채식주의와 자본주의

식물성의 저항 2005/01/11 18:50

내가 채식주의를 처음 알고 나서도,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몸으로 받아들여 직접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채식주의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들(또는 오해들?) 때문이었다.

지난 2000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순수채식을 했다.

고기와 생선을 안먹는 것은 물론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호주 출신의 아나키스트였는데, 낯선 땅인 한국의 고된 생활 속에서도 비폭력의 가치를 철저하게 실천해왔다.

내가 그 친구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사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였다.

불편함을 용케도 견디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훌륭하기는 했지만 굳이 저렇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버릴 필요가 있나 의아했던 것이다.

 

또 하나, 들었던 생각은 '채식주의는 서양식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서양 사람들은 원래부터 햄버거네 스테이크네 소시지네 워낙 고기를 많이 먹었으니,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반발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

한국의 식습관은 주로 곡식과 야채로 이뤄져있고, 생선과 고기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 아닌가.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원래 오래 전부터 육류 중심의 식습관을 유지해왔고, 그것도 남아서 버릴 정도로 풍족한 삶을 누려왔으니 이제는 그런 생활에 대한 반성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남반구 국가들로부터 자원을 수탈해 배를 불린 서양인들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다면 채식을 하는 것은 뭐 어느 정도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극단적으로까지' 철저하게 채식을 하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채식을 한다니 서양중심의 문화 제국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성찰을 하는군, 아무리 백인이라도 아나키스트라면 역시 최소한 그정도는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채식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채식은 이미 갈 데까지 가본 서양인들, 이미 풍요의 바다에서 헤엄을 쳐본 사람들,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질려버린 부르조아들, 굶을 걱정이 없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철저히 소부르조아적인 태도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나 같은 가지지 못한 자들은 당장 이번 끼니에 배를 채우고 넘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가 걱정인데, 이미 그런 고민이 해결된 상태에서 '이번엔 고기를 먹어볼까 아니면 신선한 야채를 먹어볼까' 선택하는 사람은 충분히 풍족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많은 사회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에도 계급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겼던 나에게 '채식주의는 배부른 자들의 하릴 없는 고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 같은 하층 서민이라면 먹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하며, 무엇이든 먹을 것이 식탁에 올려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채식을 시작한 지 15개월이 지난 지금 나의 생각은 어떤가?

지금은 채식주의에 대해 내가 씌운 위와 같은 '혐의'는 거의 벗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즉 채식주의는 나의 애초의 오해와는 달리 결코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고민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채식은 비폭력 평화를 내 일상에서 실천하는 소중한 방법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있어서 채식주의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며, 대안을 만들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적극적인 도전의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지배하고 있는 산업사회에서는 먹거리 역시 이윤추구와 무한경쟁의 원칙 하에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되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명에 대한 폭력적 지배를 통해 이뤄진다.

특히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 소와 돼지 그리고 닭 등의 동물들을 대량으로 사육하면서 이들에 대해 가하는 폭력은 '집단학살'이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 해도 충분치 아니한데, 특히 그 과정에서 생태계에 대한 심각한 오염은 물론이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환경에 대한 일방적 착취가 행해져왔다.

인간은 다른 동물의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환경을 짓밟고, 그 환경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많은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윤추구와 무한경쟁이 아니라 자급자족과 상호부조가 기본 원리인 사회에서는 결코 다른 생명체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진 않을 것이다.

채식을 하자는 것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대량으로 사육되고 생산된 동물의 고기를 아예 먹지 않음으로써 그 산업을 뿌리부터 절멸시키자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또는 환경에 좋으니까 채식을 한다.

이런 사람들도 있고, 저런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100명의 채식인들에게는 100가지의 채식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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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1 18:50 2005/01/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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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2005/02/16 19:52 DELETE

    Subject: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

    "나는 육류와 어패류를 먹지 않아요." 채식을 개인적인 일로만 여긴 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말하기 어려웠다. 혼자만 웰빙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권을 침해
  2. Tracked from 모든 일에 자비를 2011/03/22 04:46 DELETE

    Subject: [스크랩]채식주의와 자본주의

    채식주의와 자본주의 본문 내가 채식주의를 처음 알고 나서도,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몸으로 받아들여 직접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채식주의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들(또는 오해들?) 때문이었다. 지난 2000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순수채식을 했다. 고기와 생선을 안먹는 것은 물론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호주 출신의 아나키스트였는데, 낯선 땅인 한국의 고된 생활 속에서도 비폭력의 가치를..
  1. 미류 2005/01/12 14:54 Modify/Delete Reply

    100명의 채식인들에게 100가지의 채식이 있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채식주의'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보여요. 가끔은, 채식에 어울리지 않는 채식주의자도 있는 것 같구 ㅡ.ㅡ; 그냥 요즘 드는 생각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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