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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29
    마음 좀 굳게 먹어라
    나은
  2. 2006/03/29
    토론회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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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3/27
    깍두기
    나은
  4. 2006/03/25
    하루
    나은
  5. 2006/03/22
    미안합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나은
  6. 2006/03/20
    이 글을 보고 생각난 것
    나은
  7. 2006/03/20
    브로크백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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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3/15
    최첨단시대
    나은
  9. 2006/03/05
    카스테라(4)
    나은
  10. 2006/03/05
    졸업사진
    나은

토론회의 그녀

  • 등록일
    2006/03/29 01:12
  • 수정일
    2006/03/29 01:12

토론자들의 긴 발제가 끝난 후, 청중이 질문과 의견을 발표하는 시간.

작달막한 한 중년 여성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는 갸냘프다 싶을 정도.

소속과 이름을 소개하는데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얼마 전에 들은 이름, 이력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난다.

작지만 또박또박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빈틈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15년이란 세월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했다.

15년 전, 그녀가 몸담고 있던 곳과, 지금 그녀가 몸담고 있는 곳의 간격에 대해서.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싶었다.

물론 그녀의 발언은 노측에 가까운 내용이기는 했다.

내가 손을 들고 소개를 했을 때

 그녀는 무슨 느낌을 받을까에 대해서도 문득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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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 등록일
    2006/03/27 23:45
  • 수정일
    2006/03/27 23:45

깍두기[――][명사] 무로 김치 가지. 크기 어서 소금 절인 다음, 여러 가지 양념 버무리 .

 

_오랜만에 아주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등뼈가 아프다. 쓰읍.

 

_'깍두기'란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군침이 돈다. 설렁탕집의 큼직큼직한 놈도 생각나고, 죽집의 자그마한 녀석도 생각난다. 하여튼. 아직 차갑던 겨울에 한 동지가 자기는 깍두기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나는 오늘 깍두기란 말을 문득 떠올렸다. 깍두기- 사전적 정의는 하나이지만 사회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은어로 사용된다. 첫째, 조폭들을 일컫는다. 둘째, 이미 어릴때 익힌 말인데 편을 갈라서 놀이나 운동을 할 때, 사람 수가 홀수인 경우 덤으로 얹어주는 듯한 즉 한 명 더 있어봤자 전력에서 크게 불리하지 않으므로 어디 붙어 있어도 상관없는 좀 별 볼 일 없는 좀 떨어지는 사람을 깍두기라 한다. 내가 깍두기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버스 안에서 떠올렸다.

 

_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건 정말 나의 우유부단함이 빚어낸 참극이 아닐까.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가고 아주 멍청하게 굴고 있는 것 같다.

 

_혹 그게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너무 편한 길을 추구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흘 전만 해도 발발거리고 돌아다니기로 결심했으나 아직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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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등록일
    2006/03/25 00:41
  • 수정일
    2006/03/25 00:41

유아적이라는 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욕망을 담고 있다. 욕망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욕망을 표현할 땐 문제가 된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복잡하고도 단순한 이유로, 표현방식과 여부에 따라 어른인지, 애인지가 구분되는 것이다. 어른스럽게 표출할 자신도 방안도 없다면, 가슴 속에 꾹꾹 눌러담고 있어야겠지. 다만 답답하고 홧병이 날 듯 한게 문제인 거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신경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데미지를 이중으로 부여할 만한 일은 제끼고 아주 단순하면서도 흥미없지 않은 일을 골라서 하면 된다. 그래서 몇 통 전화를 걸어 보는 것으로 해결했다. 몇 천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밖으로 내놓는 걸 보면서 실제 내 자신이 언제 그런 돈을 만져보기나 할까 하는 의문도 잠시. 금새 흥미는 사라졌고 그때부터 긴긴 지루함의 시작이었다.

 

요즘 생긴 취미는 동생이 두고 간 PMP로 동영상을 보는 것이다. "시효경찰"이란 일본 드라마에 푹 빠져 있고, 오늘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평성 너구리 전쟁 폼포코)을 보았다. 아-주 재밌었고, 볼 만했다. 일본 애니에 담긴 인간세상에 대한 풍자가 마음에 든다. "바람을 본 소년"인가도 좋았는데. 중간에 좀 지루하긴 했지만. 일본말을 이어폰으로 듣고 있자니 어느새 좀 정든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자니 찝찝한 마음에 바지런히 만원 전철 타고서 수원으로 내려갔다. 집에 돌아와서 집회에 대해 정리하고 콩나물 넣고 물만두 넣고, 떡국떡까지 살포시 넣어 너구리 한 마리 먹었더니 (너구리 본 날 너구리를 먹었다니 >.<) 조금은 뿌듯한 저녁을 보냈지 싶다.

 

이제 토요일이다. 3월이 곧 4월로 간다. 모래시계를 처음 엎어놓으면 모래가 줄어드는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다. 변화의 폭이 작으니까. 하지만, 모래가루는 쉼없이 같은 속도로 빠져나간다. 막판이 되면 모래가 줄어드는게 너무나 당황스럽게 확연하게 들어온다. 당황하지 않도록 미루지 말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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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 등록일
    2006/03/22 15:24
  • 수정일
    2006/03/22 15:24
"미안합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20시 09분)
21일 오후 날이 어두워지자, 박순호 하이닉스매그나칩사내하청지회
수석부지회장이 조합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세지. 그는 목숨을 건 고공농성
와중에도지사에게 두번이나 면담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런 심경을 담아
조합원들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이 문자를 접하고서 곧바로 이영섭 민주노총지역본부장과 정근원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장이 대교위에 올라가 설득한 끝에 오후 9시경 박순호
수석부지회장은 내려왔다. 대교아래 모였던 동지들과 함께 정리집회를 하면서
"투쟁으로 하이닉스매그나칩 문제해결을 돌파하자"고 결의했고, 박
수석지회장은 탈진으로 충북대병원으로 갔다. 
안타까움.
안타까움.
안타까움.


http://sanosin.jinbo.net/Publish/labor.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554

성과없이 접힌 박순호 수석부지회장의 고공농성

내부 단결과 교섭에 끌려 다니지 않는 투쟁으로 거듭나길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동지들의 투쟁이 1년 6개월, 햇수로 3년이 되어간다. 지난 1월 12일에는 하이닉스 반도체가 대화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무기한 서울 상경 투쟁에 돌입했다. 상경 투쟁에 돌입한 조합원들은 유서를 작성하며 죽을 각오를 하며 기필코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추운 겨울 노숙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그런데 1월 26일 이원종 충북도지사와 ‘하이닉스-매그나칩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북범도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책위)대표 등 4명이 서울 본사를 방문해 우의제 사장과의 면담에서 노사간 간접대화에 합의했다고 2월말까지는 공장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며 천막으로 찾아와 내려갈 것을 설득했다. 이러한 도지사의 말에 반신반의는 했지만 가족을 버려두고 온 장기투쟁으로 인해 조합원들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한번 도지사의 말을 믿고 대화를 해보자고 결정하고 1월 27일 청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성실교섭을 위해 손수 공장 정문에 설치된 선전물을 철거하고 본래 있던 천막을 제외한 모든 천막을 접었다. 그리고 공장 앞 집회도 자제해 왔다.

하지만 2월 15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화에서 하이닉스와 매그나칩 자본과의 사태해결을 약속한 이원종 도지사는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은커녕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끌기로 일관했다. 범대책위 대표 또한 사측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노조에게 양보할 것만을 요구했다. 노조의 가장 큰 요구는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양보를 하라는 것은 공장으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보상금 받고 타사업체로의 취업알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노조가 받을 수 없는 안이다. 이 투쟁을 끈질기게 했던 동지들은 보상금 몇 푼 받고 다른 일자리를 구할 거라면 1년 6개월의 투쟁을 이어오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끈질긴 놈이 승리한다’는 말을 믿고 있다.

그러나 범대책위는 지난 3월 14일 지회가 내부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간담회를 연기할 것을 공문으로 발송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조합원들이 오는 것과 상관없이 장소에 있을 거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에 노조에서 다시 한 번 노조의 결정을 인정할 것을 공문으로 보냈지만 범대책위는 이를 무시했고 노조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찾아간 24명의 조합원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1년 6개월의 투쟁을 이어가면서 조합원들은 집에 돈 몇 푼 가져다주지 못했다. 거기에 회사의 손배소송으로 제자리가 넘어가는 억대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어 있다. 그래서 대다수 조합원들이 얘들 학비를 대기 어려워 학원도 끊고 유치원도 끊었고, 부인들이 돈을 빌려오거나 벌어서 식비정도를 대고 있다. 빨간 딱지가 집을 도배한 조합원들도 몇 명이 된다. 생활고와 가정에서의 만류에 흔들리는 조합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온갖 수단을 다해 싸워왔고 공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의 무게에, 고립감에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것은 장투사업장의 경우 겪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3월 14일의 사건은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정리하고 결의를 다지기 전에 범대책위에서 내부를 흔들고 사태해결을 진척시키기 위해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범대책위가 중재를 한다는 명분으로 사측의 입장(보상금 지급)을 관철시키려 한 것이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를 둘러싼 사회적 차원의 문제해결은 결국 사측의 입장만을 대변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재하고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 한 것에 불과했다. 이로부터 지회의 다수의 조합원들은 지금까지의 교섭 흐름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으며, 다시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고 투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것이 20일 투쟁선포식으로 보여 졌다고 생각한다.

아직 지회 내부에서 향후 투쟁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결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면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과 투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순호 수석부지회장이 조합원과의 상의 없이 상급단체와 상집 일부 성원과의 논의 속에 21일 오후 2시경 청주 도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서문대교 위 아치에 올라가서 고공농성을 전개한 것이다. 고공농성의 요구는 도지사가 와서 사태해결의 의지를 재천명하고 책임질 것이었다. 홀로 올라가 ‘전원 고용 정규직화 실시’, ‘사태해결을 약속한 도지사는 책임져라’ 등 세 개의 플랜카드를 내걸고 굳은 표정으로 도지사가 이 자리에 올 때까지 내려가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다.

같은 시간 도청 시위를 준비하던 조합원들은 서문대교로 빠르게 이동했다.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조합원들은 도착하자마자 혼자 죽을 거냐고, 같이 여기서 싸워야지 왜 혼자 올라가 있냐며 내려올 것을 이야기했다. 함께 끝까지 단결해서 싸울 것이니 내려와서 함께 싸우자고 했다. 고공농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다 같이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되지 않겠냐는 심정에서 쏟아낸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지의 고공농성을 엄호하기 위해 대열을 갖춰 상복을 입고 집회에 들어갔으며, 경찰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난간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대오를 이동시켰다. 오직 무사히 내려오길 바라며 경찰의 진입으로 인한 사고를 차단했다.

이러한 조합원들의 마음과는 달리 민주노총 충북본부와 금속지회는 마찰 없이 내려오게 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박순호 동지가 왜 올라갔는지 그 동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듣고 그 동지의 뜻을 받아 안아 향후 단일한 투쟁으로 만들어가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내려오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모습이었다.

도지사가 노동자가 몇 명이 죽든,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든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도청에서 자리를 피하고 밤을 새워야 하는 상황과 경찰의 움직임에 결국 밤 8시 50분경 박순호 동지를 설득하여 내려오게 하였다.

박순호 동지의 고공농성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접힌 투쟁이었다. 조합원들과 공유하지 못하고 한 투쟁이었고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하고 들어간 투쟁이었지만, 내부를 단결시키고 상황의 반전을 꾀하려했던 동지의 뜻만큼은 조합원들에게 가다왔을 것이다. 다시는 개인이 모든 것을 안고 홀로 해보겠다는 투쟁은 없어야 하겠지만, 이번 투쟁을 계기로 지회가 다시 한 번 내부를 추스르고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향해 강고한 투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화가 필요없다거나 교섭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교섭에 발목을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내부가 이완되고 투쟁을 함에 있어서 눈치를 보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투쟁을 통해 그 힘으로 사측을 교섭 테이블로 끌어낼 때 동지들은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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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고 생각난 것

  • 등록일
    2006/03/20 23:51
  • 수정일
    2006/03/20 23:51

운동권이 먹고 살기 위해 재정사업을 한다면, 과연?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17317

 

 

p.s : 이러고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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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 등록일
    2006/03/20 23:24
  • 수정일
    2006/03/20 23:24

미국영화답지 않다는 느낌.

잔잔함.

생활고에 찌들리는 솔직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눈덮인 산을 배경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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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시대

  • 등록일
    2006/03/15 23:43
  • 수정일
    2006/03/15 23:43

오늘, 3월15일 금속노조 총파업. 하이닉스 매그나칩이 있는 청주에 갔다.

투쟁 결의문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사람임에도 사람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최첨단 시대를 인정할 수 없다

 

어느새 2006년. 처음 접했던 집회의 풍경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집회 내내 왠지 매가리가 없는 느낌이랄까. 집회가 지루할 때면 노동자들은 이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 거린다. 누구나 하나씩 최첨단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디카와 캠코더도 투쟁물품에서 중요한 위치로 자리잡았다. 핸드폰이 없던 십여 년 전엔 집회 도중 지루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했을까 떠올려 보았다.

 

내년이면 2007년.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년이다.

투쟁의 최일선에 서서 계급투쟁의 포문을 열어제꼈던 젊은 노동자들은,

이제 50대의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새로운 노동운동은 새로운 젊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출현할 것이다.

87년으로부터 20년. 과연 새로운 운동은 만들어질 것인가?

그 새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답답한 가운데서도 자그마한 희망을 사진 한 장에 걸어본다.

새로운 도약으로 갈 징검다리가 될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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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 등록일
    2006/03/05 23:35
  • 수정일
    2006/03/05 23:35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처음 펴든 첫 문장을 접하고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 처음 손에 쥔 소설책은 이렇게 피식, 피식 웃도록 만들었다.

만화같은 소설-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지구가 사실 한 마리의 개복치였다는 얘기까지 접했을 땐 말이지.

 

하지만, 갈수록 결국 이야기들은 후기산업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힘겨운 인간군상들의 이야기였고,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잿빛 이미지들.

잿빛 현실을 환상으로 극복하려 애쓰는 이야기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연실색.

어째 난 유머러스함을 배웠다기 보다는, 허허 이거 뭐라고 해야 할까...

 

소설책 맨 끝에 달린 해설을 읽어보니,

후기산업사회의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 작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썼다고 되어 있다.

아하, 이게 그런 식이었구나. 뭔가 색다르긴 했으니까. (읽어보면 안다. 문장만 다른 게 아니고 문장의 배열이 다르다)

 

그러면서 또 쓰잘데기 없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스트모던주의인가?

아니면, 혁명주의인가?

뭐가 더 현실적일까?

혼자 뛰어넘을 것인지 같이 손잡고 뛰어넘을 것인지, 그 차이일까?

 

...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냉장고는 인격(人格)이다.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이었다.


[카스테라]






온종일 자료를 찾고, 카피를 하고, 파일을 정리하고, 전화를 걸고, 조사를 하고, 커피 심부름을 해야 한다. 어제는 과장의 민방위 훈련을 대신 가서 받았다. 도대체 이것이 로커가 할 짓이란,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귀신 씨나락이라도 까먹는 듯한 음악이 울려퍼지더니 화면 모퉁이에 귀신 씨나락이라도 까먹은 듯한 한 마리의 너구리가 나타났다.




세 개의 책상열을 지나는 일이 세 개의 산맥을 넘는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팀장이 너구리를 좋아할 줄은, 또 어찌 알았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회사생활!




예를 들어 농경사회를 생각해봐. 모두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는데 돌연 한 마리의 너구리가 나타난 거야. 앗 너구리다. 누군가 소리치면서 일손이 중단되게 마련이지. 귀엽다. 이리 온, 해피 해피 쫑쫑.


잠깐, 농경사회 때도 영어를 썼나?


그런 느낌이란 거지. 원래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고 한 두어 시간은 온통 너구리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거야. 그럼 그 텃밭 1팀의 팀장은 어땠겠어? ... 그리고 세월이 흘렀지. 자, 후기자본주의의 산업사회가 됐어. 세상을 휘어잡은 것은 텃밭 1팀의 팀장 같은 놈들이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잭필드 4색 3종 선택 면바지 세트를 구입한 사회학과의 선배는 ... 이렇게 얘기했다. 아무래도 자본주의는 <39,800원>이 아닐까 싶어.




다음날 나는 다시 교수를 찾았다. 오 자넨가. 네. 그리고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사람의 입에서도 무지개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해를 등지고 말이야, 침을 열심히 뱉어보게. 무지개가 생길지도 모르니.




누군가 조금만 뒤를 밀어주면 좋겠는데. 우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약수터 쪽의 공원에서 누군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달려갔다. 어쩐지 나는 그 남자가 이대근씨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혹시 이대근씨가 아닌가요? 어, 나 이대근인데. 이대근씨는 흔쾌히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3억 개의 알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긍휼히 여길 수 있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사장의 딸은 거의 두더지라고 해도 좋을 얼굴이었다. 여자를 보고 그렇게 가슴이 뿅 쿵딱 뿅 쿵딱 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장은 자신은 원래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니란 말만 되풀이했다. 사장의 생각이 내 생각과 놀랄 정도로 일치했으므로,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21세기인데 이걸 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래도 꽤 타더라구, 나도 놀랐다니까. 사장은 정말이지 놀란 눈치였다. 놀랍게도,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문대라는 단어 역시, 늘 어딘가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뭐랄까,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뿅 쿵딱 뿅 쿵딱, 흐리고 탁한 수면 위에서 몇 마리의 소금쟁이가 열심히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자, 크게 아 하세요.


[아, 하세요 펠리컨]






일자리 구합니다. 똥이라도 먹겠습니다.




울며, 76년 모빌 올해의 최우수 점원 최종심에도 오른 적이 있는 빈스 터투로가 말했다. 그 손은 제 손이 아니었습니다. 진짭니다.




그는 불과 하룻밤 사이 한 장의 앨범을 녹음했고, 그 앨범에는 훗날 불멸의 고전이 될 세 개의 명곡이 들어 있었다.


진짤세 블루스


사장님, 그 손은 제 손이 아니었습니다


오르지나 말걸, 최종심




야쿠르트 아줌마가 등장했다.




이는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도, 케인즈도, 맬서스와 리카도도, 마샬도, 찰스 다윈과 엘빈 토플러도 - 그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야쿠르트 아줌마의 등장으로 시장은 한층 알 수 없고 복잡한 곳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명심해라. 니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지금 이 세상에 똥을 못 눠 고통받는 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외계의 지성체들은 인류의 메세지와,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물었다. 당신들이 극복하고 싶은 것은, 또 극복해서 가고자 하는 세계란 어떤 것입니까? 차분히 야쿠르트를 나눠주며, 야쿠르트 아줌마가 얘기했다. 바로, 야쿠르트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잡수셔야 합니다. ...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는 후기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고는 여러분 북한이 왜 못 쳐들어오는지 아십니까? 바로 민방위대원!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지 뭡니까 글쎄. 울컥 기분이 정말 나빠지더니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똥이 안 나옵니다. 지금 석 달쨉니다.




성적은 오르지 않고 변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삶이 이래도 될까요?




친구가 알려줘서 왔는데 저 같은 케이스는 없나보군요. 그럼 수고.




특히 아내가 화장실에서 안 나오면 이성을 잃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주차안내 도우민데요, 고객의 차가 들어올 때 손으로 호랑나비 팔랑을 펼치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인근 붐 마트에서 2회전 팔랑을 연출한다 해서, 할 수 없이 저희는 2회전 반 팔랑을 연출해야 했습니다.




유학 시절부터 삼십 년 변비 경력인데, 나 원 알고나 덤비시지.


[야쿠르트 아줌마]






문득 아내의 뱃살을 들춰올리면, <그럴 리가>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말이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고 있다.




거짓이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44킬로그램의 여자가 72킬로그램이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앗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곳에 기하 형의 얼굴이 나온다는 건, 외계인의 습격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표면장력이 강한, 투사의 눈물이었다. 요사이 정말 외로웠다. 감옥에 있을 때도 이토록 외롭진 않았어.




또다시 형이 정치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는 했을 텐데. 아니 적어도, 외계인에게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거기엔 



그려져 있었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코리언 스텐더즈]






하하, 지구의 절반은 여자잖아요.




너와 나 사이에 크라켄이 있다고 생각해봐. 대왕오징어의 등 위를 거니는 기분으로, 나는 B의 집을 찾아가고는 했다.




대왕오징어는 혹시 더위에 약한 게 아닐까. 꼼짝 않는 지표를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꼼짝 않는, 대왕오징어의 등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그 운동장에서의 10미터 줄자처럼, 자꾸만 웃음이 줄줄이 새어나왔다.


[대왕오징어의 기습]






갑자기 좌뇌와 우뇌를 잇는 운하, 같은 것이 열리지 않아 아프리카 대륙, 정도를 돌아야 하는 배들처럼 뇌세포들이 어수선해진 느낌이었다.




헐크 호건의 이두박근과 가슴 사이에, 설마 겨드랑이 냄새가 심한 우주가 있을 줄이야.




길고 긴 인류의 역사에서, 게다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인간 중에서 엄마야를 외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을까. 눈물이 나왔다. 분하고, 슬프고, 참담했다.




주소를 말해주실래요? 신상을 지개하며 던진 여경의 질문에, 나는 그만 강북구 하월곡동이라고 대답을 해버린 것이었다.


[헤드락]







변화의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1991년은 - 일용직 노무자들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들이 갓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무렵이자, 그런 고시원에서 아직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기였다. 그러니까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도, 또 <고시원>으로서도 조금은 쑥스럽고 애매한 시기였던 셈이다.




정숙하게, 기차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갑을고시원 체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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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

  • 등록일
    2006/03/05 21:29
  • 수정일
    2006/03/05 21:29

1촌에게만 공개되어 있는 그이의 미니홈피에는 또다른 이의 졸업사진이 올라와 있다고 했다.

학사모를 쓰고, 어엿한 성인의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래, 그렇게 그이도 졸업卒業을 하는구나.

大學이란 공간을 낀 사상과 시간들, 기억들, 관계들로부터의 졸업卒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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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파업 중단을 보면서

  • 등록일
    2006/03/05 00:11
  • 수정일
    2006/03/05 00:11

아쉽다. 이번 파업 때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아마 2002년부터의 거의 모든 파업전야제에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재작년 말께부터 작년 여름 경까지 이어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과 철도매점 파업투쟁 때문에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더 가깝게만 느껴진다.

 

특히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에 밀착하면서, 거기에 연대하는 철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건강한 정규직 활동가들을 보면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많이 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할 꺼리도 정말 많이 얻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참세상 인터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5452 )를 한 이철의 동지 생각도 나고, 투쟁에 결합하면서 알게 된 헌신적인 활동가 동지들 얼굴도 떠오르고 한다. KTX승무지부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새마을호 승무원 동지들도 잘 있는지...

 

비록 파업은 깨지고, 현장으로 복귀했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은 거세게 진행될 테지만, 그래도 철도 동지들이 잘 투쟁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건 영상으로나마, 또 이리저리 전해들은 KTX승무지부 동지들 때문이다. 새마을호 투쟁이 흘러갈 때쯤, KTX승무원들의 조직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1년의 시간을 거쳐 300여명의 강철같은 단단한 대오로 거듭난 모습을 보면서, 분명히, 희망은 있다는 확신이 든다.

 

 

> 경찰의 강제연행에 맞서 투쟁하는 사진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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