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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글쎄,

내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남긴 긴 곡선의 끝자락 같이 가물가물한 시절.  오래된 화상 자국 마냥 아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때때로 아릿한 고등학교 문예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어린 시절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짓눌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어린 아들 현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과 아이의 미래가 겹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찾아간 서클(당시는 동아리를 서클이라 했다)이 문예반이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너의 소원이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면 시인, 소설가, 작가 이런 그럴듯한 말은 알지 못하여 그저 “문학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의 학교 특활(특별활동)은 문예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끝 촌구석에서 말단 공무원 녹을 잡수시는 와중에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식들을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에 실려 서울로 올려 보내신 아버지의 그 “청운의 꿈”을 와르르 무너뜨린 곳이 바로 문예반이었다.


나의 입학년도가 82년이고 기수가 41기니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클이다.  이름도 매우 오만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00문예반이라 부르겠다.  또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필력이 높기로 알아주는 서클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세습되어 온 말도 안 되는 전통이니, 또 어린 것들의 치기 이런 것이 얼마나 우세스러웠을까.  우리 기수는 처음 8명~10명 정도가 서클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4명만 남았지만.  서클 입회 절차가 다 끝나고 첫 소집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근처 뒷골목 짱깨집(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을 모시고 신고식을 치렀다.  짜장이 들어오고 소주가 들어오고 선배들은 고약스럽게 갖은 폼을 잡고 담배들을 꼬나물었다.  그리고 1학년부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니라 악다구니를 내야 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선배들은 틈만 나면 짱깨를 갔다.  1,2학년끼리 혹은 3학년을 모시고 가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1,2학년끼리 갈 경우에는 절대 2학년 선배들이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  단골 짱깨에는 1학년들이 맡긴 시계나 돈 될 만한 품목들이 쌓여갔다.  나는 맡길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문예반은 매일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선배들보다 일찍 서클실에 와 청소를 하고 정자세를 한 채 앉아서 선배들을 기다려야 한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저녁 8시까지 정자세를 한 채로 선배들의 훈계를 듣고 써온 글을 평 받아야 한다.  1학년이 앉은 곳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창문 너머에는 “창밖의 여자”를 대신하여 벽돌 건물의 붉은 벽이 노려보고 있다.  그 붉은 벽이 어둠을 콱 깨물어 칠흑이 번질 시간이면 그 어린 가슴 속에도 서글픔이랄까 비애랄까 이런 감정이 울컥 번지는 것이다.


문예반에서는 1학년들은 매일 글을 한 편씩 써가야 한다.  우리는 시와 수필 중 하나를 자신의 장르로 선택해야 했고 나는 시를 선택했다.  매일 시와 수필을 써오라는 지시가 참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 때가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무인천하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거부할 권리와 배짱이 우리에겐 없었다.  조건도 까다롭다.  맞춤법, 띄어쓰기 틀리지 말 것, ‘그리움’, ‘슬픔’ 같은 추상명사는 절대 쓰지 말 것 따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빳다(좋은 용어는 아닌데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맞아야 한다.  그 환경에서 매일 주옥같은 시가 나온다면 나는 천재시인 랭보의 반열에 서야 하겠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천재성을 주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 전까지 시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 한다.


문예반이 선생들 사이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전교1등을 했던 아이도 몇 달 안에 꼴찌의 반열로 내려앉힐 수 있는 기적을 행하고 학교 대걸레를 남아나지 못하게 하는 빳다 덕택이었다.  문예반에 입회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얼마를 못 버티고 탈퇴를 햐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탈퇴 빳다는 50대라고 엄포를 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어머니가 바카스 1박스를 사들고 와서 탈퇴를 시켜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탈퇴를 하려는 놈과 그걸 붙잡아 본보기로 응징을 하려는 놈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퇴하려는 후배들은 선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등교시간을 넘겨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 결석까지도 감행한다.  한 보름 동안의 눈물겨운 숨바꼭질에 성공한 일부는 그 대가로 성적 최상위 클라스에 저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붙잡혀온 일부 친구는 가엾게도 50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스무 대는 치도곤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후드득 떨어지니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너 문예반 하는 것 안다.  그거 탈퇴하면 안 되겠냐, 문예반이 빳다가 세고 공부도 하기 힘든 곳인데 잘 생각해봐라 이런 보약 같은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라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들끓는 청소년기에 나는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었고 문예반 외에는 달리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전부나 다름없는 문예반으로부터 나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억압받았다.  몇 번 고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문예반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문예반 빳다는 유명하다.  빳다를 맞을 때보다 그 전의 분위기가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배들은 한 번씩 수업 끝나고 저녁 때 대걸레 자루를 모아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교실을 돌면서 대걸레에서 걸레를 떼어내고 자루만 모아온다.  그렇게 모아온 것이 한 번에 20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창밖의 붉은 벽이 어둠을 어금니 물듯 쿡 물어버릴 때,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가 선배 하나가 마침내 입을 뗀다.  “끌어”  우리는 긴 탁자를 뒤집어 또 하나의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서클실 한 쪽으로 끌어 붙인다.  탁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그르륵 끌리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학교들은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하였다.  수업을 빼먹어서 좋은 날이다.  그런데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많은 중요한 상을 우리 문예반이 휩쓸어왔다.  내 동기들도 다들 몇 차례씩 장원도 타고 그랬는데 유독 나만 상을 타지 못했다.  난들 왜 상을 타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한계를 금방 깨닫고 2학년 중반부터 백일장에 가도 더 이상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다 3학년 봄철에 대학 백일장에 참가할 때다.  1학년 후배 하나가 제출 시각 15분 전까지도 시를 전혀 쓰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대로 적어라 하고 한 10분간 불러주었는데 그게 덜컥 차하(3등상)에 입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상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탔지만...


문예반 활동의 절정은 1학기 때 00지라는 문예지를 한 차례 내는 것도 있지만 뭐니 해도 2학기 때 00문학회라고 이름을 달았던 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국화가 활짝 피는 가을철에 문학회가 열리는데 각자 준비한 시와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이다.  이 짧은 한 때를 위해서 한 달 동안을 초죽음의 수준으로 연습을 한다.  작품집에 실릴 시와 수필을 쓰고 낭독 연습을 보통 밤 10시~11시까지 한다.  한 밤 내내 발성연습을 시킨다고 소리를 꽥 꽥 지르게 한다.  모두들 더 예민해져 빳다도 심해진다.  문학회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어린 가슴이 설레지 않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떤 때는 여학생으로부터 종이학을 선물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여학생이 내 시낭송을 듣고서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로 이어진 적이 없다.


이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예외 없이 졸업한 선배들을 합쳐 수십 명의 인원이 짱깨를 향한다.  1학년 때는 몰랐으나 2, 3학년 때는 왜 이리 슬픔과 허무함이 복받쳐 오르는가.  나는 술에 만취가 되어 엉엉 울고, 토하고, 또 울었다.  모두들 그랬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일어나서 문예반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정자세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래가사를 마치 유언을 써내려가듯 비장하고 또 비장하게 읊조리는 것인데 그 가사가 이렇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이도 변하시기 잘하시는 여자의 마음 보아라 믿지 못할 여자의 마음 /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와서 믿었지 살자고 믿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남자의 마음 // 우리 집에 부모님 나를 낳고 길러서 문예반 가서 요 모양 요 꼴 되라고 나를 낳고 길렀나 보아라 믿지 못할 자식의 마음 / 기를래서 길렀나 낳으니까 길렀지 기르고 싶어 길렀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부모의 마음”


1학년 때 그토록 싫어했고 닮고 싶지 않았던 선배들을 나 또한 닮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매 맞는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듯이 서글프지만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짱깨에서 후배들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술잔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슬프게도 나도 빳다를 휘두를 때가 있었다.


졸업을 하고 한 동안 후배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다시는 나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어리지만 성적에 목매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을 기특한 후배들이 문예반으로 인하여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후배들을 찾았지만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내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고 89년인가 전교조가 설립되고 학교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가 퍼지고 얼마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노래가 또 온 세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 땐가 우연히 동기들로부터 문예반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학년 재학생들이 전원 탈퇴하였단다.  그 후로 문예반은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은 일탈을 하고 싶어 들끓었던 내 청소년의 한 시절이 의지하였던 피난처요, 또 어린 열정을 쏟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절에 목말랐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고 억압하였던 곳이다.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배웠으나 가슴과 몸으로 쓰는 시를 배우지 못하고 단지 시 쓰는 기술만을 익혔을 뿐이다.  나와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시와 수필의 형식을 빌려 상을 타기 좋게끔 꾸미도록 통제받았다.  그 덕에 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하였던 문예반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군사정권이 퇴락하듯 전교조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점점 쇠락하여 해체되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억압받고 갇혔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에돌아가야 했다.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문예반은 기억에서 흐려져 갔다.  그 문예반과 당대의 서클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시학원이 성적 성적 오로지 성적을 위해 들어찼다.  나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현이 더 크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때는 자위하듯이 아빠의 학창시절이 그래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은 있었다고, 뜨거운 눈물 한 번 받아줄 곳이 그나마 있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아들 현에게 그런 돼먹지 않은 얘기는 해주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문예반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나 그 때의 억압이 자유와 감성과 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나 힘겨웠으므로.  나중에는 그 억압을 은연중에 즐기는 나를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내 아들 현에게만큼은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의 시절에 걸맞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마음껏 누리라고.  그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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