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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역시, 꽤나 좋았던 소설. 나이를 먹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의 이치들을 조금 엿본 기분이 들었다. p10 김천댁이 소쿠리를 까불때 마다 사스랑사스랑, 조개껍질이 서로 부딪치며 쓸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쿠리 밑바닥으론 재첩 알맹이가 소복하게 떨어진다. p12 기방에서는 음식과 기생이 동격이다, 맛도 좋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손님의 눈과 귀도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p23 실지 따지고보면 일 중에 질로 거칠고 고된 것이 부엌일이여. 남들은 몸에 밧줄을 감고 빌딩의 유리창을 닦는 게 훨씬 힘들다고 말할랑가 모르지만 그건 척 보면 힘든 표시라도 나제. 이건 허리가 부서지도록 일해봤자 벨 표시도 나지 않고 아주 사람만 잡는당께. 한 고비 넘고 또 한 고비를 숨이 턱에 차게 넘다보면 평지도 나오고 지름길도 보이고 허는 맛에 힘든 건 잊어뿔고 다시 손을 놀리게 되는 기 이일이기도 허지만 말이여. p39 늙음의 끝은 완전한 소멸이었다. 적요한 소멸의 늪에 빠지기 전까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거슬러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세모진 눈을 한층 날카로이 벼려 세상을 바로 보고 부단히 손을 놀려 손맛을 잃지 않는 길, 내리막길로 치닫지 않고 더딕 가는 길은 그 길 뿐이라는 걸 타박네는 안다. 누가 타박네에게 강단이 있다고 했던가. 단 한 순간도 그녀는 고단하지 않은 적이 없다. p40 나도 너처럼 무언가에 환장을 해 보고 싶다. 환장한 순간만은 구름에 발을 디딘 듯 물살에 몸이 실린 듯 그리 살아지는 게 아니더냐. 잠시라도 그 무게를 잊는 것이 아니겠느냐. 폭폭한 이 생을 단 일초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양 아무도 모르개 땅바닥에 살짝 부려놓을 수만 있다면. p80 어머니는 꿈과 희망과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에 관해 말하는 대신 무섭고 오싹한 것들을 일찍부터 주입시킴으로써 네 딸들이 인생에 대해 더이상 놀라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방비하셨다. p144 능소화는 정말로 사람의 눈을 멀게하는 독을 꽃잎에 숨기고 있다네. 옛말 못 들었는가. 능소화의 꽃가루가 들어가면 눈이 멀게 된다는 말. p156 이 사람아, 땅위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 영화나 소설 속에서처럼 리얼리티가 심각학 결여될 때에만 사랑은그 이름값으로 간신히 아름답네. 자네도 아다시피 사랑은 시작이 퍽이나 중요하다네.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는가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결정지어진다네. 그러하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셈이네. 놓쳐버린 꼴이지. 오마담의 손님으로 당당하게 부용각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네. 능소화의 주홍빛에 홀린 것이 문제였네. 그것은 문제였네. 그것은 덫이었네. 내 사랑은 시작부터 그렇게 혹독했네. p162 소리란 입에서 나오는 즉시 흩어져버려 붙잡아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형태가 잇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것처럼 사람을 애닯게 하는 것이 없다고. 내 사랑이 그러했네. 흐르는 물을 손으로 움켜잡는 것처럼. 바라는 볼 수 있으되 가까이에서 매만질 수 없는 꽃처럼. p164 능소화와 대숲 사이에서 보낸 한 생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네. 거기에 하늘도 들이고 바람도 들이고 심심찮게 폭풍우도 불러들였으니 그만하면 한세상 잘 품다 가는 것 아니겠나.안 그런가, 이 사람아. p190 우리가 말하는 운명은 기대와 노력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우연하게 형성되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같은 인간을 옴쭉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운명이라는 것이 실은 튼튼한 고리와 고리로 빈틈없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의견에 의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할 수 있게끔 느슨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p208 육갑허네. 지지 않는 것은 꽃도 아니여. 질 줄 알아야 꽃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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