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기억, 그래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
동독 출신 작가인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또는 옆으로 눕혀놓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림이 반드시 올곧게 걸려 있을 필요는 없겠지.
가장 확실한 사실은 눕혀놓은 그림이 사람의 집중도를 월등히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들여 하나하나 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나 사진 등의 이미지를 작가가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본래의 [연단 위의 레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나,
작가가 재해석한 그림은 이런 것.
새로이 작성된 그림은 다양한 의미를 뜻할 수 있는데,
(특히 작가가 동독 태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땅으로 쳐박힐 듯 한 얼굴과 이마의 주름으로 인해 원판보다 훨씬 피로하고 늙어보이는 레닌의 모습이 찬란한 혁명의 좌절을 나타내주는 듯 하다.
토카네프의 [카자흐 여인]을 다시 그린 그림에서,
물동이를 운반하는 억세보이는 여인은 콘크리트같은 회색으로 표현되어 오래된 추억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위, 즉 캔버스의 바닥에 깔린 붉은 별은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는 혁명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아래 그림의 원본인 코르제프의 [전쟁의 나날들]은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었는데
[전쟁의 나날들 I]에선 그림 속 화가가 붓을 든 채 캔버스 하나 가득 스탈린의 당당한 모습이 차있었다.
반면 [전쟁의 나날들 II]에서는 그림 속 캔버스가 텅 빈 상태에서 화가 역시 붓조차 들고 있지 않은 망연자실한 모양새였다.
바젤리츠는 이 두개의 그림을 합쳐 화가가 붓을 들고는 있으나 무엇을 그려야 할 지 알 수 없을 만큼 텅빈 캔버스를 표현하였다.
마치 혁명이라는 커다란 백지에 더이상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전시공간 한켠에는 바젤리츠를 인터뷰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솔직히 그림보다 그 영상이 더 재미있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품었는 지 어떤 원본에 대한 추억 더듬기인지 직접 들을 수 있다.
작가는 혁명에 대한 좌절을 가슴 절절 공감하기엔 너무 당사자였다.
그는 이미 꽤 유명하고 성공한 신표현주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이 품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추억에서는 건조함이 묻어난다.
좀 웃긴 비유일지도 모르는데 하버드대는 멀리 있는 곳에서 더욱 유명하다고,
그 도가니 속 한 존재에겐 실패에 대한 낭패감이 좌절까지 갈 필요가 전혀 없는 그 무엇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중을 표현할 때는 사뭇 다르다.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소위 알려진 인물에 대한 작품은 다소 명백한 패러디적 성향이 강한 반면,
(인터뷰를 들으니 레닌을 독재자로 부르더만)
공장 직공이나 물동이 들고 가는 여인, 이사하며 기뻐하는 여인 등의 모습은 좀 낡고 오래된 사진첩같이 아련하기도 하고, 여전히 내재된 힘을 느끼게 해주는 강인함을 풍기기도 한다.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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