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4/08/08 03:04
문화사회  제96호
최영화 / 문화사회 편집위원 sobeit2000@hanmail.net

 

절대로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생각했어요

“니가 고아인 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줄 알았지? 나도 고아였으면. 아무리 찾아봐도 한번도 아름다웠던 기억이 없어. 그 사람들 부모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야. 결혼? 나도 자신 없어. 나 혼자 살 거야.”

태어나서 자기 부모 욕 한번 안 해본 사람 없듯이, 나영(전도연)은 고아인 남자친구 앞에서 20년간 억눌러왔던 불만을 죄다 털어놓는다. 억척스러운 욕쟁이 엄마(고두심)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순둥이 아빠(주진모) 때문에 나영은 단 하루도 맘껏 웃어보질 못했다. 착하기만 한 아빠는 빚보증을 섰다가 나영의 대학등록금을 날려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열혈목욕관리사(때밀이)인 엄마가 가만히 넘어갈 리 없다. 빚 떼어먹고 죽어버린 사람 집에서 한바탕 험악한 곡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영의 엄마가 칼이라면, 아빠는 방패다. 그러므로 나영이가 보기에는 이 결혼 자체가 모순(矛盾)적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엄마는 욕설과 독설로 매번 아빠의 가슴을 찔러대지만, 둥글둥글한 방패같은 아빠는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방어할 뿐이다. 아빠에 대한 애정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엄마는 무방비 상태의 아빠를 보기에 처참할 정도로 공격한다.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 이쯤 되면 의문을 가질 만도 하다. 도대체 결혼은 왜 한거야? 어쩌다가 결혼하게 된 거야? 나영은 거의 확신한다. ‘아마 결혼도 그냥 때가 돼서 중매로 만나 대충 했을 거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엄마, 아빠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일상이 지루하고 비루하게만 생각되던 나영에게 드디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날 기회가 찾아온다. 나영이 일하는 우체국에서 실시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뉴질랜드에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출국 전날 새벽에 나영 대신 아빠가 ‘가출’을 해 버린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병을 앓고 있었던 아빠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했던 나영은 이번에도 여행을 포기하고 아빠를 찾아 나선다. ‘여행은 나중에,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고 주문처럼 되뇌면서. 외삼촌으로부터 아빠가 유일하게 갈 만한 곳이라고 전해 들은 그 곳은 엄마의 고향이자,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섬마을 ‘하리’.

낯선 섬마을에 도착해 지나가던 우체부에게 길을 묻고 돌아서니 계절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어져 있고, 찾아간 주소지엔 나영보다 더 어린 스무 살의 엄마 연순(전도연)이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묵으며 나영은 지금과는 전혀 딴 판인 수줍음 많은 엄마를 알게 된다. 늘 해맑은 얼굴로 편지를 배달하는 아빠 진국(박해일)도. 우체부인 아빠를 보기 위해 동생에게 돈을 쥐어 줘 가며 집으로 편지를 부치게 하는 연순은 막상 편지가 오면, 손에 물을 묻히고 뛰어나간다. 매번 물이 묻어 수령인 싸인을 할 수 없다는 연순의 말에 진국이 대신 이름을 적고 편지를 건넨다.

엄마가 가엽고, 엄마가 불쌍하고, 자꾸 엄마 생각이 나요

연순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진국은 선생님을 자처한다. 밤새워 직접 만든 한글교본과 학용품들을 건네주며 그는 연순에게 ㄱ, ㄴ부터 가르친다. 연순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빨간색 옷을 입고 나가 열심히 한글을 익힌다. 20점을 받아도 ‘참 잘했어요’라고 써주며, “연순씨가 100점 받으면 나중에 공부 열심히 하겠어요?”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 진국.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국을 좋아하는 연순에게 나영은 “착하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고 충고한다. 그 말에 연순은 발끈한다. “언니, 그러는 거 아니예요. 사람이 우선 착하고 봐야지라.” 전에 후배보고 “착하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어리숙해서 이용해먹기 좋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고. 20년 전만 해도 ‘착한 것’이 미덕이었지만, 무한경쟁시대인 지금,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말았다. 진국은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던 반면, 여리고 순진했던 연순은 ‘살기 위해’ 똑똑하게, 그리고 독하게 변했던 것이다. 누가 이 두 사람한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나영은 비로소 엄마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오라~이, Alright!

연순이 진국의 자전거 뒷좌석을 타고 다니며 동네 곳곳에 쓰여져 있는 글자들을 큰 소리로 읽어내며 뿌듯해 할 무렵, 진국이 육지에 있는 근무처로 배정을 받는다. 이 소식을 듣고 나서 무리하게 일에 매달리다가 몸져 눕게 된 연순을 위해 진국은 밤새워 바위 밑의 ‘약물’을 길어 나른다.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영은 아빠 보기를 원수 보듯 하는 엄마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면 세월과 세상이 두 분에게 상처를 많이 입혔다 하더라도 화해할 여지는 있겠구나 생각한다.


시공간이 다시 흐트러진다. 연순이 살던 그 집엔 병색이 완연한 아빠가 누워있다. 아빠를 찾았으니 만나러 오라는 나영의 전화에 엄마는 언성을 높이며 전화를 끊지만 결국엔 하리로 찾아오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을 했던 그 곳에서 화해가 이뤄진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결혼하지 않을 거라던 나영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에게 앨범을 보여주던 나영이 목욕탕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왜 그 사진 있잖아. 버스 처음 들어왔을 때 기념사진 찍은 거. 그 사진에 아빠가 있게, 없게?” “바쁜데 그런 걸 왜 물어? 있어, 이년아” “근데 아빠 얼굴이 잘 안보이는데, 아빠가 웃고 있는 거야?” “아, 몰러 이년아, 바빠, 끊어.”전화를 끊고 나서 엄마는 피식 웃는다. “으이구, 싱거운 년. 그럼 찍고 잡아서 찍으면 웃겄지. 안 웃겄어?” 처음으로 연순과 진국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버스개통식 날을 회상하며 엄마는 미소를 짓는다.

# 에필로그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50대 아저씨들 만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나의 아빠. 그런 아빠가 엄마에게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엄마는 웃으시며 "아니오"라고 답해 아빠를 충격에 빠뜨렸었다. 어릴 적에 두 분이 싸우신 후, 엄마에게 "나는 괜찮으니까 이혼해"라고 말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성격차이가 많이 나는 부모님을 보며 가끔 두 분이 왜 결혼하셨는지 나영이처럼 의문스러울 때가 있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은 두 분은 중매로 결혼하셨지만, 아빠를 먼저 '찍은 것'은 엄마였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하늘색 셔츠를 입고 학생들과 거리에서 자원봉사 중이셨던 아빠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었다고. 내가 모르는 엄마, 아빠의 옛 이야기. 나영이처럼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겠지만 '좋았던 그 시절'을 두 분이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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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8 03:04 2004/08/0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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