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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벗에게 주는 말 1

91년 겨울에 한 동무가 다른 한 동무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무의 가슴앓이를 옆에서 안스럽게 지켜만 보다가, 어느

날 그 동무와의 술자리를 끝낸 늦은 밤에, 나는 부리나케 실험

실로 달려갔습니다.  그 밤과 새벽 사이에 추운 실험실 구석에

서 마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이 글입니다. 내 편지글을 전해

받은 동무는 그 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고, 그 둘은

이윽고 결혼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내 옛 메모장들을

더듬어 가다가 우연히 이 글을 만났습니다. 반갑네요. 어쩌면

취중의 유치찬란한 마음으로 썼을지라도 동무를 향한 내 우정

의 한 조각을 만난 듯합니다. 조만간 그 동무를 만나서 소주라

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그대 사랑

분수처럼 힘차게 사위로 흩어져 내리더니

어쩌다 그 줄기 하나

제 곳에 가 닿지 않음이 안타까워

오늘도 잠 못이루고 있구나, 벗이여


이 척박한 땅에서는 모다 외로운 이들 뿐이거늘

하필 그대가 지나는 길마다 사랑의 꽃 활짝 피어나니

누가 있어 그 꽃그림자에 갇힌 모습 살펴

손 내밀어 그대를 쉬게 하리오만

정이 많음이 병이런가

사랑이 깊음이 죄이런가

봄볕 오는 거리로 나가 춤추지 못하고

낯붉히며 그늘로 물러서는 나의 벗이여

사랑이여 연민이여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여

나조차 이 새벽에 애닯고 눈물겹고나


그런 것을, 그토록 몸달은 그대인 것을

나는 그만

사랑은 오래도록 남몰래 지키는 것이요

사랑은 말못할 가슴앓이를 안으로 안으로만 견디다가

해살라 먹고 달 살라 먹고 별까지 안은 후에

이윽고 찬란한 아픔으로 터지는 석류와도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구나


서둘지 마라, 그대

자칫 강가에 닿기도 전에

사공의 벗은 옷에 님의 옷깃 가리운 걸 모르고

서러운 물로 풍덩 뛰어든 낭자의 전설처럼 큰 슬픔이 또 올까

그것이 두렵다고

그렇게 말하였구나


기다림 속에서 애타고

고통 속에서 입술을 말리면서

젖은 장작은 서서히 불씨를 키우고

마침내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날에도

눈보라 내리치는 겨울날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피어 나리라 활활 타오르리라

그렇게 떠벌였구나


아닐세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대 사랑의 깊이를 내가 몰랐네

그대 불꽃의 밝기를 내가 미처 몰랐네

그대 정염의 힘찬 깃발을 내가 정말이지 못 보았네

그래, 사랑은 뜨거운 몸뚱아리를 아낌없이 던지는 것

그래, 사랑은 거대한 불구덩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것

그래서 바다와 같이 깊은 가슴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

그래서 하늘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

그래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것

이제 알겠다, 벗이여

그대 사랑의 빛깔과 그대 사랑의 냄새와 그대 사랑의 맛깔

술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순간

아하 비로소 그대 사랑의 의미를 바로 알겠다


지금 내 감히 이야기하느니, 달려가라 벗이여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님를 찾아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태양을 찾아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영혼을 찾아서

달려가라, 견딜 수 없이 서러운 밤들을 모아

그대의 발치에 버리고

무수한 불면의 술잔들을 내던지고

술잔 속의 온갖 상념을 떨치고 달려가라

가서 두려워 말고 고백을 하라

부끄러운 고백 뜨거운 고백 오로지 사랑의 고백을

이 새벽이 밝으면 기어이 하라 늦기 전에

하라


이루어지리니 그대의 소망

이루어지리니 그대의 꿈

아름답구나, 그대의 기나긴 사랑 그 마지막 열병 그 눈부신 불꽃.


- 1991. 2. 27. 새벽 2시 30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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