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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해 정초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다.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심령에 부딪치는 커다란 반향이 된다.
그 동안 나의 기도 생활은 나의 영성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성은 영혼의 성품인가? 영혼이 향하는 영적인 경향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이며,
경험되어지는 영적인 세계의 창문인가?
나는 기도를 통해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의 꿈들, 먼 미래에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기대를
바라보는 내일의 창문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자신은 기도를 하다 언제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싶은 간절할 때가 있다.
내 영혼이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에 흥분되는 그 무엇을 준다.
영음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반응은 영혼의 감성을 자극하여
열린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나의 기도가 천상에 계시는 창조주에게 올려져 왔다.
나의 무수한 쏟아낸 간구들은 때로는 영혼의 절규가 되기도 하며,
고요하게 내면에 울려 퍼지는 묵상의 언어들,
혹은 하늘을 쳐다보면 나의 마음의 창문으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들,
그리고 나의 꿈이나 비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내면의 마음의 소리들.....
그 동안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기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과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평신도로 사역을 할 때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에 분반 아이들에 대한 어린 목자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어린 영혼들을 위해 순수한 목자의 열정을 담은 간구를 뜨겁게 올리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중 고등부 전담 담당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전체 중 고등부의 부흥과 젊은 영혼들의 세상의 쉽게 노출된 유혹을 차단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 열정적인 간구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영적인 생활은 보다 깊은 영적인 갈망이 솟구쳐 특별 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 기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런 기도들은 주님을 찾는 영적인 갈망과
더불어 나의 장래를 부탁 드리는 기도를 드렸으며,
그러다가 나의 인생의 전체에 대한 간구를 드리기도 하며,
나의 삶을 드리는 헌신적인 기도가 드려졌다.
그런 기도를 드렸던 나의 영적 생활에 전환점이 되는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나의 영성을 순수의 열정에서 고뇌의 무감각의 영성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느 주일날 젊은 교우의 군입대를 환송하는 곳에 갔는데,
당시 그 젊은 영혼은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친구였다.
그 친구의 환송은 동네 막걸리 집에서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거룩한 나의 몸과 영에 영향을 받게 되어
주님앞에서 나의 영성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 후 주님께 회개를 드리는
10일간의 물만 먹고 하는 금식 기도를 드리는
나의 내면에의 영성에 변화를 가져와
나의 영성은 무감각해 진 영혼의 상태로 나아가
결국 영성의 순도는 무디어져 이어진 군생활 3년 동안의 기도 생활은
더 깊은 영적인 은혜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영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로 지나게 되었다.
나의 기도도 신선함을 잃은 상태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 군 제대 후에 신학교에 복귀하여,
그 후로부터 교육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중 고등부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당시 사역자로 나선 처음의 사역시기에
자신의 영혼은 그래도 열렬히 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심방 전도사로 성도들의 각 가정을 심방하면서
교우들의 가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그리고 직업이나 사업에 대한 간구를 그들을 위해 드리고 하였다.
이렇듯이 사역자로 혹은 책임 있는 목회를 하면서
나의 기도는 인간적이며 세속적이며,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사역의 도구로서의 기도를 드렸다.
평신도 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도는 점점 식으면서,
제도적이고 습관적인 기도의 언어들이 나의 영혼에 메아리 쳤다.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심방을 하면서 늘 교우들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교회의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었다.
어느 때에는 하루에 심방을 하는데 거의 30가정을 다녔던 적도 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잠시 가정에 머물며, 가정의 상황을 듣고는 바로 기도를 드린다.
같이 다니는 대원들에게 꼭 같이 들려지지 않는 기도를 드리려고 했으나,
그러나 나의 기도는 어느 새 공식처럼 가정의 가족들의 평안과
가족들의 축복된 삶과 그리고 그들의 대소사의 문제들을 간구 드렸다.
유학의 시기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신학교의 신학적인 배움의 길에서는
영혼에의 메마른 상태에 있었고
기나긴 영혼의 고뇌의 시간들과 더불어
더 깊어진 영성의 변화와 함께 몇 번의 내면의 치유와
영적인 깨달음과 넓어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뿌리들을
이루게하는 영성과 경건신학의 배움은 자신의 영성의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영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개인 경건의 시간들이 도움이 되나,
과거 처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가졌던 순수함과 영적인 열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이렇듯이 자신의 기도의 생활의 변천사는
나의 영성의 변화와 맞물려 나의 신앙생활을 형성하여 왔던 것이다.
당시 주님께 드려지던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며,
자신의 영성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는 가운데에 특히 나의 신앙의 삶의 역사에는
메마른 영혼의 시기였던 신앙의 암흑기와 영적인 굴곡의 나래에서도 기도는
언제나 주님께 드려졌다.
기도의 언어나 내용은 나의 영성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할 수 있겠다.
목양을 하는 요즘은 교회의 목회와
교우들의 목양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역자의 기도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영성을 깨우치는 기도에의 헌신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벧전 2:9-10) |
출 15:1-18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까지 애굽의 군대의 추격을 받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200만명이나 애굽의 노예를 잃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부하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애통하며 장례를 치루고 난후,
그들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두려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전차 600대를 앞세우며,
며칠동안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홍해바다앞에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바다가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600대의 전차가 달려오고 있어,
모두가 죽을 상황, 독 안에 든 쥐(A rat in a trap),
진퇴양난(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라는 말처럼
앞, 뒤, 좌우 다 돌아보아도,
그들은 살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민족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받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고통의 소리에 신음하였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주받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속박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포들 중에 그곳에서 탈북 하시는 분들은 살 희망이 없으니 탈출합니다.
출애굽 하듯, 그들은 그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홍해바다 앞에 처한 위기의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서 그 바다를 열고
바다의 열린 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의 교회에 교역자 일일 수양회를 바닷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잦은 흐린 날이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육지에서 조금 바다가로 나갔습니다.
제가 수영을 하는 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
제가 수영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규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저의 등뒤를 누군가가 힘을 받치면서 저를 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은혜 받았을 때에,
당시에 젊은 나이에 저는 신경성위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먹어야 되고,
만성적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저의 마음에 평안함이 왔을 때,
저는 그 신경성 위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님을 믿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위장병이 고쳐졌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와서는
혼자 뒷산에 올라가 오후 내내 주님을 찬송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은혜의 깊음에 잠기다 보니,
저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저 하는 강렬한 마음이 일곤 하였습니다.
그런 찬송 부름의 습관은 바로 저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격을 기쁨으로 노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밤새껏 동풍이 불어서 바닷물을 두쪽으로 물벽을 세워
그 사이를 육지처럼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그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나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구주 하나님께 찬송드림은 당연한 신앙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로 표현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 정, 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중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어
정서적인 믿음의 단계인 마음의 감격이 정서적으로 찬송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세상에 어느 음악이든지,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찬송생활은 크리스천음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음악은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음악은 성도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유명한 신학교교수님의 여고생 딸이
영적으로 공격을 받아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귀신의 영향이 점점세워져 결국에는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딸에게 있는 귀신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딸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은 그녀가 자주 들었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록음악에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단적인 타락한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음악을 조심스럽게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그런 나쁜 음악에 오염되어
정신과 마음을 아울러 더럽히게 하는
악한 영에 열려, 자신도 가눌수 없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부드럽게, 음악이 없다면 인생의 삶이 삭막합니다.
슬플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고, 기쁠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마음이나 듣는 기쁨은 마음의 정서를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찬송하는 일은 더욱 영혼을 강화, 마음의 정서를 편하게 함과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더 우리의 마음을 이끌리게 합니다.
성경에는 단체나 개인이 찬양이나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기사들이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대하 20: 1이하에, 남 왕국 유대의 나라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유다는 막을 힘이 없어,
군대의 힘이 약하니, 긴급히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군대가 평소에 훈련되거나 적들을 대항할만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왕으로 비롯하여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력이 연합군으로 편성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의 군대 앞에
레위족속들의 성가대 앞세우며, 찬송을 부르며, 적진으로 나가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하나님께서 적들의 전력을 상실하게 하시므로,
적의 연합군은 서로 반목질시하여, 서로 죽이다가,
결국에는 다 전멸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을 승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전장에 널려있는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잃었던 것을
불레셋의 나라의 족속들에서 되찾아올 때에,
춤을 추면서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은 때로는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눌수 없는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흥겨워서 춤을 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실때에
그들과 함께 찬미하시며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4:26절에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첫순교자 스데반의 집사가 원수들로 부터 무수한 돌을 맞으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순교하는 순간에
스데반은 자기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며,
그의 은혜를 유지하는 신앙에 활력이 됩니다.
늘 찬송을 가까이 함은 크리스천의 삶의 승리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송구영신 예배 시에 말씀 드렸지만,
제가 새벽에 찬송을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천국의 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찬송의 유익은 성도의 신앙의 자세의 나약함을 강화시켜줍니다.
찬송할 때에, 성도들에게 들어있던 부정적인 마음,
나약한 마음에, 강한 의지와 용기의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찬송은 우리에게 또한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늘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명랑한 얼굴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의 삶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며,
그 구원과 은혜의 감격은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찬미하며 사는 성도들로 살게 합니다.
(Exodus 15:1-18)
* The salvation at the Red Sea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events to save the Israel.
1.The salvation of Israel people makes change their
status and position.
2. They changed free men from slave people.
Our salvation also makes change our status and position:
the righteous from sinned, a blessed life free from cursed,
the children of God from the salves of Satan
* What event happens in the episode my salvation?
* The praise of Moses and Israel people comes from the
responding rejoice to their salvation. So do Christians .
1. My praise also comes from my saved experiences.
2. My praise helps my spiritual life to be healthy.
3. Such hymn-centered life can produce victorious Christian life.
* Praise-centered life is the right and duty of Christian life
1. What about my praise life?
2. What is my favorite hymn or gospel song?
출애굽기 15:1-18
성경 본문은 찬양시가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5, 7-11, 12-16 그리고 결론 부분이 있다. 17-18
1-6
첫부분은 바다에서 멸망당한 애굽의 군대의 파멸을 읊으며,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을 인식하여
그런 엄청난 구원을 이루심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다.
모세는 구원의 하나님을 나의 노래이다라고 고백한다.
7-11
둘째부분은 하나님에 의해 파멸되는 애굽인들의 자세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시는 의인화 화법으로 하나님의 콧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숨소리로 라는 말로 자연세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개입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이스라엘을 쫓아온 애굽인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을 했고,
이스라엘인들을 대적하였으나 하나님의 힘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었다.
모세의 찬양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주님에 대한 찬양의 동기로 내세우며,
당신과 같은 신이 어디 있나이까?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받을 존재는 아무도 없나이다. 라고 찬양으로 고백한다.
12-18
이시는 모세의 찬양에 후대에 삽입된 이스라엘민족의 찬양신앙적인 고백이다.
그들의 역사속에 반복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러한 크신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연속적인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에 의한 그의 오른손으로 놀라운 승리는
그 백성들을 그의 거룩한 처소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임을 언급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다윗시대까지 위협이 되었던 팔레스틴의 백성들,
광야의 노정에서 이스라엘의 행로를 방해했던 에돔과 모압의 주민들을 물리치고,
물론 약속의 땅에 거주하였던 가나안의 주민들 까지 정복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세의 승리의 노래는 그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성소의 장소로서의
곳에 살게 할 것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찬양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이 영원히 그의 백성들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한 구원으로 찬양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 약속의 땅을 준비하며,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을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구절 이해
중요 구절 (15: 2, 11)
핵심 구절(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3절은 구원의 삼 단계를 알려준다.
1. 먼저 구속하시고 (구원하심), 2. 광야 길에서의 인도, 3.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심,
성도의 구원의 삶도 그와 같은 구원의 패턴을 밟고 있는 것이다.
1.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음, 구원을 얻음, 중생의 단계
2. 성도의 생활, 나그네의 길, 성화의 삶,
3. 천국에 들어감, 영화의 단계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이스라엘의 전쟁에 많이 나오는 표현, 여기서도 이스라엘의 승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승리를 강조한다.
15: 8콧김은 여호와의 분노를 가리킨다.
주의 바람은 동풍을 가리킴
15: 13 성결한 처소/ 시내산이나 시온산을 가리키며, 약속의 땅 전체를 가리키기도 함
15:14/ 블레셋거민/ 애굽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민족,
에돔과 모압은/ 광야의 길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맞주친 민족들
가나안 거민/ 블레셋 거민과 함께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이다.
15:16 주의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
본문과 연결되는 사건의 성경본문들
15: 19-21
여기서는 모세의 찬양에 대해 미리암의 화답하는 노래가 담겨있다.
미리암은 성경에서 여선지자라고 불림을 받은 첫 여성이다.
미가는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
중요한 지도자로 여김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당시 모세는 80세이며, 아론은 83세이며,
미리암은 아마 90세 정도 되는 것이다(출 2:4).
여기서 미리암과 여인들은 소고 (일종의 탬버린)를 흔들며 함께 춤을 추며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모세의 찬양에 화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14: 1-4 이스라엘의 야영지
이스라엘은 며칠을 남동쪽으로 내려오며, 에담에서 캠프하였다.
이곳으로 야영을 하게 된 것은 블레셋 땅의 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전쟁의 발생과 그로인한 백성들의 두려움과 돌이킴을 막기위해,
하나님은 애굽의 국경의 바다로 인도하셨다.
14:5-9 애굽의 추격
60만명(정확히 60만 3,550), 장정을 포함한 2 백만명이 빠져나간
애굽은 초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라셈스에서 출발하였다.
애굽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르며, 며칠간 슬픔속에 있다가,
다시 강팍해진 바로를 비롯하여, 화가 난 애굽의
군인들은 이스라엘을 추격하게 되었다.
14:10-22 백성의 울부짖음과 모세의 믿음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니, 이스라엘인들은 당황하며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해주신 것을 잊고,
모세를 저주하며, 자신들을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여기 광야로 데리고 와
죽게 만들었냐고 원망을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과 두려움에 빠져 버렸다.
모세는 원만하는 백성들사이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으며,
그분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바다로 내밀라 하셨다.
하나님은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여, 바다를 둘로 나누게 하셨다.
새벽녁 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라진 바다를 육지처럼 나가게 하셨다.
그 바닷길은 2백만이 지나 갈수 있는 길을 이루어 그들은 신속히 건너갔다.
14: 23-31 애굽의 파멸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려, 바다에 들어갔으나,
하나님께서 전차의 바퀴를 흩트려 뜨리고, 추격을 힘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애굽군대와 직접 자연의 힘으로 싸우시면서,
그들을 다시 합쳐지는 바다물에 모두 함몰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아 애굽의 추격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홍해기적에 대하여
홍해바다는 갈대바다라는 학자도 있으나, 애굽의 국경에 있는 바다로,
거기에는 갈대가 자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불레셋으로 가는 지름길을 피하게 하려
(전쟁을 하면 겁이 생겨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심)
애굽의 국경인 광야 끝으로 인도하심.
그 바다는 2백만명이 지나가는 큰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애굽의 군대가 빠져질 정도의 깊이가 있는 바다였다.
하나님은 밤새껏 동풍을 불게 하여 바다물을 둘로 갈라 세워,
새벽 3-6시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홍해로 건너는 기적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곧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는 다 바다에 몰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진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 진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출애굽의 역사와 홍해의 구출의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에 의한 역사로 이루어 졌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인도로 이집트의 고센에서 살았으나,
요셉이 죽으며, 그의 총리직을 통한 보호를 잃은 후,
400년을 지내는 동안 그들의 종으로 전락하여 노예생활을 하였다.
애굽인들은 그들의 노예들을 강제노동으로 부역하게 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자녀들의 생산에 까지 관여하여 남아를 없애,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출애굽연도는 1446년, 1876년-1446년 430년(갈 3:17)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노예에서 구출받음으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선민으로서의
자유를 의미를 얻은 것을 의미하며 이후에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정체감의 형성에 중요한 신앙적인 동기부여로서의 주요한 사건이며,
민족성의 건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 주제는 성경의 큰 주제로서, 인류의 타락하고 억압된 역사속에
신음하는사람들의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출애굽의 역사속에 홍해의 기적적인 건넘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가장 큰 역사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애굽의 추격은 마치 사람들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헤매이며
끝까지 달려드는 사단의 영향력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통해 노예의 강제노동의 압박에서 해방을 받았으며,
노예신분으로 사는 종살이의 비참함에서의 자유이다.
그들은 출애굽을 통해 자유시민으로 살아가며,
그것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총을 입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원수들과 싸우시고, 그들을 처부셨다.
성도들의 구원은 출애굽의 사건으로서의 구출로
세상의 장망성의 탈출(존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의 떠남)에 비유된다.
그들의 구원은 사단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한다.
어둠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구원받은 것이다(골1: 14).
그들은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불순종의 피조물에서 순종하는 자식으로 살아가게 된다(엡 2:2).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이루어야 한다.
영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교제,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남, 죄의 용서,
정죄 받음에서 해방, 어둠의 영적 세력의 지배를 이기는 권세의 삶
혼으로부터의 구원/ 죄책감에서의 자유, 수치심에서의 자유,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에 대한 자기인식의 확인,
형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의 평안,
육으로부터의 구원/ 영의 지배를 받는 조화로운 삶, 기쁨과 행복을 주는 만족한 삶,
의미와 가치를 이루는 세상적인 일의 열매맺는 삶 등
구원과 찬양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땅한 구원받은 성도의 노래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중에 구원의 노래가 있다.
그 내용은 승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주제를 그들의 찬양의 중심으로 삼았다.
출애굽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반복되는 주제로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상기케 하며,
자신들의 정체감을 새롭게하는 즉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택함을 입은 선민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통해 격려한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세움을 입은 존재들이다(벧전 2:9).
성도들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다.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다.
고로 성도의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찬송은 또한 성도의 입술의 열매이다 (히13: 5).
더 나아가 찬송생활은 구원받은 성도의 성령 충만한 삶의 방식이다(엡 5:18-20).
성도는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인도와 섭리로서의
현재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뿐 아니라,
성도를 영벌에서 영생으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즐거워 하며,
그 분을 기뻐하는 것으로서의 신앙고백적인 노래를 날마다 불러야 할 것이다.
출애굽(홍해기적)의 구원과 찬양 (성경 공부 안에 대한 제안)
* 홍해의 기적의 사건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애굽 군대의 추격, 사면초가의 이스라엘백성, (이 내용은 본문의 앞장의
내용이기에 간단한 질문이나 설명을 하기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의 반응/ 그런 경우에 반원자신들의 반응
2. 모세의 신앙과 기도/ 배울 점은?
3.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생생하게 설명
*. 출애굽의 사건 중에 홍해기적의 사건은 애굽에서의 노예상태와 이스라엘의
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출애굽을 이룬 핵심적인 사건이다.
1. 이스라엘의 구원은 상태와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나의 구원에서 나의 상태와 신분의 변화는 무엇인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저주받은 인생에서 축복된 인생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등 이런 것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은 강제노역, 노예신분, 자유가 없음, 저급한 생활, 노예근성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특권은 무엇인가?
2. 홍해의 기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자신의 일생이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도우심을 받은 것들을 간증으로
나누기를 바랍니다.
나의 간증적인 사건/
나의 간증적인 일이나 참여된 인물/
* 모세의 노래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다.
모세의 찬양은 하나님의 권능의 인식,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롬1:16).
1. 내가 구원받을 때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의 역사는?
2.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신앙적인 표현은 어떠했는가?
3. 찬송에 대한 자신의 이해나 신앙적인 관심은?
4. 입술의 사용에 대해, 자신의 말은 어떠한가?
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 자신의 말과 자신의 삶과의 관계는?
로마서 10:8-17
세례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세례를 받을 때에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
글쎄요, 당시 저는 잘 믿는 축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 생활을 잘 합니까?
구원받은 사람 쪽에 끼였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도 폭발 식 전도 방법에서 훈련받은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 당신이 세상을 떠나, 당신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나 간다면,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을 확신합니까?
장례식에 가보면,
어느경우에는 신자들이 오랜 교회 생활을 해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 했던 이들의 장례식에 그 영혼이 떠날 때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몸 상태를 보고 대략 짐작을(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에 초상 예배를 많이 치렀습니다.
그리고 있을 미국에서도 장로님, 안수 집사님의 장례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물음이나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을 갖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성경 로마서는 분명히 구원은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실상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에, 물고기 표시를 합니다.
서로 당시에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 사람은 잡혀가거나 사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끼리 암호로 표시하여 믿습니다.
헬라 어로 물고기의 뜻의 익수스라는 말은
그 앞 글자만 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믿었던 초대 교우들은 믿음은 생명과 바꿀수 도 있는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의 생명을 의지하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신자들을 구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은 자신 행위에 대해 근거를 삼는 율법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며,
자기 중심적인 종교 헌신이나 생활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이 이루신
그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의 길을 믿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죄의 짐을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짐을 해결하여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함을 얻습니다.
복음을 믿는 데에는 그 믿음의 현상이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이나
그리고 이해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생각으로 그 사실들을 믿습니다.
자신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저주받은 자리에서 살리기 위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원을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동이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마음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의 크신 희생에 따르는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사랑을 경험으로 체험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그분이 내리시는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그 사랑에 대한 응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강단이 나무 강단이고
신발을 벗고 단위에 오르는 곳에 있습니다.
거기를 걸레로 닦을 때에 한 없이 주님의 사랑이 감격스러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변소 청소나 교회 탑 꼭대기에 올라가
성탄 츄리를 달 때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즐겁게 그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셋번째 단계에는 의지적인 헌신의 결단이 있는 단계입니다.
저는 주님으로 부더 받은 그 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
자신의 일생을 주님에게 드려야 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신앙에는 의지에서 헌신적인 결단이 나오며,
결단 후에 실질적인 주님에게 헌신하는 삶이시작됩니다.
그후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며,
자신의 생활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간증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는 늘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헌신된 마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님을 위한 헌신의 삶의 지속되었습니다.
믿음은 전인적으로 자신을 주님에게 드리고,
고로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신앙 생활의 단계에 나갈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듯, 지,정,의,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이나 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정의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드리며, 자신의 중심인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갈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의 삶을 삽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그 마음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
무엇보다도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맛봅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해결을 받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면 마음이나 정신적인 문제에서 자유를 얻고, 해결을 받습니다.
과거의 상처받은 일들, 현재 자신의 마음을 누르는 깊은 근심이나
걱정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영혼의 우선순위를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는 일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해결이 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의 중요성이나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압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한 말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
그 영향 아래에 삽니다.
날마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안 된다. 하면 안됩니다.
기쁘게 삽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그들은 주님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생활이나 삶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입니다.
나의 일도, 나의 인생 철학도,
나의 삶도 다 내입에서 나간대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고로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기이한 도움을 체험하는 경험을 통해 간증이 나옵니다.
자기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 동행의 신앙,
즉 자기만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천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
인생의 실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성공하는 이야기,
질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치유의 간증 등은
그것을 듣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과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나님 체험의 자기 고백이며
하나님 신앙한 사람들의 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는 비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생활의 현장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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