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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30
    The miracle of praise and the work of salvation
    목동
  2. 2008/01/28
    배워서 확신하는 진리
    목동
  3. 2008/01/27
    기도생활과 영성변화
    목동
  4. 2008/01/25
    찬양의 기적과 구원의 역사
    목동
  5. 2008/01/17
    성도의 정체감과 삶의 스타일
    목동
  6. 2008/01/14
    찬송생활의 이유와 유익
    목동
  7. 2008/01/14
    The Rescue at the Red Sea and the Praise of the Isralite
    목동
  8. 2008/01/10
    하나님의 구원과 찬양
    목동
  9. 2008/01/07
    믿음의 말씀
    목동
  10. 2008/01/07
    구원의 확신
    목동

The miracle of praise and the work of salvation

(Acts 16:16-34)
* There is a dark environment in the non-believing
world.
1. The evil forces mislead to the hearts and the minds of
non-believers.
2. Non-believers are easy to drive into foolish idol
worship and a kind of divination.
3. How do we Christians overcome the unsaved
phenomena impacted by the dark force?
By having sound faith based on biblical teachings and
consistent personal fellowship with the Lord

*The miracle of God should work on the faith expression
of the people like praising and praying God.
1. Praising God means to glorify God and it moves
God’ s mighty hand.
2. The miracle of God works to save people who depend
on God’s salvation.

* The message of messenger can cooperate with the
responding attitude to the receiver for the work of
salvation.
1. One ’s salvation comes from believing and confessing
Jesus as own Savior.
2. How do we express our personal confession?
Self-testimony, public bap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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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확신하는 진리

딤후 3:1-17 (14-17)

본문 분해
1-9 말세의 상황, 교회의 상황
인본주의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무시하는 인간 중심의 종교는 인본주의의 신앙적인 행태이다.
쾌락주의 인간의 쾌락 추구는 타락한 인간의 성향을 나타낸다
(자기의 배만 위하는 자기본위의 지나친 감성 주의)
형식주의 신앙의 껍데기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
믿음의 힘이 없는 사변적인 신앙, 화석화된 종교인들을 양산하는 경우
이기주의 기복적인 신앙의 중심에는 이기주의적인 신앙적인 행태가 있다.
신앙의 이기주의는 자기 중심의 공덕 주의나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자기 기만이 있다.
어리석은 배움의 무익 신앙을 갉아먹는 탁상공론적인 신학 교육의 추구,
경건의 원리를 무시하는 신학적이고 철학적 이론을 추구하는 가르침.
성경적인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단적인 가르침의 위험

10-13 성도의 모습, 성도의 현실
진리에 대항하는 현상 진리를 사랑하는 가는 진실한 성도나 지도자의 가늠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이다.
진리에 거역하거나 대항하는 것은 거짓된 교리를 좇아가게 만든다
믿음의 실패 믿음의 파선자는 믿음을 담는 믿는 마음의 실패자이다. 그런 마음은 교만한 마음,
부패한 마음, 안일한 마음, 그리고 퇴보하는 마음 등이다.
신앙인의 고난 경건을 위해 사는 자,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성도는 고난의 현실이 있다.
그들 앞에는 늘 신앙적인 핍박, 생활의 곤란,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도전들(동성애, 낙태주의자, 세속주의등)이 있다.

14-17 교육의 유익, 성도의 교육
1. 배우고 확신하는 일 기독교의 진리는 가르쳐 배우는 확신함을 주는 말씀 교육이다.
2. 구원을 얻는 진리 교육 성경 교육은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교육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 교육이다
3. 의의 교육 성경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도덕 교육이며, 참된 인성 교육이다.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는 말씀 교육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다.
고로 성경 중심의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사람의 육성과 성장과 완전함에 이르게 한다.
본문 이해
1-9 불신적인 상황
말세라함은 초대 교회로부터 주님의 재림 시까지 전교회 역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중간 시기에 세상은 사회적으로 타락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19가지의 종말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알려주고 있다.

1-5 말세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은
1. 자신을 사랑하는 즉 자기중심 주의나 이기주의에 몰입되어 있다.
2. 돈을 사랑하는, 맘몬 사상이 팽배하며 (딤전 6:9-10)
3. 자랑하는 체 내면의 자신에 충실하게 보다는 외형에 치우치는 사람
4. 거만한 자, 오만함과 교만을 내세우는 사람
5. 타인을 거부하는, 하나님께 대해 신성시 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사람
6. 부모를 불순종하는 사람
7. 감사치 않는 사람
8. 거룩하지 않는 사람
9. 사랑이 없는 무정한, 따뜻함이 없는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
10. 용서치 않으며, 사단적인 사람(딤전 3:6-7 딤후 2:26)
11. 중상하는 사람
12. 자기 절제가 없는 사람
13. 잔인한, 길들이지 않는, 건전한 시민 사회에 거역하는 사람
14. 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15.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기울인 현상으로, 배반적인 사람
16. 무모한, 지각없는, 무분별한, 조급한 사람
17. 자만심, 우쭐대는 사람(딤전 3:6; 6:4)
18.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
19. 경건의 모양(형식) 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로마서 2:20; 딤전 1:16)

바울은 이런 것들에 언급을 에베소서에서 하고 있다.
디모데가 대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조심하며,
그들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을 권면한다(딤후 2:24).

6-7 거짓 교사들의 출현
바울은 에베소의 특수한 현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거짓 교사들이 누룩처럼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들이 만연할 것이라 한다.
그 거짓 교사들의 방법은 교활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 속이기 쉬운 사람들을 향해
그 어린 성도들에 대해 친근하게 접근하여, 악한 영향을 끼친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에는 의지력이 약한 여 성도들에 접근하여
여러 가지 탐욕으로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유도하였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은 도덕적인 타락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의 육욕성과 비도덕성을 부추긴다(에베소서 4: 14).

이단적인 가르침은 일시적인 유행적인 현상으로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준다.
(한국의 80년대의 종말사상에 심취한 다미선교회등)
어린 신자들은 그들이 진리를 알기 전에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를 아는 것은 진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딤후 2:25).

8-9 진리의 리더십에 대항하는 자들
유대인 전설에 의하면, 얀네스와 얌브레는 모세의 지도력에 대항하였다.
바로의 술사들로서 모세와 경쟁하였다(출애굽기 7:11,9:11).
여기서 바울은 거짓교사들과 애굽의 술사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자들은 부패자들로 사람들을 타락으로 유인하다(딤전 3:9).
결론적으로 그들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은 잠시는 심각하게 주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얀네스와 얌브레와 같은 어리석은 자들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잘못이 밝혀지는 것이다(딤전 4:15, 5:24-25).

10-13 반대에 직면한 신실한 일꾼들
바울은 인내와 신실함에 대한 자신의 예를 들면서,
디모데에게 직접적으로 권면한다 (2:1).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들과 목적, 믿음, 인내, 사랑, 참음, 핍박,
고난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참 교사의 가르침들을
디모데가 알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안디옥, 이고니움,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선교 여행을 하였던 디모데는
일찍이 젊은 선교사로서 신앙인의 고난 당하는 삶을 경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핍박을 받는 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디모데를 비롯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통해 여기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처한 상황(기독교 사역자의 사역 현장과 성도들의 신앙적인 삶의 현장)에 대해
거짓 가르침들이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 사이에서 널리 만연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정상적인 기독교 주변에는 많은 이단적인 집단들과
이상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 현상들은 신앙의 세계를 더 힘들게 하는 것으로
그런 거짓 가르침으로 속이는 일과 속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14-17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앙 교육
14-15 디모데가 받은 신앙 교육
이방인의 문화와 유대 종교의 혈통이 섞인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받은 신앙 교육은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 중심의 교육과 성경 중심의 교육은
그의 받은 교육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교육의 원천이 있다.
좋은 신앙인의 모델 교육과 성경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성경 교육은 구약에서 나온 진리에 대한 교육으로서 바울처럼
그도 또한 율법주의의 한계를 넘어간 전형적인 신앙인이었다(딤전 1:2; 딤후 1:2,5; 행전 16:1).
그 구약 성경의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에
맞추어 졌을 때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아브라함과이삭, 야곱등)

16-17 성경 교육의 목적과 유익
성경은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받은 성경 교육은 구원에 도달하게 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율법은 복음의 몽학(유치원)선생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여기에서 디모데 에게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구약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 졌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독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고로 그 책들은 오류 없이 이루어진 책들이다. 이점은 유대교에서도 강조하는 점이다.
바울은 말씀의 유용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디모데의 사역의 각 방면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
죄를 지적하고 잘못을 책망하는 일(딤전 5:20, 딤후 4:2),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주는 일(딤후 2:25, 4:2),
그리고 새 신자들을 하나님의 길,
즉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의의 교육은 아이들을 훈련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훈련하는 일이다.
이런 교육들은 하나님의 성경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많은 유익을 주는 것이다.

성경 교육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영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다.
그는 온전하고, 능력이 있으며, 효율적인 사람으로
모든 교회의 일꾼의 조건들을 채우는 것이다.
그는 모든 선한 일들을 위해 자격을 갖춘 일꾼인 것이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 젊은 사역자에게 사역의 무거운 책임감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의 헌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으며,
성경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디모데의 사역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을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가르침
악한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해
초대 교회 때부터 주님의 재림 때가지 교회는
영적 생활의 중간 시기로 종말의 시기에 살고 있다.
주님도 성도들이 사는 세상은 양들을 이리로 보내는 것처럼
선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힘든 악한 현상들이 타락한 인간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나 불합리한 현상들은 인류의 범죄의 결과로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그러한 악하고 모순되고 부조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선한 이들은 그 가운데에서 악한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거기에 지기도 하고, 그런 현상들을 극복하며 살기도 한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 지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오는 그날에는
더욱 하나님의 심판에 걸릴만한 인간 사회의 악한 현상들이 만연할 것이다.
우리의 주변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문명의 발달이나 문화의 진보는
과거보다 사람들의 마음은 순수함 보다는
유능함을 추구함 나머지 교활함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기 보다는 진리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함으로 나가기도 한다.
인구가 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돕는 상부상조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인구의 폭발로 인하여
생존에 대한 경쟁심이 늘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고 무정하게 한다.

우리 시대의 이전의 사람들은 단순히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면 되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기독교의 보편화로 인하여,
복음의 진리를 믿는 크리스천들 중에서
기독교의 본질의 가치나 의미가 변색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은 신자들에게 더 많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며,
선한 행실의 열매를 바라 보기를 원하며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듣고 받아들여 변화 되기보다는
아무리 좋은 진리이라도 그 절대적인 진리를 우선 거부하며,
인간의 좁은 생각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평가로 판단하기도 한다.
고로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신앙인의 경건의 능력과
복음을 전달하는 사역자들의 복음 메시지의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거짓 가르침의 문제, 이단에 대한 이슈
이단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대해서 잘못되게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이다.
초대 교회로부터 이천년의 교회 역사는 수도 없는 이단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혔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진리의 교육을 소홀히 하면
신앙이 여린 성도들은 미혹을 받기 쉽다.
이단적인 가르침들은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해
호기심을 자극하거나(이상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은 현상)
사람들에게 긴박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종말적인 가르침 등으로 무장한다.
최근까지 세계 교회나 한국 교회는 많은 이단들의 현상들을 보아왔다.

성도들에게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건강한 신앙을 세우게 하거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무장시켜야 할 책임이 사역자 들에게 있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먼저 건전한 신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자기 구원(자기가 이해하고 경험한 성경적인 구원관)과
자기 복음(자기가 이해하고 경험한 성경적인 복음관)에 대한
확실한 목회 가르침 내지는 기독교 교육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필자의 목회 사역 중에 제일 안타까운 일들 중에 하나가
열심을 가졌던 순수한 평신도들이 하루 아침에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가정을 버리고,
자녀 교육을 등한히 하고, 이단 집회에 빠져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해 나갈 때이다.
어느 경우는 이단의 가르침의 배후에는
이단의 영들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충실했던 신실한 신앙적이었던 교회의 일꾼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는 것이나,
이단적인 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 사회적으로 엘리트이며,
지극히 이성적이라 할 수 있는 사회 명사나
저명한 학자들까지 포섭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 배후에는 인간의 마음을 미혹하고
강한 영향력을 주는 영들의 역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 교육의 이슈들
아무리 인간 교육이 발전하고,
좋은 이상적인 가르침이라도 사람은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들의 인성 교육을 가능하게 하며, 참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회 교육의 본질은
흔히 보통 교회에서 하는 짜여진 프로그램에서 하는 제자 교육이나
특수한 접근에 의한 단계별 교육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포괄적으로 가르치는 성경 중심과
성경의 권위에 입각한 하나님 말씀을 직접 가르치는 것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교육은 교육을 맡은 사람들의
옳은 성경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성경의 가르침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받는 학습자들의 신앙적인 학습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 교육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 교육은 사람들을 구원을 얻게 하는 구원의 진리의 교육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적인 가르침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 수 있는 교육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 공부 교안
*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상황
성도들이 사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인본주의, 쾌락주의, 무신론 등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들의 맹점인 신앙의 형식주의와
이기적인 신앙적인 행태는 신앙인들의 경건을 무력하게 한다.
때로는 성도들 주변에 거짓된 가르침들이 미혹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앙인의 배움에 유익을 얻지 못하는 현상 등도 있는 것이다.
1. 자신의 주변에서 겪는 일반 사회적인 현상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을 주는 현상은 무엇인가요?
2. 신앙인으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에 겪는 어려운 일들이 무엇인지요?
3. 신앙인으로서 그러한 어려운 일들을 어떻게 극복하는 지요?

*성도의 현실적인 문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삶은 때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힘든 일도 겪는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 소외되는 현상도 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현실이다.
1.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부딪치는 신앙적인 이슈는?
2. 말씀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신앙적인 자세는?
3. 성도로서 삶의 현장에서 겪는 고난의 문제들은?
성도로서 그런 고난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3. 하나님의 사람 교육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는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일을 통해
자기 확신하는 데 이를 수 있다.
먼저는 자기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진리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연결해 주는 의의 교육을 할 수 있다.
부모를 둔 모든 자연적인 사람은 그 부모를 통해 인간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1. 자신의 구원의 확신에 도움을 주는 성경 말씀은 무엇인지를 나누어 보세요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3. 자신을 변화시킨 말씀이나 교육을 받은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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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과 영성변화

올해 새해 정초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다.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심령에 부딪치는 커다란 반향이 된다.

그 동안 나의 기도 생활은 나의 영성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성은 영혼의 성품인가? 영혼이 향하는 영적인 경향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이며,
경험되어지는 영적인 세계의 창문인가?
나는 기도를 통해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의 꿈들, 먼 미래에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기대를
바라보는 내일의 창문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자신은 기도를 하다 언제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싶은 간절할 때가 있다.
내 영혼이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에 흥분되는 그 무엇을 준다.
영음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반응은 영혼의 감성을 자극하여
열린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나의 기도가 천상에 계시는 창조주에게 올려져 왔다.
나의 무수한 쏟아낸 간구들은 때로는 영혼의 절규가 되기도 하며,
고요하게 내면에 울려 퍼지는 묵상의 언어들,
혹은 하늘을 쳐다보면 나의 마음의 창문으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들,
그리고 나의 꿈이나 비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내면의 마음의 소리들.....

그 동안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기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과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평신도로 사역을 할 때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에 분반 아이들에 대한 어린 목자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어린 영혼들을 위해 순수한 목자의 열정을 담은 간구를 뜨겁게 올리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중 고등부 전담 담당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전체 중 고등부의 부흥과 젊은 영혼들의 세상의 쉽게 노출된 유혹을 차단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 열정적인 간구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영적인 생활은 보다 깊은 영적인 갈망이 솟구쳐 특별 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 기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런 기도들은 주님을 찾는 영적인 갈망과
더불어 나의 장래를 부탁 드리는 기도를 드렸으며,
그러다가 나의 인생의 전체에 대한 간구를 드리기도 하며,
나의 삶을 드리는 헌신적인 기도가 드려졌다.

그런 기도를 드렸던 나의 영적 생활에 전환점이 되는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나의 영성을 순수의 열정에서 고뇌의 무감각의 영성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느 주일날 젊은 교우의 군입대를 환송하는 곳에 갔는데,
당시 그 젊은 영혼은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친구였다.
그 친구의 환송은 동네 막걸리 집에서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거룩한 나의 몸과 영에 영향을 받게 되어
주님앞에서 나의 영성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 후 주님께 회개를 드리는
10일간의 물만 먹고 하는 금식 기도를 드리는
나의 내면에의 영성에 변화를 가져와
나의 영성은 무감각해 진 영혼의 상태로 나아가
결국 영성의 순도는 무디어져 이어진 군생활 3년 동안의 기도 생활은
더 깊은 영적인 은혜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영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로 지나게 되었다.
나의 기도도 신선함을 잃은 상태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 군 제대 후에 신학교에 복귀하여,
그 후로부터 교육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중 고등부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당시 사역자로 나선 처음의 사역시기에
자신의 영혼은 그래도 열렬히 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심방 전도사로 성도들의 각 가정을 심방하면서
교우들의 가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그리고 직업이나 사업에 대한 간구를 그들을 위해 드리고 하였다.
이렇듯이 사역자로 혹은 책임 있는 목회를 하면서
나의 기도는 인간적이며 세속적이며,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사역의 도구로서의 기도를 드렸다.
평신도 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도는 점점 식으면서,
제도적이고 습관적인 기도의 언어들이 나의 영혼에 메아리 쳤다.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심방을 하면서 늘 교우들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교회의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었다.
어느 때에는 하루에 심방을 하는데 거의 30가정을 다녔던 적도 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잠시 가정에 머물며, 가정의 상황을 듣고는 바로 기도를 드린다.
같이 다니는 대원들에게 꼭 같이 들려지지 않는 기도를 드리려고 했으나,
그러나 나의 기도는 어느 새 공식처럼 가정의 가족들의 평안과
가족들의 축복된 삶과 그리고 그들의 대소사의 문제들을 간구 드렸다.

유학의 시기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신학교의 신학적인 배움의 길에서는
영혼에의 메마른 상태에 있었고
기나긴 영혼의 고뇌의 시간들과 더불어
더 깊어진 영성의 변화와 함께 몇 번의 내면의 치유와
영적인 깨달음과 넓어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뿌리들을
이루게하는 영성과 경건신학의 배움은 자신의 영성의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영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개인 경건의 시간들이 도움이 되나,
과거 처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가졌던 순수함과 영적인 열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이렇듯이 자신의 기도의 생활의 변천사는
나의 영성의 변화와 맞물려 나의 신앙생활을 형성하여 왔던 것이다.
당시 주님께 드려지던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며,
자신의 영성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는 가운데에 특히 나의 신앙의 삶의 역사에는
메마른 영혼의 시기였던 신앙의 암흑기와 영적인 굴곡의 나래에서도 기도는
언제나 주님께 드려졌다.
기도의 언어나 내용은 나의 영성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할 수 있겠다.
목양을 하는 요즘은 교회의 목회와
교우들의 목양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역자의 기도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영성을 깨우치는 기도에의 헌신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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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기적과 구원의 역사

행전 16: 16-34)
본문 분해
1. 점하는 여종의 치료16-21
귀신들림의 현상인 점괘와 악령들의 영향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 지역에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
바울의 축사와 점치는 여종을 고침
(귀신들의 정체를 알리고 복음 증거를 방해함, 바울의 축사 사역)
주인들의 반발과 반 유대적인 환경 (노예를 부리는 기득권자들의 이익 추구의 영향)

2. 감옥에서의 찬양의 기적과 죄수들의 자유 22-26
바울과 실라가 태장을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힘 (복음전도자들의 고난의 현장)
감옥에서의 기도와 찬양 (영적인 부흥의 현장은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 일으킨다)
기적의 현장(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흔들림, 옥문이 열림, 수갑이 풀어짐)

3. 간수의 구원받은 역사 27-34
간수가 당하는 처지(죄수들의 탈옥하는 현장에 대한 책임감에 자결하려고 함)
도움을 구하는 간수 (간수의 간절한 소원: 자신의 절실한 문제해결을 호소함)
간수장에게 복음을 전함(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 복음에 있음을 보여줌)
간수와 가족들이 구원받음 (개인 구원은 곧 가족 구원으로 발전함을 보여줌)
세례와 간증의 역사(구원받음의 증거는 세례와 같은 공식적인 신앙 고백과 그리고 간증의 응답)

본문 배경 이해
빌립보 지역에 대해
로마의 식민지로, 군대의 주둔지였다. 거기에 있는 유대인인구는 소수였다.
원래 유대인 남자가 10인이면 회당이 있는데, 거기에는 회당이 없고, 기도처가 있었다.
기도처는 열린 공간이며, 작은 건물이었다.
그 지역은 반 유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이 지역의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디아 같은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나,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유럽은 아시아와 달리 더 로마적이며, 로마의 통치가 더 영향이 미치는 곳이었다.
로마인들은 자기 풍습이나 지역 내의 관습을 존중해주었고,
당시에 전 로마적으로는 희랍적인 종교 풍습과 문화적인 환경이 만연해 있었다.
그리이스의 신들을 숭배하는 일들을 통해
지역 내에 있는 신, 여신들을 숭배하는 일들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빌립보에는 보통 다른 지역과 같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당시 세계에는 우상숭배에 영향을 받고 빠져있는 이방인들이 있었고,
유대교를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으며,
유대의 종교와 풍습을 좇아 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의 기자 의사 누가가 빌립보에서 자랐으며
거기에 있는 의술 학교에 다닌 것 같다고 한다.
로마의 식민지에 두 리더가 다스린다.
보통 행정관, 치안관등이 식민지에서 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다.
식민지는 군대의 주둔과 로마의 군사기지로 활용되었다.

점치는 여종의 치료 및 구원(16: 16-18)
그녀는 귀신의 들린 상태에서 귀신의 힘을 빌어,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고, 점치는 일을 하였다.
악령, 혼령에 의해, 델피신전의 아폴로 신이 악령의 뱀으로 장식되었다고 믿었다.
델피의 원래의 여사제들은 그 악령에 의해 미래를 예언하는 일,
귀신들은 악령 숭배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준다. 예언하는 일등이다.
미국의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서 한 여샤만이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언하고 점을 치는 일을 방영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 여종은 여청년으로 바울 일행을 만나,
계속하여 여러 날을 소리지르며,
그녀를 통해 귀신이 그들의 정체를 밝힌다.
그녀의 말이 맞지만, 그런 일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바울은 축사를 하였다. 그 악령에게 직접 그 여종에게서 나오라고 하였다.
주님의 권세를 믿고 그의 권한을 위임 받은 주님의 일꾼들에게는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간수장의 개종 ( 16: 19-34)
여종의 주인들이 여종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같다.
그 주인들이 여종의 치료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바울 일행을 고소하여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으로 잡히게 되었고,
누가(이방인)와 디모데(반 이방인)는 이방인으로 잡히지 않았다.
이런 일은 로마의 황제 클라디우스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일이 생기기 전에 일어난 일로
당시에 반 유대적인 경향이 농후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도시소란죄라는 죄목이 첨가 되었다.

16:22 바울과 실라의 고난의 현장
관원들이 채찍질하여 고후 11:25에 세 번의 태장을 맞았다는 내용처럼,
여기에서도 채찍질 당하는 고통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감옥에 들어갔다.
전도자들은 당시의 금지된 복음 전파로 인하여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받으며, 마치 죄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비일 비재 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발을 착고에 채워, 지하 감옥에 가두게 되었다.
당시에도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
심한 매질을 당하는 일, 자기의 속한 가문이나 지역사회에서 축출되는 일,
지위와 직업을 박탈당하는 일등이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고난 당하는 현장은
지금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모슬렘 지역에서는 출가나, 사회에서 매장되며,
공개적으로 전도하지 못하는 민족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대표적인 복음 전파뿐 아니라,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지역은
인디아(힌두교), 인도네시아(모슬렘), 콜럼비아, 터어키(모슬렘)
이디오피아, 미얀마 등이며, 복음 전파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지역은
인도네시아 외의 모슬렘 지역, 중국, 북한 등이다.

16: 23-24 철야 기도와 찬송이 주는 의미
바울과 실라는 지하 감옥에서 찬송을 하며,
그 기도하며 찬송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 까지 들려졌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며,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손을 채운 수갑 혹은 착고가 풀려졌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통해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과연 자기의 백성들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성도들의 찬송 중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의 역사가 일어난다.

16: 25 부흥의 주제
바울과 실라는 사도행전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기쁨의 특별한 의미를 주는 기도와 찬송을 불렀다.
기도와 찬송이 어우러졌다는 것은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는 부흥적인 요소가 가미된 두 사람의 전도자로서의 간증을 담은 내용이다.
영적인 부흥은 주님의 말씀을 통한 부흥도 있지만
성도의 신앙 표현인 열정적인 기도와 뜨거운 감격적인 찬송으로도 나타난다.

16: 26 베드로와 바울의 비교
지진으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는
베드로의 탈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18-20, 12:3-11)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베드로와 바울의 체험의 비교를 볼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두 사도들의 행적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베드로와 후기의 바울의 전도 사역과 선교 사역의 역사는
두 사도의 초대 교회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의 탈옥에는 천사의 개입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고,
여기서는 바울과 실라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지진으로 인하여,
옥문이 열리고 옥터가 흔들리며, 그들을 채운 수갑이 풀려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본문에서 독자들에게 능력과 기적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6: 27-28 간수의 책임
그러한 기적적인 현상들이 일어났을 때에, 죄수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때에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결을 하려 하였다.
당시의 간수들은 죄수의 탈출은 곧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책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책임에 대한 표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것이다.

16: 29-30 간수의 호소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로 알고, 떨며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지를 물었다.
여기에 그의 질문은 자기 목숨에 대한 문제이며,
그 사람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걸린 간곡한 부탁의 물음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간절한 문제에 대해 진지한 반응을 한다.
본문은 복음은 인생 문제의 해답임을 알려준다.

16:31-32 핵심 구절31
32절은 핵심 구절로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 지는 것으로,
간수가 무엇을 해야 자신이 구원받는지를 질문하였는데,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가를 문의 하였다.
바울은 한 말씀으로 복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간수의 집안 사람들이 다 구원받을 사람을 받았다.

16: 33-34 물세례와 복음에 대한 간증
그들이 물세례를 받으므로 그들의 죄를 씻는 증거를 나타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의 상처난 부분을 씻기며, 죄수들을 먹이며,
그들 가족은 다 기쁨이 충만했다. 복음을 받고 나서 기쁨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승리하는 복음의 증거는 기쁨에 있다.
물세례는 믿음 고백과 동시에, 구원의 확신의 표로 나타나고 있다.
간수와 그의 가솔들은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표로 세례를 받았다.

신학적인 가르침
귀신들림과 그에 따르는 현상, 그리고 축사
불신 세계는 대부분 어둠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
어둠의 세력은 불신자들의 마음에 미혹된 마음과 무지와 어리석음과
거부하는 태도를 늘 심어 놓는다.
그 세력은 적극적으로 불신자들의 육체에 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타 종교나 그럴 듯 하지만
어리석은 영적인 가르침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심리적으로는 깊은 불안의 세계에 살게 하며,
목적이나 방향 감각이 없이 한없이 방황하며 인생의 의미나 가치를 무시하고 살게 한다.

귀신들림은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아주 경미한 상태로 있는 경우로 이성적으로는 괞찮으나,
모든 생각이나 사상에 어둠의 영향을 받는다.
조금 영향을 받는 상태는 육체적으로 불면이나,
혹은 심리적으로 걱정이나 불안 심리가 있는 경우이다.
그 다음 단계는 반복적인 오용이나 남용의 현상에
자신을 빠뜨리는 단계로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어떤 일에 탐닉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직접적인 귀신들의 영향 아래에 놓여서,
일상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장애가 나타난다.
그런 경우에는 정신적인 병, 발작적인 상태,
혹은 더 큰 상태로 인간의 정상적인 삶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귀신을 극복하는 길은 신앙 안에 서는 것과 건전한 사고방식과
그리고 일정한 사회생활에 있을 때에는 쉽게 그런 현상들을 극복할 수 있다.
축사하는 일은 주님이 믿는 자에게 주신 능력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어둠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는 믿음과 영적이며, 상담 기법적인 대처 방안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내적 치유나, 자아 치유나, 기억치유나,
혹은 인간 관계 치유(용서, 재 연합등)를 통해 이루어 진다.
그리고 악령들은 사람들 속에 있는 상한 감정이나 상처의 쓰레기에 스며들기 쉽다.
고로 축사 사역자들은 먼저 피축사자들에게
그런 상한 감정이나 상처들을 해결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성도들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은 그런 귀신들림이나
영향을 받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환경을 벗어나게 하며,
건전한 정신과 강건한 믿음을 견지하게 하는 일이다.

구원의 역사와 믿음의 의미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분명한 복음의 역사이다.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의 응답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신다.
믿음과 구원은 씨앗과 열매의 관계가 같다.
믿음은 구원을 심는 사람 속에 있는 영혼의 장치이다.
믿음은 지성이나 감성이나 영성이 함께 어우러져 사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한다.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어디서 오며 언제 시작되는 가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말씀에 있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영적 부흥의 역사 (기도와 찬송의 관계)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부흥은 스가랴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이루어 진다.
하나님의 성령이 자유롭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의 질서나 조건이 이루어지면
성령은 마음껏 역사하셔서 사람들 속에 역사하신다.
성령께서 그가 역사하시는 조건만 맞으시면 마음의 부흥이나,
영적인 희열이나, 감격스런 영성의 발생이나 충만한 상태의 성령충만을 일으키신다.
기도와 찬송은 영적인 감흥이 일어나는 지름 길 일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여는 일이며,
기도를 통해 영적인 통로가 하나님께 열리고,
초대교회 성도등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기도라는 무기를 통해
응답을 받고,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내었다.
기도에 열정을 쏟은 만큼 성도들 사이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높이는 일은
그분의 성호를 높이는 성도들의 찬양에 있다.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이며,
능력의 성령님이 자유롭게 임재 하시는 환경을
가장 빨리 조성되는 길이 찬양에 몰입하는 일이다.
기도가 살고 찬양이 살면 영적인 부흥은 일어난다.

구원의 역사와 믿음의 표현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일어난다.
그 고백은 공중에서 침례 받음으로, 자기 구원에 대한 간증으로,
구원받은 자의 감격에서 나오는 전도에서 나오며,
혹은 자기 결단의 공개적인 고백이나 감사의 표현을 통해서 나온다.
그리고 개인의 은밀한 가운데에서도 사명으로의 발전적인 결단이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고백적인 결심으로 그리고 기타 등으로 일어난다.

성 경 공 부 안
*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계의 문제: 믿는 자 에게 적대적인 환경16-21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둠의 지배를 받는다.
고로 악령의 영향을 받는다(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또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하여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반면에 성도들은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환경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복음에 대해 철저한 무장이 필요하다.

1. 어둠의 세력의 영향을 받은 적(귀신들의 영향) 이 있습니까?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 논의 해보세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사주팔자 신수를
본적인 있는지요. 점이나 손금을 보거나 사주 관상을 보는 일이
왜 해롭습니까?
2. 귀신을 물리친 일이나, 그 영향력들을 극복하는 일에 대해 논의 해보세요.
어떻게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3. 자기의 생활 속에서 신앙 때문에 어려운 일들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세요?

* 영적 부흥의 현장: 감옥에서의 찬양의 기적과 구원의 역사 22-26
1.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는지요?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2.하나님의 기적이나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응답으로서의 기적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3.자신에게 경험이 되었던 영적인 부흥이나, 기적이나,
은혜의 경험들을 나누어 보세요

* 구원의 역사: 간수와 그의 가족의 구원 27-34
1.간수가 당한 인생의 문제는 무엇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비교해서 논의 해보세요
2.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으로 혹은 확신이나 체험으로
3.구원받은 표는 무엇인지요. 침례에 대한 신앙 고백은? 간증이 주는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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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정체감과 삶의 스타일

(벧전 2:9-10)

분문의 의도 분석
성도란? 하나님의 소유인 그의 백성; 왕족, 제사장, 구별된 특별한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의 주민들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9.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을 널리 찬양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 이전의 과거와 성도된 현재와의 비교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불쌍히
여기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성도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며, 길 위에 있는 삶이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십시오.

성도의 삶의 지향
선한 생활, 전도의 효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12. 여러분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에 대해
베드로는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신앙 생활을 잘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 썼다.
지금의 터어키 지역인 소아시아의 로마 식민지들 지역에 흩어진 크리스천들에게
이방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다.
그 신자들은 핍박의 현장에서 성도로 태어나므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며,
불신자나 적대적인 이방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새로운 행위가 요구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새로운 책임감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이 서신은 신자들의 매일의 필요를 위한 실제적인 격려와 위로를 주고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정체감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성도들 자신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자기 이해이며,
자기 사명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한다.
성도들이 과거의 자신들의 삶과 지금 성도로서의 현재의 삶을 비교하며,
이방 세계에서 사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자기 사명을 다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본문 강해
핵심 구절 2: 9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고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세(정신)로 살 것을 강조한다.

9-10
베드로는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활력 있는 권면과 더불어
성도의 거룩한 삶을 실천할 것을 권면한다.
이사야 43:20 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보는 시각을 베드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새로운 선민으로서
유대와 이방인 모두에게 적용하고 있다.

출애굽기 19:6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두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나라를 세우리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족에 속한 제사장직을 언급하고 있다.
이 뜻은 크리스천들이 세상나라에 대해 구별된 자들로, 특별한 구별의식,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는 것은 제사장은 백성의 중보자로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하는 자였다.
고로 모든 신자가 각기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그와 교통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히 10:19-22).
동시에 그렇게 구별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주변인이나,
혹은 별 볼 일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족 같은 자기 존재의 고귀한 인식과
그리고 왕족이 누리는 특권을 갖고 살 것을 명하고 있다.
왕족의 특권은 온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의 권한을 함께 공유하며,
함께 그 왕의 권한의 활용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고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왕권의 권한에 대해서는 주 예수님께서
마태 28: 18에서 복음 전파를 맡은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는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교회 시대에서 선택된 백성들을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로 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그의 백성들을 보존하시며,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하시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그의 나라를 위해 그분의 동역자인 것이다.
이 약속은 원래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
즉 메시야 왕국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예언의 성취로서 알려지는 것이다.
성도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선택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양을 나타내는 데 있다.
찬양이란 말은 탁월함(하나님의 속성의 위대하심, 뛰어나심등)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도들은 제사장으로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고로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증인으로서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어둠은 호세아2: 23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 제공되는
분여(provision)를 모르는 이방인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성도들은 그들이 그의 백성이 아닐 때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비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의 자비는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의 근거가 되는 그분의 속성이다.
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관심(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그의 돌봄, 보존, 인도, 격려, 능력등) 을 받는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이런 두려움에서 종교의 동기가 출발하고 있다.
그렇게 타종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비결이다.

11-12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다르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들이 죄에 대해 대적하며, 다른 이들에게 선한 자세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이 말씀에서 크리스천들은 죄는 미워하나
죄인은 미워하지 않아야 하는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요 즉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며,
세상에서 인생길의 여행을 다니는 행인으로서 고향처럼 살지 말고
타향살이 하는 것처럼 살 것을 권면한다.
세상의 가치와 신념이나 신조들은 크리스천의 그것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로 크리스천들은 기독교 윤리에 의해 비도덕적인 것이나,
죄악적인 태도로 추구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억제되어야 할 그런 것들은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주장한 지나친 육체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등인 갓이다.
그런 것에서 크리스천들은 그런 것들과 영적인 전쟁을 치루는
영적인 전사처럼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의 자기 약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크리스천들은 불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빛으로 드러내며,
그들앞에서 효과적인 증인으로서 살아야 할 것이다.
11절에서 소극적으로 세상물결에 대해 방어하는 입장에서 살아가는 데서
12절에서 적극적인 크리스천의 라이프 스타일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불신자들에게 보여줄 선한 행실과
그에 따르는 열매를 맺는 살 것을 권면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판단이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그것들이 귀한 자산으로 나타내며, 자신에게 유익으로 남으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가치로 남게 된다.

고로 바울은 성도의 국적은 하늘에 있다고 가르쳤다(빌3: 20).
그러기에 성도는 신앙의 용사들로 가장 값진 보물인 하나님의 도성을 찾아
희망과 인내를 가지고 여행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 공부안
1. 신자(성도)란? 하나님의 소유인 그의 백성; 왕족, 제사장, 구별된 특별한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의 주민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자 (성도)는 누구입니까?

신자(성도)로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자(성도)로서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높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신자(성도) 이전의 과거와 성도된 현재와의 비교해 봅시다.
신자(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감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자(성도)이전의 자신의 상태는?

신자 (성도)가 된 이후에 자신의 모습은?

예수님 믿고 난 후에 받은 축복이나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의 손길은?

3. 성도의 삶이란?
성도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며, 길 위에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전쟁을 날마다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삶을 여행하는 하늘나라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객으로서 자신이 가져야 할 자세는?

신자(성도)는 자기의 영혼의 유익(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에게 있는 약점(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 전쟁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신자(성도)의 삶은 선한 생활을 하며,
불신자 전도를 위해 사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전도에 효과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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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생활의 이유와 유익

출 15:1-18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까지 애굽의 군대의 추격을 받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200만명이나 애굽의 노예를 잃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부하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애통하며 장례를 치루고 난후,
그들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두려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전차 600대를 앞세우며,
며칠동안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홍해바다앞에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바다가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600대의 전차가 달려오고 있어,
모두가 죽을 상황, 독 안에 든 쥐(A rat in a trap),
진퇴양난(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라는 말처럼
앞, 뒤, 좌우 다 돌아보아도,
그들은 살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민족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받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고통의 소리에 신음하였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주받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속박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포들 중에 그곳에서 탈북 하시는 분들은 살 희망이 없으니 탈출합니다.
출애굽 하듯, 그들은 그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홍해바다 앞에 처한 위기의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서 그 바다를 열고
바다의 열린 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의 교회에 교역자 일일 수양회를 바닷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잦은 흐린 날이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육지에서 조금 바다가로 나갔습니다.
제가 수영을 하는 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
제가 수영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규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저의 등뒤를 누군가가 힘을 받치면서 저를 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은혜 받았을 때에,
당시에 젊은 나이에 저는 신경성위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먹어야 되고,
만성적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저의 마음에 평안함이 왔을 때,
저는 그 신경성 위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님을 믿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위장병이 고쳐졌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와서는
혼자 뒷산에 올라가 오후 내내 주님을 찬송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은혜의 깊음에 잠기다 보니,
저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저 하는 강렬한 마음이 일곤 하였습니다.
그런 찬송 부름의 습관은 바로 저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격을 기쁨으로 노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밤새껏 동풍이 불어서 바닷물을 두쪽으로 물벽을 세워
그 사이를 육지처럼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그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나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구주 하나님께 찬송드림은 당연한 신앙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로 표현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 정, 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중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어
정서적인 믿음의 단계인 마음의 감격이 정서적으로 찬송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세상에 어느 음악이든지,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찬송생활은 크리스천음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음악은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음악은 성도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유명한 신학교교수님의 여고생 딸이
영적으로 공격을 받아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귀신의 영향이 점점세워져 결국에는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딸에게 있는 귀신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딸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은 그녀가 자주 들었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록음악에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단적인 타락한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음악을 조심스럽게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그런 나쁜 음악에 오염되어
정신과 마음을 아울러 더럽히게 하는
악한 영에 열려, 자신도 가눌수 없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부드럽게, 음악이 없다면 인생의 삶이 삭막합니다.
슬플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고, 기쁠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마음이나 듣는 기쁨은 마음의 정서를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찬송하는 일은 더욱 영혼을 강화, 마음의 정서를 편하게 함과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더 우리의 마음을 이끌리게 합니다.

성경에는 단체나 개인이 찬양이나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기사들이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대하 20: 1이하에, 남 왕국 유대의 나라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유다는 막을 힘이 없어,
군대의 힘이 약하니, 긴급히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군대가 평소에 훈련되거나 적들을 대항할만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왕으로 비롯하여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력이 연합군으로 편성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의 군대 앞에
레위족속들의 성가대 앞세우며, 찬송을 부르며, 적진으로 나가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하나님께서 적들의 전력을 상실하게 하시므로,
적의 연합군은 서로 반목질시하여, 서로 죽이다가,
결국에는 다 전멸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을 승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전장에 널려있는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잃었던 것을
불레셋의 나라의 족속들에서 되찾아올 때에,
춤을 추면서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은 때로는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눌수 없는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흥겨워서 춤을 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실때에
그들과 함께 찬미하시며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4:26절에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첫순교자 스데반의 집사가 원수들로 부터 무수한 돌을 맞으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순교하는 순간에
스데반은 자기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며,
그의 은혜를 유지하는 신앙에 활력이 됩니다.
늘 찬송을 가까이 함은 크리스천의 삶의 승리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송구영신 예배 시에 말씀 드렸지만,
제가 새벽에 찬송을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천국의 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찬송의 유익은 성도의 신앙의 자세의 나약함을 강화시켜줍니다.
찬송할 때에, 성도들에게 들어있던 부정적인 마음,
나약한 마음에, 강한 의지와 용기의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찬송은 우리에게 또한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늘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명랑한 얼굴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의 삶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며,
그 구원과 은혜의 감격은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찬미하며 사는 성도들로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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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cue at the Red Sea and the Praise of the Isralite

(Exodus 15:1-18)

* The salvation at the Red Sea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events to save the Israel.

1.The salvation of Israel people makes change their
   status and position.
2. They changed free men from slave people.
Our salvation also makes change our status and position:
the righteous from sinned, a blessed life free from cursed,
the children of God from the salves of Satan

* What event happens in the episode my salvation?

* The praise of Moses and Israel people comes from the
   responding rejoice to their salvation. So do Christians .

1. My praise also comes from my saved experiences.
2. My praise helps my spiritual life to be healthy.
3. Such hymn-centered life can produce victorious Christian life.

* Praise-centered life is the right and duty of Christian life
 1. What about my praise life?
 2. What is my favorite hymn or gospel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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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과 찬양

 

출애굽기 15:1-18
성경 본문은 찬양시가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5, 7-11, 12-16 그리고 결론 부분이 있다. 17-18
1-6
첫부분은 바다에서 멸망당한 애굽의 군대의 파멸을 읊으며,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을 인식하여
그런 엄청난 구원을 이루심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다.
모세는 구원의 하나님을 나의 노래이다라고 고백한다.
7-11
둘째부분은 하나님에 의해 파멸되는 애굽인들의 자세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시는 의인화 화법으로 하나님의 콧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숨소리로 라는 말로 자연세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개입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이스라엘을 쫓아온 애굽인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을 했고,
이스라엘인들을 대적하였으나 하나님의 힘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었다.
모세의 찬양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주님에 대한 찬양의 동기로 내세우며,
당신과 같은 신이 어디 있나이까?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받을 존재는 아무도 없나이다. 라고 찬양으로 고백한다.

12-18
이시는 모세의 찬양에 후대에 삽입된 이스라엘민족의 찬양신앙적인 고백이다.
그들의 역사속에 반복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러한 크신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연속적인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에 의한 그의 오른손으로 놀라운 승리는
그 백성들을 그의 거룩한 처소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임을 언급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다윗시대까지 위협이 되었던 팔레스틴의 백성들,
광야의 노정에서 이스라엘의 행로를 방해했던 에돔과 모압의 주민들을 물리치고,
물론 약속의 땅에 거주하였던 가나안의 주민들 까지 정복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세의 승리의 노래는 그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성소의 장소로서의
곳에 살게 할 것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찬양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이 영원히 그의 백성들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한 구원으로 찬양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 약속의 땅을 준비하며,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을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구절 이해
중요 구절 (15: 2, 11)
핵심 구절(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3절은 구원의 삼 단계를 알려준다.
1. 먼저 구속하시고 (구원하심), 2. 광야 길에서의 인도, 3.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심,
성도의 구원의 삶도 그와 같은 구원의 패턴을 밟고 있는 것이다.
1.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음, 구원을 얻음, 중생의 단계
2. 성도의 생활, 나그네의 길, 성화의 삶,
3. 천국에 들어감, 영화의 단계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이스라엘의 전쟁에 많이 나오는 표현, 여기서도 이스라엘의 승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승리를 강조한다.
15: 8콧김은 여호와의 분노를 가리킨다.
주의 바람은 동풍을 가리킴
15: 13 성결한 처소/ 시내산이나 시온산을 가리키며, 약속의 땅 전체를 가리키기도 함
15:14/ 블레셋거민/ 애굽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민족,
에돔과 모압은/ 광야의 길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맞주친 민족들
가나안 거민/ 블레셋 거민과 함께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이다.
15:16 주의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

본문과 연결되는 사건의 성경본문들
15: 19-21
여기서는 모세의 찬양에 대해 미리암의 화답하는 노래가 담겨있다.
미리암은 성경에서 여선지자라고 불림을 받은 첫 여성이다.
미가는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
중요한 지도자로 여김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당시 모세는 80세이며, 아론은 83세이며,
미리암은 아마 90세 정도 되는 것이다(출 2:4).
여기서 미리암과 여인들은 소고 (일종의 탬버린)를 흔들며 함께 춤을 추며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모세의 찬양에 화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14: 1-4 이스라엘의 야영지
이스라엘은 며칠을 남동쪽으로 내려오며, 에담에서 캠프하였다.
이곳으로 야영을 하게 된 것은 블레셋 땅의 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전쟁의 발생과 그로인한 백성들의 두려움과 돌이킴을 막기위해,
하나님은 애굽의 국경의 바다로 인도하셨다.
14:5-9 애굽의 추격
60만명(정확히 60만 3,550), 장정을 포함한 2 백만명이 빠져나간
애굽은 초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라셈스에서 출발하였다.
애굽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르며, 며칠간 슬픔속에 있다가,
다시 강팍해진 바로를 비롯하여, 화가 난 애굽의
군인들은 이스라엘을 추격하게 되었다.

14:10-22 백성의 울부짖음과 모세의 믿음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니, 이스라엘인들은 당황하며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해주신 것을 잊고,
모세를 저주하며, 자신들을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여기 광야로 데리고 와
죽게 만들었냐고 원망을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과 두려움에 빠져 버렸다.
모세는 원만하는 백성들사이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으며,
그분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바다로 내밀라 하셨다.
하나님은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여, 바다를 둘로 나누게 하셨다.
새벽녁 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라진 바다를 육지처럼 나가게 하셨다.
그 바닷길은 2백만이 지나 갈수 있는 길을 이루어 그들은 신속히 건너갔다.
14: 23-31 애굽의 파멸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려, 바다에 들어갔으나,
하나님께서 전차의 바퀴를 흩트려 뜨리고, 추격을 힘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애굽군대와 직접 자연의 힘으로 싸우시면서,
그들을 다시 합쳐지는 바다물에 모두 함몰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아 애굽의 추격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홍해기적에 대하여
홍해바다는 갈대바다라는 학자도 있으나, 애굽의 국경에 있는 바다로,
거기에는 갈대가 자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불레셋으로 가는 지름길을 피하게 하려
(전쟁을 하면 겁이 생겨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심)
애굽의 국경인 광야 끝으로 인도하심.
그 바다는 2백만명이 지나가는 큰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애굽의 군대가 빠져질 정도의 깊이가 있는 바다였다.
하나님은 밤새껏 동풍을 불게 하여 바다물을 둘로 갈라 세워,
새벽 3-6시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홍해로 건너는 기적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곧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는 다 바다에 몰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진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 진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출애굽의 역사와 홍해의 구출의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에 의한 역사로 이루어 졌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인도로 이집트의 고센에서 살았으나,
요셉이 죽으며, 그의 총리직을 통한 보호를 잃은 후,
400년을 지내는 동안 그들의 종으로 전락하여 노예생활을 하였다.
애굽인들은 그들의 노예들을 강제노동으로 부역하게 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자녀들의 생산에 까지 관여하여 남아를 없애,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출애굽연도는 1446년, 1876년-1446년 430년(갈 3:17)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노예에서 구출받음으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선민으로서의
자유를 의미를 얻은 것을 의미하며 이후에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정체감의 형성에 중요한 신앙적인 동기부여로서의 주요한 사건이며,
민족성의 건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 주제는 성경의 큰 주제로서, 인류의 타락하고 억압된 역사속에
신음하는사람들의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출애굽의 역사속에 홍해의 기적적인 건넘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가장 큰 역사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애굽의 추격은 마치 사람들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헤매이며
끝까지 달려드는 사단의 영향력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통해 노예의 강제노동의 압박에서 해방을 받았으며,
노예신분으로 사는 종살이의 비참함에서의 자유이다.
그들은 출애굽을 통해 자유시민으로 살아가며,
그것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총을 입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원수들과 싸우시고, 그들을 처부셨다.

성도들의 구원은 출애굽의 사건으로서의 구출로
세상의 장망성의 탈출(존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의 떠남)에 비유된다.
그들의 구원은 사단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한다.
어둠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구원받은 것이다(골1: 14).
그들은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불순종의 피조물에서 순종하는 자식으로 살아가게 된다(엡 2:2).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이루어야 한다.
영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교제,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남, 죄의 용서,
정죄 받음에서 해방, 어둠의 영적 세력의 지배를 이기는 권세의 삶
혼으로부터의 구원/ 죄책감에서의 자유, 수치심에서의 자유,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에 대한 자기인식의 확인,
형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의 평안,
육으로부터의 구원/ 영의 지배를 받는 조화로운 삶, 기쁨과 행복을 주는 만족한 삶,
의미와 가치를 이루는 세상적인 일의 열매맺는 삶 등

구원과 찬양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땅한 구원받은 성도의 노래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중에 구원의 노래가 있다.
그 내용은 승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주제를 그들의 찬양의 중심으로 삼았다.
출애굽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반복되는 주제로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상기케 하며,
자신들의 정체감을 새롭게하는 즉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택함을 입은 선민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통해 격려한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세움을 입은 존재들이다(벧전 2:9).
성도들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다.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다.
고로 성도의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찬송은 또한 성도의 입술의 열매이다 (히13: 5).
더 나아가 찬송생활은 구원받은 성도의 성령 충만한 삶의 방식이다(엡 5:18-20).

성도는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인도와 섭리로서의
현재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뿐 아니라,
성도를 영벌에서 영생으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즐거워 하며,
그 분을 기뻐하는 것으로서의 신앙고백적인 노래를 날마다 불러야 할 것이다.


출애굽(홍해기적)의 구원과 찬양 (성경 공부 안에 대한 제안)
* 홍해의 기적의 사건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애굽 군대의 추격, 사면초가의 이스라엘백성, (이 내용은 본문의 앞장의
내용이기에 간단한 질문이나 설명을 하기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의 반응/ 그런 경우에 반원자신들의 반응
2. 모세의 신앙과 기도/ 배울 점은?
3.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생생하게 설명

*. 출애굽의 사건 중에 홍해기적의 사건은 애굽에서의 노예상태와 이스라엘의
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출애굽을 이룬 핵심적인 사건이다.

1. 이스라엘의 구원은 상태와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나의 구원에서 나의 상태와 신분의 변화는 무엇인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저주받은 인생에서 축복된 인생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등 이런 것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은 강제노역, 노예신분, 자유가 없음, 저급한 생활, 노예근성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특권은 무엇인가?

2. 홍해의 기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자신의 일생이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도우심을 받은 것들을 간증으로
나누기를 바랍니다.

나의 간증적인 사건/

나의 간증적인 일이나 참여된 인물/

* 모세의 노래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다.
모세의 찬양은 하나님의 권능의 인식,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롬1:16).

1. 내가 구원받을 때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의 역사는?

2.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신앙적인 표현은 어떠했는가?

3. 찬송에 대한 자신의 이해나 신앙적인 관심은?

4. 입술의 사용에 대해, 자신의 말은 어떠한가?

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 자신의 말과 자신의 삶과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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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

(로마서 10:8-17)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링컨의 고백대로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할 생명의 씨앗으로
그것을 받으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하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
말씀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시다.
그 말씀 (로고스)은 만물의 원리이며, 생명의 가르침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기록된 성경의 주인공이시다.

마틴 루터는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말구유라고 하였다.
성경을 어디를 보아도 거기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담을 수 있으며,
우리의 입술로 전달되고, 알려진다.
그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 들려지게 하는 생명의 진리이며,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말씀은 우리의 심령 안에 믿음을 심는 씨앗과 같다.
고로 성경은 믿음의 책이며, 동시에 생명의 책이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 손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말로 고백하므로 자신의 말에 의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며,
자기인생이 결정이 된다. 예수님을 나의 입술로 즉 나의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시인하는 일로 인하여 죽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시대나,
공산치하에서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우리의 믿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하신 일들을 믿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심이고,
그의 부활하심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승리의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죽음을 이기는 것이며,
인생의 저주받음에서 생명을 얻는 축복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네 마음 속에 주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들을 믿는
마음의 믿음은 그분과의 신뢰에서 나온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는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받는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죄와 죽음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분은 해결 및 해답을 갖고 계신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가 연결된 존재이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건강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첫번째 오는 축복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의 상태이다.
주님을 믿는 인간의 마음은 수치심과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자유를 얻는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상태가 된 인간의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영혼의 만족과 온전한 자아가 이루어 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의 잔은
마음에서 흘러 넘쳐 밖으로 나온다.
우리의 입을 통해 찬양으로, 간증으로, 전도로,
그리고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더 나아가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한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영혼이 경험하고, 육체도 느끼며, 삶을 통해서도 경험한다.
단지 믿어서 나중에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다.
그분의 인도와 섭리를 통해 때로는 훈련을 받고, 고난도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은 신앙 안에서 하기에 쓸모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며, 우리자신을 성숙하게 한다.

성경 말씀 속에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약의 이사야에서 핍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궁핍하거나 곤란하여,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갖지 않는다.
주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 수치심안에서 고통 한다.
그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주님이 변호사가 되어
우리를 영원한 수치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불명예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도 그분을 찾고 나오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푸시는 선물이다.
주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나를 믿는 사람들이
죽음의 길에서 생명을 얻고,
고생스런 인생길을 풍성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믿는 사람은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통하고,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런 것들을 다 이기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해주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살맛이 있는 인생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자라게 하시며,
마음에 조화와 풍성한 만족의 상태에서 살게 한다.
그리고 실제 삶의 필요한 자원들을
언제나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 공급하시며 돕는 손길들을 허락하신다.
고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그분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산다고 시편의 시인처럼 고백한다.

주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며, 하나님은 기도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인생들이 구해달라는 울부짖음에
결코 외면치 아니하시는 능력이 많으신 전능자이시다.
그분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수 있는 준비를 다 해놓으신 분이다.
지금도 그분은 이세상에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려하시며,
우리를 보존하시며, 돌보시며, 인도하신다.
고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필요할 때에 찾으면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분이며,
늘 그 분이 주시는 힘과 지혜와 도움의 손길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속 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라야 즉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그의 구원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등 우상에게 자신의 인생을 도와 달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비참함 속에서 살고 있다.
미래의 갈 길도 모르고, 저주받은 인생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 믿는 이들도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먼저 주님을 알고 믿었던 이들이
가족 중에든지, 혹은 친구나 아니면 전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지나가는 이들이 전도하였든지,
좌우간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고로 자신을 전도한 전도자가 있으므로 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성도들이 전도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직무유기이며,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은 구원얻을 사람들을 전도자를 통해 불러내신다.
그리고 나중에는 구원얻은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전도자로 보냄을 받아,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한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의 발길은 가벼우며,
그들의 도착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의 긴 70년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예언자들을 통해
그 노예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을 날이
곧 다가 오리라는 것을 외치는 예언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좋은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바벨론에서의 노예해방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속에 그는 이스라엘 민중이
가장 애국자로 여기는 예언자로 여김을 받았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야 예언자라 할 만큼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명을 받은 예언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그 예언자는 듣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할 책임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을 전하였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한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그것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결국에는 불순종에 빠져 자신을 향한 구원의 말씀을 놓치게 된다.
때로는 전도자는 전도를 받지 않을 때에 예언자의 탄식처럼 답답하지만
전도해야 할 책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이
그 예언자들이 했던 것처럼 전해야 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시키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다.
이 성경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고 영생,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라고 요한 복음에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내 말은 생명이요, 구원이라 하셨다.
사도 요한은 성경즉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기록한 목적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에 심겨져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한다. 고로 말씀은 믿음을 낳게 하는 메시지이며,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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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로마서 10:8-17

세례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세례를 받을 때에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
글쎄요, 당시 저는 잘 믿는 축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 생활을 잘 합니까?
구원받은 사람 쪽에 끼였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도 폭발 식 전도 방법에서 훈련받은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 당신이 세상을 떠나, 당신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나 간다면,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을 확신합니까?

장례식에 가보면,
어느경우에는 신자들이 오랜 교회 생활을 해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 했던 이들의 장례식에 그 영혼이 떠날 때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몸 상태를 보고 대략 짐작을(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에 초상 예배를 많이 치렀습니다.
그리고 있을 미국에서도 장로님, 안수 집사님의 장례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물음이나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을 갖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성경 로마서는 분명히 구원은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실상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에, 물고기 표시를 합니다.
서로 당시에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 사람은 잡혀가거나 사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끼리 암호로 표시하여 믿습니다.
헬라 어로 물고기의 뜻의 익수스라는 말은
그 앞 글자만 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믿었던 초대 교우들은 믿음은 생명과 바꿀수 도 있는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의 생명을 의지하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신자들을 구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은 자신 행위에 대해 근거를 삼는 율법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며,
자기 중심적인 종교 헌신이나 생활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이 이루신
그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의 길을 믿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죄의 짐을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짐을 해결하여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함을 얻습니다.

복음을 믿는 데에는 그 믿음의 현상이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이나
그리고 이해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생각으로 그 사실들을 믿습니다.
자신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저주받은 자리에서 살리기 위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원을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동이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마음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의 크신 희생에 따르는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사랑을 경험으로 체험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그분이 내리시는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그 사랑에 대한 응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강단이 나무 강단이고
신발을 벗고 단위에 오르는 곳에 있습니다.
거기를 걸레로 닦을 때에 한 없이 주님의 사랑이 감격스러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변소 청소나 교회 탑 꼭대기에 올라가
성탄 츄리를 달 때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즐겁게 그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셋번째 단계에는 의지적인 헌신의 결단이 있는 단계입니다.
저는 주님으로 부더 받은 그 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
자신의 일생을 주님에게 드려야 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신앙에는 의지에서 헌신적인 결단이 나오며,
결단 후에 실질적인 주님에게 헌신하는 삶이시작됩니다.
그후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며,
자신의 생활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간증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는 늘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헌신된 마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님을 위한 헌신의 삶의 지속되었습니다.
믿음은 전인적으로 자신을 주님에게 드리고,
고로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신앙 생활의 단계에 나갈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듯, 지,정,의,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이나 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정의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드리며, 자신의 중심인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갈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의 삶을 삽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그 마음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
무엇보다도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맛봅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해결을 받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면 마음이나 정신적인 문제에서 자유를 얻고, 해결을 받습니다.
과거의 상처받은 일들, 현재 자신의 마음을 누르는 깊은 근심이나
걱정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영혼의 우선순위를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는 일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해결이 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의 중요성이나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압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한 말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
그 영향 아래에 삽니다.
날마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안 된다. 하면 안됩니다.
기쁘게 삽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그들은 주님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생활이나 삶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입니다.
나의 일도, 나의 인생 철학도,
나의 삶도 다 내입에서 나간대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고로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기이한 도움을 체험하는 경험을 통해 간증이 나옵니다.
자기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 동행의 신앙,
즉 자기만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천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
인생의 실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성공하는 이야기,
질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치유의 간증 등은
그것을 듣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과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나님 체험의 자기 고백이며
하나님 신앙한 사람들의 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는 비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생활의 현장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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