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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1
    달란트 비유가 주는 교훈
    목동
  2. 2007/12/25
    성탄의 뉴스와 목자들의 증거
    목동
  3. 2007/12/24
    목자들에게 주는 성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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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12/17
    마리아의 적극적인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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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12/03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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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10/29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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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10/22
    성령으로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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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0/18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삶
    목동
  9. 2007/10/16
    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목동
  10. 2007/10/16
    하나님의 창조명령
    목동

달란트 비유가 주는 교훈

마태 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주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는 데에 있다.
그의 통치를 인정하는 일은 그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세이다.

천국에 대한 비유는 천국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천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에 살펴볼 일이다.
비유는 빗대어 중요한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의 핵심을 살피는 일이다.
천국의 주인과 종과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다.
주인은 맡긴 자이며, 종은 주인이 맡겨준 권한을 잘 활용하는 일이다.
맡겨진 일이며,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으며, 자신에게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작은 천국이다.
그 천국 안에서 즉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효용성을 나타내야 한다.

자기의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다.
그 재능이나 능력이 천부적인 것이나 아니면 후천적으로 얻은 것인지 모르나
그들 각자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정도의 소유물을 받았다.
한 달란트는 상당한 양의 돈이다.
종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다.
주인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종들을 판단하여
그들에게 맞는 능력에 따르는 소유를 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인이며,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대하신다.
그의 종들을 불러 자신의 소유를 맡겼다는 것이다.
그 종들은 주인의 소유를 맡았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천국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이 맡겨주셨다는 청지기 의식이 필요하다.
청지기는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것에 대해 주인의 의식이 필요하며,
셈하는 것을 맡은 자로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자신의 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동안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시간이 있으며,
물질이 있으며, 직분이 있으며, 그의 권한이 있다. 시간은 정해진 때가 있다.
물질은 자기의 소유물로 자기의 것으로 활용한다.
직분은 자기에게 해당하는 역할이 있다. 직분에는 권한이 있다.

재능이나 능력은 맡긴 것을 활용하는 데에 달려 있다.
개발하는 데에 있으며, 장사하는 자는 장사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있다.
자기가 투자하고 노력하는 일에 반드시 댓가가 돌아온다.
노력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 그 결과가 따른다.
그 시간의 비례에 의해 자신이 노력하는 일에 열매를 맺는다.
그 종이 자신의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기 위해 바로 갔다는 말은
주어진 시간에 일을 추진하려는 지혜로운 태도이다.
일을 이루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도 가장 적당한 때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가치 중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때로 자기의 손을 거쳐
이미 기억이나 추억 속에 남아있는 망각의 시간들이다.
미래는 아직 오직 아니한 마음속이나
혹은 자신의 계획 속에 있는 기약 없는 순간들이다.
그 시간들이 자신에게 다가올지, 아니면 않올지 자신은 모른다.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에 맞는 사역은 그 봉사와 사역가운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직책이나
혹은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의 능률을 생각한다.
일의 능률은 일의 효과를 가져온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알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다. 그도 다섯 달란트 받은자와 같이 이익을 남겼다.

이 사람은 자신의 한 달란트에 대한 태도가 주인의 뜻을 모르고,
즉 오해하여 그것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 돈을 사용하여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잃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등한히 한 것이다.

오랫동안 떠나있던 주인이 돌아와 종들이 어떻게 하는 지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주인은 종들에게 주었던 달란트를 셈하려고 하였다.
주인은 자신이 비운 자리에 종들을 신실하게 생각하여
그들에게 그들이 할수 있는 일들을 맡긴 것이다.
종들은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통해 자기 소신껏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통해 받은 것이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인생의 길이를 보낼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 1琉?고 그 시간안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잘 선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유물이 있을 것이다. 지위나 권한이나 혹은 재물등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생산적인 삶을 살 것을 명하신 것이다.
이렇듯 인생은 각자가 하나님과 자신의 삶을 두고 셈을 하는 결산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심판이 있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능력이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충실한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주인이 바라는 것은 받은 달란트로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임을 알고 그 일에 충성하였다.
자기의 재능이나 능력에 걸맞게
충실하게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남기게 된다.
이 종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였다.
자신의 위치나 권한을 활용할 줄 알고 자신의 맡겨진 일에 충성하였다.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하 깊은 관심과
그 나라에서 주어진 현재의 신앙생활에 진력을 다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 모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평가를 받으며,
그 일로 인하여 하늘 나라에서 자신의 위치나 상급유무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종으로서 주인을 위하는 일은 주인의 뜻을 잘 분변하여
그분께서 원하시는 삶과 일들을 그분 앞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

고린도전서에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한 일들중에
어떤 것들은 하늘나라에 까지 남을 수 있는 금 같은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들은 지푸라기처럼 그 일에 대한 평가나 판단의 불 앞에
다 소멸되어 버리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을 생각하며,
그분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자신의 맡겨진 달란트를 활용하여
생산적인 것들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주인은 그 종에 대해 착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착하다는 그의 성품으로나 인격으로 주인 앞에 신실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한 일에 대해 그 종은 적은 일에 대해서도 충실하여
작은 일에도 충실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달란트는 상당한 양의 돈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런 돈들도 하나님나라에서는 작은 것에 불과하다.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신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을 상급이나 기업은 놀라운 것들로 이루어 질것이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나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의 차이를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충실히 하여, 생산적인 것들을 남겼는 가를 보신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보다 적게 받은 두 달란트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여
자기에게 맞는 능력을 따라 이익을 남겼다.
주인은 똑같이 그 둘을 칭찬하셨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잘 몰랐고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겨준 주인의 의도를 오해하였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생의 원리를 모르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무가치하게 생각하거나,
또한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허비한 시간들을 보내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받은 것들,
즉 시간이나 지위나 권한이나 소유물 등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주인이 원하는 소중한 일들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의 육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부한 재물을 모았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투자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그의 생명은 끝나 지옥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운데에 젊고 유망하여
재물이 있는 부한 이가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에
인생의 보다 나은 가치를 얻는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결국에는 보이는 세상의 없어질 재물에 마음이 빼앗겨 주님을 떠나게 되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등 종교지도자들도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였지만
자신들은 자신중심의 의에 빠져 자신을 구원할
하나님나라에 이르는 복음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종교적인 공로주의에 빠져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두려워하여, 주인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 종의 주인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그 종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대한 잘못된 소유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것을 활용하지 않고, 그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 ?
?상을 그의 뜻에 의해 창조하셨다.
그리고 만물은 그분의 뜻안에서 모든 필요을 따라 세움을 입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은 쓸모있는 존재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익한 일에 쓰이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종에게 있어,
그 종을 유익한 존재로 만드는데 필요한 재화 가치인 것이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므로
그들은 주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을 활용하지 못하므로
게으르고 쓸모 없으며,
악하기 까지 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어리석은 한 달란트 자의 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인생들과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결국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로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신은 자기중심에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우상주의에 근거한 허수아비 신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은 어리석게 그런 우상주의나 허무한 무신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종은 주인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 인간세계의 보편적인 원리이며,
자연세계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도 적용되어지는 원리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것이다.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계획과 실행 없이는 자신 앞에 발전하는 날들이 없을 것이며,
중요한 것이나 귀한 것을 위한 투자 없이는 결코 그런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없다.

주인은 그 종이 한달란트를
차라리 은행업을 하는 이들에게 맡겼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면서
자기의 그 원금을 돈놀이 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그 달란트의 효용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주인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 종들보다도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그로 인한 이자를 받을 것을 생각하였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책망하였다.
능률적이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이익을 남기는 사람들에게 불공평하지만 주어진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므로 한 달란트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람에게
주인은 매몰차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오히려 많은 갖고 있는 열 달란트를 갖고 있는 그 종에게 더 주었다.
마치 빈익빈 부익부의 모순된 논리처럼 들리지 모르나,
없는 사람은 더 궁핍한 가운데에 있으며, 가진 자에게 더 많이 주어지는 것 같으나,
책임을 맡기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 달란트의 효용가치를 높이는 종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주인의 뜻은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충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도 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충실하게 일을 하며,
그 달란트의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천국에 상을 쌓아가는 원리도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그 나라를 위해 투자하며 수고한 이들에게는
더 큰 상급과 높은 지위나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러한 보상받은 권리가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를 늘리고 물질을 모은다.
그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영원한 가치와 보장된 상급을 위해
더 많은 수고와 하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순교를 통해
영원한 상급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는 일처럼
숨어서 은밀한 중에 더 많은 하늘나라의 자신의 창고에 쌓아놓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익한 사람 즉 쓸모 없는 사람은 실패하는 사람이나, 실수하는 사람보다 낫지 않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하다가 실수를 하거나
일을 하면서도 능률적이지 않아 낭비의 결과를 가져온 경우보다 못하다.
그 한 달란트을 받은 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하지 않는 게으른 악함은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앞에서 내어 쫓김을 당했다.
한달란트를 받은 종은 이 비유에서 왜 쫓김을 받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천국을 들어가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일이라 하겠다.
그만큼 천국을 위해서, 혹은 주인이 맡겨준 그 일이나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는 일이 자신이 버림받은 것처럼
심각하고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천국행 티겟을 따서 천국으로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들은
이 비유에서 주는 그 하늘나라의 원리에 신중히 생각하여
자신의 삶을 살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보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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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뉴스와 목자들의 증거

누가 2: 8-20

목자들에게 알려진 구주 탄생은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은 모든 인생들에게 미칩니다.
구주 탄생은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 기적은 인류를 위하고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매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뉴스는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주는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증인으로서의 목자들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경험한 진리의 메시지는
그들을 통하여 선포하는 진리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듣고 본 것들을 즉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웃에게 좋은 소식으로 알려집니다.
2: 8-14
1.목자들에게 알려진 천사들의 메시지
목자들의 직업과 삶은 성전에 바쳐질 양들을 위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양을 돌보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일들을,
악한 동물들의 습격과 도적떼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합니다.
지팡이와 막대기의 손놀림, 물 맷돌의 무기 사용등을 알고 익혀야 합니다.
목자들은 자기의 일에 충실한 직업인들입니다.
그 목자들은 세종류의 목자들이 있는데, 첫번째는 유목인 목자들이 있으며,
두번쨰는 한곳에 머물며 돌보는 상주하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인의 소유인 목장에서 양들을 돌보는 일들을 합니다.

그들은 천민의 신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종교적인 일들을 돕는 봉사와 양들을 치는 목동의 위치입니다.
평범한 직업인들의 찬양과 자기 직무에 충실한 직업인으로
양들을 방목하는 성전에 바칠 양들을 기르는 업을 가진 그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의 사건을 경험하는 선택 받은 그들은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자신의 일에 묵묵히 하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의 기적의 사건을 경험합니다.
세상에 있는 그들에게 신령한 눈이 열리고 하늘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도에 달나라에 가는 일들은 우주인들이 달을 걸었던 일들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는 일은 주변에서 비일비재있습니다.
최근에는 서해안 태안앞바다에 기름이 유출된 일등입니다.

올해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뉴스는 무엇입니까?
대통령 당선과 새 정부의 출현이죠,
반면에 충격적이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은 한 한인학생의
총기 난동으로 수십 명을 죽인 일들일 것입니다.
올해에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들 중에 하나가 쏘지마 였습니다.

이 목자들을 통해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인 상황을 알려주고,
그분의 탄생의 사실을 널리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역사와 인간 세계의 반응
천사들의 알림은 하늘의 소식을 알리며, 그 소식은 천상의 기이한 현상으로
구주탄생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알렸습니다.
천사들과 인간들의 합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 나타나고 알려집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일들이 역사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심부름꾼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에 대한 묵상에서,
구주 탄생의 소식은 인류 구원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의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들 자신이 구원받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것은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대가로 얻을 것이 아니기에, 그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선물을 받음으로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을 고마워 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이루어 놓으시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주 탄생의 뉴스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주며
인간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소식입니다.

땅에서는 평화라는 메시지를 묵상하면,
구주께서 오시기 전의 이 땅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평화가 깨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세계만을 구축하여 살려고 합니다.
그것으로는 자신들의 문제만 더 많아질 뿐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불화는 모든 인생들의 삶의 현장을 부조화롭게 만들었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에 대해 왜곡된 이메지와
그리고 그 이메지에서 쌓아놓은 자신의 모든 것들은 공중누각에 불과합니다.
외부의 도전이나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어,
인생들은 마음의 병을 얻고 육체의 질병을 얻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근본적인 영성은 인간이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죄인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목자들은 하늘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나중에 메신저의 역할 즉 증인으로서의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15-20
2. 목자들의 방문과 증거
목자들의 반응은 순종과 신속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들은 대로 본대로 베들레헴까지 가는 여행길을 마다 않고,
그곳에 가서 구주 탄생의 현장의 목격자로 자신들의 경험한 일들을 증거합니다.

예루살렘 근방의 들녁에서 방목하던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양들을 목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그 두려움은 벅찬 기쁨으로 바뀌어 지면서
이 놀라운 소식을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불이 났을 때에,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야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관심으로 발전합니다.
호기심은 동기 유발을 합니다.
공부에도 호기심으로 혹은 재미있는 동기유발로 하면 잘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호기심의 동기유발은 효과적이며, 신선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일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목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그 메시지의 실현하는 현장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을 읽을 때에 소설책을 읽듯이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꾸 보고 싶고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신속한 응답으로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광경에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 감격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날마다 나에게 감격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감격으로 드리는 예배, 감격으로 드리는 찬양, 감격으로 드리는 헌신등입니다.
감격속에서 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등은
우리의 영혼을 흔들며, 우리의 영성을 높여 줍니다.

목자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움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의 역사는
일상의 우리의 삶을 감격과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그가 하시는 영적인 역사는 기이하며,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일상은 우리를 권태롭게 합니다.
영적인 일은 일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일은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게 합니다.
육체의 일이나 세상일은 우리를 자주 슬럼프에 빠뜨립니다.
영적인 일은 우리를 마음을 상기시켜주고, 우리의 생각을 높여주며,
우리의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상쾌하게 합니다.

사건에 대한 목격은 일을 자세히 알아보려는 심정이 있어서,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대합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즉 듣고 본 이야기들을 확인하기 위해
베들레헴 지경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놀라운 뉴스가 실제 일어난 현장을 보고,
다시금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뉴스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세계는 우리에게 일상에서 기이한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의 세계를 들어가면, 일상에서 사는 우리를 감격스럽게 합니다.
성경을 통해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봅니다.
목자들이 경험한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기록된 메시지로 알려지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혹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지를 재해석하여
알려주는 설교의 메시지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이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구원의 역사, 기적의 역사, 섭리의 역사,
하나님 개입의 역사를 봅니다. 성경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일어납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놀라운 경험을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그 사건의 목격자로 증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전하여 준 베들레헴의 구주 탄생의 뉴스를 확인하고,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 광명스런 천상의 천사들의 대합창을 들은
놀라운 광경의 목격자로서 목자들은 자신의 듣고 본 것들을 증거하였습니다.
확인하고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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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에게 주는 성탄의 의미

누가 2:8-20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 가니라

주님의 천군 천사들은 천상에서 선포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려 세상에 나타납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주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목자들에게 비치는 하늘의 영광에 그들은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의 세계에 나타날 때에,
그들을 압도하는 권능과 위엄이 나타납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천사들의 임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임하시어,
위엄을 나타내시자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하는 자세로 변합니다.

뉴스는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뉴스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뉴스는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주는 뉴스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보다는 사람들의 문제와 현상을 알려주어,
복잡한 인간 세상의 문제들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일이 십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천사가 이르는 하늘의 소식은 사람들을 살리는 그들에게는
정말 필요하고 놀라운 뉴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들리는 뉴스는 절망과 탄식을 주는 소식이 많지만,
하늘의 소식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뉴스는 충격적인 뉴스에서부터 놀라운 뉴스도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의 탄생의 소식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치는 빅뉴스입니다.
그들 각자에게 영향을 주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것은 그들 각 사람이 그것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메시아의 탄생의 소식입니다.

그 베들레헴 지경에, 즉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자기 직무에 충실한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다가옵니다.
목자들은 밤이슬을 맞으며, 성전에 바쳐질 양무리 들을 위해 목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양들과 함께 밤을 지새며, 그들을 돌봅니다.
목자들 자신의 일들은 양을 보호하고 돌보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보호처와 피난처가 되어 양들이 쉴 수 있고,
풍부한 풀과 시원한 물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좋은 환경들을 제공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직업인으로서 천시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양의 일을 묵묵히 책임지며,
양들을 돌보는 모든 일과 규정에 대해 순종하며,
자기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동네에 태어나시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예언의 약속에 의해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구세주는 메시아로 온 우주의 구원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다윗의 도시는 시온성이 있는 곳이며, 다윗의 고향입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에 의해 그곳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메시아 왕국의 임하시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구주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사,
인간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 각자를 위한 성탄, 즉 구주의 탄생 소식은
우리들 각자에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각 사람이 구주 예수님을 듣고, 그분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분을 구주로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죄와 사망의 늪 속에 있는 세상의 모든 생로병사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의 즐거움과
그 구원의 결과가 주는 놀라운 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준비해 놓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와 권한을 얻는 축복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생, 가정이나, 자녀나, 하는 일이나, 등
모든 것으로부터의 문제해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 널려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 오셨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그분에게 나아와
모든 인생의 그 문제들을 해결 받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우리를 위한 표적입니다.
그의 오심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기적의 입니다.
구주의 탄생은 인간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들어오시는 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구원하며,
역사의 흐름을 갈라놓은 사건입니다. 구주 이전의 인간의 절망의 때와
그가 오신 이후의 인간 구원을 위한 희망의 시간들로 나뉩니다.

구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는 말구유, 여물통에 태어나 뉘었습니다.
인간들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인간들의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려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에 임하시는 구주의 성탄과 자신의 마음과
인생의 중심에 오시는 구주의 임하심은 놀라운 의미를 담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표적으로서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적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구주의 탄생의 기적은 온 세상을 멸망에서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사역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위해 만세 전부터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세월들을 보내며,
자신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통해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대로 오늘 구주의 탄생으로 그 약속의 실천을 이루셨습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하늘의 현상은 온 천상의 천군들의 집합의 영광송을 보여줍니다.
그 기이한 현상은 이 사건의 중대함과 귀중함을 알려줍니다.
고로 그 구주 탄생의 사건은 온 우주에 미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간 세상의 구원 역사를 이룩하시는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세상에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일입니다.

이 영광송은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인류가 역사 속에서 알려야 할 영원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끊어진 거룩한 하늘과 타락한 땅을 잇대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구주 탄생의 소식은 인류 구원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의 밑거름이 됩니다.
자신이 구원받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대가로 얻을 것이 아니기에, 그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선물을 받음으로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을 고마워 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이루어 놓으시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주 탄생의 뉴스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주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땅에서는 평화/ 이 땅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평화가 깨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세계만을 구축하여 살려고 합니다.
그것으로는 자신들의 문제만 더 많아질 뿐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불화는 모든 인생들의 삶의 현장을 부조화롭게 만들었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에 대해 왜곡된 이메지와
그리고 그 이메지에서 쌓아놓은 자신의 모든 것들은 공중누각에 불과합니다.
외부의 도전이나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어,
인생들은 마음의 병을 얻고 육체의 질병을 얻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근본적인 영성은 인간이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죄인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주 탄생의 소식을 알리며,
또한 그 소식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다시 천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목자들은 그들의 받은 소식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 주변 들판에서 방목하다가, 일손을 거두고,
구주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으로 향하였습니다.
서로 그들은 그 놀라운 뉴스에 압도되어 그 소식의 현장을 보러 갔습니다.

놀라운 광경과 메시지의 중대함에 그들의 마음과 몸을 재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속히 베들레헴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구주가 아기로 태어나신 곳을 찾아갔을 까요.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을 인도하는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좇아,
베들레헴 지역의 한 마구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동물들이 잠자며, 먹고 쉬는 마구간에서
그리고 그 마구간에 놓여있는 그 동물들의 한 밥통 안에 누이신 아기를
비춰주는 빛을 따라 그들은 그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알려주는 천사들의 뉴스의 정보에 따라 아기에 대해,
살펴보며, 하늘의 천상에서 들려온 놀라운 광경과
메시지와 영광송에 대해 증거하였습니다.

주변에 있는 구주 탄생을 경배하는 이들 모두에게

목자들은 자신들이 듣고 본 내용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전하는 뉴스는 그 광경의 놀람과 중대함으로 인한 그들의 증거는

듣는 이들의 마음에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듯 구주의 탄생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기이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그 아기에 대하여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받은 천사의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몸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아기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마음에 되새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이루신 기이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이루신 메시지들을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에 와 닿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할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어, 자신들을 살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정보가 있기에, 늘 마음에 되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는 것은 늘 그 말씀의 내용을
자신들의 머리의 기억 창고에서 다시 끄집어 내어,
마음과 삶에 영향을 주는 정보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살아서
자신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구주 탄생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 중에 목자들의 역할은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며,
그 증거의 일들을 통해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주 탄생의 뉴스를 전하며,
그 뉴스와 그 뉴스의 전달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합니다.
목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북받쳐 하나님을 흠송하며, 찬미하며,
그리고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증인의 삶이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이야기들을 경험하면서,
그 기적이 주는 사건의 정보와 그 기적의 의미들을 나누는 일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듣고 본 대로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기적의 일들을 이웃에게 알려주는 것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자신들과 남들에게 기이함과 놀라움을 주는
기쁨을 주는 축복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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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적극적인 신앙

누가 복음 1:26-38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미리 알리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셔서
다윗 왕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을 알려주는 소식의 천사장 입니다.
그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의 몸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8-38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와의 대화
천사: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마리아: 반응(놀라고 당황한 마리아)천사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 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생들이 기뻐해야 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시는
메시아의 역사를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마리아에 대한 인상은 그녀가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입은 여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 메시아를 잉태하는 여인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이 그녀와 함께 하시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나온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인간들 세계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복은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지십니다.

천사: 마리아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놀라운 은혜를 내리셨다.
의외의 놀라운 소식에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축복을 내리십니다.
너는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마리아는 그녀의 몸을 통해 예수님을 낳게 되는 메시아 잉태의 대 역사를 이룹니다.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며 그의 통치가 영원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대 역사가 한 여인의 몸을 통해서 시작이 된다는 것은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의 역사는
작은 한 인간의 겸손과 순종과 적극적인 믿음에 의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하지만 처녀인 내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천사에게 대답하였습니다.
1.마리아는 묵상하는 신앙을 가졌으며,
그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갑작스런 섭리를 대했습니다.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잠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은혜를 입은 자여, 주님이 함께 하심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명에는 어떤 계획이 있는 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성적인 신앙에서 출발하여, 확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해하는 신앙을 거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즉 하나님의 섭리가 갑자기 자신에게 임했을 때에 당황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 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나, 기이한 일들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수태고지는 마리아에게만 일어나지 않았고, 사가랴 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사가랴는 세례요한의 아버지로 그는 제사장으로 백성들의 지도자로
종교적으로 혹은 영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부인인 엘리사벳과 더불어 늘 자식 없는 공허함과 답답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천사의 출현이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가랴는 어리둥절하며, 그리고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해 버렸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기도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않았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를 받을 만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에 대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나타나신 계시와 섭리를 대할 때에 깊이 묵상하는 믿음의 태도를 가졌습니다.
곰곰이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그녀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의 인사나 그의 메시지를 그녀는 온몸으로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미칠 하나님의 예언을 멸시치 않았습니다.
처녀인 마리아는 어떻게 그 일이 이룰지를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의심하는 태도로 의문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만세 전에 세우시며, 그의 계획은 빈틈없이 이루어 집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아기를 갖게 하는 동정녀탄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마리아의 살아있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큰 논쟁을 줄 수 있는 동정녀탄생의 근거가 되는 내용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 믿음은 중요한 우리의 믿음의 사실적인 내용입니다.

아기예수 수태고지에 알려진 천사의 메시지에, 당황하는 마리아는 질문을 던지면서,
어떻게 그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의문을 확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그의 뜻을 묻는 질문을 합니다.

거기에는 받아들일만한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메시지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태 1:18-25에 예수님은
인간아버지가 없는 여인의 몸에서 난 분입니다.
그는 여인의 후손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남자의 후손입니다.
오직 그만이 여인의 후손입니다.
2.우리가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은 특별하게 이세상에 오신 것을 믿습니다.
고로 동정녀 탄생의 기사는 우리의 믿음의 중요한 사실적인 역사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1.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을 여인의 후손으로 알려주며,
그만이 인간의 혈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2.동정녀탄생은 우리의 믿음의 결정을 통해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천사: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영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는 독생자이신 메시야는 성령을 통해
이세상에 오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십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가졌다.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임신한 지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
천사는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통해,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드일 자세를 갖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석녀로 거의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든 여인이었으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녀가 세례 요한을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이미 엘리사벳은 임신한지 6개월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고 있음을 확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마리아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긍정적인 생각이나 올바른 인생관에서 나옵니다.
매사에 자신을 바르게 보는 사람들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주어진 삶이나 일에 있어서, 좋은 생각을 갖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적극적인 인생관은 살아있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그녀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나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인간의 영혼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예언입니다.
그 약속이 말씀을 받아들인 그녀에게 믿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할 때에,
그 내용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이루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약속하신 바대로 그대로 성취 됩니다.
그분은 창조의 하나님으로 그분께서 명하신 바를 다 이루어 냅니다.
2. 예언하신 것을 이루어 내십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당황하는 중에도
그녀는 묵상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대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예언을 온 몸으로 받았습니다.
잉태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자신의 약혼한 생활이나,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기대하신 바를 따르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신앙입니다.

2.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
순종하는 신앙/ 그녀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실 일을 따르는 순종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녀는 약혼한 사이로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되는 선언은
자신의 정혼함이 파혼을 당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여인에게
가하는 사형을 당하는 처지에 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결연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리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시키는 일이면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절대적인 복종의 믿음입니다.
이 마리아의 믿음은 예수님의 평생의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따르는 모습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모험과 위험이 따르는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혼한 사이는 1년 기간을 결혼상대로 묶어줍니다.
그 관계는 이혼에 의해 그 관계가 풀어집니다.
약혼한 남자가 죽을 경우에는 그 여인은 과부로 간주합니다.
처녀이지만, 과부로 여깁니다. 그리고 만일 그 관계안에 있을 때에,
불륜적인 일이나 마리아에게 일어날 정혼한 사람과의외에 임신하는 일이 일어나면
그녀는 가문에서 추방이 되며,
주민들에게 돌로 맞아죽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하는데도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고로 마리아의 순종은 매우 희생적이며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나의 뜻을 이루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자발적이며, 순종하는 자세로 그녀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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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

마가 1:1-8)

강림절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절기이다.
강림절에 주시는 메시지로 세례요한의 선구자에 대한 삶과 그의 메시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세례요한이 외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메시지중에
선포된 주님의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주님의 길은 은혜와 진리의 길이다.
저주받은 인생들이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어둠에 처해있는 인생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알려주셨다.

주님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미움과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에 그는 사랑으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버리시며, 희생을 통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그의 사랑의 정신이며, 삶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길을 배운다.

주님의 길은 생명과 구원의 길이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의 길은 인간구원의 길이다. 그를 통해 인간 구원을 이루며,
죄 있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주셨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란?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주님을 오심은 준비하여, 주님이 우리의 삶에 행하실 길을 또한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 있지만, 그 선구자는 앞섰지만, 뒤에 오시는 이를 위해 사는 삶이다.
세례요한은 사명자로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예수님보다 앞서지 않았고,
예수님의 신발끈도 풀기 힘들다는 철저히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나는 망하고 주님은 흥하여야 하리라는 원칙으로 살았다.

그는 마지막 예언자였다. 오랫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예언자였다.
마지막 구약성경의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 들었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수 백년간, 하늘로부터 들려오지 않아,
백성들이 갈 바를 모르고, 희망이 없는 막연한 세월을 살고 있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나에게 하나님이 주어지지 않는 세월들은 방황하며 무의미한 삶이다.
그런 가운데에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예언자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곳이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곳인 광야에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소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얻었다.

세상의 복잡한 곳에서 우리의 영혼은 혼란 가운데에 있다.
세상에서 분주하게 쏟아내는 여러가지 소리들은
우리 자신들에게 때로는 실망을 주고, 자신들을 어리석게 만들고,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며,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관심을 세상에 빠지도록 하는 소리들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영혼이 답답해 하며, 때로는 죽어 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인생이 복이 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주일날이라도 교회에 와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내 영혼이 산다.
주일날 듣는 메시지는 자신의 영혼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중대한 메시지이다.
이것을 한귀로 듣고 흘릴수 없는 고귀한 하늘의 소리인 것이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란?
먼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구별된 삶을 살았다.
그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썼다.
요즘 사람들은 케이블 텔레비전과 인터넷등,각종 게임등 엔터테이트먼트의 도구들로
모두의 관심을 빼앗는 세상의 소리로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그런데, 주일날 갖고 다니는 성경은 집 어느 한구석에 있지만,
개인적으로 성경을 들고 읽거나, 공부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의 사귐도 중요하지만,
그는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요즘은 기도하는 시간은 갖기 힘드는데,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으며,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아이들을 돌보고, 사업을 해야지, 공부를 해야지,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일들이 널려있다.
이세상은 너무 우리의 마음의 관심을 빼앗가는 일들이 너무 많다.
옛날에는 6일을 일을 해도, 보통으로 살았는데,
요즘은 주 5일 하고도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어 버린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에, 토요일이 은근히 즐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진지한 일들,
즉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몸의 건강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이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구별된 삶이란, 거룩한 생활이다.
과거 속담에 백로야 까마귀노는 곳에 가지말라, 까마귀의 구린내나는 것들에 영향을 받을 까한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기 정체감을 살아갈 때에
오히려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세상에 안 좋은 세태에 노출되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성은 힘을 잃어가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윤리적으로 더러운 것과 어두운 것은 비슷하다.
어둠 속에서 죄를 짓기 쉬우며,
사람들이 아무도 못 본다고 할 때에 죄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보시지 않겠지 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내 의식에서 사라지고, 내 눈에 안 보이면,
그때부터 악이 들어오는 것이며, 죄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세상과 구별되며,
자신에게 더러운 일을 하게 하는 죄를 짓는 생활에서 구별되며,
사단의 속임수로 빠져가는 악한 생활에서 구별되며,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타락과 구별되어야 한다.

준비하는 삶은 사명있는 삶이다.
세례 요한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었다. 그래서 그는 목적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주님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목적을 이루는 일을 하였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백성들에게 주님을 맞을 준비를 시켰다.
회개는 인간의 죄를 고치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마음을 고치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방법대로 사는 데서 하나님의 길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사명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생활이다.
열심으로 사는 것이다. 세례요한 은 열심으로 외쳤다.
온 유대 마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요단강에서 외쳤는데, 온 곳에서 백성들이 그에게로 나왔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사명을 따라 사는 생활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생의 가치는 자기본분을 찾아 살 때에, 이루어 진다.
가문을 빛낼, 자신을 빛낼, 가치는 인생을 고귀하게 한다.
이 일을 하는 데 나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물어야 할 질문이지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냐 하는 질문도 해야 할 일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일,
요즘은 나의 필요에 의해 부모를 모시는 경우가 많으나,
과거에는 자식의 도리,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녀로서의 도리로,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예를 들자면 우리의 선배들이 과거 일제 침략시대에는
애국하는 일, 즉 특별히 독립 운동하는 명분이나
사명에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얻고 살아갔었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하는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례요한 그는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기 위해
그는 주님과 함께 하는 광야의 생활을 마다 하지 않고,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또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였다.
그는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을 통해 백성들을 준비시켜,
앞으로 오실 주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일을 듣는 무리들에게 맞이하게 하였다.
물로 세례를 베풀며,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케 한다.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사람의 마음을 고쳐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자세를 갖게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고쳐 먹어야 그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내 마음이 주님에게 열려있어야 주님을 맞이한다.
내 마음이 변하므로, 은혜에 열려있고, 말씀에 열려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회개는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의 변화이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시도록
우리는 마음의 준비와 생활에서 주님을 모실 생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의 도움을 구해야 하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시도록 하려면 자리를 마련해드려야 한다.
모든 계획가운데에 우리의 지도자, 선생님,
그리고 우리의 일에 대해 주관자, 혹은 능력자로 모셔야 한다.

세례요한은 또한 예수님에 대해, 다음가 같은 고백적인 내용을 선포하였다.
그는 나 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신다고 외치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였다.
주님은 나(인간) 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위대해 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마음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내 마음의 주인이며,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의 주님이시기를 원하신다.

세례요한은 오시는 주님에 대해 그분의 신발끈도 푸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분라고 고백한다.
그 주님은 나의 삶의 중심에서 높임을 받아야 할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인의 구주이이시다라는 의미가 있다.

평소에 준비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무의미하지 않다.
시간을 준비하고 (시간약속에 대해)
일을 준비하고 (일의 추진과 성취를 위해)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의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현재에 준비를 잘하는 삶은 미래가 보장된다.
이렇게 사는 태도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일이다.

세가지 중요한 준비하는 것들이란,
바로 자신이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고,
또한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사는 것이다.

고로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행하는 구체적인 준비의 삶은
1, 영혼을 위해서 사는 삶
2. 내일을 위해 사는 삶
3. 주님을 위해 사는 삶 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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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때

전도서 11:9-12:8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짐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라
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 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 깨어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청년의 날은 혈기 왕성한 인생의 날들이다.
마음껏 자신을 펼 수 있는 젊음이 있고, 힘이 있다. 시간도 있으며, 명석한 두뇌도 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젊은 날을 즐기며, 그 날들을 만끽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젊은 날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기뻐하며,
그 날들에 하고 싶은 것들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된다.
그리고는 젊음의 자유가 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린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즉흥적이며, 찰나적인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그것에 온통 자신이 빠져버린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절 감각을 잃어버리면,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일에 몰두하게 되어
자신을 방종으로 혹은 방탕으로 몰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슬쩍 곁길로 빠져나가는 어둠의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며, 퇴보하기도 한다.
그런 일에 반복하다 보면 자신을 패인으로 만들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그 후에 삶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가치 구조에 자신을 내 맡기게 된다.
결국 그러다가 후회하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인생의 일에 대해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결산을 하며, 셈을 하여, 평가하고 심판하신다.

방종과 방탕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면, 자신 안에 깊은 근심과
절망감을 뿌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기 염려나 혹은 방종이나 방탕 하는 일에 대한 근심이 사람을 사로 잡을 때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결국 마음과 몸이 모두가 병이 든다.
그리고는 인생의 절망에 이르는 병에 걸려 버린다.
방종이나 방탕은 인생의 삶을 악으로 치닫게 하여,
그 어둠의 영향 아래에 머물러 버리고, 선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악한 인생의 길에서 자신을 마구 더럽히며 악인의 냄새를 품기며
헛된 일에 지절대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이나 젊은이 때를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깨끗한 그릇에 더러운 것을 담기도 쉬우며,
백지와 같은 자신의 속에 마구 주변의 좋지 않은 영향들에 쉽게 노출되어
자기 조절이나 자기 방어 없이 다가가다가는
여지없이 더럽고 악한 일에 물들고 마는 것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신을 세우며, 자신을 조절하며,
자기를 발전시킬 것 인가를 늘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단도리 할 수 있는 뜻있는 일에 자신을 몰입하여 지내는 것이 좋다.
뜻있는 일이란 어떤 일이겠는가?
자신을 바로 세워 줄 수 있는 원칙이나 가치관을 좇아가는 일이나.
혹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올바르게 제시하여
가르쳐주는 삶의 원리들을 따르는 것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일들에 하게 하는 것인가?
인생에 대해 가르쳐 주고 인생을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진리를 찾아가는 철학의 여행을 나서는 가 아니면,
인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스승을 찾아가는 것인가?

청년의 때란 방종하기 쉬운 때이며 방황하기 좋은 시절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곤고하다는 느낌이나
체험을 경험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곤고한 일들이 무엇인가?
인생이 곤란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당하면 황당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미혼모가 아이를 낳는 다든지,
애송이 청년이 문란한 성적인 유혹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 되는 일이라든지,
그리고 주변의 어둠의 유혹에 어리석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신의 몸도 감당할 수 없는 마약에 빠지는 일이라든지 등등
자신을 망치게 하는 일들이 바로 인생이 곤고해지는 것들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활기찬 젊은 날의 아름답고 살만한 인생이 겨우 지탱하며
허우적대는 삼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도 결국 먼저 걸어간 후회하는 인생들의 발자취를 밟게 되어
정처 없이 이리저리 쓰러지며 겨우 생존하는 삶을 연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오도록 젊은 인생들이 아무것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안타깝고 허무하며, 불행한 젊은 인생의 후회막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을 있게 한 나의 인생의 주인에게로 가야 하겠다.
나를 흙으로 빗었으며, 그의 신으로 조성한 몸 안에 있는
그 고구한 영혼의 절규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 까?

해가 지고 달도 빛을 잃을 날들이 다가온다. 인생도 종말을 향해 달려가며,
역사도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다만 같은 방향으로만 달려갈 뿐이다.
시작과 더불어 종착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비가 온 뒤에 그 비를 몰고 온 구름이 더 자신의 삶의 주변을 덮기 전에,
구름이 모이면 비가 내리듯, 인생의 모든 일들이 다 자기가 뿌리대로 거두며,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 움직여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에 겪는 일로 인하여 과거의 인생의 업보를 탓하기 전에,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의 날들을 바라보는
인생의 혜한을 열고 종말을 향해 줄달음하는
인생의 시간이나 역사의 경주의 도상에서, 이 헛된(빨리 지나가기에)
시간의 찰나에 있는 자신을 건져줄 구원주를 만나기를 힘쓰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곤고한 날에는 자신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으며,
자신을 지탱하는 것들이 힘을 잃게 된다.
평소에 힘을 자랑하며 지혜를 내세우며,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재능이나 명예, 권력, 혹은 소유물) 의지하였는데,
그런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곤고한 날들이 자신의 삶에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는 힘있는 것들이 다 무너져 자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인생이 경험하는 일들 중에 맷돌질하듯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들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갈고 으깨어 부수어 뜨려 자신의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언제나 좋은 것만을 담는 것이 아니다.

언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자기 인생의 허망하다고 느낌이 올 때인데,
그 때는 무엇을 해도 허전하고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겪을 때 일 것이다.
전능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자기 한계에 깊이 느낄 때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주변에 가까이 계시다고 느낄 때에
그리고 인생의 헛됨을 알기 전 젊은 날에
그리고 나이 들어서 기력이 쇠할 때에
힘의 근원을 잃을 때에 인생의 힘의 원천이신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인생의 삶이 다하는 죽는 순간에 그분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것은 행복한 인생의 종말이다.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그분이 나의 창조주이시니,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 창조주이시다.
그분을 만나야 인생의 길이 보인다. 그분을 만나면, 인생 자기를 구원하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가 그분이 영이 신고로 기도하면서 그분을 만나고 경험한다.
그리고 인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그분과의 만남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분의 도움을 구하므로 자연스럽게 그분을 만난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에 영혼의 창을 열고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의 추억은? 인생이 즐겁다, 살만하다, 힘이 있다, 젊음이 아름답다.
그리고 마음껏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명심할 것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시간과 젊음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평가와 판단을 받으며,
나중에는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 중에 경솔한 젊은이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다.
그는 자유와 독립심을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나가 살아도 될만한 인물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청구하여,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외국에 가서 살았으나,
결국 자신의 소유물을 다 허비하고,
결국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을 처지인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되었다.
그는 실패하는 젊은이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성경은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며,
인생의 쓴 교훈들을 언급하고 있다.
인생이 헛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는 인생이 짧다는 것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많으나 그것을 다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직 나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다 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게 하는 주어진 제한된 자기 시간이
마구 흘러가기에 흐르는 물처럼 빨리 지나간다.
고로 인생은 가치 있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으며,
결국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기에,
흙만 바라보고 살아서는 헛된 삶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의 헛됨 에서 구원받을 길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러면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1. 그가 창조주이시다.
2. 그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다. 3. 그분에게 다가가 그분을 찾고 구하라.
그리고 그분을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 중에 젊음에 대해 예수님의 복음이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영원한 젊은이 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젊은 날에 이루어 졌다.
33세에 다 이루었다. 그 사역 중에 십자가와 죽으심 외에
예수님의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신 사역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셨다.
그것은 고귀한 젊은이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사역을 하셨다.
먼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 그 죽은 아들은 독자였다.
그 과부이야기는 누가복음 7:12-16에 있다.
또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그 딸도 무남독녀로 아버지에게는 귀한 딸이었는데, 죽음 일보 직후까지 갖다.
예수님의 가까운 이웃이었던 나사로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3남매의 가정에 가장인데 그도 젊은 날에 죽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싱싱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과부의 아들은 독자이다.
야이로의 무남독녀이다. 나사로는 가장이다.
젊은이는 보배이다. 이슬 같은 청년들, 주님의 은혜를 머금은 젊은이들이다.
당시에 주님은 이런 젊은이들을 살리셨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젊은이들을 살리신다.

때를 아는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현재만이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그것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필요하다.
시간의 헛됨의 찰나에서 그래도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생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시간을 쓰는 인생 자신이 아니다. 고로 인생을 사는 자기 시간은
하나님과의 정해진 약속의 선상에 있다. 몇 년 몇 일 몇시 까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내게 제한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 가는 나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때가 다가온다.
또한 그 시간은 인생에게는 계속해서 흘러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특성이 있다.
내 주위를 흘러 지나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고로 시간 속에 있는 나는 항상 젊은이로 있지 않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자신을 어느 덧 젊은이에서
인생이 시들어가는 노년의 삶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 없는 인생의 가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생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지속했으면, 행복도 즐김도, 기쁨도, 좋아하는 것에 안주하고 싶지만
인생은 지속적으로 그렇지를 못한다.

전도서에서 37번이나 헛되다라는 말이 나온다.
전도서는 인생 철학서로 인생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부귀와 광명과 명예와 지식을 가져보았던 솔로몬이 노년에 쓴
인생 경륜에 대한 입문서이다.
전도서는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추구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생사는 것이 헛되다라고 하는 데는 세상의 이런 면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1. 세상이 불의하다, 2. 세상이 불합리하다. 3. 세상은 모순이 있다.
4.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세상과 나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전도자가 자신이 가져보았던 여러 가지 세상의 욕구들을 생각해보면,
즉 옷을 잘 입는 것, 명예를 갖는 것, 소유를 갖는 것, 애정을 나누어보는 것,
권력을 갖는 것 등 여러 가지 경험해 보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다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 이들이 밤새 게임을 하는 것도 그렇다.
게임을 해도 해도 그 게임에 대한 갈증이 더 생긴다.
내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자기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한다.
연예를 하고 싶어도, 끝없이 사랑추구에 목매달게 되며,
지나친 성욕 추구는 만족보다는 더 진한 애정행각에 목마르게 되며,
또한 그런 욕구 발산도 어느 하나를 지속적으로 계속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그런 일을 한가지만 하다 보면,
거기에 탐닉이 되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젊은이 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젊은이는 우선 그 때가 약속의 때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인생은 앞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기다리는
즉 가능성에 대한 많은 보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젊음은 힘이 있고,
지혜가 뛰어나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보장이 있고, 가능성의 기회들이 있다.

미국의 두 사람의 젊은이들이 어느 날 교회 앞을 지나다가,
한 젊은이는 교회로 들어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여 그는 나중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는 그 제안을 뿌리치고,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감옥에 드나들기를 제집 드나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자기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때는 그 친구는 감옥에 있었다.

청년의 시기는 실수를 자주하는 때이다. 또한 그 세대는 죄에 빠지기 쉬운 세대이다.
경험이 없고, 미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수치스러운 일,
불명예, 추잡한 음란한 일에 빠지기 쉽다. 포르노에 빠지는 일, 죄에 탐닉하는 일등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젊은 동생, 판단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해서, 타국에 가서 살았으나, 망해버렸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더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도 자기 독립심과 자유의 방종에 맡긴다.
그러나 그런 자유나 독립에는 반드시 책임 의식이 따른다.
청년의 시기는 아직 인생이 견고해지지 않은 약한 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인 것이다.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할 일을 준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기간이다.
그 때에는 인생의 기초를 닦는 시절이다.
젊을 때에, 결혼식장에 가기보다는 장례식에 가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인생을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고로 젊은이 시절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다.
그 에게만 시간이 과거,현재, 미래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손안에 있을 때에만
시간이 우리 것이며, 금방 지나가는 것이다.
젊은이 시절이 엇그제 같은 데, 벌써 반백이 되며, 백발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 에게 딤후 2:22, 젊은이의 헛된 열정에 빠지지 말고,
의, 믿음, 소망, 평안을 추구하라, 젊은 시절에 경건에 훈련을 거듭하라,

젊은이의 상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 힘과 약속이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에는 젊은이는 인생 경험이 적어, 어리석게 되기 쉬우며,
미숙하여, 판단을 잘 하지 못해, 원치 않는 죄에 빠지기도 쉽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젊은이여, 시간 관리를 잘하자, 현재하는 일에 충실하기,
그리고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계획 있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힘쓰며,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 가를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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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사는 사람

로마서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 뿐 아니라
    할 수 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무질서와 혼돈 가운데에 있는 이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의 조화와 질서 가운데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의 영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의 영을 통해 그분의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의 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되며, 그분을 나의 마음에 다스리시는 주인으로 그리고 나의 삶의 중심에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다.

그분의 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실 때에, 만물의 조성자로 만물 가운데에 생명력으로 역사하셨다. 이제 그 영은 생명의 영으로 믿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새 성품을 심는 재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그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크리스천의 삶을 이끌어 가며,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그의 영이 계신 곳에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굴레를 벗겨 버리고 진정한 자유의 혜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과거에 그리스도밖에 있는 인생들은 자신 안에 있는 번민과 갈등의 현상 속에서 원하지 않는 죄악의 늪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와 심판의 사슬에서 풀어 내어 자신을 정죄하지 않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평안 가운데에 살게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원죄의 굴레에서 왜곡된 인간 본성의 이탈에서 오는 부조화의 갈등에 있어서, 늘 죄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며, 자기 왜곡과 불안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그분을 통해 참 평안을 맛보며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분의 인도와 영향력으로 비참한 인간의 모순된 상태에서 벗어나, 참 인간이 되어가는 길을 발견한다. 과거에 받은 잘못된 조상의 유전이나 가족등 주변의 사람들의 좋지 않은 영향과 환경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몰이해에서 그분의 섭리를 발견하여 구원받은 인생의 새로운 길을 살아간다.

그 분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모순이나 거짓된 자아의 현상에 시달리지 않으며, 참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며, 그 분이 제시한 올바른 인간 자신의 자기 변화와 개선과 완성의 길을 향하여 줄달음하게 된다. 과거에는 자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삶을 살다 보니 항상 부정적인 시각과 제한된 자원 속에서 자기 한계와 불만을 가지며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우리 자신을 보시는 관점을 갖고 살게 되어 모든 일에 가능성을 보며, 믿음 안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 안에 있음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모든 혜택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삶의 저주를 담당하여 우리 삶의 그림자와 같이 따라 다니는 죽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생명은 그분의 영이 인생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들어오신 이후에 오게 되며, 그 생명이 주는 구원의 기쁨과 삶의 풍성함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살면서 죄의 영향 아래에서 살며, 그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과 죽음의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된다. 그래서 늘 죄와 죽음 사이에 있는 불안과 절망과 고통의 연속선 상에서 살아간다. 손을 움켜지고 울며 태어난 어린 생명은 평생을 사는 동안 죄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인생의 부조화와 불합리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죄가 품어대는 악의 불안함 속에서 번민하며 살아간다. 누가 그런 인간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노력들 중에서, 세상의 고상한 도덕이나 혹은 비상한 철학적인 가르침으로도 할 수 없으며, 더욱이 갖은 고난의 수양을 쌓아도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이나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그 죄의 사슬의 영향을 풀어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 죄와 그 죄의 영향력에서 해방되고, 인간 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은 그 인간의 죄를 담당한 존재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생노 병사의 길에서 백팔번뇌와 같이 무수한 인간 문제의 현장에서 고민하며 때로는 곤란을 당하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고로 인간은 그 깊은 근저에서부터 참으로 행복 하고저 하는 바램이 있으며, 늘 변화무쌍한 일시적인 인생의 삶에서 변치 않는 영원의 지속을 갈구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법을 지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적인 구속력을 따라 살아간다. 만가지 법을 지켜도 하나의 법에 저촉된 행동에 대해서는 다시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법을 어기면 법이 집행하는 대로 형벌이 따른다. 인간의 육신적인 삶은 인간의 육체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육체의 제한 안에서 육체가 바라는 대로 추구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육체란 흙에서 온 것으로 육체란 언제 가는 다시 육체의 근본인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흙으로 사라질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육체를 따라 사는 길은 그 육체가 욕구하는 것에 충실히 따라야 생존한다. 그렇지만 그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낡아지고, 상해지며, 퇴락해가는 것이다. 그 육체로는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길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 인간 예수를 통해, 죄 있는 인간의 문제를 안고 그가 입은 죄의 육체성를 통해 죄와 그 대가의 형벌인 죽음을 당하시므로, 인간의 육체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다. 피 흘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죄를 받아,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새로운 인간을 이루어 갈수 있는 길이 열려 졌다. 주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육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또한 열렸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영이 사람들 속에 와서, 죽은 인간의 영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고로 그분의 영을 모신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며 서로 교제하며,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영적인 인간의 육체 속에 있는 인간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영적인 영향력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린다. 고로 그 영적인 영향력이 인간 속에 오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비록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를 안고 사는 인생일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다시 살리시는 생명력이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들은 자기 속에서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우신 법의 요구들을 그 영의 영향력과 주도권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된 존재로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며, 그 영의 도움과 인도를 통해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갈수 있게 된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흙에서 만들어진 육체성의 요구대로 육체의 본능을 중시하며, 그 본능이 욕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 육체성은 하나님께로 오신 영적인 영향력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육체의 본능의 욕심에 좇아가기 마련이다. 그 욕심은 끝없는 인간의 욕구 충족을 따라가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가운데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영의 추구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하나님의 영혼 만족의 추구를 따라 살며 생명 살림의 그 영의 인도를 받아,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로 나아가게 한다.

육신은 흙으로 왔기에 언제 가는 사라지는 즉 끝나가는 존재의 형질로 이루어 진다. 그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이며, 죽음의 길에서 얻는 불안과 불만과 절망의 나락에 점점 빠져들어 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다시 살게 된 영인 인간의 영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계속되는 교제 안에서 그분을 통해 받는 모든 생명의 혜택을 받으며, 인간의 영혼의 자리인 마음속에 조화와 질서의 세계에서 맛보는 평안을 얻는 다.

인간의 마음이나 두뇌에서 나오는 인간의 생각은 그 방향성에 의해 나뉘어 진다. 크게 두 방향성은 영의 방향과 육의 방향이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영이신 하나님의 영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며, 그것을 통해 그분의 의도를 따르게 된다. 그렇지만, 육신을 좇아가는 육신적인 사람은 자기 속에 모신 하나님의 영의 생명력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생명의 법을 따르지도 못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세우신 법 조차에도 순종하지 않는다. 육체의 본능의 추구에 따라 자기 욕구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 영의 의도를 감지하지도 못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의 영의 의도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자신의 육체의 좋아하는 것 즉 그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영적인 일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육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육체의 본성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와 죽음의 법 아래에서 삶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다. 예수님은 이세상에 오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마련하셨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갈 수 있으며,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적인 일을 할 수 도 없으며,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분의 영을 모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시며,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시므로 육체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육체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삶을 제공하신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 안에 살고 있지만,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이다. 육체의 몸은 죄의 본성으로 인하여 죄의 영향력을 받지만, 영으로 살게 되면 영이 육체의 몸을 이끌어 가는 생활을 하게 되어, 하나님과 옳은 관계안에서 살며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그분의 영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의 영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살리시며,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길을 살아가게 하신다. 그의 영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죽어가는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즉 영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영의 사람으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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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삶

베드로전서 2: 18-25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종으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도 인내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의 삶을 섬기는 자의 삶으로 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고난 속에서 그는 자신이 좋은 모델이 되어주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셨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종이라고 하는 말은 일반적인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봉사하는 청지기로서의 봉사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주는 권면은 자기가 섬기는 상관이나 주인이 좋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잘하라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나 상관에게 인정을 받는 길은 다른 이를 섬기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는 사회에 남을 돕고 섬기려는 이웃은 누구나가 인정을 하며, 환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 사회나 단체에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당함을 당하는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부당한 일에 대해 잘못된 행동으로 반응하면,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지를 못한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거나 힘 드는 일을 만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기억할 만한 일로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입히실 것이다. 인생을 살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된다.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낙심하거나 불평해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좋은 일과 형통함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범적인 삶을 살 것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성품이나, 태도나 행위에 있어서, 그는 크리스천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도 고난을 깊이 겪으셨고, 부당한 삶의 환경이나 주변인들의 무시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델을 보여주셨다.

주님의 본은 그가 죄가 없으심에도 그는 죄인 취급을 받는 중에도 자신의 고난이나 고통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맞서서 항변하거나, 혹은 말로 사람들에게 욕을 하거나 그리고 거짓으로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타인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악을 범하지 않으시고, 그는 자신에게 당하는 고통이나 형벌이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담당하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셔서, 죄인들인 인간들을 위해 친히 자신이 죄인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죄와 악을 범하는 모든 현상에 대해 결코 인간은 거기에 대해 자유 할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이 죄에 대해 더 이상 죄의 영향력에서 살지 않고, 죄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죄와 악의 소멸의 길을 보여 주셨다.

주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십자가의 고난은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인생 자신에게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제공하신다. 그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신다. 그의 좌절과 실패와 같은 십자가의 고난은 실패와 좌절에서 우는 우리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제공한다. 특히 병중에라도 그의 채찍에 맞으신 그의 상하고 찟기신 육체는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당하는 죄로부터 오는 모든 삶의 저주와 고통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 삶의 고통과 좌절과 실패와 절망의 나락에서 회복되어 잘 살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인생의 리더가 되시며, 영혼과 생명의 감독이 되시는 그분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지도와 도움을 바라며, 그분과의 지척에 가까운(생명을 나눈, 그리고 그분과 삶과 생명을 공유한 관계이므로) 관계로서 늘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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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룻기 1:15-22

이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다.
룻기는 “우정”이라는 뜻이며,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사 시대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는 배교와 전쟁과 몰락과 강포와 도덕적 부패와 반란의 시대임을 보여준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처지에서 며느리들에게
자기의 고국이나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었다.
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동족이나 신에게로 돌아가라는 시모의 권면에 따라야 할 것인데,
오르바는 시모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새로운 남편이나 새 삶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룻은 자신의 선택을 시모인 나오미를 택하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1 모험과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선택이다. 룻은 시모가 사는 곳에 자신도 살며,
시모가 죽는 곳에 자신도 그 곳에 죽겠다고 한다.
현실적이지 않고 희망이 없는 시모를 선책한다.
인생에 있어서, 투자를 하거나 선택하는 일에, 신중하게 지혜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선택도 필요하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선택은
현실적이고 보이는 것에 대한 선택하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룻은 자기 동족에게로 가면, 순탄할 것이다.
그러나 시모를 선택하는 일에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보장이 없다.
이스라엘에 수혼법이 있다. 그 법은 형제가 아내를 두고 죽었을 때에
그 밑에 형제가 대를 잇는 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기도 한다.
여인에 대한 자비의 법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대를 이어가려는
이스라엘의 지혜에서 나온 법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모를 모셔야 하는 수고만 있을 뿐이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곳을 선택하는 모험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봉사와 희생의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효성으로 시모를 보호하려는 봉사하려는 생각이며,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선택이다.
며느리로서 시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며느리 전성시대라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도 우리네, 삶에는 인간의 윤리가 중요하다.

룻의 선택은 그녀의 신앙을 나타내는 선택이 었다.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또 다시 우상숭배의 죄로 가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동기가 선택의 중심이 었다.
이방인이 개종하려면, 안식일이나, 절삭일들을 지켜야 하며,
113가지의 율레들을 지켜야 하는 수고가 따라야 한다.
이방인에게는 때로는 이스라엘의 법은 엄하며 지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 나아가 간음한 여인에게는 돌로 쳐 죽인다든지
중한 죄에 대해 목을 매어 사형하는,
엄격한 윤리가 적용되며, 시행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보다는 높으며,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룻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선택은 1. 남을 도우려는 선택이며,
2. 순리를 따르는 선택이며, 희생과 모험이 따르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이방인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좇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6번씩이나 어머니라고 부르는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정이나 애정이 지극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려는 의지는 믿음에서 나왔다.
시모와 오랫동안을 살은 며느리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의 마음이 있었다.

오르바는 결국 우상숭배하는 자기의 동족으로 돌아갔다.
오르바의 선택은 때로는 인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모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남편을 구하고자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자기 가족 친척을 버리고,
민족성을 버리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다.
고로 그녀의 선택은 비장한 선택이 었다.
끝가지 시모를 좇아가려는 아름다운 효의 선택이 었다.
앞으로 남편이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을 한 단계를 높이는 귀한 선택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일취월장하게 하는 고결한 선택이었다.

그녀에게는 다만 희생과 봉사만이 요구되는 모험의 선택이었고,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결과를 졸 때에 그녀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신의 섭리는 시모를 모시려는 그녀에게는 덤으로 잘사고 유력한 남편과
또한 자녀를 낳는 복을 주었으며,
자기 동족과 우상을 버리는 그녀의 결단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서 택함을 입었다.
그 뿐아니라 다윗의 증조 할머니로서 왕족의 가문에 들어가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위대한 은총과 영광을 얻었다.

룻의 선택의 이면에는 이렇듯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느끼는 섭리가 있었다.
반면에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이민 생활을 선택하고 고국을 떠난 나오미는
그의 이민생활에서 얻은 것은 오직 실패하는 인생뿐인 것이었다.

나오미의 실패는 고통과 우울을 주는 삶이 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쓰디쓴 인생의 맛을 맛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분명한 이스라엘인의 신앙도
그녀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을 가졌을 것이다.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다운되는 그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괴로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이나
다가오는 미래를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에 넘어있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의 의도와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섭리신앙에 대한 인간의 한계이며,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순종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오미는 마치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이민의 삶을 살려고 왔지만,
다 잃어버리고, 실망과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쓰디쓴 나날들을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나, 그분에 대한 신앙이나 존경보다는
주님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 그리고 한탄스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울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실패와 자절에서 겪는 상실에서 오는 고통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넘어뜨릴수 있으나,
신의 섭리아래에 있는 인생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상실을 넘어서는 때에,
자신은 더욱 강한 자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실패를 딛고 진행된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주인 보디발집에서도 의롭게 충실하게 실력있게, 청지기직을 잘하였으나,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통해 억울하게 모합을 받아,
국가 범죄인들이 들어가는 지하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서 수년을 보내었다.
그는 그곳에서 더 힘들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훈련의 때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기도는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고 체념하며,
그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이 있고,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그자리에 머물어 있어야 함 했다.
거기에서 생활은 실망과 한숨이 섞인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곡이 깊은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 처럼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의롭고 불쌍한 요셉을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가장 높은 자리인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신다.

우리는 늘 인간의 생각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며,
그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기에 이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을 따라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움직이시는 때와 방법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고로 신앙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현재의 일시적인 현장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두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의미를 되새겨 주며,
신앙의 선택이 주는 이유와 인생의 삶의 실패와 성공을 보게 하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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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명령

창세기 1:24-31

창조된 자연 속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신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인 계시로 부분적으로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는 사람들 속에 미지의 세계나, 혹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신의 세계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리고 신의 창조된 자연의 세계는 신의 솜씨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능하신 창조 사역이다.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
1.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셨다. 그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이며, 동시적이며, 일시적인 창조이다.

2.그의 창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능하심, 전지하심, 무소부재 하심,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다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말씀의 창조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창조사역은 그의 영원성, 전능성, 인격성, 진리성등을 나타내신다.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창조의 목적이나 동역의 사역을 통해 중간 역할을 하신다.

4.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삼위일체의 사역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심, 성령은 창조하신 말씀을 직접 이루어 지게 하심, 수면에 운행하심, 말씀 창조 사역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이 이루어 지심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순서대로 하심이다. 질서데로 창조하셔서 잘 조직하셨다.
6.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심, 창조와 보존과 섭리의 사역이 있으심,
7.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육의 창조 사역이 있고, 영의 창조 사역이 있으심, 영물들을 창조하심, 재창조의 사역의 시발점은 창조 사역에 있다. 인간 구원의 사역은 재창조의 사역이다.
8. 창조와 타락은 연결되어 있음, 창조는 세상의 존재의 모든 원인의 해답, 타락은 인간 문제의 원인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 명령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 된다.
1.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 즉, 직접 인간을 빗으심, 대화와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2.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의 창조,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의 역할, 지성의 역할, 영성의 역할 등으로 나뉘어 있다. 고로 인간은 신의 거룩성이나 신성을 닮았다. 에베소서4:24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의 속성을 따라 재창조의 사역으로서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3.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에 직접적으로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어 사람들은 창조 사역 중에 하나님의 창조의 복을 받았다. 고로, 인간들은 신의 축복 안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명예와 은총이 있다.
4.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장이며, 동시에 창조의 파트너이다. 고로 창조세계의 관리인으로 혹은 통치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고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창조의 명령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1.생육하고 번성하라/ 자기 생존이나, 자기 성장 이나 자기 발전하라, 건강하게 생존하고, 자기를 잘 가꾸어야 할 일이다. 고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육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되라, 또한 항상 건강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가꾸라,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복음으로 거듭나는 일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땅에 충만 하라/ 자기 표현이나 역할을, 자기에 대해 자기 인생에 대해 완성하라, 자기를 극대화하라, 자기 성장이나, 발전하라, 자기고유의 재능 개발을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인 탈랜트 개발을 하여, 자신안에서 기술적이나 기능적인 것을 잘 하도록 개발하라, 고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을 잘하라

3.땅을 정복하라/ 영향력을 주라, 자신의 리더쉽을 키우라, 좋은 사회인으로 살라, 크리스천(특별한 부름을 받은 군인)의 전투적인 입장을 따라, 이 땅의 어두움을 정복하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과 사랑으로 정복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28:19-20 18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있음을 언급하시며, 믿는 이들에게 다시금 복음 선포를 통해서 재창조의 명령을 주셨다. 19절에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으로 어둠을 정복하라 1. 제자를 삼으라 2.세례를 베풀라20절에,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

4.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즉 창조세계의 관리인이 되라는 것이다. 주님의 통치의 모든 영역에서 청지기가 되라,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한을 통해 통치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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