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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변화와 전도 (사도행전9: 10-22)
인생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에서 사람들은 더 깊고 넓은 변화를 경험 하기도 합니다. 그런 황당한 경험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자동차사고를 만난 것처럼 잘나가는 사울의 인생이 그만 다메섹에서 고장 난 인생의 차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강한 빛에 쬐어 어둠 속에 있었던 그의 상태는 견딜 수 없었으며, 그러한 어둠의 자식으로는 아무것도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장님신세가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활개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남을 괴롭히는 종교인의 최고 절정에서 그만 다메섹에서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잡혀 버렸습니다.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을 괴롭히고, 그들을 추격하여 잡아드리는 악역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자신의 확신하는 바가 결국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의 당한 처지를 구해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합니다. 타인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관점은 남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교만한 눈입니다. 악을 향하는 손 입니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위해 그는 사람을 압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슨 권위에 복종하는가는 우리의 신분이나 역할을 하게 합니다. 여기 한 사람 사울은 대제사장, 당시, 종교의 세력과 이름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처지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리는 은혜의 주님의 권위와 지시에 순종하는 아나니아는 사울을 돕고, 치료하고, 살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나 사단의 하수에 따르는 경우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소문은 사람들을 오해하게 합니다. 소문은 사람들을 시달리게 합니다. 사실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통해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사울을 살리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같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첫째, 복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면서도 빛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도리어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얽어 매 버리게 합니다. 더 나아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그에게는 좋은 소식이 필요합니다.. 희망의 소식입니다. 자기우월감에 빠져 살지만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행복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병이 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줍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치료하지만, 마음의 병이나 영적인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음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주변에 셋 번째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을 묻는 이들, 인생의 길에서 상처를 받아, 울고 있는 이들, 고난과 역경의 삶의 현장에서 지쳐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남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잘 만나야 병을 고치는 것처럼, 환자가 의사를 잘 못나면 병을 더 얻을 수도 있습니다. 돌팔이의사가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치료에 환자에게 나타난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술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는 일은 환자에게는 더 없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 에게는 인상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핍박자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했던 사울이었으나, 그 사건은 그에게 적지 않은 의문을 주었을 것입니다. 상당히 충격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어째서 핍박 받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이가 그렇게 천사의 모습으로 최후의 모습을 할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받은 다메섹에서의 사명은 크리스천들을 잡아드리는 것이며, 그들을 핍박합니다. 유대종교인들이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그 만남의 경험은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였습니다. 그가 체험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주 예수님께서 광명의 빛으로 사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의 빛에 사울은 꼬꾸라져 자기 인생의 큰 전환점을 이룬 일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종교는 가문과 자신이 배운 학문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전통과 가문에서 얻은 종교입니다. 그의 학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정통하여 그 문화와 언어와 풍습에 익은 유대교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사는 종교인으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전형적인 자기 중심의 신앙형태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갑작스런 체험으로 자기 중심에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잠시 며칠간 눈이 멀었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내면의 큰 혼돈의 시기를 맞아, 자신의 내면의 소용돌이 치는 중에, 그의 안에 있는 어두운 면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종교가 자신의 내면의 자유보다는 억압으로 내몰았던 상태에서, 그는 어두운 면들을 벗고, 남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해로운 사람이 자신 속에 있는 깊은 내면의 상처들을 씻어내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종교의 껍질로 자신의 죄성을 눌러버리고, 자신의 의의 옷으로 치장하던 디펜스 메커니즘 즉 자기방어나, 자기 공경의 성향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진정으로 다가가는 겸허한 성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변화
사울은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자기의 종교적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영적인 짐들을 지며,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타인들을 억압하는 핍박자에게서 이제는 어둠에 억압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형식적인 열심으로 자신을 얽어 맬 뿐 아니라, 그 형식적인 종교적인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이나 종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에서 내용의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에서 겸손한 사람으로 성숙해 집니다. 남에게 위협이 되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전환합니다.
바울의 전도
1. 바울의 전도는 자기변화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의 원수요, 크리스천들의 핍박자였으나,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의 빛을 통해 새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2. 자기변화로 인한 확신하는 바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자기 개종의 결과는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는 지식이나, 확신하는 바의 180도 전환하는 인생변화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생각이나, 비전이나, 성품이나 마음까지 그는 송두리째 자신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확신한 바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자기체험은 자기 증거에 대한 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끄는 것입니다. 전도는 못난 사람을 잘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변화에 필요한 진리를 제공합니다. 고로 교회는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를 주고, 올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전 중에 주님께서 지시하는 것을 순종하여 크리스천들의 원수인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하므로 그의 멀었던 눈을 즉 시력을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즉 그의 해야 할 일을 주님의 지시를 받아, 그가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들의 리더였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리더로서 항상 주님에게 열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었는지 혹은 잠을 자다가 받았는지 모르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시는 그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사울의 환상 중에 받은 대로 안수하여 그의 멀었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 간단히 해야 할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적대자요, 소문에 의하면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잡으려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소 사람이라 함은 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울은 성령을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안수를 받음은 개인적인 관계로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형제의 관계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받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또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먼저, 남을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빛으로 살며,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치료자의 입장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울에게 찾아가서 그를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아나니아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그가 지시하는 것을 따릅니다.그는 또한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 그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치료해주고, 남을 돕는 사람으로 역할을 합니다.
사울은 진리를 만난 이후에 변화되었고, 그 이후에 자신과 자신의 삶의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사울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눈뜬 장님이 된 후에 그는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시력을 잃고 나서, 타인의 손에 이끌리면서 그는 자신이 보아왔던 것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유대교에서 배운 종교습성들은 종교의 탈을 쓴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알게 되어 그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그리고 자신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을 통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았습니다. 자신이 3일 동안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소경의 상태에서 진리와 어둠의 차이를 볼 줄 알며, 어둠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영광의 광채의 빛은 어둠에 있는 사울을 일시에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빛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의 모습이며, 원수요 핍박자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핍박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서 깨닫는 지난 날들의 과오를 생각하며, 그는 깊이 뉘우치며, 회개의 깊은 골을 팠습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마음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와 아울러 인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사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개종 시에 주님으로부터 자기 사명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났던 주님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이 빛을 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합니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다만 시간의 선상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서 새로운 날을 시작한다. 하루가 시작 되었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은 지 잠깐인데, 하루의 길이는 해가 중천에 올라 하루의 일과에 몰입하여 보니, 시간을 타고 밀려가는 바다의 파도처럼 거침없이 하루의 시간의 끝을 알려주는 황혼의 저녁노을에서 빨리 지나가 버린 낮의 일들을 생각하니, 하루의 길이는 너무나 짧다.
그렇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고 태어나, 꿈을 안고 살다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루의 꿈은 아침에 꾸며 하루를 살아간다. 한 달의 꿈은 매월 첫날을 보내는 중에 설계하며, 하루하루를 그 꿈속에 살아간다. 매년 새해가 될 때마다 우리는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며, 새날을 맞이한다. 그리고 한 해에 이루어질 꿈을 가득 안고 새로 시작한다. 젊은 날에 품은 꿈들은 나이가 들면서, 현실로 다가오는 세월의 무상함 속에 우리의 품은 꿈들은 기억도 없이 날아간다. 우리는 또 우리는 꿈을 품는다. 그리고 그 꿈속에 산다.
어느 방송의 “젊은 그대”에 나오는 어느 주인공의 말처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도전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 가야 할 것을 역설하며 본인도 그렇게 살고 있노라고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자기만의 꿈을 향하여…,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산다는 것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늘도 내일을 바라보는 꿈을 먹고 살아간다.
(딤후 2; 1-6)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믿음으로 이렇게 살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주님을 멀찌기 좇아가는 경우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에서 멀어지면 성도들은 약해지며, 세상과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어둠의 영향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위치가 위태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믿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일꾼이며 동시에 주님의 일꾼입니다. 본론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선생이 제자인 디모데가 영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고 쓴 서신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의 감옥시기인데, 그때에는 네로의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무렵으로,주후 64-68년경(첫 번째 투옥시는 63-63경)입니다. 첫 번째는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가택엄금으로 자유롭게 바깥세계에 있는 성도들과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지하감옥에 갇혀서 순교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애 중에 마지막 시기를 살고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자인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 건전한 정신으로 무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의 사람답게, 그리고 주님의 일꾼답게 강한 믿음의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앙인들은 어떻게 강해지는 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강해져 라는 것입니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훈련으로, 혹은 삶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믿음을 키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절에서 마지막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담대히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세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강한 자가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한때 많은 농경지가 하늘에서 비를 얻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물을 지속적으로 대는 수리 안전 답으로 논을 개조하여, 농사를 잘 지으며, 수확도 풍성히 거두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영어를 잘 하는 힘은 언제나 꾸준히 단어를 암기하여 나타나며, 그 암송한 단어를 정복하는 것만큼 언어적인 소통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물질의 세계에도 에너지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권세에도, 그 통치력아래에 정의로운 지도력이나 통치력에서 나오는 권력의 힘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세계에도 지식의 힘이 있습니다. 어느 13세된 프리틴 학생이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이 되게 할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여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도록 하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위기는 다음세대들의 배움의 실패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신앙인의 세계에나 교회의 세계에는 신앙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의 힘과 그리고 교회의 힘이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의 힘은 교회의구성원들이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넘어지지 않고, 뒤로 퇴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 소망 교회가 강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멤버인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며,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길이나, 건강한 신앙 생활의 비결은 교회 내에서 실행하는 모든 종류의 신앙의 훈련, 영성 훈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자기 능력 배가는 성도들이 자기 정체 감을 강하게 가질 때에 자신감을 가지며, 자신의 일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의 부으심의 축복입니다. 그의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그의 은혜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성도들이 강해지는 길입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에게 붙어있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합니다.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그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는 성도들을 먹여주는 양식입니다. 그 은혜는 주님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다 라는 은혜의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강한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읽으므로, 들으므로, 공부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일꾼들이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가르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세우는 데에는 또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 세울수 있습니다. 그 영적인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강한 일꾼들로 만들어 갑니다. 부흥회이든지 성경 사경회를 통해 주님의 일꾼들은 영적인 충전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교회에서 실행하는 영성 수련의 모임은 바로 영적인 충전을 하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강한 성도들이 되어 갑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여주는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서 1. 주님의 일꾼으로 고난을 받을지니, 신앙인으로 겪는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을 줍니다. 2.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삶/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3.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는 것/ 우승하는 것/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을 잘하여 자기 관리를 잘하며,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 수고하는 농부가 수확을 기대하며 열심히 합니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첫째는 군인의 삶입니다. 군인 정신, 그리스도인은 군인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사명, 즉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일을 받아 그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 군인들의 총 사령관이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군인들은 적을 예상하고 항상 전쟁에 임하는 임전태세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크게 세가지 적에 직면하여 살아야 하며, 그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적들은 사단이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시스템이며,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자기자신입니다. 이러한 전쟁터에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부르셔서, 강한 영적인 세계의 군인으로 강한 군인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강한 군인정신을 소유하려면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마귀와의 실전을 대비하며, 훈련을 하며, 영적으로 경계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군인에게는 전투력이나 실전에서 능력은 바로 거듭되는 훈련을 통해서 입니다. 평소의 훈련 시에 땀을 흘린 군인들은 실전에서 아주 전쟁을 잘하는 군인들이 됩니다. 둘째는 운동선수의 삶입니다. 훈련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승리의 결과가 있습니다. 항상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타이거 우즈가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도 여전히 교사를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 있을 때에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약을 많이하여 한국의 최초의 빅리거로 명성을 날리다가, 그 후에 몇 년간을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들을 보냈으나, 계속 훈련을 거듭한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고대의 운동경기에도, 경기의 룰이 있어서,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운동선수들의 경기하는 면들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알려주고, 신앙인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올림픽 경기 때마다 약물복용문제가 있어서, 좋은 경기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약물복용 때문에 상이 박탈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농부의 사역의 삶입니다. 그 농부의 삶은 목적 있는 삶입니다. 수확이라는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이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한 것에 대한 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성도들의 수고는 현세와 내세에 많은 결과들을 보장해줍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삶의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봉사하다가 주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목회할 때에, 4,29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마켙을 열심히 하는 중에도 성가대 봉사를 열심히 하였는데, 폭동 시에 많은 한인 마켙들이 피해를 입었고, 거의 매월 강도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켙에도 어느 날 강도가 와서는 총을 들이대고, 그는 총을 맞았습니다. 순간 그는 복부아래에 총을 맞아 쓰면 하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복부위에 총을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나, 다행히 총을 맞고도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후 자신의 봉사하는 믿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받은 달란트 대로 열심히 그것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역하는 삶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만듭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없고 가치 없는 삶을 삽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어린이 책에, 한 농부가 자신의 과수원에 어느 나무 밑에 보물이 감추어져 잇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농부는 몇 십그루 되는 과수원 나무들을 다 헤치고, 그것을 엎었으나, 보물을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것을 통해 그는 나무들을 잘 돌보게 되어 그 후로부터 그의 과수원에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 농사를 잘 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론 강한 성도들은 군인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훈련으로 강한 성도들이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하는 농부의 자세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러한 강한 군인, 훌륭한 운동선수, 능력 있는 농부처럼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됩니다. |
아브라함의 신앙/ 로마서 4:17-25 |
출 15:1-18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까지 애굽의 군대의 추격을 받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200만명이나 애굽의 노예를 잃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부하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애통하며 장례를 치루고 난후,
그들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두려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전차 600대를 앞세우며,
며칠동안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홍해바다앞에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바다가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600대의 전차가 달려오고 있어,
모두가 죽을 상황, 독 안에 든 쥐(A rat in a trap),
진퇴양난(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라는 말처럼
앞, 뒤, 좌우 다 돌아보아도,
그들은 살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민족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받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고통의 소리에 신음하였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주받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속박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포들 중에 그곳에서 탈북 하시는 분들은 살 희망이 없으니 탈출합니다.
출애굽 하듯, 그들은 그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홍해바다 앞에 처한 위기의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서 그 바다를 열고
바다의 열린 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의 교회에 교역자 일일 수양회를 바닷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잦은 흐린 날이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육지에서 조금 바다가로 나갔습니다.
제가 수영을 하는 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
제가 수영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규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저의 등뒤를 누군가가 힘을 받치면서 저를 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은혜 받았을 때에,
당시에 젊은 나이에 저는 신경성위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먹어야 되고,
만성적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저의 마음에 평안함이 왔을 때,
저는 그 신경성 위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님을 믿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위장병이 고쳐졌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와서는
혼자 뒷산에 올라가 오후 내내 주님을 찬송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은혜의 깊음에 잠기다 보니,
저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저 하는 강렬한 마음이 일곤 하였습니다.
그런 찬송 부름의 습관은 바로 저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격을 기쁨으로 노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밤새껏 동풍이 불어서 바닷물을 두쪽으로 물벽을 세워
그 사이를 육지처럼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그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나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구주 하나님께 찬송드림은 당연한 신앙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로 표현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 정, 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중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어
정서적인 믿음의 단계인 마음의 감격이 정서적으로 찬송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세상에 어느 음악이든지,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찬송생활은 크리스천음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음악은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음악은 성도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유명한 신학교교수님의 여고생 딸이
영적으로 공격을 받아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귀신의 영향이 점점세워져 결국에는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딸에게 있는 귀신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딸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은 그녀가 자주 들었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록음악에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단적인 타락한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음악을 조심스럽게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그런 나쁜 음악에 오염되어
정신과 마음을 아울러 더럽히게 하는
악한 영에 열려, 자신도 가눌수 없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부드럽게, 음악이 없다면 인생의 삶이 삭막합니다.
슬플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고, 기쁠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마음이나 듣는 기쁨은 마음의 정서를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찬송하는 일은 더욱 영혼을 강화, 마음의 정서를 편하게 함과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더 우리의 마음을 이끌리게 합니다.
성경에는 단체나 개인이 찬양이나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기사들이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대하 20: 1이하에, 남 왕국 유대의 나라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유다는 막을 힘이 없어,
군대의 힘이 약하니, 긴급히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군대가 평소에 훈련되거나 적들을 대항할만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왕으로 비롯하여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력이 연합군으로 편성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의 군대 앞에
레위족속들의 성가대 앞세우며, 찬송을 부르며, 적진으로 나가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하나님께서 적들의 전력을 상실하게 하시므로,
적의 연합군은 서로 반목질시하여, 서로 죽이다가,
결국에는 다 전멸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을 승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전장에 널려있는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잃었던 것을
불레셋의 나라의 족속들에서 되찾아올 때에,
춤을 추면서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은 때로는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눌수 없는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흥겨워서 춤을 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실때에
그들과 함께 찬미하시며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4:26절에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첫순교자 스데반의 집사가 원수들로 부터 무수한 돌을 맞으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순교하는 순간에
스데반은 자기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며,
그의 은혜를 유지하는 신앙에 활력이 됩니다.
늘 찬송을 가까이 함은 크리스천의 삶의 승리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송구영신 예배 시에 말씀 드렸지만,
제가 새벽에 찬송을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천국의 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찬송의 유익은 성도의 신앙의 자세의 나약함을 강화시켜줍니다.
찬송할 때에, 성도들에게 들어있던 부정적인 마음,
나약한 마음에, 강한 의지와 용기의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찬송은 우리에게 또한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늘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명랑한 얼굴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의 삶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며,
그 구원과 은혜의 감격은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찬미하며 사는 성도들로 살게 합니다.
로마서 10:8-17
세례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세례를 받을 때에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
글쎄요, 당시 저는 잘 믿는 축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 생활을 잘 합니까?
구원받은 사람 쪽에 끼였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도 폭발 식 전도 방법에서 훈련받은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 당신이 세상을 떠나, 당신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나 간다면,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을 확신합니까?
장례식에 가보면,
어느경우에는 신자들이 오랜 교회 생활을 해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 했던 이들의 장례식에 그 영혼이 떠날 때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몸 상태를 보고 대략 짐작을(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에 초상 예배를 많이 치렀습니다.
그리고 있을 미국에서도 장로님, 안수 집사님의 장례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물음이나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을 갖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성경 로마서는 분명히 구원은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실상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에, 물고기 표시를 합니다.
서로 당시에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 사람은 잡혀가거나 사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끼리 암호로 표시하여 믿습니다.
헬라 어로 물고기의 뜻의 익수스라는 말은
그 앞 글자만 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믿었던 초대 교우들은 믿음은 생명과 바꿀수 도 있는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의 생명을 의지하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신자들을 구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은 자신 행위에 대해 근거를 삼는 율법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며,
자기 중심적인 종교 헌신이나 생활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이 이루신
그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의 길을 믿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죄의 짐을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짐을 해결하여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함을 얻습니다.
복음을 믿는 데에는 그 믿음의 현상이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이나
그리고 이해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생각으로 그 사실들을 믿습니다.
자신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저주받은 자리에서 살리기 위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원을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동이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마음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의 크신 희생에 따르는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사랑을 경험으로 체험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그분이 내리시는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그 사랑에 대한 응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강단이 나무 강단이고
신발을 벗고 단위에 오르는 곳에 있습니다.
거기를 걸레로 닦을 때에 한 없이 주님의 사랑이 감격스러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변소 청소나 교회 탑 꼭대기에 올라가
성탄 츄리를 달 때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즐겁게 그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셋번째 단계에는 의지적인 헌신의 결단이 있는 단계입니다.
저는 주님으로 부더 받은 그 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
자신의 일생을 주님에게 드려야 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신앙에는 의지에서 헌신적인 결단이 나오며,
결단 후에 실질적인 주님에게 헌신하는 삶이시작됩니다.
그후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며,
자신의 생활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간증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는 늘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헌신된 마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님을 위한 헌신의 삶의 지속되었습니다.
믿음은 전인적으로 자신을 주님에게 드리고,
고로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신앙 생활의 단계에 나갈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듯, 지,정,의,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이나 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정의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드리며, 자신의 중심인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갈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의 삶을 삽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그 마음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
무엇보다도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맛봅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해결을 받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면 마음이나 정신적인 문제에서 자유를 얻고, 해결을 받습니다.
과거의 상처받은 일들, 현재 자신의 마음을 누르는 깊은 근심이나
걱정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영혼의 우선순위를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는 일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해결이 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의 중요성이나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압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한 말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
그 영향 아래에 삽니다.
날마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안 된다. 하면 안됩니다.
기쁘게 삽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그들은 주님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생활이나 삶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입니다.
나의 일도, 나의 인생 철학도,
나의 삶도 다 내입에서 나간대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고로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기이한 도움을 체험하는 경험을 통해 간증이 나옵니다.
자기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 동행의 신앙,
즉 자기만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천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
인생의 실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성공하는 이야기,
질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치유의 간증 등은
그것을 듣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과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나님 체험의 자기 고백이며
하나님 신앙한 사람들의 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는 비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생활의 현장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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