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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씨의 비유

마가복음 4:26-29

은밀히 나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마가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교훈을 언급하는 예수님의 교훈보다는 행하심에 더 관심을 둔
마가복음에만 나타난 유일한 비유인데, 왜 마가가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마가는 예수님 안에 있는 메시아의 비밀을 갖고 기록하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알리고 있습니다.
감추기 위한 비밀이 아니라 알리기 위한 비밀입니다.
비유라는 것은 어떤 진리나 사실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 예화입니다.
그것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저절로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자체가 가지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미약한 것처럼 생각될지라도,
반드시 엄청난 확장 과 성장을 가져다 주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캐나다의 존 캐디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 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 식인종이 한 명도 없다”
즉 그는 섬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셔서 신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농부가 밭에 뿌린 씨앗이
자체의 생명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비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나라의 성장이 식물의 성장과 유사하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교회 혹은 성도개인의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교회를 어떻게 해서든 성장시키고자 하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램이요
기도제목이 아닙니까?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모르고서야 열심히 기도하고
이모저모로 애를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본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바
교회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교회는 그 교회자체의 성장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성장은 성도들의 희생의 밑거름으로 자라갑니다.
땅에 묻힌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고 열매 맺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흙 속에 있는 자양분입니다.
농부가 이른봄 땅을 갈아 엎고 두엄을 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식물이 자라는데 좋은 자양분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흙 속에 자양분이 많아야 씨앗이 싹을 틔우고 튼튼히 자라고 또 충실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다른 조건이 좋아도 자양분이 없다면 식물은 튼튼히 자라지 못합니다.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자양분이 희생이 될 수 도 있고
우리의 당하는 어려움일수 있습니다.

성장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집밖에서 놀다가 클로버 꽃 위에 벌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벌을 잡으려고 했을 때에 소년의 작은 손에다 바늘 침을 놓았습니다.
벌이 미워 라고 소리치며 소년은 어머니에게로 달여갔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을 치료하고 약간의 빵과 꿀을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맛있니 그것이 좋지 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쏘아 대기도하는 조그만 벌이 우리들이 좋아하는 꿀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연단시키기 위한 사랑에 찬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인
날카로운 쓰라림을 느끼지 않고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에서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삶의 달콤한 면도 또한 벌의 쏘임 같은 쓰라림도 받아드려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해주시고 적절히 응답해주심에
만족하는 은총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라고 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희생의 밑거름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밑거름, 헌금의 밑거름, 전도의 밑거름들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라갑니다.
반드시 생명이 있는 곳에 성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흙의 자양분만 가지고서는 씨가 싹을 틔우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적인 힘은 바로 씨앗 자체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씨앗자체에 생명력이 있기에 물과 자양분을 흡수하여 자라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26절; 본 비유는 씨앗이 풍부한 열매를 맺기까지 성장하는 씨앗가운데
내재한 신비한 능력을 강조하였습니다. 씨는 복음을 의미..
나의 복음; 자기가 체험하고 깨달은 복음이 다 달라 내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다릅니다.
나의 복음에 대한 연구/ 하나님중심의 복음인가 사람중심의 복음인가

확신 있는가, 진리인가 비 진리인가? 복음의 깨달음이 요청됩니다.
바울의 복음은 내가 받은 복음이 무엇인가; 진리의 복음이냐 거짓 복음이냐

내가 전하는 복음이 참 복음이고 내가 전하는 예수가 진리의 예수라면
그리고 그 예수님에게 붙어있어야 신앙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꽃다발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냄새를 맡은 후 서둘러서 꽃을 물병에 꽂아 놓습니다.
꽃을 받을 때에는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그 꽃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꽃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잘렸기 때문에 곧 말라 죽을 것입니다.
어느 날 그녀는 꽃을 내다 버릴 것입니다.
로이드 오글비는 이것을 통해 영적 생명력이 쇠퇴하고 사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꺾어 논 꽃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으려면
내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근거합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수고할지라도,
결국 그 완성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공들인다고 자라지를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야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3: 7에 하나님 나라의 농사는 이렇다고 고린도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여호와께서도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성장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십시오.
특히 기도의 봉사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성장단계에 따라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고 하셨습니다.
식물이 싹트는 과정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때를 기다리며 선을 행하다가 보면 거두게 됩니다.
눈물로 우리의 씨앗을 계속해서 뿌려 가꿔갑시다.
시126: 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 그 것이 계속해서 자라는 것을 성장의 과정이 있으며
교회성장의 비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성장의 비결은 자연의 성장의 비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 씨앗 그 자체에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더불어
땅을 통해 작용하는 성장의 배경입니다.

그리고 성장의 단계에서 나타난 비결은 성장의 과정을 통해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 사도의 평생에 걸린 신앙성장에 대한 간증은
우리들에게 신앙인의 성숙은 격려될 수는 있어도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을 알고 좀더 주님을 닮게 되는 것뿐임을 확신하십시오.

27절;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시간이 필요로 1,000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1,000년을 두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의 인내입니다.
25년을 기다려 아들을 선물로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씨앗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시간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씨가 나서 자라되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는 밭을 일구고 비옥하게 하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는 씨앗을 싹트게 하고 성장시킬 수는 없다. 그 자라는 과정의 신비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실 것을 믿고 노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성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자동적으로 / 처음에는 충실한 곡식이라.
곡식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특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창세기 26: 13에 이삭의 농사가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추수 때의 긴급 성/ 29절; 열매가 곧 낫을 대나니
추수 때가 되면 즉각 낫을 대어 추수할 것을 명합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심판이 진행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하고 요엘3: 13의 인용으로
추수 때란 종말의 시기 추수는 가라지나 쭉정이 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때를
즉, 알곡의 때에는 완성의 때를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를 위한 우리의 수고와 봉사는 주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 들의 의무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를 위한 수고를 하며 교회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셔서 부흥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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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변화와 전도

자기 변화와 전도 (사도행전9: 10-22)

 

인생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에서 사람들은 깊고 넓은 변화를 경험 하기도 합니다.  그런 황당한 경험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자동차사고를 만난 것처럼 잘나가는 사울의 인생이 그만 다메섹에서 고장 인생의 차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강한 빛에 쬐어 어둠 속에 있었던 그의 상태는 견딜 없었으며, 그러한 어둠의 자식으로는 아무것도 한치 앞도 없는 장님신세가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활개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남을 괴롭히는 종교인의 최고 절정에서 그만 다메섹에서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잡혀 버렸습니다.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을 괴롭히고, 그들을 추격하여 잡아드리는 악역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자신의 확신하는 바가 결국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의 당한 처지를 구해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합니다.  타인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관점은 남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교만한 눈입니다.  악을 향하는 입니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위해 그는 사람을 압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슨 권위에 복종하는가는 우리의 신분이나 역할을 하게 합니다.  여기 사람 사울은 대제사장, 당시, 종교의 세력과 이름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처지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리는 은혜의 주님의 권위와 지시에 순종하는 아나니아는 사울을 돕고, 치료하고, 살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나 사단의 하수에 따르는 경우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소문은 사람들을 오해하게 합니다.  소문은 사람들을 시달리게 합니다.  사실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통해 사실을 알고 후에 사울을 살리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같이 우리가 도와야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첫째,  복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면서도 빛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도리어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얽어 버리게 합니다.  나아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그에게는 좋은 소식이 필요합니다..  희망의 소식입니다.  자기우월감에 빠져 살지만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행복 없습니다.   둘째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병이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줍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치료하지만, 마음의 병이나 영적인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음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주변에 번째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을 묻는 이들, 인생의 길에서 상처를 받아, 울고 있는 이들, 고난과 역경의 삶의 현장에서 지쳐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남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만나야 병을 고치는 것처럼, 환자가 의사를 못나면 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돌팔이의사가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치료에 환자에게 나타난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술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는 일은 환자에게는 없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 에게는 인상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핍박자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했던 사울이었으나, 사건은 그에게 적지 않은 의문을 주었을 것입니다.  상당히 충격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어째서 핍박 받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이가 그렇게 천사의 모습으로 최후의 모습을 있을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받은 다메섹에서의 사명은 크리스천들을 잡아드리는 것이며, 그들을 핍박합니다.  유대종교인들이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만남의 경험은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였습니다.  그가 체험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께서 광명의 빛으로 사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의 빛에 사울은 꼬꾸라져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이룬 일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종교는 가문과 자신이 배운 학문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전통과 가문에서 얻은 종교입니다.  그의 학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정통하여 문화와 언어와 풍습에 익은 유대교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사는 종교인으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전형적인 자기 중심의 신앙형태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갑작스런 체험으로 자기 중심에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잠시 며칠간 눈이 멀었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내면의 혼돈의 시기를 맞아, 자신의 내면의 소용돌이 치는 중에, 그의 안에 있는 어두운 면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종교가 자신의 내면의 자유보다는 억압으로 내몰았던 상태에서, 그는 어두운 면들을 벗고, 남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해로운 사람이 자신 속에 있는 깊은 내면의 상처들을 씻어내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종교의 껍질로 자신의 죄성을 눌러버리고, 자신의 의의 옷으로 치장하던 디펜스 메커니즘 자기방어나, 자기 공경의 성향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진정으로 다가가는 겸허한 성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변화

사울은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자기의 종교적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영적인 짐들을 지며,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타인들을 억압하는 핍박자에게서 이제는 어둠에 억압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형식적인 열심으로 자신을 얽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적인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이나 종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에서 내용의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에서 겸손한 사람으로 성숙해 집니다.  남에게 위협이 되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전환합니다.

 

바울의 전도

1. 바울의 전도는 자기변화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의 원수요, 크리스천들의 핍박자였으나,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의 빛을 통해 새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2. 자기변화로 인한 확신하는 바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자기 개종의 결과는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는 지식이나, 확신하는 바의 180 전환하는 인생변화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생각이나, 비전이나, 성품이나 마음까지 그는 송두리째 자신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확신한 바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자기체험은 자기 증거에 대한 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끄는 것입니다.  전도는 못난 사람을 잘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살리는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변화에 필요한 진리를 제공합니다.  고로 교회는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를 주고, 올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전 중에 주님께서 지시하는 것을 순종하여 크리스천들의 원수인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하므로 그의 멀었던 눈을 시력을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그의 해야 일을 주님의 지시를 받아, 그가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들의 리더였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리더로서 항상 주님에게 열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었는지 혹은 잠을 자다가 받았는지 모르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는 그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사울의 환상 중에 받은 대로 안수하여 그의 멀었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은 그리 간단히 해야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적대자요, 소문에 의하면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잡으려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소 사람이라 함은 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울은 성령을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안수를 받음은 개인적인 관계로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형제의 관계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받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또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먼저, 남을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빛으로 살며, 남을 도울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치료자의 입장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울에게 찾아가서 그를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아나니아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그가 지시하는 것을 따릅니다.그는 또한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 그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치료해주고, 남을 돕는 사람으로 역할을 합니다.

 

사울은 진리를 만난 이후에 변화되었고, 이후에 자신과 자신의 삶의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사울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눈뜬 장님이 후에 그는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시력을 잃고 나서, 타인의 손에 이끌리면서 그는 자신이 보아왔던 것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유대교에서 배운 종교습성들은 종교의 탈을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알게 되어 그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그리고 자신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을 통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았습니다.  자신이 3 동안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소경의 상태에서 진리와 어둠의 차이를 알며, 어둠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영광의 광채의 빛은 어둠에 있는 사울을 일시에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는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의 모습이며, 원수요 핍박자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핍박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음성에서 깨닫는 지난 날들의 과오를 생각하며, 그는 깊이 뉘우치며, 회개의 깊은 골을 팠습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마음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와 아울러 인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사울은. 자신이 해야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개종 시에 주님으로부터 자기 사명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좋은 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났던 주님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이 빛을 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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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다만 시간의 선상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서 새로운 날을 시작한다.  하루가 시작 되었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은 잠깐인데, 하루의 길이는 해가 중천에 올라 하루의 일과에 몰입하여 보니, 시간을 타고 밀려가는 바다의 파도처럼 거침없이 하루의 시간의 끝을 알려주는 황혼의 저녁노을에서 빨리 지나가 버린 낮의 일들을 생각하니, 하루의 길이는 너무나 짧다.

 

그렇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고 태어나, 꿈을 안고 살다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루의 꿈은 아침에 꾸며 하루를 살아간다.  달의 꿈은 매월 첫날을 보내는 중에 설계하며, 하루하루를 꿈속에 살아간다.  매년 새해가 때마다 우리는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며, 새날을 맞이한다.  그리고 해에 이루어질 꿈을 가득 안고 새로 시작한다.  젊은 날에 품은 꿈들은 나이가 들면서, 현실로 다가오는 세월의 무상함 속에 우리의 품은 꿈들은 기억도 없이 날아간다.  우리는 우리는 꿈을 품는다.  그리고 꿈속에 산다. 

 

어느 방송의 젊은 그대 나오는 어느 주인공의 말처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도전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 가야 것을 역설하며 본인도 그렇게 살고 있노라고 남들이 생각할 없는 자기만의 꿈을 향하여…,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산다는 것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늘도 내일을 바라보는 꿈을 먹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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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이렇게 합시다

 

(딤후 2; 1-6)
서론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믿음으로 이렇게 살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주님을 멀찌기 좇아가는 경우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에서 멀어지면 성도들은 약해지며, 세상과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어둠의 영향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위치가 위태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믿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일꾼이며 동시에 주님의 일꾼입니다.

 

본론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선생이 제자인 디모데가 영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고 쓴 서신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의 감옥시기인데, 그때에는 네로의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무렵으로,주후 64-68년경(첫 번째 투옥시는 63-63)입니다.  첫 번째는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가택엄금으로 자유롭게 바깥세계에 있는 성도들과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지하감옥에 갇혀서 순교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애 중에 마지막 시기를 살고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자인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 건전한 정신으로 무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의 사람답게, 그리고 주님의 일꾼답게 강한 믿음의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앙인들은 어떻게 강해지는 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강해져 라는 것입니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훈련으로, 혹은 삶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믿음을 키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6 3절에서 마지막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담대히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세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강한 자가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한때 많은 농경지가 하늘에서 비를 얻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물을 지속적으로 대는 수리 안전 답으로 논을 개조하여, 농사를 잘 지으며, 수확도 풍성히 거두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영어를 잘 하는 힘은 언제나 꾸준히 단어를 암기하여 나타나며, 그 암송한 단어를 정복하는 것만큼 언어적인 소통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물질의 세계에도 에너지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권세에도, 그 통치력아래에 정의로운 지도력이나 통치력에서 나오는 권력의 힘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세계에도 지식의 힘이 있습니다.  어느 13세된 프리틴 학생이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이 되게 할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여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도록 하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위기는 다음세대들의 배움의 실패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신앙인의 세계에나 교회의 세계에는 신앙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의 힘과 그리고 교회의 힘이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의 힘은 교회의구성원들이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넘어지지 않고, 뒤로 퇴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 소망 교회가 강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멤버인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며,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길이나, 건강한 신앙 생활의 비결은 교회 내에서 실행하는 모든 종류의 신앙의 훈련, 영성 훈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자기 능력 배가는 성도들이 자기 정체 감을 강하게 가질 때에 자신감을 가지며, 자신의 일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의 부으심의 축복입니다.  그의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그의 은혜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성도들이 강해지는 길입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에게 붙어있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합니다.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그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는 성도들을 먹여주는 양식입니다.  그 은혜는 주님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다 라는 은혜의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강한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읽으므로, 들으므로, 공부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일꾼들이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가르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세우는 데에는 또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 세울수 있습니다.  그 영적인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강한 일꾼들로 만들어 갑니다.  부흥회이든지 성경 사경회를 통해 주님의 일꾼들은 영적인 충전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교회에서 실행하는 영성 수련의 모임은 바로 영적인 충전을 하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강한 성도들이 되어 갑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여주는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서 1. 주님의 일꾼으로 고난을 받을지니, 신앙인으로 겪는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을 줍니다.  2.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삶/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3.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는 것/ 우승하는 것/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을 잘하여 자기 관리를 잘하며,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 수고하는 농부가 수확을 기대하며 열심히 합니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첫째는 군인의 삶입니다.

군인 정신, 그리스도인은 군인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사명, 즉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일을 받아 그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 군인들의 총 사령관이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군인들은 적을 예상하고 항상 전쟁에 임하는 임전태세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크게 세가지 적에 직면하여 살아야 하며, 그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적들은 사단이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시스템이며,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자기자신입니다.  이러한 전쟁터에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부르셔서, 강한 영적인 세계의 군인으로 강한 군인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강한 군인정신을 소유하려면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마귀와의 실전을 대비하며, 훈련을 하며, 영적으로 경계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군인에게는 전투력이나 실전에서 능력은 바로 거듭되는 훈련을 통해서 입니다.  평소의 훈련 시에 땀을 흘린 군인들은 실전에서 아주 전쟁을 잘하는 군인들이 됩니다.

 

둘째는 운동선수의 삶입니다.

훈련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승리의 결과가 있습니다.  항상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타이거 우즈가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도 여전히 교사를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 있을 때에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약을 많이하여 한국의 최초의 빅리거로 명성을 날리다가, 그 후에 몇 년간을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들을 보냈으나, 계속 훈련을 거듭한 박찬호 선수가 다시 야구선수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훈련을 거듭한 결과, 그는 다시 선발투수로 오랜만에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기도훈련, 말씀 훈련등 많은 훈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고대의 운동경기에도, 경기의 룰이 있어서,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운동선수들의 경기하는 면들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알려주고, 신앙인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올림픽 경기 때마다 약물복용문제가 있어서, 좋은 경기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약물복용 때문에 상이 박탈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농부의 사역의 삶입니다.

그 농부의 삶은 목적 있는 삶입니다.  수확이라는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이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한 것에 대한 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성도들의 수고는 현세와 내세에 많은 결과들을 보장해줍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삶의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봉사하다가 주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목회할 때에, 4,29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마켙을 열심히 하는 중에도 성가대 봉사를 열심히 하였는데, 폭동 시에 많은 한인 마켙들이 피해를 입었고, 거의 매월 강도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켙에도 어느 날 강도가 와서는 총을 들이대고, 그는 총을 맞았습니다.  순간 그는 복부아래에 총을 맞아 쓰면 하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복부위에 총을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나, 다행히 총을 맞고도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후 자신의 봉사하는 믿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받은 달란트 대로 열심히 그것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역하는 삶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만듭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없고 가치 없는 삶을 삽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어린이 책에, 한 농부가 자신의 과수원에 어느 나무 밑에 보물이 감추어져 잇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농부는 몇 십그루 되는 과수원 나무들을 다 헤치고, 그것을 엎었으나, 보물을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것을 통해 그는 나무들을 잘 돌보게 되어 그 후로부터 그의 과수원에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 농사를 잘 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론

강한 성도들은 군인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훈련으로 강한 성도들이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하는 농부의 자세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러한 강한 군인, 훌륭한 운동선수, 능력 있는 농부처럼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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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신앙

아브라함의 신앙/ 로마서 4:17-25

모든 인간관계는 신뢰의 관계 위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자식들은 부모님들을 신뢰합니다. 부부관계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의 부부관계일 때에 어떤 어려운 일도 함께 헤쳐갈 수 있습니다.

같은 또래의 친우의 관계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관계라야 친한 우정을 나누는 친우관계가 됩니다. 이익의 동기로 모인 직장에서 조차도, 직장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직장생활이 잘되어갑니다. 사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손님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도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장사도 잘됩니다. 사람들이 명품을 찾고, 좋은 물건을 찾는 것도 물건의 품질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정치지도자와 국민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한 신뢰의 관계에서 권력의 힘이 나옵니다. 국민이 정치지도자에게 부여한 정치의 권한도 그 신뢰에 있습니다. 만일 신뢰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라도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관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들을 믿고 창조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맡겼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와의 신뢰의 관계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그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담은 말씀을 어겨서 행위로 범죄하여, 하나님과 불신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공로로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율법의 길에서는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범죄한 죄인임을 아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인간관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불신했던 인간들은 범죄하므로 그 신뢰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창조물에 대한 책임 역할과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무엇이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절대자로 의존할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조차도 인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 자유의지로 즉 범죄한 그 반항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의 법도를 어겼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행동을 보나, 또 혹은 내자신안에 있는 선하지 못한 성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한을 옳게 사용하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습니다. 이러한 자유와 선택의 권한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길이 인간이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의 신뢰의 관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인간의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는 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아니오 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의 길로 나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길은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가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 즉 그의 선물로 주신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선물은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가 받은 축복은 땅과 자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요구하며, 그분과 그분의 약속하신 말씀들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살았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분의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그분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는 믿고 그분을 알아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 미래에 대한 문제, 인간의 눈에 불가능 한 것을 가능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의 복과 더불어, 그의 이름에 대한 축복, 삶에 대한 축복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축복을 다 받아 누리고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나 전제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물로 주어지는 즉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의복은 운명이나, 우연에 근거하지만, 불확실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의 복은 어떻습니까? 그 축복은 영원하시고 확실하신 하나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질서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며, 운행하는 만물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에 그것은 확실합니다.

신념이 주는 유익은? 신앙과 다릅니다. 신념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비전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생각이나 비전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신 분이고, 그분의 확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념으로는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장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 즉 인간구원의 생명의 부활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하였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관점을 믿은 신앙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그들의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몸이 죽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일 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안 된다 했을 때에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고로 그의 신앙은 불멸적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을 믿는 신앙을 없앨 수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도저히 자신에게 일어날수 없는 일이기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의 신앙은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실망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삶의 조건만을 바라보다면 사람들은 절망할 수 있으나, 신앙인들은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특징은 조건이나 환경을 넘어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을 배출했으며, 자신을 변화시킨 신앙인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을 불사하고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18절에 Contrary to hope/ 이 말씀은 희망과는 거리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관점이나 판단으로 볼 때에는 희망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노인이 되었는데, 즉 사라의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며, 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고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의 복은 부활의 축복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는 모든 인류의 원수인 죽음을 이기는 즉 인간의 죽음을 이기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고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불멸적입니다. 죽어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북한이나 모슬렘과 같은 핍박하는 세계에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상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비이성적이 아니고, 상식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초이성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으로 생각할 때에 상식을 벗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이성을 벗어나는 비전과 계시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기나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기다리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바로 자손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25년을 지나고 나서 그들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일을 성취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4절에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마음이 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실망하거나 절망하여 자포자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기다림의 시간들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혹은 일이 잘 이루어 지지 않을 때에도, 시간적인 차이나, 혹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 두지 않고,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신뢰의 문제는 인간사회의 욕구입니다. 정치가와 국민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소고기문제에서 정치가들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신뢰심을 백성들은 요구합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많은 수의 표를 얻었습니다. 한국민들이 그에게 그의 능력에 신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쇠고기문제로 인하여 그는 국민들의 신뢰심에 금이 가게 되어 인기를 잃고 어려운 정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문제는 비단 국가나사회의 문제뿐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혹은 교회도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의 신뢰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신뢰하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신뢰하는 단계에 있으면 그 교회가 아무리 외부적인 조건이 부족에도,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번 민주당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데는 미국인 민주당 유권자들이 그들의 후보를 선택하였습니다.
능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경험이 많고, 경력이 있는 힐러리 보다는 신선한 변화를 주려는 오바마를 선택하였습니다. 어느 쪽이 더 신뢰가 가는 가하는 것은 능력보다는 시대에 흐름을 반영하는 변화의 욕구에 더 많은 점수를 주어, 그를 신뢰한 것입니다.

23절에
전가하는 문제는 대표성에 대한 것입니다. 옛날 군대에서나 학교 같은 곳에서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 하는데도, 잘못하지 않은 다수인 그 단체에 속한 모두가 같이 체벌을 받습니다. 원죄에 이런 연대책임을 묻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자 마자 원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이 우리모두는 그런 일에 불공평하다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가하는 문제는 원죄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전가하는 문제는 아무 공로나 일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들 자신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높고, 위대하고 부요 하신 자였으나, 우리 때문에 그가 가난하게 되시고, 천대를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나로 인하여 저주받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믿음으로 내가 저주받은 데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낮아짐으로 내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는 일,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복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잃어버린 신뢰의 관계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르며 신뢰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낙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서, 때마다 일마다, 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여 독자인 이삭을 갖는 축복을 누렸으며, 그 자손들에게 땅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의 불멸의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옳다 함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신앙과의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이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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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섭취를 통한 영적성장

베드로 전서 1:22-2:3

어느 의사에 의하면, 암을 일으키는 요소는 유전자, 활성산소, 스트레스 등이라고 합니다.
암세포는 매일 3000-6000이 발생합니다.
다만 우리 몸에서 암세포를 물리치는 면역시스템을 통해 극복합니다.
암을 일으키는 것은 먼저 유전적인 요인은 극복하는 것을 식생활습관이나,
혹은 정기적인 건강체크 등이며, 활성산소를 극복하는 길은 소식이나,
혹은 몸의 산성화를 막는 음식 섭취 등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통해 입니다.
웃으며 밝게 사는 것, 활동적으로 사는 것, 적당한 운동 등입니다.

이렇듯이 영적인 생활에도 영적인 건강을 유지해야만 영적인 삶을 잘 살수 있으며,
건강한 영적인 상태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사람의 영혼을 건강하게 합니다.
영혼을 더럽히는 죄를 해결하며, 영적인 슬럼프를 벗어나게 하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기적인 말씀섭취가 필요합니다.

한국사회는 세상에서 요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여 비방을 받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의 문제는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입니다.
교회만을 위하는 신앙추구나, 이기적인 행태나,
신앙을 물질적인 추구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것 등입니다.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사모하고, 그 말씀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에 양약이 됩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리며, 건강한 영적 생활을 유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는 약이며,
인간의 죄악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여집니다(히브리서 4: 12).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이 받은 영혼의 유익은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여러 가지 유익이 있지만, 먼저 자신이 사랑하는 영혼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영혼입니다.
고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부분은?
취미,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사람과의 교제 등 중에 어느 것인가요? 여러 가지 중에 자기에게 해당되는 부분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중생케 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자연인은 모태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출생하는 중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인간 세상은 모든 것이 언제 가는 사라질, 썩을 것들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 세상적인 것들을 이생의 자랑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육체의 정욕등 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처럼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그 말씀은 썩지 않을 씨입니다.
그 말씀을 받은 영혼에 영원한 것들을 심습니다.

한편 신자의 신앙 생활에는 영적인 굴곡이 있습니다.
영적 일생 중에 어떤 때는 영적인 성장이 있는 좋은 시절이 있는가 하면,
한 없는 영적인 슬럼프에 빠지는 영적 암흑의 시기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 신자에게 영향을 주는 발생하는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들이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악한 의지로, 거짓, 가식, 시기, 중상, 비방 등으로
신자들의 생활에 부정적인 영적인 영향력을 줍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문제되는 부분은?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이런 것들은 신앙을 방해하지만 반면에 크리스천의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여 자신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요?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삶의 힘, 죄를 없애는 일,
자신의 필요를 채움, 영적 성장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우에는 어느 부분에 도움을 받습니다.

말씀섭취는 성도의 생활에 중요한 영적인 일입니다.
어떻게 말씀을 섭취하나요?

말씀을 열심히 먹으려면, 먼저 그 말씀의 맛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은 시편의 기자처럼
시119: 103 송이 꿀보다 더 달아 내입에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시119: 97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사랑하는 지요
그것을 종일 묵상을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길래 온종일 묵상합니까?
이렇게 다윗은 목동의 시절이나 왕으로 봉직 할 때에도
언제나 그는 말씀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저는 외우는 말씀 중에 이사야 41:10을 좋아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에 있어, 노예선 에서 일을 했던 존 뉴턴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노예를 다루던 악명이 높았지만,
그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이 죄인 된 것과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감격하여
찬송가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과 언제가 죽음의 세계를 거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는 것과 자신에게 임할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를 깨닫기 시작하고서부터 입니다.

북한 유학생 김병세에 대한 이야기를 작년 설교 중에, 했던 적이 있습니다.
김병세는 모스크바에 유학을 가서, 한인목사님을 통해 성경을 얻어,
그것을 열심히 읽는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신론의 교육을 받은 그였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통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얻게 하며,
그 받은 구원을 성장하는 믿음을 통해 자라게 합니다.
그 말씀은 내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영혼을 정결케 하며,
나의 영혼을 강건하게 하며, 그리고 나의 영혼을 자라게 합니다.
그 말씀이 주는 유익은 나에게 삶의 힘, 필요의 공급, 하나님의 응답,
문제의 해결 등을 줍니다. 고로 그 말씀을 정기적으로 섭취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섭취는 영혼의 유익을 주며,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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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생활의 이유와 유익

출 15:1-18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까지 애굽의 군대의 추격을 받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200만명이나 애굽의 노예를 잃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부하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애통하며 장례를 치루고 난후,
그들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두려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전차 600대를 앞세우며,
며칠동안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홍해바다앞에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바다가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600대의 전차가 달려오고 있어,
모두가 죽을 상황, 독 안에 든 쥐(A rat in a trap),
진퇴양난(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라는 말처럼
앞, 뒤, 좌우 다 돌아보아도,
그들은 살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민족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받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고통의 소리에 신음하였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주받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속박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포들 중에 그곳에서 탈북 하시는 분들은 살 희망이 없으니 탈출합니다.
출애굽 하듯, 그들은 그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홍해바다 앞에 처한 위기의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서 그 바다를 열고
바다의 열린 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의 교회에 교역자 일일 수양회를 바닷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잦은 흐린 날이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육지에서 조금 바다가로 나갔습니다.
제가 수영을 하는 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
제가 수영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규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저의 등뒤를 누군가가 힘을 받치면서 저를 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은혜 받았을 때에,
당시에 젊은 나이에 저는 신경성위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먹어야 되고,
만성적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저의 마음에 평안함이 왔을 때,
저는 그 신경성 위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님을 믿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위장병이 고쳐졌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와서는
혼자 뒷산에 올라가 오후 내내 주님을 찬송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은혜의 깊음에 잠기다 보니,
저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저 하는 강렬한 마음이 일곤 하였습니다.
그런 찬송 부름의 습관은 바로 저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격을 기쁨으로 노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밤새껏 동풍이 불어서 바닷물을 두쪽으로 물벽을 세워
그 사이를 육지처럼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그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나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구주 하나님께 찬송드림은 당연한 신앙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로 표현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 정, 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중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어
정서적인 믿음의 단계인 마음의 감격이 정서적으로 찬송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세상에 어느 음악이든지,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찬송생활은 크리스천음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음악은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음악은 성도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유명한 신학교교수님의 여고생 딸이
영적으로 공격을 받아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귀신의 영향이 점점세워져 결국에는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딸에게 있는 귀신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딸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은 그녀가 자주 들었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록음악에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단적인 타락한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음악을 조심스럽게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그런 나쁜 음악에 오염되어
정신과 마음을 아울러 더럽히게 하는
악한 영에 열려, 자신도 가눌수 없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부드럽게, 음악이 없다면 인생의 삶이 삭막합니다.
슬플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고, 기쁠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마음이나 듣는 기쁨은 마음의 정서를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찬송하는 일은 더욱 영혼을 강화, 마음의 정서를 편하게 함과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더 우리의 마음을 이끌리게 합니다.

성경에는 단체나 개인이 찬양이나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기사들이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대하 20: 1이하에, 남 왕국 유대의 나라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유다는 막을 힘이 없어,
군대의 힘이 약하니, 긴급히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군대가 평소에 훈련되거나 적들을 대항할만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왕으로 비롯하여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력이 연합군으로 편성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의 군대 앞에
레위족속들의 성가대 앞세우며, 찬송을 부르며, 적진으로 나가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하나님께서 적들의 전력을 상실하게 하시므로,
적의 연합군은 서로 반목질시하여, 서로 죽이다가,
결국에는 다 전멸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을 승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전장에 널려있는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잃었던 것을
불레셋의 나라의 족속들에서 되찾아올 때에,
춤을 추면서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은 때로는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눌수 없는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흥겨워서 춤을 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실때에
그들과 함께 찬미하시며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4:26절에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첫순교자 스데반의 집사가 원수들로 부터 무수한 돌을 맞으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순교하는 순간에
스데반은 자기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며,
그의 은혜를 유지하는 신앙에 활력이 됩니다.
늘 찬송을 가까이 함은 크리스천의 삶의 승리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송구영신 예배 시에 말씀 드렸지만,
제가 새벽에 찬송을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천국의 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찬송의 유익은 성도의 신앙의 자세의 나약함을 강화시켜줍니다.
찬송할 때에, 성도들에게 들어있던 부정적인 마음,
나약한 마음에, 강한 의지와 용기의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찬송은 우리에게 또한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늘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명랑한 얼굴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의 삶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며,
그 구원과 은혜의 감격은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찬미하며 사는 성도들로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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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

(로마서 10:8-17)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링컨의 고백대로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할 생명의 씨앗으로
그것을 받으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하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
말씀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시다.
그 말씀 (로고스)은 만물의 원리이며, 생명의 가르침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기록된 성경의 주인공이시다.

마틴 루터는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말구유라고 하였다.
성경을 어디를 보아도 거기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담을 수 있으며,
우리의 입술로 전달되고, 알려진다.
그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 들려지게 하는 생명의 진리이며,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말씀은 우리의 심령 안에 믿음을 심는 씨앗과 같다.
고로 성경은 믿음의 책이며, 동시에 생명의 책이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 손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말로 고백하므로 자신의 말에 의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며,
자기인생이 결정이 된다. 예수님을 나의 입술로 즉 나의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시인하는 일로 인하여 죽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시대나,
공산치하에서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우리의 믿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하신 일들을 믿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심이고,
그의 부활하심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승리의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죽음을 이기는 것이며,
인생의 저주받음에서 생명을 얻는 축복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네 마음 속에 주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들을 믿는
마음의 믿음은 그분과의 신뢰에서 나온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는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받는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죄와 죽음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분은 해결 및 해답을 갖고 계신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가 연결된 존재이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건강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첫번째 오는 축복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의 상태이다.
주님을 믿는 인간의 마음은 수치심과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자유를 얻는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상태가 된 인간의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영혼의 만족과 온전한 자아가 이루어 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의 잔은
마음에서 흘러 넘쳐 밖으로 나온다.
우리의 입을 통해 찬양으로, 간증으로, 전도로,
그리고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더 나아가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한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영혼이 경험하고, 육체도 느끼며, 삶을 통해서도 경험한다.
단지 믿어서 나중에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다.
그분의 인도와 섭리를 통해 때로는 훈련을 받고, 고난도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은 신앙 안에서 하기에 쓸모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며, 우리자신을 성숙하게 한다.

성경 말씀 속에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약의 이사야에서 핍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궁핍하거나 곤란하여,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갖지 않는다.
주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 수치심안에서 고통 한다.
그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주님이 변호사가 되어
우리를 영원한 수치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불명예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도 그분을 찾고 나오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푸시는 선물이다.
주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나를 믿는 사람들이
죽음의 길에서 생명을 얻고,
고생스런 인생길을 풍성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믿는 사람은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통하고,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런 것들을 다 이기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해주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살맛이 있는 인생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자라게 하시며,
마음에 조화와 풍성한 만족의 상태에서 살게 한다.
그리고 실제 삶의 필요한 자원들을
언제나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 공급하시며 돕는 손길들을 허락하신다.
고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그분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산다고 시편의 시인처럼 고백한다.

주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며, 하나님은 기도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인생들이 구해달라는 울부짖음에
결코 외면치 아니하시는 능력이 많으신 전능자이시다.
그분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수 있는 준비를 다 해놓으신 분이다.
지금도 그분은 이세상에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려하시며,
우리를 보존하시며, 돌보시며, 인도하신다.
고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필요할 때에 찾으면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분이며,
늘 그 분이 주시는 힘과 지혜와 도움의 손길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속 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라야 즉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그의 구원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등 우상에게 자신의 인생을 도와 달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비참함 속에서 살고 있다.
미래의 갈 길도 모르고, 저주받은 인생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 믿는 이들도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먼저 주님을 알고 믿었던 이들이
가족 중에든지, 혹은 친구나 아니면 전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지나가는 이들이 전도하였든지,
좌우간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고로 자신을 전도한 전도자가 있으므로 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성도들이 전도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직무유기이며,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은 구원얻을 사람들을 전도자를 통해 불러내신다.
그리고 나중에는 구원얻은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전도자로 보냄을 받아,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한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의 발길은 가벼우며,
그들의 도착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의 긴 70년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예언자들을 통해
그 노예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을 날이
곧 다가 오리라는 것을 외치는 예언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좋은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바벨론에서의 노예해방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속에 그는 이스라엘 민중이
가장 애국자로 여기는 예언자로 여김을 받았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야 예언자라 할 만큼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명을 받은 예언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그 예언자는 듣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할 책임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을 전하였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한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그것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결국에는 불순종에 빠져 자신을 향한 구원의 말씀을 놓치게 된다.
때로는 전도자는 전도를 받지 않을 때에 예언자의 탄식처럼 답답하지만
전도해야 할 책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이
그 예언자들이 했던 것처럼 전해야 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시키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다.
이 성경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고 영생,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라고 요한 복음에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내 말은 생명이요, 구원이라 하셨다.
사도 요한은 성경즉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기록한 목적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에 심겨져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한다. 고로 말씀은 믿음을 낳게 하는 메시지이며,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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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로마서 10:8-17

세례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세례를 받을 때에 목사님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
글쎄요, 당시 저는 잘 믿는 축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 생활을 잘 합니까?
구원받은 사람 쪽에 끼였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도 폭발 식 전도 방법에서 훈련받은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 당신이 세상을 떠나, 당신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나 간다면,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을 확신합니까?

장례식에 가보면,
어느경우에는 신자들이 오랜 교회 생활을 해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 했던 이들의 장례식에 그 영혼이 떠날 때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몸 상태를 보고 대략 짐작을(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에 초상 예배를 많이 치렀습니다.
그리고 있을 미국에서도 장로님, 안수 집사님의 장례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물음이나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을 갖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성경 로마서는 분명히 구원은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실상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에, 물고기 표시를 합니다.
서로 당시에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 사람은 잡혀가거나 사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끼리 암호로 표시하여 믿습니다.
헬라 어로 물고기의 뜻의 익수스라는 말은
그 앞 글자만 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믿었던 초대 교우들은 믿음은 생명과 바꿀수 도 있는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의 생명을 의지하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신자들을 구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은 자신 행위에 대해 근거를 삼는 율법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며,
자기 중심적인 종교 헌신이나 생활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이 이루신
그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의 길을 믿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죄의 짐을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짐을 해결하여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함을 얻습니다.

복음을 믿는 데에는 그 믿음의 현상이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이나
그리고 이해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생각으로 그 사실들을 믿습니다.
자신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저주받은 자리에서 살리기 위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원을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동이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마음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의 크신 희생에 따르는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사랑을 경험으로 체험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그분이 내리시는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그 사랑에 대한 응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강단이 나무 강단이고
신발을 벗고 단위에 오르는 곳에 있습니다.
거기를 걸레로 닦을 때에 한 없이 주님의 사랑이 감격스러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변소 청소나 교회 탑 꼭대기에 올라가
성탄 츄리를 달 때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즐겁게 그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셋번째 단계에는 의지적인 헌신의 결단이 있는 단계입니다.
저는 주님으로 부더 받은 그 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
자신의 일생을 주님에게 드려야 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신앙에는 의지에서 헌신적인 결단이 나오며,
결단 후에 실질적인 주님에게 헌신하는 삶이시작됩니다.
그후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며,
자신의 생활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간증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는 늘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헌신된 마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님을 위한 헌신의 삶의 지속되었습니다.
믿음은 전인적으로 자신을 주님에게 드리고,
고로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신앙 생활의 단계에 나갈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듯, 지,정,의,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이나 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정의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드리며, 자신의 중심인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갈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의 삶을 삽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그 마음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
무엇보다도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맛봅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해결을 받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면 마음이나 정신적인 문제에서 자유를 얻고, 해결을 받습니다.
과거의 상처받은 일들, 현재 자신의 마음을 누르는 깊은 근심이나
걱정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영혼의 우선순위를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는 일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해결이 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의 중요성이나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압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한 말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
그 영향 아래에 삽니다.
날마다 죽겠다 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안 된다. 하면 안됩니다.
기쁘게 삽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그들은 주님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신앙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생활이나 삶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입니다.
나의 일도, 나의 인생 철학도,
나의 삶도 다 내입에서 나간대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고로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기이한 도움을 체험하는 경험을 통해 간증이 나옵니다.
자기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 동행의 신앙,
즉 자기만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천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
인생의 실패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성공하는 이야기,
질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치유의 간증 등은
그것을 듣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과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나님 체험의 자기 고백이며
하나님 신앙한 사람들의 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는 비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생활의 현장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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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일꾼이 되라

마태 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그저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서 무위도식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라기 보다는
오히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가며,
그곳은 마치 천국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으며,
자신의 수고 한 일에 상급을 받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주인이신
그를 섬기는 종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일도 국민이 합니다.
국민이 주인이기에 국민을 섬길 지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고로 지도자는 국민들을 위해 자기의 직무를 다해
국민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좋은 일꾼이 되어야 좋은 지도자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목양하는 목회자도
하나님앞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자기의 본문을 다하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입니다.
성도님들도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에게 맞는 권한이나 능력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따라 달란트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네 인생을 사는 각 사람에게 크게 세가지로 주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 생명유지나 인생을 사는 것을 위해 필요한 시간과 건강입니다.
2.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의 위치를 허락하십니다.
가정에서 주부의 일들, 남편의 일들 자녀의 일들, 지위나 권한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에 충실하는 것은 자기의 위치나,
해야 할 일을 알면 그 일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돈을 버는 일등도 자기의 본분을 하는 것입니다.
3.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재능이나 능력을 활용하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에게 맞는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마침주인이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주인이 부재중에, 종들은 자신의 일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11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는 비슷한 내용이나 거기에 좀더 하늘나라의 주님과
당시의 유대의 종교적인 현황에 있는 경우를 빗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 사람의 신실한 청지기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나
애굽에서의 총리지도 성실하게 일을 수행했습니다.
신실한 청지기로서의 요셉은 주인이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할수 있고,
주인의 유고시에도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으로 우리에게 여러 달란트를 활용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시간이나 지위나, 소유물이나 재능등 여러가지 것으로 인생을 살면서,
특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성도들 각자도 자신이 받은 은총을 잘 간직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너희가 떨림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도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기의 영혼을 돌보며,
자신의 신앙을 키우며, 주님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달란트비유에서 책망을 받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으로 붜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좋지 않은 일꾼으로 여김을 받는데서 자신을 지키려면,
세가지 면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자신의 삶을 두고 게으르지 않으며, 또한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해야 할일에 대해서 어리석은 태도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전체 자기의 인생에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목표하는 바도 이루고,
원하는 일들도 할 수 있으며, 좋은 일을 많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을러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열심히 사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하는 일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실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몰랐습니다.
주인의 의도를 무시하고 오해하였습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인생의 원리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생들에게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일을 맡은 자입니다. 일에 충실한 그 사람이 좋은 일꾼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자신이 주인대신 나서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의도를 보면 주인에 대해 불만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품습니다.
범죄인들도 원망하는 마음으로 죄를 범합니다.
얼마전에 한국에 해병대 초소에서 무기를 강탈하고 병사를 죽이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애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볌행을 저질러 닸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신실한 일꾼으로 살려면 먼저 자신을 잘알고
자기의 위치나 역활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아는 일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신자는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을 잘알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도 자신도 알고 인생도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솝이야기 중에 강아지와 당나귀가 주인이 기르고 있는데,
애완용인 강아지는 주인의 사랑을 받아 집안에 키웁니다.
그런데 당나귀는 노동이나 운수용으로 쓰임을 받는데,
어느 날 당나귀가 강아지만 사랑 받는 것을 생각해,
자기도 그런 주인의 사랑을 받으려고 생각해
주인이 자는 방에 들어가 사랑을 받으려다 주인의 노여움을 받아 쫓겨 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력서를 낼 때도 자기의 할일에 대한 분명한 명세서를 쓰는 일이 필요 합니다.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그 일을 잘 하는 비결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실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익을 남겨야 하는데, 주인의 것을 허비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은 하늘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무엇이든, 인생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원리로 종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납니다.
좋은 일을 심으면 좋은 것이 나고, 귀한 일을 심으면 귀한 것을 얻습니다. 반면에 나쁜 것을 심으면 좋지 않은 열매를 거둡니다.
주인은 본문에서 종들에게 자신의 받은 것, 그 달란트로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런 주인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받은 것을 썩여 두었습니다.
아무일도 안한 것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실업의 상태는 답답하고 고민 스럽지만, 일을 할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이 있는데도 자신의 처지를 무시하여 자신의 실업의 상태를 유지하고 산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삶의 태도입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며, 자신의 존재이유이며, 자기 표현이나 자기 성취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두달란트, 다섯달란트 받은 이들은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좋은 일꾼으로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시며, 신자들의 주인이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각자에게 더 나아가 그의 아름다운 속성중에 하나인 그의 탁월하심과 같이 우리에게 자신의 일에 탁월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탁월한 이들중에 이름을 높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문에 요즘 국민들이 김연아를 보면 살맛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반이상이 한 여고생의 탁월함의 상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여학생이 피겨 스케이트로 세계대회에서 상을 받아 그녀의 탁월함 때문에
국가의 선양을 올리니
국민들의 마음이 시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 보면 자기일을 충실하여 베스트 하는 사람은 왕 앞에 선다고 하였습니다.
가끔 뛰어난 연주자들이 대통령앞에서 연주할 때 라든지,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인 학생들이 대통령앞에 가는 일입니다.
옛날에 클린턴 대통령이 학생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이 불러
초청을 백악관에 가서 악수하였던 경험은 훗날 그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중에 탁월하심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하나님의 속성중에 그는 탁월하심니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탁월함을 원하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좋고 신실한 일꾼으로서의 삶를 통해
그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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