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2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19
    인생의 진정한 도움은?
    목동
  2. 2007/07/12
    인생의 노래
    목동
  3. 2007/07/06
    하나님의 약속
    목동
  4. 2007/07/01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목동
  5. 2007/06/30
    계시가 주는 의미
    목동
  6. 2007/06/27
    믿음의 세계
    목동
  7. 2007/06/21
    믿음의 시련
    목동
  8. 2007/06/19
    고난의 유익
    목동
  9. 2007/06/16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목동
  10. 2007/06/15
    영적인 족보
    목동

인생의 진정한 도움은?

이사야 31: 1-9

1. 도움을 얻으려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과 전차와 마병과 같은 이집트의 막강한 군사력은 의지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시므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고 일어나셔서 악을 행하는 자기 백성을 치시며
    또 그들을 돕는 자들을 벌하실 것이다.
3.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에 불과할 뿐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도 고기 덩어리일 뿐 영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뻗치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고 도움을 받는 자도 쓰러져 다 함께 멸망할 것이다.
4.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고 으르렁거릴 때
    목자들이 몰려와서 아무리 소리를 치고 떠들어 대도 사자는 놀라거나
    당황하여 달아나지 않는 다. 이와같이 전능한 나 여호와도 시온산에서 싸울 것이다.
5. 새가 둥지위를 맴돌며 자기 새끼를 보호하듯이 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6.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으나 이제는 그에게 돌아오라
7. 너희가 은이나 금으로 만든 죄악의 우상들을 다 집어 던질 날이 올것이다.
8. 앗시리아는 멸망할 것이나 사람의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에 망하고 말 것이다.
    앗시리아의 사람들은 그 칼앞에서 도망할 것이며 그들의 젊은이들은 노예로 잡혀갈 것이다.
9. 그들의 황제는 놀라 달아날 것이며 그들의 장군들도 공포에 질려
    그들의 군기를 버리고 달아날 것이다. 이것은 여와와의 말씀이다.
    그의 분(분노)은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타고 있다.

모든 인생들 중에, 크게 두 종류의 삶을 생각해 볼수 있다.
그 한부류는 역천자로 사는 자로 하늘의 뜻을 거스리고 사는 경우인데,
하늘을 거스리는 자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 가게 한다.
자연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자연의 원리를 거역해도 해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는다.
반면에,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순천자는 그의 인생이 흥하는 길을 살아간다.

고로 하늘을 향해 겸허히 살아가는 자는 하늘의 순리에 따르며, 하늘의 이치를 무시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살므로 그의 사는 인생이 평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늘 듣고 지내는 이야기 가운데에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인생을 돕는 길은 하늘의 뜻을 따르며,
그 하늘의 도움을 의존하는 것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늘의 존재를 바라고 믿고 신뢰하고 사는 길이 자신의 인생을 돕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신의 도움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신을 외면하고 사는 자신이 세상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에,
인생이 당하는 어려움은 대개 자신으로 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하지 못하는 한계의 존재이다.
더 나아가 죽은 자에게는 인간의 도움이나 돌봄이 쓸데없다.
살아있을때에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도움은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약해져 스스로 생존하기가 힘든 상황이며,
주변에 쳐들어 오는 적을 막을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라가 약하여 주변의 강한 나라에 도움을 구하는데,
다른 나라가 더 강하게 쳐들어오는 상황이라면, 그도움은 쓸모가 없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며,
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악에 대해 반드시 징벌하신다.
그가 정한 심판을 피할수 있는 길은 그에게 나와 잘못을 뉘우치고
그에게 선을 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을 받는데서 구원받는 길은 그에게 나오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나오지 않으며, 그분을 찾지 않는 허물을 범하며,
자신들의 악을 뉘우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주변의 다른 강대국을 의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기백성을 징벌하시고,
그들을 돕는 나라들도 함께 어려움에 처하도록 하신다.

인생이 도움을 구하려고 여러가지를 시도하지만, 인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도움을 얻으려는 것을 그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먼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지름길을 제쳐놓고, 먼길을 돌아가는 어리석음이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길을 버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으면,
그일로 인하여 더 자신을 분요하게 만들 것이다.
인생이 자신의 일에 대해 잘 살펴보는 것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잘 분석하여,
그문제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악한 행실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징계를 받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며,
자신들의 문제를 하나님을 제치고 다른 데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의지하여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이스라엘이나 그를 도울려는 이집트도 모두 패망하게 된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려고 할때에, 양들을 보호하는 목자는 더 강해야 그 사자를 물리칠수 있다.
그러나 그사자보다 강하지 않으면 그 사자를 이길수 없다.
인생의 일도 그들을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능력자라야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인생을 잡고 있는 죽음의 문제나,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은
그것을 해결한 사람(메시야, 구세주)에게 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한 해결의 길은 그에게로 나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새가 둥지위를 맴돌며,
자기새끼를 보호하듯 자기의 도움을 받을 자들을 도우신다.
변변한 군대나 기병이 없었던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을 물리칠수 있었다.
당시 앗수르의 군대는 18만 5천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 성을 무너뜨리려 접근하였으나,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로 인하여,
그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패전하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겠다고 여기시면 누구도 그의 손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쳐부수지를 못한다.

인생의 길에도 그의 보호하심에 있을 때에만이 진정한 안정된 삶을 영위할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이나,
환경의 위협이나, 주변의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는 보호하시며 그 인생들을 지켜주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 범죄하여 파멸의 길에 있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살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이 점점 약해져 가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웃나라의 풍습을 좇아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의 행위가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 당시 유다를 다스리는 나라에 신실한 왕이 있어서,
강대국의 침략을 그의 신앙과 그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가 파멸의 위기에서 구출되었다.

유다를 침략을 한 앗수르는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칼에 모두가 전멸되다 시피 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천사가 그 막강한 군대를 힘도 쓰지 못하고 패전하게 하였다.
결국 앗수르는 군대를 이끌고 온 왕은 그의 군대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후에 그는 죽게되고 그나라는 약하게 되었다.

그 앗수르의 왕과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의 존재에 대항하여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맞아 파멸하고 말았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죄와 악을 향해 그의 심판으로 나타나신다.
고로 인간들의 악한 상태와 죄악의 행위에 대해 심판하시며 파멸하신다.

하나님앞에서 선하게 살며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의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고로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그로부터 해결을 받고 살수 있다.
모든 불행의 역경이나 고통의 시련가운데에서도
그의 도움은 능히 인생들을 마음편히 살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의 돕는 손길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인생의 수치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요인이 되게하는 것이다.
고로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도움이 어디서 오는 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생의 노래

예레미야 애가 1:15-20

15. 여호와께서 나의 모든 용사들을 짓밟으시고 큰 군대를 모아 나의 젊은이들을
     부수시며 내 백성을 포도즙틀의 포도처럼 밟으셨다.
16. 그래서 내가 울지 않을 수 없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구나.
     나를 위로할 자가 내 곁에 없고 내 영혼을 소생시킬자가 멀리 떠나고 말았네.
     원수들이 나를 이겼으므로 내 자녀들이 처량하게 되었구나.
17. “내가 손을 내밀어도 나를 도와주는 자가 없다. 여호와께서 내 주변에 있는
     자들을 내 대적이 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나를 더러운 물건으로 취급하는구나.
18.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신데도 나는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말을 듣고 나의 고통을 보아라. 나의 처녀들과 청년들이 다
     사로잡혀갔단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나를 배신했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목숨을 이으려고 먹을 것을 구하다가 성 안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20. “여호와여, 나의 고통을 보소서 내가 주를 거역한 죄 때문에 이처럼
     번민하며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칼이 사람을 기다리고
     집안에는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노래가 있다. 인생의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표현하는기쁨의 노래가 있다.
그 기쁨의 노래는 인생의 일들중에 축하와 감격이 있는 때에 영혼속에서 기쁨이 솟아난다.
기쁨은 감격과 벅찬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환하게 밝게 피어나게 한다.
반면에 인생에는 슬픔의 노래도 있다.
슬픔의 노래는 삶의 절망과 좌절속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인간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문은 고통의 울부짖음과 같은 멸망을 바라보는 시인의 고백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전쟁의 도탄에 빠져있는 것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자신의 조국이 파멸되어가는 것을 비애의 노래로 표현하고 있다.
유다 국가는 온국민이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전쟁을 통해
모든 나라의 요소인 사람들과 땅과 그들의 재산들이 모두가 다 쑥밭이 되었다.

고통스럽고, 암울한 처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자기비애에 빠지는 경우 일 것이다.
자기연민, 자기애증, 자기 탄식, 자기번민등 인생을 살아갈때에,
깨닫게 되는 자신에 대한 느낌들이다.
고통의 노래는 인간영혼의 신음하는 소리이며, 깊은 내면의 절규와 같이 내뱉는 탄식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물으시고 그민족을 주변의 강대국을 들어, 심판하여,
그들의 나라에 속한 군대들을 패배시키신다.
나라를 지키는 용사들인 젊은이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죽어가며,
백성들은 보호와 방패막이가 없어져,
전쟁의 패전으로 인하여 약탈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신의 삶이 마치 이렇게 전쟁에서 패전하여 무참히 짓밟히는 처지와 같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앞을 보아도 갈길이 막막하고 옆을 보아도 소망이 없는 경우가 아닌가?
마구 짓밟히는 듯한 경우라도 결코 자신의 삶이나 처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운데에서라도 우리의 생은 살아야 할 순간들임을 잊지말며,
그런 속에서 값진 교훈들을 발견할수 있다.

예레미야는 조국의 형편이 암담해지며, 동포들이 당하는 어려운 처지를 바라보며
동족들의 아픔에 대한 애끓는 심정이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비통한 심정을 위로받을 길이 없으며,
선민 이스라엘의 민족의 중심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하는 동족들의 어두운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신이나 동족들의 처지를 회복시킬 만한 요소는 없고,
심판으로 인해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만이 놓여 있다.
자신들의 원수들인 악한 강대국의 침략으로 패배의 쓴 잔을 마시며,
패전의 처지에서 온갖 약탈과 잔악한 행위의 희생양으로
당하는 민족의 처지에 마음깊은 곳에서 고통의 탄식을 울부짖고 있다.

사방이 꽉막힌 듯한 처지에 있는 자신의 생활을 두고 울고 싶은 심정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있을 때에,
주변에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참담함이 극심할 것이다.
그때에는 비통의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지만,
비록 자신을 위로할 자가 없어도 자기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연약하고 병든 자신을 돌보아 줄수 있는 존재를 찾을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때에 우리를 사람을 알아볼수 있다.
자신의 친척이나 혹은 친구들이나 우인들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교훈을 오히려 힘든 일을 만났을 때에 더 값진 것을 배우게 된다.
더 나아가 어려운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항상 남을 돕는 자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처지는 자신의 민족인 유다민족의 처지와 비슷하다.
유다민족은 강대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처지이듯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동족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치 않으며,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대로 살아간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핍박하며,
그를 더러운 물건 취급하듯 그를 괴롭히며, 고통을 준다.
유다나라도 주변의 침략국에게 힘없는 자들처럼 침략의 약탈에 방치되어
패전국의 당하는 갖은 수모를 겪는다.

자신의 어려움을 당할때에 특히 마땅히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외면하게 될 때에 배신감도 들고, 모멸감이나 허탈한 심정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을 버림 받은 존재로 혹은 죄지은 사람모양 죄인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때에는 참을 수 밖에 없으나, 그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더불어 주변인들에게
다시 재기하는 오뚜기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인생의 일들은 업보로 인하여 생겨나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한다.
인생의 당하는 고민이나 고통의 경험은 인생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가운데에서 비롯 어려운 가운데에 있지만, 인생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 당시에 살아가는 인생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감이나 가치를 알아가게 된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은 인생의 다른 어떤경험보다도 인생에 교훈이나 가치를 주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자신이 당하는 민족이나 개인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그는 비록 힘든 일이라도 그 가운데에서 신실한 주변의 사람들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들을 없을 뿐 아니라, 찾아도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들 뿐이다.
왜 사람들사이에 서로 배신하는 일들이 일어날까?
그것은 인간속에 서로에게 신뢰를 줄 만한 신실한 모습이 없기에 그렇지 않을까?
타락된 인간성속에서 자신에게도 신뢰를 얻을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거북하지만
사람은 사실 그런 존재의 상태라는 것을 부인할수 없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그런 불신이나 배신의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난다.
그런 와중에서 사람들은 서로 저마다 제 살길을 찾으며,
자기 생존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자기 인생의 생존에 대한 노력은 자기 생명에 대한 가치추구이상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실상은 인생에 있어서 자기 생명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의 생존에 관심이나 염려에 집중하는 것이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인간생명에 대한 의미와 가치발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인간의 번민이나 고통은 신앞에 범죄한 인간의 버림받은 상태에서 오는
필요악으로서 인간의 생활에 자주 등장하는 삶의 고통이며, 인생의 딜레마이다.
이런 곤고하고 답답한 인생의 길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길은 보이지 않고,
자신을 점점 나약하게 하며, 병들어 가는 자신의 절망속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자신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조의 시작이 된다.
그때부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의 해결자이신 신에 대한 목마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고로 사람은 기쁨의 노래가 있는 결혼식에 가서 보다는
서글픔의 노래가 있는 초상집에 가서 더 많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의 교훈을 배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나님의 약속

에스겔 16: 59-63
59. “나 주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약속을 무시하고 계약을 깨뜨렸으므로
      네가 행한 것 만큼 내가 너에게 갚아 주겠다.
60. 그러나 네가 어렸을 때 내가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1. 네가 네 자매인 사마리아와 소돔을 맞아 들이게 될 때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너에게 딸로 줄 것이나 너와
     세운 계약때문은 아니다.
62. 내가 너와 새로운 계약을 세울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63. 네가 행한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에 너는 그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네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나 주여호와의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신 후, 그들이 이지상에서 생육하고 창성하기를 축복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세운 법칙을 깨뜨리고, 그들은 세상에 내 좇김을 받았다.
그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시며, 그들이 회복될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제시하는 분이며,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약속은 그의 전체의 메시지를 통해 역사를 통해 이어져 시작부터 과정을 거쳐,
완성을 향하여 나가고 있다. 이미 그의 약속하신 많은 내용이 실현이 되었으며,
그리고 지금도 그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루어질 많은 약속이 예언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하나님에게 나아오며,
그분이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많은 축복의 약속을 하신 것을 받는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사람들에게 그의 명령과 함께 약속을 주셨으나,
그들은 그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허물을 범하였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약속으로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며, 그의 약속은 신실하신 그의 성품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신다.
성경은 세상의 시작에서 부터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계약문서이다.
그가 사람을 부르실때에 그의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계약을 어기고
그들은 그의 명령을 소홀히 하며, 이방신들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삶을 실패하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유지하며, 그들의 실패를 넘어가,
인류전체를 향한 구원의 확대로 그의 약속을 제시한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을 부르사 그들과 계약을 맺어,
선민으로 살도록 하여 그들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구원의 계획을 이루고저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세우는 일을 하신다.
그것은 만민을 위하여 세상을 구할 메시야를 보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유다백성은 사마리아의 혼혈민족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시하며, 그들을 배척하였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윤리적으로 악한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듯,
유다백성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통해 택한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신다.
특히 이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본연의 마음속에 부패한 상태를 간파하시고,
인간의 내면의 타락된 상태를 회복케 하기 위해 그의 영을 인간의 마음에 보내
그들이 영적인 교통으로 하나님과 교류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속에 자신의 영을 보내시는 약속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창조주와 인간의 부모로서의 관심과 사랑을 통한 구원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속에 심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진정한 회복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할 뿐아니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과
그 메시야가 이룰 구원의 길을 통해 오는 그 하나님의 영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사람마다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게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며, 그분의 인간구원을 위한 약속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도,
그들의 행위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은 부끄러운 상태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앞에서 범죄하므로 그의 약속과 인간에 대한 성실함이 문제시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약속을 이루기를 원하며,
그 약속을 따라 인간을 새로운 차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그 약속은 인간에게는 새로운 기회이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며,
인간의 장래와 그들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통해 인간의 미래와 역사의 종말에 대해
신의 정해진 계획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나 장래를 인도하신다.

인간과 인간의 약속도 인간사회에 중요한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의 언약을 통해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개인과 개인의 사이의 관계에서 있는 약속은 중요한 인간사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부부가 서로 장래를 약속하며,
미래의 가정생활에 대한 안정과 번영을 기약한다.
사회나 기관이나 각각의 단체규약을 통해
상호약속을 지키므로 사회적관계와 질서를 유지한다.
국가와 국가간의 계약이나 약속도 국가간의 상호생존이나 번영을 위해
서로에게 상호유익을 위해 약속을 유지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상호간의 약속은 언제든지 깨어지기 쉬우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그의 약속은 결코 변치 않는 그의 성품과 같이 여전히 인간에게 구원과 축복을 주는 약속으로 남아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물이 사람의 몸의 전부로 의루어 졌다고 과언이아니다.
물이 몸의 90% 이상을 차지함은 물이 우리 몸의 구성요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수 있으며,
몸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근원이 물에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을 형성하는 기본으로 인간생활의 음식에 모든 영양의 근본을 제공한다.
물맛이 좋아야 한다. 물이 기본이다. 물의 자질이 좋아야 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물이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인 비는 사람들이 짓는 농사의 근원을 이루어 간다.
그 비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물로 생물을 자라게 한다.
구약의 엘리야는 비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비오기를 또한 기도하였다.
하늘의 물을 받지 않고서는 땅의 농사를 지을수 가 없다.

언제 마시는 물이 제일 맛있을까? 일을 하고서 혹은 운동을 하고 하고서
진한 땀을 흘리고 난후에 마시는 물맛은 갈증을 해소케 하는 맛있는 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피는 물로 이루어졌다.
피는 인간의 혈육을 의미하는 관계적이며,
인간의 삶에 쏟아붓는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적인 관계를 생각나게 하나,
물은 신이 주시는 모든 사람들의 목을 축이는 생명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피와 물까지 다 쏟아내셨다.
그몸에 있는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다 내어놓으셨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구원과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것이다.
그가 쏟은 물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물이며,
그 물을 마시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의 삶을 보장한다.
그 생명수는 영생을 누리는 그의 나라에서 마음껏 마시지만,
목마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생의 삶에도 그 물은
사람들의 갈증(삶의 의미와 가치, 생명의 분여의 축복) 을 해소한다.

물은 경계선이다. 모든 육지의 대륙을 갈라놓은 경계선의 역활을 하여,
사람들 사는 곳의 거주의 한계를 정함에 대해 물은 한 몫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레돈도 비취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물길을 따라 닿을 고국인
대한민국의 땅이 맞닿는 곳은 서로 물로 경계로 이루어 져 있다.
물은 인간의 삶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홍해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구분을 내었다.
노예와 자유민으로 사는 경계선의 역활을 물이 하였다.
요단강을 건너는 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들의 발이 밟는 곳에 흐르는 물이 멈추어 섰다.
노예로 살았던 땅과 이제 자유민으로 살아갈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을 갈라놓는 것이
바로 그 홍해의 물이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이 백성들이 되어가는 순례의 길을 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하는 세례(과거의 삶을 저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정표로서의 죄를 씻는 의식)의 의미로서,
광야에서 어두운 과거의 때에 살았던 풍습이나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였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 동산에서 흘러 나오는 강에서 여러줄기로 나오면서,
세상을 적시는 강물들로 나누어 졌다.
그 물의 한 분지는 생명수를 마실수 있는 천국의 샘이 있는 주변이 있었으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 차단이 되었다.
물론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도 제한이 되었다.
생명의 물은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었었다.
그 생명의 물은 이제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생명의 물을 마실수 있게 되어 있다.

고로 인간생활에 물은 생명선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그에게 나오는 사람마다 그를 통해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주리라 하셨다.
그 생명의 물은 인간의 갈증을 해소하는 역활을 한다.
목에 갈증을 느낄때에 물한잔을 마시면 마른 목을 축이듯,
자신의 영혼에 목마름을 해갈하는 그 생명수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심령속에서 솟아나온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계시가 주는 의미

계시록 1:1-3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곧 일어날 일을 자기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계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의 천사를 자기 종 요한에게 보내

   이 일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것, 곧 자기가 본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예언들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하며 그 자기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내용이다. 고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인 의도와 계획을 알려주고 있다. 종말에 있을 역사에서 일어날 많은 일들이 그의 계시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계시는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의 알려진 계시와 하나님의 알려지고 있는 계시가 있으며,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도 있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난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의 길을 완전하게 보여준 온전한 계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인간이 그 계시의 길을 따라 구원을 얻는 지식을 얻으며, 또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회복의 길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알려지고 있는 계시는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혹은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드러냄이 있다. 이 계시는 사람에 따라, 자신이 알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해의 표현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계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내용을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외에 그 종말의 일련의 사건속에서 이루어 질 다가올 계시적인 사건과 그리고 이세상을 넘어가는 영원한 세계의 상징으로서 알려질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늘의 계시는 장차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것과 그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늘의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파노라마와 같이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그를 섬기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의 계시를 보여주셨다. 그의 종들이 그의 계시를 통해 교훈을 받으며, 그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게 하신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로 그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주님의 계시를 알려주었다. 주님의 계시와 그의 하시는 비밀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진다. 주님의 말씀은 그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며, 그들에게 주님의 신실한 말씀의 은총과 말씀의 복을 부어주신다.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성도들은 그들의 삶과 생활을 통해 주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증거할 책임이 있다. 증인의 삶은 주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이다. 주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가롯유다를 제외한 모두가 다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순교로서 자신들의 증인으로서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 계시의 말씀을 증거하며 전달하는 요한은 마지막순간까지 말년의 세월들을 밧모섬에 유배되어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종말에 일어날 주님의 계시를 받아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천사의 인도를 받아 사도 요한은 종말에 있을 주님의 예언적인 일들과 하늘의 비밀들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모든 일들에 예언하고 있으며, 그 말씀은 인류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각개인은 물론 그 말씀에 의해 그들의 삶이 판단을 받으며, 심판을 받고 멸망받기도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으며 새로운 영광의 길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로서 알려지는 주님의 영언이다. 영언으로서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 임하는 생명의 언어로 역사한다. 이것은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 개인에게 주님이 열어보여주는 계시로서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 말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의 세계를 바라볼수 있으며,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달아 알수 있으며, 말씀이 명하는 바를 따라 자신들의 삶과 생활을 영위할 기초와 가치관내지 인생관을 세워 갈수 있다.

 

예언의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들은 모든 인류와 각 개인에게는 생명의 소식이며, 그 말씀들은 인류의 미래와 개인의 미래와 세계의 종말과 새세계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준비하고, 말씀을 통해 주신 그분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으며, 그분의 예언하신 모든 놀라운 일들이 정한 때와 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믿음의 세계

히브리서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2.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보고, 목표있는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은 목적지향의 형의 인생철학을 갖게하여,
그 목적을 따라 자신의 인생방향을 뚜렷이 설정하고 살아간다.

먼저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은 바라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향한 기대감은 그것에 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그것을 얻고자 하는 미래지향적이 태도이다.
믿음을 통해 바라봄이란 실현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증거를 찾으려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은 가시적이지 않아서,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나 현재성은 엄연히 실현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약속된 것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약속하신 바를 믿고 바라보며 살게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계시를 통해 그의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약속은 미래의 세계에서 이루어 질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미래의 약속되어진 바를 바라보고 살아간다.

믿음은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준다.
그래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미래의 것을 바라본다.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지만 약속된 시간에 이루어 지는 현재이다.
미래는 약속된 것으로 그 약속을 현실로 받아들고 살아가는데 믿음이 필요하다.
앞으로 이루어 질것을 미리 알려진 것에 대한 기대감을 통해,
그 실현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

믿음은 사람이 바라는 것을 추구하게 한다.
즉 이말은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바에 대해 믿음으로 나가며,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견지하여
결국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즉 믿음은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것이 미래의 언제가에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때에, 자신이 커서 무엇이 되겠다고 꿈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자신의 그꿈대로 이루어져
실제로 자신이 꿈꾼대로 된 인물이 되어진다.

꿈과 비전은 믿음이라는 바탕위에 세워진 인간삶의 희망의 동기부여의 밑거름이 된다.
꿈은 나이든 사람이 잠을 잘때에 꾸는 것처럼,
노년의 삶에도 꿈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 꿈을 바라보면, 소망스럽게 살게 된다.
꿈이란 사람의 생각에서 보다는 영적인 주체에 의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꿈이란 이상향을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의
마음의 이상을 이루어 가는 구체적인 대상이라 할수 있다.
꿈이 있으면 사람은 살아갈 동기부여를 갖고 살아가게 한다.
비록 하루를 살더라도 그 꿈안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비전은 꿈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이상적인 바램이다.
비전에는 구체적인 목적이나 목표가 있으며,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 대한 시간적인 계획과 노력의 시도들이 있다.
비전은 장래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가질수 있는 이상적인 바램과 그 시도들이다.
비전있는 젊은이들은 힘있고 활력있는 인생으로 살아갈수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구체적인 계획과 어느 가능성을 이루어내는 힘이 있다.
고로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지않은 인생보다는
많은 가치있는 것들을 이루어 낼수 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을 이루어내는 사람의 투자하는 시간이나 노력의 밑거름에는
그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신념에는 인간의 계획이나 목표하는 바램에 대한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약속이나 목적이나
혹은 신의 계획에 대해 바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믿음의 대상의 확실함이나 그 존재의 신실함에 의해
그 믿음은 절대불변의 확고한 것이 있다.

또한 믿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보게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현실의 세계에서 보지 못하는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것들이다.
영적인 실체들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창조의 영적의 세계안에 있는 영물들이 있다.
그 영적인 존재들은 크게 선한 존재들인 천사들과
그반대세력인 악한 영적인 존재(귀신)들이 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나타나는 일들중에 알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며,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세력들의 영향력을 보고 그 현상들을 이해력으로 살필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인간세상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나
영원한 일에 대한 것을 현재의 실체로 바라보게 하는 안목을 주는 것이
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다.
고로 이러한 믿음은 인간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들을 보며
주관하시는 신에 의해 주어진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며,
그의 하신 일들과 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하실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가 약속하신 바를 특히 장래에 대한 것들에 대해
그의 절대성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을수 있는 믿음이다.

역사속에 살았던 많은 인물들은 그들이 자신들이 신으로 부터 받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자신들의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분과 더불어 살았던 삶의 발자취들을 남겼다.
그래서 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귀감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를들어,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던 기독교 초기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게하는 위협과 무서운 핍박속에서 믿음을 지켰다.
그때에, 폴리갑이라는 교부는 당대에 그가 살았던 그의 믿음의 발자취가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했던 것은 그의 말년에 그가 고백한 신앙고백때문이다.
그는 신앙때문에 화형당하는 순간에 그가 믿는 구주에 믿음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그는 그의 신앙때문에 순교라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 76년의 생애에서 한번도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나 의심을 할만한 일이 없었기에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고백을 따라 순교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앞에서 있는 유일한 삶의 세계관이며 인생의 가치관이다.
믿음은 모든 세계와 그안에 있는 모든 역사에 대해 창조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세상종말에 대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의해 우연이나
혹은 그것의 돌연적인 발전에 의해 생겨난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속에 이루어진 그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그의 창조사역은 그의 전능하신 말씀을 통해 이루어 졌다.
그 말씀은 우주의 창조의 원리이며, 우주의 섭리의 중심에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자신이며,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메시야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며, 세상을 다스리며,
그의 심판과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모든 세상의 권력이나 세력의 힘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아래에 놓여 있다. 고로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중의 왕이시다.

믿음으로 보는 안목이 인생 현장의 모든 일들과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수 있게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실제들을 보게하며,
그 세계의 현상들과 그 영향력에 의한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할수 없는 일들도 믿음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통해
장래에 가서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며 이해한다.

믿음과 그 믿음을 따라 살게하는 소망은 인간의 삶의 방정식의 한축을 이루어 간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믿음안에서 그들의 소망을 안고 살아갔다.
삶의 원리중에,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상관관계를 통해
인생은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어 들인다.
고로 믿음은 정확한 인생의 가치있는 삶의 원리이다.
그리고 믿음은 인생현장의 철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신앙인의 귀중한 자산이다.
더 나아가 그 믿음은 인생의 현장에 나타날 성도의 무기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믿음의 시련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살 희망을 갖게 하셨으며
4. 썩지 않고 더럽혀 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에 간직한 축복을 여러분이
    받도록 하셨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때에 나타나도록 예비된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가지 시련으로 잠시 근심할수 밖에 없으나 그래도
     여러분은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7. 시련을 겪은 순순한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됩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고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9.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당하는 시련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삶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속에서 역사하신다.
인간의 시련가운데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고통받는 현장에 하나님의 귀가 열려 있다.

인생의 시련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찾게 한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게 한다.
시련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좌절하지 않는 하늘의 끈을 잡게 한다.
시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단련하여
더 강한 신뢰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이 겪는 시련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재료로 제공된다.
시련을 통해 사람은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든 일들을 감당할수 있는 자질과 성품을 키워준다.
삶에서 겪는 시련은 사람을 만드는 필연의 도구이며,
인생훈련의 기회의 장으로 쓰여진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므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는 시련을 경험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류의 희망을 잃게 하고 두려워 하게하는 죽음의 길을 통과하셨다.
그의 시련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므로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의 절망의 세계를 벗어나 부활의 희망을 갖고 살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의 예수를 보면서 죽음의 현실을 알게 하고,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역사를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거듭남의 삶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람들에게 주는 살 희망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의 현실에서도 살아갈 희망을 얻고,
죽음너머에 있는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련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단련하고 값지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은 그 시련을 통해 새로운 기회의 시간을 살게 하며,
새로운 성품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단련됨을 제공한다.

시련은 당장에는 힘들고, 괴로움을 주지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하게 인간속에 있는
악한 성품들을 정제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제련소에 들어가는 불순물이 더덕 더덕 붙어 있는 쇠덩이가 불같은 제련으로 정화되듯이,
시련은 사람들을 정화시킨다.

천국을 들어가려면, 시련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것은
시련을 통해 정화된 인격을 만들어 천국시민이 되게 한다.
고난은 사람을 연단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고난속에서 인내를 배우며, 인내를 통해 연단된 성품을 갖게 되어
살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꿈과 비전을 심어준다
천국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들로 차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존귀와 영광에 대한 축복이다.

천국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로 거듭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곳에 쌓아가는 보화는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갖고 있다.
그곳에는 죄와 악이 있는 더러움을 갖고서는 들어갈수 없다.
죄와 악을 벗어던지고, 정결된 심령이 들어가는 곳이다.
천국에서 보장되는 새로운 삶의 축복은
이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의 영혼을 만족케하는 생명의 강에서 나오는 생명수와 함께
그곳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누릴 자기조화와 자기 완성을 맛보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죄와 그 영향으로 인하여 모든 만물이 더러워 져 있으며,
만물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신음하며 새로움을 더 입으려고 한다.
그가운데에 더렵혀 지지 않은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라고 있는 하늘나라에서 살 영원한 삶의 기업이다.
그 기업은 하늘나라에서 얻을 영광된 인간의 삶을 보장한다.
그곳에서 생명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완벽한 조화와 이상적인 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말세에 나타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믿음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상태와 필요를 채워주는 축복을 가지고 있다.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벌거벗긴채
온몸으로 그러한 죄와 죽음의 절망을 안고
탄식과 한숨과 허무의 늪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절망과 저주와 파멸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희망과 축복과 새로운 삶의 건축을 세우며 살게 한다.

세상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환난과 시련에서의
보호받는 하나님의 도움심이나,
혹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종말의 시기에
겪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내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갈수 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에게
보이지않는 하나님과 그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역사하여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보호와 도움을 받게 된다.

신앙안에서 시련을 당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유익이 된다.
시련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한 신앙인이 될수 있다.
시련이나 고난이나 고통은 때로는 사람들을 약하게 하고 절망케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것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더 강해지며, 더 유익한 존재가 되고,
사물이나 사건을 생각하는 자신의 견해나 인생을 보는 관점을 더 깊이있게 해준다.

고난의 시련을 통과하는 자에게는
자기성장과 자기성숙의 열매가 있으며,
고난과 시련속에서 땀과 눈물과 피흘림을 가질만한 노력을 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나 인생에 대해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신앙안에서 겪는 시련은
신앙인이 갖기 쉬운 거추장스런 형식주의와
무가치한 종교의식의 불순물을 벗겨버리는 일을 한다.
신앙인들은 신앙때문에 겪는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순수한 신앙외에 갖기쉬운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것(인본주의위주의 공로사상,
인간의 진실한 것을 덮어버리는 외형지상주의내지는
하나님앞에서의 비인간적인 태도, 등등) 들을 버리고,
하나님앞에서 진솔한 사람들이 순수하고 정제된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핍박받는 지역에서 목숨을 내걸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순전한 황금같은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당하는 신앙의 시련은
이후에 하나님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것(성품, 약속, 섭리, 역사 등등)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었으나,
2000년 전후 즈음에 이스라엘 이라는 조그만 지역에서 33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보내셨다.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 오셔서
몇몇 사람들에게(수백만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자신을 알리셨다.
역사속에서 그분을 구주로 믿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으나,
그분의 삶과 그가 하신 사역에 대한 사실의 소식에 접하였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모시고 믿음의 선배들은 살아왔고,
지금의 신앙인들은 살고 있다.

신앙인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베푸시는 개인적인 사랑하심과 은총을 베풀어 주심에 응답하며
개인적인 관계와 친분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과의 개인적인 친밀함 속에서
약속하신 영적인 축복과 그 축복안에서 맛보는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그 기쁨안에서 영혼의 만족과 더불어 마음의 평안과
그분을 믿는 신앙생활의 가치와 의미안에서 즐거워 하며 생활한다.

인내를 통해 좋은 결과를 기대하듯,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그 하나님의 선물은 그의 약속하신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안에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하여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축복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는 만물보다 귀한 것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영혼이다.
만일 사람이 온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항상(시간과 영원의 차원속에서)
누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의미한다.
고로 믿음은 자신의 영혼이 고귀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난의 유익

고난은 인생을 강하게 한다.
고난은 평범한 삶에 도전을 주는 시련이며, 인간을 힘들게 훈련받게 한다.
고난은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참사람의 되어가는 과정을 모르는 사람의 삶과 같다.
그것은 인생의 질곡을 거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세월속에서 무의미와 무가치함으로 지나게 한다.

그런데 고난이나 시련은 평범하고 안일한 삶에 도전을 주어,
인생을 긴박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능력을 이끌어 내어
그도전을 극복하고저 노력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련이나 고난의 때를 지나고 난후에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강해지며,
인생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을 강화시켜준다.

강한 군인은 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더 강인한 군인이 되며,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새의 왕이라 할수 있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는 비결은
계속적인 강한 독수리로 자라도록 험악하고 고된 시련의 훈련을 받게 한다.

고난은 인생에 역경을 가져다 준다.
고난당하는 것은 때로는 삶을 불편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
인생은 고난으로 인하여, 힘들어지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난이 오면 인생이 움추려들며,
시련의 계절에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노력을 배가하게 한다.

역경의 세찬바람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여행을 고되게 하고 있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도전에 대해 반응을 강화시키므로
자신을 강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난은 인생을 겸손하게 한다.
고난은 사람으로 겸허하게 신을 의지하게 한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에 의해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신을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한다.
오만하고 안일하게 살던 사람도 고난이 닥치면 겸손하게 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위해 주변을 돌아보며,
그리고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되며,
그 인생의 밑바닥에서 신을 찾는 영혼의 울부짖음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이상의 힘든 상태로 발전되지 않게 하기위해
겸허하게 신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나서게 된다.

반면에 어느 경우에는 고난과 시련속에 자기포기에 빠져 헤매이며,
자신에 대해 저주하며,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하다가,
자신의 인생의 절망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 상태에서 사람은 절망을 느끼며 점점 죽어가는 자신으로 인하여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련의 세파에 떠밀려 세상을 원망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간다.
이럴때에는 자신의 반응하는 자세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원망이나 포기하는 자세에서
그 역경의 때를 벗고저 하는 생존에 대한 강한 애착심과 더불어
자신을 쇄신할 만한 요인(성품의 변화, 생각의 변화, 반응의 변화)이나
사람(자신에게 상담이나 조언을 줄 사람)이나,
사건(자신의 환경이나 처지를 변화시킬 새로운 일)들을 찾아나선다.

고난은 인생을 살만하게 한다.
자신의 삶에서 늘 상 평탄함만을 맛보며 살아간다면
자신의 인생을 안일하게 한다. 그리고 권태로움을 준다.
여행중에 있는 나그네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지나가는 여행길에 대해 무심히 지나치듯
무료한 인생의 날들은 사람들을 무가치하게 하거나
혹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시련이나 고난은 인생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그문제의 도전을 받아, 그것을 헤쳐나가는 동안에 인생의 깊은 것을 맛보게 한다.
시련은 사람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나,
혹은 타인을 이해하는 면에서 탁월하게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말라기 4:1-6

1.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용광로의 불과 같은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처럼 타서 없어 질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하나도 살아 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2.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며
    너희는 나가 외양간에서 풀려나온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3.내가 이것을 행하는 날에 너희가 악인을 짓밟을 것이며 그들은 너희 발밑에 있는 재와
    같을 것이다.
4.“너희는 내가 시내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내 종 모세에게 준 법과 규정을 기억하라.”
5. 보라!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
6.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돌아서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돌아서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그들의 땅을 저주로 치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포하신다.
그의 날이 심판을 행하는 날로 임하리라는 것을…그리고 심판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또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만일 불순물이 끼어있는 쇠덩어리가 용광로에 들어가면
그속에 타오르는 불이 모든 더러운 것을 사르고,
모든 찌꺼기들을 불로 태워 버리며,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용광로의 제련되는 쇠덩어리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불같은 역사가
사람들 속에 붙어있는 죄와 악과 같은 불순물들이 다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용광로의 불로 비유한 것은
그의 심판이 인간의 모든 더러운 요소들을
불로 태워 없애버리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죄악을 행하는 인생들은 거기에서 살아남을 길이 없이
다 타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에 예언한 대로 주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들은
지옥불의 감옥에 들어가,
그들은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는 장소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며,
그의 심판을 받을 것을 자초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다 거기에 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 그리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에게 임한다.
그의 심판은 엄격하고 정확하게 시행될 것이다.
주님이 돌리시는 심판의 멧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움직이지만,
반드시 모든 악의 요소들을 다 갈아버리는 심판을 행하신다.
콩을 넣어 멧돌을 돌리면 콩이 다 바스러져서 콩물이 흘러내리게 된다.
그것처럼 인간의 죄악도 그의 심판의 멧돌에 모두가 갈아버리게 된다.

주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시행되는 것과 같이
또한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의 심판을 피하고 면하는 길은 그가 행하신 그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로 나타나,
상한 영혼들을 치료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병든 영혼들을 고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의 태양이 나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사람들이 그빛에 쬐이면 치료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으셨기에 그는 인간의 문제와 질병을 치료하실수 있다.
그의 손길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데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온전하게 창조되었으나,
불순종과 범죄이후에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성의 좋은 성품이 변질되어,
그들속에 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육체의 본성으로
저주와 절망적인 상황하에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새롭게 하여
소망적인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한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그들을 주님이 주시는 은혜안에서 축복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고통받는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죽음의 상태를 벗어난 평안과 상쾌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치료는 영혼과 육체의 치료로 사람들의 몸의 질병을 치유하며,
그리고 마음의 병과 정신적인 질환에 대해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치료는 그의 보편적인 방편으로서의 은혜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모든 의료기술과 인간적인 치유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특별하신 은총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
치유의 기적과 혹은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부으심과 만져주심으로 치료하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치료를 의미하며,
그의 은혜의 빛은 해가 비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듯
비쳐주는 생명의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들을 밝히신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환희의 은총의 능력안에서 살게 하신다.

어린 송아지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 송아지가 어딘가에 매여있으면 그얽매임에 의해 억압이 되어있다.
송아지가 억압되었다 풀려나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의 품안을 떠난 인생들은
그의 품을 떠나는 때부터 모든 것에 억매여지낼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리를 풀어 죄의 사슬에 매인 인생은
모든 죄의 영향력의 속박에 매이게 된다.
질병, 상처, 고통, 저주, 불행, 좌절, 절망, 멸망당함등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는 모든 것에서 매여 지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고 죽이지 않는 법을 주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법을 지키지 못하여
법에서 정한 규정을 어겨서,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죄로 인한 저주와 고통이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모든 삶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인한 원인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었다라고 하셨지만,
사람이 그렇게 태어날수도 있는 것자체가
인간현실의 모순과 고통의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의 현실을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신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은 즉 하나님의 위로와 나음이 있고,
상처가 있은 즉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아물게 하신다.
시련과 역경속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이 있는 인생의 눈물을 씻기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때에
그의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어 자신들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심판하고
그들을 벌하기 위해 주변의 강대국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괴롭히고 상하게 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죄와 허물이 그런 일들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허물을 사면하며, 그들을 다시 축복하게 될때에
그들은 주변에 있는 원수인 나라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그리고 그것을 정복하고 지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반복되는 역사였다.

사람의 일생도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반복된다고 할수가 있다.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이 있는 가하면 기쁘고 형통한 날들이 있다.
상하고 병들고 힘들어 질때가 있으면 치료하고 회복하고 나아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생을 통해
자기들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간다.

하나님의 예언자이며 메시야의 선구자인 엘리야의 사명은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케하는 데 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기전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준비인 사람들의 죄와
회개의 촉구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그 선구자는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이할수 있도록
즉 마음을 고쳐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날, 축복의 날은 사람들에게 화합과 일치를 가져와
가족이나 사회를 새롭게 하여 회복케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특별히 가족간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망가진 관계들을 치료하신다.
가정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역사는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때이다.

가정안에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인간관계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고로 보통 가정마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이 갈라지기 쉽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가 상하기쉬운 관계이다.
부모중에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 자녀들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 쉽다.
가정의 문제에서 아버지의 역활의 중요성의 강조와
그 아버지와 가족간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가정문제의 많은 경우에 해결되는 일들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몸으로 낳아서
자녀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돌봄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해 애뜻한 애정이나 관심의 돌봄을 주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역활을 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모든 사회의 문제의 발단은 통치자 혹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 할때에 일어난다.
지도자혹은 지배자는 남을 돕는 위치에 있을때에 제 역활을 할수 있다.
그러나 남을 지배하려고만 하는 자세는 남을 상하게 하기 쉽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기 쉽다.

사람이 사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악한 것들 때문이다.
그들이 죄인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죄악을 자행하고 있어서
특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의 삶에 저주스러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적인 족보

2007/06/15 오전 12:01 | 메시지

에베소서 1:1-6

1.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자기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3. 이것은 우리가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신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시기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6.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알려지는 가계나 가문의 족보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핏줄과
그에 따른 후손들의 내력이 있는 역사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속해있는 가계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속한 가계의 조상들의 과거에 대한 기록은
현재의 자신의 소속에 대한 정체감에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그 족보나 가계를 통해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 가 하는 자신의 소속감에 의해
자신의 정체감을 아는 자기 이해를 갖추게 된다.

자신의 영적인 족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족보있는 신앙은
조상적부터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가치있는 자산이 된다.
족보있는 사람은 좋은 가문에서 효력있는 가훈과
부모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훌륭한 모범을 보인 부모들의 삶이 그들의 지침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있는 가정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고귀함과
자존감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문이나 가계혈통과는 전혀 다른 가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형제자매사이와 부모자녀간의 혈통이나 민족을 넘어가며,
인간적인 관계를 벗어나는 영적인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에 의해 이루어진 영적인 족보이다.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가운데에 나타난다.
그의 계획아래에 모든 인류들중에서
여러 인생들을 그의 자녀이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해본다면 그에게 속한 무리의 반열에 드는 것은
그의 전적인 택하심이며 그의 선하신 은혜이다.

성도들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그가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뜻에는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영원불변하는 그의 속성과 더불어
그가 정하신 뜻은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시간과 역사를 통해
영원하신 그의 계획하심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 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의 뜻은 시간과 역사속에서 상대적인 인간의 생각과
다른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유동적인 변화에 대처해가는 유연한 그의 뜻이 있다.
각자의 인생에게 주님은 그의 정하신 뜻이 있다.
그는 사람들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대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명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다.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근본적인 인생의 죽음의 상황이나 위치에서 생명을 얻는 길,
혹은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등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들을 구체적으로
그의 뜻하심(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안에서 그들을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영적인 족보의식을 통해
자신이 속한 그 가문에서 오는 자신의 정체감을 갖는 것은
자기신분의 근본적인 요소로 자신의 신앙생활에 중요하다.

내가 누구이며, 당신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성도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의해 이루어 진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의 뜻에 구별된 사람, 혹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여기서 성도와 신자들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정체감을 두가지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며
자신들의 믿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이루어 진 인생이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보시는 관점안에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이나 생활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품안에서 만족해 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장차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누릴 영원한 기업의 기약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이며 신앙인 그들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여러가지 복을 받는 다.
그중에 그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은
그들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복을 받는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은혜와 평안의 복을 받는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특별한 혜택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중에 인간이 쓸수 있는 자원은
거의 유한 할수 밖에 없고 제한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그 자원이 무한한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무한하신 자원에서 나오는 그의 축복이며,
사람들에게 주시는 값지고 멋진 선물이다.
그의 은혜안에는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고, 회복케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의 마음의 고향에서 얻을수 있는 평화가 깃들인다.
사람들의 불안과 방황은 그들의 마음의 고향(죄의 상태와 영향력)에서
얻은 그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그 상태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되돌려
그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온 세상에 있는 인간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이땅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드리며,
그분은 마땅히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하나님아버지는 모든 은총을 그의 아들을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가 베푸시는 축복, 특히 하늘에 속한 복들을 부어주신다.
그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받는다.
그의 영적인 복들은 자녀들을 삼아주심을 통해,
장차 얻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영적인 상속인에게 주시는 영적인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은 그의 선하신 뜻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고귀하신 계획을 통해 세워진 무리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의 근본, 자신의 위치, 자신의 장래는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또한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로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축복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이제 선택받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안에서
그의 자녀의 반열에 세워졌으며,
그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그의 크신 능력과 축복안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는 그의 권세와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특권이자 그의 영광에 대한 자녀의 참여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받으며,
절망과 허무로부터의 소망과 가치의 삶을 살며,
그의 자녀로서 그분을 즐거워하며 높이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의 책임적인 삶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 주님은 높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평생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 주님은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