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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11
    인생의 복은 자신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목동
  2. 2007/03/10
    사람의 운명
    목동
  3. 2007/03/06
    심판과 구원사이에서
    목동
  4. 2007/02/28
    종말에 대한 신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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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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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2/25
    신의 계획과 인생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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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2/11
    신을 찾아가는 인생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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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2/04
    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목동
  9. 2007/01/20
    인간의 선택과 신의 인도
    목동
  10. 2007/01/15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길
    목동

인생의 복은 자신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시편1편1:1-8

1. 복있는 사람은 악한 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죄인들을 본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2.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이다.
4.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뿐이다.
5.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날에 무사하지 못하고 죄인들이 의로운 자들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
6. 의로운 사람의 길은 여호와께서 지키시나 악인의 길은 파멸에 이를 것이다.

소문만복래라는 말은 사람이 웃음으로 사는 경우에
그곳에 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인생의 복은 대개 자신의 보는 인생의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해볼수 있지만,
대개 형통하는 삶은 복받은 삶이고, 반대로,
자신의 인생이 역경이나, 고통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가시밭길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더 가치있고 유용하다.
복은 수단보다는 목적에 치중하면 얻어질수 있다.
복은 의에서 오는 것이지 악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의로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화가 임한다.
그리고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이 임한다.

하늘나라는 축복의 나라이며, 지옥은 저주의 나라이다.
인생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지상은 사는 과정을 통해서,
장차 영원한 댓가를 받을 것을 바라보며,
인생이 저주와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곳이다.

흔히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
자기안에서 자신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며.
반면에, 곤고한 사람이란 자신안에 갈등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불만과 불안, 불평속에 살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 정체성이란 두가지로 대표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데
하나는 자신이 복받은 사람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복은 커녕,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여기는 채로 살아가는 자이다.
그 정체성이란 언제든지 자신안에서 개선하며 살수 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인생전반에 있어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인생이 누리는 복은 악에서 오지 않고, 의에서 온다.
그 복은 의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즉 복있는 사람은 올바른 생활철학을 갖고 살고, 그의 삶이 올바르게 되니,
그는 자신의 의로운 길에서 인생의 복들(장수, 형통, 자족,덕행,영향력) 을 받게 된다.

사람의 생활철학은 사람이 쓰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개념설정에서 온다.
무슨 말을 듣는가에 따라, 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습성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생활태도에 영향을 주는 타인의 말을 잘들어야 한다.
옳은 조언을 찾아가는 것은 지혜자의 일이다.
악한 친구의 꾀임에 빠지거나, 악한 자의 유혹에 이끌리면, 패가망신하기가 일수 이다.
자신이나 남에게 죄를 짓는 자들은 항상 그 마음속에 악에 대한 유혹이 있으며,
죄를 범할 것을 생각한다. 범죄인들은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뉘우침이 없으면,
계속해서 가중되는 죄를 범한다.
가중범죄에 대해 더 가혹한 형벌이 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그를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존재를 비웃는 일을 통해
인생들은 점점 악해져 가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변의 삶에 악의 조장이나, 죄악의 흔적이나,
어둠세력들(타락한 영들)의 영향들이 나타나
자신을 더럽게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며,
자신이 그의 엄정한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신의 인생이 복이 있으려면,
먼저 죄와 악을 행하는 태도나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이다.

고로 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복이 온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야야 할 것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난후에, 인간들을 이땅에 살게 하여,
그의 혜택안에 살도록 하였다.
그는 지금도 세상을 유지하게 하며,
그 세상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하늘을 무시하고 역천하는 사람치고 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하늘은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할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그것을 얻으면 그에 댓가를 인생들이 받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의 가르침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복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진리이며 생명이며, 소망이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복을 낳으며,
그 말씀들이 자신에게 복있는 생활철학을 살게 한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을 유익하게 위해 주어진 것이다.
사람이 그 법을 따르면 살길이 열린다.
생명을 얻게하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람에게 주신 그의 법은 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 법을 통해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준다.
사람이 그 법을 지키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이 된다.

하나님의 법인 그의 말씀에는 하나님자신의 정체감이나, 임재하심이 있다.
그의 말씀을 신언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있으며,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신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안에 현상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한 숨결과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단계에 이르기 위해, 그저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품는 것이란 마치 닭이 달걀을 품고
생명의 소중한 탄생을 기다리듯 자신의 마음속에 그 말씀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말씀의 육체화(성육신화: 말씀의 실현화)를 묵상의과정을 통해
그것을 기대하 며 그 실현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이들은 그 법을 늘 생각하며, 그 법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그 법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삶의 철학으로 삼으며 살때에, 인생이 살아야 길이 보인다.
그 가르침의 진리들을 품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 올바른 선택과 지혜로운 결정을 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며, 자기가 심은 일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일을 하는 목적이나, 동기나,과정을
주님이 주시는 말씀안에서 형성하기 때문이다.
열매를 거두려면, 뿌려진 씨가 좋고, 그것을 뿌린 밭이 좋은 밭이고,
그것을 잘 가꾸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은 자신을 잘 가꾸어 준다.

무슨일을 해도 건강한 씨처럼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지면,
그것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든지, 든든한 사람이 되며,
그리고 자신이 심겨진 환경들을 바꾸는 능력을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공급받는다.
그리고 때를 따라 적당한 시기에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을
가꾸고 돌보는 노력을 하면,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일의 결과인 열매가 나타난다.

인생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치안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삶의 열매를 가져온다.
똑같은 나무를 심어도, 열매의 많고 적음은 농사짓는 모든 일의 결과이다.
인생은 이땅에 심겨진 씨이며,나무처럼, 자신을 통해 열매를 거두어 들인다.
그 열매를 거두게 하는 것은 전혀 사람농사를 행하시는 농부의 손에 달려있다.
그 농부는 모든 인생농사에서 유능한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농부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농사가 풍작이 되기도 하고 흉작이 되기도 한다.

인생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의 손길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악이다.
그의 길은 인생들이 의의 길에서 발견할수 있다.
인생의 삶안에서 옳음을 좇아가고, 바름을 위해 살려고 하면, 그를 만날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의 가르침과 제시하는 길을 무시한다.
고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악한 일만 거두게 되는 것은
죄악도 뿌린대로 거두어 지는 것이 인생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며,
악인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며, 주변을 어지럽게 한다.
충실한 알곡이 거두어지고, 열매를 거두는 일이 이루어질때에,
바람에 나는 겨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어지럽게 할 뿐이며,
수고한 만큼 댓가를 가져올수 없는 공허와 요란함과 낭비만이 있을 뿐이다.
이땅에서 선을 이루기는 쉽지 않으나, 악을 행하기는 쉬운 길이다.
악인이 뿌린 어둔 일로 인하여 세상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통해, 사람들은 악인과 선인의 삶의 차이를 판단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배운다.

악을 조장하는 인생들은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들의 댓가를 받으며,
자신이 뿌린 악의 열매를 자신이 거두게 되어,
그 사람들에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구속과 거기에 따르는 형벌의 심판이 있을 뿐이다.
악인이 아무리 선한 척, 백노가 노니는 곳에가 있는 까마귀처럼
아무리 선한 포장으로 자신을 뒤집어 썼어도,
결국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고로 자신이 까마귀에서 백노로 신분변화
(자기갱신, 자기회개, 자기변화)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인생의 열매는 옮고 의로운 길에서 얻을수 있다.
의인의 길은 바른 길이며, 인생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른 길인가?
인생에서 바른 것은 인간다운이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수는 없다.
이 말은 결코 자신스스로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해결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절대자 하나님앞에서 그를 통해 이땅에 태어났으며,
자신의 가는 인생의 길을 통해, 인생문제를 해결받아야 할 존재이다.

죄인의 길은 죄를 짓는 법범자의 삶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무엇이 죄인가? 죄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길을 따르는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 길을 저버리고 살아갈때에, 죄의 길에 들어서기 쉬운 것이다.

의인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심판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돌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인생들이 행한 일에 보응을 하신다.
이세상에서 받지 못한 인생들은 시간을 넘어가는 영원을 향해,
그들에게 합당한 댓가와 보상을 얻게 하신다.
때로는 의인이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시간속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해할수 없는 삶의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생에 대한 평가(심판)와 보응을
결코 이 시간적인 선상에 있는 세상에만 국한해 놓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간을 넘어가는 영원한 세계에 더 중점을 두고
인생들을 다스리며, 훈련하며, 인도하신다.

악인은 당대에 자신의 생이 끝난다는 생각을 갖고 살기 때문에
죄와 악을 쉽게 행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저지른 결과가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영원한 장래에
보응받는 형벌을 생각하면,
감히 그 죄와 악을 안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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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

예레미야10:23
“여호와여 내가 알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가 없고
삶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 할수 도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운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상관없이 태어나며,
그곳에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안에서 정해진 인종이나
환경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고로 사람은 자신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삶의 시작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처럼, 자신의 운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운이란 사람의 정해진 길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계나 테두리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의 바다와 육지를 갈라놓는 해변의 경계선처럼,
바다의 물결이 해변에 휘몰아쳐도 어떤 정해진 경계에 물이
더이상 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내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러시아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백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신이 황인으로 태어났으면 그는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간다는 생각에는 그저 숙명을 좇아가는 경우처럼,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살아갈 때에,
부정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없이
그저 자신에게 정해진 삶을 살아가다면,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순응하듯이 살지만,
자신의 개선이나 발전을 위한 의지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도 알수 없는 운에 맡기고 사는 경우이다.

윤회설에서 말하는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업보로 생각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자신에게 더 나은 새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에 당하는 힘든 일들을 극복하고,
선행을 힘쓰고 살아가면 언제가는 다시 태어날때에,
보다 좋은 인생이나, 영물로 살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돌고도는 윤회적인 인생철학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데는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기회가 유일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천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느 인생에게는 하늘의 정해진 뜻이 있다라는 말로 이해된다.
역사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들은 그들의 삶이 하늘이 정해준 이치나,
삶의 길로, 그들이 당대에 필요한 일들을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하늘이 정해준 이치를 따라 살면서
자신안에 있는 적극적인 동기부여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하였는데,
그는 인간세상에 악을 행하고, 그 악을 행하는 댓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주실때에,
이집트의 왕인 바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도전하여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노예로 잡아두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고집과 오만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므로써,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돈에 팔아버리기로 선택한 유다는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애석하게 여긴다.
성경은 그의 태어남을 후회하듯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다가 없이는 예수님이 팔리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죽으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만인구원의 길을 열지 못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던 인생이지 아닌가?
그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일로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겪어야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예레미야는 태어날때부터 모태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유다민족의 예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고난중에 감당하였다.
그의 인생은 이미 태어나기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별되고,
자신이 해야할,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진 인생은 그에게 정해진 인생의 운명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알고
자신의 삶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

유다나라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국민이
하나님앞에 그를 버리는 잘못과 우상숭배의 죄를 지으므로,
멸망으로 치닫는 결정된 미래를 따라 나라가 온통, 주님의 심판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노력하여 정해진 멸망해가는 코스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지만,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한 우상숭배와 도덕윤리의 타락은
결국 유다나라를 침입하는 이웃 강대국들에 의해 멸망해 갔었다.

인간이 하나님이 결정된 미래를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운명처럼 변개할수 없는 것의 삶의 코스를 살아가는 것이란 다르다.
하나님이 정한 테두리안에서 자신의 최대한의 노력이나 발전적인 시도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숙명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에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에 의한 미래의 결과를 알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결정하고 어느 일을 선택했을때에,
그 선택이나 결정이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자신이 결정하는 결혼도, 자신이 선택하는 직업도,
자신이 만나는 만남도 결과를 알수 없는 미래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때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자신이 생각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계획한대로 내일 그것이 다 이루지 못하며,
자신이 정한 삶이 방향이 아닌
삶의 변수(사건사고나 불행이나 불운을 통해 겪는 일들)가 주변에 많이 놓여있다.
선택과 결정은 자신이 하더라도 그 삶의 전체 흐름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선거때마다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를 택하지만,
이외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의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자신이 정한 인생의 방향을 끝까지 지속하기위해서라도,
자신의 인생의 길을 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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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사이에서

예레미야 4:1-4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나에게 돌아오너라.
네가 만일 내가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우상을 내 앞에서 제거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2. 살아있는 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또 네가 진실하며 정직하고 의로운 가운데에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속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4.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아, 너희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너희 자신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너희를 태울것이니 그 불을 끌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백척간두의 나라의존폐의 위기에서 나라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의나라는 계속해서 외침으로 인하여 약화되어 가고 있다.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나라는 피폐하여져서 멸망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이다.
그들의 정치지도자들은 나라를 살릴려고 주변국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를 힘쓰고 있지만,
나라 온전체가 지도자나 백성이나 할 것없이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우상숭배의 죄와 모든 도덕적인 죄까지 범하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가야 할 곳은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이며,
나라도 민족도 그 처해있는 상황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라가 힘들고 민족이 갈길을 못찾아 헤매이고 있을때에,
지도자의 역활은 중요하다 하겠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하에서,
지도자의 잘못된 인도와 정치철학으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을 세우고 번영케 하신 하나님에게
이제는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버림받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을때에,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얻을 길을 찾아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에, 그것을 해결할 길을 모색하여,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사람이 타향에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기가 자라나고 자신의 근거지가 되었던 고향을 그리워 하며
원래 가졌던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자신에게 뚜렷한 명분을 찾아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아무런 가치기준이나 삶의원칙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뀌어지고,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만한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는 방황하지 않을수 없다.
우상은 신이 아닌 것을 신을 섬겨야 할 자리에
그것을 대신놓고 신처럼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영의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민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민족의 미래가 참담해져가는 상황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자신들의 생활과 문화의 근거로 삼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대한 마음이 변질하여,
종종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우상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과 죄를 범하였다.
지금은 우상숭배의 죄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던 그 백성을 해방시켜 나라를 세우게 인도하였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전능하심과 역사하심을 알아야 하며,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 지는 모든 그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인생이 세상을 있게한 신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자신의 모든 삶이 제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서게 된다.
인생은 하나님앞에 있을때에, 자신에 대해 진실하며, 정직하며, 의로운 생을 살아간다.

진실, 진리, 참등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진리는 영구불변하며,
인생들이 기댈만한 가치와 원리를 가지고 있다.
진리안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며, 인생이 따라야 할 가르침이 있다.
그 진리는 사람들의 삶을 비쳐주는 빛이다.
빛이 비쳐주어질때에, 옳고 바른 것을 알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기 전에 그들은 땅을 고르고,
씨를 받아, 생명이 움터, 자랄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계절에는 만물이 자신의 옷들을 새로 갈아입듯, 봄갈이을 한다.
인생의 마음이나, 삶의 환경도 자신안에 생명의 숨결이 쉬어지고,
생명의 태동을 기대하려면, 자신안에 새로 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기를 기대하신다.
인생의 마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부패하여,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이 드러난다.
마음의 부패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어둠과 그로 인한 모든 악한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어,
자신속에 선을 찾아 보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선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일도,
결국 자기중심의 자화자찬의 선행에 불과하며,
그런 행위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에 오히여 오만한 위선으로 보일 뿐이다.
인간의 상대적인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의 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로, 자신의 밖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진단하고,
부패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을 옳은 길로 인도하여줄 진리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전혀 다른 차원의 새마음을 받아야 자신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사람들에게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부패한 마음을 깨닫고 그 잘못을 고치고 회개하는 심령에
새로운 마음을 가질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갱신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생각이나 성향이 정결한 모습의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상에게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의 관심과 방향을 돌이켜
자신들을 살리는 길로 나아오도록 권면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자신이 관심하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에 무엇으로 채워있느냐는 것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음을 드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향할수 있다.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선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면,
악을 멀리하는 일과 악을 짓는 행위로부터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선을 좇아가려는 마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소시적부터 인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류의 원조들의 원죄와 조상들의 죄의 흔적으로 인하여,
자신의 내면에 어둠과 악에 노출되어 있다.
순전하게 태어난 사람이 세상의 편만하게 있는 악에 물들고,
자신의 주변에서 겪는 일들로 인하여,
자신이 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악을 행하는 자의 피해자임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당한 것을
자신도 같은 상처들을 타인에게 범하며,
선한 자신의 동기가 점점 어둠에 물들어 가서,
악을 행하는 어둠의 세력의 동조자로 서있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하신다.
그 원래의 모습이란 사람이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으로 마땅히 하나님과의 교류안에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렇지를 못한 것이, 원래의 상태를 잃어버린 채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자신안에 있는
좌절이나, 불행이나, 절망이며, 결국 죽음(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탄식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상태로 머물러 계속하여
악의 영향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그 죄있는 상태를,
악한 영향(어둠의 세력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을 받은 모습을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아래에 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욕망이
그들을 그의 심판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며, 그의 심판을 면할수 없게 한다.
불을 품는 자가 자신을 태우기 마련인 것처럼,
죄와 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사람들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자비와 함께 하는 구원의 역사와 동시적으로 임한다.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생들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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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신의 메시지

이사야51:4-6
4. 내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율법이 나에게서 나올것이며 나의 의로운 진리가 만민의 빛이 될 것이다.

신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가 부르는 자들이다.
신에게서 나온 사람들은 신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인생들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며,
그렿게 하므로 그들이 신에게 속한자들처럼, 신의 은총을 입을 것이다.

세상에 진리는 하나이며, 그진리는 신에게서만 나오는 영원한 원리이며,
인생이 들어야 할 이치이다.
그에게서 법이 나오며, 인생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법이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명제는 신에 대한 인간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하늘에 대한 태도이다.

신은 그의 속성이 의롭고 바르며,
그의 절대성에 기초하는 그가 정한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 원칙을
모든 인생들에게 내세우고 있다.
인간들은 조석으로 변하는 상대적인 이치에 머물러,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며 자신들의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며,
세상의 물결에 허우적 대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인생들은 신에게로 나오는 자신에게 신은 바른 정도를 가르치며,
변치않는 원리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의 진리가 모든 인생들이 받아야 할 생명이며,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된다.
신은 태초에 세상을 지을때에, 빛이 있으라 하여,
그 빛가운데에 모든 만물이 생성되고, 형성되고, 조성되게 하였다.
모든 만물이 그빛안에서 지음을 받아 생존하며, 유지되며,
결국 그 빛가운데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 빛은 만민에게 비쳐줄 생명의 빛이다.
또한 모든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진리의 빛이다.

5. 구원의 때가 가까왔으므로 내가 속히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
내가 만민을 심판할 것이니 모든 민족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구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들은 시간속에 살아가는 시간살이같은 존재이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까지 자기가 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에 곳곳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시간들을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반대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끝난 인생들은
자신이 받은 시간들을 반납하고 자신이 왔던 곳으로 가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을 무수한 인생들을 생각해본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남은시간을 보내는 인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상실한채, 허탄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다.
시간에서 태어나서 시간속을 달리는 인생들은 그 정해진 자신의 시간속에서
신의 구원하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들은 자신의 신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소식을 어느 시점에서 들을 것인가?
어느 인생들은 인생초반부터 먼저 세상에 온 선진들로 인하여,
신을 알아가는 지식을 얻게 되어, 어린시절부터 신을 찾고, 만나고 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혜택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삶들은 아직도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에게서 나온 진리의 도, 생명의 메시지가 인생들을 살리며,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생들에게 구원의 제안을 했었던
신은 이제는 인생각자에게 자신들이 경주한 인생경기장에서,
결산의 때를 정해놓고, 한 사람, 한사람씩 그들을 판단하며
자신들이 살아온 이력들을 내어놓고, 신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신이 정한 인생들의 살아가는 노정이며,
인생들이 경험할수 밖에 없는 삶의 종착(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신의 평가)이다.

6. 너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아래 땅을 살펴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낡은 옷처럼 헤어질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하루살이처럼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나의 의는 쇠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마음이 시원하며,
구름한점없는 하늘을 보노라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얼마전에 어느 도시에 가서, 근처에 있는 해변에 갔는데,
경비행기가 몇번을 주변을 돌더니, 얼마안있다가,
하늘에 글씨를 하얀 연기로 써가고 있는 데, "아무개가 아무개를 사랑한다"라는 글귀였다.
그 하늘에 그 문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난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고 청명하여,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들을 시원함으로 쓸어 내려주어,
마음을 한결가볍게 해주곤한다.

우리마음에 맑으며, 밝음으로 고마움을 선사하는
그 청명한 하늘도 언제가는 체질에 풀어져 하늘이 사라진다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이 인생들의 뇌리에 부딪치는 단어는 종말이라는 단어이다.

이지구가 새로운 체제로 들어서게 되는,
모든 인생들의 시간끝이라는 상황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사는 땅이 흉악하게 변해버려,
그곳에 사는 인생들이 하루살이처럼 하루 사이에 자신의 생명들이
촌각에 달리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기억에 혹성탈출이나 혹은 지구종말에 대한 주제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가 어느 시점에 가서
지구자신의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이 우왕좌앙 살 궁리를 하지만,
생존세계전체가 흔들리고 변화를 겪는 현실앞에 인생들은 하루살이 목숨처럼,
그 현실에 매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신이 기획하고 있는 그런 지구혹은 세상 종말시나리오는 언제가는 현실로
인생모두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신이 신자신의 존재를 두고 인생들에게 알리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신은 모든 인생들을 만든이로서
그들을 할수 있는대로 자신의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므로 견디고
신이 베푸는 구원을 의지하여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인생 자신의 시계는
지금도 신이 자신에게 정해준 시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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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인생철학

인생의 삶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지향하는 자세에 따라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 시간에 어떤 태도로 일관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되어진다.
시간을 살아가는 네가지 삶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는 과거지향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그녀는 늘 과거를 추억하고 과거에 매이는 태도로 살아간다.
과거를 회귀하려는 미련에서 계속겪는 현실을 소극적으로 대하게 된다.

전통이나 관습에 매인 경우에는 과거에서 내려온 주어진 조건이나 규칙을 따르며,
자기개선이나 생활개선에 대해 소극적이어서,
자신에게 가져오거나 다가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한 사건이나, 일들이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아,
그 영향이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처세술의 밑바닥에 깔려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데 매이게 된다.

또한 과거에 몰입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충실하고 그 조직에서 주장하는 원칙에 순응하려고 한다.
그 조직에서 갖고 있는 전통적인 법에 매여,
거기에 자신의 위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자신의 발전에 대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발전적인 미래보다는 현실적인 안정에 더 관심을 갖기 쉽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두려워 하여,
과거가 자신에게 물려준 환경이나 습관이나 처세술로
자신의 처한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습성이 있다.

현실주의적태도는 언제나 자신이 현재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려고 한다.
시간관리에 있어서는 현실주의자들은 지극히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이 세운 시간계획에 따라 현재에 주어진 자신의 시간이나 일에 충실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투자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주는 이익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안에 머물러,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감각이나
인생을 선으로 보지 않고 점으로 만 보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쉽다.

예를 들어, 어려운 일을 만나는 일에 대해,
그 어려움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 어려움에 빠져 허우적되기도 한다.

미래지향적인 자세는 늘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앞으로 달려가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
자칫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적인 현실에 불충하여,
자신의 삶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만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상에 붙들려
현실적인 순간에서 얻어야 할 지금안에 있는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과
단계적인 성취을 잃어버리기 쉽다.

항상 무엇을 잡으려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또 다른 이상에 자신을 내맡겨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상념에 잡혀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시간과 다가오는 영원을 연결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살펴보면,
자신의 유한한 인생에서, 시간속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처세는
인생전체에 대한 자신의 위치설정(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나
치우치거나 빗나가지 않는 자신의 삶의 균형(이생과 저생과의 조화)을 잡아간다.

시간과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흐르는 시간속에서 지나가는 세월로 이해하여,
그 세월들이 주는 가치를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영원과 연결되는 시점을 향하여,
자신의 인생의 시간에 더하기 빼기식의 대차대조표의 상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 그런 시간과 영원을 이으며 살아가려는 태도의 삶은
자신안에 물흐르듯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어 하며,
그 안에서 시간이(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자신에게서 줄어들고 있다)
주는 가치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인생의 사는 존재의 시도는 피안과 차안에서
맞주치는 삶의 태도의 이중적인 구조안에서 이상과 현실에 대해 조정하며,
자신의 전체의 삶의 지평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태도로 살아간다.

그/그녀자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오늘의 교훈으로 받고 살며,
순간의 시간을 보내는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 사라질 시간안에 이루어야 할 일에 대해,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드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오늘이라는 자산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축적하는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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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획과 인생의 회복

이사야 46:8-10
8. 너희 죄인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라.
9. 너희는 오래전에 있었던 옛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나와같은 자도 없다.
10. 나는 처음부터 일의 결과를 말하였으며
오래전에 벌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고
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생들이 아무리 선한척하고,
선한생각에 휩싸여 살아간다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안에서 태어나 죄를 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벗어날수 없다.

인생은 자신의 현주소가 어디에 속한지를 알아야 하며,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자신의 하는 일을 생각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나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속성과 자신의 하는 일을 알린다.
인간이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걸어가야할 목적과 방향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하는 의식속에 뿐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감정과 의지안에서 자신의 뜻을 알리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이미지를 새기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의 깊은 곳까지 살피는 분이다.

그가 인간을 자신의 파트너로 정하였지만,
인간들을 각기 하나님앞에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각각 제각기 제가 원하는 곳을 가다가, 방황하여,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보낸 영을 받아들여,
그 영을 통해 알려지는 그의 음성을 접하고,
그음성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고 정한
이치와 법도를 마음에 새겨 살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소생으로 지었다는 것과
자신의 이메지(상)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변질되어,
자신안에 자신도 모르는 빛인 하나님과 다른 어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끊임없이 빛과 어둠의 충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자신도 모르는 세력이 판을 치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어둠이 유혹하고,
미혹하는 대로 끌려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만이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비쳐주는 생명의 빛이다.
이 생명의 빛이 이땅에 오므로 모든 것이(특히 어둠의 일들이) 드러났다.
그 빛을 보고 빛을 향해 가는 자는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으며, 인생의 바른 길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상태와 처지와 운명에 대해 말씀하여 왔다.
사람이 범한 잘못으로 인한 결과는 인생이 겪는
모든 불행한(죄의 응보로 인한 역경, 저주,고난, 고통, 죽음) 문제들의 원인이 제공되었다.
세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해오고 있으며,
그 장래의 위기(다가오는 인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서
인간이 구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이 시작될때부터 계획을(잃어버린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을 다시 되찾아,
그들이 있어야 할 그 신분과 위치를 회복케하는 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든 인생들을 향해 그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모든 인생들에게 영향을 줄것이다.
그 계획을 실행하였고 지금도 실행하며, 앞으로도 실행할 하나님은
그분자신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깊숙이 와서,
인생이 겪는 일(문제들: 저주,고난, 고통,죽음)들을 맛보며,
인생의 당하는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였다.
그 계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도록 활동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한
그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마당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은 지금도 여러 인생들 주변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본래의 신분(자녀의 신분)과
위치(하나님이 머무는 자리)와 권한
(자녀의 권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죄의 모든 속박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이 허락하는 모든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파트너로 다가올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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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찾아가는 인생의 태도

인간이 신을 찾는 데 가져야 할 태도는
신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를 향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가는 것일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 신의 은총을 입는 접촉점은
두가지의 사실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신을 이해하는 분명한 식견으로 신앞에 나가는 인생이
신의 영광스러움을 통한 신의 관대함과 용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인간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해는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은 자신이 신의 소생으로 자신의 처지가 항상 신을 갈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배고픔이 있는 가난함에 대한 철저한 자기인식일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인생자신이 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가?
대개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오는 인간한계에 부딪치게 될때에 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는 다든지,
혹은 사랑하는 자녀가 교통사고나, 죽을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인생의 한계를 생각하며, 신에게 두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어떤 반응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하고 신에게 반항하며,
무시하며, 신을 떠난 인생의 절규와 같이 애써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반면에 자신이 어떻게 할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나 사건에 대해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자신이 신의 손길을 찾아나서는 심정을 갖게 된다.

인생의 삶의 밑바닥과 같은 절망적인 경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하는 것은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절규와 영혼의 목마름을 통해,
인간속에 있는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케하는 신을 찾아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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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의 역사를 통해 사람의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선험적지식,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선험적지식의 예를 든다면,
요셉의 노예팔림, 바라오의 악한행위,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예수님을 배반,
십자가의 죽으심등은 하나님이 예견하심가운데에서 인간의지의 선택의 결과로 일어났다.

루터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아시고
그것을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험적지식이나 예정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의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일어날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이성의 증거에 의하면,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의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험적인 지식은 신적인 결정주의를 반드시 암시하지 않으나,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는 때에 제한을 받지 않으셔서
그는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조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데,
인간의 의지는 결정된 한도내에 있기에,
자발적이든 자유이든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존해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적인 결정주의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속적인 변화를 가진 그의 마음과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포용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파괴하는 예를 든다면,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참새도 떨어지지 않는다(참새가 팔리지 않는다)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100%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확실한 것을 이루는 원인으로서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나 선택을 통해 일하신다.

루터는 의지의 노예가 은혜신학의 기본적인 기초가 된다고 논의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와 질수 없고, 믿음을 얻거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공헌할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안에서 무이다.라고 루터는 주장하였다.
칼빈도 그점을 옹호하였다.
“자유의지를 지켜가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아닐수 없다라고 하며,
교회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커다란 이익이라고 하였다.

신적인 결정주의는 하나님의 선험지식이나, 전능하심의 교리에 근거를 두며,
그리고 은혜는 원인과 결과를 따르는 자연적인 결정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성서적믿음은 하나님은 창조적질서를 통해 일하신다고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며 방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 은혜의 손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체안에 위험요소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의지의 선택의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그의 선험적인 지식에 따르는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또한 그의 전능하심의 다스림으로 인한 결정에 제한을 받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제한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대안(은혜의 길)을 따르는 의지의 노예로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Myers, David G.의 "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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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택과 신의 인도

시편25편 12절-14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리라

하나님을 자신의 공경과 진실로 섬기는 이는 하나님의 길이 보일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충청도의 천안 삼거리에 가면
그 삼거리 길목에서 세가지 갈래 길로 퍼져 나가게 된다.
전라도로 향하는 길과 경상도로 가는 길, 그리고 충청도에 머물러 있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길로 가고 싶은데 저길을 선택하면,
이길은 가지 못하고 저길로 가야만 하며,
세 갈래길에서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면 그냥 주저하는 일밖에는 안된다.

삶이란 항상 자신에게 선택을 하도록 요구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 누구를 만나야 할는지,
그리고 점심시간에 나가서 외식할때에도 오늘은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가?
집으로 오는 길이 여러가지 변수가 있는 데,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하며, 정해진대로 길을 가게 된다.
인생의 일에 있어, 중요하고 인생사에 큰 일을 처리할때에,
무엇보다도,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일을 잘하는 비결은 어느 일이 든지,
그 일에 적합한 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을 잘하는 데는 선택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정적인 자신의 마음의 결단력이 필요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진행시킬 추진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인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줄 알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생을 함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며, 낭비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신 신에게 다가가 그의 조언을 경청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저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험적인 지식을 갖고서, 인간의 만사에 대해 관여하신다.
그리고 그의 전능하심은 인간의 삶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신다.
인생이 수도 없이 다가오는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신은 신의 지혜를 인정하고 의존하려는 인간에게 그들의 갈길을 지시하신다.
그지시나 인도는 신을 섬기는 자만이 알고 경험할수 있는 권한이다.

그는 언제나 번영을 누리며 살고 그의 자손들은 땅을 상속하리라.

그들(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일들이 형통하게 되며,
자기가 계획하는 일들이 성취하게 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없이 불안해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확실한 것을 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생은 불확실성을 통해 모든 일에 대해 불가지론으로 일관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보장된 것이 없이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무지한 가운데에 머물다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세계로 던져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보장,
자신의 삶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이해, 인생의 생노병사의 가치이해)을 잡은 이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아는 것 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 신으로부터 특별한 보장을 받으며 살게 되어,
자신의 미래의 상태가 점점 밝아지며,
자신을 통한 자식이나 후대들에게 까지 확실한 인생의 지침을 전수하므로,
그 자손들이 인생의 만족과 행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친밀감을 가지시고
그 약속의 비밀을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은 늘 자신에게 다가와 그를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며, 그의 숨결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와의 친밀함을 이루며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인생의 감추어진 비밀속에 있는 중요한 삶의 지침이나,
인생성공이나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경외하는 이들은 늘 그분과의 정상적인 관계안에서
계속되는 만남이나 교제안에서 그분의 뜻을 알고,
그리고 그분의 섭리(자신뿐 아니라 인간세계를 움직이는)의 뜻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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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길

새해에는 모두가 복많이 받으세요 라고 서로 인사를 한다.

인간생활에 복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복을 추구하는 인간은 누구나

그 복안에서 만사형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복에 대한 생각이 중요하다.

복을 추구하는 나의 생각에 따라 내가 행복하게 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된다.

우연히 주어지는 복을 기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일확천금의 기대를 걸고, 행운을 기다린다.

물질과 번영이 주어지는 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물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을 보면,

소유한 만큼 행복이 주어지지는 않는데,

도리어 그들은 가진 것 만큼 행복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오는 반대급보로 불만족이고, 불행한 인생을 보낸다.

못되게 살면서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것,

양심대로 살지 않으면서 형통하게 된다는 것은
일시적인 안녕을 주고, 출세와 영달로 자신을 포장하며, 살게한다.

그것을 얻었을때에, 남을 무시하기 십상이고,

자기 잘난척 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헛된 욕망에 도취되어

인생의 좋은 가치들을 저버리고 살게 해버린다.

사람이 소유에서 오는 복을 구하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끊임없이 그것에 목매어 살아야 한다.

소유에서 오는 외형적인 복은 사람에게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것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가져본 사람, 높아본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다보다가,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때에는

그것보다는 높은 가치와 삶의 의미를 주는 내면의 행복을 구하게 된다.

잠시 생각하면, 외형적인 복을 구하는 그런것들은 결국 인생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구하는 자신에게 대해, 자신이 배반 당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치가 변질되어 자신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질 못하고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그 행운들이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다.

인생의 참가치를 알게하고 깨닫게 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공자의 말처럼 아침에 일어나, 하루 종일 수고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에

자신의 생활을 두고 만족해 할수가 있다.

진리는 인간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졌을때에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변함이 없이 인간에게 영원한 가치를 주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철학으로 그 진리에 이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정작 그 진리는 인간에게 감추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인간자신에게 가리워 있다.

그 진리는 다만 인간을 지은 조물주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다.

그 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신다.

그 내용인즉 사람이 매일의 인생의 삶을 살아갈때에

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진리의 내용들을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 내용대로 살아가면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참된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밤낮으로 신이 우리에게 하신 내용들을 생각해보면 인생의 길이 보인다.

앞날이 보이지 않고 답답해 할때에,

어디에 내가 지금 머물어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방황하는 인생에서 하고자 바 대로의 바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하늘을 거스리고, 신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게 되면,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헛되게 자신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고 후회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신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마구 휘젓으며 잘 살가는 것 같으나,

잠시 지나고 나면 마치 바람에 불려

흩날려 버려지는 쭉정이 같은 인생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

인생의 삶의 현장은 마치 인생이라는 경주의 일정한 기간을 통해

사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인생의 경주를 많은 이들이 지나가며,

어떤 이들은 악하게 살다가 가며,

어떤이들은 비관하면서 인생을 마치며,

어떤 이들은 바르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데 그 인생들이 바른지 그른지를 어느 시점에 가서는 판단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 한 날 살다가 없어지는 인생이 아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온지를 판단받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의 전부가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매일 순간마다 깊이 생각하며,

또 생각하며 살아가노라.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후회하지 않는 진리를 따라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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