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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례미야 33:1-3-9
1. 내가 아직 궁중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너는 나에게 부르짖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응답할 것이며,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영혼의 탄식이다.
때로는 기도는 대화이상이며,
언어표현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혼의 절규이다.
그것은 또한 상한영혼의 고통의 하소연이다.
인간의 갇혀진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부르짖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때로 요구하시며,
그 절규에 응답하신다.
내면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가?
영혼의 탄식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자기 표현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때에,
자신도 모르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나약함이란 어리석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도 외면하며,
자기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인간속에 새로운 마음을 심고,
인간의 깊은 곳과 연결되게 하는 그의 영을 통해
인간의 가장 필요한 영혼의 소리를 대변할때도 있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가장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일수 있다. 한곳에 갇혀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자기한계에 갇힌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속에서 나오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감옥에서 사람들은 깊은 사색이나, 연구나,
혹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 있는 인생의 깊은 생각을 길어낼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지만
국가에서 설교를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설교때문에 그는 감옥에 13년을 갇혀 있으면서,
유명한 천로역정(하늘나라 가는 영적의 순례의 길)을 썼다.
그는 감옥에서 깊은 사색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신앙인들이 살며 겪을수 있는 여러가지 경우들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인생순례를 보여준다.
그 책은 성경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며,
사람의 인생사는 걸음을 인도하는 지침의 역활을 하였다.
일본시대에 기독인의 모델이 되었던 주기철목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일사각오의 순교적인 신앙을 다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다.
신사참배의 위협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절개있는 믿음과
애국의 독립적인 자세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한국기독교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다.
마틴루터킹 목사는 알라바마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의 타당성에 대한 글을 쓰며,
자신의 하는 인간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흑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철학적인 에세이를 쓰기도 하였다.
참담한 상태의 현실에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궁중감옥에 갇혀 현실이 암담하였다.
갇힌 그에게 희망이란 보이지 않으나,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적인 징조나,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질때에,
하늘을 바라보며, 창공의 하늘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향해,
이세상을 있게 하신 그 신이시 하나님이 나의 희망이다.
그분,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다라는 생각에 부르짖으며,
그에게로 다가가며 자신의 울분을 토하며 나아간다.
영혼의 절규는 사람이 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간구이며,
자기절규에서 나오는 하소연이다.
때로는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며,
역사를 바꾸기도하며 혹은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약속하신다.
기도는 미래를 여는 창조의 사역이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속에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하는 것이다.
어두움의 역사가 깊은 곳에 희망찬 새날에 기대가 고조된다.
암담하고 참담한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와 축복의 날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눈이 새로운 미래를 열것이며,
비록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하는 영혼의 소리에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다.
예언자는 비록 감옥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향해 동족들의 죄에 대해 탄식하며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하며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심판 넘어의
새로운 희망차고 축복된 민족의 미래의 번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여기며 사는 경우라면,
그 인생에 대한 자신안에 있는 괴로움이
영혼의 탄식으로 변하여 도움을 주실 신에게로 향하다면,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속에서 고난이라는 도전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의 기회라는 응전으로 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사람사는 곳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는 때도 있으니,
그런 상황하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갈 힘을 자신의 영혼의 탄식의 소리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얻기를 기대하기를…
에스겔18:26-32
26. 만일 의로운 자가 그 의를 떠나 죄를 범하고 죽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때문에 죽는 것이며
27. 만일 악한 자가 그 악에서 떠나 법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면
그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28.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켰으므로 분명히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29.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고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어째서 내가 공정하지 않느냐? 오히려 너희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30.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행한대로
내가 너희 각 사람을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러면 너희가 죄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1. 너희는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어째서 죽으려고 하느냐?
32.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유다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사람이 망해가는 법을 좇아, 살길을 찾는 길은 어리석은 현상이다.
인생이 성공하는 소원이 가득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가지고 살아가면,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예가 더 많이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지키며,
주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을 할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한 옳은 삶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신앙의 순결에서
이방나라들의 풍습이나 삶의 흔적을 좇아가서,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를 중시하고,
현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살피신다.
사람의 삶도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자신이 하는일이 옳지 않다면,
그 일이 자신을 더럽히고, 그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며,
자신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 결코 소홀히 대할수 없는 사람이며,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떠 한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사람은 과거에 살지를 않는다. 다만 현재 주어진 시간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잘한 사람은 그 잘한 일에 도취되어
현재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등한히 하기 쉽다.
악한 자가 과거에 지은 죄로 괴로워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에 범한 허물이나 죄가 더이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현재에 개관천선하여,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선용하여
바르게 살기로 다짐하고 현재를 바르게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나, 지나친 과거지향주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은 자신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악인이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슬퍼만하지 말고,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현재를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일을 잘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늘에 대해 불평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분복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부를 받아, 부한 가운데에서 살고,
어느 경우는 건강하게 사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경우는 불행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을 살다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생애를 살아간다.
공정하게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고 살아가도록 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 각자에게 공정한 심판을 행하신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만났을때에 자신의 처지나
문제해결에 대한 하소연이 들어지지 않을 때에,
그사회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진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에서는 공정한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의 후반에 가서는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며,
그의 공정한 저울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판단은 항시 현세와 내세의 삶의 판단의 저울로 사람들을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공정성의 판단에 대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든다면,
현세에서 의로왔지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들은
내세에 마련한 영생과 영광의 복으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현세에서 악하게 살며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편안하게 살았던 인생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형벌)을 통해 평가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도록 되어있는 원리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원칙안에 있는 세상은 무엇이든지 심은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이 원칙위에 다스리신다.
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들이 행한대로 갚으시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합당한 결과를 얻게 한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은 지난 일들의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혀 새로운 방향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항상 현재의 기회를 바로 사용하려면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리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항구에 정박에 있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하려면,
정박해있는 부두에 붙들어 매둔 밧줄(자신을 댕기는 과거의 끈)을 끈고
항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는 지은 죄에 대한 청산하려는 결단의 태도와
또하나는 자신안에 죄를 지으려는 성향들을 고치는 태도이다.
이것은 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준엄한 자신의 평가에 따르는 통한의 태도이며,
그리고 자신의 그릇된 죄질의 성향의 방향전환의 결단을 포함한다.
인생이 죄에 대해서 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죄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은 그 위반한 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른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은 그 범법한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그것을 벗기전에는 모든 일에서 자유할수 가 없다.
그 위반이 자신의 활동하는 몸이나 생활을 영향을 주는 구속을 주기 때문이다.
(경범과 중범의 차이는 있지만, 법위반에 대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죄의 시작은 인류의 시조인
처음인간(아담, 하와)의 범죄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그들의 허물과 범죄가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 속에 영향을 주어,
그들과 같은 성향의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의 피가 온인류의 몸안에 흐르고 있는
죄를 짓게하는유전인자와 악한 성향등으로 나타난다.
고로 인간의 죄는 먼저는 원죄이다.
그리고 그들속에 있는 그 악한성향이 나타나
자신이 짓는 자범죄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다.
인간의 법은 행위와 영향력에 대한 죄를 묻고,
드러난 죄의 결과를 판시하여,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치른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외형의 죄뿐 아니라,
내면의 죄와 타고난 인류의 원죄와
그죄의 영향력까지 사람을 살피시고 있는 그의 심판의 잣대가 있다.
고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이 죄에 대해 자유로우려면,
자신을 만드시고 존재케하신 하나님앞에 가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실 죄의 시작이나 근본은 외형적인 죄의 행위에 있지않고,
죄를 짓게하는 내면의 태도나 성향이 더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기질이 있다면,
언제가는 타인의 물건을 도둑질할 것이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의 성향이 거짓되고, 오만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언제가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혹은 자신의 주변로 분출되어 나타날 것이다.
고로 인간을 고치려면, 즉 사람이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와 지려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곳은 인간의 의지와 감성과 이성이 함께 어울러져,
자신이 어느 성향의 사람의 자아이든 그 자신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그 마음안에 두 주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두주인은 인간의 옛자아와 새로운 자아이다.
먼저는 옛자아(타락한 이후에 갖고 태어난 인간의 죄의 성향과
그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자아성)의 세력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
또한 새로운 자아(주 예수를 초청함으로 즉그가 영으로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심으로
그 소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새롭게 변화시켜,
진정한 인간의 온전성을 세워가는 자아)이다.
마음의 끝(가장자리혹은 연결고리)은 인간내면의 두방향성에 의해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방향성이란 육으로 가는 길과 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육신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몸에서 요구하는 육의 본성과
그 본성의 욕구충족의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는 본능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욕구충족이 지배하는 세계로,
자주 혼돈과 고뇌에 사람을 빠지게 한다.
영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고귀한 성품이 맞닿는 곳으로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과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체계가 있어,
영적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그 영적세계에는 하나님의 인간속에 심은 인간성(종교성)이
비록 타락으로 변질되었지만,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영성)과 자질(하나님을 닮아가는 기질)이 있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이 되며,
관계가 성립이 되고, 교제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통해,
내면과 마음의 혼돈과 공허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사람의 상태는
점점 질서와 창조의 채움으로 이어지게 되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며,
건전한 자신의 소우주를 만들어 간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르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죄에 따르는 결과는 인간에게 죽음의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번민과 고통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었던
그리고 짓는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죄는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인간세계의 필연의 악이다.
그 필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죄악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죄에 대한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채무를 이행하면 될 것이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은 이미 인간의 대표로 나타나신 인간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오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었다.
그가 해결하신 인간의 죄는 그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짓는 죄의 성향이나 모든 행위에 대해
형벌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해결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죄있는 사람들은 그앞에 나아가 그의 형벌치름을 의존하여,
죄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할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짓는 성향이나 악으로 빠지기 쉬운 혼돈된 내면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살기 위해 살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한 사람사는 도리이다.
누구도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오직 그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자신을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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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1:1-8
4.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말한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얼마 안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그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우실 때가 지금입니까?” 하고 묻자
7.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것이 아니다.
8. 그러나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날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중에
무엇을 가장 우선시하고 살며,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때에,
그 날들의 하루하루가 충실히 모아질때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사람은 어릴때에 하는 일과 청소년이 되어 하는 일과,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 각기 일이 달라진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나 방법도 점점 성숙해지고 능력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인생의 각 단계마다 성장이나 성숙에는 변화나 전이로 인한
새로운 도전이나 거기에 응하는 자기 변화내지는 개선되는 자기정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 모인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라는 역사적인 신적인 존재인
그분에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에게 속해있는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르쳐왔던 바람직한 인생의 가르침과 하늘나라의 도리를 따르며,
그가 세울 이상적인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따라왔다.
그런데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가졌던 목표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의 삶의 모델이었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다 날려가버린 허탈감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가 세운 목표나, 방향이 갑자기 사라지면 당황하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과 더불어,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오늘여기에 나타난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인생의 딜레마에서,
자기들의 세우고 따랐던 인생의 삶의 목표수정이나
혹은 궤도이탈로 인한 방황을 통해
앞으로 자신들앞에 전개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만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과 다른 차원의 삶인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셔서 나타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가 지상에 있을시에 가르쳤던 하늘나라의 가르침과
인생을 살릴 좋은 뉴스에 대해 그의 자상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여,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할수 없지만,
그가 약속하신 그의 분신이신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 제자들을 새롭게 하며, 강하게 하며,
새로운 예수의 제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중에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셨을까?
그렇지만, 제자들이 생각할때에, 예루살렘은 끔직한 곳이다.
자신들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예수님을 잃은 곳이다.
모든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모든 직업과 재산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 갔는데,
그가 갑자기 죽음과 함께 자신들과 함께 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제자들은 고아들처럼, 방황하며,
애써, 공허하고 실망한 마음을 참으며, 그나마,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른 차원의 생명이신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 그 분으로 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고 지내고 있었다.
예수님도 죽으셨고, 그들의 따르는 사역도
모두 물거품으로 공중에 붕뜬 느낌을 가지고 사는 요즘의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겪는 변화무쌍한 현실에 안주를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어디서 새로운 희망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따라 나섰다.
제자들은 차라리 요한을 따라 나설걸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례요한도 민중들속에 순교한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어디서 하늘의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
(이후에는 그들이 하늘의 메신저들이 되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와서 외쳤던 회개하라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친 메시지의 메아리가 아직도 그들의 귓가에 맴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요단강가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씻는 표를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오셔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보내신 성령은 만물을 소성케하며,
멸망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영이시며,
그분을 받으들여,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
아직도 자기민족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망국의 한을 살아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 주님에게 간청한다.
언제쯤이면,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시나요.
아직도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이스라엘 자기 민족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 까하며,
그리고 어떻게 성공하며 출세를 할까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들 자신의 영혼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자주 인간이 사는 삶에 일어나는 딜레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입히는데 관심이 있고
자기를 먹는 일에 관심있고, 자신이 소유하는 일에 관심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에 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 자신이다.
사람들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안에서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촛점이 모아져 있다.
로마의 압정하에 자기민족이 해방을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는 인류구원에 있으며,
예수자신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복음이 다 증거되면, 그제야 인류역사의 끝이 오면
모든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때와 다르며,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국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걱정을 하고
하루 속히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는 더 큰 계획의 전개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은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항상 가장 최선의 시기에,
이룰 그의 역사의 때와 기한을 주장하신다.
주님이 다시오시는 시간도 주님만이 아신다.
그의 때와 시간은 완벽하게 준비하신다.
인생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인데,
자신의 지혜는 자신의 인생안에 있는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한내에 자신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오직 인생의 때와 기한은 그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인류의 시간표도 그의 권한안에 있다
그의 권한에 의해 모든 때가 시작이 되며 과정이 되며 완성이 되어진다.
그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의 분신이신 영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에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로 오신다.
인간속으로 생명과 능력의 영으로 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속에 그의 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그 하나님의 영은 인류창조와 재창조의 영이며, 능력과 지혜의 영이다.
그의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성령의 역활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여 새로운 일들을 추구하여 이루어 낸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며,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나약함이나 부정함이나 불가능함을 극복하고,
인간갱신이나 생명변화를 통한 인간구원의 보증자가 되셔서
인간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하며 주님의 때까지
인간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인간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생명의 전도에는
그 전도의 시작과 진행 역사의 사이클이 있다.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들속에 들어와 생명의 시작을 이루어 가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정함의 딜레마를 딛고
그가운데에 인간속에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어,
그것을 가꾸고, 성장케 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권한을 회복케 하는 결론을 이루어 내신다.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주님의 복음의 전파는
성령이신 그의 영으로 시작이 되며 앞으로 그 끝의 완성을 이룰을 것이다.
이말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성령을 받아들인 각자 인생의 인생구원의 시작이며,
또하나는 죽음이라는 운명안에 처해있는 온인류에 대한 인간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두 명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류나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인생 각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분의 영을 통해 지금은 그분의 구원의 은혜받을 때요,
그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할때이다.
지금은 그의 복음을 전하며, 혹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을때이다.
그일이 각 개인이나 인류전체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 일들이 항상 놓여 있다.
일상적인 일들, 필요한 일들, 정해진 생활의 규칙을 따라 해야 할 일등,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교제를 위해 해야 할일,
가정의 대소사등 일을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우리 앞에 널려 있다.
그런중에도 사람이 자신의 생명이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한 영적인 일들은
항상 자신의 일중에서 최우선의 일인 것을 알고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생을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비결중에 하나는 우선순위의 결정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며,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일의 순서등을 자신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므로, 인생의 자신의 중요한 사역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자로서 질서있는 인생사역의 주인공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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