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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

예례미야 33:1-3-9

1. 내가 아직 궁중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너는 나에게 부르짖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응답할 것이며,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영혼의 탄식이다.
때로는 기도는 대화이상이며,
언어표현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혼의 절규이다.
그것은 또한 상한영혼의 고통의 하소연이다.
인간의 갇혀진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부르짖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때로 요구하시며,
그 절규에 응답하신다.

내면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가?
영혼의 탄식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자기 표현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때에,
자신도 모르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나약함이란 어리석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도 외면하며,
자기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인간속에 새로운 마음을 심고,
인간의 깊은 곳과 연결되게 하는 그의 영을 통해
인간의 가장 필요한 영혼의 소리를 대변할때도 있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가장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일수 있다. 한곳에 갇혀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자기한계에 갇힌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속에서 나오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감옥에서 사람들은 깊은 사색이나, 연구나,
혹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 있는 인생의 깊은 생각을 길어낼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지만
국가에서 설교를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설교때문에 그는 감옥에 13년을 갇혀 있으면서,
유명한 천로역정(하늘나라 가는 영적의 순례의 길)을 썼다.
그는 감옥에서 깊은 사색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신앙인들이 살며 겪을수 있는 여러가지 경우들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인생순례를 보여준다.
그 책은 성경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며,
사람의 인생사는 걸음을 인도하는 지침의 역활을 하였다.

일본시대에 기독인의 모델이 되었던 주기철목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일사각오의 순교적인 신앙을 다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다.
신사참배의 위협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절개있는 믿음과
애국의 독립적인 자세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한국기독교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다.

마틴루터킹 목사는 알라바마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의 타당성에 대한 글을 쓰며,
자신의 하는 인간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흑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철학적인 에세이를 쓰기도 하였다.

참담한 상태의 현실에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궁중감옥에 갇혀 현실이 암담하였다.
갇힌 그에게 희망이란 보이지 않으나,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적인 징조나,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질때에,
하늘을 바라보며, 창공의 하늘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향해,
이세상을 있게 하신 그 신이시 하나님이 나의 희망이다.
그분,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다라는 생각에 부르짖으며,
그에게로 다가가며 자신의 울분을 토하며 나아간다.

영혼의 절규는 사람이 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간구이며,
자기절규에서 나오는 하소연이다.
때로는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며,
역사를 바꾸기도하며 혹은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약속하신다.
기도는 미래를 여는 창조의 사역이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속에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하는 것이다.

어두움의 역사가 깊은 곳에 희망찬 새날에 기대가 고조된다.
암담하고 참담한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와 축복의 날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눈이 새로운 미래를 열것이며,
비록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하는 영혼의 소리에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다.

예언자는 비록 감옥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향해 동족들의 죄에 대해 탄식하며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하며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심판 넘어의
새로운 희망차고 축복된 민족의 미래의 번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여기며 사는 경우라면,
그 인생에 대한 자신안에 있는 괴로움이
영혼의 탄식으로 변하여 도움을 주실 신에게로 향하다면,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속에서 고난이라는 도전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의 기회라는 응전으로 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사람사는 곳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는 때도 있으니,
그런 상황하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갈 힘을 자신의 영혼의 탄식의 소리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얻기를 기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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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원인과 극복

신에 대한 존재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배경에 대해서 몇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 신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무신론이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신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편하게 죄를 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규범을 따르지 않고, 규율을 벗어버리는 습성이 몸에 배어서,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태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면 무신론의 영향을 받기가 쉬워진다.

또한 사람은 여러가지 동기로 무신론의 철학을 갖게 된다.
부모들의 무신론적인 배경을 통해서,
혹은 조상들의 범죄에 연루되어 자신도 모르게 불의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인 인간관계(지독한 상처받은 경험이나 비운이나 재난에 가까운 역한 경험)를 통해,
혹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어느 시기에 특정의 사람
(주변에 유독하는 인생관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심어진 부정적인 세계관을 통해,
신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무신론적인 철학을 습득을 통해 무신론을 익혀가기도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중에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에 빠진다.
복잡한 사상이나 이상한 가르침을 통해 무신론의 세력이 강화된다.
주변에 무신론에 빠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 무신론적인 가르침이나 사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어둠의 영들의 미혹에 의해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인 존재들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진리이신 신(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무신론의 영향에는 다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먼저 무신론적인 태도는 사람을 어리석게 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는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양심적인 기능의 한부분이 마비되는 것이나
혹은 인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적인 기능(신과의 접촉을 가능케하는)이 정지된 것처럼
그 의식이 그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어,
자신의 사고시스템에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마음이 사고하는 형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데 대해서도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게된다.
그런 어리석은 태도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여 밝게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대하지 않게 만들고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에 잡히게 한다.

무신론은 사람을 교만(방자)하게 한다.
무신론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속에 고집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사고나 태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의견을 절대화하여,
자신을 어리석에 과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자기를 절대시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인생에 대해 절대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사람을 어둡게 한다.
무신론은 마치 따사롭게 비쳐주는 태양빛의 존재앞에
그 태양을 등지고 지내는 것 처럼 자신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상태로
그 그늘속에서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
해를 등지고 따스한 햇살이 주는 혜택을 받기가 곤란한 것은
그 해살의 비쳐주는 강인한 따사로움이 사람들을 거동하게 하며,
빛이 주는 능력으로 사람의 몸의 온 구석을 두루 비쳐주어
몸의 세포가 다시 생성되고,
몸의 요소들이 마치 식물이 해빛의 영향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듯,
사람도 햇빛의 주는 광선으로 생동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무신론에 빠진 사람은 이런 혜택을 스스로 거부한다.

무신론은 절망하는 인생을 더욱 불안한 모습에 푹 눌려 지내게 하며,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숙명인양,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불안이 주는 마음의 공허나
혹은 공항을 겪으며 살게 되며,
늘 불안한 자신속에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한다.

무신론을 극복하려면, 먼저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의 존재와 개입을 인정해야 한다.
신의 존재는 불가지론자의 경우처럼 신을 알수 없다고 가정하지 말고,
신은 언제나 찾는 사람들에게 만나주는 존재이며
다만 신을 구하는 채널이나 창구가 잘못이 되어
다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신은 언제나 누구에든지 골고루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고 있는데,
그런경우는 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혹은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나, 기이한 순간에 신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신은 가장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살았던 인물들에 의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자신의 생전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갖고 살았는데,
신은 그의 집을 성서(신의 말씀)를 발행하는 집으로 활용하였다.

신의 노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다.
구약의 아브라함, 그는 무신론적인 고대의 세계에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가 발견한 믿음은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인격신에 대한 믿음, 유일신에 대한 믿음,
자연신에 대한 믿음, 거짓 신에대한 믿음등이 다 다르다.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을 깨닫고 자신의 응답을 통해 경험한 신은
바로 인격신에 대한 경험이며,
개인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신의 인도를 따라 가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유신론적인 사고의 시스템안에서 무신론적인 태도는
얼마든지, 외형적인 신앙적인 형태의 생활에서
전혀 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를 기만하는 태도로 사는 경우도 있다.
외형적인 종교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의 일을
다 헤아리는 신의 의도를 다 알수 없다.
오히려 외형적인 종교적인 지식이
더 큰 무신론적인 사고의 형태로 종교인들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덜 종교적인 사람이 오히려 신에게 가까이 이를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신에 대한 가장 충실한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낳고 자라게 하며,
젊은 시절의 여러 인생의 노정에서,
베풀어준 부모의 보살핌이나 보호가 있다.
자녀들을 돌봐주는 부모의 마음은 늘 자식에게 있다.
그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이 자신을 믿어주고 신뢰하며,
자라고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처럼 사람과 신과의 관계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유형으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부모와의 관계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자기와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신과의 관계에서 좋은 태도와
인생관을 가질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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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게하는 것과 살게하는 것

에스겔18:26-32

26. 만일 의로운 자가 그 의를 떠나 죄를 범하고 죽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때문에 죽는 것이며
27. 만일 악한 자가 그 악에서 떠나 법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면
그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28.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켰으므로 분명히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29.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고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어째서 내가 공정하지 않느냐? 오히려 너희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30.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행한대로
내가 너희 각 사람을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러면 너희가 죄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1. 너희는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어째서 죽으려고 하느냐?
32.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유다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사람이 망해가는 법을 좇아, 살길을 찾는 길은 어리석은 현상이다.
인생이 성공하는 소원이 가득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가지고 살아가면,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예가 더 많이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지키며,
주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을 할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한 옳은 삶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신앙의 순결에서
이방나라들의 풍습이나 삶의 흔적을 좇아가서,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를 중시하고,
현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살피신다.
사람의 삶도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자신이 하는일이 옳지 않다면,
그 일이 자신을 더럽히고, 그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며,
자신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 결코 소홀히 대할수 없는 사람이며,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떠 한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사람은 과거에 살지를 않는다. 다만 현재 주어진 시간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잘한 사람은 그 잘한 일에 도취되어
현재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등한히 하기 쉽다.

악한 자가 과거에 지은 죄로 괴로워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에 범한 허물이나 죄가 더이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현재에 개관천선하여,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선용하여
바르게 살기로 다짐하고 현재를 바르게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나, 지나친 과거지향주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은 자신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악인이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슬퍼만하지 말고,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현재를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일을 잘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늘에 대해 불평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분복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부를 받아, 부한 가운데에서 살고,
어느 경우는 건강하게 사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경우는 불행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을 살다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생애를 살아간다.

공정하게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고 살아가도록 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 각자에게 공정한 심판을 행하신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만났을때에 자신의 처지나
문제해결에 대한 하소연이 들어지지 않을 때에,
그사회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진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에서는 공정한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의 후반에 가서는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며,
그의 공정한 저울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판단은 항시 현세와 내세의 삶의 판단의 저울로 사람들을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공정성의 판단에 대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든다면,
현세에서 의로왔지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들은
내세에 마련한 영생과 영광의 복으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현세에서 악하게 살며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편안하게 살았던 인생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형벌)을 통해 평가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도록 되어있는 원리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원칙안에 있는 세상은 무엇이든지 심은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이 원칙위에 다스리신다.
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들이 행한대로 갚으시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합당한 결과를 얻게 한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은 지난 일들의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혀 새로운 방향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항상 현재의 기회를 바로 사용하려면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리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항구에 정박에 있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하려면,
정박해있는 부두에 붙들어 매둔 밧줄(자신을 댕기는 과거의 끈)을 끈고
항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는 지은 죄에 대한 청산하려는 결단의 태도와
또하나는 자신안에 죄를 지으려는 성향들을 고치는 태도이다.
이것은 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준엄한 자신의 평가에 따르는 통한의 태도이며,
그리고 자신의 그릇된 죄질의 성향의 방향전환의 결단을 포함한다.

인생이 죄에 대해서 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죄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은 그 위반한 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른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은 그 범법한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그것을 벗기전에는 모든 일에서 자유할수 가 없다.
그 위반이 자신의 활동하는 몸이나 생활을 영향을 주는 구속을 주기 때문이다.
(경범과 중범의 차이는 있지만, 법위반에 대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죄의 시작은 인류의 시조인
처음인간(아담, 하와)의 범죄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그들의 허물과 범죄가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 속에 영향을 주어,
그들과 같은 성향의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의 피가 온인류의 몸안에 흐르고 있는
죄를 짓게하는유전인자와 악한 성향등으로 나타난다.

고로 인간의 죄는 먼저는 원죄이다.
그리고 그들속에 있는 그 악한성향이 나타나
자신이 짓는 자범죄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다.

인간의 법은 행위와 영향력에 대한 죄를 묻고,
드러난 죄의 결과를 판시하여,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치른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외형의 죄뿐 아니라,
내면의 죄와 타고난 인류의 원죄와
그죄의 영향력까지 사람을 살피시고 있는 그의 심판의 잣대가 있다.
고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이 죄에 대해 자유로우려면,
자신을 만드시고 존재케하신 하나님앞에 가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실 죄의 시작이나 근본은 외형적인 죄의 행위에 있지않고,
죄를 짓게하는 내면의 태도나 성향이 더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기질이 있다면,
언제가는 타인의 물건을 도둑질할 것이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의 성향이 거짓되고, 오만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언제가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혹은 자신의 주변로 분출되어 나타날 것이다.
고로 인간을 고치려면, 즉 사람이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와 지려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곳은 인간의 의지와 감성과 이성이 함께 어울러져,
자신이 어느 성향의 사람의 자아이든 그 자신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그 마음안에 두 주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두주인은 인간의 옛자아와 새로운 자아이다.

먼저는 옛자아(타락한 이후에 갖고 태어난 인간의 죄의 성향과
그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자아성)의 세력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
또한 새로운 자아(주 예수를 초청함으로 즉그가 영으로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심으로
그 소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새롭게 변화시켜,
진정한 인간의 온전성을 세워가는 자아)이다.

마음의 끝(가장자리혹은 연결고리)은 인간내면의 두방향성에 의해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방향성이란 육으로 가는 길과 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육신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몸에서 요구하는 육의 본성과
그 본성의 욕구충족의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는 본능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욕구충족이 지배하는 세계로,
자주 혼돈과 고뇌에 사람을 빠지게 한다.
영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고귀한 성품이 맞닿는 곳으로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과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체계가 있어,
영적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그 영적세계에는 하나님의 인간속에 심은 인간성(종교성)이
비록 타락으로 변질되었지만,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영성)과 자질(하나님을 닮아가는 기질)이 있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이 되며,
관계가 성립이 되고, 교제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통해,
내면과 마음의 혼돈과 공허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사람의 상태는
점점 질서와 창조의 채움으로 이어지게 되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며,
건전한 자신의 소우주를 만들어 간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르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죄에 따르는 결과는 인간에게 죽음의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번민과 고통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었던
그리고 짓는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죄는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인간세계의 필연의 악이다.
그 필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죄악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죄에 대한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채무를 이행하면 될 것이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은 이미 인간의 대표로 나타나신 인간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오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었다.
그가 해결하신 인간의 죄는 그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짓는 죄의 성향이나 모든 행위에 대해
형벌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해결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죄있는 사람들은 그앞에 나아가 그의 형벌치름을 의존하여,
죄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할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짓는 성향이나 악으로 빠지기 쉬운 혼돈된 내면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살기 위해 살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한 사람사는 도리이다.
누구도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오직 그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자신을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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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사람과 쓸모없는 물건

예레미야13:1-9
1.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두르고
그것이 물에 닿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2.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둘렸다.
3.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4. “너는 그 베띠를 가지고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그 곳 바위 틈에 숨겨 두어라.”
5.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가에 감추어 두었다.
6.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 베띠를 끄집어내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7. 그래서 내가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감추어 둔 곳을 파고 띠를 꺼내 보니
썩어서 못쓰게 되어 있었다.
8. 그 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9. 이와같이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쓸모없는 것이 되게 하겠다.

사람이 쓰는 물건에는 어디나 쓸모있는 것이 있고 쓸모없는 것이 있다.
물건을 샀을때에는 유용하다 싶어 샀는데,
사서 놓고 보니 쓸모없게 된 경험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물건은 비싼 것이나 싼 것이등,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명품은 대부분 유행을 통해 혹은 인간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이 된다.
명품보다는 그래도 물건이 소비자에게 가치있는 제품은
쓸만하고 소비자가 쓰기에 흡족하면
그 물건이 명품다운 제품이 된다.
아무리 유행이나 사람들의 평가로 유명한 제품이라도
자기가 쓰기에 불편하면 그것은 명품이 아니다.

쓸만한 물건을 가게에서나 쇼핑센타에서 보았을때에,
그것이 아무리 비싸도 사고 싶은 것은
그 물건이 유용하다고 생각이 들어 그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새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중고품의 유익함을 가져보는 것도
그물건을 쓰는데 유용하다면, 그물건을 잘 산 것이다.
물건의 새것인지 혹은 중고의 것인지 하는 것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물건의 쓰임새가 있으면, 그물건은 유용한 것이다.

미국에는 자동차 중고시장은 거대한 시장으로 활발하게 매매가 형성이 된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집에 쓰는 모든 가정용품에 대해
그들은 가라지(창고)세일이나, 야드(뒷뜰)세일로 자기들이 쓰던 물건을
잘 손질하여 내다 팔고 그것을 사서 쓰고 있다.

사람들 중에도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나 마나한 무익한 사람도 있으며,
더 나아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해로운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자리보다 높이 평가된 사람은
보다 귀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그자리를 빞낼수 있다.
그런데 자리값을 하지못하는 제능력에 버거워 하는 경우는
자칫 그자리에서 제대로 자기역활을 하지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적법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으로 적합(유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상징적인 행동을 하게 하여, 이스라엘에 교훈을 주신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에 사용하던 허리띠를 가지고,
그 허리띠의 유용성이나 혹은 허리띠가 썩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
무용하게 되어 버리는 교훈을 주고 있다.

물건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그 물건을 잘 보관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대개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자기주변의 안좋은 환경이나
나쁜 사람들 혹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지식이다.
사람을 버리지 않도록 하려면 좋은 환경이나
좋은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교육하는 데 모방교육이
가장 큰 교육의 효과가 있으며 영향력이 있다.
사람은 따라하면서 배우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므로 어른들을 닮아간다.

그 모방교육은 교육적 환경에 좌우 될때가 많다.
백노야 까마귀 놓는데 가지마라.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은
좋은 것, 옳은 것, 유익한 것들을 많이 보게 하고,듣게 하고,
느끼게 하고,체험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맹모삼천지교의 교훈등은
인간의 교육에 현장의 중요성과 모방교육의 영향이나
효과등을 알려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쓸모있는 경우는 자신이 쓰기에 합당한 물건이 되었다.
쓰는 동안 유익하며, 쓸모있으면, 좋은 물건이다.
사람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쓸만한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물건을 보관하게 하는 것은 물건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건을 상하게 만들어버리는 곳에 물건을 보관하면
물건이 썩어서 못쓰게 되거나, 망가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도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그 질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좋고 명품의 물건인줄 알고, 아끼고 두어다 놓다가
나중에는 그물건을 쓸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자랄때에 배우는 시기에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하다가 나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오랜 세월의 반복의 과정의 결과에서 생겨난다.

지금이라도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가꾸고 배우게 하는 일에
투자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배우는 시기를 놓쳐서 공부하려면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른다.

물건을 쓰지 않고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그냥 놔두면,
그 물건을 못쓰게 상하게 되었다.

사람도 상하거나 버림받은 상태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거나,
혹은 게으름이나 무책임에 방치하면,
사람은 아무리 과거에 뛰어나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항상 관리하지 않으면
쓸모없게 되고 망가지는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손쉽게 할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익한 일에 매달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고 후회스러움만 남아 무익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좋은 환경에 있어서도 자신을 가꾸고 교육하지 않으면
좋은 인물을 만들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거나 여건이 좋아도
자기노력이나 애씀이 없다면 가치있는 일들을 남길수 없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유용한 교훈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재차 언급하실때에
그 말씀의 이면에 뜻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에 단순하게 생각하여 이해할수 없는 말이다.

교육의 효과도 반복할때에 나타난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교육혹은 수학테스트나 언어교육은
반복연습을 해야만 교육적인 효과가 나타나 점점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진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을 반복하여 연습하면,
두뇌에 강인하게 입력이 되어,
닦고 닦은 익힌 기술을 자동적으로 나타낼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것과 쓸모있는 것의 차이는 쓰는 사람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사람이 못쓰게 되는 경우는
대개 지나쳐서 쓸모가 없고 유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배워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기지식에 대한 지나친 절대화하는 태도가
자신을 교만하게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른사람에게 유익하게 나누지를 못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교만하면,
자리에서 오는 유익만을 취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거나 버림을 받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교만으로 나가면,
그 힘이 사람들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고 압박하는 도구로 변해버린다.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것과
자신에 대해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모있는 사람이 있고 쓸모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명시하였으며,
그것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쓸모있는 것이 좋다.
시장에 가서 그 물건이 좋아보여 사놓고,
그것을 실지로 써보면 쓸모가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하찮게 여기고 산 물건이 이외로 쓸모있게 쓰는 경험도 가졌을 것이다.

사람은 좋아보이나, 사람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그 자리에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이다가
막상 자기 자리에 있게되면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뿐 아니라 전체를 다 볼수 있으니,
그가 옳은 판단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과 그의 어떠함을 평가한 하나님의 판단을 담은 글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알수 있고,
겸허하게 자신을 가꾸는 일에 충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나중에는 유익하고 가치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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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시와 독생자의 영광

히1:1-6
1.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없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또 아들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3.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4.그래서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그들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 되셨습니다.
5.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거나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6.그러나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계시를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의 자기알림은 역사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알려오신 분이다.
감추어진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린 문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계시의 의미이다.
비밀의 뜻을 푸는 것은 그것을 푸는 해결(이해의 안목)의 열쇠를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알리신 것처럼
각 개인에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도 또한 일생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알려진다.
이성의 세계에서 즉 기록된 말씀안에 알려지신 지식의 내용을 아는 단계에서
알려진 그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인생의 삶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경험의 세계에서 그분의 감추어진 부분들을 계시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메신저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알리셨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알리셨는데,
그 방법들 중에는 하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입의 기적적인 현상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사람과 동행하심으로,
국가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지도자들을, 사사들을, 예언자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하여등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셨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
그분의 의로움에 대해,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그분의 정확한 약속성취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알리셨다.

그분의 알린 계신 중에 단연 가장 큰 계시의 중심에는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가장 긴 역사의 단일한 주제로
끊임없이 하나님은 인간사회에 말씀하셨다.
인류의 세초에서 부터,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이 었다.
하나님이 역사의 중심에 오시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은 독생자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역으로
그 계시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가 이루시는 계시는 그분의 아들 독생자를 통해
다시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계시로 알려지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그의 통치아래에 두시고,
모든 것의 주인으로 세우시고,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로 그의 이름을 높이신다.
모든만물이 다 독생자 예수의 발아래에 있으며, 그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진 독생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 지배권,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신다.

이제는 독생자가 이땅에 오셔서 알려주신 종말계시의
단계적인 성취실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으로 인류역사속에서,
그 통치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 독생자의 통치하심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어느 정점을 향하여 인류의 역사는 진행이 되고 있다.

만물의 주인이 인류역사속에 계시의 주체자로 사역하심과 같이
각개인의 인생의 삶의 현장안에서도 그분의 통치의 영역이며,
그분은 모든 그를 구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인생가운데에 그분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영접한 인간들 속에서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하신다.

인간들안에 알려진 독생자의 계시는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그 독생자의 중보의 역활을 통해 알려지고 알게 되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은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분은 인간속에 오신 알려지신 하나님으로 인간들의 인생을 친히 경험하여,
그 인생들과 동화된 그분의 성품과 사역을 통한 아들의 계시의 역사는
각개인에게 지금도 재창조(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듯
지금은 인류각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성품을 만들어가시는 사역)의 사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중심이며, 그 독생자는 인류에게 알려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통해 인간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이신 본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중에 가장 분명한 계시된 성품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은 온몸으로 인류를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인생들에게 생명과 인간본연의 영광된 위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분은 영원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그분은 만물의 원리의 중심에서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지금도 보존하시며 통치하신다.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와 사역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통치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알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차적인(육체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혹은
이차적인 차원(생각이나 명상)이 아니라 삼차원(영적인 세계: 영물들의 사역하는 차원)을 지나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의 영역안(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교제안에서의 믿음과 창조의 차원)에서 이해와 경험을 할수 있게 된다.

오늘도 독생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의 만물의 통치의 주인으로 다스리신다.
그리고 인생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여하며,
그분이 이땅에서 흘리신 피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류를 깨끗이 죄에서 씻어내는 일을 하신다.
그분의 보혈은 인류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죄를 속하는 속죄의 방법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앞에서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역사의 시초에 범한 죄로 인하여 변질된 상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독생자는 유일한 하나님의 광채이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은 하나님안에서 나온 분으로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인 영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영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로 지음받고 세움을 입었으나.
그분 독생자는 모든 영물들의 사역의 봉사를 받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모든 만물들이 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영광중에 찬미를 받으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 독생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생들이 믿고 따르는 독생자는 하나님이기에 인생의 존재는
모든 만물의 존재들중에 뛰어난 존재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락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떨어졌으나.
인생들은 그분안에서 얻을 영광을 바라보는 존재로 다가올
그분의 때에 그분의 영광받으신 것처럼
그분안에 있는 인생들은 영광을 함께 누린다.

하나님은 그분 독생자와 더불어 영광과 존귀와 찬양받으심을 공유하며,
만물의 통치에서 공유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세계의 영역안에서 주님으로서 공유하신다.
그리고 그 독생자의 피의 공로로 구원얻은 각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받으심을 공유하신다.
구원얻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모실 한분의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다.

독생자의 세상에 오실때에 수만만의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하늘에서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인류의 화해를 나타내는 평화의 사도로 독생자가 임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영물들은 그분의 탄생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그분에게 돌아갈 영광을 돌리며,
그영물들의 영광돌림과 찬양속에 독생자는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사역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이땅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의 은총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안에서 인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수 있으며,
인류는 하나님을 자상한 어머니(자녀사랑의 화신)같은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다시 자신들의 잃어버린 명예와 영광을 회복한다.
그 독생자의 영광안에 인류의 영광과 축복이 담겨있다.
그분의 영광의 통치안에서 인류는 평안과 안식과
그리고 썩지 아니할 영광의 축복을 얻는다.

고로 독생자 예수님은 만물중에 으뜸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통해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 독생자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알려지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조성이 되었고 인류가 구원과 영광의 길을 찾았고,
그분 독생자를 모신 인생들이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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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들과 청중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에스겔 3:16-21
16. 7일이 지난 다음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 말로 그들을 경고하라
18.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에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거나 잘 타일러 그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를 살게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겠지만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물을 것이다.
19.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악인을 경고하고 타일러도 그가 악한 행실과
죄를 버리지 못하면 그는 자기의 죄때문에 죽을 것이며,
너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 것이다.
20. “또 의로운 자가 의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면 내가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때문에 죽게 될 것이며 그가 전에 행한 일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21.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의로운 자를 깨우쳐 그가 네 경고를 듣고
범죄하지 않으면 그가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너도
네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다.”

메신저들(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은 청중(그 말씀을 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말씀을 먹음을 통해 자신이 먼저 말씀에 용해되어
그 말씀에 푹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이 말씀을 풀어 설명할수 없다.
말씀에 대한 경험은 그 말씀이 자신안에 육신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는 몇가지 단계로 생각해보면,
먼저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그 이해와 연구의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다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그 묵상을 통해 말씀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말씀안에 들어가 자신을 변화시켜,
말씀의 지시하는바를 따라 말씀이 주문하는 명령이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단계로 나아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조절하며, 말씀의 인도에 순응하여,
그 말씀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파숫꾼의 사명은 선견하는 일,
즉 먼저 앞서 시대의 미래를 볼줄 알아야 할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저 살펴보고,
그 일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전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청중들의 길을 판단하고 그들의 삶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파수꾼이 하는 일은 백성(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이다.
앞으로 일어날 재앙이나 위급한 일에 대해 경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고 대비하도록 할 것이다.
예언자(파숫꾼)는 백성들이 갈 방향(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지시하는 일이다.
고로 그들이 갈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일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여,
그것을 따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예언자는 메신저와 청중들의 관계를 이해하고,
먼저 그들중에 악인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왜 인생이 악으로 달려가는 가? 그것은 자신들의 악한 성품때문에 그럴것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은 사람들을 오염시켜,
그 악의 세력안에 이끌려 죄를 범하게 한다.
악의 근원은 악한 존재에게서 시작이 되었다.
세상에 악을 뿌리는 악한 존재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악한 영들이다.

그들이 뿌린 악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는 데로 유인하여,
사람은 죄악을 순간적이든지 혹은 의도적이든지 행하는 허물을 범한다.
즉 사람이 악에 물들면, 의의 율법을 듣는 양심의 기능이 마미가 되어,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악인으로 변한다.
고로 자신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악의 흔적이나 찌꺼기등을 깨끗이 물리쳐야 한다.
이미 범한 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회개, 용서, 그리고 정결)들을
실천해야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수 있다.

메신저(예언자)들은 의인에 대한 격려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의를 행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감도 필요하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의인은 의인의 삶의 원칙을 따를때에 만들어진다.
성경은 의인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인은 그의 말씀을 따라 그가 명하시는 바를 순종하는 자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그분이 명하는 믿음의 원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이는것에만 의존하지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영적세계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실때에,
그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의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들을줄 알아야 하며,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그의 편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함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말씀하시며,
그 예언자의 자신의 정체감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예언자가 활동하는 시기는 유다나라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으며,
참담한 국가나 그사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명을 받아서,
그 가운데에서 심판과 아울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어주는 의미가 있는 직명이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를 이스라엘민족의 파숫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은 망하고
다시 건설되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를 살고 있는 각 시대를 분석하고 진단하고
판단하는 경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각시대의 파숫꾼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다.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즉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주변사람들에게 영적인 파숫꾼의 사명이 있다.
그들의 말과 언행을 통한 삶을 통해,
그 주변사람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게 하는 사명이 있다.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주위의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혹은 나쁜 가르침의 영향으로 인하여,
혹은 악인의 모델을 봄으로, 혹은 자신스스로 택한 악한 길에서 등일 것이다.
성경은 악에 대해 반드시 그악에 따르는 댓가를 치를 것이며,
불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원치 않게 악에 물들어,
옳고 의로웠던 과거의 행적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어제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결단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의인은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통해
법의 준수의 필요성과 선함을 좇아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므로써,
옳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수 있을 것이다.

각사회마다 법을 이행하는 사회적인 규범이 있는데,
법의 집행을 위해 경찰이나, 권위자들이 있다.
그리고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댓가를 치르게 하는 법원이나 교도소등이 있다.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법의 옳은 시행과
그 법을 따르고 준수하는 시민정신이 건전하면 그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사회를 밝게하는 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로 법의 엄격성을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긍정적인 대안으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도덕이나 종교의 역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양심이며,
건강한 사회의 척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의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일에 대해서는
왕이나 평민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예언자들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파하였다.
메신저들은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선포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와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을 인도하는 사명이 있다.

신언(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종교인들, 사명자들)에게는
주변인들에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고,
악인은 그악에서 돌이키도록 하며, 의인에게는 더 옳은 일에 대한 격려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밝게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사회적인 책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며,
그 잘못은 더 엄격하게 처리되며,
그 일에 대해 종교인들의 바른 전언을 통해
사회적인 지도자들이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보다 조심하며,
자신들의 위치에서 바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종교인들이나 사회의 양심의 기능을
다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소홀히 하게 되면,
그 영향은 사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들 중에 하나가,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백성들사이에서,
각시대의 사회를 향해 도적적이고
영적인 파숫꾼(파숫꾼은 군대나 혹은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첨병혹은 보초병이다)
의 사명을 바로 하지 않아서 패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항상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들로 부터 시작이 된다.
종교인들 즉 사회적인 정신적인 지주역활을 하는 이들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하면, 먼저 자신들이 경고를 받고 심판을 받는다.

파숫꾼이 자신이 해야 할일들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그들이 행하는 의를 칭찬하며,
더 큰 선을 향하여 나갈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메신저(설교자혹은 예언자 혹은 진리의 실천자)의 경고를 듣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면,
악을 행하는 악인에게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빛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때에 더 불빛이 필요하듯,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의인과 예언자)의 역활은
자신의 언행으로 자기에게 비쳐진 빛이 잘반사되어져 비치도록
자신을 가꾸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별수 없이 살다가 그만 악의 길로 물들어 살다가,
자신의 처지가 더 암담해지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는 경우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악을 행하는 것이 어려워 지는 것도 자신에게는 고맙고 유익한 배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을 짓는 악인의 삶으로 향하여 나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어느 인생에게는 그것이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저질러 지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안타깝고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은
옳은 일을 행하던 사람이 갑자기 악을 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일이며,
선한 일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그 일에 지쳐 자신의 의와 선을 포기하고,
악에 타협하는 일이다.
어제까지 옳은 일을 하고, 지금 자신이 주변의 악에 물들어 간다면,
어제의 선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늘의 변질된 자신을 고쳐 돌이키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포자기, 좌절, 변절, 배신, 타락등은 인간생활에 사람들이 경험해서는
안되는 안좋은 인간의 상태이다.
신앙생활에도 낙심, 변절, 배교, 퇴보등은
자신의 인생기록에 있어서는 안될 인간의 못된 자기변화이다.
그런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파멸로 자기를 더 밀어넣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그릇된 경향이다.
그것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결과를 낳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사람들을 흥겹게하고 힘나게 하는 것은
인간자신들에 대한 소망적이며,
개선적이며, 발전적인 뱡향으로 나가는 것일 것이다.
그런 예를 구체적으로 든다면,
인생의 도(생명을 얻는 진리)을 구하는 구도자가 그 길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과거까지 악을 줄달음질하다가,
생명의 빛의 진리를 듣다가 깨달아,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뱡향으로 옮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중에 강도가 변하여,
새삶을 살아가고, 인생의 쓸모없는 놈팽이라고 자신을 여기는 사람들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타인에게
격려와 자극을 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뉴스가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제까지 어리석게 고집스럽게
부모의 교훈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더럽게 악을 범하며,
살던 자식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삶을 살기롤 결심하는 사건은 모든에게 청량제와 같은 시원함을 주는 소식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혹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부모된 입장의 신앞에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결심을 고백하며,
자신의 개선과 발전의 결과가 나타내도록 힘쓰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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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는 삶

로마서 1:1-7
1.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된 나 바울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2.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3.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가 그분을 통해 은혜와 사도의 직책을 받은 것은
모든 나라사람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가 된 로마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그도의 은혜의 평안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인생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며, 삶의 방향이다.
자기의 정체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사람을 자기 인생의 길안에서
자신의 해야 할 사명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
고로 자기가 해야 할 고유한 일과 그일에 대한
천직적인 소명감이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기 인생의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가는 과정들이 모여 목적있는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낸다.
그래서 자신의 성취목표가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은 자기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사명에 대해 분명한 자기정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일이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그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그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투자하여 그일에 매진하고 있다.

힘들고 슬픈소식이 넘쳐나는 인생들의 삶의 현장에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통해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 기쁨의 소식은 바울을 구원한 소식이며,
동시에 그는 이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 기쁜 소식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예언자들은 핍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고난과 역경가운데에 그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위해 끊임없이 역사속에서 전파하였다.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에 대한 뉴스이다.
그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민족안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시다.
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나?
그는 다윗의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한 메시야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앞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던 왕이다.
메시야는 이상적인 왕의 통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세상의 것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에게 오시므로 그들을 구별된 존재들로 세운다.
그 영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므로
그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 영은 생명의 영이며,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영의 역사안에서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의 예수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자신됨과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장차와 영원가운데에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그 신분의식에 의해 자신이 위치를 발견하고,
그위치에서 자신이 할일을 찾아, 그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되고 나서 자신이 할일을 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신이 되지 않고 직책이나, 사역을 하러 나선 경우는
일을 하면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고, 그분안에서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과거에는 종교적인 지식이나 관습에 의해
자신이 유대교의 선생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여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지냈으나,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변화된 그의 고귀한 성품이나 인격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를 좇아,
여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사람들을 살려야 할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 만인에 대한 봉사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고 맡은 사람으로 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되어야 할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갖고 전하는 사람으로
바울은 자신(바울자신이 먼저 변화된 사람)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르게 되도록 하는 가르침은 그것을 사람들이 받을때에,
그 진리가 자신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진리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킨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자기경험를 통해 영향을 줄수 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인생에 막강한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변치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갈 뿐 아니라,
사람들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인생의 삶을 빛나게 하는 역활을 한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분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사역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사람들로 세우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사람들이 되어갈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이다.
성도란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이란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이다.
세상에서 따로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그것은 자신의 영원한 영적인 고향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만 자신의 처지나 직업이나,환경안에서
거기에 있는 자신으로서 그의 부름을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농부는 농부로서, 기술인은 기술인으로서, 전문인은 전문인으로서,
혹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단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소명(하나님의 부름)을 이루어 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은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받는 것이며,
그가 인간을 위해 마련한 모든 영광과 축복의 자리에 동참하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부름에는 그의 깊은 예정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부름안에 있는 그의 예정은 만세전에 작정하신 뜻이며,
그가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무리들을 영원전에
이미 작정하신 계획의 일로 부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섭리는 그의 부름을 각자의 인생들속에
그의 기이한 손길로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사람들이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분명한 확신과 자기 사명에 투철하여,
평생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목적의식아래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인생 앞에 놓인 과정들이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더라도
자기가 가는 길을 후회없이 그리고 나약하게 진행하지 않으며,
일관된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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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인생을 망하게 한다

2007/04/11 오후 11:50 | 메시지

예레미야13:15-18
15. 너희는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교만하지 말아라
16.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어두운 산에서 너희가 비틀거리기 전,
너희가 바라던 빛을 그가 캄캄한 흑암으로 바꾸시기 전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17. 그러나 너희가 듣지 않으면 너희 교만때문에 나의 심령이
외롭게 흐느낄 것이며 여호와의 양떼가 사로 잡힌 것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것이다.
18.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왕과 그의 어머니에게
‘너희는 높은 자리에서 물러나 앉아라.
너희 영광의 면류관이 떨어졌다’하고 말하라.

교만은 인간실패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자신을 실패하는 자로 여기려는 데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게 되며,
그 일로 나중에 자신의 망하게 되는 요인를 발견하게 된다.
교만한 그 사람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얼마 안있다가,
자신의 삶이 실패하게 되든지 혹은 곁길로 빠져 망하게 된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선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듯,
인간에게 교만은 쉽게 가지게 되는 인간의 성향이다.
조금 높여주면 교만이 하늘높이 솟아 올라,
사람들의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신만의
바벨탑(성경의 고대에 있는 사람들이 인류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자기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탑을 쌓았다가 그 탑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 내린 탑)
의 세계를 쌓아놓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자신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위치에서 인간 자신들을 망하는 쪽으로 향하는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귀에 달콤한 말을 주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말에 솔깃하여 그말에 속아간다.
그렇지만 바른 소리를 하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마음이 정직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올바르게 만드는
그 정직한 말에 귀를 기울인다.

지혜로운 자녀들은 부모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으며,
그 부모의 교정하는 가르침에 순종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한다.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지혜로우며, 또한 겸손함 사람들이다.

어리석은 인생이 갑작스런 자기위치변화나
소유변화가 있을 때에 빠지기 쉬운 교만의 함정이 있다.
그들은 일시적인 자기의 교만의 태도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의 삶에는 안좋은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런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중에 서야 자신의 가지고 있는 그 교만의 태도나 자세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험이 없고 젊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울때에나,
못사는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그런 경우에 그런 교만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경우나,
잘못된 부모의 교육으로 자신을 교만하게 여기며 지내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지나치게 자녀들을 그들 중심의 인생관을 갖도록 유도하게 될때에,
자녀들이 쉽게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혹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 즉 자기가 속해있는 모든 환경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며,
모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들을 자기의 욕구를 달성하는데 이용만 하는 경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교만한 인생으로 비쳐 줄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없었던 사람이나,
혹은 낮은 자리에 있을때에는 겸손하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소유물을 갖게 되었을때에나,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쉽게 자기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경우도 잇다.

유명인들중에 자신의 인생이 특별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교만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쉽다.
어느 일에 업적을 남기거나, 혹은 어느 단계에서 훈련의 효과를 본 사람들이
자기가 이룬 것을 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 교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신다.
그 교만이 아름다운 영적인 영물들(천사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떨어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귀신들) 변화되어,
결국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더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그 교만은 이상적인 인간(창조주가 창조후에 보기에 좋았던 인생들)을 타락시켰으며,
그들을 복잡한 문제에 휩싸인 존재로 전락하게 하였다.

교만한 인생의 앞길에는 망하게 하는 요소들만 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잘 나가는 인생도 그의 손길 앞에서 무너져 내리게 한다.
교만한 사람이 자신의 형통한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누리다가 언제인부터인가 그의 밝던 인생의 현장에 어둠이 깃들일때에,
자신의 삶이 비틀거리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그 인간의 교만은 사람들을 고집스럽게 하며, 의를 추구하지 않게 한다.
더 나아가 그런 교만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인간사회에서 악을 조장하며,
악의 세력으로 횡횡하게되어,
사회가 어두워지며, 어렵게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상황으로 나가게 한다.

자신의 교만에 대해 지적해주는 충정어린 사람들의 충고를 외면하고,
주변사람들의 권면을 무시하게 되면,
그 교만한 사람은 더 나쁜 사람으로 나가게 되며,
그 주변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심령에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그 교만한 사람의 삶을 탄식하게 된다.

교만한 사람들이 그들의 교만의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이미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이나 상황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들어 버리며,
자기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 괴롭히게 된다.
교만한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도 힘들어 지게 괴롭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어리석은 교만으로 일을 저지른 결과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그 고통에 참여하며 그것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인생들을 거부하신다.
그들의 오만과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미워 하신다.
그 자리가 아무리 높고, 그사람들의 위치가 아무리 견고해도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삶이 버림받은 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에 온유한 사람이
결국 자기가 원하는 땅(자리, 소유)을 차지하며,
겸손한 사람들이 사람들사이에서 환영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겸손, 겸손, 겸손은 인생을 잘사게 하는 자신의 좋은 자산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높여주고 가치있게 해주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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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속에서 희망을 걸고


예레미야 애가 3:22-27
22. 여호와의 크신 사랑때문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으니
그의 자비가 영원하구나.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24 내 심령이 말하는구나 ‘여호와는 나의 전체이시므로 내 희망을 그에게 두리라.’
25 여호와 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26. 여호와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고
27. 사람이 젊었을때 인내를 배우며 훈련하는 것이 좋다.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슬픈노래를 부르는 예레미야는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며,
그에게 희망을 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유다나라는 자신들의 범죄와 허물로 심은대로 멸망을 거두고 있다.
절망가운데에 있으면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절망에 빠지게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힘을 잃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 상황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곧 잠시 있으면 다시 새로운 희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고난가운데에 있으면서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며,
교훈을 되새기며, 자신을 가다듬는 기회를 삼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꿋꿋히 서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어진 환경들을 통해 없는 것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와 유익을 찾으며,
그것을 통해 그 시절들을 극복하는 재료를 삼아,
이후에는 그들은 더 강한자, 그리고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지게 된다.

실패를 당하면서도 성공할 것을 생각하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새로운 시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반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패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게 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돌아보게 한다.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실패를 많이 거쳐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실패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교훈삼아 성공하는 자신을 가꾸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유다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범죄로 온나라가 멸망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와 인생의 교훈을 배웠으며,
이후에 유다는 세계에 흩어지며,
고난 당하는 민족으로 호된 시련의 세월을 겪지만,
그 고난가운데에 세계에서 적응하는 것을 배우며,
자신들의 생존이나 번영을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좋은 인생의 지침과 올바른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에 대해 분명히 판단하며,
그들의 죄를 심판하지만, 결코 인간자체를 파멸로 이끌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살길을 열어주시고,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다만 사람이 망해가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어리석음,
혹은 파멸하게 되는 원인이 오만한 모습이나 고집스런 악한 태도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들의 잘못으로 댓가를 치르는 중에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수 있는 크신 분이다.
그는 온우주와 그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의 모든 것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신다.
비록 인간들이 잘못하여, 범죄해 빠져 있어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며, 자비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통해 사람은 죽어간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소멸되어간다.
그렇지만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은 영원한 세계로 향하여 나아간다.
다만 그길이 두 갈래길에서 갈라지만
그영혼들은 영생을 얻는 미래와 영벌을 당하는 미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자비는 죽음을 맞이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안타가워 하신다.
그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
항상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가진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다가온다.
모든인생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사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잊을수 가 없다.
그가 한사람의 영혼을 향한 열정은 유일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한 그 사랑에 있다.
그 사랑은 항상 망해가는 사람들을 향해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새롭게 삶의 호흡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녁에 사람들의 낮에 분주한 활동으로 고된 육체을 쉬게 하고,
잠을 통해 다시 자신들의 육체가 힘을 얻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나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된다.
밝게 빛나는 아침의 햇살을 맞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신선한 공기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자비와 헤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아침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하루를 시작할수 있다.

인생의 많은 날들주에 자신들이 젊은 날에나, 혹은 무엇이나 시작하는 순간에
모두가 새로운 소망에 마음을 푸근하게 할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을 시작할수 있다.
그것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베푸시는 혜택으로 인함이다.
그는 우리들 자신의 구원과 영광의 하루의 날을 이루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신실한 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비로우며 신실하다는 이사실을 명심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향해 항상 내가 그의 자비하신 손길에
나의 희망을 걸리라는 다짐을 통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것이 그의 손길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희망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
사람이 신에게서 그것을 찾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을 삼아,
인생을 힘있게 그리고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아간다.

인생의 좌절이나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나설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부르는 초청의 음성에 불러냄을 받아
이미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보다,
아직도 그의 부르는 음성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마음을 쓰신다.
그들도 마찬가지 신의 품안에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어떤 인생들은 좌절과 번민과 고통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나온다.
어느 사람들은 진리를 구하고,
변치않는 삶의 원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살게한 신을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여유에서든지 신을 찾아 발견하고 그에게 나아와
자비와 사랑을 기대하며, 인생의 축복을 기대하며,
절망속에서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은혜를 주신다.

사람이 일이 안되고 인생이 힘들때에는 잠시 삶을 살아가는 손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분을 생각하는 것은
지치고 나약해진 자신들을 돌보고 힘있게 하는 신의 손길을 기대할수 있다.
때로는 세상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고 정신없게
만들어 쓸모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을 값있게 살아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시 조용히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날이나 좋은 일을 만날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에게는 나의 많은 인생의 날들중에
가장 감격스럽고 기뻤고, 의미있었던 날은 나에게 그분이 찾아온 날이다.

사람이 젊을때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정력을 쓸데없는 일에 소모하지 않고 살면
인생을 사는 지혜를 얻으며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젊음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며,
왕성한 의욕이 자신을 휘둘러 마치 오래살고
기회가 많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다.
때로는 젊은 날에 일들의 실패와
힘든 인생관계의 상처와 인생의 아픔과 삶의 좌절감을 맛보는 것이
그가운데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며,
이후의 자신의 삶에 값진 교훈이나
유익하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저력이 될수 잇다.
절망속에 희망을 걸고 이 삶의 원칙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를 찾는 자신에게도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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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역의 우선순위

행전1:1-8
4.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말한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얼마 안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그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우실 때가 지금입니까?” 하고 묻자
7.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것이 아니다.
8. 그러나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날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중에
무엇을 가장 우선시하고 살며,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때에,
그 날들의 하루하루가 충실히 모아질때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사람은 어릴때에 하는 일과 청소년이 되어 하는 일과,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 각기 일이 달라진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나 방법도 점점 성숙해지고 능력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인생의 각 단계마다 성장이나 성숙에는 변화나 전이로 인한
새로운 도전이나 거기에 응하는 자기 변화내지는 개선되는 자기정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 모인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라는 역사적인 신적인 존재인
그분에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에게 속해있는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르쳐왔던 바람직한 인생의 가르침과 하늘나라의 도리를 따르며,
그가 세울 이상적인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따라왔다.

그런데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가졌던 목표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의 삶의 모델이었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다 날려가버린 허탈감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가 세운 목표나, 방향이 갑자기 사라지면 당황하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과 더불어,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오늘여기에 나타난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인생의 딜레마에서,
자기들의 세우고 따랐던 인생의 삶의 목표수정이나
혹은 궤도이탈로 인한 방황을 통해
앞으로 자신들앞에 전개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만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과 다른 차원의 삶인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셔서 나타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가 지상에 있을시에 가르쳤던 하늘나라의 가르침과
인생을 살릴 좋은 뉴스에 대해 그의 자상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여,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할수 없지만,
그가 약속하신 그의 분신이신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 제자들을 새롭게 하며, 강하게 하며,
새로운 예수의 제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중에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셨을까?
그렇지만, 제자들이 생각할때에, 예루살렘은 끔직한 곳이다.
자신들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예수님을 잃은 곳이다.
모든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모든 직업과 재산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 갔는데,
그가 갑자기 죽음과 함께 자신들과 함께 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제자들은 고아들처럼, 방황하며,
애써, 공허하고 실망한 마음을 참으며, 그나마,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른 차원의 생명이신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 그 분으로 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고 지내고 있었다.

예수님도 죽으셨고, 그들의 따르는 사역도
모두 물거품으로 공중에 붕뜬 느낌을 가지고 사는 요즘의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겪는 변화무쌍한 현실에 안주를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어디서 새로운 희망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따라 나섰다.

제자들은 차라리 요한을 따라 나설걸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례요한도 민중들속에 순교한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어디서 하늘의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
(이후에는 그들이 하늘의 메신저들이 되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와서 외쳤던 회개하라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친 메시지의 메아리가 아직도 그들의 귓가에 맴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요단강가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씻는 표를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오셔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보내신 성령은 만물을 소성케하며,
멸망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영이시며,
그분을 받으들여,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

아직도 자기민족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망국의 한을 살아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 주님에게 간청한다.
언제쯤이면,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시나요.

아직도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이스라엘 자기 민족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 까하며,
그리고 어떻게 성공하며 출세를 할까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들 자신의 영혼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자주 인간이 사는 삶에 일어나는 딜레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입히는데 관심이 있고
자기를 먹는 일에 관심있고, 자신이 소유하는 일에 관심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에 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 자신이다.
사람들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안에서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촛점이 모아져 있다.
로마의 압정하에 자기민족이 해방을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는 인류구원에 있으며,
예수자신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복음이 다 증거되면, 그제야 인류역사의 끝이 오면
모든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때와 다르며,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국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걱정을 하고
하루 속히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는 더 큰 계획의 전개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은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항상 가장 최선의 시기에,
이룰 그의 역사의 때와 기한을 주장하신다.
주님이 다시오시는 시간도 주님만이 아신다.

그의 때와 시간은 완벽하게 준비하신다.
인생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인데,
자신의 지혜는 자신의 인생안에 있는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한내에 자신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오직 인생의 때와 기한은 그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인류의 시간표도 그의 권한안에 있다
그의 권한에 의해 모든 때가 시작이 되며 과정이 되며 완성이 되어진다.

그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의 분신이신 영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에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로 오신다.
인간속으로 생명과 능력의 영으로 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속에 그의 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그 하나님의 영은 인류창조와 재창조의 영이며, 능력과 지혜의 영이다.
그의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성령의 역활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여 새로운 일들을 추구하여 이루어 낸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며,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나약함이나 부정함이나 불가능함을 극복하고,
인간갱신이나 생명변화를 통한 인간구원의 보증자가 되셔서
인간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하며 주님의 때까지
인간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인간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생명의 전도에는
그 전도의 시작과 진행 역사의 사이클이 있다.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들속에 들어와 생명의 시작을 이루어 가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정함의 딜레마를 딛고
그가운데에 인간속에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어,
그것을 가꾸고, 성장케 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권한을 회복케 하는 결론을 이루어 내신다.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주님의 복음의 전파는
성령이신 그의 영으로 시작이 되며 앞으로 그 끝의 완성을 이룰을 것이다.
이말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성령을 받아들인 각자 인생의 인생구원의 시작이며,
또하나는 죽음이라는 운명안에 처해있는 온인류에 대한 인간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두 명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류나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인생 각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분의 영을 통해 지금은 그분의 구원의 은혜받을 때요,
그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할때이다.
지금은 그의 복음을 전하며, 혹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을때이다.
그일이 각 개인이나 인류전체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 일들이 항상 놓여 있다.
일상적인 일들, 필요한 일들, 정해진 생활의 규칙을 따라 해야 할 일등,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교제를 위해 해야 할일,
가정의 대소사등 일을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우리 앞에 널려 있다.
그런중에도 사람이 자신의 생명이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한 영적인 일들은
항상 자신의 일중에서 최우선의 일인 것을 알고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생을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비결중에 하나는 우선순위의 결정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며,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일의 순서등을 자신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므로, 인생의 자신의 중요한 사역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자로서 질서있는 인생사역의 주인공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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