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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2
    크리스천의 사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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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0/07
    아름다운 여인 룻의 비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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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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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07
    주님에게 붙어있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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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9/03
    예수님의 기적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
    목동

크리스천의 사회생활

벧전 2:11-17

크리스천에게는 사회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삶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죄에 대해 대적하며, 법적인 권위에 순응하며,
주인이나 상관들에게 인내로 참으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불신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비방을 막으며,
하나님께 칭찬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친애하는 사람들이라며,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형제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세상에서 외국인처럼 그리고 나그네처럼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신자들을 외국인이라 여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외인처럼 살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말은 언제나 자기의 자의식이나 세계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함을 명하며,
세상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 크리스천의 가치나 믿음을 부정하므로,
세상에 속한 것은 비도덕적이며,
죄 짓는 욕망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나그네처럼 죄악적인 세상의 추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음을 명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전쟁을 치르는 사람처럼
즉 영적인 전쟁을 매일 싸우며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공중 권세 잡은 악한 마귀가
세상을 통해 크리스천들을 유혹하거나,
혹은 도전을 걸어 믿음의 가치나 삶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이런 죄의 욕망에서부터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 앞에서 효과적인 증인으로서 살기 위한 것이다.
적극적인 크리스천은 죄악 세상에 대해 능력 있게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거짓말로 크리스천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즉 그 어둠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 어두움을 밝혀줄 빛을 발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 선한 행위나 삶의 스타일을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새롭게 받을 불신의 형제들에게 주님이 방문을 하실 때에,
그 좋은 선행이 효과적인 인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기독교 역사에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에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
민족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대표적인 경우의 예를 보면,

민족의 기운이 불운할 때에,
매일 저가에서 술만 퍼 마시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강패였던 김익두같은 사람에게
어느 날 외국인 여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코를 풀고는,
그 선교사를 위협하였던 것에 대해 선하게 반응한 일로 인하여,
그 깡패 김익두는 마음에 찔림과 진한 감동의 도전을 받아,
급기야는 당시의 유명한 폭력배인 그를 거꾸로 뜨려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의 시민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가 속한 조국이나 사회에 소속된 일원으로
자기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모든 권위에 순응할 것을 명하는데,
그 순응의 동기는 위반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보다는 주님을 위하여,
즉 그것은 모든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 대한 영향력이 그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세운 법적인 권위의 목적은 악한 자에게 징벌을 가하고
선한 행위를 격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
고로 그 권위에 순응하는 일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을 비방하며 악의적으로 거짓 증거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므로,
그들의 비방이나 중상 모략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빛이 크리스천들을 통해
더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 권면의 역사적이나 지리적인 배경은
당시 로마 시대의 전 제국의 조직적인 핍박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즉 우리 시대에 우리나라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같은 문제에 봉착하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
그 문제란 말로나 언론의 힘으로 크리스천이나
그 사회의 모습들에 대해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것일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하나의 흔한 현상으로 문제 있는 것이나
혹은 그렇지 않는 것일지라도,
많은 크리스천들의 행위에 대해
사회적인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같은 비방 스런 중상 모략같은 공격적인 일들에 대해
최선의 방패는 크리스천들의 선한 행위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사회의 법적인 구속이나 제도에 대해 순응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그 사회의 법이나 제도에 기꺼이 순응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천들의 자유는 언제나 책임 의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그 자유는 악을 마음껏 행하도록 하는 만용적인 자유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즐기며,
그 사회에 속한 한 일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갖고 사는
하나님의 종처럼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크리스천들의 시민 의식은
먼저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표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큰 가족 의식을 갖고 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단이나 교파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에도 더불어 함께 이해하며,
생각하는 동지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먼저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제도적인 권위나 법적인 구속에 대해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권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허용이 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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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 룻의 비장한 선택

룻기 1:15-22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러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신앙은 선택으로 표출된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순간 순간들이 넘실댄다. 금성 냉장고나 텔레비전에 대한 한번의 선택은 제품의 품질 보증의10년을 좌우 합니다 라는 광고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항상 인생 앞에는 여러가지 선택의 기로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인생의 길에는 천안 삼거리와 같은 길들이 많이 놓여 있다. 그 천안 삼거리에서 한 길을 선택하여 가면 그 길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다른 도로 가는 세 갈랫길로 나뉜다. 하나는 전라도로 가는 길이며, 하나는 경상도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충청도로 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즉 7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났다. 민족의 앞날에 중요한 결정을 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함께 맞이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북한은 특히 개방이냐 아니면, 폐쇄냐 하는 기로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달려 있다. 남북은 이제 따로 설수 없는 민족 공영 공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남은 북을 품지 않으면 번영으로 더 나갈 수 없으며, 북은 남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남북 민족의 공동의 운명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다.

롯의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삼촌 아브라함 앞에서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장차 망할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의 에덴동산 같은 곳을 선택하여 나중에는 그곳에서 의인으로서 심한 영적이며 도덕적인 우울에 걸려, 끌려 다니다 시피하는 타락된 사회에서 맛 잃은 소금처럼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그 땅의 사람들과 같은 운명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롯 유다는 몊 푼에 스승을 파는 후회막급의 선택을 하여, 결국 자살로 자신의 생애를 끝냈다. 지옥의 자리에 떨어졌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통일 왕국의 통일 치세의 길을 제시하는 노인들의 지혜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분단으로 이끄는 자기 동무들의 어리석음의 과욕의 분단의 길을 선택하여, 결국 통일 왕국인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는 안타까운 민족적인 손해의 행보를 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영생을 위한 선택을 통해 그는 주님의 제자들 중에 수제자로 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초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하였으며, 쿠오바디스라는 영화에도 나오듯이 그는 십자가의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서 도망가듯 로마에서 빠져 나오다, 그는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고 그는 결국 주님을 위해 죽기로 하는 십자가의 순교의 선택을 하였다.

사업에도 투자 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투자한다. 공부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선택한다. 연애도 결혼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를 선택하는 가는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늦은 막이나 혹은 갖 결혼하자마자 이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쏘아져 나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의 실수로 인하여,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려는 경향들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삶의 이야기 가운데에 이 이야기는 지극히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전의 이야기이다. 어려운 일에 있을 달콤한 축복의 세월을 교훈하는 고진감래라는 말이나, 역전의 삶의 통용어인 기사회생의 말이라 든 지를 생각나게 하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진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에 매료되어, 그것이 한류가 되어 외국에 까지 타민족의 사회에 영향을 주는 감동의 이야기로 알려 주고 있다.
한류의 원조인 겨울 연가를 저는 감명 있게 본 적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주인공의 죽음과 그 죽음 후에 있는 꿈 같은 재회의 기회로서 죽은 이에 대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는 그 드라마에서 주님에 대한 저의 첫사랑의 애끓는 듯한 과거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기억나게 하여, 영적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주인공은 죽은 첫 애인에 대한 첫사랑의 향수를 그녀를 자주 괴롭혔지만, 그녀는 그 첫사랑의 분신으로 그녀 앞에 다가온 새로운 인연의 만남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연결로 끝나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인생의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민족의 이야기를 말로 전수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녀들 세대에 전달하며 자기들만의 민족적이며, 신앙적인 희망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원래 성경은 기록된 문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말로 전달되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당시에도 신약은 없었고 다만 그들에게는 주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만 전달되며, 그 이야기나 간증은 생명력이 되어 사람들의 삶에 파고 들어 죽어가는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부활과 생명의 메시지로 널리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전파되었다. 나중에는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나오미는 고향 땅을 떠나 객지 생활 10년 만에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버린 인생의 쓰라린 상실의 계절을 맞이했다. 모압이라는 땅에 들어가는 그녀에게는 이민의 삶이 기회의 땅이 아니고, 그녀에게는 상실과 방황의 쓰디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민 생활에서 맞이한 이방 여인이었던 두 며느리는 모압의 여인들로 이방 풍습에 젖어있던 그 며느리들은 남편이 죽자 그들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자식도 없는 처지에서 당연히 그들을 보낸 친정 집이며, 같은 동족인 모압 족속에게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나오미는 그 자부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삶의 시련과 황량함으로 남은 자신의 삶의 부담을 안겨줄 뿐이다. 룻은 아무것도 없는 희망이라고 볼 수 없는 그녀의 시어머니의 황량한 고통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두 여인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자신이 돌보아 주리라는 일념으로 시어머니를 세상 끝까지 따르려는 아름다운 선택을 하였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것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할 때가 많다. 룻 그녀는 황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끌어안으며, 그 험악한 삶의 세월들을 헤쳐나가리라는 비장한 각오의 선택을 하고 있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로 이방 여인이었던 자신의 삶을 시어머니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그녀는 보이는 처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서 새롭게 역사하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룻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과 묶는 결단의 말을 하고 있다. 살아도 그녀와 함께 죽어도 그녀의 곁에서 죽을 것이라는 일사각오와 같은 희생적인 결단은 그녀의 선택을 나약하지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비장한 선택의 말을 내뱉고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 시어머니의 인생의 삶의 삭막하고 실패한 자처럼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거기에 계시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오히려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고자 하는 자신의 선택이 당연한 귀결임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룻의 부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인생의 실패와 좌절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나오미는 감동적인 며느리의 결단과 그녀의 확고한 마음을 보고는 그녀에 대하여 시어머니로서 그녀의 기특함을 보고, 그녀의 선택을 받아 용납하였다. 이제는 한 여인의 황량한 삶이 아니라, 두 여인의 아름다운 삶의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다. 인생은 좌절과 실의 속에서도 함께하는 두 마음의 결합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부부가 함께 마음으로 한다면, 그 일은 쉬이 물러가며, 그 어려운 때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이 극할 때에 주변에 있는 우인이나 친우들의 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격려나 충고는 자신에게 엄청난 힘을 얻는 계기가 된다.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함께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에, 온 동리가 그들을 보러 나왔다. 그 두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 사람들은 옛날 같은 동네 이웃이었던 나오미를 보며,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처럼 기쁨의 여인 같은 모습이 아니고 쓸쓸한 노인의 황량함과 희망을 바라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한 그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향을 떠 날 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희망찬 이민의 삶을 살 것을 바라보면서 나갔지만, 이제는 타향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고백하는 쓰디쓴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며 기쁨의 여인이 아니라, 괴로운 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인생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는 젊은 시절에 가고 있던 꿈을 향해 나가던 시절이 어느 덧,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회한에 빠져 슬픔과 실의에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게 한다. 젊은 시절의 강인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생기 있고 발랄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몸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한 자신을 깊이 느끼는 시간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생은 결코 우리의 삶을 그렇게 결산하도록 해서는 안되는 삶의 진지함이나, 인생의 숭고한 발자취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자신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후회하고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는 그때에야 말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들의 처하는 위치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었던 나오미의 삶의 처량하고 처참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황량한 그녀의 노후에 더 너머에 있는 그녀의 말년의 세월은 인생 행복 귀결이라는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다복한 여인의 말년을 보내며, 지난 쓰라린 세월들을 되갚아 그렇게 찾기를 힘썼던 그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왜 인생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일을 신의 조화라고 여기는 가 여기 나오미도 자신의 고되고 고통스런 삶을 겪으면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황량 스럽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 화복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삶의 이야기 중심에서 도외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끌어 이 땅에 살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를 따라 내가 살아온 길에 서 계셨으며, 장차 나의 미래를 이끄실 분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이나 불행이나, 죽고 사는 일들은 그 분안에 있는 우리 인생들이 겪은 일들이며, 그리고 장차 맛보야 할 일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룻의 하나님 선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녀는 과연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넘어가는 크나큰 인생 선택의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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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과연 존재하는 가?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 주제는 기독교 역사에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해 옹호를 받고 있다.
지옥은 성경에서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지옥의 현실과 그곳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영원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관용(용서의 기간을 넘긴 경우)이 없는
그의 엄중한 심판을 받는 곳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존재의 엄연한 현실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지옥의 심판에 대해 그 엄연한 심판의 현장의 사실성을 왜곡하여,
그곳에 대한 상상적인 비유로 영혼의 영원 소멸이라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며,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의 강조로,
그의 복음을 거부한 인생들에 대해 유여 하는 정도의 심판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의 존재와 그의 알려주신 복음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인생들은 가야 할 엄연한 심판의 현장인 것이다.

이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심판이 문자 그대로 사실대로 이루어 지는 영원한 감옥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한 타락한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어둠의 영들이 가는 곳이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생들이 가야 할 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지옥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어지는 곳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죽음의 영원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곳은 영영히 불이 타는 곳으로,
악한 존재들에 대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곳의 생생한 감옥의 역할을 하는 곳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앞으로 인간 사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대 파노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 중에 지옥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동시에 그 심판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 20:10 에 사단은 불타는 연못과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며,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던져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시록 14:11에, 지옥에서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가며,
밤낮 쉬지 않고 고통을 당하는 현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단과 그의 짐승들에게 경배하는 자들도 그 연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영원한 고통을 받는 다는 교리는 복음주의자들과
비 복음주의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옥의 교리를 수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신학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죽음 안에서 인간들은 죽음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의 희망을 희구한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생명과 연결되는 영생으로 나가지만,
악인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영벌로 나간다.
지옥의 고통은 다가오며,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다.
고통 받는 곳과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신약의 한결 같은 주제이다.

지옥에 대한 세가지 그림은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묘사와 대조된다.
지옥은 천국을 상급이나 상속으로서 여기는 것과 같이 지옥은 처벌로 나타난다.
심판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전능하게 구원 얻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들의 죄 때문에 처벌받을 자들을 심판 받도록 허락하신다.

지옥에 대한 사실이나 지옥 형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는 만인구원론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으로 지옥형벌을 받을 사람이 없다라는 논리이다.
그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심판의 현실성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맞지 않다.
그것의 낙관적인 견해는 위로를 주지만, 인간의 죄의 비극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의 불신적인 것들을 통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무시한다.

또 하나는 영원 소멸론(annihilationism)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서 사람들이 떨어져나가,
그저 단지 영혼이 영원히 죽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하지만,
그 논리는 인간은 영혼불멸의 존재로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의인은 영생의 부활로, 혹은 악인은 영벌의 부활로 존재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대치되는 논리이다. .

마지막으로는 조건주의론(conditionalism)이 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혼의 상태가 불멸하는 존재로 육체는 죽으나,
다시 영혼의 상태는 지속되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신자들은 신의 성품과 불멸성을 받는다.
그러나 불신의 상태로 남아있을 시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고로,
그 자신이 지은 죄에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공존은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받은 자의 행복을 감하지 않는다.
비 기독교인들의 처벌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엄위성을 증거하며,
그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의 공의를 높이며,
그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극대화한다.

지옥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의 효과를 기대하는 인간들에게도
엄연히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 속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인생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Morgan, Christopher’s Hell Under Fir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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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토록 있는 말씀

베드로 전서 1: 22-2: 3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을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 와 지며, 거룩해가며, 정결함을 유지하는 삶이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는 삶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을 유지하는 삶이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삶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였던 주님의 말씀이 있다.

진리를 순종함은 인생의 참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부패를 가져왔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의 부패와 연결되어 있어, 밝아야 할 인간의 양심이나, 영혼의 상태는 어둠에 휩싸여 있다. 거기에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와서 밝혀야, 어둠이 걷히고, 마비되고 찌들인 양심의 기능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생령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교류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리의 말씀은 어두운 인간의 영혼을 밝혀,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며, 말씀 속에 계신 주님의 정화시키는 능력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므로, 자신 안에 순결함으로 회복하게 한다. 어둠에 처해 있을 때에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하며, 왜곡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쳐주면,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함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뉘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둠에 숨어 있는 죄의 그림자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가까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인 새 생명의 출생을 의미한다. 그 생명을 탄생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세상에 있는 썩어지는 모든 것(육체에 속한 것)과는 다른 본질의 것으로 그 말씀은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지만, 다시금, 그 말씀은 영혼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적 생명(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생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성과 현존성을 드러낸다.
그 인간에게 전달 되어진 기록된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인 영원한 말씀(영생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씀으로 그분의 영원한 존재성과 더불어 그 말씀은 살아있다.

모든 인생이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 이지상에 한 일들은 인간의 기억에 남지만, 그러나 다 사라지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세운 업적이나 공로나, 일들은 결국 마지막에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들이 얻은 영광도 세상의 사라짐과 더불어 없어진다. 그러니 아침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라도 저녁에 시들어지는 때에는 힘을 잃고, 생기를 잃어, 아름다움의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렇듯이 인생의 날들은 젊은 때에 활기찬 것들이 노년에 시들해지면서,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이 세운 모든 일들이 다 사라진다. 거기에 안주하려다가는 실망을 하며, 또 거기에 자신(미래와 생명 등)을 거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오직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말씀은 세상의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을 있게 한 창조의 근원으로 그것의 존재의 근원은 영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 가운데에 존재했던 말씀은 생명 존재의 근원으로 그 말씀은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거의 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낡아지나, 인간이 기대하며, 바라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에 의해 세세토록 존재하며, 이 지상의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에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남아있어, 인간의 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머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 말씀 안에 지금 세상의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나, 미래에 숙제로 남아있는 일들이 풀어질 날이 다가오는 때에, 그 말씀의 미리 알려주신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 그 곳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때가 되어 나타나며 현실로 다가 올 것이다. 그 것에 대한 정보가 인간에게 전하여 진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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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초대

이사야 55:1-5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너희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4.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었나니
5.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나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내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품 안을 떠난 인생들은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가 왜 인생들을 부르시는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찾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에덴 동산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주님이 명하신 바를 거역하여, 범죄하였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그분의 존재를 무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좇기듯 하나님 앞에서 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고 계셨다.

그것은 인생들이 제 길을 찾지 못하여 지금 인생들이 방황하며 혹은 절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며, 진리를 구하고, 어둠에 처해있는 인생들이 빛을 찾아 길을 나서고 있으나,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곳에서 지치고 상한 심령들이 하소연을 하고 있다.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향해 그로부터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여, 그 삶의 길을 제시하며, 누구든지 그 길로 나아오라고 하신다. 절망 가운데에 있는 심령들은 들을 만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구원의 소리이다. 지친 영혼, 상한 영혼, 병든 영혼들은 모두가 창조주 그분에게 나오면 그분이 병든 영혼들을 치료하시며, 상한 영혼들을 새롭게 하며,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여 건강한 인생을 만들어 주신다.

세상에서 사는 인생들의 현실은 항상 부족함과 자원의 제한 속에 처해있다. 그것은 세상의 형편은 만족하게 인간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자원의 한계에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생들은 목말라 있다. 세상에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 진리에 대한 목마름, 사랑에 대한 목마름, 영원에 대한 목마름 등 여러 가지 것에 대한 갈급함으로 가득하여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이 목마름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로 그 갈급함을 채우려고 하지만, 만족할 길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목마름에 의해 인생들은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자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축여줄 여러 가지 것들을 좇아간다. 어떤 때에는 명예를 좇아 갔지만, 그 명예를 자기 손에 넣는 순간에 그 명예는 자신을 언제나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 또한 언제 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경우에는 물질을 좇아갔으나, 물질을 추구하는 자신의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공허함의 소리를 듣고는 소금을 머금은 사람처럼 물을 찾아 다른 것으로 만족을 채우려 하나 실망한다. 세상의 영달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권력형 사람들은 그 권력이 주는 매혹에 빠져, 거기에 목을 매달아 살아가지만, 그 권력도 언제 가는 자신의 손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때에 가서야 그 권력 추구도 무상함을 알게 된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이나, 혹은 삶의 활기참 등 인생이 주는 시간의 혜택 안에서 안주하고는 그것들을 즐기고 거기에서 주는 만족감을 누리려고 하나, 달려가는 인생의 시간들은 너무 빨리 그런 인생의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서 취해 가버린다. 마음은 젊지만 육체는 지나는 시간 속에서 결국 시간의 제한 속에 갇혀 있는 육체의 한계를 알고는 절망한다. 과거를 추억하며, 회한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연인이나 혹은 사랑이나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이 주는 달콤함이나 귀여운 자녀들을 얻고는 가족이 주는 행복함도 세월의 냉혹한 현실 앞에 자신들의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을 지나간 추억으로 되돌려 버리고 만다. 흐르는 시간은 수없이 많은 것들을 얻으려는 인생들을 실망시키며, 회한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가 외치듯 사람들은 이런 헛되고 헛된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가고 읊고 있지 않는가?

이렇듯 인생들을 썩어질 흙으로 만들고, 시간 속에 살아가도록 인간의 운명을 정해놓은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들이 갈 길이 아닌가? 주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너희는 내게 나아와 들으라고 하셨다. 시간의 제한 속에 그리고 육체의 한계성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와 악을 통해 얻은 인간들의 비참한 상태임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자신을 구원하는 인생 지혜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영원 가운데에 계신 신은 시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언약을 세웠다. 너희는 내게 나와 들으면, 너희 한계를 벗어날 영혼을 살리는 약속을 받는다. 시간 속에 들어오신 주님은 그가 시간의 한계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영원을 연결하는 대속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생 한계(생노병사)의 체바퀴 돌 듯 돌아가는 죽음의 회긔속에 있는 인생들을 살리는 다리를 놓으셨다. 그분은 인생들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놓은 일중에 가장 확실하게 인생들을 구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가 그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고백적인 선언을 하셨다. 그의 고백적인 선언은 죄에 빠진 채 흐르는 제한의 시간 속에서 죽음으로 떠내려가는 인류 구원의 선언서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구원자로 모든 인생들의 선생으로 그리고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인도자로, 그리고 인생들이 지켜서 얻을 생명의 도리를 전하는 명령자로 세우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적인 예언과 그의 계시를 경험한 종들(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인생들)의 증거와 그 증거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그에게 나오는 모든 인생들을 구하는 생명의 구주이심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만민을 향한 그의 구원의 원대한 계획은 영원부터 이루어 진 그의 선취적이며 주도적인 우주에 가장 큰 프로젝트이다. 그의 계획은 후회함이 없고, 실패함이 없으며, 그의 정하신 것을 그의 영원성과 절대성에 근거를 통해 이루어 질것이다. 그의 인생 구원 계획은 그에게로 나오는 필자와 이것을 보는 독자 등을 포함한 모든 인생들에게 미치고 있다. 그는 인생 자신들을 한 사람씩 부르신다. 그가 세워 놓은 영원 생명과 그가 가져오신 인생들이 누릴 풍성한 삶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신에게로 나오는 인생 자신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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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삶의 근거

베드로 전서 1:13-21
13.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크리스천의 삶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성품을 받은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죄 있는 인간의 상태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성품으로는 하나님에게 나갈 수가 없으며 그분 앞에 사는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고로 그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의 자세는 행동의 양식을 가져온다. 마음의 정결함과 선함과 옳은 뜻을 따르려는 자세는 자신의 심령 안에서 마음의 상태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할 때에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저절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알아도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도 없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 인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의 변화와 깨어남의 전제가 필요하다.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마음이 깃들듯이 정신을 차린 상태로 살아야 자신의 마음이 정결하며, 옳은 일을 위해 의를 좇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진리의 빛이 없는 고로, 인간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 무지함에서 방황하며,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의 빛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그 상태의 혼돈함과 비참함을 보게 하여, 마음의 잡초가 난 상태에서 그것을 뽑아버리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이 마음의 갱생과 정신적 인과 영적인 자세의 변화가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받은 자로 건강한 영적인 삶을 영위하여 갈 때에 주님의 가져오실 더 큰 은혜와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세상 나라의 정지와 그의 나라의 정착이 시작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에는 새로운 차원의 안긴 유형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날을 준비하여 사는 자에게만 그 때의 삶의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한 사람은 순리대로 사는 자와 두 번째의 사람은 하늘에 대해 역천하는 자로 살아간다. 순리대로 사는 자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를 대하는 순종하는 자식처럼 자신을 여기며 살아간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지속적인 교제 안에서 그분의 관심과 돌봄의 대상으로 살아야 할 존재였으나, 인간의 독립적인 자세로 그분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자세로 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로 낙인을 받아, 수치심과 정죄 의식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과 그에 따르는 죄의 결과는 인간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 버려, 자신의 그 욕구에 따라 살아서, 결국 그로 인하여 죽음의 선언을 받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죄 받음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로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그의 뜻에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인생을 본받아 살도록 부르셨다. 과거에는 부패하며, 방탕하게 살았어도 지금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초청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생활은 그의 거룩하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뜻하며, 그 거룩함의 생활은 마음도 몸도 정신도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이 거룩함으로 살아감이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인생을 병들게 하는 부패와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 죄의 문제를 극복하여, 영적으로든지 정신적으로든지 육체적으로든지 모든 면에서 건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뽑혀 불러냄을 받았으며, 그분의 택하심을 좇아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살게 되었다. 그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를 닮아 가기를 힘쓰는 것이며, 그의 성품은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얻어지며, 그분과의 교제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은총과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신선함과 자기의 도달해야 할 온전함을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분의 의도를 따라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과 구별된 초월성을 갖고 계신다.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셔서 돌보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세계 안에 인간의 범죄함으로 부패와 더러움으로 오염된 사람들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의도로 다가오신다. 고로 택한 사람들이 그분에게 가까이 가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분의 제시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거룩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타락하여 마음이 부패한 세계에 살고 있다. 고로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부패한 성향으로 인하여, 그분의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거룩의 발걸음을 살아가려면 의지의 결단에 의한 마음의 변화와 지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내면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을 전체로 파악하며, 분별하신다.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외모나 행위보다는 내면이나 동기의 선함과 악함을 보시고, 늘 그들의 외모보다는 진정한 내면의 변화의 유도를 권고하신다.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그들을 택한 자녀로 세우신다. 고로 택함 받은 사람들은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친 백성이며, 시민권 자로 이 땅에서 살아갈 시에 잠시 머물러 살아가는 나그네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나그네는 자기가 가야 할 분명한 목적지를 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길을 향해 계속 가는 사람들은 길에서 결코 한가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안일한 자세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며, 세상에 눈을 팔지 말고, 자신이 받은 하늘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진지함과 근신하는 자세로 세상에서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들은 혈통이나 조상의 영향 아래에서 머물러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 받는 저주의 혈통 아래에서 질식하며, 그리고 결국 죄의 대가로 멸망에 이를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각각 개인의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각 개인이 인간의 원죄와 유전 죄와 그리고 자신이 짓는 자범 죄에서 주 예수님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의 보혈로 죄의 대가와 형벌로부터 해방을 받아, 그 주님의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인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주님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그 험악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영혼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주 예수님은 옛적 구약 시대에 인간의 허물과 죄에 대한 제물로 희생되었던 양의 희생 제물처럼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죄수로 처형을 당하며,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의 형벌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당하셨다. 그가 흘리신 피는 생명의 강이 되어 누구든지 그의 보혈을 마시고 그의 피로 죄의 씻음을 받으면, 죄의 저주와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되어 구원받는다.

날마다 그분의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며, 그 보혈의 능력과 효력을 따라서, 부패한 자신의 마음이 정결케 되며, 어두운 심령이 생명의 빛을 보게 된다. 고로 그의 보혈은 죽은 심령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 아무리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도 그의 보혈에 씻음을 받으면 그 무거운 짐에서 벗고, 영혼의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날마다 늘 그분을 바라보며 찾으며, 그분이 소생시키시는 영혼의 축복 안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삶의 묘미를 맛보고 살아간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 전에 영원 가운데에 함께 계셨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말씀으로 알려지셨다.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와서 듣는 그의 메시지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 죽음 아래에 있는 생명들을 살리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아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의 정해진 시간의 선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만큼 살아간다. 이런 시간의 현상은 종말적이며, 제한적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 종말의 현 시점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시간에 대해서는 마지막 시간을 산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세상에 올 때에는 차례대로 부모들을 통해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오직 하나님이 아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가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단 한 분 뿐이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그 아들을 비참하게 인간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게 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매정하게 그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다. 저주의 형벌과 지옥의 고통과 같은 죽음의 현실을 당하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모든 구원받는 사람들의 살리시는 생명이 되셨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에 처해있는 모든 인생들의 희망이 되셨다.

크리스천은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희망을 안고 산다. 그들의 삶은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따라 살며,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런 희망의 근거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뢰심에 있다. 그들의 신뢰심은 결국 그들의 죽어가는 영혼과 자신들의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신뢰심은 세상이 감당을 못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미지의 세계인 영원을 잇대게 하는 생명선으로 연결된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그들은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공명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공하는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승리의 비결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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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사람들

요한 일서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1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아 주셨습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창조 하사,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세워놓은 이세상을 돌보셨다.  그리고 아름다운 동산을 세우시고 그 가운데에 사람을 창조하사 살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셨다.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태어났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에서 오는 인간 희구의 감정의 원형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단어는 사회적인 인간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서로 채워져야 할 사람들 속에 있는 원초적인 요구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은 혈육들이 나누는 사랑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향하는 사랑이나, 혹은 동기간에 혹은 형제 남매간에 서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돌보며, 나누는 인간의 정에서 나오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의 돌봄을 통해 사람은 생존하며, 태어나서 무덤에 갈 될 때까지 인간의 끈끈한 정에 얹혀서 살아간다.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로 사람은 유아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남녀간에 차이를 넘어, 원래 한 몸에서 나와,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갈구하며, 애증하며, 한 통속에서 나온 연결된 관계의 존재들이다.  사람들이 자아에 대해 자아 인식을 하면서 자기와 성적으로 다른 존재인 상대방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하늘이 정해준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남녀는 마치 자석끼리 서로 힘을 당기듯이 가까이 하며 살아간다.
 
모든 인류가 사람이라는 한 종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각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사람에게는 서로 하나님이 정해준 인간의 기본적인 요소(욕구 충족, 희망 사항이나 삶에 대한 의식) 들을 다 갖고 있다.  말을 하거나, 생각하고 느끼고, 서로 공통적인 인류애의 나눔을 갖고 살아간다.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에 의해 함께 생존하며,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지구촌의 이웃으로 같은 공동의 운명체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환경이나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람들은 함께 비슷한 삶의 조건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인류애에 대한 보편적인 동포 사랑이나, 주변 나라들을 도우며,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 인류 보편적인 사랑으로 국제 결혼도 하며, 혼혈로 된 자손들도 낳으며, 다른 나라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자신들의 자녀처럼 돌보는 이들도 있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으로 알려진 인류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원래의 부모로서, 그는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돌봄의 교제인 그의 법을 넘어가 그 말씀의 원칙들을 위반하여 범죄하여, 버림받았을 때에 그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는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에 있는 멸망 당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의 희생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을 조건 없이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아니며, 그가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심을 통해 그분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려주시고 있다.  그는 그의 말씀 가운데에서 자신을 사랑이시라고 하셨다.  그는 그의 사랑을 따라 사람을 대하시며, 사람들에게 사랑의 관심으로 늘 살펴주신다.   오직 그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가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과 돌보심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닮은 존재로 그의 사랑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되며, 그분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인간의 저지른 죄로 인하여 부조화와 불합리가 판을 치는 것 같으나, 가까운 행성 중에 하나인 달에 갔었던 우주인들이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조화의 솜씨를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들은 그들의 보았던 시야를 통해 지구가 둥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느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는 지금 사람들이 사느라고 갖다 버리는 온갖 쓰레기와 같은 것으로 뒤덮여 가고, 살기 좋은 지구 환경이 사람들이 개발하면서 내 품는 이산화탄소의 가스 배출의 팽창으로 점점 지구는 더워져 급기야는 인류 모두가 지구 온난화의 위험이나 재앙을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에 와있다. 


그러나 지구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지어진 곳이며, 지금의 문제는 지구의 주인께서 언제 가는 해결하실 것이다.   지구의 종말로 가던지 아니면, 그분이 이미 마련하신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정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사람들을 지은 창조주이며,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이며, 인생들이 자신의 문제에 휩싸여 혼란스러워 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인류 구원을 바라보며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기대하며, 절망스런 자신의 삶에서 사랑이신 그분을 통해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상태를 버려두지 않으며,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 그분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 세상에 오신 그 독생자는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나타내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그의 희생과 죽으심을 통해 인류 원과 인간 개조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해결의 길을 보며, 그분 안에서 인간 자신을 미워하는 불합리한 상태에서 범죄한 자신을 용납하여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다.


인간 상에 횡횡 하는 미움이나 저주나 증오의 현상은 사람들이 저지른 죄의 영향과 그로 인한 악의 세력의 확대로 인한 고통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의 신세나 운명을 한탄하며, 불안해하는 자신을 달래려 갖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있는 악의 씨앗인 죄의 경향성은 오직 사람들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사람들 속에 있는 그 어두움을 몰아내신다.  불안과 절망에 버려진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잊어버린 위치를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다시 찾게 되며, 자신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그분의 사랑의 배려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의 영광된 모습을 회복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인 사람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나누는 사랑의 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천의 발전소에서 나오는 구원의 무한한 힘과 생명의 에너지의 공급은 망가지고 버려진 사람들을 다시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가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신비한 세계의 하나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죄로 인한 불안과 저주스런 고통의 현장에서 늘 돌이 킬 수 있는 위안과 자신의 삶에서 언제든지 소망을 얻는 능력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그 사랑의 지식과 정보를 받은 사람들은 그분에게로 돌아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는 자의 기쁨과 인간적인 만족감을 누리며,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형제인 이웃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랑 실천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으며, 그 사랑의 경험 안에서 자신이 편안해하는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맛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비록 과거에는 정죄하며, 불만해하는 적대감이나 수치심이나 정죄 의식 속에서 해방을 받아, 사랑의 하나님이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보며 자신을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용납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운명의 공동체의 지체인 이웃이나 형제들을 향해 그분의 사랑의 축복과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무리들의 아름다움의 실체는 바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서로 실천하며, 나누는 기쁨 중에 그 사랑의 을 경험하는 상태에 그저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실체를 그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신앙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 사역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에 그들의 사랑 실천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허물을 용납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정죄의 어리석은 판단과 사람들 사이를 이간케 하는 고질병적인 시기와 질투의 질곡에서 해방 받는 치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게 하며, 자라게 하며, 성숙하게 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여, 자기 완성의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그의 사랑은 한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과 인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자족감과 신실성을 도모하여, 끊임없는 그분의 기대치에 이르고 저 하는 자원의 노력의 의지로 충만한 상태로 계속하여 그분에게 나가기를 힘쓰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자기 개선과 자기 성숙을 통해 이루어가는 자기 완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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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하늘의 순리대로 사는 지혜

잠언 3:1-12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아버지교사가 아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추구하라고 4가지 명령과 그에 따르는 상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각각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을 오용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을 신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 5-6
2.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앞에서 지혜로운 척하지 말라 7-8
3.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 9-10
4.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원리와 가치를 오해하지말것등 11-12

맥아더는 아들을 위한 기도문에서 아들이 겪는 인생의 풍상에서 결코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간구하고 있으며, 영국의 정치가이며 탁월한 지성인이었던 채스터 필드는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아들에게 인생의 여러가지 교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한국어 소 문고판의 서문에 한 아버지가 100명의 스승보다 자녀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4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잊지말라와 지켜라입니다. 그 가르침은 주님의 율법입니다. 만일 이것을 인생의 원리로 따라 살면, 두가지유익을 얻습니다. 장수하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번영하는 것입니다. 번영을 위한 말씀은 샬롬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평화로 번영하는데 거기에 평안함과 번영함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더 큰 의미로 강건하게 되는 것, 건강그리고 조화로운 삶입니다.

사람에게 주님의 법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자녀에게 부모의 가르침은 인생을 유익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생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우리가 이원리들을 따르는 것은 즉 그 법을 지키면, 자신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옵니다.
1-4에 명령에 따라 의무를 행하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5절에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하며
7,8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며,
9,10절에 우리의 재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부를 얻는 길이다
11,12절에 우리가 징계나 고통을 참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경주에는 코스를 따라서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습니다.
코스를 이탈해서는 정상적으로 경주를 진행할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보편적인 법은 자녀가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도 바르게 사용하면 건강을 유지하며, 영혼도 진리를 먹으며 살아가면 생명을 얻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아래에서 심는 일을 열심히 하면 거둘 때에 많은 열매를 거둘수 있습니다. 불의의 씨를 뿌리면 불의의 열매를 거두고 선한 의의 열매를 위해 힘쓰면 존귀와 영광의 열매를 거둡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여 살면 인생의 장수를 하며, 그 날들이 형통과 평강의 날들로 채워집니다.

지혜의 삶의 길에는 은총과 영광이 있습니다. 인생을 영위하는 정책중에 정직이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삶의 진리는 인생을 바르게 살게하며 자신을 방황하게 헛된 것들로부터 참된 자유를 얻게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는 진리의 원천이십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려면 그가 명하신 길을 따라 가면, 옳은 길을 걸어갈수 있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나 사람들앞에서 인정을 받으며, 모든 일에 있어 제대로 쓰임을 받으며, 결국 그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중에 높임을 받습니다. 사람들중에 명예를 얻은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존경을 얻었으며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인정받게 하였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인생은 자신중심의 지혜를 좇아가기 보다는 선인들의 앞선 삶에서 배우며 옛사람들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의 인생의 길들을 배우는 중에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쳤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길을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늘의 뜻을 쫓아, 그 창조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아시며, 그 길을 제시하며,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신다. 인생의 지혜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며 그분을 섬기는데서 부터 사람들이 삶의 지혜를 배운다. 하나님은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다 아시고 그들의 종국에 도달할 목적지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앞에서 겸허하게 살아가려면 모든 일에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하신 일들을 명심하여 자신의 하는 일에 모든 일에 적용하여, 그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그분을 인정하는 것은 항상 어느 일에 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물으며, 그일을 추진하는 시기가 적당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의 삶의 모든 일에는 각기 적당한 시기와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해야 할 것인지 나중에 해야 할 것인지를 물어 보며, 일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하나님에게 여쭈어 먼저 해야 하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획하는 일은 실수가 있고, 실패할 경우가 많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하고 인정한 일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실패하지 않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혜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구하여 그 일을 하면 훨씬 쉽게 성공적으로 이룰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

자가당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일에 자신이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 착각에 쉽게 빠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 과대히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리석어 지는 것은 겸손한 자가 아니라 자기의 지혜나 능력을 과대히 평가하여 자기신념에 몰입하다보면, 스스로 실수를 하며, 어리석게도 남에게 해를 끼치기 까지 한다. 고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지혜, 지식, 재물, 권력, 재능)으로 교만하게 자신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실패하기 쉽습니다.

오직 인생의 길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인생을 창조하며 인생의 길들을 정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경배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의와 진리의 원천이며, 온우주의 원칙의 순서를 세우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무시하고서 참된 선을 이루어 갈수 없으며, 도리어 악을 범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제시하는 길을 버리는 것이 인생을 악으로 빠지게 합니다. 악한 인생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길들을 따르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걷다가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세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에게 구하여 얻을 수 있는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기술적인 지혜나 학문이나 혹은 훌륭한 판단력을 갖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좋은 손 기술로 하나님의 장막을 잘 지었던 오홀리압이나 애굽의 궁정에서 이집트의 문화를 배운 모세가 가진 학문의 지혜는 모세오경이라는 고대사회뿐 아니라 인류문화의 보고라 할수 있는 탁월한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겸허히 하나님에게 백성들을 잘 다스리며 사람들의 속 뜻을 잘 분별하는 훌륭한 재판을 하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두번째 생각해볼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섭리의 지혜를 통해 나타나는 우주적이며 인생의 전반을 주관하는 삶의 원리로서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하며, 인생의 바른 도리의 삶의 원리들을 제시합니다. 이 지혜를 받으면 인생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수 있는 철학가나 성인들의 반열에서 서게 하는 인생원리로서의 지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관계와 교제로서의 주어지는 인격으로서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보내심으로 이땅에 말씀(로고스)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모든 지혜가 그분안에서 나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분안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동안에 늘 우리는 그분의 지혜의 능력과 효용을 공급받아 이세상에서 하나님앞에서 자기에게 정한 삶을 그분의 뜻안에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얻으며 살아갑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앞에서 사는 이 지혜는 고대사회에 악한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지않고 승천하였던 에녹과 같은 삶에서 이런 지혜를 얻을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의 여러 측면들을 그분에게 나아가 구하고 살아야 할 것이 인생의 마땅한 갈길이며 도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살면 인생의 하는 모든 일들에 그일에서 의미와 가치와 성공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삶이 굳건한 반석위에 세워져, 많은 풍상(고난, 고통, 저주, 헛된 운수지향주의)이나 자신의 삶을 흔들게 하는 일들( 실수, 교만, 사건, 사고, 헛됨, 갈등, 범죄)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이 세상에 살도록 세우시기전에 먼저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채워주심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마련하신 것들을 누리며 그리고 혹은 즐기며 살아갑니다. 비록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하는 고된 인생의 환경이지만, 그가운데에서 그분이 주시는 삶의 안식이나 즐김과 능력공급을 받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고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들로 하늘의 뜻에 거스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도에 자신이 얻은 것들을 쓰며 혹은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가면 보다 삶이 풍요로우며, 유익한 인생의 열매를 거둘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노력한 것들을 바르게 심어가면, 그 결과에 유익한 것들을 거두게 된다. 그래서 그 소산물로 자신이 즐기며, 가족을 부양하며, 그리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은 우리 인생의 필요에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이나 자기 이익에 몰입하는 일은 그 인생을 어리석게 만드는 헛된 수고를 하게 한다. 자기이기주의로 재물을 모으고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능을 `키우고 일들도 결국 인생의 결산의 길에서 남는 장사가 아닌 밑진 장사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들을 함께 이웃들과 나누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지 않고 옳은 일에 쓰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면 자신이 모은 재물이 썩지 않고, 요긴한 때에 써야 할 일이나 사람에게 적절하게 쓰여져 많은 선함과 유익한 열매를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이름이 아름다운 명예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놓은 재물이나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지혜나 지식이나 자신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재능등이 유익하게 사용되어, 더 값진 것들을 낳게 됩니다. 그는 이제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서있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새로운 세계에서도 그의 이름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지혜자들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다니엘은 타락한 문화속에서도 하나님앞에서 살고저 하는 경건하게 사는 인생의 결단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땅에서 하나님앞에서 살려는 의지와 비전에 대한 실천을 이루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더나아가 헌신된 그의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받아 그에게는 특별하고 신비로운 인생의 한계를 넘어가는 신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또한 명 청지기였던 요셉에게는 경영의 지혜와 인내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17세에 팔려가 애굽의 군대장관집에서 그리고 궁중감옥에서도 30세 이르기 까지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인생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결론
지혜의 유익한 것들은
1.무엇보다도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혜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혜의 우월성, 탁월성이 있습니다. 고전 1: 지혜는 그리스도이며, 그는 로고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딤후 3:15-17에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책이며,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지혜와 선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데 유용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2.지혜가 보이면 인생의 성공의 길이 보입니다. 그안에는 인생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여러가지 지혜를 알려줍니다. 경영의 지혜, 노력의 지혜, 자기성장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3.원래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지혜는 의인의 삶의 길에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바르고 살려는 의인의 삶에서 지혜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4.어리석음과 지혜의 비교를 통해 지혜의 혜택과 특권을 누립니다.
지혜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자기파멸에서 구원하며, 자신을 모든 것으로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리석음은 반대적인 것으로 악에 빠지며, 파멸에 이르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5. 지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모든 곳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모으는, 밥먹는 일, 친구사귀는 것, 결혼잘하는 것, 식물을 잘자라게 하는 것, 모든 일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잘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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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게 붙어있는 인생

참포도나무의 비유
요한 15:1-6
1.“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두 잘라내시고 열매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깨끗이 손질하신다.
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어 준 말로 이미 깨끗해졌으니
4.내 안에서 살아라. 나도 너희 안에서 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서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사람안에 살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주워다가 불에 던져 태운다.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비유를 통해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가 어디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살아있는 분으로 지금도 신자들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다.

신앙인의 능력있는 삶의 비결은 예수님과 성도개인과의 관계에 의해 달려 있다. 그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 신앙인들은 그의 생명을 받아서 그의 생명의 영향력에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생명은 영적인 생명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삶을 보장받으며, 그 생명의 연결을 통해 신앙인안에 그와의 연결을 통해 생명이 유지가 된다. 고로 그 생명유지는 근본적으로 그와의 관계와 그에 따르는 교제의 실질적인 지속적인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과의지속적인 연결은 그로부터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을 공급받으며, 그분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가져온다. 신앙인들은 신앙생활하면서도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따로 사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음을 본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인가? 아니면 자신 혼자 애쓰고 영성생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밭에 심어지신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밭에 심겨진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열심있는 농부로서 창조시부터 그는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영광된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 저주받은 땅에서 불안과 고통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을 다시 그의 아들의 나라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세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땅에 세워진 인류희망의 나무처럼 이세상에 심겨졌다. 그의 포도나무의 비유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범위아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누구나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나라에 속할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축복을 상속받는다. 구원받은 중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통치의 세계로 들어온 이들은 그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관계의 생명을 지속할수 있다. 이 관계의 지속은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의 교제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만일 지속적인 관계유지에 실패한다면 그들이 맺은 관계설정이 무효화될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교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잎이 열리고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게 되려면 지속적인 관계의 유지와 그와의 활발한 교제만이 그에게 붙어있는 가지로서 생명유지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자신의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가지로서 끊임없는 생명유지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열매맺을 가능성을 안고 있으면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가지를 전지하며, 보다 열매가 잘 영글수 있도록 다듬는 일을 하신다. 더러운 것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잘 정리된 깨끗함을 유지하여 건건한 가지로 생존하게 하여, 열매를 맺을 때에 탐스러운 열매를 열리도록 배려하신다. 그 다듬는 일이나, 배려하는 일은 두가지를 겸하는 것인데, 훈련이나 단련을 시키며, 그리고 격려하는 일을 통해 가지가 가지로서 강건할수 있도록 만들어가신다.

믿는 사람들이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의 약속안에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는 정화의 내용이 있으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자신의 죽은 영혼을 살게 되며, 자신을 더럽히는 죄의 흔적들을 씻어낸다. 그 말씀을 통해 더러운 인간의 타락한 부분들을 드러내어, 그 정죄된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힘이 그의 말씀에 있다. 그는 이땅에 생명의 말씀으로 오셔서, 그가 말씀을 통해 전해준 약속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피흘림으로 인생들의 죄를 씻어내는 정화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분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몸을 희생하므로 죄를 해결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자신들이 거듭나 변화받은 것은 그의 씻기시는 능력의 약속을 담고 있는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인간의 죄가 씻어지며,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인생들으 그분안에서 죄의 정죄받음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심령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로 살게된다.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거기에 붙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를 인정하고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인으로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는 그를 영접한 인생들안에 오셔서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주하여 그의 나라가 그들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나라의 통치속에서 그는 인생의 주인으로 자신을 믿고 받아들인 그들의 생활속에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자신을 믿은 사람들에게 가져오신 세계는 죽음과 불안과 절망에서 생명과 평안과 그리고 희망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을 따라 살면 그안에서 진정한 인간됨의 길을 발견하며, 인간의 자기한계를 극복하는 비결을 터득한다. 그안에서 하나님의 인간개선과 개종을 이루어 내며, 인간의 자애중심(자기가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되려는 의식속에서 갈등과 불안을 경험한다)의 제한되고 모순된 삶에서 하나님중심의 의인(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가운데에서 주님의 인정받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진정한 평안을 경험한다)의 삶을 살아간다.

그분안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는다. 그분안에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한 활력과 용기와 희망을 얻으며 무슨 일에나 충실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분을 떠나서는 외로운 고독자처럼 자유인처럼 사는 것 같으나, 그의 삶은 늘 죄의 속박아래에 주어진 억압된 인간성의 한계와 불안가운데에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조차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여, 자신안에 있는 육욕이나 죄의 영향력안에 있는 탐욕적인 추구에 몰입하기 쉬어지며, 결국 허망하고 혼란스런 생활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주님밖에 있는 인생들은 그들이 당하는 인생의 처절한 상황은 인간시조의 원죄와 그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부조화된 불안과 두려움의 마음에서 내면의 평안을 얻지 못하며, 결국에는 자신안에 있는 인간절망의 상태에서 탄식하며, 곤핍한 심령의 상태에서 메마른 생애로 마감하며, 결국에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향하여 나갈수 밖에 없다. 그의 종말은 심판으로 인한 파멸의 길에 놓이며, 후회와 회한의 삶을 살아온 자처럼 사라져 없어질 무의미한 생으로 마감할 것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신앙인들은 지속적인 그분과의 생명의 관계형성과 계속되는 공급되는 그분안에서 오는 삶의 에너지에 충전을 받으며, 그분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일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분안에서 자신의 영적생활을 유지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기와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여, 자신의 삶이 보람차며, 좋고 귀한 열매맺는 생으로 이어질수 있도록 그분에게 늘 붙어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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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

요한복음 2:1-11

서론
결혼식은 인간의 만남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관계 설정의 예식입니다.
결혼 예식에 있어서 서로의 서약하는 순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신성한 인간관계의 권리와 의무의 약속입니다.
결혼 예식을 통해 앞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결정이 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저도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문을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결혼식 날에 설레이는 마음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지는 벅찬 경험을 가졌었습니다.

우리네의 결혼식은 당일날 예식과 더불어 2박 3일 정도의 신혼여행을 다녀가게 되었지만,
그리고 도착하여 신부네 집에서 신랑이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결혼식의 기간은 보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신랑의 집에서 혹은 그 아버지의 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 절정을 이룹니다.

본론
주님의 공생애에서 그는 제자들과의 첫만남이후에 함께 결혼식에 참여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일은 제자들에게 메시야로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리고 그의 앞으로의 사역에 인간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시고
해결하시는 해결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여러번 하나님의 나라의 대한 성도들의 참여를 결혼예식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결혼은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로 설정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관계로 의미하는 바를 나타냅니다.
신약에서는 천국은 초대받은 신부들이 신랑을 맞이하는 과정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성도들은 주님과 영적인 혼인 관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며 주님과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장차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그 결혼식에 있어 신랑은 주님이며, 신부는 성도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이미 마리아는 거기에 있었고, 주님과 제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에, 잔치의 평가는 포도주의 준비나,
그 포도주의 맛 혹은 음식의 정성스럼에 있습니다.
포도주는 때로는 약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사막지역이며,
물이 귀한 중동지역의 이스라엘에는 주로 포도주를 물과 3대1로 섞든지,
10대 1로 섞어 음료수로 씁니다.

인간의 문제
마리아의 요청/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결혼식의 해프닝/포도주가 모자 란지라.
신랑 집에서 주최한 결혼식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결혼식 하객에는 신부측 손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포도주가 모자라, 예식에 지장을 받아서 하객들이 항의하여,
유대법 상으로 신부측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도 있습니다.

이러한 곤란한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현재 나의 고민이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1. 자신을 억누르는 안전이나 생존에 대한 걱정, 근심을 품는 것이 아닌지
혹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인지도 모릅니다.
2.자신의 변화나, 성품의 개선에 대한 것이 아닌지요. 자신도 모르게 실망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는 문제의 해결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나의 필요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됩니다.

해결의 실마리
인간의 필요, 혹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길에 접근하기 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이 있습니다.
본문의 기적은 주님은 인간의 문제의 현장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날마다의 삶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때때로 포도주가 모자라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때로는 낭패를 당할 때가 있으며, 곤란한 경우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신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하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1.마리아의 요청에 주 예수님의 응답으로 여자여 나와 무슨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의 때에 대한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5번 정도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인생에느 그저 시간을 보내는 지나가는 때가 있는 가하면,
정해진 시간의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들은 우리 자신들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들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을 하는 순간과 주님을 만나는 시간들은
아주 귀중한 생애의 사건들입니다.
주님에게는 자신이 이것을 위해 이세상에 오셨기에, 그는 자신의 사명을 이룰 그때를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는 그 때에 대한 자기 사명의 시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지나가버리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날때에는
그 시간은 너무 소중한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은혜를 받았을때에등은 자신에게 소중한 시간들이며,
부부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시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에 진지한 대화를 할수 있는 시간들은 가족에게 소중합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인생은 유지되며, 생존하며, 번성하게 됩니다.
고로 축복으로서의 기적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우리의 현장에 늘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이런 일들은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저의 경험을 보면 저는 중학교 때에 동네축구를 하다가,
저보다 큰아이하고 부딪쳤는데, 오른 발 복숭아뼈를 크게 다쳐,
며칠을 통증으로 지내다가, 거기가 염증이 생겨, 곪아터져 진물이 납니다.
어머님과 교회의 한 권사님과 함께, 연세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골수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뼈안에 곪은 부분을 긁어내는 수술을 그렇게 하다보면,
계속해서 그런 수술을 계속하고 나면 나중에는 발을 절단할수 도 있습니다.
병원비가 37년저에 15만원이 있었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앞에서 어머님과 그 권사님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 한의원을 연결해주는 브로커를 만나
동대문에 있는 한의원에 가서 용한 한의사를 만나,
한약을 지어 15일 동안을 약을 달여 먹은 결과,
그 뼈의 고름을 다 말라지게 하여, 저의 다리와 발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기적의 의미
우리가 기적을 이야기 할 때에 미러클로서의 단순한 경이로운 일로 생각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나타내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의 배후에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기적의 사인즉, 표적으로서의 기적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의 기적은 메시야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어,
이제 처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그리고 아마 요한) 하여금 주님을 메시야로 믿게 하는 일 이었 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기적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고 그일은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이기적은 인간의 절실한 요청이나 긴급한 도움이 필요할 시에 일어나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한 방편입니다. 그분은 살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세상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과 자연 속에서 은밀히 사역하시는 그의 역사를 볼수 있는
신앙의 눈을 뜨게 하며, 주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도를 따르게 합니다.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도 그런 기적입니다.

이집트의 모세의 기적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의 현장에 구원의 하나님은 기적으로 시작하여 기적으로 끝나는 가운데에
그들을 구출하십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그들의 오만과 악을 심판하시는 기적적인 개입으로
많은 재앙이나 자연의 재해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구원의 기적으로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로 이루어 집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이 내게 주는 의미는
1. 주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을 알게 합니다.
주님의 36가지의 기적이야기 중에
처음으로 그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통해 인간의 문제에 접근하셨습니다.

인간의 문제투성이에 대해 주님은 문제의 해답으로 다가오십니다.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 두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성의 변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런 두가지의 자신의 근본적인 것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자신의 성품이나, 개성이나, 혹은 자신안에 있는 능력의 문제와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살면서 겪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집문제, 사업문제, 자녀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공부문제, 결혼문제,
질병문제, 직장문제, 돈문제등, 많은 이슈가 있습니다.

문제해결의 길은 먼저 그문제에 대한 염려근심을 주님에게 던져 버려야 합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문제에 대해 마리아는 주님에게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사생활하셨던 예수님에 대해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공생애를 앞둔 주예수님(그의 모친으로서 오래전에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예언에 의해 그녀는 주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 주님에 대한 신뢰가 그녀는
포도주가 갑자기 바닥이 나버려 자칫 혼인잔치에 수모를 겪을지도 모를 자신의 친척,
그 신랑집의 결혼잔치의 당면한 문제를 주님에게 맡겼습니다.

혼인잔치에서의 주님의 그 처음기적은 메시야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기적은 한낱 비논리적인 환상이나,
혹은 우연의 사건으로 여길수 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결과를
특히 제자들은 주님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2. 주님의 기적은 나에게 믿음을 강화시켜줍니다.
여기에 기적의 요건은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기적은 하인들의 순종에 응답하신 결과입니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는 순종은 주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순종은 겸손한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신뢰와 존경에서 나오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순종의 태도는 믿음의 능력과 영향력(하나님의 응답)을 좌우합니다.
순종하는 마음에 경외심과 신뢰심이 자리 잡습니다.

순종은 주님의 의지를 내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이나 고집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태도입니다.
신앙 생활에는 자주, 주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낫고,
주님의 계획이 자신의 플랜보다는 훨씬 뛰어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살아 갑니다.
성도로서, 그분에게 드리는 우리의 간구나 혹은 바램이나,
준비나 역사하심에 대핸 순종은 우리의 주변에서 주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주님의 역사 앞에 마음으로 열려있는 자들에게 주님의 때에,
그리고 주님의 의도나 목적에 의해 일어납니다.
여기에 하인들의 순종하는 자세를 통해, 자신들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주인집의 급한 문제가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물을 채우라는 주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이 아구까지 물을 갖다 부으니 주님의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3. 나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로서의 기적
본문에서 주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그분은 마치 맛없는 인생들을 맛나는 인생들로 만들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분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신성한 결혼식에 기적을 행하심으로 인생들을 새롭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결혼에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혼자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으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맺는 주님과의 혼인 관계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준비와 미래를 보게 합니다.

연회장의 평가
사람의 평가는 진정한 판단의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에 따라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연회장이 포도주의 맛을 보니, 더욱 맛있는 포도 주입니다.
신랑에게 칭찬하여 잔치가 지나 갈수록 더 나은 포도주를 내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으로 인도하시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유익이나 성장을 가져옵니다. 사단은 달콤하게 유혹하려고 다가오지만, 그 결과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패망의 길로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맛없는 인생이 맛있는 인생으로 바꾸어 지게 하십니다.
맛없는 인생이란 어떤 삶입니까?
무미건조한 생활혹은 늘 안일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궁핍하고 부족한 삶입니다.
가진 것 같은데, 없는 자처럼 사는 경우이며 늘 배고프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인생의 변화는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보다 승화시킵니다.
그런 변화는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가기켜 자기개선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개종이 점진적인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지지만,
늘 성장하고 성숙한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드림과 그분에게 투자하는 시간이나 희생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들어 성경을 읽는 다든지, 설교에 몰입하든지,
기도에 혹은 영성강화에 헌신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영성이 성숙하며,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변세계에 빛을 발할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개인의 급진적인 변화는 개종이나,
혹은 성품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나에게 있어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나오는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영적으로 도태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생물의 세계에도 변화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올챙이가 개구리되어가는 과정을 보면, 올챙이는 물에서만 삽니다.
뒷다리가 나옵니다. 나중에는 앞다리가,
그리고 나중에는 육지에서 다닐수 있는 발과 다리를 갔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살수 있는 몸인 개구리로 변합니다.

나비는 처음에는 애벌레가 되어 기어다닙니다.
그리고 딱딱한 고치 속에 얼마간 갑갑하게 지내다,
있다가 갑자기 어느 날, 고치로부터 날개가 붙은 나비로 분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물도 변화해야 생존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변확시키지 않으면 도태합니다.
우리의 몸의 세포도 7일마다 갈아 치우면서 몸이 적응합니다.
우리의 영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변화를 받아야 성숙하며,
성장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적용 및 결과/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는 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알게 하고,
또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며,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기적을 늘 바라보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1.그래서 삶의 모든 문제를 늘 주님에게 맡기는 것으로
염려와 불안을 이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2.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 기적을 기대 하기 위해
주님 앞에 항상 열려 있는 자세로 신뢰와 순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날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자신의 신앙에서 발견하여 영적으로 성장하여 변화되어
열매 맺는 성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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