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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삶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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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7/23
    나를 치료하는 생명의 빛
    목동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삶의 철학

시편 1:1-6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복해지는데 많은 관심과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복을 좋아하며, 밥그릇에도 집안에도 복자를 써넣기를 좋아합니다.
흔히 우리가 듣는 말중에 오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五福(오복)은 무엇일까요.
동양 儒學(유학)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1. 壽(수)는 長壽(장수)하는 것,
2.富(부)은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것,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康寧(강녕)은 우환이 없이 편안한 것,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攸好德(유호덕)은 덕을 좋아하며 즐겨 덕을 행하려고 하는 것,
5. 考終命(고종명)은 天命(천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복의 개념은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것이며,
건강이나 수나, 형통등 세상에서 얻는 복과 비슷합니다.
그 인생의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보편적인 복입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여 하나님과의 약속과의 관계에서
그 약속을 지키면 즉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복을 받는대신에 저주가 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있는자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즉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자들이며,
자신의 영혼구원을 갈급해하며,
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을 찾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신앙생활에는 이런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불행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교만하며, 죄를 범하며, 악한 자의 삶의 길에 있을 때 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로 살기좋은 이세상이 저주와
그로 인한 불안과 고통과 죽음의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평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하며
그리고 때로는 불안을 안고 살며, 절망가운데에 머물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이 행복할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삶의 바른 길을 갈 때에
즉 죄를 해결하며 의인의 삶으로 살아갈때에 입니다.
무엇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 갑니까?
그것은 인간의 도덕이나 수양으로 가능합니까? 아니요,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바르게 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성품을 바꾸어 주며 인간에게
선한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었으나 사람은 악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고
자신을 의롭게 하게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길은 그의 말씀속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그 말씀안에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악한 영혼들을 고쳐 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크게 두종류의 인생철학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복되게 하며,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또하나는 악인의 삶의 철학은 인간을 더럽히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죄의 길이며, 악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교만한 인생의 길입니다.
오직 의인의 삶의 철학은 인간을 바르게 인도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의인이 되게하는 삶의 철학은
인간을 자신의 삶에서 행복해 질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의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무엇이나 잡는 것 같은데,
그것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취하는 것, 소유욕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자신의 삶이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탐욕은 죄의 뿌리입니다.
만족이 없는 갈증을 줍니다.
그러나 인생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 가치를 통해 소유도 따라오고, 행복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이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끼?
자신이 행복해지게 만드는 조건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의 상태즉 자신이 있든지 배웠든지,
자신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상태에 행복해 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두부자가 있는데 한 부자는 자신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유익하게 쓰며,
남을 도우며,그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구하고 살면서 행복해 합니다.
다른 부자는 다른 사람를 착취하여 끊임없는 소유욕에 의해 얻어진 부이기 때문에
그 부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모아도 항상 탐욕에 빠지는 궁핍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지고 부족해도,
자신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한 사람은 못가졌다고 원망과 불평속에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서
자신을 행복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해 지는 절대적인 행복의 상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시듯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바르게 보며 삶을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자신의 상태냐?
아니면 행복해지려는 자신이 갖고 있어야 할 조건이냐?
전도서에서 인생의 복은 자신의 주어진 분복을 누리는 것이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있는 그대로의 것을 즐기는 상태를 복받았다,
즉 행복한 생활을 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복을 위해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반면에 모든 인생들은 불행을 싫어합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큰 목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여, 비둘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행복과 소통하여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발견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행복을 얻을 수 잇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17에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며,
또한 의로운 일꾼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에서의 복있는 사람에 대해
요한 계시록 1:3에 그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자와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즉 행복한 사람은
주야로 그 구원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듣기를 힘쓰고
그 말씀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자신의 의인의 삶의 철학적 바탕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주님의 법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뜻, 바램, 열망, 마음의 동기,
즉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있습니다.
주님의 법을 자기 인생의 규칙으로 삼으며, 삶의 철학으로 삼는다.
모든 행동이나 열망의 표현을 말씀의 거룩한 표준에 둡니다.
그는 자유의 온전한 법을 좇아,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이며, 그의 행동이 복을 받습니다.
그는 단지 읽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아니라,
그가 읽은 것을 생각하고, 묵상하여,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것입니다.
마치 말씀의 젖을 먹듯이 영생의 삶을 키우는 것입니다.

불행하게 하는 인생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본문에서 인간의 죄의 상태의 삶을 세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불경건한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들의 삶은 불행합니다.
2. 죄인들의 삶은 표적이 빗나간 삶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생활에 빠집니다.
위반하는 생활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것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악을 범합니다.
전자는 하나님없이 사는 자이어서 절망적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후자는 그의 마음의 죄로 가득차 외부로 그것이 위반하는 것으로 표출합니다.
3. 경멸적인 오만함을 조롱하는 태도
그는 신앙이 없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기 쉽고, 영혼의 불멸,
보이지않는 영적인 세계를 우습게 압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죄는 진행형이며,
한 가지 악은 다른 악을 불러들입니다.
나쁜 조언을 받으면 악한 행동을 유발하며,
악한행위를 하도록 자신을 포기한 사람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인생이 됩니다.
탐욕이 죄를 낳고, 죄가 죽음을 가져옵니다.
솔로몬은 악한 자의 길을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복있는자는 죄를 범하는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복받는 것 대신에 저주받는 것은
불경건한 자의 길에서며,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이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3절/ 심은 나무처럼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버려두면, 저절로 제대로 자라는 법이 없듯이,
영적생활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르치고 영혼을 먹여야만 영혼이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신앙교육을 게을리하면 의의 열매를 기대할수 없습니다.
가꾸지 않은 영혼은 가시덤불과 같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를 거두는 능력을 주셔서 그것을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와 장소와 기회를 주셔서,
자신의 영혼에 선한 것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에게도 좋은 것으로 영향을 줍니다.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항상 변함이 없으며,
그의 믿음이 그의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잎사귀와 열매는 나무의 생장하는 완성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열성적인 신앙의 표현은 좋은 사역으로 따라옵니다.
그것이 건강하고 좋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가 하는 무슨일이든지 번성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항상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같이 경건한 사람은 주님의 은혜에 깊이 뿌리를 내려,
은혜안에서 강해지며, 성령의 지속적인 영향아래에서 무슨일이든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만한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 형태로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불경건자는 바람에 휘날리는 먼지와 같으며,
그가 이루어 놓은 것에 견고한 것이 없으며,
그의 길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는 농사에서 좋은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에 불과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체질로 불어 버리면 다 날라가 버립니다.
불경건한 자는 결코 안전하지 않아, 어리석음, 직업적인 것, 모아놓은 것들,
그리고 인간관계까지도 흩으러 버립니다.
불경건자는 어떤 하나님의 축복의 혜택도 받지 못하여,
영생의 부활을 받지 못하여, 결국 영원한 파멸로 나가게 됩니다.

주님은 의인의 길을 아십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계속적인 돌봄을 받습니다.
그는 그들이 가는 길을 아시고, 그들의 동기와 목적과 사역들을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의인의 몸과 영혼을 돌보며, 모든 위기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적용및 결론
어떻게 인생을 복되게 하는 삶의 철학을 뿌리를 내리고 강화할수 있습니까?
먼저 저주를 불러 들이는 죄의 줄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을 때에 삶의 저주가 오며, 그 죄를 회개치 않고 품고 있으면,
자신의 인생에 그 저주가 머물러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저주하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할수 없다, 너는 못난사람이다. 마음으로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
저주를 불러 오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악담을 하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입으로 저주를 퍼부는 일을, 이웃에게 악한 말로 저주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저주하는 것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먼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암송하여 삶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안읽었던 분은 읽으시고, 읽으시는 분은 성경을 파고 들으시며,
그러면 신앙이 자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에 꿈으로만 여기기 쉬운 불가능한 것도 할수 있다는
믿음의 철학,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순종의 철학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활용하여 자녀에게 매일 복을 비시고,
자신에게 매일 일어나서 축복을 비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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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유익한 인생

잠언 3:1-6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사람에게 주님의 법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녀에게 부모의 가르침은 인생을 유익하게 살아가게 한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진리가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생명의 길을 걷게 한다. 인생의 뜻을 바르게 세우는 길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법을 준수하면 그 테두리안에서 자유를 얻고, 자신의 권리를 찾으며, 자기의 권한을 유지한다. 법을 지키는 것은 그 법을 마음에 새기며, 그법을 준수하려는 정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옳은 길을 살아가는 진리의 법을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신다.

그 법을 지키면, 자신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온다. 인생의 경주에는 코스를 따라서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다. 코스를 이탈해서는 정상적으로 경주를 진행할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보편적인 법은 자녀가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육체도 바르게 사용하면 건강을 유지하며, 영혼도 진리를 먹으며 살아가면 생명을 얻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간다. 인생에서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아래에서 심는 일을 열심히 하면 거둘 때에 많은 열매를 거둘수 있다. 불의의 씨를 뿌리면 불의의 열매를 거두고 선한 의의 열매를 위해 힘쓰면 존귀와 영광의 열매를 거둔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여 살면 인생의 장수를 하며, 그 날들이 형통과 평강의 날들로 채워진다.

인생에는 정의로움과 자비로움을 함께 품으며 살면 자신의 삶이 풍성하게 이루어 진다. 타인에게 관용하며 자비를 베풀며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에도 하늘과 타인으로 부터 자비를 얻을수 있으며, 인생의 넉넉한 풍부함이 주어진다. 하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인생들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 스스로 도울 힘이 없는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다. 이웃중에 고아와 과부의 처지에 있는 인생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을 쌓는 것이다.

진실한 삶의 길에는 은총과 영광이 있으며 인생을 영위하는 정책중에 정직이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게 한다. 삶의 진리는 인생을 바르게 살게하며 자신을 방황하게 헛된 것들로부터 참된 자유를 얻게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는 진리의 원천이시다.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려면 그가 명하신 길을 따라 가면, 옳은 길을 걸어갈수 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나 사람들앞에서 인정을 받으며, 모든 일에 있어 제대로 쓰임을 받으며, 결국 그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중에 높임을 받는다. 사람들중에 명예를 얻은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존경을 얻었으며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인정받게 하였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인생은 자신중심의 지혜를 좇아가기 보다는 선인들의 앞선 삶에서 배우며 옛사람들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의 인생의 길들을 배우는 중에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쳤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길을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늘의 뜻을 쫓아, 그 창조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아시며, 그 길을 제시하며,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신다. 인생의 지혜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며 그분을 섬기는데서 부터 사람들이 삶의 지혜를 배운다. 하나님은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다 아시고 그들의 종국에 도달할 목적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앞에서 겸허하게 살아가려면 모든 일에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하신 일들을 명심하여 자신의 하는 일에 모든 일에 적용하여, 그 명령을 따를 것이다. 모든 일에 그분을 인정하는 것은 항상 어느 일에 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물으며, 그일을 추진하는 시기가 적당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생의 삶의 모든 일에는 각기 적당한 시기와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해야 할 것인지 나중에 해야 할 것인지를 물어 보며, 일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하나님에게 여쭈어 먼저 해야 하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나가는 것이다.

사람이 계획하는 일은 실수가 있고, 실패할 경우가 많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하고 인정한 일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실패하지 않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혜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구하여 그 일을 하면 훨씬 쉽게 성공적으로 이룰수 있다.

자가당착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일에 자신이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 착각에 쉽게 빠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 과대히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어리석어 지는 것은 겸손한 자가 아니라 자기의 지혜나 능력을 과대히 평가하여 자기신념에 몰입하다보면, 스스로 실수를 하며, 어리석게도 남에게 해를 끼치기 까지 한다. 고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지혜, 지식, 재물, 권력, 재능)으로 교만하게 자신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실패하기 쉽다.

오직 인생의 길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인생을 창조하며 인생의 길들을 정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경배하는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의와 진리의 원천이며, 온우주의 원칙의 순서를 세우셨다. 누구든지 그분을 무시하고서 참된 선을 이루어 갈수 없으며, 도리어 악을 범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제시하는 길을 버리는 것이 인생을 악으로 빠지게 한다. 악한 인생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길들을 따르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걷다가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십상이다.

과도한 자기지혜에 몰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인생의 길을 건강하게 한다. 자신의 몸도 마음도 건전하며 자신의 삶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살면 인생의 하는 모든 일들에 그일에서 의미와 가치와 성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삶이 굳건한 반석위에 세워져, 많은 풍상(고난, 고통, 저주, 헛된 운수지향주의)이나 자신의 삶을 흔들게 하는 일들( 실수, 교만, 사건, 사고, 헛됨, 갈등, 범죄)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이 이 세상에 살도록 세우시기전에 먼저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놓으셨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채워주심이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마련하신 것들을 누리며 그리고 혹은 즐기며 살아간다. 비록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하는 고된 인생의 환경이지만, 그가운데에서 그분이 주시는 삶의 안식이나 즐김과 능력공급을 받고 살아갈수 있다. 고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들로 하늘의 뜻에 거스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도에 자신이 얻은 것들을 쓰며 혹은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가면 보다 삶이 풍요로우며, 유익한 인생의 열매를 거둘수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노력한 것들을 바르게 심어가면, 그 결과에 유익한 것들을 거두게 된다. 그래서 그 소산물로 자신이 즐기며, 가족을 부양하며, 그리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은 우리 인생의 필요에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이나 자기이익에 몰입하는 일은 그 인생을 어리석게 만드는 헛된 수고를 하게 한다. 자기주의로 재물을 모으고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능을 키우고 일들도 결국 인생의 결산의 길에서 남는 장사가 아닌 밑진 장사에 불과하다. 자신이 수고한 것들을 함께 이웃들과 나누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지 않고 옳은 일에 쓰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면 자신이 모은 재물이 썩지 않고, 요긴한 때에 써야 할 일이나 사람에게 적절하게 쓰여져 많은 선함과 유익한 열매를 모으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이름이 아름다운 명예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놓은 재물이나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지혜나 지식이나 자신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재능등이 유익하게 사용되어, 더 값진 것들을 낳게 된다. 그는 이제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서있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새로운 세계에서도 그의 이름이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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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신앙

마태복음 15:21-28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발전은 저 미지의 세계 넘어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의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불굴의 용기의 정신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위기나 혹은 어려운 일에도 포기하지 않는 기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때에 장애물을 극복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어가는 도전하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세계안에도 그러한 도전적인 정신이 있는 깃들어 있는 믿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안에서 믿음의 도전적인 성격이란 이렇습니다. 그 믿음은 바라는것을 이루며,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특성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도전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시돈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가셔서 접촉하신 일은 드물게 그의 사역에 나타납니다.

이방인들은 보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문화이기에, 사람들 가운데에 악령들이 쉽게 영향을 주며, 사람들은 귀신들의 지배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화나 문명이 발달하여도 하나님을 모르는 문화나 문명은 영적인 존재들에 영향을 받는데, 특히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이방인인 한 여인이 자기 딸로 인하여 늘 염려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딸은 소중한 자녀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으나, 그녀의 딸이 몹쓸 귀신이 들려버렸습니다. 아마 그녀의 딸이 어린 시절의 아버지나 혹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로 지내다. 그 상처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딸이 실성하여 귀신이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패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딸은 어미에게는 크나큰 인생의 짐이며,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하는 태도나 답변은 그녀의 청원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에게 유대인우선순위를 내세워,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리라. 이방인들이 들으면 화가 날 개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그러한 기존의 편견이나 선입관들에 대해 여인은 자신의 도전하는 믿음으로 맞섰습니다.
첫째로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이 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간청할 때에 거부와 반대와 같은 장애요인들이 있엇습니다. 1)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상종하는 것은 금기로 여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접근이나 대화의 장벽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거절과 제자들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5장에 보면 제자들이 그 여자를 제자들이 귀찮게 여기고, 보낼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애물을 넘어갔습니다.그녀에게 유대인과 이방 인의 차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다만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의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 딸을 치유하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강인한 갈망의 에너지가 넘치는 믿음이 었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갈망의 에너지가 넘쳐나 그 에너지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해결의 접근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하는 집중적인 믿음의 활력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여 기회를 잡았습니다. 자신앞에 메시야 구세주 예수께서 다가오실때에, 기회를 잃지 않고 그녀는 담대히 유대인앞에 나가서 자신의 요구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 나라의 좋은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사모하고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강인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은 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으로 다가옵니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곳이며,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두번째로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매몰차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자녀의 떡에 제한 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 자녀의 떡을 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개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끝까지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그 옛날 구약의 조상중에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한 야곱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대신에 차자로 태어나서 그 장자에 대한 축복을 취하고저하는 열정과 그 그 장자권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통한 일관된 추구는 급기야는 그가 어느 발 밤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축복의 하나님에게 축복을 쟁취하고야 만 하는 그의 도전적인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에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축복을 얻어내는 인간의 믿음의 도전적인 시도들을 격려하며 축복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필요를 관철하고저 하는 끈질긴 간구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이나 효과는 믿음의 기대만큼에 정비례합니다. 끈질긴 믿음은 결국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합니다. 모든 일에 잇어, 일의 성공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타납니다. 일의 성취도 중간에 있는 반대작용이나 한계를 넘어가면서 이루어 집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역사에 가장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을 때에 허랑방탕하며, 사생아를 낳았으며, 진리를 추구하였으나, 이방종교인, 마니교에 빠져 그의 영혼과 몸이 모두 타락한 상태에서 혼돈과 절망속에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가 잇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그녀는 십수년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결국에는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로, 어거스틴이 어느날 정원에서 자기의 동료와 이야기 하다가,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에 탁자에 올려 있었던 성경을 로마서 13:13-14을 들고 읽거라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그동안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변화가 없던 그에게 하늘로부터 깨달음의 빛이 그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그가 그때부터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것을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어 장차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는 유명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그녀의 도전적인 믿음은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장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 표현이 그런데 마태복음15장에서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정신은 절박함이나 간절함에서 나오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나 정신은 그 간절함이나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대감일때 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이나 인간의 편견을 넘어가는 그녀의 믿음은 할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급을 얻게하는 큰 믿음이 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기존개념에 머물게 됩니다. 도전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상식적인 생각을 넘어가며, 그 너머에 있는 할수 있는 가능성의 열매를 따먹습니다.

다윗시대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틴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군인들은 누구나 저 거인을 아무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거인에 도전할 만한 용기가 나서질을 않았습니다. 모든 군인들의 생각에 거인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만은 달랐습니다. 골리앗이 거인이라도, 전사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이길수 있다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용기가 있는 믿음이 큰 상급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수로보니게 여인의 도전하는 믿음은 먼저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상급을 얻는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러한 큰 믿음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런 큰 믿음을 갖고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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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

요한복음 13:34-35
34. 이제 내가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주 예수님 자체이다.
그의 삶은 사랑의 화신의 삶이다.
그는 사랑으로 인하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위하여 이땅에 오셨으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의 생명까지도 그의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희생을 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 사랑에 대한 그의 태도는 목숨보다 더 강한 정열을 보여주셨다.
그 사랑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위해 자신을 버리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보여주시며,
그 사랑안에서 인간들이 잃어버린 영광의 자리를 회복케하여,
인간의 죄와 허물로 벌어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복원케할 진정한 사랑을 심으셨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이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본성과 연결되는 의미가 있다.
사람은 사랑할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할때에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인간의 선함과
자신속에 창조된 풍부한 하나님의 속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주님이 주신 새계명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명중에
가장 고상한 인간 선의 온전함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그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에게 가까운 속성으로 인도하여
인간속에 심겨진 신의 흔적을 볼수가 있다.
사랑을 통해 신의 세계가 열리며, 인간성의 고상함을 보여주게 된다.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은 인간들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참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안에서 서로에게서 사랑을 잃어버려서 붏신과 좌절과 절망을 겪으며,
결국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며,
사랑은 사람들속에 있는 모든 좋은 소유들을 서로 공유하게 하며,
풍부하게 하며,사람들간의 서로 상호의 온전함을 이루는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사랑은 인간의 유치함(어리석음)을 성숙케하며,
단절된 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망과 죽음으로 부터 오는 모든 두려움이나 불안을 떨쳐 버리게 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랑의 관계에서 출발할 때에
인간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되며,
그리고 숭고한 인간성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심으신 인간성안에 있는 인간의 고귀함을 가꾸며,
더 나아가 자신을 온전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함께 유익한 존재들로 변화되어 가게 한다.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공동체는 이상적인 인간들의 모임을 이루며,
그 안에서 사람은 사랑을 서로 먹으며 생존하고, 자라며,
온전한 성숙을 향하여 나갈수 있다.
특히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늘 사랑의 분위기에서 유지되면,
사람은 그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일과 사명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이상적인 비전을 펼쳐 갈수 가 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서로를 돕는 존재로 나타나게 하며,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안의 갈등과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겪는 어둠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로를 빛나게 하는 은총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들사이에 있는 사랑을 통해 그 빛을 발한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과
그로 인한 풍성한 혜택들을 누리게 되며,
더나아가 사랑하는 자기들 안에서 살아있는 진정한 인간성의 숨결을 느끼며,
고상한 사람냄새의 아름다운 향기를 마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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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있는 믿음의 소유자

마태복음 8:5-13

5.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장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구하며.
6. “주님 제 하인이 중풍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7.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시자
8. 장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까지 오시게 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나으라는 말씀만 한마디 해주십시오.
9.저도 윗사람을 모시고 있고 제 아래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부하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제 하인에게 ‘이 일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예수님은 이 말에 놀라시며 따라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스라엘 온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
11. 또 너희에게 말한다. 동서 사방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통곡하며 이를 갈것이다.”
13. 그러고서 예수님은 장교에게 “가거라.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바로 그 시각에 그의 하인이 나았다.

이 치유는 치유자와 병자와의 관계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만난 백부장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보다는 치유에 따르는 믿음의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알려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의해 나타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의해 생겨난다.
믿음의 성격중에 순종을 하는 것이 있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따라 순응하며 좇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순종으로 향하여 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고 신뢰할수 있는 것을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믿음은 또한 신뢰받을수 있는 분에 대한 존경이나 공경에서 나오는 자세가 있다.
높으신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는 것을 공경하는 태도로 받아들일 때에
그의 약속은 받아들이는 자에게 실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역방문은 그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으로 다가온다.
가버나움은 제자들의 고향으로 그 지역에 주님은 여러 가지사역을 행하셨다.
그 지역에 가셨을때에 이방인이 한 로마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으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해
주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는 건전한 군인이었다.
그는 점령군의 군인이었으나 식민지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대문화나 생활습성에 적응하며 그들의 문화나 생활방식을 존중하였을 것이다.

그 군인에게는 자신을 돕는 하인이 있었다.
군인은 늘 그 하인의 병으로 인하여 마음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하인의 병을 염려하던 그인지라
그는 자기의 일처럼 하인의 질병을 치료하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주님의 지역방문의 뉴스를 접하고
주님을 만나러 나와 그에게 겸손히 간청하는 것이 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요청을 들어주시려 하여, 자신이 가서 고쳐 주겠다라고 하셨다.
사람이 주님에게 나가 간구를 하며 요청을 할때에 그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하인의 일로 인하여,
주님에게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간청을 하였다.
즉 그 백부장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마음에서 주님에게 매달렸더니
주님은 그 요청을 열납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에게 간구를 하며,도움을 요청을 할때에,
자신의 기도의 동기가 중요하다. 이기적인 동기인가 아니면,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자신의문제를 해결받기를 기대할때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의 요청하는 의도가 선명하며, 올바를 때에 그의 간구가 힘을 얻어,
강청하여도 그의 간구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마 하던
예수님에게 주님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방인인 그가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이
문화적인 차이나 혹은 민족적인 감정의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에게 대한 전적인 신뢰와 그의 직업에서 오는
상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의 삶의 원칙들에 충실하였던
평소의 습성이 주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의 자세는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진정하며 숭고한 경배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며,
그분의 자신의 집에 오심을 막을 정도로 주예수님을 모시고
영접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변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었을 것이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시며,
자신에게 나오는 수많은 병인들을 치료하며,
사람들을 일깨워주시는 그의 사역에 대한 뉴스는
그 백부장에게 주님에게 대한 깊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한 제자에게
그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가진 이들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축복하신다.
믿음이란 경험이나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이성적이고
감각적인 판단에 의해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대하는
신앙인의 마음의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부여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과 그나라의 기이한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아가 천국의 시민이 되게하는 그분의 선물로서
다가오는 믿음의 역사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된다.

백부장이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대하는 믿음의 세계는
절대복종이라는 평소의 군인정신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였던 같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살고 그 명령에 죽는 철저한 군인정신에 의해 훈련되었다.
그의 평소에 가졌던 그 정신은 주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관의 명령의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있는 가를 체험하였기에
그는 주예수님을 대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은
그저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가 듣고 이해하였던 메시야로서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역을 충분히 신뢰하고도 남는
좋은 믿음의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믿음은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창조사역에 모든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 말씀 한마디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지대한 능력의 표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백부장이 그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
자신이 주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만 해주세요, 그러면 자신의 하인이 낫게 되리라는 것을 보이며
그는 말씀창조의 사역의 주님에 대한 절대 신뢰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백부장이 군인의 세계에서 있는 명령체계에서
그는 상관의 말한마디에 따라 그 밑에 있는부하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영향력을 주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주 예수님에게 자신의 진정한 군인정신에서 우러 나오는 믿음의 깊은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의 태도에서 백부장이가 이해한 믿음은
절대 순종으로 대하는 믿음의 세계였다.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해주는 신앙인의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과 그분의 하시는 일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절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인격적인 관계는 서로 신뢰하는 상태에서 발전이 이루어 지며, 진정한 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군인정신의 자세에서 나온 믿음의 태도에 의해
주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갖고 주님에게 나왔다.
그가 이해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은
철저한 복종정신과 그리고 그에 따른 경외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때에 철저한 태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깊이 이해하고 경험할때에
그가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인간의 진정한 모습과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하나님앞에서 갖게 되는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 인생들을 창조하셨으며,
인생들은 하나님의 세우신 테두리안에서 존재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영광됨을 찾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세계안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참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안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게 되며,
그분안에서 있는 인간고귀함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갖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찾으며, 그의 영광을 바라며 나가는 것이 믿음의 발걸음이다.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믿음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선택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자리를 마련하셨다.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구원을 통해 천국의 백성이 될 것이다.
세상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단지 구원을 얻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천국에 장차 구원얻을 수억만만의 만민들이 모여들 것이며,
그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지만 그 유대인의 혈통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한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는 제외되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안에 있는 인간구원과
그에 따르는 영광을 얻을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람앞에 놓여있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은 인간이 가서 영광을 얻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 아니면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심판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결국 죽음의 세계안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고통의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현실앞에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 오셨다.
누구나 그분에게 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자신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하인의 질병을 들고 주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의 치유를 하인에게 주었다

동시에 그 백부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얻을 백성으로 인정받았으며,
더나아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가장 뛰어난 가치의 믿음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해 하인을 치료받게 하며, 자신을 구원하며,
하나님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백부장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임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믿음은 그의 인생을 가장 가치있는 것들중의 하나로
하나님나라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천국에서는 믿음있는 자가 존귀함을 받으며,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또한 그의 믿음의 삶은 이웃을 섬기는 것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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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올바른 삶

학개 1: 3-7
3. 여호와께서 다시 예언자 학개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4.”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 데 너희는 호화주택에 살고 있느냐?
5.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6. 너희가 많이 심었으나 적게 거두었으며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으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품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지갑에 넣는 격이  
 되었다.
7.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성전중심의 삶은 성전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중심의 신앙을 전개하며,
말씀중심의 신앙을 정착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현현을 기대하게 하는 성전중심의 신앙은
언제나 성전을 통해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통치를 바라보며 나가는 신앙이다. 

주님은 주님의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다. 
성전에서 부르짖는 간구에 주님이 응답하시며,
그의 손길과 역사하심이 그의 임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당시 유다백성은 바벨론 유폐의 생활에서 고토에 돌아와
옛왕국이나 자신들의 살았던 삶의 터전을 세우는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살집이나, 혹은 사회기반건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유다백성의 삶의 근본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망각하고,
그들은 성전재건의 사역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자기살 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에 성전을 지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학개 예언자는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전달하실때에 그의 메신저를 들어서 전달하신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할 책임이 주어진다. 

고로 예언자는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설교자나, 성경교사들은 말씀전달을 통해
주님의 뜻과 그의 음성을 전하는 것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유다백성들은 고토에 돌아와 자기 살길이 바빠,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소홀히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다. 

인간의 관심이 자기에게로만 집중이 되면,
객관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지혜가 없어진다. 

사람에게 영적인 관심이 없어지면,  육체적인 일에 집중하며,
도덕이나 윤리적인 원칙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행위를 살피지 않고, 가치없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고, 자신을 흩어지게 하는 산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상태를 간파하시며,
인간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임을 알고 계신다. 
인생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무시하고 살아가기 쉽다. 
인생이 기준없이 살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자신의 일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관찰하시며 판단하신다.

사람이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하기가 어렵다. 
이말은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자기의 생각이 명료해지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영혼이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안에서 인간의상태가 영과 혼과 육의 체계를 질서있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게 된다.  

 

고로 먼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펴서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질서를 따를때에
사람은그 안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인간의 자기능력이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신의 인간성안에
인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영혼의 가치를 추구할 때에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본연의 삶에 충실할수 있다. 
고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일이 잘되어야 자신의 능력을 잘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상태를 보시는데, 
그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상실감속에 있거나, 진리를 떠난 미로의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하는 일을 판단하며, 그들의행위를 살피며,
그들을 평가하며, 심판하신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상태를 반영하는 고로 자신안에
하나님의 선과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들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기준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바르게 할수 있으며, 자신의 삶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     

 

여기서 성전중심의 삶은 바로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문제를 돌아보며,
자신의 상태를 올바르게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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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좋은 인생

마태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사람은 겪어보아야 사람됨됨이를 알수 있다라고 하듯, 사람은 서로 알아가며, 사귀는 단계가 있어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알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지내는 과정을 통해 친밀감이나, 혹은 우정을 나눌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에 품은 뜻이 어떠하며,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을 보며, 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되어, 그가 한 일을 보고난 후에 그 사람을 판단하며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생활이나 누구의 지도를 받는 선생을 두거나 지도자를 둘때에, 사람들은 선생이나 지도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지도력은 그 지도의 영량으로 나타나지만, 그 영향을 받는 따르는 사람들은 지도자나 선생의 지시에 자신의 삶의 방향이나 결정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지도자도 그 지도력을 배우려는 좋은 제자나, 혹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자신의 원하는 일들을 추진 할 필요가 있듯이, 그 지도력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좋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자신이 좋은 일을 할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나 지도자들의 자질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자신들의 하는 일의 결과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자는 그들의 상태를 통해 지도의 영향력을 나타낸다. 그들의 상태를 분별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그들의 진위를 알아내게 된다. 선생이나 혹은 조언자나 영향력있는 친우등 나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잘 분별하여 선택해서 자신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인간 처세술의 지혜이다.

사람은 좋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며,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어느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으며, 혹은 평소에 자신과 소원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이외로 자신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에나 중요한 결정할때에 자신에게 중요한 역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특히 영적지도자는 사람들의 인생이나 영혼의 상태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까지 영향을 주기때문에 자신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러 영적지도자들에 대해 옳은 선택하며, 또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지도자를 분별하여 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게 되면 영적지도자의 권위에 의해 어뷰즈를 당하는 경우를 만나면 영혼을 망치며, 삶을 허비하며, 인생을 파탄으로 내몰리게 된다. 반면에 옳은 영적지도자를 만나면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옳은 영적인 생활과 바람직한 정서적이고 정신적인생활과 그리고 건강한 인격적인 관계안에서의 사회적인 모든 일)에 있어 한층 상승하는 단계를 지나게 된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 그 나무의 정체를 알아볼수 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맛보며 좋은 포도나무인지를 알며, 가시나무는 찌르는 가시가 있는 것을 통해 그 나무의 가치를 알아볼수 있다. 그렇듯이 사람도 그 사람의 하는 일이나 행동의 결과에 따라 사람의 진가와 가치를 알수 있다. 인생은 모든 일에 자신이 심은대로 거두는 원리가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볼수 있다. 나이가 40이 되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들의 살아온 흔적을 찾아볼수 있으며, 또한 불혹(흔들림이나 동요등에서 자유로운 상태, 즉 자신의 살아온 경험이나 지식이나 이해를 따라 판단하여도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는 자기처세의 단계)의 나이를 넘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주변인들의 됨됨이를 잘 평가할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긴 세월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가 형성이 된다. 그리고 사람의 가치의 형성은 그의 평소의 생각을 통해 정해놓은 좋은 습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격의 갖춤과 평소에 갖고 있는 자신의 삶의 원칙에 의한 인생의 지속적인 전망을 통해 그 사람의 일의 결과나 행위의 생산을 통해 그사람의 인생의 열매를 맺게 된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고방식과 좋은 습관과 좋은 생활의 진행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할수 있다. 자신의 삶의 과정속에서 의인은 의의 열매를 맺으며, 악인은 악의 열매를 딴다.

한 번 그 길로 방향을 잡으면 돌이키는 데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길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좋은 습관이나 좋은 사람의 모습은 기나긴 세월을 두고, 일정한 지식습득과 경험의 훈련의 기간을 통해 좋은 사람의 판단이나 행동을 유발한다.

나쁜 인격으로 형성된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할수 없으며, 나쁜 생각을 평소에 늘 품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영향을 줄수 없다.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에 힘쓰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에 따라 그가 자신의 행동의 결과나 일의 열매에 결과가 나타난다.

사람은 서로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어느 사람이든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선생이 되기도하는 가 하면, 혹은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는 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인생은 각종의 여러 인생들의 살아가는 경주장이며, 여러 사람들이 널려 있는 인간상품의 전시장이라 할수 있다. 사람은 크게 있어서 유익한 사람이 있으며,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면 해로운 사람도 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자나 혹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든지 사람들은 다음의 질문,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잇다. 먼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인생의 삶에 유익을 줄수 있는 사람은 부단한 자신의 발전에 노력하는 사람이며, 인생의 의미나 가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아름답고 사람답게사는 좋은 향기가 난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은 인생의 길이에서도 별 의미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지탱하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무익한 것으로 허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해로운 일을 꾸미는 사람은 쉬지않고 악을 도모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인생을 소비한다. 특히 그런 인생들은 하늘에서 볼때에 결국 도끼에 찍히는 나무처럼 찍혀서 내던져지는 심판의 형벌을 면할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람은 두가지 결산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삶의 길이를 보내고 있다. 하나는 누구나 자기 개인의 종말의 시간이 앞에 놓여 있어, 자기에게 주어진 정해진 시간이 다하면 그 살아온 시간속에서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평가하며 판단을 받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자신의 삶의 결산을 갖게 된다. 또 하나는 역사의 종말이 있다. 모든 인생들은 그 역사의 종말을 향해 지금 향하여 나가고 있다. 역사의 종말의 때는 한정된 때이며, 제한된 시간이다. 고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자신들에게 인생의 시간들이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리고 이세상도 반드시 마지막이라는 기간적인 구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후에 전혀 지금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고로 지금 자신의 시간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며, 자신의 삶도 자신에게 귀한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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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도전적인 믿음

마가 복음7:24-30
24.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하셨으나 곧 알려지고 말았다.
25.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가진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즉시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녀는 수로베니게 태생의 그리스 사람인데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27.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에게 던지는 것을 옳지 않다.”
28.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29. “네 말이 옳다. 이제 너는 돌아가거라. 이미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래서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은 이미 나가고 어린 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발전은 저 미지의 세계 넘어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의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도전정신과 실험시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위기나 혹은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실험정신, 즉 개척자적인 정신이 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기회를 쟁취하는 불굴의 용기의 정신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시돈지방으로 가셨다. 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잃어버린 선민들을 위해 이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다. 본문에서는 그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가셔서 접촉하신 일은 드물게 그의 사역에 나타난다. 사마리아 지역에 가셔셔 전도하신 일이나, 혹은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이방인들을 만나신 일도 있지만, 이렇게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그 지역에 이방인인 한 여인이 자기 딸로 인하여 늘 염려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에게 딸은 소중한 자녀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으나, 그녀의 딸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귀신이 들려버렸다. 이방인 지역은 우상을 섬기고, 악령이 횡행하다보니 그녀의 딸이 사춘기의 급격한 변화로 혹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나 혹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로 지내다. 그 상처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딸이 실성하여 귀신이 들렸다. 패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딸은 어미에게는 크나큰 인생의 짐이며,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다. 인생의 문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앞에 나오게 한다.

그녀는 그리스의 사람이 었다. 수로보니게의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리스사람은 당시 전세계에 헬라(그리이스)문명이 영향을 주고 있는 시대여서 그리이스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던 것 같다. 이방인들은 보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문화이기에, 사람들 가운데에 악령들이 쉽게 영향을 주며, 사람들은 귀신들의 지배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무리 문화나 문명이 발달하여도 하나님을 모르는 문화나 문명은 영적인 존재들에 영향을 받는데, 특히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의 죄나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악령들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지배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땅에도 악령들의 지배가 있었으며,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때에 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영향을 주며, 나중에는 상주하여 지배를 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중에 하나가 인간세계에 있는 사단이나 그의 하수인들인 악령들의 영향이나 지배를 없애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녀의 청원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기존관념을 내세우며, 기존의 유대인우선, 선민사상으로 나가셨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에게 유대인우선순위를 내세워,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리라. 이방인들이 들으면 화가 날 개념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기존 관념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관념이나 편견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충실하였으며, 자신의 간절함을 따라 행동하였다.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편견이나 제한을 생각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셨다. 기존 관념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여인은 자신의 주장으로 맞섰다. 믿음은 주님의 의견이나 생각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으로 그 여인은 믿음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믿음은 자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믿음이 었다. 그녀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상관이 없다. 그녀에게는 다만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의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 딸을 치유하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강인한 갈망의 에너지가 넘치는 믿음이 었다.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갈망의 에너지가 넘쳐나 그 에너지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해결의 접근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하는 시너지 효과로 종합적이고 집중적인 믿음의 활력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기회를 잡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앞에 메시야 구세주 예수께서 다가오실때에, 그녀는 담대히 유대인앞에 나가서 자신의 요구를 간청하였다.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상종하는 것은 금기로 여기는 것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접근이나 대화의 장벽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벽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그녀의 시도는 실험정신이며, 도전정신이다. 이것이 세상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발명이나 발견의 시도는 모험이나 시련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새로운 시대나 흐름에 대한 개척정신이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 나라의 좋은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믿음이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사모하고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강인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난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천국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천국은 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으로 다가온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곳이며,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곳이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이며,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자녀의 떡에 제한 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 자녀의 떡을 취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녀들의 빵을 취하고저 하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이 믿음은 바로 그 옛날 구약의 조상중에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한 야곱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다. 야곱은 자신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대신에 차자로 태어나서 그 장자에 대한 축복을 취하고저하는 열정과 그 그 장자권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통한 일관된 추구는 급기야는 그가 어느 발 밤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축복의 하나님에게 축복을 쟁취하고야 만 도전적인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호를 갖게 되었다. 너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에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축복을 얻어내는 인간의 믿음의 도전적인 시도들을 격려하며 축복하셨다.

그녀에게는 기회를 쟁취하고저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절박함을 주님에게 대한 한계나 제한을 넘어가는 믿음으로 표현하였다. 만일, 인생에 절박함이 있고,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에게 구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고질적인 딸의 문제를 들고 주님에게 나온 것이다. 그 문제로 인하여 그녀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와 그의 은혜의 치유로부터 딸의 치유와 구원을 받는다. 자신의 딸의 문제로 구세주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 딸을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딸의 구원과 치유를 받는다. 더구나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같은 믿음의 표현으로 인하여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끈질김은 그녀의 간청으로 포기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매어 달리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매몰차게 제한과 한계를 설정하신 주 예수님의 거절의 답변을 듣고도 그녀는 주님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다. 일의 성공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타난다. 일의 성취도 중간에 있는 반대작용이나 한계를 넘어가면서 이루어 진다.

그녀의 주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고백은 이렇다. 상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필요를 관철하고저 하는 끈질긴 간구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믿음의 능력이나 효과는 믿음의 기대만큼에 정비례한다. 끈질긴 믿음은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장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정신은 절박함이나 간절함에서 나오지 않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나 정신은 그 간절함이나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대감이다. 그의 이론이나 생각이나 인간의 편견을 넘어가는 도전적인 것이 있다. 사람은 대개 기존개념에 머물게 된다. 비상한 사람들은 그 상식적인 생각을 넘어가며, 그 너머에 있는 가능성의 열매를 따먹는다.

다윗시대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틴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군인들은 누구나 저 거인을 아무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거인에 도전할 만한 용기가 나서질을 않았다. 모든 군인들의 생각에 거인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다윗만은 달랐다. 골리앗이 거인이라도, 전사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용기가 있었다. 용기가 있는 믿음이 큰 상급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 여인에게서 배울 것은 그녀에게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고서 주님의 은총을 입고 그녀의 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녀에게는 먼저,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사역을 가능하시도록 유도하였다.

그녀의 믿음는 편견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유대인은 되고, 이방인은 안되는 편견을 넘어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오는 불편 부당한 대우나 편견된 상황을 뛰어넘는 자기 재치나 지혜나 지략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된 믿음안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입견이나 상식을 넘어가는 창조적인 정신이 있어, 그 정신에 의해 축복의 기회를 잡았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으로 유대인이신 주님의 매몰찬 거절과 냉혹한 한계의 현실을 극복하여, 여러가지 장애를 넘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었다. 세상은 여러 많은 도전이나 시련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원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은 자신의 성취의 동기의 주요한 밑거름이나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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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태복음 22:35-40

35. 그들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교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살아가는 중심계명이다. 이 계명은 성경의 전체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삶의 계율이다.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가교의 계명이며,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신의 의지의 반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안에서 새롭게 그들의 잃어버린 지위와 권세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그의 삶의 정신에서 나오는 교훈이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수행하신 사명을 감당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를 보면 알수 있다. 교회공동체나 신앙적인 모임안에 이 사랑이 존재하고 있을 때에 그곳은 그의 나라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분위기를 세울수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그들은 항상 율법을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의 핵심의 의미를 소홀히 하여, 그법에 매여 법으로 이웃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역활을 하였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이 율법의 눈으로 인류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근간이 되는 율법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종교와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고 생각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을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율법의 본질적인 진위를 모르고 피상적인 이해와 형식적인 법적용에 머물러 있다. 고로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의 성품과 속성의 근저는 그 사랑하심에 있다. 그는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람에게 다가 오신다.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구원의 근간을 이루며, 하나님의 자기의지의 표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있는 그의 성품이며, 그의 속성의 본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의 생애 그 자체는 하나님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셨으며,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한 지극한 삶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나 삶의 표현방식은 하나님 사랑에 도달하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며, 가장 고상한 사람의 성품에 도달한다. 사람이 갖고 있는 영이나 혼이나, 마음이나 정신이나 생각에 있어, 하나님사랑하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과 그의 선하신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생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알고,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인간구원이나 승리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나 생활이나, 삶의 흔적들이 오직 그 계명 즉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의지와 정신의 실현에 있으셨다.

주님은 강조하신다.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이 제일 근본이 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이세상에 태어났으며,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속에는 자신 스스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나 표본을 따르지 않고 자기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시도에 의해 그 하나님의 수준을 벗어나, 어리석은 사람의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며, 자기혼란안에 빠져 버렸다.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시고 원하시는 위치로 돌아가는 길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의지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생활이나 삶의 평생의 과정이나 흔적들은 그 계명의 실천과 그 실천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사명과 자기 수행을 진행할 때에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도 그의 모습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그의 돌보심과 주관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웃의 모습안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이메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사랑의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볼때에 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하나님의 대상이 되며, 이웃도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웃의 모습안에서 자신과 비슷하며 자신을 반영하는 속성이나 자신과 똑같은 인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형상을 본다. 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태도의 연장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고 애착하듯, 이웃을 향한 자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세계안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안에서 이웃은 나 자신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공동운명체의 부분이며, 함께 그의 형상을 받고 나눈 혈연이며, 글로발 가족의 한 일원 인 것이다. 고로 이웃사랑의 범위나 실천적인 영향력의 대상은 민족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확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사회를 향한 뜻과 의지의 실현이 율법을 통해 계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며, 인간사회안의 사람들사이의 상호 합리적인 관계와 질서있는 생활의 기준의 법으로 제시되며, 그 율법의 중심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의 정신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율법을 받은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사회를 향하여 계속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우신 법을 지키도록 하셨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사회에 알리시며,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를 받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며 인도하시는 큰 테두리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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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료하는 생명의 빛

말라기 4: 1-6

말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무관심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잘못된 성전예배와 성도의 의무에 대해해서 언급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는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서 노예생활을 한 이후에
그들의 죄는 주로 영적인 게으름이나 혹은 안일하게 편하게 믿는 편리주의입니다.
이런 불신안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하였습니다.
이 예언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계약관계에서 오는 축복에 대해
백성들이 하나님앞에서 계약 충실을 지킬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에 대해 말라기는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새롭게하며,
그들의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세우게하며,
계약백성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 절에 하나님의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정하시는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인생의 시간도 심판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인생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지금은 구원의 때요, 은혜받을 만한 때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하는 때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고 합니다.

2절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백성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름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경이러움과 두려움을 갖으며,
그리고 순종하는 자세를 통해 지속적인 믿음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치료와 회복이 일어나며, 생활에 활력을 얻습니다.

2절에 그들에게 의의 태양에 대해 언급합니다.
페르샤에서는 날개가 달린 태양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축복과 보호를 주는 신으로 생각합니다.
의의 태양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23:5,6/ 다윗의 후손가운데에 한 의로운 자를 일으킬 것이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러질 것이다.
시편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태양이시요 방패이시며 우리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고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의의 태양이 내안에 떠오르게 하려면
즉 자신의 마음이나 인생안에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높임을 받고
들림을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안에서 의의 태양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러면 예수님을 믿되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1. 선택의 기준에 있어서 /
마태 6: 24, "사람이 두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우선순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예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복음14: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3. 주님과의 관계성립에 있어서는 /
요한 1: 12, "영접하는 자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4. 주님과의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 15:4, 포도나무비유에서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5. 주님을 믿되 그분을 늘 바라보는 법칙으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 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합니다.
6. 자신의 신앙의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마가복음 8: 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7. 마지막으로 그분을 깊이 생각하는 묵상의 축복을 통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내안에서와 생활을 통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3:1 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유의 광선이란 말은 빛의 유익에 대한 것으로,
태양의 영향력으로 만물에 생동함이 오며, 활기참이 옵니다.
태양의 광선은 비쳐주는 곳마다, 살아 숨을 쉬며, 활동을 하며 생기가 있게 됩니다.

주님의 치유의 사역을 받은 사람의 상태는
본문의 송아지처럼우리안에 갇혀있던 송아지가 넓은 열린 들에 내놓아
막 뛰어다니듯이 축복이 옵니다. 그 송아지에게 자유와 만족의 기쁨속에 뛰어다닙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들판에 나다닐수 있다는 .자유의 행복입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즐겁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나가 마음껏 풀을 뜨고 다닐수 있는
미래에 대한 만족감과 거기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 5,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는 생명의 빛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 죽은 목숨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빛의 역활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빛은 어둠속에 있는 나를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하는 광선이며, 구원의 빛입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갈길을 알지 못하는 어둠에 처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빛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진리를 갖고 와서 나에게 인생의 가야할 길을 알려주셨으며,
모든 눌림이나 억압에서 인간을 자신을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아직도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 4,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 대해 소망의 빛으로 다가 오십니다.
절망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소경 바디매오은 거지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남에게 구걸하며, 구차하게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소경을 고쳐주어, 바디매오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9: 5, "내가 이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면서 소경이 된 사람에게 실로암못가에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1: 9-10,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사람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사야 57: 19, "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고칠 것이다"라고 합니다.
2절의 본문에 나오는 광선은 날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91:1, 4, 날개아래에 모으는 닭이 날개로 그 새끼를 모으듯이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이사야 30:26, "여호와께서 자기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날에 달이 해처럼 밝을 것이며, 햇빛은 7배나
더 밝아 7일 동안의 광량에 맞먹는 빛을 낼 것이다."

이사야 52: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질병에서부터 마음의 병을 고치며,
그리고 육체의 병도 고치십니다. 더더욱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합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며,
자신 자신이 건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회복이 되어,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합니다.

주님의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치료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성도가 주님의 치유를 받으려면
믿음의 용어에, 춧쯔파라는 말은 이디쉬어의 속어로서,
‘강심장, 철면피’ 라는 뜻이다.
“어떤 행동에 있어서 극단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이 흔들림이 없는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8: 43- 48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낫는 다는 믿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하여 부정하였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은밀히 만지기로 작정하고, 그 여자는 치유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질병은 크게 네가지 질병의 유형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질병들을 치유하십니다.
1)영의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영혼이 병이듭니다.
영의 치유는 회개를 통해 치유가 이루어 집니다.
죄에 대한 회개는 영혼의 치유를 가져옵니다.
주님은 여러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실때에 동시에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가 친구 4사람에 의해 들려왔을때에,
주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선포하셨습니다.

2)감정의 질병이 있습니다.
이 질병은 때로는 영적인 병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한 육체적인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적인 상처로 인하여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분노로 인하여 상한 감정과 정서적인 문제를 겪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원수를 용서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어떤 여인이 늘 몸에 병이 있는데,
병원에 가면 원인을 모르는데, 기독교 상담가에서 상담을 받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래전에 그여인이 이웃집여인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에 붙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것을 용서해주자. 그 병에서 고쳐 졌습니다.

누가복음7: 44-50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에게 발에 향유를 부으며, 머리로 씻엇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새롭게 하는 치유의 능력이 됩니다.
그녀의 상처받은 과거와 자아가 고쳐져 새로와 졌습니다.
주님을 통한 자신에 대한 치유은 영적인 건강과 생활의 회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앞에서 의를 회복케하는 능력을 갖었습니다.

의외로 신앙인들에게 우울증의 현상들이 있습니다.
생활에서 오는 염려, 불안이나 근심이 신앙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웬지 모르게 자신안에 병든것처럼 마음의 슬픔에 빠지는 일입니다.

고로, 영혼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7: 13 주님의 기쁨이 저희 안에 있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피하여 우물가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그녀는 놀라운 영혼의 기쁨을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3)육체적인 질병입니다.
흔히 말하는 몸의 병으로 질병의 원인이나 혹은 사고로 병이 발생합니다.
의사들은 육체적 질병의 50 %가 내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에 의해 생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4:24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자, 귀신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의 질병에 대해 주님에게 치유를 위해 간청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지금도 일어남을 믿습니다.

4)귀신들의 속박에서 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갇힌 영혼들을 구출하는사역을 해야 합니다.
귀신의 영향에서 오는 질병으로 극단적인 정신적인 병들이 해당됩니다.
이런 병에 대한 치유는 능력치유입니다.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세력을 물리칠 능력을 주셨습니다.
누가 복음9:1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들의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없애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 일서 3: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은 마뒤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영적으로 회복되고,
망가진 인생들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육체적 치유뿐아니라 또한 영적인 치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적인 자유와 행복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결론.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속에서 의의 태양으로 떠올라,
날마다 치료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여러분은 우리안에 갖혀있었던 송아지가 그 얽매임에서 풀어나 자유를 얻어 기뻐하는 것처럼 ,
날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치료와 마음의 치료
그리고 몸의 치료를 통해 자유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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