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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13
    인생찬가
    목동
  2. 2007/06/13
    크리스챤의 생활이란?
    목동
  3. 2007/06/11
    믿음의 기도와 응답
    목동
  4. 2007/06/05
    소명과 해방의 길
    목동
  5. 2007/06/05
    신앙인의 표지
    목동
  6. 2007/06/03
    자신의 결단과 절제된 생활
    목동
  7. 2007/05/29
    창조사역의 우선순위
    목동
  8. 2007/05/26
    말씀의 전달자와 청취자
    목동
  9. 2007/05/14
    말씀이 사람이 되어
    목동
  10. 2007/05/13
    나의 삶은 어떤 진행형의 삶인가?
    목동

인생찬가

갖난아기가 태어날때에, 손을 움켜 지면서 앙앙하고, 일성을 가한다.
이땅에 난 것을 기념하는 자기 표현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 시작한다.
내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느 가문에 태어나는지, 부자집인지, 가난한 자의 집인지,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자인지를 모르고
다만 태어난 가정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세상에서 태어나 사는 것이,
신의 혜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인할수 없다.
생명을 갖고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 고사리같은 손이 자라, 어른이 되어 무엇인가를 이루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든지 달라질수 있으니,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은 공평하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든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이 있다.
이시간에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으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자, 한계임을 알아야 하겠다.

밥을 먹고, 하루를 살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다.
각병원마다 중환자실에 가보며,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시간의 제한에 있음을 느끼며,
제한된 시간안에 무엇인가를 보람있는 일을 하겠노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의 길이를 늘여보겠다고 아둥바둥대는 이도 있으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한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쨋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감사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다.

인생이 항상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그리고 내게 넉넉한 것만이 있고,
부족함이나, 또한 살면서, 어려움이 없든지,
문제에 쌓이지 않든지 하거나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이 없다면,
인생은 게을러지고,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나, 자신을 낭비하고,
우리 육체가 썩을 몸둥아리만 생각하다,
안일하게 지내다, 끝내지 않을까?

나는 살아있는 연어고기의 헤엄치는 모습를 좋아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갖고,
자기에게 내리 달려오는 물살을 가르고, 계속움직이며,
힘을 써서 달음질하여, 상류로 가고자 하는 자기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얼마나 무수한 인생이 이지구상에 살고 있는가?
그 많은 입들을 누가 다 먹이며, 그 많은 생명들이 다함께 살고 있으며,
가끔 전쟁과, 불합리와, 악이 있지만,
누구나 주어진 환경안에서 자기나름대로 살고 있는 것,
이것은 인간을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닌가?

제한된 자원안에서 인생들이 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원을 가진 신의 돌봄을 받고 있지 않는가?
누가 이모든 만상을 계획하여, 설계하고, 이루어 놓았는가?
인간이었는가? 저절로 되었는가?
저 넓은 우주에 퍼져있는 행성들을 생명체들의 존재가
우리같은 인생들이 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다.

누가 이곳을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는가? 그는 신이 아니었던가?
신이 인간을 자연안에서 살게 하여,
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며, 비록 지금은 곳곳이 공해나,
인생들의 폐해로 지구의 환경이 훼손되어가지만,
그래도 이지구를 붙들고 있는 이가 있어,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 인생안에 소우주를 만들고,
우리안에 있는 내면세계에도, 그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한다.
신의 만든 세계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놓았는가?
그러나 신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아니다.
그가 있으므로 우리가 있게 되었다.
그가 붙들므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인도하므로 우리가 따르고저 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하는 길이 바른길이고, 인간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고백해야 만한다.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그의 손에 있다고, 그리고 그에게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우주여행을 했었던 우주인들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우연인가? 아니다.
신이 그 것을 아름답게 해놓았기에, 그렇다.
우주를 아름답게 이룬 신이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도 그의 만드는 솜씨를 아름답게 나타내고저 한다.
인생이 갖고 있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내면의 소우주에 대해
과연 내가 마음대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을 것인가?

인생들이 가끔, 하루에도 열두번씩 내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 친구를 만날것인가?
아니면 집에 앉아 휴식을 즐길 것인가?
마음대로 결정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행못하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나,

신은 인간에게 그 소우주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생존권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소우주에 대한 소유권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변함없는 마음의 편안함,
그 소우주의 질서 내지는 행복감은 저절로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언제부터 인가 두려움이 자리잡고, 불안함이 있으며,
미혹됨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어둠이 깃들지 않았는가?

신은 인간에게 삶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것과
인생이 지금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더 많은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이 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내일 자신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게도 살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시간의 제한으로 들어가는 죽음의 때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행한 결과에 의해 그렇게 된 것뿐이다.
이런 제한에서도 신은 인간에 살 만한 인생들의 미래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다.
늙어갈수록 그 생존권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이,
늙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생은 질고, 실패, 병고, 죽음, 절망, 파멸등에 매달려 살지 않고
살수 있기를 늘 희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신은 이런 모든 부정적인 인간경험까지도 유익한 것을 창출해 내고 있으니,
그는 과연 신이 아닌가?
아픔뒤에 회복이 있으며, 갈등이 지나 화해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고,
전쟁뒤에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죽음뒤에 평화로움과 인생의 완성감을 맛본다.

신은 지금 인간이 누리고 있는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인생처럼 바보인 인생은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볼수가 없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가시권을 가질수 없으니,
다만 신에 대한 신뢰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세계에 대한 신의 배려에 대해 조금 깨달음 바가 있다면,
다가올 신의 주는 혜택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부터 환영할 만 하질 않을까?
인생은 신이 제안한 살만한 가치의 세계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지금 거기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휠씬 뛰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은 내게 주어지는 삶은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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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의 생활이란?

빌립보서 1:-27-30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함께 있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마음 한뜻으로 기쁜 소식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28. 무슨 일에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구원의 표가 되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표가
       됩니다.
29. 그리스도를 위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0. 여러분도 내가 싸우는 것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전에 보았고 지금도 듣고 있는 싸움입니다.

크리스챤의 생활은 그들의 정체감을 통해 나타난다.
그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자신들의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 간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것은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크리스챤이어서 세상에 붙어서 사는 것인가?
세상에 살아 남기위해 사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사명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시대에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무엇이 그들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여하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실천하고,
헌금을 내며 봉사에 참여하여 사는 것인가?
단지 외형적인 종교활동에 참여하는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음과 영혼의 내면의 풍성하고 흡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내면의 풍요와 만족이 자신의 생활과 삶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솟아나는 진리에의 사랑의 헌신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수고가 나타나는 것을 행하며
세상에 보내어지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자신만의 유일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연출의 전형적인 상태는
그들의 내면이 세상에 그 어떤 이들보다
마음의 평안과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내면의 솟는 만족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일 것이다.
자신이 신앙인이라서 기쁜 가?
아니면? 다른무엇으로 인하여 기쁜가?

자동차를 산 사람은 그 차를 운전하는 처음시기에 탈때마다
차에 대한 유쾌한 감정으로 탈것이다.
새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그 집에서 지내는 수년동안을
만족해 하는 마음에 여유있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결혼을 한 새가정에는 신혼의 단꿈의 시절에는 웃음이 나오며, 깨가 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사람들이 인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하여
그것에 만족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들은 우리의 육체와 시간이 쇠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만 일시적인 현상이며 지나가는 형체에 불과 할 뿐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기쁨과 만족은 그런 외형적인 것들과는 달리,
죄와 그로 인한 모든 짐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가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속에서 솟아나는 영혼의 환희와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얻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마음의 자족에서 오는 지속적인 기쁨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그들이 누릴 미래와
영원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생의 기쁨과 영광의 만족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방향성(미래지향, 완전지향, 영원지향)을 향하는
신앙인의 만족과 기쁨은 그들의 생활속에서 자기표현을 통해 나타난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그런 건강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자기를 표현하게 될것이다.
세상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자신의 주변과 이웃에대한 관심,
그리고 형제들과의 연합과 함께 하는 활동을 통해
세상을 향한 봉사와 전도와 선교를 감당할 것이다.

좋은 일을 하려할 때에는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나 주의 주장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것이나 자신의 삶의 철학을 위해
지켜가는 자세에 대해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자기의 믿은 바를 통해 열매와 선한결과를기대할수 있다.

선인과 악인의 삶은 그들의 행동과 생활의 열매로 나타난다.
선한 일을 위해 힘쓰며 사는 사람은 그들의 평소에 갖고 있는
선한 생각과 태도를 통해 선한열매를 맺고,
악인들은 평소의 악을 좋아하는 성향과 죄에 물들은 상태에서
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행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각자에게 행한대로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갚으시는 분이다.
의를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영광과 상급을 주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형벌과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

사람들각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은혜안에서의부르심이다.
그의 은혜는 성도의 온전과 영광을위한 주님의 선물이며,
성도안에 있는 능력의 자산이다.
성도가 구원얻은 것은 하나님의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이며,
성도들이 받는모든 축복은 그의 베푸시는 축복의 은혜이며,
그의 은혜에는 사람을 고치고(회개), 새롭게하고(개종),
의롭게하며(칭의) 회복케하며(치유), 성장보존하며(성화와 견인),
영화롭게(영화)하는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에게나아가며,
은혜안에서 자신을완성해나간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성도들은 성령의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통해
사역을 하기도하며, 그들은 그 은혜를 통해 봉사와 헌신을 하며 자기를 표현한다.
그리고 자기완성을 이루어 간다.
이런 사역과 자기완성의 과정안에서
성도들은 자기의 신앙과 그들의 삶의 신조를 따라 살아간다.
고로 생활속에서 성도들의 신앙은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한 삶에 있어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어야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
작은 고난은 작은영광을 얻으며, 큰 고난은 큰 영광을 얻는다.
고난속에서 댓가를 많이 치른 사람들은
장차얻을 영광속에서 더 많은 유익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성도를 훈련하게하며,
성장하게 한다.
성도가 예수의 고난인 십자가를 짊어짐은
생활속에서 예수의 책임과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것이다.
성도가 예수의 십자가를 짐은 동시에 그의 부활의영광을 향한 발걸음이며,
예수의 부활은 성도들의 의의 근거이며,
죄와죽음의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영적으로 그와 더불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인으로서 영광으로 나가는 순례에의 길에 참여하며,
장차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과 권세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앙을 위한 전쟁은 진리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진리의 투쟁의 선상에서 복음을 위한 투쟁을 위해
거짓 복음이나 사이비신앙의 난무에 대해
분명한 신앙인의 순결의식과 진리사랑의 정신이 필요하다.

신앙인은 자신의 전생애를 걸쳐 몇가지 방향에서 영적싸움을 싸워 가는것인데,
그 싸움은 자신안에 있는 선한기질(영의 정신, 믿음의 성품)과
악한 성향(죄악을 범하는,육체의 욕심만을 따르는)과의싸움,
세상의 불의와 악에대한 싸움(악인과 교만한 죄인들의 대적),
영적인 대적의 존재들(유혹과 핍박를 통한 방해공작)과의싸움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영적전쟁에서의 싸움에는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과
그리고 사랑의수고 더 나아가 피흘리기 까지 싸우는 진취적인 불굴의 정신이 요구된다.
영적전쟁에서는 승리가 목표이며, 승리에 따른 좋은 결과를기대할수 있다.
성도들의 승리는 주님의 승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며,
승리를 챙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단지 그의 승리를 통해 가져온 결과로
이미 승리를 보장받은 성도들은 승리의 고지에서
자신의 인생안에서 얻을 전쟁 수획물(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죄와 절망과
죽음으로부터의 얻은 영광의 자유)을 얻기 위한 영적인 자기순례의 싸움이며,
주님의 의와 진리를 위한 수고이다.

지금 자신은 어떤 문제로 고민하며,
어떤 이슈로 자신의 영적전쟁에 관건이 되고 있는 가?
그것들 중에는 성품의 문제,유혹의 문제,물질과 생활의 염려,
영적인 훈련과 생활의 이슈등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인들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자기의 영적인 투쟁을 향한 수고가 없다면
그는 아직도 세상에 머물러 있는 어두움의 상태에 있는 자신이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회색지대에서 방황하는 영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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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도와 응답

요일 5:14-15
14.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구한 것을 받은 것도 알게 됩니다.

 

기도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하고 하는 것과 기도를 하지 않고 하는 것의 차이는 확연히 구별이 되며,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서도 다르고, 일을 추진하는 능률이나,
일이 이루어지는 역사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의 성장의 실험에서 두화분에 식물을 심고 가꿀 때에 기도를 하고 돌보는 것과
기도를 하지 않고 그저 돌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장의 차이와 열매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바램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이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자신이 살고 있다는 생활의 의미나 생활에서 겪는
자신앞에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잃고 방황한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 시스템에서 바라는 생각대로
그 이메지 (상)에 따라 삶을 이루어 간다.
어린 시절의 꿈을 가진대로 장년이 되어 자신을 그 꿈대로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

 

사람은 바라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바라고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이면서 하나님과 기도자의 쌍방간의 소통이나 교류에의해 연결된다. 고로 기도는 독백이기보다는 대화이다. 인격적인 대화이다.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인간이 그분을 다 이해하지 못하나,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분의 섭리를 이해하면 기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에게 이르는 소통의 과정을 겪어서 응답을 가져온다.

믿음이 기도를 통해 일을 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그의 일의 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믿음으로 기도함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그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
믿음은 그 세상의 창조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저절로 생겨나거나,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주가 만물을 그의 뜻안에서 그의 행하시는 방법으로
무에서 유를 있게 만드신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나, 혹은 세상을 움직이는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데는
그를 향한 태도에서 알게 된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간이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가는 분이시다.
고로 그를 이해하고 그를 알기 위해
그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려지신 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있어 신뢰의 관계가 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가지 고민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가 제때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신앙의 낙심의 원인이 되기도하며, 영적인 생활에 혼돈을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영혼의 기도의 맛을 잃게 하기도 하며,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적인 방황이나 슬럼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신앙인에게 자신의 믿음생활에 안정적인 확신과
지속적이고 건강한 영적인 진보를 갖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을 강화시켜준다.

 

기도의 응답에는 여러가지의 응답이 있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부터 기도에 대한 무응답으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며,
또한 자신이 원하는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대체하시는 것으로의 응답이 있으며,
더나아가 때와 시기를 필요로하는 응답이 있다.
그리고 정한기간에 응하시는 응답이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는 기도자의 믿음을 요구하기도 하며
믿음을 키우는 도구로 기도가 활용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기위해 지속적인 관계안에서
인내와 명분을 갖추게 하며 응답받은 성숙한 인격으로 기도자를 인도하신다.

 

기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기도응답에 대한 확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런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자신이 하는 기도에 대해 먼저 하나님에게 여쭈어야 하며,
자신의 필요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자의 필요의 정도에 따라 반응하시고,
기도자의 기도의 타당성에 응하신다.
그 말의 의미는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긴급한 것인가를 통해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의 반응을 기대하게 한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여,
열심있고 믿음있는 기도를 계속적으로 하게 하며,
그 기도의 습관은 나중에 자신의 삶에 좋은 열매의 결과도 가져온다.

 

기도응답에 대한 신앙인의 믿음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믿음의 근거가 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부부는 자녀생산에 대한 기대를 갖고서 기도를 드렸을 것이나,
그들의 자녀를 위한 기도는 신앙인생의 긴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84세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16년이 지난 100세가 되어 아브라함자신과
그의 정실 부인 사라자신의 몸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를 받았다.
그 때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만한 성숙한 신앙의 단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 약속을 받기 까지 도중에 그들의 시행착오
( 신실한 종을 후계자로 생각한 적이 있음)와 인간적인 방법
(후실를 통한 낳은 아들: 이스마엘), 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기도응답을 생각할 때에, 신앙인들은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기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뛰어나며,
그의 뜻이 사람의 뜻보다 높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고로 기도자는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향하여 나가는 기도를
그가 들으신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예언자의 사명을 했던 사람이며,
그 시기는 가장 악한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로서
그런 때에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항상 기도에 의존하는 사람이었으며,
기도로 사역을 하였던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이며
그는 그의 기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어
당시 우상을 섬기던 850인의 우상예언자들과의 기도대결에서 승리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으로 우상의 예언자들과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셨으며,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나타내셨으며,
그의 기도로 온나라에 우상의 열풍을 잠재우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그의 기도로 인하여
온천지에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의 현상을 일으켰으며,
또한 그의 기도로 하나님은 하늘에서 단비와 축복의 폭우를 쏟아 붓는 응답으로 역사하셨다.

 

기도응답과 믿음은 정비례한다. 강한 믿음의 소유자는
많은 기도의 응답의 경험을 가져오며, 기도의 응답은 건장한 믿음을 불러온다.
역사상 많은 기도의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기도를 역사하셨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가져온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며, 자신의 인생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손길을 맛보고 싶은 이들은 기도를 사랑하며 기도에 몰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고질적인 문제안에 있는 자신도 변화되고,
자신의 인생도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며,
하나님의 응답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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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과 해방의 길

출애굽기 3:1-10
1. 어느 날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자기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이다가 양떼를 광야의 서쪽으로
    몰고가서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에 이르렀다.
2. 그런데 여호와의 천사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났다.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 나무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그래서 모세는 “이상하다.  어째서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가?  한번가서 봐야겠다”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4.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다.  모세가 “내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5.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신을 벗어라.
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 말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그때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잔인한 감독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내려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출하고 그 땅에서 이끌어내어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족, 헷족,아모리족, 브리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기름지고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9.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이 나에게 들리고 또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도록 하겠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은 참 중요한 지식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답답한 인생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길은
내가 누구이며, 자신의 인생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다.
 
모세의 생애는 크게 3 단계의  삶을 살았다. 
40년의 세월을 세상의 애굽의 왕자로 교육을 받으며,
애굽의 문화와 사회의 모든 문물을 습득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동족의 아픔을 보고, 그 아픔에 동참하여,
그것이 화가 되어 애굽에서 좇겨나
동족의 아픔의설음을 안고 광야에서 야인의 생활을 40년을 살았다. 


그렇게 오랜세월을 살아가는 그가 어느 날에
갑자기 그의 인생을 완전전환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장인의 집에서는 처가살이로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동물들을 기르고,
이끌면서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삶을 터득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특별히 자신들의 삶의 주변에서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현현을 만난다.
필자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에게 그의 임재로 나타나
그 인생으로 하여금 신의존전앞에 있는 경험을 갖게 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갔고 있는데,
모세는 그 천사를 본 것이다. 
신의 현현을 담당하는 천사가 사람에게 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현존은 인간의 심령에 기이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신의 존전이며,
상대적이며 질그릇같은 인생이 절대자인 존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현장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신의 현존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이며,
그의 존재의 실존을 접하게 되는 인간에게는 더없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세는 기이한 경험을 하는 중에,
그는 타오르는 불꽃의 가시덤불을 바라보면서,
그의 눈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마음의 상에
강렬한 하나님의 기적과 더불어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에는 두가지를 통해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현상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통해서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일생에 몇번 인생은 하나님을 접하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적적인 일을 통해서 혹은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하면서,
이성으로 이해할수 없는 신의 손길을 맛본다. 
사실, 만물가운데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안에
신의 솜씨로 인한 그의 존재에 대한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 일어나는 이상한 경험이나 혹은 신비로운 일들은
영적세계의 실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물에 빠졌으나 구?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이 인생을 부르시는 음성은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이 하나님앞에 서야 할 자리에서 떨어졌기에,
계속하여 그는 인간들에게 그의 음성을 통해 부르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오는 인생들에게 그들을 한사람씩 부르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실체를 계시하신다. 
그분은 사람들 각자와 더불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때에 인생들은 그의 부르시는 음성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라는 매개체를 통해,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꺼지지 않고 계속하여 타오르는 불꽃가운데에
모세는 불멸의 하나님의 존재성과 그의 신비성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분으로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는 것을 이해한다
(알기위해 믿는 것인가? 아니면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인가?
고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인간에게 스스로를 보여주시는
신의 계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그는 절대자이지만,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분의 절대성을 통해, 인간의 일시성과 불멸치 못함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한다. 
원래 인간은 그의 창조물로 그분의 속성을  닮아,
거룩성을 좇아 창조함을 받았다. 
그의 계심과 함께 영원의 관계와
그의 성품의 내재를 통해 인간은 고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어디인가?
인생들이 머물러 사는 곳에 신은 어디나 존재하신다. 
그의 계신 거룩한 곳에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상은
다만 차원의 차이일뿐이지,
모든 만상이 그의 존재의 크심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으며,
편만히 그의 임재와 손길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신은 신발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는 삶의 족적을 드러낸다. 
그신은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이 겪은 일들 혹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인간의 시간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되어 가는 것이다.


자기가 밟은 땅이 구별된 땅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자유로이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갈망속이나,
그들의 영혼속에 있는 빈공(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속에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지는 곳: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인간의 영의 심연)이 있다.


사람들을 개개인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는 유아독존자로 세상과 떨어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속에 오셔서 일일이 개개인의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개개인의 역사의 시간이 깃들어 있는 일생을 통해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아무개의 하나님으로 불리워 지기를 좋아하신다. 
여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즉 믿음의 족장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생애속에 나타난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사람들은 불의한 자가 세상을 지배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줄때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 가고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세상에 이럴수가 있는가라고 탄식할 만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세상에 많은 권력자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강압적으로 핍박을 하여,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생명을 짓밟을 때에
하나님은 그 밑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신다. 
우리의 삶의 주변과 지구촌에서는 자주 인신매매, 종교인 탄압,
부당한 해고, 불평부당한 처사등 갖가지 불의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부르심은 인간의 억압과 노예의 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손길로 나타난다. 
구원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고통받는 곳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며 살길을 열어주신다. 
지금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지쳐있을 때에
주님은 각자 인생에게 오셔서
그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고통받는 각 사람을 힘있게 세우신다.


번민과 고통을 통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음에 대해
하늘에 계신 자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으시고 그들의 상처나 고통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불공정과 부당함이 세상에 만연함은
인간의 죄로 인한 불의와 악행으로 인하여 나타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말할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하여 살 희망을 무너뜨리는 일을 벌인다. 
지금도 지구상에 곳곳에 인신매매, 불법적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회안에서 권한을 가진자와 부요한자,
그리고 그 사회를 인도하는 리더들은
자신들이 사는 사회안에 있는 연약한 인생들을 도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책임은 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더 불쌍한 처치로 사람들을 내몰기도 한다.
그때에 사람들은 신에게 호소하며, 항의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 가 하며 자포자기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불의와 부당함을 다 보시고
그들의 불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신다.  

때로는 이지상에 다 댓가를 치루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문제가 이세대에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안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하신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고생하며 고난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그 문제를 살피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하신다. 

하나님은 이집트땅에서 나그네로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해방과 구원을 주기 위하여 해방자 모세를 보내신다. 
그에게 이스라엘민족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기로 하시며,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선민으로 세우는 은총을 베푸신다.

 

특히 죄의 노예로 고통받는 인생들을
주님은 안타까워 하시며 그들을 구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무지와 교만과 불의함으로 자신들이
죄의 속박아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살며
알수 없는 번민과 길이 없는 인생길에서 방황하며,
불안과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연약함(질병)으로 신음하며 살아간다.


모든 인생들에게 죄는 폭군과 같이 압박을 하여,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지 못하며,
그죄의 그림자에 영향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의 모든 곳에서 암세포와 같이 어둠의 세력안에서 신음하며 살아간다. 
그런 상태안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은 그 죄의 사슬에 매여 살면서
그 상태에서 신음하는 자신의 영혼의 소리도 외면한채 한탄과 절망의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모든 인생들에게 그 죄와
그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과 구원과 소망을 외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방자를 보내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출하여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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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표지

히10: 35-39
35. 그러므로 여러분은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이것으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6.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머지않아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38.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다가 뒤로 물러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고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란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잡고,
그 원칙안에서 바르게, 용기있게,인내하며 살아갈 것이 아닌가?
믿는 사람이란 바로 소신있는 신앙인,
용기있는 신앙인, 확신하는 바를 좇아가는 신앙인일 것이다.

신앙인들의 간판은 무엇인가?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 혹은 자동차뒤에 붙이는 십자가의 스티카가 붙은 차의 주인공정도인가?
아무아무개 교회의 교인, 성경을 가지고 갖고 다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는 가?
아니면 점심시간에 많은 사람이 모인자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이것이 신자들의 표지인가?
아니면 왕성한 종교활동을 하며,
외형적인 종교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므로
자신의 정체감이 거룩한 무리가운데에 머물러 있다는 인식을 통해 얻는 것인가?

그렇지만 신앙인 즉 믿는 이들은 그들의 신앙의 고백과 표현에 있어서,
자신들이 가져야 할 덕목의 표지는 진리에 대한 용기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끝까지 잡으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하는 것을 굳게 잡고 사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앙인의 용기는 모든 것을 얻기위한 모험이며, 자기확신에서 가질수 있는 중요한 덕목이다.
사람이 확신하는 바에 따라 소신있게 처신한다.
그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두려움에 대한 반대로, 두려움을 이길수 있는 자신감이며,
마음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용기가 있어야 모험을 무릎쓰고 일들을 감당하고
반대를 극복하고 자신의 확신하는 바를 추진한다.

이 용기가 신앙에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용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시하며 연출한다
특히 신앙과 그에 따르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핍박하는 자들앞에서
자신의 믿는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은 용기를 통해 가능하다.
이처럼 용기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용기가 있을 때에,
의롭고 바른 일을 반대를 무릎쓰고 추진할수 잇다.

일을 시작하거나, 혹은 일의 장애를 넘어가고 극복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반대에 부딪쳤을 때에, 그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확신하는 바를 관철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힘들때에 중단하거나 혹은 포기하지 않고
일을 끝까지 추진하는 데에는 강인한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는 불굴의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신앙인의 성품에 있어서 중요한 자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인생들 누구에게나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이다.
세상과 인생이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함부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인생의 나그네의 삶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우리의 곁은 스쳐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은
결코 우리손에 잡고 그것을 늘릴수 도 없으며 붙잡을수 도 없다.
그리고 돌이킬수도 없는 세월들이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은 종착역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그 목적지가 하나님이 정해놓은 시간이며,
그가 다시오시는 것은 모든 인생들은
결국에는 하나님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인생들은 두가지 정한 날에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구원의 자리든지 아니면 심판의 자리든지
자신이 결정한 대로 자기자리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난당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날들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어리석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현재를 믿음으로 축복의 날,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들을 대망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키지 못하면
뒤로 넘어져 뒷걸음치는 패배자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자신을 방치하여 멸망에 이른다.
인내는 고난가운데에 얻는 성도의 미덕으로 인내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을 갖게 된다.
신의 성품은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자신안에 있는 신의 씨앗을 품어,
그것을 가꾸고 자라게 하여 주님을 닮아가
그의 영광된 위치와 자리에 이르게 한다.

자신은 누구인가 멸망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구원의 자녀인가를 아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유익이 된다.
신자의 표지는 그들의 진취적인 신앙의 용기와 그들의 성실과
끈기에서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지속적인 확신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인의 용기는 진리를 방어하려는 노력에서 반대세력에 대한 세력에 대해
두려울 때에 필요하며,
확신은 자신속에 일어나는 의심이나 자신의 영혼의 방황 할 때에 필요하며,
인내는 끝까지 믿는 바를 통한 자기실현에 의해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하는 성도들의 자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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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단과 절제된 생활

다니엘 1:8-20

8.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궁중대신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9.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궁중 대신의 환심과 동정을 사게 하셨다.
10. 그러나 궁중 대신은 왕을 두려워 하여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왕이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하셨는데 만일 너희가 핼쑥하여 너희 얼굴이
     다른 소년들보다 못하게 되면 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11. 그래서 다니엘은 궁중 대신이 자기와 자기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였다.
12. “우리를 10일 동안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채소와 물만 주어 먹게하고
13. 그 후에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과 비교하여 우리의 얼굴 모습을 보고 우리를
     처분하십시오.”
14. 그는 이 제의를 승낙하고 그들을 10일동안 시험하였다.
15. 그런데 10일 후에 그들은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혈색이 좋고
      건강하게 보였다.
16.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왕이 지정한 포도주와 음식을 주지 않고 그들이 채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7. 하나님은 이 네 소년들에게 학문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통달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으며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꿈과 환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18. 왕이 정한 3년 동안의 수련과정이 끝나자 궁중 대신은 그들을 느부갓네살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19. 왕이 그들과 대면하여 이야기해보니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다른 소년들보다 우수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왕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는데
20. 왕은 그들에게 무슨 문제를 물어도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그 나라의 어떤
     마술사나 점성가보다 열배나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특별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구별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이다.
뜻을 정하고 사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혹은 뚜렷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신이 정한 원칙을 따라 사는 길은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을 따르면 오히려 나중에는 그길이 쉬워지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따라 성취하는 기쁨과 자신이 성장하는 열매도 맺게 될 것이다.

뜻을 정하고 살아간 이들이 세계역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다니엘은 어려운 상황하에서 오히려 자신의 원칙을 세워 더 빛나는 인생을 살았다.
바벨론의 이방문화가운데에서 유대적인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지혜와 은총을 더 하셨다.

다니엘은 바벨론(지금의 이락)에 포로로 잡혀가 신세이지만,
그가운데에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살아간다.
어느 환경에서나, 사람은 자신의 태도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
주변환경보다 나은 자신의 소견이나 의지의 영향으로 소신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독특한 인간승리의 본이 된다.
다니엘은 자신을 이방, 우상의 관습으로 인한 방탕과 나태를 범하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 결심은 어떤가
사람의 결의는 사람의 정신력이나 의지력의 정도를 드러낸다.
사람의 됨됨이나 혹은 사람의 성취의 정도는
사람들 자신의 결심이나 결연한 의지의 정도에 정비례한다고 할수 있다.

뜻을 정하고 사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배려가운데에
이방땅인 바벨론에서 외롭지 않게 살게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만들기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의 삶은 자질변화나, 자기개선에 충실하다보면,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환경이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향기를 발하는 꽃에 나비나 벌이 달려들듯,
자신이 아름다운 성품이나, 혹은 뚜렷한 의식있는 생활을 하다보면,
자기주변인들은 자신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뜻을 정하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도울 주변인들을 붙여주신다.

다니엘은 바벨론 궁중에서 궁중대신의 배려를 받게 된다.
그의 관심어린 돌봄을 받은 다니엘은 자신의 뜻을 펴는 데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일을 추진할때에. 자기와 자기의 뜻을 알아주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통해 수월히 진행할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주변사람들의 관심과 혹은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충실히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아본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소신과 성실로 임하게 될때에
그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게 되며,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자신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개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좋은 취지에 대해 호응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돕는 일에는 반드시 주변인들의 희생이나 혹은 자기봉사가 있다.
더 나은 제안을 따르거나 혹은 보다 좋은 처방을 따라 가려면
그 제안에 대한 자신의 옳은 판단에서 오는 확신과
또한 그것을 추진하려는 신속한 응답과
그리고 그것을 순서있게 진행하는 현명한 처신이 필요할 것이다.

다니엘의 제안은 모험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데 모험이나 혹은 위기가 있으며,
혹시 실패할 지도 모를 경우도 예상이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성공할수 있다고 믿고 확신하는
일을 추진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이 실행할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제안이 관철될수 있도록 주도면밀하게 일이 되도록 추진한다.
새로운 일을 하려 할때에 주변인들을 설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면,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분명한 의지와 성공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그일을 추진할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하려할때에 그일이 성공할 는지를 생각해보며,
그 일이 성공하는 가를 테스트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채식위주의 음식섭취를 추진할때에 거기에 대한 분명한 소신이 있었다.
그들의 실험결과는 성공적이어서 그들과
왕의 음식인 기름진 음식을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모습과 건전한 외모를 유지하게 되었다.

자신이 정한 것을 원칙대로 밀고 나가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정한 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 확신은 자기결단을 뒷받침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게 한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타인과의 비교의식에서 오는 경쟁하는 경기에 연연하기 쉽다.
비교의식은 사람속에 있는 창조성과 개별성을 무시하게 되며
자기 자신의 유일성을 등한히하여 자기의 개성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지나친 경쟁의식과 그에 따르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자기의 창의에 의한 게획에 대해 제안한 것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 관한한 성공하기가 쉽다.
세상의 방법과 신앙의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다니엘의 실험은 자기확신가운데에 그와 그의 또래 소년들은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채식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꾸었다.

세상적인 방법은 겉으로는 유리한 것같고,
모든 조건이 좋아도 신앙적인 방법으로는 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언제나 안전하며 성공할수 있는 확률이 더 많아진다.
다니엘과 세소년은 채식으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혈색이 다른 소년들보다 더 건강하며
지헤로운 몸관리와 생활의 습성을 세워 나갔다.

음식의 차이는 몸에 유익을 주는 가를 통해
그 음식이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를 판단하게 된다.
입에만 맛을 주고 몸에는 해로운 음식이 많다.
아이스크림, 캔디같은 단음식, 육류같은 기름진 음식등 입에는 맛을 주지만
몸안에 들어가면 피를 탁하게 하며 몸의 기능들을 약화시키는 역활들을 한다.
그런데 식물성종류의 야채는 몸안에 있는 독소를 제거하고,
몸을 신선하게 하여 몸을 건강하게 하는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여기서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을 옹호하기보다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조건들이 결코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안좋은 조건이 자신을 더 강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 있다.
이것은 후천적으로 좋은 교육과 배우는 노력으로 얻을수 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을 배우고, 배운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는데는
인간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하나님을 통해서 오게 된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고 높이는 공경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지혜가 싹이 트며, 사람에게 총명이 다가온다.
이 네소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음식으로 자신들의 마음과 몸을 지켰다.
하나님앞에서 구별된 생활을 살고자
뜻을 정하고 살아가면,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절제의 덕은 인간이 가지는 덕목중에 가장 품위있는 덕목중에 하나이다.
사람이 잘못되기 쉬운 것은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한다.
물질적인 부요도 지나치면, 낭비와 사치의 죄를 범하고,
먹는 식물에 대한 지나친 과욕은 몸에 이상을 가져와 병을 얻게 된다.
지나친 명예욕이나 인간적인 성취에 대한지나친 자화자찬은
하나님앞에서 교만한 죄를 범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순천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혜는
자기관리에 대한 지혜일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지 자기관리에 실패하면 패배 망신당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지혜중에 때를 아는 지혜와
자신을 바로 아는 지혜가 가장 중요한 지혜들일 것이다.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전도서에서 사람에게는 각자가 행해야 할 시기와 때가 있다고 했으며,
젊은이나 노인이나 할 것없이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속에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지혜라고 하였다.
지금이 공부할 때인지 아니면 돈을 벌어야 할 때인지
인생이라는 것이 제한된 시간안에 살기 때문에
때에 맞는 일을 하는 지혜는 필요한 지혜이다.
초상집에 가서 결혼식에 가는 하객처럼 가서는 안될 것이며,
축하하는 자리에서 슬픔을 이야기해도 실례가 될 것이다.

자신을 바로 아는 길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지식에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와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인생의 날들을 알때에 자신을 알고 자기처신을 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네소년들은 자기관리에 충실하였으며,
자기개발에도 노력을 정진하여 뛰어난 재인들이 되었다.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은 왕앞에 서게 되듯
이소년들은 왕을 보필하는 궁중의 중요한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드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다.
교육의 기간이 길수록 사람은 충실하게 자신에게 실력을 쌓게 된다.
사람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의 길이는
된 사람을 형성하는 교육적인 효과와 결과에 정비례한다.
다니엘과 세소년에게3년이라는 세월은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의 문물을 익히며,
자신들이 이민자로서 혹은 이방인으로
그 사회에서 자기 역활을 할수 있는 기술과 자질을 닦는 시기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의 세월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교훈과 삶을 배우며, 그분 곁에서 제자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일정기간을 훈련을 받는 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남자들에게는 군대에서의 3년여간의 군복무하는 세월도 자신을 키우는 좋은 시간들이며,
그 기간가운데에서 자신이 여러 사람들이 사는 단체생활에서
자신의 적응력과 고된 군무생활에서 단련된 자신을 갖추게 되어
이 사회를 리더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들에게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갖는 시기라든지
혹은 자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기간을 통해서
훌륭한 어머니로서 성장하여 이사회에 건강한 역활을 하는 주요인이 되는 것이다.

바벨론의 왕은 그 네소년들을 대면하여 테스트하니
그들은 모든 일에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쌓기 위해 부단한 자기노력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르는 경건한 생활에 힘써,
모든 생활면에서 자질면에서 뛰어난 자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왕이 내준 문제들을 그 소년들은 누구보다도 명철과 지혜로 풀어가니
타인과의 비교에서 월등한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여러가지 일들중에서 일을 감당하는 실력의 차이는
그 일을 대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소년들은 매사에 자기관리를 잘하여왔으며,
일을 할때에 충실한 자세로 임하니
그위에 자신들의 출중한 실력이 나오게 되어 왕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사람이 가꾸고 닦을 때에 더 빛이 나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나 총명은 배우고 닦는 실력에 의해 더 발휘된다.
천재라 할지라도 자기노력이나 자기발전에 대한 노력이나 뒷받침이 없으면
나중에 평범한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후천적인 노력이나 돌봄으로 인하여 좋은 인재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타고난 지도자보다는 만들어 지는 지도자가 많으며,
자기 성품으로 타고난 지혜인보다는
후천적으로 가꾸며 노력하는 성실인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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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사역의 우선순위

창세기 1:2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만물 가운데에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이 혼돈된 상태로 있으며,
그 위에 흑암이 혼돈된 상태의 존재로 우주안에 깃들이고 혹은
우주는 깊은 무질서의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므로 시작된다.
우주는 그의 창조의 대상이며,
수면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를 의미하며,
모든 만상에 그의 신이 운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행하심이다.
성령의 창조사역은 혼돈된 우주에 질서를 세우는 일을 먼저 하신다.
성령은 창조사역시에 그는 만물의 공허와 혼돈의 상태를 새롭게 하기위해,
그혼돈된 상태의 우주에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로 운행하시며 사역을 하신다.

생명의 우선순위
만물의 모든 생물들속에 성령의 창조사역으로 인하여 그안에 생명이 주어졌다.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이 있다. 성령의 창조의 사역을 운행하시므로
그는 만상에 생명의 창조를 시작하셨다.
그의 창조사역은 창조의 명령를 따라, 질서를 세우며,
우주의 혼돈을 질서로 바꾸며. 그위에 생명의 창조를 하신다.
그의 창조사역은 생명을 지음으로 시작한다.
엿새동안을 창조하신 모든 생물을 창조하신 후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신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성령의 창조생명의 역사로 살아있는 생령(즉 하나님의 생명과 교통할수 있는 영)이 되었다.

오늘날 성령의 사역은 항상 생명우선순위의 원칙을 따라 사람들속에 역사하신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그 생명을 상하고 병들었으면,
고치고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사역을 하신다.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살린 생명의 영이
죽은 인간의 영혼속에 들어와 그 생명들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

고로 사람이 사는데 모든 일을 행하기에 앞서서 인생의 지혜를 얻는 비결은
사람에게 가장 중시할 것은 생명경외를 깨닫는 일이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부나 권력보다 중요하며,
자신의 몸은 자신의 의복이나 명예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수명(신이 정해준 인생의 시간)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건강이나 취미에 대한 관심보다 중요하다.

영혼의 우선순위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의 영에 들어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를 통해 교제가 이루어지는 일을 하신다.
죽은 영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도 없고 교제할수도 없다.
그의 영이 인간에게 들어와 인간의 영을 살려
그의 생명의 연결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영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게 되면
인간의 생명은 그의 영혼이 육체안에 머물러 있기에, 육체의 생명을 유지한다.
고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먼저 돌봄을 받아야,
사람이 그 영혼이 잘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생명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부자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비교를 말씀하신다.
부자가 자신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많은 부를 쌓아놓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려고 하였지만,
어느 날 부자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사자가 그 영혼을 취하여 가므로,
그에게 주어진 육체의 생명의 기간은 끝이 났다.
그래서 그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에 그의 육체의 생명도 멈추게 되었다.

사람의 영혼이 몸안에 있는 동안에만 사람에게 인생의 삶이 주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일을 등한히 하고, 자신의 인생을 유지할수 없다.
육체의 몸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이끌어 오는 대로 살겠거니 생각하면서 살았으나,
어느 날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유지할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고로 사람에게 영혼의 존재는 곧 자신의 생명과 연결된 근본으로
육체의 필요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필요는 더욱 자신에게 근본적인 문제로 채워야 할 문제이다.
육체의 필요는 몸의 유지를 위한 먹고 배고픔에 대한 음식의 문제이지만,
영혼의 배고픔은 자신의 생명의 유지를 위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양식의 채움이다.
몸은 단지 영혼을 담는 그릇이나 몸을 유지하고 활동하게 하는 영혼은
항상 몸을 조절하고, 인간의 모든 사고 활동에 영향을 주는 생명의 근본이다.

신앙의 우선순위
성령은 믿음의 영이다. 인간속에 들어와 믿음을 심으신다.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신뢰가 금이 간 이후에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자신의 인생을 자기주장대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과 섭리를 이해하고 신뢰하도록 인도한다.
고로 성령은 인간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 신뢰심을 심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믿음이라는 그 바탕위에 선 사람들속에
또한 신의 성품을 만들어가는 인간 재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믿음은 모든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섭리에 대한 모든 사역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신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며,
세상에 사역하시는 신의 흔적을 찾아 가게 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에게 믿음의 능력을 심어,
사람들 속에 있는 그 믿음의 눈으로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이해의 길과
하나님경험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이유이다.

고로 인간에게 있어 모든 인생의 경험이나 물질로 된 것들은
결국 사라질 제한된 시간안에 있는 인간의 소유이지만,
믿음을 좇아 행하는 인간의 행동이나 사역은 영원히 남아
장차 하나님앞에서 갖고가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불멸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과 유일하게 계산할수 있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크레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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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달자와 청취자

신명기18: 14-22
14. 여러분이 쫓아낼 민족들은 점치고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15.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16. 이것은 여러분이 시내산에 모이던 날에 여러분이 직접 여호와께
      구한 것입니다.
17.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
18. 내가 그들 가운데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 백성들에게 전한 말을
      그에게 하겠다. 그러면 내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가 백성들에게
      전할 것이다.
19. 그가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내가 직접 벌하겠다.
20. 그러나 내 이름을 빌려 내가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제멋대로 말하는 예언자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21.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이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속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22. 만일 어떤 예언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을 해도 그것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그가 말한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가 제멋대로 지어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으 그런 자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명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려고
말씀의 일꾼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그런 의도안에서, 어느 때에는 예언자로 혹은 제사장으로
혹은 한 부족의 족장으로 혹은 사사로 혹은 정치적인 왕으로
그의 메시지를 전할 사람들이 영적인 리더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며, 그것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 교훈이나 혹은 지도를 받으려 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상황이나 사건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혹은 결정하는 것이나
혹은 행동하는 것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식속에 있는 신의 음성즉,
양심의 소리 혹은 영혼속에서 나오는 신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있게 한 창조주인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고치려고 관상자를 찾는다.
점치는 일,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는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심보와 비슷하다.
사주팔자보는 일, 관상을 보는 일등은 점괘로 사람의 운명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인간의 미래를 아는 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인생은 자신의 앞 길을 알수 없는 채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래를 알아서 미래를 변화시킬 만큼 능력이 없는고로
알아도 그것에 대해 유익을 가질수 없다.
다만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의 자세이다.

인생에게 주는 종말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며,
자신의 인생도 마지막을 향하여 한걸음 내딛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주인의식이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각시대에나 혹은 사회에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때에나
주변의 환경안에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의 전하는 내용을 들으라.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향한 그분의 원하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그의 보낸 설교자 혹은 전도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
(아무리 작은 자인 자신의 집에 있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들로 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영원한 세계의 모습을 현재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의 부족이 아니고, 하나님께 향한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전해도,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는 상식의 관점안에서
현실세계를 초월하는 영원세계에 대한 인식을 쉽게 바꿀수 없다.
평소에 자기 주변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여러 대변자(설교자, 전도자, 영적인 리더)들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혹은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들의 확신하는 바를 전한다.
그들은 그들의 메시지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
사람들에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는
그 세계(영적인 세계,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영적세계의 눈으로 보면,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사역을 이해할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모든 백성으로부터 지도자라는 존경을 받고,
그의 리더쉽은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나갈 길을 예언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리더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백성의 대표로서, 중보의 역활을 한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책임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중개하는 역활을 잘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인도는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며,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며 나가야 하는데,
그 중간에 리더의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이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죽을까 봐 두려워서 다시는 여러분의 음성을 듣지 않게하고
그 무서운 불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대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죄성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을 찾으려는 추구는 결국 인간의 자기한계의 부딪치며,
그런 시도를 통해 성공한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대개의 경우에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계시하며, 자신을 알린다.

인간의 자신의 처지를 옳게 보는 것은 자신들의 한계를 바로 깨닫는 것이며,
자신들의 한계에서 자신들이 할수 있는 것을 해보는 일이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워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하였다.
때로는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을 지도자가 들을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그리고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제안을 하였기 때문에,
지도자가 그것을 분별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따르는 사람들은
지도자를 인정하고 더욱 지도자의 지도에 따를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 많은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그 가운데에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도자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경우도 있으며,
사람들이 세우는 지도자도 있으며,
하늘에서 택하여 세우는 지도자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두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위해 택함을 입은 사람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의 뜻이 손상되지 않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모세가 여기서 예언한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이 지상에 오셔서 사역하실때에
모든 일을 아버지의 뜻을 좇아 하셨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는 아버지의 의도를 이루려는 충정으로 사역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셨으며,
하나님아버지의 의도를 이루려는 것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사역하셨다.
주의 사역자들도 자신을 회중들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움을 입은자로서
주님의 의도를 충실하게 전달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 즉 그의 말씀을 대변하는 종들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는데도
그들은 그의 말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은
사실 듣는 청중들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듣고 믿음으로 마음에 심는 사람에게는 자신들에게 구원과 축복으로 주어진다.
그 유익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인생의 바른 지침이나 방향설정이 되며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듣고도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선포하는 내용이 자신의 삶에 있어 심판으로 작용할수 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선포된 대로
그냥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의 영향력이 말씀의 삶의 지도나 인생의 안내나
혹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나 판단이나
혹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취의 효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어떻게 하든지,
그의 뜻을 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예언자가 자기 멋대로 말씀을 전달하게 될때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며, 그런 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들도 같은 이치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안에서 선생된 자,
혹은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판단과 평가는
더욱 엄중하며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일은 설교자를 통해 선파된 내용이
옳은 지를 살피고, 또한 그내용이 신빙성있게 실현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과 그의 행위의 열매로 판단되며,
그 말씀이 실효성있게 전파되기 위해
설교자자신이 메신저로 그의 메시지의 신실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회중은 설교자의 설교의 진위를 판단하고,
그들의 메시지의 신실성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설교를 듣는 자신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한 것이나,
혹은 인생의 삶에 여러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교를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으며,
사실 스스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을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설파하는 내용은 인정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듣는 청중들의 영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 선파된 메시지안에서 혼동이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내용에 의해 오도되는 진리의 미로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들여지는 하나님의 예언은 전적으로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말씀이며,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축복이나저주 혹은 구원이나 심판) 진리의 잣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의도는 전적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고
혹은 도달할수 있는 인간의 유익과
하나님앞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영광과 인간으로서의 명예회복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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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어

요한 1:14
14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말씀이 구체적으로 인간들의 내면이나 삶에 영향을 주며,
그 말씀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변화와 개선과 완성을 이루어간다.

만물의 중심인 그 말씀은 우주창조의 원리이며 또한 우주보존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조성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의 영역안에 모든 만물이 놓여 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영역에로 그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인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말씀의 존재의 선재성이나,
우주의 중심성이나, 만물의 목적성등에 대해 연구를 하므로,
그 말씀의 근본적인 위치와 영향력등 일것이다.

말씀을 알고 말씀을 받아들인 인생들은
자신속에 있는 소우주에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창조의 순서의 원리는 먼저 혼돈과 무질서가 있는 가운데에서,
채움과 질서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원리가 이루어 진다.

말씀이신 주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라고 하셨다.
주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안에 자신의 변화나,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집을 지어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은 철학이며, 논리이며, 신앙이며,
처세관을 이루는 인간의 근본을 새롭게 창조하는 역활을 한다.

말씀의 내면화를 통해 말씀이 사람속에 오셔서,
그의 인격성이 자신의 내면에 영향력을 주어,
말씀안에서 사람 자신의 새로운 성품이 조성이 되고,
옛사람의 타락한 성품이 변화되어,
새로운 성품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생각이나,
성향등에 영향을 주는 말씀의 영향력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자아와 생각과 성향등이 마음이라는 곳에 어우러져
인간의 소우주의 세계를 이루며,
그 내면의 조성에 따라 외부의 환경과 사람이 표현하는 행동이나 습관에 영향을 주며,
자신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생활을 이루어 간다.

고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우주인 내면의 세계를
생명이신 말씀으로 마음의 집을 잘 조성해 가야 할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다.
그 마음안에는 사람의 심령이 임재하는 곳으로
거기에서 말씀이 인간의 심비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인
영생의 생명의 창조와 사람의 성품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그의 말씀은 그의 인격의 영향력이며,
그의 존재의 임재의 표시이다.
그의 말씀이 어느 사람에게 심겨졌다는 것은
그 말씀의 영역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자신이 말씀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사람속에 이루어지는 말씀의 구체화는
말씀이신 그분의 임하심이 구체적인 육체를 입고,
우리가운데에 머물러 있듯이 자신의 내면이나 인생의 중심에
구체적인 자신의 집(장막)을 그 안에 짓듯이 머물러 계신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생활에 주님은 이스라엘인들의
천막들 중심에 있는 장막(하나님의 성막)에 거하시며,
그 백성들과의 만남을 가지셨다.
그 만남의 장막에서 그들을 대면하여,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광야생활의 진행을 인도하셨다.
고로 말씀이 인생의 갈길에 구체적인 교훈과 삶의 이치와 원리를 담고 있다.

말씀이신 예수는 인생의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셨다.
그는 하늘의 말씀으로 그가 이땅을 밟고 살므로써,
구체적인 인생의 모델의 자취를 남기셨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가 걸어가신 삶의 흔적들을 찾으며,
그안에서 진정한 인생의 교훈과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여,
그가 가신 그길의 뚜렷한 삶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말씀을 모신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 말씀의 능력화가 이루어진다.
말씀은 그 자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갖고 있다.
세상은 그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므로,
말씀의 창조력은 혼돈과 무질서한 우주에 창조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창조력을 가진 말씀안에는 사람들속에서
다시 죽은 심령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 있다.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비쳐질때마다
생명력이 나타나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속에 있는 소우주의 모든 요소들을 질서있게 하며,
어둡고 죽어가는 상태들을 소생케하는 능력이 있어, 그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으며,
그영광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영광이며,
우주안에 있는 모든 인생들을 포함한 보이는 존재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로부터 받는 영광이 있다.
그의 영광은 사람들에게 비쳐주는 영광이며,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생명의 창조의 영광이 있다.

그는(말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가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이해하는 통로로 나타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말씀안에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모든 예언의 성취를 바라본다.

그 말씀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으로 존재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푸시는 모든 좋은 요소들과 혜택을 담고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각종의 지혜와 축복의 은총을 포함하고 있다.
그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그것을 깨달으며, 확인하며, 그것을 추구하여,
자신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에게 은혜의 전달이 이루어진다.
말씀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충분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의 요소들을 갖고 있어
사람에게 부여하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급으로 은혜가 베풀어 진다.

그 말씀은 만물이 통하는 우주의 진리가 있으며,
진리안에는 인생의 마땅한 도리가 있으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이끌어 주는 확실한 생명의 길이있다.

고로 진리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이르며,
하나님안에 머물게 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진리안에서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장소에 자신의 도달해야 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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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진행형의 삶인가?

로마서 1:16-17
16. 나는 이기쁜소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한 놀라운 뉴스라고 할수 있다.
바울은 이 기쁜소식에 대해 즉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실한 사실과
자기 경험에서 온 진리의 증거가 있다.

기쁨의 소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뉴스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병을 치료할수 있는 약이나 처방에 대한 뉴스는
그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소식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지식의 힘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준 그 무엇이 그이의 삶을 받쳐주는 것이 아닌가?
각자는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준 그 무엇을 가지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혹은, 사상이나, 영향력등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람에게는 자신의 학문일수 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재능이나,
혹은 배운 기술일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자질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며,
자신이 세운 인생관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자질은 자기가 배우고 터득한 좋은 경험들이나
개발된 재능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실력인 것이다.
자신의 자질은 무엇을 할수 있는 자격이 될만한 능력이나
혹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자기의 기본적인 실력이다.
이 능력이나 실력은 사람의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할수 있다.
사람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타고난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자기훈련의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인가?
두가지를 다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 중요하다.
자기가 세운 뚜렷한 자기만의 삶의 철학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버팀목 역활을 해준다.
후회없는 인생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일 것이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을 좇아,
자신이 해야 할일을 하면서 살면 그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 있어서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자신이 하는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건강일수 있으며,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실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잘하는 한가지 기술이 있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바를 추구하며,
그 추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인간의 심적상태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것들 중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있다.
죄책감은 구체적인 죄나, 죄짓는 자신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이 가지는 수치심은 인간의 마음의 전체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그 수치심에는 건강한 수치심이 있는 가하면 해로운 수치심도 있다.
건강한 수치심은 좋은 마음의 기능을 가진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그릇된 일을 할 때에나 자신속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자신을 고쳐서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한다.

해로운 수치심은 행동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는 행동하게 하는 자아에 치중하는 것으로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자기비하나,
혹은 자기모멸에 가까운 상태의 자아학대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지나치면, 병적인 상태의 자아가 형성이 되어,
무엇이든지 자신의 눈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병적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는 인생의 철학을 갖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 것이다.
여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은
이러한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통해,
후회없이 살아가는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럽지 않는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인하여 그 행복감과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면그가 가졌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가 소유하고 전했던 그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안에 죽음을 맛본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죽음을 맛본 사람들 어떤 사람일까?
죽고싶은 심정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경우일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되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는 다급한 상황하에 있었던 경우일 것이다.

사람은 죽을 운명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의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병으로
인간속에 있는 죄가 인간을 끝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아,
수도 없이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오는 절망,
존재불안에서 오는 절망, 죄의 깊은 영향력으로 인한
절망적인 자신으로 인한 좌절감과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삶에 대한 존재의 불안에서 겪는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내몰게 한다.

삶의 각종의 스트레스는
시시각각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렇게 어둠속에서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절망에서 소망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무의미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리며,
병든 인생을 고치며, 상한 심정들을 새롭게 하여,
밝은 광명의 빛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나님안에는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의 힘이 있는 것과 같이
병들고 상하고 망가진 인생들을 고쳐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능력도 있다.
그안에서는 모든 인생들이 새롭게 변화될수 있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인생들의 진정한 의사이며,
비틀거리며 시달린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수 많은 인생들의 유능한 조련사이다.
그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다.

기쁨의 뉴스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줄만한 놀라운 사실과
거기에 모두를 기쁘게 해주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난 날에 기뻐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우리의 삶에 행복으로 다가오는 일이나 사건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 는 것이나,
혹은 고대하고 기다리던 입시합격의 통보나,
혹은 취직시험을 치루고 난후에 입사통지를 받는 소식등이다.

이렇게 지난 세월에 여러가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소식이 있었다.
나자신에게는 행복해하고 좋아해하며, 그소식에 감격해 하던 기억들,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일이 가장 자신의 생애에 의미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복음은 기쁨을 담고 있는 좋은 뉴스이다.
한국이 지난 날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4위)을 한 소식은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뉴스였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있는 소식이다.
그소식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를 당한 조각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선이 가져다 주는 목마른자에게 시원함을 주는 기쁜소식이다.
누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죄때문에 죽어야 할 자신에게 형벌과 죽음에서 해방을 얻는 기쁨을 맛본다.

다만 사람에게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수 있는 믿음이라는 그릇이다.
믿음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내세울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을 찾으며,
그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인생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생명과
그에 따르는 축복의 상급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이 사람을 바르게 하는가?
도덕인가, 인생의 수양이나 혹은 고고한 철학적 가르침인가?
도덕은 인간에게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율법은 사람의 마땅한 길을 제시하나 인간을 도와 줄수는 없다.
그 도덕률을 지키면, 그 사람은 올바르게 될수 있으나,
그런 것들을 다 따라 행하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인생을 바르게 건강하게 수양하는 것으로 극기하며,
자신을 수련하여, 고도의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어느 수준의 고양된 인격은 소유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사람이 온전해 질수는 없다.

또한 고고한 철학적인 지식도 사람에게 희망의 능력을 줄수 없는 것은
그 지식들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두운 동굴들에 갇힌 사람들이 그 동굴들을 헤쳐나올 지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막연한 우주의 원리의 선상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는 인격신인 하나님과 잇닿을 수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오직 우주를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찾아와 그신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진리와
그 진리를 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그것을 통한 인생에게 주어진 진리를 통하여 얻은
결과에 대한 신의 배려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순간속에서 사라지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주는 영생의 길과
그 인생길에서 결국 다가오는 인생의 죽음을 이길수 있는 생명의 길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 능력이 죽음을 이긴 주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이며, 기쁜 소식인 것이다.

삶이란 다양하게 진행되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무엇으로 사는 가에 따라 그 진행형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진행은 무엇이 지탱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세상의 방식으로 물질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보이는 현상에 의해 존재하는 물질만이 의미이며,
가치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보이는 육체의 추구하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물질주의, 육체적인 욕구, 현재적인 현상,
그리고 일시적인 상태의 추구등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사람들에게는 항상 삶의 진행형안에서 존재한다.
그 진행형은 다만 일직선상의 전진만이 있고
후진할수 없는 시간의 한계선의 삶이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미래로 나가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수 없으며,
그 미래도 자신에게 현재로 다가올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진행형은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있지만,
그 제한 속에서 제한을 넘어가는 영적인 세계와
영원한 차원의 세계를 따라 움직여 갈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행형이다.

인생의 삶이란 자신의 인생관에 의해 움직여지며,
자신을 살게하여,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장래에 그것의 결과로 결정된 것을 맞이한다.

무엇을 따라 살아가는 가?
어느 경우는 철을 따라 유행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행에서 사라지면, 자신이 좇은 그유형이나 스타일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옛날 방식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수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유행처럼,
한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 같은데,
사라지는 시간과 더불어 없어지며
자신의 삶의 종착인 영원한 세계에 잇닿아지는 때에는
그런 것(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다 무용지물로 남아있게 된다.

자신의 삶의 진행형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추구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설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시간과 영원을 잇대으며,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하며,
사라질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며 살아갈수 있는 근거의 인생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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