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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4편 1-2 |
생활의 주변에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났을때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면,
얼마나 생활을 편안하게 그리고 쉽게 살아갈수 있을까?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전자기계나, 컴퓨터가 고장이 났을때에,
자신이 고칠려고, 몇번 시도하지만,
오히려 망가진 상태를 더 못쓰게 만드는 경험을 하였던 적이 있다.
물건이 고장이 났거나, 집의 구조에 문제가 생겼을때에,
전문가에게 가서, 고치게 되면 그 물건을 고쳐 쓸수 있게 되며,
문제된 부분을 해결하게 된다.
가정생활에서,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
서로 함께 사는 것이 힘들때에,
가정상담이나, 전문 부부상담을 받는 것도 가정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부부사이에, 서로가 가벼운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때에,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그문제가 확대되어,
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공동체에 문제가 있을때에, 그것을 정확히 진단해보고,
그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외부 전문인의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
문제점을 파악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들을 내놓으며,
그문제들을 풀수 있는 계획들을 실천해가면
그 공동체의 기능은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새롭게 활성화되는 단계로 옮겨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는 가정이라는 기본단위에서 부터,
사회의 여러종류의 기관들이나 단체들에 대해
그런시도를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을 것이다.
컨설팅하는 일들을 주변에 많이 찾거나,
그런 일들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사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거에 자신이 알았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못하거나, 더 발전되지 않게 된다.
그럴때에, 전문가의 의견이나 도움을 받게되면,
그 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더 개선하여, 발전하게 된다.
문제에 부딪혔을때에, 자신에게서나 남에게서 얻은 것이든
그문제들에 대한 발전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나,
혹은 문제해결의 정책에 의존하면, 그 문제된 상황을 넘어가서 더 발전적인 상태가 된다.
과거에 아이엠푸를 겪던 시절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
경제가 힘들고, 기업들이 생존하기 힘들며,
그 상태로 그냥 있기만 하면, 부도가 나거나, 혹은 다른 기업으로 넘어가서,
결국에 파산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을때에,
어느 곳이나 기업에서는 그상태를 비상사태로 생각하여,
사업의 리모델링을 하며 기업들은 어려운 시절들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요즘 우리사회의 주변에 서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서로 문제시하는 내용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정치문제나 경제문제, 혹은 실업문제나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통해 문제들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책을 세워서 한단계씩 문제를 개선하며,
문제해결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은 성숙한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다.
인생들의 문제는(인간의 근본적인 죄의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생의 고뇌와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
인간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의 문제,
사회적인 병폐와 인간갈등의 문제,
그리고 해결될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사의 문제들)
인간이 모여사는 인간사회의 테두리안에 늘 머물러 있고,
그 인간문제의 해결은 신의손안에 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문제들의 해결들을 찾아, 신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삶의 지혜를 얻게한다.
이세상천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고마웠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자신에 대해 흐믓하게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아끼고, 나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나가 골목에 있는 동네의 아이들사이에 있을때에,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며, 즐겁게 놀수 있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혼자 덩그러니 자신만 있고,
누구도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심심하며,
동네를 빙빙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어딘가로 길을 걷고 있을때에,
많은 군중들이 분주히 자신의 일들을 보기위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혼자만이 덩그러히 서있으면,
갈데없고,만날사람도 없으며, 시간을 보낼만한 일들도 없다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없고,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자신들일때에,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타는 가 보다.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다가,
보아도 보아도 계속되는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을 붙일때가 없으며,
다만 문자와 이메지와 사운드의 교류속에서
사람들사이에 연결되는 따스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 때에,
사이버의 고독이라 할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울 지원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혼자 외로이 인생을 살아가느라 아둥바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며,
자신에 대해 도움은 커녕, 고독과 불안을 느낄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우울증에 빠진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 대해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밀려들때에,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부모나,
고향이나, 혹은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노출된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맛대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놀아주고, 즐겨주는 무엇이 없다면,
더 서글픈 자신의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인 신이 보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생이 고아와 같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런 인간을 향해 도움을 주며,
나약한 존재인 인생들을 붙들어주려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살다가 지쳐 자신의 삶을 한하며,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내가 눈을 산을 바라보는데, 나를 도움이 어디서 오는고 생각해보니,
나를 도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지은 신이었으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신을 발견했을때에,
기쁨이 넘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점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도울 신앞에,
자신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는 말을 되새기며,
도움과 지원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삶의 도전들(나약,실망,실패, 배신당함,사건 사고,
자신의 스캔들로 인한 설자리를 잃음, 목표미달에서 오는 좌절,
불안에서 오는 절망,알수 없는 고난,
매섭고 몰아친 고통, 엄연한 현실로 다가올 죽음 등)을 끝내 극복하고 승리하며 나갈 것은
신이 자신의 도움이며 자신을 지키는 자로 자신의 옆에 있기에, 그렇다.
인생이여, 도움을 얻으소서
역사의 시간속에 여러가지 동기로 전쟁이 일어난다.
침략의 동기로 혹은 나라사이의 갈등이 동기로 아니면,
혹은 악한세력의 폐해를 막기위한 선한동기로 일어난다.
악을 제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한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은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구약은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실제, 하나님은 인간사회이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다.
인간사회에 나타난 전쟁은 인간사회의 타락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러가지 동기로 인간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투쟁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사회의 악한 횡포로서 일어나기 도하며,
양육강식의 논리로 일어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삶의 필요악으로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질서가 무너지고, 약자가 고통을 당하며,
평화가 무너지면 정당방위의 전쟁은 일어난다.
악이 힘이 있으면 그 악이 약자를 괴롭히며,
그 약자를 희생물로,이땅에 많은 악이 만연하며,
악인의 힘이 강해져 세상전체의 평화를 깨고, 뒤엎기 때문에,
선한세력의 선한동기는 약자를 보호하며,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정당방위의 전쟁은 그 동기에 있어서, 요구총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전쟁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요구충족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징계로서 나타나야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악을 제압하고,
악의 세력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며,
선한 세력이 통치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한세력의 편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폭력사용은 사용하는 자의 동기나 방법이나,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폭력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사용이 되어야 하며,
인간사회에 비폭력사용을 따르는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구축에 더 힘을 쓰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갈등이나 투쟁이 일어날때에,
우선적으로 비폭력을 따르며, 비폭력의 방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의 더 큰 폭력의 폐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선한세력측에서 정당한 폭력사용을 통해,
인간사회의 악의 영향을 제압하며,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전쟁은 폭력사용의 전형적인 실례이며,
폭력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적인 평화주의와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있는데,
상대적인 것은 악의 실재와 공존 할수 밖에 없는 제한된 선의 평화이며,
그 평화가운데에는 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며,
선과 악의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상대적인 평화의 개념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폭력사용이 허용되어진다.
절대적인 평화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악을 다 몰아내어,
선한 세계를 이룬 상태일 것이다.
절대평화주의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의 표현이나
그의 사역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 같아,
이세상에서의 악을 이기기 위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이땅에 평화의 상징인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이셨다.
평화는 선한세력이 힘이 있을 때에,
인간사회에 악의 상징인 폭력이나,
불합리한 모순핍박을 물리치고,
사람을 존중하는 선한 사회을 이루어낼수 있다.
사실 절대평화주의는 악이 이지상에서 다 사라지기전에는 이룰수 없으며,
악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지상에 선과 악의 불균형이 깨어져,
선한 세력의 통치하에서, 평화가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가 이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며,
오히려 그가 세우시려는 하나님나라는 전투적인 정신속에서,
하나님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상징으로
비폭력이나, 사랑을 내세우셨다.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안에 있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정신인 전투적이며,
영적인 전쟁이며, 악에 대한 선의 투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님이 이 땅에 검을 쓰는 자는 망하리라 하셨는데,
이말씀은 검을 가진자가 악을 행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쓰일때에,
주님이 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으며,
이말씀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에 대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서의 징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며,
어두움의 세력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또한 어두움의 세계에 대한 빛의 세계의 도전이며, 영적인 전쟁이다.
크리스챤은 절대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전쟁에 대해서도, 선한세력의 정당방위의 전쟁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입장에서,
악을 이길 선을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시편113:1-2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말은 인생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와야 할 말이다.
인생은 언어사용의 존재이다. 무슨 말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
그사람의 인생과 삶을 이야기할수 있다.
인간이 신을 말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그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하는 것은
신이 인간을 언어적 존재로 세우시고,
그 언어를 통해 인간과 대화하기를 원하셨다.
원래 인간의 언어적 구조인 구음이 하나였다.
바벨탑까지 쌓아 놓은 인간의 교만과 자위권남용으로 인하여,
신은 인간의 언어를 헤쳐놓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는 하나로 통하며,
다양한 인종의 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공통의 구조적인 언어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적 시스템이
신과의 대화를 통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어질수 있다.
신은 인생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그는 인생들이 신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원래 신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알려진 신은
그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성품이나 본질을 계시한다.
신의 가장 신다운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즉 자존자이다.
신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누구의 필요나, 동기가 아니라, 신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모든 만물의 존재나 모든 인간존재의 원인은 바로 신에게 있다.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 신에게서 오므로,
신의 이름은 인간의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의 이름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보여주므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펴볼수 있다.
신의 이름이 다양함은 인간의 현실과 경험세계에 대해,
어느 상황이나, 형편에라도 인간을 대면할수 있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로 신이 존재할수 있다는 말이다.
신의 이름은 기묘자라, 그가 행하시는 일은 인간이 다 이해할수 없고,
다만, 추측하고, 상상할 뿐이나,
신의 역사는 확실한 현실이며, 신의 오묘한 세계이다.
인간이 풀수 없는 수수께끼나, 해결할수 없는 문제는 신의 손안에서 해결된다.
신의 이름은 모사라, 아무리 인간이 지혜를 발휘하고,
재간을 부리고, 전략을 세울지라도,
신의 지혜나 전략에는 미치지 못하며,
진정 지혜를 구하고, 모략을 구하며, 지략을 구하려면,
신의 지혜의 세계을 이해해야하며,
신의 지혜의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상담가이다.
그는 영원한 카운셀러이다.
그가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풀어주는 선생이며,
난제를 극복할 조언을 줄수 있는 조언자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나, 자신에 대한 깊은 무의식의 세계나,
무궁무진한 두뇌의 세계안에도,
신의 손길이 미쳐있고,
인간이 개발하지 못한 곳에 신의 지혜가 널려있다.
이지혜 또한 그를 상담가로 모신 인생이 발견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전능자라,
그는 천지를 만들고, 온 만물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전능한 능력과 권세를 갖고 있다.
모든 힘이나, 권세는 그에게서 나온다.
그가 할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간을 일하게 하시며,
인간에게 모든 힘을 공급한다.
호흡하는 자마다 그신의 호흡케 하는 힘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신의 기운이 임하여, 인생이 호흡하며, 힘을 얻고 삶을 살아간다.
그 신이 존재하기에
인생은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고 그 분을 찬양한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신을 두려워 하며,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는 자에게는 인생의 복이 있다.
복의 근본은 만물을 있게 한 신에게 있으며,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시다.
그는 신을 모시고 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신의 자신에게 내려준 분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신이 명한 바를 크게 기뻐하며,
그신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렇듯이 그 의인은 신을 두려워 하며,
신이 정한 인생의 이치를 무시하지 않고, 하늘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의인의 삶을 통해 그자손들에게도 복이 된다.
좋은 부모가 좋은 인생을 사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들, 정신적인것, 물질적인 것, 생활적인 것 등을 자녀들이 받는다.
그 자녀들은 부모들이 쌓아놓은 귀한 것들을 더 발전시켜,
세상에 더 강한자, 혹은 영향을 주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
악인의 자손들보다 의인의 자손들이 더 잘되어 가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혹은 개인의 족보사를 통해, 알수 있다
(미국의 두가문의 이야기: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의 자손들중 많은 학자, 정치가, 문벌이 좋은 자손들이 나왔으나, 당시에 도둑질을 하던 자의 자손의 가문에는 강도, 살인, 도둑, 사회적인 부랑아등이 여러세대를 두고 나왔다)
환영받는가운데, 온가족이 기다리는 축복속에 태어난 아이는 행복할 것이다.
좋은 환경가운데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에게 복이다.
부모들이 좋은 교육을 해주고, 자기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속에서 살게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을 잘돌보지 않고, 게으르다든지,
마음을 못되게 먹고 살게되면,
자신의 인생이 악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며,
결국에는 망신당하는인생으로 바꾸어 질수 있다.
바다밑 흙속에 묻혀있는 조개속에 진주같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현실에서 굴하지 않고,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 닦아, 자수성가하거나,
오히려 인생반전의 산 증거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활짝 펼친 사람들의 삶들도 있으며,
그들 가운데에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의연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같은 인생의 동료로서 그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민심이 천심이다 라는 말처럼,
선거때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투표를 할 후보들을 생각한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나온다. 그것처럼
인심도 천심이다. 사람이 옳게 마음먹고 살면 옳은 일이 생기고,
악한 마음을 먹고 살면 악하고, 안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인생들 자신이 마음을 먹은대로 자신들의 생각이나 비전을 가꾸고 일구어 갈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만들것이다.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 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인생의 주인에게 보상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운명의 행운이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행운을 기대하며, 토정비결을 보며, 그날의 운수를 쳐다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향하여, 잘되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인간의 삶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이 인생들에게 일정한 분복을 주면,
그것은 마치 재능이나 재물을 맡는 자처럼 자기관리를 잘하여,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그것을 통해 더 많이 남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까지 도움을 주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복이며, 자신의 행복이다.
인생은 울면서 왔다가 생활하면서,
울게 되는 현실에, 찌들려 지내다, 한번 얼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인생을 활짝 펴보지 못하며 지내다,
생활의 제한이나, 염려에 울다가 지쳐,
한없는 인생의 한을 남기고, 애처로운 가족들의 통곡속에서 생을 마감하다면,
참으로 슬픈인생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절호의 기회로 알고,
신의 명하는 바를 이루며,
어두움가운데에서 빛이 비쳐지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의 삶은 자신에게 축복이 되며,
자손에게 유익이 되며,
또한 그사람들의 삶은 명예로와 질것이다.
해마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때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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