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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07
    자신은 어디에 속한 자인가?
    목동
  2. 2007/01/06
    문제해결을 향하여
    목동
  3. 2006/12/23
    기도하는 인생
    목동
  4. 2006/12/08
    자신을 도우려면
    목동
  5. 2006/12/07
    전쟁과 평화
    목동
  6. 2006/12/01
    주인의식과 노예근성
    목동
  7. 2006/11/27
    인생의 입과 신의 이름
    목동
  8. 2006/11/27
    인생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목동
  9. 2006/11/24
    개인적 감사
    목동
  10. 2006/11/24
    신의 마음
    목동

자신은 어디에 속한 자인가?

시114편 1-2
자기백성이 우상의 나라들의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날때에,
하나님은 그 크신 능력을 나타내시어, 그백성을 구출하셨다.
그 신의 능력은 억압하는 민족위에 강한 손을 펴서, 압박받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출하셨다.
신이 자기가 택한 민족이나, 씨족이나, 가족이나, 개인을 향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냄은 그 택한 존재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 의한 구원의 역사이다.

한개인 자신이 구원받은 것도 크나큰 신의 손길이 개입되어 있으며,
자신의 일생을 통해 전개된 기이한 손길을 포착할수 있으니,
자신을 있게한 신은 인생의 삶을 귀하게 보며,
한걸음 한걸음씩 걷는 발걸음의 발자취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의 터전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신을 통한 개인의 부름이나 민족의 부름에는
신의 선험된 뜻이 있어, 그 뜻을 통해 자신들이 선택된 존재로 나오게 되었다.

한 민족이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가운데에서
신의 개입으로 나오게 되어, 오랫동안 약속되어진 신의 계약을 따라 유일하게
신의 역사를 통해 세계안에서 중심으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
그 민족(신이 부른 민족)의 백성들을 통해 신의 언어를 섬기고,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의 언어를 알리는 역활을 하는 민족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 고통받는 자기백성을 구출하심은 신을 저버리고,
신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있는 나라가운데에서 구출하여,
신은 그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자신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세상에 속한자에게 속하여 신아닌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그들이 그 세상의 노예된 상태를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어, 신을 섬기는 일로 나가게 되었고,
그 백성은 신을 섬기는 그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존재와 가치의 전부라고 할수 있게 되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세상으로 부터 나오게 된 사람들이 자신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으로부터,
즉 세상에서 신아닌 것들을 통한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
돈, 명예, 권력, 자아중심의 인생, 쾌락과 무가치한 것등을 따르는 가치관들,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신을 섬기는 데로 나가게 되어,
그들이 사는 곳이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그들의 터전이 신을 예배하는 중심에 서있게 되었다.

나 자신의 인생은 누구의 영역안에 있으며,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
세상에 속해 있는 가? 아니면 신에 속한 자로 있는가?

세상에 속한 자로 사는 인생은 세상, 그의 지배를 면할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 것인가?
온 세상은 유혹자의 유혹에 넘실대며,
인간의 초인간적 망상과 주권을 부추겨, 인간들에게 만용을 부리도록 외쳐대고 있다.
신을 떠난 세상은 인간에게 과장된 자유를 약속하고
그 자유안에서 인간들을 방종으로 유도한다.

이집트의 사람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의 신은 세상이다. 그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강제로 세상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이집트에 속한 세상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그(세상)의 노예로 전락되어 살게 한다.

신을 떠난 세상은 보기에도 좋아보여 인간들이 마음껏 자기자신대로 살아도 간섭이 없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신의 심판과는 무관하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도록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신의 소생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의 삶을 통해,
신의 판단과 그의 심판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신을 떠난 세상에 속한 자로
세상의 신을 섬기는 이집트땅에 안착하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그리고 그런 세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탄식하는 영혼들을 위해,
신을 떠난 세상에 신이 손을 펴고 심판과 구원의 역사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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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해결을 향하여

생활의 주변에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났을때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면,
얼마나 생활을 편안하게 그리고 쉽게 살아갈수 있을까?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전자기계나, 컴퓨터가 고장이 났을때에,
자신이 고칠려고, 몇번 시도하지만,
오히려 망가진 상태를 더 못쓰게 만드는 경험을 하였던 적이 있다.
물건이 고장이 났거나, 집의 구조에 문제가 생겼을때에,
전문가에게 가서, 고치게 되면 그 물건을 고쳐 쓸수 있게 되며,
문제된 부분을 해결하게 된다.

가정생활에서,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
서로 함께 사는 것이 힘들때에,
가정상담이나, 전문 부부상담을 받는 것도 가정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부부사이에, 서로가 가벼운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때에,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그문제가 확대되어,
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공동체에 문제가 있을때에, 그것을 정확히 진단해보고,
그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외부 전문인의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
문제점을 파악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들을 내놓으며,
그문제들을 풀수 있는 계획들을 실천해가면
그 공동체의 기능은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새롭게 활성화되는 단계로 옮겨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는 가정이라는 기본단위에서 부터,
사회의 여러종류의 기관들이나 단체들에 대해
그런시도를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을 것이다.

컨설팅하는 일들을 주변에 많이 찾거나,
그런 일들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사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거에 자신이 알았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못하거나, 더 발전되지 않게 된다.
그럴때에, 전문가의 의견이나 도움을 받게되면,
그 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더 개선하여, 발전하게 된다.

문제에 부딪혔을때에, 자신에게서나 남에게서 얻은 것이든
그문제들에 대한 발전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나,
혹은 문제해결의 정책에 의존하면, 그 문제된 상황을 넘어가서 더 발전적인 상태가 된다.

과거에 아이엠푸를 겪던 시절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
경제가 힘들고, 기업들이 생존하기 힘들며,
그 상태로 그냥 있기만 하면, 부도가 나거나, 혹은 다른 기업으로 넘어가서,
결국에 파산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을때에,
어느 곳이나 기업에서는 그상태를 비상사태로 생각하여,
사업의 리모델링을 하며 기업들은 어려운 시절들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요즘 우리사회의 주변에 서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서로 문제시하는 내용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정치문제나 경제문제, 혹은 실업문제나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통해 문제들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책을 세워서 한단계씩 문제를 개선하며,
문제해결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은 성숙한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다.

인생들의 문제는(인간의 근본적인 죄의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생의 고뇌와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
인간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의 문제,
사회적인 병폐와 인간갈등의 문제,
그리고 해결될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사의 문제들)
인간이 모여사는 인간사회의 테두리안에 늘 머물러 있고,
그 인간문제의 해결은 신의손안에 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문제들의 해결들을 찾아, 신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삶의 지혜를 얻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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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인생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다.
쌍방간의 소통에 근거한 신과 인생의 만남이다.
기도는 신이 인간을 향해 찾아오는 매개체이며,
신의 자기계시를 알리는 인간의 응답의 표식이다.
신은 인간의 기도를 통해 일을 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일과 필요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게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다.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창조한 신의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신의 전능한 힘의 세력안에 몰입하게 된다.
기도는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켜, 신의 세계를 맛보게 하며,
신의 창조와 섭리의 능력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기도를 일분하면 자신이 100시간을 투자하는 일보다 더 효력있게,
그리고 능력으로 일을 할수 있다.
사람이 기도하므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할수 있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을 (120%-자신이 도달할수 있는 퍼센트까지) 발휘하게 하며,

지성에 있어 자신의 지혜가 빛나게 되며, 바르게 생각을 하며,
내면의 혼란이나 충동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
총명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표현할수 있다.
학자나 지식을 가진 이들이 기도로 하게 되면
자신의 연구에 놀라운 신의 도움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사업가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 기도를 하고 일을 시작하면,
자신의 생각에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며,
그 아이디어를 추진할 힘을 공급받아, 그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며,
생각이, 계획을 이루며, 그 계획이 과정을 순탄하게 거치게 하며,
일의 질서있는 순서의 진행을 통해,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을 추진하게 된다.

학문을 연마하는 자(학생들)나, 기술을 익히는 자나,
기예를(악기, 그림, 도예, 재능발휘를 통한 창작이나, 작품생산을 이루려는 일들) 닦는 자들이
기도로 시작하며 기도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자신의 순조로운 발군의 실력발휘가 기도를 통해
마무리하는 단계를 통해 기대이상의 효과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기도는 종교생활의 단계를 익혀가는 평생의 작업이며,
접촉하는 신을 이해와 경험하는 장기간의 과정이다.

신앙의 세계에 종교적행위에 있어서
가장 알기어렵고 오랜시간을 들여야 깨닫고 경험할수 있는 과정은
기도를 통해 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종교적인 체계(이성적학습이나, 이해를 통한 경험습득,
혹은 훈련을 통한 숙련을 이루는 과정을 통한
평안한 종교및 신앙생활에 들어갈수 있다)에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간의 마음을 결단하고,
숙련되어가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이룰수 있다.
그중에 가장 오랜기간이 걸리며,
고도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어가는 기도하는 과정은
긴 시간의 투자와 이해와 경험되어지는 오랜과정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세계는 신을 알아가며 동시에 사람(자신)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세계이다.
기도를 통해 사람이 신을 이해하고 신의 세계에 접촉하며,
신의 본성과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며,
자신을 향한 신의 의지(뜻)와 섭리(사람의 삶안에서 일을 하는 신의 역사)를 알아가며,
이해해가며, 맞추어 가며, 인도되어,
자신이 도달할 자기인생의 목표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기도없이 사는 인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능력과 지혜와 삶을 유능하게 살아가는 수단을 잃고 사는 것과 같다.
기도없이 사는 자체가 사람을 있게 하고 살게하며
도달하게 하는 신의 의도나 목적을 무시하는 버림받은 삶으로 전락되어 사는 것이다.

기도는 만인이 필요한 인간됨의 자기표현이며, 자기성찰이며,
기도하기는 자기 인생목적의 성취나 성숙에 있어
근본적인 역활을 가능하게 하는 고도의 모델학습이다.

기도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사는 것은
자신이 신앞에서 가장 오만하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
(인간이 신과의 대화적인 존재로 창조되어,
신과 대면하여 대화할수 있는 능력의 상태에서 떨어져,
신과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불안과 무의미와 불충분함의 삶)의 모순과 혼란을 안고
살아도 아무런 대책없이 사는 것과 같다.
기도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은 신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이 만들어 놓은 이세계의 비밀을 무시하고 사는 것과 같다.
방향없이 혹은 도움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인생의 암초나,
곳곳에 놓여있는 삶을 훼방하는 요소들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 이다.

자신이 기도를 하는 경우에,
사람이 신앞에 있어보는 순간은 자신의 인생의 보내는 어떤 시간의 가치보다 중요한 순간이며,
시간효용극대화의 진행이다.

기도는 여러가지 자신의 삶에 있어, 인생(자신)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며,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사는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며,
자신이 당하는 불안과 고뇌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게 하여,
신이 사람자신을 위해 이룬 그리고 이루어 가는 지복(행복, 기쁨, 보람, 성취, 만족, 자신의 충만함)의 상태를 맛보며 살게한다.
이런 좋은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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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도우려면

이세상천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고마웠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자신에 대해 흐믓하게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아끼고, 나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나가 골목에 있는 동네의 아이들사이에 있을때에,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며, 즐겁게 놀수 있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혼자 덩그러니 자신만 있고,
누구도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심심하며,
동네를 빙빙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어딘가로 길을 걷고 있을때에,
많은 군중들이 분주히 자신의 일들을 보기위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혼자만이 덩그러히 서있으면,
갈데없고,만날사람도 없으며, 시간을 보낼만한 일들도 없다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없고,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자신들일때에,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타는 가 보다.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다가,
보아도 보아도 계속되는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을 붙일때가 없으며,
다만 문자와 이메지와 사운드의 교류속에서
사람들사이에 연결되는 따스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 때에,
사이버의 고독이라 할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울 지원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혼자 외로이 인생을 살아가느라 아둥바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며,
자신에 대해 도움은 커녕, 고독과 불안을 느낄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우울증에 빠진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 대해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밀려들때에,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부모나,
고향이나, 혹은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노출된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맛대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놀아주고, 즐겨주는 무엇이 없다면,
더 서글픈 자신의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인 신이 보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생이 고아와 같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런 인간을 향해 도움을 주며,
나약한 존재인 인생들을 붙들어주려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살다가 지쳐 자신의 삶을 한하며,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내가 눈을 산을 바라보는데, 나를 도움이 어디서 오는고 생각해보니,
나를 도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지은 신이었으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신을 발견했을때에,
기쁨이 넘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점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도울 신앞에,
자신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는 말을 되새기며,
도움과 지원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삶의 도전들(나약,실망,실패, 배신당함,사건 사고,
자신의 스캔들로 인한 설자리를 잃음, 목표미달에서 오는 좌절,
불안에서 오는 절망,알수 없는 고난,
매섭고 몰아친 고통, 엄연한 현실로 다가올 죽음 등)을 끝내 극복하고 승리하며 나갈 것은
신이 자신의 도움이며 자신을 지키는 자로 자신의 옆에 있기에, 그렇다.
인생이여, 도움을 얻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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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역사의 시간속에 여러가지 동기로 전쟁이 일어난다.
침략의 동기로 혹은 나라사이의 갈등이 동기로 아니면,
혹은 악한세력의 폐해를 막기위한 선한동기로 일어난다.
악을 제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한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은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구약은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실제, 하나님은 인간사회이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다.

인간사회에 나타난 전쟁은 인간사회의 타락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러가지 동기로 인간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투쟁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사회의 악한 횡포로서 일어나기 도하며,
양육강식의 논리로 일어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삶의 필요악으로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질서가 무너지고, 약자가 고통을 당하며,
평화가 무너지면 정당방위의 전쟁은 일어난다.
악이 힘이 있으면 그 악이 약자를 괴롭히며,
그 약자를 희생물로,이땅에 많은 악이 만연하며,
악인의 힘이 강해져 세상전체의 평화를 깨고, 뒤엎기 때문에,
선한세력의 선한동기는 약자를 보호하며,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정당방위의 전쟁은 그 동기에 있어서, 요구총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전쟁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요구충족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징계로서 나타나야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악을 제압하고,
악의 세력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며,
선한 세력이 통치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한세력의 편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폭력사용은 사용하는 자의 동기나 방법이나,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폭력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사용이 되어야 하며,
인간사회에 비폭력사용을 따르는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구축에 더 힘을 쓰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갈등이나 투쟁이 일어날때에,
우선적으로 비폭력을 따르며, 비폭력의 방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의 더 큰 폭력의 폐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선한세력측에서 정당한 폭력사용을 통해,
인간사회의 악의 영향을 제압하며,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전쟁은 폭력사용의 전형적인 실례이며,
폭력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적인 평화주의와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있는데,
상대적인 것은 악의 실재와 공존 할수 밖에 없는 제한된 선의 평화이며,
그 평화가운데에는 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며,
선과 악의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상대적인 평화의 개념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폭력사용이 허용되어진다.
절대적인 평화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악을 다 몰아내어,
선한 세계를 이룬 상태일 것이다.

절대평화주의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의 표현이나
그의 사역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 같아,
이세상에서의 악을 이기기 위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이땅에 평화의 상징인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이셨다.
평화는 선한세력이 힘이 있을 때에,
인간사회에 악의 상징인 폭력이나,
불합리한 모순핍박을 물리치고,
사람을 존중하는 선한 사회을 이루어낼수 있다.
사실 절대평화주의는 악이 이지상에서 다 사라지기전에는 이룰수 없으며,
악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지상에 선과 악의 불균형이 깨어져,
선한 세력의 통치하에서, 평화가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가 이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며,
오히려 그가 세우시려는 하나님나라는 전투적인 정신속에서,
하나님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상징으로
비폭력이나, 사랑을 내세우셨다.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안에 있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정신인 전투적이며,
영적인 전쟁이며, 악에 대한 선의 투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님이 이 땅에 검을 쓰는 자는 망하리라 하셨는데,
이말씀은 검을 가진자가 악을 행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쓰일때에,
주님이 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으며,
이말씀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에 대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서의 징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며,
어두움의 세력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또한 어두움의 세계에 대한 빛의 세계의 도전이며, 영적인 전쟁이다.

크리스챤은 절대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전쟁에 대해서도, 선한세력의 정당방위의 전쟁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입장에서,
악을 이길 선을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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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식과 노예근성

노예근성이라는 말은 누구나 듣기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인간다운 것을 따라 살지 못하는경우를 말하는것이다.
사람은 자유인이며, 자기주장을 하며,
자신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속에는 옛날부터 노예의지로 사는 것을 습관화하여,
자기책임이나,혹은 자기 자존감을 생각하지않고,
피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태도이다.

그러면 이태도가 어떻게 인간속에 있게되었나?
이 노예근성의 태도는 갖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생각할수 있겠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의 지도이나, 혹은 권위있는 사람의 강요적인 일방적인 훈육이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적인 영향이나,
혹은 다양성이나 개인 자신의 개성을 무시하려는 전체 사회적인 분위기나
혹은 민족적으로 과거에 받은 식민지적인 사고태도에(책임을 가지고 있는자(정부, 사회단체, 가정의 부모)나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주변환경에 대한 거부나, 혹은 무책임으로 대하는 태도) 의한 등 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노예근성의 자세의 원뿌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한 결과로 인하여,
인간본성이 참담한 상태가 된 것이 근본적인 것인데,
인류의 시조인 두 사람이(아담:남자의 대표,하와:여자의대표) 신에게 잘못을하고 난후에,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인간 본성안에는 그 자유의지가 변하여,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때에, 노예의지 내지는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어느 한 가정에 자녀들과 종들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그가정안에 노예와 자녀는 서로 신분이나 위치와 권위나,태도에 있어서 너무나 다를 것이다.
자녀는 자기 집안에 부모의 재산에 대해서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활용하며,
자기의 권한이나, 능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발휘하면 할수록
그집의 부모에게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며,
나중에는 부모의 재산이나 권한을 자신이 소유하며, 관리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이 주는 허락 한도내에서
자신이 빌어먹는 상태로 살며, 늘 종의 의식으로 살다보니,
모든 일에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수가 없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며,
종의 신분이라는 제한되고 구속된 자리에서
자유인으로 그 집안에서 자신의 삶을 즐길수가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지구라는 집에 관리인으로 혹은 책임있는 자녀로
주인의 뜻을 잘 받들어 살아가도록 하였는데,
인간들의 대적자이며, 유혹자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이 원래가진 자유의지의 남용된 죄로 인하여,
자기의 땅에(인생의 삶) 대한 자녀(신의 소생)의 영광된 신분이나 권한을 많이 박탈당한채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의지로 살아가게 된다.
노예의지의 사람이나 그의 삶의 철학은
무슨일에나 자신은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빌어 붙어사는 것처럼,
자신을 노예화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인에 의한 태도나 보는 관점에 따라,
자신을 생각(판단)하고, 살아가는 경우라든지,
혹은 자신의 고유한 인간의 권리와 인간성의 권한을 포기한채로,
그저 자신이 알수 없는 인생의 미스테리와
인생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내에서, 자신의 삶을 한하면서 살고,
인생들의 무거운 짐들을 스스로 혼자 감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지는 대부분의 짐은 인간의 잘못으로 왔다:
절망, 좌절, 분노, 병고, 저주받은 인생, 실패에 따른 고통, 알수 없는 고난, 죽음 )

옛날에 어느 집에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종의 아들은 우쭐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잘난척하는데,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는 주인의 자손(소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종의 신분이기때문에, 종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또한 주인의 하녀의 소생이라, 자신의 신분의 위치는
주인의 아들(소생)이면서,
자신의 권한이나, 신분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처지이다.

그렇지만, 주인의 자유부인의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정실부인이라,
그는 아버지의 앞에서, 주인의 아들로 당당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신분이나 권한을 항상 활용하며,
주인의 집에서 늘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세상에서,
그들을 신의 소생으로 세우고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중에 자신을 신의 자녀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속에서, 눈치를 보며,
종의 의식으로 사는 인생들이 있다.

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 땅의 주인에 대해 늘 불만이다.
주인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잘살게 하였는데,
그는 자신안에 있는 그노예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생을 자신있게 혹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자신의 신분확인이나 신분위치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분명한 자신이 주인이며, 주인의 자녀라는 자기의식을 가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 누구나,
자신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사에 자신있게 살지못하고, 노예의지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인의 자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자신있게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신은 신의 소생인 인간들이 이땅에서 종의 자녀가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의 자녀로 자신있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비록 힘든일이 있더라도,
태도만은 신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그리고 자신있게 자신의 인생의 운명이나, 여건들을 맞이하고 살아가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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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입과 신의 이름

시편113:1-2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말은 인생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와야 할 말이다. 
인생은 언어사용의 존재이다.  무슨 말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
그사람의 인생과 삶을 이야기할수 있다. 

인간이 신을 말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그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하는 것은
신이 인간을 언어적 존재로 세우시고,
그 언어를 통해 인간과 대화하기를 원하셨다. 

 

원래 인간의 언어적 구조인 구음이 하나였다. 
바벨탑까지 쌓아 놓은 인간의 교만과 자위권남용으로 인하여,
신은 인간의 언어를 헤쳐놓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는 하나로 통하며,
다양한 인종의 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공통의 구조적인 언어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적 시스템이
신과의 대화를 통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어질수 있다.

 

신은 인생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그는 인생들이 신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원래 신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알려진 신은
그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성품이나 본질을 계시한다. 

신의 가장 신다운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즉 자존자이다. 
신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누구의 필요나, 동기가 아니라, 신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모든 만물의 존재나 모든 인간존재의 원인은 바로 신에게 있다.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 신에게서 오므로,
신의 이름은 인간의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의 이름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보여주므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펴볼수 있다. 
신의 이름이 다양함은 인간의 현실과 경험세계에 대해,
어느 상황이나, 형편에라도 인간을 대면할수 있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로 신이 존재할수 있다는 말이다. 

 

신의 이름은 기묘자라, 그가 행하시는 일은 인간이 다 이해할수 없고,
다만, 추측하고, 상상할 뿐이나,
신의 역사는 확실한 현실이며, 신의 오묘한 세계이다. 
인간이 풀수 없는 수수께끼나, 해결할수 없는 문제는 신의 손안에서 해결된다. 

 

신의 이름은 모사라, 아무리 인간이 지혜를 발휘하고,
재간을 부리고, 전략을 세울지라도,
신의 지혜나 전략에는 미치지 못하며,
진정 지혜를 구하고, 모략을 구하며, 지략을 구하려면,
신의 지혜의 세계을 이해해야하며,
신의 지혜의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상담가이다. 
그는 영원한 카운셀러이다. 
그가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풀어주는 선생이며,
난제를 극복할 조언을 줄수 있는 조언자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나, 자신에 대한 깊은 무의식의 세계나,
무궁무진한 두뇌의 세계안에도,
신의 손길이 미쳐있고,
인간이 개발하지 못한 곳에 신의 지혜가 널려있다. 
이지혜 또한 그를 상담가로 모신 인생이 발견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전능자라,
그는 천지를 만들고, 온 만물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전능한 능력과 권세를 갖고 있다. 
모든 힘이나, 권세는 그에게서 나온다. 
그가 할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간을 일하게 하시며,
인간에게 모든 힘을 공급한다. 
호흡하는 자마다 그신의 호흡케 하는 힘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신의 기운이 임하여, 인생이 호흡하며, 힘을 얻고 삶을 살아간다. 
그 신이 존재하기에
인생은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고 그 분을 찬양한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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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신을 두려워 하며,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는 자에게는 인생의 복이 있다.
복의 근본은 만물을 있게 한 신에게 있으며,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시다.
그는 신을 모시고 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신의 자신에게 내려준 분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신이 명한 바를 크게 기뻐하며,
그신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렇듯이 그 의인은 신을 두려워 하며,
신이 정한 인생의 이치를 무시하지 않고, 하늘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의인의 삶을 통해 그자손들에게도 복이 된다.
좋은 부모가 좋은 인생을 사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들, 정신적인것, 물질적인 것, 생활적인 것 등을 자녀들이 받는다.
그 자녀들은 부모들이 쌓아놓은 귀한 것들을 더 발전시켜,
세상에 더 강한자, 혹은 영향을 주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

악인의 자손들보다 의인의 자손들이 더 잘되어 가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혹은 개인의 족보사를 통해, 알수 있다
(미국의 두가문의 이야기: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의 자손들중 많은 학자, 정치가, 문벌이 좋은 자손들이 나왔으나, 당시에 도둑질을 하던 자의 자손의 가문에는 강도, 살인, 도둑, 사회적인 부랑아등이 여러세대를 두고 나왔다)

환영받는가운데, 온가족이 기다리는 축복속에 태어난 아이는 행복할 것이다.
좋은 환경가운데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에게 복이다.
부모들이 좋은 교육을 해주고, 자기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속에서 살게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을 잘돌보지 않고, 게으르다든지,
마음을 못되게 먹고 살게되면,
자신의 인생이 악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며,
결국에는 망신당하는인생으로 바꾸어 질수 있다.

바다밑 흙속에 묻혀있는 조개속에 진주같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현실에서 굴하지 않고,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 닦아, 자수성가하거나,
오히려 인생반전의 산 증거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활짝 펼친 사람들의 삶들도 있으며,
그들 가운데에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의연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같은 인생의 동료로서 그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민심이 천심이다 라는 말처럼,
선거때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투표를 할 후보들을 생각한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나온다. 그것처럼
인심도 천심이다. 사람이 옳게 마음먹고 살면 옳은 일이 생기고,
악한 마음을 먹고 살면 악하고, 안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인생들 자신이 마음을 먹은대로 자신들의 생각이나 비전을 가꾸고 일구어 갈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만들것이다.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 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인생의 주인에게 보상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운명의 행운이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행운을 기대하며, 토정비결을 보며, 그날의 운수를 쳐다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향하여, 잘되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인간의 삶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이 인생들에게 일정한 분복을 주면,
그것은 마치 재능이나 재물을 맡는 자처럼 자기관리를 잘하여,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그것을 통해 더 많이 남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까지 도움을 주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복이며, 자신의 행복이다.

인생은 울면서 왔다가 생활하면서,
울게 되는 현실에, 찌들려 지내다, 한번 얼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인생을 활짝 펴보지 못하며 지내다,
생활의 제한이나, 염려에 울다가 지쳐,
한없는 인생의 한을 남기고, 애처로운 가족들의 통곡속에서 생을 마감하다면,
참으로 슬픈인생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절호의 기회로 알고,
신의 명하는 바를 이루며,
어두움가운데에서 빛이 비쳐지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의 삶은 자신에게 축복이 되며,
자손에게 유익이 되며,
또한 그사람들의 삶은 명예로와 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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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감사

해마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때마다,
경험하는 것은 마땅히 갈때도 없지만,하루를 그냥 집에서 지내기가 일수 였다.
그렇지만, 추수감사절의 명절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기억난다.

처음 미국에 온 해에는 당시 이웃에있는한인교회의 어느 집사집에 초청을 받아,
처음 감사절 가족식탁에 초청을받아,
함께 칠면조고기와 호박파이등을 먹으며, 감사절을 경험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어느 미국인교회에서 유학생들을 초청한자리에 가서
함께 예배를드리며, 저녁을 함께 하며,
서로 나라마다 자기들의 장기나 특성들을 소개하며, 감사절을 보냈다.

감사절의 추억은 나에게 먼 이국생활에 따뜻함과 배려의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유학생활에 활력을 주거나,
사람들사이에 나누는 정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 조상들도 추석이나,설날등 명절에 함께 친척이나,
이웃들과 정겨운 정을 나누듯
이곳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 그런 인간의 정을 나눈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추수감사절은 이곳 사람들의 생활속에 뿌리내린 전통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와서 자주 들은 말은 서로가 감사한다.고맙다 하는 말들을 자주 인사를 주고받는다.
관공서에서 일을 처리하거나,
마켙에 물건을사도,서로 고맙다는 말을 주고 받는다.

나도 잘 안되는 영어하기에서 그래도 제일 많이 했던 말은 고맙다라는 말이었다.
나도 이곳에 여러해 지내다보니 감사하는 습성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

사람이살면서,자신의 환경이나, 여러가지 인생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혜택을 받은 경우등을 경험한다.
미국생활에서 잊지 못하는 감사할 일이 생각나,몇자 적어본다.
한번은 갑자기 병원신세를 졌는데,
거기에 있는 전달훈집사라는 한인 의사가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진통이 너무 심해 참을수 없어, 밤에 병원에 가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그 의사집에 전화를 하여,
그 집에 밤늦게 찾아가, 그의 진단과 진료를 받았다.
너무나 고마운 한인이었다.
그후에도 그는 나의 병원생활을 수시로 체크해주며, 돌보아주었고,
당시나는 학생 보험을가지고 있었는데,
보험회사와 그의사의 도움으로 한푼도 내지 않고,
일주일간 병원생활과 수술비가 3만불 이상이나왔지만,
치료를 잘받았다. 고마운 동포의사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켄터키까지 일주일 정도 걸리는
대륙횡단하는 자동차여행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중고자동차를 두대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밴이고, 하나는 소나타 중고차였다.

캘리포니아 주를 벗어나는 지역에는 고갯길이 많이 있었다.
힘없는 중고차 밴이 뒤에 짐을(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척이
김치랑,반찬이랑 마련해주어 그것을 뒷차에
잔뜩실어 뒷차를 견인하기가 힘들 정도로 실려 있었다) 실은 소나타차를 끌고
높은언덕길을올라가는데, 트랜스미션오일이 분출하여,
차가 잘움직이지 못하여,겨우 이웃 마을에 도착하였다.
주변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갔는데,
그날은 토요일오후라,정비소가 반난절만 일하여,월요일까지기다려야 만한다고 한다.
또한 차의 수리비가 트랜스미션을 갈아야 하는데, 1,500달러(1,500만원)가 든다고 한다.
갈길은 아직 멀기만 하고(여행거리 1,300마일; 약1,600 킬로미터의 1/5정도 온지점에서
차가 문제가 발생),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여서, 막막했다.

마침, 우리가 두차를 연결하려면 유월이라는 이사전문업체에서
뒷자동차를 앞바퀴만 올려,견인하는 차를 빌려서,
그 지역에 있는 지점을 찾아가 그문제를 문의했는데,
거기에 있던 마음씨가 착한 종업원이 우리차를 살피더니,
이것은 트랜스미션오일만(15달러어치) 채우면,
차가 목적지가 갈수 있다고 한다.
그때,그종업원이 말대로 차는 무사히 올수 있었다.
지금생각해도 그에게 너무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모든 감사할 일이 배후에는
신의 기이한도움의 손길과 신의 응답의 역사가 있었다.

신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는 한번은 한국에서 동료들과 함께 바닷가 해변에,
하루 여름 수련을 가서 수영을 하다가,
해변의 바다의 소용돌이가 이는 지역에 빠져,
아무리 수영을 하여,빠져 나오려고 했지만,나올수 없었다.
내 힘이나 실력으로는 그곳을 빠져 나올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물에 빠져 죽는구나,생각이 들면서,
내가 믿는 신에게 절대절명의 순간에,
제발 살려 달라고 짧은순간에 긴급한기도를 드렸는데,
그때 갑자기 큰 파도가 내 등뒤에 부딪히면서,
그 부딛치는 힘에 의해, 그 소용돌이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그 일로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구나,
그리고 신은 반드시 신의 자녀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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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마음

세상을 창조한 신은 홀로 천지를 만들고, 주재하지만,
그는 한 공동체로 신의 본성이나, 신의 역활을 감당하고 있다.
창조주 신은 그안에서 서로 관계(독특한 관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를 성립하고 있는 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섭리를 통해,
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함께 신의 역활을 감당한다.
이점을 인간이 이해할수 없지만, 신의 관계는 마치 인간의 가족관계처럼,
그안에서 서로 역활을 분담하며(아버지는 세상을 있게 하였고, 세상을 돌보는 역활을,
아들은 세상에 있는 인생들을 아버지와 연결하는 중보하는 역활을,
영은 아들에게로 나오는 인생들을 인도하는 역활을),
세상에 있는 인생들을 신 자신과의 관계나 교제안에 들어오는 길을 제시하였다.

신은 세상을 향한 그의 통치와 돌봄을 그의 아들과 그 영을 통해, 함께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임하여서,
몸소 인간의 삶을 체험하였다.
그신은 인간이 되어, 인간이 겪는 모든 삶의 고난과 고초를 겪으며,
가장 처절한 고통의 인간체험을 통해,
그는 인간의 죄를 감당하며,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신의 인간에 대한 신의 형벌과 고통을 다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간에게 신에게로 다가올수 있는 용서와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여,
인간세계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죄, 절망, 두려움, 상처, 질고, 죽음등)를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아들인 신은 그의 근본이 신이지만,
그는 신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간 인생들을 위해,
그는 자신의 영광된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이 겪는 모든 인생의 삶의 과정들을 경험하므로,
그는 그 인생들에게 신의 뜻을 보여주어,
인생들로 하여금 신을 알게 하여, 그들을 신에게로 인도한다.
아들은 인간에게 신의 본성과 모습을 알려 주었으며,
신의 마음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었다.

여느 인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취한 그의 마음은 깊은 겸손한 태도와
인간을 신에게로 인도하고저 하는 열정의 마음이었다.
신의 아들은 인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 마음은 신을 이해하는 마음이며,
신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며,
인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다.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모든 인간의 문제의 근본적인 상태는
바로 인간의 그 타락하고 교만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한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마음이 신과 동등해지고저 하는 불순한 마음의 동기로 발전되어,
신 앞에 교만한 의도로 인하여,
인간속에 있는 신의 통치와 관할하에 있는 자신의 겸손한 상태를 벗어나,
그 인간들은 신과의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신과의 교제의 영광의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신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하여, 인간이 신의 법을 어기고,
그 베푸신 혜택을 배반하여, 인간속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
그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인간 자신속에 있는 소우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고저 하려고 할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신과의 관계안에서 누리는 그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만물의 그 어떤 것보다 그 상태가 부패해있고, 어두워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심히 자신의 마음이, 거짓과 허무에 노출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나,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그릇된 의식은 모든 일에 있어, 신의 뜻을 저버리고 살게 되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마치 아직 개간되지 않은채,
온갖잡초와 엉겅퀴가 나있는 황무지와 버린 땅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신의 마음을 통해,
신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제안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사랑과 용서를 알려주는 신의 마음이 필요하다.
신의 마음을 통해, 인간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안에 새로운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그리고 그 자아상은 잃어버린 신의 형상을 회복케 하는 신의 성품를 가지게 한다.

다시말하면, 신의 마음을 받아들인 인간의 자기이해는 자기모순이나, 자기혼돈이아니라,
자신안에 조화된 성품과 자기개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을 갖게한다.
그리고 인간은 신의 마음을 통해, 신을 이해하게 되고, 신과 일치하는 마음이 되어,
신과의 관계회복과 교제의 지속적인 실행을 통해,
인간자신안에 잃어버린 신의 형상이 이루어 진다.

그 신의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신과 단절되어 떨어져 나가버린 고아와 같은 버림받고 절망된 자신의 상태와
그 상태로 인한 자신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의 소생이라는 것과 신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신으로부터 인류의 조상들 자신이 얻으려고 했던,
인간안에 있는 신의 영광에 참여할수 있는 혜택을 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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