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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7
    신뢰의 대상; 하나님과 사람의차이
    목동
  2. 2007/04/06
    위기가운데에서 구원받음
    목동
  3. 2007/04/0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목동
  4. 2007/04/01
    인생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목동
  5. 2007/03/30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
    목동
  6. 2007/03/29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관점들
    목동
  7. 2007/03/27
    신앙의 경주(5)
    목동
  8. 2007/03/26
    주 예수께 대한 자신의 간구
    목동
  9. 2007/03/24
    회개해야 할 인생
    목동
  10. 2007/03/19
    불멸의 믿음
    목동

신뢰의 대상; 하나님과 사람의차이

예레미야 17:5-8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을 의지하고 나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6. 그는 사막의 가시덤불 같을 것이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의 메마르고 염분이 많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7.그러나 나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8.그는 물가에 심겨져서 그 뿌리를 시내로 뻗어 더위가 와도 두려워 하지 않고,
그 잎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고,
항상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은 자이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는 가에 자신이 믿는 바의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며,
그 의지하는 경우에 따라 인생의 삶의 차이가 있다.
무엇을 의지하는 가는 그 사람의 삶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준다.
물질(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돈이나 소유품)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세상의 것을(명예, 부귀, 권력, 권한) 의지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좌우하려고 한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이상의 존재에 대해 무시하며,
자신안에 갇혀서 사람의 한계에 부딪쳐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람이 볼수 없고,
이해할수 없고 가질수 없는 부분에 까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면서,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분을 의지하며, 무한한 그분의 자원을 활용하며 살아간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될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제한이 되어있고,
사람의 지혜나 모략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치 앞을 예견할수 없는 인간의 자기한계는
인간자신을 의지하기에는 연약한 실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없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사람에게서는 도움을 기대하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대하면 사람사는지혜를 얻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사람을 의지하다가
자신을 맡길만한 신뢰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되어,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한계이며,
좌절을 안겨다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세력이나 권한은 인생의 자신의 호흡이 끝나면
주변인생의 도움을 의지하는사람을 돕는 그들의 삶도 끝이 나고만다.
그런경우에 사막에 심겨진 풀처럼, 갈급한 상태와
위급한 상태가 연속되는 경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안락이나, 희망을 기대할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인생들이 자신을 기댈만한 힘이나, 세력이 되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왜 하나님을 떠나는 가? 바른 길이 싫어서, 의로운 생을 미워해서,
자신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면, 자기조절을 잃고, 방황하며, 결국 방탕의 길로 접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든 과정이나 결과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며
그 사람 자신스스로가 모든 것에
(인생의 자기한계를 넘어가는 것 까지/ 예: 미래, 죽음등)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은 사람의 자기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을 신뢰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신의 호흡조차 마음대로 조절할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사막에서 가시덤불은 쓸모없는 가치를 나타낸다.
사막에는 물이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마실수 있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여야 하는데,
그 신기루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절망스런 환경이란 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사막에 있는 가시덤불같은 경우일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며,
더이상의 소망을 기대할수 없게 한다. 죽음만이 기다리는 곳에 소망이 없다.
죽음뒤에 있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이라야 그 죽음을 이길수 있다.
사막에는 사람이 살수 없다.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은 물이 있는 곳이라야만 합니다.
물이 없는 사막은 사람이 살수 없다.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만 하나? 그는 창조주이며 만물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태어나 사는 것은 전적으로 보내어진 존재로 인생은 살아간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많이 있다.
자신의 근원이 어디서 왔다는 것을 모르고 지내므로,
창조주를 모르고 살기에 그의 길을 찾을수 없으며,
그의 길을 거스리다가, 결국 나락의 길을 가게 된다.

고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주인(창조주)의 지시에 따라야 행복하게 살수 있다.
그는 인생의 발걸음을 주장하시며, 인생의 미래를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쌓아놓은 업적을 허물기도 하시고,
분토에 앉은 인생을 높이 올리기도 하신다.
인생의 높고 낮은 자들의 자기위치를 세우며, 내려 앉으며, 인생의 자리를 인도하신다.

나무가 물이 많은 곳에 심겨지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수액을 빨아들여,
나무의 근력이나 세력을 펼쳐나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물이 없어 말라 비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나무가 푸르청청할수 있는 수자원이 풍부해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랄수 있다. 사람도 마치 나무와같이
자신의 삶의 뿌리를 내릴만한 근본적인 인생의 철학이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이 살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길을 터득하게 된다.
사람들의 삶에 더위가 오는 경우는 물을 고갈시키는 일들이
사람들의 주변의 삶에서 무수히 일어난다.

정상적인 생활의 상태에서도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건강한 생활의 원리나, 방법들,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소망, 믿음에 관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여러 필요한 요소들이 인간의 평범한 생활에서 고갈되는 요인들이 일어난다.
자기상실이나, 좌절케하는 인간관계(자신을 남용이나오용하거나,
자신에게 배신이나 상처를 주는, 마땅히 받아야 대상
(부모나 부부의 가족이나 혹은 친구, 우인등)으로부터 자신의 기대치에 못미치는,
쓸데없는 것에 소모케하는 낭비를 통한 자원의 고갈(시간, 건강, 열정, 상식적 자세의 상실등),

잎이 언제난 푸른 청정한 것은 나무에서 뻗어간 가지에서 자라는 잎들이
충분한 영양이나 수분을 공급받으면 무성하게 자라는 과정을 겪으며,
그 잎이 항상 푸르청정하게 된다.
사람도 올바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삶의 철학이 일관성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갖게되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철학에 성공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나, 원리들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 원칙이나 원리에 따르다 보면,
그 사람 자신이나 그의 삶의 모든 부분들은 잎이 항상 싱싱한 것처럼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 말은 사람이 자기에게 맞으며, 충분하며,
만족할만한 상태의 자신이나 그의삶을 유지하게 된다.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다.
즉 인생을 살아갈때에 위기를 경험할때에,
거기에 휩싸여 빠지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된다.
인간관계의 위기, 소유물의 상실, 자기 표현이나 성취의 과정에서의 실패나
그로인한 절망스런 상황,
자기 기대나 소원의 무산이나 목표도달에 미달되는 경우등,
그런 위기에서 다시 재기할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여 더 강하고, 성숙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나무나 잎을 잘 돌보아 주면, 정해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잎을 통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항상 열매를 맺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건강한 나무나 잎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듯이
좋은 사람, 혹은 건강한 사람, 더 나아가 자신있고
충실한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이 맺는 열매에는 시간과 노력과 기회가 합쳐질때에, 나타나게 된다.
이 세가지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창조주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창조주께서 사람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 주어진 시간안에 노력하는 일은 사람 자신의 몫이다.
그렇지만, 노력하는 과정에도 그의 도움없이는 진행할수 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삶의 모든 경우에 적당하게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 기회는 준비한 사람혹은 기회를 잡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렇지만 평소에 늘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기회,
즉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삶을 통해 열매는 따라 오게 되어 있다.
그말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창조주의 세계안에 있는 자연과 인생의 이치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는 다. 그 말은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마련한 삶의 형통한 원리나 이치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 자신을 찾고, 그분에게 와서
상(축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으로 부터 풍성, 충만하고,
넉넉하고, 넘치도록 있고, 그의 열심히 담겨있는 인생의 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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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운데에서 구원받음

예레미야 35:18-19

18. 그때 나는 레갑집안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일러 주었다. “너희는 너희 조상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모든 지시에 따르고 그가 명령한 것을 다 행하였다.
19.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 나를 섬길 후손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위기를 당할때에, 그 위기를 잘극복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취직시험이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다가올 시험이라는 위기를 보고,
그것을 자신을 업그레이드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아,
힘들게 자신을 극복하므로, 그 준비하는 시기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혹은 보다나은 직장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남왕국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국민이 나라의 패망을 눈앞에 보며,
파멸해가는 조국의 운명과 함께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온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 심판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족을 구원하고 있으니,
심판이 있는 곳에 동시에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본다.
그 가족은 대대로 조상이 섬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온 후손들이 가훈으로 그 명령을 잘 지켜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길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조상의 명령에 순종했던 레갑집안 사람들,
그들은 조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졌다.
35:6절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않고,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지 말고 항상 천막에서 살아라.
그러면 이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라는 조상의 지침을 받았다.

조상의 지침을 지켜왔던 그들은 생활의 불편이나,
삶의 고됨도 극복하고 그 명령에 따르는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한 가족이 이렇게 명령을 지키고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그 명령을 지켰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시켜서, 성전으로 그들을 불러,
한 방에 모이게 하여, 포도주와 잔을 내어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하자, 그들은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켰던 것이다.

사람의 신실함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이나,
일관된 철학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하겠다.
신실한 사람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나 사회가 건강하며,
사람이 살기좋은 곳를 이루게 된다.

신앙은 자신의 신실함을 지켜가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가 명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발판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근거가 된다.
신실함을 지켜가는 길은 결국 자신의 신앙의 신실함을 세우는 길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지키므로
자신의 믿음이 신실함을 보여주게 된다.

이스라엘은 온나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그들은 범죄한 백성으로 살고 있다.
그런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 살고 있는 레갑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켜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의 집안의 축복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축복하셨다.
그 멸망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신실한 백성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위기나 어려움이 있을때에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어려움들을 이길수 있다.
어려움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신실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
허지만 그런 신실한 가운데에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결국 자신앞에 놓인 그 어려운 과정을 넘어가는 때가 다가올것이다.
또한 우리의 힘에 한계에 도달할때에 좌절하기 쉽지만,
그때에도 다시한번 자신에 대해 원칙을 살펴보고,
자신이 세운 그 규칙을 향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함에 스스로 한하지 말고
자신의 인간됨의 불성실함에 대해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는 것은 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며,
또한 신실하신 분으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신실함에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신실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은 제한이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의로서는 한계에 부딪친다.
고로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살펴보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르며
그분의 의에 의존하는 신앙을 지켜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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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미가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앞에 나아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불에 태워 바칠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내가 수천마리의 수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간다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실까?
내 허물과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바칠까?
8.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그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

종교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앞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 종교심은 하나님을 찾는 심정이며,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을 바라는 경배의 태도이다.
그 종교심은 자신의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 믿음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이는 것처럼여기며,
그분의 존재하심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배는 무엇일까?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참 예배는 하나님앞에서 사람의 진실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제사나 희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제사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시작이 되었다.
인간의 저지른 죄가 하나님앞에 그냥 나갈수 없어,
그에게 희생의 제사를 통해 나가게 된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예표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동물들을 죽이므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에 참여 하였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
구약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이 오심을 바라보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제사로 규정하고
그 제사를 통해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섬김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사와 예배를 드리므로 섬겼다.
신약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해마다 3번은 꼭 하나님앞에 나가야 한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등의 절기에
하나님앞에 나가 자신을 신고한다.
그 백성들이 해마다 여호와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사명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나아갈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 없는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며 섬겼다.
그분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감히 가까이 할수 없는 분으로 여기고,
죄인들이 주님앞에 나아갔다.

그렇지만, 그분을 섬기려면 그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만난 하나님은 각자의 신앙고백에 근거가 된다.

무엇으로 그분을 알수 있을까? 그분이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서이다.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성경계시의 주인공도 성령계시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알아야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 분은 높이 계신분이다. 초월자이시다.
무엇이 그분의 계시를 알려주는 가?
기록된 메시지를 통해서 주님을 잘 알수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계시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 계시된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다.
그 기록된 말씀이 가까와 바로 나의 손에 있다.
그렇지만 기록된 메시지는 성령의 조명으로 읽혀져야 이해되며 믿어진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때에
온 이스라엘국민과 더불어 수만마리의 양과 수천마리의 소를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이 왕이 되어 수천의 수양을 국가적으로 드린 제물보다
왕이 될 무렵에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볼 정치가로서의 겸손하게 엎드려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태도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사람이 내 허물과 내 영혼의 죄를 위해 가장 애써야 할 일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물론 자신속에 늘 머물러 있는 죄책과
자신의 죄로인한 인간본성의 타락을 통한 자신의 왜곡된 상태를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허물은 자책과 자범죄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자기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허물은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약점이나, 혹은 숨은 죄악일수 있다.
일상생활에 자기의 성향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경향으로 나가서,
그 에게 허물을 범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실수나,
혹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서 오는 잘못 일수도 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혼의 죄는 신앙인에게 더 영향을 준다.
그의 죄들은 마음의 태도이며,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방향성이다.
영혼의 죄는 내면을 살피는 것이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면의 죄가 무엇인가? 자신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죄이다.

신앙인의 맹점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실수나,
자기의 책임성을 무마하려는 경향이나,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가 아니라, 불평섞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죄는 자신의 깊은 심층에 있는 자신의 자아에서
나오는 자신의 그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에서 나오는 죄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죄이다.
그 영혼의 죄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지는 자신의 그릇된 편견이나, 태도이다.

사단은 우리안에 부정적인 생각을 심고,
그리고 또한 불의한 생각을 심고,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이간하는 일을 일삼는다.

그 사단은 또한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는 일과 의심을 일으키는 일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부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한다.
그래서 우리안에 의심이 들어오게 한다.
불신이나, 의심이나 부정은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데 방해가 된다.
더 나아가 그 사단은 인간에에 교만을 심는 일을 또한 한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수 있다고 착각으로 생각하게하며,
그속에 자신에 대한 과대한 생각을 갖게 하며,
그 생각에 자신의 교만한 마음으로 굳어지게 한다.

더나아가 사단이 우리안에 심은 어리석은 생각이나,
허망한 마음으로 우리를 미혹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중에 하나이며,
그런 생각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좌절하고 절망적인 생각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과 욥과사이에 있는 욥의 잘못은
하나님앞에서 의로웠던 욥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욥과 하나님사이에 있었다.
모든 면에서 의로웠고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욥도 그 불안에서 벗어날수는 없다.
오직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의 은혜뿐이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가 기적으로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의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였는데,
어느 날 물없는 광야에서 돌반석을 보고
그것을 명하여 물을 내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로 두드렸다.
사소한 행동같아 보였으나,
그 일은 모세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자신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의외로 자신의 인생을 막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할수 있다.
사람이 생각할 때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숨은 죄악의 흔적도 그런 역활을 할수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겸허하게 인간세계안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지략과 힘으로는 알수 없는 변화무쌍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길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알면,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영의 사람으로,
영의 욕구를 들어주고, 채워 줄줄아는 사람이다.
영혼의 욕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의 하소연이다.
영적인 호흡이나, 영적인 활동이나, 영적인 양식의 채움을 주어야 한다.

성경을 먹는 일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이며,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을 그 말씀 안에서 영양분을 캐내어 먹어야 한다.
말씀의 분별(이해, 순종)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은자가 된다.
믿음의 비밀을 깨달으려면, 말씀의 세계를 파고 들어야 한다.
말씀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이다.
루터는 영혼의 공허를 말씀의 연구가운데에서 찾았으며,
칼밭트의 신학도 말씀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로마서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발견하고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경에 대한 책들을 연구하기보다는 성경을 알도록,
성경을 먹도록 힘쓰는 일이 자신의 영혼에 필요하다.
성경은 먹어야 알아지는 말씀의 책이다.
성경을 먹어야 믿음이 온다.

성경을 분석하거나 연구하는 것에는 문자에 혹은 문학적이나 철학적인 논리에 빠지기 쉽다.
문자만 보이고 영이 보이지 않는다.
도덕률이나 율법이 보이고 성령의 법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데는 기도를 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기도의 비결을 배우기보다는 기도를 자주 하는 것이 기도에 정통하는 지름길이다.
기도는 기도하므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이다.
기도를 하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경험한다.
자신의 기도의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만큼,
실질적인 신앙의 힘이 된다.
기도의 세계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기도에는 많은 단계의 기도의 단계가 있다.
묵상의 기도, 능력의 기도, 인생의 삶을 묶고 푸는 기도,
영적인 싸움의 기도, 축복과 저주를 다스리는 기도,
치유와 능력의 기도, 믿음을 키우는 기도, 금식기도등 능력의 기도도 있다.

예수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를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산다.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일을 쉬임없이 해야 한다.
살은 그의 몸을 의미하며,
그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구세주가 우리안에 오셔서
그는 우리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와 우리와의 관계는 생명의 몸인
그 의 몸안에서의 영적인 연결로 영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몸은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우리의 사는 일상의 근거가 된다.
즉 그는 우리를 위해 살았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그의 몸의 일부인고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선함)을 지키는 것이다.
자신의 선함은 그분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분앞에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를 좋아하며, 선한 일을 좋아하신다.
의로움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계속적으로 도를 닦듯이 쌓아놓는 영적인 성장과 인격성숙의 과정을 통해,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듯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농부가 씨를 심어놓고,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며
끊임없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한다.

그 열매를 통해 기독인의 사회적 정의와 상식적인 덕을 유지해야
기독교의 사회적인 가치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필요한 곳이 되도록
우리의 신앙의 가치와 의미를 높이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사회적인 고도의 덕목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변치않는 사랑을 원하신다.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신실함을 보이는 것이다.
한결함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며,
심지가 견고한 자가 가질수 있는 평강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세는 자신이 믿은 바에 대한 확신하는 것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이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겸손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겸손한 덕은 그리스도인이 가질수 있는 가장 큰 덕목이다.
겸손함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태도이다.
겸손은 모든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덕이다.
겸손은 천국백성의 특징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365년의 생애에서 매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힘쓰며 살았다.
그는 고대의 시대에 의의 복음을 전파하며, 동행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당시에 악이 횡횡하고 어둠의 세력들이 있는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의를 지키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신앙의 관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이제 복음을 듣고 믿고자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3가지 덕목을 즉 의 와 사랑과 겸손을 지키며 하나님앞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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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잠언 1:1-7
1.이것은 다윗의 아들인 이스라엘왕 솔로몬의 금언이다.
2.이것을 쓴 목적은 지혜와 교훈을 얻게하고 깊은 뜻을 지닌 말을 깨닫게 하며
3.모든 일을 지혜롭고 의롭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하게 하고
4.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 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
5.이미 지혜있는 자라도 들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분별력이 있는 자도 좋은 교훈을 얻어
6.금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사람들의 말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의 참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 얻는 지식이나 지혜는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주시는 교훈과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는 교훈으로 부터 온다.
인생은 삶의 경험을 통해 지식를 얻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받는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구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역대왕들중에 가장 국가가 융성할때에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리더가 되기 위해, 하늘이 베풀어준 지혜가 필요하였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기 위한 정성어린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얻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뿐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얻혀 주셨다.
인생이 지혜를 얻으면, 그의 인생의 삶이 보이며, 성공하는 인생을 사는 비결을 배운다.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많은 지식을 논할줄 알았다.
그 지혜의 힘이 그로 하여금 지식을 습득하는 법을 깨닫고,
지식을 축적하는 법을 알기 시작하였다.
지혜는 인간이 지식의 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그 모든 지능은 천문학적인 숫자인1000억개의 신경두뇌세포와
100조개의 신경회로네트워크(시냅스)에 의해 개발되어지는 두뇌의 활용은
신의 영역에 속하여, 그길을 열어보여주어야만, 그 능력을 십분발휘할수 있다.

솔로몬이 지혜를 논하고, 지식을 습득하여,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자가 되었다.
그의 소문은 멀리 남방에 살고 있는 여왕의 귀에 까지 전하여 졌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배우고 싶어 그 먼 여행길을 마다않고,
많은 금은 보화의 선물을 가지고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왔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지혜의 선생이 되었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지혜를 활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으로 부터 왔으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보다 자신이 받은 지혜에 몰입하다,
자신의 지혜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어서,
가장 지혜로운 자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그 지혜를 소유하고 활용하기에는
인생의 타락함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지혜가 아무리 출중하여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서는 지혜를 바르게 사용할수 없다.

선각자는 먼저 깨달은 자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하는 세계너머에 있는 것이나,
현재의 것을 넘어가는 미래의 세계에 대한 사건이나 개념들을 깨달아 알아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므로 유익을 준다.
또한 어려운 이치나, 복잡한 원리들을 이해하는 자는 지혜가 뛰어난 자이다.
항상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나 문화는
그들 선각자들이나 지혜자들에 의해 움직여 지며, 인도되어진다.
고로 지혜에 대해 앞선 사람들이 일반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리더한다.

당대의 석학의 지혜는 학문을 통해 인생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의 지혜이다.
학문의 습득을 통해, 인생의 진리에 이르는 자는 많지 않으나,
그것 또 하나님의 지혜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석학은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자신의 알수 있는 지식의 체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지식의 보고안에서
인생에게 유익을 줄수 있는 지혜를 캐내어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을 한다.

창조적아이디어는 인간에게 필요한 생각을 주며
인간사회에 유용하고 발전적인 생각을 가져다 준다.
그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평소에 논리나 지혜에 대해 궁구하며,
자신의 생각하는 영역가운데에,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이나, 독특한 아이디어로 생겨난다.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판적인 정신이 필요하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위한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현재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 나간다.

발명의 왕, 천재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발견하여
여러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
그들의 그 지혜는 그들의 열정과 함께 빛을 발한다.
모든 발명의 천재들은 연구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로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가꾸어진다.

하나님은 태초에 지혜의 천사를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그 지혜의 천사가 스스로 높아져 교만이 극치에 달해
결국 가장 수치스러운 사단이 되었다.
그 사단은 거짓 지혜로 인간들을 오도하며, 그릇된 길로 빠뜨린다.
어둠안에 어둠의 모략이 있다.
그 어둠의 지혜는 사람을 악하게 하며, 타락시키는 데 사용이 된다.
그 지혜에는 교활함이 있어 사람들을 오만과 교만함과 멸망함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지혜이다.
또한 그 지혜는 인간을 그릇되게 하는 사기, 속임, 술수, 거짓등은 어둠의 지혜이다.
그 지혜는 인간의 눈을 흐리게 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을 혼란케하여 옳고 그릇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반면에 지혜는 빛의 지혜가 있다. 그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 지혜는 의의 지혜이며, 생명을 얻게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겸손함에서 배울수 있으며,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얻게하는 생명의 지혜이다.
그는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그는 죄없으신 분이나, 죄있는 자들의 죄값을 담당하여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 안에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지혜가 있다.
그분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십자가안에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지혜가 있다.
그것이 또한 사람을 옳고 바르게 하는 의의 지혜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데 능하게 하는 것은 지혜와 의의 특성외에 공정성과 정직성이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의에대해 공정하시고, 죄에 대하여 엄하게 정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이 세운 의는 영원하다. 그의 의는 그의 원칙을 지켜가신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놓으심으로 인간의 불의를 해결하고
자신의 의를 지키신 분이다.
따라서 그의 심판 또한 공정하게 모든 인류에게 적용이 되어질 것이다.
이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모두가 공정하게 그의 판단을 받을 것이다.
의롭고 바르신 하나님의 지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자녀들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며, 시련과 역경가운데에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성품이 강직하시고 정직하시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정직하게 창조하셨으나,
인생들은 사단의 유혹으로 그에게 범죄하므로,
인간의 문제는 복잡하게 되었고, 모든 하나님의 질서안에서 사람들 자신들이 왜곡되게 되었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 정직은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마음의 힘을 강하게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여,
결국 어느 때에도 떳떳이 자신이 하는 일을 내세우게 한다.
마음의 정직은 태도의 당당함을 제공한다.
정직의 태도는 바른 자세의 확고한 인생철학을 갖게 하여,
결국 그 자세로 자신이 하는 일을 강화시켜준다.

어리석어지는 것등은 어린자들이 가지기 쉬운 자질이다.
왜냐하면 인생이 어린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순수무구할지라도 인생이 타락한 인류의 후손이기에
태어난 인생들은 끊임없이 교육의 힘으로 깨우침을 받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지혜의 길을 얻고, 지혜로와지는 것이다.
지혜의 시작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인생에 이르게 된다.

젊은이들은 학문이 필요하며, 지식의 습득을 통해,
판단력이나 분별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잠언의 지혜는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삶의 적용과 지혜의 원리들을 제공한다.
젊은이들이 잠언속에 있는 지혜를 배우므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수 있다.
거기에는 대신과 대인관계의 처세와 부와 영화와 물질사용의 올바른 태도와
인간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인생철학과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일정한 바른 자세와
그 안에서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지혜있는 자에게 지식의 힘으로 그 지혜를 빛나게 하여,
그가 가진 지식을 현명한 것으로 바꾸어 활용한다.
학문이 있는 자가 학문을 하는 것을 알고,
그 학문을 연마하므로 더 높은 지식에 이르며,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지혜로와 질수도 있다.
인생은 배우는 것 만큼 성장하며, 성숙해진다.
평생을 배우는 자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있는 인생의 태도이다.
지혜로운 자가 옳고 그릇 것을 판단하고,
일의 가치나, 우선순위의 가치기준을 바로 정해, 옳은 일을 해나간다.
좋은 교훈은 지혜자에게서 나온다.

금언은 금과 같이 인생들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런 금언은 역사와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배울수 있다.
그 가치는 그들의 살아온 과거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유는 감추어진 것으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세계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교훈들을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의 이야기의 비유로 풀어 설명하셨다.

지혜있는 사람들의 말은 지혜있는 자가 알아 듣는다.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그분으로부터 지혜의 영을 받아야 그 말씀의 뜻을 깨달을수 있다.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통해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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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

요한복음 1:1-9

성육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람의 등장에 있다.
1.우주가 존재하기전에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2.그리스도는 맨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분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4.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인류의 빛이었다.
5.이 빛이 어두움속에 빛나고 있었으나 어두움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6.하나님이 보내신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7.그는 이빛에 대해서 증거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
8.그는 이빛이 아니었으며 다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것뿐이었다.
9.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있었다.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주님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가운데 계시면서, 존재하신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원래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그의 근본은 영원가운데에 있다.
인간예수에게서 하나님을 찾을수 있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 알수 없는 우주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오직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수 있다.

주님은 말씀이시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심은 말씀이 세상의 근본임을 보여준다.
그 말씀은 우주의 원리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통해 모든 만물이 생성되었으며, 존재하고, 유지되어간다.
그 말씀은 세상을 구원하며, 세상을 심판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가운데에 계셨다.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만물의 창조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셨다.
맨 처음이라는 말은 시초부터라는 말로
그가 모든 만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생사에 대하 모든일을 관장한다는 말이다.
맨처음의 그분이란 모든 만물의 생존의 시작의 원인자가 되시는 것을 의미한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은
그 말씀이 모든 만물의 시작의 근원에 근거를 두는 존재이다.
구원받을 인생 자신의 시작은 그분안에 있었던 태초에 계획이 되어졌으며,
그분안에서 인생들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생존의 시작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영원가운데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만물의 창조의 이전에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 자신들의 존재가 그분의 영원의 존재안에 있는 그분의 계획안에 있었다.

모든 만물은 그분의 계획을 따라,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아무것도 없었던 “무”였던 이세계가 그분을 통해 만물이 생겨 나고 조성되었다.
그분을 통과하지않고는 어느 피조물도 생성될수 없었다.
즉 모든 만물은 그분의 손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그 분은 처음에 빛을 만드심으로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다.
만물은 창조의 질서를 따라, 만물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빛으로 시작된 이세상에 어둠이 깃들어 있게 된 것은
그의 창조물중에 반역자인 영물들(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들)로 인하여,
이세상에 어둠이 또한 시작이 되었다.

그 분, 만물의 창조를 조성하신 그 말씀안에 인류를 향한 생명이 있었으니 ,
그 생명은 인류에게 비쳐주는 생명의 빛이며, 소망이며, 구원이 되는 근거가 되었다.
그 생명은 하나님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이며, 죽을 인생들에게
소망을 가져다 주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었다.
빛으로 시작된 창조의 세계는 어둠이 함께 깃들이므로
죽음이라는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빛과 공존하는 어둠의 영향으로 인하여
인생들이 어둠의 영향을 받아, 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고, 그 죄의 결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운명이 인류모두에게 드리워 졌다.
이 죽음이라는 운명에 처한 인생들의 삶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어둠에서 헤매이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어둠에 처한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비쳐주고 있었으니,
그 빛은 바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출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빛과 어둠사이에 머뭇되는 인생들에게
그 빛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하여,
그 빛은 인간세상에 태어나는 성육신의 빛이 되어,
어둠에 처한 인생들에게 비추어 졌다.
그렇지만, 어둠의 영향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빛을 깨닫지 못하고 그빛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세상에 있는 인생들은
그 빛으로 나오지 않으며, 어둠에서 갈길을 못찾아 방황하고 있다.
어둠에 처한 영혼들이 하소연하듯 탄식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안에 있는 영혼의 소리에 귀를 닫고 있어서,
그 빛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빛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빛을 이땅에 보내시므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런 중에 주님은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
이 빛을 예언하엿으며, 그예언을 따라 빛이 세상에 임하시기전에,
마지막 예언자인 광야의 소리로
하늘의 소리를 대변하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먼저 와서 그 빛을 증거하고 있다.
진리는 증거되어야 하며, 진리의 소리는 들여져야 한다.
빛은 비추어져야 어둠이 물러간다.
인생들의 눈을 가리워 있는 무지와 혼돈의 상태를 벗겨내어,
그 빛을 볼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빛의 증거자들로 인하여, 인생들은 그 생명의 빛을 본다.

빛을 반사하는 사명이 요한에게 있었으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안내하는 사명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오늘도 다시 오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그분을 전할 선파자들이 있다.
그 빛의 비침을 받고, 그 생명의 빛을 깨달은 자마다,
이빛을 전하므로 자신에게 투영된 그 빛을 드러낸다.

세례요한은 그 빛을 증거하였다.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었다.
이스라엘지역에 사는 이들마다 세례요한에게로 나왔다.
수백년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가 오지않았으며,
하늘의 소리가 들려지지 않았는데,
요한이 광야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대변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추구하는 인생마다, 그에게로 나아와,
그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오늘도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하늘의 들려주는 생명의 전파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이 생명을 얻을 살길을 찾는다.

그의 증거는 모든 듣는이마다 자신을 통해 구세주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자신의 증거의 메시지나 삶의 증거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증거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믿도록 한다.
믿음은 들음으로 오며,
생명의 메시지는 마음의 들음을 통해 뭇 영혼의 심령 깊숙이 들려진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야 구세주가 아니라,
그는 자신을 구세주에게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사명을 다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약해지며,
그는 높여지고 나는 낮아지는 겸손의 자세로 그는 구세주를 전하였다.

진정한 사람됨은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겸손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 그분 하나님을 높이며,
자신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올바르게 하기위해 그들의 그릇됨을 지적하고 깨우쳐주신다.
부모가 자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훈계하며,
징계하듯이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생들을 향하여 진리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 진리의 빛으로 나아오며,
이 빛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 그리고 변화되어 구원을 얻는다.

온 세상사람들이 와서 보아야 할 참 빛이 오셨으니,
온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죽은 듯한 인간들의 영혼들의 잠을 깨우며,
다가올 심판의 날에 모든 인생들이 구원을 얻도록 세상에 오신 그빛은
인간들의 모든 죄와 질고와 그들이 당해야 할 땅의 저주와
그리고 죽음의 심판까지 친히 담당하여 누구나,
그분을 통해, 저주와 죽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인생들은
그 분에게 오면 축복과 생명을 얻는 길을 발견한다.

그 빛은 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
그 빛은 영원하며, 무한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한 생명의 빛이며, 구원자의 광명이다.
그분은 하나님이며,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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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관점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관점들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그런 섭리의 관점들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에
우리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우리를 새롭게 헌신하도록 한다.

그러나 아직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이 우리에게 있다.
플레블은 다섯가지로 그 문제점들을 이해하고 있다.
1.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가 힘들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의심스러울때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들은 이런것들이 있다.
a.당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두려워하는 즉
그를 거슬리는 두려움이 실제하는 지를 살펴보기
b.말씀을 더욱 연구하기
c.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을 제안하고 너의 실천해야 할 내용들을 알아보기
d.당신이 하나님의 조명과 분별을 위해 기도하기,
e.곤란한 상태에 있을때에 당신을 인도해달라는 간구를 하기 죄의 유혹에 빠지지않도록
말씀과 일치하는 섭리의 신앙을 가지기

2.하나님께서 우리의 평안과 축복을 위해 천천히 사역하실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비들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
고로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연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을 알고 조급해 하지말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경험하도록 기다려야 할 것이다.

3.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사건들이 그의 사랑을 보여주는지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지 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쓴 약과 같이 우리가 쓴맛을 맛보는 것같으나
그 섭리들은 우리에게 양약이 된다.

4.하나님의 섭리가 크리스챤들을 고통스럽게 참게 할시에
우리의 크리스챤생활을 어떻게 안정하게 할 것인가?
어떤 시련들은 잠시동안 우리를 버려두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낼수없다.
걱정은 쓸모없는 일이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과 목적안에
모든 것이 놓여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5.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복종할수 있을 것인가?
다섯가지의 원리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이 얼마나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계시는지를 기억하며,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 적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방법들에 걱정하는 일이 우리이게 죄가 되고 해로운지를 알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서 나타나 복종의 예들을 살펴보고 섭리에 대해 거부하는 기질에 대해 부끄러워 함
네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영원한 안식을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다섯째, 하나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기도나 믿음생활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들
1.하나님은 그의 만드신 우주를 다스리고 있다.
2.하나님은 그의 완벽한 목적으로 사역하고 계신다.
3.하나님은 우리들 자신의 종이 아니다.
4.하나님의 길들은 자신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신비스럽고 경이한 것이 있다.
5.하나님은 모든 때에나 우리들 자신이 신뢰할수 있는 선하신 분이다.
6.하나님의 타임스케쥴은 우리들 자신의 것과 다르다.
7.하나님은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 것보다
우리들 자신이 되어가는 존재가 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8.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크리스챤복음의 약속된 부분이 아니다.
9.고통은 크리스챤생활의 주요한 부분이다.
10.하나님은 우리들 안에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당하는 고난속에서 사역하신다.
11.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2.하나님은 그의 말씀의 렌즈를 통해
우리들이 그의 섭리를 읽을수 있는 존재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13.하나님의 길들의 경이로움을 추적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Sinclair G. Ferguson 의 The Mystery of Providence by John Flavel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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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경주

빌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얼마전에 이봉주선수의 마라톤의 경주에서 우승의 쾌거를 이룬 일은
모든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달리기 선수로서는 37세의 늙은 나이인데도,
그는 부단한 자신의 훈련이나 자기관리를 통해 부단히 자신을 매진하여,
경기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귀중한 예를 보여주었다.,

마라톤처럼 경주하는 것이 인생의 신앙의 경주라고 할 수 있다.
마라톤의 경주는 인간의 힘의 한계를 도달 할뿐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경기이다. 시작에서 끝까지 힘의 안배가 중요하다.
그리고 골인 지점의 끝까지 잘달려야 한다.
경기에서 우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라톤의 경주에서 완주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리라.

이와같이 마라톤코스와 같이 긴 경주의 코스가
정해진 인생경기장에서의 신앙인의 경주에도 비슷한 원리들이 적용이 된다.

자신이 과거에 이루어 놓은 일에 매이지 않고,
자신이 계속하여 진행되는 시간속에서 끊임없이
시간안에 잡으려는 자신앞에놓여있는 성취를 향해, 좇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좇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그 돈은 돌고 도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얻고 그것을 나의 주머니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어느 덧,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그돈이 있다가 사라진다.
아까 까지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없어지고 끝없이 일어나는 자신의 소유욕을 그것으로 채울 길이 없다.

성경에 인생의 허무한 면들을 살펴본
전도서의 필자인 전도인은 인생이란 소유를 좇아가는 것이 허무하며,
거기에서 벗어나, 반면에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인생의 경험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삶에서 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의미와 가치의 발견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숭고한 인생의 가치를 예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무엇을 잡으려고 달음질하였나? 부귀와 명예혹은 세상공명에 취하여 살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끝없는 소유욕에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만 하였는지,. 돌이켜 자신의 날들을 살펴보며, 과거에 이루어 놓은 업적이나, 자기 성취에 대해 안주하지 않고, 지금 껏 달려온 길을 계속하여 달음짐을 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 지혜롭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자신이 지금 껏 살아온 것들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도 괞찮은지? 점검해볼필요가 있다.

인생의 방향을 잘못 정했으면 돌이켜 바른 길을 가며,
아직도 제자리에서 별로 진보하지 않았으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자신의 길을 다짐하며,
진행의 속도를 더 내도록 자극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 성취나 과거에 이룬 업적에 안주하기에는 아직도 자신의 갈길이 멀다.
인생들은 이미 도달한 것과 아직 도달하려고 나가는 중간에 머물러 있다.
고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서 걸어온 길을 계속하여 지금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갈짓자로 걷지 않고 정도로 걸어왔는지?
아니면 정도를 이탈하여 자신이 가야할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빠지지 않았는지? 다시금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마음을 다해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향한 창조주의 의중에 따라 새로운 각오아래
그목적을 향해 다시 정진하는 자세를 가질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안에 있는
자신의 목적을 찾아 발견하며,
그분이 부르신 자신의 갈길을 찾아 그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전도인 바울은 원래는 철저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로
그의 종교와 생활은 크리스챤들을 핍박하는 일로 자신의 일로 채우며 지냈다.
열심도 좋고, 사명있는 생활도 좋았지만,
인생의 방향이 잘못 설정이 되어 자신의 추구하는 바가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억압하고 죽이는 도구자로 전락되어 살다가,
급기야는 하나님의 긴박한 간섭으로 하루 아침에 사람이 바뀌어져,
과거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가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예수의 전도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때로는 이와같이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을때에는 방향수정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안에 이루어 놓은 성취하는 과정이 있다.
어떤 이는 이미 많은 삶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성취하는 과정안에서 자기만족에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좌우간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나의 목표가 얼마나 달성했는지도 몰라도,
아직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에 이 인생의 긴 경주의 때를 마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달려갈 길을 달리는 것이다.
인생에서 그때까지 은퇴라는 것은 없다.
육체의 생명이 다한 인생의 경주밖에서라야 그 경주가 끝나는 것이다.

만일 우리자신이 중간지점에 도착하여 거북이와 경주하는 토끼처럼 쉬고 싶어 낮잠을 자며는
경주에서 지는 꼴이 되고 만다.
안일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직업을 놓고 은퇴를 하였다하여,
자신이 가야할 길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에 더욱 자신의 인생의 도달해야 할 목표에 대해 다시금,
열심히 살아온 길을 따라 그 길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힘있게 달려가는 것이다.

자기성취를 이룬 사람들, 즉 과거에 많은 일들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실패하는 예는
자신의 더이상 진보하기를 중단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머물고자 할때에,
자신에 대해 실패하기가 쉽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난후에
그의 나라는 확대일로로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나라가 융성하였을때에 그가 한가로이 자신의 궁궐의 전망대에서 거닐다가,
안일했던 그에게 정상적인 결혼에서 오는 성적인 생활 외에
불법적인 성적인 유혹을 받아, 넘어지는 자가 되었으며
그로인하여 자신의 가족사가 불명예스러웠고,
불법을 저지른 자신으로 인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나의 도착한 지점이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지점에서 생각해볼 것은 나의 인생의 전체의 경주에서
어느 구간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고, 거기에 맞는 태도와 처세를 해야 할 것이다.
젊은 날에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할 것이며,
장년의 날에는 자신의 하는 일을 셈하여 쓸데없는 일을 가지치듯 정리하여,
가장 중요한 일부터 생각하여, 여러가지 일로 바쁘고
분주한 자신의 주변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노년의 삶의 거리에서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주변에 있는 여건이나 상황에 대해 감사하면서,
남은 생을 열매맺을 수 있도록 전체의 자신의 날들을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어디까지 도착하였든 일관성있는 자세와 인생철학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인생의 자세나 생각들이 조석으로 바뀌어져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시간을 낭비하게 할뿐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앞으로 계속하여도 후회하지 않을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의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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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께 대한 자신의 간구

주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다.
그분이 나를 알고 내가 그분을 아는 것이
구원의 관계에서 그분이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고통당하며,
땅의 저주받음과 삶의 고뇌에서 애통해하는 자신을
받아주실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더불어 사는 은총을 입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세상에 사셨던 사람이며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세상에 나와 같이 사셨던 분이다.
그분은 나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겪는 모든 과정을 다 겪으셨다.
보통 사람들이 겪는 것보다도 더 많은 질고와 고통을 당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아신다.

주 예수의 영은 자신안에 거하시는 주님이다.
우리 자신안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주관하며
내가 주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다.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자기정죄나, 죄책감이나,
자기허탈에 빠지지 않으며, 자신의 새롭게 됨을 경험할수 있다.

새롭게 된 자신이 그분안에서 얻을 축복을 생각하며,
자신안에 계신 그분을 구하라.

그분에게 능력을 구하지 말고, 그분을 구하라.
그분안에 능력이 있으며, 그의 능력안에서 그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그의 능력은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으며,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우편위에 보좌를 펴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며, 능력으로 따르는 무리들을 보호하며,
그들을 치유하는 일을 하며, 모든 정사와 능력이 그의 손안에 있다.
힘없는 자, 무능한 자에게 힘주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그분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전능자이며, 무한한 권능아래에 계시는 분이다.
그분 안에 모든 능력과 권력이 나오며, 모든 세상권세가 그분의 통치아래에 놓여있다.

그분에게 지혜를 구하지 말고, 그분을 구하라
그분은 지혜의 근본이시다. 그는 지혜로 세상을 펴시고,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지혜의 충만 그자체이시다.
지혜는 온 우주에 가득한 그분의 솜씨를 드러내며,
인생이 감히 찾을수 없는 깊은 지혜의 보고를 가지고 계신다.
지혜없는 자는 그분에게 가서 지혜를 구하며,
그분과 사귐을 가지면서, 그분으로 부터 지혜를 얻게 된다.
지혜는 내가 소유하기 보다는 내가 그 지혜의 도구로 쓰여지도록
지혜에 나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지혜는 자신의 소유로 갖고 있기보다는 지혜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그 지혜의 소명에 응답하며,
그 지혜의 길을 좇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에게 부요를 구하지 말고 그분을 구하라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솜씨로 넉넉하게 만물이 조성이 되어,
보시기에 좋은 우주로 세워졌다.
모든 만물이 그분의 숨결에 살아 생동하며, 생육하며,
충만한 그의 복아래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곳곳에 궁핍과 곤란과 부족의 현상을 겪고 있다.
그것은 모든 부요의 원천이신 그분을 외면하면서
그렇게 우리 자신들에게 부요보다는 궁핍함이 가까이 있다.
부요하기를 원하면, 그분을 가까이 하여야 할 것이다.
그분의 부요는 곤핍한 중에도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분에게 축복을 구하지 말고 그분을 구하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은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주장하며, 세울자를 세우고, 버릴자를 버리며,
인간의 운명의 미래에 대하여 주장하신다.
인생의 날들이 형통의 날이 있는 가하면, 고난의 날들도 있다.
선인과 악인의 삶이 매일반듯, 그들의 생이 비슷하게 끝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분을 찾는 것이 인생에게 있어, 만족과 기쁨의 시작이며,
자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합당한 해답을 얻는다.
어려운 날들의 미스테리나, 알수 없는 고민의 생각들이 그의 가르침안에서 해결받는다.

그분에게 물질을 구하지 말고 그분을 구하라
만물은 무에서 유를 이루어 내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 그에게서 나온다.
그는 천상에서 하지까지 모든 곳에 편만하시며, 모든 물질을 주장하신다.
그에게서 풍부와 부요함이 있으며, 넉넉한 자원이 존재한다.
만물의 자원이 물질에 있지만, 물질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생겨났다.
고로 그분안에 물질의 모든 풍부와 넉넉함이 있다.
그분 예수님안에 모든 부요와 풍부함이 있다.
그분안에 절박함에서 오는 궁핍을 해결할수 있으며,
사막에서 물길을 내시는 손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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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해야 할 인생

이사야 1:2-9

2.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기른 자식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3. 소도 자기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신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구나.”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부패하고 악한 백성이여! 너희가 여호와를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5. 너희가 벌을 더 받고 싶은가? 어째서 계속 거역하느냐? 너희 머리는 병들었고 마음은 약해졌으며
6. 밑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하나도 성한 곳이 없이 온통 상하고 터지고 맞은 자국뿐인데도
너희는 짜내고 약을 바르며 붕대를 감는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7. 너희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 성들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외국 사람들이 너희가 지켜보는 데서
너희 토지를 빼앗아 황무지로 만들었고
8. 겨우 예루살렘만 남아 포위를 당한 채 포도원이나 오이밭의 원두막처럼 되었다.
9. 만일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일부 생존자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같구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라.

왜 예언자는 하늘도 듣고 땅도 들으라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세운 나라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어리석게 그의 지시와 인도를 무시하여,
배반하는 일을 하고 있어,
하나님의 탄식하는 소리가 온 우주에 충만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배은망덕이라는 말은 인간사에 있어서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말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은혜를 베풀고 선행을 했던이웃이 오히려 선에 대한 보답은 커녕,
원수로 대하는 경우일 것이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에게 먼저 대접해야 좋은 인간관계로 유지할수 있다.

배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덕중에 사람들의 본성이 타락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속성이다.
거역하는 것은 거부하고 역행하는 일을 일삼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은 인생이 당하는 가장 힘든 상태에 처해지는 것일 것이다.

동물도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는 데
만물의 영장이라 할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있게 한
창조주를 모르고 지내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참 인간다운 것은 자신의 위치를 잘알고
자신의 처신하는 일에 지혜를 갖는 일일 것이다.

범죄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악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다.
부패와 악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악이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 아니고, 선하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악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죄를 짓는 일이다.
의(옳음)에 대한 배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자신을 잃는 일이다.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은 죄를 짓는 악인들이 더욱 완악해져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으로 달음질하게 된다.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일은 위험한 발상이다.
이미 죄에 물든 몸이 죄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머리에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을 행하기를 꾀하고,
그 도모가 범죄를 생각하게하는 것은
그마음에 품은 것이 늘 어둠에 속하여 자신의 판단을 가눌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정신이 병들고, 생각이 어두워져서 허망한 것을 좇아가고,
쓸모없는 일에 내버려두시는 유기의 상태에서
인간은 더 악을 일삼는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마음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강해진다.
마음이 왜곡되면, 그 마음의 상태도 건강치 못하다.
마음이 약해져서 옳은 일에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다스리지를 못한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의사가 환자의 질병의 상태를 올바르게 볼수 있다.
환자가 자신의 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나서 증상이 시작이 되어있으면,
이미 병에 깊이 빠져 있게 된다.
상하고 터지고 맞은 자국에 멍들고, 자신의 몸이 성한 곳이 없어져 있다.
그런데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자신이 지금 암 말기증상에 있는데도 만일 치료는 커녕,
진단도 정확히 모른다면, 그 상태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
육체적인 불감증이나 도덕적인 불감증도 인간의 상태를 악화시킨다.
영적인 불감증은 더욱 인간의 처지를 절망적인 상태로 빠뜨린다.

환자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질병에 노출되어있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몸을 의사의 손에 맡겨야 한다.
인생도 병들고, 멸망으로 치달아가고 있다고 판단이 되면,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나가야 한다.
그분과 대면하여야 살길이 열린다.

사람들이 악하면, 그 사람들이 사는 자연도 영향을 받아,
하늘의 벌을 받아, 땅도 농사를 지어도 열매를 맺지를 못하고,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버린다.

오만한 거나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햇빛을 받고
이땅에 살수 있는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것도 가당치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일정기간동안을 혜택을 주신다.
사람들이 사는 땅이 몹쓸게 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고,
그리고 영적으로 병이 들어, 그 땅이 그들과 함께 버림을 받았다.

땅을 고치려면, 그곳에 사는 인생들의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이다.
악인이 아무리 재물을 쌓으려고 애를 써도 그것을 허물어 뜨리는 이가 있으니
하늘에 계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악인들은 재물들을 부지런히 모으지만,
그 재물을 쓰는 이들은 주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의인의 복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유다나라는 전국토가 남의 나라에 침략을 받아,
유린당하고,이제는 예루살렘만 남아,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밖에 없는 상황이란 참담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침략을 받아 멸망해가는 유다나라의 현실은
하나님앞에 범죄한 나라가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다.

의는 나라를 영광되게 하지만, 죄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
오이밭의 원두막같이 덩그러니 남은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속에 있다.
인생의 삶에서 위기의식을 가져본 적이 있는 경우는 자신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린 상태로,
헤어날수 없는 자신의 몸의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사업이 실패하여 진퇴양난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빚의 독촉을 받아,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있는 경제적인 손실이 막강할 때일 것이다.
왜 자신의 인생이 유린당하고 억울한 일을 만날까?
알수 없는 문제투성이가 발생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인간속에 겪는 수많은 재앙적인 요소들은
모두가 인간의 죄로 기인된 것임을 부인할수 없다.
그런 문제에서 헤어나올 길은 구원자를 찾아,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유다나라도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살길이 보인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의 때까지 늘 일시적이며, 제한적이다.
그것은 그의 심판가운데에, 자비의 손길이 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그대로 실행한다면
아마 누구도 그의 심판앞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오고오는 세대에 심판의 경종을 알려준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죄를 짓는 일을 밥먹듯하며,
늘 생각하는 것이 죄악을 범하는 일에 빠르게 진행되어버린다면,
거기에 대한 댓가는 심판을 자초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유여는 그의 자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다리는 그의 손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하나님의 배려이다.
십자가의 심판의 죽음이 있기전에 자신에게는
십자가에서 주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성자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의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심판의 혹독함과 수치스러움을 보며,
자신속에 있는 죄악을 뉘우치고
자신속에 있는 영적인 질병과 도덕적인 타락을 회개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자신의 그릇된 길에서 돌이킬 것을 명하신다.
인생들이 자신들의 길에서는 의를 발견할수 없으며,
의의 하나님에게 나아올때만이 의를 발견하고 그의 의안에서 평안을 얻는다.

인생의 변화는 대체로 두가지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그 변화는 인생의 나가는 향방(그 방향성으로 인하여 돌이킬수 없는
인생의결과를 초래함)을 생각해본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과 안좋은 방향으로 트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이정표의 역활을 한다.
회개는 현상을 변화시키는 지름길이며, 인간성의 개조의 주된 도구이다.
회개는 자기혁신이며, 인생변화의 분명한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다.

사회는 인간성의 변화를 통해 개선되어진다.
인간이 사는 방법에 따라 사회의 상태가 결정이 된다.
유대사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들이 점차 사라지고,
종교를 방편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무리들로 인하여
자신이 멸망에 처한 사회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사회변화는 인간변화에 의해 주도되어진다.
나라와 국가의 좋은 발전도 국민들의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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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믿음

로마서 4: 17-21

17. 이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우리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18. 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으므로 “네 후손도 저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신 약속대로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가 백세가 다 되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많아 도저히 출산할수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 조상이 있고, 족보가 있습니다.
우리 가문에 역사가 있고 우리민족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족보가 있고 역사가 있음은 자신의 근본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에는 많은 조상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기계를 처음 사용한 조상들, 도시생활을 시작한 조상들,
문명을 발전시킨 조상들, 고대에 유명한 조상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인류의 역사가운데에 독특하고 유용한 조상들이 있는데,
그 조상들은 이세상에 살면서 이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동행한 인생의 발자취를 남겼으니,
과히 그조상들의 발걸음은 인생들에게 획기적이며 가치있는 일이며
의미있는 인생족적의 발걸음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를 만나,
자신들의 일생가운데에서 그분의 숨결과 손길을 경험했으니,
우리 인생들에게는 귀감이 될 조상들이다.
그 조상들중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은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유명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던 그의 믿음을 살펴보고저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개인이 경험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셨으며,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사람들을 찾으며,
그들에게 그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내용은 하나님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지시고 죽음의 선고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음앞에 절망합니다.
죽는 다는 사실은 인생을 비참하게 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접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원수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그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만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십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생명의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생명의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은 그분에게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능하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무에서 유를 이룬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셨습니다.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은 그 바라는 것을 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이성을 초월하여,
바라는 바를 끝까지 붙잡고 나가게 합니다.
경험과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적사고시대에
이성의 역활을 초월하는 믿음의 세계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성은 나타난 현상의 세계에 대한 것을 확인하기를 원하며,
경험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편견에 잡히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경험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새로운 미래의 도전에 대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너의 자녀들이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부인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의 자녀가 이렇게 많아질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생산을 쉽게 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으면,
그 약속의 실현을 기대하게되겠지만,
아브라함은 나머지 일생을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자녀에 대한 기대를 한번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나갔습니다.

그의 믿음이 훌륭한 것은 믿을 수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도 가능하지 않는
자녀생산에 대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는 믿음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한데,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을 수없는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그믿음의 대상에 의해 자신이 믿은 그 믿음에 낭패를 당할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다나라가 하나님앞에 우상을 섬기고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멸망을 당해가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을 즉,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용서받고 멸망에서 구원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에 대해 전혀 어떻게 할수 없는 자신들을 믿은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저주받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믿을수 없고 도저히 믿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을 믿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잇닿게 한 것이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며,
약속하신 대로 자신의 삶에 실현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멸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의 상태를 보아도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이며,
그가 가진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에 대한 그 믿음이
어떤 상황하에서도 그의 믿음을 소멸치 못하였습니다.

믿음을 방해하거나 소멸케하는 요인은 사람들 바로 자신이며,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성향이며,
또한 자신의 믿음을 방해하는 자신의 환경이라 할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자신이 믿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하나님 역활을 내세우면,
누구도 그를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부정하는 자신때문에
믿음의 세계로 들어올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자신의 속에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향이나 기질이나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소극적인 사람은 믿음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를 꺼려 합니다.
매사에 또한 부정적인 성향이나 의심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믿음을 부정하기 십상입니다.

믿으려는 자신이며, 자신속에 믿음에 대한 강한 성향이 있는데,
자신의 주변이 그를 못믿게 만드는 환경이 있습니다.
그 환경중에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대대로 내려오는 불신이나,
무속의 영향을 받은 가정도 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가문에서 좇겨나는 핍박이 있어,
그것을 감히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런 환경안에서 자신은 도저히 믿음을 가질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으로는 할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하에서도 그사람을 믿게 인도하십니다.

불가능을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현실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능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믿는 믿음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 200만명 가량의백성들은 모두가 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앞에 놓여있는 바다를 갈라,
육지처럼 길을 터놓아,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을 탈출하게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은 믿음입니다.
정실부인인 사라자신의 몸에서 아직도 자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들이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분이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옛약속과 새약속사이에서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과거에 약속하신 것을 실현되게 하시고, 또한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옛 계약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수천년동안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예언자들로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씨의 능력이 이미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아기의 생명을 만들수 있는 정자의 수가 줄어들어,
도저히 생명의 탄생을 할수 없게하는 몸의 상태인데도
그것을 아브라함은 다시 살릴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녀의 속에 수정란을 만들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난자가 충분히 성숙하기에는 그녀의 몸은 이미 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난자를 자라게 하고, 숙성한 난자들을 생산케 하셨습니다.

사라는 이미 여자로서 자녀들 가질수 있는 아기씨를 잉태할수 있는 자궁의 상태가 아닙니다.
자궁안에 생명을 착상시킬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그 상태를 복원하셨습니다.
원래 불임이었던 사라의 몸이 임신을 가능케 하는 상태로 변화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사라에게도 생명을 만들수 있는 몸상태가 아닌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생명을 가질수 있는 몸의 상태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불임판정을 받아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한 사라였는 데,
하나님은 사라의 몸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불임의 몸을 가임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젊은나이가 아니라 몸에서 경수가 끊어진 상태인 그녀에게
생명의 씨인 수정란를 성숙케 하는 몸으로 다시 만든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합니다.
불신앙은 믿음이 없다가 아니고, 불신앙은 의심에 속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믿음은,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믿음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죽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을 안고 사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의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범한 죄의 댓가로 인간의 삶의 현장에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는 현실앞에 자유할수 없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늘 죽음이라는 다가오는 현실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불신앙으로는 결코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릴수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철학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도,
인간이 쌓아놓은 도덕률도 사람을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죽음에서 인간을 살리는 길은
오직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만이 가능합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때에
비로소 죽음아래에 있는 우리 자신들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할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진리나 존재에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존재하지도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의심이 드는 것은 인간의 생각안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수 없으며,
하나님이 언급하는 내용(무에서 유의 창조, 생명의 부활등)에 대해서도 인정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들은 그분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선물을 통해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신앙할수 있습니다.

인간자신에게 드는의심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자신을 믿음으로 강화시키는 일입니다.
믿음에 굳게하는 일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볼때에, 가능합니다.

믿음의 대상에 따라 믿음의 성격이나 역사가 다릅니다.
어리석은 믿음의 경우나 현상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에 생겨납니다.
인간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가 따른다고 했습니다.
즉 그말은 의지할만한 힘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고로 인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소망을 가질수 없습니다.
인간을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가 도모한 일이 한순간에 다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의 불멸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그리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실현에 대한 믿음입니다.

확신은 믿음의 닻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마음에 정착시킨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온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듯,
그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인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기질이나 성향은 자신안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믿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에 있어,
그의 이성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성품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의지나 결단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떠나라 했을때에 가족과 친척과 고향땅을 떠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활동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에게 그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착상되어
그 믿음이 자신에게 고착이 되어 믿음이 자신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할동하는 믿음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확신하는 믿음이란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그 확신은 자신안에서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믿음입니다.
결국 그는 그 믿음으로 불가능에 대해
즉 자신의 나이를 극복하고 동시에 사라의 불임과 나이의 한계를 이기고
자녀를 가질수 있는 하나님의 가능을 자신안에서
경험으로서 얻는 단계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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