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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검진이 조심스럽다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한 재생플라스틱 제조회사에서 분쇄작업을 하면서 수십종의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62세 남자가 작년에 비해 폐기능이 10%정도 감소했고, 작업후 폐기능은 작업전에 비해 또 10%정도 감소한 소견을 보였다. 작년 검진에서 흉부엑스레이 촬영상 이상이 있었는데 작업경력 2년째라 비직업성 질환으로 판단하고 호흡기 내과 진료를 보도록 했던 사람이다.  흉부 컴퓨터 단층촬영상 암도 진폐증도 아니었고 호흡세기관지 염증으로 추정되는데 확진을 위해서는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호흡기 내과의사의 의견을 참고하고, 작년 검진을 계기로 40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었는데도 폐기능이 저하된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재검을 냈다.


 8월30일자로 해고되었다고 한다. 들어보니 사측에서 그가 중대한 병을 숨기고 치료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오해하여 그를 비난하면서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환자는 화가 나서 사측이 내미는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을 했다. 아는 노무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일단 싸인하면 상당히 불리하단다. 그러니 일단 가장 빠른 시일내에 사직의사가 없다는 것을 사측에 알려야 하고 법적인 효역을 가지려면 그 내용을 녹음을 해 두어야 한단다. 그러나 그 노부부는 녹음기도 없고 녹음기를 빌리더라도 사용할 자신이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허걱.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여러 과를 전전하다가 우리 과 까지 와서 상담하게 된 사람인데 엠디아이에 의한 천식이 의심되었다. 이후 사측에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하고 작업전환했다가 몇달뒤 다시 엠디아이 공정에 재 배치되자 화가 나서 그만두었다. 그만두고 나서 나를 찾아와서 산재신청하겠다고 했는데 노무사한테 물어보니 고용이 유지되지 않으면 산재신청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안타까왔던 사례이다.

 

 그래서 심각한 직업성 질환이 의심되면 먼저 무슨 일이 있어도 결론이 날 때까지 고용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환자는 특검 문진때 증상이 없어서 재검이 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재검이 나가고 나서 노과장과 간호사가 사업장을 방문해서 사측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여 별 걱정 안 했다. 일단 그 회사 보건관리자인 노과장이 사측에 통화하여 설득하여 일단 보름동안 유보시켰다.

 

  나는 환자 챠트를 들고 호흡기 내과 교수를 찾아가서 의논을 했다. 환자에게 직업성 질환이 있느냐, 비직업성 질환인 경우 업무를 계속 할 수 없는 건강상태이냐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주치의 뿐 아니라 직업성 호흡기 질환에 식견이 풍부한 다른 교수까지 와서 길게 토론을 했다. 일단 호흡기내과쪽에서 일을 빠르게 진행하여 고해상도 컴퓨터 촬영과 메타콜린 유발 검사를 하고 나서 임상 상태를 먼저 파악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제 환자가 모든 검사를 마치고 다시 찾아 왔다.

 

 호흡기 내과 교수의 의견은 "일단 간질성 폐질환은 아니고, 흉부 컴퓨터 단층 촬영상 작년과 비교하여 나빠진 소견은 없다, 폐기능 검사상 경도의 폐쇄성 폐질환 소견이 분명하고 의미있는 기관지 과민성이 있으나 천식이라고 진단하기에는 미흡하다. 금연후에도 폐기능이 나빠진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으나 간혹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에게서 자극성 가스에 노출시 그런 소견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작업환경에 의해 폐기능이 나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천식을 진단할 만큼 나빠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특별한 증상이 없고 일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이 선생님은 직업성 천식환자를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노동자의 처지를 잘 알고 인정이 많은 분이라 말씀하시는 게 다른 임상과 교수들이랑 좀 다르시다. 환자에게 치료를 요하는 호흡기 질환이 없다는 소견서를 써주셨다.

 

  예방적 견지에서 보자면 이 환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 작업을 하지 않는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는 일하고 싶어하고 억울한 해고를 당했고 지금은 그가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나는 특수검진 결과서에 직업성 질환은 없으며 경도 폐기능 저하는 치료를 요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썼다. 이런 건강상태로 그 작업을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충분한 설명을 들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노과장이 회사와 다시 통화를 했는데 계속 근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 잘못한 것이 되어야 하기에 노과장은 사측에 사과를 했다고 한다. 사실 재검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은 회사인데 사과는 우리가 한다.  

 

  하여간 이 건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예민한 문제는 확인 또 확인하고 처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호흡기 내과 교수들과의 토론에서 그들의 풍부한 임상경험으로 부터 배운 것이 많다. 지난 사흘간 우리 모두 힘들었다. 그래도 결과가 해피엔딩이니 낫다. 내 마음 깊은 속에선 환자가 억울함을 풀었으니 이번 계약기간(12월말) 끝나면 그 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꿈틀거린다. 아니, 이럴 땐 그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건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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