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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2

§52) 이렇게[1][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이란] 탁월한 것이[형식주의의 사냥거리가 되어] 생명과 정신을 박탈당하고, [형식주의의] 생명 없는 지가[살아있는 삼중성을 때려잡아 그] 외피를 짐승의 가죽처럼 벗겨서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둘러쓰고 있는 것을 눈뜨고 봐야 하는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삼중성이] 이렇게 운명을 다하고[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삼중성이] 이렇게 가죽으로 남은 상태에서 생명 없는 지가[우리시대의] 정신에 행사하는 폭력을, 정신이 아니라면 최소한 심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폭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삼중성이] 일반적이고 엄밀한[2]형식으로 다듬어져 나가는 것을 또한 인식할 수 있다.1 이런 형식을 갖춤으로써 삼중성이 완성되고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그 일반성을[어떤 원리를 완전히 깨닫고 난 후에는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적용하듯이] 표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1]원문<aber/그러나>. 뭔가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aber>다. 이 <aber>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문단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 같다.

[2]원문<Allgemeinheit und Bestimmt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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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가 보기엔 헤겔도 쉘링한테 뭔가 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