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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5

§55) [오성의 의미는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1]], 실체가 자기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 의미가 이미 이야기되었다.[2] 여기서 이야기된 바로는 그 의미가 실체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면에서 밝혀진 것이다. — 현존재는[본]질, 즉[다른 것이 다 추상된] 자기동일적인 규정, 달리 표현하면[하나로] 규정된 단순성이며, 이렇게[사유의 산물인] 규정된 사상이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 안에 작용하는 오성의[힘]이다.[3] 그래서 아낙사고라스가 처음으로[우주와 현존재의] 본질을 규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본]질은 누스가[4]되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에이도스 혹은 이데아라는[5]개념 등으로 현존재의 본질을[6]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했는데, 이런개념들은 규정된 보편성으로서<종>개념이다[7]. 혹자는<종>이라는 표현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등등의 이념을 담기에는 너무나 비속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 수야 있겠지만, 이런 이념은 실로 종개념 그 이상의, 그 이하도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표현은 멸시하고 다른 표현을 선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표현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개념을 자욱한 안개 안에 두루뭉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럴수록 아직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표현들이다. — 현존재가 바로 종[개념]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단순한 사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성으로서의 사상, 즉 누스가[현존재의] 실체다. 실체는 이런 단순성과 자기동일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자기동일성은[자기긍정못지않게] [자기]부정성이다.[8] 그리고 이 부정성으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현존재는 자신이 해체되는 상태를 맞이한다. 현존재가 현존재가 되는 것은[제한된] 규정성으로서 그런데, 이런 규정성이 첫눈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런 규정성의 운동은 알 수 없는 폭력이[외부에서] 가해진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사유와 현존재의] 규정성은[다른 현존재의 규정성과 관계하기 보다는] 애당초부터[인식되지 못한 상태로]  자기안에[9][자기의] 타자존재를 두기때문에[타자존재와 관계하는 운동이 자기와 관계하는] 자기운동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사유의 단순성에 바로 이런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유의 단순성이란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 안에 차이가 나게 하는 사상임과 동시에 자기 고유의 내면성으로서 순수한 개념이다. 오성은 이렇게 분별하는 힘으로[10]생성되고 이런 생성으로서 정도를[11]아는[12]이성과 부합하는 것이 된다.



[1]이성과 함께 오성이란 개념의 형성과정을 보면 두 갈래의 의미로 생성되었다. 하나는 감각적 지각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인식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와 함께 그 안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원리 자체가 누스, 즉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Artikel „Verstand/Vernunft“ 참조).

[2]서설 §17 이하에서 다뤘다. 의식의 운동, 즉 정신현상학의 주제다. 그럼 오성과 함께 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개념]논리학인가? 의식의 운동은 이해가 가는데, 오성/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 헷갈린다. 뭔가 신비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의 근간에는 우주에 작용하는 원리가 이성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고, 칸트가 이야기한<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e> 이상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다치고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면 어떤 식이든지 목적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스피노자의 목적론 비판 이후 어떤 목적론이 가능할까? 아무튼 앞에서<인식론>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 언어분석철학 입장에서 보면 둘 다 같은 것이고 부족한 것이지만 – 여기서 이야기되는 ‚존재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고 뭔가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듣는 것같이 힘들게 만든다. 요즘에 들어선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조차 수긍이 안가는 판인데, 연필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여 뭔가를 스스로 쓰고 지운다고 하면 광적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원문<Verstand des Daseins>.이 소유격은 주격 소유격임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이다. 그러나 오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서에서 규정하는 여기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겠다.

[4]원문<Nus>. <noein/인식하다>의 명사<noos> 혹은<nous>를 이야기하고 있다.<noema>도 역시<noein>에서 파생된 낱말로서<사상>을 의미한다.

[5]원문<Eidos oder Idea>.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Idea>를 플라톤이 이야기한<이데아론>과 연결시키고, <Eidos>는 플라톤의<이데아론>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의<형상론>에서 이야기된<Eidos>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Eidos>와<idea>를 동일선상에 놓는<oder>가 이해안된다. 그리고 왜 순서를 지켜<Idea oder Eidos>라고 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이데아론>이 플라톤 자신이 만들어 논 것이 아니라 후세대가 만든 것이고, 플라톤은<이데아>와 관련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사용된<Eidos>는 플라톤이<이데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낱말에 속하는 것 같다.

[6]원문<Natur>

[7]원문<[Eidos oder  Idea, d.h.] bestimmte Allgemeinheit, Art>. <규정된 보편성, 즉 종>이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제시한<형상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플라톤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이데아>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현상의 본질을 묻는<정의/Definition>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doxa/사견>과 <Episteme/“학문“)간의 관계를 다루는 차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고늘어지는 차원은 두번째 사견과 학문을 다루는 차원의 맥락에서 이야기된 개별자와 이데아간의 관계다. 플라톤에 따르면<Episteme>는 혼이 태어나기 전에 보았지만 몸으로 태어나면서 다 잊어버린 본질을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기론>의 신비성은 제쳐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기서 이야기된<이데아>는 칸트가 이야기한<선험적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선험적인 것으로서<이데아>는 개별자의<참다운 존재근거/to aition to onti>가 되고 개별자는 이런 참다운 존재근거에<분유(分有)/Methexis>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한다. 플라톤이 정말 개별자와 이데아가 따로 논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개별자와 따로 노는 것/para ta kath’ hekasta choris>이라고 비판한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질료/hyle/Materie>에 대립되는 개념으로<형상/Eidos/Form>을 도입하여 사물의 모든 성질은, 그것의 인식가능성, 규정성, 제한성을 포함하여<Eidos>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바로 이<Eidos>가<개별자가 그런 개별자가 되게 하는 개별자에 속한/내재하는 본질/to ti en einai hekastou>이고<첫(!) 본질/he prote ousia>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따로 노는<이데아>가 본래적인 본질이 되는 첫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hyle>와<eidos>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양대원칙이고 서로<떼어놀 수 없는 것/ou choriston>이라고 한다. <hyle>와<eidos>의 관계는<dynamis/가능태>와<energeia/실재태>와 비교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능태>로서의<hyle>는  <유/gene>와 같은 것이고, <eidos>는 모든<차이/diaphorai>를 거쳐서 규정된 것이 된다. 즉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통한 종(Art)과 같은 것이다. 이런 종으로서<eidos>는 보편본질이 된다. (철학개념사사전4권55쪽 이하 참조). 근데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을 따르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플라톤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양자를 동선에 놓고 거론한다. 아니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따로 논다는 생각이 애당초 잘못된 생각인지,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 말하는 것이 같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8]원문<Aber diese Sichselbstgleichheit ist ebenso Negativität>. 이것 정말 이해안된다. 이 부정의 힘이 어디서 온다는 것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보편적 본질로서의<eidos>, 즉<종>으로서의 본질보다는 개별자의 본질(to ti en einai)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여기서 부정성이란 것을 뭔가 더 참다운 것이 있어서 덜 참다운 것을 부정하여 거기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건 플라톤이 이야기한<원본/paradeigma>을 따라가는<Methexis/분유>가 아닌가? 이것이 또 참다운<분유>의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인 것과 이데아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이<Methexis>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부정은 뭔가 부족한 것의 부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헷갈린다.

[9]원문<an ihr>

[10]원문<die Verständigkeit>

[11]<Maß>란 개념을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12]원문<die Vernünfti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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