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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와 비판 2

 "Die wahrhafte Widerlegung muß in die Kraft des Gegners eingehen und sich in den Umkreis                seiner Stärke stellen." (헤겔, 논리학, 2권, “Vom Begriff im Allgemeinen/개념일반에 관하여”)

 “진정한 반박을 행하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힘 자체의 속으로 파고들어서 바로 그 힘이 휘둘러 대는 작용권내에 진을 치고 들어앉아야만 한다.”(임석진 역)
 

 

반대자를 유치한 것으로 규정하고 어린아이 팔 비틀듯 비틀어 넘어뜨리고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다. 이런 만족감에 똥물을 퍼붓는 일이 또한 만족감을 줄 수도 있겠다. 둘 다 유치하다고 고개를 획 돌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만족감이 “쉽게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통용”(헤겔, 정신현상학, 서론)되는 현실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에 관한 이른바 좌파의 비판이 “타자화”의 담론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의자놀이>가 노동운동의 주변을 맴돌면서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투쟁을 도구화 한다는 것이 이런 비판의 논지다. 그 궤도의 소실점은 아마 새누리당 박근혜가 “국민을 위한 복지”, 달리 표현하면 “모든 계급을 위한 복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나온 마당에 리버럴한 세력이 버린 아이 취급했던 노동자계급을 안으려는 것은 차기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사진을 증거물로 내놓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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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전인권이 18일 저녁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들국화와 함께하는 공지영의 의자놀이'에서 노래하는 가운데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과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민중의 소리 http://www.vop.co.kr/A00000531856.html)

 

 

숨가쁜 비판이며 유효기간이 빤히 내다보이는 비판이다.

이런 타자화담론은 진정성에 기반하고 있다. 공지영은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이런 타자화담론의 지평을 인지하고, 같은 지평에서 이른바 좌파의 진정성을 문제시하면서 역공한다.

공지영: “언제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 내가 너무 단순한가? 정말 무섭다. 겉으로는 위선을 떨고 다니겠지....내면으로는 온갖 명예욕과 영웅심 그리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남의 헌신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진심인 적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헐!!”

진정성에 기반한 타자화담론이 좌파의 분석 및 비판인가? 헤겔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이행한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었던가? 명료했던 레닌의 개념사용이 실존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벼룩시장에 나부기는 쓰레기가 된 지금 좌파의 분석과 비판은 어디에 와 있는가? 실체가 모호한 <Empire>에 대응하는 더욱 모호한 <Multitude>를 운운하고 있지 않는가? 공지영이 말한 "실체의 모호함"이 바로 이런 퇴보한 좌파의 분석 및 비판능력을 그대로 참조하고 있지 않는가?


<의자놀이>의 힘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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