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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7
    정신현상학 서설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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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9/25
    정신현상학 서설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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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9/24
    정신현상학 서설 § 56, 57, 58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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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9/24
    정신현상학 서설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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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9/22
    정신현상학 서설 § 54-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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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9/21
    정신현상학 서설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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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9/20
    정신현상학 서설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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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17
    정신현상학 서설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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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9/17
    정신현상학 서설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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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9/14
    정신현상학 서설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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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9

§59)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사유태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이 개념적인 사유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다 뚜렷하게 부각된다. — 논변 위주의 사유는 한편으로는 파악된 내용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이를 반박하고 무참(無慘)하게 만들기 일쑤다. 내용이 말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식의 통찰은 한낱 부정적인 것이다. 논변 위주의 사유가 마지막으로 하는 행위는 이렇게 내용을 끝장내는 것으로서 자신을 뛰어넘어[1]새로운 내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용을 다시 갖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뭔가 다른 것을 데려다가 앞에 세워놓고 다뤄야만 한다.[2] [이렇게 내용에 종지부를 찍는 부정성일 뿐인 논변 위주의 사유가 [내용파악에서 하는] 마지막 행위는 공허한 자아로 [다시] 돌아가는 반성일 뿐이며, 이것은 텅빈 지가 [내용을 다 꿰뚫어 보았다고 자찬하고, 내용이 별볼일 없다고 뻐기는] 우쭐함일 뿐이다. — 이런 텅빈 지의 우쭐함에는 지의 내용이 공허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의 인식 그 자체가 공허하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이 공허함은 부정된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부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은[자기가 내용에 행사하는 부정 자체를 대상화하여] [그 부정이 내용안에서 하는 운동을] 내용으로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사태 안에 머무르는 법이 없고 항상 그 밖을 향하고 있다.[3] 그래서 이런 반성은 공허함을 주장하는 것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있는 통찰보다 더 앞서간다고 착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개념적인 사유에는 부정적인 것이 바로 내용 그 자체에 속하고 동시에 내용에 내재되어 있는 운동 및 [엄연한] 규정이 된다. 그리고 이런 운동과 규정을 통해서 완성되고 또 이런 운동과 규정이란 속성을 갖는 전체로서[4]긍정적인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결과로 파악하면 그것은[내용에 내재하는] 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자기를] 제한하는 엄연한] 부정이며[5]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1]원문<über sich hinaus>

[2]서론 §7, 8참조

[3]원문<darüber hinaus>. <über sich hinaus/[자신을 스스로 뛰어넘는] 내재적 초월성/immanente Transzendenz>과 형식적 사유의 밖에 매달리는 <초월적 초월성/transzendente Transzendenz>이 대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형식적 사유는 <정신현상학> 서설 §7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죽음에 맞서게 되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덜덜 떨면서> [빌립보2.12과 키에르케고르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뭔가 초월적인 위대한 존재자를 찾게 된다.

[4]원문<als Ganzes derselben>. 여기서 소유격을 행위주체를 나타내는 소유격과 성질을 나타내는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전체를 이루는 것은 부정의 운동을 통해서이고 또 전체에는 부정을 통한 운동과 규정성을 속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5]원문 <das bestimmte Negative>. 서론 §7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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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8

§58) 그래서[위와 같은 작태를 멀리하고] 학문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씌우는 멍에를[1]마다하지 않고 몸소 걸머지고[황소가 논밭을 갈듯이] 노동해야 한다. 개념이 씌우는 멍에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데는 개념 그 자체에Aufmerksamkeit[주의][2]하는 것이 요구된다. 즉Ansichsein [즉자존재], Fürsichsein [대자존재], Sichselbstgleichheit [자기동일성][3] 등과 같은[개념의 운동에 나타나는] 단순한 규정에 파뭍혀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정이[대상의 왜곡되지 않은 모습인]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수한 자기운동이기 때문이다. 혼의 개념은 물론[정신이라는] 뭔가 더 높은 것을 지향하고 있지만 말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표상에 기대여 앞으로 나아가는[사유]습관에게는 개념에 의해 표상의 줄이 단절되고 정지되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이점은 비실재적인 사상들을 놓고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형식적인 사유에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사유습관은 물질적 사유라고도 칭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발적인 의식이 단지 어쩌다가 소재에 퐁 빠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식은[어쩌다가 양반이 된 놈이 지가 무슨 한얀 의복을 입고 태어난 양반이나 되는양  똥물에 빠지면 재수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기 급급하고 똥물을 씻어내고 체면을 차려 다시 하얀 의복만을 입는 양방행세를 하기 바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소재에서 다시 벗어나 자기란 것, [즉 자기는 순수한 의식이란 것]을 말끔하게 부상시킴과 함께 그런 자기란 것에 안주하기에[4]급급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이리저리 따져보는 사유는 이와 대조적으로[지가 무슨 도사나 되는 양 이젠 어떤 똥물도 더 이상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식으로] 어떤[천박한] 내용과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자유를 행사하고 자기가 우뚝 서있는 바 이젠 어떤 내용도 자기를 담글 수 없다고 우쭐해 하는 것이다. 이런 우쭐함에 젖어있는 사유를 다그쳐, 내용을 자의적으로 이리저리 뒤흔드는 동력이[5]되는 그 따위 자유는 갖다버리고, [그런 자유를 행사하는] 대신 그런 자유는 내용 속에 함몰시켜[죽여버리고 다시는 내용에 손대는 일이 없게 하여] 내용이 자신의 속성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내용이[운동의 주체가 되는] 자기를[6]자기 것으로 하여 스스로 운동하게 가만두고[7], 이러한 운동을 바라보기만 하게 하는 것인데, [우쭐함에 젖어있는 사유에게는 실재로 하기 힘겨운 일이다.] 개념을 능욕하여 그 안에 내재하는 리듬을 자기 멋대로의 박자로 대치하는 발상을 물리치고 개념에 자의와 어디에선가 취득한 지혜를 수단으로 삼아 침범하지 않는 것, 바로 이런 자제가[8]개념에Aufmerksamkeit를 온통 집중하는 하는데 빠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동력이[9]된다.



[1]원문<Anstrengung des Begriffs>. 어원을 살펴보니<Anstrengung>에는<Strang/역어꼬은 줄>이란 의미가 어근이다. <멍에>로 번역했다. 개념의 필연적인 운동이<멍에>와 같다는 의미가 있고, 개념이 이런 멍에를 씨운다는 의미와 함께 이런 멍에를 또 달갑게 받아들인다는 변증법적 운동이<Anstrengung des Begriffs>란 표현에 스며있는 것 같다.

[2]<Aufmerksamkeit>를 담아내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해서 원문을 그대로 두었다. <Aufmerksamkeit>에도 역시 변증법적 운동이 스며있는 것 같다. <Aufmerksam>하려면 우선 주의가 산만한 자신을 하나로 엮어꼬아[의식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집중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려 이렇게 집중하는 가운데 자신은 사라지고, 이렇게 집중된 힘에 대상이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즉 대상의 힘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Aufmerksamkeit>는 사랑의 운동과 유사한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힘이 대상의 힘이 되게 하기 때문에<Aufmerksamkeit>은 또한<배려> 혹은<친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3]원문을 그대로 두었다. 전문용어이기 때문에<Ansichsein>을<즉자존재>라고 한다고 해서 더 이해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풀어 번역한다고 해서 더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면<정신현상학>을 새로 써야 할 것이다.

[4]원문<bei sich sein>

[5]원문<Prinzip/원리>

[6]원문<das Selbst>

[7]키에르케고르가<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한<자기/Selbst>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거기서 물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다. 

[8]원문<Enthaltsamkeit>. 훗셀의<Epoché> 혹은<eidetische Reduktion>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9]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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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6, 57, 58 첫 문장

§56) 이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의 개념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하는 것의 속성이[1]바로 논리적 필연성이 성립되는 근거다.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이성적인 것이며, 유기적인 총체를 그 마디마디의 리듬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논리적 필연성은 내용[자체가] 개념과 본질이 된다는 것과 더불어 그런 내용이 지가 된다는 것이다. — 한마디로, 오로지 이 논리적 필연성만이[전체를 꿰뚫어 보는] 사변적인[2]것이다. — 구체적인 형태는 자신을 스스로 움직이는 가운데 자신을 단순한 규정성[3]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논리적 형식으로 승화하여 본질성만 갖춘 것으로 존재한다. 구체적인 형태의 구체적인 현존재는 오로지 이런 운동이며 바로[4]논리적인 현존재가[5]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밖으로부터 형식주의의 형식을 덮어 씌울 필요가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거기에 애당초부터 스며있는[6]형식주의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이 형식주의는 외피적인 형식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형식이란 구체적인 내용이 자기 터전에서 거기에 어울리게 생성되어 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57) 이 같이 한편으로는 내용과 분리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자신을 분절하여] 리듬을[7]규정해야 하는 학문적 방법의 속성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은, 위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사변적 철학에서 이루어진다. — 지금 이야기된 것은 학문적 방법의[껍데기]개념은[8]표현하고 있지만, 지금상황에서는 뒤에 가서 완성되는 것을 앞당겨 단언하는 것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단언의 진부를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이야기식으로 역어진 개요를 가지고 따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그것은 그렇지 않고 그와 반대로 이렇다>라고 단언하는 식으로, 상투적인 관념들을 확드러나고 모두에게 알려진 진리인양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나열하는 식으로, 아니면 신적인 내적 직관만 꿰뚫어 볼 수 있는[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성스러운 갑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양 보란 듯이 내놓고 단언하는 식으로 [여기서는 단언일 수 밖에 없는 학문적 방법에 대한] 단언에 대한 반론을 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뭔가 모르는 것을 대하는 지의 첫 반응을 보면, 살펴본 바와 같이 의례 우선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자신의 자유와 통찰력, 다시 말하면 외부의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위를 사수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지가 여기서 대하는 것은 처음엔 외부 권위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반항의 또 다른 목적은[직관이라고 내놓은 것이 구구절절 습득한 것임을, 영특한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멍청해서] 애써 습득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는데 있다. 이와 같은 작태는 정치극장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박수갈채로 받아들이는[자기의 무식이 뽀록날까봐/아니면 숙청될까봐 무서워 같이 박수치는] 행위와 똑 같은 유의 반응인데, 여기서 직관은 극단적인 혁명적 언사, 그리고 행동과 같은 것이다.[9]

 

§58) 그래서 학문에는[위와 같은 작태를 멀리하고] 개념의 힘겨움/노동[10]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떠맡는 일 없이는 열중할[11]수 없다.



[1]원문<In dieser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 뭔 말인가? 이 문장 구조가 왠지 하이데거가<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제기와 관련해서 현존재[여기서는 인간을 의미한다.]를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고, 그 근거로 제시한 „Diesem Seienden {dem Dasein} [geht es] in seinem Sein um dieses Sein selbst/현존재에게는 존재하는 가운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에[무관심하지 않고] 그것을 움켜쥐려는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데거는 여기서<in seinem Sein>을<실존/Existenz>이라고 하고 현존재는 실존하는 가운데 이미 이런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현존재, 즉 인간은 존재론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실존의 차원에서 행한다는 말이다. 참다운 자기 모습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이어 실존이란 현존재가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현존재가 이미 그속에 빠져있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가능성 중 그 하나이며, 현존재가 존재하는 모습은 이렇게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니면 그런 존재와 관계하지 않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무튼 양자택일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es selbst oder nicht es selbst zu sein“). (하이데거, Sein und Zeit, 12쪽 참조).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에 기대어 윗 문장을 살펴보면 „존재하는 것은(was ist) 존재하는 가운데(in seinem Sein)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될 수가 있겠다. 여기서 부정형 „zu sein“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하는 가운데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가?

[2]„사변적인 철학이란 모든 것이 이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의식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념이란 사상 속에 있는 참다운 것으로서, 단지 직관이나 관념이 아니다. 사상속에 있는 참다운 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대립을 빗고 둘로 갈라져 있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이 각기 갖는 양면이 사유규정이며, 이런 사유규정을 통일한 것을 이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변적인 사유란 현실을[둘로] 해체하여 이런 차이들이 사유규정에 따라서 대립관계들을 빗게하고, 둘로 갈라진 것의 통일로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Spekulative Philosophie ist das Bewusstsein der Idee, so dass alles als Idee aufgefasst wird; die Idee aber ist das Wahre in Gedanken, nicht als bloße Anschauung oder Vorstellung. Das Wahre in Gedanken ist näher dieses, dass es konkret sei, in sich entzweit gesetzt, und zwar so, dass die zwei Seiten des Entzweiten entgegengesetzte Denkbestimmungen sind, als deren Einheit die Idee gefasst werden muss. Spekulativ denken heißt ein Wirkliches auflösen und dieses in sich so entgegensetzen, dass die Unterschiede nach Denkbestimmungen entgegengesetzt sind und der Gegenstand als Einheit beider aufgefasst wird.“) (헤겔, 종교철학강의I, stw Bd. 16/20, 30쪽)

[3]원문<Bestimmtheit>

[4]원문<unmittelbar>

[5]온갖 사물도 실존하는 인간과 같이 존재론적이란 말인가?

[6]원문<an ihm selbst>

[7]서설 §26에서 언급된 헤라클리트가 말한<리듬과 절/metra>이란 의미로 번역했다.

[8]원문<Begriff>. <bloßer Begriff>이란 의미로 번역햇다.

[9][개념]논리학이 헷갈리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헤겔 자신이 수긍하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는데,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고 여기선 단지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너무 쉽게 넘어간다.

[10]원문<Anstrengung des Begriffs>.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개념을 따라가는 것이 힘겨울 뿐만 아니라 개념이 스스로 힘겹게 운동한다는 것이고 노동과 개념[운동]은 성질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11]원문<studium>. <노력하다>라는 어원의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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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5

§55) [오성의 의미는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1]], 실체가 자기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 의미가 이미 이야기되었다.[2] 여기서 이야기된 바로는 그 의미가 실체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면에서 밝혀진 것이다. — 현존재는[본]질, 즉[다른 것이 다 추상된] 자기동일적인 규정, 달리 표현하면[하나로] 규정된 단순성이며, 이렇게[사유의 산물인] 규정된 사상이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 안에 작용하는 오성의[힘]이다.[3] 그래서 아낙사고라스가 처음으로[우주와 현존재의] 본질을 규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본]질은 누스가[4]되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에이도스 혹은 이데아라는[5]개념 등으로 현존재의 본질을[6]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했는데, 이런개념들은 규정된 보편성으로서<종>개념이다[7]. 혹자는<종>이라는 표현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등등의 이념을 담기에는 너무나 비속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 수야 있겠지만, 이런 이념은 실로 종개념 그 이상의, 그 이하도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표현은 멸시하고 다른 표현을 선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표현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개념을 자욱한 안개 안에 두루뭉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럴수록 아직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표현들이다. — 현존재가 바로 종[개념]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단순한 사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성으로서의 사상, 즉 누스가[현존재의] 실체다. 실체는 이런 단순성과 자기동일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자기동일성은[자기긍정못지않게] [자기]부정성이다.[8] 그리고 이 부정성으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현존재는 자신이 해체되는 상태를 맞이한다. 현존재가 현존재가 되는 것은[제한된] 규정성으로서 그런데, 이런 규정성이 첫눈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런 규정성의 운동은 알 수 없는 폭력이[외부에서] 가해진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사유와 현존재의] 규정성은[다른 현존재의 규정성과 관계하기 보다는] 애당초부터[인식되지 못한 상태로]  자기안에[9][자기의] 타자존재를 두기때문에[타자존재와 관계하는 운동이 자기와 관계하는] 자기운동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사유의 단순성에 바로 이런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유의 단순성이란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 안에 차이가 나게 하는 사상임과 동시에 자기 고유의 내면성으로서 순수한 개념이다. 오성은 이렇게 분별하는 힘으로[10]생성되고 이런 생성으로서 정도를[11]아는[12]이성과 부합하는 것이 된다.



[1]이성과 함께 오성이란 개념의 형성과정을 보면 두 갈래의 의미로 생성되었다. 하나는 감각적 지각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인식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와 함께 그 안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원리 자체가 누스, 즉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Artikel „Verstand/Vernunft“ 참조).

[2]서설 §17 이하에서 다뤘다. 의식의 운동, 즉 정신현상학의 주제다. 그럼 오성과 함께 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개념]논리학인가? 의식의 운동은 이해가 가는데, 오성/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 헷갈린다. 뭔가 신비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의 근간에는 우주에 작용하는 원리가 이성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고, 칸트가 이야기한<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e> 이상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다치고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면 어떤 식이든지 목적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스피노자의 목적론 비판 이후 어떤 목적론이 가능할까? 아무튼 앞에서<인식론>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 언어분석철학 입장에서 보면 둘 다 같은 것이고 부족한 것이지만 – 여기서 이야기되는 ‚존재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고 뭔가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듣는 것같이 힘들게 만든다. 요즘에 들어선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조차 수긍이 안가는 판인데, 연필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여 뭔가를 스스로 쓰고 지운다고 하면 광적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원문<Verstand des Daseins>.이 소유격은 주격 소유격임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이다. 그러나 오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서에서 규정하는 여기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겠다.

[4]원문<Nus>. <noein/인식하다>의 명사<noos> 혹은<nous>를 이야기하고 있다.<noema>도 역시<noein>에서 파생된 낱말로서<사상>을 의미한다.

[5]원문<Eidos oder Idea>.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Idea>를 플라톤이 이야기한<이데아론>과 연결시키고, <Eidos>는 플라톤의<이데아론>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의<형상론>에서 이야기된<Eidos>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Eidos>와<idea>를 동일선상에 놓는<oder>가 이해안된다. 그리고 왜 순서를 지켜<Idea oder Eidos>라고 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이데아론>이 플라톤 자신이 만들어 논 것이 아니라 후세대가 만든 것이고, 플라톤은<이데아>와 관련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사용된<Eidos>는 플라톤이<이데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낱말에 속하는 것 같다.

[6]원문<Natur>

[7]원문<[Eidos oder  Idea, d.h.] bestimmte Allgemeinheit, Art>. <규정된 보편성, 즉 종>이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제시한<형상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플라톤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이데아>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현상의 본질을 묻는<정의/Definition>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doxa/사견>과 <Episteme/“학문“)간의 관계를 다루는 차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고늘어지는 차원은 두번째 사견과 학문을 다루는 차원의 맥락에서 이야기된 개별자와 이데아간의 관계다. 플라톤에 따르면<Episteme>는 혼이 태어나기 전에 보았지만 몸으로 태어나면서 다 잊어버린 본질을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기론>의 신비성은 제쳐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기서 이야기된<이데아>는 칸트가 이야기한<선험적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선험적인 것으로서<이데아>는 개별자의<참다운 존재근거/to aition to onti>가 되고 개별자는 이런 참다운 존재근거에<분유(分有)/Methexis>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한다. 플라톤이 정말 개별자와 이데아가 따로 논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개별자와 따로 노는 것/para ta kath’ hekasta choris>이라고 비판한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질료/hyle/Materie>에 대립되는 개념으로<형상/Eidos/Form>을 도입하여 사물의 모든 성질은, 그것의 인식가능성, 규정성, 제한성을 포함하여<Eidos>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바로 이<Eidos>가<개별자가 그런 개별자가 되게 하는 개별자에 속한/내재하는 본질/to ti en einai hekastou>이고<첫(!) 본질/he prote ousia>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따로 노는<이데아>가 본래적인 본질이 되는 첫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hyle>와<eidos>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양대원칙이고 서로<떼어놀 수 없는 것/ou choriston>이라고 한다. <hyle>와<eidos>의 관계는<dynamis/가능태>와<energeia/실재태>와 비교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능태>로서의<hyle>는  <유/gene>와 같은 것이고, <eidos>는 모든<차이/diaphorai>를 거쳐서 규정된 것이 된다. 즉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통한 종(Art)과 같은 것이다. 이런 종으로서<eidos>는 보편본질이 된다. (철학개념사사전4권55쪽 이하 참조). 근데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을 따르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플라톤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양자를 동선에 놓고 거론한다. 아니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따로 논다는 생각이 애당초 잘못된 생각인지,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 말하는 것이 같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8]원문<Aber diese Sichselbstgleichheit ist ebenso Negativität>. 이것 정말 이해안된다. 이 부정의 힘이 어디서 온다는 것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보편적 본질로서의<eidos>, 즉<종>으로서의 본질보다는 개별자의 본질(to ti en einai)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여기서 부정성이란 것을 뭔가 더 참다운 것이 있어서 덜 참다운 것을 부정하여 거기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건 플라톤이 이야기한<원본/paradeigma>을 따라가는<Methexis/분유>가 아닌가? 이것이 또 참다운<분유>의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인 것과 이데아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이<Methexis>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부정은 뭔가 부족한 것의 부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헷갈린다.

[9]원문<an ihr>

[10]원문<die Verständigkeit>

[11]<Maß>란 개념을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12]원문<die Vernünfti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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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4-수정

{어제 올린 정신현상학 서설 §54 번역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원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보다는 앞뒤가 맞는/읽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자라도,  [원문이 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뭔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번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올린다.} 

 

 

§54) [이런 풍부한 내용이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통틀어서 이야기 하자면[1]앞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어로 사용되는] 실체[2]그 자체에 [애당초부터] 주체가/[생동하는 주체로서의 힘이] 스며들어 있기[3]때문에 [모든 규정이 부정된 이 실체가 갖는] 형형색색의 내용은 [밖에서 누군가가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실체가 자기반성을 통해서 스스로 구별짖는 것이다.[4]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뭔가로 존재하는} 현존재에서 한번 살펴보자.] 현존재가 존속하는 터전/본질, 즉 실체는[5]자기동일성[6]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현존재는 해체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7] 더 살펴보면[8]이런 자기동일성이란 순수한 추상이며, 그리고 바로[9]이런 추상이 사유가 되는 것이다.[10] 내가 여기서 질이라는 말을 사용할땐 [다른 모든 규정은 제쳐놓고 현존재를 {셀 수 있는} 하나로 규정하는] 단순한 규정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현존재는 이런 의미의 질을 통해서 다른 현존재와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란 것 자체가 성립된다. [하나로서의] 현존재란 독자성을 통해서, 달리 표현하면 [그것외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 추상한/ 아무런 분열이 없이 해맑은] 자기와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11]존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본질이 [사유의 산물인] 사상인 것이다.[12] — 바로 여기에 <존재는 사유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투적이고 몰개념적으로 운운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 현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존속하고, 자기동일성은 순수한 추상성이기 때문에 [결국] 현존재의 터전/본질이란 현존재가 스스로 자기로부터 추상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현존재의 터전/본질은 현존재와 불일치를 이루고 헤체되어 현존재를 바깥으로부터 거두어 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간 내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존재가 생성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젠 현존재를 떠난 존재자 전반을 살펴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은 [사상규정을] 본질로 하고 있다. 존재자의 본질이 이렇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본질이 지의 대상이 되다는 면에서 지가 하는 일이난 낯선 것을 다루는, 즉 반성하는 순간 내용에서 벗어나는 자위행위하는 반성이 아니라 [내용 안에 머무르는 반성이다.][13] 학문은 [내용적인 차원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다투기 만을 일삼는 독단론 대신 [단지 반성의 차원에서, 즉 데카르트와 같이 내용 안으로 침강하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서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는 반성을 통한] 자기 확신과 같은 것을 단언하는 독단론을 운운하는 관념주의가 아니다. 학문은 이와 맥을 달리하는[14]것이다. — 지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 되는] 내용이 스스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관조하는 가운데 내용 안으로 침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운동하는] 자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의 활동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대상이 되는 내용인] 타자존재 안으로 침강하지만 또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가 하는 활동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해 보이는 간계와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지가 하는 일이란[자기동일성이란] 규정성이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삶을 전개해 가지만, 그 일의 결과는 정반대로 스스로를 해체하여 전체의 한 마디가[15]되는 행위임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1]원문 <dadurch überhaupt>

[2]원문 <Substanz>. <실체>란 것이 알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아리달송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본질/Ousia, To ti en einai>, <바탕/Hypokeimenon> 등에 이어 스피노자가 말한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등 헷갈린다. 이런 헷갈린 상태로 이 문단을 다시 읽어 내려간다. 스피노자를 따라 실체를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 스피노자는 이것이 신이라고 한다 – 으로 이해한다면 실체란 모든 규정을 부정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실체가 주체란 면에서, 그리고 주체가 하는 일이 부정운동이란 면에서 자기부정이 아닌가?

[3]원문 <Die Substanz [ist] an ihr selbst Subjekt.> <정신현상학> 서설 §17에서 이야기된 것이 재개되고 있다. <an ihr selbst>라는 표현과 관련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왜냐햐면, <ihr>가 주어인 <Substanz>를 가르키기 때문에 재귀대명사 <sich>가 사용되어야 한다. <an sich> 대신<an ihr>를 사용한 이유는Terminus Technicus로 사용되는<an sich>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실체가 주체다>라는 사실은 주어가 되는 실체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주어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실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만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서론 §17에서 실체를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an ihr>라는 표현에는 이렇게 실체가 주체라는 것이 처음에 외부에서만 파악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실체가 스스로 주체라고 인식할 때, 즉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의 파악과 같아질 때 <정신현상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정말 같아지냐가 문제다.

[4]원문 <Aller Inhalt [ist] seine eigene Reflexion in sich.> 처음엔 <모든 내용은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이 무슨 말인지, 번역해 놓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알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문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헤겔이 소유대명사를 좀 헷갈리게 사용한다는 점에 기대어 소유대명사 <sein/그것의>이 이 문장의 주어로 사용된<aller Inhalt>를 가리키지 않고, 부속문장의 술어로 사용된 <Subjekt/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해 보았다. 이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니 스피노자가 했던 이야기를 헤겔이 반복하는 것 같다. <aller>는<allerlei>란의미로번역했다.

[5]원문 <das Bestehen oder die Substanz eines Daseins>. 실체가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Hypokeimenon/바탕>과 같은 것인가?

[6]원문 <die Sichselbstgleichheit>. 이<자기 동일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to ti en einai>와 같은 것인가?

[7]정말 해체되는가? 그리고 자기동일성이란 것이 정말 [애초부터 있는] 바탕/본질인가. 키에르케고르에 기대어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서술하자면 <자기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또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Zu sein, was man nicht ist, und nicht zu sein, was man ist.”/Michael Theunissen, Negative Theologie der Zeit, 참조)이 아닌가 한다. 해체되어 정신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자기, 또는 자기동일성의 해체라기 보다는 이런 미칠지경인 상황을<종합해 내는 능력/synthetische Leistung)이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자기동일성이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종합해 내는 능력>의 결과인 것 같다.

[8]원문 <aber>

[9]원문 <aber>

[10]오성이 하는 일이 원래 현존재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 곧 추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헤겔은 이 추상을 별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맑스가 <Grundrisse>에서 이야기한 <Abstraktionsverfahren>도 살펴봐야 하고…

[11]원문  <durch diese Einfachheit mit sich selbst>. 이건 정말 사유의 규정이지 현존재가 현존하는 모습은 아닌 것같다.

[12]원문 <Aber dadurch ist es wesentlich der Gedanke>.

[13]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맑스가 이야기한 <실천> 개념에 견주어 보면 자위행위인 것 같다.

[14]원문<sondern>

[15]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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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4

§54) [이런 풍부한 내용이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통틀어서 이야기 하자면[1]앞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어로 사용되는] 실체 그 자체에 [애당초부터] 주체가/[생동하는 주체로서의 힘이] 스며들어 있기[2]때문에[사물이 갖는] 형형색색의[3]내용은 [밖에서 누군가가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스스로 자기반성을 통해서 구별짖는 것이다.[4] 현존하는 뭔가의 실체, 달리 표현하면 뭔가가 [그것으로] 현존하는 터전은 자기동일성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현존재는 바로 해체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살펴보면[5]이런 자기동일성이란 순수한 추상이며, 그리고 바로[6]이런 추상이 사유가 되는 것이다.[7] 내가 질이라는 것을 말할땐 [현존재를 {셀 수 있는} 하나로서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규정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현존재는 이렇게 질을 통해서 다른 현존재와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란 것 자체가 성립된다. 현존재란 이런 [하나로서의] 독자성, 달리 표현하면 [그것외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내부에 아무런 분열이 없는] 자기와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8]존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또한 본질적으로 [사유의 산물인] 사상인 것이다.[9] — 바로 여기에 <존재는 사유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투적이고 몰개념적으로 운운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 현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존속하고, 자기동일성은 순수한 추상성이기 때문에 현존재란 결국 스스로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추상하는, 달리 표현하면 [추상이전의??] 자신과 불일치를 이루고 해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체된 현존재란 자기 내면성[만]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바깥으로부터 거두어 자기 안으로[만]  [기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존재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 같은 존재자의 속성 때문에, 그리고 지에 대하여 존재자가 이런 [현존재의] 속성을 갖을 때, [이렇게 자기 안으로 기어 들어간 내면성인] 내용을 다루는 지는 낯선 것을 다루는, 즉 반성하는 순간 내용에서 벗어나는 자위행위하는 반성이 아니라 [내용 안에 머무르는 반성이다.][10] 학문은 주장만 일삼는 독단주의를 축출하고 자기 확신 등 뭔가를 관념적으로 확실하다고 단언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독단주의와는 완전히 다른[11]것이다. — 지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 되는] 내용이 스스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관조하는 가운데 내용 안으로 침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운동하는] 자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의 활동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대상이 되는 내용인] 타자존재 안으로 침강하지만 또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가 하는 활동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해 보이는 간계와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지가 하는 일이란 현존재가 [자신을 자기동일성으로] 규정하고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삶을 전개해 가지만, 그 일의 결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해체하여 전체의 한 마디가[12]되는 하는 행위임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1]원문<dadurch überhaupt>

[2]원문<Die Substanz [ist] an ihr selbst Subjekt.> <정신현상학> 서설 §17에서 이야기된 것이 재개되고 있다. <an ihr selbst>라는 표현과 관련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왜냐햐면, <ihr>가 주어인 <Substanz>를 가르키기 때문에 재귀대명사 <sich>가 사용되어야 한다. <an sich> 대신<an ihr>를 사용한 이유는Terminus Technicus로 사용되는 <an sich>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실체가 주체다>라는 사실은 주어가 되는 실체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주어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실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만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서설 §17에서 실체를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an ihr>라는 표현에는 이렇게 실체가 주체라는 것이 처음엔 외부에서만 파악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실체가 스스로 주체라고 인식할 때, 즉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의 파악과 같아질 때<정신현상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정말 같아지냐가 문제다.

[3]원문<aller  Inhalt/모든내용>. <allerlei Inhalt>란의미로번역했다.

[4]원문<Aller Inhalt [ist] seine eigene Reflexion in sich.>

[5]원문<aber>

[6]원문<aber>

[7]오성이 하는 일이 원래 현존재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 곧 추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헤겔이 이야기하는 추상이란 것에는 별다른 것이 있단 말인가?

[8]원문<durch diese Einfachheit mit sich selbst>

[9]원문<Aber dadurch ist es wesentlich der Gedanke>.

[10]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맑스가 이야기한 <실천> 개념에 견주어 보면 자위행위인 것 같다.

[11]원문<sondern>

[12]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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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3

§53) 학문이란 자기를 스스로 조직해 나가는 것으로서 생동하는 개념의 고유한 삶을 두루 거치면서 체계화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1] 그래서[자기 제한적인] 규정이[형식주의에서는] 도식이란 외부에서 골라내어 현존재의 외부에 갖다 붙이는 이름표와[2]같은 것이지만 학문 안에서는[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삶이] 내용으로 충만하게 하는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혼이다.[3] 존재자가[살아나가는]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4]되는 것으로서[이렇게 자기 내재적인 운동으로 발생한 타자를 자기내용으로 갖는 것이고[5],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개된 것, 즉 타자화된 자신의 현존재를 자기 안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걷어들이는 것으로서, [활짝 전개된 내용으로 충만한 자신의 현존재를 가다듬어 전체의] 한 마디를 이루는 것으로 응집시키고, 이렇게 하여[추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자신을[별것이 아니라 이렇게 제한된] 규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정성은, 타자가 되는 운동이라는 면에서, [분투하여 자신을 쪼개] 차이가 나게 하여 [자기]현존재를 정립하는[힘]이고, 자기 안으로 다시 걷어들이는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엄연하게 규정된 단순성이 생성되는[힘]이다. 이렇기 때문에 내용은[자기제한적인] 규정이 되는데 있어서, 타자로부터 뭔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름표로 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자기제한적인 엄연한] 규정을 스스로 부여하고, 외부의 힘으로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다듬어 일개의 마디가 되어 전체 안에서 자기자리를 잡는 것이다. 일람표에 따라서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오성은 사물의 구체성, 즉 실재하고 생동하는 운동이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멋모르고[6]차리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자각하지는[7]못하고 있다. [목전에 있는 것만 감지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알 리가 없다. 왜냐하면, [감지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느닷없는] 통찰력을 발휘해서 한번 보게 되었다면 분명 보여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오성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통찰이 필요하다는 욕구를 느끼지조차 못한다. 이런 부족함을 느꼈다면, 도식에 따라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일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도식을 따라 정돈하는 일이 내용의 목록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했을 것이다. 오성은 이렇게 내용의 목록만 제시할 뿐, [약속한] 내용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다. — 오성이 다루는 규정성이란, 자기(磁氣)라는 규정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달리 표현하면 실재적인 규정성일 수 있다. 그리고 오성은 그렇다고 내세우지만 따져보면 사실 뼈다귀만 앙상한 죽은 퇴적물일 뿐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규정성은 단지 타 현존재의 술어로 사용될 뿐, 그 현존재에 내재하는 생명으로, 달리 표현하면 그 규정성이 그 현존재를 터전으로 하여 그 토양에서 자라나고 거기에 어울리는 독특한 것으로 스스로를 산출하고 자기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8] 이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이고 떠맡아야 할 일인데 형식적인 오성은 이것을 타자의 몫으로 내버려 둔다. — 오성은 사물의 내재적인 내용 안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항상 밖에 머물면서 겉모양만 한번 쓱 훑어보기 때문에 전체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9]언급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현존재 위에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오성은 결국 현존재를 보지 못한다. 학문적 인식이 요구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대상의 살아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서 바로 대상의 내적 필연성을 마주하고 이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몰입하다 보면 학문적 인식은 내용 안에 머물지 않고 내용에 대한 자기 안에서의 자기반성에 지나지 않는 일람표의 일목요연성은 하나하나 잊어버리게[10]된다. 소재에 깊숙이 들어가/침강하여[자신을 망각한 체] 소재의 운동을 따라가는 가운데 학문적 인식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1]이런 학문적 인식의 반성으로서의 복귀는 형식적인 지의 반성과는 달리[인식이 알아서 하는 반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밖으로 힘껏 뻗어나가] 충만해진 내용이 자기를 다시 자기 안으로 거두어 들임으로써[12][엄연한 자기제한적인] 규정으로 단순화하고 자신을 낮춰 현존재의 일면을 이루는 자리로 들어가서 보다 높은 현존재의 진리로 이행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두루 거치는 가운데 단순한, 자신의 온갖 모습을 스스로 통찰하는[투명하고 겹침이 없는] 전체가 반성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풍부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부상하는 것이다.



[1]원문 <Die Wissenschaft darf sich nur durch das eigne Leben des Begriffs organisieren.> 단어와 문장구조가 어렵지 않고 또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을 종합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문장 같은데 뭔가 아리달송하다. 특히 <개념의 고유한 삶/das eigne Leben des Begriffs>이란 표현이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개념의 삶>이란 것이 개념도 먹고 싸고, 아침에 일어날 땐 몸이 뻐끈하고, 일하려 나가고, 섹스하고, 울고 웃고, 자식을 키우고, 등짝이 간지럽고 등등 이런 일을 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념의 삶>이란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것과 전혀 관계가 없고 그저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만은 또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학문은 논리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역자는 의식이 운동하는 힘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질문제기의 연장선에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개념의 삶>, 즉 논리학=학문을 이야기할 때 <정신의 삶/Leben des Geistes>, 즉 정신현상학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야 어떻든 이 문단에서 헤겔은 <정신의 삶>과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에 기대어 <개념의 삶>을 서술하는 것 같다. 그럼 정신의 삶이란 것은 뭘 말하는 것이고, 또 삶의 이념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논리학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밖의 것에 매달리는 자연적인 삶과 달리] 삶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즉, 개념의 고유한 삶에 따라] 서술하는 연관성에는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이 자리하고 있고, 정신의 이념(Idee des Geistes)이란 바로 이런 삶의 이념에서 생성되어 나온 것이다. [...]삶이란것은 [위에서] 알아본바와 같이 [명확하게 완성된] 이념인데, 살펴보니 아직 참된 서술 혹은 이념이 현존하는양식으로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삶에서는 [밖으로 드러난] 이념의 현실이 [그저] 개별적인 것이고, 일반성 혹은 유적인 것 [역시 그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부정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는] 절대적이고 부정적인 통일로서의 삶의 진실은 추상적인, 같은 말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직접적인 개별성을 지양하고 [밖으로 드러난 현실과 내적인 것이] 동일한 것으로서 [항상] 자신과 동일한 것, 즉 유적존재로 자기를 완성하여 [진정] 자신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이념이 바로 정신이다. 지금 이야기된 것에 덧붙이자면 정신은 여기서 [즉, 논리학에서] 이와 같은 이념이 갖는 논리적인 형식에 따라 관찰되는 것이다. [삶의] 이념이 갖는 논리적 형식을 이렇게 따로 언급한 이유는 삶의 이념이 논리적 형식 외 다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형태를 [논리적 형식에] 부수적인 것으로 대충 훑어보고 지나가겠다. 삶의 이념을 이런 부수적인 형태에 따라 다루는 곳은 구체적인 정신학문이 되겠는데, 혼, 의식, 그리고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In diesem Zusammenhang dieser logischen Darstellung ist es die Idee des Lebens, aus der die Idee des Geistes hervorgegangen. [...] Von dem Leben haben wir gesehen, daß es die Idee ist, aber es hat sich zugleich gezeigt, noch nicht die wahrhafte Darstellung oder Art und Weise ihres Daseyns zu seyn. Denn im Leben ist die Realität der Idee als Einzelnheit, die Allgemeinheit oder die Gattung ist das Innere; die Wahrheit des Lebens als absolute negative Einheit ist daher, die abstrakte, oder was dasselbe ist, die unmittelbare Einzelnheit aufzuheben, und als Identisches mit sich identisch, als Gattung sich selbst gleich zu seyn. Diese Idee ist nun der Geist. - Es kann aber hierüber noch bemerkt werden, daß er hier in derjenigen Form betrachtet wird, welche dieser Idee als logische zukommt. Die hat nämlich noch andere Gestalten, die hier beiläufig angeführt werden können, in welchen sie in den konkreten Wissenschaften des Geistes zu betrachten ist, nämlich als Seele, Bewußtseyn und Geist als solcher.“) 이어 헤겔은 혼(Seele)을 설명하는데 혼이란 [뭔가를 해부해서 찾아낼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Seelending“)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면서 존재하는 개념“(der für sich selbst seyende Begriff „)이라고 한다. 그러나 혼은 필연적으로(!!)„직접적인 현존재 안“(in unmittelbarem Daseyn)에 있다고 한다. 직접적인 현존재 안에 있는 것으로서 혼은 삶과 실체적인 동일성을 이루며(„in dieser substantiellen Identität mit dem Leben“), 이렇게  자신의 외형에 푹 빠져 있는 것(„in seinem Versenktseyn in seine Aeußerlichkeit“)으로서 혼은 인류학이 다루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삶의 이념의 가장 낮은 단계이고 다음 단계인 의식은 정신현상학이 다룬다고 하고, 이런 정신현상학은 자연정신의 학문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의 중간에 있는 학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신 그 자체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der für sich seyende Geist“)이지만 자신의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in seiner Beziehung auf sein Anderes/강조 역자),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부정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서술하는 것(„erscheinend am Gegentheil seiner selbst sich darstellend“)이라고 한다. (논리학, 마이너 판2003년,  233쪽 이하 참조). 인류학이 다루는 삶과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의식이 정말 부수적인(beiläufig), 마라톤에서 주자의 박자를 맞춰주기 위해서 잠깐 뛰는 들러리(Beiläufer)와 같이 없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겔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가 왠지 중세철학에서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 같다. 관련 <학과 간의 논쟁/Der Streit der Fakultäten>(1798)에서 칸트가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보는 것이야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지만, 시녀가 안주인의 치마폭을 정리하면서 뒤따라 가는지 아니면 안주인을 앞서가면서 어둔 길을 밝히는지 이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고 한 대목이 생각난다 (학과 간의 논쟁, 1장, I, 2절). 헤겔이 폄하하는 인류학의 소재가 되는 삶이, 브레히트가 <독서하는 한 노동자의 질문/Fragen eines lesenden Arbeiters>에서 „만리장성이 완성되던 날, 이젠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날 저녁에 장성을 쌓던 노동자들은 어디로 갖을까?/Wohin gingen an dem Abend, wo die chinesische Mauer fertig war, die Maurer?“라고 노래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삶이 이젠 학문의 대상이 아닌가 한다.

[2]원문<Bestimmtheit>

[3]원문<die sich selbst bewegende Seele des erfüllten Inhalts>. „삶에 충만해서“(“lebenssatt”) 죽었다는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평가(창세기25.7)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맑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참조).

[4]원문<ein Anderes>. 존재의 운동, 즉 의식의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 혹은 개념의 운동이라면 <sein Anderes>라고 해야 한다. 이 <ein Anderes>가 <sein Anderes>가 되어야 소위 변증법이란 것이 성립되는데, 관련 역자는 주인과 손님 간의 관계 등에서 언급하였듯이 좀 회의적이다.

[5]원문<zu seinem immanenten Inhalt>. 강조 역자. <내재적/immanent>을 원문과는 달리<내용/Inhalt>이 아니라 운동을 서술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6]원문<für sich>

[7]원문<für sich>

[8]이것이 바로 인류학이 하는 일이 아닌가?

[9]원문<übersehen>. 두 갈래 의미가 있다. <통틀어 보다>와 <간과하다>라는 의미다. 통틀어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10]원문 <vergisst es jener Übersicht>. 여기서 <jener Übersicht>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소유격(Genitivus partitivus)이 목적격으로 사용된 것 같다. 일람표를 다 잊어버릴 때까지 그 항목항목 하나하나를 잊어버리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11]원문 <aber>

[12]서론에서 언급된 <Reflexion des Gegenstandes in sich/대상의 자기 안에서의 반성>을 이야기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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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2

§52) 이렇게[1][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이란] 탁월한 것이[형식주의의 사냥거리가 되어] 생명과 정신을 박탈당하고, [형식주의의] 생명 없는 지가[살아있는 삼중성을 때려잡아 그] 외피를 짐승의 가죽처럼 벗겨서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둘러쓰고 있는 것을 눈뜨고 봐야 하는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삼중성이] 이렇게 운명을 다하고[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삼중성이] 이렇게 가죽으로 남은 상태에서 생명 없는 지가[우리시대의] 정신에 행사하는 폭력을, 정신이 아니라면 최소한 심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폭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삼중성이] 일반적이고 엄밀한[2]형식으로 다듬어져 나가는 것을 또한 인식할 수 있다.1 이런 형식을 갖춤으로써 삼중성이 완성되고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그 일반성을[어떤 원리를 완전히 깨닫고 난 후에는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적용하듯이] 표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1]원문<aber/그러나>. 뭔가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aber>다. 이 <aber>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문단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 같다.

[2]원문<Allgemeinheit und Bestimmt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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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가 보기엔 헤겔도 쉘링한테 뭔가 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51

§51) [자기 제한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규정은 내적 생명력을 갖고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인데, 형식주의가 말하는 단순한 규정은[1]그렇지 않고 다만 직관, [여기서는] 즉 감각적인 지에 의한 표면적인 유추를 통해서 표명될 따름이다. 그리고 이같이 공식을 외면적이고 공허하게 적용하는 것을 구성이라고[2]내놓는다. —[이 형식주의는 제법 의미심장하게 자기가 뭔가 별다른 것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것을 터득하는 일이란 다른 형식주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질병을 무력증, 강력증, 간접무력증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이 각기 있다는 형식주의적인 이론을15분내에 주입시키지 못할 만큼 주름 없는 뇌가 있을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교과과정을 수료하면 평범한 의사가 충분히 이론에 정통한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그 과정이 어렵다고] 그것을 포기한 의사가 있다면 그는 과연 얼마나 멍청한 의사일까? 자연철학적 형식주의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번 들춰 보면 지성은 전기니, 동물은 질소니 하는가 하면, {지성은?? 전기는??} 남[극], 북[극]과 일치한다는 등 이런저런 비교를 하는가 하면{무엇이??} 그것을{지성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3], 이런 형식주의는 위와 같이 허술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보다 많은 전문용어를 첨부하여 뒤범벅 해 놓든 아무튼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이 뚝 떨어져 있어 보이는 것을 한 묶음으로 싸매는 힘이다. [자기가 직관하는 것에] 푹 빠져 있는[4]감각에게는 이런 한 묶음이 폭력으로 다가오고, 이런 힘은 또 개념이 무슨 증서라도 되듯 개념증을[5]발급할 뿐 개념 그 자체,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표상이 갖는 의미를 표명하는 정작 해야 할 일은 방기하는 폭력이다. 이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이야 이런 힘과 폭력을 경탄한 나머지 감탄사를 터뜨릴 것이고, 그것이 마치 심오한 천재성이라도 되듯이 경의를 표할 것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여 눈요기가 되는 것으로[6]만들기 때문에 그 힘과 폭력을 마치[자유자재 하는 그리스 신들의 조각된] 명쾌함을 보는 마냥 즐거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거침없는[7]행동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다는 영감 속에서 그런 행동에 공감하고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찬(自讚)할 것이다. 이런 식의 영특함은 속임수와 같은 것으로서 금방 습득할 수 있고, 습득함과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속임수는 그 작동 방법이 한번 알려지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뻔한 요술로서 반복하기에 민망한 것이다. 이 단조로운 형식주의의 도구는 마치 두 가지 색깔, 예를 들어 빨간색과 녹색만을 가지고 인공적인 것을 그릴 때는 빨간색으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릴 때는 녹색으로 화면을 칠하는 화가의 팔레트와 같은 것으로서 그 도구를 다루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여기서[우리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에 존재하는 만물을 두 가지 색으로 마음껏 범벅하고 덮어씌우면서 느끼는 자기만족과 이런 도구를 만능의 도구로 사용하는데 정말 하자가 없는 일품이라는 자만심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그 어느 쪽이 더 큰지 가리기 쉽지 않게 서로 부추기면서 비등하게 작용하고 있다.천지간의 온갖 사물에, 그리고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온갖 형태에 일반도식의 양대규정[8]중 그 하나를 꼬리표로 붙이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그 어느 한쪽에 가지런히 정돈하는 방법이 산출해 내는 것이 우주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해맑은 보고>*라고, 아니 그 이하의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만한다. 그러나 이런 보고는 사실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저기 쪽지를 단[교육용] 골격, 아니면 양념소매상 가게의 뚜껑 닫힌 양념통에 에티켓을 붙인 진열대와 흡사한 것이다. 이런[형식주의] 일람표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지만, 뼈에서 살과 피를 제거한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것을 통에 봉합하여 덮어버린 후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은 떼어 팽개쳐버리거나 은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판박이 수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대규정을 적용하다가 단색의 절대화로 발전하여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9], 이때 형식주의는 도식상의 차이까지 부끄럽게 여기는 가운데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반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여 이것 또한 절대의 공허 속으로 몰아넣어 아무런 형식이 없는 백색과 같은 순수한 동일성을 만들어낸다. 아무런 색상의 차이가 없는 도식과 이런 도식에 따라서 생명 없는 꼬리표를 다는 것과[10]절대적인 동일성, 그리고 어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진행하는 것 모두가 하나같이 죽어 있는 지성이며 외피적인 인식일 뿐이다.



[1]Bestimmtheit

[2]원문<Konstruktion>

[3]이부분 헤겔의 독어가 개판이다. 쉘링의 자연철학을 논평하는 것 같은데 문장구조와 함께 그 논평이 너무 막하는 논평인 것 같다. 쉘링의 철학체계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에 대한 사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쉘링은 피히테가 펼쳐 논 절대자아라는 지평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피히테식의 주관주의 철학이 도외시한 자연에 관심을 갖는 쉘링은 당시 자연과학이 달성한 성과에 주목하면서 죽어있는 물질과 살아있는 유기체간의 괴리를 자연철학으로 해결한다.  쉘링은 자연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것이 우리와 유사하게 정신으로 각인된 것이라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자연의 체계>와<정신의 체계>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치하는 이유는 양 체계가 발전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스며있는 정신이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발전의 힘은 서로 대립하는 이중성, 혹은 양극성에서 기인한다. 쉘링은 이 양극성을 우주의 이치로 삼는데, 이 원칙으로 전기의 양극, 산성과 알칼리성 등 자연의 현상뿐만 아니라 의식의 주관과 객관 등도 설명한다. (칼 포랜더, 철학역사 참조 www.textlog.de/6565.html)

[4]원문<ruhend> <고정된>

[5]원문<Schein eines Begriffes> 명허증<Führerschein>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6]원문<erfreulich>

[7]원문<herrlich> <Herr/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주인>이란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8]원문<die paar Bestimmungen> 앞 내용, 즉 두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칠한다는 내용의 연장선에서<몇 가지>로 번역하지 않고<양대규정>으로 번역하였다.

*) 이 표현은  피히테의 저작<최근 철학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독자에게 보내는 해맑은 보고>(1801)라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9]원문<sich vollenden>

[10]Bestim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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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0

§50) [이젠 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에1 따른 학문 개념을 살펴보자.] 이 삼중성이 처음에는 그저 육감적으로2 재발견된 상태였었고 그러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죽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갖는 절대적 의미로 부상함으로써 [마침내] 참다운 형식을 갖춘 참다운 내용이 정립되고 동시에 학문의 개념이 부화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삼중성의 형식을 생명 없는 도식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무슨 독특한 허깨비나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학문의 유기적인 체계3일람표로 전락시키는 삼중성의 활용을 볼 수 있다. 이런 삼중성의 활용은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일반적인 선상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런 형식주의의 판박이 수법에 대하여 이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예정인데, 이런 형식주의는 어떤 형태의 속성과 살아 움직임을4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서술하는데 있어서 도식의 항목에서 한 규정을 골라 그 형태에 꼬리표로5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주관성이니 객관성이니 하는 것들로 표현되거나 때로는 자기(磁氣)니 전기니 하는 것들로 표현되기도 하고, 수축과 확장 또는 동과 서 등으로 비교되는 것들인데, 이런 식이라면 [자기 제한성을 갖는] 어떤 성질이나6 형태라도 다른 성질과 형태의 서술에 사용하는 도식의 형식이나 요소가7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모두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알아서 기기 때문에 위와 같은 꼬리표는 끝없이 복제될 수 있다. 이렇게 끝없이 복제될 수 있는 꼬리표는 상호의존으로 엮어진 무리일 뿐, 이것이 사태 자체에 대해서, 의존관계의 이쪽과 저쪽에 대해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러 꼬리표달기가 어떤 행위인지 더 살펴보면8 [아주 모순적인데] 도식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직관에서 얻은 감각적인 규정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것들은 말하는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내세우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 정작 그래야 하는 데에서는 정반대로] 주관, 객관, 실체, 원인, 보편 등과 같은 순수한 사상 규정들이 별도의 의미가9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아무런 숙고와 비판 없이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의미 그대로, 그런 것이 마치 강약, 신축과 같이 의미가 분명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사용한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감각적인 표상만 비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고 내놓은 것까지 비학문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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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관련 <순수이성비판> B 95이하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10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를 (B 102)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칸트는 논리학 가능성 그 자체를 따지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은 모든 내용이 사상되어 있는 일반논리학과는 달리 선험감성에 따른 다양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오성개념은 소재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사고의 자발성이 이런 다양한 것들을 하나하나 두로 통찰하면서 수용하고 결합시키면 인식이 된다고 한다. 이 활동을 종합(Synthesis)이라고 부른다. 이 종합과 관련하여 칸트는 인식을 3단계로 서술한다 (B 104). 일반논리학은 다양한 표상을 분석을 통해서 하나의 개념아래로 귀속시키지만 transzendentale Logik은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순수종합이 개념이 된다고 한다. 칸트가 제시한 인식의 3단계를 살펴보면, 첫째 순수직관에 의해서 주어진 다양한 것, 둘째 이런 다양한 것을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통해서 종합하는 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것을 종합하는 일로써 인식이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완성되려면 다음 행보가 필요한데, 셋째 이 순수종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개념은 순수종합의 통일성이 필연이라는 관념에 따른 개념이다. 이렇게 하여 칸트는 12개 범주를 3개씩 4개의 영역으로 분류한 범주표를 제시한다 (B 106). 인식의 3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질이라는 영역을 보면 현실성(Realitaet), 부정성(Negation), 그리고 제한성(Limitation)이란 3단계로 구분되어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칸트가] 첫째 범주는 긍정이고, 둘째 범주는 첫째의 부정이며, 셋째는 양자의 종합이라고 말한 것은 개념의 지대한 본능이 나타난 것이다. 삼중성 형식이 여기서는 단지 도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인 형식, 즉 개념이 가려진 체 있다.“(Es ist großer Instinkt des Begriffs, daß er sagt: die erste Kategorie ist positiv; die zweite ist das Negative der ersten; das Dritte ist das Synthetische aus beiden. Die Form der Triplizität, die hier nur Schema ist, verbirgt in sich die absolute Form, den Begriff. (헤겔, Werke in 20 Baenden, 1979, Bd. 20 (철학역사강의), 345쪽)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Organisation>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Leben/생명>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Praedikat/술어>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Bestimmung/규정>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Moment>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 <dabei>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 <das an sich bedeutende>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