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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가 벤야민의 단편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의 일부와 묘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해당 부분을 번역을 통해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Die Sorgen: eine Geisteskrankheit, die der kapitalistischen Epoche eignet. Geistige (nicht materielle) Ausweglosigkeit in Armut, Vaganten-Bettel-Mönchtum. Ein Zustand der so ausweglos ist, ist verschuldend. Die »Sorgen« sind der Index dieses Schuldbewußtseins von Ausweglosigkeit. Die »Sorgen« entstehen in der Angst gemeinschaftmäßiger, nicht individuell-materieller Ausweglosigkeit.”
강신주 번역
“걱정(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이해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번역해 본다.
“근심걱정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정신병이 된다. 이 정신병은 (물질적인 절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등을 돌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떠돌이-걸인-수도사 등 가난을 수행함으로써 [정신적인 구원을 찾을 수 있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젠 그런 가난수행을 할지라도 그 안에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정신적인 절망이다. 이토록 [구원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는 빚쟁이/죄인신세가 지속된다. 바로 이런 “근심걱정”이야 말로 [구원이 없는] 절망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정신병으로서의] “근심걱정”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결함에서 기인한] 개인적-물질적 절망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공동체 전체에 해당하는 절망 앞에서 어찌할-바-모르고-분주하게-움직이기만-하는-심성(Angst)에서 발생한다.“
혹시 강신주가 고도의 자본주의의 정신병에 걸린 게 아닐까?
자본주의에서는 탕자의 귀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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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화가들이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 뒤러, 렘브란트 등 - 이 중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이 좀 특이하다. 그 특수성은 탕자의 시선에 있다. 뒤러의 그림에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는 교회로 향하는 시선이,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탕자를 얼싸안는 아버지가가 주제다. 근데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탕자의 시선은 돼지밥통으로 향한다. 생각을 고쳐먹은 (=회개) 사건이 일어난 돼지밥통을 잊지 말자는 다짐의 시선인지, 아니면 돼지밥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의 시선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보기엔 불안의 시선에 가깝다. 보쉬가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성격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게 아닌가 한다. 돼지밥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