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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5 - 역사의 폐기물이 된 사유에 근거

1870년대 독일제국의시 제정된 후 1974년 대대적인 형법개혁으로 전면 폐지될 때까지 근 100년 동안 유효했던 형법이 있다. 독일제국 형법 361조다. 거기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 361. 다음과 같은 사람은 구류처벌 대상이다.

 

3. 부랑인 (wer als Landstreicher umherzieht;)

 

8. 지금까지의 주거지 상실 후 소관관청이 정한 기간 내에 다른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가 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거지를 마련을 할 수 없었음을 증명할 수 없는 자.(wer nach Verlust seines bisherigen Unterkommens binnen der ihm von der zuständigen Behörde bestimmten Frist sich kein anderweitiges Unterkommen verschafft hat und auch nicht nachweisen kann, daß er solches der von ihm angewandten Bemühungen ungeachtet nicht vermocht habe.)

 


뭔가 상식에 어긋난다. 법을 어기는 행위에 책임이 있으면 처벌을 받는다. 그 증명은 처벌하는 쪽이 해야 한다. 근데 여기서는 처벌대상이 되는 주거지상실자가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강신주류의 논리를 빌리면 이해가 되겠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논리적 구조는 아마 이런 것일 거다.

 

1.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노력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주거지 마련 실패=노력부재, 이건 사실(fact)이다.

 

독일제국법: 주거지는 노력하면 누구나 마련할 수 있다.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노력 부족이다. 그 노력평가에 삶의 수단(직장, 재산, 사회 그물망/독일의 상당수의 집 없는 사람들이 친구 등의 집에서 얹혀산다./ou_topia)이 있는지 없는지가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법규가 그런 요소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요소들은 책임을 덜어주는 요소가 될 수 없다. 주거지마련 노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노력!

 

강신주: 노숙자가 노숙하는 건 편해서 그렇다. 물질적인 조건과 전혀 무관하다. 자존심의 문제다. 오직 자존심!

 

2.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은 이 기정된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한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마 말이 되지 않아서 전격 폐기되었을 거다. 강신주는 역사의 폐기물을 가지고 끄적거리고 있다.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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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3 - 번역: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일부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가 벤야민의 단편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의 일부와 묘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해당 부분을 번역을 통해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Die Sorgen: eine Geisteskrankheit, die der kapitalistischen Epoche eignet. Geistige (nicht materielle) Ausweglosigkeit in Armut, Vaganten-Bettel-Mönchtum. Ein Zustand der so ausweglos ist, ist verschuldend. Die »Sorgen« sind der Index dieses Schuldbewußtseins von Ausweglosigkeit. Die »Sorgen« entstehen in der Angst gemeinschaftmäßiger, nicht individuell-materieller Ausweglosigkeit.”

 

강신주 번역

 

“걱정(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이해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번역해 본다.


“근심걱정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정신병이 된다. 이 정신병은 (물질적인 절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등을 돌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떠돌이-걸인-수도사 등 가난을 수행함으로써 [정신적인 구원을 찾을 수 있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젠 그런 가난수행을 할지라도 그 안에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정신적인 절망이다. 이토록 [구원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는 빚쟁이/죄인신세가 지속된다. 바로 이런 “근심걱정”이야 말로 [구원이 없는] 절망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정신병으로서의] “근심걱정”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결함에서 기인한] 개인적-물질적 절망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공동체 전체에 해당하는 절망 앞에서 어찌할-바-모르고-분주하게-움직이기만-하는-심성(Angst)에서 발생한다.“

 

혹시 강신주가 고도의 자본주의의 정신병에 걸린 게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본주의에서는 탕자의 귀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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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2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글에서 강신주의 감정이 어떤 운동을 하는지 스피노자의 감정 정의에 기대어 분석해 보자.

 

1.


이 칼럼에서 강신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되어 21세기 초 서울을 20세기 초 더블린과 비교한다.

 

“지방 강연 때문에 서울역을 자주 찾는다. 어느 사이엔가 서울역은 노숙자들의 든든한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 주고 여름에는 비를 막아 주니, 어쩌면 그들에게 서울역은 마지막 남은 은신처라고 할 만하다. 이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다.”   

 

강신주는 서울의 이런 현상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마비”와 “[서울]사람들의 총체적 마비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그 탈출구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노숙자에 “죽은 사람들”의 주인공 게이브리엘을 대조시킨다.


근데 이 대조 혹은 비교가 대칭적이지 않고 비틀려있다.


노숙자의 이야기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강신주의 감정이고, 게이브리엘의 이야기는 그레타를 바라보는 게이브리엘을 다시 바라보는 제임스 조이스의 기록.

 

이 문제는 어쩜 강신주가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아니라 게이브리엘의 알터 에고가 된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소한 아도르노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문제다. 어떤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를 뚝 떨어져 있는 한 개체로 취급하고 접근하여 뭔가를 찍어 올릴 수 있는가 아니면 그를 어떤 특정한 배열(Konstellation)의 결정체로 이해하고 그런 배열 안에서 그에게 접근해야 하는가는 철학이 숙고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레타와 더불어 마이클 퓨리로 상징되는 풍부한 외부 및 내면세계를 게이브리엘 주변에 배열하고 게이브리엘의 [감정]운동을 그린다. 강신주의 노숙자 접근은 어떠한가?

 

강신주의 노숙자는 매우 우연적이고 뚝 떨어져 존재하는 일개의 개체일 뿐이다. 게다가 이 개체는 아무런 내면세계가 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는 노숙자와의 ‘만남’이 없이 매우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감정을 그에게 내던진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2.


근본적인 문제는 수치심(verecundia, 독 Schamgefühl)이 아니라 타자의 물화(Verdinglichung)냐 아니면 “[타자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표상하는가(quem nobis similem esse imaginamur - 에티가 3부, 감정 정의 18, commiseratio, 독 Mitleid, 아픔나누기)”라는 갈림길이다.

 

강신주의 감정운동은 타자의 물화라는 지평에서 일어난다. 물화된 타자는 아무런 내면세계를 갖지 못하고 인식주체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런 감정을 스피노자는 경멸(contemptus)이라고 정의한다.

 

“경멸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표상(rei alicujus imaginatio)이다. 그러나 [표상주체인] 정신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게 표상된 표상이다. [그 표상의 무기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표상 대상인] 어떤 사물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더라도 그 사물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정신을 굼실거리게 하는 표상이다.” (“Contemptus est rei alicujus imaginatio, quae mentem adeo parum tangit, ut ipsa mens ex rei praesentia magis moveatur ad ea imaginandum, quae in ipsa re non sunt, quam quae in ipsa sunt." 에티카, 3부 감정 정의 5. 많이 의역했다/역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한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가 정의한 경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화된 타자가 시선을 되돌릴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나를 대상화하고 타자를 자유로 경험하게 하는 타자의 시선’이 있을 수 없다. ‘노숙자들은 타자의 시선은 아랑곳없다’면 강신주는 아예 타자의 시선이 없다. 그가 지향하는 공동체로 향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없다.

 

“타자가 등장하면, 그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나와 어떤 관계를 맺든, [그의 나타남으로] 내게 와 닺는 것이 오직 그 존재의 등장뿐이라 할지라도, 내게 외부가 주어지고 나는 자연이 된다. ... 그리고 수치심은 내 자신을 자연으로 지각하는 일이다.” (“S’il y a un Autre, quel qu’il soit, où qu’il soit, quels que soient ses rapports avec moi, sans même qu’il agisse autrement sur moi que par le pur surgissement de son être, j’ai un dehors, j’ai une nature ; ... et la honte est ... l’appréhension de moi-même comme nature[.]” (사르트르, 존재와 무)

 

그저 존재뿐인 노숙자의 등장에 강신주가 느끼는 수치심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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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나에겐 진보넷이 한국의 상황을 접하는 첫 창구다. 사람이 사는 곳이야 어디든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어떤 특정한 사실, 사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런 게 어떻게 이야기되고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진보넷을 통해서 접한다.

 

예컨대 강신주의 노숙자이야기 바로 그런 거다.

 

강신주의 원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여기 베를린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고, 멀쩡한 젊은이가 쇼핑가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을 벌리고 있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뭐야, 어디서 빌어먹기라도 할 일이지”하기 때문일 거다.

 

강신주가 인용한 스피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한 번 상상해 보다. 강신주가 한 구절을 인용한 스피노자 에티카의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을 찬찬히 읽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신주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스피노자가  전혀 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우선 스피노자는 감정론 모두에서 그를 앞서간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인간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그가 행동하는 영역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또한 그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고 믿는 오류를 범한 까닭에 인간이 무능력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원인을 사람과 자연을 온통 다 다스리는 자연의 힘에서 찾지 않고 알아먹기 힘든 인간본성의 결함의 몫으로 돌리면서 왜 인간본성이 이럴까 애석해 하고, 비웃고, 경멸하다가 결국 저주하는 일로 보통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고스의 거인처럼 백 개의 눈을 부릅뜨고 인간 정신의 무력함의 꼬리를 잡는 일에 신통한 사람들이 뭐나 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고 꼬집는다.(제 3 부 서론)

 

이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에서 그랬듯이 기하학적 방식으로 감정의 본성(natura) 및 힘(vires/에너지), 그리고 이들을 다스리는 정신의 능력(potentia)을 다루고, 인간의 행위(actiones)와 끌림(appetitus)을 이것들이 마치 선, 면, 입체와 마찬가지나 되는 것처럼 고찰할 거라고 자신의 논의방향을 제시한다. 감정의 물리학이라 할까?

 

강신주는 노숙자가 수치심(verecundia)이 없어서 노숙자로 산다고 서술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마저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노숙자가 노숙자로 사는 원인의 적합한 서술인가? 스피노자는 정의 1에서 어떤 결과의 원인은 결과에 의해서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지각될 수 있을 때 적절한 원인(causa adaequata)이 된다고 한다. 수치심 부재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것의 적절한 원인일까? 아니면 노숙자 생활을 다 설명해 주지 못하는 단지 부적절하고(inadaequata)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이걸 정의 2에 견주어 노숙자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게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가 질문할 수도 있겠다. 오직(sola) 노숙자의 본성(natura)에 의해서만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이해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니면 노숙자와 그의 본성이 단지 노숙자생활의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노숙자의 능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의 3에 기대어 어떻게 신체의 행동력(corporis agendi potenitia)이 증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노숙자의 수치심이, 즉 노숙자의 관념(idea)이 노숙자생활을 종료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강신주가 참조하는 감정의 정의에서 그는 핵심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슬픔(tristitia)의 정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픔이란 한 사람이 보다 큰 완정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옮겨지는(transitio) 데 있다.”(Tristitia est hominis transitio a majore ad minorem perfectionem.") (감정 정의 3)

 

스피노자는 transitio에 주목하고 보다 작은 완전성에 슬픔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transitio에 있다고 한다. 난 이걸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몸 팔러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어갔던 공순이 공돌이 이야기와 함께 노숙자가 노숙자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신체의 행동력을(corporis agendi potentia) 상실하게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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