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지성인이 해야 할 일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4/01/21
    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ou_topia

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나에겐 진보넷이 한국의 상황을 접하는 첫 창구다. 사람이 사는 곳이야 어디든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어떤 특정한 사실, 사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런 게 어떻게 이야기되고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진보넷을 통해서 접한다.

 

예컨대 강신주의 노숙자이야기 바로 그런 거다.

 

강신주의 원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여기 베를린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고, 멀쩡한 젊은이가 쇼핑가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을 벌리고 있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뭐야, 어디서 빌어먹기라도 할 일이지”하기 때문일 거다.

 

강신주가 인용한 스피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한 번 상상해 보다. 강신주가 한 구절을 인용한 스피노자 에티카의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을 찬찬히 읽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신주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스피노자가  전혀 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우선 스피노자는 감정론 모두에서 그를 앞서간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인간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그가 행동하는 영역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또한 그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고 믿는 오류를 범한 까닭에 인간이 무능력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원인을 사람과 자연을 온통 다 다스리는 자연의 힘에서 찾지 않고 알아먹기 힘든 인간본성의 결함의 몫으로 돌리면서 왜 인간본성이 이럴까 애석해 하고, 비웃고, 경멸하다가 결국 저주하는 일로 보통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고스의 거인처럼 백 개의 눈을 부릅뜨고 인간 정신의 무력함의 꼬리를 잡는 일에 신통한 사람들이 뭐나 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고 꼬집는다.(제 3 부 서론)

 

이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에서 그랬듯이 기하학적 방식으로 감정의 본성(natura) 및 힘(vires/에너지), 그리고 이들을 다스리는 정신의 능력(potentia)을 다루고, 인간의 행위(actiones)와 끌림(appetitus)을 이것들이 마치 선, 면, 입체와 마찬가지나 되는 것처럼 고찰할 거라고 자신의 논의방향을 제시한다. 감정의 물리학이라 할까?

 

강신주는 노숙자가 수치심(verecundia)이 없어서 노숙자로 산다고 서술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마저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노숙자가 노숙자로 사는 원인의 적합한 서술인가? 스피노자는 정의 1에서 어떤 결과의 원인은 결과에 의해서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지각될 수 있을 때 적절한 원인(causa adaequata)이 된다고 한다. 수치심 부재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것의 적절한 원인일까? 아니면 노숙자 생활을 다 설명해 주지 못하는 단지 부적절하고(inadaequata)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이걸 정의 2에 견주어 노숙자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게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가 질문할 수도 있겠다. 오직(sola) 노숙자의 본성(natura)에 의해서만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이해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니면 노숙자와 그의 본성이 단지 노숙자생활의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노숙자의 능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의 3에 기대어 어떻게 신체의 행동력(corporis agendi potenitia)이 증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노숙자의 수치심이, 즉 노숙자의 관념(idea)이 노숙자생활을 종료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강신주가 참조하는 감정의 정의에서 그는 핵심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슬픔(tristitia)의 정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픔이란 한 사람이 보다 큰 완정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옮겨지는(transitio) 데 있다.”(Tristitia est hominis transitio a majore ad minorem perfectionem.") (감정 정의 3)

 

스피노자는 transitio에 주목하고 보다 작은 완전성에 슬픔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transitio에 있다고 한다. 난 이걸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몸 팔러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어갔던 공순이 공돌이 이야기와 함께 노숙자가 노숙자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신체의 행동력을(corporis agendi potentia) 상실하게 된 이야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