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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2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글에서 강신주의 감정이 어떤 운동을 하는지 스피노자의 감정 정의에 기대어 분석해 보자.

 

1.


이 칼럼에서 강신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되어 21세기 초 서울을 20세기 초 더블린과 비교한다.

 

“지방 강연 때문에 서울역을 자주 찾는다. 어느 사이엔가 서울역은 노숙자들의 든든한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 주고 여름에는 비를 막아 주니, 어쩌면 그들에게 서울역은 마지막 남은 은신처라고 할 만하다. 이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다.”   

 

강신주는 서울의 이런 현상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마비”와 “[서울]사람들의 총체적 마비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그 탈출구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노숙자에 “죽은 사람들”의 주인공 게이브리엘을 대조시킨다.


근데 이 대조 혹은 비교가 대칭적이지 않고 비틀려있다.


노숙자의 이야기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강신주의 감정이고, 게이브리엘의 이야기는 그레타를 바라보는 게이브리엘을 다시 바라보는 제임스 조이스의 기록.

 

이 문제는 어쩜 강신주가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아니라 게이브리엘의 알터 에고가 된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소한 아도르노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문제다. 어떤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를 뚝 떨어져 있는 한 개체로 취급하고 접근하여 뭔가를 찍어 올릴 수 있는가 아니면 그를 어떤 특정한 배열(Konstellation)의 결정체로 이해하고 그런 배열 안에서 그에게 접근해야 하는가는 철학이 숙고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레타와 더불어 마이클 퓨리로 상징되는 풍부한 외부 및 내면세계를 게이브리엘 주변에 배열하고 게이브리엘의 [감정]운동을 그린다. 강신주의 노숙자 접근은 어떠한가?

 

강신주의 노숙자는 매우 우연적이고 뚝 떨어져 존재하는 일개의 개체일 뿐이다. 게다가 이 개체는 아무런 내면세계가 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는 노숙자와의 ‘만남’이 없이 매우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감정을 그에게 내던진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2.


근본적인 문제는 수치심(verecundia, 독 Schamgefühl)이 아니라 타자의 물화(Verdinglichung)냐 아니면 “[타자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표상하는가(quem nobis similem esse imaginamur - 에티가 3부, 감정 정의 18, commiseratio, 독 Mitleid, 아픔나누기)”라는 갈림길이다.

 

강신주의 감정운동은 타자의 물화라는 지평에서 일어난다. 물화된 타자는 아무런 내면세계를 갖지 못하고 인식주체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런 감정을 스피노자는 경멸(contemptus)이라고 정의한다.

 

“경멸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표상(rei alicujus imaginatio)이다. 그러나 [표상주체인] 정신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게 표상된 표상이다. [그 표상의 무기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표상 대상인] 어떤 사물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더라도 그 사물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정신을 굼실거리게 하는 표상이다.” (“Contemptus est rei alicujus imaginatio, quae mentem adeo parum tangit, ut ipsa mens ex rei praesentia magis moveatur ad ea imaginandum, quae in ipsa re non sunt, quam quae in ipsa sunt." 에티카, 3부 감정 정의 5. 많이 의역했다/역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한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가 정의한 경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화된 타자가 시선을 되돌릴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나를 대상화하고 타자를 자유로 경험하게 하는 타자의 시선’이 있을 수 없다. ‘노숙자들은 타자의 시선은 아랑곳없다’면 강신주는 아예 타자의 시선이 없다. 그가 지향하는 공동체로 향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없다.

 

“타자가 등장하면, 그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나와 어떤 관계를 맺든, [그의 나타남으로] 내게 와 닺는 것이 오직 그 존재의 등장뿐이라 할지라도, 내게 외부가 주어지고 나는 자연이 된다. ... 그리고 수치심은 내 자신을 자연으로 지각하는 일이다.” (“S’il y a un Autre, quel qu’il soit, où qu’il soit, quels que soient ses rapports avec moi, sans même qu’il agisse autrement sur moi que par le pur surgissement de son être, j’ai un dehors, j’ai une nature ; ... et la honte est ... l’appréhension de moi-même comme nature[.]” (사르트르, 존재와 무)

 

그저 존재뿐인 노숙자의 등장에 강신주가 느끼는 수치심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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