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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주제로 삼으면 쉽게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있다. 향토학자들은 한동안 아편을 피우는 사람처럼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런가하면 아직 오늘날까지 알프스 영양 수컷의 등털[로 꾸민 고유복장 모자]를 보면 칼날같이 예리한 지식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은 특히 남부독일에 있는 것 같다. (…) 고향, 이건 분명 [따라가기 싫은?] 뒤처짐을 일겉는 데 사용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래, 함부르크에 면방센티미터당 대졸자[Abiture/고졸]가 더 많고, 베를린에 안경당 책이 더 많고, 뒤셀도르프에 두당 20세기가 더 많다고 기꺼이 시인한다. 허나, 베를린함부르크뒤셀도르프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곧 따라갈 거다. 따져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현지시간이 70년전에야 비로소 중앙유럽표준시에 종속되지 않았던가. 반면 이곳 시민들의 [행진]드럼은 [독일제국건국의 마지막 전투인] 세당[전투] 후에도 25년동안이나 [프랑스 혁명] 트리콜로르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25년이 지나 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 주도 북부독일연맹/독일제국/나치제국 기의 색인] 흑백적에 장단을 마췄다. 덧붙이자면 슈바벤 짜이퉁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독일민주공화국[DDR-동독]이 인용부호없이 [떠떳하게] 등장했다. 물론, 이 지역에서 이런 걸 말할 때 저 일간지를 주교에 밀고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마르틴 발저의 1968년 에세이 "향토학"에서 발췌)
Wenn es sich um Heimat handelt, wird man leicht bedenkenlos. Volkskundler waren eine Zeit lang gefährdet wie Opium-Raucher. Andererseits gibt es heute noch Leute, die können keinen Gamsbart sehen, ohne sich gleich als schneidige Intellektuelle zu fühlen. Heimat scheint es vor allem in Süddeutschland zu geben. (...) Heimat, das ist sicher der schönste Name für Zurückgebliebenheit. Ach wir geben es doch zu, Hamburg hat mehr Abiture pro Quadratzentimeter, Berlin mehr Bücher pro Brille, Düsseldorf mehr 20. Jahrhundert pro Kopf. Trotzdem sollte man sich in Berlinhamburgdüsseldorf nicht zu viele Sorgen um uns machen. Wir kommen schon nach. Schließlich wurden unsere Ortszeiten erst vor 70 Jahren der mitteleuropäischen Zeit unterworfen. Dafür waren aber auch hiesige Stadttrommeln noch 25 Jahre nach Sedan mit den Farben der Trikolore bemalt; dann erst wurde hier schwarweißrot getrommelt. In der Schwäbischen Zeitung wiederum steht seit Jahr und Tag DDR ohne Anführungszeichen. Allerdings, man kann so etwas hier nicht notieren, ohne das Gefühl zu haben, man hätte die Zeitung dadurch beim Bischof denunziert. (Martin Walzer: „Heimatkunde“, in: Heimatkunde. Aufsätze und Reden, Frankfurt a. M. 1968, S.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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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이란 당명 때문에 진보신당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한다.
„진보신당이 최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공천 잡음의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름 아닌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을 국민들이 많이 헷갈려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신당 당사로 "왜 이정희 대표는 사퇴하지 않는 것이냐"는 항의 전화가 옵니다. 동네에서 발로 뛰는 20여명의 지역 후보들은 주민들에게 두 당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데 선거운동의 절반 이상을 써야 합니다.“ (http://www.newjinbo.org/n_news/news/view.html?no=659)
„진보“란 이름과 함께 모든 걸 갈아치워야 할 때가 왔나 보다. 기회로 봐야지 이름을 남용한다고 통탄할 일이 아니다.
한국에 분명 호명법이 있을 것이다. 이건 잘 모르겠고, 단지 고대 희랍에서도 ‚이름’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이름’을 사유하는 고대 희랍은 세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즉 오노마, 에포스, 그리고 로고스다. '다 뭘 두고 말하다'란 기본 의미에 오노마는 ‚부르다’란 동사 오노마째인을 명사화한 것이고, 에포스는 ‚말하다-서사하다’란 동사 에이페인을 명사화한 것이고, 로고스는 ‚앞뒤가 맞게 말하다’란 동사 레게인을 명사화한 것이다. 이런 구조 안에서 오노마와 에포스가 공유하는 의미인 „약속“을 로고스가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름’과 ‚실천’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근데 „새누리당“이란 당명과 강령에 이런 고대희랍적인 이름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 그냥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강력한 윤리강령을 내놓고 있다.
한국 좌파의 이름, 약속, 그리고 실천은 뭔가? 이제 어떻게 이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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