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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존엄성
독일 기본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unantastbar" (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라고 규정하고 있다.
먼저 ‘규정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문제다. 누가 무엇을 어디에 근거하여 어떻게 규정하고 있단 말인가? 기본법 1조의 위상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성이 도출한 것인지 아니면 이성이 어디선가, 즉 이성 밖에서 발견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 도출했다면 무엇으로부터? 그저 발견한 것이라면 그 절대성은 어디서? 이성과 이성의 저편에 있는 게 묘하게 얽혀있다. 이성이 어쩌다 자기 밖에서 발견한 것에 기대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unantastbar"의 이해와 번역에 앞서 오고간다.
어원사전은 unantastbar의 일부인 tasten의 어원을 라틴어 ‘taxare’, ‘뭔가를 가늠하면서/하기 위해서 만지다’에서 찾고 있다. 이에 따라 ‘unantastbar'는 인간의 존엄성에 뭔가 다른 기준, 잣대, 상황 등을 갖다 대어 그 크고 높이, 적용범위 등등을 가늠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라틴어에서 한 쌍을 이루는 intactus 와 integer (tangere, 독 tasten)에서 다른 뉘앙스를 도출해 볼 수도 있겠다. 다른 것에 의해서 훼손될 수 없고(불가침성), 다른 것에 의해서 불완전하게 되는 일이 없고(완전성), 다른 것과 섞여 있지 않는(순수성) 의미로 integer가 사용된다. 종교적인 경외의 대상이 이렇게 ‘integer'하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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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발견한 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겠고,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나에겐 둘이 얽혀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음성을 몸소 경험한 ‘믿음’이 아니라, 일흔 다섯의 노인네가 ‘가라’하니까 두말없이 간 ‘믿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보잘것없는 믿음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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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한국기관 등 독일의 제도와 현실을 답습하러 온 사람들이 상당히 ‘부족하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독일 전문가/담당자들은 제도와 현실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당연 말이 길어질 수밖에. ‘다 아는데, 어떤 기준이 있냐? 그건 어떻게 마련하나?’ 뭐 이렇게 반응한다. 기본법의 현실(Wirklichkeit)에서 헌법재판소는 보통 말뚝 몇 개만 밖아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 한다. 그 말뚝이 절차와 관련된 것이면 주로 위원회가 구성되어 기본법 현실을 구체화한다. 답습하고 베껴 갈만한 특별한 조치나 정책이나 기준, 뭐 이런 게 없다. 이럴 때 마다 느끼는 건, 독일 담당자는 원칙/원리가 현실 속에서 정말 생동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데, 한국 전문가는 뼈다귀를 보여 달라고 때를 쓴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뼈다귀가 더 용이하겠지만. 암튼 그렇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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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잣대질 할 수 없다. 이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 이성이 도출한 것이 아닌 것, 이성이 어쩌다 찾은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실천의 범주다. 그래서 독일 기본법은 국가의 존재근거가 인간존엄성 존중과 보호에 있다고 한다. 수동적인 보호를 넘어서 존중해야 하기 때문애 인간존엄성이 장려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agendi potentia'의 증대를 추구해야 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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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길이 '이성 자폐증'에서 빠져나오는 길인지 모르것다.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 등의 뒤를 이어 반이성! 하는 오리무중의 차이의 철학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것다. 암튼 이성과 이성이 아닌 것, 그게 반이성이든, 이성 안으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암튼 이 둘 사이의 긴장을 견디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것다. 바로 이 긴장에 독일이상주의의 고도한 생산력이 있었지 않나 한다. 암튼 이성의 일부일처제는 아닌 것 같다. 열심히 짝을 찾고 또 다른 짝을 찾아야 할 것.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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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카톨릭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 벌어진 건 주지의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카톨릭이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고 그 절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케케묵은 카톨릭이 하나님의 말씀에 준거하여 극복한 상태로 다시 떨어진다. 통탄할 일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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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의 경제에 대한 [단호한] 노.53.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인간생명의 가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엄연한 경계선을 정립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배제의 경제와 소득의 부등에 [분명하게] 노”해야 한다. 이런 경제는 살인이다. 길거리에서 생활하도록 강제된 한 노인이 얼어 죽어도 아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지만 증권시장에서 증시가 2 포인트 하락하면 대서특필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배제다. (...) 이건 단순한 착취와 억압의 현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현상이다. 배제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살고 있는 사회에 귀속된다는 소속이 뿌리 체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배제로 인해서 하층, 주변부로 떨어지거나 힘없는 사람들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 밖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배제된 자들은 “착취된” 자들이 아니라, 단지 쓰레기, “폐기물”일 뿐이다.
(교황 프란체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53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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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통제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상응(adaequatio)? 이런 과도는 결국 이성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통과/과도하려면 고유한 모든 걸 말끔하게 씻어내고 ‘쉬볼렛’해야 하는데? 이런 과도의 가능성은 차치하고, 이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번역이 ‘이성이란 자기 밖에 있는 거에 기대고 있는 거’라 하면 어떨까? 만남? 할 이야기 많은 만남? ‘unantastbar’를 번역하지 않고 ‘손님’으로 모시는 '번역'? 뭐지?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