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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의 팔에 나치가 유대인에게 그리 한 것처럼 숫자를 새기고 있다. 표시된 자, 즉 경계에 있는 자, 경계 대상자로 구별되고 있다.
(난민의 손에 숫자를 적는 체코 여경) FAZ,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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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 nicht, Marie! Und kein Anderer auch nicht!”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마리!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짓]도 아니야!”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첵”에서 인용)
나치를 환영하고 졸졸 따라다녔던 나치추종자들의 변명과 어찌 이리 똑 같을까? 뷔히너가 어쩜 이렇게 독일 민족성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나치를 예견하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형안(炯眼/Hellsichtigkeit)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의 편지 몇 장을 살펴본다.
[1833.4.5 슈트라스부르크 체류 중 집에 보낸 편지]
오늘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 일을1) 언급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그건 폭력(Gewalt)입니다. 우리 맨 꼭대기에 있는 자들로부터(Fürst-제일인자/영주/군주) 뭘 기대할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이제 압니다. 그들이 인가하는 모든 것은, 달리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떼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가된 것 그것조차도 우리에게 [개들에게 던져 주듯] 던져 주는 것입니다. 그걸 마치 애걸한 자비나 궁색한 애들 장난감을 던져주듯이. 그리하여 한이 없이 멍청한 얼간이 인민이 [갓난아이의 몸을 받친다고 띠로 감아 놓은 것처럼] 그의 몸이 너무 꽉 쪼이게 칭칭 감겨 옴짝달싹할 없는 상황이란 걸 잊어먹도록 하려고. 이건 양철로 만든 엽총에 나무로 만든 칼을 차고서 어린애의 군인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데, 이건 오로지 독일인에게나 통하는, 써먹고 또 써먹어서 맛이 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우리의 신분제 대표제도는2) 살아있는 이성(gesunde Vernunft)의 조롱에 불과합니다. 우리 [독일인은] 저런 [기저귀 같은] 것을 차고서 백년을 더 기어 다닐지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그 모든 [좋고 나쁜] 결과들을 다 합산하면 [독일] 인민은 [틀림없이] 그들 대표자들의 고상한 연설들을, 로마제국의 황제가 어설픈 시 두 줄을 지은 왕실시인에게 2만 굴덴을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이 지불한 상황일 것입니다.3) 사람들은 청년들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한이 없는 폭력상황에 빠져 있지 않단 말인가? 우리는 단지 지하 감옥에서 태어나 양육되었기 때문에 손발에는 족쇄가 채워진 채, 입에는 재갈을 문 채 구덩이/감옥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저들은 뭘 두고 법적 상황이라고 한단 말인가? 보잘 것 없는, 그리고 썩어빠진 소수의 비자연적인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국민의 대다수를 쟁기를 끄는 짐승으로 만드는 법을 두고서? 그리고 이 법은, 야만적인 군대의 폭력과 이들 괴뢰군의(Agenten) 멍청하기 짝이 없는 교활한 행위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 법은 살아있는 이성에 가해지는 한이 없이 야비한 법입니다. 어떤 상황이라도(und) 나는 입과 손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지금] 일어난 [봉기군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인데, 이건 내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혹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로지 내가 현재 시점에서 어떤 혁명적인 운동도 헛된 의거(Unternehmung)로 여기고, 독일 사람들을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는 인민을 보는 사람들의 눈먼 짓에 합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리석고 미친 생각이 프랑크푸르트의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오판은 막중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판하는 것은 물론 죄가 아닙니다.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했든지(und) 독일 사람들의 무관심/무반응(Indifferenz)은 정말 모든 계산을 허사로 만드는 류의 무관심/무반응입니다. 마음 깊이 저 불행한 사람들을 애석해 합니다. 내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일에 연루되어 있지 않을 수 있을까? […]
[1834.3.10 이후 기쎈 체류 중 약혼녀에게 보낸 편지]
[...] 매 순간 펜을 손에 집어 들어 [뭔가를 쓰려고 시도한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태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뭔가 돌출 구를 찾기 위해서] 저는 지금 혁명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무시무시한 숙명론에 눌려 빠개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 제 자신을 간추릴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혁명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은 인간의 속성에는 맨 정신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사람을 미치게 만드는(entsetzlich) [그저 ‘그런가 보다’하는] 무관심(Gleichheit/여기서 Gleichheit는 평등 혹은 유사성이 아니라 위의 Indifferenz와 같은 의미/역자)을 보고,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서 거역할 수 없는 폭력(Gewalt)을, 모두에게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폭력을 봅니다. 개별자는 파도물결의 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은 그저 우연이고, 천재의 통치는 인형극이며, 철칙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웃기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이걸 인식하는 것이 최선이며 그걸 지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열병식군마 앞에서 그리고 [역사를 외골목 숙명으로 만들어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지키는] 역사의 건달들 앞에서 내 허리를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내 눈을 피에 익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단두대의 칼이 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das muß)이란 말은 인간에게 세례를 주면서 사용하는 저주의 말들 중 그 하나입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걸 가져다주는 사람은 저주하는 식의 발언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건 도대체 무엇[누구]인가요? 나는 이 생각을 더 이상 추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 라인 강 다리를 건 넌 후 나는 내 안이 다 파괴된 듯합니다. 모든 느낌이 [다 사라져] 더 이상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 기계일 뿐입니다. 나의 혼을 앗아갔습니다. (...) 그대는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냐고 묻습니다. 단지 한 점에서만 살 수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 점에서 찢겨 나와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내 자신의 비참함인데, 어찌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
주지하다시피, 뷔히너의 <보이 체크>는 미완성 드라마다. 완성을 기다리는 드라마다. 보이 체크가 자신의 존재근거가 되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하는 불륜여성 마리의 목에 꽂는 칼이 저들의 목에 꽂는 칼이 될 때 이 드라마는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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