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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기
1.1 직접적 동기
참세상 정은희 기자의 번역 “6월 30일 이후 이집트 노동자” (원제: 조엘 베이닌의 “ Egyptian Workers After June 30”)
1.2 보다 본질적인 동기
다른 나라 노동운동 소개는 쉽지 않다. 특히 [서구] 자본주의의 全세계적 관철이 제국주의와 평행을 이루면서 - 이 평행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과 함께 - 이루어지는 후기자본주의 혹은 “제3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운동을 소개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부분적인 경험이지만, 한국의 노동운동 소개도 쉽지 않았다. 개관할 수 없는 수많은 조직적, 사상적 요소들이 있었다. 전노협이 결성된 후에도 다양한 대기업노조 등 다양한 독립노조들이 있었고, NL, PD, NLPD 등등 얽히고설킨 사상적 요소들이 산재했다. 어용노조도 있었다. 자생적 노조와 더불어 부평산업선교회 등 노동운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던 시민단체들로 있었다. 여기에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양단된 한반도의 역사를 더해야 했었다.
다른 나라 노동운동 소개는 해당 국가 사회의 총체적인 이해를 전제한다는 결론이다.
2. 노동운동가의 글쓰기
가장 깨끗하고 간결한 독어는 테오 피르커(Theo Pirker)의 저서 “Die Blinde Macht. Die Gewerkschaftsbewegung in Westdeutschland.”(눈이 먼 권력. 서독의 노조운동)에서 소개된 2차 대전을 경험한 어느 노조활동가의 보고서였다. [지금 이 책이 내 곁에 없다. 그래서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조만간에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떻게 말했는지는 (Wortlaut)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단지 그의 문장체에 대한 느낌만이 남아있다.] 그의 문장체는 과학자의 프로토콜서술과 비슷했다. 담담하리만큼 간결했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 안에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걸 받아내는 살아 움직이는 정신이 있었다.
3. 위의 정은희 번역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들
0 글의 상음
글도 음악처럼 상음이 있다. 글의 기조다. 근데 정은희의 번역에서는 글의 상음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예:
[원문] “The Tamarrud campaign demanded early presidential elections, but the Egyptian army seized the opportunity of the mass gathering to depose Mursi on July 3, claiming, with some justification, that its coup was the will of the people.” [강조는 ou_topia]
[번역] “타마로드 운동은 조기 대선을 요구했지만, 이집트 군은, 7월 3일 무르시를 물러나게 하려고 자신의 쿠데타가 민중의 의지였다는 대의명분을 주장하며, 모여든 대중을 활용했다.”
원문의 상음은 “with some justification"이다. 이건 이집트 군부의 주장이 아니라 요엘 베이닌의 견해다. 번역문은 이걸 보지 못하고 있다.
다른 건 다 틀려도 괜찮다. 어쩜 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글의 상음, 글의 기조에서는 절대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0 현실에 주목하지 않는 번역
예:
[원문] “Three independent trade union organizations -- the Egyptian Federation of Independent Trade Unions (EFITU), the Egyptian Democratic Labor Congress (EDLC) and the Permanent Congress of Alexandria Workers (PCAW) -- also collected signatures and monitored workers’ participation in the demonstrations.” (강조는 ou_topia)
[번역] “이집트 독립노조연맹(EFITU), 이집트 민주노동회의(EDLC)와 알렉산드리아노동자상임회의(PCAW) 등 3개 독립적인 노동단체도 서명을 모으고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를 관찰했다.”
“three independent trade union organisations”를 “3개 독립적인 노동단체”로 번역했는데, “노동단체”는 소그룹이라는 느낌을 준다. 현실적으로 3개 노조상부조직들이다.
이렇게 현실에 주목하지 않는 번역은 이런 오류로 이어진다.
[원문] “These independent federations and hundreds of their constituent local unions have been established since the ejection of Mubarak because the Egyptian Trade Union Federation (ETUF) created in 1957 has always functioned as an arm of the state.”
[번역] “이들 독립연맹과 수백 개 지역 조직은 무바라크 제거 후 설립됐다. 1957년 창설된 이집트노총(ETUF)이 항상 국가편에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독립연맹과 수백 개 지역 조직 간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 없다. 원문은 수백 개의 지역노조들이 상부조직의 구성요소(constituent)가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자생 노조들이 힘을 합하여 상부조직을 결성했다는 점이다.
조목조목 비판은 여기서 그만둔다.
4. 노동활동가의 글쓰기는 어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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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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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형제들의 대살육을 직시하고 허둥거리면서 수습에 나선 베이닌의 위의 글보다 이집트 자생 독립노조들의 입장을 간결하게 서술한 “Workers and Egypt's January 25 Revolution”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편이 더 낫겠다. 독어 번역본이 있다. 무료다. (http://www.emanzipation.org/articles/em_1-2/e_1-2_beinin.pdf)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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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원문은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The Tamarrud campaign demanded early presidential elections, but the Egyptian army seized the opportunity of the mass gathering to depose Mursi on July 3, claiming, with some justification, that its coup was the will of the people.”
타마루드 운동은 조기 대선을 요구했지만 이집트 군부는 대중집회라는 기회를 포착해서 7월 3일 모르시를 끌어내리면서,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민중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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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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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with some justification"을 그렇게 구별해서 번역해야 할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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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some"이란 표현인데, 역겹고 비려요. 이 "some"의 정체를 제가 소개한 FAZ지와 Zeit지의 글은 밝히고 "그런 거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데, 베이닌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some" 정체를 실체를 호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좌파의 입장에서. 뭐지?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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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IS들이 쓴 글 보면 맨날 옳게도, 정당하게도 이런 말들이 나오는데 번역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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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independent federations and hundreds of their constituent local unions는 "이들 독립연맹과 수백 개 지역 조직"이 아니라 문맥상 이 세 개의 독자적인 연맹들과 그 산하 수백개 지역노조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because the Egyptian Trade Union Federation (ETUF) created in 1957 has always functioned as an arm of the state
"1957년 창설된 이집트노총(ETUF)이 항상 국가편에서 기능했기 때문이다.”가 아니라 "1957년에 생겨난 이집트 노총이 항상 국가기관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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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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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가 아니라는 게 저의 지적입니다. 지역노조들이 자생적으로 결성되고 이들이 모여서 구성요소가 되어서 상부조직을 결성했다는 게 핵심입니다. 탑다운이 아니라는 거죠.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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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상부조직"의 자생적 노동자운동의 이익에서의 이탈, 혹은 배반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 판단에는 이집트독립노조연맹(상부조직)의 정치적 오류가 있어고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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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ETUF를 이집트 노총이라고 옮기는 것은 순전히 민주노총처럼 부르기 편하라고 그러는 것이고 Federation이 들어가면 그냥 연맹입니다. 그러니까 EFITU는 이집트 독립노조연맹입니다. 민주노총은 그 밑에 또 연맹이 있기 때문에 뒤에 총자가 붙지만 총연맹은 Confederation입니다. 자생적으로 모였든 아니든 이 구조는 맨 위에 총연맹이 있고 그 밑에 연맹들이 있고 그 밑에 노조들이 있고 그 밑에 조합원들이 있는 구조라고 생각됩니다.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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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노조운동은 베이닌이 "Workers and Egypt's January 25 Revolution" 잘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ETUF (Egyptian Trade Union Federation)은 과거 한국노총과 같이 어용노조였고, EFITU( EgyptianFederation of Independent Trade Unions)는 2011년 1월 말에 결성이 선포된 조직입니다. 이 조직이 결성되기 이전에 2008년 이후 기업 단위의 다양한 자생적 독립노조들이 결성되었읍니다. 어용노조 ETUF를 대항해 모인거죠. 어차피 이집트 아랍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점을 노조운동의 흐름을 정확하게 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조운동 활성과 관련 이집트릐 아랍사회주의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베이닌을 잘 설명하고 있고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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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닌은 스탠포드 교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영문입니다. 전 아직 그 글을 검토하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문제에 관심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말 아부 에이타는 나세르주의자들인 알 카라마당의 창립자들 중 한 명입니다.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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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닌의 글을 독어번역판에서 번역한 내용입니다."이집트 사람들이 호스니 무바락 대통령을 쫒아낸, “1월 25일의 혁명”이라고 일컫는 인민봉기의 사건들 중에서 보다 덜 인식된 사건 하나는 이집트독립노조연맹(EgyptianFederation of Independent Trade Unions/EFITU. 이하 이집트독립노조연맹) 결성이다. 이집트독립노조연맹의 존립은 2011년 1월 30일 이집트 인민운동의 진원지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의 [중산층 시민단체이며 노동자운동에 주목한 Center for Trade Union and Workers Services 의 우산아래] 기자회견에서 선포되었다. 2008년 후 부동산 세무노동자, 보건기술직 노동자, 그리고 교사들이 결성한 자주노조들의 발안으로 창설되었다. 이 연맹에 그 얼마 전에 조직설립허가를 받은 850만 명의 연금수급자 연명들이 가입하고, 이어서 카이로, Helwan, Mahalla al-Kubra, Tenth of Ramadan und Sadat City 등의 의류 산업, 제약 및 화학 산업, 그리고 철강 산업의 임노동자 대표들과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이 가입하였다. 이집트자주노조연맹 EFITU는 인민봉기를 타고 처음으로 창설된 기구로서 노동자의 사안을 1월 28일 이후 명시적인 혁명운동으로 [발전한 인민운동과] 결부시켰다.
노동조합의 국유화
노동자대중에 주목하는 NGO 및 노조들은 수년전부터 독립노조들의 결성을 토론해 왔다. 이집트노총(Egyptian Trade Union Federation/ETUF)이 1957년 결성된 이후 국가적인 기구가 되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노조들이 필요했다. 이집트노총 ETUF의 임무는 노동자대중을 동원하여 노동 및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ETUF는 1976년의 노조법과 2003년의 노동법이 규정에 의해서 노조조직[활동]을 독점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기업차원의 노조위원회들은 전국 24 업종노조에 합류해야 하고, 이 24대 업종노조는 이집트노총 ETUF에 가입해야 한다. 업종노조위원장들로 이집트 노총 ETUF의 집행부를 구성한다. 무바락의 사임까지 업종노조위원장들은 거의 모두 무바락의 민족민주당(NDP) 당원이었고 적지 않게 NDP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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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번역한 내용들입니다."1991년 이집트 노총 ETUF 집행부(지도부)는 이집트가 IMF와 세계은행과 합의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개선과 안정화프로그램 (Economic Restructuring and Stabilization Program
ERSAP)에 승인했다. 이어 이집트노총은 자본 및 정권과 협력하고 지들이 대변한다는 자칭하는 노동자의 이익에 반하는, 2004년 총리 Ahmad Nazif가 구성한 “비즈니즈맨의 정부”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Nazif의 직무는 이집트 경제의 신자유주의 이전을 가속화하고 공공부문을 민영화/사유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내각의 경제관련 부서는 서구에서 교육된 박사들와 기업총수들에게 주어졌다. 관광부장관은 [관광업자로서] [국가투자를] 자기[사업의] 투자로 결정하고 건설부장관은 부동산사업자였다. 등등. 이들이 [모두] 무바락의 장자 가말 무바락과 한 패들이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내각은 호스니 무바락보다 며칠 앞에 퇴임했다.
구조조정프로그램 ERSAP에 의해 감소하는 공공부문에서의 취업자 수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노총 ETUF 노동자들을 확장되는 민영산업/사기업에서 조직하는데 아무런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기듯이 이집트노총은 외국 직접투자[유치]를 위해 마련된 경제특구와 이른바 품질[품목] 공업단지(Special Economic Zones, Qualified Industrial Zones), 즉 [생산]가치에서 이스라엘 원산지 [부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10.5%를 넘으면 미국에 아무런 양적 규제 없이 그리고 무관세로 [수출하는] 공업단지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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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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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을 미루어보면 1월 25일 수년전에 이미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 및 이웃들이 사회운동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파업과 그 외 단체행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본질적인/실질적인(substantiell) 경제적인 요구들을 달성할 수 있었고 수많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가르침을 전달/중재할 수 있었다. 예전엔 중산층의 열성적인(engagiert) 활동가들 외엔 모두가 가망 없는 것으로 간주된 노동자의 [자발적인] 단체행동들을 통해서 전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이집트의 노동자운동은 몇몇 심각한 결함들을 안고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점은 전국적인 혹은 지역[전반]적인 노조, 정치적-조직적 틀 혹은 하나로 묶어주는 프로그램의 부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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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을 번역해서 내일 올리겠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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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내일로 미뤄야 겠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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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some justification"에서 이집트 노조운동의 상부조직+서구사회주의자+참세상이 이집트군부를 지지하고 무슬림형제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한 이유를 읽읍니다. 무슬림형제들이 노조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슬림형제들이 이집트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조직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은 완전히 무시하고. 노조/노동운동이 [장기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이집트 노조/노동운동 상부의 오류로 상실한 게 아닌가 합니다."with some justification"은 인륜적인 차원에서의 연대에 소홀하는 말하기가 아닌가 하고요. 마르크스의 유적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서구에 가르쳐준 아랍-이슬람 철학자 아베뢰스의 "유적이성"(intellectus agens)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건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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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UF는 이집트노련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상급단체는 ICATU(국제아랍노총)인데 다마스커스에 있다고 하는군요. 우리도 아마 산별이 되면 민주노총은 무의미하고 국제산별이 될거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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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새 국제노총 ITUC 출범http://www.voakorea.com/content/a-35-2006-11-01-voa22-91233079/1301498.html
이집트, 바레인, 튀니지, 알제리 등에서의 활동(2011년)
http://www.global-unions.org/IMG/pdf/03-globalunionsandmena.pdf
레이버스타트 설립자 에릭 리의 글
http://www.ericlee.info/blog/?p=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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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총은 이집트 노동계급의 친구가 아니"라는 세계사회주의자웹사이트http://www.wsws.org/en/articles/2011/02/btuc-f12.html
The chief concern of the union executives is to prevent Egyptian workers from challenging the imperialist domination of the region. The American trade union federation, in particular, has a long and predatory history in North Africa and the Middle East. With funding from the CIA, 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formed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Free Trade Unions—the forerunner of the ITUC—in 1949 to battle the influence of left-wing trade unions and help establish anti-communist and pro-Western regimes in the region. Among its first “successes” was the bringing to power of Habib Bourguiba—Tunisian dictator Ben Ali’s predecessor—who brutally suppressed the working class and incorporated the General Union of Tunisian Workers (UGTT) into the state.
"국제노총은 IMF 직원"이라는 세계노련(WFTU) Quim Boix
http://www.alnef.org.za/index.php?includ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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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이란의 FARS 뉴스 통신 보도입니다.http://english.farsnews.com/newstext.aspx?nn=13920604001374
The P-800 Oniks, also known in export markets as Yakhont (in English means ruby or sapphire), is a Russian/Soviet supersonic anti-ship cruise missile developed by NPO Mashinostroyeniya as a ramjet version of P-80 Zubr. The missile has a range of 300 kilometers.
Development of Yakhont missiles officially started in 1983, and by 2001 allowed the launch of the missile from land, sea, air and submarines. The missile has the NATO reporting codename SS-N-26. It is reportedly a replacement for the P-270 Moskit, but possibly also for the P-700 Granit.
그러나 시리아에 배치되는 미사일은 Onyx SS-N-25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명 수퍼선번입니다.
http://europebusines.blogspot.kr/2013/08/has-obama-administration-made-decision.html
The Onyx SS-N-25 (P-800 Oniks) is sometimes called the Super-Sunburn (SS-22). It is arguably the fastest (hypersonic) anti-shipping missile on Earth. It is so fast that it could sink a destroyer sized warship just from its terminal impact speed, even if it did not have a massive warhead (which it does).
선번 대함 미사일
http://rense.com/general59/thesunburniransawesome.htm
The Sunburn - Iran's Awesome Nuclear Anti-Ship Missile
The Weapon That Could Defeat The US In The Gu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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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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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적수를 반대하여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의 《해상협력-2013》합동군사연습이 수요일에 울라지워스또크에서 끝났습니다. 두 나라 해병들이 제일 어렵고 위험한 정세에서 서로 협력하는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두 나라 군지도부가 군사연습결과를 구체적으로 분석할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벌써 명백한것은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이 대단히 복잡한 군사작전을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다는것입니다.
바다에 군함들이 떠있는데 전투기가 나타나 폭탄을 투하합니다. 구축함들이 대응사격을 가합니다. 이때 우측에서 적잠수함이 구축함을 향해 다가옵니다. 프리케트함들이 심해어뢰를 발사하여 적잠수함을 소멸합니다.
합동군사연습은 울라지워스또크의 뾰뜨르대제만에서 진행되였습니다. 연습에서는 가상적수의 공습을 격퇴하는 훈련이 진행되였습니다. 동부군관구의 쑤-24전투기들이 가상적수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후에는 전투기들이 전투에 진입하여 미싸일함정, 잠수함들의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해적들에게 랍치된 선박을 구원하는 긴장한 특수작전도 진행되였습니다. 7척의 군함들, 직승기들, 해병대가 참가했습니다. 직승기는 랍치된 선박에 조성된 정세를 감시했으며 해병대는 고속정을 타고 선박을 점령하여 해적들을 소멸했습니다.
중국측에서는 이번 연습에 4척의 구축함, 2척의 프리케트함, 1척의 보급함이 참가했습니다. 로씨야(러시아)측에서는 8척의 군함들이 참가했습니다. 그중에는 태평양함대의 기함인 미싸일순양함《와랴그》호도 있습니다.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은 벌써 두해째 이런 대규모합동군사연습을 진행했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은 두 나라의 합동군사연습의 목적이 반테로전만이 아니라고 일치하게 주장합니다. 언론들에는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이 군사동맹을 형성한다는 억측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씨야(러시아)해군총참모부 부총참모장 해군중장 레오니드 쑤하노브는 이 소문을 배격했습니다.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의 합동군사연습은 다른 나라를 반대하는것이 아니라고 쑤하노브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 자기 나라 리익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연습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나라들은 좋아하면서 정세가 안정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들은 저들의 리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은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이 지역의 대국들이기때문입니다.》
군부관계자들은 이번 합동군사연습의 목적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안정을 보장하는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다수 분석가들은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이 가까운 앞날에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진행할것 같지는 않다고 주장합니다.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의 지도자들이 만일 정세가 요구하는 경우 군사적으로 개입할데 대한 정치적결정을 빨리 채택할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때문입니다. 실례로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은 2010년에 끼르기지야의 오슈에서 류혈적인 종족간충돌이 일어났을때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로씨야(러시아)와 중국이 군사동맹을 형성한다는 소문은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소문과 다를바 없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겸해서 말한다면 이번 연습기간에도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일본언론들이 서부해안에서 미확인비행물체가 발견되였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로씨야(러시아)태평양함대공보부는 미확인비행물체의 출현이 이번 합동군사연습과 련관되여 있지 않는가고 물어보는 수많은 일본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출처: 러시아의 소리]: http://korean.ruvr.ru/2013_07_11/117662757/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101601005
UFO부터 쓰나미폭탄까지…뉴질랜드 역사적 비밀
입력: 2013.01.01 ㅣ 수정 2013.01.23 18:40
미확인비행물체(UFO)부터 해일을 일으키는 쓰나미폭탄까지 뉴질랜드 국가기록원에 숨겨져 있던 역사적인 비밀이 최근 책을 통해 드러났다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레이 와루의 신간 ‘비밀과 보물’(Secrets and Treasures)은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있는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자료를 모은 책으로, 그 양만 총 100km에 달하는 책장을 가득 채우는 역사적인 자료들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 레이 와루는 “정말 압도당했다. 처음 찾던 것은 (뉴질랜드 건국의 기초문서인) ‘와이탕이 조약’과 ‘(영국으로부터) 독립 선언과 같은 중요 문서였다.”면서 “조사를 하면서 새로운 내용이 속속 발굴돼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레이 와루는 뉴질랜드의 여성 참정권을 요구한 3만 6000명분의 탄원서를 예로 들었다. 길이만 300m에 달하는 이 서명은 뉴질랜드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1893년 당시, 찬성 결정으로 의회 바닥에 펼쳐졌고 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 인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책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문서 이외에도 희귀 문서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여러 건이 소개됐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프로젝트 실’(Project Seal)이란 이름 아래 뉴질랜드와 미국이 비밀리에 진행한 ‘쓰나미 폭탄’ 개발 계획에 관한 문서다.
핵폭탄에 비견할 파괴력을 가진 이 폭탄은 1944년 6월 태평양의 산호초를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임무를 수행한 미 해군 간부가 작전 수행 시 거대한 파도가 생성되는 모습을 보고 착안, 지진 해일을 일으키는 폭탄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계기였다.
이에 과학자들이 오클랜드 북방 바다에서 실험을 시행한 결과, 이 계획은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근해에서 10번의 큰 폭발을 일으키면 해안의 작은 마을을 삼킬 수 있는 높이 10m 정도의 쓰나미를 발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들은 계산했다. 그 계획은 소규모의 실험 성공을 거뒀지만 1945년 초 중단됐다.
이 밖에도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특이한 문서 중에는 군과 민간 항공기 조종사 등이 보고한 UFO 목격 정보에 관한 파일도 있다. 이 문건은 원래 뉴질랜드 국방부에서 관리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많은 지역에서 상공을 이동하는 수수께끼의 빛을 목격했다는 문건부터 비행접시나 (고대 이집트 왕인) 파라오의 가면을 쓴 외계인, 외계 문자로 추정되는 도형을 그린 스케치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중 뉴질랜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UFO 목격담은 1978년 남섬 카이코라 앞바다에서 방송국 촬영 스태프가 찍은 ‘이상한 빛’이라고 한다.
하지만 UFO 헌터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뉴질랜드군은 선박으로부터의 빛이 구름에 반사되거나 금성이 변칙적인 외형을 하는 등의 자연 현상일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에 대해 레이 와루는 “국가기록원의 자료 열람은 지루할 것 같지만 당시 풍토를 알 수 있는 ‘창’”이라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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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폭탄 투하하는 나사.http://news.nationalgeographic.com/news/2009/10/091009-nasa-moon-bombing-lcross-impact-crash.html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폭탄도 개발중.
http://www.opednews.com/articles/Secret-American-Atom-Tests-by-Sam-Hamod-110311-718.html
은퇴한 우주왕복선들과 파인먼의 가상 인터뷰.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607027002
파인먼: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돼 반갑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애틀랜티스를 제외하고는 이제 편히 쉴 일들만 남았네. 엔데버 자네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만들어졌는데, 나 같은 물리학자가 왜 우주왕복선의 모임에 나타났는지 궁금하지 않나?
엔데버:제가 1992년에 태어났으니까 1988년에 돌아가신 선생님을 뵐 기회가 없었죠. 그래도 그 명성만큼은 익히 들었습니다. 1986년 챌린저 형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조사위원회인 로저스위원회(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가 당시 위원장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위원장의 이름을 따 위원회 이름을 부른다. 부위원장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었다)에 참여하셨죠? 그때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 1986년 1월 28일 발사 직후 73초 만에 폭발한 챌린저호.
출처 미항공우주국(나사)
파인먼:사실 나한테도 우주왕복선은 TV로나 보던 존재였지. 그래서 처음에 나사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거부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사람(기네스 파인먼)이 “모두가 몰려다니면서 정치를 할 게 뻔한데, 제대로 조사를 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고, 난 멍청하게 우쭐해서 그 말을 받아들였지.
디스커버리:그래도 사고 원인을 찾아내셨잖아요.
파인먼:글쎄. 세상에는 내가 챌린저가 발사되던 날의 기온이 크게 낮았고, 그 때문에 연료통의 틈새를 메우는 고무 O링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연료가 유출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그 문제를 처음 알아낸 것은 국방부의 커티나 장군이었어. 난 단지 그 문제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지.
애틀랜티스: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얼음물을 달라고 해서 실제로 O링을 넣어 뒀다가 보여 줬던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개회의였는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파인먼:아무도 나한테 O링을 주지 않았는데, 회의장의 모형에 O링이 있었고 그걸 실험할 수 있는 곳이 거기뿐이었거든. 사실 조사 과정에서 나사와 관련 회사들이 얼마나 일을 엉망으로 하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수많은 부분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어. 챌린저 폭발의 원인이 단순히 O링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디스커버리:이제 뭐 다 지난 일이고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니 구체적으로 좀 얘기를 해주시죠.
▲ 리처드 파인먼
파인먼:120일이 조금 넘는 조사기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거기에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랑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라는 말이었지. 누군가 자기들을 파헤치고 다니는 게 불편했던 것이지. 무엇보다 우주왕복선은 사람이 만들고 탄 물건 중에 가장 위험했거든. 너희들은 실제로는 폭탄이나 다름없지. 우주왕복선의 설계상 사고 확률은 100~450회 비행당 1건으로 돼 있어. 군용기가 2만 2000회 비행당 1회, 민간 여객기가 100만건당 1회로 계산되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게 높은 위험도지. 그런데 나사는 이걸 민간 여객기와 같은 100만분의1이라고 발표했거든.
엔데버: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왔죠?
파인먼:“우주왕복선에는 사람이 타기 때문에 더 안전하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때문이야. 숫자 조작을 한 거지. 실제로 우주공간에서의 임무를 제외하고, 비행과정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착륙할 때 바퀴를 꺼내는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밖에 없거든. 그 밖에도 부품들에 생기는 문제를 규정 변경을 통해 허용치로 바꾸거나 엔진 터빈에 생긴 균열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용 가능으로 판정하기도 했어. 조사 과정에서 보니까 엔진, 부품, 연료 등 많은 부분에서 현장 기술자들이 발사를 반대했는데 윗선에서 묵살했더라고.
디스커버리:그런데 왜 무리해서 발사를 한 거죠?
파인먼:챌린저가 폭발한 1986년 1월 28일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가 예정돼 있었지. 영화배우 출신답게 쇼를 좋아했던 레이건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챌린저호의 우주인과 교신을 하려고 했던 게 무리한 발사의 원인이었다고 봐야지. 특히 챌린저에는 일반인이었던 과학교사 매컬리프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극적 효과로는 최고였겠지. 챌린저가 얼마나 무리한 발사를 하는지 알고도 탔을 만큼 매컬리프 부인이 용감했는지는 별개로 쳐야겠지만 말야.
애틀랜티스:결국 그때 나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안을 하셨고, 실제로도 많은 개선이 이뤄졌잖아요. 그런데 2003년에 큰형님인 컬럼비아호가 또 불행한 사고를 당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 1990년 4월 25일 허블 우주망원경을 띄우기 위해 우주로 꺼내고 있는 디스커버리호.
출처 미항공우주국(나사)
파인먼:그건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여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주왕복선이 워낙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 외부적으로는 발사 단계에 타일이 떨어져 나가면서 돌아올 때 열을 견디지 못해 폭발했다고 하던데. 일각에서는 나사가 1990년대 후반에 구조조정을 심하게 하면서 관리와 정비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하더구먼.
자, 사고 얘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30년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각자의 안식처(디스커버리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엔데버는 캘리포니아과학센터, 애틀랜티스는 플로리다 케네디우주센터)로 옮겨지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각자 일생에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을 되돌아볼까?
디스커버리:전 ‘지구의 눈’으로 불리는 허블 우주망원경을 1990년 4월에 우주로 올려놨죠. 사람들이 총천연색 우주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 것은 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까지 우주왕복선 5대가 기록한 우주비행 135회 중 39회가 제 차지였습니다.
애틀랜티스:저 역시 허블망원경의 수리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2003년 2월 컬럼비아 형님이 허블망원경을 수리하고 돌아오다가 사라진 이후 나사는 “국제우주정거장(ISS) 이외에는 우주왕복선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하지만 미국 과학자들은 물론 전 세계에서 허블망원경을 계속 보게 해 달라는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 제가 다시 허블망원경으로 향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전 가장 마지막으로 하늘을 난 우주왕복선으로 역사에 남을 겁니다. 이달 말 비행으로 말이죠.
엔데버:하늘에 떠 있는 가장 큰 인공구조물인 ISS는 제가 주도한 작품입니다. ISS 내 우주인 투입이나 우주인들이 체류하는 데 필요한 물품 공급, 배터리 교체, 로봇 팔 설치 등이 모두 저를 통해 이뤄졌죠. 2007년에는 저를 타고 우주로 간 우주인들이 선생님이 돼 지구의 아이들에게 과학교실을 열기도 했죠. 이젠 모두 지나간 추억이 됐지만 말이에요. 언젠가 제 후배들이 태어난다면 이런 얘기들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희 형제들과 수백명의 우주인들이 만들어낸 도전의 역사는 영원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1992년 5월7일 고장난 통신위성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유영을 하고 있는 엔데버호 우주인.
출처 미항공우주국(나사)
파인먼:우주를 날아서 비행기처럼 자유롭게 활주로에 착륙한다. 정말 공상과학 소설 같은 얘기를 현실에서 보여준 자네와 나사의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네. 물론 보이저(1977년 발사된 나사의 행성 탐사선. 목성과 토성을 찍었고 현재 태양계 끝에 도달해 있다)처럼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태양계 밖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여전히 자네들이 여기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네. 위험한 비행을 하며 형님 둘(컬럼비아·챌린저)을 먼저 보내고 자네들은 살아남지 않았는가 말일세. 우주왕복선이 이뤄낸 수많은 업적보다 내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세상에 홍보용으로 전락한 과학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줬다는 점이라고 말하겠네.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그런 일이 계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일세. 오늘 즐거웠어. 각자의 자리에서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기 바라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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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기차를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2046
http://youtu.be/w8rG4plRM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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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구름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aklar&logNo=40194857945
ひこうき雲
히코오키 구모
비행기 (꼬리)구름
白い坂道が
시로이 사카미치가
하얀 언덕길이
空まで続いていた
소라마데 쯔즈이테이타.
하늘까지 뻗어있었다
ゆらゆらかげろうが
유라유라 카게로오가
아롱아롱 아지랑이가
あの子を包む
아노 코오 쯔쯔무
그 아이를 감싼다
誰も気づかず
타레모 키즈카즈
아무도 모르는새
ただひとり
타다 히토리
그저 혼자서
あの子は昇っていく
아노코와 노봇테 유쿠
그 아이는 언덕을 오르고
何もおそれない
나니모 오소레나이
아무 겂도 없이
そして舞い上がる
소시테 마이 아가루
그리고 날아 오른다
空に憧れて
소라니 아코가레테
하늘을 동경하여
空をかけてゆく
소라오 카케테 유쿠
하늘을 가로지른다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
아노코노 히코오키 구모
그 아이의 생명은 비행기 구름
高いあの窓で
타카이 아노 마도데
높은 저 창으로
あの子は死ぬ前も
아노코와 시누마에모
그 아이는 죽기전에도
空を見ていたの
소라오 미테 이타노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今はわからない
이마와 와카라나이
이제는 알 수 없지
ほかの人にはわからない
호카노 히토니와 와카라나이
다른사람은 알지 못하지
あまりにも若すぎたと
아마리니모 와카스기타토
너무 젊었던 탓이라고
ただ思うだけ
타다오모우다케
그저 그리 생각 할 뿐
けれどしあわせ
케레도 시아와세
그래도 행복하지
'''''''
空に憧れて
소라니 아코가레테
하늘을 동경하여
空をかけてゆく
소라오 카케테 유쿠
하늘을 가로지른다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
아노코노 히코오키 구모
그 아이의 생명은 비행기 구름
空に憧れて
소라니 아코가레테
하늘을 동경하여
空をかけてゆく
소라오 카케테 유쿠
하늘을 가로지른다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
아노코노 히코오키 구모
그 아이의 생명은 비행기 구름
가사출처: http://m.blog.daum.net/melon310/2955788
http://www.youtube.com/watch?v=TMKqQ_zuY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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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첫번째 중국영화세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
양조위
http://youtu.be/kWQLkrYxmpc
장첸
http://youtu.be/GdBNO7NthHA
장쯔이
http://www.youtube.com/watch?v=2Tk44p0tLlg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과 영상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조선의 여자들처럼 머리에 쪽을 진 장쯔이는 어쩌면 송혜교의 도플갱어인지도.
http://youtu.be/GNqE_ZwBO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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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리아 사태와 관련하여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를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주장들을 발견했습니다.석유는 화석연료가 아니다
http://eyeon.tistory.com/19
유가상승과 종말론
http://www.sciencetimes.co.kr/preview/article.do?todo=articleView&atidx=23436&print=Y
Oil Is NOT A Fossil Fuel - It Is Abiotic
http://rense.com/general67/oils.htm
Discovery backs theory oil not 'fossil fuel'
http://www.wnd.com/2008/02/4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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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레프트21은 시리아 혁명적좌파경향의 성명서를 소개했습니다.http://www.left21.com/article/13498
원문은 http://syriafreedomforever.wordpress.com/2013/08/21/statement-of-the-revolutionary-left-current-in-syria-on-the-massacre-in-the-region-of-east-ghouta-resulting-use-of-chemical-weapons-by-the-assad-regime/
레프트21은 시리아 혁명적 좌파경향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아사드 정권은 8월 21일 다마스커스 인근 동(東) 구타 지역을 화학무기와 독가스로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피해자의 다수는 여성과 아이 들이었다."
cbs 뉴스는 "Syria chemical weapons attack blamed on Assad, but where's the evidence?"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http://www.cbsnews.com/8301-202_162-57600624/syria-chemical-weapons-attack-blamed-on-assad-but-wheres-the-evidence/
Chemical and biological weapons experts have been relatively consistent in their analysis, saying only a military force with access to and knowledge of missile delivery systems and the sarin gas suspected in Ghouta could have carried out an attack capable of killing hundreds of people.
But no official death toll has been given. The international aid group Doctors Without Borders said it tallied 355 people killed and more than 3,000 displaying symptoms typical of a nerve agent like sarin gas, but no independent organization has yet confirmed that it was sarin gas used in Ghouta. Nor has it been confirmed what the delivery method was.
그렇다면 레프트21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독가스 공격이 아사드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http://www.theblaze.com/stories/2013/08/30/retired-u-s-general-who-visited-syria-on-day-of-sarin-attack-obama-needs-to-back-the-fsa-fighters-in-syria/
“It was horrific,” Vallely told TheBlaze (see video below). “We were getting updates from the (Free Syrian Army) fighters that (President Bashar Al) Assad had gassed his own people with Sarin. The U.S. needs to back the FSA fighters. Only a monster could do such a thing.”
레프트21은 "이번 학살은 혁명의 보루 중 한 곳에 대한 전면 공격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합니다. 8월 26일 로이터 보도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로이터에서 이 글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 이 글을 본 것은 로이터였습니다)
http://news.yahoo.com/syrian-kurdish-leader-says-assad-not-blame-attack-181018014.html
Syrian President Bashar al-Assad would not be "so stupid" as to use chemical weapons close to Damascus, the leader of the country's largest Kurdish group said.
Saleh Muslim, head of the Kurdish Democratic Union Party (PYD), said he doubted the Syrian president would resort to using such weapons when he felt he had the upper hand in the country's civil war.
한편 시리아 자유군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An FSA officer told TheBlaze that they are secularists, not Islamists and “want to fight al-Assad and al-Qaeda together, but with the help of America.”
The FSA fighter said that Al Qaeda fighters in the region “want to kill me” because we represent a secular trend.
그러나 시리아 자유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http://www.joshualandis.com/blog/the-free-syrian-army-doesnt-exist/
Shorter version of the above: Let’s say it again, the FSA doesn’t exist – at least not as commonly perceived. Global Syria coverage would be a lot less confusing if journalists didn’t persist in pretending that it does.
There are of course insurgent alliances that actually do exist. For example, we’ve recently seen the creation of the Syrian Islamic Front (homegrown Syrian salafis, who don’t take Western money, and don’t call themselves FSA), and there’s the Syrian Liberation Front (a loose collection of Western/Gulf-funded salafis and more moderate Islamists. Before creating the SLF, these groups used to call themselves FSA, and they still tend to be lumped in with the FSA by many news reporters), the Shields of the Revolution (Muslim Brotherhood affiliates, who themselves occasionally use the FSA term), or the locally based Ansar el-Islam Gathering (an Islamist coalition in Damascus, members of which used to call themselves FSA, but don’t anymore).
But these groups have so far received near-zero coverage in the Western media. All we ever hear about is the FSA and Jabhat al-Nosra, as if these two organizations represented two rival wings of the insurgency. Since only one of them actually exists, it would be one wing at best, and that doesn’t fly.
레프트21은 시리아에 대해서 별로 조사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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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붉은 헤게모니가 발표한 입장입니다. (이 글은 분석과 입장 카테고리에 들어있지만 이런 글을 분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http://www.redhegemony.com/index.php?document_srl=13254
"그러나 민중의 변화를 향한 거대한 행동은 역동적이지만 지그재그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거대하게 확산되고 거세게 불타올랐다가도 순식간에 투쟁의 불길이 잦아들고 답답하게도 투쟁의 성과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 성과를 또 하나의 지배계급과 정치적 특권세력이 가로채는 걸 멍하게 지켜보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세력과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무력과 이슬람교에 대한 숭배와 순종, 전제정치의 논리가 사회화, 문화화, 대중화 되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크다. 오랜 정체의 삶에서 변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맛 본 대중의 변화를 향한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 비록 스스로 변화가 향해야 할 정치적 목표와 그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기존의 정치세력에게 그 변화를 기대하지만 변화를 향한 의지는 지속적이다. 기존의 지배세력과 특권세력은 대중의 거대한 변화열망을 담아낼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제를 깨고 나가기 위한 대중의 투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참세상의 입장입니다.
http://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1246&page=1&category1=38
"이 때문에 튀니지에서처럼 계속적인 세계 경제위기 아래 북아프리카 민중의 혁명 운동이 다시 일어나고 있지만 이집트의 사례로 이제 혁명 운동의 여지는 극히 줄어든 상황이다. 리비아에 대한 서구의 군사 개입, 파국으로 치달은 시리아 내전, 이집트 군부의 학살로 혁명 운동 사례는 모두 질곡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군부도 무슬림형제단도 아닌, “빵과 자유, 사회적 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와 전략이 더욱 주목된다."
이 때문에! 이 때문에!
다음은 다함께의 입장입니다.
http://www.left21.com/article/13491
"따라서 우리는 미국과 서방의 어떠한 개입도 단호히 반대한다.
시리아 민중은 열악한 무기와 심각한 생활고 속에서도 혁명을 지켜 왔다. 폭압적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진정한 힘은 제국주의의 미사일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민중의 혁명에 있다."
게으름, 무기력, 정신착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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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계위원회(CFR)란 무엇인가?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fc]=4&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253
"지난 1921년에 조직된 CFR은 현재 미 국무부 이외 미국의 외교 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잡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는 그래서 미국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의 필독 참고서로 꼽히고 있다."
CFR의 Ed Husain이 최근 발표한 두 개의 글
1. If the West Would Step Up
http://www.nytimes.com/roomfordebate/2013/08/14/is-this-the-end-of-the-arab-spring/hope-for-the-arab-spring-if-the-west-steps-up
It is still not too late: the Arab Spring can be saved, but to do so requires international effort. What happens in Egypt does not stay in Egypt. The military's persecution of the Muslim Brotherhood is providing fuel to global Islamist radicalism, and in the minds of young Muslim activists, the credibility of democracy is being burned. Let us not forget that Egypt's prisons and military dictators gave us Ayman al-Zawahiri and a cadre of other jihadists. A new generation of extremists will be born unless the democratic process finds oxygen in Egypt.
2. Why Western intervention in Syria will leave chaos
http://edition.cnn.com/2013/08/28/opinion/syria-husain-opinion/index.html
Syria after al Assad will be worse. A new civil war will break out between opposition factions. By bombing Syria today, we bear the burden of the instability we leave in our w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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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Korean Air Lines 007 Shootdown, 大韓航空007便撃墜事件)은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007편 여객기(기종 : 보잉747-230B, 기체번호 : HL7442)가 비행 중 소련 상공에서 소련 공군 소속의 수호이 15(ru)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숨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래리 맥도널드(en) 미국 민주당 하원 의원을 포함한 16개국 269명에 달하는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래리 맥도널드의 생전 모습
http://youtu.be/puNCkwjuxJ0
Congressman Larry McDonald on Crossfire, May 1983, just three months before being killed in the Korean Airlines 747 that was shot down by the Soviets near Moneron Island after the plane entered Soviet airspace.
"The drive of the Rockefellers and their allies is to create a one-world government combining supercapitalism and Communism under the same tent, all under their control.... Do I mean conspiracy? Yes I do. I am convinced there is such a plot, international in scope, generations old in planning, and incredibly evil in intent." Congressman Larry P. McDonald, 1976
"There is a real question in my mind that the Soviets may have actually murdered 269 passengers and crew on the Korean Air Lines Flight 007 in order to kill Larry McDonald." -- Jerry Falwell, The Washington Post, September 2, 1983
A few Rockefeller quotes to prove Larry was right:
"We are grateful to The Washington Post, The New York Times, Time Magazine and other great publications whose directors have attended our meetings and respected their promises of discretion for almost forty years. 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for us to develop our plan for the world if we had been subject to the bright lights of publicity during those years. But, the work is now much more sophisticated and prepared to march towards a world government. The supranational sovereignty of an intellectual elite and world bankers is surely preferable to the national autodetermination practiced in past centuries." David Rockefeller [June, 1991]
"For more than a century ideological extremists at either end of the political spectrum have seized upon well-publicized incidents such as my encounter with Castro to attack the Rockefeller family for the inordinate influence they claim we wield over American political and economic institutions. Some even believe we are part of a secret cabal working against the best interests of the United States, characterizing my family and me as 'internationalists' and of conspiring with others around the world to build a more integrated global political and economic structure -- one world, if you will. If that's the charge, I stand guilty, and I am proud of it." -David Rockefeller, from his own book, Memoirs.
"This present window of opportunity, during which a truly peaceful and interdependent world order might be built, will not be open for too long... We are on the verge of a global transformation. All we need is the right major crisis, and the nations will accept the New World Order." - David Rockefeller speaking at the United Nations Ambassadors' dinner. [Sept. 2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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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nes: the future of war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northamerica/usa/10263923/Drones-the-future-of-war-as-well-as-agriculture-and-transport.html
UAV strikes kill 870 in Yemen
http://youtu.be/3ggA0pr1kxg
Here are 3 other places the US military bombed in the past month
http://www.globalpost.com/dispatch/news/regions/americas/united-states/130827/3-other-places-the-us-military-bombed-month
A List Of Children Killed By Drone Strikes In Pakistan and Yemen
http://www.policymic.com/articles/24164/a-list-of-children-killed-by-drone-strikes-in-pakistan-and-yemen
드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http://www.thebureauinvestigates.com/category/projects/dr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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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을 보니 "시리아 군사개입에 활용당한 김관진 장관"이라고 해서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이게 뭔소린가 해서 찾아봤더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전시작전통제 전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얘긴 기사에 없군요.Hurdles lie ahead for Korea-U.S. alliance
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30828000790
The OPCON transfer and subsequent operational changes also call for new joint war plans. The allies have been working on crafting OPLAN 5015, which will replace the existing OPLAN 5027 centering on responses to an all-out war on the peninsula.
Under OPLAN 5027, the U.S. would dispatch its 690,000 troops to the peninsula and mobilize 160 military vessels and 2,500 aircraft within 90 days of the outbreak of a war. But this Cold War-era plan has become outdated and irrelevant considering a string of factors such as the U.S. decision to reduce its ground troops including marines.
OPLAN 5015 is expected to embrace new war-fighting concepts Washington has been developing with a particular emphasis on aerial and naval assets. This is why Seoul needs to keep track of U.S. policy shifts, analysts say.
중앙일보 기사를 보니 작계 5015도 협의가 안되고 있는 것 같네요.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719066
"김대영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미국은 1993년 북핵 위기 발발 직후 외과적 수술(surgical strike)을 주장하는 등 북핵에 강력한 대응을 요구해 왔다”며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한·미 간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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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U-57로 北지휘부를…진화하는 작계 5027"이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기사입니다.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089136
"특히 지하로 숨어들 북한 지휘부에 대한 공격도 힘을 기울인다. 60m를 관통하는 GBU-57 관통형 폭탄을 B-2폭격기에서 투하해 말 그대로 묻어버린다. 수백m 지하라 해도 여러 발 GBU-57로 인공지진을 일으켜 지하 벙커의 모든 출입 갱도를 무너뜨리면 생매장된다."
http://jasonlefkowitz.net/2012/03/the-question-about-bombing-iran-that-nobody-is-asking/
Israel and the U.S. both possess bunker-buster weapons, though in different amounts and sizes. Both nations have stocks of the GBU-28, an air-dropped, laser-guided bomb that can be armed with a bunker-buster warhead such as the 2,000-pound BLU-109 and the 5,000-pound BLU-113. The largest Western conventional bunker-buster bomb, the huge 30,000-pound GBU-57 (a.k.a. “Massive Ordnance Penetrator,” or “MOP”) is only in the U.S. arsenal, not Israel’s; this is in part because it’s a very new weapon, with deliveries to the U.S. Air Force starting just last year, and in part because Israel has no aircraft big enough to carry it even if we made it available to them — while the GBU-28 can be carried on small fighters like the F-15, the GBU-57 can only be carried in the B-2 stealth bomber.
지난 4월에 있었던 한미연합 독수리연습에 관한 기사입니다.
http://www.counterpunch.org/2013/04/25/reviewing-the-korean-crisis/
The Obama administration approved [the plan] earlier this year. Dubbed “the playbook,” it laid out the sequence and publicity plans for U.S. shows of force during annual war games with South Korea. The playbook included well-publicized flights in recent weeks near North Korea by nuclear-capable B-52 and stealth B-2 bombers, as well as advanced F-22 warplanes.
http://www.independent.co.uk/news/world/asia/nuclear-capable-b2-stealth-bombers-carry-out-drill-over-south-korea-after-north-threatens-to-wipe-out-us-air-bases-8553146.html
독수리연습은 핵전쟁과도 관련이 있나봅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65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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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난 8월 30일에 끝난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이 북한에 대한 핵위협이라고 비난했습니다.http://www.presstv.ir/detail/2013/08/29/321057/north-korea-slams-dangerous-war-game/
지난 1월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미국이 B-2 두 대를 한반도에 보낼 예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http://www.businessinsider.com/wo-b-2-stealth-bombers-closer-to-china-david-cenciotti-the-aviationist-2013-1
지난 3월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http://p.joongang.co.kr/kr/news.do?_method=webcontent&newsid=20130328N0050
이 기사에서도 말하듯이 B-2는 80년대에 개발되었고 따라서 구식입니다. 오히려 외신에서는 B-1 랜서와 E-6 머큐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http://www.zerohedge.com/news/2013-04-05/us-secretly-deploys-b-1-strategic-bombers-e-6-doomsday-planes-near-north-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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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화학무기 공격이 사우디 정보국장인 반다르 빈 술탄 왕자짓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반군도 화학무기인 줄 모르고 당했다는군요. 세상에 이런 일이..http://www.mintpressnews.com/witnesses-of-gas-attack-say-saudis-supplied-rebels-with-chemical-weapons/168135/
However, from numerous interviews with doctors, Ghouta residents, rebel fighters and their families, a different picture emerges. Many believe that certain rebels received chemical weapons via the Saudi intelligence chief, Prince Bandar bin Sultan, and were responsible for carrying out the dealing gas attack.
“My son came to me two weeks ago asking what I thought the weapons were that he had been asked to carry,” said Abu Abdel-Moneim, the father of a rebel fighting to unseat Assad, who lives in Ghouta.
Abdel-Moneim said his son and 12 other rebels were killed inside of a tunnel used to store weapons provided by a Saudi militant, known as Abu Ayesha, who was leading a fighting battalion. The father described the weapons as having a “tube-like structure” while others were like a “huge gas bottle.”
Ghouta townspeople said the rebels were using mosques and private houses to sleep while storing their weapons in tunnels.
“They didn’t tell us what these arms were or how to use them,” complained a female fighter named ‘K.’ “We didn’t know they were chemical weapons. We never imagined they were chemical weapons.”
“When Saudi Prince Bandar gives such weapons to people, he must give them to those who know how to handle and use them,” she warned. She, like other Syrians, do not want to use their full names for fear of re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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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보니 반다르 이 놈은 시리아 반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네요.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127887323423804579024452583045962.html
Officials inside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knew that Saudi Arabia was serious about toppling Syrian President Bashar al-Assad when the Saudi king named Prince Bandar bin Sultan al-Saud to lead the effort.
They believed that Prince Bandar, a veteran of the diplomatic intrigues of Washington and the Arab world, could deliver what the CIA couldn't: planeloads of money and arms, and, as one U.S. diplomat put it, wasta, Arabic for under-the-table clout.
http://english.al-akhbar.com/node/16652
Bandar, the Prince of Jihad: Expect a Syrian Shift in Power
In theory, Syrian opposition fighters now have one single commander: Saudi Prince Bandar bin Sultan. The man, who had a failed military adventure in Beirut, is vying today to alter the balance of power in Syria. But his foes say they will not let him win this time either.
http://www.haaretz.com/news/features/cia-s-favorite-saudi-prince-is-laying-the-groundwork-for-a-post-assad-syria-1.453434
Saudi commentators say Bandar was the one behind the decision to give money to the Syrian rebels, and even to buy weapons for them. They say the Saudi demand that Assad step down is part of Bandar's strategy, which guides the kingdom far more than the positions of the 88-year-old king, whose health is fa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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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2007년 시리아 핵시설을 공습한 적이 있습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11/08/0200000000AKR20111108012400071.HTML
9월 2일 국민일보 쿠키뉴스 보도입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007521058&code=11141300
"세계 최대 규모의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호를 앞세운 미 해군 전투단이 시리아와 가까운 홍해로 이동 중이라고 영국 로이터통신이 1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구축함 4대와 순양함 1대를 포함한 니미츠호 전투단은 그동안 아라비아반도 남쪽 바다인 아라비아해에서 대기 중이었다. 아라비아해 서쪽에 위치한 홍해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반도 사이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가르는 좁고 긴 바다다. 홍해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 수에즈운하를 통해 시리아 앞바다인 동지중해로 진입할 수 있다."
러시아 투데이는 핵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http://rt.com/news/syria-strike-nuclear-disaster-427/
핵추진 항공모함은 한반도에도 나타났습니다.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662911.html
"올해 한반도에 전개된 미국 측 전략무기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가장 최근엔 핵추진 항공모함인 ‘니미츠 호’가 부산항에 입항했는데요, 북한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올해 잇따라 공개된 미군의 전략무기들에 대해 서울에서 한상미 기자가 보도합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지난 8월 27일 브루스 커밍스를 초청해서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asaninst.org/02_events/scholarship_detail.php?seq=3202
네이션지에 소개된 브루스 커밍스의 글 Korean War Games
http://www.thenation.com/article/173657/korean-war-games#axzz2dygJjPqM
At the end of March, Obama upped the ante by sending B-52 and B-2 Stealth bombers soaring over South Korea to drop dummy bombs. It was a needless and provocative re-enactment of “the empire strikes back”; more than sixty years ago, Washington initiated its nuclear blackmail of the North when it launched B-29s on simulated Hiroshima/Nagasaki bombing missions over North Korea in the fall of 1951. Operation Hudson Harbor dropped dummy A-bombs or heavy TNT bombs in a mission that called for “actual functioning of all activities which would be involved in an atomic strike, including weapons assembly and testing.” Ever since, nuclear weapons have been part of our war plans against the North; they were not used during the Korean War only because the US Air Force was able to raze every city in the North with conventional incendiaries. Hardly any Americans know about this, but every North Korean does; no wonder they have built some 15,000 underground facilities related to their national security. However provocative the North appears, we are reaping the whirlwind of our past nuclear bull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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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6 TACAMO(임무수령 및 이동)http://theaviationist.com/2013/08/27/e-6-syria/#.UifqhH9BBPQ
Even if it will be a quick cruise missiles, stealth bombers-only campaign, E-6s will probably play a role in a U.S. air war in Syria.
E-6B는 한반도에도 왔습니다.
http://fecundstench.wordpress.com/2013/04/06/looking-glass-deployed-to-north-korea/
The E-6B replaced Air Force EC-135Cs in the “Looking Glass” role, providing command and control of U.S. nuclear forces should ground-based control become inoperable.
http://investmentwatchblog.com/u-s-preparing-for-nuclear-conflict-reports-of-deployment-of-doomsday-plane-to-korean-theater/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091213160449
이 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룩킹 글래스(Looking Glass)’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령부가 비행 이동 중 미사일을 제어할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E-6B 머큐리의 목적은 아마도 이겁니다.
http://fox2now.com/2013/08/20/large-white-plane-flying-in-pattern-worries-some-in-st-louis/
“It’s a strategic communications plane we use like a radio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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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쿠데타 발생 40주년 앞두고 시위 확산 조짐http://www.fnnews.com/view?ra=Sent1101m_View&corp=fnnews&arcid=13090605451348&cDateYear=2013&cDateMonth=09&cDateDay=06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특파원 =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 발생 40주년을 앞두고 학생시위가 가열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5일(현지시간) 칠레 언론에 따르면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이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1973∼1990년)의 유산인 시장 중심 교육제도의 개혁을 촉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칠레학생연합은 이날 시위에 8만여 명이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2만5천여 명으로 추산했다.
칠레에서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지난 2010년부터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일부 시위에는 10만 명 넘게 참가해 1990년 민주주의 회복 이후 20여 년 만에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http://youtu.be/1nCdHKNym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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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봐도 멋진 사진http://t.co/FQvtdjt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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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에 있었던 집회 사진"Nos vemos el 11" 우리 11일날 보자
http://www.flickr.com/photos/cherchelaliberte/8646407437/
오는 11일에도 대규모 시위가 예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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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제공항 점령한 교사들http://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544866&ctg=1301&tm=n_int
http://thinkmexican.tumblr.com/
http://www.counterpunch.org/2013/09/06/mexican-teachers-hit-the-streets/
There have been ongoing protests – great and small – since President Peña Nieto took office in December. Indeed, according to the Public Security Ministry, over 8,000 public demonstrations take place in Mexico City every year. One by one the various reforms have been vocally shot down by groups who oppose them. But we haven’t seen anything on the scale of the recent protests in Brazil, Egypt or Turkey. Beyond the current CNTE(멕시코 교사노조) gathering, there isn’t even really a “movement”.
http://youtu.be/OOYZFuAEP3k
The protests coincide with next week's approval of an energy reform, with members of Yo Soy132 students' organisation and the National Co-ordinator of Education Workers (CNTE) joining together to form one mass demon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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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독립기념일 맞아 전국에서 반부패 시위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971395
Protests Fill City Streets Across Brazil
http://www.nytimes.com/2013/09/08/world/americas/protests-fill-city-streets-across-brazil.html?_r=0
“This whole government only knows how to rob us,” said Naiana Vinuto, 25, a management student among the protesters in Rio de Janeiro, expressing anger about political corruption in different parts of Brazil’s vast public bureaucracy.
“I’m protesting because I want a decent home,” said Maria Pier de Britto, a maid. “For me, housing is Brazil’s biggest problem, after the health care system.”
시위사진을 볼 수 있는 곳
http://g1.globo.com/brasil/fotos/2013/09/fotos-eventos-de-7-de-setembro-no-brasil.html
http://www.flickr.com/photos/leonardomercon/sets/72157635423754671/with/9698716786/
http://youtu.be/szHRngbv7GY
http://youtu.be/475giqp7Xp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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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키즈 온 더 블록http://t.co/lI9kDUsN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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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분에 대해 궁금해하지마http://t.co/XUXpXfs0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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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투데이 9/11과 글라디오 작전http://youtu.be/vka7Da6e9LY
미국의 음모 이론가 제프 렌스가 운영하는 <렌스>는 2009년 9/11은 CIA와 모사드의 작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http://www.rense.com/general87/d3.htm
누군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http://blog.daum.net/knight111/8740437
2012년 12월 프레스TV 역시 9/11은 CIA와 모사드 작전이라는 로드니 셰익스피어의 글을 소개했습니다.
http://presstv.com/detail/2012/12/15/278193/cia-mossad-staged-911-to-save-israel/
프레스TV는 금년 3월 9/11 음모 이론가 필립 마샬이 CIA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케빈 바렛과의 인터뷰를 소개했습니다.
http://www.presstv.ir/detail/2013/03/04/291867/marshall-killed-over-cia-911-secrets/
필립 마샬은 아이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http://www.examiner.com/article/9-11-conspiracy-theorist-philip-marshall-kills-his-2-children-dog-and-himself
이 글 역시 필립 마샬의 자살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http://www.larouchepub.com/other/book_reviews/2013/4011bamboozle_murder.html
스노든의 폭로에 의하면 9/11 이후 미국의 정보기관들에 대한 지출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3/aug/29/us-intelligence-spending-double-9-11-secret-bud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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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가 개입한 또 하나의 9/11칠레 역사로 본 미국노총(AFL-CIO) 국제연대의 허구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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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파이프라인, OPEC, US 달러http://news.goldseek.com/GoldenJackass/1377892800.php
Syria is about the last gasp for the Petro-Dollar, the emergence of energy pipeline geopolitics, the rise of the NatGas Coop, the new dominance of Russian Gazprom, the eclipse of OPEC, the fall of the house of Saud, and a grand adjustment process in global commerce and banking.
NatGas Coop은 천연가스 협동조합을 말합니다. 필자는 NatGas Coop에 대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The key to the future is seen on the margin of new power. It is the Natural Gas Coop. To date, it has no name. Curiously, its power might lie in the fact that it has no name, no central nexus. It is a de-centralized cooperative. But more accurately, it has a Russian core, a brain trust at Gazprom. It has a certain Kremlin command center, since a newfound strategic weapon. It is their greatest global weapon in decades.
시리아에 대한 전쟁은 파이프라인때문인가?
http://www.zerohedge.com/news/2013-09-04/guest-post-us-going-war-syria-over-natural-gas-pipeline
Now the United States is getting directly involved in the conflict. If the U.S. is successful in getting rid of the Assad regime, it will be good for either the Saudis or Qatar (and possibly for both), and it will be really bad for Russia. This is a strategic geopolitical conflict about natural resources, religion and money, and it really has nothing to do with chemical weapons at all.
2009년 아시아타임즈에 소개된 페페 에스코바의 글
http://www.atimes.com/atimes/Central_Asia/KJ03Ag01.html
그러나 이 글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대안적인 글
http://www.theguardian.com/environment/earth-insight/2013/may/13/1
But the US, Israel and other external powers are hardly honest brokers. Behind the facade of humanitarian concern, familiar interests are at stake. Three months ago, Iraq gave the greenlight for the signing of a framework agreement for construction of pipelines to transport natural gas from Iran's South Pars field - which it shares with Qatar - across Iraq, to Syria.
The Memorandum of Understanding (MoU) for the pipelines was signed in July last year - just as Syria's civil war was spreading to Damascus and Aleppo - but the negotiations go back further to 2010. The pipeline, which could be extended to Lebanon and Europe, would potentially solidify Iran's position as a formidable global player.
The Iran-Iraq-Syria pipeline plan is a "direct slap in the face" to Qatar's plans for a countervailing pipeline running from Qatar's North field, contiguous with Iran's South Pars field, through Saudi Arabia, Jordan, Syria and on to Turkey, also with a view to supply European markets.
The difference is that the pipeline would bypass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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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후 40년Clashes erupt as police fire tear gas at massive Pinochet victims march in Chile
http://rt.com/news/pinochet-tear-gas-chile-580/
http://youtu.be/zsBF4SIk_I8
살바도르 아옌데
http://youtu.be/DRhSsPDKh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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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는 아름답다. 허나 그게 길의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http://aniooo.wordpress.com/2013/07/26/kazetachin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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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큰손 핌코의 베팅을 위협하는 멕시코 교사들http://www.businessweek.com/news/2013-09-02/how-37-year-old-teacher-imperils-pimco-s-bond-bet-mexico-credit
“The education reform shows that it’s not going to be easy for the government to pass other reforms that hurt certain political groups or interests,” Marco Oviedo, chief Mexico economist at Barclays, said in a telephone interview from the country’s capital. “It’s not going to be a picnic.”
The teachers will join protests against Pena Nieto’s oil industry reform proposal that Andres Manuel Lopez Obrador, the runner-up in last year’s presidential race, has scheduled for Sept. 8, according to Inesimo Pelaez, an organizer of the recent marches.
“We could block banks, toll booths or airports,” Pelaez said in an Aug. 28 interview.
http://youtu.be/8SPZngTn2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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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2002)http://youtu.be/D6qcRMiYg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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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심한) 황제http://www.atimes.com/atimes/Middle_East/MID-03-090913.html
They need a Syria as docile as the Arab petro-monarchies. They want to hit Russia bad - and then discuss missile defense and Russian influence in Eastern Europe from a position of force. They want to hit Iran bad - and then continue to issue ultimatums from a position of force. They want to facilitate yet another Israeli attempt to capture southern Lebanon (it's the water, stupid). They want a monster gas pipeline from Qatar for European customers bypassing Iran and Syria as well as Gazprom. Most of all, this is all about control of natural resources and channels of distribution.
http://mirror.enha.kr/wiki/%EB%B2%8C%EA%B1%B0%EB%B2%97%EC%9D%80%20%EC%9E%84%EA%B8%88%EB%8B%98
분명 제목은 '벌거벗은' 임금님이지만 심의 때문에 대부분 그래도 속옷은 입고 행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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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자 카운터펀치는 대부분의 글을 시리아로 채우는 기염을 토했다.http://www.counterpunch.org/
September 09, 2013
ROB URIE
Obama Goes Full Bush on Syria
MUSA AL-GHARBI AND ST MCNEIL
‘Flooding the Zone’ with Bullshit on Syria
FRANKLIN LAMB
Citizen “Street Teach-Ins” As the Obama Prepares to Bomb Syria
BRIAN J. FOLEY
Let’s Cross-Examine Obama About His Case for Bombing Syria
PAUL FINDLEY
Obama Has No Authority to Attack Syria
JACK RASMUS
Larry Summers, the Next Fed Chairman?
STEVE EARLY
As The Curtain Rises in LA
ALFREDO LOPEZ
The NSA Has Effectively Destroyed Internet Privacy
RALPH NADER
Stopping Barry O’Bomber’s Rush to War
BINOY KAMPMARK
Turning Back Dystopia
DAVE LINDORFF
There is No Justification for Obama’s War on Syria
STEVE HORN
The Flip Side Of Obama’s Keystone XL Delay
DAVID MACARAY
How I Met Your Brother
SHAMUS COOKE
Obama’s War Grows as Support Shrinks
BRETT BOWDEN
The March of Savagery
PETER LEE
Will President Obama Wear His Nobel Peace Prize Medal When He Bombs Syria?
VIDEO OF THE DAY
Live at Ic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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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자 글로벌 리서치는 시리아에 관한 글을 한 페이지에 다 모았다.http://www.globalresearch.ca/syria-another-war-based-on-lies-say-no-to-obamas-war/5348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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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화발에 짓밟힌 꿈http://www.nytimes.com/2013/09/08/opinion/sunday/9-11-the-day-everything-changed-in-chile.html?pagewanted=all&_r=0
More crucially, however, the most lasting legacy of Chile’s Sept. 11 were the economic policies implemented by Pinochet. My country became, in effect, a laboratory for a neoliberal experiment, a land of unrestrained greed where extreme denationalization of public resources and suppression of workers’ rights were imposed on an unwilling populace. Many of these merciless policies were later deployed by leaders across the globe.
Though it led to a scandalous disparity in income distribution and created conditions congenial to our latest planetary financial crises, the Chilean free-market model retains its appeal. Pinochet’s drastic privatization of Chile’s pension plans is, for instance, constantly trotted out as an example of how to “solve” the “problem” of Social Security. And a recent unsigned editorial in The Wall Street Journal suggested that “Egyptians would be lucky if their new ruling generals turn out to be in the mold of Chile’s Augusto Pinochet.”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출격준비 완료!
http://www.globalresearch.ca/chile-september-11-1973-the-ingredients-of-a-military-coup/5349051?utm_source=dlvr.it&utm_medium=twitter&utm_campaign=chile-september-11-1973-the-ingredients-of-a-military-coup
The main objective of the US-supported military coup in Chile was ultimately to impose the neoliberal economic agenda. The latter, in the case of Chile, was not imposed by external creditors under the guidance of IMF. “Regime change” was enforced through a covert military intelligence operation, which laid the groundwork for the military coup. Sweeping macro-economic reforms (including privatization, price liberalization and the freeze of wages) were implemented in early October 1973.
Barely a few weeks after the military takeover, the military Junta headed by General Augusto Pinochet ordered a hike in the price of bread from 11 to 40 escudos, a hefty overnight increase of 264%. This “economic shock treatment” had been designed by a group of economists called the “Chicago Boys.”
While food prices had skyrocketed, wages had been frozen to ensure “economic stability and stave off inflationary pressures.” From one day to the next, an entire country had been precipitated into abysmal poverty; in less than a year the price of bread in Chile increased thirty-six fold (3700%). Eighty-five percent of the Chilean population had been driven below the poverty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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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대한 도널드 베이커의 회고http://koreaweb.ws/pipermail/koreanstudies_koreaweb.ws/2011-November/009117.html
As someone who has been studying what happened in Kwangju in May, 1980, for over three decades, I would like to add my two bits. Scott Burgeson makes some factual errors. There were a few people killed in Pusan and Masan in early fall, 1979. Posters stating that fact were plastered to the walls of the pedestrian underpass at Kwanghwamun shortly afterwards. (The rumor at the time was that those posters had been placed there by the KCIA, on the direct orders of Kim Chaegyu.) And the soldiers who were first sent to Kwangju were not sent there to arrest protestors. They were sent there to be so brutal that the whole city, and probably the whole country as well, would be too intimidated to protest any more. They were paratroopers, not the usual riot police, and they had been told that North Korean had infiltrated Kwangju. How else can we explain the attack on peaceful demonstrators at Chunnam University's front gates at 10 am on the morning of Sunday, May 18? The clubs they wielded were intended to maim, not arrest. And the bayonets they used later on Keumnanno were not intended to arrest people. They were intended to kill.
As for the explanation for US support offered by George Katsiaficas, I don't find that particularly persuasive. Neither Ambassador Gleysteen nor General Wickham were particularly fond of Chun Tuhwan. However, they held their noses in May, 1980 and backed up his suppression of the Kwangju demonstrations because they were more concerned about stability than democracy. They were afraid that if the Kwangju "riots" (as the ambassador called them even 20 years later) spread, North Korea would take advantage of the chaos south of the DMZ to invade. They did try to mitigate some of the damage Chun's thugs had done by getting Chun to promise to send only regular troops, not paratroopers, to recover the city on May 27. Chun, of course, didn't keep his promise. There were paratroopers among the regular army units that entered Kwangju on May 27. There were even paratroopers on some of the helicopters piloted by Americans which brought those troops to the Kwangju area.
In 1980 I didn't see much concern in the US embassy over imposing Neo-liberal economic policies on South Korea. The main issue was an excessive concern for stability, and fear that, as much as the US didn't like Chun, to condemn his coup and the brutality of his troops in Kwangju (which, by the way, Scott, the embassy knew about soon after it started--there was an American diplomat in Kwangju on May 18) would bring chaos to South Korea and invite North Korean intervention. In other words, the US government was more concerned about the overall "security situation" in Northeast Asia than about the welfare of the people of Kwangju, or the exact nature of the type of government that ruled South Korea.
"전두환, 종신형 받고 지금도 감옥에 있어야"
[인터뷰] 캐나다 한국학 교수 도널드 베이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1359
신자유주의와 광주
http://www.eroseffect.com/articles/neoliberalismgwangju.htm
http://eroseffect.com/powerpoints/NeoliberalismGwangju.pdf
"한국 신자유주의는 전두환의 유산"
카치아피카스 교수, "5·18 무력 진압 승인 받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도입"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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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죽다(1972)http://youtu.be/HHFpQBS2VVI
Chile4A
http://29.media.tumblr.com/tumblr_lrcb5stuuf1qjm3ofo1_50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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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http://youtu.be/ZHST-z3_COM
http://youtu.be/ip_WheqdztY
http://youtu.be/pR3ALLTRd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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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반대, 불을 든 프랑스 시위자http://news1.kr/articles/1317457
'Dangerous' pension reforms to test Hollande
http://www.thelocal.fr/20130910/dangerous-pension-reforms-to-test-government
10일 노동총연맹(CGT)을 비롯한 4개 노조는 연금 개혁에 반대하면서 파업을 벌이기로 했으나, 민주노동동맹(CFDT) 등이 파업에 불참함에 따라 2010년과 같은 교통대란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밖에도 일년 사시사철 대란을 겪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
http://www.businessinsider.com/photos-worlds-worst-commutes-2013-8?o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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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한명 잘 뽑으니…멕시코 경제 '질주'http://m.hankyung.com/apps/news.view?category=general&aid=2013040584931
"그는 지난해 7월 대선 때까지만 해도 독재로 악명 높던 부패 정당의 후보였다. 그런 그를 국민은 선택했다. 오랜 경기침체에 지친 탓이다. “부패 정권이 돌아왔다”는 탄식도 나왔다. 지난해 12월 정권을 잡은 멕시코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사진) 얘기다.
그러나 넉 달 만에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페냐 니에토가 독과점 기업 해체 등 경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면서부터다.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멕시코에 글로벌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다. 지난해 7월 대선 당시 38%였던 페냐 니에토의 최근 지지율은 60%까지 뛰었다. 뉴욕타임스(NYT)는 4일(현지시간) “멕시코 새 영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평했다."
지난 4월 한국경제 기사다. 그러나 니에토가 추진하려는 개혁마다 뚜껑이 열린 교사들 때문에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 그 가운데 으뜸은 석유자원의 해방정책이다.
[사진] 멕시코, 국영석유 민영화 반대시위
http://news1.kr/articles/1302501
9월 8일자 파이낸셜 타임스
http://www.ft.com/intl/cms/s/0/99d3422a-13ce-11e3-9289-00144feabdc0.html#axzz2eXerJysZ
But Mr Montgomery suggests the real prize for foreign companies could be winning lucrative work in the relatively unexplored deep waters of the Gulf of Mexico.
9월 9일자 러시아 투데이
http://rt.com/business/mexico-tax-oil-reform-612/
A reported 40,000 protestors rallied in Mexico City to reject President Enrique Pena Nieto’s new tax plan, which increases the burden on individual taxpayers and allocates $27 billion investment to state-oil company Pemex.
The leftist opposition called for a ‘peaceful mobilization’ against the new oil reform that is ‘treasonous’ and ‘filthy, shameless robbery’ of the state’s resources.
Early in August Pena Nieto announced his plans to end Mexico’s 75-year-old state oil monopoly and open up the market to foreign investors.
지난달 말에도 분노한 교사들은...
멕시코 교사노조 1주일째 시위… 멕시코시티 마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41909171&code=970201
이 기사에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시위 교사들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교사 평가제 도입, 교사노조의 교사 채용제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입법화하려 하자 거리로 나섰다. 멕시코 교사노조는 조합원들의 충성도에 따라 보직을 나줘주는가 하면 교사직 세습, 교사직 매매 등으로 원성이 자자했다."
이 기자는 CNTE와 SNTE를 헷갈리고 있다.
니에토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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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가스 혁명과 에너지 독립http://www.lgeri.com/economy/overseas/article.asp?grouping=01010200&seq=635
미국-일본 경제동맹 실체는 에너지동맹?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06/2013090601613.html?news_Head1
The Emerging Irony of US Energy Independence
http://www.cnbc.com/id/100780504
U.S. Great Game Against Russia Continues
http://www.themoscowtimes.com/opinion/article/us-great-game-against-russia-continues/4849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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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교사노조는 어떻게 니에토의 앞날을 망치고 있는가http://youtu.be/OUHbqhM05LY
Mexican Teachers’ Massive Strikes Crescendo to a Showdown - See more at: http://www.labornotes.org/2013/09/mexican-teachers%E2%80%99-massive-strikes-crescendo-showdown#sthash.bpEsDkNm.d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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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니에토가 추진하려는 세제개혁 중에는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있다. 그 목적은 비만을 퇴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Mexico Soda Tax Proposed By President Enrique Peña Nieto To Control Obesity
http://www.huffingtonpost.com/2013/09/10/mexico-soda-tax_n_3902327.html?ncid=edlinkusaolp00000003
탄산음료 규제나선 멕시코, 코카콜라에 벌금?
http://kr.wsj.com/posts/2013/08/29/%ED%83%84%EC%82%B0%EC%9D%8C%EB%A3%8C-%EA%B7%9C%EC%A0%9C%EB%82%98%EC%84%A0-%EB%A9%95%EC%8B%9C%EC%BD%94-%EC%BD%94%EC%B9%B4%EC%BD%9C%EB%9D%BC%EC%97%90-%EB%B2%8C%EA%B8%88/
Mexico's Attack On Soft Drinks is Misguided
http://www.policymic.com/articles/61903/mexico-s-attack-on-soft-drinks-is-misguided
멕시코에서는 식수가 위험해서 콜라가 대안이라고 한다.
Mexico's Water War
http://www.forbes.com/sites/ivancastano/2012/02/22/mexicos-water-war/
멕시코에서는 아무도 물을 마시지 않고 (정말인가???) 그래서 탄산음료는 더 이상 잘 나가는 사업이 아니라고 한다.
“Soft drinks are no longer such a great business in Mexico,” says Ana Trulin, an analyst in Mexico City with Euromonitor. “Water is the big profitmaker.”
비만세의 진정한 목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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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저항이 멕시코 교육개혁을 좌절시킬까?http://www.brookings.edu/research/opinions/2013/09/10-teachers-mexico-education-reforms-rozental
The teachers who have been demonstrating and creating chaos on the streets of Mexico City have mostly come from Oaxaca, Guerrero and other provincial areas in the south of the country. They belong to the Coordinadora Nacional de Trabajadores de la Educación (CNTE)—a rival union to the older, more established National Union of Education Workers (SNTE)—created in the 1980s with the support of the federal government to counter the urban-based SNTE and its powerful leader at the time.
교사들이 또 다시 혼란을 일으키다
"We're Fed Up, CNTE," was one of the top trending topics on Twitter in Mexico on Wednesday afternoon.
The teachers say their tactics aren't meant to win the sympathy of Mexico City residents. Because Mexico's elite control the levers of government power and the media, they say, it would be pointless to appeal to popular opinion through less-disruptive protests. The powerful will only listen to power, they say, and the teachers' main power is their ability to shut schools and make life inconvenient in the heart of Mexico's economic, political and cultural life.
"Unfortunately, in Mexico, political pressure has more weight than reason and dialogue," Renato Jimenez, a teacher at a Mexico City teacher-training school, said as he prepared to march down Constituyentes. "It's a shame, but we feel it's necessary."
Read more here: http://www.islandpacket.com/2013/09/11/2678604/teachers-spawn-chaos-on-mexican.html#storylink=c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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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교사 30만명 하루 파업http://www.vidalatinasd.com/news/2013/Sep/10/more-than-300000-teachers-on-strike-in-colombia/
Among the seven complaints Fecode made to the government were demands for better health benefits, the payment of salary arrears dating back to 2002, and an end to deteriorating working conditions.
They also protest "against the privatization of education."
그 결과 최소한 17,000개 공립학교가 휴교했다. 콜롬비아 총학생연합(MANE)도 횃불을 들고 파업에 동참하겠다고 밝혔으나 정부가 얼릉 협상에 응함.
http://colombiareports.co/government-takes-steps-avoid-national-student-strike/
보고타에서는 군대가 순찰중.
http://new-power.org/2013/09/11/colombia-troops-to-patrol-bogota-after-protests/
“Last night, I ordered the militarisation of Bogota and I will do the same today in any municipality or area that needs the presence of our soldiers,” President Santos said in a televised address after an overnight cabinet meeting.
“It’s unacceptable that the actions of a few impact the lives of the majority.”
On Friday, the farmers’ leaders said they would no longer block highways but would retain roadside pickets.
They said they would resume negotiations with the government on Saturday.
"콜롬비아의 전국 파업과 인민 불복종에 관하여"
http://www.anarkismo.net/article/2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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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해!http://www.theguardian.com/world/2013/sep/07/chile-coup-pinochet-allende
A few days earlier Richard Helms, director of the CIA, had scribbled notes on a meeting in Washington with Nixon, Kissinger and John Mitchell, the US attorney general, where the president demanded a coup. They read: "One in 10 chance perhaps, but save Chile! /worth spending /not concerned risks involved /no involvement of embassy /$10,000,000 available, more if necessary/ best men we have/ game plan/ make the economy scream /48 hours for plan of action."
1973년 칠레 쿠데타를 기억하며
http://www.digitaljournal.com/article/358140
그러나 누군가에는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다.
http://www.huffingtonpost.com/marcela-pizarro/chile-coup_b_3909250.html
Here two student leaders, past and present, think about the anniversary of the military coup, and what it means for them 40 years on.
http://youtu.be/aOWIUUuA9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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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비만국가 1위 멕시코, ‘이제 설탕에 세금 걷겠다’http://www.womennews.co.kr/news/60995#.UjKVIX9x2TP
9월 12일자 여성신문은 특이하게도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사실 나도 이 정체모를 비만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 계속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멕시코 콜라의 전설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는 듯하다. 검색을 해보면 글이 많이 나온다. 그것도 언론에서 제공하는 기사보다 훨씬 더 실감나고 재미있게! 그러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적인 블로그 글을 링크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에 패스한다. 대신 이 기사를 인용한다.
코카콜라, 멕시코산이 더 맛있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06011116585146029&type=1
"원칙적으로 코카콜라 맛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1980년대 비용 절감을 위해 코카콜라는 단맛을 내기 위한 재료를 사탕수수에서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바꿨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사탕수수를 아직 이용하고 있다. 또 멕시코산 코카콜라는 1916년부터 용기로 병을 사용하고 있다."
멕시코 콜라는 콜라계의 컬트라고 할 수 있다.
http://www.dailymail.co.uk/femail/article-2368972/How-tastier-Mexican-Coke-cane-sugar-hit-know.html
A 2004 study, published by researchers at the Pennington Biomedical Research Center of Louisiana State University, stated that high-fructose corn syrup is a significant factor in America's obesity epidemic.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설탕보다 맛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것 같다. 허핑턴 포스트에서는 아예 실험까지 했다. 80년대에 유행했던 눈 가리고 콜라 마시기.
http://www.huffingtonpost.com/2012/03/07/coca-cola-taste-test_n_1324282.html
그 결과 실험 대상자의 85프로가 코카 콜라와 멕시코 콜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80프로가 멕시코 콜라가 더 맛있다고 대답했다.
멕시코 콜라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http://www.dnainfo.com/new-york/20130717/williamsburg/new-yorkers-enjoy-mexican-coca-cola
그런 이유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뉴욕 시장은 행복하다.
http://www.chinapost.com.tw/health/nutrition-&-fitness-/2013/09/12/388693/New-York.htm
New York Mayor Michael Bloomberg, whose plan to ban giant soft drinks from restaurants was rejected by an appeals court in July, exchanged pleasantries with Pena Nieto on Twitter.
“Thanks to Mexican President Enrique Pena Nieto for taking action on the obesity epidemic & supporting a new tax on sugary drinks,” he wrote.
The Mexican leader replied: “I thank @MikeBloomberg for the recognition of the important reform agenda we are leading in Mexico. I hope to greet you in NY soon.”
세계에서 아이스크림을 가장 좋아하는 나라 핀란드에서도 2011년에 설탕이 들어간 상품에 세금을 부과한 결과, 트럭을 몰고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들이 망했다.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127887323324904579041021775845030.html
멕시코에서는 사탕수수 재배 농민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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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하늘로 날아갈래요하늘위 떠있는 멋진 달되고 싶어
날아올라 저 하늘 멋진 달이 될래요
깊은밤 하늘에 빛이 되어 춤을 출꺼야
http://news1.kr/articles/132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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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정부가 파업교사들에게 경찰을 보냈다.http://youtu.be/CdbOPQdzp20
니에토의 교육법 개혁은 OECD의 요구에 응한 것이다.
http://elenemigocomun.net/2013/09/mexico-teachers-neoliberal-reform/
The basis for Peña Nieto’s reforms can be found in a 2010 agreement Mexico signed with the neoliberal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which in part stated, “Mexico urgently needs a standards-based teacher evaluation system…to reward excellent teachers or support lower-performing teachers. Teachers who permanently display a low level of performance should be excluded from the educ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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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칼로 광장의 결투http://youtu.be/2Ym6E7yUsPU
http://youtu.be/0TQ_MBYAzt4
http://www.sopitas.com/site/249317-galeria-el-13smx-en-la-lente-de-santiago-ar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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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소칼로를 탈환하고 할라파로 진격해나갔다.http://youtu.be/uB7oVakp6UM
http://vimeo.com/74506942
http://t.co/BLuZ1mPF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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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정부는 비만세를 도입하려고 한다. 우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비만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비만은 누구의 책임인가?"비만은 미국의 수출품"
http://theweek.com/article/index/249256/is-obesity-americas-most-influential-export
Mexicans have the world's highest rate of soda consumption, at 43 gallons per capita annually. And U.S. agricultural polices have been a big factor in fueling their addiction, says John Norris at Foreign Policy. America's high tariffs on sugar, coupled with its subsidies for U.S. corn farmers, created a boom in the use of cheaper, high-fructose corn syrup in everything from soft drinks to spaghetti sauce, and that coincided with a spike in U.S. obesity (research has found that rats fed corn syrup gained more weight than those eating sugar). Then, he says, we started pushing the stuff south of the border.
It is no accident that Mexico's weight gain has coincided with increased soft-drink guzzling... The Institute for Agriculture and Trade Policy, a Minnesota-based think tank, has shown that the country's sharp spike in obesity and soda consumption correlates with the 1994 passage of the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 which opened Mexico to a flood of cheap junk food and soda pop: After the agreement took effect, there was a more than 1,200 percent increase in high-fructose corn syrup exports from the United States to Mexico between 1996 and 2012, according to the U.S. Agriculture Department. [Foreign Policy]
"미국의 쓰레기 음식산업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http://rt.com/usa/us-obesity-food-global-regulation-551/
Following the passage of the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 Mexico became the dumping ground for a slew of cheap fast food and carbonated drinks, according to a Foreign Policy report.
Thanks to NAFTA, there was a more than 1,200 percent increase in high-fructose corn syrup exports from the US to Mexico between 1996 and 2012, according to the US Agriculture Department. In an effort to place a cap on the high-calorie drinks, Mexican officials introduced a tax on beverages containing high-fructose corn syrup. American corn refiners, however, cried foul and the tax was voted down by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멕시코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로라 칼슨은 더욱 신랄하게 나프타를 비난하고 있다. 2011년 기사다.
"나프타는 멕시코를 굶기고 있다"
http://fpif.org/nafta_is_starving_mexico/
엄청난 고생 끝에 찾은 이 글이 한국에도 번역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매우 큰 기쁨이다.
"멕시코가 굶고 있다" 북미 FTA 18년의 참상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22161129
아래는 2008년 오마이뉴스 기사다.
"옥수수가 없으면 멕시코도 없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6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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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원액재료 물품 7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412
회사 측에서는 비밀 유지를 위해 팸버턴이 사용한 코카콜라 원액의 재료를 암호명으로 부른다. 물품 1은 ‘설탕,’ 물품 2는 ‘캐러멜,’ 물품 3은 ‘카페인,’ 물품 4는 ‘인산,’ 물품 5는 ‘코카 및 콜라 추출물,’ 물품 6은 ‘글리세린,’ 물품 7은 극비에 해당하는 ‘향료 복합물’이다. 사실 원액의 절반가량은 물품 1(설탕)이어서, 설탕 가격의 변동 때마다 생산에 차질이 생기곤 했다. 특유의 톡 쏘는 맛을 내는 물품 4(인산)는 흔히 이빨을 녹인다고 해서 악명이 높지만 그 위험 역시 실제보다는 훨씬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오늘날의 코카콜라 원액 제조공식은 팸버턴 때와는 약간 달라져서, 가령 물품 1은 설탕에서 콘 시럽으로 바뀌었고, 그 이름의 유래가 된 물품 5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한편으로는 마약과의 전쟁, 한편으로는 코카인 수입
Ask around... That's a lot of cocaine. Remember, too, that these are 333 kilos of cocaine approved by the DEA -- an agency which claims to be fighting a "war on drugs" but somehow grants immunity to Coca-Cola suppliers who are literally manufacturing hundreds of kilos of cocaine each year.
Learn more: http://www.naturalnews.com/032658_Coca-Cola_cocaine.html#ixzz2f1JC8W1c
물품 5는 코카잎 추출물
http://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3/01/why-we-took-cocaine-out-of-soda/272694/
The Coca-Cola we know today still contains coca -- but the ecgonine alkaloid is removed from it. Perfecting that extraction took until 1929, so before that there were still trace amounts of coca's psychoactive elements in Coca-Cola. As Dominic Streatfield describes in Cocaine: An Unauthorized Biography, the extraction is now done at a New Jersey chemical processing facility by a company called Stepan. In 2003, Stepan imported 175,000 kilograms of coca for Coca-Cola. That's enough to make more than $200 million worth of cocaine. They refer to the coca leaf extract simply as "Merchandise No. 5."
코카(Coca) 잎의 슬픈 진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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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쿠데타를 이해하는 최재훈의 유치함에 대해서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1522
자료를 찾다가 참세상에 방금 올라온 최재훈의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글의 전문을 얼마전에 <경계를 넘어>에서 읽긴 했다. 이 글의 부제는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다. 자료만 찾아보면 되는데 왜 구태여 방정식까지 풀어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최재훈이 뭐라고 주장하든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집트 쿠데타는 이렇다. 이집트 혁명이 터졌던 2011년 1월에 브루킹스 연구소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http://www.brookings.edu/research/opinions/2011/01/28-egypt-riedel
The most problematic issue between the Ikhwan and America will be Israel. The Brotherhood raised an army to fight Israel in its war of independence in 1948. Its Palestinian branch was the nucleus for Hamas, and the Brotherhood retains links to the rulers of Gaza. The Ikhwan’s leaders understand the peace treaty with Israel is the cornerstone of modern Egyptian foreign policy and underwrites America’s $2 billion annual aid as well as the lucrative tourist trade, but they are very critical of Israel, its leader, and policies. Their base is fundamentally opposed to any Egyptian cooperation with Israel.
최재훈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정권은 미국이 원하는 그런 안정을 전혀 깨뜨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부차적 문제라는 뜻이다. 최재훈이 아무리 복잡한 방정식이고 답은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실제로는 답을 제공하려고 한다. 그리고 최재훈이 제공하는 답은 틀렸다.
지난 8월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쿠데타의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에르도안은 무슬림 형제단과 동맹이기 때문에 사실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전 서기장을 지낸 수비 알-투파일리도 쿠데타의 배후는 서방과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다.
http://www.kavkazcenter.com/eng/content/2013/07/12/18046.shtml
이스라엘이 무슬림 형제단보다 SCAF를 선호하는 것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파이프라인 때문이다.
http://www.israelnationalnews.com/News/Flash.aspx/271667#.UjatpH9x2TN
최재훈은 이집트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군부에 대한 그의 주장.
"그렇다면 군부가 이번에 무르시 정권 축출과 무슬림 형제단 무력화 카드를 끄집어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집트 내에서 군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잘 조직되고 확고한 지지층을 가진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굳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60년 전 나세르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말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무르시 정권과 형제단은 잇단 실정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집권세력에게서 등을 돌린 시민들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이 나서게 됐다’는 쿠데타의 명분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그리고 6월 30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기회로 삼아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군은 1년 만에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집트는 다시 군사독재라는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록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이집트의 현실이다."
뉴요커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다.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newsdesk/2013/07/egypts-ordinary-coup.html
In many ways, Egypt’s biggest challenge stems from the state of its economy rather than the legitimacy of its governing institutions. In the past two years, growth has slowed substantially, unemployment has gone up fifty per cent, and the budget deficit has doubled. Egypt needs twenty billion dollars over the next year just to keep its economy afloat, and it will require major reforms to put the economy on a sounder footing. However, the military has consistently blocked attempts at substantive economic reform because this would require the privatization of its own assets: various commercial enterprises that may include up to one third of the Egyptian economy. While the exact holdings of the Egyptian armed forces are classified military secrets, these go far beyond the publically acknowledged ownership of arms factories, supposedly necessary for national defense, to real estate, gas stations, beach resorts, and day-care centers. The military produces televisions, jeeps, washing machines, butane cylinders, olive oil, bottled water, and pasta. These and other state-run enterprises are subsidized and operated for political reasons, rather than with an eye on the bottom line, and therefore increase the ballooning deficit by an undisclosed amount.
참세상은 왜 이런 글을 독자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글에 일일이 토달기도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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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은희가 없으니까 최재훈인가? 멍청한 인간들에게 멍청한 소리를 할 권리를 주는게 참세상인가? 나 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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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군은 지난 7일부터 헬기와 탱크를 동원해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다.http://www.haaretz.com/news/middle-east/1.545827
Sunday's airstrikes targeted the villages of el-Mahdiya and el-Moqataa on the outskirts of Rafah and Sheikh Zuweyid. One official said U.S.-made Apache helicopters hit shacks, houses, olive farms and cars used by militants.
The strikes paved the way for a ground offensive, allowing troops backed by armored vehicles to sweep homes of suspected militants.
이집트군은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민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군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다.
http://www.middleeastmonitor.com/articles/middle-east/7278-egypts-coup-leaders-grateful-for-israeli-support
최재훈은 민주주의에 대한 설교 대신 신문을 더 열심히 보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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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군이 자국민을 죽이고 있다는건 어쩌면 거짓말이다. 시나이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번도 이집트인이었던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국가가 없었다. 그들은 이집트 정부의 핍박 속에서 살았다. 모르시는 그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모르시 집권 1년 동안 시나이 반도의 부족사회는 자기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들은 무장했지만 국가폭력에 대한 정당방위였을 뿐이다. 이제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었다.참세상에 글을 썼던 정은희 기자나 최재훈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용산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거기다가 무장폭도라는 오욕속에서 살아도 경제만 잘 풀리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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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앞으로 참세상이 소개하게 될 최재훈의 두번째 글이다.http://ifis.or.kr/2013/09/12/column-egypt-2/
최재훈은 이 두 개의 글에서 근거도 없는 자기 주장을 무한히 펼치고 있다. 그러나 쿠데타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다는건 외신에서도 우회적으로나마 인정하는 사실이다.
The root of Egypt's coup: Morsi giving free hand to Sinai Islamists
http://www.haaretz.com/news/middle-east/1.536623
The Saga of Sinai: A Neglected Hotspot Egypt’s Morsi Must Not Let Explode
Read more: http://world.time.com/2013/06/21/the-saga-of-sinai-a-neglected-hotspot-egypts-morsi-must-not-let-explode/#ixzz2f37MVBxf
Sinai’s Role in Morsi’s Ouster
http://carnegieendowment.org/sada/2013/08/20/sinai-s-role-in-morsi-s-ouster/gjdw
최재훈은 "이집트 좌파와 진보세력은 너무 안일하고 순진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그들은 이집트인들인데 정말 이집트 군부와 무슬림 형제단과 시나이 반도에 대해서 최재훈만큼도 모를까?
그런 것은 모두 이집트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공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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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글을 쓰는게 노동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의 절반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노동이 아니라 그냥 일이길 바라는 사람이다. 노동은 참혹한 것이다. 노동을 들먹이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현실의 노동은 죽을만큼 힘들다. 내가 일했던 직장 엘리베이터에서 들은 얘기다. 직원에게 백을 원하면 이백을 하라고 한다. 그러면 백이십이 나온다고 한다. 그럼 결과는 매우 흡족하겠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정말 이 고생을 하고서도 당신들의 일이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최재훈은 꽤 긴 글을 썼다. 그런데 그 글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냐고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최재훈은 정말 그 글을 쓰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아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이런 허섭쓰레기 같은 글만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다. 왜 이런걸까. 왜 이렇게 게으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치고 다니는걸까.
그들은 죽어라고 말한다. 이집트인들은 빵과 자유, 사회정의를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그렇다. 빵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그들의 글에 빵은 없다.
이집트는 세계 최대의 밀 수입국이다. 그러면 이집트는 밀을 어디에서 수입하는가? 러시아. 그런데 러시아는 아사드를 지지하고 모르시는 반정부세력을 지지한다. 이 중대한 사실을 군부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http://oilprice.com/Geopolitics/Africa/Egypt-for-Sale.html
The 6.8 million government employees had a vested interest in bringing down the Brotherhood backed government. The Brotherhood was advocating the privatization of the state owned industries. That was threatening the economic interests of the military that controls a third of the economy and the jobs of the government workers. Morsi was following the same policy that contributed to the mob led coup that enabled the military to remove Mubarak.
http://mobile.nytimes.com/2013/07/11/world/middleeast/improvements-in-egypt-suggest-a-campaign-that-undermined-morsi.html?partner=rss&emc=rss&utm_source=twitterfeed&utm_medium=twitter&_r=2&
And as the interim government struggles to unite a divided nation, the Muslim Brotherhood and Mr. Morsi’s supporters say the sudden turnaround proves that their opponents conspired to make Mr. Morsi fail. Not only did police officers seem to disappear, but the state agencies responsible for providing electricity and ensuring gas supplies failed so fundamentally that gas lines and rolling blackouts fed widespread anger and frustration.
이런 사실은 검색만 하면 금방 나오는데도 최재훈이나 정은희는 민심이 모르시에게 등을 돌리자 군부가 기회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민심이 등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사태 때문이다.
http://www.al-monitor.com/pulse/originals/2013/06/egypt-gas-shortage.html#ixzz2Yf24ySW4
이것도 모르시 정권의 무능 탓으로 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http://www.dailynewsegypt.com/2013/07/07/fuel-and-electricity-crises-were-politicised-experts/
Meanwhile, Gamal Seyam, an advisor to the Economic Studies Centre at Cairo University told the Daily News Egypt that he blamed the fuel crisis on distributors. He argued that there was an “undeclared civil disobedience” in the electricity and fuel sector which led to some distributors contributing to the “congested political” scene through blocking the commodity.
이집트 군부는 시나이 반도의 테러리스트들이 에너지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면서 모르시를 공격했다.
http://www.madamasr.com/content/less-warzone
But the skepticism transcends military propaganda and extends to the level of militancy in Sinai in general.
Like others, Arar says much of what is reported about militant attacks in Sinai is fake and meant to justify the military's power grip. “Is it normal that a checkpoint is attacked several times, and nothing is done about it? This is a conspiracy," he asserts.
Arar went on to mock news reported earlier on Sunday that the gas pipeline running from south Arish to Jordan had been bombed. “The bombing was happening just as military Apaches were hovering in the sky,” he says. A year ago, the pipeline supplying gas to Israel from Sinai was bombed over a dozen times.
“This is a media campaign by the military,” Arar contends.
사실상 정은희나 최재훈이 생산하는 정보들은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쓰레기 글이나 보여주는 참세상은 그 더러운 이름을 이제 그만 내려!!!
Inside Egypt's Killer Coup: The Inconvenient Evidence
http://readersupportednews.org/opinion2/289-134/18710-steve-weissman-inside-egypts-killer-coup-the-inconvenient-e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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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교사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맞서 투쟁 지속"참세상 기사 제목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교육개혁(파괴)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현재 의회를 통과한 교육법 개정안은 교육개혁과는 상관이 없는 노동개혁이다.
http://www.bostonreview.net/blog/mexican-education-reform-below
“The PRI government has wrongly called this education reform. But it is not education reform. It is a labor reform. Why? Because it goes after our rights as workers,” Alfonso Arellano, a teacher from Oaxaca, told independent journalist Andalusia Knoll. “Educational reform would be structural and related to the curriculum, and would be directly related to the students. This wrongly called educational reform is changing the constitutional articles and putting into risk all of the labor rights that historically the CNTE has gained with 30 years of struggle.”
그리고 이런 식의 노조 박살내기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http://www.thenation.com/article/173308/us-style-school-reform-goes-south?page=full#
A network of large corporations and banks extends throughout Latin America, financed and guided in part from the United States, pushing the same formula: standardized tests, linking teachers’ jobs and pay to test results, and bending the curriculum to employers’ needs while eliminating social criticism. The medicine doesn’t go down easily, however. In both countries, grassroots opposition—from parents and teachers—has been rising. In Seattle, teachers at Garfield High have refused to give the tests. In Michoacan, in central Mexico, sixteen teachers went to jail because they also refused.
http://monthlyreview.org/2013/06/01/the-chicago-teachers-strike-and-beyond
CORE directly counterposed its vision to the corporate-driven “deform” touted by Mayor Emanuel, who advocated using student scores on standardized tests as a weapon to evaluate and compensate teachers (merit pay), closing public schools (with the rationale that they have failed to prepare their students to succeed on the standardized tests), opening more privately run, mostly non-union charter schools, and restricting or eliminating seniority in cases of layoffs. CORE opposed privatizing and charterizing, calling instead for investing resources into existing neighborhood schools. The strike—with its mass participation by teachers, parents, and community around a visionary program for school change—was a dramatic rejection of that program. It was in a very real sense a political strike, borne of a rank-and-file caucus and movement with its own alternative program.
역시 멕시코에서도 노조를 박살내기 위해 성과급을 도입하려고 한다. (출처는 앞의 네이션지)
Founded in 2005, Mexicanos Primero advocates standardized tests and merit pay for teachers based on test results. These principles were incorporated into the Alliance for Quality Education (ACE), negotiated in 2008 between the union’s Gordillo and then-President Felipe Calderón. In 2009, the government began administering a national standardized test for students, called ENLACE. Advocates of the corporate education reform agenda point to the poor results by Mexican students on the 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which is given by the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an association of wealthy developed nations. In 2009, 50 percent of 15-year-olds scored a level 2 or below (on a scale of 0 to 5) in math or science.
그 결과 미국은 학교가 문을 닫고 교사들이 해고된 가운데 신학기를 맞고 있다.
http://www.reuters.com/article/2013/08/26/us-usa-education-chicago-idUSBRE97P0BQ201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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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멕시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로라 칼슨이 쓴 글이다.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멕시코에 관한 중요한 자료 중 상당수가 이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라 칼슨(과 공저자)는 현재 의회를 통과한 헌법 개정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http://www.cipamericas.org/archives/10623
The reform proposed by President Peña Nieto began with reforms to two Articles of the Constitution, already approved by Congress. The reform to Article 3 makes a Bush-like “No Child Left Behind” test required for job security and salary levels for teachers part of the constitution. Art. 73 gives schools the capacity to do private sector fundraising to finance basic education.
No Child Left Behind는 2002년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한 낙오 아동 방지법안을 말한다.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설명할 능력이 안된다. 그러나 이런 법안이 공격하는 대상은 교사노조와 공립학교다. 아래는 2011년 2월 가디언지 기사다.
The agenda behind teacher union-bashing
The attacks on teachers and unions are not about educational reform, but turning the teaching profession into a service industry
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cifamerica/2011/feb/04/usdomesticpolicy-schools
2012년 12월에는 워싱턴 포스트에 "The war on teachers: Why the public is watching it happen"라는 글이 실렸다.
http://www.washingtonpost.com/blogs/answer-sheet/post/the-war-on-teachers-why-the-public-is-watching-it-happen/2012/03/11/gIQAD3XH6R_blog.html
현재 멕시코 CNTE 교사들, 특히 와하카 지부(section 22)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While the right has not yet succeeded in destroying the public sector unions, it has undermined worker solidarity by convincing non-union and private sector workers that public sector workers are somehow responsible for their problems.
Public sector workers like teachers, nurses, and social workers are often portrayed as caregivers rather than workers, as if their labor was easier, less dangerous, or done entirely out of love, and therefore not worthy of generous compensation or job protections.
In addition, public sector unions tend to represent highly skilled workers whose jobs require specialized college and professional training. As a result, they cannot be easily replaced by unemployed and underemployed workers who lack this training. Skilled members help keep public sector unions relatively strong.
- See more at: http://www.labornotes.org/blogs/2011/07/reform-trojan-horse-wheeling-schools#sthash.cmJTy4AB.dpuf
http://monthlyreview.org/2011/07/01/neoliberal-education-restructuring
There is a long and complex road ahead with no clear outcome. But education is the frontline in class warfare by the rich against the working class. The assault on public education, teachers, and their unions has been evolving over the past thirty years as part of the neoliberal restructuring of the global capitalist economy, but the current crisis of capitalism has accelerated this assault.3 Education has been a key sector in the neoliberalization of social policy and the neoliberal political economy of cities. The resistance to these policies has been broad at classroom and school levels and in a growing movement of education activists allied with parents and students. Education, for those in power, plays a key role in social reproduction of the labor force and in ideological legitimation of the social order. Those who, conversely, have seen education as a way to strengthen democratic participation in society and human liberation have always contested these goals. There is a rich history of people of color, women, workers, educators, and social movements fighting for democratic, inclusive, liberatory education. The crisis and the accelerated assault on teachers and public education are sharpening the contest over the right to public education and the role of education in society.
http://monthlyreview.org/2011/07/01/education-and-the-structural-crisis-of-capital
The Education-Industrial Complex
The restructuring of public schools has given a big boost to the private education industry, which is now seen as a growth area, promising enormous profits. On May 16, 2011, CNNMoney.com reported that the “job market rockstar” after the health industry, since the onset of the Great Recession in late 2007, has been the education sector, which has added 303,000 jobs over the last four years, primarily in education services and state colleges.75
As early as 2000, Bloomberg Business Week issued a report on investment in education, which projected a general trend toward marketization and privatization of schools. Scott Soffen, an education analyst at Legg Mason, a global asset management firm, was quoted as saying that “the major competitor [of the private education industry] is the government, and over time the for-profit sector is going to consistently capture business from the government.”76
많은 점에서 멕시코는 묘한 나라다.
http://chronicle.com/blogs/worldwise/the-dangers-of-mexicos-new-student-loan-program/29084
But with skyrocketing college debt triggering protests around the world, Calderón’s push to increase the number of Mexican debtors is wrongheaded–if not downright cynical. Calderón cites Chile and the United States as examples of successful student-loan programs, but both are facing huge social problems because of their so-called success. The South American country has been rocked by massive student-led protests since May against the college-loan system. The protesters are demanding an end to reforms implemented by the Pinochet dictatorship in 1980, which required all universities–public or private–to charge tuition, and implemented a system of government-backed student lo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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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의 계급투쟁http://youtu.be/R1RPdfzzBmY
Gil @amadorlicea 1시간
Tomorrow, thousands of college students will march along with #CNTE teachers and 60 other unions to re-occupy Zocalo, after brutal eviction
Gil @amadorlicea 1시간
In public assemblies today, students of public Universities in Mexico City voted in favor of joining forces with #CNTE striking teachers.
kalashnikov @socialAk47 2시간
Mexico: Assembly at the Philosophy Faculty from UNAM decided to stop classes in support to the #CNTE v @Global132
UNAM은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의 약자다.
Mexico: Teachers resist neoliberal attacks
Since the passing of the 1994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deal, the taming or smashing of “hold-out” or “recalcitrant” unions has been a key objective in the campaign to ensure Mexico's working class is at the mercy of transnational capital.
As well as radically militarising the “war on drugs”, which also involved a covert crackdown on dissent, Pena Nieto’s predecessor Felipe Calderon took on the Mexican electrical workers’ union, leaving it crippled.
Calderon received Washington’s enthusiastic backing, as has “pro-business” Pena Nieto.
- See more at: http://www.greenleft.org.au/node/54964#sthash.PlSBpwkY.d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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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 샤틸라 학살1982년 9월 16일 오후 6시 - 9월 18일 오전 8시
http://youtu.be/NZqKwgAGA0U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309/h2003091517093625340.htm
[오늘속으로<904>(9월16일)] 사브라ㆍ샤틸라 학살
1982년 9월16일 레바논의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소속 기독교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의 방조 속에 서베이루트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해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지 석 달 만에,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눈물 속에서 시리아로 근거지를 옮긴 지 불과 수주일 만에 일어난 이 학살 사건은 전세계에 놀라움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은 PLO가 시리아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이뤄지면 서베이루트로 진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 한 바 있지만,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아리엘 샤론 국방 장관은 이 협정을 무시하기로 결정했고, 9월15일 아침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로 밀려들어와 이튿날에는 전지역을 장악했다.
미국과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에 항의했지만, 힘없는 레바논 정부만이 아니라 힘있는 미국 정부도 말과 속셈이 달랐던 듯하다. 이스라엘군은 중무장 병사들과 탱크로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을 포위한 뒤 레바논 극우파 민병대원들을 난민촌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날 오후부터 18일 오전까지 만 이틀동안 벌어진 ‘살인 파티’의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제적십자사의 비교적 보수적인 집계에 따르더라도 피살자는 2,750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주로 현장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 이 시신들은 대부분 사지가 절단돼 있었다. 민병대원들은 학살의 무기로 기관총보다는 도끼나 대검을 더 선호한 것이다. 이 학살자들이 불도저를 동원해 판 구덩이에 묻은 시신들은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 거기다 피납ㆍ실종자들까지 계산하면 피해자 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이 더러운 작전의 방조자인(어쩌면 기획자인) 아리엘 샤론은 지금 이스라엘 총리로 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입력시간 : 2003/09/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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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땅’ 가자에서의 죽음150만 주민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의 ‘집단처벌’… 지속적 폭격 상황에 ‘전면공세’ 예고까지 나와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11/021019000200711080684031.html
Sinai: Counter-Terrorism or Collective Punishment?
http://english.al-akhbar.com/content/sinai-counter-terrorism-or-collective-punishment
According to consistent eyewitness accounts in the two villages, homes were looted of clothes, food, and even women’s jewelry. Olive trees were uprooted and cattle were slain. The army uprooted large areas of olive groves south of al-Arish, supposedly to better expose the area and secure it against infiltration. But these measures have resulted in losses to the tunes of millions of Egyptian pounds, with many families losing their only source of livelihood.
As world watches Syria, Egypt launches major campaign against jihadists in Sinai
http://www.foxnews.com/world/2013/09/16/as-world-watches-syria-egypt-launches-major-campaign-against-jihadists-in-sinai/
"I have no doubt that Sinai could become a hub for terror, like Afghanistan. The Egyptian Army has finally decided to take care of what is going on in Sinai," Kedar said, "not because of Israel, not because of Gaza, not because of Sinai, but because of Egypt and the fact that the terrorism there could soon spill into Egypt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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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 리뷰에 실린 Hugh Roberts의 The Revolution That Wasn’t를 조금씩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번역은 힘들고 잘 못해서 왠만하면 안하려고 했는데 요즘 참세상이 하는 짓 보면 진짜 한심해서 했습니다. 쓰레기글 보는 것도 한두번이지. 원문은 여기에 있습니다.http://www.lrb.co.uk/v35/n17/hugh-roberts/the-revolution-that-wasnt
서방 여론은 이집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또는 최소한 뭐라고 해야 할 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제 환각의 행상인들이 주눅이 든 것 같고 7월 3일 카이로에서 벌어진 사건을 ‘2차 혁명’으로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유행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반혁명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표현이 명백히 더 정확하더라도, 우선 혁명이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서방 언론은 아직도 이런 견해를 고집하는 것 같다. 언론이 ‘아랍의 봄’이라고 부르는 것이 혁명의 연쇄라는 것은 아주 빨리 정설이 되었다. 이집트는 ‘아랍의 봄’이라는 관념에 불가결했고 따라서 이집트도 혁명이 일어났어야만 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희망사항이었다. 타흐리르 광장과 다른 곳에서 2011년 1월 25일부터 계속 놀라운 시위를 조직했던 대담한 젊은 이집트인들은 분명히 혁명적 정신을 갖고 있었고 무바라크가 물러나야 한다는 자신들의 요구가 인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루어낸 것이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 이런 생각에 고무된 것은 발칸 전쟁 기간에 ‘journalism of attachment’이 부상한 이후로 갈피를 못잡고 있는 서방 언론의 열광적인 보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성취된 사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튀지니에서 벌어진 사건은 분명히 혁명이었다. 튀니지 군대의 역할은 매우 온건한 것이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벤 알리를 구하기 위해 시위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2011년 2월 이집트 군대의 역할은 온건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튀니지 군대가 정말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국가의 종임을 증명했다면, 이집트 군대는 그 사령관들의 진정한 전망을 감추기 위해 중립적이고 심지어 시위자들에 대한 공감하는 태도를 취했다. 겉모습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기자들에게는 충분한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있어서는, 두 나라 모두 혁명이 일어났고, 사실상 동일했다. 이제 ‘아랍의 봄’은 작동했고 질문은 단순했다. ‘다음엔 누구인가?’
/journalism of attachment는 발칸 전쟁에서 언론이 전쟁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여야 한다는 구실 아래 중립성을 포기하고 한 쪽 편을 든 것을 말함.
2011년 1월 25일을 시작으로 원래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최근 이집트의 끔찍한 사태 전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지난 2년 반의 드라마를 그 역사적인 뿌리, 즉 호스니 무바라크의 장기 집권의 마지막 기간 동안 이집트 국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서 잘라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무바라크 재임기간이 이집트 국가에게, 그 국가의 다양한 요소들에게, 특히 군대에게, 그리고 그 국가의 정부 형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무바라크의 집권이 유발하거나 허용했던 다양한 반대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국가 자체의 위기를 가져왔으며, 그 위기는 튀니지 혁명이 진행되기 오래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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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는 나세르(18년)와 사다트(11년)을 합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인 30년이 넘게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집권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으며, 동시에 아들 가말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은 로저 오웬이 놀랍도록 심층적으로 논의한, 두 개의 전반적인 현상들의 사례였다. 아랍 세계에서 ‘종신대통령제’의 부상과 왕위 계승을 도입함으로써 가족에게 대통령직을 보장하려는 지도자들의 경향, 또는 최소한 유혹. 무바라크는 대통령 시절에 명백히 유례없을 정도로 권력을 집중했으며, 그것은 사다트가 했던 일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오웬은 아랍 ‘공화국들’에 관한 상세한 조사에서 두 개의 주요한 범주를 구분한다. ‘중앙 정부가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들(튀니지, 시리아, 이집트, 알제리)와 약한 국가들(수단, 리비아, 예멘). 따라서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대체로 비슷하게 다룬다. 조슈아 스태쳐는 이집트-시리아 비교에 집중하면서 다른 견해를 제공한다. 이 두 정권은 몇몇 중대한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집트의 권력 구조는 매우 중앙집권적인데 반해 시리아는 비교적 분산되어 있었으며 현재도 그렇다는 것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무바라크가 자신의 정권에 대해 행사하는 통수권을 전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웬의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차이들을 감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튀니지와 알제리는 중앙 정부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리비아, 수단, 예멘보다 분명히 훨씬 더 강하며, 오웬 스스로 자신의 범주들이 각각 그 내부에 다양한 순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봉기에 주로 집중하고 있고, 독재자의 축출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시리아와 알제리의 독재자들은 아직까지 축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국가들의) 특별한 구성형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스태쳐는 독재라기보다는 과두제인 시리아의 구성형태는 정권이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어려움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바샤르에게 도전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를 지지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시리아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는 서방의 기대는 틀린 것이라고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권력구조는 극심하게 집중화되어 있다는 그의 논리 중 나머지 부분은 이집트에서 사태의 진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10년 말과 2011년 초에 봉기가 일어나기 오래 전에, 무바라크 정권, 또는 적어도, 내가 2001년부터 카이로에 살고 있을 때 관찰했던, 그의 통치 기간 중 마지막 1/3을 특징짓는 극심한 권력의 축적은 나에게 미래에 대해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을 암시했다. (그러한 권력의 축적은) 그의 아들이 그를 계승하든 그렇지 않든, 무바라크가 떠난 후에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후에는 국가 내부에서 권력이 대통령으로부터 재분배될 수밖에 없고 문제는 이 재분배가 어떻게 처리될 것이며 누가 수혜자가 되느냐였다.
권력 승계의 문제는 최소한 2002년부터 이집트 정치 논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고, 왕위 계승이 계획되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촉진되었으며 tawrith al-sulta, 즉 권력 세습의 가능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분노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거부에 의해 문제가 심각해졌다. 권력 승계가 2011년 1월과 2월의 사건의 기저가 되는 주요 쟁점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젊은 자유주의와 좌파 활동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기를 내서 일어나 오랜 세월의 독재 정치에 대한 억눌린 분노와 자유와 정의에 대한 꿈을 외친, 수백만은 아니더라도 수십만의 평범한 이집트인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며 정치의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누가 권력의 재분배에서 혜택을 볼 것이냐의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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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에 거래된 것을 열렬히 응원하는 자들은 그것을 2011년 1월과 2월의 부활로 제시했다. 무슬림 형제단, 그들의 자유정의당, 그리고 모하메드 모르시에게 납치되어 왜곡된 혁명은 손을 잡은 민중과 군대에 의해 회수되었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기사의 특징은 무바라크가 실각한 뒤 이집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략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들과 최고군사위원회(SCAF) 사이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타흐리르 광장과 공공장소들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무바라크 이후 최고군사위원회의 운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시위에 의해 재점거되었고, 2011년 가을 실망은 더 급진적인 정서로 바뀌었다.최고군사위원회의 진정한 전망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2011년 10월 9일 나일 강변도로에 있는 국영방송국 마스페로 건물에서 콥트교인들의 시위를 진압한 것이다. 무바라크 시절 내내 콥트교인들은 이등시민 취급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고, 정치 활동으로 통하는 것에서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합법이지만 절망적으로 작은 야당들, 특히 New Wafd와 el-Ghad는 얼마 안 되는 콥트교인들에게 짝퉁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으나, 무바라크의 민족민주당이 콥트교인을 선거 후보로 내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의회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콥트교인들은 거의 언제나 대통령이 임명한 의원들이었고, 2000년 선출된 국회의원 444명 중 콥트교인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대신 정부는 콥트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차별당하지 않는 종교단체로서 대우했다. 그들의 ‘정당’은 콥트 교회였고 그들의 정치적 지도자와 대표들은 콥트 교황이었다.
하지만 콥트교인들은 타흐리르 광장의 무바라크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다른 시위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무슬림과 콥트교인이 손을 잡았다!’ 구호가 울려 퍼지면서 갑자기 종교적 차이를 초월하는 것은 혁명이 약속하는 것의 일부인 것 같았다. 살라피들이 주지사와 공모해서 아스완의 교회를 파괴한 것에 항의해서 자유 시민들이 시위를 조직했듯이, 콥트교인들도 공적 생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전적으로 평화적인 행진이 마스페로 방송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군 부대의 실탄 공격을 받았다. 28명의 시위자들이 살해당했고, 최소한 두 명은 고의적으로 군 차량에 의해 치였고, 212명은 부상당했다. 부상자 중엔 내 딸의 삼촌도 있다. 교훈은 무지막지하게 분명했다. 소위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든간에, 최고군사위원회에게 있어서 콥트교인의 해방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 원문은 The cry went up ‘Muslims, Copts, one hand!’ and suddenly the transcending of the religious divide in the accession of all to an equal citizenship that at last meant something seemed to be part of the revolutionary promise.인데 생략했습니다. 제 영어 실력은 좋지 않습니다.
이런 교훈을 보내는 일은 계속되었다. 2011년 11월 19일부터 24일까지, 군정 종식과 민간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자 45명이 모하메드 마흐무드 거리와 그 주변에서 살해당했다. 12월 16일에는 국무조정실 근처에서 3주 동안 계속된 연좌농성이 폭력적으로 해산되었고 시위자 17명이 살해당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밝힌 여성들은 반복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2011년 3월, 무바라크가 퇴진한 후 몇 주 동안 여성 시위자들은 군대의 표적이었고 끔찍한 굴욕과 다른 (남성)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남성 군의관이 실행하는 처녀 검사의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여성들 중 한 명인 사미라 이브라힘은 이 관행을 공적으로 쟁점화하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러나 예닐곱의 헌병들이 젊은 여성을 야만적으로 패면서 상의를 벗겨서 속옷이 드러나게 했던 사진이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 시위자들은 계속해서 표적이 되었다. 2011년 12월 20일 수천명의 이집트 여성들이 이러한 학대에 대항하여 시위했다. 7일 후 행정 법원이 처녀 검사가 불법이라고 선언하자 군대는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군사법원장은 행정 법원이 군 구치소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이 판결은 시행할 수 없다고 신속히 선언했다.
2011년 12월 31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또 다른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최고군사위원회는 일보후퇴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은 것 같았다. 군대나 경찰이 눈에 띄지 않았고 분위기가 느긋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려왔고 나도 그랬다. 그것은 시위라기보다는 거대한 송년의 밤이었지만, 여전히 정치적 메시지가 있었다. 연사들이 연달아서 군중에게 연설을 했고, 무바라크에게 보내는 전갈을 음악에 담은 Irhal(떠나)의 가수 라미 에삼이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왔다. 하지만 ‘다운, 다운, 무바라크’ 대신, 그와 군중은 ‘다운, 다운, 군정’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집트는 어떻게 2011년 12월 31일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2013년 6월 30일로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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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이후 대기는 당파적 주장으로 자욱했다. 논쟁은 지난 2개월과 그 2개월의 서곡이 된 13개월 동안 벌어진 실제 사건들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외부인들이 편을 들면서 (사막에) 열과 먼지를 더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대신 이 드라마의 핵심에 있는 두 개의 미스터리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금년 6월 ‘혁명’의 이름으로 시위를 주도한 타마로드 운동의 처신과 무슬림 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의 처신. 이 둘 모두 대단히 오해받고 있다.‘불복종, 항명, 반란, 반역’ (그리고 ‘폭동’)을 의미하는 타마로드는 우선 모르시 대통령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조직했으며 그리고 나서 6월 30일 시위를 조직했던 조직의 이름이다. 타마로드는 금년 4월에 결성된 새로운 조직이다. 서명지는 서명인이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한다고 명시했다. 조직인들은 1,500만 명의 서명을 모으겠다는 야심을 발표했으며 2,200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숫자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을 본 적은 결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수백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인정하기로 하자. 서명하는 것을 물론이고 이러한 서명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비민주적 행위가 아니다. 시민은 선출된 공직자가 사임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 혹은 그녀가 선거에서 패배할 때까지 재직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서명지에는 군대가 이 문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군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6월 30일 시위 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바라크 반대 시위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여러 유명 조직들, 특히 4월 6일 청년 운동,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2010년 알렉산드리아 경찰이 한 청년을 살해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 운동은 주저 없이 참여했다. 그들에게는 모르시와 자유정의당을 싫어하고 모르시가 물러나기를 원하는 이유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위 자체에서 벌어진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시위 참석자들 중 분명히 군대가 개입할 것을 요구했던 많은 이들에게는. 3일 후 군대가 모르시를 축출했을 때, 많은 시위자들이 2011년 2월 11일에 그랬던 것처럼 반응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된 것에 대해 의기양양했고 군대를 민중의 뜻을 실천하는 도구로 간주하고 싶어했다. 7월 6일자 옵저버가 인용했듯이, 타마로드 활동가는 이렇게 기뻐했다.
"시시와 군대는 민중에게서 신호를 받았다. 그들은 전에도 과거에 그들이 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기회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군대가 개입할 것을 외치기 시작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명령을 받았다. 군대는 권력을 넘겨받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적 변화의 동반자일 뿐이었다."
순전히 망상은 아니더라도 이 속에 들어 있는 희망사항의 요소는 타마로드의 진정한 성격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사실의 진술 역시 그렇다. 모르시가 물러나고 조기 대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던 타마로드의 서명 운동이 왜 군대가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돌변했을까? 분명히 타마로드 자신은 이러한 사태 전개에 만족했다. 수백명의 이집트인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요구를 지지하도록 서명하게 하고, 시위 기간에 이 요구를 다른 것으로 전환하도록 한 것은 타마로드 활동가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시위 참여자들이 외치는 구호는 보통 조직자들에게서 나오고 대부분의 시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를 행복하게 외친다.
서명인의 목표를 1,500만 명으로 잡은 것은 명백히 그 숫자가 2012년 6월 대선에서 모르시에게 투표했던 1,323만 명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곧 다른 숫자들에 의해 추월되었다. 1,700만 명, 2,200만 명. 이집트의 고참 페미니스트인 나왈 사아다위는 심지어 전체 유권자의 다수인 3,400만 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이 숫자들은 꾸며낸 것이며, 터무니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지만 전세계 언론을 이런 허풍으로 폭격한 이집트인들에게 사기를 쳤다고 진지하게 나무랄 수는 없다. 방청석을 만든 건 바로 서방이며 그들은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중대사였고 그것은 정당하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 언론이 이 넌센스에 넘어갔으며 그리고 나서 다시 우리에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는가이다.
숫자 문제는 카이로에서 수년간 살고 있는 미국 작가이며, 북아프리카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없어서는 안 될 출처이며, International Boulevard 웹사이트에 영어로 재발행되는 Maghreb émergent에 7월 11일 상세한 기사를 게재한 잭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은 타흐리르 광장과 그 곳으로 이어지는 거리들의 실제 면적을 계산한 결과, 아무리 넉넉하게 추산해도 시위자들은 265,000명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카이로의 헬리오폴리스에서도 큰 시위가 있었다는 주장을 위해서 211,000명을 추가한다면, 기껏해야 476,000명이다.
그렇다면 모르시가 얻은 투표수를 초과하는 데 필요한 나머지 1,280만명은 어디에서 나온걸까? 카이로는 이집트 전체 인구의 거의 1/4이 사는 곳이다. 다른 도시들에서 ‘수십만명’이 행진을 했다는 막연한 서방언론의 언급은 전체 숫자를 올리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가 보고 있는 숫자는 백만이고, 최대한 잡아봐야 전국 모두 합쳐서 2백만이다. 카이로와 기자에서 모르시가 득표한 285만보다 적다. 서방 언론에서 인용했던 허깨비 숫자는, 브라운이 주장한 것처럼, 시위 참석자와 타마로드가 주장한 서명인 숫자 사이의 혼동을 활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수백만명이 정말 서명했더라도, 그들 중 아무도 군대가 대통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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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 지지자들에 대한 군대의 공격이 점점 더 폭력적이 되자, 6월 30일 참여자 일부는 생각을 바꾸었다. 4월 6일 청년운동의 지도자인 아흐메드 마헤르는 반모르시 캠페인을 지지했지만 나중에 군대의 조치와는 담을 쌓았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결국에는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타마로드 지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사임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무력으로 대통령에게 물러날 것을 명령하는 국방장관 사이에서 현저한 차이를 찾지 못했으며, 결과에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을 주장했다. 옵저버가 인용한 타마로드 활동가는 모하메드 하미스라는 이름이었다. 최소한 628명의 시위자들이 사망한 라바아 알 아다위야 사원과 나흐다 광장에서 학살이 있고 난 이틀 뒤인 8월 16일, 가디언은 그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는 라바아와 나흐다에서 벌어진 일에 동의한다”고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지만 대단히 인기 없는 모르시에 반대하는 여론을 모은 타마로드 운동의 대변인 모하메드 하미스는 말했다. “우리는 형제단이 했던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타마로드를 시작했던 활동가들은 2004년과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전의 저항운동의 고참들이었다. 그 운동의 공식적인 이름은 변화를 위한 이집트 운동이었지만 급속히 이 운동의 주요한 슬로건인 ‘키파야’(충분해!)로 알려졌다. 키파야는 2011년 1월과 2월의 시위에서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키파야는 2006년에 점차 작아지다가 더 최근에 형성된 조직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하지만 내가 2011년의 드라마를 따라가면서 분명해진 사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젊은 혁명가들은 키파야의 정신적 자식들이며 그들의 유일한, 순전히 부정적인 요구가 관철되는 순간 그들은 주도권을 잃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부터 ‘혁명’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
키파야에 관한 훌륭한 설명은 무바라크 치하에 존재했던 반대운동에 관한 홀거 알브레히트의 시기적절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사태가 터지면 반드시 등장하는 희화화와는 반대로, 알브레히트는 무바라크 정권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 완전히 위에서 조종하기 때문에 - 놀라울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다원주의를 제공하는[원문 그대로] 자유화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집트에 살면서 어느 정도 그렇게 느꼈다. 특히 언론은 일반적으로 활기 있었고, 정부에 대한 많은 비판을 포함해서, 폭넓은 영역의 의견을 담을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고, 알브레히트가 설명하듯이, 키파야에 대해 흥미로운 것은 그 선을 둘이나 넘었다. 계엄령 하에서 비공인 시위 금지와 대통령과 그의 가족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 금지.
게다가 키파야는 상대적으로 무사히 그 선을 넘었다. (2,3백 명의) 작은 시위들은 항상 시위 진압 경찰 숫자가 엄청나게 더 많지만, 그들 시위의 대부분은 진압되거나 해산되지 않았고, 활동가들이 카이로 외부에서 시위를 하려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상하게도 용인되었다. 키파야는 본질적으로 무바라크의 ‘권력 독점’과 그의 아들이 그를 승계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항하는 이집트 지배계층의 반체제 진영에 의해 수행되는 선동이었다. 비록 변화를 위한 이집트 운동이라는 매우 진지하게 들리는 이름 아래 다양한 개혁적 견해들을 끌어들이고 민주적으로 들리는 목표와 요구에 관한 장황한 쇼핑 리스트를 발행했지만, 키파야가 실제로 수행한 선동은 성격상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2005년에 키파야를 조사하면서 이 운동을 세속적인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나세르주의자들이 지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영위원회에는 두 명의 공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두 명의 자유주의자들과 온건한 이슬람주의자이며 와사트당의 설립자인 Abu ’l-Ala Madi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키파야의 조정자이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콥트교인이며 고참 아랍 민족주의자인 George Ishaq였고, 주요한 대변인은 나세르주의 신문인 알 아라비의 편집장인 Abdel Halim Qandil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인상적이었다. 내가 인터뷰한 Ishaq는 전투적이고 호감을 주는 직설적인 인상을 주었고, Qandil은 특히 정권의 살인적 탄압을 견디는데 있어서 존경할 정도의 저항력을 보여주었다.
2005년 4월 나는 알 아라비의 사무실을 방문해서 다른 편집자인 Abdallah Senawi를 인터뷰했다. 그는 내게 ‘키파야는 알 아라비의 자식이며 키파야의 슬로건을 처음으로 내놓은 것은 알 아라비였고, 대부분의 키파야 활동가들은 나세르주의자들’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 이 주장은 과장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 솔직하게 나세르주의자들의 진정한 미래상의 윤곽을 그려주었다. 그것은 ‘무바라크 문제’를 해결하도록 군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며, 모리타니아의 울드 타야 대통령을 끌어내린 최근의 쿠데타를 가능한 모델로서 인용했다.
2005년에 국제위기그룹을 위해 썼던 보고서에서 나는 단 한 개의 긍정적인 요구나 제안이 없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메시지가 키파야가 더 많은 청중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나세르주의자들이나 최소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처럼, 그들이 무바라크를 진정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의 권위주의가 아니라, 그 이전의 사다트처럼 그가 나세르가 선언했던 범아랍 전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진정한 민주적 선동을 조직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인과 결과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거꾸로 놓았을 수도 있으며, 그들이 평범한 이집트인들을 동원할 수도 있는 긍정적 요구를 직조하기 거부하는 것은 외부인들이 무바라크의 지배권의 한계를 목격하길 원하면서도 그들이 꿈꾸고 있는 문제 해결에 일반인들이 연루되지 않길 바라면서, 무바라크에 대한 도전을 이집트 지배층의 폐쇄된 세계 내부에 가두고 싶어하는 마음을 반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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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5일 시위와 그것이 막을 연 역사적 드라마는 튀니지 혁명의 충격파와 2008년 이후 신세대 중간계급 활동가들의 출현에 의해 가능했다. 이 활동가들은 그 해 4월 6일(아흐메드 마헤르의 4월 6일 청년운동의 존재이유) 시작된 일련의 노동자 파업에 열광했으며 정권이 점점 더 갈수록 보여주는 잔인무도함에 격분했고, 그 잔인무도함은 2010년 6월 칼리드 사이드의 살해에서 절정에 달해 와엘 그호님이 페이스북에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 페이지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2004년과 2005년에는 명백히 부재했던 것들을 제공한 반면, 결국 대중집회를 실현가능하게 했던 정치화된 에너지의 실질적인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정치화의 정도는 제한적이었다. 젊은 활동가들은 그들이 무엇을 원치 않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에 합의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혈통에 대해 알고 있든 아니든, 키파야의 부정적 의제는 그들에게 방향을 부여했고, 군대가 무바라크 문제를 해결하는 나세르주의자들의 꿈이 실현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우리는 2011년 2월 11일을 쿠데타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혁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쿠데타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긍정적 의제나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주도권을 상실한 민중 봉기였다. ‘빵, 자유, 사회정의’는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열망과 슬로건일 뿐이다. 사회운동이 정부가 특정한 조치들을 취하게 압박했더라면 이 슬로건들이 요구들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정부가 제공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정부가 꺼지길 바라는 운동은 일관성에 문제가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요구는 ‘무바라크, 떠나!’였다. 군 사령관들은 이 요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끌어들임으로써 주도권을 잡았다. 거의 확실히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한동안 발설하지 않은 자신들만의 목표였기 때문에.
2011년 2월 11일에 일어난 일은 자유장교단들의 국가의 부활이었다. 지배적인 정치 행위자로서의 최고군사위원회의 출현을 모두에게 분명히 밝혀야 했던 것처럼, 1952년 쿠데타 이후 자유장교단이 세운 국가의 근본적 골격은 아직 그대로 있기 때문에, 무바라크의 퇴진 그 자체는 혁명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의 성과는 튀니지에 훨씬 못 미쳤다. 튀니지인들은 벤 알리를 퇴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당인 민주헌정연합을 즉시 폐지했다. 민주헌정연합은 하비브 부르기바가 설립하고 주도한 민족주의 정당의 진화였으며, 독립에 이르는 진로를 계획했다. 그것은 진정한 지배정당이었으며, 권력의 원천이었고 국가가 사회를 상대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도구였다. 그것에 상대할만한 정당은 북아프리카 국가 어디에도 없다. 민주헌장연합의 폐지는 프랑스 분석가들이 ‘정당-국가’(parti-état)라고 부르는 것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것은 튀니지 사회가 헌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집트 시위자들이 무바라크의 민족민주당사를 파괴했을 때, 그들은 국가의 정치권력의 근원을 공격하고 있었던게 아니라, 단지 정권의 외관을 공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군대는 1952년 이래로 정치권력의 근원이었다. 군대는 무바라크에 의해 주변화되어 정부의 일상 업무에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을 대체할 권력의 근원에 의해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대를 중심무대로 되돌려놓은 2011년 1월과 2월의 사건들은 혁명이 아니었다.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며 환영하는 나세르주의자들의 전통은 1952년 7월에 막을 열었다. ‘2차 혁명’ 테제를 승인하길 거부하는 7월 3일 사건의 비판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날 있었던 일을 반혁명으로 묘사했는데, 나는 그 견해에 동조한다. 2012년 6월 사람들의 표가 정말 중요했던 진정한 선거 시합이 있었고, 그것이 민주주의적 발전을 위한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7월 3일을 그 길을 파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따라서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2013년 7월 3일이 2011년 2월 11일의 근본적 논리를 복구했다는 시시 장군과 타마로드의 주장에는 미세하나마 최소한 일관성이 있다. 비록 마지못해서라도 이 논리가 역사적으로 정치적 우위인 군대에 의해 재주장되고 재활용되었으며, 민주주의의 혁명적 도래는 고사하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일관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대가 무바라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의 파도를 탔던 방식의 논리에 자격을 주는 것은 무바라크 형제단도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으며 그 뒤를 이은 개방에서 자신들의 몫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자신이 없어서 원문을 붙입니다.
The Nasserist tradition of hailing coups as revolutions was inaugurated in July 1952. Critics of the events of 3 July who have refused to endorse the ‘second revolution’ thesis have in some cases described what happened as a counter-revolution, a view with which I sympathise. Given that in June 2012 there was a real electoral contest in which people’s votes really counted, making it seem that a democratic line of development had begun, one can certainly regard 3 July as having destroyed that and therefore as being counter-revolutionary. But there is at least a germ of coherence in the claim made by General Sisi and by Tamarrod that 3 July 2013 restored the fundamental logic of 11 February 2011. We can see this once we accept, however reluctantly, that this logic was the reassertion and reclamation by the army of its historical political primacy and not a real revolution, let alone the revolutionary advent of democracy. But what, more than any other consideration, qualified the logic of the way the army surfed the wave of Tahrir Square to resolve the Mubarak question was the fact that the Muslim Brothers had been in Tahrir Square too and had earned their share of the opening that en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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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무슬림 형제들의 최고 지도자 Hassan al-Hodeibi는 감옥에서 Du’ah, la Qudah(심판자들이 아니라, 설교자들)을 출판했다. 이 문서로 형제들은 사이드 쿠틉의 급진적 교리, 특히 쿠틉이 자유장교단들의 국가를 kufr(불신자)만이 아니라 jahili(야만적)이며 성전의 대상이라고 비난한 것과 관계를 끊었다. 그 후 형제들은 개혁적 전망과 점진적 전략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현존 국가에 대한 이슬람적 신임장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이슬람적 성격과 전체적으로 사회의 이슬람적 성격을 향상시키려 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사다트 정권(형제들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반대한 뒤 즉시 진압되었다)과 무바라크 정권에 의해 상당 부분의 사회적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이슬람 자선, 교육, 문화 단체들의 대형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원과 진료소를 지었고, 어떤 합법 정당도 어깨를 겨룰 수 없는 사회적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그들은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형제들은 무소속 후보로 나가거나 심지어 가끔씩은 New Wafd 같은 합법 정당의 후보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일부는 선출되었고, 무바라크가 완화 모드냐 규제 모드냐에 따라 숫자는 변동했다.이 기간 내내 형제들은 비폭력적 전략을 고수했고 신중할 뿐만 아니라 극기심을 가지고 행동했다. 간간이 탄압이 있을 때마다 수십, 때때로 수백 명의 형제들이 갑자기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형제들의 점진적 접근의 핵심적이며 어쩌면 암묵적인 요소는 나세르가 지도자들 중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조직을 분쇄했던 1954년에 벌어진 일의 반복을 피하겠다는 결심이었다. 형제들의 지도국에 소속된 한 회원이 2004년 내게 말했다. ‘우리는 절대 군대와 대결하는 사태로 끌려들어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모르시의 실수와 잘못을 너무 많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의 사임 요청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리는 타마로드의 서명지 서문에 있다. 이것은 그 결과로 인한 대실패의 진정한 이유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형제들이 피하기로 맹세했던 대결을 가져온 큰 실수는 대선에 나가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원래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그 후에 태도가 180도 달라지자 당연히 그들의 경쟁자들과 적대자들은 비판했다. 또 처음에는 의회 선거가 있었을 때 의석의 1/3만을 얻도록 할 생각이며, 이 목적을 위해 불과 절반에 도전하겠다고 말했고, 그리고 나서 다시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의석 중 2/3에 도전했다. 그들이 처음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두 번째에는 무사히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바라크의 퇴진이 암시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게 아닐까? 권력은 어쩔 수 없이 대통령으로부터 재분배되고 있었다는 것, 그 첫 번째 수혜자는 군 최고지휘관이라는 것, 대통령직은 더 이상 그것에 도전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와 위험을 정당화할 만큼 굉장히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부분적 해명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주 조금밖에 해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결정의 주요 요인은 그들이 심각한 탈퇴와 동시에 이슬람주의 경쟁자들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무슬림 형제들은 이미 2011년 3월에 대선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 해 4월 그들은 자유정의당을 출범시켰다. 그 다음 달, 형제들의 가장 저명한 회원 중 하나인 압둘 모네임 아불 포투가 대열을 이탈해서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고, 그 때문에 그는 6월 중순 방출되었다. 압둘 포투는 민주적 원칙에 대한 헌신, 기독교인들에 대한 종파적 태도에 대한 반대,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에 대한 지지로 잘 알려진, 형제들의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 진영에 속했다. 그는 형제들 외부에서 명성이 상당했고, 형제들의 청년 회원들 사이에서 강력한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는 떠날 때 그들 중 일부를 데리고 갔다. 그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은 형제들의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고, 규율에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살라피들이 경쟁상대로 부상하자 사태는 훨씬 더 나빠졌다.
1880년대 페르시아의 시아파 선동가 Jamal al-Din al-Afghani와 그의 수니파 대표자인 이집트인 Mohammed Abduh가 시작했으며, 원래 근대적이고, 매우 정치적이며, 반제국주의, 범이슬람주의, 비종파주의 운동이었던 살라피야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보수적으로 바뀌었고 1970년대 이후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와하비 전통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제 살라피야는 al-Afghani와 Abduh’의 전망과는 정확히 정반대를 상징한다. 살라피들은 경전의 무오류를 믿는, 수니 이슬람의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halal(허가된)과 haram(금지된) 사이의 대립에 사로잡혀 있다. 다시 말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올바른 이슬람적 행위에 정신이 팔려 있으며, 대체로 모든 수니 정권을 지지해 왔고, 부패에 대해 도덕적 담론을 제공하지만 정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아파 교리와 또 그들이 kuffar(불신자들)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것은 그들을 Ahl al-Kitab(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백성들)이라고 존경하는 (형제들이 고수하는) 전통적 오스만 견해와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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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피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적이며 특히 무슬림 형제들에게 적대적인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정당이 신자들의 공동체를 분열시키므로, 바로 그 정당이라는 개념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에서 돌아오는 이집트 이민자들에 의해 아라비아 유행이 되살아나고, 사우디와 에미리트 돈이 이집트에 대량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향으로서, 지난 몇 년간 이집트에서 살라피 경향은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라피가 자신들만의 정당을 발족해서 선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상 유례가 없었고, 형제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거 전망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2011년 11월과 2012년 1월 사이에 열린 의회 선거에서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거구에 도전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을 설명해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보수적 경쟁자들에게 성공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선거 결과는 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자유정의당이 이끄는 선거연합이 전체 유권자의 37.5%의 지지로 235석을 얻은데 비해, 살라피 누르(빛)당과 그 동맹들은 27.8%와 123석을 얻으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형제들이 애초의 약속을 지켰더라면 이보다 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형제들에게 헤어날 수 없는 딜레마를 암시하는 불길한 것이었다. 그 지도자들이 비록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 진영에 속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이슬람-현대주의자 전통에 속했던 반면, 수많은 평회원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과 살라피들을 거의 구분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이슬람주의 진영에 속한 살라피들의 압력 때문에 형제들이 비이슬람주의 정당과 선거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부 결속을 해치는 것이며, 대신 누르당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세속주의 정당들과 멀어지게 한다. 알다시피 형제들은 이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비이슬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희생시켜가면서 자신들 내부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에 우선권을 주었다.
그 와중에 형제들은 더 직접적이며 어쩌면 훨씬 더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들의 가장 진보적 진영에서 뛰쳐나갔으며 여전히 인기 있는 아불 포투가 출마할 것이고 살라피들도 후보를 내세울 텐데 대선에 도선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고집할 것인가? 결국 누르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고 다른 그룹에서 내보낸 살라피는 부적격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형제들이 이 사실을 미리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회원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었을까? 보수적 형제들이 싫어하는 가출자에게 표를 던지라고?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이슬람주의자에게 표를 던지라고? 살라피가 아불 포투에 대항해서 후보로 나온다면 형제들은 둘로 쫙 갈라질 텐데. 아니면 우리의 모든 경쟁자들이 승리하게 절대 투표하지 말라고? 그들은 그래도 가장 덜 나쁜 선택은 자신들이 후보를 내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들은 2012년 3월 말 지도국 부의장 카이라트 알 샤티르가 대선에 출마한다고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들의 유턴은 당연히 광범위한 공격을 당했고 그것은 형제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에 불과했다. 돌이켜 보면 이것은 끔찍한 실수였지만, 강요된 실수였다. 여전히 설명해야 할 것은 왜 형제들은 그들이 덫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게 분명했을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가다.
2012년 4월 14일, 알 샤티르는 무바라크 정권 때 투옥된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 알 샤티르는 형제들의 지도적인 정치적 두뇌였고 그들이 후보로 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자신들의 선택이 거부되자, 형제들은 자유정의당의 의장으로 후퇴했다. 재미없고 명백히 부적합한 모하메드 모르시. ‘스페어 타이어’를 장착하면서, 그는 곧바로 이렇게 불렸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딜레마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후보 부적격 판정에 분노하면서 조작 선거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해서, 선거를 조종하는 최고군사위원회와 사법부를 수세에 몰리게 하고 누가 당선되든 미리 선수를 쳐서 부정할 수 있었다. 대신 그들은 비틀거리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2주 후, 누르당은 아불 포투의 출마를 승인했고 고난의 2부는 준비되었다. 퇴보적으로 보이며 공공연히 종파적인 살라피들이 아불 포투를 승인한 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 누가 그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한편 형제들에게는 이 사실이 곤경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오히려 가중시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살라피의 후원이 아불 포투를 쑥스럽게 만들든 아니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이슬람주의자들의 표의 대부분을 얻게 될 가능성을 높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형제들의 내부 문제를 현저히 악화시켰다. 만약 진보적 이슬람주의자들과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불 포투를 지지하기 위해 단결한다면, 형제들의 지도자들은 회원들에게 그에게 투표하지 못하게 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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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매우 희박하지만 늪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다. 5월 23일과 24일에 열린 1차 대선투표에서 모르시는 구정권의 후보인 아흐메드 샤피크를 제쳤다. 두 사람 사이의 결선은 6월 16-17일로 예정되었다. 6월 13일, 최고군사위원회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체포하고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명시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민주적인 대선 한 복판에서 벌어진 주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사실 기동훈련 3부작 중에서 제 1부, 조롱하는 단계였을 뿐이다. 그것은 또한 형제들이 선거에서 발을 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그것이 제공하는 구실은, (군인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민간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완벽한 것이었음에도,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결선투표 이틀 전이었던 그 다음날 6월 14일, 대법원은 자유정의당에게 국회 의석 중 최다수를 차지하게 했던, 6개월 전에 열린 선거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최고군사위원회는 의회를 해산하는 행정법령으로 후속조치를 취했다. 이 결정의 구실은 많은 선거구에서 절차위반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자유정의당은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선거 결과는 오로지 해당선거구에만 무효일 뿐이고 적절한 해결책은 이 선거구에서 보궐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합리적 주장은 거부되었다. 만약 모르시가 당선된다면 국회에 있는 자유정의당 소속 의원들의 지지에 기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6월 18일 카이로에 도착해서 그 다음날 저녁 친구와 식사를 같이 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의 첫 번째 말, “우리의 쿠데타에 온 걸 환영한다.” 하지만 이집트 역사상 가장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시킨 쿠데타는 서방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당신이 이슬람주의나 무슬림 형제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든간에, 이러한 사태전환 때문에 모르시의 당이 얼마나 견딜 수 없도록 고통스러운 입장에 놓였을지 잠시 상상해보시길. 행군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들의 후보에게, 만약 당선된다면, 국가기구 내부에서 아무런 정치적 지지도 없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이었다. 의회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자기 혼자서 군대, 경찰, 다양한 정보기관들, 엄청난 수의 비개혁적 관료들, 비개혁적이고 명백히 적대적인 사법부와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은 죽을 때까지 다른 모든 이들의 비난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의 상대는 무바라크의 심복인 샤피크였기 때문에, 모르시는 2011년 타흐리르 광장에 참여했거나 또는 동질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선택이었다. 샤피크가 승리하도록 모르시가 기권한다면, 수백만의 이집트인들은 - 특히 형제들의 회원들과 자유정의당 -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들 중에서 누가 기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떻게 자유정의당과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모르시와 자유정의당은 살인적 펀치를 피해나가면서 꿋꿋이 링에 머물렀지만, 어쩌면 최고군사위원회가 샤피크를 승리하게 하도록 아무도 모르게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의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독배를 받아드는 순간 싸움은 돌이킬 수 없이 졌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녹초가 될 때까지 마지막 라운드를 끌어서 1년 뒤에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결선투표 두 번째 날인 6월 17일, 최고군사위원회는 ‘헌법선언’을 발표해서 대통령의 핵심적 권력을 강탈했다. 여기에는 군 사령관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을 최고군사위원회가 직접 가지는 한편, 다른 핵심적 권력들은 최고군사위원회나 사법부가 가지는 것이 포함된다.
형제들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군대와의 대결을 피하려 했지만, 바로 그 대결을 위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최고군사위원회와 협상을 하기 위해, 그들은 2011년 11월 최고군사위원회에 항의하는 모하메드 마흐무드가 시위를 지지하길 거부하면서, 의회선거가 그 다음주에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과 ‘혁명가들’ 사이를 틀어지게 했다. 이런 식으로 형제들은 젊은 활동가들의 변덕스러운 열정을 자신들의 확고한 적들의 동맹의 성장을 위한 선물로 주었다. 형제들이 진퇴양난 사이에서 안전한 길을 택하는데 무능했던 것은 아불 포투의 처신이 그 징후이며, 무바라크의 마지막 집권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직 자체 내부의 계속되는 위기에 그 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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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오웬은 아랍에서 종신대통령제가 부상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기록하면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권위주의에 관한 학문적 논쟁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하지만 그의 저서는 그 논쟁을 종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시 시작하게 한다. 그가 영구적인 ‘안보 국가’의 개념, 군대의 역할, 보안기관들의 역할, 혁명 이후 시대의 지도자들이 ‘경제적, 정치적 자유화의 전세계적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대처했던 방식, 그에 상응하여 중요한 정실 자본가들의 역할 등을 강조하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최소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첫 번째는 이 지역의 사회들에서 공화주의적 정치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부재하고 있다. 아랍 공화국들은 왕정이 아니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주로 공화국들이었다. 그것을 넘어서서, 일종의 대리주의 - 스스로 결정하는 민중 대신 가부장적인 지배자들 - 가 한동안 지배했으며(나세르, 부르기바, 부메디엔, 가다피, 아사드), 그 뒤, 혁명 이후의 또는 반혁명적인 후임자들 치하에서 일정한 국가의 사유화(사다트, 샤들리, 벤 알리) 이후, 대통령들의 독재정치는 점점 더 지역의 공인된 왕정을 닮아갔다. 그러나 이집트 지식인들이 tawrith al-sulta(무바라크 집안이 왕조가 되는 명백한 프로젝트)에 불평했을 때, 그들이 공화주의적 원칙을 옹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1952년 이래로 국가는 왕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재천명했다. 정부는 오래 동안 공화정이길 중단했다. 만약 공화정이 존재하기나 했다면.
지난 해 사망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국을 덮친 재난에 대해 알 길이 없는, 고 안와르 압델 말렉은 이 논쟁에 더없이 중요한 두 권의 책을 냈다. (1962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Egypt: Military Society를 읽는다면 젊음을 되찾은 자유장교단들의 국가가 현재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편집했던 La Pensée politique arabe contemporaine(1970년)은 이 누락(lacuna)을 증언한다. 시대의 쟁점들 - 이슬람주의, 민족해방, 정체성, 아랍 통합, 사회주의, 팔레스타인 - 에 관한 50명이 넘는 아랍 작가들의 에세이 가운데 공화주의 사상에 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부재는 오웬이 묘사하는 현상의 주된 이유들 중 하나를 나타낸다.
종신대통령들의 현상이 국가 수장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또한 중요하다. 2000년대 중반 카이로에서 가장 저명한 합법적 정당의 지도자들이 모두 미니 무바라크들이었다는 것은 빈정대는 논평의 문제였다. 자기 자신이 대통령(ra’is)인 늙어가는 독재자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이비 정당들의 국지적 파라오들. 그 중에는 당시 70대 초반이었던 No’man Gomaa, New Wafd의 자기중심적 지도자였던 그는 (미래에 el-Ghad를 설립할) Ayman Nour를 당에서 내쫓았고 당사에서 총격전이 있고 난 후에야 결국 마침내 탈출했다, Tagammu의 73세 지도자 Rifaat al-Saïd, 그는 동료들의 생각을 무시하기로 유명했다, 심지어 더 나이가 많은 나세르주의 당의 지도자(79세) Dia al-Din Dawoud, 그의 독재적 방식은 그의 가장 재능 있는 젊은 신입당원 Hamdeen Sabahi를 나가게 해서 al-Karama(자긍심)라는 신당을 만들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집트만의 것이 아니다. 이라크의 쿠르드민주당을 몇 대에 걸쳐서 바르자니 집안이 지도하고 있고, 레바논의 드루즈족은 줌블라트 집안이 지도해왔다. 그리고 알제리 언론들이 알제리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적 정당이라고 애정을 담아 언급하는 사회주의세력전선은 1963년 설립 이래 심지어 (50년째가 되었을 때) 가다피의 재임기간을 초과했던 종신의장 호신 아이트 아메드가 지도해 왔다.
또 다른 사례는 무슬림 형제들 자신이 제공한다. 알 바나부터 계속해서, 모든 최고 지도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평생 직책을 맡아왔다. 예외는 모하메드 마흐디 아키프인데, 그는 2004년에 취임했지만 2009년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로 은퇴를 강요당했다. 알브레히트는 이것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뿐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 관한 미래의 역사는 이 사건을 2011년 2월 이후 형제들의 처신과 그로 인한 파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문제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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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프가 2004년 1월 취임했을 때 형제들은 사실상 이집트에서 정치활동 참여가 용인되었다. 17명의 형제들이 2000년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이따금씩 일어나는 체포파동은 여전히 그들의 불법적 지위를 상기시켜주었지만, 그들의 견해는 정기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지도적 형제들은 종종 비이슬람주의 대중이 모인 자리에 연사로 초청되었다. 그때까지 그들의 정치적 의제는 뚜렷하게 민주적 방향을 취해왔었다. 무엇보다도 계엄령의 종식을 요구했고, 그 다음으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언론과 결사의 자유, 등등. 2004년 3월 3일, 취임한 지 두 달 후, 아키프는 새로운 주요 정책을 추가했다. 그는 형제들이 국가를 의회 공화국 (parliamentary republic)으로 바꾸기 위해 급진적 헌법 개정을 제안한다고 발표했다. 이 제안은 무바라크 집안에 집중함으로써 개인적인 것에 국한하는 대신 정부의 권위주의적 형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으며, 부패와 자의적 지배를 억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에 있어서도 전제조건인, 권력을 입법부로 재분배하는 것을 제도화했던 것으로 보아 가말의 권력 승계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두 개의 합법정당이 결국 이 정책을 채택한 반면, 제안은 진지한 대중토론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고 곧 ‘무바라크 문제’에 관한 키파야의 선동에 의해 가려졌다. 그럼에도 이것은 형제들의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인도했다. 2005년 11월과 12월 의회 선거에서, 그들은 의석의 1/3에 도전했고 88석이나 얻었다. 이 유례없는 승리는 그들을 의석의 1/5을 차지하는 가장 강력한 야당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국회 의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수인 민족민주당에게 그들이 전에는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던 압력을 가했다.정권이 반응을 보인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형제들을 잡을 것이다’ 민족민주당 지도부에 있는 가말 무바라크의 측근 중 한 명은 내 동료에게 말했고, 그 뒤 3년에 걸쳐 정권은 형제들이 그들의 성공을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대부분의 선거규칙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단연코 그들에 대한 가장 모진 탄압캠페인에 착수해 수천 명은 아니지만 수백 명을 투옥시킴으로써 조직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궁극적 결과는 추의 방향이 보수적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아키프가 주도했으며 아불 포투와 이삼 엘 에리안과 같은 인물에게 구현된 전진적이고 외향적이며 매우 정치적인 전략은 형제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형제들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을 유지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는 전통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2010년 1월 아키프는 사임했고, 조직의 2인자이며 또 다른 진보적 형제인 모하메드 하비브가 아니라 지도국 회원 중 상대적으로 무명인, 보수적 진영의 모하메드 바디가 승계했다. 하비브는 자신이 밀려나자 조직을 떠났고, 2011년 아불 포투가 그 뒤를 따랐다. 그 때부터 정책을 만드는 것은 바로 형제들의 보수적이고 내향적 진영이었다. 정치적으로 덜 노련하고 자신감이 덜하고 다른 견해에 대해 더 불편해 하기 때문에 토론에서 어설프고 융통성이 없고, 의심을 잘 하고 그 대가로 의심을 일으키며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전제조건으로서 정권과 모종의 거래를 몹시 하고 싶어 하는 새 지도부는 무바라크 이후 시대에 끝없는 도전들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집트는 알제리가 아니다. 이 뻔한 말과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인 ‘우리는 알제리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는 무바라크 정권과 그들이 소유한 언론의 담론에서 빈번한 주제였고, 무엇보다도 형제들의 합법화 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989년에 이르기까지 자유장교단들의 정권의 정치 모형을 (중요한 차이들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모방했던 알제리인들은 갑자기 그것에서 벗어나서 이슬람구국전선을 합법화함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의 족쇄를 벗겼다. 이슬람구국전선이 세상을 놀라게 한 1990년 6월과 1991년 12월의 선거 승리, 1991-92년의 국가 위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악몽같은 폭력으로의 추락은 모두 카이로에서 어리석다고 비난했고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다루는 정권의 지혜의 증거로서 인용되었다. 그러나 2005년 11-12월에 있었던 일은 사실 6년 후에 일어날 일, 미니 ‘알제리 운동’을 앞질렀다. 형제들이 (2000년보다 71석 많은) 88석을 얻은 이유는 그들이 완전히 합법적인 것처럼 홍보하려는 정권에 의해 그들이 무언의 격려를 받았으며 그들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무소속으로 등록하면서도 후보들은 공개적으로 형제들로서 출마했다. 모든 거리의 벽과 가로등 기둥에 붙어 있는 후보들의 사진에는 전설의 ‘Al-Ikhwān al-Muslimūn’(무슬림 형제들)과 ‘Al-Islam, huwa al-hall’(이슬람이 해결책이다)가 적혀 있었다. 심지어 형제들은 그들이 승부를 겨룰 선거구에서 대중집회와 행진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언론은 그들의 선거운동을 마치 다른 정당들의 선거운동처럼 보도했다. 정권이 이 모든 것을 허락했던 이유는 미국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라크의 파괴가 전지역적 민주화 과정의 개시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라는 워싱턴의 압력 속에서, 카이로는 그러겠다는 시늉을 했지만 2005년 말이 되자 지겨워졌다. 정치 영역을 개방하는 것은 오로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권한을 줘서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을 백악관과 국무부에게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때가 되었다. 알제리인들은 이슬람구국전선을 합법화하고 조종하기 위한 더 복잡한 이유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비슷했고, 1991년 선거 1차 결과는 같은 방식으로 파리를 상대로 한 정권의 끝없는 대화에서 도구화되었다. 하지만 이집트 정권,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민주당 지도부의 가말 무바라크 팀은 오판했다. 그들은 형제들이 기껏해야 30이나 40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오판을) 만회하기 위해 대대적 탄압을 지시했던 이유이며, 그 때 워싱턴은 딴 데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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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알제리의 경험들 사이에는 다른 많은 접점들이 있다. 1952년 이후의 이집트처럼, 1962년 이후의 알제리에서 군대는 권력의 원천이었고 당은 대통령과 정보기관들의 근접관제의 대상인, 국가기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부메디엔이 시인했듯이, 빈 껍데기였다. 그러나 알제리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초기에 신중하게 이집트 모델에서 벗어났고, 하젬 칸딜의 중요한 책 덕분에 우리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칸딜은 자유장교단들의 국가의 내밀한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시 썼으며 그의 저서는 부단히 논쟁을 일으켜야 마땅하다. 그의 저서는 나세르와 사다트 두 정권의 끝없는 권력투쟁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상세히 설명하며 각 정권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위기들에 관해 믿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설명을 제공한다. 칸딜은 나세르가 1954년부터 계속 완전히 국가를 지배했던 것으로 묘사하는 전통적 역사를 반박하면서, 그는 정부를 인수했을 때 실질적으로 군대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지휘권을 압델 하킴 아메르에게 위임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소위 죽마고우가 점점 더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메르는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친구들을 승진시켜서 군대를 자신의 봉토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에는 자유장교단들이 애초에 음모를 꾸미도록 만들었던 파루크 왕 시절 군의 부패하고 사기 저하된 상태를 되풀이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더 적대적이 되면서 두 사람이 각각 통제했던 정보기관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참호전이 벌어지면서, 결국 나세르가 중대한 세 개의 실패를 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금방 끝나버린 시리아와의 통합(1958-61), 실패한 예멘에 대한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7년 6월 이스라엘에게 대참패. 애초에 나세르가 시리아와의 통합에 동의하면서 아메르를 다마스커스 주둔 이집트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메르가 자신을 짜증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조치는 통합을 망하게 하도록 도왔을 뿐 나세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아메르가 돌아왔을 때 군 지휘권을 되찾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군대가 심각한 전투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유능한 장교들을 아메르가 승진시키길 꺼려했던 것이 이집트가 예멘에서 낭패를 겪게 된 주 요인이었음을 칸딜은 암시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집트를 벼랑끝으로 몰고 간 치명적 게임에 대한 책임이 나세르가 아니라 아메르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나이 반도에 군대를 파견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6일 전쟁에서 이집트를 박살 낼 구실과 기회를 주었지만, 나세르는 아메르의 어리석음이 가져올 결과를 아무리 저지하려고 해도 헛수고였다.
다른 역사가들이 도전하게 될 이러한 폭로들이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미국 정책에 관한 전문가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든지간에, 이러한 폭로들은 또 알제리를 새롭게 조명한다. 부메디엔은 1965년에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국방장관직을 확실하게 지켰고, 마침내 1967년 8월 나세르가 아메르를 제거하는데 성공을 거두자 그 뒤를 따라, 사납게 날뛰는 참모총장 타하르 즈비리가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도발해서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데 성공했고, 진압은 부메디엔의 통제를 강화했다. 칸딜은 사다트 시대에 대한 매혹적인 설명을 제공하면서, 알제리인들이 이집트를 계속 지켜보면서 교훈을 얻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을 보여준다. 아마도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1981년 10월 사다트 암살의 배후에 군 지도부가 참여했다는 그의 암시였다. 칸딜은 자신의 저서가 끝날 때까지 이 주장이 사실임을 밝히지 못하지만, 암살자들이 하급 장교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해치운 조직인 탄짐 알 지하드의 지휘관이 군 정보기관의 변절자였고 그는 사형을 면했으며 결국 2011년 3월 석방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훌륭히 입증한다. 사다트가 살해된 직후, 샤들리 대통령이 알제리군 정보국장을 정규 장교로 교체하고 그 뒤 근무지를 국방부에서 대통령궁으로 옮긴 것이 과연 우연에 지나지 않을까? 우연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샤들리 정권은 이미 그 전부터 사다트의 교본을 많이 베꼈다. 1970년대 초 사다트가 나세르주의자와 좌파를 숙청했던 것을 빈틈없이 모방해서 1980년 부메디엔주의자와 좌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집트군이 사다트에게 분개했던 이유는 1973년 10월 전쟁에 관한 칸딜의 설명이 명확히 말해준다. 당시 장군들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면서 자신들이 따낸 이점을 사다트가 활용하는데 실패하자 이성을 잃었다. 사다트가 시나이 반도의 주요 통로들을 장악하길 거부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 분노가 더욱 심각해진 것은 칸딜이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우여곡절 에피소드 중 하나인, 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던 시기였다. 사실상 아메르는 시나이 반도를 잃었고 사다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진지한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이집트의 시나이 문제를 만들어냈고, 무바라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관리하는데 만족했고, 이제 그 문제는 폭발하고 있다.
군대가 사다트의 충실한 계승자인 무바라크를 구출하길 끝내 거부했던 것의 뿌리, 오웬이 묘사한 아랍 ‘공화국들’과 왕정들 사이의 차이가 점차 사라지는 것의 뿌리, 이 두 뿌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에피소드, 사다트가 미국인들 앞에서 자신과 조국이 엎드리게 했던 에피소드 속에서이다. 종신대통령 증후군은 이집트가 개척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했던 것은 부르기바였고, 그는 또 사다트의 경제 정책에서 중심이 될 infitah(개방)을 개척했다. 이란의 shah(왕)을 본 따서 그의 화려함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면서, 명백히 군주적 대통령을 개척한 것은 사다트였다. 칸딜이 묘사했듯이, 사다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워싱턴에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워싱턴에게 절대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집트를 자신이 봤을 때 유일하게 중요한 외세인 워싱턴의 종속국가, 또는 심지어 하인국가로 축소시키고, 한편으로는 미국이 자신의 지배를 외부에서 보증하게 만들었다.
샤들리 치하의 알제리는 일정하게 이집트와 같은 길을 걸어갔지만, 워싱턴과 파리 사이에 충돌을 조장하고 항상 계획을 변경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권력을 잡은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전략의 근본적 요소들은 유지하면서도 완화시켰다. 최소한 처음에는 짜증나는 화려함과 제왕적 태도를 걷어치우고, 대미 관계의 일정 측면들을 재협상했다. 무바라크는 군 사령관들을 통제하고 열외 취급하려는 사다트의 단호한 노력을 계속했으며, 사다트가 이미 결정한 항로를 신중하게 따르면서 갈팡질팡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완전히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했으며, 자유장교단들의 국가의 실질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로부터 일정한 자율권을 대통령이 그럭저럭 확보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군이 정부의 중심으로 맹렬히 귀환한 것은 일부가 주장하듯이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체제가 도래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극도의 자율권은 이제 없으며, 심지어 시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무바라크가 장기적으로 추구한 세력균형의 중요한 요소는 무슬림 형제들에 대한 암묵적 의존이었다. 그는 형제들이 세력균형에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고 국가가 더 이상 신경쓸 수 없거나 신경쓰지 않으려 하는 사회의 특정부위에 대해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이 합의는 이제 깨졌다.
국내 정책이, 순전히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세르주의로 복귀할 것인가는 여전히 두고 볼 일이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군대의 진정한 목표가 되지 않는다면, 사우디 돈과 이스라엘과의 협동에 의존하는 것은 대외정책에서 나세르주의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혁명가들’에게 미치는 타마로드 운동의 놀라운 정치적 영향력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환상이 확실히 깨지고 나면, 그들은 결국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전망에 대담하게 대항하여 자유, 정의, 존엄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실패했던, 1989년 이후의 알제리 세속주의자들과 좌파들의 비극적 실수를 자신들이 너무나 근본적으로 되풀이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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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마치면서 제 생각을 잠시 정리하겠습니다. 전 6월 30일 이후 참세상의 이집트 보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겐 그렇지 않습니다. 참세상은 명백히 학살을 축소하고 학살의 일부 책임을 피해자들에게 돌렸습니다.정은희는 명백히 잘못된 정보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정은희의 기사는 6월 30일 이전에는 자세히 본 적이 없지만 아마 그 이전부터 잘못된 정보를 계속해서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 원인은 정은희가 이집트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는 정은희의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당시 수많은 언론이 타마로드 서명운동과 그 이후 모르시 퇴진을 요구한 6월 30일 집회에 대해서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정은희가 이것을 전혀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 무시했을겁니다. 정은희는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도 학살을 집중 보도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최재훈의 글을 참세상에서 최근에 본 것은 터키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레디앙에 한상진의 글이 실렸는데 그 글은 최재훈의 글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도 터키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제겐 하나의 의혹이 있었습니다. 최재훈은 국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활동가인지는 모르지만 터키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상진은 이라크전 때 알려진 평화운동가이며, 그는 아랍을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랍 민심에 대해 (일반인의 수준에 비추어) 잘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터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충분히 조사를 하면 글을 쓸 수도 있기 때문에 단지 최재훈이 터키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의 글보다 한상진의 글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이집트에 관한 최재훈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최재훈은 터키나 이집트에 대해서 아는게 없어도 국제연대운동을 하는 활동가라는 자신의 명성만 갖고도 충분히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세상은 계속해서 잘못된 정보를 주면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구든 저지하지 않으면 참세상은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민중이 돈이 없어서 싸구려 옷을 입고, 싸구려 밥을 먹고, 싸구려 교육을 받아도, 싸구려 언론까지 봐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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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슬리 리뷰에 교육투쟁과 관련된 글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슬리 리뷰 2013년 6월호에 게재된 "The Rebirth of the Chicago Teachers Union and Possibilities for a Counter-Hegemonic Education Movement"을 지난번처럼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글들도 번역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글이 우리 전교조 선생님들과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랍니다.http://monthlyreview.org/2013/06/01/the-rebirth-of-the-chicago-teachers-union-and-possibilities-for-a-counter-hegemonic-education-movement
시카고 교사노조의 재탄생과 대항 헤게모니 교육운동의 가능성
들어가며
9월의 9일 동안, 시카고는 교사들, 보조교사들, 임상의들에게 속했다. 2012년 9월 10일, 시카고교사노조(CTU) 조합원 26,000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것은 시카고에서 26년 만에 처음으로 교사들이 일으킨 파업이었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노조들이 양보를 받아들이면서 임금, 수당, 연공서열에 따른 권리들, 고용 보호, 그리고 20세기에 노동운동이 쟁취했던 많은 것들을 삭감하는 것에 굴복해왔던 반면, CTU는 교사노조를 무너뜨리고 공공교육을 해체하는 사업에 착수한 람 이매뉴얼 시장, 시카고 상공인클럽,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들에게 맞섰다. 시카고는 CTU의 붉은 색으로 물든 바다였다. (옮긴이: CTU 조합원들은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행진했다) 교사들과 학부모들, 학생들, 지역의 지지자들은 전 도시의 학교들에서 피켓 시위를 했고, 학교 주변을 행진했고, 매일같이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중 집회는 시카고를 멈춰 세웠다.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파업 배반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9일 동안, 도시는 저항의 축제였고, 지하철은 조합원들의 붉은 색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트럭, 버스, 자동차 운전자들은 학교와 길모퉁이에 가득 모인 교사들만이 아니라, 교사들과 연대하는 구호가 적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거리에 지나가기만 하면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다. 17년 동안 공립학교를 지배해 왔던, 부담이 너무 높은 시험(high-stakes tests, 옮긴이: 합격여부가 응시자에게 매우 중대한 결과가 되는 시험)과 하향식 책임전가의 살인적 효과를 체험했고, 이제 가르침과 배움 모두를 말살하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학부모들과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7년 동안 욕을 먹고 공교육의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비난을 받은 끝에, 시카고 교사들은 영웅이 되었다. 그들의 용기, 전투성, 능력은 전국을 전율하게 했다. 그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정의해왔던 공공부문의 파괴와 부와 권력의 오만한 집중에 맞서 우리 모두의 편에 섰다. 시카고 교육청(CPS) 임원들과 시장의 예측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파업을 지지했고, 인종, 계급, 거주지를 뛰어넘는 노조를 지지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파업으로 곤란을 겪었음에도 시카고 공립학교 학생들의 부모 중 2/3가 노조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카고는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고, 파업은 신자유의에 대항하는 더 큰 전투의 일부로서, 공교육을 지키고 변형하는, 새로운 기반 위에 노조를 재건하기 위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전쟁 속에 있는 하나의 전투였다.
이 글에서 우리는 공교육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경제 위기를 이용해서 공공부문과 공공부문 노조를 공격하려는 국가의 시도와 관련해서 파업의 중요성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미국에서 공교육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탄생한 시카고는 이제 그것을 격퇴하는 중심지다. 결정적 요인은 CTU의 탈바꿈이다. 이 글은 지역사회의 교육투쟁들과 사회운동노조로서의 CTU의 부상의 상호관계를 검토한다. 우리는 시카고의 대항 헤게모니 교육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칠 것이다.
우리는 활동가와 학자로서 이 글을 썼다. 폴린은 정치경제학과 도시 교육의 급진적 정치학에 관해서 글을 쓰고 가르친다. 리코는 비판적 교육학, 사회정의를 위한 교육, 수학교육정책에 관해서 글을 쓰고 가르친다. 우리는 풀뿌리 조직인 시카고의 사회정의를 위한 교사들(TSJ)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이며, 2004년 이후부터 학교 폐쇄와 교육 민영화를 막기 위한 조직화 교육에 참여해왔다. TSJ를 통하여, 우리는 학부모, 지역사회 구성원, 교육자들의 폭넓은 동맹의 일환으로서, 파업에 대한 지지를 모으기 위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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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의 의의와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부상시카고 교사들의 파업의 의의는 경제의 경쟁력과 자본축적을 위해 공교육을 구조조정한다는 전세계적 의제와 관련하여 검토해야 한다. 미국에서 이 초당적 의제가 시작된 것은 교사와 학교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면서 학교를 기업처럼 운영하겠다는 레이건 행정부의 요청이었다. 25년에 걸쳐, 다양한 영역의 자본과 기업식 교육 “개혁주의자들”은 응시자에게 높은 부담을 주는 표준 평가제, 전국 평가제, 시험 성적과 결부된 교사 평가제, 시장市長의 학교 통제, 민영화에 의해 주도되는 전국적 하향식 책임전가 시스템을 밀어붙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뉴올리언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의 한 형태로서, 2008년 경제 위기는 모든 방면에서 교육 민영화를 가속화하고, 노조를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전세계적 경쟁력을 위해 학교를 능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것이 바로 “정상을 향한 경주”라고 알려진, 오바마 행정부가 43억 달러를 쏟아 부은 교육을 위한 경제적 복구계획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재정 위기”는 공립학교를 폐쇄하고, 민영화된 차터스쿨을 확대하고, 전 학군을 해체(예: 디트로이트)하거나, 전 학군을 교육 공급자들의 “포트폴리오”로 대체(예: 필라델피아)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게이츠 재단과 월튼 재단 같은 억만장자 벤처 자선가들은 연방 정책과 주 정책 그리고 지역 학군을 이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막대한 부를 배치하고 있다. 공립학교들이 심각한 예산 삭감에 직면해 있는 이 순간, “모든 주에서, 엄청난 개인 재산을 소유한 남자들[원문 그대로]이 교사들의 tenure(종신 재직권)과 seniority(연공서열 또는 근속연수)를 폐지하고, 공립학교를 개인이 인수해서 교사들이 아무런 권리 없이 일하게 되는 학교를 위한 길을 트는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이 재난의 진원지(focus)는 아프리카 출신 지역사회가 학교 폐쇄의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도시 학군들이다.
이 신자유주의 계급의 기획은 “강탈에 의한 축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사적인 축적을 위한 공공재의 징발, 그것은 소 목장을 위한 아마존 우림의 개방일 수도 있고, 볼리비아의 물을 사유화하는 것일 수도 있고, 미국에서 공공주택, 도로, 다리, 학교를 민영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육, 교사들, 그들의 노조에 대한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공격은 공공재의 전유,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재배치, 혼란, 광범위한 다수에 대한 강도짓을 향한 투자자들의 추동(drive)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카고 교사들은 이 의제에 맞섰다. 프랑스 교사노조가 CTU에게 보낸 연대 성명에서 나타나듯이, 이것이 바로 전 세계가 CTU 파업의 뒤를 따라가는 이유다.
“우리는 민영화에 대항하여 공교육과 당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당신들의 투쟁에 대한 소식을 방금 접했다. 우리는 우리의 연맹인 FNEC FP FO가 당신들의 주장을 완전히 지지한다는 사실을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들의 투쟁과 당신들이 시카고 교사 중 98%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파업이 완전히 성공하길 기원한다. 교육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며, 교사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고, 해고를 멈추고, 학교 폐쇄를 멈추고, 민영화를 멈추고, 교사들의 법적 지위와 단체협약을 존중하라. 우리의 모든 사회적 성취들을 존중하라.”
시카고 교사 파업의 의의는 또한 공공부문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지방정부들은 “재정 위기”를 해결할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 남은 사회 안전망과 괜찮은 공공부문 일자리를 심각하게 감소시킬 긴축예산을 강요하고 있다. 시정부들은 경찰과 소방관들을 줄이고, 공무원들의 임금과 수당을 대폭 삭감하고, 도서관과 학교를 폐쇄하고, 사회기반시설의 복구와 유지를 포기하고, 공공시설들을 초국적 합작 투자자들에게 헐값에 넘기고 있다. 이것은 금융화, 투기적 부동산 투자, 폭리를 취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기업들이 가져온 위기의 비용을 노동계급과 빈민들, 특히 유색인들과 중간소득자들에게 전가하고 수익성 있는 투자처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자본축적으로 돕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이 공격의 선두에 있다. 이것이 바로 운송노동자들, 집배원들, 시카고 경찰이 교사 파업을 지지했던 이유다. 민간부문 노동자들 중 불과 7%만이 조직화되어 있는 반면, 공공부문의 조직율은 36%이기 때문에, 공공 노동자들은 공공복지에 대한 무참한 공격에 대해 조직화된 저항을 일으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 또 그들은 활력 있고, 사회적으로 더 공평하고 올바른 공공기관을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노조에게 노동자들의 복지와 지역사회의 복지 사이의 연계를 강조하고 원칙에 입각한 노조-지역사회 연합체를 건설할 것을 요청한다.
교사들과 교사노조에 대한 보편적 공격은 지금까지 노동자들과 공익을 지키는데 비참할 정도로 실패한 기업 조합주의와 단절해서 새로운 교사노조의 정치를 위한 조건들을 창조한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국제적으로 교사노조로부터 진로를 발견하고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와 양질의 교육을 위한 전국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온두라스와 (멕시코) 와하까 교사들의 “사회운동 조합주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교사연맹의 반인종주의적, 반신자유주의적 태도, 그리고 그들의 동맹인 학부모들. 상황은 서로 다르더라도, 원칙들은 공통적이다.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핵심적 측면은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위한, 지역사회에 기반한 운동들과의 동맹이다.
미국적 상황에서, 사회운동 조합주의는 노조의 시야를 경제 투쟁으로 좁히고 노조가 갖고 있는 힘을 민주당과의 밀실협상과 민주당에 대한 의존으로 제한시키는 경제주의와 하향식 구조에 대항한다. 사회운동 조합주의는 더 폭넓은 사회정의 운동들과 동맹을 맺으며 사회운동 그 자체로서 조직된다. 그들의 힘은 동원된, 정치적 의식을 갖춘,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조합원들과, 주변화된 지역사회와의 강력한 유대관계로부터 나온다. 시카고에서 우리는 모든 학생을 위해 풍부하고, 공평하고, 올바른 교육을 위해 투쟁하는 학부모들과 지역사회들의 편에 선 사회운동 교사노조의 탄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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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발사대시카고는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초기모델(prototype)이었다. 이 도시가 모델로 부상한 것은 일리노이 주의회가 당시 시장이었던 데일리에게 교육위원들을 임명할 권한을 주어서 최고경영자가 학교를 운영하도록 했던 1995년이었다. 데일리가 임명한 교육위원들과 연달아 나타나는 최고경영자들은 유례없는 수준의 고부담 시험, 책임전가, 하향식 기업경영을 강요했다. 시장의 통제는 이 과정의 핵심이었다.
2004년, 시카고 교육청은 거주지역의 공립학교를 폐쇄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차터스쿨과 계약학교를 확대하는 계획인 르네상스 2010과 함께 민영화로 향했다.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것은 시카고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 금융, 정치 엘리트들의 조직인 시카고 상공인클럽이었다. 동시에 시카고 교육청은 주로 부유하고 고급스러운 거주지역에서 선별입학과 특수 공립학교를 확대했다. 당시 시카고 교육청의 최고경영자였던 안 덩컨이 “시카고의 기적”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한 르네상스 2010은 전국적으로 도시 학군들에 대한 모델이 되었다.
2012년까지, 시카고 교육청은 시카고 학교의 약 1/6인, 백 개 이상의 학교를 폐쇄했다(그 학교들은 압도적으로 저소득 흑인, 라틴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카고 교육청은 거의 백 개나 되는 개인운영 차터스쿨을 열었고, 35개의 ‘턴어라운드’ 학교를 창조했다. 이 조치들은 지방학교 민주주의를 약화시켰고 (예: 신설학교들은 지방학교 운영에 학부모들과 지역사회가 실질적으로 직접 참여하는 공식단체인 지방학교운영위원회가 없다) 교사노조를 약화시켰다(차터스쿨 교사들은 CTU에 가입할 수 없다). 2012년 이매뉴얼 시장은 2013년 가을이 될 때까지, 지난 10년 동안 폐쇄된 학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120개 이상의 학교를 폐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턴어라운드 학교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428232
시카고의 공공교육 해체가 미친 영향은 저소득 아프리카와 라틴계 지역사회에 특히 편중되었고, 그들 지역사회에 대한 투자회수와 불안정에 기여했다. 2001년 이후 학교에 대한 백여 개의 조치 중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조치는 저소득 유색인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경우 학교는 빈곤, 인종주의, 공공주택 해체, 압류, 사회적 배제에 시달리는 지역사회의 버팀목이었다. 학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한 학부모의 말을 인용하면 “지역사회의 중심”이다. 학교폐쇄는 또한 지역사회와 가족들을 잘 아는, 경험 있는 흑인 교사들의 불균형적 손실에 기여한다. 전체적으로, 시카고 교육청 소속 흑인 교사들은 2002년 40%에서 2012년 27%로 하락했다.
학교폐쇄와 민영화는 자본축적을 위해 도시를 구조조정하고 저소득 유색인 지역사회를 몰아내왔던 부동산, 도심개발, 기업 보조금, 민영화에 초점을 맞춘 신자유주의 도시 경제 개발정책의 연결망(nexus)의 일부이기도 하다. 고급화를 위해 선발된 거주지역에서는 학교폐쇄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는데 기여한다. 그 뒤 학교는 중간계급 고객들을 위해 개조하고 쇄신한다. 투자를 회수한 거주지역에서는 문을 닫은 공립학교를 대신해서 차터스쿨이 들어선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운영하지만 공적자금으로 운영되는 차터스쿨은 이윤의 출처이며 그것의 확산을 추동하는 것은 시장 중심적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정책들은 수천 명의 학생들을 인근 학교에서 쫓아냈으며 그들의 교육을 개선하지 않았다. 교체된 학교 중 불과 18%만이 우수한 성적으로 평가받았고, 거의 40%가 시카고 교육청의 평가에서 하위를 차지한다.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지역사회 밖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폭력과 안전에 대한 위협이 급등했다. 이에 대응하여, 학부모들, 학생들, 교사들은 2004년 이후부터 끈질기게 학교폐쇄와 싸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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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의 저항과 CTU의 사회운동 조합주의아프리카, 라틴계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조직들은 진보적 교육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학교폐쇄와 민영화에 대한 전투를 지휘한다. 우리는 함께 행진, 집회, 피켓시위, 기자회견을 했고, (겨울에) 시카고 교육청 본부 앞 노상에서 잠을 잤고, (600명이) 시장 자택을 향해 행진했고, 연좌농성을 했고, 체포되었다. 우리가 폐쇄를 막을 수 있었던 학교는 비록 얼마 안 되지만, 우리는 공공교육을 시카고의 신자유주의 도시개발에서 가장 치열한 분야로 만들었다. 우리는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만들어냈고, 대중에게 이 의제 배후에 있는 기업세력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켰다.
CTU 지도부는 대체로 시장의 신자유주의 의제와 공모해왔지만, 2008년 한 무리의 교사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교육자들의 모임인, 평교육자회의(Caucus of Rank and File Educators, CORE)을 결성했다. CORE는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조직들과 나란히 싸우는 교사들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그들이 구축한 동맹은 시카고의 교육 민영화와 싸우는 노동-지역사회 편대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 동맹은 현재 CTU가 만들어가려 하는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뿌리다.
노조가 원래 그래야 했던 방식으로 활동하면서, 즉 학교폐쇄에 반대하는 학부모, 지역사회와 함께 하고, 교사의 직장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조합원들에게 기업식 교육 의제에 관해 교육하면서, 불과 2년 만에 CORE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사노조를 지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풀뿌리 교육투쟁에 새로운 힘을 주고 가시화했다. 모든 학교에서 노조가 갖고 있는 제도적 힘과 조합원들의 영향력, 생기를 되찾은 노조의 조직부와 신설 연구부, 노조가 대중을 설득하는 힘(its public voice)은 학교를 지키기 위한 아프리카, 라틴계 지역사회의 투쟁을 강화했다. 또 이 투쟁에 대한 노조의 참여는 관료화된 노조에 의해 전반적으로 해산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 해제된 조합원들을 정치화하는 것을 도왔다. 결성된 지 불과 2년 후, 상대적으로 경험이 없는 평교육자회의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시카고 교사 파업을 지도했다.
파업 그 자체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파업은 시카고 전반에 걸쳐 경제 위기를 교사들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노조를 약화시켜서 쓸모없게 만드려는 이매뉴얼 시장의 시도에 도전했다. 그러나 파업의 효과는 이보다 더 큰 것이었다. 한 번도 정치적 활동가였던 적이 없었던 교사들이 피켓 라인과 집회를 지도했고 교직과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에 대해 대중에게 설명했다. CTU는 임금과 수당에 대한 파업이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교사들이 직접 제작한 피켓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쟁점들은 학부모들과 학생들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는 쟁점이기도 했다. 한 교실에 더 적은 학생. 더 많은 미술, 음악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고부담 시험의 폭압과 교육 민영화의 종식. 사회운동 조합주의를 향한 CTU의 움직임은 전국 교사노조와 미국 노동운동 내부에서 새로운 극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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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대항 헤게모니 교육운동의 가능성사회세력이 집결하고 위기가 전개되면서 시카고의 대항 헤게모니적 교육운동을 위한 기회가 열렸다. 경제위기,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축적된 효과, 학교폐쇄의 가속화, (교육에 대한) 시장의 통제의 부당성, 흑인과 라틴 지역사회들의 교육-정의 투쟁의 끈질김과 성숙, 그리고 CTU의 재탄생은 지배적인 교육 의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과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들을 창조해냈다. 이 새로운 운동은 시카고 교사 파업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에는 학부모들과 교사들 사이의 일체감을 위한 새로운 기초가 있다. 2010년 일리노이주의 “재정위기”는 시카고 교육청이 부유한 거주지역에서조차 음악과 미술 수업을 대폭 삭감하고 한 교실의 학생 수를 늘리겠다고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중간계급 학부모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들은 바로 시카고의 시장들이 공립학교에서 모집해 왔던 핵심 유권자들이었다. 자신의 거주지역에서 학교폐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 학부모들은 삭감에 압력을 넣기 위한 조직을 결성했다. 그 뒤, 이매뉴얼 시장은 2011년 당선된 직후 효과 빠른 교육개혁으로서 수업일 연장을 위한 십자군 전쟁에 돌입했다. 학교 개선을 위해 아무런 자원도 추가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지겨운 하루를 보내게 하는, 전과 똑같은 접근방식은 전 도시의 학부모들을 분노하게 했고 일부 백인 노동계급 지역사회를 움직이게 했다. 전에는 교육투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던 학부모들이 위원회 정책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학교폐쇄와 차터스쿨 확대와 싸우는 아프리카, 라틴계 학부모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2012년, 주로 백인 학부모들로 구성된 이 그룹들, 학교폐쇄와 싸우는 아프리카, 라틴계 조직들, 교육-정의 조직들은 시카고 학교운영위원회 대표 선거를 위한 전도시에 걸친 캠페인을 결성했다. 시카고의 약 2,500개 선거구의 13%의 표본을 추출해서 실행한, 위원회 선거에 대한 투표는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87%의 찬성표를 얻었다. 이 선거구들이 시카고를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조직들 중 다수가 교사 파업과 지역사회 연대의 중추가 되었다. 현재 이 조직들은 CTU를 포함하는 풀뿌리 다인종적, 다계급적 지역사회-노동 동맹의 일부다. 비록 이 동맹이 어리고 필연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이 있지만, 학교폐쇄와 민영화에 반대하고 민주적, 지역사회 기반의 학교 변형의 과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다.
시카고의 신자유주의적 학교 경영(governance)은 정당성을 잃고 있는 것 같다. 파업은 당선되자마자 노조를 향해서 맹렬히 달려든 이매뉴얼 시장의 패배였다. 하향식 책임전가와 시카고의 기적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현재 시카고는 1997년 처음 이 정책을 도입했을 때보다 거의 세 배나 많은 학교가 academic probation 상태에 있고, 학업성취에서 인종적 격차는 더 커졌다. 학교운영위원회 선거에 대한 투표결과는 주요 언론들조차 시장이 임명하는 위원회에 대한 표면적 변화를 제안하게 했다. 수천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 폐쇄에 반대하고 나서자, 지방정부의 선출직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이 학부모들의 편을 들어야 했다. 시장과 시카고 교육청은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 있다. 시카고 교육청 행정부는 엉망이 되었다. 4년 동안 5명의 최고경영자들, 중앙 행정부의 낙하산 인사, 시장이 임명하고, 책임질 필요가 없는 교육위원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있다. 현 시카고 교육청 최고경영자조차 시카고 교육청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시카고인 다수의 지지를 받는 CTU 파업은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대극(counter pole)을 형상화했다.
/ academic probation은 학사경고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아 우리 말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시카고가 이 정책을 도입한 것이 1997년이라고 했는데 109 City Schools On Academic Probation이라는 제목의 1996년 시카고 트리뷴 기사를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96-09-30/news/9610010053_1_school-business-manager-schools-for-seven-years-elementary-schools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부분적으로 시장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신념, 그리고 시장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공공교육의 가치들인 공정성, 정의, 민주주의, 상호의존성, 그리고 공공의 이익에 대한 재확인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비록 지배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들과 경쟁적 소비주의, 시장들, 미국의 공공교육 정책을 좌우하는 국가 축소의 담론들에 대항한다. 시카고 교육청을 변형하기 위한 CTU의 제안인 The Schools Chicago Students Deserve(시카고 학생들에게 합당한 학교들)은 이러한 목표들을 향한 구체적이지만 앞을 내다보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학교 정책들과 자원 분배에 내장된 구조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밑에 깔려 있는 인종주의를 특징짓는 교육 아파르트헤이트(분리, 격리)에 대항한다. 그 뿐 아니라, CTU는 긴축의 정치학과 희박한 자원에 대한 경쟁에서 완전히 떠나면서, 학교에 대한 공정한 재정지원을 통한 부의 재분배, 기업에 대한 조세지원(corporate tax subsidies)과 도피처 폐지, 시장의 부동산개발 비자금 100억 달러를 학교에 반납, 진보적 세제를 통해 이 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재정을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13년 4월, 이매뉴얼 시장은 시카고 교육청의 예산 적자가 10억 달러라고 주장하면서, 54개 학교의 문을 닫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학교들의 거의 전부가 흑인 지역사회에 있다. 이것이 학교 폐쇄에 대항하는 전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수천 명의 학부모들, 교사들, 학생들,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그들의 학교를 지키기 위해 공청회에 나섰다. 그들은 파업이 가진 위력에서 영감을 얻었다. 최근 한 공청회에서 한 학부모가 말했듯이, “교사들은 지난 여름 이 도시를 멈췄다. 우리는 웨스트 사이드에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매뉴얼이 임명한 학교위원회가 그의 위협을 현실화하느냐, 그리고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는 두고 볼 일이다.
파업, 학교위원회 선거를 위한 캠페인, 지금 형성되고 있는 동맹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카고 파업은 지역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교육 풍경을 바꿨다. 지역사회와 손을 잡은 교사노조는 공공교육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지역사회의 교육투쟁에서 태어났고, 결과적으로 그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 교육 정의를 위한 의제를 추진할 수 있고, 학교를 뛰어넘어 도시 자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될지도 모를, 대항 헤게모니 형성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저항의 분출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느냐, 그리고 지속적인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느냐는 시카고 대중과 의식 있는 조직가들이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앞에는 길고 복잡한 길이 놓여 있다. 사회운동 노조로 발전하고 있는 CTU는 그것의 정치적 입장, 제도화, 자원, 그것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 규율, 자신의 조합원들이 가르치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그것이 맡은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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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멕시코에서 니에토의 개혁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를 찍은 20분짜리 영상을 보면 대체로 평화적이고 멕시코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만 흥미롭다.http://youtu.be/fHlShFaN3D0
하지만 내가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상은 13일 소칼로 광장을 담은 30분짜리 영상. 음산한 음악과 사람들의 표정을 근접촬영한 이 영상은 보는 이에게 현장에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강추.
http://youtu.be/eNeqzsGDOsI
아래는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의 포토 에세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많이 귀엽다.
http://upsidedownworld.org/main/mexico-archives-79/4456-photo-essay-indigenous-in-mexico-reweaving-strug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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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피스타민족해방군(EZLN)은 건재하다http://youtu.be/HdRwUQB9Y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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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11월에 나온 Nicolás M. Somma의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처럼 나눠서 올리겠습니다.http://www.interfacejournal.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2/11/Interface-4-2-Somma.pdf
2011-2012년 칠레 학생운동: 교육 시장화에 도전하다
들어가며
주류 국제 분석(예: 2011년 유엔)에 따르면,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고 학생들” 중 하나다. 1970년대 중반 지역에서 처음으로 과감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행한 칠레는 지난 20년간 인상적인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고 빈곤이 1/3로 감소했다. 정치적 안정, 정기적 선거, 그리고 지역의 기준에 비추어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높은 존중의 시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2011년 칠레는 그것의 거시경제 수치가 아니라 정부와 자국의 교육제도에 대항하는 유례없는 사회적 저항의 물결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해 5월의 첫 번째 시위에서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온 반면, 8월이 되자 시위자들은 약 20만 명의 절정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학생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들, 노동자들, 환경 운동가들, 원주민들, 그리고 정치, 경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이질적 시민 대중이 포함되었다. 이 시위들은 1973년부터 (민주주의가 회복된) 1990년까지 이 나라를 지배했던 아우구스토 피토체트 장군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타도했던 1980년대 말의 시위들 이후 가장 대규모적이며 칠레 모두를 아우르는 시위들이었다. 이 시위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보석(옮긴이: 칠레의 별명)에서 발생했고, 강도는 낮아졌지만 2012년 10월에 이르러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시위들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일부 관찰자들은 재빨리 칠레 학생운동과 스페인의 Indignados(분노한 자들)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결정적 차이를 무시했다. 후자가 경제 침체와 긴축재정의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삭감에 대항했던 반면, 전자는 고용률 성장, 낮은 인플레이션, 사회계획 확대를 배경으로 행동했다. 이 수수께끼를 알고 있는, 더 많은 신랄한 논평자들은 칠레인들이 “배가 불러서” - 아마도 음식, 최첨단 장비, 자동차, 현대화에 - 시위를 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글에서 나는 최근(2011-2012)의 칠레의 학생시위의 급증에 관하여 세 가지 주장을 제출한다. 첫째 학생운동은 칠레의 신자유주의와의 단절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시장 원리가 지도하는 대학교육 체제의 급속한 발전에 내재된 모순이 유례없는 수준의 조직화 기술, 통신망, 불만을 - 이것들은 운동을 육성했던 기본재료였다 - 가진 대학생 대중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 주장인데, 운동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의 가장 소중한 두 가지 신념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 신념은 다시 말해서 교육은 소비재이며, 사적 행위자들이 교육 활동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이다. 학생 운동은 교육 체제를 훨씬 뛰어넘어 칠레 사회의 기본적 측면들을 재구조화하기 위한 길을 열였다.
셋째, 운동은 급속한 수치 성장을 겪고 있음에도 내부 분열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학생들이 대단히 많이 참여했던 배경이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학생 지도자들이 학생 대중과 결합하도록 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운동은 지난 20년간 엘리트적이며 비참여적 성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칠레 정당들의 관행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 세 가지 주장은 대중언론에서 운동에 관해 공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개인적 관찰, 학생 활동가들과의 격식을 차리지 않은 대화에 근거하고 있다. 이 주장들은 엄격한 실증조사에 근거하여 최종 진술을 제공하기 보다는 이 운동에 관한 논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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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전통적 동원, 최근에 잠잠1973년까지 칠레는 인민동원의 강한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2011-2012년 시위의 예상치 못한 대규모는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1880년대 이후부터 칠레 노동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것 중 하나였고, 1910년까지 강력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당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1960년대에는 좌파 정당들과 기독교민주당이 농민 표를 얻기 위해 애쓴 결과, 정치적 동원은 도심에서 시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정점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의 집권 기간(1970-73)이었다. 이 시기에, 가까운 공장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참여 민주주의를 위한 독립 기구(산업 코르돈)을 창조했다. 그리고 (식량과 생필품) 결핍을 배경으로, 지역 인민들은 기초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공급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경제적 사보타주와 위협(이것을 위해 우파 민병대가 동원되었다)을 통해 아옌데를 전복하기 위한 보수 세력의 시도에 저항하려 했다.
피노체트의 억압기구들이 시민 기구들, 노동조합들, 정당들을 해산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을 기소하면서, 1973년을 시작으로 이렇게 생생하고 양극화된 사회는 목이 베여나갔다. 비록 독재정권이 흔들렸던 1980년대 말에 인민동원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선 민주적 정부들은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별로 한 것이 없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인민동원이 1973년에 그랬던 것처럼 군대가 또 쿠데타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1973년 이전의 칠레를 망각하기만 한다면, 2011-2012년의 고조된 동원은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것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 동원은 칠레의 전통에서 꽤 일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시위의 급증은 주목할 정도로 신선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기존의 정치적 인물들과 단체들에 의해 위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시위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만들어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끌어들이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둘째, 그리고 정확히 학생들은 자신들을 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항 모델로 여겼기 때문에, 운동 내부에서 위계적 구조를 최소화하려 했다. 학생들은 마리나 시터린(2006년)이 주변화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발견한 “수평주의(horizontalism)”을 자신들에게 맞게 고쳤다. 이 두 가지 특징은 - 제도적 정당들로부터의 자율성과 조직 내부에서의 수평적 구조 - 칠레 학생운동을 지난 20년간 지구 남반구에서 발전해온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동원의 일부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Motta의 2008년, 2009년, 2011년 연구, Webber의 2011년 연구를 찹조할 것)
/ Sara Motta는 Social Movements in the Global South: Dispossession, Development and Resistance (Rethinking International Development)(2011년)의 공동 편집자이며, Jeffery R. Webber는 From Rebellion to Reform in Bolivia: Class Struggle, Indigenous Liberation, and the Politics of Evo Morales(2011년)의 저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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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교육은 어떻게 학생운동을 창조하는가최근의 학생운동이 칠레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라는, 이 글의 첫 번째 주장은 칠레의 교육제도가 시장 원리에 의해 지도되었던 과정을 고찰하게 한다. 피노체트는 1970년대까지 국가 재정과 교육부의 중앙적 행정부에 의지해 왔던 칠레 교육에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학교 운영을 지방자치 정부에 맡김으로써,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탈중앙화했다.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했는데, 사립학교 숫자는 급속히 증가했다. 고등교육을 자유화했는데, 사립대학과 기술대학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들의 결합으로 인해 1990년부터 2010년까지 고등교육에 진학하는 칠레인들의 수는 4배로 팽창했고, 그 결과 18-24세 사이의 연령집단에서 대학생 비율은 16%에서 40%로 증가했다. 이 학생들 중 대략 70%가 자신들의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까지 진학한 구성원이었으며, 대학 진학은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동을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대학 진학의 확대는 정치인들과 시민들 모두가 환영했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 시장의 실패는 정치적 논쟁에서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첫째, 국가 감독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기 때문에, 새로 생긴 중등, 고등 교육기관들 중 다수가 제공하는 학습은 불충분했다. 고용주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점점 더 이 교육기관들에서 배출한 졸업생들(그들이 상층계급에 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을 고용하길 꺼려했기 때문에, 사회적 상승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었다. 오직 상층 계급만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비싼 사립학교 제도의 존재와 결합하여, 교육적 질과 경제적 보상에 있어서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냈다.
둘째, 학비는 곧 매우 높아져서, 칠레 교육은 (그 인구의 수입에 비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교육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가 지원하는 대출이 확대되었고 학생 인구의 약 70%가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대출금은 학비보다 더 적었기 때문에, 가족이 학비의 3/4을 부담해야 했고, 이것은 칠레가 2010년에 가입한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 대출금은 이자율이 높기 때문에, 학생들은 놀랄 정도의 빚을 축적했으며, 빚을 갚기는 힘들었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비율에 속하는, 전체 학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들에게는 명백히 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학위를 따는 대신, 좌절감과 종종 가족 재정을 위태롭게 하는 빚을 얻었다. 결국, 교육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가 칠레에서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사립 교육기관들 다수의 소유주들은 복잡한 절차를 통해 법의 정신을 위반했다. 결과적으로, 대량의 돈이 민중-중간계급의 가족 호주머니로부터 점점 더 부유해지는 교육 기업인들의 호주머니로 이동했다.
요약하면, 시장 매커니즘을 통한 고등교육 확대에 따른 대가는 교육의 질의 격차, 수많은 빚과 좌절감, 그리고 민중-중간계급 수천 가구들에 경제적 취약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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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비명: 2006년 “펭귄” 시위이미 2000년대가 되었을 때, 교육의 상품화 그리고 그 후 칠레 교육의 확대가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 중 하나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조직적 능력을 갖춘 중간계급 학생대중의 창조였다. 게다가 그들은 폭압적인 독재 정권의 시기에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쉽게 표현할 수 있었다. (2006년 학생들이 점거한 고등학교 건물 외벽에 설치한 걸개그림에는 “우리는 두려움 없이 태어난 세대”라고 적혀 있었다)
/ 이 말은 지금도 칠레 학생운동을 표현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Generation Without Fear" Demands Free Education in Chile
http://therealnews.com/t2/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767&Itemid=74&jumival=10159
이미 시작된 변화는 2006년에 분명해졌다. (교복 색깔 때문에 “펭귄들”이라고 불렸던) 고등학생들의 항의 시위는 사회당 지도자인 미셸 바첼레트 정부를 위태롭게 했다. 행진과 학교 점거를 통해 전국적으로 동원된 “펭귄들”은 교과과정을 변혁할 것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자체 교육행정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개월간의 활동 끝에 분열되고 심신이 쇠약해진 학생들은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원 해제되었다. 정치인들은 재빨리,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여 운동의 요구들을 피상적으로만 다루는 합의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즉석에서 교육위원회를 만들어냈는데, 학생 대표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 이 위원회는 그 어떤 의미 있는 개혁안도 제출할 수 없었다.
“펭귄들”은 이 경험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운동의 요구를 제도화함으로써 끌어들이려는 정치인들의 시도를 경계할 것. 둘째, 정부와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학생동원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2011-12년 운동의 가장 눈에 띄는 지도자들 중 하나인 까밀라 바예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2006년의 경험)은 학생운동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인들의 cooptation(통폐합) 전략을 알고 있다” (Ouviña 2012:15).
/ 바예호가 오는 11월 총선에서 하원의원 후보로 나간다는 내용의 기사
http://en.mercopress.com/2013/07/13/chilean-charismatic-former-student-leader-runs-for-congress-with-the-communist-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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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장에 도전하다: 권리로서의 교육과 이윤과의 투쟁2007-2009년이 되자 고등교육에 진입한, 나이 든 “펭귄들”이 2011년 다시 거리에 나왔다. 이제 과녁의 윤곽은 2006년 때보다 더 선명해졌다. 운동이 대면하는 상대는 더 이상 온화한 좌파 여성(미셸 바첼레트)가 아니라, 중도-우파 대통령(세바스티안 피녜라)였다. 억만장자 기업인인 피녜라는 취임하기 전에 자신의 기업을 팔겠다는 선거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의 바로 핵심에 있는 인물로 쉽게 묘사되었고, 학생운동에게는 더 선명한 목표물이 되었다. 2011년 7월까지 교육부 장관을 지낸 호아낀 라빈(그가 교체된 이유는 정확히 학생시위 때문이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이윤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사립대학의 설립자이며 주주였다.
/ 2012년 3월 15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피녜라는 “칠레로 귀국해 신용카드 사업을 통해 부를 쌓기 시작한 이래 중남미 최대 항공사인 란(LAN), 산티아고 시내 대형 쇼핑몰인 '아라우코 공원', 공중파 TV 채널 칠레비시온(Chilevision), 칠레 최고의 인기 프로축구클럽 콜로-콜로(Colo-Colo) 등을 소유한 거부로 떠올랐다.”
2006년과 마찬가지로, 2011년의 최초의 요구들은 상대적으로 협소했다. 그 요구들은 학생 교통비 지원과 장학금 지급지체에 관한 것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자 요구는 칠레인 모두에 대한 무상교육 제공에서부터 교육에서 이윤을 얻는 주체들에 대한 효과적 처벌, 세제개혁과 광대한 구리자원에 대한 국가 소유의 확대를 통한 공교육 재정지원 마련으로 계속 상승했다. 운동은 수적으로도 증가했다. 2011년 최초의 행진에 수천 명이 참가했으나 겨울에는 수십만 명으로 늘어났다(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윤에 반대하여
주로 교육시장 확대의 의도치 않은 부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시장의 두 가지 기본 가설을 흔듦으로써 시장에 도전했다. 첫째 가설은 사적 주체가 교육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얻는 것의 타당성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것이 비록 칠레에서 불법이지만, 많은 교육기관들이 복잡한 관행에 기대어 이윤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부동산 중개소를 만들어서 건물을 유난히 높은 가격으로 대학에 임대했다. 운동은 칠레 교육이 매우 비싼 (그리고 가족들이 이 비싼 교육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수의 교육 “기업가들”이 칠레 교육으로부터 부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cognitive connection(옮긴이: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서로 연결해서 기억해두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음)은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는 불의에 대한 의식을 창조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칠레의 교육시장 철학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는데, 그 철학에 따르면 이윤이 동기인 시장 주체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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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때마침 터진 기업 스캔들은 이윤에 반대하는 이러한 신념의 전파에 도움을 주었다. 2011년 5월 중요한 유통업체인 La Polar는 고객에게 궁극적으로 해로운 일방적 채무재조정을 함으로써 고객을 학대해 온 사실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최고 경영진들의 체포로 끝난 이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시장 감독 소홀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었다. 또 (사립대학인 Universidad del Mar와 같은) 교육기관들만이 아니라 가금류 산업을 둘러싼 이와 비슷한 스캔들은 이윤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벌어지는 부정행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데 기여했다.이윤이 불법이라는 것을 시인한 정부는 고등교육기관을 감독하고 고등교육기관들의 재원, 계약, 광고실행, 임원들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업무를 담당할 부서(Superintendencia de Educación Superior, 고등교육감독청)을 만들어서 운동의 요구를 다루려 했다. 그러나 운동은 감독청이 교육부문에서 불법인 이윤추구 관행을 저지할 의지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일부 고위 공무원들이 이러한 관행에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령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신설기구는 그럴 능력이 없다. 가장 돋보이는 운동 지도자 중 하나인 까밀라 바예호가 최근 주장했듯이, 그것은 ‘paper tool’이다. (옮긴이: 실체가 없다는 뜻인 것 같지만, 정확히 모르겠음)
궁극적 문제는 운동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정부의 제안들은 “소문자”가 있다는 빈번한 비판은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상사계약 용어에서 비롯된 이 표현은 고객에게 유해한 측면을 감추기 위해 소문자로 쓴 조항을 가리킨다. 이 경우 이 표현은 교육개혁 프로젝트의 내용에서 실제로는 현저히 그 효과를 약화시키는 세부조항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 다른 불신의 암시는 운동이 정부와 협상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동원해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6년에 이미 배웠듯이, 동원해제는 그들이 효과적인 협상을 하는데 필요한 지렛대를 파괴한다.
소비재가 아니라 권리로서의 교육
운동이 도전했던 두 번째 가설은 아마도 교육시장의 작동에 있어서는 더 기본적일 것이다. 즉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하는 것의 타당성이다. 운동은 칠레의 체제가 질 높은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있고 학업을 끝마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한 자들과 그럴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 사이의 엄청난 불평등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체제의 이른바 능력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이러한 불의를 근절하기 위해서, 운동은 모든 시민에게 질 높은 무상 공교육을 제공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교육은 소비재가 아니라 권리가 된다. 학생들은 다른 중간소득 국가들도 이러한 체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주변의 우루과이의 예를 들면서), 칠레에서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충돌의 처음 몇 개월 동안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정부는 공교육에 투입할 재원을 현저히 늘리고 학비 대출에 대한 이자율을 낮추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나 2011년 중반이 되자, 피녜라는 “교육에는 이중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소비재이며 (...) 투자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폭로했다. 정부는 사람들이 교육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 교육 시장을 선호했다. 그 뒤 피녜라와 그의 각료들은 국가가 교육의 주요한 또는 유일한 공급자라는 “가르치는 국가”의 사상에 대항하여, 사적 주체들이 교육 비즈니스에 참여하는 “가르치는 사회”의 사상을 방어했다. 그리고 모든 시민에 대한 무상교육에 관한 운동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기 힘으로 감당할 능력이 있는 상층 계급에게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공적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대응했다. 운동 지도자들은 교육이, 심지어 부분적으로라도, 시장 매커니즘에 의존한다면, segregation(분리, 격리, 차별)과 불평등은 계속 재생산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따라서 의견의 차이는 공교육을 위한 재원의 양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관한 기본 관점에 관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부와 완전히 다른 관점을 표현하면서도, 운동이 사용한 수사적 무기들은 비슷했다. 전문적 주장들과 숫자들. 그들은 학생들을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단지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아이들로 묘사하는 stereotype(옮긴이: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이 문장에서는 흑인은 게으르다는 식의 한 집단에 대한 부당한 동일시를 의미함)을 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칠레 교육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고, 철벽같은 제안들을 개발하기 위해 국제적 경험들을 검토하고, 전문적 근거로 정부의 제안들을 비판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운동은 보통 칠레 교육의 결함들을 강조하는 양적 분석과 국제적 비교를 동원하여 자신의 주장들을 뒷받침한다.
또 학생들은 체제의 불의를 보여주기 위해 정보를 모으기 위한 독창적인 방법들을 개발했다. 이를테면, 교육부채의 수와 양에 관한 공식적 수치들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칠레대학교(Universidad de Chile)의 공대생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채무 상태에 관한 정보를 올리고 자신의 사연을 제공할 수 있는 웹페이지(http://yodebocl.tumblr.com/)를 개발했다. 자신의 정보를 업로드한 약 5,000명의 학생들이 빚을 진 전체 학생들을 대표하지 않지만, 이 숫자는 그들 중 일부가 떠안고 있는 부담을 시사한다. 이 웹사이트가 보고한 학생들의 평균 빚은 2만 달러가 넘으며, 이 금액은 칠레의 평균임금 25개월분과 맞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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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결속과 늘어나는 지지 사이에서 긴장을 해소하다대부분의 운동에서, 지지자가 늘어나는 것은 의견이 더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운동이 분열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어떤 운동이라도 운동이 성장하면서 내부 결속과 연대 유지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시위자의 숫자를 운동 크기의 지표로 간주한다면, 운동은 이미 언급했듯이 몇 개월 만에 대규모가 된다.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내부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글의 남은 부분은 이 수수께끼를 다룬다. 우선 나는 학생 기구 내부에 만들어진 매우 참여적인 환경과 지도부의 수평적 스타일 덕분에 잠재적 내부 분열이 최소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운동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정치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1세기 전에 묘사한 과두제화 경향을 막았다. 또 나는 시위자들의 수적 증가는 (a) 대다수 칠레인들과 (b) 신자유주의에 대한 폭넓은 불만을 학생 운동과 공유하기 때문에 시위에 동원된, 노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 같은, 특정 그룹들이 학생들의 요구와 공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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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미헬스와 관련하여 필자는 아래와 같은 footnote를 남겼습니다.
미헬스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조율해야 하는 조직들은 소수의 지도자 파벌(clique)의 손에 권력과 결정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비록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정반대를 지시하더라도. 이 지도자들(“과두제”)는 결국 평회원들의 욕구(needs)로부터 멀어져서 자신들만의 개인적 목표들을 추구하게 된다.
/ 과두제를 의미하는 oligarchy의 어원인 ὀλίγος (olígos)는 소수를 의미합니다.
참여는 정당성을 낳는다
풍부한 참여기회의 제공과 지도부의 수평적 스타일이 칠레 학생운동이 분열되는 경향을 최소화했다. 결과적으로 참여는 내부 조직에 달려 있다. 운동을 조율하는 것은 약 30개 공립대와 사립대 학생회 대표들로 구성된 칠레대학총학생회연합(Confederación de Estudiantes de Chile, CONFECH)이다. 대표들은 선거 때마다 재학 중인 학생 대중에 의해 선출되기 때문에, 지도부는 물이 흐르듯이 계속 순환된다. 이러한 유동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는 칠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 중 하나인 칠레대학교 총학생회(Federación de Estudiantes de la Universidad de Chile, FECH)의 2011년 선거였다. 까밀라 바예호가 FECH를 이끌었던 2011년은 운동의 전성기였지만, 이것이 그녀의 재선을 보장하는 못했다. 그녀는 2011년 말 선거에서 현 FECH 회장 가브리엘 보릭에게 패배했다.
/ 언론에서 FECH를 칠레학생연합이라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FECH는 CONFECH 소속입니다. 쉽게 말해서 CONFECH은 우리의 한총련과 같으며, FECH는 칠레대학교가 칠레의 최고명문 국립대이기 때문에 우리의 서울대총학생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2011년 말에 있었던 FECH 선거와 관련해서 2011년 12월 8일자 연합뉴스 보도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12/08/0601350100AKR20111208091800090.HTML
운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 중 하나는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이다. 운동은 현 칠레 정치의 비참여적이며 심각하게 엘리트적인 성격에 반대하기 때문에, 운동의 가장 눈에 띄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운동의 담당자들(authorities)이라기 보다는 대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반 학생기구들이 주요한 결정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형적 특징은 정부의 개혁 제안들을 듣기 위해 정부 당국과 회동한 후에는, 운동 대표들이 지역 회의와 전국 회의에 학생들을 소집한다는 것이다. 정부 제안들은 학생들에게 제출되며, 결정에 도달할 때까지 토론된다(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거부되었다). 회의를 소집하고 거행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것은 느린 과정이지만, 관심이 있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운동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전국을 돌며 장소를 바꿔가며 열리는 CONFECH 총회 이외에도, 각 대학은 정기적으로 총학생회 회의를 소집할 뿐만 아니라 학부 또는 단과대 수준에서 특정한 회의들을 소집한다(학생 파업 기간에는 종종 매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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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회의 소집만이 아니라, 학생들은 학내에서 치열한 의식화 사업에 열성적이었다. 이 사업은 운동 전략과 교육제도 문제에 관한 논쟁,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에 관한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발표, 영화제, 예술 공연을 포함한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들이 정규 학업으로부터 해방되는 파업 기간에 더 활성화되었다. 또 학생들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버스 안, 광장, 거리에서 일반 민중에게 운동의 대의를 일깨웠다.학생운동의 내부 조직은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르고 이 조직들 사이에도 명백히 차이가 존재함에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브라질의 땅 없는 농촌노동자 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 베네수엘라의 주민자치위원회(Consejo comunal)와 도시토지위원회(Comités de Tierras Urbanas, CTU), 또는 아르헨티나 산업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그룹과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경험들과 일부 유사성을 공유한다. 이 모든 운동들은 최고 지도자나 전위당이라는 낡은 공식에 기대지 않고 극단적 상황에서(많은 점에서 칠레 학생들이 처했던 상황보다 더 극단적인)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조율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 운동들 모두 대안적인 공식을 찾아냈다. 그것은 결합하고 머리를 맞대고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잠재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집합적 과정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과도한 짐을 어깨에 멘(encumbered) 지도자나 개화된(enlightened) 지도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놀라우면서 변혁적(transforming) 경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운동을 자신들 외부에 있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창조하는 것(their very creation)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창조는 회의와 시위가 열릴 때마다 실체를 드러냈다(instantiated).
학생들, 그리고 그 너머
광범위한 참여가 뒷받침하는 높은 정당성 덕분에 운동은 자신을 갉아 먹는 파편화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운동의 가장 수수께끼는 정확히 어떻게, 20년 전 민주주의의 회복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떤 운동보다, 더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얻는데 성공했는가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것은 학생 대중 내부에서 지지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운동이 본질적으로 칠레에서 가장 명문대에 속하는 대학의 학생들로 제한되었던 반면, 곧 군소 사립대, 고등학교(일부 사립학교 학생들도 가담했다), 전문대 학생들이 운동에 합류했다.
그러나 곧 운동의 거센 물결은 학생 대중을 뛰어 넘어, 환경 활동가들과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대의에 참여했다. 천연자원과 원주민 사회를 위협하는 칠레 남부의 발전소 건설계획안 승인의 결과 지난 몇 년간 칠레에서 환경 행동주의는 놀랍도록 각성했다. 학생 시위는 환경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칠레의 일반 대중에게는 환경 문제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현 교육제도의 폐해와 같은 대의와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은 자신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환경에 대한 위협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수도 산티아고 주민들에게는 특히 사실이었다.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생 운동과 환경 행동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폭넓은 비판으로 집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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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역시, 특히 고등학교 교사노조와 광산노동자 노조를 통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확립했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칠레의 노동운동은 군사독재 시절 몇 가지 수단에 의해 - 우선 활동을 불법화하고 그 지도자들을 구금 또는 투옥한 뒤, 노동연맹의 설립을 제한하는 노동법 공포 - 약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함께, 노조 가입률의 체계적 감소를 설명해준다. 현재 칠레의 노조 가입률은 11%에서 15% 사이 어딘가에 있으며, 이것은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노동운동의 구체적 요구들이 학생운동의 요구들과는 명백히 다름에도, 양자는 신자유주의가 촉진하는 불평등에 대한 전반적 비판을 공유한다. 게다가 학생운동의 목표는 많은 산업,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명(共鳴: 같이 울림)했는데, 그들의 자녀는 (집안의 역사에서) 고등교육에 진입한 1세대였다. 이 부모들은 학비 대출로 인한 경제적 부담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더 일반적으로는, 칠레 가구의 대다수가 가족 중에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있거나 대학진학을 예상하는 학생이 있고, 대출을 받지 않으면 학비를 마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운동이 강조한 문제들 중 최소한 하나 - 비싼 대학교육 - 는 칠레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일부 학생 시위들에 부모들, 조부모들, (아이들을 포함해서) 가족 전체가 대규모로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운동의 창조성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운동은 음악 공연과 기타 활동으로 가득 메운 공공 공원에서 가족친화적 시위를 조직했다.
물론 칠레의 학생운동이, 지구 남반구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현재의 사회동원에서는 처음으로, 국내의 다른 운동들과 공통점들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예컨대, 2011년 말 아르헨티나에서 데 라 루아 대통령의 종말을 가져온 동원 역시, 그 중에서도 특히 최근에 해고된 산업노동자들, 장기실업자들, 퇴직자들을 포함하는, 수없이 많은 이질적 집단들로 구성되었다. 볼리비아에서 산체스 데 로사다를 쫓아낸 동원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폭넓은 동맹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다양한 사회집단들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반면, 그것을 활성화하는 것은 종종 더 부수적인(contingent) 조건을 요구한다. 처음에 피녜라가 교육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던 칠레의 경우에서처럼, 현 정부의 실현되지 않는 약속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이다.
전술적 다양성
학생운동이 사용하는 폭넓고 다양한 시위 전술 역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대도시의 전통적 대중행진은 시위의 중추였다. 그것은 운동이 얻은 전폭적 지지를 보여주는데 기여했고, 정부가 시위에 대처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쏟게 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대부분의 행진은 대통령궁을 포함하여 국가건물 여러 곳이 위치한 주요 중심가인 알라메다 거리에서 벌어졌다. 알라메다 시가행진은 운동의 요구의 중심성(centrality)을 상징화할 뿐만 아니라, 보행밀집지역이라는 점에서 운동의 가시성(visibility)을 확대한다.
행진들은 다른 네 개의 전술에 의해 보완되었다.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전술은 집합적 예술행위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공공 광장에서 집단키스 시위(Besatón), 자전거 타고 대통령궁 주변 돌기, 대형 꼭두각시, 속옷입고 시가행진,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와 같은 클래식 팝송에 맞춘 예술행위, 대통령궁 앞에서 실행한 이 공연에는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했다. 199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Santiagazo가 사람들에게 일으킨 감정들과 유사하게, 이러한 전술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갖고 있는 심각성과 정부의 대응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에게 축제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이었다. 게다가 학생들의 창조성을 보여줌으로써, 예술행위들은 더 진지한 전통적 전술에는 무감동한 구경꾼들의 공감을 끌어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칠레 학생운동은 오큐파이 운동의 인간 마이크와 수신호에서부터 2001년 필리핀에서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항의했던 스마트몹에 이르는, 세계 다른 곳의 창조적 시위들과 공동전선을 편다.
/ Santiagazo는 1993년 12월 16일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에서 발생한 봉기를 말한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는 Contentious Lives: Two Argentine Women, Two Protests, and the Quest for Recognitio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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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술은 일시적인 건물 점거였다. 점거는 대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에서부터 좌파와 우파정당 당사, 텔레비전 방송국, 심지어 고등교육기관의 자격을 부여하는 국가기관 건물에까지 이른다. 많은 경우 무차별적 진압 방법을 동원한 경찰력의 강제 해산으로 끝났다. 일부 학생들이 휴대폰으로 이러한 관행들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기 때문에, 정부는 경찰의 월권행위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거는 압력 수단으로 작용했는데, 그것은 점거가 일부 교육기관들의 재정 상황을 위협했고(국가 보조금이 학생들의 출석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정부 당국에 불안을 조성했기 때문이다.게다가 몇몇 고등학생들은 몇 주에 걸쳐 단식투쟁을 했고,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단식투쟁 때문에 정부와 사회전반이 조마조마하면서 마음을 졸였고, 보건부 장관과 같은 고위 공무원들은 정부를 불편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단식투쟁을 격렬히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방관만 하던 주민들은 가끔씩 미리 계획한 시간, 일반적으로 밤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두들기는 카세롤라소(cacerolazo)를 통해 운동을 지지했다. 카세롤라소는 산티아고 동부의 상층계급 거주지에서 놀랍도록 강렬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우파를 선호하는 그들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회 부유층의 일부가 운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론
현재의 칠레 학생운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 시장 원리를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정책들을 추진하는 정치적 계급, 그로부터 이윤을 얻는 기업 세계에 대항하는 포괄적 동원 중 하나의 사례를 표현할 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정표인 1999년 시애틀 시위나 2001년 세계사회포럼 이후, 이러한 동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다. 이러한 동원은 라틴 아메리카(특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나 지구 남반구만이 아니라, 더 발전된 지역(북미와 서유럽에서 가장 활동적인. 최근의 오큐파이 운동에서 볼 수 있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 사이에는, 예를 들자면,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 아르헨티나의 삐께떼로스, 칠레 학생들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각자 독특한 국내 사정에 의해 형성되며, 각자 자신을 형성한 조건들과 결부된 특정한 주장들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주제는 주목할 만하다. 즉 착취와 불평등에 대한 투쟁, 대의 민주주의의 현 상태에 대한 깊은 불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행동과 의식을 갖춘 실험, 그리고 수평적 사회관계에 대한 헌신.
이 글은 2011년 초부터 칠레를 뒤흔들고 있는 학생운동의 몇 가지 특징을 묘사했다. 칠레는 반신자유주의 시위에 대한 연구에서 흥미로운 사례다. 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의 충고에 기댄 피노체트 독재정권에서 그랬듯이, 정치적 지배층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도입한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였기 때문이다. 매우 억압적이었던 1970년대에는 칠레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지속적 시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놀랍게도,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 15년 동안에도 그러한 시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비동시성(옮긴이: 이 문장에서 asynchrony는 신자유주의와 그에 대한 저항처럼 마땅히 공존해야 하는 것들이 공존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음)이 마침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한 번 맛을 보여준 2006년과 총력투쟁의 2011년, 그 격렬함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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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보도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삼류 찌라시 언론 <참세상>이 최재훈의 글 "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를 추천기사로 올려 놓았다.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최재훈과 정은희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사실"이다.최재훈은 말한다.
"이는 누가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명백한 쿠데타요,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이 군대의 완력에 못 이겨 강제로 쫓겨났다면 그것이 어떻게 쿠데타가 아닐 수 있을까. 또한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나라에서 대다수가 평화적인 방식을 고수하던 시위대를 광장과 모스크에 가둔 채 마치 사냥하듯 총질을 해대는 행위는 명백히 학살이다."
쿠데타요 학살이라는 것은 최재훈이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최재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다음에 근거 없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늘어놓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이집트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이야기와 주장들은 우리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쿠데타는 쿠데타지만, 이건 민중들의 민주적인 쿠데타”라고도 하고, “학살은 가슴 아프나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치러야할 대가”라고도 한다. 쿠데타 아닌 쿠데타, 비극적이지만 당연한 학살.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이런 주장..."
따옴표 안의 이런 말들은 도대체 누가 한 걸까. 바로 쿠데타를 불러들인 "혁명가들"이 했던 말들이다. 그런데 정은희는 이런 말들을 보도하고 최재훈은 이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참세상이 하는 짓이다. 참세상은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럼 틀렸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또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풀 수 없기 때문에 최재훈이 풀어줘야 할 수수께끼라고 한다.
2013년 2월 13일에 발표된 글이다. "이스라엘, 사우디, 미국은 이집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
http://www.socialistaction.net/International/Middle-East/Egypt/Israel-Saudi-Arabia-and-US-preparing-a-coup-in-Egypt.html
이집트에 쿠데타 세력이 존재하고, 그 세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는데 쿠데타가 일어나는건 너무 당연하다. 게다가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도 미국의 동반자는 무바라크가 아니라 군부였고, 이스라엘 역시 무슬림 형제단은 말할 것도 없고 무바라크보다는 군부를 더 좋아하는데다, 사우디는 무슬림 형제단을 증오하고, 좀 있으면 죽을 압둘라 국왕의 자리를 노리는 사우디 정보국장 반다르 빈 술탄 왕자는 이란 콘트라 사건 때부터 미국을 위해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해왔던 작자다. 그럼에도 최재훈의 글에는 눈을 씼고 찾아봐도 이런 얘기가 없다.
http://consortiumnews.com/2013/08/29/the-saudi-israeli-superpower/
Both see Iran, with its Shiite rulers, as their principal regional rival. Both are leery of the populist Islamic movements unleashed by the Arab Spring. Both sided with the Egyptian military in its coup against the elected Muslim Brotherhood government, and both are pleased to see Syrian President Bashar al-Assad facing a possible military assault from the United States.
http://www.middleeastmonitor.com/news/middle-east/7478-arab-secrets-saudi-princes-qupsetq-over-kingdoms-support-for-egypt-coup
Government leaks suggest that the massacres of protesters in Rabaa Al-Adawiyya and Al-Nahda Squares by security forces were carried out under the direct orders and supervision of Bandar bin Sultan.
http://www.internationalboulevard.com/arab-world/110-egypt/286-on-the-run-with-the-muslim-brothers
"Many of them are charged with possession of illegal weapons or for murder, which was not the case for the Tahrir protestors."
"Do you know what the most surprising thing is?" he asks. "The indictments accuse them of not only shooting at security forces, but also of accidentally shooting each other."
최재훈은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걸까. 이집트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꽤 복잡하고 어려운 방정식 같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접하는 방정식은 아니다. 오늘날까지의 세계 역사에서 자유와 인간존엄을 향해 솟구쳐 나온 민중의 혁명 의지가 반혁명 세력의 반발과 폭력, 술수에 막혀 좌절되거나 심각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경우를 적잖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 어쩌면 현재의 이집트 위기는 독재와 탄압, 외세의 지배, 부패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 민주주의와 정의를 찾아가는 민중이라면 거의 필연적으로 풀어야하는 난제의 전형일 수 있다."
그러면서 첫번째 상수는
"독선과 무능으로 가득 찼던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 1년"
아무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참세상같은 삼류 찌라시 언론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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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집트 신문 엘 와탄이 7월 5일 보도한 모르시와 시시의 마지막 대화다. 이 대화는 "독선과 무능으로 가득 찼던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 1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http://www.raymondibrahim.com/from-the-arab-world/exposed-final-conversation-between-morsi-and-sisi/
Morsi: Okay, but take care—I’m the one who hired you as minister and can remove you.
Sisi: I became minister of defense due to the military’s will and not yours—and you know this very well. ..
물론 정은희가 이런 사실을 알 리는 없다. 정은희는 근본적으로 이집트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희망사항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꾸준히 알리고 있는 중이다. 참세상은 정은희의 독선과 무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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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희는 최근의 이집트 보도에서도 이집트에 존재하지도 않는 "혁명가들"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다.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집트를 위해서?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정은희는 사실을 알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정은희는 말한다.
"이집트 언론들은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만수르 임시 대통령이 최근 새 제헌의회를 임명했을 때 국영신문 <알아흐람>은 '4월 6일 청년운동'이 많은 이들이 비판했던 제헌의회를 균형잡힌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청년운동 측은 “이 뉴스가 완전히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타츠>는 제헌의회에는 청년을 위한 공식 지분이 있지만 4월 6일 청년운동 활동가는 배제되었으며, 무르시 축출을 위해 성공적으로 시위한 뒤 조건없이 군부 뒤에 선 타마로드 운동은 2명을 진출시켰다고 전했다.
이 언론에서 4월 6일 청년운동의 한 회원은 “정권은 1월 25일 혁명가 모두를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쿠데타 정부에 청년이 참여하는게 왜 중요한지 묻고 싶다. 게다가 대다수 이집트인들을 - 그들이 비록 모르시를 싫어하고 그의 퇴진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 대표하지 않는,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타마로드와 4월 6일 운동에 대해서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보도하는걸까? 많은 외신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http://www.globalresearch.ca/us-bankrolled-anti-morsi-activists-us-money-trail-to-egyptian-groups-that-pressed-for-presidents-removal/5342377
이 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모르시 반대파들에게 자금을 대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걸까. 오히려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언론의 책임 아닐까? 게다가 어쩌면 모르시에게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을 이집트 빈민들은 4월 6일 운동이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이 타마로드가 누군지 잘 모른다. 타마로드는 신생조직이니까 그렇다치고 구국전선은 유명한 정치인들의 모임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엘바라데이는 모르시가 인기가 없었을 때 실시했던 조사에서 모르시보다 더 인기가 없었다. 이집트인들을 대표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혁명가들? 혁명이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혁명을 일으킨 민중은 모르고 있는 혁명가들도 있나? 그들을 혁명가라고 하느니 시시가 혁명가라고 하는게 차라리 더 낫겠다. 혁명은 고사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집트인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이집트 인구의 거의 절반이 빈곤선 아래나 그 수준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의 불만의 핵심은 이슬람화 정책이다. 그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독재를 비난한다. 이집트에서 세속주의 세력은 지금 이대로는 어떤 경우에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집권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세속주의자들이 독재를 했다면, 아마 그것은 반혁명(이슬람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실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http://www.financialsense.com/contributors/william-engdahl/egypt-revolution-creative-destruction-for-a-greater-middle-east
정은희는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관심도 없다.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없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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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재훈은 이집트 위기는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도 아니고 독재 vs 민주주의(터키)도 아니고 그보다 더 어려운 방정식인 쿠데타냐 또다른 혁명이냐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한심한 인간들아.. 2011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알아낸게 고작 그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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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희는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라바 학살을 진정성을 가지고 다루지 않았다. 나 역시 끔찍한 사진이나 영상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사람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려고 했다. 난 어쩔 수 없이 그 사진을 봤다. 그래서 나도 당신들이 라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길 바란다.http://youtu.be/ANKHE7thpF4
참세상은 계속해서 정은희를 끌어안을 것이다. 아마 양심있는 기자를 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제식구 감싸기"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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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 미국은 이집트에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2013년 2월 13일, 수요일
http://www.socialistaction.net/International/Middle-East/Egypt/Israel-Saudi-Arabia-and-US-preparing-a-coup-in-Egypt.html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은 2011년 이집트에서 자신들이 보호하는 무바라크 정권의 전복을 결코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집트가 아랍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일 뿐만 아니라, 시온주의 국가와의 군사적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관심사가 자신의 생존인 사우디 아라비아 독재정권은 아랍 세계의 그 어떤 동요에도 겁을 집어먹으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신을 지지해줄,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기둥으로 여긴다.
온건한 무슬림 형제단이 지배하는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을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미국, 이스라엘, 또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용인할 수 있는 정권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후견 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단호하게 이집트에서, 과거의 독재자를 복구시키지 않은 채, 무바라크 정권을 복구시키려 한다.
이것이 바로 주요 도시들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여 6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게 된, 이집트의 최근 난동의 배경이다. 폭동이 전국적으로 번져서, 카이로의 대통령궁이 화염병 공격을 당했으며, 포트 사이드에서는 교도소, 경찰서, 법원 청사가 총기 공격을 당했다.
여전히 무바라크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 보안군이 이 수많은 폭력적 공격에서 뒷짐을 진채 물러서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무장 시위자들은 난동을 부리면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이 명백히 노리는 것은 국가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개입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주장을 이용하여 군대와 보안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이제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있다. 지지난 주 군대는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군대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국방장관이기도 한 압델 파타 엘 시시는 질서를 회복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정치 갈등이 국가를 붕괴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모르시 대통령은 군대에게 세 주의 통제권을 넘겼다. 포트 사이드, 이스마일리아, 수에즈는 현재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군대와 그 밖의 다른 무바라크 세력은 자신들에 대한 반대와 그에 상응하여 모르시와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지지가 아직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다. 따라서 무바라크 세력의 전략적 목표는 혼란을 가중시켜서 쿠데타를 위해 더 유리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집트 경제 위기의 전개
이러한 사태의 배경은 이집트에서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경제 상황과 재정 위기 봉착이다. 이집트는 현재 기본 생필품을 수입하는데 필요한 외환 보유액이 바닥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외환 보유액은 연료와 식량을 수입하기에는 3개월도 못 버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제 상황은 전반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2008년 7.2%에서 2012년 1.5%로 떨어졌다. 지난 해 하반기에 산업 생산량과 고용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 결과 이집트 통화(이집트 파운드) 가치는 급속히 떨어지고 있으며, 금년 들어 벌써 거의 10%나 떨어졌다.
이집트 정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당한 자금 유입이 필요하다. 최근 카타르(25억 달러)와 터키(20억 달러)의 대출이 위기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지난 주에는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여신한도(credit line)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지원할 수 있는 자금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자들은 의도적으로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이집트 상황을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미국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 수입으로 엄청난 자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해 정부는 1,020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남겼다. 그 일부만 투입해도 이집트 위기는 중단될 수 있지만, 사우디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IMF 융자 패키지의 일부인 미국의 지원 역시 현재 보류중이다. IMF는 48억 달러를 대출하기로 이미 합의했고 9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돈을 풀지 않고 있다.
이 대출은 이집트가 매우 필요로 하는 자금을 선불해주기로 되어 있지만, 그것에 딸린 가혹한 조건들은 이집트인들에게 더 혹독한 시련을 부과할 것이다. 세금을 인상하고 보조금을 감소할 긴축정책은 금년 말에야 비로소 시작할 예정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집트 정권을 예전으로 돌려놓길 원하는 자들은 이집트에 필요한 자금을 보류함으로써 그 정부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목적은 명확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온건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이집트에서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은 지역에서 미국-이스라엘-사우디축의 힘을 약화시켰다.
모르시 대통령이 이스라엘-이집트 조약의 기본원칙을 뒤집을 의도가 없지만, 그는 최근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격하려는 것을 억제했고 하마스가 더 강해질 수 있게 도왔다.
모르시와 중국의 대화, 이란과의 화해, 이 둘 모두 무바라크의 순수한 후견주의와는 다르며, 제국주의나 이스라엘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지역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진군은 걸프 국가들의 저항운동을 강화시켰으며, 사우디 왕정은 반전을 원한다.
무슬림 형제단 정부
작년 여름 모르시 대통령이 무바라크 정권의 후보를 가볍게 이기자, 무슬림 형제단이 급진적 반제국주의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제국주의로서는 당연하게 무슬림 형제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강요된 전술적 변동이다. 이집트에 대한 제국주의의 전략적 기조는 순수한 후견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모르시는 무바라크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민중의 상당한 지지에 기대어 왔다. 그의 헌법 개정안은 투표 결과 63.8%의 ‘찬성’과 36.2%의 ‘반대’로 승인되었다. 지금 당장 쿠데타를 일으키기에는 이 표차는 너무 크다.
따라서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더 유리한 조건들을 준비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촉진시킬 필요가 생긴다.
물론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 무슬림 형제단 역시 경제 혼란이 심화되게 했다. 제국주의나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재정 지원 없이, 경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자본가들의 이익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할 조치를 요구한다. 형제단 자신이 이집트 자본의 여러 부문과 동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치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불만은 계속 번지고 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시위는 고조되고 있으며, 시위는 지난 해 여름 파업의 물결을 뒤따른 것이다. 생활수준이 계속해서 하락하게 되면 이러한 불만은 심화될 것이다.
이집트 ‘세속주의’의 현실
지난 해 11월 모르시 대통령이 헌법개정 투표에 따라 자신을 무바라크주의자들인 사법부 판단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령을 반포했을 때, 친제국주의 세력은 이 쟁점에 관한 정치적 혼돈을 활용하여 이집트의 일부 좌파세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도 아래 끌어들였다.
무바라크 시절에 장관을 지낸 암르 무사와 친서방 자유주의 모하메드 엘 바라데이는 ‘세속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좌파’ 민족주의자 함딘 사바히를 모르시에 반대하는 ‘구국전선’에 끌어 들였다. 그들은 모르시가 헌법령을 철회하게 했으며, 모르시의 권력 이양을 요구하는 시위들을 조직했다.
무바라크주의자들은 현재로서는 모르시로부터 권력을 인수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은 오직 군대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이것을 부분적 승리로 간주했다. 이 부분적 승리 역시 그 뒤 국민투표 결과 자체에 의해 무효가 되었지만.
무바라크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목적을 감쪽같이 감추기 위해 이집트 좌파 부문들을 이용하고 있다. 1차 대선에서 3위를 차지한 ‘좌파’ 민족주의자 사바히는 지난 해 6월 대선 결선에서 모르시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과 무바라크의 전 총리 아흐메드 샤피크 사이의 선택은 ‘국가의 미명아래 압제’와 ‘종교의 미명아래 압제’ 사이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무바라크주의가 확고하게 샤피크를 지지하고 있는, 이집트의 사회세력의 진정한 배열(alignment)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구국전선의 전략은 무질서를 창출해서 쿠데타를 위한 조건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구국전선의 조정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지난 주 이런 트윗을 남겼다. ‘담벼락에 “모르시 일당이 민중의 요구를 들을 때까지 폭력과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쓰자’. 이러한 요청은 동맹 내부에서 무바라크에 충성하는 자들과 보안군에게 군대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해야만 하는 사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렇게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미국은 의심의 여지없이 객관적으로도 무바라크주의자들과 협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지도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이집트의 피보호자들(clients)에게는 여전히 가공할 장애가 있다.
혁명의 기억과, 비겁하고 불쾌한 무바라크 독재정권에 대한 기억은 아직 생생하며, 투표 결과는 무바라크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여전히 상당한 다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좌파의 최고 과제는 이 전략이 성공의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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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이스라엘 수퍼파워2013년 8월 29일
http://consortiumnews.com/2013/08/29/the-saudi-israeli-superpower/
[독점] 이집트의 반혁명과 시리아 내전은 새로운 초강대국들의 동맹의 도래를 예고할 수도 있다.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스라엘과 엄청난 금융재산을 가진 사우디 아라비아의 예상을 뒤엎는 동맹은 중동 전 지역에서 함께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고 로버트 페리는 전한다.
로버트 페리
시리아와 이집트의 쌍둥이 위기는 중동에서 새로운 초강대국 동맹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동맹을 위해 요르단은 중개인 역할을, 페르시아만 석유국들(oil sheikdoms)은 조연을 맡고 있다.
이 새로운 동맹이 갖고 있는 잠재적 효과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스라엘은 비범한 프로파간다 기술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치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향력을 동맹에 기여하며, 사우디 아라비아는 막대한 석유달러 비축을 이용하여 지구적 금융네트워크를 착취할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함께 시리아와 이집트의 충돌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는 역사적 차이가 있지만 - 하나는 유대교 종교국가이고 또 하나는 수니 이슬람의 극우적 변형인 와하비를 수용하고 있다 - 두 나라는 보다 최근에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이란과 이란의 시아파 지배자들을 자신들의 주요한 지역적 경쟁자로 보고 있다. 둘 다 아랍의 봄으로 고삐가 풀린 민중적(populist) 이슬람 운동을 경계하고 있다. 둘 다 선출된 무슬림 형제단 정부에 대한 쿠데타에서 이집트 군대를 지지하며, 둘 다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미국으로부터 군사공격에 직면해 있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다.
두 나라는 중동 전역에서 정신없이 진행되고 있는 혼란을 틈타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 종파분열과 정치폭력이 자신들의 장기적 이해관계에 부정적 결과를 되돌려 줄 가능성을 초래하면서 - 최소한 그들이 단기적 이익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근 몇 개월간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민중을 대변하는(populist) 무슬림 형제단의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의 타도 덕분에 자신의 전략적 위치가 향상되는 것을 보았다. 이 정치적 변화는 더 나아가 가자에서 하마스가 지도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고립시켰다. 한편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의 시아파 운동은 궁지에 몰린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에 대원들을 파견한 뒤 계속해서 증가하는 군사적, 정치적 압력하에 놓여 있다.
아사드는 시아 이슬람의 분파인 알라위이며,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군을 격퇴한 뒤부터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였던 정치-군사 운동인 헤즈볼라를 오랫동안 후원해왔다. 수니파가 아사드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이면서, 시리아 내전의 종파적 성격이 증가하는 것은 또한 수니 운동인 하마스와, 하마스의 핵심 후원자인 시리아 정부와 그 동맹국인 이란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는데 기여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쿠데타와 더 나아가 쿠데타가 가자 봉쇄를 재부과함으로써 하마스를 약화시키는 효과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를 산산조각내고 있는 수니-시아 분열에 의해서도 이득을 챙기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이 재개하면 서안 지구에서 이미 약화된 팔레스타인 당국에게 정치적 해결책을 지시할 수 있는 더 많은 재량권을 갖고 있다.
네오콘이 미친 척 하는 이유(A Method to Neocon Madness)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우위를 점하게 하는 것은 미국 네오콘들의 오랜 목표였다. 비록 그들이 역사의 정확한 방향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팔레스타인과 땅과 평화를 교환하도록 이스라엘을 재촉했던 협상(옮긴이: 1993년 오슬로 협정을 말함)은 네오콘을 좌절시켰고, 2003년에 이라크에서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생각은 바로 이 협상과 “깨끗이 단절”하기 위한 네오콘 전략의 일부였다.
협상을 내던지고 대결을 하겠다는 계획은 1996년 보고서 ‘깨끗한 단절: 영역 확보를 위한 새로운 전략(A Clean Break: A New Strategy for Securing the Realm)’에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베냐민 네타냐후의 총리 선거운동을 위해 리차드 펄과 더글러스 파이스 같은 저명 네오콘들이 작성했다.
보고서에서 네오콘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은 터키, 요르단과 협력해서 시리아를 약화, 억제, 심지어 축소함으로써 자신의 전략적 환경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시리아의 지역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정당한 전략적 목표인,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에 주력할 수 있다.”
“Israel can shape its strategic environment, in cooperation with Turkey and Jordan by weakening, containing, and even rolling back Syria. This effort can focus on removing Saddam Hussein from power in Iraq – an important Israeli strategic objective in its own right — as a means of foiling Syria’s regional ambitions.”
네오콘들은 1990년대 말에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라크를 침략하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나, 2001년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9/11 공격이 미국인들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붙이자 그들의 희망은 꽃피었다.
그러나 네오콘들은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미국의 꼭두각시를 새로운 지도자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자신들만의 프로파간다를 믿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결과 그들의 믿음은 이라크가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고 시리아와 이란에서 “정권교체”를 촉진하기 위해 미국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도록 하게 했을 것이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을 때려눕히기 위해 와인드업을 하고 있는 동안, 네오콘들은 이라크를 정복한 다음에는 어디를 칠지에 관해서 늘 하던 농담을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다. 다음엔 시리아일까, 이란일까, 다마스커스 아니면 테헤란? 감동적인 부분은 “진짜 사나이면 테헤란이지!”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계획한 대로 정확히 풀리지 않았다. 물론 부시는 후세인을 권좌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했으며, 그가 교수대를 행해 걸어간 뒤, 바닥의 문 아래로 몸이 떨어져서, 목을 매달고 죽은 것을 즐겁게 봤다. 그러나 미국의 점령은 새롭게 권력을 얻은 다수 시아파가 소수인 후세인의 수니파를 억압하면서 종파간 살육의 발단이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최종결과는 이라크를 수니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시아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물론 종파간의 폭탄공격이 거의 매일같이 벌어지는 곳으로 변형시킨 점도 있지만.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주요한 수혜자 중 하나는 시아 신정 정부를 둔 이란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이란은 숙적인 수니파 사담 후세인을 새로운 시아파 동맹으로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미국 덕분이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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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확산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이라크 전쟁은 전 지역에서 종파 갈등을 악화시켰다. 1990년대 이란과의 전쟁에서 후세인을 지지했던 사우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만 석유국들은 이란이 이제 이라크와 시리아를 지나 레바논의 시아파 고립지(enclave)로 이어지는 “시아 초승달” 세력권을 갖게 된 것을 보고 경악했다.
사우디 왕정은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민중 봉기에 의해서도 충격을 받았다. 사우디의 오랜 동맹인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축출되었고, 민중적(populist) 무슬림 형제단이 지도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 교체되었다.
무슬림 형제단 역시 수니파이긴 하지만, 이 운동은 이슬람과 민주주의의 혼합을 대표하며, 따라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와 특권을 누리면서 방자하게 살고 있는 사우디 왕자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 때문에 페르시아만 석유 셰이크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고, 심지어 바레인에서 시아파가 주도하는 민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사우디는 군사개입까지 했지만, 정치적 격변은 전 주미대사이며 현 사우디 정보국장인 반다르 빈 술탄 왕자와 같은, 사우디의 지정학적 전략가들에게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시리아에서 반군과 전투원들을 지원함으로써, 사우디와 그 나머지 석유 셰이크들은 이란의 지정학적 이득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또한 이집트 장군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투입함으로써, 페르시아만 왕정주의자들은 미국으로부터의 그 어떤 제재 압력에도 대항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는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요르단 왕정이 중매를 하고 부추긴 덕분에, 관계가 성사되었다.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강력한 안보관계를 맺고 있고 페르시아만 왕정들의 후한 인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을 뒤엎는 커플을 위한 뚜쟁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정보통에 따르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사우디 사이의 쌍무계약을 위한 주요 장소였고, 이 막후 동맹은 이집트 쿠데타에 대한 합동지원과 함께 마침내 모습을 공개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집트의 새로운 군사정권에 대한 자금을 마련했다면, 이스라엘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쿠데타에게 쿠데타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하도록 워싱턴에 강력한 로비단을 파견했고,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의 군사원조는 차단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수퍼파워
자, 이제 새로운 최강의 콤비가 시리아에서 한 팀이 되었다. 지금까지 시리아는 아사드 정부에 불안정과 가능하면 전복까지 노리고 있는 사우디와 다른 페르시아만 국가들이 반군에게 자금을 대왔던 반면, 이스라엘은 아사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그리고 프로파간다 자산을 배치해 왔다.
사우디와 이스라엘 둘 다 아사드 정권이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거나 또는 종말을 맞이하면 수혜를 입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시리아의 정권 교체는 자신의 주요한 경쟁자인 이란에 대한 전략적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란이 약해져서 고립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헤즈볼라를 아프게 하고 더 나아가 지원의 중요한 공급원인 이란과 시리아로부터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킨다면 추가적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포자기한 팔레스타인이 어떤 “평화” 조건이든 이스라엘이 부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네오콘의 전망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과 서방에게 잠재적으로 불리한 점도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만 국가들이 알카에다와 연계된 그룹들을 포함하여, 현재 시리아에서 싸우고 있는 가장 근본적(radical) 이슬람주의자들 중 일부를 무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시리아 내전의 결과 중 하나는 이슬람 테러리즘에게 새로운 안식처를 중동 한복판에 마련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에 사우디 아라비아는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지하디스트들을 위한 주요 자금줄이었고, 그들은 소비에트와 싸우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지만 그들의 증오와 자살 전술은 결국 미국을 향했다.
또 사우디-이스라엘 동맹의 출현은 지구적 지정학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놀라운 금융, 경제적 영향력과 이스라엘의. 특히 미국 내에서, 정치와 프로파간다를 배후조종하는, (사우디와) 똑같이 놀라운 능력의 조합은 새로운 초강대국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미국을 시리아 내전에 끌어들인다면, 그것의 도래는 예고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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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9월 9일자 르몽드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한 글을 다시 제가 옮긴 겁니다.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닌데다가, 제 영어실력도 좋지 않기 때문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필자인 플로랑스 오브나스는 국내에도 출간된 "위스트르앙 부두 - 우리 시대‘투명인간’에 대한 180일간의 르포르타주"와 "뉴스 공장- 기자와 뉴스 이데올로기"의 저자입니다.원문과 번역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제목인 Egypte : les Frères en cavale는 "이집트: 도망중인 형제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http://www.lemonde.fr/a-la-une/article/2013/09/09/les-freres-en-cavale_3473172_3208.html?xtmc=les_freres_musulmans_en_cavale&xtcr=1
http://www.internationalboulevard.com/arab-world/110-egypt/286-on-the-run-with-the-muslim-brothers
무슬림 형제들과 도주하며
카이로에서 무슬림 형제들과 지하에서의 삶. 시청자들이 전화로 이웃을 ‘테러리스트’라고 고발하는 텔레비전 프로. 날이 새기 전에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 지도자를 잃은 시위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 프랑스에서 가장 훌륭한 특집 기자 중 한 명인 플로랑스 오브나스가 쿠데타 이후의 카이로의 현장을 취재했다.
집권 1년 동안,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들은 어찌된 일인지 이것을 전혀 상상도 하지 않거나 대비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와 평화적 시위자들에 대한 군대의 학살, 대량 체포, 목이 잘린 조직, 이 악몽의 시나리오를. 일부는 의아해한다. 군대가 우리 평화적 활동가들을 절망과 테러리즘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게 아닌가?
텔레비전에서 방송이 막 시작했다. 이집트의 신설 민영 방송국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토크 쇼 중의 하나다. 시청자들은 ‘테러리스트들’을 고발하기 위해 생방송 중에 전화를 걸 수 있다. 텔레비전 앞에 앉은 야세르는 진행자가 ‘나라의 이미지에 극도로 위험한’ 누군가를 반복해서 공격하는 것을 듣는다. 진행자는 그 이름이 시청자들의 머리에 깊숙이 박힐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러다 갑자기 소파에 앉아 있던 야세르는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그 ‘테러리스트’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다. 40세, 두 아이의 아버지, 이집트 무슬림 형제들의 정당인 자유정의당 컨퍼런스 센터에서 급여를 받는 직장인, 야세르인 바로 자신.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사람은 야세르의 부인이었다. “도망가야 돼요” 그녀가 남편에게 말한다. 그는 망설인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가 말한다.
모하메드 모르시의 대통령 당선과 이슬람주의 정부에 대한 가망에 고무된 야세르와 그의 아내는 1년 전 두바이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등진 채 카이로에 돌아왔다. 이제 군대는 모르시를 난폭하게 권력에서 몰아냈다. 군 병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했던 초기 단계가 지나자, 모르시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은 최근 몇 주 동안 사법부에게 돌아갔다. 한 변호사협회가 수도에서(옮긴이: 원문에는 in the capitol이라고 되어 있다) 15개 경찰서와 4개 교도소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최소한 1,700 명이 체포되었다.
소파에 앉은 야세르는 경찰이 정말 자신을 체포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왜?” 그는 묻는다. “경찰은 주요 인물만 뒤쫓아 다녀.” 그의 아내의 대답. “당신 동료들은 벌써 도망갔어요, 그렇지 않아요?” 요즘 그들은 수없이 많다. 전 장관에서부터 변변찮은 형제들까지, 갑자기 그들 모두 수백 명씩 지하 생활에 내던져졌다. 최악의 사태가 아직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폭동과 슬픔의 올 여름을 보내고 나서, 카이로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 검문소는 전보다 줄었고, 호텔들은 현란한 ‘special curfew evenings’(옮긴이: 통행금지 시간 내내 행사를 하는 것을 말함)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분위기는 여전히 매우 긴장되어 있고, 사람들의 휴대폰에 스쳐 지나가는 뉴스 업데이트는 정시를 알린다. 축출된 대통령 모하메드 모르시는 ‘살인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지만, 날짜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에즈 군사법원에서 열린 친모르시 시위자들에 대한 1차 공판이 막 끝났다. 한 사건에서, 가석방 없이 10년 또는 15년부터 종신형에 이르는, 숨이 멎도록 무거운 형벌.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특별한 적개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변호사, 암르 하산이 말한다. 나이가 열 살이나 어려보이는, 29세의 하산은 우리가 예상하는 이슬람주의 동조자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2011년 그는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투쟁기간에 타흐리르 광장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위해 ‘청년 혁명가를 방어하기 위한 모임(Collective for the Defense of Revolutionary Youth)’을 설립했다. 이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지난 여름 연좌농성에서 체포된, 한 트럭분의 친모르시 시위자들의 가족들이다. 최소한 법적 수준에서는, 하산에게 이 투쟁은 2011년의 투쟁만큼 어렵다. 실제로는 더 어렵다. “그들 중 다수가 불법무기 소지나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타흐리르 시위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까요?” 그가 묻는다. “기소장에 따르면 그들이 보안군에게 총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실수로 서로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겁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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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집트 판사협회(Nadi al Quda) 부회장 압달라 파트히는 “지금까지 모든 법적 절차는 타당하다. 무력 사용에 있어서 일부 과도한 측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 국민은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확언한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집트 판사들의 공식노조인 판사협회 본부였던 격조 높은 건물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이 사건을 담당한 새로운 판사들은 원래 자유정의당과 심지어 무슬림 형제들까지 법적으로 금지할 계획이었다. 결국 그들은 정치적 고발이 아니라 형사고발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테러리즘과의 투쟁이라는 상황 속에 들어와 있다.”/ 이집트 판사협회는 번역문에 Egyptian Judges' Club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체는 193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단체이며, 9천 명이 넘는 회원과 이집트 판사 중 90%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2년 11월 25일 <러시아의 소리> 보도에 따르면 이 협회는 모르시의 새 헌법 선언문에 대항해 시민들에게 전국적인 파업을 촉구하면서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http://korean.ruvr.ru/2012_11_25/95800801/
협회 동료가 문을 열면서, 대화에 끼어든다. 그는 파트히가 새로 임명된 검사인 자기 아들의 경력에 도움을 주길 원한다. 파트히는 그가 내민 서류를 보지도 않고 서명하면서, 대화를 계속한다. “판사들은 모두 현 전략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5만 명의 판사들 중에서) 모르시가 집권했을 때 모르시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던 150명의 판사를 제외한 모든 판사들이다. 모르시의 몰락 후, 그들의 판사 자격은 취소되었고, 자격정지 심사는 계류된 상태다. 십여 명은 도망중이다.
며칠 전 아마도 새벽 5시쯤이었을 것이다. 야세르와 그의 아내는 경찰차가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웃을 일러바친 사람들이 집을 가리키면서 경찰을 호위했다. 잠에서 깬 온 동네 사람들은 검은 마스크를 한 남자들이 그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마치 “잘 봐, 곧 너희들도 이렇게 될 테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야세르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대책이 없었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카이로의 거리에서 매주 금요일 기도가 끝나면, 모르시의 축출에 항의하기 위해 그의 지지자들은 힘을 모으려 한다. 주마다 만 명에서 4만 명의 사람들이 완전히 봉쇄된 도시에서 행진을 하러 나온다. 지난 여름 초 폭발적 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런 경찰국가 분위기에서 시위 군중 내부의 분위기 역시 달라졌다. 외신 기자들은 현재 환영을 받고 있다. 참석한 여자들에겐 무조건 손부터 잡는다.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비록 그들이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왔더라도.
노출을 꺼리는 바시르가 모험을 한 것은 바로 여기, 뚜렷하게 눈에 띄는 군중 한 가운데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예의바르지만, 약간 빈정거리는 태도다. 약사이며 이슬람주의 정치운동의 오랜 활동가인 그는 7월부터 쿠데타에 반대하는 청년들(Youth Against the Coup)의 대표를 맡고 있다. 미행당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는 2주째 집에 가지 않고 있다. “무슬림 형제들은 역사의 대부분을 지하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곤경에 대비한 전략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다. “이것은 형제들의 나약함을 보여주며, 이 재난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이 초래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이 중에서 2백 명은 저처럼 지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숨 막히는 군중의 열기로 가득한 오늘, 인터뷰 약속은 하나씩 따낸다. 정보는 급속히 유포된다. 반쿠데타 운동 홍보국장이 체포되었다. 다음은 조직국장(head of ground mobilization) 차례다. 형제들이 집권했던 1년 동안 임명되었던 정부 각 부처 직원들은 모르시의 보좌관들이 체포된 뒤 일제히 떠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조직은 해산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래도 페이스북은 있네요” 또 한 명이 말했다.
군 헬기 한 대가 시위군중 머리 위로 지나간다.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힘을 인정하는 징표라는 듯이,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듯이, 군중 사이에서 박수가 터진다. “군대는 사악한 짓을 하길 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바시르가 말한다. “형제들 세대 전체가 은퇴할 때가 되었습니다. 청년들이 형제들을 인수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겁니다” 그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만약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어쩔거냐구요? 거기까지 제가 갈 수 있다면, 전 그 대가도 치르겠습니다.”
전 정부에 속했던 사람들 중에서, 청년부 장관과 같은 일부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는 우연히 자신들이 수배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일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제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말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혼란이 공포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체포된 이슬람주의자들의 변호에 참여한 또 다른 변호사가 설명한다. “총리나 형제들의 최고지도자처럼, 서열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빼고는, 새 정권은 눈에 띄는 대로 아무에게나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중요한 인물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특히 선호하는지도 모릅니다.”
변호사 모임의 젊은 암르 하산과는 달리, 이 변호사는 자신이 이슬람주의 운동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터놓고 인정한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처럼, 그는 도망자들이 폭력을 향해 진로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몇몇 고립된 경우는 제외합니다” 그는 말한다.
하지만 도시에 숨어 있는 동안 그들 모두는 무엇을 할까? 그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정말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질문을 한다. “만약에 군대가 이 모든 작전을 수행하는 이유가 단지 우리에게 무기를 들게 해서 테러리스트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뭉치를 가지고 돌아온다. “이걸 읽어봐요!” 그는 패배자의 말투였고, 치명적인 운동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들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눈썹만큼이나 멋진, 짧은 콧수염 아래로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카이로의 끝없이 혼잡한 교통소음만이 파도처럼 사무실 창문을 때리고 있다. “저도 이걸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말한다. “그들은 절 체포하러 올 겁니다.” 서류들은 모르시 정권 때 무바라크와 그의 파벌을 상대로 실시한 세관 조사였다.
카이로 거리에는 새로운 실력자 알 시시 장군의 초상화가 모든 상점에 걸려 있다. 결국, 야세르는 마지막 순간에 도망을 쳤다. 그는 나일 강변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그의 티셔츠는 두려움 때문에 쪼그라든 몸에는 헐겁다. 그는 사방을 응시하며,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다. “모든 게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정부를 되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의 전화가 울린다. 어머니다. 즉시 그는 거짓말을 한다. “친구들과 안전하게 있어. 우릴 위해서 기도해 줘.” 우리 주변의 휴대폰들에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다. 내부무 앞에서 차량이 폭발했다.
Florence Aubenas
09 Sep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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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실의 풍경. 이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 기자들은 정말 마음놓고 웃는다. 그가 모아놓은 무서운 장면들 위에 마이클 무어의 보이스 오버는 배꼽을 잡게 만드는 유머를 줄창 섞어놓기 때문이다. 그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의 난징 학살사건 기록필름에서조차 그러했다. 그러나 뒤이어 프랑스, 라는 자막과 함께 알제리에서의 학살이 보여지는 순간 시사실은 멈칫 했다. 나는 알제리 학살의 기록필름은 처음 보았는데 그건 마치 광주 같았다. 저 잔인한 학살의 역사.-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씨네 21 2002-05-31
http://youtu.be/Ad8pGPxA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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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앞 등불", 멕시코 여교사들이 노동권을 지킨다출처: 여성권개발협회(Association for Women's Rights in Development)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http://www.trust.org/item/20130927181240-3ejng/
유치원 교사 96% 이상, 초등학교 교사 66%, 중고등학교 교사 51%를 대표하지만, 교육개혁 논쟁에서 배제된 여교사들은 자신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특히 농촌과 원주민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칠 새로운 법과 싸우고 있다.
By Katherine Ronderos
파업에 들어간 교사들은 주로 베라크루스, 마초아깐, 오아하까, 게레로, 치아파스주의 여교사들인 반면,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주들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교사들이 멕시코 시티에 와서 9월 3주 동안 이 도시의 중심인 소칼로에서 주둔했다. 정부가 특히 교사들의 경력과 관련된 부분의 교육법(Education Act)을 개정할 의도로, “부수적인(secondary)" 법들을 통과시키자, 교사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교사들은 정부가 교육 개혁을 완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멕시코교사노조인 전국교육노동자조정위원회(Coordinadora Nacional de Trabajadores de la Educación, CNTE) 22지부 소속 오아하까 여교사들은 자신들의 아이들, 공동체, 가족을 남겨두고 멕시코 시티에서 자신들의 노동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계속해서 주변적 존재로 남겨두려는 불의와 단호하게 싸울 계획이다.
정치적 배경
2012년과 2013년의 멕시코 교육개혁은 멕시코를 위한 협약(Pacto por México)에서 합의한 것을 이행한다는 틀 내에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이다. 이 협약의 주된 목적은 정치적 차이를 초월하여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빈곤과 사회 불평등을 낮추는데 필요한 개혁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2012년 12월 교육 개정안은 상하 양원에서 통과되었다. 2013년 2월 연방의회는 개정안이 헌법에 포함된다고 선언했고, 행정부는 법을 제정했고, 공식연방저널이 발표했다. 2013년 9월 10일 세 개 법이 제정되었다. 일반교육법, 국가교육평가기관법, 그리고 직업적 교육서비스법.
개혁의 목적은 교육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직업진출, 승진, 직장에서 고용연장을 결정할 평가제를 부과하는 것이다. 멕시코 학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4개 국 중 그 어느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더 높으며 결과는 더 낮고, 따라서 평가는 OECD 기준에 근거한다.
교육기관의 경영구조 또한 개혁되고 있다. 노조는 이 개혁을 특별히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교육기관 운영에 자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멕시코 주는 배제되기 때문이다. 대신 구내식당 운영, 기반시설 유지, 물과 전기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교육기관과 학부모에게 맡겨진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학업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시험에 합격해서 능력을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지만, 정부는 교사들의 시험 준비를 위한 적절한 훈련, 교육적 지원, 자금이나 시설 지원을 하는데 실패해 왔으며, 특히 가난한 지역에서 그러했다.
헌법에 추가된 평가제는 시위의 핵심을 차지한다. 교사들이 평가를 거부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사르비아 아날리 발베르데는 주장한다. 그녀는 오아하까주 믹스텍족 지역의 작은 공동체 유치원 교사다. “우리는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 따른, 우리 현실에 따른 평가를 원하는 것이지, 표준화된 절차에 의한 평가는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부가 도입하려는 정책들이 현실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역시 오아하까 교사인 마리아 산티아고는 공동체 원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사포텍이나 믹스텍 언어고 스페인어는 그들의 제2 언어인데 영어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냐고 반문한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에스코바 교수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인터넷을 사용한 수업을 하느냐면서 새 법을 비난한다.
교사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향상시키고 싶어 하지만, 자신들이 일하고 있는 가난한 농촌 지역에서 자신들의 선택권은 제한되어 있다고, 발베르데와 같은 교사들은 설명한다. “우리는 훈련을 더 받고 싶지만, 우리는 대중교통이 없는 외딴 공동체에서 살고 있고, 주말에만 겨우 공부하러 도시에 갈 수 있다”면서 “우리 교육제도의 후진성에 대해 교사들은 책임이 없다. 제도의 후진성은 구조적 문제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에 투자해야 할 돈이 다른 곳에 지불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발베르데는 강조한다.
시위 여교사들에 관한 진실
농촌과 원주민 지역에서 일하는 여교사들 대다수는 한 달에 고작 미화 6백 달러나 그보다 적게 번다. 그들은 생필품 부족 속에서 배고픈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 건물의 비참한 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학교는 심지어 교실, 화장실, 제대로 된 지붕, 수도, 전기와 같은 가장 기본적 시설조차 갖추지 못했다. “우리 교사들은 우리의 학생들, 그 애들의 어머니, 아버지들과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우리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곤궁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격앙되어 있다”고 오아하까주의 한 젊은 교사는 말한다.
교사들은, 대부분 자비로, 학생들의 연필이나 공책 같은 학용품을 충당할 수밖에 없다. 비록 공동체에는 영어, 스포츠, 미술, 컴퓨터 같은 특별활동을 위한 교사들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들이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춤, 체육, 원예와 같은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노동조건은 제대로 된 충분한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멀고,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으며, 임신을 할 경우 실업의 위협에 놓이고, 자신의 집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힘들고 지친다.
과거에 여교사들이 시위에서 맡았던 역할은 동료를 위해 요리를 하고 행진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행진을 지휘하는 진정한 활동가들이 되었고,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체를 동원하고, 운동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다수다. 우리의 참여는 중대하다. 전에 우리는 요리를 하곤 했지만, 이제 우리는 이 동원에서 모든 다양한 국면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와 무력감을 전달하기 위해 마이크를 움켜쥔다” CNTE 실무단 소속 베아트리스 피카소 페레스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교육운동 내부에서 여교사들의 승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성별로 인해 차별을 겪고 있다. 그들은 직업승진에서 남자들과 같은 기회를 얻기 위해 투쟁한다. 예컨대, 교수학습에 관한 국제조사(옮긴이: OECD가 실시하는 조사임. International Teaching and Learning Survey, TALIS) 결과 멕시코 중고등학교 교장 중 여성은 34.7%에 불과하다.
주류언론이 시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려고 교사들에 대한 적대적이며 폭력적인 환경을 조성해왔지만, 교사들은 대안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소식지를 배포하고, 택시, 식당 그리고 거리에서 서로 의견을 나눈다. 그들의 투쟁이 옳다고 믿는 사회 각계층의 사람들은 교사들의 농성장에 음식을 제공하고 동참하며 함께 행진한다. 그러나 정부가 지속적으로 시위의 정당한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폭력과 진압작전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몇 주 동안 생활조건은 시위 여교사들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 하나였다. 그들은 야외 노천에서 잠을 자고, 비위생적 조건에서 요리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빗줄기와 질병을 견뎌내야 했으며, 가족과 아이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임금도 못 받으면서 투쟁에 대처해 왔고, 강압적 철거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언론이 만든 주요한 사실왜곡(myth)은 교사들이 건설적 대안은 제공하지 않은 채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실용적 해결책을 개발하기 위해 작업 중인 것이 사실임에도. 예를 들자면, 아나벨 메디나는 오아하까주 여교사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기본시설과 자료 부족에 여교사들이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설명한다. “2000년 학교 건물이 붕괴했을 때 여교사들이 그 일부를 다시 지었지만, 교실만 있을 뿐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없다. 정부가 우리에게 보내 준 프로그램은 최소의 것이며, 교수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테면 해방교육학 프로젝트와 같이, 우리만의 방식을 직접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셀리플로라 가르시아 세르반테스는 교사들에게 원주민 언어를 그들의 수업에 통합하는 전략을 창조하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개혁이 그들의 성취를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명으로 구성된 자문팀이 학교에 간다. 우리는 전문팀들과 논의를 한 뒤 학생들의 지식, 그들의 관심, 또는 공동체의 특정한 사회적 문제들에 근거해서 집합적으로 교육 프로젝트를 구성하며, 프로젝트를 두 언어로 짠다.”
시험대
교사, 어머니, 여성 인권운동가인, 그들의 주 과제는 자신들의 지도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투쟁의 본질은 모든 멕시코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이며, 무상 공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며, 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교육의 질을 더 낮추게 할 현 교육 개혁에 반대하는 싸움이다.
9월 13일 경찰이 행진하는 교사들에게 가스를 쏘면서 시위자들은 농성장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났지만, CNTE 22지부는 여전히 소칼로에서 시위에 전념하고 있다. 이 기나긴 파업의 결과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결정은 다른 여성 인권운동가들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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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운동을 하면서 저항을 배우는 여성들(번역을 하면서 제목을 틀리게 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로라 칼슨, 2013년 9월 13일
http://www.cipamericas.org/archives/10650
멕시코 교사들이 자신들의 생계, 그리고 공교육의 질과 접근성을 위협하는 교육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나섰다.
멕시코 시티 도심구역에 임시 천막촌을 세운 수천 명의 시위자들 중에서, 여자들은 눈에 덜 띄는, 운동의 알맹이다. 교육 노동력의 61%를 차지하는, 백만 명 이상의 여교사들은 종종 월 몇백 달러에 불과한 임금에 전국에 있는 열악한 교실에서 일한다.
그 운동의 스페인어 첫 글자들을 따서 CNTE라고 알려져 있는 민주적 평조합원 운동은 헌법 개혁을 거부하기 위해 교사들을 거리에 나오게 했는데, 무엇보다도 평가제 결과에 일자리와 급여 수준을 못 박고, 학교에게 그들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게 하는 “자치운영”을 확립하는 조항들에 반대하고 있다. 교사들은 이 개혁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고용보장을 붕괴시키고, 결국 학교 민영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은 교사들이 게으르고 교통을 방해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면서, 교사들의 파업에 대한 여론을 선동해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멕시코의 우기에 억수로 쏟아지는 비에는 좀처럼 소용이 없는 방수포 아래서 생활하기 위해 집에서 수백 마일을 왔다. 부족한 음식에, 빨래 할 곳이 없고, 녹초가 되는 행진에, 거듭되는 철거와 진압의 위협 속에서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그들은 왜 이럴까?
우리의 질문에 교사운동을 하는 여성들은 간단하지만 호소력 있게 답한다. 그들의 반응은 위기에 처한 교육제도를 반영한다. 그 위기는 무능한 교사들 때문이 아니라, 오랜 방치와 무관심, 그리고 전국에 있는 수백만 학생들의 삶에 가혹하게 얼룩진 빈곤 때문이다.
부끄럽지 않은 일자리와 양질의 교육을 위한 싸움에서 여성들의 목소리
A의 말. “이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는 매일 이 나라와 우리가 살고 있는 주에 존재하는 불의를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우리는 결핍과 불의를 경험하며,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사로서 우리는 우리 학생들과 어머니들, 아버지들과 같이 한 공동체에서 살고 있고, 그들이 처한 결핍을 알고 있고, 우리를 분노로 끓게 한다” 오아하까주에서 온 한 젊은 교사가 말한다.
그녀는 학교 근처에 있는 식량도매시장에서 농작물을 팔러 온 공동체 사람들과 학교에 가기 전 일을 해야 하는 소녀들과 소년들을 본다.
“어떤 아이들은 새벽 4시나 5시에 일어나서 시장에 과일이나 야채, 식물을 팔러 온다. 그 아이들은 아침도 안 먹고 학교에 와서 낮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저녁 8시나 9시까지 시장에 있다가 잠을 자러 공동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같은 일과를 시작한다.”
그녀는 이 악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확신하지만, 교육개혁은 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이 승인한 것을 가지고서는 우리 공동체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더 나빠질 것이다.”
사르비아 아날리 발베르데는 믹스텍 원주민 구역의 소공동체 유치원 교사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인 게레로 산타 크루스에서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기 위해 2킬로 이상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부모들 중 다수가 강제 이주 당했다. 아이들은 아침을 안 먹거나, 또는 콩이나 소금을 약간 바른 단단한 또르띠아 하나를 넣은 배낭을 메고 학교에 간다.
이름을 밝히길 원하지 않는 또 한 여성이 설명한다. “우리는 가족과 모든 것을 남겨두고 멕시코 시티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지만... 우리 중 다수가 지하철을 탈 줄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익숙해지고 있다. 우리는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왔다.” 그녀는 계속한다. “이 과정은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아주 힘겨웠다. 하지만 오아하까만이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여교사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수도에 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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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평가해야 하나?시위의 핵심은 헌법에 추가된 평가제다. 발베르데는 교사들이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평가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맥락에 따라, 우리의 현실에 따라 평가받기를 원하지, 표준화된 절차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녀는 말한다. “특히 우리는 교육을 개선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교사들을 처벌하고 해고하기 위해서 평가제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의 지역 교사들은 지식과 기술을 향상시키길 원하지만, 그들이 일하고 있는 가난한 곳에서는 선택권이 제한되고 있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우리는 더 훈련을 받고 싶지만, 우리는 대중교통이 없는 외진 공동체에 있고, 주말밖에는 공부하러 먼 길을 갈 시간이 없다.”
위태로운 여성들에게, 이것은 희생자를 비난하는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혹자는 교사들이 교육제도의 후진성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제도의 후진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에 써야 할 돈을 다른 곳에 썼던 사실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다. 한 가지 좋은 예는 막대한 돈을 쓴 지난 선거다. 그 돈을 교육개선을 위해 할당할 수도 있었다.”
저항수업
시위 교사들 중 다수에게는, 이것은 첫 번째 동원이 아니다. 오아하까 교사들은 2006년 운동을 기억한다. 당시 전국교사노조 22지부의 파업은 지역에서 반란의 기폭제가 되었고, 폭력적 진화작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한 교사가 봉기와 진압이 미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얻은 교훈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A. "나는 2006년 사건에 참여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그 정신병과 퇴거를 기억하지만, 친구에게 말했듯이, 두렵지 않다. 사실 난 친구에게 우린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고, 자러가기 전에는 항상 주위를 살핀다.“
최소한 그녀의 경우에는, 진압은 결국 장기적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 “우리는 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고, 그 일 때문에 우리는 마비되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지 않다.”
그녀의 친구가 거든다. “매일 신문을 읽을 때마다 거기에서 2006년을 본다. 이건 그들이 7년 전에 우리에게 했던 짓이다. 우릴 공격하고, 나가 떨어지게 하고, 모욕하고,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하게 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멕시코 풀뿌리 운동의 역사에서 고전이 된 역사를 회상한다. 여성이 구축한 역사.
“그 때 여교사들은 스스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행진을 요청했고 언론사에 가서 우리는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심지어 공익언론이어야 할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게마저.”
“그래서 수천 명의 여자들이 언론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우리는 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민중의 것인 언론공간에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이 체제의 가장 기본요소인 대중매체에 도전했기 때문에 언론장악은 매우 강력한 조치였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방송국 안테나와 그밖에 다른 것들에 총기를 난사했다.”
회상에서 현재로 되돌아 온 그녀는 말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역사들이, 이런 경험들이 있다. 작은 승리들, 수많은 두려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수없이 분석한 이 모든 순간들. 지금 여기 우리는 다시 이런 상황 속에 있고, 서로를 바라본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다.”
시위와 제안들
언론이 유포한 주된 myth(유언비어, 뜬소문, 낭설 ex. 상근이 사망“설”)은 교사들이 건설적 대안을 제공하지 않은 채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마다 하나씩 있는 교사들의 노동조직과 직장에서 교사들 스스로 실용적인 대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오아하까주는 이 과정이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선진적이다.
아나벨 메디나는 타마술라팜(옮긴이: 미스텍족 원주민 마을임)의 학교에서 여교사들을 가르치는데, 이 학교는 오아하까주에 남은 마지막 교육대학이다. 정부는 민영화를 준비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농촌 저항의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대학들을 체계적으로 폐쇄하거나 예산을 줄여왔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역사적으로 가난에 찌든 학생들이 학위를 딸 수 있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지키는 중추였던 곳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워 왔다.
메디나는 교사들이 기초적인 사회기반시설과 교육자료 부족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설명한다.
“2000년에 우리 건물이 붕괴했을 때 교사들이 그 일부를 다시 지었지만, 교실밖에는 없고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없다. 정부가 보내준 교육과정은 최소한의 것이며 교수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해방교육학 연구프로젝트’처럼, 우리만의 방식을 고안해야 했다.
“우리 학교는 다양한 종족집단들의 참여로 다채롭다. 우리는 다양한 풍습과 전통을 가진, 사포텍, 나와틀, 미스텍, 그리콰어로 수업을 한다.
“우리는 주로 영어로 가르치는 수업을 강조하는 개혁 때문에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 이 문화를 잃고 싶지 않다.” 그녀는 대학이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강요하지 않는 새로운 교수법을 어떻게 개발했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물어본 뒤, 그들만의 고유한 경험에서 시작하며, 프로그램은 여기에 맞게 구성한다. 학생들이 레보소(옮긴이: 주로 여성이 몸에 걸치는 숄을 말하며, 멕시코 전통의상임)나 빵을 만드는 법을 알면, 우리는 그 지식에서 출발하며 이런 콘셉트들을 우리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삽입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개발한 이 모든 선진적 교육 콘셉트들은 개혁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고 메디나는 말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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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에스테반 아틀라후카 공동체에서 온 셀리플로라 가르시아 세르반테스도 교사들에게 원어를 교습에 통합하는 전략을 창조하는 훈련을 시킨다. 그녀는 개혁이 자신들의 성과를 도로아미타불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6명으로 구성된 자문팀이 학교에 간다. 우리는 기술팀들을 면담한 뒤, 학생들의 지식, 그들의 관심사, 또는 공동체의 특정한 사회문제를 토대로 교육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프로젝트는 두 언어로 구상된다.”학생들의 현실을 직접 다루는 것이 그들의 작업의 중심이다. “오아하까에서 우리는 우리를 우리의 주, 우리의 멕시코에 계속 묶어놓기 위해 우리만의 지식과 풍습을 구조하는데 초점을 맞춘 계획을 생각해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가장 주변화된 공동체들의 맥을 짚는다.”
많은 소녀들과 소년들이 “중학교 졸업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이 잘 풀리면 미국에 가려고 한다. 거기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건 아닌데도.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여기 우리의 주에, 우리 나라에, 우리의 멕시코에 간직해야 할 필요를 인식한다. 그들을 붙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화를 살려내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한다. 그게 교사들이 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강조한다.
여교사들에게, 아이들에 대한 헌신은 최우선이다. “우리의 투쟁의 본질은 우리가 남겨두고 온 우리 아이들을 포함해서, 모든 소년들과 소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보고 싶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와 함께 이 모든 걸 겪어 온 아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매일 밤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만, 우리 중에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삼 주째 못보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 있을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정의를 위한 것이고, 정의는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이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현실을 변형하는 여성들
28세의 모니카 아마도르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부근 코소알테펙에서 4학년, 5학년, 6학년을 가르친다. 학교에는 그녀 외에 교사가 단 한 명 있다. 그녀는 한 달에 약 320달러를 번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 일부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수화를 배워야 한다. 커피 수확철이 되면 학생들은 가족이 추수하는 걸 도와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빠진다.
교실에서 그녀는 학생 26명이 반달 모양으로 모여 앉게 한다. 교실의 위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 책상은 우리들 앞이 아니라 뒤에 놓는다.”
멕시코 여교사들은 새로운 세대를 형성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세계의 불의와 불평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길 바란다. 그들은 또 변화를 위한 운동에서, 그리고 그들이 창조하려고 애쓰는 더 나은 세상에서 당당하게 자신들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을 인도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위해, 조합원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지난 몇 년간 내 이해의 폭은 넓어졌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이 갈수록 여성이 풀뿌리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 여성은 지금까지 선두에 서 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더 이상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또 다른 이유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여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는 전에 (남성명사로) ‘우리 교사들’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이제 나는 (여성명사로) ‘우리 교사들’도 여기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들, 우리의 두려움들, 우리의 욕망들, 우리의 꿈들 - 우리는 이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여기에 가져왔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풀뿌리 운동에서 여성을 위한 것들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체적으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이 운동의 조합원들로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제공할 책임과, 사회운동에서 우리의 참여를 보이게 만들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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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와 정의로운 평화의 추구2013년 9월 26일
샌디 톨런(The Lemon Tree: An Arab, a Jew, and the Heart of the Middle East의 저자임)
http://www.aljazeera.com/indepth/opinion/2013/09/edward-said-his-quest-for-a-just-peace-201392681712880834.html
에드워드 사이드는 십년 전, 2003년 9월, 12년에 걸친 백혈병과의 전투 끝에 사망했다. 걸작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저자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식인 중 하나인 사이드는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학생 세대에게 사랑받는 교수, 재능 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네이션> 잡지를 위한 오페라 비평가였다. 아마도 그는 전 세계에서 발행된 수많은 저서, 수백 개의 평론들과 기사들에서 그가 보여준, 그의 민중,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그의 치열한 투쟁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9월은 또 하나의 운명을 결정한(fateful) 스무 번째 기념일을 표시하는 달이기도 하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오슬로 협정을 확정했던 이제는 수치스러운(now-infamous) 아라파트와 라빈의 악수를 기념하는 날. 오슬로의 유산과 그것의 가장 위대한 비판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정반대의 양극을 대표한다. 사실상 협정을 처음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들 중에 속하는 이가 사이드였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자족적인 오늘의 많은 전문가들과는 달리, 그는 실제로 그 협정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미망인 마리암이 내게 말하길, 그는 1993년 9월 협정식에 참석해달라는 백악관의 초청을 거절했다. 오늘날 오슬로에 관한 그의 말들은 예언자의 외침이다.
착각의 왕국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점령을 계속하라는 팔레스타인의 공식 승낙”이라고 사이드는 <평화와 불만>에 담긴 글 “중동 ‘평화협상’”에서 썼다. “이스라엘이 확고히 다스리는 착각의 왕국”. 그는 1995년의 “오슬로 2”에 답하며 이렇게 썼다. 그 해에 서안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면적 군사통제는 72%에서 60%로 조금 줄어들어서, 18년 뒤인 오늘과 같았다.
사실상 그가 참석을 거절한 백악관 의식 나흘 전에 썼던, 그의 때 이른 우려는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 ‘역사적 진전’은 ... 이스라엘은 여전히 정착촌, 동예루살렘, 경제를 책임진 채, 팔레스타인인들은 지극히 종속인들로 남겨둔다”고 사이드는 <가디언>과 카이로의 <알 아흐람 위클리>에 썼다. “이스라엘은 영토, 영해, 안보 전반, 외교를 통제할 것이다. ... 어렴풋한 미래에도,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해와 영토, 이미 빼앗은 것 중 상당수를 포함하여... 서안을 지배할 것이다. 문제는 사실상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되는 땅을 양도할 것이냐이다.”
이 말들이 지난 주에 쓴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사이드가 이렇게 쓴 후로 20년 동안 잇달아 나타나는 평화조정자 지망생들은 그들의 실수를 재활용해 왔다. 외교적 “사랑의 블랙홀”: 늘 똑같은 생각, 늘 똑같은 “협상” 실패.
그러나 사이드는 그의 비판자들이 자주 하는 독설에도 불구하고(논평은 그에게 “테러 교수”라는 별명을 붙였다), 평화 그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정의로운 평화의 옹호자였다.
오슬로 프로세스에 들어간 뒤 거의 5년 뒤인 1998년, 사이드는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깊게 믿고 있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존에 대한 대안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신념이 그를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의 이중국적을 가진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우정으로 이끌었고, 그 우정은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설립을 낳았다. 사이드가 죽인 지 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관현악단은 미국과 유럽의 청중들 에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화해의 정신이 성지(Holy Land)에서 사라진지 오래라, 악단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기를 잃어버렸다. 사실 악단의 아랍 연주자들 중 일부는 악단이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하는 통일된 성명을 발표하길 꺼리는 것에 좌절해서 떠나버렸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곧 나올 나의 책의 발췌다. 제목은 잠정적으로 “돌을 든 아이들(Children of the Stones)”이다. 발췌는 자신이 “화해를 위한 대안적 길”이라고 부른 것을 찾으려는 사이드의 결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인터뷰, 비디오 영상, 직접 들은 이야기나 <알 아흐람 위클리>에 게재된 타니아 나시르의 회상처럼 간접적으로 얻은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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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든 아이들1998년 봄, 에드워드의 평화협정에 대한 회의는 깊어졌다. 그 해 그는 1948년 이스라엘의 탄생과 팔레스타인의 "나크바"(대재앙)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BBC가 제작한 자전적 필름을 촬영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여행했다. 어느 날 그는 돌로 뒤덮인 들판에 갔는데, 몇 시간 전 이스라엘 불도저가 한 팔레스타인 가옥을 부수고 난 뒤였다. “50년 동안 매일, 매시간, 매순간 계속되는 일”, 괴로운 기색이 역력한 에드워드가 제작진에게 말했다. 그의 뒤에는 격자무늬 케피예를 두른 노인이 자기 집이 있던 곳 바깥에 떨어져 있는 돌들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저걸 봐요. 플라스틱 쪼가리들, 통나무 조각들, 여기 철책 파편들, 여기 찌그러진 깡통들” 에드워드는 말했다. “이것들은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구성하는 원자들입니다” 에드워드는 숨이 가쁘고, 눈물을 참느라, 말을 하다가 계속 멈췄다. “바로 여기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게 제게는 정말 너무 힘들군요 ... 내 사람들(my own people)이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있어요 ... 소위 문명세계란 곳에서 아무런 구호도, 아무런 연민이나 지지도 없이. 그리고 지금 우리는 평화협상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어요. 그런데 누가 보호해주고 있어요? 누가 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있어요?”
거의 7년째 백혈병과 분투 중이었던 에드워드는 “화해를 위한 대안적 길”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마주침들은 그에게 점점 더 새로운 생각을 찾으라고 재촉했다. 그는 여전히, 언젠가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오슬로를 통해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애를 써도,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잔존한다”고 그는 썼다. “생각, 기억, 그리고 종종 묻히거나 보이지 않는 현실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봄에 에드워드는 성지를 여행하면서, 양쪽의 예술가, 정치인, 지식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에드워드와 생각을 같이했고, 그의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보려고 했다. 이러한 대안적 사고는 함량미달 협정의 세부사항들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 선 두 민중의 화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동등성에 기초한 대안을 모색하던 에드워드는 자신의 절친이 되어 그 봄에 함께 여행했던 이스라엘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에게서 동류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사람들을 위해 뭐든 해야 해” 다니엘은 에드워드에게 누차 말하곤 했다.
동예루살렘 아메리칸 콜로니 호텔에서 에드워드는 다니엘과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고, 다니엘, 그리고 그의 팔레스타인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느라 신이 나 있었다. 그는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타니아” 전화기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Keefek?(안녕?) Keefcom? 잘 지냈어? 하나도 잘 지내고?“
타니아와 하나 나시르는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 마리암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에드워드와 하나의 관계는 1940년대 팔레스타인 지방인 서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전쟁으로 그 도시의 서쪽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탈출과 추방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 뒤, 두 부부는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옮긴이: 원래는 유대 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을 말함) 속에서 서로 만났고, 가장 최근에는 서안에 있는 비르자이트대 총장 하나가 이스라엘에서 추방된 뒤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요르단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에서 이스라엘의 지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한 뒤 “보안위반”죄로 기소되었다. 오슬로 프로세스 초기에 이스라엘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한 화해 제스처로서, 하나에게 돌아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가 요르단강을 건너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땅을 밟았을 때, 에드워드와 마리암은 이 역사적 사건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했다. 그 날 저녁, 뉴욕에서, 두 사람은 옛 친구들에게 축하의 전화를 했다.
이제 타니아와 하나는 추방당하기 전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기독교 집안이었던 하나의 가족이 1920년대에 설립했던 비르자이트 고등학교이기도 했다. 그 학교가 점점 발전하여 비르자이트대가 되었고, 결국 하나가 대표를 맡게 되었다. 하나의 자매 리마 타라지는 공동 설립자였고, 그의 조카 수하일 쿠리는 대학의 후원으로 설립된 팔레스타인 국립음악원의 새 총장이었다. 소프라노 훈련을 받은 타니아는 종종 피아니스트 리마와 공동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가들을 클래식 스타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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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서 바흐의 미뉴에트, 베토벤의 소나타가"
http://blog.donga.com/raphy/archives/35
Rhythms of resistance
http://www.aljazeera.com/programmes/general/2010/03/2010325132736122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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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에드워드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공유하는 타니아에게 제안을 했다.“타니아” 아메리칸 콜로니 호텔 객실에서 에드워드는 흥분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나하고 아주 가깝게 지내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여기 같이 있어. 그는 멋진 남자고, 위대한 인간이야.” 타니아는 팔레스타인의 대의의 옹호자로서의 다니엘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음악가로서 타니아에게 바렌보임은 오래전부터 친숙했고, 두 사람이 매우 친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의 일부였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에드워드는 오슬로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막연히 감돌았다. “오슬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까? 그것이 우리의 내밀한 대화의 전부였다.”
이제 에드워드는 타니아를 서예루살렘 콘서트홀로 인도할 제안을 하고 있다.
“다니엘은 이번 주에 서예루살렘에서 콘서트를 할 거야”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말했다. “타니아, 널 초대할게. 우리는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타니아는 뭐라고 답변해야 할 지 몰라서 주저했다. 아마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녀는 즉시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점점 커지는 폭력과 정착촌 확대에도 불구하고 - 거실 창가에서 바로 보이는 언덕에도 정착촌이 있었다 - 그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부터 자신과 하나가 느꼈던 긍정적 감정의 자투리들을 간직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참석하는 것은 엄청난 도약이었다. 그녀는 거의 57년 전인 1941년에 서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당국의 금지 때문에 갈 수 없다. 설령 허락을 얻는다고 해도, 점령지역을 넘어 자신의 오랜 적의 땅으로 가는 것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 것이다.
음악가로서 타니아는 예술이 이해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정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타국 땅이며, 그 나라가 여전히 그녀의 사람들을 점령하고 있는 지금, 서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불편했다.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고, 이스라엘에 감으로써 그 반대의 암시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 에드워드 사이드가 초대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이며, 그녀의 사람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사람의 서예루살렘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해야 할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 “기정사실”을 뜻하는 facts on the ground는 이스라엘이 협상을 하면서 정착촌을 늘려나가는 전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점령지를 이스라엘의 주거지로 바꾸어나가면서 이스라엘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정사실”을 만든다는 말은 정착촌을 또 늘린다는 의미입니다.
타니아는 에드워드에게 생각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신뢰하고 그의 인격을 믿었고,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가 존경스러웠다. “에드워드는 허기져 있었어요” 그녀는 회상했다. ”그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알고싶어 했어요. 우리가 뭔가 밀어붙여야 한다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다니엘과의 우정은 그 일부였어요.“ 타니아는 초대해 준 에드워드와 다니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초대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은 자신에게도.
그녀는 곧 에드워드에게 다시 전화했다. 그리고 자신이 콘서트 초대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와 다니엘을 비르자이트에 있는 자택에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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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일찍 도착한 손님들은 거실로 걸어갔다. 12피트 높이의 교차형 둥근 천장. 1피트 두께로 회반죽을 바른 벽에는 팔레스타인 자수가 걸렸다.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나시르 가족의 사진들 아래 놓인 수형 피아노를 사진 한 장에 담았다. 붉은 색 타일 바닥에는 페르시아 카페트가 깔렸다.다니엘, 에드워드, 그리고 집주인들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아락을 홀짝이며 포도잎과 설탕에 졸인 아몬드 접시에 손을 가져갔다. 다니엘은 하나에게 추방과 유배의 경험에 대해 물었다. 1974년 11월 학교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한 후 총장인 그는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눈을 가린 채, 다른 추방자들과 함께 호송차에 태워졌고, “모르는 곳으로 7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갔다.” 군인들은 눈가리개를 벗긴 뒤, 여기가 레바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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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숨은 술, 아랍 술 ‘아락’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46
“그렇게 요르단에 갔다고요?” 다니엘이 물었다.
네, 유배지에. 하나가 대답했다.
타니아는 다니엘의 얼굴에 서린 걱정을 알아챘다. 그녀는 그의 정중하면서도, 진실을 캐기 위한 질문들에 끌렸다. 그녀는 가족이 남아있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비르자이트와 아이들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암만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아이들을 실어 나르던 수년간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 그들에겐 여행 허가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양한 점령당국들에게 수많은 승인도장을 받아야했다. “시당국에서부터, 경찰서든, 교육부든, 국세청이든, 아무튼간에” 타니아가 말했다. “가끔씩 며칠에 걸쳐서 도장을 받아야했어요. 줄이 너무 길어서, 계속 기다리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군인이 거기 불쑥 나타나요. 누군가가 줄을 잘못 섰거나, 아니면 군인이 즉흥적으로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그냥 결정해버리면, 우리는 애들처럼 야단을 맞고 나서 전부 쫓겨나요. 아침부터 3시간, 4시간 죽 기다렸는데, ‘오늘은 여기서 끝. 내일 와.’ 그러면 정말로 점령이 뭔지 알게 되요. 그리고 그들이 도장을 안 찍어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생겨요. 그러면 입을 다물게 되요. 속에서는 불이 나죠. 남편이 있는 암만에 가야하고, 애들을 데리고 와서 학교에 보내야 되요.”
서안지구와 요르단왕국의 경계선인 요르단강 알렌비 다리에서 “우리는 8시간 동안 기다렸어요. 아이들은 먹을 것도, 물도, 갈아줄 기저귀도 없었어요. 전 애들 옷에서 종이 한 장이라도 나올까봐 겁에 질렸어요. 초콜릿 포장지나 아무튼 뭐든.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따라 죽 가서 줄 맨 뒤에 서야 되요. 그들은 그게 초콜릿이라는 걸 알지만, 핑계가 생겨요. ‘이 종이에 뭐라고 써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슬로가 도착했을 때, 하나가 말하길, 평화협상에서 일종의 신뢰구축 조치로서, 이스라엘은 그에게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타니아는 그와 동행하기 위해 암만에 갔고, 하나는 더 감상적인 수많은 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팔레스타인을 보자마자 울면서 땅에 키스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요르단강을 건너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한 순간,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하나는 눈물에 젖어 버스에서 뛰어내리더니, 무릎을 꿇고 땅에 키스했다. “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타니아는 깔깔댔다. “하나가 버스에서 제일 먼저 내렸어요!”
예리코(아리하) 부근에서, 의기양양한 비르자이트대 학생인파가 총장의 승리의 귀환을 환호했다. 그와 하나는 “진정한 희망과 화해의 정신” 속에서 돌아왔다고 타니아는 말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기쁨을 나눴어요.”
5년이 지난 후, 타니아가 말하길, “물밀듯이 밀려오는 호전성과 폭력”과 끝없이 펼쳐지는 정착촌 속에서 희망은 어두워지고 있다. 그녀는 거실의 트윈 아치형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의 시선이 남동쪽을 향했다. 어둠 속의 종려나무와 키프로스나무 너머, 1마일 떨어진 언덕 꼭대기 정착촌에서 밝은 노란 빛이 보였다.
칵테일 시간 동안, 그리고 속을 채운 닭에 적포도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면서, 타니아는 에드워드가 분열된 양쪽의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되어 즐거워하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대화를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에겐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친구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런 운명을 살아온 사람들과 마주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그는 몇 년 뒤에 말했다. “나는 너무나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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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을 지배한 건 정치였지만, 음악은 결코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의 자매 리마는 팔레스타인 국립음악원의 공동 설립자였다. 미래에는 다니엘이 그 곳에서 콘서트를 할 것이다. 이제 에드워드와 다니엘은 원대한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 있다.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를 촉진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양쪽의 음악가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구상이었다.프로젝트는 여전히 구체화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니엘은 바이마르의 아들,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독일 바이마르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초청을 고려하게 되었다. 괴테는 가능성에 대한 에드워드의 감각에 불을 붙였다. 자신이 정기적으로 서방의 제국적, 군사적 지배의 대리인 꼬치에 끼우는 “오리엔탈리스트들”과는 달리, 에드워드는 괴테를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 서양인의 전형으로 보았다. 괴테는 19세기 초 전쟁터에서 돌아온 독일 병사에게 꾸란에서 찢어 낸 종이 한 장을 받은 뒤 이슬람과 아랍 세계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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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스트 비평가의 전략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012
무기가 아니라 예술이 세상 바꾼다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12/09/10/201209100500031/201209100500031_1.html
2세기 후 그러한 탐구는 에드워드가 붕괴하고 있는 평화협상이라고 보았던 것에 대한 일종의 평행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을 상징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것을 위해 상위문화와 소름끼치는 역사가 같이 맴도는 바이마르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는 바흐, 리스트, 바그너, 니체, 죽음의 수용소 부헨발트의 고장이었다. 바이마르의 초대는 두 친구의 상상력을 흥분시켰고, 곧 중동 전역의 젊은 연주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에서야 에드워드와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사를 불렀다. 다시 한 번, 다니엘은 그 다음날 밤 서예루살렘 콘서트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을 타니아에게 내밀었다. 가겠다고 그녀는 그에게 장담했다. 위험이 따른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허가증 없이 이스라엘에 들어가려다 잡히면, 타니아는 체포될 수 있다.
그 다음날 늦은 오후 에드워드는 예루살렘에서 8마일 떨어진 곳에서 비르자이트로 택시를 보냈다. 타니아는 혼자 뒤에 탔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향했다. 하나 역시 예루살렘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차 안에서 타니아는 그가 자주 가던 정든 곳을 회상했다. 렉스 영화관, 커피숍들, YMCA, 하나가 테니스를 치고 아랍어 타자를 배웠던 곳, 그의 가족이 참석했던 팔레스타인 심포니 콘서트가 열렸던 곳, 팔레스타인 연주자 살바도르 아니타가 오르간 연주회를 했던 곳. 이제 허가증이 없는 타니아는 기억해 낸다. “몰래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돼. 무법자처럼 잠입해야 돼.”
피아노에 앉은 다니엘은 홀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의 첫 음을 연주했다. 타니아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음악에 몰입하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잠시 동안은 음악에 빠져들었지만, 곧 자신이 여기 왔어야 했는지 의심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한 시간이 흘러, 다니엘의 리스트 소나타 B단조 연주가 끝나자,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타니아와 에드워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니엘은 앞으로 걸어나와 청중 앞에 더 가까이 가서 히브리어로 짧게 말한 뒤 영어로 바꾸었다.
“어제 밤 저는 서안에 가서,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20년 동안 부당하게 추방당한 뒤 최근 돌아온 한 팔레스타인 교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다니엘은 말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저를 단지 친구로서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서 접대했습니다.”
타니아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녀와 에드워드는 서로 쳐다봤다. 다니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객석은 조용했다. 다니엘은 작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선 채, 캄캄한 홀을 향해 말했다. 그는 평화와 정의에 대해서 말했고, 양쪽의 고통을 끝낼 필요에 대해서 말했다. 불현듯 타니아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밤 절 초대해 준 팔레스타인 여성이 오늘 밤 여기 우리와 함께 해서 행복합니다. 그녀는 금지와 많은 주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와 달라는 제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제 앙코르 연주를 그녀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에드워드는 타니아를 끌어 안았다. “다니엘만이 할 수 있어” 그가 말했다. “다니엘만이 저런 배짱이 있어.” 타니아는 목이 메었지만, 다니엘이 피아노에 앉아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자 더 참을 수 없어졌다. 어렸을 때, 타니아는 야상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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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이후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되었나?극소수 정당들만이 군부 또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군부의 공격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http://www.thenation.com/article/176445/what-happened-egypts-liberals-after-coup?page=full
Sharif Abdel Kouddous
October 1, 2013
칼리드 다우드는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모하메드 모르시를 해임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작년 11월 결성된 비이슬람주의 정당들과 조직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구국전선의 대변인인 다우드는 모르시와 무슬림 형제단을 반대하는 발언(voice)으로 잘 알려져 있다. 6월 30일 몇 주 전부터, 그는 전국을 돌면서 대규모 반모르시 시위에 대한 지지를 불러 모으고 대중동원을 조직했다.
7월 3일 군대가 모르시를 축출한 후, 다우드는 국내외 뉴스채널에 정기적으로 출연해서 정권 타도를 옹호하면서 대통령의 해임은 군부 쿠데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 나라의 미래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모르시의 해임에 대해서 어떠한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이집트 혁명의 원칙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배신했다.”
그러나 지금 다우드는 자신이 과거에 대변했던 조직과 갈등을 빚고 있고 과거의 많은 정치적 동지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축출된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 진원지였던 카이로의 연좌농성장 두 군데를 군대와 보안군이 야만적으로 철거했던 8월 14일이 전환점이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가 “이집트 현대사에서 벌어진 대규모 불법살해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이라고 묘사한 사건에서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함딘 사바히 전 대선후보와 암르 무사를 포함하는 구국전선 지도부는 기습작전에 갈채를 보내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틀 뒤,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좌파”라고 말하는 다우드는 조직의 대변인을 사임했다.
“우리는 정치적 거래를 원했다. 우리는 모르시 퇴진을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슬림 형제단을] 진압하거나 그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불법단체로 간주하길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1996년부터 기자로 일했던 이집트의 국영 영자주간지 알 아흐람 위클리 사무실의 심하게 갈라진 가죽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말했다. 사임한 뒤 “친한 친구들 중 일부는 나를 형제단 동조자, 비밀세포, traitor, 미국 간첩이라고 불렀다”고 그는 말한다.
/ traitor는 배신자나 반역자라는 뜻 외에도 매국노, 부역자, 이적행위자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다우드의 이야기는 이집트의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지형의 표상이다. 모르시의 축출과 그 후 형제단과 그 협력자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의 여파로 단층선들이 이동하면서 재배치되었다.
/ fault line은 ‘단층선’ 외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를 뜻합니다.
모르시의 집권 기간 내내 그에 대한 반대는 점점 커져서, 결국 이집트의 거의 모든 부문으로 확산되었다. 모르시 반대는 민중의 지지도 얻었고, 그의 통치 1년 동안 9천 회가 넘는 시위와 파업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결국 모르시 정권은 조기대선 실시 요청과 유례없는 6월 30일 동원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반대파들은 폭넓은 정치, 사회운동을 포함하며, 종종 상충되는 이데올로기와 불만들로 특징지어졌다. 여기에는 공식적인 야권(비이슬람 정당들과, 그 중 다수가 자유주의를 정의하는 특징인 정치적 다원주의의 개념을 전적으로 거부해왔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같이 묶이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혁명 활동가들, 노동조합들, 인권옹호자들, 콥트 교회, 비협조적 국가기관들, 전 무바라크 정권에 속했던 사람들, 구석에 몰린(sidelined) 비즈니스 엘리트들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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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herealnews.com/t2/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31&Itemid=74&jumival=10411
What happened after the Revolution, after the January 25 uprising, is that many of these people fled because of their ties to the Mubarak regime. [incompr.] largest and probably most--some say richest man in Egypt, Ahmed Ezz, was actually in charge of the National Democratic Party's parliamentary bloc and their policymaking body. He's in jail now. Other people, such as Hussein Salem, a close friend of Mubarak who was in charge of many of the gas deals and who was the middleman in the energy sector for many of the gas deals between Egypt and other countries, including Israel, he's in Spain escaping persecution. So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desire from the revolutionaries to have all of these people face trial, to have a lot of the deals that went through due to unfair practices or due to [incompr.] certain market failures that had to do with the political situation be looked into again and potentially reversed somehow.
http://rebeleconomy.com/commodities/the-return-of-egypts-elite/
Nassef Sawiris, the head of OCI, was for much of this year entangled in a tax case with the former Islamist government, which claimed Orascom evaded taxes worth $2.1 billion after the sale of its cement business to French firm Lafarge in 2007.
OCI denied any wrongdoing. The government responded by placing a travel ban on both Nassef Sawiris and his father Onsi.
In April, the company finally agreed to repay $1 billion over a five-year period.
The Sawiris family struggled with the Islamist government, and Naguib Sawiris, Nassef’s brother, admitted he backed one of the biggest rebellions against Morsi, the Tamarod movement.
그 결과는 혼란스럽고 점점 더 원자화되는 정치지형이다. 모르시에 반대하는 이질적 집단들 중에서, 일부는 적극적으로 군부의 개입을 추구했고, 그보다 소수는 군부가 어떠한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던 반면, 다우드와 같은 일부는 군부가 대통령을 몰아낼 때는 군부의 편을 들었지만, 고조되는 국가폭력과 “테러에 대한 전쟁”을 가장한 이슬람주의자의 대량체포에 직면하자 결국 달아나버렸다.
무바라크 이후의 정치지형을 관리하고 혁명에 대한 열망과 통제되지 않는 민중동원을 억누르기 위해 2011년 거의 내내 형제단과 편리의 동맹(a coalition of convenience)을 맺은 군부는 반모르시 운동을 성공적으로 끌어들였으며, 공안기관과 함께, 그의 축출에서 가장 큰 승리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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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 반대파들은 젊은 조직가들이 (아랍어로 “반란”을 뜻하는) 타마로드를 개시했던 5월 초에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타마로드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생각, 즉 대통령 불신임 투표와 조기대선 요청을 선언하는 탄원서를 기초로 한 풀뿌리 이니셔티브다. 캠페인은 자원봉사자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가속도가 붙어서, 이집트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거리, 대학 캠퍼스, 심지어 관공서에서도 서명을 받았다. 영향력 있는 많은 활동가들과 운동단체들이 타마로드를 지원했는데, 이 중에는 2011년 1월 25일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4월 6일 청년운동과 케파야 운동이 포함된다.캠페인에 상당한 탄력이 붙었던 5월 말, 타마로드의 설립자 중 세 명이 캠페인과 그 목적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기자에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비좁은 본부에 모였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저명한 사회주의 그룹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타마로드 캠페인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 가구가 별로 없는, 네온이 비추는 방에 모였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아나키즘, 사회주의, 레닌주의에 관한 책 무더기들이 판매를 위해 놓여 있었다.
타마로드의 설립자 중 하나인 마흐무드 바드르(이전에는 케파야의 조정자였다)는 서두발언에서 군부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군최고위원회(SCAF)에 반대하는 민중동원과 저항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SCAF는 2011년 무바라크의 축출 - 여기에 형제단은 참여하지 않았다 - 이후 직접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정계에서 군부의 역할을 배제시키자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군대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힘차게 말했다.
5주 후, 7월 3일, 거리에는 탱크가 하늘에는 헬기가 배회하는 가운데, 바드르는 이집트 군 수장 압둘 파타 엘 시시의 가까이에 앉아 있게 된다. 시시가 모르시의 대통령직 종료를 선언할 때였다. 그 날 이후로 타마로드 캠페인은 모르시를 쓰러뜨린 군부의 역할을 극찬하면서, 군부가 이끄는 과도정부를 지원하면서, 보안군에 의한 형제단 회원 수백 명의 살해와 수천 명의 평회원들의 투옥을 응원하면서, 군부와 보조를 같이 해 왔다. 그 후 바드르와 타마로드의 또 다른 설립자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는 이집트 헌법을 개정하는 50인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타마로드의 이야기는 대중운동이 포섭(co-optation)되는 이야기”라고 이집트 출신의 버나드 칼리지 정치학 교수 모나 엘 고바시는 말한다. “타마로드는 그 정의상 풀뿌리의 주도 아래 시작된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운동이었고, 군부에게는 남이 깔아놓은 멍석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라고 엘 고바시는 말한다. “타마로드 지도자들이 내놓은 논평은 6월 말부터 그리고 확실한 것은 6월 30일 이후로 왕보다 더 엄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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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의 축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후원자들 중에는 비이슬람주의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있었다. 2011년 많은 혁명가들의 지지를 받았던, 저명한 개혁파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모르시의 전복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났던 날 그는 시시 바로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과도정부에서 외교담당 부통령의 직책을 맡았다. 군부가 이끄는 과도정부에게 그의 명성은 정당성의 공급원이었다.엘바라데이는 비밀 장소에 외부와의 연락이 금지된 채 모르시를 구금한 것이나 이슬람주의에 동조하는 텔레비전 방송국을 폐쇄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았던 반면, 그는 카이로의 라바 알아다위야 광장과 나흐다 광장의 친모르시 연좌농성에 대해 강제해산이 아닌 정치적 해결을 요청했던 몇 안 되는, 그리고 확실히 가장 걸출한 정치인들 중 하나였다. 엘바라데이의 제안들은 국영언론과 민영언론의 사나운 반응에 부닥쳤는데, 평론가들은 엘바라데이가 반역자(traitor)이며 이중간첩이라고 비난했다.
보안군이 연좌농성을 무지막지하게 철거하고 나서 정확히 한 시간 후, 엘바라데이는 사임했다. “나는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그는 사퇴서에 썼다. “나는 피 한 방울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 자신을 악마화하는 선동이 점점 더 거세지자, 사퇴한 지 나흘 후 그는 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조국을 떠났다.
“엘바라데이는 우리를 대단히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고 흔히 자유주의자들의 가장 실질적인 정당으로 간주되는 이집트의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국제서기 후세인 고하르가 말한다. “엘바라데이는 자신이 친평화적이고 이집트인들이 피 한 방울도 흘리기를 원치 않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우리 모두를 이슬람주의자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흡혈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기 선택이나 그 이유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카이로의 나일강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섬 마니알에서 개업하여 성공한, 저명한 부인과 의사 고하르는 사회민주당이 점점 더 강경한, 친군부, 반이슬람주의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이집트인 대부분의 민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한다. “군대가 7월 3일에, 그리고 농성을 와해하기 위해 8월 14일에 했던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고하르는 말한다. “그러나 군대는 그 모든 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면,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고하르의 사회민주당의 주요 멤버 하젬 엘 베블라위는 군부가 후원하는 과도정부의 총리로 뽑혔다. 베블라위는 공식 논평에서 이런 양가감정(ambivalence)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력적 농성해산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보안군의 “자제력”(이것은 그의 말이다)에 찬사를 보냈다. 이것은 그가 2년도 채 되기 전에 취했던 입장과는 180도 다른 차이를 보여주었다. 2011년 10월 마스페로 학살이라고 알려진 사건에서, 군대가 27명의 시위자들(그 대부분이 콥트교인들이었다)을 살해한 것에 항의하여 그는 군부가 지휘하는 정부의 재무장관 사퇴서를 제출했다.
/ 8월 21일자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베블라위는 “미국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혈 사태로) 겨우 수백 명이 죽었을 뿐"이라며 "내전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8356
한편, 이집트 자유주의의 지도급 정당인 와프트당과 좌파정당으로 설립된 타감무당은 군부가 이끄는 과도정부를 강력히 지원하면서 탄압에 갈채를 보냈다. 두 당 모두 형제단을 공식 해산하고 그들의 모든 활동을 금지시킨 최근의 냉혹한 법원 판결을 환영했으며, 그것은 나세르주의 정치인이며 전 대선후보인 함딘 사바히가 주창한 운동인 민중의 흐름(Popular Current)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전 대선후보이며 아랍연맹의 전 사무총장인 암르 무사는 현재 단 두 명의 이슬람주의자와 형제단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 헌법개정 50인 위원회의 위원장이다. 무사와 사바히 둘 다 강경하게 군부를 후원해왔으며 민주적 민간통치라는 실낱같은 가식마저 모조리 벗길 조치인, 육군참모총장 시시의 대선출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다.
“장기적 전략으로서, 군부와의 동침(pacting with the military)은 비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정치적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엘 고바시는 말한다. “그들은 군부가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절멸시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누차 거듭해서 보여줘 왔듯이, 그들은 선거판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극소수의 정당만이 군부가 이끄는 과도정부나 형제단에 대한 맹공격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취해왔다. 비록 재원과 회원은 얼마 안 되지만 2011년 봉기 후 결성되어 진정한 좌파 정당으로서 관심을 끌어왔던 사회주의 민중연합(Popular Socialist Alliance)은 최근 “초법적 보안조치들, 사회정의의 쟁점관리 실패, 전환기의 정의에 필요한 법령발표 실패”를 이유로, 임시정부가 과도기를 “사보타주”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는 이익집단들의 끈질긴 공생관계(old network of interests)”의 영향력을 비난했다.
/ 보통 전환기의 정의라고 번역되는 transitional justice는 과거의 정부가 저지른 인권유린을 바로잡는 것을 말하며, ‘과거사 청산’과 같은 것입니다.
한편, 정치학자이며 이집트자유당의 설립자이고, 2011년 의회선거에서 선출된 암르 함자위는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였다.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의 위기와 재건”이라는 제하의, 일간지 알쇠룩(Al Shorouk)의 7월 31일자 칼럼에서 함자위는 소위 “자유주의” 정당들이 모르시의 집권 시절 내내 군대가 개입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며 맹공격했고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인권과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고 비난했다. 유명 정치풍자가 바셈 유세프와 칼럼니스트 벨알 파들과 같은 인물들 역시 군부 주도의 탄압과 그 배후에 있는 맹목적 민족주의 흐름을 비난해왔다. 비록 여전히 소수의 목소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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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를 무너뜨린 혁명의 기초공사를 도왔던 노동운동은 모르시에 반대하는 6월 30일 시위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두 개의 주요한 독립노조단체인 독립노동조합연맹(이하 독립노련)과 민주노동회의는 타마로드 캠페인을 위해 서명을 모았다. 이집트의 공식노조이며 1957년 설립된 이래 국가부문(arm of the state)으로서 기능해왔던 노동조합연맹 역시 반모르시 시위를 후원했다.“형제단은 근본적으로 실패했으며, 특히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와 노동조합에 관한 문제(economic and organizational questions)에서 그러했다”고 이집트 노동운동을 면밀히 연구해온 스탠포드대학 중동사 교수 조엘 베이닌은 말한다. 베이닌은 입법부에서 최대 다수를 차지했음에도 독립노조를 결성할 권리를 보장해주었을 법률안에 퇴짜를 놓은 형제단의 결정을 지적한다. 모르시의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부가 모르시를 물러나게 했던 7월 3일 직후, 독립노련 위원장은 군대와, 그가 “6월 30일 혁명”이라고 부른 것에서 군대의 역할을 칭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립노련의 창립위원장이며 중견 노조원인 카말 아부 에이타는 그 후 “전 정권하에서 파업의 투사(champion)였던 노동자들은 이제 생산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의 성명은 “이집트 노동자들은 결코 파업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독립노련의 저명한 자문위원(Council Member) 파트마 라마단의 주장과 함께, 군부 후원의 신정권에 대한 항복문서라며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아부 에이타는 심지어 6월 30일 이전부터 군부 개입을 옹호했던 함딘 사바히와 더불어, 나세르주의자들의 카라마당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시시가 가말 압델 나세르라도 되는 양 상상하는 것 같다”고 베이닌은 말한다. “그들이 군대가 권력을 장악했던 2011년과 2012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냥 문자 그대로 잊어버렸다니 그야말로 기이하다.” 무바라크 축출 후 군부는 파업과 작업정지를 범죄화하고, 시위자와 노동운동가들을 체포하고, 파업을 뭉개버리기 위해 군대가 보유한 노동력을 사용하기까지 하면서, 조직된 노동에 대해 가혹한 태도를 취했다.
2주 뒤 아부 에이타는 과도정부의 인력이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일각에서는 이것을 노동자 운동의 승리로 보았다. 그러나 그가 8월 중순 수에즈 철강회사와 시미터 석유회사에서 있었던 두 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공안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의 임명이 운동을 포섭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두려워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또한 군부는 임금인상과 체불상여금 지급을 요구하며 거의 2만 노동자가 파업을 한 마할라의 미스르 섬유회사와 그 주변에 병력수송 장갑차를 배치해서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새 정권의 명백히 권위주의적 성격, 친기업적 내각, 노동자 권리는 대체로 언급되지 않은채 남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도 독립노련은 군부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유지해온 반면,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위한 서비스센터’와 같은 노동단체들은, 비록 전술적이긴 하지만, 과감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들은 더 비판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신들이 박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고 베이닌은 말한다. “그들에게는 전술적 문제다. 어느 선까지 반대하고 나서야 무사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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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의 어스름한 땅거미가 내려앉은 카이로 탈라트 하브 광장에 모인 수십 명의 시위자들 주위를 혼잡한 월요일의 경적 소리가 감싼다.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남녀들이다. 그들은 군부와 무슬림 형제단 양쪽 모두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점점 더 빈발하는 무작위 체포, 군사재판, 최근의 비상사태 연장을 맹렬히 비난한다. 시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얼마간의 단체들과 4월 6일 청년운동이 공동으로 요청했다.4월 6일은 2011년 혁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그 뒤 계속해서 2012년 6월 대선 결선투표에서 구정권의 귀환을 상징했던 무바라크 정권의 마지막 총리 아흐메드 샤피크에 맞서 모르시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이 그룹은 모르시의 취임 후 첫 몇 달 내에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헌법을 둘러싼 의견 충돌, 경찰에 의한 자신들의 회원 가베르 “지카” 살라흐의 살해, 모르시의 운명을 결정한(fateful) 2012년 11월 헌법선언이 그 배경이었다. 그의 선언은 그에게 일시적으로 광범위한 권력을 주었고 그의 결정을 법원의 권한 밖에 두었다.
/ “이집트 대통령 초법적 칙령에 시위 격화”라는 제목의 2012년 11월 26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 따르면 “NSF의 핵심 요구사항은 모르시가 칙령을 취소하는 것이다. 칙령은 다음해 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승인될 때까지 모르시가 대통령으로서 과거와 미래에 한 결정에 대해 사법부의 검토를 받지 않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모르시는 대법원이 올해 초 의회를 해산한 후 사법권을 손에 넣었다. 당시 이집트는 군위원회가 임시 통치하고 있었다.”
http://kr.wsj.com/posts/2012/11/26/%EC%9D%B4%EC%A7%91%ED%8A%B8-%EB%8C%80%ED%86%B5%EB%A0%B9-%EC%B4%88%EB%B2%95%EC%A0%81-%EC%B9%99%EB%A0%B9%EC%97%90-%EC%8B%9C%EC%9C%84-%EA%B2%A9%ED%99%94/
4월 6일은 2013년 초 모르시 반대시위에 참여했고 조기대선을 요구하는 6월 30일 시위를 전심을 다하여 지지했다. 그럼에도 모르시가 무너진 뒤, 이 그룹은 재빨리 군부와 임시정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 더 심각해진 군부의 국가장악, 결함이 있는 헌법 로드맵, 다시 힘을 얻은 보안기구에 둘러싸인 채.
“우리는 여전히 1월 25일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고 저명한 4월 6일 회원 지주 압도가 말한다. 구호를 선창하던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 위해 휴식을 선언한 중이었다.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지금의 언론 내러티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 참가자 수는 엄청난 것”이라면서 그는 이 집회를 무바라크를 끌어내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시위 현장에 비유한다. 당시 현장에는 참가자들이 대개 보안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드문드문 있었다.
시위현장 근처에는 이들에게 대항하는 소수의 시위자들이 감히 군대에 맞설 생각을 하는 군중을 향해 고함을 치고 있다. “시시는 우리를 구했다!”고 얼룩말 무늬 상의를 입은 한 여성이 외친다. “왜 형제단을 돕는거냐?”
압도는 물러서지 않는다. “이것은 무바라크, 군사위원회, 형제단에 이어 혁명의 4라운드입니다. 우리는 곧 닥칠 다음번 싸움이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4월 6일의 정치적 입장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무바라크가 강제로 물러난 뒤 국가를 운영해 온 자들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외쳐 온 얼마간의 독립적 혁명 활동가들, 인권변호사들, 작가들, 조직가들의 견해를 대변한다. 그 중 일부는 6월 30일 시위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시위자들의 말(rhetoric)과 목표들이 군부와 구정권과 결탁한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채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6월 30일 시위에 대해 더 양가적(ambivalent)이 되었다.
대체로 이 사람들은 군부와 형제단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모르시 축출 이후 시기의 담론에서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최근 몇 주 동안 일부는 특정한 쟁점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곧 마련될 헌법에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거나 점점 더 당국의 표적과 언론의 비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공개적 지지의 요청과 같은 것들이 있다.
9월 24일 그들 중 수십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운 조직 ‘혁명의 길 전선’(Road of the Revolution Front) 결성을 선언했다. 전선은 성명을 통해 “1월 25일의 주된 목표인 빵, 자유, 사회정의에 관심을 집중할 것을 목표로” 하며 자신들이 반혁명의 양날개라고 보는 무슬림 형제단이나 안보국가와는 어떠한 연합도 거부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굉장히 오래 동안 함께 해왔다”고 유명 블로거이며 무바라크 정권과 군부에 의해 투옥되었고 모르시 치하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던 알라 압델 파타는 말한다. “우리는 십년이 넘게 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왔다. 우리의 생각은 이 네트워크를 하나로 결합된 독립체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공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동맹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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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는 티핑포인트인가, 축출을 위한 구실인가.2013년 9월 12일
http://www.mei.edu/content/aziz-sinai#_ftn2
군부가 모하메드 모르시를 축출한 원인들의 분석들 중 상당부분이 무슬림 형제단의 실적, 다시 말하면, 국내 문제에서 실적 부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급성장한 자유주의 정당들과 역전의 무슬림 형제단 및 이슬람주의 동맹들 사이에 벌어지는 민간인들의 정치분쟁으로 끝났을 사건에 군대가 개입하기로 한 그 결정에서 시나이의 독보성(preeminence)에 대한 검토는 명백히 부재하고 있다.
모르시가 많은 실수를 함으로써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는 이집트인들이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의 정당성에 도전하게 만든 것이 사실인 반면,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시나이의 안보상황은 집권한 지 단 1년 만에 신속히 모르시를 축출하게 한 주요 추동력이었다. 모르시가 병사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만이 아니라 시나이로 들어오는 무기와 전투원의 증가를 막기 위해 물리적 전술을 동원하길 거부함으로써 그의 비난자들은 이집트군을 포함하여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경계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 관계자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으며, 이집트군은 자신들의 재정적, 군사적 이익들의 현상유지를 위해 자기 손으로 일을 처리했다.
2011년 혁명 후 군 최고회의(SCAF)와 그 뒤 모르시 치하에서 급격히 상승했던 시나이의 무법상태는 모르시의 외교정책과 국가안보의 변화를 표면화시켰고, 그 변화로 인해 미국과 지역의 핵심동맹인 이스라엘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익을 염려하게 된 나머지, 최우선적 교섭상대인 이집트군에게 개입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모르시 정권과 하마스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시나이에서 가자로 밀반입되는 물건과 무기는 심각히 늘어났다. 무기와 함께 다양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전투원들이 해외에서 들어왔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나이에서 이슬람 국가를 세우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이집트군을 공격하는 것에 이른다. 리비아와 수단에서 밀반입한 군대 수준의 무기를 손에 넣은, 해외에서 온 자칭 지하디스트들이 조직을 재정비하자, 이스라엘은 앞날의 일 때문에 불안에 떨게 되었고, 미국의 세계 대테러리즘 전략(Global Counterterrorism Strategy)을 위한 더 장기적 안목에서 초기단계를 제안했다. 그러는 사이, 시나이에서 납치되고 살해된 이집트 병사들의 문제를 일반적인 군사적 대응보다는 부족장들과 의견 조율을 통해 해결하는 모르시의 더 부드러운 접근방식은 그의 군대의 눈에 그를 순진하고 통치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모르시의 시나이 정책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에서, 미 군부의 축복을 받으며, 이집트 군부의 명쾌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시나이가 1월 25일 혁명의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은밀한 국가(deep state)가 반혁명을 후원하기 위한 구실일 뿐인지, 아니면 1월 25일 혁명의 애초의 목표들과 더불어 이집트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추동력에 불과한 것인지는 여전히 검토해야 할 일이다. 친모르시 지지자들과 군부에 반대하는 다른 이집트인들에 대한 악랄한 탄압, 임시정부 부통령 모하메드 엘바라데이의 사임, 비상계엄령의 발동, 가말 압델 나세르 장군과 같은 국가 영웅의 대접을 받으며 인기가 급상승한 압둘 파타 엘 시시는 후자보다는 전자를 암시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청년들과 자유주의 정당들은 자신들이 현재 이집트 권위주의의 역사의 가장 최근의 국면 속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계획단계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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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국가안보정책의 중심인 시나이이집트와 이스라엘이 1979년에 체결한 역사적 평화협정은 30년이 넘도록 미국의 중동정책을 보호하는 방벽의 역할을 해왔다. 바로 그러한 방벽으로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향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학대를 중단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국제적 압력이 거세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아랍의 핵심 동맹이다. 또한 평화협정은 미 해군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서 신속히 출동할 수 있게 하고, 이집트 영공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접근권을 제공하며, 이집트군에게 미제 무기를 구매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원조를 승인한다. 이뿐인가. 이집트는 미국의 세계 대테러리즘 전략을 위해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한다. 실제로 이집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용의자 인도 프로그램'을 통해 납치된 사람들의 빈번한 도착지였고, 그 곳에서 용의자들은 지하감방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았고, 죽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가장 많은 패키지형 해외원조를 받으며, 총 15억 달러 중 13억 달러가 군사원조에 할당된다.
/ 2009년 2월 10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에 의한 비밀인도 프로그램은 외국에서 테러용의자를 납치해 본국으로 보내거나 제3국에 비밀리에 인도하는 것으로 인도 후 고문 주장이 나오는 등 인권침해 비난을 받아왔다.”
http://www.yonhapnews.co.kr/issues/2009/02/10/1251010000AKR20090210211600009.HTML
시나이 반도의 보안, 그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과 접한 시나이 동부 국경지대의 보안유지는 이집트의 협정상 의무를 구성하는 필수요소다. 결과적으로 이집트 보안군은 역사적으로 국가에 의해 학대당해왔으면서도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토착 베두인족을 포함하여, 테러리스트라고 의심하는 누구에게나 무관용 원칙을 고수해 왔다. 국가의 고압적 전술이 이스라엘에 대한 가자의 맹렬한 공격을 지원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전투원들을 겨냥한 것이지만, 이러한 전술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종종 이집트의 베두인들이다. 국가는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조차 국가 자원을 부족하게 할당하면서 시나이를 방치해 두었고, 많은 이들이 수도나 전기 없이 생활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일부 베두인족들은 생존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밀수업에서 운반책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베두인들은 당연히 범죄자와 밀매범 취급을 당했고, 30년간 내내 비상계엄 하에서 군사법정의 판결에 따른 자의적 체포와 구금을 통하여 집단처벌을 당하게 되었다.
/ 보통 무관용이라고 번역되는 zero-tolerance는 말이 좋아 무관용이지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본보기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2011년 혁명 이전에는 시나이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띄엄띄엄 완화되었기 때문에, 지하터널을 통해 가자의 고립되고 황폐화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소비재가 전달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제한적 관행으로 가자 주민들은 소비성 품목과 식료품을 이스라엘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심각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치 빠른 이집트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베두인 운반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다양한 범주의 상품들을 은밀히 수입했다. 이러한 활동은 인도적 관심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패한 이집트 보안관료들에게 짭짤한 수익이 되었기 때문에 허가되었다. 실제로 무기와 소비재 모두를 포함하는 수백만 달러짜리 터널사업이 번성했던 것은 시나이 북부의 군 정보장교들이 두둑한 뇌물을 받는 대신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이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시나이 동부와 북부에서 이집트의 군사작전을 제한했기 때문에, 국내 보안군에게는 반도에서 경찰권만이 허락되었다. 내무부의 악명 높은 학대 행위는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베두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졌기 때문에, 그들의 가슴 속 깊이 사무친 국가에 대한 분노는 증폭되었다. 그러나 언론에 미치는 국가의 영향력과 더불어, 시나이는 이집트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학대당한 자들의 비통함은 종종 이집트 언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갔다. 따라서 그것이 무기나 물건 밀수에 관한 것이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리즘에 관한 것이든, 또는 베두인 주민들에 대한 체계적 학대에 관한 것이든, 시나이 문제는 1월 25일 혁명 전이나 그 후나 다를 바 없이 악화되고 있는 삶의 질에 정신이 팔린 대다수 이집트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나이의 긴장 상태는 혁명과 모르시의 집권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혁명 후 내무부 보안군들이 근무지에서 철수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무법상태가 격화되는 안보 공백을 초래했다. 이집트가 직면한 다양한 난제들 중에서도 단연코 모르시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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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무법상태의 확산과 모르시의 시나이 신정책1월 25일 혁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구들 중에는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이집트 내무부 보안군 개혁이 있었다. 보안군의 잔혹성은 청년들에 대한 일상적 괴롭힘과 철저한 수색에서부터 자의적 체포와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까지 다양했다. 수십 년간 무바라크의 국가 보안군은 시나이 베두인들을 가차 없이 수감, 고문, 투옥하고 때로는 수백 명을 죽였다. 따라서 혁명이 일어난 후 보안군의 철수는 반가운 변화였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시나이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집트 군대였다.
대공 미사일과 대전차 미사일을 포함한, 군대 수준의 무기가 시나이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군 최고회의(SCAF)의 지배를 받을 때였고, 모르시의 집권 내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무기는 리비아에서 밀반출되어 이집트 북부를 통해 시나이에 들어왔고, 다른 것들은 수단을 거쳐 들어왔다. 그 무기들 중 일부는 지하터널을 통해 가자로 들어갔고, 다른 것들은 모르시 정권의 이슬람 해석이 너무 느슨하다고 보는 극단주의 그룹들의 통제 하에 시나이에 머물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폭력적인 이슬람주의 그룹들의 눈에는 무슬림 형제단이 세속적 정치체제 내에서 활동하고,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을 유지하고, 국정에서 종교의 역할을 둘러싼 쟁점들에 대해서 양보하는 경향은 그들에게 배교자(traitor)의 자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SCAF의 관심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골치 아픈 전환과정을 억제하는데 집중되면서 종국에는 권력에서 강제 퇴출되기에 이르는 동안, 시나이의 폭력은 증가했다. 모르시가 집권한 후에도 폭력은 수그러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집트 경찰은 자칭 지하드 그룹들의 십자포화에 시달리게 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을 이집트 감옥에서 석방하기 위한 인질로 사용하기 위해 군 장병들을 납치했다. 일부는 검문소에서 무장 괴한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전임자들의 강경 대응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모르시는 그의 정권에게 베두인족 원로들과 모임을 갖고 그들의 고충을 듣는 한편, 시나이와 라파(옮긴이: 이집트와 국경지대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유혈 참사를 종식하기 위한 그들의 견해를 듣는 과제를 떠맡겼다. 종교를 끌어들여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 무력대응을 하기보다는, 국가 공무원들을 시나이에 파견해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살인을 재가하는 파트와를 발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종교적 교리 해석을 지적, 법학적으로 개정할 것을 권장했다. 2012년 11월, 보도에 따르면 모르시는 “나는 무슬림 손에 다른 무슬림의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시나이의 테러리스트 혐의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엘 시시 대장의 요청을 전면 거부했다.
또한 모르시는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했다. 그는 시나이에서 병사 16명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엘 시시 대장에게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메샬과 만나라고 명령했다. 군대와 내무부 보안군은 60년이 넘도록, 비폭력적 무슬림 형제단이건 그들보다 더 극단적인 지하디스트들이건 상관없이 이슬람주의자들은 무조건 짙은 의혹의 눈으로 보도록 훈련을 받아 왔다. 실제로 그들의 다수가 당시 국정을 운영했던 형제단의 일부 단원들을 체포, 수감, 고문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시시가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하길 거부했고,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은 날로 더 벌어져서, 보도에 따르면 좌절한 모르시가 틈이 날 때마다 시시에게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지위를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모르시의 시나이 전략은 수지맞는 무기 거래를 중단시키지도 못했고 극단주의자들을 완화시키지도 못했지만, 그를 권력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실세(옮긴이: stakeholder는 원래 판돈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이란 뜻임), 이집트 군부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의 폭력 사용을 모르시가 거부한 것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 시나이에서 보안을 유지해야 할 그의 의무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모르시의 더 부드러운 접근을 이슬람주의 단체들 사이에서 그의 충성심이 갈등을 겪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피살되거나 납치된 군경이 더 늘어나면서, 군대 내에서 모르시에 대한 신뢰는 곤두박칠쳤다. 모르시와 그의 형제단 후원자들에게 시나이에 관해서 숨은 속셈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들이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하에서 이집트의 국가안보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중동 전역의 범이슬람주의 연합을 추구하는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의 요구대로 움직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집트 군부에게만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의 중동정책에서] 중추적인 조약을 유지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르시는 중재자들이 이슬람주의 그룹들을 포섭하는데 실패했음이 명백해지자 시나이에서 더 공격적 전술을 썼지만, 뒤늦게나마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다(it was too little, too late). 동시에 모르시는 이집트군과 보안군이 시나이와 가자를 연결하는 밀수 터널에 물밀듯이 들어와서 무기와 이주민들의 월경 차단(cross-border interceptions)을 강화하고 불법 밀거래에 참여했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이면 아무나 체포하는 것을 승인했으나, 군 지도자들은 모르시의 정치적 반대자들과 밀실 협상을 시작한 뒤였다. 시간과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 이미 군부는 모르시에게 정치를 맡기기엔 부적합하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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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봉급 인상하라… 브라질 교사 파업 시위 격화http://news.khan.co.kr/kh_news/cp_art_view.html?artid=20131002224611A&code=970201
브라질서 교사와 경찰 병력 대 충돌
http://www.metr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3955
Anarchist group turns teachers’ march in Rio violent
Read more: http://newsinfo.inquirer.net/502591/anarchist-group-turns-teachers-march-in-rio-violent#ixzz2h6jXXKLm
Riot in Rio 07/08/13
http://youtu.be/HfDb0i45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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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유튜브 영상은 8월 7일이 아니라 10월 7일 영상인 것 같다.http://www.youtube.com/watch?v=gzjBIgYB214&feature=share&list=UU7G7saR0vFSMh-SdEyF3U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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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불운한 매체군사 쿠데타 후 지면에 무엇을 실어야할지는 기자들에게 위험한 질문이 되었다.
2013년 10월 7일
http://america.aljazeera.com/articles/2013/10/7/in-egypt-an-unhappymedium.html
이집트 카이로 - 9월 초, 현지 신문기자 아흐메드 아부 드라는 시나이 반도 북부에 있는 군사시설에 유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친척을 찾으러 갔다. 친척을 찾는 대신, 드라 자신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군사법정에 세워졌다.
석달 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드라는 시나이의 인신매매를 다룬 기사로 유럽연합이 주는 사미르 카시르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이제 그는 군대에 관한 허위 보도와 군사지역에 무단 침입죄로 조사를 받고 있다.
체포된 그 다음 날, 신문에는 “군에 체포된 테러분자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후줄근한 7명의 남자들 속에 얼룩이 묻은 흰 티셔츠를 입은 그의 사진이 실려 그의 친구들을 경악시켰다.
동료들은 그를 체포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이 보복이 아닌지 의심했다. 최근 드라는 시나이 북부에서 지하디스트들의 거점이라고 추정되는 세이크 주웨드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군사공격이 실제로는 민간인 가옥들을 파괴했으며, 한 사원에 피해를 입히고, 네 명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보도했다.
“이건 무바라크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례없는 행위”라고 시나이에서 근무하고 있는 또 다른 기자 모스타파 신가르가 드라의 체포와 공개망신에 대해 말했다. “아직도 제 발로 서지 못한 정권이 이런 짓을 하는 건 극도로 멍청하다고 봅니다.”
드라는 이집트 최초로 자유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무슬림 형제단의 전 고위관료인 모하메드 모르시를 전복한 7월 3일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군사법정에 선 기자가 되었다. 쿠데타는 이집트 사회의 대부분을 정부와 방송전파 위에 군림하는 군부의 지지자들과, 그 다수가 이슬람주의자들이며 주변화되고 억압된 군부의 반대자들로 양극화시켰다. 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거나 체포되었고, 모르시 지지자들은 재갈이 물렸다.
토요일 드라는 법정에서 허위 정보를 유포한 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가 3년 내에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를 경우, 다시 실형이 선고될 수 있다.
“[군부는] 우리는 아주 강해, 그러니까 우리에 관해서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드라의 변호인 네그아드 엘 보라이는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민족주의 정서의 물결 속에서 닥친 드라의 체포는 새로운 언론탄압이 모르시 지지자들을 넘어 군부 후원의 임시정부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로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정부는 보안군이 친모르시 연좌농성을 잔학하게 해산시킨 8월 14일 이후 전국에 선포한 비상사태를 최근 연장했다. 이미 형제단에 대해 적대적이며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는 주류 언론은 별로 저항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전반적으로 대다수 이집트 언론은 군부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고 있다 (...) 의도적으로, 확신을 갖고” 조지타운대에서 아랍언론을 연구하는 아델 이스칸다르는 말했다. “이집트에서 형제단을 지지하면, 별종(separate breed) 취급을 당하게 된다.”
이집트 민영언론은 비록 활력 있기는 하지만 항상 제약 속에서 운용되어 왔다. 무바라크는 집권 30년간 거의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았지만, 기자들이 그의 경제 정실주의(business cronyism)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아들 가말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계획에 대해 전보다는 덜 눈치를 보면서 비판할 수 있었던 그의 임기 말년에조차, 대부분의 기자들이 넘지 않으려고 했던 이른바 “레드라인”이 있었는데, 여기엔 이집트 경제의 대부분을 지휘하고 정권의 중추역할을 하는 군사기구에 대한 본격수사는 어느 것이나 포함되었다.
대부분의 매스컴은 무바라크 시절 부를 축적한 유력 기업가들이 설립했거나 여전히 소유하고 있으며, 성인 문맹률이 30% 가까이 되는 이 나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했다. 많은 매체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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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계 거물이며 자유이집트당의 설립자인 나기브 사위리스는 ONtv를 출시했으나 나중에 리버럴한 튀니지 영화 제작자에게 팔았다. 제약회사 경영진이며 친국가적 와프트당 당수인 엘 사예드 엘 바다위는 알 하얏트(옮긴이: 아랍어로 ‘삶’)를 소유하고 있다. 무바라크 시절 부동산계 큰손 만수르 아메르의 동업자였던 모하메드 엘 아민은 무바라크의 언론 자문관이었던 라미스 엘 하디디를 톱 앵커로 기용한 CBC(옮긴이: Capital Broadcast Center의 약자)를 소유하고 있다. 알 카히라 왈 나스(옮긴이: 아랍어로 ‘카이로와 인류’)의 소유주인 타레크 누르는 유력한 마케터 중 하나이며, 한 신문은 사설에서 그를 무바라크 당의 “응석받이 광고업자”로 묘사했다. 그의 회사는 무바라크의 2005년 대선 캠페인과 2012년 모르시의 상대였던 아흐메드 샤피크의 대선 캠페인 광고를 만들었다.이런 매체들은 개인 소유지만, 독립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이집트인들은 거의 없다. 2011년 무바라크에 대항한 봉기 기간에, 바다위의 하얏트나 13억 달러짜리 시나이 시멘트 회사의 회장 하산 라테브가 설립한 알 메흐와르(옮긴이: 아랍어로 ‘축’)와 같은 방송국들은 종종 시위를 매도했다.
그 해 2월 무바라크가 군 최고회의(SCAF)에 자리를 비켜준 뒤, 많은 매체들이 이번에는 장성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2011년 7월, 드림 TV 소유주 아흐메드 바흐가트는 - 보도에 따르면 그의 부동산과 TV 공장 제국은 무바라크와의 연줄을 통해 번영했다 - 아침 토크쇼 진행자 디나 압델라흐만이 군부에 대한 비판을 방송에 내보내자 해고했다. 장성들은 언론 소유주들이 자기들 편을 들게 설득할 수 없을 때에는 야수로 변했다. 그 해 10월 국영방송국 본사 밖에서 콥트교 시위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이 광란극을 방송하고 있던 방송국 25TV와 알 후라(옮긴이: 미국이 만든 아랍어 위성TV지만 현지에서 인기가 너무 없다고 함)를 군인들이 기습한 뒤 폐쇄해버렸다.
모르시는 2012년 6월 선거에서 당선된 뒤, 회의적인 언론에게 폭넓은 교양을 가르친 게 거의 없었다.
/ cultivate는 척박한 땅을 일군다는 뜻임.
새 헌법은 종교나 정부를 비판하는 자에 대한 규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상원은 뉴스 편집실을 다양화하는 대신, 많은 업계 종사자들이 반동적이거나 이슬람주의자라고 보는 사람을 국영신문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모르시 행정부의 첫 200일 동안 대통령을 조롱한 것에 대한 소송건수는 무바라크 집권 30년간의 4배였다. 모르시가 비사법적 선언(옮긴이: extrajudicial declaration은 모르시의 새 헌법선언을 말함)을 하면서 임명한 검찰총장은 그 중 일부를 실행에 옮겼다.
“모르시는 언론이 자신을 뒤쫓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언론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 때문에 대립이 시작되었다”고 언론인보호위원회(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 중동-북아프리카 코디네이터인 세리프 만수르가 말했다.
모르시의 집권기간에 그에 반대하는 시위를 취재했던 수십 명의 기자들이 그의 지지자들에게 폭행을 당했고, 한 신문의 기자인 엘 호세이니 아부 데이프는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다음 달 시나이에서 근무하는 또 한 명의 기자가 금지구역을 촬영한 혐의로 기소되어 군사법정에 섰다. 지지자들은 몇 번이나 미디어 제작 단지(Media Production City)에 분노했는데, 그들은 대부분의 민영방송국이 있는, 카이로 교외 서부의 이 언론 복합체가 반이슬람 편향에 포위되어 있다고 보았다.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CBC의 풍자 뉴스쇼 진행자 바셈 유세프가 모르시를 조롱한 것에 대해 공식 수사를 받은 사람들에 속했던 반면, 정부는 예언자 모하메드에 관한 투박한 아마추어 영화 “이노센스 오브 무슬림”에서 뽑은 장면들을 방송한 뒤 중동 전역에서 시위의 불을 지핀, 알 나스 방송국의 칼레드 압달라 같은 세속주의 앵커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용인했다. 모르시에 반대하는 대중시위가 발생하기 사흘 전인 6월 27일, 모르시는 몇 시간동안 계속된 연설에서 그 일부를 CBC 소유자 아민과 드림 소유자 바흐가트와 같은, 자신의 언론의 적들을 위협하는데 사용했는데, 그는 그들이 어마어마한 세금을 미납했다고 비난했다.
/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무슬림의 순진함”이라고 번역되는 “이노센스 오브 무슬림”는 “만듦새는 영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조악한데,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하마드를 사기꾼에 동성애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의 예고편이 유튜브에 공개되자 중동권에서 즉각적으로 반미 시위가 일어났다.”
http://koreaonair.com/?mid=news&page=4&document_srl=23011
“그는 세금 포탈자입니다. 세금을 물게 해줍시다” 이것은 모르시가 아민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그는 우리를 공격하는데 자신의 방송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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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제가 허물어지고 거리가 시위와 군중폭력으로 몸살을 앓는 7월이 될 때까지, 많은 기자들과 편집자들은 모르시와 형제단을 자신들의 생존과 이집트의 국가 정체성 양쪽 모두에 실존하는 위협으로 보았던 것 같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일부 뉴스 편집실들은 축제 시작을 알리는 폭죽을 터뜨렸다. 앵커가 앉아 있는 데스크를 둘러싼 ONtv 직원들은 박수를 치고 춤을 추면서 이집트 국가를 불렀다.“조국이 공격을 당하거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느낌은 조국을 잃은 느낌이나 마찬가지고 때로는 자아를 잃은 느낌입니다”라고 ONtv의 PD 알베르트 샤픽이 말했다. “우리가 TV 화면에서조차 축하하는 이유는 우리는 조국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고, 이제 우리는 조국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보호위원회와 국경 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쿠데타 후 지금까지 5명의 기자가 살해당했고 최소한 40명이 체포되었으며 무려 10명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보수적인 종교적 방송 네트워크와 형제단이 소유한 Egypt 25를 포함하여, 모르시에게 동조적이라고 간주되는 다섯 개 텔레비전 방송국이 폐쇄되었다.
형제단의 정치세력화(political wing)인 자유정의당의 공식 기관지는 지난 달 말 폐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모르시의 전복을 비판했던 다른 매체들은 공격 목표가 되었다. 알자지라의 이집트 지사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지만, 보안군이 들이닥쳤고 정부가 방송을 금지했다. 국영방송 TRT를 포함하여 터키의 3개 매체가 습격당했다. 국영 위성방송 Nilesat는 3개 범아랍 채널들의 전파를 방해(jam)했다.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군부에 순응했다. 쿠데타 사흘 전인 6월 30일에 터진 전국적 대규모 반모르시 시위를 군인들이 헬기를 타고 다니며 촬영했던 영상을 퍼뜨리기 위해 군부가 테이프를 건네주었던 CBC는 애국적 음악을 배경으로 깔면서 방송했다.
형제단이 미국을 비롯한 외세와 연합해서 이집트를 분열시키고 사보타주(옮긴이: 고의적 파괴행위)하려고 한다는 음모를 상세히 묘사하지만, 근거는 희박한 기사들이 국가 언론사령부(flagship newspaper) 알 아흐람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 중 한 기사를 보고 앤 피터슨 전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는 지체 없이 공개 대응했는데, 그녀는 그 기사를 가리켜 “어처구니 없고” “허구적이며” “이집트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라고 말했다.
쿠데타 후 대부분의 텔레비전 채널들은 거의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형제단을 가리키면서 이집트가 “테러리즘”의 위협에 놓여 있다고 선언하는 생생한 배너들을 방송에 부착했다. 7월, 군부에 대항하라고 형제단이 요청한 전국 행진이 최소 36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충돌로 끝난 다음 날, CBC 앵커 하디디는 “테러리즘”이 “가면을 벗었다”고 말했다.
하디디에 따르면, 형제단은 정부가 재앙을 해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불렀던 숨은 세력인, 이른바 “삼자(三者)”였다. 그녀는 반무바라크 시위 당시 이집트를 고문했던 폭력에 대한 책임을 형제단에게 돌리면서, 무바라크 정권 관계자들이 애호하는 내러티브를 앵무새처럼 흉내 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사람들을 죽인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묻는다. 교도소 문을 연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묻는다. ... 우리는 이 조직의 역사에서 숨기고 싶은 한 페이지(a black page)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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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 말, 모르시를 내쫓은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은 자신에게 “폭력과 테러리즘”에 맞설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시민들에게 요청했다. 이틀 뒤, 수만 명이 모르시를 지지하는 시위를 하면서 도로를 봉쇄하려다 경찰과 충돌하여 최소한 80명의 모르시 지지자들이 사망했다. 8월 14일, 경찰은 친모르시 농성장 중 가장 큰 곳인 라바 엘 아다위야 사원을 말끔히 치우면서 최소한 377명이 사망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사건을 이집트 현대사에서 최악의 집단살해라고 불렀다.이집트에서 가장 큰 방송국들은 그 전부터 몇 주 동안 친모르시 농성을 방송하지 않았고, 보안군이 라바 농성을 진압했을 때 리포터를 파견한 매체는 거의 없었다.
“나에게 최악 중 최악은 혁명이 시작했던 첫 날부터 참여해왔던 일부 친한 동료들이 ... 상대방인 형제단의 말은 듣지 않거나 그들의 관점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알 아흐람의 경제부 중견기자 사바흐 하마무가 자신의 고용주와 다른 매체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모두가 혁명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았습니다.”
친모르시 시위에 가보지도 않으면서 그들을 얕보는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리, 그녀는 영상과 사진을 찍기 위해 라바 엘 아다위야를 여러 번 방문했다. 그녀는 형제단에 친구들이 있었고, 과거에 자선행사에서 그들과 일한 적이 있었다. 알 아흐람이 그녀가 가져온 자료를 사용하길 거부하자,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블로그에 올렸다.
8월 14일, 농성장의 폭력사태가 진정된 뒤, 그녀는 다시 찾아갔다. “저는 모두에게 트윗을 했어요. 오늘 사망한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어디에나 시체들이 흩어져 있었다.”
동료들은 그녀의 말에 의문을 던지는 답글을 보냈다. 하마무처럼 편집국장이 자신의 영상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현장에 있던 알 요움 알 사바 신문기자는 자신이 찍은 걸 알자지라에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알자지라는 유일하게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주요 방송 중 하나였다.
“그날 밤 라바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는 언론은 없었다”고 하마무는 말했다. “아마 신바람이 난 언론은 있었을 겁니다. 그들에게는 현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이 되고, 라바는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에 따르면, 라바에서 사람들이 살해된 이후로도 보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군부가 저지른 짓에 대해 은총을 내리는 것은 광범위했고 거의 한결같았기 때문에, 일부 언론인들은 편집장과 언론 소유자들이 의도적으로 보도를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부와 보안군에 협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유출된 영상은 그러한 우려의 일부를 입증하는 것 같았다. 쿠데타 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서, 시시와 고위 장교들은 무바라크 실각 후 색이 바래진, 군부 비판에 대한 “레드라인”을 복원할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다. 한 장교는, 그의 말에 따르면, (군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이 난 민영언론 거물들을 “살살 구슬리거나 위압”하자고 제안했다.
시시는 그런 조치들은 이미 진행 중이라고 공언했다. “규칙과 제약들은 해체되었고, 재조정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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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민영 신문 중 한 곳(그 이름은 밝히길 거부했다)에서 모르시 행정부를 취재했던 칼레드는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종종 (군의) 고충처리부를 통해 팩스나 전화를 걸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부와 몹시 협력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집트 매체들에 폭넓게 배포된 이 팩스들은 일반적으로 언론이 다루어야 할 보도 범위와 시각에 관한 의견뿐만 아니라, 군부가 기사와 방송에 노출되길 원하는 정보들을 포함했다./ Morale Affairs Department는 고충처리부라고 풀어 썼지만, 이 말 그대로 옮기면 (군의) 사기진작에 관한 업무를 다루는 부서입니다. 이 명칭은 영어권 사람들에게 조지 오웰의 1984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고 합니다. 이 부서를 담당하는 책임자는 군최고회의(SCAF) 소속입니다.
칼레드에 따르면, 정보는 종종 한심할 정도로 거짓이었는데, 일례로 그가 2009년에 국제부에서 일했을 때 받았던 팩스에는 하마스가 50만 대군을 보냈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국장들은 종종 기자들에게 그런 내용을 기사로 옮기라고 했다고 그는 말했다.
모르시에 반대하는 6월 30일 시위 후, 군부의 팩스와 전화는 증가했다고 그는 말했다. 다양한 매체에서 동일한 보도가 나왔는데, 이를테면 한결같이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 배너를 부착하거나, 돌연히 영어로 전환했고 - 일부는 해외의 기자들과 시청자들을 좌지우지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 그는 이것이 군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칼레드는 쿠데타 후 모르시 축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려다 일부 동료들에게 형제단 단원이라고 비난을 받았다고 말했다.
ONtv PD 샤피크는 군부가 자신의 방송국에게 하달하는 뉴스 속보와 안내방송은 무해하며, 미 국방부가 일상적으로 하는 공보활동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코 사건을 어떻게 보도해야하는지에 대한 “제안들”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모르시의 전복에 대한 ONtv의 보도는 “무엇보다도 이집트적이며, 그 다음 전문적”이었다고 말하면서, 테러리즘에 대한 조국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형제단에 속하는 일부는 자신들이 희생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나는 결코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많은 매체들이 무바라크 실각 후 16개월의 군정기 동안 매일같이 고충처리부가 보내는 팩스와 확인전화가 푹주했다고 증언했다. 때때로 장성들은 생방송 도중에 전화를 걸어서 초대손님이나 앵커들에게 답변할 테니 방송에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일부 장성들은 계속해서 편집장과 사주들을 면담했다. (ONtv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진행자이며 스타 방송인인 요스리 푸다가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난 후인 3월에, 군 공식대변인은 그의 병문안을 갔으며, 보도에 따르면 시시는 그에게 응급의료 전용헬기를 사용하게 했다).
때로는 가혹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그 다음 달, ONtv 푸다의 동료 림 마그에드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헌병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비난한 뒤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복종을 거의 보장할 수 없었던 초창기였다.
“때때로 언론인들은 팩스를 찢어버렸다. 말 그대로 무시하곤 했다”고 이스칸다르(옮긴이: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조지타운대에서 아랍언론을 연구하는 아델 이스칸다르임)는 말했다. “언론의 담론은 [군부]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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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후 대안적 목소리들은 사라지거나 침묵 속으로 떠밀렸다. 빈번히 모르시를 비판했던 CBC 코메디언 유세프는 7월 3일 이후로 텔레비전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는 탄압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썼다. 9월에 모친의 사망으로 그의 공백은 연장되었다. 푸다는 7월 9일 일을 중단했다. 그는 사고로 인한 치료를 받기 위해 직장을 잠시 떠나며 10월에 복귀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마그에드도 소리소문 없이 휴가를 냈다.“@ontveg(옮긴이: ONtv 트위터 계정)에서 정직처분을 내리거나 일을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그녀는 8월 말 트윗을 남겼다. “하지만 가끔은 침묵이 가장 정직한 뉴스고, 다시 알려드릴 때까지는 침묵하기로 했습니다.”
이달 초 알 아흐람의 자매지인 타블로이드 주간지는 신정부를 비판했거나 의구심을 표현했던 많은 이슬람주의자들과 진보적 인물들의 이름을 밝히는, 이른바 “제5열 블랙리스트”를 실었다. 이 명단에는 라바 엘 아다위야 살인극 후 총리를 사퇴하고 이집트를 떠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와 모르시에게 반대했지만 탄압에 의문을 제기한 자유주의 정치인 암르 함자위가 포함되었다. #제5열을 사용한 트위터 사용자들은 푸다, 마그에드, 군대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무바라크와 모르시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던 많은 활동가들을 명단에 추가했다.
“이것은 우려할만한 추세며 2011년 혁명 이전의 언론 분위기로의 퇴행”이라고 2011년 봉기 기간에 국영 나일TV 부본부장을 사직했던 사히라 아민이 말했다.
사직한지 몇 달 뒤 아민은 새 토크쇼 진행자로 방송국에 재합류해서, 무바라크의 몰락 후 더 정직한 보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쿠데타 후 그녀의 프로그램은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녀의 CNN과의 인터뷰에 대해서 항의했는데, 그 인터뷰에서 아민은 모르시 축출 운동이 “민중에 의한 반란”이며 “점점 더 쿠데타를 닮아가고” 있고 “보안군, 무바라크 충성파, 그리고 어쩌면 정보기관, 경찰, 군대”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말했다.
군부의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유일한 주요 방송인 알자지라는 형제단과, 이 방송망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르시 정부에 80억 달러의 차관과 무상원조를 지원했던 카타르의 외교정책에 대해 구제불능의 우호적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집트인들의 폭넓은 견해다. 알자지라는 현재 다방면적인 혐오를 받고 있으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알자지라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평가들은 실수와 사기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무바라크 통치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하는 인터뷰 대상을 침묵시켰던 일. 형제단에게 대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선별해서 출연시키고, 형제단 지지자들에게는 상세히 말할 수 있게 허락했던 일. 모르시를 전환기의 지도자로서 칭찬하면서 그에게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들은 무시했던 일.
보도에 따르면 알자지라의 편집방침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 일부 직원들이 직장을 박차고 나갔다. 심지어 카타르에 있는 알자지라 본사 영어뉴스 편집실에서도 불화가 발생해서, 기자들은 선임 앵커가 라바 엘 아다위야 살인극이 터진 후 뉴스에 출연한 형제단 단원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 때문에 가혹한 비난을 당한 뒤 진행하고 있는 정규프로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며 현지 뉴스 웹사이트(옮긴이: 도하뉴스를 말함)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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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의 실각 하루 뒤, 알자지라 이집트 지사 뉴스 진행자이며 이 네트워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아흐메드 만수르는 군부가 임명한 임시 대통령을 “종교를 증오하는” 유대인이라고 말했다고 형제단 웹사이트가 인용했다. 나흘 뒤, 모르시 지지자들과의 회담에서 슬로건을 어떻게 짜고 대중에게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조언을 하는 그의 모습이 촬영되었다.“우리의 수사법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그가 말했다. “그들은 6월 30일 쿠데타고, 우리는 1월 25일 혁명입니다.”
매일같이 “비방전”을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알자지라 대변인 그하산 아부 후세인은 이집트를 “양쪽 각도에서” 보도해왔다고 말했다. 알자지라가 편향적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알자지라를 시청하지 않거나 ...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그냥 7월 3일 밤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 날 군부는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했고 보안군이 와서 우리 사무실을 폐쇄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때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에서 세 명의 출연자가 생방송 중이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이 반모르시였습니다.“
모르시의 몰락 후, 알자지라 기자 45명이 억류나 감금당했다고 후세인은 말했다. 그는 영어뉴스 편집실에 불만을 늘어놓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근거 없고 사실이 아닌” 음모론이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자지라 방송에서 감지되는 당파성은 많은 이집트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제 기자들은 수시로 민간인과 경찰 양쪽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이따금 알자지라 직원으로 오인된 기자들도 공격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알자지라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모든 정치 성향의 매체들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알자지라만이 직업적 규범(professional standards) 없이 운영되는 채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이집트에서 언론 현장 대부분이 양극화되어 있기 때문에 직업의식(professionalism)은 대단히 실종되었다”고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과장 라샤 압둘라가 (한 신문에) 썼다.
압둘라의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모하메드 엘마스리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쓴 신문 기고문에서 반모르시 레토릭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본 것과는 차별화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프로파간다전(선전/선동)에서 정치인들이 아니라 뉴스 보도와 신문이 선두지휘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6월 30일 반모르시 시위의 준비기간에 드림 TV, CBC, ON TV의 심야뉴스쇼는 출연자들과 스토리 구도(story angles)에서 획일적으로 “반이슬람” 편향을 노출시켰다.
이제는 심지어 정부의 유혈진압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불편해하는 기자들조차 쿠데타 전으로 되돌려놓으라거나 모르시 행정부를 원상복구하라는 시위자들의 요구를 듣는 게 썩 내키지 않는 눈치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집트 군부보다는 무슬림 형제단을 그들에게 더 큰 위협으로 보고 있다”고 이스칸다르는 말했다. “지금 과도기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못마땅하지만 그 대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많은 기자들에게는 침묵을 지키려는 열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쿠데타 이후 이집트에서, 장성들은 이해가 빠른 기자들과 군대를 “구세주”로 보는 대중의 상당수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군부가 전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스칸다르는 말했다.
언론인보호위원회의 만수르는 쿠데타 후 국영언론과 민영언론이 부각시키는 슬로건과 보도에서 정부와 “일종의 공조”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자기 검열이나 편집 통제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순수한 당파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두 진영 사이의 충돌은 매우 뚜렷해졌고, 양진영 모두 언론을 이용해서 뉴스를 자신의 시각에서만 다루고 있고, 많은 점에서 순수한 프로파간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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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에 이집트 혁명과 쟁점 토론회가 열린다고? 국제문제활동가연구자모임이라.. 최재훈, 원영수, 박석삼, 정은희, 그외에 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만 들어도 한심하다.이번 토론회를 통해 ‘아랍의 봄’ 이후 미국 등 서방의 이집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란, 팔레스타인 관계 등 이집트 혁명 후 변화된 서방의 대 중동정책의 현재에 대해서도 분석할 예정이라니..
국제문제는 고사하고 아랍문제에 대해서 정말로 관심이 있었으면 이제와서 저런 토론회를 할까. 나는 그동안 기사들을 번역하면서 자료를 찾던 도중 정은희가 그동안 썼던 글을 보게 되었다. 정은희는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청년 활동가들의 시각을 여과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 사태가 이토록 오랫동안 진전되도록 그들은 한 일이 없다. 이것은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국제활동가연구자로 행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동력으로서 미 대외정책의 정교한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전쟁에서 언론이 맡은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비아 사태 때 여기에 있는 박석삼씨 블로그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이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언론 모니터링도 제대로 안하고 있다가 일이 터지면 수습토론회나 하는 사람들이 무슨 연구자들이냐. 사태파악은 총체적인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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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희는 앞날이 구만리니까 실력을 갈고 닦을 기회나 있지, 최재훈은 나이가 몇이고 경력이 몇년인데, 가망없다. 최재훈 글을 보고서도 남들 보라고 신문에 싣는 사람들이나 그 사람을 또 불러서 발제를 시키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 오합지졸들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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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난당하거나 조롱당하더라도 나는 분명히 확신이 있다. 나는 외신이 예닌학살과 이라크전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고 있다. 그 전쟁에서 언론이 수행하는 심리전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은 확신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혁명이라고 우긴다면 나는 그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반혁명은 테레비에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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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와 2011 혁명2013년 9월 6일
http://www.jadaliyya.com/pages/index/14023/the-egyptian-military-and-the-2011-revolution
이집트 군부는 현대 이집트 국가가 시작한 이후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주체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말 이래로, 군부를 맥락화하고 역사화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그러나 군부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집트 정계와 재계에서 지배층의 기구며 집합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우리의 현 시점에서 이러한 계열의 연구조사(such a line of inquiry)가 갖고 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최근 몇 년간 군의 정치 관여를 심화시켜 왔으며, 2011년 18일간의 봉기와 그 이후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상황을 대단히 명쾌하게 해명해 줄 것이다.
/ 맥락화(contextualize)는 “역사 연구에서 다양한 배경들을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의 개념으로 구축하는 것”을 말하며 역사화(historicize)는 찾아본 결과, 너무나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말한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such a line of inquiry)”과 연관시켜 보면 ”어떤 사실도 학문적인 담론 속에서 사실자체로 재연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치밀한 서술이라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학문의 사실담론은 무수한 틈새를 지닙니다“. 그 틈새들을 채워나가는 것이 ‘역사의 허구화’이며 ‘허구의 역사화’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식과 상상의 긴장 (M. 엘리아데-종교와 신화, 2003.10.30, ㈜살림출판사)
이를테면 2011 혁명에 직면했을 때 군부가 취했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군부가 이집트 지배계급의 다른 구성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분석하는 것, 특히 시간의 경과에 따른 정치적 행위자들의 재배치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지배계급 내에서 어떤 권력이동이 발생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응집력과 이집트를 통치하는 능력에 어떤 제약을 가져왔는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배계급 내의 이러한 권력이동이 2011 봉기와 군의 개입에 공헌했던 사회적 긴장과 어떻게 관련을 맺었나. 군부와 보안군을 다른 지배층과 함께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일부로 개념화하는 것은 유용하다. 이러한 권력 역학 내부에서 균형이 깨지거나 주요한 이동이 발생하게 되면, 지배계급 내부의 변화는 자국민에게 경제적, 사회적 압박을 가하는 정책들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결국에는 사회불안을 초래해서, 지배계급의 통치력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 전체에 중대한 파문을 몰고 올 전환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기사는 2011년에 군부가 이집트의 민간인 지배층과 갈라서기로 한 결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며 군부가 1990년대에 지배계급 내에서 새롭게 부상한 집단과 대면했을 때 취했던 입장을 분석한다. 이 글은 지배계급 내부에서 권력의 역학관계의 변화가 2011년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군부가 2011년에 개입하기로 한 동기는 무엇 때문인지, 이 둘을 모두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11년에 이르기까지, 신흥 지배층으로 떠오른 집단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면서 지배계급 내부에서 군부의 위치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2011 봉기와 그 후 군부 개입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이집트 군부
일반적으로 흔히 혁명으로 이해하는 1952년 쿠데타는 공식적인 이집트 독립의 시작을 나타낸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으로 알려져 있는 군부 내부의 운동이 권력을 잡았고 파루크 왕을 몰아냈다. 이 과정으로 인해 곧 영국의 이집트 점령이 끝나게 된다. 자유장교단은 혁명사령부위원회를 형성해서 과도기를 선언했다. 1956년 새 헌법이 선언되었을 때, 새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는 장관들의 임명권을 포함하여 막대한 권력이 주어졌다. 경제 일선에서는 산업화와 국유화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쿠데타는 이집트를 군부가 지배하는 국가가 경제의 목표와 방향을 지휘하는 나라로 변형시켰다. 이러한 진전과 일치하도록 지배계급 내부에서는 토지소유 부르주아지들의 영향력이 신흥 산업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후퇴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나세르의 지배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군부의 탁월한 정치적 역할을 제도화했고 생산수단에 대한 군부의 통제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이집트 군부는 혁명 정통성의 역사를 계속 끌어들이고, 많은 이들은 군부를 애국적 기관으로 본다. 1881년 우라비 혁명, 자유장교단 운동,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민중의 상상력 속에서 군부의 중대한 역사적 역할을 강화한다. 더욱이 1952년 후 군부는 자신을 반식민주의 세력으로 묘사했고, 나세르와 같은 군 지도자들은 1952년 쿠데타의 동기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perceived) 왕정의 부패만이 아니라, 주로 이집트에서 영국군의 주둔이었다고 설명했다. 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춘 민족주의 레토릭을 첨부한, 이러한 반식민주의 신용증명서들은 군대가 대중들 사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당성을 갖게 했다.[ii]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새 정권의 반식민주의적 입장을 명백히 보여주는 역할을 했고, 이러한 진전은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군부에게 이런 대중적 정당성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결국 나세르의 두 후계자들은 군부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의무징병제는 전보다 더 많은 대중이 이 제도와 유대를 맺을 수 있게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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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이 민족주의적 레토릭의 많은 부분이 산업화에, 그리고 나중에는 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초기의 재분배 정책은 이집트의 새 정권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분류하는데 기여했지만, 논란의 여지는 있더라도 나세르 시기는 자본주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그 시기에 지배계급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결합시켰다.
군부의 국제적 동맹들은 군부의 강력한 지위를 한층 더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나세르와 군부를 권좌에 오르게 한 1952년 쿠데타의 뒤를 이어, 이집트는 비동맹주의 정책(옮긴이: 냉전체제에서 어느 한 진영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이집트 사이에는 노골적인 충돌은 아니더라도 수에즈 운하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식민 점령과 같은 핵심 쟁점들을 둘러싸고 종종 심각한 수준의 긴장이 존재했다. 사다트가 대통령이 된 것은 경제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모두에서 이집트 외교정책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경제적으로 사다트의 인피타흐(개방) 정책은 이집트 시장의 문을 열었고, 해외직접투자가 쇄도했다. 정치적으로 이집트는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결과 이집트와 아랍국들 사이만이 아니라,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군부와 정계의 핵심 인물들과 사다트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다. 모하메드 이브라힘 카멜 외무장관은 “눈앞에서 펼쳐진 이 비극을 보면서 나는 수치스럽고, 메스껍고, 비통해서 죽을 뻔 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래, 이집트는 미국의 군사원조 2위 수혜국이었으며, 일년에 총 20억 달러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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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탈정치화?나세르 시대 후 이집트 정치에서 군부의 역할은 문헌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하젬 칸딜은 군부가 독립 후 이집트 국가(post-independence Egyptian state)를 수립한 1952년 쿠데타를 후원했지만, 그 후 곧 그들을 주변화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모두 탄압도구로서 군부보다는 국가 보안기구를 선호했고, 무바라크 치하에서 군부에 대한 도전을 상징하는 새로운 지배 집단이 부상했다. 이 새로운 경제 엘리트는 지배계급의 중핵이 되었고, 따라서 군부의 위치는 구석으로 몰렸다. 그러나 예지드 사이으 같은 이들은 이집트가 2011년까지 (그리고 그 후로도) 변함없이 군사국가(military state)였으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집트의 정치, 경제권 내에서 군부의 가시성(visibility)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2013년 6월 30일 후 이집트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과 특히 관련 있다(highly pertinent).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군부는 그 전까지는 지배계급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 보면, 군부가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났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군부는 계속해서 공중의 상상 속에서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으며, 경제권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변함이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군 고위간부들이 무바라크 정권 아래 있던 부패한 체제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들을 포섭하기 위한 더 폭넓은 시도의 일환으로서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더구나 군부는 이집트 국가의 수립 이래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비록 지배계급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다른 지배층들과 마주치면서 변했다 하더라도, 계급 내에서 그들의 존재는 부정하기 어렵다.
/ 공중은 군중과 대립되는 개념이며, 소수의 엘리트와 대다수의 매스(대중)를 포괄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중 [public, 公衆] (두산백과)
다른 한편에서 보면, 정부들이 연이어서 그들이 위험하다고 보는 군 간부들의 권력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은 분명하다. 무바라크의 대통령 시절, 후원(옮긴이: patronage는 보호-피보호의 수직적 종속관계를 의미함)과 경제적 유인(incentives)을 통해 군부를 체제 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빈번했고, 압드 알 하림 아부 가잘라 전 국방장관처럼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군 간부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iii] 더구나 나세르 정권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사다트와 무바라크 정권에서도) 국내 보안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을 확장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것은 내무부가 미증유의(unparalleled) 권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77년 “빵 폭동”이 발생하자 사다트는 군부에게 평온을 되찾으라고 지시하고 난 뒤, 소요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 본 그는 경찰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무바라크 시절에 내무부는 대권을 장악했고, 경찰의 잔학성은 서서히 이집트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권의 경제 정책들이 가져오는 결과들이 오로지 강압적으로만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변화들은 앞으로도 계속 군부의 자리를 주변으로 내몰게 될 신흥 엘리트들의 출현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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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1989년 무바라크는 아부 가잘라가 금지된 미사일 기술을 이집트에 수입하려는 계획을 꾸몄다는 혐의를 받자 국방장관을 교체했다. 아부 가잘라는 군대와 국민 모두에게 대단히 인기 있었고, 오래 전부터 무바라크의 경쟁자로 지목되어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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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의 재배치지배층 내부의 권력 이동은, 특히 이집트 경제에 대한 통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군부를 지배계급 내에서 다른 행위자들과 대면하게 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세르 치하에서 국유화와 산업화 계획은 군부가 경제의 광활한 부문들을 통제하도록 보장했다. 사다트 정권에서 주목할 만한 국가부문의 민영화로 인해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될 무렵에 군부는 다시 전통적으로 민간인 통제에 속했던 영역으로 경제적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사다트 집권시절 내내 군부는 경제 영역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켰으며, 관광, 산업, 부동산에 관한 주요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들을 진행했고, 그 모든 것이 정부의 감독을 면제받았다. 이러한 확장은 세 가지 영역에서 단연 돋보였다. 농업과 토지개간, 무기제조, 건축 및 정비(construction and services).
(비록 그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오늘날 유명한 군부의 경제적 제국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의 일부, 그 중에서도 특히 무기생산과 수출에서 나오는 수익은 비밀에 부쳐졌을 뿐만 아니라, 군부는 전기를 비롯하여 생산에 투입되는 요소들(manufacturing inputs)에 대한 보조금 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at a subsidized rate) 수익을 창출했다. 군부가 투자하기 시작했던 또 다른 경제부문은 농업과 식량생산이었다. 사막을 도시개발을 위한 땅으로 개간하는 사업은 1980년대까지는 사다트 정권 아래 민영기업이 담당해왔지만, 군부의 활동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또 군부는 무바라크 시절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들을 떠맡았다. 따라서 1980년대는 군부가 국가와 민간이 통제하던 영역으로 치고 들어와 무수한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로 인해 이 산업들을 통제하던 부르주아지들과 군부 사이에 새로운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이 되었을 때, 가말 무바라크가 소유한 기업인 서클의 도를 넘는 민영화와 독점화는 다시 한 번 경제 영역에서 군부의 지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무바라크 치하에서 새로운 경제 지배층이 출현했는데, 그 핵심인물은 그의 아들 가말이었다. 이 그룹은 지배계급 내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되었고, 이들의 특징은 자본주의 축적의 한 방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굴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자유주의 세력의 존재는 지배계급 내부의 변화를 암시했고, 그들은 곧 통제에 대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집권당인 국민민주당(NDP) 내부에서 특히 그러했다.[iv] 그들의 독점 자본주의는 특정 영역에서 낙인을 찍으며 군부의 독점을 위협했고, 그들은 특히 과거에는 국가와 군부가 통제했던 부분들을 민영화하는데 주력했는데, 여기에는 국영은행들과 토지개간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도전들은 주로 가말 무바라크와 NDP 내부의 새로운 신자유주의 세력이 퍼뜨린 정책들의 결과였다. 가말과 그의 기업인 친구들의 영향력 확대는 특히 집권당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위원회 중 하나인 정책위원회 내부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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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한 예로 그들은 집권당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확대하려 했다. 그들은 NDP와 의회를 손에 넣은 뒤, 내각을 장악했다. 핵심 기업인들이 NDP 내에서 중요한 지위에 임명되었다. 철강왕 아흐메드 에즈는 의회에서 다수당 대표가 되었고 가말 무바라크는 NDP 사무차장이 되었다.
무바라크의 이집트는 중동에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티모시 미첼이 언급한 것처럼,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는 능력과 걷잡을 수 없는 민영화 양쪽 다 불균등하게 적용되었고, 따라서 소수의 지배층만이 그 혜택을 누렸던 반면, 대다수 이집트인들은 삶의 질이 하락되는 경험을 했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이 이집트의 사회계급들 사이에 거대한 심연들을 창조했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그들의 독점 자본주의를 통하여 군부를 포함하는, 지배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위협을 제기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무바라크의 집권 30년째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이집트 경제의 상당 부문을 독점하게 된 이 집단은 경찰과 보안군에 광범하게 의존했다. 이 사실은 보안군이 점점 더 증가하는 노동자 파업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특히 분명했다. 계급 간의 긴장은 계속 증가해서 폭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강압을 훨씬 더 절실하게 했다. 경제적 착취에 필요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가인상과 불평등확대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치안유지 활동은 증가했고 경찰의 잔학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계급 갈등의 주된 원인은 점점 더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자유주의였고, 사회계급들 사이의 점점 더 넓어지는 격차, 미시적 수준에서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의 효과들, 그리고 해외자본의 유입과 민영화의 확산(이것은 군부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에서 가시화되었다.
게다가 정치적 수준에서 체계적인 선거 조작과 보안군의 잔학성의 증가는 이집트 사회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전환(transformation)은 이제 완성되었다. 주로 신자유주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부와 보안군의 지원을 받는 집권당은 이집트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손에 넣었다. 불평등 확산, 기본물품의 가격 인상, 그리고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나는 노동자 파업으로 인한 계급 간의 긴장은 이집트 사회의 중요한 부위들이 점점 더 생존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암시했다. 이 신 지배층의 정책 때문에 가파르게 상승하는 사회 불평등과 신흥 신자유주의 엘리트가 제기하는 위협의 조합은 군부가 2011년에 개입한 이유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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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과 2013년 - 지배계급 내부에서 중앙으로 재진입하려는 군부의 시도들2011 봉기 기간에 군부에게 닥친 선택들은 여러 가지 요인들의 산물이었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다양한 단위들이 파업을 단행하겠다는 위협뿐만 아니라 시위를 통한 기층 민중의 압력이 당국으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를 해결하도록 강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들의 요구는 사회정의와 자유에 집중되었고, 아울러 경찰의 잔학성과 내무부 개혁은 중심적 역할을 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고,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군부의 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군부가 이집트 지배계급 내에서 위상이 추락하는 것에 대해 마음을 태웠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고, 군 고위층 내에서 부패한 인물들을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재판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 역시 절박했다. 2011년 2월 호스니 무바라크의 강제 퇴임에 이어, 이집트는 시의적절하게(duly) 군 최고회의(SCAF) 밑에서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기에 들어갔다. 다시 한 번 군부는 이집트 정치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혁명적 시위들이 무바라크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은 군부가 “혁명의 편을 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시위자들의 요구에 공감해서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군부가 전략적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가말이 대통령직을 맡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뻔했기 때문에, 군부는 이제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이집트에서 민간인 대통령이라는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가말 무바라크가 이끄는 신 엘리트 집단은 혁명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긴장을 악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이제 그 혁명은 지배계급 전체를 끌어내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군부의 특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배계급의 교체로 인한 경제 정책들, 그것도 주로 핵심 산업들에서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들은 나세르 때부터 존재해왔던 세력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지배계급 내부에서 자신들을 재중앙화(re-center)할 수 있는 이 기회는 군부가 2011년 개입하게 된 동기를 유발했다. 이 개입은 군부 주도의 과도기로 이어졌고, 그 뒤를 이어 2012년 대선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고위급 인물인 모하메드 모르시가 당선되었다. 무엇보다도 모르시 정권에서 작성한 헌법은 군부의 특권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르시가 군부를 막사로 돌려보내려 했다는 내러티브에 의혹을 제기한다.
모르시에 반대하는 2013년 6월 30일의 광범위한 시위 후, 군부는 다시 한 번 중앙무대로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대중적 지지가 대단했다. 7월 3일 압델 파타 엘시시 장군은 모르시는 더 이상 이집트 대통령이 아니며 헌법은 정지되었다고 선언했다. 아들리 만수르 최고헌법재판소장이 임시 대통령직을 맡았다. 6월 30일 시위는 모르시 집권 1년에 대한 깊은 불만에 그친 것이 아니라, 2011년의 요구들 중 많은 것들의 연장선을 나타냈다. 헌법 개정은 비이슬람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헌법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12월 대통령궁 앞에서 발생한 폭력적 충돌사태는 모르시가 통치하는 이집트에서 경찰 폭력의 역할에 관한 의문을 낳았다. 이러한 사태는 이집트에서 신자유주의를 더욱 더 공고히 할 IMF의 신규대출의 가능성과 함께, 이집트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서 우려를 일으켰다.
이 개입이 군사 쿠데타에 해당하느냐에 관한 논쟁은 지금까지 풍부했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 개입이 2012년 대선 후만이 아니라 2011년 이전의 지배계급 내부에서 군부의 지위를 조명해줄 수 있느냐이다. 분명한 것은 6월 30일 후 이집트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주로 그것이 쿠데타인지 아니면 민중 혁명인지 질문하는 것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조합이었다. 그 사건에 연루된 다양한 행위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6월 30일 이후로 전개된 사건들에서 중요한 측면은 시위가 군 자체와 군의 특권적 지위가 표적이 되는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군 엘리트들의 시도였다. 이것은 2011년 이후 군부가 두 번째로 개입한 것이었고, 두번의 개입 모두 풀뿌리 수준에서 대규모 동원과, 중대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구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리고 그것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보고 난 뒤, 장래의 사태 추이를 결정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군부와 모르시 정부 양쪽 모두 이집트에서 재분배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프로젝트인 신자유주의 통치를 지속시키고 강화하는데 한 몫 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혁명의 핵심적 요구들을 지속적으로 방해한 것은 바로 이 프로젝트이며, 따라서 이 프로젝트를 위협하는 대중 동원이 지속되는 것을 막는 것은 전체 지배계급의 관심사다. 2011년에 앞서 그들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도전과 더불어, 이 사실은 2011년에 왜 군부가 개입했는지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군부는 거리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군부의 관심사는 주로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서, 2011년 이후로 많은 시위자들이 해체하려고 애써 왔던 정확히 바로 그것인, 지배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프로젝트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현상 유지다. 2011년 1월 25일의 중심에 있었던 요구들, 특히 사회정의에 관한 요구는 지배계급과 그들의 정책의 타도를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혁명의 핵심적 요구들의 완수는 지배계급의 전복을 수반하는 반면, 군부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배계급을 재배치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2011년과 2013년의 군부 개입을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지배계급 내부의 이동들과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다양한 지배층들은 헤게모니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 공동의 이익이며, 지배계급 내에서 한 집단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중단될 위기에 놓이면 2011년과 2013년에 그러했듯이 충돌과 배출(defections)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2011년과 2013년의 군부의 개입은 지배계급 내에서 자신의 중심성을 회복(특히 2011년 후)하고 시위 그 자체로부터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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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의 진정한 최고 승자봄이든 겨울이든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지난 3년의 격동은 역사적으로 유대국의 적들을 보편적으로 약화시켰으나, 이스라엘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http://www.thetower.org/article/the-real-big-winner-of-the-arab-spring/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혁명의 해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그 재난은 국경지대에서 치안을 악화시켰고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게는 중대한 좌절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면 뉴욕타임스 컬럼니스트 토머스 L. 프리드먼은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자신의 전략적 환경에서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다”고 썼다. 워싱턴포스트 컬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내셔스는 “아랍의 봄이라는 이스라엘의 두통거리”라는 컬럼을 기고하면서 가담했다. 중동 전문가 파와즈 게르게스(옮긴이: 런던 정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이며 중동연구센터 소장이고, “지하디스트의 여정”의 저자임)와 그레이엄 풀러(옮긴이: 20년간 중동에서 CIA 활동을 했으며, "The Future of Political Islam"과 "A World Without Islam"을 비롯해서 수많은 책을 썼음)는 각각 이스라엘을 가리켜 “최대의 패자”, “명백히 유일한 최대패자”라고 말했다. 워싱턴 D.C.의 저명한 싱크탱크들의 분석은 이러한 평가를 그대로 따라 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관료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는 것 같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아랍의 봄이 “이슬람류, 반서방류, 반자유주의류, 반이스라엘류, 반민주주의류 열풍”이 되었다고 경고했다. 에후드 바라크 전 국방장관은 격변에 대해 “매우, 매우 충격적”이라고 했고, 그의 전임자들 중 하나인 베냐민 벤엘리에제르는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전 군 정보부장(옮긴이: 우리의 보안사령부와 같은 IDF 정보기관 ‘아만’의 수장)이며 현재 이스라엘에서 가장 저명한 싱크탱크들에 속하는 연구소 대표(옮긴이: 텔아비브대 국가안보연구소인 INSS 소장)인 아모스 야들린은 “지금으로서는 이스라엘은 지는 쪽에 있는 것 같다. 더 심각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썼다. 요시 쿠퍼와세르 이스라엘 군 전략부 사무총장은 “점점 더 불확실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증오와 적개심이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이 격변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최후의 심판일이 닥칠 것이라는 분석은 전 유대국에 울려 퍼졌기 때문에,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의 봄”을 “이슬람주의 겨울”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틀리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아랍의 봄이 가져온 변화는 장기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의 가장 헌신적인 적들, 특히 이란이 주도하는 “저항의 축”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심각히 약해졌다. 아랍국들은 적대적이든 그렇지 않든 앞으로 한참은 이스라엘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양한 세력들이 권력과 통제를 놓고 싸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에너지는 국내 갈등에 집중될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그 자신은 지역의 격변으로부터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 국방은 더 강화되었고 경제는 번창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전략적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아랍의 봄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승자로 떠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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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가리켜 아랍의 봄의 패자라고 하는 이유는 거의 끝이 없어 보였다. 아마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이유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 소속 모하메드 모르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집트 혁명은 이스라엘의 전략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은 오랫동안 지역 안정의 초석으로 여겨져 왔고, 이스라엘에게 그 혜택은 수없이 많았다. 그 조약은 시나이를 비무장화함으로써 multi-front war(옮긴이: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전쟁)의 위협을 종식시켰고, 카이로를 미국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가장 난폭한 두 적수인 신정주의 이란과 근본주의자 지하드 그룹들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 조약 덕분에 이스라엘 전함은 수에즈 운하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최대 천연가스 공급자가 되었다.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에서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렸지만, 이집트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 대한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그러나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갑자기 성공하면서 지난 30년간 흔들림 없었던 안정이 하룻밤 새에 날아가 버리는 듯 했다. 반유대주의, 반이스라엘 광신도들의 집단인 무슬림 형제단이 갑자기 집권하자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이 터지기 전 그들이 느꼈던 불안감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형제단은 이스라엘의 두려움을 달래려고 별로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노골적으로 비웃었고, 그 조약 때문에 시나이에서 이집트군의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비난했고,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처음으로 이란 전함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 허락했다. 모르시 그 자신은 과거에 하마스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현했고, 유대인들을 가리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흡혈귀들, 이 전쟁광들, 돼지들과 원숭이들의 자손들”이라고 불렀으며, 이맘이 “유대인들과 그 후원자들을 파괴”해달라고 알라에게 요청할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녹화되었다.
앙시앙 레짐의 내파로 인해 시나이가 테러리즘의 온상으로 뒤바뀌면서, 이스라엘 안보에도 콘크리트 열화현상이 나타났다. 2011년 4월 7일, 국경지역에서 스쿨버스 한 대가 공격을 당해 어린이 한 명이 사망했다. 그 해 8월, 소규모 공격이 계속 터져서 8명의 이스라엘인들이 피살되었다. 1년 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국 영토에서 처음으로 공군력을 사용해야 했다. 2012년 말에, 순찰 중이던 이스라엘 병사 한 명이 살해되었고, 이스라엘 남부 도시인 에일라트에 로켓탄이 산발적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시나이 횡단 파이프라인에 대한 파괴행위가 계속된 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맺은 천연가스 계약을 취소했다. 한때 이스라엘에서 가장 조용했던 국경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가장 위험한 국경이 되었다.
심지어 2013년 7월 3일 군사 쿠데타로 모르시가 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계속 진행중인 시민 분쟁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다. 군의 정권 탈취와 뒤이은 탄압으로 시나이에서 지하드 폭력은 증가해왔고 이집트 전국에서 이슬람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생겼다. 쿠데타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반응도 예루살렘을 곤혹스럽게 한다. 형제단과의 관계는 늘 그대로였던 반면, 오바마 행정부는 쿠데타 이후로 합동 군사훈련을 취소하고, 전투기 인도를 연기했고, 군사원조의 “검토”에 착수했다. 그 결과 군사 쿠데타로 이집트-이스라엘 관계는 향상되었지만, 이집트-미국 관계는 위태로워졌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궁금해 한다. 왜 오바마는 형제단 치하의 이집트를 군부 치하의 이집트보다 동맹국으로서 더 우대했는가?
뿐만 아니라 아랍의 혁명들은 하마스를 강화했다. 지난 1년간 하마스는 터키와 튀니지 외무장관들, 말레이시아와 이집트 총리들을 초대했으며, 카타르 국왕은 하마스가 집권한 이래 가자를 방문한 최초의 국가 원수였다. 여전히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모두 하마스와 관계회복을 모색했다. 요르단 관료들은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칼레드 메샬과 십년 만에 처음으로 회동했고, 마흐무드 압바스는 PA가 관할하는 서안지구에서 하마스 집회를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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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정부 권위가 붕괴되면서 생겨난 밀수경로를 통해 정교한 무기들이 가자에 대량으로 밀려들었다. 지난 해 10월 하마스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헬기를 향해 어깨 견착식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마스는 또 러시아제 레이저 유도 대전차 미사일 코르넷 여러 대를 습득해서, 2011년 4월에는 이스라엘 스쿨버스에 발사해 어린이 한 명을 죽였고 2012년 11월에는 국경을 순찰중인 이스라엘 지프차에 발사했다. 방어기둥 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하마스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로켓 무기고를 공개했다. 이 테러리스트 그룹은 이스라엘을 향해 1,500발이 넘는 로켓을 발사했고 그들의 로켓은 텔아비브를 겨냥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역사상 처음으로 예루살렘까지 공격목표로 설정했다./ 방어기둥 작전(Operation Pillar of Defense)은 2012년 11월 14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IDF가 가자지구에 대해 실시한 군사작전입니다. 에이탄 부크먼 이스라엘 방위군 북미언론 담당 대변인은 이 작전이 히브리어로 구름기둥 을 의미하며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출애굽기 13:21-22절”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02년에 IDF는 노아의 방주 작전을 실시했으며, 2008년 유대교 축제인 하누카(봉헌) 기간에 실시한 캐스트리드 작전 역시 성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북부의 상황 역시 폭발지경이다. 시리아 내전과 반군의 주요세력으로 떠오른 지하드 그룹들은 40년간 상대적으로 고요했던 골란고원 국경지대를 흔들어 깨웠다. 2011년 5월과 6월에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과민반응을 보이면 시리아인들의 관심이 내전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수십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국경을 넘게 해서 골란고원에서 욤 키푸르 전쟁 이래 최대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시리아의 박격포와 포탄은 주기적으로 골란의 이스라엘 주거지를 타격해서, IDF가 지체 없이 답례포를 발사하게 했다. 보도에 따르면 2013년 1월, 5월, 그리고 7월에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공습을 감행해 개량 미사일의 이송을 공격했다. 1974년부터 활동 중인 유엔휴전감시군(옮긴이: UNDOF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또는 10월 전쟁 이후 시리아-이스라엘 휴전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감시하는 유엔군임)은 양국이 약속을 철회하면서 과다출혈중이다. 게다가 아사드는 화학무기를 계속 사용하면서 국제적 공분을 일으켰고 지난 달 미국은 군사작전을 실행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실은 아사드가 이스라엘을 향해 화학무기를 사용하거나 레바논 테러리스트 그룹 헤즈볼라에게 전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촉발했다.
이스라엘은 아사드가 하는 짓을 혐오하지만, 아사드 이후의 어떤 정권도 훨씬 심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시리아 반군은 대체로 무슬림 형제단과 다른 지하드 그룹들에게 포섭되어 있다. 최근 텔레그래프는 “반군 중 극소수만이 세속적이거나 순수하게 민족적 성향의 집단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연구조사를 보도했다. 나머지는 모두 이러저러한 이슬람주의자들이다. 심지어 오바마 행정부가 한 반군 파벌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지명한 뒤에도, 알카에다 스타일의 그룹들이 계속 출몰했다. 대전차 미사일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반군들이 시리아-이스라엘 국경선을 따라 정찰중인 모습이 촬영되었다. 다른 반군들은 아사드를 무너뜨린 뒤에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는 “골란을 해방”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레바논의 한 지하드 그룹은 최근 이스라엘 영토에 로켓 네 발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와 가자의 자매운동과 동맹한 시리아 지하디스트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포위되는 사태로 치달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이스라엘이 가장 신뢰하는 동반자 요르단조차 아랍의 봄이 뒤흔들어 놓았다. 요르단을 지배하는 하시미테 왕가는 현재 통치 40년 만에 가장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소위 "동편(East Bankers)" 요르단의 지배계급을 이루며 왕가의 생존에 필수적인 부족들은 다양한 내각 구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시위를 점차 확대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요르단 지부인 이슬람행동전선은 지금까지 소요의 선두에 서왔다. 압둘라 국왕은 반대파들을 달래기 위해 십년 전에 추방했던 하마스 지도자들과 관계회복을 시도했고, 그의 정부를 수도 없이 개편했으며, 지난 2년간 총리를 다섯 번이나 바꾸었다. 게다가 심각한 재정위기, 5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의 입국, 요르단 영토에 대한 시리아의 포사격, 이 모든 것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 하시미테 왕조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최악의 악몽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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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재난들을 종합해보면 압도적인 것 같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혼란이 가져온 세력균형의 변화에서 중대한 패자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 격변은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훨씬 더 파멸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스라엘 자신은 대체로 별 탈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아직도 자신을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치장하고 싶어 하는 이집트에서 계속 진행 중인 국내 혼란은 이미 경화된 국가의 몰락을 재촉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없다. 이집트 경제는 급강하하고 있다. 해외투자, GDP 성장, 외환보유고 모두 폭락했고, 예산적자는 엄청난데다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신용등급은 정크(투자부적격) 영역 깊은 곳에 있고, 관광업은 곤두박질쳤다. 반면 무슬림 형제단의 급속한 상승과 추락은 사회적 에너지를 이스라엘이 아니라 내부로 집중시키고 있다. 압델 파타 엘시시 장군의 새 군사정부는 반대자들에 대한 전국 수준의 탄압을 개시했다. 조직의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고위 무슬림 형제들을 체포했고, 살상무기로 대중 시위를 잠재웠다. 서로 우위를 다투는 이러한 투쟁의 결과, 시민 분쟁과 계속되는 저강도 내전은 당분간 이집트 정치를 정의할 것이다.
군사적으로도 사태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해지고 있다. 정치권력을 되찾은 이후 이집트 군부는 시나이에서 전면적인 대테러 작전에 착수했다. 지난 8월 이스라엘은 시나이의 한 테러리스트 세포조직에게 무인기 공격을 했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 고도의 군사협력 관계를 시사했다. 하마스에게도 압박이 쏟아졌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2013년은 이스라엘이 8년 전 가자에서 철수한 이래 로켓 공격이 최저수준이었다. 자신의 동맹 모르시가 권좌에서 축출된 덕분에, 이 테러리스트 그룹은 현재 밀수작전과 이스라엘 국경에서의 테러 활동에 대한 이집트의 탄압에 직면해 있다. 요약하면, 새 이집트 정권은 그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울 수 있다면 이스라엘이 선호하는 정책들을 정력적으로 추구하게 될 것 같다.
설령 이집트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현 상태를 뒤집어버리고 싶어도, 이집트 군대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워싱턴은 연간 13억 달러를 제공하며, 이 금액은 이집트 국방예산의 40%, 그리고 무기 구입비용의 거의 80%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M1A1 에이브람스 주력전차 수천 대와 F-16 전투기 수백 대가 포함된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이 모든 관대함이 이집트의 평화조약 유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만일 이집트가 조약을 폐기하려는 행동을 취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는 끝날 것이며, 아마도 그 과정에서 이집트 군대의 능력은 거의 소멸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집트는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약하고, 불안하고, 국내문제에 집중하게 될 것이며, 워싱턴에 군사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두려울 게 거의 없다.
북으로 시선을 돌리면, 세력 균형의 변화는 예루살렘에게 훨씬 더 유익해졌다. 이란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며 헤즈볼라의 중대한 후원자인 아사드 정권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시리아는 경제적 재난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특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시리아의 GDP는 현재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거의 바닥났고, 국내 화폐는 유례없는 수준으로까지 평가절하되었다. 심지어 내일 내전이 끝나서 대규모 경제 재건 사업에 착수한다 하더라도, 시리아 경제가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1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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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수그러들지 않는 잔혹한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시리아군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리아군은 허술한 조직에, 정식 훈련은 받은 적이 없고, 무장도 제대로 안 된 반군에게 간신히 버티고 있고, 아마도 이 사실은 그들이 화학무기를 사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AP 통신은 지금까지 무려 1만 5천 명의 정부군이 사망했다고 추산하는 반면, 전쟁연구소(옮긴이: ISW는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네오콘의 싱크탱크이며, 토마호크 미사일 제조사 레이시온, F-16 제조사 제너럴 다이내믹스, 용병회사 다인코프 등이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음)는 시리아군 20-30%가 반군으로 전향했다고 추정한다. 아사드 정권이 살아남든 그렇지 않든, 시리아군은 앞으로 한 세대 동안은 이스라엘에게 도전할 수 없다.전쟁의 결과와는 상관 없이, 시리아는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한동안은 내부로 에너지를 집중하게 될 것이다. 계속되는 불안정과 종파간의 폭력이 앞으로의 시리아 지형을 지배할 것이다. 이미 쿠르드 전투원들과 이슬람 반군들 사이에 충돌이 터졌고, 자유시리아군은 알카에다 극단주의자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고, 수니 과격파들은 알라위의 심장부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마이클 오렌 주미 이스라엘 대사(옮긴이: 마이클 오렌은 뉴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을 나온 역사학자며, 예루살렘의 싱크탱크인 샬렘 센터의 연구원이었고, "Six Days of War: June 1967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Middle East,"의 저자임. 이중국적자인 그는 2009년에 주미 대사가 되었음)가 최근 성명을 통해 발표했듯이, “그들이 지하디스트 반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란이 후원하는 나쁜 놈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나쁜 놈들을 선호한다.” 누가 승자로 떠오르든 간에,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권력 장악과 복수, 그리고 국가 재건에 혼신의 힘을 쏟을 것이다.
가능한 또 하나의 결과인 시리아의 발칸화는 이스라엘에게 훨씬 더 유리해질 것이다. 시리아는 알라위 잔당, 수니 아랍인, 쿠르드 독립체로 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이란과의 동맹은 단절될 뿐만 아니라, 수니 지하디스트들의 세력 역시 심각히 약해질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현 시점에서 국가 없는 쿠르드족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한 세기 동안 국가를 찾아 헤맨 그들의 모습은 초기 시온주의자들의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쿠르드와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조용히 접촉해왔으며, 이 관계는 이스라엘이 공격적인 이란, 고집 센 터키, 혼돈에 빠진 시리아 잔당들을 다루는데 유용할 것이다. 시리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스라엘의 전략적 위치는 과거의 상황보다는 더 좋아 보인다.
게다가 아사드의 동맹이며 아마도 이스라엘의 가장 인정사정없는 적인 이란과 헤즈볼라는 이 사태만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을 향할 수도 있었던 광대한 자원을 시리아에 쏟아부었다. 이란과 헤즈볼라는 아사드가 수니 반군을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를 돕고 있으며, 지금까지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극심한 경제 제재로 인해 자국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이란은 아사드를 구하기 위해 군대 파견, 무기와 재정 지원을 곱빼기로 늘려왔다. 일부 분석가들은 시리아가 이란의 “베트남”이나 “스탈린그라드”라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과잉확장이 가져다 주는 전략적 결과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마찬가지로, 헤즈볼라는 시리아 내전에 참여함으로써 레바논에서 종파간 대립을 재개했다. 이제는 레바논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들 사이에 치명적인 무장 충돌로 이어져서 서로 간에 차량폭탄 폭발사고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유럽연합은 마침내 헤즈볼라의 군사조직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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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24601의 글에 대해 잠시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참세상에서 볼 수 있음)이 글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서평이다. 서평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레닌주의자들이 자꾸 맑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레닌과 맑스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들은 맑스를 끌어들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엥겔스가 교량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4601은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의 어떤 자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강신준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볼셰비키는 ……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48년과 1871년 혁명을 경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술로부터의 빼곡한 인용으로 가득하다. 레닌이 인용한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이상하다. 우선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용하고 나서 그 다음에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용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레닌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아무 문제 없을 지 모르지만 맑스만 읽은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이 주로 나타나는 문헌은 Konspekt von Bakunins Buch "Staatlichkeit und Anarchie"다.
http://kulturkritik.net/systematik/philosophie/mew/pop_mew.php?bd=18&pg=636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문헌은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 다음으로 인용할 수 문헌은 고타강령 비판이다. 이 문헌은 맑스의 저작에서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번역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http://jinboedu.jinbo.net/bbs/data/pds/%B8%BC%BD%BA%B0%ED%C5%B8%B0%AD%B7%C9%C3%CA%BE%C8%BA%F1%C6%C7.pdf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와도, 공산주의 사회의 미래의 국가 제도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Zwischen der kapitalistischen und der kommunistischen Gesellschaft liegt die Periode der revolutionären Umwandlung der einen in die andre. Der entspricht auch eine politische Übergangsperiode, deren Staat nichts andres sein kann als die revolutionäre Diktatur des Proletariats.
Das Programm nun hat es weder mit letzterer zu tun, noch mit dem zukünftigen Staatswesen der kommunistischen Gesellschaft.
고타강령 비판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쏘비에뜨 권력의 초기 법령들을 보자. 1917년 후 생디칼리즘적인 "노동자 통제"는 거부되었다.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 제1항에 적혀 있는 "인민경제의 계획적 관리"가 노동자 통제와 무관하다는 것은 반혁명 및 태업 단속을 위한 국가보안기관의 창설이 말해준다. 레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거대한 관료주의적 전체주의 체계는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에 의해 처음부터 만들어졌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국가, 즉 강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일관적 주장이었다. 볼쉐비끼들은 권력투쟁을 좋아했으며 현실정치에 관여만 하면 진저리를 치고 도망쳤던 맑스의 삶과는 현실적으로 달랐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무력적 전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 속에서 족쇄 이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여, 단결하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주의 혁명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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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요르단에서는 불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포섭과 배제를 뒤섞은 술수를 통해 반대파를 제압해 온 압둘라 국왕이 자신의 통치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 도전도 헤쳐 나가고 있는 듯하다. 요르단의 반정부 시위는 아랍 세계의 다른 곳들보다 규모가 더 작았고, 요르단 보안군은 심각한 시민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는 치명적 대결과 같은 것은 막을 수 있었다.확실히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물러나지 않기를 바랐던 만큼이나 요르단 왕정이 눌러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설령 압둘라가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하시미트 이후의 정권은 현재 이집트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제약들 - 급변하는 경제/정치적 상황, 미국에 대한 지속적 의존, 이스라엘군을 상대할 수 없는 무능력 - 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집트와 매우 흡사하게, 요르단 국방예산의 20%는 미국에서 나오며, 미국은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인 요르단에게 고성능 무기들과 군사훈련을 제공해왔다. 게다가 요르단 군대는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훨씬 더 우월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에게 금방 제압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널리 확산된 믿음과는 정 반대로, 아랍의 봄으로 인한 현재의 혼란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장기적 전략지정학적 위치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켰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스라엘의 가장 무시무시한 역사적 원수인 이집트와 시리아는 극적으로 약해져서, 전자는 이스라엘과 평화로운 관계로 되돌아왔고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헌신을 배가했으며, 후자는 소멸되기 직전이다. 한때 반이스라엘 “저항”의 지도자로서 환대받았던, 이란의 레바논 내 대리인인 헤즈볼라는 종파적 군대라는 정체가 드러났고 사람들이 모두 경멸하는 아사드와 이제 불가분의 관계다. 게다가 이란이 지금까지 핵무기 프로그램을 착실히 진행해왔어도,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대리인들인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모두 3년 전보다 현저히 약해져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의 주변국 모두 현재 집안 싸움에 더 관심이 쏠려 있고, 서로 싸우고 있는 중이라 유대국을 상대할 겨를이 없다.
/ 2013년 5월 28일자 슈피겔 온라인은 “자신을 이스라엘 ‘골리앗’에 계속 거역하는 아랍의 ‘다윗’으로 묘사하는 헤즈볼라는 이슬람 내부의 형제들과의 싸움에서 종파적 군대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http://www.spiegel.de/international/world/syrian-war-heightens-sectarian-divisions-in-arab-world-a-902137.html
Hezbollah, which portrays itself as the Arab "David," repeatedly defying the Israeli "Goliath," has turned into a sectarian army in the fraternal struggle within Islam.
동시에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아무 탈 없이 혼란을 헤쳐 나왔다. 경제는 한 번도 주저앉은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인들이 전통적으로 휴가를 보내는 지중해를 피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이스라엘 해변으로 몰리느라 관광업은 사상 최고에 달했고,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와의 교역은 증가했으며, 이스라엘은 현재 GDP당 부채비율을 줄인 유일한 OECD 가입국이다. 최근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스라엘의 GDP가 2009년부터 2012년 사이 14.7% 성장했고 2013년 상반기에 3.4% 성장했다고 보도했다. 더구나 지난 3월에는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해저에서 가스전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등장해서, 이스라엘은 이제 에너지 수출국의 대열에 끼게 됐다.
군사영역에서 이스라엘은 아랍의 봄의 결과 국경지대에서 증가하고 있는 저강도 폭력사태를 무력화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방어책들을 배치해왔다. 특히 단거리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 돔의 도입으로 인해 평범한 이스라엘인들의 안전은 월등히 향상되었다. 2011년 3월에 처음으로 배치된 아이언 돔은 2012년 방어기둥 작전 기간에 85%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가자에서 발사한 로켓탄 1,506발 중 단 58발만이 도심 지역을 타격해서, 인명피해는 6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미사일이 처음으로 텔아비브와 예루살렘까지 도달했을 때 조차도 이스라엘인들은 정상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결혼식 하객들이 미사일을 요격하는 아이언 돔이 상공을 환하게 밝히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축하연을 계속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 주민들에게 미치는 미사일 공격의 위험을 엄청나게 경감하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숨통을 트게 해주었고, 이스라엘이 로켓 공격으로 인해 더 큰 충돌사태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분석가들은 가장 중요한 요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다. 아랍국들은 유대국을 상대로 중요한 전쟁을 네 번이나 치렀는데, 네 번 모두 이스라엘의 확실한 승리로 끝났다. 그로부터 40년간 아랍 군대는 화석화되었지만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수십 년간의 전투 경험으로 연마된 이스라엘은 현 시점에서 자신의 잠재적 적들에 대해 엄청난 질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욤 키푸르 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검증되지 않은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는 자국 영토마저 통제할 능력이 없는 반면, 요르단은 1967년 이후로는 전쟁에 나가본 적도 없다. 아랍국들은 유대국과 대규모 충돌에 봉착하게 되면 반드시 떼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 중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장기적 위협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근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이스라엘의 전략적 경쟁자들을 위태롭게 했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많은 세력들을 황폐하게 했다. 주변국들이 혼돈과 폭력에 휘말리는 동안, 이스라엘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자제력을 발휘하고, 저자세를 유지하고, 국방을 강화한 이스라엘은 현재 여러 해 전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장기적으로 보면 아랍의 봄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승자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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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보도] 이집트 ‘국가 혁명’ 배후의 진정한 세력2013년 10월 10일
By Asma Alsharif and Yasmine Saleh
http://uk.reuters.com/article/2013/10/10/uk-egypt-interior-special-report-idUKBRE99908720131010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의 집권 마지막 시기에 세계인들의 이목은 수십만 명이 아랍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복무했던 독재자 중 한명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카이로에 쏠렸다.
카이로에서 멀리 떨어진 와디 엘 나트룬 사막의 한 교도소 감방에서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이 탈출했을 때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서 이슬람주의 단체 회원들이 연달아 탈옥하게 되었고, 공포에 질린 경찰관들은 이집트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상실했다.
한 경찰관은 누군가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며 동료들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찰서 앞에 와 있고, 난 지금 혼자서 다르 알 살람 지역 전체를 상대하고 있어, 서둘러 제발”, 그는 소요사태가 확산되자 동료들에게 무전을 보냈다. “지금 그들은 기관총을 갖고 있어, 젊은이들이 나한테 기관총을 쏴대고 있어, 병력 증원을 요청한다.”
바로 그 날, 1월 28일, 총 2백 명의 경찰관과 보안군이 살해당했고, 반무바라크 시위자들은 이 날을 분노의 금요일이라고 불렀다. 일부는 목이 잘렸다. 교도소에서 달아난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중에는 그 다음 해 대통령이 될 모하메드 모르시가 있었다.
국가보안기구와 전투경찰을 포함하여 전국의 모든 경찰력을 통제하고 있는 이집트 내무부는 이 혼란을 결코 잊지 않았다. 특히 와디 엘 나트룬 탈옥 사건은 보안기구 내에서 통제력 상실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공안당국 관료들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형제단과 모르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올해 7월 압델 파타 엘-시시 군 참모총장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모르시의 대통령직 종료를 선언하면서 선거 계획에 대해 발표했을 때, 이집트의 군 지도자들이 반혁명의 배후에 있는 주동자들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그러나 외교관과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군, 보안, 경찰 당국의 관료들을 상대로 수십 차례 인터뷰를 한 결과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을 제거한 쿠데타의 배후에 있는 핵심 세력은 내무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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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쓰기 위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익명을 요구한 네 명의 내무부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집트 국가정보원(General Intelligence Service)의 고위 관료들은 청년 활동가들이 모르시의 통치에 불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국정원 정보관들은 활동가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활동가들은 군부와 내무부가 “형제단에게 이 나라를 넘겨주고” 있다고 말했다.정보관들은 활동가들에게 거리에 나가서 모르시의 권위에 도전할 것을 권고했다. 많은 이들은 모르시가 자신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고 경제 운영에 서투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러한 혐의들을 부인했다. 6주 후, 아랍어로 “반란”을 의미하는 타마루드라는 이름의 청년 운동이 모르시의 퇴진을 요구하는 탄원을 시작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내무부 관료들과 만난 청년들이 아니었지만, 내부무 소식통에 의하면 그들은 내무부의 지원을 받았다. 내무부 관료들과 경찰관들은 서명을 모았고, 서명지 배포를 도왔으며, 자신들이 직접 서명했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이집트인들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단과 그들의 소름끼치는 통치 때문에 속이 상했다”고 익명을 요구하는 타마루드 운동의 한 여성(23세)이 말했다.
타마루드는 내무부에게 와디 엘 나트룬에 대한 복수를 할 기회를 제공했다. 놀랄 만한 운명의 반전이었다. 무바라크 집권 30년 동안 두려움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국가 보안군은 권력을 잃은 지 2년 반 만에 국가의 통제권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지난 몇 년 사이 가장 격렬한 탄압에 들어갔다.
내무부는 노골적으로 무바라크 시절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안보의 회복에 대해 말한다. 2011 봉기에 불을 붙인 잔학성으로 명성이 자자한 경찰의 목소리에는 되찾은 자신감이 배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이제 경찰을 치켜세운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내무부와 군부를 칭송하며, 그들을 조국의 영웅과 구세주로 묘사한다.
내무부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서인 정치안보부대(Political Security Unit)는 형제단을 다루기 위해 부활했다. 무바라크 시절에 이 부서 담당자들은 민간인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가 강제로 물러난 직후, 활동가들이 이 기관의 건물에 침입해서 찾아낸 서류, 비디오, 사진들을 온라인에 게시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피로 흥건한 바닥과 쇠사슬이 비치된 고문실들이었다.
내무부는 과거의 “침해”에 대해서 사과했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태 전환의 열쇠는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하고 존경받는 기관인 군대와 더 긴밀한 연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내부부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무바라크가 물러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시작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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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삭이며무바라크가 실각한 지 몇 주 후, 내무부는 카이로 경찰대학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내무부와 고위 보안담당자들이 주도한 이 모임은 형제단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해 의논하기 위한 연속 회의 중 첫 번째 만남이었다고, 이 모임들 중 일부에 참석한 두 명의 경찰관들이 말했다.
수천 명의 중-하위급 경관들은 화가 나 있었고, 자신들이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는 대통령 밑에서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위 경찰들은 모르시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남자라면 적당한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달래려고 애썼다. “우리는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고 한 경찰 고위간부가 말했다. “그들은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일뿐이었습니다.”
한 고위 보안군 장교는 모임에서 모르시의 명령에 거역하라는 명쾌한 지시는 없었지만 대단히 많은 경찰들이 형제단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저는 모르시의 집권 기간 동안 일했습니다. 어떤 임무든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그를 경호하는 임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국가안보를 담당하고 있는 한 소령이 말했다.
“현실에서는 테러리스트의 안전을 지키면서 조국을 위해 국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군인과 경찰들을 공격한 죄로 1990년대 이후로 수감되어 있던 이슬람주의 전투원 17명을 모르시가 사면하자 적개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 중 한 명은 시나이에서 경찰들을 공격해서 수십 명을 사살했다. 그들 중 아무도 공개적으로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고,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지난 해 11월 모르시는 자신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결정을 하면서 대중적 시위의 봇물이 터졌다. 12월 5일, 이티하디야 대통령궁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군중이 점차 불어나자, 모르시는 보안군에게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거부했다. 한 고위 장교는 모르시에게 불복하라는 분명한 명령은 없었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소요를 평정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무장력을 투입했고, 형제단 지지자들은 일부 시위자들을 체포하라고 경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경찰은 거부했다고, 당시 형제단 관료들이 말했다.
“기자님들은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나요? 형제단 때문에 우리 동료들이 지금 감옥에 있어요.” 한 보안군 장교가 말했다.
그 후 계속된 충돌 끝에 열 명이 사망했고, 그 대부분이 형제단 지지자들이었다. 자유주의 활동가들은 형제단 단원들이 반모르시 시위자들을 구타하고 고문했다고 비난했다.
두 명의 군부 소식통에 따르면, 모르시는 폭풍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자며 군대가 요청한 회의를 취소하면서 오판을 거듭했다.
“그것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을 은밀히 전한 것이었고, 우리는 모르시가 선출된 지도자이고 그 권위에 도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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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싸움2013년 1월, 모르시는 전 보안군 장교인 아흐메드 가말 내부장관을 해임하고 모하메드 이브라힘으로 교체했다. 보안기구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브라힘은 내부무 내의 반형제단 파벌과 가장 접촉이 적은(the least exposure) 관료들 중에서 가장 고위급이었다. 그는 형제단이 반모르시 시위를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비난했던 가말보다는 더 유약하고 순응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러나 탈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무장관의 보좌관이었던 이브라힘을 임명한 것은 엄청난 실수로 드러났다. 한 경찰 소령에 따르면, 그는 군부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브라힘은 군 참모총장 시시와 직접 교류를 할 수 있는 행사에 참여했고, 정기적으로 장군의 관리기법에 찬사를 보냈다.
시시는 무바라크 정권에서 군 정보국장을 지냈다. 그는 종교적 인물로 알려져 있고, 자신보다 젊은 군 장교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모르시는 이 젊은 장교들이 무바라크 정권을 위해 봉사했고 자신이 집권한 지 두 달 후인 2012년 8월에 해임했던 나이 많은 장성들에 비해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집트 경찰청장은 군부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형제단은 불길한 소식이라는 것.
“우리는 거리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군대와 흉악범들보다 더 강인합니다” 경찰 소령이 말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하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들을 처치하고 싶었습니다.”
이브라힘은 로이터가 요청한 인터뷰를 거부했고 이메일로 보낸 질문에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시시의 견해를 들으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13년 초 이전에, 군 장교들과 내무부 관료들은 군의 호화로운 사교클럽과 스포츠 클럽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 클럽들 중 일부는 나일강이 내려다보인다. 이 모임들에 참석했던 보안군 고위 장교들과 군 장교들에 따르면, 그들은 오찬이나 스테이크를 곁들인 만찬을 즐기면서 형제단과 이집트의 미래에 대해 의논했다.
한 보안군 고위 장교에 따르면, 내무부는 형제단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무부가 무슬림 형제단과 전투를 벌였던 1990년대에 내무부는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내무부는 군부에게도 똑같은 용어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저는 군부와의 모임들 중 일부에 참석했는데, 우리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단에 대해서는 군부보다 경험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함께 나누었고, 군부는 이 사람들이 물러나야 하고 이집트에 해롭다는 사실에 대해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보안군 고위 장교가 말했다.
“형제단을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더러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군부는 형제단이 이집트에 뭔가 공헌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 낭비일 뿐이었습니다.”
내무부 관료들은 모르시의 술수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군부에게 경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 동료들에게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를 위해 봉사하기 보다는 중동 전역에서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제국(Islamic caliphate)을 창조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형제단은 이집트 국가와 문제가 있다”고 국가 보안군 장교가 말했다. “모르시는 형제단의 계획을 실행하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 형제단은 애초부터 이집트 국가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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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내무부의 중간급 간부들은 군부와 함께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최고 수준에 달했다. 올해 초, 군 참모총장 시시는 모르시에게 그의 정부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나는 2월에 모르시에게 당신은 실패했으며, 당신이 꾸미고 있는 계획은 끝났다고 말했다” 이번 달 일간지 알 마스리 알 요움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시시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내무부 관료들은 형제단이 내무부를 개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믿고 있었다고, 국가 보안군 장교가 말했다. 신경이 곤두선 관료들은 의회와 사적인 모임에서 이 문제에 관해 의논했다. 한 가지 선택안은 경찰대 해소였다. 많은 이들이 이 계획을 자신들의 기관과 경력에 대한 위협으로 봤다.
“그 소문을 젊은 경관들이 알게 되었다. 이 조치는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모르시는 그들의 장래를 망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국가 보안군 장교는 말했다.
무슬림 형제단 관료들은 자신들이 내무부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혐의를 부인해 왔고, 경찰대를 해체할 계획이 없었다고 말한다. 과거에 그들은 내무부 관료들이 정부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고, 형제단 지도부에 대한 보호를 거부하고, 사람들이 형제단의 통치에 반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우리는 시종일관 내무부와 협력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내무부나 경찰대를 약화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와 협력을 거부한 것은 내무부였습니다” 형제단 관료 카말 파힘이 말했다. “시종일관 우리를 거부한 것은 그들이며, 이집트인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타도하라, 타도하라
시시와 군부에 대한 내무부의 압력이 점점 더 거세진 덕에, 5월에는 타마루드가 부상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처음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명을 모으자, 내무부 관료들을 포함하여 모르시에게 신뢰를 잃었던 이집트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관료들과 경관들 중 일부는 서명을 모으는 작업을 도왔고 시위에 가담했다.
“물론 우리는 그 운동에 참여했고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은 이집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모르시라는 현상 자체가 이집트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봤기 때문에, 모두가 이 사람과 그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고 한 보안 관료가 말했다.
“유일하게 차이가 있다면, 경찰과 보안기구는 맨 처음부터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나머지 이집트인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1년 동안 그들의 통치가 실패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와 뜻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6월 15일, 내무부는 카이로의 메디나트 나스르 구역에 있는 한 사교클럽에서 대장과 중장들을 포함한 장교 3천명과 모임을 갖고 시나이에서 전투원들에 의해 피살된 한 경관의 죽음에 대해서 의논했다. 시나이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성은 주로 경찰과 군 장교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모르시가 당선된 후 급격히 증가했다.
이 모임에서 곧 “모하메드 모르시가 석방한 (...) 테러분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고 국가 보안군 장교가 말했다.
경관들은 “최고지도자 정권 타도하라,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최고지도자는 이티하디야 대통령궁 앞에서 벌어진 시위 기간에 폭력 선동 혐의로 현재 감옥에 있는 무슬림 형제단의 최고지도자 모하메드 바디에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르시의 집권 1주년 기념일인 6월 30일, 분노한 내무부 관료들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서 타마루드 회원들과 수백만 이집트인들에 합류했다. 나흘 후, 시시는 텔레비전에 나타나서 군의 정권 인수에 해당하는 것을 선언했다. 일부 보안 관료들은 이 조치를 “국가 혁명”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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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총알, 불도저모르시 정권이 타도되고 나서 몇 주 동안, 서방 관료들은 시시에게 카이로에 있는 형제단 농성장을 해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옛날에 뻐기던 모습을 재빨리 되찾은, 강경한 내무부는 탄압을 강요했다. 경찰 관료들은 형제단 단원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협상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국가 보안군 소령이 말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테러리즘입니다. 그리고 전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모든 이들이 교훈을 얻었고 이제 우리에게 감사하고 있고 저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8월 14일 이른 새벽, 검은 제복에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경찰 14명이 카이로에 있는 형제단 지지자들의 중요한 철야 농성장 두 곳 중 하나인 라바 알 아다위야 천막촌을 기습했다.
경찰은 군부가 후원하는 내각이 경고 방송을 한 뒤 물대포를 사용해서 시위자들을 해산시키라는 계획을 무시하는 대신, 최루가스, 총알, 불도저를 사용했다.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현장 급습 후 전국에서 터진 충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나중에 군 장교들이 경찰에게 사망자 수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물었다. 내무장관은 그들이 먼저 자신이 보낸 병력에게 발포했다고 말했다.
“양복을 입은 관료들이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서 결정을 내리는데”라고 형제단 고위 간부들 중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국가 보안군 장교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군으로 활동하면서 이 테러 조직과 연관된 어떠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결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무력을 사용해야 했고 저들에 대해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력 사용과 사망자들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에 반대해서 들고 일어났던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낙관적인 것 같다.
자유주의적인 구국전선(NSF) 연합은 보안군의 조치들을 칭찬했다. “오늘 이집트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고 급습 후 구국전선은 성명을 발표했다. “구국전선은 경찰과 군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와디 엘 나트룬 탈옥 사건 2년 후, 내무부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내무부는 “시민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시위자들을 다룰 때는 실탄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때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시위진압 보안군들이 사용했던 트럭에는 이제 “민중의 경찰”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정부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 된 이슬람주의 운동을 분쇄할 목적으로 형제단 최고 지도자들을 교도소에 수감했다. 무슬림 형제단 관료들은 현재 이티하디야 시위와 관련하여 재판을 앞두고 있다.
보안군 고위 장교들은 형제단 본부를 기습한 뒤 찾아낸 문서에서 형제단에 대한 자신들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말한다. 그 문서들은 모르시가 구조조정을 가장하여 군을 해체할 계획을 꾸몄음을 암시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국가 보안군 장교가 로이터에 보여준 한 문서에는 “마땅한 곳이면 어디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은 대부분 감옥에 있거나 숨었기 때문에 이 문서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경찰 관료들은 더 이상 이집트인들을 학대하지 않을 것이며,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이가 이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최근 투옥된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무라드 알리가 쓴 편지를 누군가 몰래 감옥에서 빼내 로이터에 보여주었다. 그는 악취가 풍기는, 어두컴컴한 건물에 사형수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한다. 다른 형제단 단원들의 변호사들은 수인들이 작은 감방에 가득 차 있고 심리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로한 형제단 수인 한 명은 간수들이 그의 머리를 밀었고 그에게 겁을 주기 위해 포악한 개들을 데려왔다고, 그의 감방 근처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들이 로이터에게 말했다.
무바라크 시절에는 채찍질이나 전기 고문과 같은 유형에 대한 항의는 없었다. 그러나 형제단 단원들은 현재의 탄압은 더 강렬하다고 말한다. “압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형제단 동료들 중 아무도 같은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단의 법정 대리인인 왈리드 알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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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가 좌우한다. 그것은 모두 세력권에 관한 것이다.2013년 8월 22일
By Robert Kaplan
http://www.realclearworld.com/articles/2013/08/22/geography_rules_its_all_about_spheres_of_influence_105393.html
언론은 지배층 사이에서 외교 정책의 담론을 반영하는 민주주의, 인권, 그 외 다른 가치 중심적 요소들에 몰두하지만 그런 것들은 밀실정부들의 실질적 동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정부들에게 정말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지구는 예전의 시대에 그랬던 것과 같은 정도로 지리적 세력권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일단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에서 놀랄만한 일은 상대적으로 적다.
중동을 보자. 소위 아랍의 봄이 민주주의보다는 무정부 상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미국은 중동에서 안보에 문제가 발생했다. 아랍의 봄이 가져온 무정부 상태는 알카에다와 같은 병균이 퍼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레반트(옮긴이: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등을 포함하여 동부 지중해에 인접한 지역을 가리킴)에서 지리적 영향력을 놓고 이란과 세력균형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란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지중해에서부터 중앙아시아 고원에 이르는 세력권을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페르시아 이교도들(옮긴이: 조로아스터교를 말함)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상교통로들이 계속 안전하고 초국가적 테러리스트들을 억제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미국이나 이스라엘 국경 근처에 다가오지 못하게 막을 수만 있다면, 예컨대, 테러리스트들이 이집트나 리비아 또는 예멘 같은 곳에서 여러 해 동안 쇠약해진 정부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워싱턴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며, 아무튼 워싱턴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언론이 중동의 혼란에 몰두하고 있는 반면, 더 중요한 지정학적 변화가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그 하나는 발트해에서부터 카프카스 산맥에 이르기까지 - 여기에는 중유럽과 동유럽이 포함된다 - 세력권을 넓히려는 러시아와, 또 하나는 서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진로를 개척하려는 중국이다.
지속되는 유럽의 경제 위기와 에너지 수익을 통해 넘쳐 나는 러시아의 현금은 크레믈린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사회기반시설을 있는 대로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자금 압박을 써서 상당수의 다른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이 헝가리, 불가리아, 아제르바이잔처럼 멀리 떨어진 정권들에 대해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과 소비에트 연방이 재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적 지형에 기반한, 더 전통적이고 더 아련한 세력권과 제국 건설은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언론은 전반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언론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미국의 탈주자(defector)를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인권침해자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동정심 있는 러시아의 지배자들을 본 게 과연 몇 번이나 되는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러시아 역사라는 관점에서 푸틴에게는 그 자신이 현실화하려는 적절한 지리적 그림이 있다. 푸틴에게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서 헝가리가 빅토르 오르반 총리 아래 유사 권위주의로 떠내려간 것,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러시아, 이란, 터키, 그리고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조절하고 있는 것, 그리고 최근 그가 러시아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것은 최근 아랍 세계의 그 어떤 일국에서 전개된 사건보다 지구적 지정학에서 더 분명한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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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도 해군의 확장과 현대화 양쪽 모두 계속해나가고 있으며, 유라시아 남부의 항해할 수 있는 림랜드(옮긴이: 동아일보사 발행 <2004년판 현대시사용어사전>에 따르면 림랜드는 “세계의 심장지대를 둘러싼 ‘주변지대’. 지리적으로는 하트랜드를 제외한 유라시아 연안지대(일본·중국·동남아시아·중근동·유럽)를 가리킨다. 미국의 지정학자 니콜러스 스파이크먼이 제기한 이론으로 근대공업에 적합하지 않은 하트랜드보다 자연조건이 좋은 림랜드가 중요하며 여기를 제압하는 것은 세계를 제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변에서 상업적 이익을 확장하고 있다. 중국은 케냐, 탄자니아, 방글라데시의 심수항(深水港) 건설계획에 투자하거나 관심을 보여 왔으며, 그 이전에는 인도양의 다른 지역인 미얀마, 스리랑카, 파키스탄의 항구 건설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금을 댔다. 게다가 중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지금 막 싹트기 시작한 이 서인도양 항구들과 연결되는 자원채굴 제국을 건설했다.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의 해상제국 모두 그 시작은 보다 덜 분명한 형태였다. 동시에 동아시아 해상에서 중국은 핵잠수함에서부터 정보수집의 잠재력이 있는 소형어선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해군주둔(full-spectrum naval presence)을 전개하려 하고 있다. 제임스 홈즈, 도시 요시하라, 앤드류 에릭슨(옮긴이: 이 세 사람 모두 미 해전대 전략연구부 준교수들임)을 비롯하여 미 해군전쟁대학과 그 외 다른 곳의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진행 상황을 연대순으로 꼼꼼히 기록해왔다. 전함과 기타 해상 플랫폼 모두를 포함하여, 중국의 해상군사력은 현대사를 통틀어 전 세계 해군들의 전통적 역할이었던 것을 수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상의 움직임과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서로 맞물리게 하면서 힘의 지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다. (진정한 전략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창조적 조합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이 해군확장을 조절하는데 성공한다면 미국과, 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다른 누구와도 무력전쟁을 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을 두 대양 전역에서 지각할 수 있게 된 바로 이 순간에도.스프랫포(STRATFOR, Strategic Forecasting, Inc.)가 독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듯이, 러시아와 중국의 확장은 장기적으로 볼 때 지속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탄화수소를 발견한 덕분에 러시아는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시장을 지배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때에 자국에서 인구문제에 직면해 있다. 중국 경제의 둔화는 앞으로는 군사력을 계속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감축시킬지도 모른다. 최소한 지난 수십 년간의 능력과 같은 수준으로. 러시아와 중국 모두 자국 경제와 정치적 배열에 있어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좋은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미국의 지배층이 그 자신 별로 해줄게 없는 중동의 무정부 상태에 연연하고 있는 반면, 유라시아의 두 거물은 자신들의 지리적 세력범위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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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현지시간) CONFECH(칠레총학생연합) 주최로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http://english.peopledaily.com.cn/90777/8429230.html
http://youtu.be/p-c7PT0L9A0
콜롬비아는 더 암울하다. 광부, 트럭 운전사, 농민, 원주민이 1주일이 넘게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투석전과 파업으로 전국 경제를 마비시키고 있고, 여기에 MANE(콜롬비아총학생연합)이 가세했다.
http://youtu.be/ekqnC0JqVCM
[사진]로보캅처럼 중무장한 콜롬비아 경찰
http://news1.kr/articles/136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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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콜롬비아 유뷰브는 지난 달 것이었음. ^^;;;내용이 너무 비슷해서.. ^0^;;;
새걸로 바꿈.
http://youtu.be/NS_b_Dv0W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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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럽(Greater Europe)에서 지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러시아의 실력행사(geographic power play)와 아직 초기 단계인 중국의 Two Ocean 상업전략 저 너머에는 대남아(Greater South Asia)에서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중국,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과 소강국들 사이에서 더 작은 패권전쟁(great games)이 진행 중이다./ 제주평화연구원이 발간하는 JPI PeaceNet에 소개된 “아시아-태평양 지역 다자간 공조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에 따르면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 통합은 크게 세 갈래 공조 전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갈래가 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리고 다른 두 갈래가 구소련연방 지역과 EU 지역이다.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목표는 구소련연방 지역을 경제적으로 재통합하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2011년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제안한 바와 같이 유라시아 연합(Eurasian Union)의 형태를 완성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EU와 경제적으로 통합하여 러시아의 해외 교역량을 상당한 수준으로 확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푸틴 총리는 유라시아 연합이 "대유럽(Greater Europe)"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러시아는 유라시아 연합이 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있다.”
대남아(옮긴이: 대남아는 중앙아시아를 남아시아에 통합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을 말함. 2013년 10월 18일자 미국의 소리에 따르면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차관보는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축으로 삼아 유럽과 아시아를 내륙상으로 연결하는 교차로가 되는 미국은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에서, 중국과 인도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에 대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스리랑카에서 새 심수항을 건설했고 , 서방이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불교계인 싱할라족 정권이 힌두 타밀족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무기를 공급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인들은 인도인들과 매우 가깝고, 스리랑카는 타밀 공동체를 통하여 인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궁극적으로 스리랑카를 지배할 수 없다. 방글라데시는 중국 남서지방과 가난한 분쟁다발지역인 인도 북동부 양쪽에 이로운 교역로 개통의 열쇠를 쥐고 있다. 따라서 베이징과 뉴델리 모두 다카를 놓고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 네팔과 인도는 치안상태가 나쁜 긴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카트만두에 대한 영향력은 뉴델리에게 필수적이다. 비록 중국이 그 곳에 군사적,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왔지만. 한 때 영국령 인도 제국에 속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인도의 중간소수집단(옮긴이: Middleman Minority는 화교나 유대인들처럼 차별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시장을 지배하는 소수집단을 말함)의 거주지였던 미얀마는 중국이 천연가스를 위한 항구와 파이프라인을 건설해놓은 곳이다. 여기가 바로 인도와 중국의 지리적 이해관계들이 진정으로 크로스해치(옮긴이: 그림을 그릴 때 서로 다른 각도로 중첩시켜 음영효과를 나타내는 방법을 말함)하는 곳이며, 이것이 바로 양국 모두 여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다. 인도 역시 그들만의 항구와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러시아가 전 소비에트 공화국들과 군사적, 경제적 유대를 맺고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은 광물과 탄화수소 채굴권에 투자해왔다. 한편으로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했고 전 소비에트연방의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중국 서부지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건설하려 하면서. 런던에 있는 왕립합동군사연구소(United Services Institute)과 워싱턴에 있는 우드로 윌슨 센터의 라파엘로 판투치와 알렉산드로스 피터슨은 중국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우연한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 알렉산드로스 피터슨은 인터뷰에서 우연한 제국“Inadvertent Empire.”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but it’s inadvertent, in the sense that China doesn’t really have a strategy for the region. China doesn’t want an empire. As Seeley would say, it has an empire “in a fit of absence of mind.”
그러나 중국은 이 지역에서 아무런 전략이 없다는 점에서 우연한 것이다. 중국은 제국을 원하지 않는다. 실리가 말했듯이, 중국은 “방심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제국을 갖게 되었다.
북으로는 일본에서 남으로는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동아시아 해안지역에 대해서 말한다면, 중국은 최근 수년간 그리고 수십 년간 자신의 해군력, 경제력, 정치력을 통하여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감지할 수 있는 중국의 침략성은 일본의 유사-평화주의를 시들하게 하고 국가주의(nationalism)의 부활을 가져온 요소였고, 아마도 군사적 결과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동지나해의 섬들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남지나해의 섬들에 대한 분쟁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국가의 군사적, 제도적 능력이 증가해온 이 시점에서, 중국의 해군력 팽창이 맞물린 결과다. 국가주의가 쇠퇴하고 개인의 힘이 기세등등하게 떠오르는 역사 이후의 열반(post-historical nirvana)을 향해 더듬거리며 다가가는 대신, 1970년대 이후 아시아의 자본주의적 번영은 결국 군사적 확장으로 끝났으며 따라서 공간과 권력을 놓고 싸움이 터지기 직전이다.
요약하면, 유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유라시아는 골목대장들끼리 모여서 땅따먹기 게임(king-of-the-hill turf battles)에 열중하고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지리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에 비해 사상은 사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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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사회주의 아나키즘의 과제2013년 10월 17일
/ 이 글은 번역문이고 원문이 게재된 것은 10월 15일입니다.
논쟁 영역으로서 “리버테어리언” 세계
/ 리버테어리언은 보통 자유지상주의라고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냥 리버테어리언이라고 옮기기로 했습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2”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리버테어리언"과 "아나키스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리버테어리언은 미국 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와 관련하여 주류의 스팩트럼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미국의 리버테러어리어니즘 libertarianism 은 곧 제한없는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리버테어리언 전통은 이 자본주의를 줄곧 반대해 왔습니다.”
본문에서는 스페인어 리베르타리아나 리베르타리오를 이 단어의 동사형인 libertar(해방하다)을 감안하여 “해방”으로 옮겼습니다.
http://www.anarkismo.net/article/26329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민중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이 함께 어우러진 리버테어리언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특정하게 공유된 요소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국가의 외부에서, 아래로부터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에 대한 인식 같은 것. 언제나 운동 내부의 민주주의에 중점을 두고 운동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고취하는 것. 전략적 수준에서의 과제가 계급이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는(with class autonomy) 민중 권력을 건설하고 사회 변형(social transformation)을 위한 주된 정치적 도구로서 직접 행동을 북돋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 그러나 대선후보 마르셀 클라우데를 지지하는 Todxs a La Moneda(모두 모네다궁으로) 운동의 일환으로 Red Libertaria(붉은 해방)의 등장, 그리고 Frente de Estudiantes Libertarios(학생해방전선)이 이러한 계획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움직임은 오로지 리버테어리언들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지금 우리 운동은 개혁적이고 권위주의적 입장이 전투적 입장에 대해 헤게모니를 얻었고, 아나키스트들은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들로 전략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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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민중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후에야 쟁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일단 쟁취했다 하더라도, 민중이 이 자유의 철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정부가 느낄 수 있을 때만이 정치적 자유는 지속될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타인이 그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방어하는 과업을 위임하는 것에 민중이 익숙해지게 하는 것은 민중을 지배자들의 변덕에 맡기는 길을 확실히 뚫어 놓는 방법이다.” (말라테스타)“그러나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은 거기 있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외부에서 생산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실수와 성공과 함께, 정의와 자유를 향한 민중의 열망으로 이루어진 authentic product(옮긴이: ”신뢰할만한 진정한 산물“이라는 뜻. authentic은 주로 신뢰할만한 게 없을 때 쓰는 말임)이다. 이 체제를 지탱하는 비참한 기반이 아닌 다른 것에 기초하여 사회를 구조화하는 대안을 파멸시켜 왔던 것들에 대한 더 엄정한 비판을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우루과이아나키스트연합 Federación Anarquista Uruguaya)
칠레에서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건설해 온 14년이 지난 후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민중 운동의 특정한 부문들 내에서 리버테어리언 이념이 지니고 있는 신념들에 대해 엄청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꽤 행복할 수 있었다. 확실히 우리는 노동조합, 학생, 민중 속에서 나온 전투파들로 구성된 리버테어리언 운동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들은 특정한 전략적, 전술적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었고, 우리는 공통적인 정치적, 문화적 입장을 그 요소들에 부가할 수 있었다. (옮긴이: 이 문장에서 common political and cultural matrix는 보통 정치성향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뒤 사각형을 보수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사민주의적, 권위주의적 이런 식으로 네 칸으로 나누고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보여주는 도표를 말함. 거기서 공통되는 지점을 찾는 것임) 2011년의 동원은 주체적 수준에서(on a subjective level) 리버테어리언 프로젝트가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숙이 침투할 수 있게 하는데 기여했다.
동시에, 이렇게 급속히 발전된 리버테어리언 운동이 좌파 내부에서 혁명적 극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당했다. 그것은 학생 연합들과 CONFECH(칠레학생총연합), 새로운 생디칼리즘을 위한 의회와 같은 조직들 내부에서 다른 정치적 경험들과 공동행동을 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직 맹아적 형태이긴 하지만, 2011년 이후에도 여전히 버티고 있는 특정 주민의회들과 조정위원회들에서도 드러났다. 지난 2,3년간 우리의 노력은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현저한 진전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 노력으로 인해 우호적인 세력이 축적될 수 있었고,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위성 운동”이라는 지위를 벗어던지고 그들의 리버테어리언 프로그램 내부에서 발전시켰던 일련의 경험들과 사고들을 민중 운동에 주입할 책임을 떠맡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선명함의 결과 더 이상 우리의 실천은 우리가 창안하지 않은 어떠한 계획에 대해서 등을 돌리거나 거부하지 않으며, 동시에 더 이상 시류에 편승할 필요가 없으며, 권위주의적 좌파들 편에 붙을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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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민중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이 함께 어우러진, 그러나 특정하게 공유된 요소들을 갖고 있는 리버테어리언 운동이었다. 이를테면 국가의 외부에서, 아래로부터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에 대한 인식 같은 것. 언제나 운동 내부의 민주주의에 중점을 두고 운동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고취하는 것. 전략적 수준에서의 과제가 계급이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민중 권력을 건설하고 사회 변형을 위한 주된 정치적 도구로서 직접 행동을 북돋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 그러나 대선후보 마르셀 클라우데를 지지하는 ‘모두 모네다궁으로’[3] 운동의 일환으로 ‘붉은 해방’의 등장, 그리고 ‘학생해방전선’이 이러한 계획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움직임은 오로지 리버테어리언들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지금 우리 운동은 개혁적이고 권위주의적 입장이 전투적 입장에 대해 헤게모니를 얻었고, 아나키스트들은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들로 전략해버린 것 같다./ 각주 [3]에 따르면 이 운동은 Izquierda Unida(단결된 좌익)과 휴머니스트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한 때 크리올과 라틴 아메리카 아나키즘의 역사적 계보가 깊이 새겨 넣은 칠레 아나키즘 운동이 위로부터의 제도적 투쟁과 아래로부터의 직접 대중행동을 보완하는 정치노선을 도입할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정도로까지 실용주의를 선택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볼리바르 프로젝트와 민족주의 좌파들의 논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수파가 즐겨 선택하는 과업(popular project of majorities)을 향하는 길인 “민주주의의 파열”에 전념하는 것이 리버테어리언에게는 장기적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버테어리언 운동 내부에는 여전히 단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그들의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최소한 현 시점에서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과업이 동거하기 시작하는, 그러나 또한 전략적으로 심각히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단계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 크리올은 16세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건설했던 스페인 사람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독립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계 크리올이었다. (...)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18세기가 될 무렵에는 "criollo = 아메리카 태생의 백인"라는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베로아메리카 제11권 2호[2009. 12] “탈식민성과 라틴아메리카 연구”에 따르면 맑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이 한줌밖에 안 되는 크리올 분리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 없이 영국 부르주아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진단에 직면한 우리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두 개의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리버테어리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개혁파들이 제출한 입장은 견디기 너무 힘들다는 뜻이다. 또는 “리버테어리언”이 무엇인지 이 개념의 역사적 유산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논쟁을 통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 시점에서는 반론의 여지없이 아나키스트의 실천과 사상에 연관된 문제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모여서 이러한 구성(construction)에 대해 논쟁하는 학파를 만들 때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이 개념의 구성은 10년 넘게 계속되어 왔고 그 동안 우리 아나키스트 코뮤니스트들은 어쩌면 리버테어리언의 다른 부문들보다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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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침묵은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비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실수일 것이다. 첫 번째 주요한 과제는 아나키즘의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후 Delo Truda 그룹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1917-1919년에 러시아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실패한 것을 볼셰비키당의 국가주의적 탄압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에 빠져들었는데, 그것은 심각한 실수다. 볼셰비키의 탄압은 혁명 기간에 아나키즘 운동의 확산을 방해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장애였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바로 아나키즘 운동 내부의 무기력이었다. 모호함과 우유부단함을 발산하는 그 무기력은 조직과 전술에 관한 주요한 정치적 문건들을 특징지었다.”
1차적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반드시 배울 건 배우고 넘어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건설된, 그러나 무엇보다도 계급의 자율성과 직접 대중행동에 기반한 풀뿌리 운동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우리 조직에 다시 가져와야 한다. 개혁파 진영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 우리 자신의 건설적 제안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조직적 구조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고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경험과 우리가 과거에 이룬 것들에 대한 이론적 반성을 통해 영감을 얻고 인도를 받을 수 있을 뿐이지, 별 다른 수가 없다.
두 번째 과제는 동맹에 관한 우리의 정책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혁명적 대안을 건설하려 하는 조직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이 승리할 것이며 어느 영역에서 우리의 동맹을 선택할 것인지 정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래로부터 그리고 투쟁 속에서” 혁명적 부문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이유다. 이 구호는 우리 자신을 제도적 목표를 가진 위로부터의 어떠한 연합과도 거리를 갖게 해준다. 그리고 제도적 목표는 ‘모두 모네다궁으로’에 결집한 일부 리버테어리언들의 선택인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위치를 “아래로부터”에 놓는 것은 우리의 다양한 회원들이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특정한 영역들(사회적 그리고 사회-정치적 공간들)에서, 최소한의 특정 목표들이 공유되기만 한다면, 조율을 우선순위로 둔다. 그리고 이 “아래로부터”는 “투쟁 속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들을 명확히 하고 우리의 입장을 바로 잡는 것은 단지 정치 기구를 통한 논쟁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민중적 부문들 내부에서 리버테어리언 극을 형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과업을 촉진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한 한 리버테어리언적인 운동이 될 것이며, 종국에는 혁명적 방식으로 국가를 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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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것과 연관된 세 번째 과제는 왜 우리가 현재의 선거과정에서 리버테어리언들의 참여를 반대하는지 분명히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래로부터 그리고 국가의 외부에서 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전략과 완전히 연관되어 있다. Felipe Corrêa(옮긴이: 브라질 Organização Anarquista Socialismo Libertário 회원임)의 말을 빌리면,“자본주의의 어떠한 사회적 변형도, 사회주의는 오로지 국가기구 외부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옹호했던 바쿠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 모든 피지배계급의 조직일 것이다. 피지배계급은 그들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기구들 - 노동조합, 사회운동 등에서 시작하여, 변형을 위한 투쟁과 새로운 사회의 구조화 양쪽 모두를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배권력이 아니라 자율관리 권력으로 제시할 것이며, 지배 일반을 폐지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경제적 영역(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정치적 영역(더 많은 자유와 시민의 권리) 모두에서 단기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오로지 더 폭넓은 변형과정의 수단일 뿐이며, 그 과정은 새로운 영토적, 공동체적 권력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자본주의와 국가를 폐지하게 될 자율관리 권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한다.
/ 국가에 대한 바쿠닌과 맑스의 차이에 대해. (독일어가 서툴러서 영문 번역본을 참고하면서 옮겼습니다)
바쿠닌은 맑스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wenn das Proletariat die herrschende Klasse sein wird, dann über wen wird es herrschen?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누구를 지배할 것인가? 그것은 dieser neuen Herrschaft, diesem neuen Staat(새로운 지배, 새로운 국가)가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맑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Das meint, solange die andren Klassen, speziell die kapitalistische noch existiert, solange das Proletariat mit ihr kämpft (denn mit seiner Regierungsmacht sind seine Feinde und ist die alte Organisation der Gesellschaft noch nicht verschwunden), muß es gewaltsame Mittel anwenden, daher Regierungsmittel; ist es selbst noch Klasse, und sind die ökonomischen Bedingungen, worauf der Klassenkampf beruht und die Existenz der Klassen, noch nicht verschwunden und müssen gewaltsam aus dem Weg geräumt oder umgewandelt werden, ihr Umwandlungsprozeß gewaltsam beschleunigt werden.
다른 계급들, 특히 자본가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과 싸우는 한,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력을 갖고 있더라도 그들의 적들과 사회의 낡은 조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적 수단, 따라서 통치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신은 여전히 계급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원인인 경제적 조건과 계급의 존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변형시켜야 한다. 그것의 변형과정은 강제적으로 촉진되어야 한다.
바쿠닌은 묻습니다. Wenn Staat ist, dann ist unvermeidlich Herrschaft, folglich auch "Sklaverei"; Herrschaft ohne Sklaverei, verborgen oder maskiert, undenkbar - deswegen sind wir Feinde des "Staats" Was heißt das, das Proletariat, "das als herrschende Klasse organisiert"? 국가가 있으면 지배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노예제”도 불가피하다. 노예 없는 주인, 그것이 은밀한 것이건 위장된 것이건, 생각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적이다.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라니 무슨 말인가? 맑스는 대답합니다.
D.h., daß das Proletariat, statt im einzelnen gegen die ökonomisch privilegierten Klassen zu kämpfen, Stärke und Organisation genug gewonnen hat, um allgemeine Zwangsmittel im Kampf gegen sie anzuwenden; es kann aber nur ökonomische Mittel anwenden, die seinen eignen Charakter als salariat |Lohnarbeiter|, daher als Klasse aufheben; mit seinem völligen Sieg ist daher auch seine Herrschaft zu Ende, weil sein Klassencharakter [verschwunden].
그것은 경제적 특권을 가진 계급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싸우는 대신 그들과의 투쟁에서 보편적 강제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힘과 조직을 충분히 획득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경제적 수단만을 사용할 수 있다. 임금노동자로서의, 따라서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지양할 수 있는 수단.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도 당연히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계급적 성격은 사라졌기 때문에.
http://www.mlwerke.de/me/me18/me18_597.htm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4/04/bakunin-not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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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포르투갈서 긴축반대 수만명 항의 시위(로마·리스본 AP·AFP=연합뉴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주요 도시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19일(현지시간)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부의 예산감축과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적 비용에 항의했다.
http://youtu.be/Ix962fPtmBA
http://youtu.be/gT5NeqGF8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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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 잘 지내시고 계시나요?어디 계신지 요즘 통 안보이시는데 블로그 주인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가 너무 오랫동안 이 공간을 쓰고 있었네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해요. 전에 만들어두었던건데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뒀어요. 8월에 우리 애가 아파서 8월말로 직장을 그만뒀어요. 얼마 안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서. 그런데 요새 다시 좋아져서 또 희망을 갖게 됐어요. 어쩌면 올해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0^
처음엔 당분간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애가 저한테 시간을 선물해주고 있네요. 작년 4월에 갑자기 수술하고 나서 쇠약해져서 카드빚도 많이 지고 또 병원비가 계속 들어갈 지 모르니까 힘들어도 계속 직장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애한테 필요한건 치료가 아니라 제 보살핌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또 방문할께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지내시길 바래요.
새로운 집이에요. 놀러오세요.
http://shimarisu.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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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님, 이사간 동네 가 봤더니 집이 철거되었네요. 어디 계시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