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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염돈재의 글 "독일 통일 교훈 올바로 이해한 드레스덴 연설"에 대한 비판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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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의 글 "독일 통일 교훈 올바로 이해한 드레스덴 연설"에 대한 비판 - 2

염돈재의 글은 안봐도 빤한 논리전개로 이어진다.

 

동방정책의 목적이 동독정권변화에 있다는 왜곡의 이면에는 사실 동방정책의 목적이 혹은 그 결과가 동독정권강화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출발한 논리 전개는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동방정책이 단절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염돈재는 바로 저런 논리전개를 한다. 원문을 보자.

   

“둘째, 많은 사람은 기민당의 콜 총리가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콜 총리는 동독과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방침만 이어갔을 뿐 사민당 정책 기조는 계승하지 않았다. 콜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사민당 요구대로 동독 탈출민의 수용을 거부하고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다면 독일 통일은 훨씬 지연됐거나 불가능하게 됐을 가능성이 많다. 위기에서 벗어난 공산 잔당이 다시 세력을 얻어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물안 개구리의 모습을 짚고 넘어가자.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맏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있다. 한국의 친지 노인네들과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지난 번에는 스위스와 독일 국경사이에 있는 보덴제 호수에 다녀왔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거기서 머냐?” 착시현상의 한 발현이다.

 

그런데 이런 착시현상이 뚝 떨어져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두고서도 일어난다. 염돈재는 분명 역사적인 사건들의 시간성 – 공간적으로는 거리성 – 을 가늠할 줄 알 거다. 근데 그는 우물안 개구리의 모습을 취하고 일반인들을 우롱한다. 장벽이 붕괴된 직후의 상황과 동방정책이 만들어진 시기를 동시화하고 있다.

 

 비판 본론으로 들어가자.

 

계승이 문제다. 염돈재는 동방정책을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사민당 정책 기조”고 다른 하나는 “동독과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방침”이다. 이렇게 구분하고 콜 총리가 사민당의 정책 기조는 계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민당 정책 기조”를 은근 슬쩍  “동독 탈출민의 수용을 거부하고 대규모 경제 지원”이라고 정의한다. 이어서 사민당 정책 기조가 관철 혹은 계승되었다면 “ 독일 통일은 훨씬 지연됐거나 불가능하게 됐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마지막에 드디어 염돈재의 글을 지배하는 팔림세스트 텍스트, 혹은 피벗 텍스트가 등장한다. 동방정책이 지속되었더라면 “위기에서 벗어난 공산 잔당이 다시 세력을 얻어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북한 지원하지 말라는 말이다. 북한 지원이 북한 체제를 강화한다는 말이다.

 

근데 동방정책의 기조가 바로 케네디의 제안의 연속 안에서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방침”이었다. 다른 게 없었다.

 

그리고 사민당이 장벽 붕괴 후 독일 통일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뭔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독일 제 2 공영방송 ZDF의 탐사보도를 참조하라. (Die SPD war 1990 gegen die Wiedervereinigung – Stimmt so nicht/사민당은 1990년 통일을 반대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맞지 않는 말이다.  http://zdfcheck.zdf.de/faktencheck/spd-wiedervereinigung/) 누누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통일조약을 100% 찬성한 정당은 자유민주당 FDP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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