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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12
    독일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투쟁의 현장
    ou_topia

독일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투쟁의 현장

베를린에 오면 일반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지만 좌파라면 꼭 찾아가봐야 할 곳이 있다. 베를린의 번화가로 알려진 프리드리히거리를 쭉 올라가면 나오는 메링 광장(Mehring Platz)이다. 베를린에는 여러 광장이 있는데 광장의 모양에 따라 론델(Rondell/원형광장), 카레(Carré, 사각형광장,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 그리고 옥토곤(Oktokon/8각형광장, 라이프치거 광장/Leipziger Platz)이라 불린다.

 

메링광장은 원래 원형으로 만들어져 Rondell이라 불렸는데, 워털루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나폴레옹이 사령부로 사용했다는 주점 ‘벨 알리앙스’(Belle Alliance)란 이름을 따서 벨 알리앙스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2차 대전 후 서베를린에 위치하게 된 이 광장은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마르크주의 사학자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의 이름을 따서 메링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광장에는 옛날 모습이 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시 언론사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또 정부청사와 가까운 지역이어서 집중폭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독이 한참 지난 지금 ‘문제지역’으로 간주되는 이 지역 재단장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게 아니라 메링광장에 위치한 이 지역 관리 사무소(Quartier Management)가 이 지역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서 마련한 사진자료와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다. 11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독일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스파르타쿠스연맹 간의 분열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파르타쿠스봉기 - 린덴[보리수]거리(Lindenstrasse)에서의 혁명

                     

※ 전후 길 위치가 약간 변경됨. 이전에서 메링광장으로 이어졌음.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월로 이어지는 몇 개월 동안 벨알리앙스광장과 린덴거리에서 사는 주민들은 혁명과 “스파르타쿠스봉기”의 처참한 유혈진압을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 된다.

 

1918년 11월 8일 군부대가 또다시 할레셔스 문(Hallesches Tor, 인근 지역이름)을 통과하여 진입한다. 1차 대전에서 귀국하는, 기관총과 가벼운 대포로 무장한 제 4 엽병(獵兵)연대(Jägerregiment)가 기존질서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연대는 11월 9일 시위하는 노동자와 군인들이 황제를 강압하여 퇴위하게 하자 혁명에 합류한다.

 

1918년 11/12월, “사회주의 소비에트정체”(독립사민당)냐 아니면 “의회주의”(사민당)냐 라는 대안을 놓고서 진행된 논쟁이 노동운동의 분열로 이어진다. 1919년 1월 5일 독립사민당은 사민당과의 공동행동(Zusammenarbeit/협력)을 회수한다. 혁명지도자들, 스파르타쿠스연맹, 독립사민당은 대중시위를 촉구한다.

 

같은 날 저녁 무장 노동자들이 주요 신문사건물들을 점거한다. [이 중 하나가] 사민당기관지 “포어베르츠”(Vorwärts/전진) 및 사민당 제국정당학교가 자리한 “린덴하우스”(Lindenhaus)다. “포어베르츠”는 유난히도 다수파사민당이 완고하게 걷던 “함구와 질서”(Ruhe-und-Ordnung)의 노선을 선전했다.
 

1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구스타브 노스케가 이끄는 사민당 지도부는 반격의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위해서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간(alt) 황제의 군부를 불러 원조를 구한다. 특히 “포르베르츠” 건물을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다. 심한 폭격을 받은 점거 [노동자]들은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백기를 들게 하고 적군 사령관에게 보낸다.

 

대표단의 목적은 안전한 철수(freier Abzug)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명 협상대표단은 인근 용기병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한명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와 함께 돌려보내고 나머지 5명은 학대를 받고 총살된다.

 

 

 

나중에 이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일이 일어난 건 옛 세력과 결탁하고 혁명을 죽인 사민당의 원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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