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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4/14
    비지론
    ou_topia
  2. 2012/04/12
    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1)
    ou_topia
  3. 2012/03/23
    선비, 자리싸움, 야권연대
    ou_topia
  4. 2012/03/16
    반MB에 대한 단상(4)
    ou_topia

비지론

비지? 한국 사회주의권의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종종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의아해 할 때가 있다.

비지하면 얼른 떠오르는게 비지찌게. 고기가 귀한 시절 (1년에 한 두어번 정도 먹었었나?) 삼겹살을 넣고 끓인 비지찌게.

그래서 그런지 내 머리는 비지론에 비지와 삼겹살을 연상하고 침샘에 명령하여 군침을 흘리게 한다. 근데 뭔지 알고보니 맛이 싹 가신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비지론은 국공합작에 기대고 있다 (노정협의 <임박한 4.11 총선과 노동자의 전략 전술> 참조).

쉽게 말해서 삼겹살이 되자는 이야긴데, 오류가 심해도 보통 심한 게 아니다. 내 뇌주름의 오류야 연상착오라고 어여쁘게 봐 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근데 국공합작에 기대어 야권연대, 비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좌파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관념론에 빠질 수 있을까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우선 존재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한다.  아예 눈을 감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있지 않는 것을 어디다 갖다 붙였다  떼었다 한다. 한국에 중국의 공산당과 같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현안인데, 공산당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논증한다. 마오를 읽기 전에 먼저 비트겐슈타인 읽기를 권하고 싶다.

 기초적인 존재론적 오류가 범주의 오류로 이어진다. 계급 동맹을, 다시 말해서 조직된 계급, 즉 당 간의 동맹을 사안적인 동맹과 혼돈하고 있다. 예컨대 무상급식과 같은 사안적 동맹과 조직적 동맹을 혼돈하고 있다. 사안적 동맹은 조직, 즉 당이 부재해도 이야기될 수 있는 범주다. 그러나 조직적 동맹은 당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야기 될 수 없다. 고등교육이 필요없는 상식이다.

몰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공합작이 있기 전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생사를 건 싸움을 했다. 그리고 당의 생존을 위해서 국민당 치하로 들어가지 않고 대려 국민당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합작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 했을 때 했다. 이게 국공합작의 역사적 교훈이다.

암튼, 삼겹살은 좋아하지만 비지론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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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

1.

붉은 색은 좌파의 전용으로 알고 있는데 새누리당이 붉은 점퍼를 입고 다닌다. 노란색은 독일의 경우 친기업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색인데 매우 헷갈린다.

2.

야권연대란 걸 이해할 수 없다. 독일의 경우 진보적 좌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야권연대를 거부해 왔다. 1차대전 전쟁신용법안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독립사민당이 떨어져 나와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원자력과 나토이중결정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반전.반핵.평화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와 녹색당을 결성하였고, 비정규직, 노동자파견법, 실업자수당 사회수당으로 하락 등 신자유주의 개혁정책 <아젠다 2010>를 실행한 사민당에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이 떨어져 나와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을 결성했다. WASG의 경우 심지어 사민당 당수가 탈당하여 WASG에 합류했다. 통합진보당으로, 그러니까 결국 민주통합당으로 간 한국의 진보거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권연대란 게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3.

4.11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 관련,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언론은 총선결과에 잠깐 얼어붙더니 금새 회복하고 긍정적인 평가로 말머리를 돌린다. 야권연대가 수도권에서는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물음표를 달고 싶다. 여야를 왔다갔다하는 17대, 18대, 19대 총선의 결과를 보면 서울이란 대도시의 특성이 더 작용한 게 아닌가 한다. 서울을 몰라서 이렇다저렇다 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일정한 정당에 투표하는 밀리외(millieu)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없거나 다양해서 투표결과가 매우 유동적이지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수도권에서의 총선결과를 대선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판단은 속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총선결과는 여촌야도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  인증샷수준의 순간포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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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자리싸움, 야권연대

한자/한문을 제공하는 워드의 툴이 없으면 하늘천따지 하고 꽉막일 사람이 유학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하지도 않을 것이고.

근데 선비하면 강하게 내 머리를 가득 채우는 이미지가 있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자리를 차 버리고 낙향하여 시골에서 서당하는 선비의 모습이다.

잉여가치에 충혈된 자본주의 흡혈귀 ‚머시너리’(Maschinerie)에 예속되어 몸 주고 이제 마음까지 거의 다 준 상황인데 선비운운하는 건 아마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사람이나 떠드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근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선비’하니까 민심이 동요한다. 때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기때마다, „난 자유가 좋아“를 제창하게 하면서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에 완전 예속된 것처럼 보이는 민심이, 다른 걸, 소위 대안이란 걸 보지 못할지언정, 열심히(!) 자리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마음 속 깊은 곳에 심어져 있는 다른 그림을 본다.

자리에서 내려온 새누리당 김종인과 자리에 붙어있는 한명숙, 이정희가 대조된다. (어, 이정희 자리 내놓았다네. 쯪쯪).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온 선비와 자리싸움을 자기 이데올로기로한 중산층의 마인드를 그대로 보여주는 „야권연대“가 대조된다.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자리싸움에 시달리는 민심이 최소한 보고싶어 하는 것은 김종인과 같은 선비의 모습이다.

과거에 뿌리하는 마음가짐이지만 여기에 미래가 없다곤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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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MB에 대한 단상

반제, 반전, 반핵은 설명이 필요없고
반듀링하면 뭔 말인지 알겠고
반자본주의하면 적이 보이는데
반MB하면 뭔가 헷갈린다.

자본주의는 그대로 두고 MB를 반반하자는 „야권연대“의  半MB인지
MB를 버리는 박근혜의 叛MB인지 …

하기야, 유통기한이 다 된 MB를 다들 얼른 먹고 싶겠지…

 

스스로 심고 가꿔 수확하지 않고

유통기한이 다 돼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것만 찾아다니는

거러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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