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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Schein


 

케네스 웨스트팔은 헤겔의 <지각> 장이 위에서 언급한 흄의 <인성론>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Täuschung’은 ‚Illusion’의 번역일 것이라고 한다. (Kenneth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hmbarer Dinge, Ffm. 1998, S. 10ff.)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착각=Illusion}은 {착각=Täuschung:<=>Tausch(교환)}이 아닌 것 같다. {착각}이 교환의 의미를 가짐과 함께 {Schein}도 가상(假象)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물자체로] ‚있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넘어가면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가상 혹은 사이비라고 했다. 교환에서는 뭔가 넘어가는 것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독어로 Passierschein이라고 한다. 비자도 이것과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Visum'(비자)는 통과할 때 보여주는 것(‘Sichtbares'=보이는 것)으로서 Schein(=증명서)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건너감’의 상처에 주목하고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지적하고 또 지적했듯이 - '건너감‘은 ’십볼렛‘하는 몸체를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뭘 가지고 건너왔던가? 뭐가 건너가게 해주었던가?


 

이주 노동자는 ‘노동력’만이 ‘건넘’을 허락받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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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

4. 넷째 문장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지각하는 [의식은] {착각}의 가능성도 의식하고 있다.“)


 

어? 흄과 칸트에 따르면 {착각=Illusion}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필연성에 가까운 것인데 헤겔은 가능성이라고 한다.


 

헷갈린다. 흄-칸트의 {필연성}은 헤겔의 {가능성}과 같은 것인가?


 

1) 이해 첫 접근


 

{착각}의 맛이 각기 뭔가 다르다. {착각=Illusion}의 필연성하면, 흄과 칸트에게는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나쁜} 필연성이다. 근데, {착각=Täuschung}의 가능성하면 뭔가 좋게 들린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달리 뭔가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맛을 준다. 말장난 같지만 {착각=Illusion}의 필연성은 {착각=Täuschung}이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착각}행위가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그렇다면, 흄과 칸트의 필연성은 현실에서 별 볼일 없는 추상인가?

 

헤겔의 {착각=Täuschung}은 {나쁜} 필연성이 아니라 {좋은}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필연성이라면 {착각=Täuschung}의 의미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착각=Täuschung}이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착각=Täuschung}은 긍정적인(positiv-ponere-setzen-gesetzt-정립된) 것이다. 이 정립은 우선 ‘이것’과 ‘저것(=이것이 아닌 것)’ 간의 관계인데, 어쨌든 ‘이것’과 ‘저것’을 바꾸는 행위다.

 

그래서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은 „지각하는 의식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하는 가능성을 (혹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번역 첫 시도에서 „Täuschung“을 „불량거래“로 번역한바 있다. "täuschen"(기만하다)의 어원 ”tauschen"(교환하다)에 기댄 번역이었다. 이제와서 보니 그리 틀린 번역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번역}이다. „täuschen“의 몸체에 있는 이런 'Schein'이 어떻게 다른 말의 몸체로 {번역}될 수 있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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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4)-이어서

사물의 자기동일성엔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되는] 지속적인 존재가 전제된다.

 

바로 이 문제를 흄이 <인성론> 1권, 4부 2장 'Of skepticism with regard to senses'에서 다룬다.


흄은 [지각]외부존재의 진실성은  이성적으로(by reason) 증명할 수 없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인데도, 우리는 그걸 안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건 인간 본성상 선택의 여지가 없고(“Nature has not left this to his [회의주의자의] choice.”) 모든 추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That is a point, which we must take for granted in all our reasonings.”)이라고 한다. 그래서 외부존재로서의 ‘사물’('body')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단지 어떤 원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body')의 존재를 믿게 하는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흄은 이어서 [외부]사물의 존재를 [지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하는] 지속적인 존재라는 측면으로 나눠 다루면서, 외부존재에 대한 믿음이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추적한다. 감각(senses), 이성(reason), 그리고 상상력(imagination)이 그 영역들이다.


흄은 외부존재는 오류와 환영 같은 것에 의해서("by a kind of fallacy and illusion") 오로지 믿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절대 감각과 이성의 영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감각은 자기를 기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선 감각은 사물의 지속성이란 관념(notion)이 발생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논리적으로] 없다. 왜냐하면, [감각에서] 대상이 사라졌는데 대상이 계속 있다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으로서 감각이 중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각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에서 가능한 사념은 단지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이 인상들(impressions)을  [외부존재를] ‘재현하는 상’으로 아니면 외부존재 자체로 제시해야한다 ("and in order to that, [senses] must present their impressions either as images and representations, or as these very distinct and external existences.") 

 

근데 감각은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은 인상들을 “일개의 단순한 지각”(“a single perception",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eine einfache Wahrnehmung', 즉 아무런 접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 둘로 갈라짐이 없는 일개의 지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은 ”이중존재“(”double existence")를 생산할 수 없다. 뭔가 다른 것, 즉 이성 혹은 상상력의 개입으로 이중존재라는 환영이 발생하고 그 이중존재 간의 관계가 “흡사”(“resemblance”)니 “야기”(“causation”)니 하는 기만이 행해질 수 있다.

 

인상을 재현으로 보는 배경에는 가상(Schein)이 자리하고 있다. 가상은 의식의 소여(所與)태에서 뭔가가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고 가정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근데, 감각에서는 현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They [인상들] must necessarily in every particular  appear what they are, and be what they appear.") 가상의 배경을 이루는 현상과 존재의 분리는 감각영역 밖에서 혹은 감각이 아닌 다른 것이 감각영역에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 감각과 다른 뭔가는 감각의 내용들을 감각의 영역에서 현존재의 영역인 존재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결국, 착각의 문제는 영역의 문제다.

 

상품은 시장생산을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배 하에서 이중성격을 지니는 상품이 되듯이 사물의 이중성(정확히 말하면 Einheit-Eins-Eigenschaft로 짜여 진 삼중성) 역시 어떤 영역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 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무엇의 지배아래 누가/무엇이 감각의 영역 이쪽저쪽에 등장하여 뭘 사고파는지 궁금하다. 착각, 기만, 불량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게 뭐지?

 

흄은 인상의 이중성은 상상력이 감각의 영역을 지배할 때 그렇고 이성(reason)이 지배하면 현상과 존재의 분리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 같다.

 

칸트도 감각에 대한 견해에서 흄을 따르는 것 같다.

 

칸트는 우선 현상과 가상을 구별하고, 가상의 위상은 진리와 같은 것으로서 대상과 오성 간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감각(Sinne=senses)은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오성은 형식적 진리를 산출하는 법칙을 준수하기 때문에 절대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다. 근데 감각과 오성 외에 다른 인식원천이 없기 때문에 오류는 단지 감성(Sinnlichkeit)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알 수 없게(unbemerkt) 오성을 침범(Einfluss=영향)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A294).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감각과 오성은 함수적인 관계에서와 같이 직접 관계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데, 감성이 그러지 않고 오성행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벌어지고 , 그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포인트는 흄과 같이 이와 같은 오류는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단지 칸트는 이런 오류를 심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선험적 가상(transzendentaler Schein)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한다.

 

선험적 가상은, 내재적 원칙과 초월적 원칙 중에서, 내재적 원칙을 남용하면서 그 남용을 초월적 원칙에 따른 순수오성의 확장이라고 뻐기는데 있다고 칸트는 설명한다(A296).

 

이런 뻐김은 선험적 비판을 통해서 단지 허구라는 것이 폭로되어도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주관적인 인식능력이 이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건 주관적인 인식능력일 뿐인 근본규칙(Grundregel)과 그 사용에 관한 격률(Maxime)이 객관적인 원칙(Grundsätze)의 탈을 쓰고 오성의 편에 서서, 우리가 우리의 개념들을 어떻게든 연결해야 하는 주관적 필연성을 개관적인 필연성으로, 즉 물자체의 규정으로 돌리는데 있다.  그래서 이런 착각("llusion")은 전혀 회피할 수 없다(A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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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4)

3. 셋째 문장:

 

“Indem der Gegenstand das Wahre und Allgemeine, sich selbst Gleiche, das Bewußtsein sich aber das Veränderliche und Unwesentliche ist, kann es ihm geschehen, daß es den Gegenstand unrichtig auffaßt und sich täuscht.”

(“[의식에게] 대상은 참답고 보편적인 것이며 자기동일성인 반면 의식은 자기가 보더라도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의식에게는 대상을 잘못 담아내어 착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3.1 대상="das sich selbst Gleiche"

 

“das sich selbst Gleiche"를 ‘자기동일성’이라고 번역했는데, 무슨 말이지?

 

우선 지각에서 대상이 어떻게 규정되었는가 보자.

 

우리/헤겔에게는 (für uns oder an sich) 대상과 의식이 단지 지각의 Momente일뿐이다. 단지 지각하는 의식에게만 양대 Momente가 분리되어 대상과 지각하는 의식으로 대립한다. 이때 대상은 1) 지각하는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Wesen=Sein), 즉 지각하는 의식[행위]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 되며, 이런 독립적인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단순한 것(“das Einfache")으로 규정된다. 반면,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허깨비 혹은 있으나마나한 허섭스레기와 같은 것(das Unwesentliche)으로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내구성이 없는 것(das Unbeständige)으로 규정된다. (지각 장, (§1))


(§6)에서 “das sich selbst Gleiche"라는 규정이 추가되는데, 이게 단지 ”das Einfache"(단순한 것)의 다른 표현인지, 아니면 대상의 새로운 규정인지 아리송하다.

 

“das Einfache"를 ”단일성“("Einheit")으로 읽고  ”das sich selbst Gleiche"를 ‘수적 동일성’으로 해석해보자.

 

그러면 ‘지각하는 의식은 변화는 것으로서 시점t1와 t2에 행해지는 지각 W(t1)와 W(t2)는  동일 할 수 없으나 W(t1)의 대상 G(t1)와 W(t2)의 대상 G(t2)는 동일하다’정도가 되겠다.

 

근데 영 이상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W(t1)=W(t2), 고로 G(t1)=G(t2)하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지각은 서로 다른데 대상은 안 그렇다고 하면 뭔가 영 말이 안 된다. 대상의 자기(수적)동일성을 확인해 주거나 담보해 주는 뭔가 다른 게 있다면 또 몰라도.


 

3.2 지각하는 의식의 착각(unrichtig auffassen, sich täuschen)

 

3.1의 연장선에서 지각하는 의식의 착각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겠다.

 

G(t1)=G(t2), 그럼에도 불구하고 W(t1)≠W(t2)


 

근데 의식에겐 W(t1)와 W(t2)가 동일 할 수 없으므로,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건 필연적인데, 그럼 과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각 이전에 어떤 기만 혹은 속임수가 있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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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3)

2. 둘째 문장: "reines Auffassen"

 

"es hat ihn nur zu nehmen, und sich als reines Auffassen zu verhalten; was sich ihm dadurch ergibt, ist das Wahre. Wenn es selbst bei diesem Nehmen etwas täte, würde es durch solches Hinzusetzen oder Weglassen die Wahrheit verändern.”

("[이때] 의식은 대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rein=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의식에게 안겨지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거기서 이야기된 자연[발생]적인 의식은 이미 감각적 확신이 사념하는 {대상}+{의식}의 직접성(Unmittelbarkeit={의식}과 {대상}이 떨어지지 않고 찰싹 붙어서 하나인 상태=비분리성)이 허구라는 걸 경험한 의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확신이 자기 자신이 이미 의식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구별함과 동시에 그것과 관계하는 것”(정신현상학 서론 §10)이란 의식구조가 감각적 확신에서는 즉자적이었던 것이 지각에 와서는 대자적인 것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언뜻 보면 지각하는 의식은 아직 감각적 확신에서 덜 떨어진 것 같다.

 

지각하는 의식이 아직 덜 떨어졌다는 느낌은 그가 처음 취하는 태도를 볼 때 그렇다. 그는 대상을 단지 취하기만 하면 된다("ihn nur nehmen")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nur'는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제한과 함께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는, 손쉬운 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식이란 단지 절대적인 것을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우리 곁으로 당겨오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에(정신현상학 서론) 상응하는 태도다. 이런 인식에 아무런 노력(노동?)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감각적 확신과 같지 않나 한다.

 

지각하는 의식의 ‘취함’(nehmen)은 ‘nur'에 의해서 모든 능동성을 빼앗긴 온통 수동적인 태도다. 뭔가를 담아내는 그릇과("아교“ 정신현상학 서론 §1) 같다.  그래서 ’Auffassen‘을 능동성이 아직 약간 남아있는 ’파악‘으로 번역하지 않고 ’담아내는 그릇‘(Fass=통)으로 번역했다.

 

이런 태도는 대상과 의식 간의 분리는 전제하지만 그것이 의식과 대상 간의 관계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상의 이중구조도(정신현상학 서론 §10) 인식하지 못한다. 분리의 이런 절대화는(“schlechthin", 정신현상학 서론 §1) 의식으로 하여금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지각하는 의식은 자기가 필연적으로 이런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알아채는 순간 회의주의에, 즉 대상의 진리는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뚝 떨어져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나 한다.

 

감각적 확신과 지각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점은 오성 역시 마찬가지다. 사념, 지각, 오성은 다들 ‘의식의 양식’("Weisen des Bewusstseins“)으로서 사라지게 된다(‚오성’ 장 마지막 부분).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때, 사념, 지각, 오성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것, 즉 자기의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다. 의식의 이 길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로 향하는 길이다.

 

근데 왜 모르지? 감각적 확신이 지각하는 의식이 된 것은 단지 우리/헤겔이 그를 꾹꾹 찔러서 그렇게 되어서 그런가? 지각하는 의식이 대상을 손님맞이하듯이 받아들이지만, 손님과 함께 찾아온 ‘제3자는 불청객’(‘der ungebetene Dritte')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근데 사람들이 왔다.”/"Wir haben Arbeitskräfte gerufen, und es sind Menschen gekommen." Max Frisch) 아니면, 손님은 손님뿐이어서 거기에 참관할 수 없는(=주체가 될 수 없는) 제3자일뿐이기 때문인가?(“Ich bin hier nur ein Gast.“/”나는 여기 단지 손님일 뿐이다.“=여기 참관할 수 없는 제3자일뿐이다)

 

불청객으로 찾아온 제3자란? 감각적 확신을 꾹꾹 찔러서 단지 말하게 혹은 지시하게 하지만 않고 채찍질 하여 일하게/노동하게 하는 주인? 그런 관계아래 대상과의 관계가 그저 받아들이는 관계가 아니라 ‘노동하는/실천적인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자기의식이 발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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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2)

1.2 “und das Bewußtsein ist als Wahrnehmendes bestimmt, insofern dies Ding sein Gegenstand ist;”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의식이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사물과의 관계에서만이다. 이걸 앞 문장 “So ist nun das Ding der Wahrnehmung  beschaffen"에 반영하면 ‘das Ding der Wahrnehmung’의 2격은(2격이 전체가 되고, 2격이 수식하는 것이 일부가 되는)  ‘genitivus partitivus’가 되겠다.


그래서


“지각의 일부로서 사물이란 결국 이렇게 짜여 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부’다.


통일체(Einheit)와 그 Momente 간의 관계는 전체와 일부 간의 관계가 아니다.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했듯이 Moment는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통일체를 분석함으로써 비로소 그렇게(Moment로) 나타나고 그런 통일체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철학개념사전, Moment) 그래서 통일체 안에서의 Moment는 전체의 일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우리/헤겔에게 혹은 즉자적으로/für uns oder an sich] 지각의 존재터전인, 혹은 지각의 짜여짐(concept)인 보편성의 Momente일 뿐이다. [여기서 Prinzip을 짜여짐(concept)로 번역한 것은 client-server-modell, client-server-architecture, client-server-concept, client-server-principle 등이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에 기댄 번역이다.]


그래서 'das Ding der Wahrnehmung'을 ‘das Ding in der Wahrnehmung'으로 읽고 번역하면

 

“지각 안에서의 사물이란 결국 이렇게 짜여 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임석진 옹은 “das Ding der Wahrnehmung"을 ”지각되는 사물“로 번역했는데, 이건 지각 장의 key point를 희석시키는 번역인 것 같다. 지각 장의 요지는 감각적 확신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이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롭게 나타난 대상은Einheit와 그Momente 간의 관계인 사상규정(Gedankenbestimmung)인데, 지각하는 의식은 이런 Moment들을 일부로 하여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das Ding der Wahrnehmung'은 지각하는 의식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넘어서는 오성에 의해서 begreifen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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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정신현상학 번역에서 특히 어려운 점은 똑같은 단어인데 상이한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에 있지 않나 한다. ‚Flügel’(‚날개’; ‚피아노’)과 같은 동음동형이의어라면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데 정신현상학에서는핵심적인 단어(개념)들이 맥락에 따라서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이해와 번역이 어려운 것 같다.

 

헤겔의 언어사용은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속해 있는 언어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있다.“(철학적 탐구 43)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과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헤겔의 언어이론은 개별적인 단어가 홀로 뚝 떨어진 체로- 헤겔 용어를 사용하자면 für sich -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 안에서 구별된 것으로서야  비로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역자는 지각 장의 §6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를 지각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현실적으로 취하는 태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단락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첫째 문장

„So ist nun das Ding der Wahrnehmung beschaffen; und das Bewußtsein ist als Wahrnehmendes bestimmt, insofern dies Ding sein Gegenstand ist;“

 

이 문장에서beschaffen의 의미가 어렵다. ‚beschaffen’은 ‚Beschaffenheit’에 기대어 보통 ‚성질’로 번역되는데, 그러면 ‚Eigenschaft’(성질)와 구별이 잘 안 된다.

 

우선 ‚beschaffen’이 문법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자. 상태수동태에서의 과거분사로 사용된 것 같다. 그렇다면 ‚beschaffen’의 의미추적은 동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동사로서의 ‚beschaffen’은 ‚필요한 뭔가를 곁에 갖다놓다’란 의미다. 여긴 ‚[적절하게 잘] 배치하다’(aufstellen)란 의미도 스며있다 (예: Bist du richtig aufgestellt, um dieses Problem zu bewältigen?/넌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게 [준비한] 상태냐?) „Wie steht es mir deiner Gesundheit?“하면 „[네] 건강상태가 [지금] 어때“정도인데, 이것은 „Wie ist es mit deiner Gesundheit beschaffen?“란표현과 같은 의미다.

 

‚beschaffen’과 ‚aufstellen’, ‚stehen’간의 이런 관계는 라틴어 ‚consistere’(sich aufstellen)와의 가족유사성으로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Beschaffenheit’가 영어로는 ‚properties’(Eigentuemlichkeit= Eigenschaft=성질)로 번역되는가 하면 또한 ‚consistency’로 번역되기도 한다.

 

‚consistere’는 ‚움직이다 어떤 상태에서 멈추다’라는 기본의미에 ‚[특정한] 적을 대항하여 진을 짜다’란 의미도 있다. 축구에서 어떤 특정한 적수를 대항하여 공격수, 수비진 등 선수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팀을 짜는 것(‚eine Mannschaft aufstellen’)과 같은 의미다.

 

‚beschaffen’을 이렇게 ‚aufstellen’, ‚consistency’, 그리고 ‚consistere’에 기대어 번역하면 어떤 특정한 대립관계에서의 ‚[구성]요소들의 배치 상태’가 가장 적합한 번역이 될 것 같다. 그래서 한 축구팀은 A1, A2, ... A11이란 11개의 구성요소간의 관계,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그 11개의 Momente들이 한 시스템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예나 시기 논리에서 헤겔은 사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물은 „그 Momente의 시스템“(„das System seiner Momente“)으로서 „이들은(=Momente)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만 그 무엇이 된다. 그리고 사물은 바로 이런 관계다.“(„diese sind nur was sie sind, im Verhältnisse zu einander, und das Ding selbst ist diß Verhaeltniß.“(Jenaer Systementwuerfe II, 20, 3-6)

 

번역:


„지각에서의 사물이란 결국 이렇게 짜여 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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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하부

읽으면 읽을수록 몰이해와 함께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 드러난다. 환장하겠다.


 

(§6) 마지막 부분의 번역이 엉터리다.


 

원문을 소개하고 뭘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는지 짚어 보겠다.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이렇게 번역했다.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보편성 내에서는[한밤중에는 소들이 다 시커먼바(정신현상학, 서설 §16) “별다른 소”(=시커멓지 않는 소)가 있을 수 없듯이] 별다른 존재(Anderssein)가 존립할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뜬금없이(unmittelbar) 별다르게(selbst) 등장하는 것이고, 그 별다름이란 [곧바로] 소멸되고 파기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원문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한 번역이다.


 

원문을 다시 보자. 두 개의 문장이 하나로 축약된 문장이다.


 

1) 'Das Anderssein selbst ist unmittelbar für es.'와

 

2) 'Aber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als das Nichtige, Aufgehobene.'를


하나로 만든 문장이다.

  

'Anderssein'의 존재양식을 ‘selbst' 와 ’als'로 구별하고, 그렇게 구별된 것을 평행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앞에서도 사용된 방법이다.

 

우선 이 두 문장을 번역해 보면 이렇다.


 

1) 'Anderssein'은 직접적으로 의식에 대하여 있다.

2) 'Anderssein'은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보편성[안]에서는 소멸된 것, 거둬치운(=지양된) 것으로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는 'selbst'와 'Anderssein'이다.


 

'Anderssein'은 우선 앞에서 이야기된 'Sichselbstgleichheit(자기동일성)'에 배치되는 말인 것 같다.

 

대상은 자기동일성인 반면, 의식은 - 스스로 판단하기를 - ‘가변적’이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또 있으나마나 한’(unwesentlich) 것이다. 처음엔 'unwesentlich'를 ‘비본질적’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는 오역인 것 같다. 여기서 ‘unwesentlich'의 계보는  Wesen(본질)-wesentlich(본질적)-unwesentlich(비본질적)이 아니라, Wesen([실체적인] 존재)-Unwesen(허깨비)-unwesentlich(있으나마나한)인 것 같다. 의식의 이런 가변성과 Unwesen을 'Sichselbstungleichheit'(자기비동일성)이라고 했으면 오해할 여지가 없었을 텐데 헤겔은 왜 구태여 'Anderssein'이라고 했을까?


 

'selbst'는 여기서 ‘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는 상태’, 즉 무매개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이 지향하는 ‘의식과 대상의 하나’에서 ‘의식과 대상은 돌이킬 수 없게 분리되어 있다’점이 필연적으로 드러난 후, 의식은 이제 이 분리를 대상과 의식(=인식)간의 [교통]단절(정신현상학 서론 참조)로 확정하여 대상을 ‘지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다름’이 어떤 관계 안에서의 ‘다름’으로서의 구별(Unterschied)이 아니라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그저 다름(Verschiedenheit), 즉 ‘반복과 차이’에서의 ‘차이’가 된다. 또한 이런 무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Anderssein'이라고 한 것 같다.    


 

암튼, 문제의 문장은 이정도 번역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자기동일성이란 보편성(안)에서는 [자기비동일성(Anderssein)이 있을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의식도 모르게 (unmittelbar) 뜬금없이(selbst=아무런 관계없이) 등장하는 것일 뿐이지 보편성(안)에서는 소멸된, 거둬치워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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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상부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자아가 [그저] 수용하는(aufnehmen) 대상은 순수한 일개로 등장한다. [여기서 "Aufnehmen"의 주역은 시각인 것 같다. 뭔가를 ‘일개’로 지각하지 위해서는 감각기관의 sensation 혹은 impression 안에 배경으로부터 뭔가가 선명한 윤곽선에 의해서 구별되어 드러나야 한다. 청각, 후각, 촉각 등보다 시각에 이런 윤곽선을 그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뭔가가 윤곽선에 의해서 [외적인] 형상(Form)으로 나타날 때 일개로서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식의 대상은 이미 가공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자아는 그런 일개에서 개별성을 초탈하는 보편적인 {성질}도 지각한다(gewahr werden). [여기서 {성질}은 “이것은 한 그루 나무다.”에서처럼 형상을 분류하는 의식행위가 아닌가 한다. 이때 형상을 지각하는 일과 그것을 분류하는 것 사이의 구별은 분석상의 구별이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의식행위는 아닌 것 같다. 형상지각과 그 분류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immer schon) 이미 확정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다시 말을 배우는 갓난아이의 상태로 떨어진다면 몰라도. 그래서 코끼리의 꼬리만 보고도 “이것은 코끼리”하는 것 같다. 근데 지각하는 의식은 이런 진술을(logos apophantikos) 가능하게 하는 transzendental한 배경을 테마로 정립하려고 하는 주제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의식은 [대상이 본질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고 자긴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드리기만 한다는 고귀한 뜻(?)을 품고서] 일개[형상]으로 등장하는 대상의 본질이 바로 그 일개(성)라고 했는데 대상의 그런 첫 존재가 대상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의식은 대상의 이런 존재-존재론적 차이를 대상 쪽에 두지 않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만 생각한다.] 이어서 의식은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답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면 자아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식으로(마태 9, 16-17)]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전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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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5

§5)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현 단계에서 요구되는(=지각하는 의식이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어떻게 발버둥 하는지 볼 수 있는) 범위까지만 전개해 보면(=거미줄을 쳐 보면), 이상의 둘로 갈라지는 축(Moment) 그 어는 한쪽에만 있지 않고 양쪽에 있을 때 비로소 지각의 진리로서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사물의 진리는 α) 서로 아무런 구애를 주고받지 않는 수동적인 보편성, 즉 다수의{성질}들이, 여기에 더 적합하게는 소재들이, 병존하는<또한>이라는 테두리이며, β) [감각적 규정들이 서로 무관하게 펼쳐지게 하는 즉자적인 부정이] 단순하다는 차원에서 다를 바 없는[대자적인] 단순한 부정, 달리 표현하면 대립적인(=반정립된) {성질}들을 배제하는[대자적인] 하나이며, 그리고 γ) 다수의{성질}들이[존재하는 모습] 그 자체로서 첫 두 계기[간의 아니면 안의] 관계, 즉 부정운동이 어떻게 무심한 터전(Element)과 관계하여[그 안에 구별이 생기게 하고] 그런 구별의 집합으로서 자신을 개진해 나가는지,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감각적 확신의 손가락이 지향하는] 독자적인[바로 그] 한 점이 그가 존립하는 매체 안에서[한 점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로 뻗어 나갈 수밖에 없는지에 있다. 이와 같이 구별들이[<또한>이라는 긍정적인=정립된] 무심한 매체에 속한다는 면에서 그들 역시 단지[즉자적으로] 자기와만 관계하고,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무심한] 보편적인 것이다. 반면, [대자적인] 부정적인(=반정립된) 통일에 속한다는 면에서 구별들은 동시에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와 같은 구별들의 대립적인 관계는<각자의 또한>에서 제거된{성질}들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감각적 보편성,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감각적 확신이 행해지는 순간 바로 그 행위 자체에서 나타나는] 부정의 직접적인 통일이 곧바로{성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 보편성이 진정 성질이 되기 위해서는] {성질}(=독립체란 의미의Eigenschaft)로부터 하나(=단일성)와 순수한 보편성이 전개되어 서로 구별되어야 하고{성질}이[동시에] 이 둘을 다시[극과 극으로 치닫는 선을 굽혀 원을 만들듯이] 하나로 엮어야만 비로소 성질이 되는 것이다. 성질이 이와 같이[사물의 단일성과 보편성이라는] 순수한 본질적인 양 축(Momente)과 이렇게(=통일과 모순의 통일) 관계할 때 비로소 사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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