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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박상훈)

 

박상훈 박사 "지역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창조물" (세계일보, 박종현 기자, 2009.07.14 (화) 17:07)
최근 저서 ‘만들어진 현실’서 주장
 
“우리 사회에서 지역주의 문제로 이야기되는 것의 상당 부분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위해 ‘창조’되고 ‘동원’된 것이지요.” 우리의 지역주의 문제는 사실(facts)의 차원보다는 인식(perception)의 차원에서 작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동원된다는 설명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수도권과 부산 등 영남권에서 자원 투입을 늘리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리게 됐지요. 영남 사람들은 영남 지역의 도시로 이주했지만 호남 출신은 서울 등 전국 각지의 도시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기존 원주민과 충돌하는 횟수가 늘었으며, 권위주의 세력은 선거 때마다 이를 적절히 활용했지요.”.
 
호남 차별의 심리는 같은 성격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용어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렇다. 부마항쟁과 달리, 1980년의 광주는 한동안 ‘광주사태’로 규정돼 호남에 급진주의적인 이미지를 더하는 담론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외국의 지역주의는 종교적 독립과 분리주의 등으로 구체성을 갖는데 한국은 지역주의 자체가 결코 해결방안이 안 된다. 충청도 출신이라는 박 대표는 낙인과 편견의 문화를 없애야만 우리 사회가 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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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지역주의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다 (경향, 김종목기자, 2009-07-17-17:35:48)
 
저자는 지역주의 문제에 관한 ‘지배적 해석’ 즉 한국 정치 문제를 지역주의 탓으로 과도하게 환원하는 현실을 부정한다. 지역주의는 주로 기득권 세력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위해 ‘동원’하고 ‘조작’해 ‘만들어진 현실’이다. 저자는 지역주의를 ‘상식화된 신화’이자 ‘신화가 된 상식’으로 규정하면서 역대 선거 결과와 여론조사 분석을 통해 ‘주관적이고 지배적인 해석’에 도전한다.
 
‘반호남 지역주의’의 전통적 인식 문제부터 짚는다. ‘백제=호남’인가. 백제의 정치적 중심지는 서울·경기와 충청의 공주·부여였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경북 상주 출신이다. 또 ‘배신’은 호남 사람들의 오래된 특질인가. 조선시대 호남은 ‘충의지향(忠義之鄕)’으로 칭송받는 등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정치경제적’ 필요에 따라 새롭게 불러들여졌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1971년 대선 결과를 중심으로 ‘지배적 해석’에 깔린 비이성적 허위의식을 들여다본다. “집권 세력은 ‘호남 대통령’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라는 언술로 반호남주의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접합을 시도”했지만 유권자에게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DJ 깃발만 꽂으면’ 식의 투표 행태가 지속되지도 않았다. 2000년 4월 총선 이전 한국갤럽의 의식조사를 보면, 부산·경남에 사는 호남 원적자의 지지 정당은 한나라당이 55%나 됐다. 부산의 경기 침체 등 지역 경제 상황에 따른 속지주의가 투표 기준이 된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부산에서 100% 의석을 차지, ‘반 DJ 지역주의’가 심화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 민주당의 부산득표율(15.0%)은 97년 대선 때 김대중이 얻은 것(15.3%)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저자는 “지역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권자가 투표한다는 이른바 ‘사악한 정치인-어리석은 유권자’의 설명 모델은, 현실과는 별개로 여론 시장을 지배하는 담론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80~90년대 지역주의와 ‘3김’을 동일시하는 해석틀에서 나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3김 청산론’, ‘지역주의 망국론’도 마찬가지다. 이 담론은 이념적 차이, 계층적 기반 등의 이슈·아젠다를 억압하면서 권위주의 세력을 대변하는 집권당 후보를 긍정하게 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저자는 “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은 권위주의 재생산, 기득권 방어 등 정치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반호남주의의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것”이라고 말한다.
 
지역주의를 한국 정치의 여러 특징 속에서 객관화해 이해하는 게 주요 과제며, 호남 차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실업자·비정규직, 조선족, 이주노동자 등 사회 최저층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저자는 “누군가의 정치학 실력을 가늠할 때, 그가 지역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예민하게 살펴보곤 했다”고 밝혔다. 책은 저자의 정치학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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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세력이 지역주의를 창조했다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07-17 오후 07:39:28)
김대중, 71년 대선 부산에서 43% 득표
박정희, 63년 대선 전남에서 62% 득표
유신뒤 일부 정당·언론, 민주화 요구에 위기감
개혁세력 없애려 지역주의 망국론 유포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박상훈 지음/후마니타스·1만5000원

 
다음과 같은 주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대다수 한국 유권자는 지역주의(지역감정·지역정서 등)에 이끌려 투표한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지역당을 만들었고 선거만 하면 지역분할구도가 드러난다. 지역주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옛날부터 존재했다. 지역주의의 핵심은 영호남 갈등이다. 이 두 지역 갈등이 사회 전체를 지역주의로 물들였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치 발전이 안 된다. 민주화됐는데도 정당체제가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에 따라 재편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지역주의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고질병이다. 그러니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
 
‘한국은 왜 민주화를 기점으로 지역이 중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 구조를 갖게 됐을까?’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만들어진 현실>에서 위의 주장 모두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허구이며, 책 제목이 암시하듯 설사 그게 ‘현실’로 일부 존재한다 하더라도 본디부터 그런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얘기한다. 지역주의가 망국적인 고질병인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가 망국적인 고질병이다’라고 외쳐대는 것이야말로 망국적인 고질병이라고 박 대표는 주장한다. 왜, 무엇 때문에? 그래야 자신들만의 특권적 이익을 키우고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지역주의는 풍토병이 아니라 그런 자들이 합성해서 퍼뜨린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이다.
 
여러분 자신은 정말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따져볼 것도 없이 무조건 ‘우리 지역’ 출신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묻지마 투표’를 하는가? 박정희-김대중이 맞섰던 1971년 대통령선거가 영호남간 지역주의 선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기억의 정치’, ‘편견의 동원’, ‘전통의 발명’에 따른 산물이다.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던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 부산에서 42.6%를 득표했다. 이는 그전 대선 때의 윤보선이 얻은 것보다 11%포인트나 더 많았고 대구에서도 8.8%포인트 더 많았다. 박정희도 1963년 대선 때 서울과 경기, 충청에서는 40%대 초반 지지율로 고전했으나 전남·북에선 각각 62%, 54%의 득표율을 올렸다.
 
1977년 조사(김진국)에 따르면,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이 아니라 서울과 충청 출신이었다. 반면 호남 출신자가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 출신이었고 호남에 대한 기피증이 가장 덜한 쪽이 영남인들이었다. 이는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불균등 개발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업화가 수도권과 영남 축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영남의 하층 이주자들은 부산·울산 등 같은 영남권 내 개발지역으로 이동했으나 호남과 충청 지역민들은 대부분 서울 쪽으로 몰렸다. 영남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학력자나 관료 등 엘리트 중산층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몰리는 도시권, 그중에서도 수도권에서 하층민들간 생존경쟁이 격심했고 호남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싹이 거기서 자랐다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개발독재의 성장정책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에 이런 불균등한 성장과 차별적인 엘리트·인력 충원에 따른 지역간 편견과 불만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지역주의로 ‘발굴’하고 증폭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특정 정치세력이었다.
 
이미 1971년 대선 때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눈물로 애소해야 할 정도로 권력상실 위기에 처했다. 영호남을 빼고 계산하면 김대중 지지표가 더 많았고 유독 전남에서만 10만표 이상이 무효 처리되는 부정행위 등을 통해 박정희는 간신히 이겼다.(96만표 차)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기능 축소와 국회심의제, 향토예비군제 폐지, 적대적 남북관계 개선과 4대국 보장안, 대중경제, 부유세 도입 등 권위주의체제와 불균등 개발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대중들은 사실상 그의 팔을 들어준 셈이었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제도화한 ‘유신헌법’이 공포된 것은 바로 그다음 해였고 그때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지역감정, 지역주의가 대대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를 앞세운 권위주의 기득권세력은 이에 저항한 민주화세력의 도전을 지역주의 문제로 치환하고 그것을 극도로 부풀림으로써 진실을 호도하고 정치적 곤경을 피해가려 했다. 거기에는 반유신 민주화 정치세력 리더가 호남 출신이라는 점과 호남인들의 소외의식(선행한 차별로 말미암은 소외의식과 거기에 대한 반발 내지 저항은 합리적 선택이며, 그것을 지역주의로 몰아가는 건 본말전도다)도 작용했다.
 
지역주의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고 1980년, 1987년, 그리고 지금까지 기존 권위주의체제가 흔들리는 고비 때마다 더 한층 증폭됐다. 이른바 ‘3김’(3K)으로 대표됐던 지역주의가 ‘망국적’ 차원으로까지 부각되고 전면화한 것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제도적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의 일이며, 그것은 민주화로 기득권 상실 위기에 처한 개발독재체제와 한 배를 탄 동조세력이 느낀 공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3김정치와 지역주의, 지역감정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다며 지역감정과 3김의 청산을 그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민주화와 권위주의 독재청산 문제를 지역주의 문제로 바꿔치기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 거기에 앞장선 것이 정당(우파 집권당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개혁과 극좌세력까지 포함해)과 언론이었으며, 언론 중에선 <조선일보>였고 또 그 전면에 나선 이가 전 주필 김대중씨였다. 그들이 망국병을 타파할 대안이라며 밀어올린 게 바로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줄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이었다. 그들 기득권세력의 ‘3김과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언설은 기실 ‘민주화를 그대로 두면 우리가 망한다’는 얘기였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은 지역주의를 발굴하고 창조하고 부추기며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지역주의야말로 그런 위장극을 숨겨준 알리바이 담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정당체제’는 지역주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문제이며,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지역간 화해로 망국병을 고치자고 외쳐봐야 고쳐질 병이 아니라는 것, 병을 고치려면 지역주의에 빌미를 주는 정치·경제·사회 구조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그것은 가치의 분배구조, 수도권에 초집중화한 사회구조,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동심원적 엘리트 카르텔 구조,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미미한 계층적 차별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 이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하층 배제적 사회문화 등 민주화 이후에도 아직 제대로 손대지 못한 난관들을 먼저 혁파해야 한다는 얘기다.
 
■ 지은이와 함께 | 박상훈 대표
“고려·조선때 호남차별 근거 어디에도 없어”
 
충남 청양에서 떡방앗집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박상훈(45) 대표는 1987년 서울대(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6월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었다. 학과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사회과학 공부 하면서 시위에 열심히 참가했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땐 주로 노동문제를 고민했는데 과감하게 뛰어들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더 과격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진짜 내 모습일까 하는 반성을 했다.”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과정 때 지역주의 문제를 화두로 붙잡았다. “처음 지역주의 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호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편견에 항의하려는 마음이 컸다.”
 
호남 차별의 연원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제=호남’ 등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는 678년의 존속 기간 중 493년간은 서울·경기지역에 도읍이 있었고 나머지 185년간은 지금의 충청도 공주와 부여가 도읍이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영남 사람이었다. 조선시대에 곡창 호남은 가혹한 착취로 민란과 모반이 잦았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호남이 특별히 더 착취당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민란과 모반은 영남 쪽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중앙관료 출신지별 비교에서도 고려·조선 때 호남 출신자가 눈에 띄는 차별을 받은 적도 없다.
 
호남에 대해 부정적 세평들이 전하나, 악평 없는 지역은 없다. 충청도엔 “권세가에 아부해서 이익을 좇는다”는 악평이 있고, 강원도는 “미련하다” 따위의 세평들이 있으며 영남도 악평이 수두룩하다. 인조반정 뒤 차별받은 쪽은 영남 사대부들이었고 영조는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찍었으며 정조는 영남 출신의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호남에 대해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고 김정호는 “조선팔도 중 가장 축복받은 땅”, 정조는 “가장 어질고 충성스런 고장”이라 했다. 그런데 유독 호남에 대해서만 좋은 평가는 배제되고 악평만 선택적으로 부각됐다. 거기에는 지금의 권력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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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이념인가 현실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프레시안,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2009-07-25 오전 10:27:14)
[화제의 책] 박상훈의 <만들어진 현실>
 
1. 박상훈의 정리를 요약해보자면, 한국의 지역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① 지역주의에 이끌려 투표한다. ② 지역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③ 지역주의의 중심은 영·호남 사이의 갈등이다. ④ 지역주의와 지역 구도의 고착화 정도는 매우 심하다. ⑤ 지역주의 극복 없이 정치 발전 없다. ⑥ 지역주의는 망국적 고질병이라서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박상훈은 1998년 이래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같은 통념에 도전했다.'이데올로기가 된 현실, 현실이 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역주의에 학자적 양심으로 맞섰다. 포커스는 둘이다. 하나는 지역 차별, 지역 감정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패권주의", "저항적 지역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이다. 둘은 끊임없이 교직하며 실체적 진실을 드러낸다.
 
2. 진실은 이렇다. 첫째, 영·호남 갈등이 아닌 반호남 지역주의가 있다. "반호남주의는 호남 출신에 대해 거리감과 배제적 행위를 동반하면서 엘리트 충원과 경제 발전의 성과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이 그 핵심이다. 호남 지역주의 이전에 호남 차별의 지역주의가 있었다.
 
둘째, 지역주의의 역사는 지극히 짧다. 기껏해야 박정희 정권 시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출발했고, 영·호남 간의 거리감이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였다.
 
셋째, 반호남주의를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과 편견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그런 편견의 이데올로기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넷째, 시민이나 유권자들 속에 있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어려움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합리화하려는 집권 세력의 욕구로 인해 한국 정치에 있어서 지역주의는 늘 동원되고 이데올로기가 됐다.
 
다섯째, 선거 경쟁만 개방되었을뿐, 권위주의 하에서 주형된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권위구조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호남 지역 간 표의 편차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의 지역 정당 체계는 지역주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지역 문제의 해법은 "지역성을 작위적으로 동원하고 불러들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해소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상훈은 지역주의 문제를 환원론적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 "인과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합리적으로 이해가능하며, 규범적으로 타당하게 다루는 일"로 만들었다. 특별히 이견을 제시할 부분은 없다.
 
4. 지난 2월 2일자 <매일경제>는 세계적 기업, 삼성전자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에 대한 출신 지역 분석 기사를 실었다. 역시 이제는 서울 출신이 과반을 넘어 51.2%를 차지했다. 대구·경북은 18.1%, 부산·경남은 10.2%, 충청은 6.3%, 경기·인천은 4.7%, 호남은 2.4%였다. 부산과 대구를 합해 영남으로 분류하면 28.3%다. 여기에 다시 호남의 2.4%를 대비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 특정 집단의 지역주의에 대한 현실이 된다.
 
구별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의 문제이다. 차별은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이요, 존재 그 자체다. 내 의지와 능력에 상관없이 선천적 요소로 평가받는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가 못된다. 향·소·부곡 등 출신지와 거주지와 부모의 신분으로 구분하던 사회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차별에 바탕을 둔 지역주의는 단순한 지역 감정을 넘어 폭력이 될 수 있는 중대한 근거를 획득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노골적인 인종주의자가 없는 것처럼, 노골적인 지역주의자는 없다. 그런데 신인종주의가 있는 것처럼 신지역주의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인권 침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부색보다는, 지역색보다는 문화적 차이, 경제적 차이가 이들의 논거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열악함이 학력과 문화적 차이로 이어진다. 공정한 기회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어느새 신분은 세습화된다. 이런 식의 악순환에 결합된 전근대적 정치 시스템은 신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 지배체계에 동원되는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역주의는 현실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공정한 평가 제도의 결여에 있다. 공정성이 사라진 곳에 전근대적 연고주의는 우상으로 재림한다. 학연, 지연, 혈연의 범주가 아니다. 학벌, 지벌, 혈벌이라고 이름 지어야 마땅하다. 서울이라는 일극중심주의, 권위주의적이고 사적인 대통령제, 공정한 공론의 기회가 배격되는 단순한 숫자 개념의 다수결 원칙이 득세하는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특정 지역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와 학벌주의의 기괴한 결합은 하나의 우상이요, 괴물이다. 대한민국 특유의 전근대적이고 불공정하며 폐쇄적인 정치 시스템, 비즈니스 시스템, 족내혼 성격마저 띠어가는 퇴행적 신분 사회의 흐름 속에서, 시민이라는 보편적 지위는 외롭고 힘들어진다.
 
왜곡된 정치적 기제로서의 지역주의에 대한 박상훈의 분석은 탁월하다. 대부분의 유권자와 정당은 지역주의에 젖어 있지도 않고, 정치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 또한 맞지 않다. 인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박상훈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지역주의는 문제다. 이데올로기화된 지역주의, 폐쇄적 지배체계로서의 지역주의는 이미 하나의 우상이요, 돌연변이다. 앞선 삼성전자의 인사 자료에서 훔쳐볼 수 있었듯, 우리 사회 특유의 사회, 경제, 정치적 지배체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고 공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시대적 이유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비로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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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는 없다…'만들어진 현실'일뿐 (레디앙, 2009년 08월 01일 (토) 08:26:49 정리=정상근 기자)
71년 이후 동원, 87년 이후 본격 이슈화 
[인터뷰-박상훈] "정치적 발명품…유권자 합리적 행동준비 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실재하는 현실로, 또는 너무도 명백한 당대의 현실로 대한민국 ‘공적’ 1호로, 망국적 현상으로 규탄되는 지역주의-지역감정, 지역정서, 지역정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이 책의 내용이다. 박상훈은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들’을 하나하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뒤, 그것들을 모두 뒤집어 놓는다.
 
지역주의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뿌리 깊은 것이라는 설, 대부분의 유권자는 지역주의에 이끌리며, 때문에 정치인은 이를 이용하는 지역당으로 나누어 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건 대연정처럼, 위로부터의 결단이 내려지지 않으면 고칠 수 없는 망국적 고질병이란 시각 등 지역주의에 관한 지배적 담론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박 대표는 이 책을 통해 “지역주의는 지배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성한 담론”이라고 정의한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지역주의 때문에 큰 일’ 이라는 해석이 어떻게 한국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기회와 조건만 주어진다면 한국 시민들은 항상 합리적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대안의 구조가 늘 협소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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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책으로까지 펴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을 때는 ‘민주화운동 시대’였고 87년 선거가 치러졌을 때였다. 당시 개인적으로 현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생각대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논문 주제로 지역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지역주의를 다루다 보니 이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주제란 생각이 들었고, 내가 고민한 문제들의 상당 부분을 이 주제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95년에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기로 결정했다. 이후 나 스스로의 혼란을 정리한 것을 2000년 학위논문으로 제출했고, 그러고도 잘 몰라서 10년 동안 관련 주제 살펴왔다.
 
- 책의 앞부분에 지역주의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담론을 모두 부정한다.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 지역주의 문제는 ‘지역주의’라는 현상과, 지역주의를 해석하는 담론이 있는데 이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산업, 고용 등에 대한 지역 차별이나, 편견에 따른 지역 감정 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오랜 기간 노력을 통해서 개선해야 된다. 하지만 이것과 지역주의 떄문에 큰일났다는 식의 담론을 생산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비판을 해야 한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사태를 개선하기보다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 데에는, 지역주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기여한 바 크고, 그렇게 보도록 만드는 작위적인 힘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저자는 “렌즈는 바꾸고, 이데올로기화 된 해석으로 영향력을 조직하려는 진짜 ‘지역주의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자”고 말한다.)
 
- 지역주의가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왔으며, 공간적으로는 외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한국의 지역주의가 스페인, 미국 등 국가의 지역주의와는 다른 내용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 비교정치학에서 말하는 지역주의의 일반적인 현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차이로 생긴, 특정 지역을 경계로 하는 문화적 공동체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스페인을 예로 들면 까딸루냐, 안달루시아. 바스크가 있는데 이 세 지역의 경우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약한 지역성을 갖는 지역은 분리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고 역사의 면면에 흐르는 원초성을 회복하려 하는 것이다. 즉 중앙을 향하는 것이 아닌 중앙을 벗어나려 한다. 또 미국처럼 지역이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동부는 서부개척시대에 채권단 지역이었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뚜렷했다. 채무자로서의 서부도 마찬가지였으며, 남부도 인종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경제적인 지역으로 분리되는 게 미국의 경우이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정책과 정치운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이와 다르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발전시켰고,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피해 집단이 나눠지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은 약한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민족주의가 등장하며 수많은 내전을 겪었는데, 우린 오랜 중앙집권 경험과 식민지 경험 때문에 지역성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으로 지역주의가 불러들여지면서 짧은 순간에 한국사회가 지역주의가 심한 사회로 만들어 진 것이다. 길게 봐도 한 30~40년 수준이다. 외국의 경우 지역주의 문제가 역사적-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지역주의는 상당 부분은 이데올로기적이다. 
 
- 이 책은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장점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거 같다. 각종 사례들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새롭다. 정치적으로 동원된 일종의 '유령'으로서의 지역주의를 깨뜨릴 만한 사례를 몇 가지만 소개해달라. 
= 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에서 61%를 득표했으며, 전남과 전북에서도 각각 62%, 54%를 득표했다. 비율로 보면 전남이 경북보다 표를 더 준 것이다. 71년 선거 분석하면서도 놀랐다. 정치학자들은 영호남 대결이라고 했는데 지역별로 지지를 확인하니 부산에서 DJ 득표율은 42.6%였다. 이는 이전 대선에서 야당 윤보선 후보가 받았던 지지율보다 10%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대구도 8%, 경남도 2% 정도 늘었다. 대구에서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 증가는 서울의 증가율보다 높았다. 경북의 경우 박정희 후보의 득표 비중은 4.7% 증가했지만, 대구에서는 반대로 7.4% 감소했다. 당시 박정희는 지역주의를 조장해 DJ를 공격했었다. 이 같은 현상을 보면서 권위주의 세력들은 영향력 있는 도전자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도전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하고 비껴 때리기 위해 지역주의를 이용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조선일보>다. 87년, 김대중 주필의 몇 편 안되는 칼럼이 너무 놀랍다. 역시 지배세력의 본능은 대단했다. 권위주의 지배블록이 민주화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것을 <조선일보>가 개발하는 식이다. 그해 11월엔 프로야구장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유세장 폭력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섬뜩한 것은 <조선일보>는 이미 10월 사설에 ‘프로야구 경기에서 영호남간의 화합 장면을 보고 싶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화합하는 장면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화합되지 않는 지역감정을 보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돼있다. ‘지역주의’가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뿌리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상식에도 부정한다. “‘백제=호남’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백제가 존립했던 기간에는 ‘서울-경기-충청’권이 중심이었으며, 호남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후백제 지역 출신과 신라 지역 출신이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왕비의 배출지역 역시 지역적으로 고르게 편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도 “민란의 발생 빈도는 호남보다 영남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중앙관료의 출신지도 호남이 차별받았다는 증거는 없다”고 강조한다)
 
- 호남지역의 몰표현상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있겠는가?
= 투표의 지역적 편차는 어느 나라나 있다. 영국은 전형적인 계급정당 체제 모델이지만 그런데 영국조차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다. 지역편차가 크다는 것 자체로 우리사회를 지역적 대립체제를 만들 수 없다. 보편적 관점과 지역적 관점이 병행해 통일적으로 얘기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권자 투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지역주의가 강고하면 정당이 안 바뀌어야 하는데 한국사회는 너무 잘 바뀐다. 정치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바뀌지 않나? 사람들이 이를 지역주의로 회귀해 설명하는 것은 누군가 ‘그렇게 설명했으면’ 하는 바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아닌가?
 
(그는 책에서 후보자 사이나 정당 간의 "쟁점 위치의 차이가 클수록 표의 지역적 분절성은 약화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예컨데 "5공화국 핵심세력 출신인 이세기 후보와, 대표적인 학생운동 출신 임종석 후보가 경합한 서울의 성동 지역구의 경우, 지역이라는 요인은 유권자의 투표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산-경남 출신 유권자의 최다 지지를 받은 후보는 이세기 후보가 아니라 임종석 후보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또 "이념 이슈의 효과는 지역성이라는 변인과 무관하게 유권자의 투표 결정을 이념적 정향에 따라 분화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슈의 효과에 비례하여 출신 지역이 투표 결정에 미치는 효과는 축소된다."고 분석한다.)
 
- 1995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의 투표현황을 설명한 부분이 있다. JP의 ‘토사구팽’에도 불구하고 충청권에서 표는 고르게 나왔었다.
= 95년이 중요한 시기다. 권위주의 세력은 민주화 이후 첫 번째 대선에서 승리하고 일본처럼 보수 안정체제로 가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보수대연합을 했지만, 92년 뚜껑을 열어보니 과반수가 안 됐다. 그 이후에 YS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만약 YS가 ‘3당 합당 정신’으로 정치를 했으면 무서웠을 텐데 욕심을 부렸다. DJ를 망명시키지 않았나? 만약 DJ가 국내에 있었다면,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94년에는 JP까지 쫓아냈다.
그런데 95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의 투표 결과는 지역주의적 해석을 깼다. 민자당에서 쫓겨났던 JP가 핫바지론으로 지역주의를 선동했지만, 결과는 ‘지역주의’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에 맞게 행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회와 조건만 주어진다면 한국 시민들은 항상 합리적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대안의 구조가 늘 협소하다. 마치 다양한 선호의 사람들에게 ‘만두 먹을래? 라면 먹을래?’하며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수준이다.
 
- 지역주의 담론이 등장한 것이 71년 선거 직후이며, 87년 민주화 이후 본격적 이슈로 등장하게 됐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전엔 없었다는 거냐?
= 지역감정 같은 것은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작위적으로 조직한 것이 71년 이후이다.
 
- 87년 대선에서 양김 분열의 원인을 분석해놓았다. 이들이 독자출마 배경과 지역주의는 무관하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 내가 분석한 목적은 (양김의 분열을)지역주의로 환원되는 설명이 아니더라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향후 이와 유사한 생겼을 때 당사자들이 여론에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자 했다.
 
- 지역주의를 들고 나오는 것은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대연정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나?
= 물론이다. 지역주의 문제는 늘 정치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책의 서론과 본론에서도 대연정을 비판했던 문제의식을 이어왔다. 노 전 대통령이야말로 전형적인 ‘3김 청산론자’였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문제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사실 지역주의는 잘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지배집단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 이명박 정부 들어 지역주의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 있나?
=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엘리트 집단 안에서는 아마도 그런 얘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반이명박 움직임은 모든 문제를 ‘이명박’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지역주의 환원론과 문법은 똑같다. 이는 매우 위험하다. 그런 방식으로 현 정권을 몰아붙이면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통치를 더 쉽게 만들어주는 측면이 있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작은 업적하나만 내면, ‘만사 오케이’ 아닌가?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정권을 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반대 세력을 (반이명박 전선이라는)한 곳으로 몰아넣으니 화물노동자의 죽음도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광범위한 연대는 요구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킬 수밖에 없다.
 
- ‘지역주의 망국론’이라는 담론이 처음 만든 주체가 권위주의 세력인데, 개혁세력-민주화세력-진보까지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로 합류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 책에서는 정계 은퇴를 번복한 DJ에게 주도권을 다시 넘겨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DJ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으로 지역주의를 가져온 것을 설명한다. 그들이 선의에 의한 비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은 <조선일보>가 만든 지역주의 담론을 철저히 따랐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본인들이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이는 대한민국의 ‘진보의 단점’이라고도 생각된다. 본인들이 정치를 어떻게, 왜 해야 하겠다는 비전과 내용을 갖고 행동을 했었다면, 다른 부분에 편승해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편승해도 자신들의 입지를 없애는 이상한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는 스스로 독립변수가 되려는 노력을 늘 게을리 했다.
 
- 책에서 보면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이 지역을 가로지른 요구와 선호에 부응하는 정당이 부재하기 때문에 지역정당체제가 형성됐다고 말하고 있다. 대안으로서 지역을 넘어서는 정당이 나와야 할 것이다. 지역정당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진보나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나?
= 원론과 현실을 같이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후자는 정치 활동가, 리더의 몫일 것이다. 나와 최장집 선생은 DJ집권 이후 (지역주의를 넘어서 정책과 이념차로 형성된)2.5당 체제를 생각했었다. 진보정당이 당장 1이라는 숫자는 안 되겠지만 한국정치의 한 추가 되었으면 했다.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실험을 주의 깊게 지켜봤고, 지켜보면서 실망하고, 자신도 떨어졌다.
그렇다면 미국식으로 민주당을 내부에 진보블록도 기능하게 만드는 대안밖에 없는지, 아니면 독자적 정당의 길은 추천해야 하는 것인지, 나도 고민되고 그 기로에 있다. 진보적 독자정치 세력화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세력이나 리더들에게 바라건데, 그 길을 개척해 주어서 지식인들이 발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 민주주의 역진 불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었는데, 최근 정권의 미디어법 통과 등을 보면서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현재 이명박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퇴진투쟁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퇴진 대상으로 성립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 이 문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 운영원리이며 역사상 그나마 나은 대안일 뿐, 그 자체로 다 해결해주는 만능은 아니다. 때문에 사회주의 같은 다른 운영의 원리 접합하고, 그것만으로 부족해 공동체, 시민성 등 문화적 조건도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하나의 ‘최종적 구원자’로서 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그런데 너무 민주주의가 의인화 되고 물신화되었다. 진보가 매력적인 것은 인간이 만든 제도를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개선할 수 있다고 보는 점 때문이다. 
두 번째, 이명박 정부는 현재 민주주의 정치체제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치체제라면 야당, 시민운동, 유권자, 저항세력이 있는 것이고 이 전체가 모두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벗어났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론을 행태주의적으로 퇴행시키는 이해 방법이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60년대 수준의 행태적으로 퇴행하고 있다. 상당히 우려스럽다. 이 차원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있고 한 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집권정부-지배블록이 보이는 민주적 가치의 훼손에 대한 것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 정치체제에서 승자가 될 것을 준비해야 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혼동시켜 놓으니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체제가 ‘MB’라는 말 자체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만에 민주주의적 성과가 역전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엘리트들의 조바심이다. 그동안 누린 것이 크기 때문에 느끼는 상실감 이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왜냐면 지금 선거가 2년 동안 없었던 93~95년 국면과 똑같은데, 만약 내년선거에서 정치적으로 성과를 못 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성과를 무조건 내야 한다. 다만 MB에게 최대 타격을 주기 위해 모든 세력을 다 묶는다면 주장의 수준이 낮아지고, 최소주의적 욕구들로 평준화된다. 이렇게 되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가난한 보통사람들에게 무었을 가져다 줄 것인가?
비판진영도 각자 칼라가 다르다. 그런데 이를 유지하지 않으니 <한겨레>와 <경향>이 똑같아지고,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이 똑같아진다. ‘제목만 보고, 기사를 안보는’, 전체 미디어에 대해 재미가 안 느껴진다. 작은 세력 하나라도 자기 목소리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된다.
지금 비판진영은 권위주의랑 싸우는 모습인데, 이 정도 정부가지고 그 정도로 대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밀란 쿤데라는 ‘사람이 권력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은 농담’이라고 했다. YS정부 때는 농담 많이 했지 않나? 그런데 비판진영에서 지금 정부를 너무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허약한 정부를 센 정부로 만들어놓고 본인들은 싸우지도 않으면서 시민들에게 일러바치는 형태다. 그야말로 벌려만 놓고, 정부는 상대하지 않은 채 뒤로 돌아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는 식이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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