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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페렐먼 <기업권력의 시대>

 

"미국을 읽고 개인주의 신화를 깨자"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09-08-01 오전 9:10:11)
[화제의 책] <기업권력의 시대>
   
캘리포니아주립대 경제학과 교수인 마이클 페렐먼은 <기업권력의 시대>(오종석 옮김, 난장이 펴냄)에서 미국을 '개인의 희생에 기초해 기업권력을 강화하는 기업사회'라고 정의한다. 코카콜라를 마실 건지 펩시를 마실건지 결정하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은 실제로는 개인주의의 신화라는 허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남들과 자신을 차별짓기 위해 소비하는 개인은 이윤 추구의 희생양일 뿐이다. 이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다. '손님은 왕'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이 사실은 기업들이 쳐놓은 거대한 기득권의 거미줄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사회에서 노동은 지루해지고 위험에 노출되는 강도는 늘어난다. 소비의 선택권을 제외한 개인의 자유는 갈수록 위축된다. 반면에 기업은 짊어질 책임을 교묘히 회피하면서 미국이 이론적으로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확대해 간다. 정부는 법과 규제에 기초해 환경, 노동시장, 공정보도를 파괴하는 기업의 활동을 보장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낯설게 들리는가? 아마 그렇다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한국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선진화'에 가까워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렐먼이 책에서 제시하는 기업권력의 전횡 사례를 보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 안에서 최근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 떠오른다. "제화업체 나이키는 끔찍한 노동착취에 대한 비판에 오명을 벗기 위해 기업홍보 광고를 내보냈다. 허위광고 혐의로 고발당한 나이키는 상고심에서 "그 광고가 옳든 그르든 미국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나이키는 노동환경을 감시하는 단체에 150만 달러를 기부하고 어떤 사과도 없이 문제를 해결했다."
 
나이키의 사례는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기업권력에 의해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보여준다. 기업에는 표현의 자유가 거짓일지라도 허용되고, 개인들은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셈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불균형하게 보장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을 능가한다. 인터넷 경제평론가 '미네르바'의 구속수사가 그랬고, 광고 불매 운동을 벌이는 '언소주'에 대한 검찰 수사는 불매 대상 기업이 의뢰도 하지 않았는데 수사기관이 자진해 벌였다.
 
"흑인 평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14조는 실제로 기업이 하나의 개인처럼 자유를 누리는데 적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 이후 약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는데 이와 관련해 형사입건된 사람은 151명 뿐이고 실제로 징역형을 산 사람은 최장 6개월을 복역한 8명이다. 연방판사 리처드 포스너는 "경영진들은 가치증식 전략의 일환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며 기업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기업의 불법 행위를 옹호하는 법관들의 모습은 연방판사 포스너나 우리나라의 대법관이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총수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행위 의혹에 대해 대법원은 기존의 판례를 뒤집으면서까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회에 기여한 공로가 참작'되어 감형이 이루어지고 이내 대통령 사면이 내려지는 건 지난 수년간 반복되던 행태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있어서 한국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음식으로 인한 질병으로 매년 7600만 명의 환자와 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996년 농무부 조사에 따르면 쇠고기 다짐육 중 78.6%에서 주로 배설물들에 의해 옮겨지는 세균이 발견됐다. 그런데 정부는 배설물 오염 검사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준다. '있을지도 모르는' 교차오염을 이유로 생산을 중지시키는 건 정당화 될 수 없다. 생산라인이 중지되는 시간에 대해서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지난해 5월부터 불거진 쇠고기 파동을 지켜본 이라면 현대적 축산업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런 사실에 소비자들은 극히 제한된 정보밖에 얻을 수 없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먹을거리의 안정성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다는 것은 지난해 여름 증명되었지만, 결과는 미국의 축산기업, 국내 유통기업과 정부의 승리였다.
 
"정보의 기본적인 유통경로는 기업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언론사들은 대부분 광고수입에 의존해 공익적인 정보 전달 기능을 하기 힘들다. 언론사들은 광고주들에게 해가 되는 정보뿐만 아니라 자사의 다른 계열사에 해가 될 만한 정보 또한 절대 공개하려 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의 대표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사 소유의 NBC 네트워크가 과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소리 높여 비판할 수 있겠는가?"
 
최근 '대리 투표' 논란에 싸인 미디어법 통과는 앞서 들었던 세 가지 사례가 앞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날 길을 열었다. 정부와 '코드'가 맞는 신문사와 기업들이 방송 지분을 소유하면 소비자들은 더욱 제한된 정보밖에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정부와 기업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사그라지고 소비주의를 맹신하는 광고의 홍수 속에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우리나라에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일어난 굵직한 일들은 미국의 암울한 현실이 우리나라도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진보적인 한국인들이 한국 사회를 보호하고 미국이 저지른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진보적이지 못해서 이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업권력이 정부와 밀착해 그들의 자유를 강화하는 과정이 미국에 비해 절대 뒤처지지 않았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주의의 신화에 함몰된 개인은 결코 거대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기업에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끊임없이 얘기하는 '연대'다. 개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과정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연대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이, 기업은 바쁘게 움직이며 또 다른 소비의 신화를 창조하고, 정부와 유착해 규제를 바꾸며, 미디어를 압박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2050년도 그리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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