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지음

 
유럽의 길거리에 노숙자가 드문 이유는? (시사IN [98호] 2009년 07월 25일 (토) 00:13:07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민음사 펴냄
“세계화 시대의 ‘사람 사는 세상’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유러피언 드림이 구현되는 곳이다.”
  
 
고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애독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고인으로서는 그 책에 상당한 애착이 갔으리라. 노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 만한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은 리프킨은 자신의 책에서 특히 세계화 시대의 그런 세상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유러피언 드림이 구현돼가는 곳이라고 설파한다.
 
‘세계화’는 곧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화라고 여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유난히 많다. 그 자체가 한국인에게 미국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레이건 정부에서 시작한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은 부시 정부에서 극에 달했고, 그 사이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 금융자본과 대기업 중심의 전 지구적 ‘자유시장’ 체제 건설이 인류가 마땅히 가야 할 미래라고 믿게 된 한국인, 특히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의 수는 상당히 많아졌다. 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미국인, 그것도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리프킨 같은 이가 세계화 시대의 아메리칸 드림 몰락을 예언하고 나선 것일까? 무엇보다 그가 보는 세계화의 의미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까닭일 게다. 그에게 세계화란 개인의 자유 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극소수 강자가 대다수 약자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자유시장체제화가 아니라 국적·인종·종교·성별·언어·재산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나름으로 삶을 진정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지구촌 사회의 공동체화이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화 시대에 아메리칸 드림이 강조하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 문화적 동화(同化), 부의 축적, 경제성장과 무제한적 발전, 무한 경쟁과 무한 노력, 재산권과 개인 복리, 애국주의 등은 그저 촌스러울 뿐만 아니라 폭압적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유러피언 드림은 얼마나 세련되고 평화적인가. 그것은 공동체 내의 관계, 문화적 다양성, 삶의 질, 지속가능한 개발, 심오한 놀이(deep play),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 세계주의 등을 중시한다.
 
그는 책의 여러 곳에서 “유럽의 길거리에서는 노숙자나 정신장애인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밤에 거리를 산책한다. 여성이 해가 진 뒤에도 공원에서 혼자 걷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식당이나 야외 카페에서 몇 시간이나 머문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유럽인의 느긋함과 넉넉함에 감탄을 거듭한다. 그리고 “누가 얼마나 가졌느냐보다는 삶을 어떻게 즐기느냐가 더 중요”한 유럽사회를 한없이 부러워한다. 미국 사회와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지구촌 사회의 미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세계화와 어떤 자유를 바라는가? 혼자 꾸는 꿈은 몽상에 그치지만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경제적 개인의 자유만을 바란다면 계속 아메리칸 드림을 꾸시라. 그러나 공동체적 세계화를 지향하고 사회적 개인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자 한다면 이제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자. 그것도 매일 밤, 매일 낮에. 그러다보면 실현 방안이 보일 게다. 필경은 ‘합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조정시장경제’에 관심을 갖게 될 터이다. 마치 지금 정도의 유러피언 드림 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과거 유럽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