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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304105416
盧에 속고 MB에 당한 당신의 선택은…혹시 '히틀러'? (프레시안,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11-03-04 오후 6:09:33)
[프레시안 books] 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정보 기술과 세계화, 결정론과 운명론

로버트 라이시가 변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변했다. 그의 새 책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안진환·박슬라 옮김, 김영사 펴냄)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으로 유명한 라이시는 그간 미국 사회를 분석한 여러 가지 책을 펴냈다. 미국에서의 중산층 몰락, 빈익빈 부익부 심화 그리고 전반적인 삶의 불안정화를 지적한 <국가의 일>(까치 펴냄), <부유한 노예>(김영사 펴냄), <슈퍼 자본주의>(김영사 펴냄) 등이 그 책들이다.
그렇지만 이들 책에서 라이시는 항상 그 사회·경제적 병폐의 근원적 원인을 기술 결정론 또는 세계화 운명론의 관점에서 설명했었다. 그는 날로 심각해지는 소득 불평등과 불안정한 삶의 원인을 정보 기술의 확산과 결합된 글로벌 아웃소싱에서 찾았다. 그에게 있어 월마트 자본주의와 주주 자본주의가 '난공불락'의 '슈퍼' 자본주의인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이시의 이전 저작들에는 소득 불평등과 삶의 불안정화를 우리가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무기력과 패배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늘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곤 했다. 한편에서는 월마트 자본주의와 주주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 모든 것이 정보 기술과 세계화라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발생한 까닭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투로, 사소한 사회 개혁 조치만을 미국 진보의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1990년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든 미국 민주당은 라이시와 똑같은 생각을 가졌다. 한 때 그 자신이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클린턴 정부가 중산층 몰락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수수방관했고, 그것을 저지할 적극적 구상을 내놓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오바마의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정치 권력과 뉴딜 동맹, 신자유주의와 68세대
그렇지만 이번 책에서 라이시는 더 이상 결정론과 운명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시는 레이건에서 부시에 이르는 공화당 정부가 취한 '자유 시장' 이념과 정책, 즉 공기업 민영화, 노동조합 파괴, 최저임금제 하락, 사회보장 축소, 노동 시장 보호 규제와 금융 시장 규제의 폐지 등과 같은 정치경제적 변화에서 중산층 몰락과 빈부 격차 심화의 근원적 원인을 찾는다. 또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 역시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변화에서 발생했다고 믿는다.
라이시의 새로운 관점은 과연 어떻게 1947년에서 1975년에 이르는 약 30년간의 '대번영'의 시기가 등장했는가에 대한 설명 방식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제6장). 그는 루스벨트 시기에 시작되어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그리고 닉슨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지속된 '뉴딜 동맹' 즉 케인스 경제학과 결합된 개입주의 복지 국가야말로 대번영을 가능케 한 정치경제적 토대였음을, 미국 사회의 '기본 합의'였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에 미국 연방정부는 노동조합의 권리와 협상력을 크게 강화시켰고, 사회보장제도와 사회 안전망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 공립대학(주립대학) 숫자와 정원이 늘고 등록금이 낮게 규제되어 대학 입학생이 크게 늘었다. 그리하여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소득 불평등이 크게 완화되었으며 노동 생산성도 빨리 성장했다. 생산성 향상과 소득 증가는 고스란히 구매력 증가로 이어져 장기간에 걸친 경제적 성장과 번영으로 이어졌다.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상류층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누구도 급진파라 부르지 않을 법한 (공화당 소속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였던 1950년대의 (상류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 (최고) 세율은 91%였다"(85쪽). 이것은 당시의 스웨덴보다 더 높은 수치이다. 1964년 이 수치는 77%로 떨어졌다가 조금 올랐고,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에 다시 77%가 되었다.
상류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 최고 세율이 급격하게 하락한 것은 1980년대로 미국 공화당의 레이건 및 부시 행정부는 그것을 30%대로 낮추었다. 사회 안전망과 노동조합, 최저임금제를 파괴하였고, 더구나 금융 시장 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상류 부유층 즉 금융자산가들에게 큰 투자 수익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대번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번영의 시대가 끝나고 뉴딜 동맹이 해체된 것은 결코 정보 기술 또는 세계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었다. 미국 경제는 정보 기술 및 세계화의 덕택으로 1980년~90년대에도 계속 발전했다. 그렇지만 경제 성장의 열매는 대부분 상류 부유층으로 집중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보 기술이 발전하고 미국보다도 더 기업 및 금융 시장의 세계화 흐름에 노출되었던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 복지 국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보 기술도, 세계화도 빈부 격차 심화 및 중산층 몰락의 근원적 원인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근원적 원인이란 말인가? 라이시는 그것은 결국 권력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99쪽). 큰 정부를 배격하고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을 주장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밀턴 프리드먼과 그린스펀의 '자유 시장' 경제 사상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것이 대번영 시대 종식의 근원적 원인이라고 답한다(101쪽).
클린턴 정부마저도 뉴딜 동맹 즉 케인스적 복지 국가의 복원에 크게 애쓰지 않았다.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라이시는 이 책에서 자유시장 신봉자인 앨런 그린스펀과 유사한 인물들이 클린턴 정부 하에서 핵심 경제 정책을 이끌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60년대 대번영의 시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이른바 68세대)가 그 부모 세대가 체험한 거대한 자유 시장 실패(대공황)와 공동체적 고난(전쟁)의 뼈저린 경험을 잊은 채 개인주의 성향에 빠져든 점 역시 "각자가 스스로 살아나갈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경제 사회"가 나타나게 되는 정치 권력 변화를 도와주었다고 비판한다(102쪽).
라이시의 이러한 지적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사조가 등장하고 지배 권력이 되는 과정에서 68세대의 (포스트모던 철학과 결합된) 개인주의가 큰 도우미 역할을 하였다는,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된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의 통찰과도 일맥상통한다.
2008년 금융 위기와 경제 회복
2008년 여름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경제를 연쇄적인 충격파의 흐름 속에 빠뜨렸다. 특히 미국 경제는 1930년대 이래 최악의 금융 시장 패닉(panic)과 신용 경색, 파국적 시장 실패 상황을 지난 2008년 가을에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자유 시장'(free market) 사상에 투철한 부시 행정부마저도, 즉 "툭하면 정부에 의존하려 드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저소득층을 정부가 도와줘서는 절대 안 된다"며 늘 정부 개입과 정부 지원을 강력히 반대해온 신자유주의자 부시마저도 세계 최대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 보험회사를 지원하는 구제 금융 자금을 제공했다.
당시 부시는 국민들에게 "이런 구제책을 실시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끔찍한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며 양해를 구했다. 구제 금융이 실시되고 1년도 채 되지 않은 2009년 가을부터 미국의 월스트리트는 회복 기미를 보였다. 미국 최대 은행 여섯 곳이 성장세를 보였고, 은행 중역과 트레이더는 과거와 비슷하거나 과거보다 더 많은 보너스를 챙겼다. 그리고 2010년 초반부터 미국과 전 세계 주식 시장과 채권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고 뉴스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불황은 끝났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는 보너스 파티, 메인스트리트는 고난의 행군
자, 여기까지는 우리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로버트 라이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월스트리트의 금융 자본과 금융 자산가 그리고 대기업들이 수익성과 활력을 회복하고 있다지만 대다수 미국인의 삶과 일상은 2008년 대불황 개시 이래 지금도 엄청난 상처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경제 정책 입안자들은 금융계의 재무건전성이 실물경제 번영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현대 경제에 대한 수많은 오해 중에서도 사회와 그 성원들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견실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견해만큼이나 열성적인 지지를 받는 오해도 드물다". (71쪽)
금융 기업과 대기업의 수익성이 회복되고 경기가 조금 좋아진다고 해서 과연 경제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인가? 위기 이전에도 그랬지만 위기 이후에도 미국의 (그리고 실은 한국과 전 세계에서도) 상류 부유층은 더 부유해지는데 반해 중산층과 가난한 저소득층은 더 가난해지고 있다.
라이시가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서 집중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지금처럼 심각하게 불평등한 부와 소득의 분배 구조가 유지되는 한 작금의 대불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을 써내려간다고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대공황과 자유 시장
토인비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했다. 로버트 라이시는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간혹 서로 운율이 맞는 경우가 있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을 1930년대 대공황의 시대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진지한 부분이다.
라이시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인물은 매리너 에클스이다. 그는 1934년부터 1948년의 시기에 미국의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즉 자본주의 역사상 최악의 대공황과 최악의 대전쟁의 시기에 미국 경제과 금융 시장의 구조 재편을 (당시의 민주당 대통령 루스벨트와 함께) 이끌었던 경제 지도자가 바로 에클스였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라이시가 에클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 놓는 대공황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과 일화들이 최근 글로벌 금융 위기 이래 미국과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그것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1997년에 겪었던 외환 금융 위기 때의 그것과도 매우 유사하다.
먼저 라이시는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자유 시장'의 균형 회복력을 철석같이 믿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자본가와 그리고 주류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시장은 곧 자동적으로 정화되어 균형을 되찾을 것이므로 정부의 유일한 임무는 연방 예산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고 주장해왔음을 지적한다(31쪽).
오늘날 시카고학파의 로버트 루카스 같은 경제학자들도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오바마 정부는 2008년 이래의 대불황 사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정부 개입, 특히 복지 국가적 개입이야말로 오히려 대불황을 악화시킨다"고 비판한다. 1930년대에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똑같이 '자유시장의 위대한 복원력'을 소리 높여 외쳤었다.
"불황이 초래하는 물가 하락과 금리 하락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새로운 투자로 유인할 것이고, 그러한 활동은 경제에 상승 기조를 안겨줄 것이다. (…) 따라서 (대공황과 대불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경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성공한 기업가이자 은행가였던 에클스는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심각하게 무력화된 대공황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연 어느 기업가가 선뜻 투자에 나설지 의심스러웠다.
검약(저축)과 소비, 죄와 벌
또한 대공황 당시 많은 경제계 지도자와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불황을 검약과 근검이라는 (청교도적 자본주의 도덕률)을 위배하는 죄(sin)를 범한 데 대한 하느님(즉 '보이지 않는 손')의 처벌(punishment)이라고 생각했다. 즉 이들은 1930년대에 대공황이 발생한 이유가 1920년대에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이 게으른 낭비자가 되어 돈을 헤프게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1997년 외환 금융 위기를 놓고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서구 언론의 시각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에클스는 이러한 도덕론적 설명을 거부했다.
"1929년의 대붕괴 이후 후버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자 동시에 백만장자 기업가였던 앤드류 멜론은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임금과 물가가 하락하게 놔더라. 직원들을 해고하고 주가가 폭락하고 농장 관리인을 해고하고 부동산 값이 폭락하게 놔둬라. 그래야 경제 시스템의 잘못된 부분이 바로 잡힌다. 그래야 사람들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 삶을 영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클스가 대립각을 세운 개소리이자 그로 하여금 권력자들이 의심스런 도덕률을 들먹이며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려 애쓰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만든 헛소리였다." (58쪽)
더구나 대공황과 같은 엄청난 경제 위기를 검약과 근검의 결여라는 (그리고 한국 등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경우 '모럴 해저드'라는) 도덕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의심스런 관점이 오늘날 오바마 정부의 핵심 경제 관료인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의 발언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된다는 라이시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2008년에 대형 은행들과 대형 보험 회사(AIG)가 구제 금융의 수혜를 받았다. 그러나 실물경제가 계속 악화되는 동안에 정책 입안자들은 엉뚱한 곳만 바라보았다. 정부 관리들은 2008년 금융 붕괴가 일어난 까닭은 (…) 국민들이 리스크가 과도하게 높은 대출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재무장관 가이트너의 말대로 정부 관리들은 국민들이 그동안 지나치게 소비했다고 즉 저축은 너무 적게 하면서 과소비 행각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 중국인은 저축을 많이 하고 소비를 적게 하는데 미국인은 그 반대라고 주장했다." (74쪽)
가이트너와 로렌스 서머즈 등 오바마 정부의 핵심 관료들은 국민들, 즉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저축은 적게 하면서 은행 대출 받아 주택 구입하고 카드 대출 받아 승용차 구입하는 등 과소비 행각을 벌였다고 비난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오바마 정부는 자신의 집권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미국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비청교도적 생활윤리를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 몰아간 셈이다. 오바마 정부는 대출 받아 주택과 승용차를 구입할 정도로 빈곤해진 미국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낮은 소득 문제의 개선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소비와 소득분배, 케인스와 에클스
가이트너의 관점은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의 관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로버트 라이시는 가이트너의 관점을 거부한다. 폴 크루그먼의 최근 책과 칼럼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이시는 오히려 소득이 상류 부유층에 집중되고 이들이 저축(검약)은 늘리고 소비는 별로 안 늘리는 것이야말로 2008년 대불황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라이시는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요구한다. 오바마 정부가 현재의 대불황에서 벗어나려면 1930년대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에클스의 도움을 받아 실시한 뉴딜 동맹 정책, 즉 강력한 부자 증세와 사회 안전망 구축, 노동조합 권리 강화, 기업에 대한 최저임금제 강제, 대규모 공공 사업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8년 위기 이후 일자리 상실과 주택 상실, 노후 보장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저축과 검약을 강조하면서 '허리띠를 졸라 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경제 위기 극복은커녕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한다(75쪽).
라이시는 에클스의 입을 빌려, 대공황 또는 대불황의 시기에 소비자와 기업들이 줄인 소비 및 투자 지출을 상쇄하려면 정부가 더 많이 소비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면 적자 재정 편성과 국가 채무 증가도 무릅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케인스가 <일반 이론>에서 주장한 것과 똑같은 내용이다(35쪽).
오바마 정부의 실패와 미국 정치의 대혼란
라이시가 보기에 오바마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경제 과제는 부자 증세와 함께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소득 향상을 위한 동맹, 즉 뉴딜 동맹 체제를 재건하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이 <미래를 말한다>(현대경제연구원 펴냄)에서 주장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렇지만 오바마가 중용한 가이트너와 서머즈, 폴 볼커 같은 이들은 그것보다는 "미국인들이 소득에 비해 너무 많이 소비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대다수 미국인들의 소득이 상류 부유층에 비해 거의 늘어나지 않은 것인데도 말이다.
뉴딜 동맹 재건의 의지를 갖지 않은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의 앞날은 뻔하다. 배신당한 유권자로부터 외면 받아 약화되는 것이다. 지난 중간 선거에서 패한 오바마는 벌써부터 부자 감세 철회 공약을 내던지고 공화당과 포괄적으로 협력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포괄적 연정을 추진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책의 제2부는 이렇듯 미국 민주당이 미국 사회의 '기본 합의'(즉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미국 정치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우려에 섞인 시선으로 분석한다. 라이시는 앞으로 9년 뒤인 202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배타적 애국주의 및 고립주의와 복지 국가적 평등 지향성을 동시에 주창하는 정치 세력(일명 '독립당')이 집권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배타적 애국주의(즉 민족주의)와 배타적 복지 국가 지향성이 동시에 결합된 사상이 바로 민족사회주의 즉 나치즘(National Sozialismus)이다. 실제로 최근 날로 성장하는 미국의 '세금 반대 티파티(anti-tax tea party)' 운동은 몰락하는 백인 중산층의 분노, 특히 상류 부유층(특히 유태인 금융 자산가들)에 대한 분노와 반(反) 연방정부 사상, 그리고 인종주의 및 애국주의와 결합되었다. 나치즘의 모든 사상적 요소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제2부에서 라이시는 미국의 우울한 미래를 전망한다. 미국 중산층에게 희망은 없다. 그들의 자녀에게는 더욱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조만간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 모두에 대한 미국 중산층의 불같은 분노와 반발로 나타날 것이다(152쪽).
"만약 여기서 (뉴딜 동맹 재건이라는)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결국 독립당이나 그와 비슷한 정당이 그 빈자리를 국수주의와 고립주의, 편견과 불신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181쪽)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사상과 정책을 나름대로 각각 열심히 추종하며 모방해온 한국의 민주당(혹은 국민참여당)과 한나라당에 관한 라이시의 경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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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sid=E&tid=4&nnum=649224
[주말을 여는 책 |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위기탈출 해법은 ‘공평한 분배’ (내일, 박순철 칼럼니스트, 2012-02-17 오후 2:47:42)
대공황시대의 미국 경제를 포커 판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다. 연준의 의장으로 미국 경제의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매리너 에클스였다.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 즉 여타의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신용이 바닥나자 게임은 중단되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 막장의 포커 판을 닮은 것 같다. 다만 위기감은 게임의 패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전염되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의 주제는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거대한 전환:신모델의 형성'이었다. 이 포럼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지금 당장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비가 절실하지만 단순한 시스템 정비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위기의 근본원인 찾기다. 흔히 거론되는 원죄는 과소비다. 거기에서 채무 누적과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고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 로버트 라이시는 이런 피상적 해석을 거부한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그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돈을 빌리게 된 이전에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었다는 원초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경제성장에 따른 "보상의 상당 부분, 아니 거의 대부분이 상류층에게만 돌아간 것", 그는 "이것이 바로 미국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의 핵심"이라고 가려낸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파탄의 근본원인은 소득의 편중
한 줄의 진부한 표현이 슬며시 떠오른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알면 대불황(Great Recession)이 보인다." 라이시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80여 년 전 세계경제의 지층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었던 미국 발 대진재를 세심하게 복기해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닮은 꼴 위기의 배후에 자리 잡은 닮은 꼴 원인 찾기다. 라이시는 파탄의 근본원인을 소득의 편중에서 찾아낸다. 대공황과 대불황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8년과 2007년 미국인의 총소득 가운데 최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은 각각 23%를 넘어섰다.
에클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흡입펌프"가 작동해 생산된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극소수의 손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 경제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1950년대 초에서 1980년대 말까지 그 비중은 10% 내외를 유지했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교과서적 경제문제는 부자들은 소득에 비해 너무 적게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스포츠카를 다섯 대, 열 대 사는 건 아니다.
미시경제의 법칙은 다섯 번째 스포츠카를 계약할 때의 기쁨이 첫 차를 살 때처럼 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득이 줄거나 정체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산된 재화를 충분히 소비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총수요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거시경제의 거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부채의 문제로 옮겨간다. 실질임금이 늘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사회의 환상 속에 사는 중산층이 소비를 바로 줄이는 건 아니다.
갑부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초호화판 생일잔치를 치르는 세상이 되자 그 전시효과로 중산층의 결혼식 비용도 덩달아 뛰어 올랐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거나 일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나름대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대응메커니즘이 한계에 달하자 그들은 저축을 줄이고 빚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부자들은 엄청나게 치솟은 소득과 신용대출한도를 이용해 투기에 나섰다. 제한된 자산, 그러니까 대상이 제한된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기는 당연히 그 폭등을 야기했다. 늘어난 담보나 신용을 토대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중산층도 "이 파티에 합류"했다.
자산 가격은 미친 듯 최고치를 경신해 나갔다. 하지만 자산 거품, 빚 거품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결국 파티는 비극으로 끝났다. 라이시는 이러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본합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위기의 얼개를 재구성한다. 그 합의의 내용은 "근로자들에게 경제성장의 결실을 비례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는 헨리 포드가 임금을 파격적으로 인상해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의 수요를 창출했던 사례를 들면서 포드가 "근로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합의를 이해한 기업인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기본합의의 파탄은 중산층을 고통에 빠트릴 뿐 아니라 총수요 부족이라는 경로를 거쳐 정상의 1%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한 마디로 대공황과 대불황은 바로 이 기본합의가 깨진 데 기인한다. 만일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왕도도 당연히 이 합의의 복원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라이시는 대공황 이후 미국 국민은 "한 마음으로 위기 원인인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한 경제 불안정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필요한 개혁을 해내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불황 이후는 달랐다. 이 책의 원제 '충격 이후'(After Shock)는 '상상회복'의 최면상태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일단 경제 붕괴를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결과 더 큰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약화되고 말았다. 불균형의 심화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제 위기는 정치 위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기업과 금융권이 큰 정부와 짜고서 부자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극우파와 극좌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미적거려서는 문제가 악화할 따름이다. 그는 "심판의 날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고 경고하면서 역소득세와 같은 근본적 대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시는 낙관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개혁만이 유일하고 합리적인 방법
미국이 결국은 개혁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개혁이야말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본합의의 복원, 그 가능성에서 반복되는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보는 것이다. 다만 생태위기, 자원위기가 갈수록 자본주의 경제의 운신을 제약하는 이 시대에 해법의 시야를 인간사회의 궤적에 국한해도 충분한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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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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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 (2012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092151125&code=940100
박노자 교수 “용역폭력은 노동자에 잔혹한 한국 기업·사회 구조의 반영” (경향, 이서화 기자, 2012-08-09 21:51:12)
ㆍ좌파 논객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대표적 좌파 논객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39)는 SJM과 만도의 직장폐쇄 사태로 불거진 용역폭력 문제를 두고 “노동자들을 머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국 기업의 적나라한 본질”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지난 6일 경향신문과 한 온라인 화상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은 비폭력일지라도 노동자가 약간의 ‘반항’이라도 시도하면 스스로 유사 경찰이 돼 사유화된 폭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공화국이 지속되는 한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라며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 직전의 폭력이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가 기업 공화국을 압박하지 않는 이상 개별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아주 강력하게 압박해 나갈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좌파가 필요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지난달 연구차 한국을 찾아 며칠간 머물렀다. 그는 그때 “우리가 걱정할 부분은 제대로 걱정 안 하고 걱정 안 할 부분을 걱정하는 듯해 의아했다”고 밝혔다. 다들 ‘대선, 대선’ 하는데 정작 목전에 닥친 경제침체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대책도, 논의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책은 분배를 골고루 하는 것이지만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분배나 복지 담론은 수사적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대선이야 4개월 후에 끝날 거고 대통령이 누가 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체제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표피적이고 시기적인 현상보다는 우리 사회의 기본 구조가 무엇인지, 생산모델이 무엇이고 지배구조가 무엇이고 기본 모순이 무엇인지, 기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용역폭력 등)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성도 여태까지 변함없는 한국 사회 기본 구조의 반영”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재벌’이다. 박 교수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재벌그룹들의 지배·통제 기술이 최근 훨씬 더 강화됐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재벌의 운영구조를 ‘세습제’가 아니라 ‘사회화’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 교수는 “한국 경제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하도급 기업들한테 상당한 영향을 주는 주요 대기업들은 개개인이 소유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소비자와 노동자, 지역주민, 국가·사회 대표자들이 이사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삼성전자, LG전자 등 핵심 기업들을 사회가 운영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사회가 재분배해 복지정책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렇게 해야 비정규직 양산도 막을 수 있고 하도급 기업에 대한 단가 내리기 압력 같은 것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 등의 대선 후보군에 대해서도 그는 “재벌 국가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재벌 정치인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 교수는 “공안탄압 차원에서 덜 위험하다고 이야기할 순 있어도 문재인이나 안철수 또한 재벌들을 옹호하고 재벌 공화국의 지속을 원하는 면에선 박근혜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재미있는 건 그들이 앞다퉈 복지 공약을 내놓고 복지 공약으로 승부를 겨루는 그 광경 자체”라고 말했다. 이어 “정확히 얘기하면 그들은 다수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고, 이제 다수가 성장보다는 분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벌 정치인인 그들로선 그 복지 공약들을 99% 실천 못할 게 뻔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박 교수는 “박근혜 후보가 저임금 가정 출신의 대학생들에게 무상교육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저임금 가정 대학생들이 30~40% 정도 되는 걸 감안하면 부자들이 내는 세금을 지금보다 적어도 2~3배는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4분의 1 수준인 종합부동산세도 영국 수준으로 올리고 기업세도 유럽연합(EU) 평균 정도로 높여야 그 공약을 실현할 수 있는데 박 후보가 그렇게 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 복지를 하자면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유층을 얼마나 강력하게 압박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11 총선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다. 박 교수는 진보정당의 역할에 대해 “노동계급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88만원 세대’ 등 노동계급의 하부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젊은 비정규직, 비정규직마저 될 수 없는 젊은 백수, 백수가 될까 말까 한 대학생, 대학생이 될까 말까 한 고등학생 이 모두에게 그들의 상황이 왜 비참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대안적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좌파와 진보정당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인간 뇌에서 ‘양심’을 본 적은 없다” (레디앙,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 2012년 7월 11일, 10:12 AM)
인간의 뇌 속에서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했던 한 외과의사가 보지 못했다는 그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는, 맹자의 설대로 양심의 뿌리는 선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좋아하게 돼 있고 아픔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 누구나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느끼니까 자신의 아픔과 죽음 뿐만 아니라 남의 아픔과 죽음도 절대 바라지 않을 만큼의 “착한 뿌리”(善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쇼들의 수용소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을 대량학살해놓고 안락하게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셨던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건 너무나 극단적인 사례지만, ‘양심’의 완전한 파괴의 경우들을 우리가 가까이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많고 운동하기 어려운 직장인 아저씨를 “실적이 나쁘다”고 하여 해병캠프에 억지로 보낸 상사들 은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인가요 (참, “실적이 나쁘다”고 해서 자기 개선하라고 군부대로 보낸다는 그 군국주의적 발상은 끔찍하지 않는가요? 이건 정말 나치 독일의 수준이 아닌가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 싶으면 그들을 때리고 “노예”, “천민” 등으로 분류해 끔찍한 자기비하 의식을 주입시킨  선생님과 그런 행위를 두둔해주고 방치해온 학교는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가요?
과거의 섬뜩한 시절로 가지 않아도, 우리 주위에서도 ‘양심’이 완전히 상실되어지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의 빈 자리를 “군대에서 며칠 지내보면 명령을 정확하게 실행하는 진정한 사나이가 되겠다”는 군사주의적 신념과, “인간은 그 교환가치일 뿐이다. 교환가치를 ‘업적’, ‘실적’이 만든다’는 법칙을 초교생들에게까지 적용해 그들을 업적주의적 규율에 순치시키는 끔찍한 성공주의와 훈육주의의 결합이 그대로 점하게 됩니다.
‘양심’은, “도망친” 일은 없습니다. ‘양심’의 뿌리야 태생적이지만, ‘양심’ 형성의 과정은 후천적이고 사회결정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심’은, 그 뿌리는 어떻든간에, 궁극적으로 사회적 현상입니다.
남한 아이들이 사회화 과정에서는 “노력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 낙오자는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일 뿐이다”라는 시장적 업적주의의 금과옥조를 완벽하게 익히잖아요. 그런 그들은, 나중에 노숙자를 보더라도, 노숙자들을 양산하는 사회가 범죄적인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노력을 안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하여 무심히 지나갑니다.
태생적인 측은지심, 남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밟혀 죽고, 그 대신에 예컨대 국민국가의/자본주의적 “기회균등”에 대한 시비지심은 ‘양심’의 자리를 점거하게 됩니다. 평균적인 남한인은 용산참사보다 권력층 자녀들의 병역비리에 훨씬 더 분노합니다. “성공”을 다투는 “출세”의 시장바닥에서 누군가가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보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아 더 유력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승자독식 우승열패의 정글에서의 심각한 ‘반칙’입니다.
그런데 민중들을 억압, 탄압하는 전,의경으로 차출 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미 제국의 대북, 대중 침략에서 총알받이로 이용될 수도 있는 “군대”에 도대체 왜 가야 하는가 라는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은 거의 원천적으로 밟혀 죽어버린 듯합니다. 나치들이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슬라브인들을 죽이는 일을 “비양심적”이라고 보지 않았듯이, 우리가 “우리 나라”와 그 기둥서방 격인 미 제국을 위한 살인 내지 살인준비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남한 대학에 진학하는 탈북자들이 가장 경악하는 대목은 뭔지 아십니까? 북조선이나 중국, 쏘련 학생들과 달리 남한 학생들이 죽어도 자기 노트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입니다. 정상적인, 즉 자본주의적인 경쟁의식 내면화 과정이 아직 남한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의 출신으로서, 조직생활의 제일 원칙이 상사에 대한 경쟁적인 아부와 비교적 약한 구성원의 따돌리기, 괴롭히기가 되는 남한 사회는 실은 “사회”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건 “사회”라기보다는 야수화된 개인들의 기계적 조합에 더 가깝습니다. 한데 우리에게는 이건 정상,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현실입니다.
나치 독일의 “정상적” 독일인 시민이 쏘련이나 폴란드에서 징용 당해 끌려온 Ostarbeiter (“동쪽으로부터의 노동자”)에게 “일이 어렵지 않냐”고 걱정해주고 묻지 않았듯이, 서울의 여느 식당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고생하는 연변 아주머니에게 우리가 “삶이 힘들지 않냐”고 보통 묻지 않죠. 수십만의 외국으로부터의 “유사 노예”들이 우리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지사입니다.
업적주의적이다 싶은 세계질서에서 저들의 출신국들이 우리에 비해 낙오자로 인식되니까요. 아, 우리들의 진실된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이미 사회화 과정에서 그냥 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양심의 눈이 멀어야 이 지옥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시체들을 밟아 올라가서요.

 

터부들의 사회, 배제당한 언어 (레디앙,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 2012년 7월 13일, 11:48 AM)
우리가 북조선과 같은 사회를 비판할 때에 늘 그 사회의 성역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입니다. 세습적인 통치자들을 바꿀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비판마저도 할 수 없는 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은 아마도 가장 일반적일 것입니다. “언어의 단속”이라는 북조선 지배자들의 전략이 해방적 의미의 근대성의 근본적인 원칙들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전략이 남한 통치자들의 전략에 비해서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통치자들을 신주단지처럼 모셔온 사람들이, 그 통치자들이 전혀 신성시되지 않는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숭배”의 태도는 너무나 쉽게 “환멸”과 “증오”로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한에 와서는 오히려 “강경 반북주의자”가 되는 일각의 탈북자들을 보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는, 이쪽 전략은 훨씬 효율적입니다. 바로 “반대자들의 주변화” 전략입니다. 일부의 테마들이 이쪽에서도 사실상 공식/비공식 검열에 걸려서 공석에서 논의될 수 없지만 - 북조선 문제라든가, 김구 등 한국 극우파 민족주의 아이콘들의 진면목, “대한민국 정통성”의 허구성 등등입니다 - 나머지에 대한 “말”은 직접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류언론이나 공식 서술 (교과서, 박물관 전시 등등)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의 발언들이 게토화되어, 소수자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진 다수에게는 단지 “또라이들의 이야기”로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수에게는 어떤 새로운 환경에 가도 전혀 잘 동요되어지지 않는 사상적 “확신”이 생깁니다. “언어의 단속”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믿음”에 비해서 훨씬 더 강한 “확신”이죠.
요즘 박근혜 공주님까지도 열심히 거론하는 “경제민주화” 문제를 보시지요. 신규 순환출자 규제부터 오너 (창업주 가문 - 사실상의 세습적 통치자)의 지배권 제한 내지 철폐를 위한 보다 포괄적인 규제까지는 다수가 접할 수 있는 언론에서는 쉽게 등장될 수 있는 언설입니다. 장하준 류의 재벌옹호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의 “노동자 경영권 획득” 이야기만 해도, 이미 “주류”가 완벽하게 묵살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의 “위험한 말”이면 남한의 공론장 구조상 게토화/주변화의 대상이죠. 김상봉 교수보다 더 “왼쪽”에 속하는 이야기는? 공론장에서는 그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경영에 노동자들이 참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기업이 주식회사로 남자면 그 주식의 대부분은 국유화되고 나머지는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통의 남한 사람이 평생동안 접할 확률은 몇 % 정도일까요? 아마도, 보통의 북조선 사람이 고 김정일 위원장이 백두산이 아닌 하바롭스크 근처의 한 병원에서 “유리 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접할 확률과 대략 비슷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가 “북조선은 악한 독재, 우리는 선한 민주국가”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요?
지금 컴퓨터를 오래 쓸 수가 없어서, 한 가지 사례만 더 들겠습니다. 북조선의 세습적 통치자들의 공식적 역사가 상당부분 가공, 윤색, 과장, 허구로 짜여져 있듯이, 남한에서 가르쳐지는 공식적인 역사서술은 기본적으로 근대지상주의적인 목적론적 도식에 불과하고 광의의 “신화”에 가깝습니다. 한영우씨 등 관악학파 거두들이 애써 조선왕조 건국의 “진보적 의미”, “신진사대부”들의 “합리성”, “근세사”로서의 조선왕조사 성격 등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의미들에서는 성리학적인 지주-관료들의 등장과 집권은 조선사회 약자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켰습니다.
노비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그 신분 해방의 길이 막히고 말았고, 특히 여성들의 지위가 빠른 속도로 하락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대 이후로는 여성들의 “풍기 바로 잡기” 차원에서 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처벌되어지지 않았던 “간통사건”들에 대한 철저하고 잔혹한 수사, 처벌이 시작됐습니다. 유감동 (兪甘同)과 같은 재능 많은 여성 시인이 (실제로 기녀 생활했다 해도 양반 신문이라는 이유로) “40여 명의 남성들과 관계했다”고 해서 관비가 돼 곤장 맞고 머나먼 지방으로 쫓겨나야 됐는가 하면 관료 이귀산의 아내 유씨가 자신이 옛날부터 사랑해온 남자와 간통했다고 해서 사형까지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종이라는 임금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여성들을 “모범 케이스” 삼아 성리학적인 도덕주의의 독재를 확립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종시 이름을 맨날 듣고 광화문에서의 세종동상을 봐야 하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소수의 페미니즘 서적에서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있을까요? 북조선에서는 그쪽 나름의 민족주의적 신화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이쪽에서도 이쪽 나름의 민족주의적 신화들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형식상의 “말의 자유”가 있다 해도, 이 신화들을 그 누구도 제대로 흔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도적인 “표현의 자유”가 있는 만큼 우리 사회의 무수한 터부들이 공고합니다. 소수자들이 철저하게 주변화된 “표현의 자유” 사회에서는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다수가 강력한 “면역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우리에게 사회화 과정에서 아주 잘 내면화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주류” 서술을 당연지사, “사실”로 알게끔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주어져도, 우리가 특별히 다수의 의견과 다른 “표현”을 어차피 할 줄 모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족쇄들이 보이지 않는 족쇄입니다. 그러나, 이 족쇄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 이 족쇄들이 풀리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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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edian.org/archive/6290
주체사상보다 더 사교같은 ‘선진성 신앙’ (레디앙,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 2012년 6월 15일, 10:25 AM)
'경쟁''선진성'의 유일신을 숭배하는 사교집단
“邪敎집단”이라는 말은 학자의 입에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북조선식 “유일사상”, 지도자 숭배 등의 문제성은 가시적입니다. 계급성이 결여된 그 사상만을 가지고, 계급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여 실천한다는 거야 불가능하죠. 예컨대 절대화된 “반외세”, 본질화된 “미제”의 像 속에서는 지금 “점거하라” 운동을 전개하는 가난하고 화난 젊은이들과 연대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식민지 트라우마의 결과겠지만, 계급적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미국이나 일본 사회를 획일화된 “적”의 이미지로 그리기만 하면 큰 문제죠. 북조선을 몽땅그려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악마”로 그리는 미제 보수 언론의 수준, 즉 바로 “적”의 수준 이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 사상의 문제성이야 한 눈에 당장 쉽게 들어오지만, 남한의 실질적인 “국시”의 문제는 오히려 교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어서 문제점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북 측의 “유일사상”과 달리 그 “국시”는 꼭 그렇게까지 명시적이지 않죠. 그러나 남한의 거의 모든 사회, 정치 세력들의 거의 모든 움직임 속에 그 “국시”가 녹아져 있어서 그 독으로 무수한 타자들에게 씻겨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 “국시”, 숨겨져 있는 남한의 진짜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선진성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에 비해서는 정말이지 통일교나 “옴진리교”는 아희들의 장난에 불과하죠.
개화기의 “문명개화” 열정, 식민지 시기의 “실력양성” 논리, 이승만 시기의 “미국의 우방 자유대한 건국” 이야기,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그리고 1990년대의 “국제화” 등의 계보를 이은 “선진성 신앙”은, 우파 쪽에서는 완전히 “숨겨진” 것도 아닙니다. 대놓고 “선진화”를 들먹이죠.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선진화”는 “기업하기 좋은 국가”, “복지 사회”, “다문화 사회”,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 등등을 의미하는데, 그 모델은 대체로 영국이나 일본 등 복지주의 요소가 약간 있어도 발빠르게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선진국”들입니다. 문제는 “선진”의 구호 뒤에 숨겨져 있는 현실이라는 거죠. 구호야 비까번쩍, 비까후가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실질적 “내용”은 주체사상 이상으로 살인적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국가”는 기업이 모든 법들을 통째로 무시하면서 비정규직 착취 등 극단적인 이윤극대화를 무조건 밀어붙여도 아무 문제 없는 “기업국가”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불법 사내 파견이 법에 걸려도 파견노동자들을 “직고용 계약직”으로 바꾸는 등 정규화 요구를 교묘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피하는 지금의 현대자동차처럼 말입니다.
“복지 사회”는 착취를 당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던져지는 작은 “당근”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의료업자들의 소득을 보장해주기도 하는 의료보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달리 “복지” 관련의 정부, “주류” 정당들의 모든 약속들은 예외없이 다 깨집니다. “반값등록금”을 기억하시나요? 실제 작년 이후에 등록금이 평균적으로 4,5%로 내렸을 뿐이고 곧 추가적인 인상으로 이것도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다문화 사회”는 주로 가난한 나라 출신의 결혼이민자들에 대한 한글배우기 등 “동화” 추진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무리 동화돼도 “노예”에 가까운 “신분”은 크게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다문화 사회” 속에서 이주여성의 약 20%는 가정에서 물리적 폭력을 당하고 절대 다수는 폭언, 모욕, 정서적 폭력을 당합니다. 정주 가능성이 차단된 절대 다수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 사회”와 아예 무관하고요. 그리고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은 위와 같은 약탈, 착취, 폭력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월마트 등 세계적 수준의 야수들로부터 제품조달 계약을 따내 미국인 “대행”으로 아세아, 아프리카 노동자들을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우리식 세계화”의 진짜 얼굴입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보수/”주류”의 “선진성 신앙”은 영국이나 일본보다 더 야만적인, 즉 그만큼 자본의 이윤최대화에 더 적합한 사회의 건설에 대한 굳은 신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노동자/빈민들도, 외국의 노동자/빈민들도 평생 살인적인 “경쟁”의 늪을 벗어날 수 없는, 그 대신 자본의 이윤마진이 그대로 잘 유지되는, 그런 사회를 당연시하고 긍정시하는 것은 바로 “선진성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비주류, “진보”라 해도 “선진성 신앙”의 磁場을 완전히 떠나지 못합니다. “선진성 신앙”의 중요한 요소는 (신자유주의 도입의 사례에서 보인 것처럼) “선진 외국의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맹종하는 것인데, 이건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의 고질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초중반, 동구권 몰락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 “반자본주의”가 미국 학계에서 일시적으로 금칙어가 됐을 때에 (지금 이 부분에 대한 비공식적 “금지”는 서서히 풀리는 중입니다) 그 영향을 가장 빨리, 가장 많이 받은 곳은 바로 한국의 “진보”학계였습니다. 자본이 노동자로부터 이윤을 짜내는 것은 그대로인데, 한 때에 학계에서 자본의 “상징 생산”, “상징 교환”, ‘담론 생산”만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진보” 학계에서 말입니다. 보수학계로서는 지금 초미의 관심사는 “선진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에 가장 공로를 들였다 싶은 “건국의 대통령”,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이승만이나 일제시기의 전향자, 나아가서 총독부와 친했던 기업인이나 총독부 안에서 일했던 관료들의 “명예 복원”입니다. “선진적인 대한민국 만들기에 초석을 놓은 선진적인 총복부 만세!” , 이것입니다. 이 정도 “선진화”되면 숨이 너무 차서 더 이상 뭘 바라기도 어려운 거죠.
그 폐쇄성이 너무나 가시적인 주체사상보다는, 망해가는 “선진권” 신자유주의나 “포스트” 등을 무뇌적으로 따라가는 우리들의 “선진성 신앙”의 타율성과 무비판성,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후진적” 타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야말로 “邪敎”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제2 미국”, “제2 일본”을 만들려다가 결국 평민이 마음 놓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수도 없고, 연애할 수도 없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한 순간이라도 “경쟁”의 압박을 벗어날 수도 없는 지옥같은 사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약육강식, 승자독식 정글의 먹이사슬의 맨 밑에서 마음과 몸을 망가뜨리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공부”에 매달리고 각종 폭력에 멍드는 우리 아이들은, 과연 “경쟁”과 “선진성”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邪敎에 집단으로 빠지고 만 우리들을 용서라도 할까요? 우리들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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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와 불편한 진실 (레디앙,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 2012년 5월 17일, 12:58 PM)
"진보는 외계인이 아니다…지금, 여기 현실에 구속받아"
저야 일찌감치 “통합진보당”의 결성 과정 그 자체를 계급적 입장으로부터의 이탈의 과정으로 봤기 때문에 현금의 “통진당 사태”를 봐도 그다지 감정 동요는 없지만, 수많은 분들에게 “주먹질하는 진보”는 아주 불편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셈입니다.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합니다. 통합진보당은 이미 진보와 한참 멀어졌지만, 진보라 하더라도 화성에서 오는 외계인들은 아니라는 것이죠.
진보는 비록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의 한계를 다 안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고 자라고, 학교 다니고, 군대 다녀오고, “위아래” 구조 안에서 “제자리”를 찾고 이런저런 타협을 해가면서 밥벌이하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은 “이 곳”, 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다 해도, 몸은 “여기, 지금”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만큼은 “우리”의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통합진보당 같은 경우에는, 계급적 입장을 버리고 고학력 중산계층에 자기 자신들을 “파는” 과정에서 특히 기존의 도덕 수준마저도 급격 하락돼 남한의 일반 부르주아 정치 이하의 레벨을 만천하에 과시했지만, 이와 같은 “타락”의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진보에는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게 마련이죠. 우리가 진보에 스스로 속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 한계를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중적인 진보의 모태는 제1차 대전 이전의 독일 사민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최초로 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만큼 공훈이 많은 당이었습니다. 전쟁 이전에는 약 백만 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던 독일사민당은 예컨대 주요 공업의 사회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만큼 그때만 해도 분명 “사회주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사업해온 당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독일노동자들이 받는 복지혜택 (초보적 형태의 실업수당 등등)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관료화돼가는 당은, 그 투쟁 대상인 “국가”를 닮아갔습니다.
카우츠키 등 “지도자님”들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태도는, 독일 소시민이 보통 “국가”에 대해서 느끼는 “존숭의 염(念)”과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적 원리원칙과 달리 국가의 민감한 부분 ? 예컨대 국민개병제나 대러시아 전쟁 준비, 그리고 식민지 약탈 등 ? 을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당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반면, 1918~1919 독일혁명의 급진화만큼 너무나 잘 막아 유산층 지배의 보루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시대적인 한계를 벗고 싶어도 벗지 못하는 “합법적 사회주의 운동”에서 결국 그 시대적 한계를 대표한다 싶은 기존 체제의 “지킴이”가 된 것이죠. 역시 국가나 군대만큼 늘 우러러보는 조합, 당 관료의 보수성은 “사회주의적 신념”을 이기고 말았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에게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레닌의 급진성을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지만, 말년의 레닌도 테일러주의(“과학적 경영” ? 주로 노동시간 관리 합리화와 지속적인 노동생산성의 제고를 도모하는 것임)를 “사회주의의 기초”로 생각하고 “소비에트와 테일러주의의 결합”을 “사회주의”로 착각할 만큼 기슬-과학만능주의적인 환상에 빠진 적은 있었습니다.
그 망상 그 자체야 그 당시 일반 서구 지식인의 보편적인 “통념”에 가까웠지만, 그 통념이 혁명가의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 이는 참 위험한 일입니다. 과연 레닌만 20세기 초의 보편적인 기술만능주의에 감염돼 있었던가요?
중산층 지식인 출신의 대부분 “올드 볼셰비키”들은 그랬고, (멘셰비키들은 실은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죠) 또 노동자 출신의 당원이라 해도 생활수준 향상 등에 대한 기대로 이에 부합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딸린의 반동화 이후에는 “스타카노프주의”라는 미명하에 쏘련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과잉 착취, 실적 경쟁 유도의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진보가 이렇게 보수적으로 되면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닌가요?
확언컨대, 우리가 목전에 관찰하고 있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한계는 카우츠키나 레닌보다 심하면 아주 심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또 최근의 자유주의자들과의 무원칙한 타협으로는 과연 한계밖에 무엇이 남았는가, 라고 자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한계를 분석해보면 문화적 한계와 사회-정치적 의식의 한계로 분리해서 분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폭력 사용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 같은 경우에는 분명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적 분위기, 군사 문화와 유관합니다. 권인숙 선생 등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많이 지적했듯이 남성우월주의적 군사 문화는 80년대 운동권 안으로 흘러들어갔고, 운동권을 모태로 하여 조직을 꾸려나가고 군대를 방불케 하는 “조직사회”에서 살아온 좌파민족주의자들에게는 폭력적 습관이 많이 체질화된 건 사실인 듯합니다.
“문화적 한계”라고 하는 건 바로 이와 같은 체질화된 아비투스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여성주의자 등 여러 “새로운 진보 세력”들의 성찰과 개선 요구로 그나마 나아질 수 있는 “문화적 한계”보다 훨씬 더 위험한 한계는 바로 “사회-정치적 한계”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전혀 볼 줄 모르는, 기껏해 봐야 장하준 식의 “박정희 시대와 같은 자본에 대한 국가통제” 정도를 이야기하는 한국 사회의 “일반”과 마찬가지로 통합진보당 등 자유주의화된 과거 운동권 멤버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제시를 포기한 채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의 판타지에 그대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4년이나 걸려온 세계공황은 그 어떤 자본주의적 방식으로도 ? 예산 삭감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도, 국가 위주의 시설, 공업 투자 식의 신케인스주의적 방식으로도 ? 제대로 극복되지 못한 채 악화일로 진행돼가고, 인제 어쩌면 세계 자본주의의 하나의 핵심 지역이자 수정 자본주의의 쇼 윈도우인 유럽연합이 붕괴될 수 있음에도, 한국의 “진보”는 무계획한 이윤추구 식의, 개인 투자자 소유의 재벌경제야말로 청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한국 자본주의 “성공 스토리”를 믿어 이 “성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사유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적 미몽에 옭매여 있다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유럽의 가장 급진적인 대중들도 아직은 “자본주의 문제”를 본격적인 화두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고, 단지 “1%의 탐욕”이니 “강도 같은 금융자본”이니 하는 비과학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수사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최근 선거 결과를 봐도 그리스의 총선에서 유일한 진정한 반자본주의적 세력인 공산당은 8,5% 정도만 얻었고, 프랑스의 대선에서 급진적인/자본주의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색채의 좌파연합/신반자본주의당/노동자 투쟁당 후보들은 다 합쳐도 13% 정도만 얻었습니다.
사민주의적인, 수정자본주의에 대한 각종 환상으로부터의 해방에 시간이 걸립니다. 문제는, 위기 진행의 속도로 봐서는 우리에게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아직 약물치료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상황이 더욱더 나빠지면 수술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악화될 수 있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진보로서 “자본주의 긍정”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스스로 깨닫는 것은 정말 급선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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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사람 잡아먹는 인권 논리” (레디앙, 박노자 / 2012년 5월 4일, 4:49 PM)
박노자 "진짜 인권과 사회주의는 불가분"… 북한 인민과 탈북자 인권
친척 중에 당 간부로 경력이 있는 어르신들에게 가끔 제 의심들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자네는 아직 삶을 모르네. 지식인들에게 우리가 해준 무상 교육을 갖고 자유로이 나가도 된다 그러면 상당수가 노동자들을 배반하고 서방으로 바로 가지 왜 우리에게 붙어 있겠어? 노동자는 갈 데도 별로 없는데, 지식인은 출세가능성부터 계산하잖아. 우리가 우리보다 몇 배 더 강한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탈영자들을 쉽게 품을 수 없지. 소수 개인들의 의사만 생각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사고해보라”.
일면 그들의 논리가 이해되기도 했는데, 또 일면으로 그들이 과연 “자유의 맛”을 아느냐,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좌우간, 이렇게 해서 결국 1991년에 구쏘련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출국에 대한 제한과 검열제, 그리고 중앙계획적 경제의 사망은 새로운 “인권 천지”의 탄생을 알렸는가요? 부디 이렇다고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망국과 급속한 자본화가 촉발시킨 경제의 와해 속에서는 “출국”은 인제 “인권/자유”가 아니라 수백만 명의 인민들에게 “생계”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나마 서방에서 “중산층”으로서의 위치를 득할 가능성이라도 보였던 고학력자들은 앞장섰습니다. 특히 학자, 그 중에서도 20~40대의 자연과학도와 이공계 전문가들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러시아 고등학위 보유자인 학계 구성원의 약 50만 명 중에서는 대체로 10만 명 정도는 이미 (주로 서방에서) 해외 취직하거나 적어도 단기 계약으로 해외체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학문 분야에서는 그저 “기동성”이 있는 “모두”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수학 같은 부문에서는 전체 학자들의 약 40%, 즉 50대 이하의 다수의 학위 보유자들이 썰물이 밀려나오듯이 증발되고 만 것이죠.
물론 황폐화된 나라를 벗어나고 싶은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그들의 출국이 “인권”임에도 틀림없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중앙계획적 경제의 와해와 다수 고학력 인력의 출국으로 인해 교육 질의 저하를 감당해야 하는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았던가요? 오랫동안 희생을 해서 첨단과학 발달의 가능성을 만들어주었다가 인제는 두뇌 유출로 더이상 자주적 학술 발전이 불가능해진, 황폐해진 곳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닌가요? 전체로서의 사회가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아닌가요? “인권”으로서의 개인의 출국 보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주변부적 상황에서 중앙계획적 경제만이 보장할 수 있는 공공교육에의 충실한 투자는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미 망국된 이상 이런 질문을 제기해봐야 소용도 없습니다. 늦었습니다.
“검열제 폐지”와 “개인 소유의 언론 허용”은 자유주의적인 “인권 투사”들의 또 하나의 요구이었습니다. 국가적 검열은 1991년 이후에 대체로 사라진 듯했지만, 사유화된 매체들은 쏘련 시대에 그나마 있었던 기층 민중에 대한 관심을 바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다녔던 연구소가 문을 닫아 (물론 “서비스 질 좋은” 그 뭔가로 거듭나지도 않고, 그저 그 건물이 부동산 시장에 나와 어느 은행에 팔리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와 그 동료들이 다 실업자가 돼 생계가 막막해졌을 때에 그 어느 “민주화된” 언론도 이걸 단신으로라도 언급한 적은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구쏘련에서 문닫아 폐허가 된 공장과 연구소들은 약 7만 개 정도 됐는데, 거기에 다녔다가 본의아니게 타율적으로 백수가 되어 인제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 그 모든 민중들에 대해서 그 어느 언론이라도 신경썼습니까? 자본이 소유하게 된 언론들도, 한 때에 “인권운동”으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던 거물 자유주의자들도 1993년 10월에 옐친 정권이 불법적 기업 사유화를 중지하라고 요구한 국회에 탱크로 발포했을 때에 그저 박수를 쳤을 뿐입니다. “공산주의 박멸이 우선”이라고 하면서요. 자본의 검열이 국가 검열보다 백배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실은 바로 그 때에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권”은 서방 열강들의 “동구권 흔들기”의 한 낱의 도구로 이용됐다가 그 이용가치가 다 됐을 때에 폐기처분된 셈이었습니다. 탱크로 국회에 발포하는 것도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을 만들어 기아선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인권과 아무 관계 없었지만, 1991년 이후에 러시아에서 집권한 백색강도와 도둑들의 이 범죄행각들에 대해서는 서방언론과 자유주의적 “인권 활동가”들은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빨갱이”가 아닌 “우리 편”이 한 사회를 황폐화시킬 때에는 이는 “인권 유린”이 아니고 그저 “필요한 개혁의 부산물” 정도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인권” 타령을 하는 자유주의자 무리에게는 주변부의 사회로서 자주적인 발전을 영유할 권리라든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직장을 가질 권리, 적어도 굶지 않을 권리, 즉 사회적/개인적 생존권은 “인권”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합니다.
서방에서 쓸만한 “인력”이 될 수 있는 지식인의 “출국 권리”는 “인권”이 돼도, 그 지식인으로부터 수업들어야 할 주변부 국가 학생의 학습권은 분명 “인권”이 아니라는 논리죠. 결국 서방 열강들의 유산층에 유리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는 권리들이 “인권”으로서 신성화돼도 그들에게 약간이라도 불편할 것 같은 주변주 사회의 생존권은 아예 생각밖에 나 있는 것입니다. 주변부에서 태어나게 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핵심부 열강들이 이렇게 해석한 “인권”은 정말 “사람 잡아먹는 인권”일 것입니다.
저는 “인권”에 대한 제 개인적 환멸에 관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왜 씁니까? 요즘 북조선 “인권”이 남한 보수들의 거의 “전가의 보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내놓고 있는 “인권”의 해석을 보면 그저 기가 찰 뿐입니다. 그들이 북조선의 장기적 생존권, 그리고 자주적 발전권의 영유에 기여할 로켓, 우주공학 프로그램을 비난할 때에 그들이 과연 생존권이 인권의 기반이라는 부분을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계획적으로 망각하나요?
자꾸 “시장 개혁”을 거의 “인권 신장”의 동의어로 쓰는 것인데, 오히려 모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배급제야말로 빈곤한 사회에서 인권의 기초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북조선 인구의 대다수는, 오히려 (1990년대의 참사들 이후에 지방에서 거의 유명무실해진) 배급제의 내실화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요? 탈북자들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돼야 되지만, 과연 대다수 북조선 주민들의 문제들은 소수의 “출국”, “월경”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요?
또 “월경”을 감행한 이들이 중국이나 (특히) 남한에서 당해야 할 무시와 착취, “주류”로부터의 고립, 여기에서 발생되어지는 온갖 심신상의 곤란들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과연 악질적인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에서 2등, 3등 시민이나 “불법적인” 타자로 산다는 것은 인권의 실현일까요?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이미 탈북하신 분들의 권리들도 귀중하지만, 이와 동시에 북조선 주민 다수의 생존권, 공공의료 이용의 권리, 공공교육을 받을 권리 등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부분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진정한 인권의 시발점은 집단적 및 개인적 생존권, 자주적 발전의 권리, 그리고 공공부문을 평등하게,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나, (국외 이동을 포함한) 이동권도 중요하지만, 생존권/평등권/공공부문 이용권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 개인적인 자유권들은 무의미화되기가 쉽습니다.
가난에 이기지 못해 노르웨이에 가서 은밀히 성매매하는 라트비아 여성 같으면, “이동권”을 영위한다기보다는 그저 황폐화된 사회에서 살 길을 도모하다가 국내외의 착취자들에게 이용 대상이 되는 케이스일 뿐이죠. 살인적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계획경제만이 모두들에게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안정부터 인권의 시초가 아닐까요? 제게는 이런 측면에서 (진짜) 인권과 사회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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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유럽, 자본주의와 함께 몰락" (레디앙, 2012년 04월 27일 (금) 01:28:55 박노자 / 오슬로대)
"중산층 2차대전 이전 수준…사회구조 남미와 닮아가"
요즘은 솔직히 신문 펴기가 무서워졌습니다. 제가 구독하는 <계급투쟁>지 같은 신문은 물론, 온건 부르주아 자유주의 일간지 <아프텐보스텐>지마저도 보기가 무서워졌습니다. 지상에 보이는 해외 소식마다 상상하기도 끔찍한 인간들의 고통과 전운이 감도는 미래만 보여줘, 보다보면 하도 심장이 아파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근의 대표적인 신문 해외 새소식은 이런 것들입니다.
- 그리스 청년실업률은 이제 51%에 달했습니다. 즉, 젊은 사람 두 명 중의 한 명은 일거리도, 미래도 다 빼앗긴 상태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구제책"으로 희랍의 경제 규모는 지난 4년간 이미 5분의 1은 줄어들었고, 앞으로도 일자리 창출의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 그리스 빈곤율은 40%를 향해 치닫고 있는 중입니다. 더이상 식량을 살 돈이 떨어진 과거의 중산층들은 이제 자선단체들이 나누어주는 약간의 음식에 기대어 하루하루 어렵게 연명합니다.
- 한 때에 유럽 복지주의의 전형이었던 바로 "그" 스웨덴에서의 청년실업률은 25%나 돼, 불란서와 호형호제의 수준입니다. 한국과 다를 게 없이 절망에 빠진 스웨덴 청년들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사는 것이고, 상당수는 미래에 대한 꿈이 거의 빼앗긴 상태입니다. 일부 부르주아 정객들은 절망에 빠진 청년들을 끝까지 잘 착취해보려고 특별한 "청년형 최저 임금"을 정상적인 최저임금의 75% 정도로 책정해 청년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획책하려 하지만, 노조들은 결사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 한 때에 구쏘련에서 가장 잘 살았던 공화국이었던, 그러나 이제 유럽연합의 주변부로 편입된 라트비아에서 빈민의 한 자녀가 영양실조로 죽을 뻔했다가 극적으로 구출됐습니다. 라트비아의 빈곤율은 약 26%, 근로인구의 4분의 1은 유럽연합 핵심부의 국가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가면서 어렵게 연명하는 것이고, 가난과 전망의 절대적 부재 속에서 점차 기근의 유령은 다시 돌아옵니다.
위의 소식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부에 속하는 "유럽"으로부터의 소식들입니다.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참사들에 대한 소식은 원래부터 흔히 보였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최악의 위기가 핵심부로까지 번진 지금에 와서는, 제3세계라고는 따로 없습니다.
유럽연합 전체에서는 약 17%의 인구는 빈민들이지만, 남유럽 청년의 경우에는 안정된 정규직을 갖는 "장차의 중산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곤, 준기아, 절망 등이 바다의 물처럼 퍼져가는 것입니다. 그나마 약간 남아 있는 복지제도 덕분에 기근의 만연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는 것이지, 정규직 고용이 청년들에게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안정된 직장없이 주택구입을 위한 융자를 받는 일 등이 불가능해지자 "노동하는 중산층" 위주의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사회구성은 몰락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중산층은 점차 다시 한번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준으로, 즉 고임금 전문가군이나 중소부르주아군 정도로 줄어드는 추세고, 그 중산층 밑에서 사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버리는 것은 빈민과 준빈민("워킹푸어")들입니다. 비공식부문의 고용의 규모가 조금 더 작고 대지주와 토지없는 농민과 같은 요소들이 없어서 그렇지, 많은 면에서 유럽의 사회구조는 점차 남미와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케인스주의, 복지주의의 절명의 위기와 점차적 몰락 속에서 당연히 자본주의 황금기(1945-1973)와 같은 "대형 온건 우파, 대형 사민주의 정당" 중심의 정치판의 균형도 깨져갑니다. 희랍처럼 반제, 반독재 무장 투쟁의 전통이 깊은 사회에서 급진(사민당보다 왼쪽에 있는) 좌파 정당들의 전체적 지지율은 42% 정도지만,(관련 내용) 불란서 같은 경우에는 "유럽 연합 탈퇴, 유로존 탈퇴, 보호주의 정책 재개, 재공업화 추진"이라는, 실업자와 비정규직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들리는 구호들을 극우파가 전유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장차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실력 대결"로 가버리면 그 대결에서 꼭 좌파가 이기리라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선택되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최악의 야만이 선택되어질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국내에서 아직도 "사민주의"나 "유럽모델"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금 제가 목전에 보는 유럽은 폭발되기 직전의 화산에 가까운 것입니다. "좋은 자본주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 등에 대한 꿈들은 그저 미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직시해야 합니다.
이윤추구의 논리에 기반하는 시스템은 안정될 수도, 지속가능할 수도, 좋을 수도 없습니다. 이윤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이 시스템은 결국 파멸로 가게 돼 있는데, 사회 전체가 이 잘못된 시스템과 함께 파멸로 가게 돼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타이타닉>을 지금 우리가 "구제"하려 한다는 것은 그 침몰의 시점을 연기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침몰 그 자체를 방지할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침몰할 배를 탔다는 것을 이해하고, 빨리빨리 모두들이 탈 수 있는 구명보트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 구명보트란 무엇인가요? 민주적 국가를 통해서 사회가 공공화된 주요 공업시설과 은행 등을 관리하고, 사회임금 등을 통해서 모무들의 생존, 기아 방지부터 보장해주는 "생명, 생존 위주의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에서는 은행은 수익사업에서 정책적으로 운영되는 "편의 시설"로 바뀌어야 하고, 주식과 배당금의 개념이 점차 사멸되어 잉여를 사회가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전" 대신에 탈핵, 탈원전, 환경파괴 방지, 모두들의 생존과 의료 등 생활혜택이 사회적인 경제 관리의 주된 원칙이 돼야 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비이윤적"시스템으로 바꾸지 못하면 이 <타이타닉>과 함께 야만의 바다 속으로 침몰될 것만은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구명작전할 수 있는 시간도 인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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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박노자 글방, 2012/03/23 02:15)
제가 살았던 말기의 쏘련을 회상해보면 한 가지 아주 한심한 부분은 있었습니다. 러시아라는 주변부적 국가의 아주 오랜 어떤 "서구 콤플렉스"의 발로인지도 모르지만, 늘 제기되는 표어는 "미국 따라잡기"이었습니다. 말기 쏘련의 평균적 노동 생산성은 미국의 약 60%에 불과했고, 이 사실은 적어도 지식인층 안에서는 널리 인식돼 있었는데, 지도자들이 늘 이걸 의식해서 "미국의 노동생산성을 따라잡고 능가해야 우리 체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못박곤 했습니다. 대중적으로 팔리는 통계집마다 쏘-미의 강철 생산, 트래크토르 (경운기) 대수 생산, 곡물 생산 등이 비교, 대조되고, 혹여나 쏘련이 생산 통계에서 미국을 앞지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게 당장 중앙방송에서 나오는 뉴스가 되곤 했습니다. 또 그러한 비교가 나올 때마다 미국은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로 지칭되곤 했습니다. 레닌주의적 사회주의에 좋은 점들은 대단히 많지만, 우리 입장에서 문제되는 부분이라면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이 될 것이라고 인식되는 "선진권"의 그 높은 노동생산성, 생산능력에 대한 지나치다 싶은, 근대 지상주의적이다 싶은  선망입니다. 원래부터 그런 근대지상주의적, 공업지상주의적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거기에다가 쏘련 말기의 간부층의 은근한 (혹은 가끔가다 은근하지도 않은) 자본주의적 성향의 문제까지 첨가됐습니다. 그들은 공석에서야 "미국 수준 초과"를 들먹이곤 했지만, 사석에서는 바로 그 "적 미제"에서 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욕망들을 마구 드러내곤 했습니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서양 콤플렉스", 레닌주의의 "생산의 선진성"에 대한 강력한 강조, 그리고 간부층의 자본주의적 타락 - 이 요인들은 점차 망국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리원칙으로 따져보면 과연 "미국만큼 많이 생산, 소비하기"가 정말 사회주의인가 싶습니다. 당연히 미제로부터 늘 방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나친 기술적 후진성은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전체의 자본력과 지식력, 정보력이 집중된 미국에 비해서 전통적으로 유럽의 주변부에 속해온 러시아 같은 나라가 갑자기 생산, 소비의 모든 면에서 더 앞서나갈 것이라고 처음부터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러시아도 그렇지만, 러시아보다 근대적 자본주의가 애당초부터 훨씬 덜 발전됐던 중국, 북조선의 경우에는 더더욱더 애당초부터 "생산 경쟁"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수이었습니다. 즉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 벽두인 1958년의 한 연설에서 "20년 후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던 흐루쇼브를 따라잡을 심산으로 강철 생산의 부문에서 "15年后,我?可能?上或者超?英國"이라고 큰 소리치고 마치 "영국보다 강철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을 "사회주의"의 대명사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태심한 오류이었습니다. 모택동 주석의 신중국 건국 주도나 토개 (토지개혁)의 쾌거, 비록 폭력적이고 많은 면에서 비생산적이며 철저하지 못했지만 당 내 관료화와의 투쟁의 시도나 전인민을 위한 의료, 기초 교육 공급 등의 업적은 대단히 존경스럽지만,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이야기로 결국 오도되고 재앙을 낳을 대형 켐페인인 대약진운동을 주도하려 했던 모택동은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초고속 근대화"만 갈망하는 후진국 민족주의적 지도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로서는 강철을 얼마나 생산했느냐보다는, 이 강철을 생산한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적 삶은, 자본주의적 생활보다 더 윤택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지구의 자원이 어차피 제한돼 있는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이 자원을 빨리 써버리면서 우리 세대의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제한된 자원들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그 제한된 자원을 이용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민주주의와 상호 배려, 그리고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미제와 자동차 대수 생산을 비교해가면서 "우리가 더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는 사회주의 국가는 자동차를 최소한으로 필요로 하는, 대중교통 위주의 사회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민 등 자동차를 정말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부를 예외로 하되 도시에서는 대중교통망, 특히 환경친화적인 지하철, 전차 등의 확충에 초점을 두고 출퇴근 관계로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10-15개 가구의 자동차 공동 사용 등을 적극 권장하는 것은 가장 사회주의적이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 체제의 목적은 자동차 생산으로 인한 자본의 이윤 극대화이지만, 우리의 목적은 환경 보존과 교통 사고률 최소화, 석유 등의 자원 보존, 그리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는 안정되고 상호 배려심이 많은 사회적 환경의 조성은 아닙니까? 목적이 서로 완전히 다른 만큼, 사회주의적 사회를 자본주의적 사고틀로 상상해봐야 소용이 없고, 쏘련이나 중국 지도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지상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임에 틀림없습니다.
미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쏘련이나 1970년대 이전의 중국으로서 당연히 노동생산성 제고 등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사회주의 체제로서 "노동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전인적 인간의 발전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보다는, 노동환경이 얼마나 쾌적한가, 휴식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휴식시간에 음악이나 무용, 독서 등을 즐기면서 얼마나 자기계발하고 남을 위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직장 단위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평등하고 서로 배려해주는가, 이게 사회주의 사회로서 핵심적인 문제들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차원에서는 구쏘련이나 동구권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는 훨씬 진보된 사회이었습니다. 전체 총인구 중에서 1년 내에 약 2천5백만 명이 정신신경과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게다가 약 6백80만 명이 목사나 신부 등에게 신경병이나 고질적 불안, 심리적 질환 등의 문제로 도움을 호소해야 할 만큼 "효율성 높이기" 압력이 살인적이고 왕따 현상이 고질적이고 늘 해고 위험이 도사리는 미국의 직장에 비해서는, 쏘련에서의 직장은 아주 쾌활한 곳이었습니다. 제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제가 알았던 그 어떤 기존 세대의 쏘련사람도 직장에서의 지나친 피로, 부당한 압력, 왕따 등에 대해서 불평한다는 것을, 제가 한 번도 들은 적은 없었습니다. 제 부모님만 해도 늘 출근할 때에 웃으면서, 기쁘게 갔습니다. 즉, 노동생산성이 미국에 비해 훨씬 낮아도, 노동자의 삶은 많은 면에서는 훨씬 즐거웠던 것입니다. 문제는, 구미권 자본가들을 벤치마킹하여 궁극적으로 자본가가 되려는 구쏘련의 간부들에게는, "행복한 노동자"가 필요했던 게 아니고, "빨리빨리" 보다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로봇과 같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로 노동자의 삶이 미국에 비해 훨씬 "사회주의적"이었다 해도 지도층의 "미국 따라잡기" 타령은 끊어지지 않았고, 결국 미국을 따라잡을 일도 없이 지금 같은 구미권의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로 추락하고 만것입니다.
저는 북조선 지도자들의 "강성대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쉬움을 강하게 느낍니다. 사회주의자라면 "강성대국"을 바랄 일없이, 배려와 사랑이 많고 행복감이 넘치는 사회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존중 받고 서로 챙겨주고 사랑해주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체제는 바로 사회주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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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반동의 시대, 우경화된 지구 (레디앙, 2012년 03월 17일 (토) 12:55:44 박노자)
세계적 좌파의 위기…민주적 계획경제, 침략반대 기치를
격리된 공간에 있다 보니 절로 “기억” 속으로 시간여행 가기가 쉬워집니다. 1980년대 초반, 가면 갈수록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던 소련의 지식인 사회를 부모의 친척과 친지 등을 통해서 알게 됐던 시절. 그 때 같으면 제 할머니와 같은 노인들은 강력한 공산주의적 신념을 계속 보유했지만, 제 부모 세대, 즉 1960년대에 청년기를 맞이했던 장년층의 “믿음”은 많은 균열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실질적인 원인들이야 매우 복합적이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그 “신념 위기”의 중심에 섰던 것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구소련(과 몇 개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무장간섭, 그리고 아프간 침공,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소련 파견군이 카르말과 나지브 등 아프간 혁명 정부의 편에 아프간 내전에 무장 간섭했다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개방형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현실 사회주의와 서구식 사민주의의 장점들을 같이 접목시켜보려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내 개혁세력들의 과감한 시도를 소련이 무장간섭으로 좌절시킨 것은, 어쩌면 역사적 범죄에 해당된다고 봐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류의 시도야말로 현실 사회주의의 1970년대 이후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역사에 대한 죄임에 분명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군이 저항하지 않은 관계로 그 간섭의 직접적 희생자는 약 200명 안팎이었습니다. 아프간에 대한 무장 간섭은 훨씬 더 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소련 군의 파병이야 잘못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최근 반세기 동안의 역대 아프간 정부들 중에서는 카르말과 나지브의 혁명 정권은 그나마 가장 진보적이었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희생의 규모나 소련의 “무장 지원”의 대상이 된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국외 침략을 방불케 하는 국가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좋게 보는 지식인이라고는 1980년대의 소련에서 참으로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국외 파병들에 대한 비판은, 브레즈네브 정권에 대한 혐오를 넘어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강화시키고, 어떻게 보면 1980년대 말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그 후의 망국을 “이념적으로 준비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브레즈네브의 정권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경직된 관료들의 보수화된, 지정학적인 기반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치관을 대변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의 미국의 대외 침략들은 수십 배 더 많은 희생과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의 파괴를 낳았지만, “아, 사회주의 조국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어 실망한 이들에게 이걸 설명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소련뿐만 아니었습니다. 1960~70년대의 세계에서는 어딜 가나 대외 침략들은 체제를 위협하거나 적어도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줄 만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론 월남 파병에 대한 반대가 거의 없었던 우리 대한민국을 빼고 말씀입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신좌파는 자국을 월남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든 지배층에 대해 명실상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베트남 투사들을 돕겠다고 독일에서 적군파의 ? 비록 방법은 한참 잘못됐고 성공가능성이 없었지만 그 의도만큼 참 고귀했던 ? 무장행동이 개시됐으며, 미국과 불란서에서는 호지명과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행진했던 데모들이 거의 체제를 위협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월남 투사들의 이데올로기(유교화되고 민족주의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서방 민주주의와는 물론이고 신좌파가 꿈꾸었던 민주적인, 참여 위주의 사회주의와도 꼭 일치 하지 않았으며, 저항자들의 일부 행동 (현지 사회에서의 친미 부역자 처단 등등)은 불가피했다 해도 잔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동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대외 침략은 절대 죄악, 저항은 무죄”라는 것은 1960~70년대 “의식 있는”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방이든 동구권이든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의 반동적 정책과 영미권 사회의 보수화, 그리고 1980년대 동구권에서의 사회주의 이념 포기와 보수화, 반동화 이전에는 대외 침략은 “당연히” 죄악으로 인식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의미한 살육과 히틀러의 만행이 인류에 가르친 교훈이라면 군사주의와 침략 이상의 죄가 없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아주 값비싼 레슨이었죠.
그런데 한 번 오늘날 세계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종신집권에 준하는 장기독재를 꿈꾸는 푸틴을 “구국의 영웅”으로 만든 1999년 이후의 체첸 침략과 체첸 독립운동의 말살, 괴뢰정권 수립 등에 대해, 러시아 좌파는 과연 투쟁을 차치하더라도 “비판”이라도 했던가요?
국내에도 소개된 카갈리츠키와 타라소프 등 일부 좌파 논객들은 글로 체첸 독립운동에 대한 말살에 저항했지만 러시아연방 공산당(KPRF)을 위시한 사민주의나 그 왼쪽에 있는 제도적 좌파세력들은 푸틴을 두둔해주거나 입장 표명을 기피했습니다.
결국 체첸 말살로 민심을 얻은 푸틴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도둑이자 깡패는 지금까지도 망한 소련의 유산과 그 영토 안의 지하자원을 훔쳐가면서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체첸에서 비명에 돌아가신 분들의 수는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200명보다 약 1천 배 더 많은 걸로 추산되지만, 체첸 침략에 대한 러시아 내부에서의 비판은 체코슬로바키아 무장간섭에 대한 실망에 비해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결국 이건 희생의 규모 문제도 아닌 셈이죠. “프라하의 봄”에 대한 무장탄압에 실망했던 소련 지식인들은 그때만 해도 “침략은 죄악”이라는 좌파적인 집단의식을 공유했다는 거죠. 그 의식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에요?
서방이라고 해서 보다 나은 상황은 전혀 아닙니다. 이라크 침략에 대한 반대 운동은 꽤 규모가 컸지만, 결국 이라크에서의 미제의 침략을 패배시킨 것은 그 반전 운동이라기보다는 이라크에서의 영웅적인 항미 무장투쟁이었지요.
지금 아프간에서는 고용살인자 수준으로 전락된 미국 군인들이 하는 짓거리들은 만천하에 알려져 있습니다. “재미”로 민간인을 살해하고 그 참수된 머리를 든 채 기념촬영하기, “적”의 시체에다 오줌 싸기, 코란과 같이 현지에서 신성시되는 책 소각, 16명의 민간인 목숨을 빼앗은 총난사….
아프간 침략 그 자체도 범죄이고, 그 큰 범죄의 틀 안에서는 온갖 기괴한 범죄들이 다 저질러지고 있지만, 이 범죄투성이에 대한 “위력적인 반전 운동”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침략의 부진과 가열찬 저항의 성공적 전개에 따라 “자국 군대” 희생에 쇼크를 받게 된 구미인들의 대부분은 아프간 침략의 중지를 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여론조사상 그렇게 원하고들 있는데, 1960년대 말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비교될 만한 “행동”은 없어요. 주된 저항세력인 탈레반의 광신과 잔혹성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런 것인가요? 그런데 베트남에서의 항미 저항 주도세력들은 탈레반에 비해 훨씬 근대적이었지만, 역시 서방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과는 사이가 멀긴 했습니다.
그래도 미제와의 항쟁에서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이유는, 현지 정치 세력들의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제국주의 침략이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한말의 의병들이 성리학적 보수주의자이었다고 해서, 유림계통의 그 일부 지도자들이 노비 해방을 반대하고 여자교육을 반대했다고 해서(의암 유인석선생은 대표적으로 그랬습니다), 그들에 대한 일군의 토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탈레반의 광신이나 보수성은 아니고, 서방 사회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일어난 변화들입니다. 구 동구권과 마찬가지로, 구미권도 1980년대의 반동 시대 이후로는 우경화됐으며, “침략은 죄악”이라는 좌파적인 통념을 많이 벗어났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비극적입니다. 약 2만 명 이상의 현지인들을 죽인 것으로 추산되는 리비아에서의 영국, 불란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침략에서 봤듯이, 요즘 서방세력의 “외부”에서의 몇 개월간 폭격 정도면 구미인의 대부분은 아예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명분만 좋으면 말씀입니다.
세계의 좌파는 이제 피닉스처럼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종전의 대기업 고숙련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배타적 의존성을 벗어나서 이민자, 청년층, 미조직 서비스업 노동자 등 모든 소외된 주변 분자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해야 하고, 당 관료 독재의 방식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참여로 운영되는 민주적인 계획경제와 비관료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부터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탈군사화, 침략 반대의 기치를 다시 한 번 높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오늘날 아프간 침략과 같은 악몽들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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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의미 (박노자 글방, 2012/02/24 01:22)
"이 노르웨이는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런 자유에 충만한 사회가 됐느냐"고. 생각해보면 답은 아주 분명하죠. 대체로 1968년 전세계적 혁명 사태가 노르웨이 사회에서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의 "권위주의 퇴치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그 운동 전개의 과정에서 대학에서의 의무적 출석부터 체벌까지 차차 폐지, 금지되고 말았던 것이죠. 68년 혁명은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았지만, 유럽인의 삶을 뿌리채 바꾸어놓았습니다. 실은 제가 지금 넥타이를 맺지도 않은 채 감기약 등으로 얼룩진 와이트셔츠를 입고 대학 연구실에 앉아 작업할 수 있는 것도, 제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학생들이 언제나 제 문을 두드려 "야, 블라디미르..."라고 시작해서 뭘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제가 아침마다 맨먼저 14개월이 된 딸애미를 보육원에 데려다놓고 직장에 가는 것도 다 68년 혁명의 "결과"에 해당됩니다. 68년 이전의 유럽 대학 교수는 늘상 정장을 하고 학생들을 쉽게 만나주지 않고 더더욱도 first name (개인 이름)으로 불러지지 않고 육아노동을 하지 않는,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고 고답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뭐, 그런 교수를 구경하자면 68년 혁명을 거치지 않은 남한으로 가서 어느 대학에 가도 실컷 구경할 수도 있죠. 68년이 만든 "차이"를 실감하게요.
68년이 문화나 일상 등 우리 현실의 "소프트한" 부분들을 싹 바꾸어놓았죠. 성의 해방이나 동성연애 등의 긍정적 재인식,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동등한 시각, 인종적 소수자들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예컨대 전통적 교회 등 종래 종교의 점차적인 퇴출도 1968년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노르웨이에서는 전체 "토박이" 인구의 약 4%만이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을 하는 것이고, 대학 안에서는 교회의 교리와 의례에 옭매여 있는 사람을 아예 찾아보기가 아주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성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닌 거죠. 단, 국가와 제도적으로 유착돼 아프간 침략 반대 하나 제대로 못하는 "공식" 교회가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소리높여 비판했던 율법학자들과 훨씬 더 가깝다는 점 만큼 인제 보편적으로 인지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면에서는 우리는 파리의 "적색 5월"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거죠.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인권선언", "자유, 평등, 우애"가 19세기를 사상적으로 좌우했듯이,  1968년의 "Ni Dieu ni maître!" ("하나님도 주인도 필요없다!" - 1968년5월의 한 낙서, 오규스트 블랑퀴 Auguste Blanqui 의 1880년의 아나키스트적 잡지의 제목에서 따온 듯함)는 지금까지 인류의 하나의 해방 기제로 기능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한" 부분들은 많이 변혁돼도, "혁명"으로서의 1968년은 패배 당했으며, 그 패배는 1968년을 조직적으로 주도한 "올드레프트"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노조를 통해서 수백만 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도한 공산당은, 아무리 "혁명"을 들먹여도 현실적으로 원했던 것은 임금 인상 등 자본과 국가의 양보와, 긍극적으로 사회당 등 다른 좌파 정당들과의 공동 집권 정도이었습니다. 결국에 1981-1984년간 사회당 주도의 연립내각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1947년 이후 최초로 입각해서 "정부"가 될 수 있었는데도, 그 어떤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후에 공산당의 인기만 여지없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혁명" 수사로 포장된 개혁주의 노선은 결국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투표를 통해서 집권한다 한들, "탈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위압적인 대중운동을 이끌지 않는 이상 좌파정당은 결국 그 어떤 급진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급진적으로 나가면 관료들이 조직적인 방해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자본가들이 대규모적인 자본의 해외유출 등으로 맞서기 때문입니다. 관료,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자면 "자본주의"/"의회주의" 틀을 넘어서는 조치까지 취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데, 반세기 넘어 체제내 정치에 익숙해진 프랑스 공산당에게는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아나키스트나 트로츠키주의자 등 군소 급진파들은 공산당을 압도하는 "초좌파적" 수사를 썼지만 그들의 노동자에의 영향 행사 가능성이나 조직능력, 피지배 계급 동원 능력은 공산당과 노조에 한참 미달하는 만큼 맹렬 가투와 혁명적인 출판물 발간 이상의 그 어떤 "혁명"도 일으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덩치 큰 "올드레프트" 정파들이 사민주의 수준의 개혁주의로 퇴보하고, 덩치 작은 "올드레프트" 정파들이 셔클 수준을 넘지 못해 대중성을 전혀 획득하지 못한 것은 1968년의 비극이었습니다.
"올드레프트"의 한계도 노출됐지만, 그렇다고 "신좌파"가 선전 (善戰)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착취"보다 특히 젊은이, 학생, 종족적 소수자 등의 "소외"를 문제 삼고 "착취"뿐만 아니라 "소외"도 없는, 철저하게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탈자본주의적 사회를 꿈꾸고 숙련공이라는 피착취 계급의 "핵심"이 아닌 젊은 실업자 등의 "주변부"에 그 시선을 돌린 "신좌파"의 문제의식은 굉장히 시의적절했습니다. 그리스 같이 젊은이의 절반 이상이 직장을 아예 얻지 못해 "착취" 당할 가능성도 잃어 끝없는 소외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소득이 괜찮은 정규직들도 관료들이 독점하는 실질적인 정치 권력, 자본과 국가가 독점하는 경제권력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려 하는 사회에서는 "소외"의 관점이야말로 자본주의 비판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문제는, 세계 주변부의 대중부터 서방 도심의 주변부 인생들까지, 소외를 당한 이들을 어떻게 규합하느냐, 자본주의에 어떻게 치명타를 입히느냐 라는 전략, 전술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좌파"는 그저 무력했을 뿐이고, 그 무력감의 표현 중의 하나는 독일, 의태리, 일본에서와 같은 일부 "신좌파"의 무장 공격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무장 투쟁 전술은 성공적일 수도 있지만, 그런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고립된 소수 "영웅"들의 투쟁이야 필패인데다가 자본주의적 악선전에 이용될 뿐이죠. 결국 1968년과 그 후속 "사건"들은 구좌파와 신좌파 각각의 한계를 다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극복에 성공할 미래의 좌파는 오늘날 "올드레프트"와 "뉴레프트"의 조합일 것이고 양쪽의 장점을 취할 것입니다. 적어도 1968년 이후에는 한 가지 분명해졌습니다. 그 당시의 또 하나의 인기 있는 낙서의 말대로, "Ceux qui font les révolutions à moitié ne font que se creuser un tombeau", 혁명을 할 때에 반쪽만 가는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무덤을 팔 뿐이라는 점입니다. 체제와의 그 어떤 타협도 궁극적으로 "무덤", 우리의 경험으로 본다면 1980년대의 반동과 신자유주의의 도입 등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혁명을 끝까지 끌고 가자면 좌파는 대단히 대중적이고 대단히 포괄적이고 대단히 잘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협을 하지 않고 끝까지 갈 용기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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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0099.html
[박노자 칼럼] 사회적 타살의 일상성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2.02.21 19:28)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려는 이들이 늘 집중 공격하는 것은 농업 집단화나 숙청 때와 같은 대규모 국가폭력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스탈린주의를 변호할 수는 없다. 혁명적 열기가 식어가고 정치판이 보수화하는 가운데 초고속 공업화라는 어마어마한 과제를 안게 된 국가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총동원 체제를 구축한 것이고, 그 어떤 총동원 체제도 폭력 없이 가동될 수 없다. 물론 스탈린 사망 당시의 소련 총인구 대비 ‘수용소 군도’의 인구 비율(약 1%)은 오늘날 미국에서의 수인(囚人) 인구 비율(약 0.7%)보다 약간 높은 정도이긴 해도, 이것 역시 변명거리는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야만을 근절하겠다는 체제가 결국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감옥을 하층민들의 ‘순치’와 노동착취를 위해 이용했다면, 사회주의적 간판과 이 체제의 본질이 서로 맞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국가폭력을 이야기하자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쳐선 안 된다. 북한과 같이 군사적 대립이 늘 첨예한 일부 경우만 제외하면, 대부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느 정도 공업화에 성공한 뒤로는 민중의 불만을 인식하여 국가폭력의 남용을 자제했다. 예컨대 소련의 경우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일체 양심수들이 석방됐을 때 석방 대상자들은 2억7000만명 인구의 나라에서 약 280명에 불과했다. 즉, 소련은 몰락하기도 전에 대내적으로 반대자에 대한 물리적인 국가폭력의 사용을 최소화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국가폭력은 사회의 성숙과 함께 수그러들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덜 폭력적으로 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형태의 대외적인 국가폭력은 여전한데,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대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체제를 뒤엎어버릴 것 같았던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의 베트남 침략 반대 시위와, 그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구미권에서의 오늘날 아프간 전쟁 반대 운동을 과연 비교라도 할 수 있을까? 한국도 아프간에 파병한 나라 중 하나지만, 진보계 안에서조차도 침략 방조행위인 아프간 파병은 거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체제의 폭력성이란 꼭 국가의 적극적인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보다도, 자본과 국가가 소극적으로 유기한 (또는 그 본질상 처음부터 다할 리도 없는) 사회적 책임은 더 많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죽일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인간이란 잉여가치 수취의 도구에 불과하다. ‘쓸모 있는’ 도구라면 국가는 그 종전의 이데올로기를 고치면서까지 배려하는 척이라도 한다. 120만명의 국내 외국계 인구는 농촌인구의 재생산이나 중소기업들의 경제성 유지에 필수불가결하니까 2000년대 초에 ‘단일민족’과 같이 오랜 이념이 정부에서 용도폐기되고 적어도 형식상으로 ‘다문화주의’로 전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쓸모없는 도구’가 돼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체제는 모든 책임을 다 유기할 뿐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중에서는 이미 21명이 자살이나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질환으로 비명에 사망했지만, 과연 정부나 쌍용자동차 자본이 대책다운 대책을 세워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나이가 40~50이 되고 ‘강성노조’ 이미지가 강해 취직전선에서 기피 대상 1호가 돼버린 늙고 병든 실직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주류로부터 그 어떤 관심도 끌지 못한 채 그저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노조에 가입되었던 노동자들의 죽음은 노동계 안에서라도 동감과 연대의식을 유발하지만,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쓸모없는 도구’의 죽음은 아예 흔적도 없이 묻혀버리고 만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세계 최고이며 일본·미국의 4~5배 정도인데, 해마다 가난과 멸시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5000~6000명의 노인들에 대해서 이 사회가 약간이라도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스탈린주의 체제와도 비교

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살인성은 민중의 위력적인 압력에 의해서만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다. 계급의식과 조직성이 낮은 우리나라 민중들이 그러한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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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6830.html
[박노자 칼럼] 한국 자본의 ‘통념’, 인종주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2.01.31 16:29)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여주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장면들은 필자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혹서의 미국 남부 여름에, 뙤약볕에 땀을 흘리는 흑인 노예, 그리고 채찍으로 그들을 위협하면서 “야, 이놈들아, 해는 아직 지지 않았으니 열심히들 하라”고 고함을 지르는 백인 지배인…. 소련 텔레비전에서 이와 같은 영화들을 ‘제국주의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보여주었는데, 필자 또한 이 장면이 현재와는 무관하다고 믿으면서 자랐다. 대한민국이 앞장서는 요즘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착취의 지구화’ 현상을 알게 되고서야 인종주의적이며 폭력적인 노동자 혹사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열대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수백명의, 주로 피부색이 가무스름한 인디언 계통의 젊은 여성들은 방직 작업에 열중한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 걸기조차 무섭다. ‘잡담’하다가 걸리면 한국인 관리자가 와서 머리를 마구 때리거나 적어도 폭언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체벌을 당하면 악취 나는 화장실로 도망가듯이 가서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화장실을 자주 다닌다고, 한국인 관리자가 면박 주거나 또 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보통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고함 지른다. 그러나 이러다가 ‘빨리빨리’와 ‘개새끼’ 등 일부 단어들을 가무스름한 피부의 모든 노동자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위의 이야기는 한 인권활동가가 묘사한 1980년대 말 과테말라 한국계 방직회사의 일상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국내에서 과거와 같은 마구잡이 임금착취가 어려워지자 방직업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친한적인’ 극우정권이 다스리는 과테말라와 같은 나라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과테말라에서 제1위 투자국가였는데, 그 ‘성공’의 이면에 피부색이 검은 인디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적인 혹사와 일상화된 체벌·폭력이 있었다. 한국계 공장에서의 폭력이 어느 정도 심했기에 한국과 과테말라 양쪽 정권의 ‘기둥서방’ 격인 미국의 국무부마저도 결국 ‘조사’를 해야 할 정도였을까? 한국 기업들에 의한 폭력과 초과착취, 군사주의적 노동자 통제의 ‘해외수출’의 효시 중 하나였던 과테말라 투자 붐은 결국 중국과 베트남의 부상으로 끝났지만, 한 가지는 바뀌지 않았다. 백인이 아닌, 특히 피부색이 까만 외국 노동자에 대한 끝이 없는 인격적 무시와 끔찍한 폭력의 연속, 즉 살인적 인종주의다.
물론 한국 기업의 착취와 부당노동행위의 일차적 피해자는 누구보다도 국내 노동자들이다. 또한 백인 노동자라고 해서 이윤추구에 눈이 먼 국내 자본가들로부터 각종 권리침해를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한국 학원업자들의 영어 원어민 강사(주로 미국 등 국적의 백인)에 대한 임금체불, 잔업강요, 퇴직금 지급 거부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는 이미 국제적으로 문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나 백인에 대해서는 적어도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노예취급’ 하듯이 대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검둥이’, 피부색이 가무스름한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다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12월호에서 보도된 한국 참치배에서의 인도네시아 선원에 대한 상습적 가혹행위 등의 만행은 예외라기보다는 다반사에 가깝다. 한국 기업의 착취 대상이 된 피부색이 까만 사람은 언제나 폭력이나 폭언을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는 인종주의 관련 논의의 초점은 국내 거주 동남아인이나 흑인 등에 대한 몰상식한 일부 일반인의 모욕 등에 맞추어져 있다. 서민들까지 지배자들의 ‘통념’을 그대로 배우는 것도 물론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미국식 ‘인종 질서’를 그대로 익혀 인종주의를 착취의 무기로 삼는 한국 자본가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피부색이 다른 사람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가 어려운 곳 중 하나로 만들었다. 과연 우리들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정신으로 그들의 ‘통념’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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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12
"반미는 '공기'처럼 필요하다" (레디앙, 2012년 01월 20일 (금) 10:21:01 박노자 / 오슬로대)
미, 이란 원유수입 감축 요구와 한국의 집권 노예 계급들
어렸을 때에 배운 역사교과서에서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되는 한 가지 사진이 있었습니다. 1917년10월 혁명 이후에, 평생 최초로 글을 배우기 시작한 농민 부인들은 칠판에 쓰여진 대로 공책에다가 잘 따르지 않는 손으로 어렵게 어렵게 씁니다: "우리들은 노예가 아니다. 노예는 우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는 소련 정권 초기의 최초의 교과서 중의 하나인 <문맹 타도. 성인용 자모 교과서> (Долой неграмотность: Букварь для взрослых, 1919)에서 따온 문구였지요.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 그 사진이야 나올 리가 없지만, 인터넷에서 그 사진을 만날 때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비록 그 때의 해방은 몇 년 가지 않아 결국 스탈린주의적 관료체제는 봉기를 단행한 인민으로부터 그 자유의 상당 부분을 회수(?)해버리고 말았지만, 그 순간이 엄연히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기억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1945년 8월 이후의 조선 각지에서의 인민위원회 설립 등 일시적인 '직접적 인민 민주주의' 출현이나 1946년 10월 항쟁, 지리산 등지에서의 빨치산 투쟁에 대한 기억들은 한반도 남반부 민중들에게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그러한 기억을 가진 인민들을, 잠시 다시 노예화시킬 수 있어도, 노예 상태를 벗어나려는 그 의지들을 완전히 꺾을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요즘 국내 소식을 듣노라면 아무래도 지금의 우리 상태는 집단적 노예상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예컨대 최근 이란산 원유 수입 감축에 대한 소식을 생각해보시지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란을 경제적으로 질식사시키려는 상전나라에서 후국(侯國) 한국에다가 "50%로 이란산 원유수입을 줄여라!"라고 엄명(?)을 내리고, 천자의 혜명(惠命)을 받들어 모시는 남조선후(南朝鮮侯) 명박(明博) 전하의 장상(將相)들은 "천자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만, 저희 살림살이의 어려움을 돌봐주셔업소서, 부디 30%만 줄이도록 은혜로운 명령을 다시 고쳐내려옵서소"라고 천사(天使: 천자의 사절) 앞에서 무릎을 꿇어 읍소하는 꼴입니다.
남조선 후왕 (侯王)의 뛰어난 충성에 힘입어, 천자의 사절은 이제 보다 덩치 큰 후국 일본에 가서 역시 "이란에 대한 경제적 토벌에의 동참"을 비슷한 방식으로 명령할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한 나라의 국가적 독립성이나 자주성은 물론 그 나라의 여권을 갖고 사는 모든 시민들의 개인적 자존감까지도 완전히 뭉개버리고 마는 이 소식은, 국내 매체들은 대개 "경제뉴스"로 다루어주었습니다.
경제보다 훨씬 더 일차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이 관계되는 일이지만, 이미 주인님과의 명령/복종 관계에 익숙해진 노예들에게는 그 관계틀 속에서는 돈밖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왜 개인적 자존감의 문제인가요?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데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긍을 하고, 자존의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 (1759-1796)의 명시 "사람은 사람이다, 등등"에서 이야기하듯이, "정직한 가난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자는 그저 비겁한 노예, 우리는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 용기가 있다 등등" 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 제국의 "이란 고사 작전"에 동참하는 이상, 우리는 더이상 "정직하다"고 자긍할 수 없습니다. 미 제국이 이란에 대해 별의별 경제 제재를 하고, 이스라엘의 모사드라는 첩보조직과 협동해 벌써 이란 핵과학자 4명의 목숨을 테러적 방법으로 빼앗고, 나아가서 아예 이란과의 전면전이라도 벌이려고 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란 국회를 보시면 여성 의원 아홉 명 정도 보이지만, 미국과 함께 이란 공격을 준비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국회는 물론 없고 여성의 정치적 진출을 아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란의 우파적인 신정(神政) 독재는 여성 등 여러 약자 집단들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지, 지원하는 사우디 등등의 걸프 지역의 보수적 왕국에서는 이란과 같은, 전체 대학생 중에서 여성이 65%나 차지하는 역동적 사회를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거죠.
핵 폭탄 제조의 위험? 핑계에 불과합니다. 중동 유일의 진짜 핵무장은 바로 미국의 "우방 이상의 우방" 이스라엘이 갖고 있으며, 대다수의 객관적인 관찰자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란은 아직도 핵폭탄 제조 수준 가까이도 못갔습니다. 간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나요? 파키스탄에 핵무기가 있다고 해서 주변 지역의 지정학적 지도는 과연 크게 바뀌었나요?
진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북조선이나 시리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란은 미 제국의 후국이 되려 하지 않거나 될 수 없는 나라들의 그룹에 속합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은 실제로 종교적 보수주의 방향으로 가고 인민들의 많은 기대들을 배반했지만, 그 혁명의 결과로 그나마 대외적인 자율성 정도는 따낼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미국 집권자들의 눈엣가시가 되고, 혁명의 "혁"자만 봐도 벌써 겁과 증오에 치를 떠는 사우디와 같은 나라들의 지배자들을 자극시킵니다. 이란이 혁명을 거친, 자원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국가적 통제를 확립시킨 나라이기에 그 유전을 싼 값에 임대해 그 자원을 더이상 쉽게 약탈할 수 없게 된 유럽 열강들도 기본적으로 이란을 회의적으로 보고, 미 제국의 반(反)이란 책동에 아주 쉽게, 비교적으로 지율적으로 동참합니다.
예컨대 과거에 이란을 반(半)식민화시킨 영국 같으면 그러한 동참은 자연스럽기까지 하죠. 그런데 한국은 영국과 같은 식민주의 침략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영국과 달리 이란 혁명으로 그 자원 약탈의 기회를 잃은 것도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시민 대다수가 공유하는, 일제시절에 대한 집단 기억에 기반을 두는 반(反)식민주의적 정서로 봐서는, 이란혁명의 성과에 박수갈채라도 보낼 부분들은 많고, 굳이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에너지집약적 제조업 국가 한국의 특징상 이란과 차후 아주 긴밀히 협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같은 피해자 대열에 속한다는 역사적인 동류의식이나, 미 제국의 전횡과 범죄(여태까지 4명의 이란 핵물리학자를 암살시킨 것은 분명히 국제범죄입니다!)에 대한 도덕적 분노 등을 다 나몰라라 하는 우리 후국은, 미 제국의 공범으로 아주 아주 쉽게 나서는 것입니다. 한국 여권을 갖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 아무래도 자존심은 좀 상하지 않으십니까?
1980년대식, 단순한 "양키여, 물러가라! 통일하자!"식의 반미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있습니다. 남북한 양쪽 지배자들부터 시작해서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부터 문제죠. 통일문제보다 계급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돼야 된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이와 같은 단순한, 감상적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형태는 아니더라도, 노예상태에 묶여 있는 우리에게는 "반미"는 공기처럼 필요합니다. 미 제국의 국제범죄에 공범으로 나서게 되는 만큼,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인간적 본성, 기본적 자존부터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주인님들의 요구가 어디까지일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문제죠. 정말 미 제국이 이란을 침략하게 된다면 또 파병을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또 거기에 가서도 제국의 총알받이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반미는 공기, 물처럼 필요한 것이고, 또 한국이 미 제국과 적당히 거리를 두자면 현실적으로 수많은 방편들은 있습니다. 남북 공동 군축으로 주한, 주일 미군의 주둔 명분부터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또 중국과의 안보차원 협조를 토의해, 미군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중-북-남의 공동안보협력의 시대를 향해서 적어도 한두 걸음을 걸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 같으면, 아주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양쪽의 영세중립과 한반도에서의 일체 외국군 철수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방향"입니다. 문제는, 노예화가 지나친 나머지 오웰의 말대로 "노예상태는 바로 자유"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한국의 지배층이죠.
"오렌지 발음"으로 한반도 "원주민"들을 줄세우고 계급으로 나누는 저들은, 상국(上國)으로부터 그렇게 쉽게 떨어져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오렌지 발음"이 별로 좋지 않은 가난한 "원주민"들을 주인님들에게 총알받이로 계속 공급하려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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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이 민주주의 국가라고요? (레디앙, 2012년 01월 13일 (금) 10:47:22 박노자 / 오슬로대)
"송경동, 정진우 구속은 70년대식 전체주의 회귀 현상"
노르웨이 기자들은 (북한이) "스탈린주의의 유교적 변형은 아니냐"고 묻곤 하지만, 군사화의 정도나 "유일사상" 강조는 예컨대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미-일-한 침략적 블록으로부터의 위협이 실제로 엄연히 존재하고, 또 (억압적 기구의 역할은 물론 없는 건 아니지만) 정권의 선군정책의 명분이 되는 제국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적 태세는 실제로 대다수에게 내면화돼 있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공업화 방식과 행정적 기술과 함께 전근대적인 통치 이데올로기 등을 동시 이용하는 반제적 성격의, 군사주의적 요소가 강한 대중 (합의) 독재" 정도면 어느 정도 객관적이다 싶은 정의가 될듯한데, 너무 길죠? 그런데, 조선반도의 근현대사가 복잡한 만큼, 그것보다 더 짧게 정의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조선보다 어쩌면 남한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기가 더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라고요? "가카"가 손수 라면 값 등등을 "잡아주는" 쇼를 벌이고, 이와 동시에 소비자 물가 앙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율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필요성대로 조정해주는 나라가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다는)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저는 화성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쪽으로 보면 비정규직 양산이나 저임금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의 경향적 저하, 중간 규모 근로소득자와 중소 자영업자 계층(중산층)의 경향적인 축소 등으로 봐서는, "신자유주의 국가"는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단, 이와 함께 국가가 주요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챙겨주는 "재벌국가형 중상주의" 같은 측면도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재벌국가형 중상주의의 결합"일 터인데, 신자유주의로도 (노동자 이해관계를 배제하는) 중상주의로도 고통을 받는 민중을 도대체 어떻게 해서 통제를 한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한 가지를 꼭 첨가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독특한 기업국가형 중상주의를 겸비하는 규율국가"라고 해서, 이 "규율 국가"에다가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아니면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휴대폰과 자동차의 부품들을,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길고 가장 산재 위험이 많고 가장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공장에서 만드는 노동자들이, 노르웨이 나들이를 좋아하는 그 "사장님"들을 그냥 린치해버리지 않고 아직도 계속 참고 견디는 것은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불가피하게 쌓여가는 불만의 폭발을, 이 체제는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잘 예방합니다.
실제 "내면의 규율화"가 없으면 남한이라는 자본주의형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그저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대통령까지도 "쥐박이"라고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자유의 낙토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병역거부를 하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계속 감옥행해서 세계의 수감중인 병역거부자들의 95%(!)를 차지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여러분들께서 남한에서 용감하게도 미국 상전들의 언어를 (의무교육 교정 이외에) 달달 외우기를 거부한 "영어 거부자"를 한 명이라도 보셨나요?
돈이 없어서 "내지어"(?)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돈이 있어도 식민모국 언어에 대한 거부의사를 자유로이 실천한 경우를 보셨습니까? 대학입학을 거부한 몇 명의 용감한 젊은이들을 제가 요즘 인터넷상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과연 그런, 매우 상식적인 운동들은 남한에서 보편화될 수 있을까요? 고문실과 양심수 구속의, 유신정권식의 전체주의는 이미 상당 부분 가긴 갔지만, 남한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력들은 실로 "소프트한" 전체주의 수준입니다.
그러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돈 들여 주인님들의 언어를 배울 만한 집안 사정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관리자 욕설을 들어가면서 주차장 관리요원과 편의점 알바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미리 겁을 먹는 아이들은, 과연 더 커서 반란을 일으켜 착취공장들을 쳐부쉴 위험은 클까요? 우리는 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노예화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삼성과 현대의 대주주들이 별 근심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돈벌이할 수 있는 기반이죠.
"중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겸비하는, 전체주의적 요소가 강한 규율국가" 남한....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대다수의 인구가 일찌감치 순응주의자로 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에서는, 관리자들은 늘 70년대식 "고전적인 전체주의"를 재도입할 "유혹" (?)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하는" 몇 명의 반대자들을 본보기 삼아 감옥에 쳐넣어도 사회에서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날 일은 없거든요.
예컨대 최근의 사회당 당원 박정근 동지의 구속 사건을 보시지요. "조선로동당 반대" 입장에 확고히 서는 사회주의 정당 당원이 북조선 어투를 패러디 재료(?)로 삼아 몇 개의 트위트를 날리더니 금새 "찬양고무자"가 되어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안당국이 사회당이 북조선을 철저하게 비판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 알면서 또 다른 "까부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저 국가보안법을 악용을 해서 정권의 비판자를 물리적으로 탄압한 것이죠. 그렇게 해도 대다수가 그저 침묵만 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쓰는, 경제동물화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인님"들에게 부담도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70년대식 전체주의로의 회귀" 현상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최근의 송경동, 정진우 등 "희망버스" 조직자의 구속입니다. 알 사람은 다 알지만, 그들이 조직한 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사상 아마도 가장 평화적이었습니다.
상당 부분 아이를 대동하고 부산에 오는 "희망버스" 승객들은, 화염병이나 돌에 호소하지 않는 건 물론 몸싸움까지도 피하려는 경우가 대다수이었죠. 비폭력적이었던 만큼 이 운동은 잘 대중화돼 결국 성공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송경동시인과 정진우 동지가 감옥에 가게 된 이유죠. 그들은 너무나 성공적으로 평화 지향적이었다고 해서요.
이게 전체주의가 아니고 민주국가라고요? 남한을 보고 "북조선보다 그래도 우월한 민주적 체제"라고 주장하시는 진중권 류의 리버럴 분들께서, 이 장면을 보고 약간이라도 반성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나라가 민주국가라면, 오웰의 말대로 "노예상태는 바로 자유"죠.
"진짜" 전체주의, 양심수 다수를 양산하는, 그런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방지하려면,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있지 않는" 일이죠. 트위터로든 블로그 포스트로든 매체 기고문이든 시위로든 모든 가능한 표현 방식들을 다 동원해서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동지를 비롯한 여러 양심수들을 석방하라고 고집스럽게 요구하는 일부터 하는 게 가장 쉽고 일반적인 방법이겠습니다.
그 다음에, 금년에 총선, 대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심수 석방에 대한 입장을 특정 정당 지지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이 정당은 비(非)민중적인 것은 물론 아예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 정당도 아니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제일 근본적인 대책은 노동자들의 조직화, 그리고 노조들의 전투화, 급진화입니다. 노동운동이 그 고립을 극복하고 급진화돼야 노동운동가들의 구속은 정권으로서 훨씬 더 부담될 것입니다. 결국 급진화된 노동운동과 급진적인 민중 정당만이 이 체제 전체를 한 번 근본적으로 흔들 수라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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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푸틴의 러시아: ‘마피아 국가’의 말로?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20112 19:05)
경제성장을 주된 목표로 삼아온 남한에서 태어나고 사는 주민들의 특징이겠지만, 우리에게 국가는 적어도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존재로 쉽게 인식된다. 즉, ‘정상적인’ 국가라면 ‘발전’을 목표로 할 것이고,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 및 수출을 장려할 것이라고,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이 전제는 오랫동안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해야 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주로 기술집약적 제조업 제품들의 수출로 자본의 이윤을 벌어야 하는 남한이라는 국가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지, 세계사의 보편적 규칙이라고 하기 어렵다. 1997년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성격도 띠게 됐지만, 남한은 근본적으로 산업자본의 이익 극대화에 중점을 두는 신(新)중상주의적 국가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보다 세계체제의 주변부나 준주변부에서 더 흔한 국가의 유형은 ‘약탈국가’다. 약탈국가에서 집권 관료는 특히 매장자원의 수출 등으로 지대를 올리는 반면, 다수의 평민은 만성적 빈곤에 허덕인다. 외형적인 민주국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약탈국가들은 독재 내지 준독재일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경우에는 집권 관료층이 조직범죄와 결합되거나 ‘조폭적인’ 방법들을 통치에 이용한다.
지난번에 ‘위키리크스’에서 “마피아 국가”로 명명된 옐친이나 푸틴의 러시아는, 위의 약탈국가 정의에 거의 그대로 부합된다. 지난 12월에 세계를 놀라게 한 모스크바 등지에서의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바로 이와 같은 약탈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피로와 불만의 수준을 보여준다. 실은, 1993년에 옐친이 탱크 대포로 국회를 파괴한 이후로는 러시아에서의 거의 모든 선거들은 부정선거였다. 이제 와서야 유권자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시작한 이유는, 매장자원의 수출에 의존하는 약탈국가의 허약함이 세계공황의 질풍노도에 의해서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1년 내내 러시아 주민들의 평균적 실질 소득은 거의 오르지 않았으며, 자원에 대한 수요를 깎는 공황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그 소득이 당분간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자본의 러시아라는 약탈국가가 소련 시절부터 이어받은 기술, 교육, 의료 인프라 상태는 가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2011년 말에 러시아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러시아를 약탈국가로 정의하면 많은 이들이 반대할지도 모른다. 2000년대 내내 경제가 고속성장한 이른바 ‘브릭스’ 국가이며 아직도 나로호에 기술을 제공할 정도로 우주항공 등 일부 부문에서 세계적 기술 수준을 유지하는 나라가 과연 약탈국가일 수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점차 기술집약적 제품 수출로 옮기는 등 세계 자본주의의 먹이사슬에서 2000년대에 꾸준히 상승 이동해온 중국과 달리, 러시아의 높은 성장률은 거의 전적으로 매장자원 가격 폭등에 의존했다. 러시아 수출에서의 기계 등 기술집약적 자본재 비율은 2003~2008년 사이에 9%에서 4%로 내려갔으며, 이후에도 계속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 기계생산량은 소련 말기의 40% 정도에 불과하고, 그 기술적 수준은 갈수록 떨어져 간다. 이와 같은 퇴락의 이유는 자명하다. 자원 수출의 길에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국내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을 고사시킬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몰아붙인 푸틴 정권은 석유와 가스 장사로 단기간 떼돈을 벌 생각만 하지, 다수에 이득이 될 나라의 장기적 발전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고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 집권 관료들은 나로호 프로젝트에 제공되는 옛 소련의 기술을 이용할 줄 알지만, 소련 유산을 약탈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바로 이 점은 특히 정보력이 빠른 도심의 젊은 중산층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분노의 원천이 된다.
성난 민심에 푸틴 정권이 머지않아 무너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탈국가의 성격이 당장 바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재(再)국유화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요소의 재도입, 민중의 저항에 따르는 민주화와 관료층의 대대적 물갈이 등이 없으면 러시아에 그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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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성한다" (레디앙, 2012년 01월 07일 (토) 00:57:01 박노자 / 오슬로대)
"분당 긍정한 것 책망…자주파 대한 이해, 관용 부족"
자본주의가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에 한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의 좌파가 자본주의적 시장지상주의가 추락한 그 만큼의 "세 확장", 그 만큼의 성장을 하지 못한 이유들이 객관적인 현실에도 있지만, 또 동시에 분명히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을 치열하게 해야 좌파라고 누구에게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반성이 있어야 좌파는 좌파답게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고, 반성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나가는 만큼 결국 폐쇄적인 섹트로 전락할 위험은 큽니다. 반성의 주제들을 거칠게나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소련의 망국은 분명히 역사 희대의 비극이었습니다. 1989년과 1997년 사이에 러시아만 해도 1천명 당 사망률이 9명에서 16명으로 폭등해, 1980년대에 비해 약 3백만 명이 "추가적으로" 죽은 셈이었습니다. 영양실조와 알콜, 마약 중독, 각종 범죄, 체첸 독립운동에 대한 무력진압과 학살 등등으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 극소수의 관료와 관제 재벌, 정상배들이 구소련의 자원과 공장을 "사유화"(약탈)한 것이고, 기생적이고 극도로 폭력적, 반민중적 "신흥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 비해서야, 후기의 소련도 거의 낙원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과연 소련이나 동구라파 국가들의 망국/체제변환은 "사회주의 사망 신고"이었을까요? 푸틴의 마피아 자본주의에 비해서야 당연히 민중으로서 살 만한 사회이었지만, 스탈린 시절의 보수화와 혁명가들의 숙청, 관료화를 거친 그 사회는 이미 거의 이렇다 할만한 혁명성을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성을 그대로 어느 정도 여전히 보유하는 쿠바와 같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은, 소련과 달리 망하지도 않았으며 망할 일도 없습니다. 스탈린 시기 이후의 소련의 사회적 체질로 봐서는, 고급 관료들이 약탈적 자본가로 변신해 "사유화"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의 문제이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패망"이라기보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궁극적인 "한 주기의 완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혁명 이전의 자본에 대한 사유제가 부활됐으니 "원점"으로 다시 온 셈이죠. 그런데 일국화된 뒤에 고립화, 관료화돼, 결국 변질되어 이렇게 자기부정된 러시아 혁명은 "원점"으로 귀환될 수 있어도, 이는 사회주의라는 세계적 이념의 패망을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할 수도 없습니다.
소련의 패망을 "사회주의의 패망"으로 간주한 것은 분명 근거없는 패배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이 패배주의는 특히 1990년대에 국내 좌파를 황폐화시키고, "포스트 바람" 등 각종의 기형적인 현상들을 일으킨 것입니다. 역사를 긴 안목으로 봐야 할 좌파는, 왜 그렇게도 근시안적이었을까요?
2.
소련이나 북조선은 분명히 우리가 꿈꾸는 "사회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사회들입니다. 혁명의 점차적인 제도화, 관료화 과정도 있었지만, 아무리 혁명적 열정이 남는다 해도, 미제나 서유럽, 일본, 남한과의 같은 굴지의 야수들로부터 방어하느라고 국내총생산 20~25% 정도를 무의미한 "국방"에 써야 하는, 각종의 무역 제한으로 말미암아 최신의 기술에의 접근이 많이 차단돼 있는 (준)주변부 사회들은, 사람들이 조금씩만 일하고도 각자의 자유로운 자기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공산주의적 낙토로 고립된 채 발전되기가 아주 힘듭니다.
그 엄청난 자원과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소련마저도 결국 대다수의 인민들에게 약간의 여유만 있는 상대적 빈곤을 선사해야 했으며, 자원은 훨씬 없는데다가 국방비 비중이 훨씬 더 높고 고립이 훨씬 더 심각한 북조선은 비극적이게도 식량문제마저도 안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일국적 현상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어야 하는 것이고, 지금 핵심부가 보유하는 기술력 이상의 생산력 수준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 즉 매일매일 사람을 파김치로 만드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가 하루에 2~3시간씩 사회적 노동을 한 뒤에 시를 쓰거나 산책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랑을 나누는 등 말 그대로 모두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담보할 개인의 자기실현에 몰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되라고, 야수나 언제 간섭할지 모를 강대국에 둘러쌓인 동북아의 최빈국에 요구하는 건 분명 무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련이나 북조선의 현실은 우리 이상과 많이 다르더라도, 그 현실을 여러 가지 이유로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려운 여러 분파들의 진보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과연 그렇게까지 배타적으로 대할 필요는 있었을까요? 2008년 이전의 구 민노당의 민족주의자/자주파들은 북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계급문제를 등한시한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좌파는 정말 그들과의 타협의 여지도 없이 선을 그어야만 했을까요? 분당은 불가피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최선이었을까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좌파가 떠난 민노당이 유시민 류의 부르주아 정객들의 들러리가 돼버린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부르주아 정객들의 손을 머뭇거림없이 잡아주는 것은 분명 민족주의자/자주파들의 엄청난 오판이고, 그들의 어떤 근본적인 판단 오류를 보여주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좌파는 같은 당 안에서 남았다면 민족주의자/자주파들을 견제하여 그들의 이와 같은 치명적인 오류들을 예방할 수라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미 과거의 일이라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그 때에 분당을 긍정한 제 자신의 언행을 저는 지금 책망하고 싶습니다. 잔류 만노당이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의 늪으로 빠지고 만 지금으로서야 진보신당의 독자적인 강화, 진정한 계급 정당으로서의 대중화 등이 유일한 선택이지만, 4년 전의 일은 많은 면에서 후회스럽게 느껴집니다.
3.
산업화된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오래동안 일하고, 비정규직들이 가장 많은 나라에서는, 절실한 계급문제 대신에 다소 관념화돼 있는 "민족" 문제를 앞세우고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히 좌파가 할 일은 아닙니다.
노동자들에게 지옥뿐인 야수 남한의 주도로 "통일"이 되는 것은 잘못하면 북조선 민중들에게 대재앙이 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결국 남한과의 평화 공존 체제 속에서 북조선이 독립적으로 발전돼 가는 가운데 지금 중국이나 월남 민중이 파업 등을 통해서 하듯이 북조선 민중들도 그 통치층들에게 사회적 정의 구현을 요구해가면서 그 자율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마도 민중 본위로 사고되어지는 "통일" 문제의 당분간의 최선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좌우간, 좌파의 "통일" 논의 기조에는 추상적인 "민족"이 아닌 구체적인 노동계급의 권리와 복지, 독립적 역량 강화가 깔려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자주파의 "통일지상주의" 등의 오류에 위와 같이 반대해도, 미제에 의해서 군사보호령이 되고 만 나라에서 지식인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민족주의적 울분을 십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군사적 점령에다가 요즘 매판적 성격이 아주 강한 남한의 지배엘리트들이 영어를 모든 사회적 진출, 신분상승의 기분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사실 많은 이들에게 그저 민족적 모욕감만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좌파가 반대해야 할 것은 영어를 쓰는 나라들의 민중이 아니고 남한을 비롯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배자들이지만, 좌우간 한반도의 식민지적 과거까지 생각하면 계급 문제들이 "민족적으로" 오해될 소지들은 여기에서는 많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자/자주파들과 보다 진지하게 논쟁해서, 적어도 그들을 인간적으로라도 이해해주어야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한 저는, 지금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합니다.
민족주의적 등의 오류들을 당연 "오류"라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좌파에게는 독선이 아닌 이해와 관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속단 대신에 장기적인 역사적 비전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장기적 시각과 이해력, 관용이 부족했던 데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 같은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을 것을 인제 자신에게 서약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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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 (2011년)

 

아이들을 죽이는 사회 (레디앙, 2011년 12월 30일 (금) 10:06:06 박노자 / 오슬로대)
학교폭력, 남한과 소련의 경우…견디게 하는 힘의 차이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대통령을 아키히로(明博)에서 유시민 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로 교체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쉬울 수가 있어도, 수십만 내지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가해자들을 뉘우치게 하여 가해/피해 관계를 풀어주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라는 점입니다. 아이들 사이의 가해/피해 관계는 이 정신병적 체제의 병리적인 본질과 직결돼 있는 만큼, 그 어떤 사회적 "약"으로도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술"은 필요합니다. 김영삼 옹의 1996년 "학교폭력 추방" 켐페인부터 지금까지 집권 정치꾼들이 학교에서의 죽음의 행렬을 멈추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정치적 자본을 꾸준히 축적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제로입니다. 남한 같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죽음들을 멈추는 것은, 고문실에서 고문 피해자의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게 하는 일 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갈비뼈를 보호하자면 일단 고문실 자체를 철폐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리도 같은 논리로 봐야 할 듯합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착취 아니면 빈곤이나 군사화 등으로 물들여진 모든 사회들에서는 아이들이 폭력화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니까요. 제가 성장했던 구소련 같으면 남한과 같은 개념의 착취(개인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 수취)는 없었지만, 상대적 빈곤과 군사화, 그리고 간부층과 일반인 사이의 권력 향유 내지 생활수준 차이가 있었으며, 그만큼은 아이 사회의 폭력도 없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고 제가 무수히 많이 본 다른 완력이 약한 폭력 피해자들도 그랬지만, 자살할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힘의 관계"에서 약자로 몰리는 만큼 오기 같은 게 생겨 책을 더 열심히 읽고 취미 동아리에 더 열심히 다녀 커서 사회주의 조국의 좋은 과학 일꾼이 되어 당과 인민들을 위해서 잘 일할 꿈을 더 열심히 꾸었습니다.
저나 그 당시에 저와 같은 처지에 몰렸던 다른 폭력 피해자(그 중의 상당수는 유대인 내지 독일인 등 민족 출신 성분이 불리해 당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들이 특별히 마음이 강해서 그랬던 것인가요? 그게 전혀 아니고 객관적인 현실에 힘입어 폭력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는 많은 면에서 전통사회의 민중 공동체 기풍을 이어받는 것인데, 폭력이라는 차원도 그렇습니다. 러시아의 전통적 시골 같으면 농민 아이들끼리의 싸움은 많은데, 패배하는 쪽에서 피를 흘리자마자 바로 멈추는 게 불문율입니다. 한 어린이가 일찌감치 불구자가 되어서 공동체 전체가 인력을 잃고 인화를 해치면 안되니까 일종의 안보이는 "안전 장치"가 있는 거죠.
소련 학교에서 똑같은 불문율이 적용돼 아무리 폭력이 있다 해도 예컨대 몸이 심하게 다칠 확률은 거의 없었습니다. 또, 학교 역시 "공동체"이었던 만큼 폭력이 발생되자마자 누군가가 이를 꼭 말리는 등 "사회"의 긍정적인 영향력은 늘 실감됐습니다. 폭력 희생자는 "혼자" 아니었다는 거죠.
학교 폭력에서 계급적인 "보상" 차원은 역역해서, 그걸 "사회적 정의" 차원에서 피해자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가해 학생들의 대부분은 집안 학력이 짧은 육체 노동자 자손들이었고, 피해 학생은 대개 인테리 가정 출신들이었습니다.
학교는 아무리 폭력적이라 해도, 피해자에게 여유 시간이나 가정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2시면 끝나는 거고, 그 다음에 마음껏 도서관 책들이 빌려보고 즐길 수 있었던 거고, 부모의 손을 잡아 박물관, 명승지, 자연 탐방이나 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4~5시면 집에 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아이들과 놀 여유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학교 폭력이라는 부분은 어린 인생의 "다"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면, 위에서 열거한 "폭력 피해자 자살 충동 방지 요인"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남한의 어린이, 청소년의 삶은 어떻게 보이나요? 우리에게 폭력을 그나마 완화라도 시킬 수 있는 공동체 전통이라도 남아 있나요? 북조선 같으면 아주 많이 남아 있는데, 남한은요?
실은 아이의 신체를 부모 몸의 연장으로 보고 그 신체의 훼손을 불효로 간주하는 유교 논리는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젊은이들의 폭력성을 억제시키는 기능을 맡았습니다. 유교의 긍정적 차원이라면 대체로 그런 것이지만, 우리는 유교의 부정적인 유산, 즉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같은, 빨리 소각해야 할 과거의 쓰레기 이외에 유교로부터 이어받은 게 있나요?
급우가 폭력 당하는 것을 보면 이를 바로 말릴 정도의 공동체적 "집단 무의식"은 우리에게 남아 있나요? 어른 사회에서 지난 2년 동안 쌍차 해고자 19명이나 사회적 타살을 당한 것을 보고도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절대 다수가 방관만 하고 있는데, 과연 이 "방관자들의 사회"를 보고 어린 아이들이 뭘 배워야 하나요?
약자 가정 출신의 아이가 여러 모로 억울함을 갖고 있어 약간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고 포용해줄 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계급적 차별에 민감한가요? 그랬다면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폭력 천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한 아이들이 2시에 귀가해서 학교에서의 일을 잊고 독서나 취미활동에 매진할 수 있나요?
맞교대, 특근, 연장근무 등등에 지칠대로 지쳐 맨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대다수 서민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매일 바깥에 가서 자연탐방할 기력은 남아 있나요?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은 뻔하죠. 어른의 삶도 어린이의 삶도 장시간 고강도 노동의 지옥이 된 사회에서는, 폭력도 악질화되고 폭력의 피해도 극대화됩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르들을 보고 배울 뿐입니다. 군에서의 고참이 신참을 명령지휘하면서 괴롭히듯, 편의점에서 사장이 알바에게 돈도 제대로 안주면서 멋대로 부리듯, 일부 교사들이 학습자 위에서 군림하는 태도를 취하듯, 심지어 부모들이 성적이 내려간 아이를 패고 꾸중으로 볶아먹듯, 아이들끼리도 폭력의 먹이사슬의 틀이 잡히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군사화가 심했던 소련에서 아이들이 흔히 병정놀이를 했듯이, 남한 사회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공동체적 양심이라고 찾아보기 어렵고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사회를 아주 잔혹한 폭력놀이를 통해서 재현할 뿐입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거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다 - 조한혜정 샘의 말씀대로 - (간접적) 살인범입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그 따뜻한 온기로 폭력성을 완화시켜주고 아이들의 본성적 착함을 살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아직까지 실패한 것이죠.
<재능교육> 파업 노동자들이 4년이나(!) 투쟁하느라 고생해도 "진보"도 그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고 있고, 송경동 동지와 정진우 동지가 아무 죄도 없이 양심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도 대다수의 "온건하게 진보적 시민"마저도 아무 일도 없듯 그저 내년 총선이나 대선 생각에 잠겨 있는 사회는 분명 정상적 사회는 아닙니다. 무관심이야말로 폭력의 최악의 형태는 아닌가요? 아이들이 우리들의 폭력성을 배웠을 뿐이죠. 빅토르 최가 1980년대 말에 "엄마야 우리는 다 중병에 걸렸다! 엄마야 우리는 다 미친 지 오래됐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남한에 그대로 적용될 만한 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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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요한 바오로, 노무현 & 나꼼수 (레디앙, 2011년 12월 22일 (목) 08:49:42 박노자 / 오슬로대)
'북조선'은 우리들의 거울?…개인숭배, 상품화, 가족이데올로기
지난 며칠 동안 제게 거의 지옥적이었습니다. 지난 주부터 태심한 독감을 앓았는데, 이번 주 월요일 새벽부터 노르웨이의 각종 매체로부터 막 연락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돌아갔는데, 북조선의 실상과 미래에 대해서 코멘트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대부분 기자들의 태도이었습니다. 신문 부수를 늘리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조선을 더 이국화시켜 "미지의 동양적 전제 왕국"의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팔려고 했던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북조선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쪽 실상은 그렇게 '이상하게'만 보일까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북조선이 이상하다면 남한을 비롯한 전세계 전체가 이상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저와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바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자들은 북조선 길거리에서의 집단 오열 장면을 매우 '이국적으로' 여겼습니다. 이국시하는 동시에, "독재자를 위해 꼭 울어야 하는" 북조선인들을 또 불쌍히 여기려는 분위기도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6년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돌아갔을 때에 그를 위해서 울었던 남한을 위시한 전세계 가톨릭 신도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합니까?
신화가 아닌 실제의 교황 요한 바오로는 - 김정일 위원장처럼 - 꽤나 모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에 대한 넓은 식견, 그리고 북남 교류에 대한 상당한 적극성 등과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력한 강박관념을 겸비했다면, 요한 바오로는 상당한 상식과 기가 막힐 만한 보수성을 겸비했습니다.
상식이 있었던 만큼 달라이 라마와의 친교를 맺고 미제의 이라크 침략 등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망발들을 비난했지만, 해방신학부터 콘돔 등 피임도구까지 비상하게 사갈시한 나머지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들을 남기고 또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바도 있습니다.
물론 북조선과 같은 차원의 개인숭배는 현재 남한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직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자유로이(?) 거래될 수 있는 우리들의 신자유주의적 낙토에서는, 사람도 상품회된 나머지 이용 대상은 돼도 진정한 '숭배'의 대상은 되기가 힘듭니다.
돈과 '피', '핏줄'은 이 사회의 두 개의 주된 이데올로기죠. '핏줄' 이데올로기가 전사회 차원까지 이르면 바로 혈통적 민족주의가 되는 것인데, 이 이데올로기가 지금처럼 강한 나머지 '다문화 사회'는 영원히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가족들과 '혈족' 사이의 중간단위가 바로 사회적 이익집단이나 보스에 의해서 리드되는 정파 같은 집단인데, 이와 같은 관계에서도 우리는 역시 의사(擬似) 가족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즉, 선배나 보스를 '가족의 어른', '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만큼 비판적 사고는 그 자리에서 마비되고 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 북조선에서 벌어지는 장면들과 일면 상통하는 장면들은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몇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명에 돌아갔을 적에 전국의 분향소들을 메운 인파들을 생각해보시지요. 그 때에 - 나중에 비판자들에 의해서 "놈현 관 장사"로 표현됐던 - 그 추도의 앞장에 섰던 소위 '노빠'들에게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이라크 침략과 아프간 침략과 같은 초대형 국제범죄를 적극 방조해 종범으로 나섬으로써 한국역사를 영원히 더럽혔다는 점이나, 노무현이야말로 한미FTA 발안, 추진 과정을 소신껏 주도했다는 점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까? 물론 없었지요.
'노빠'든 그 어떤 다른 빠든 일단 그 '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아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님, 아버지 격인 '짱'은, 그들에게 완전무결한 인격의 소유자죠. 유시민이나 문재인의 노무현 시절 관련 저서를 한 번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의 반성이라도 보이나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짱'의 위대한 영도를 받아 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원천적으로 자기 비판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평양의 군중들과 달리, 그들이 어떤 사회적 압력을 의식해서 '빠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거래되는 자유 대한에서 가신(家臣)의 영광스러운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더 한심하나요? 제게는, '가카'를 있는 대로 씹으면서도, 아키히로(明博)의 왕좌를 박원순이나 유시민이 차지한다 해도 이 나라 노동자들이 그대로 죽어날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꼼수>의 팬들은, 평양의 군중보다 훨씬 더 한심해 보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치하에 OECD에서 자살율이 제일 높은 사회가 된 나라에서 사는 그들은, 외부적 강제가 그다지 없으면서도 의식이 있는 계급의 구성원, 즉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 개인이 되려는 노력을 전혀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핏줄'에 따르는 소속감부터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격차, 각종의 계급적 모순들, 그리고 영어 열풍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을 북조선 사회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한 만큼 훨씬 더 약해 보이는 그들을 경멸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 꽤나 볼썽사나운 - 모습을 바로 보는 게 더 도덕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들은 많은 면에서 우리들의 거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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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 권하는 사회 (레디앙, 2011년 12월 16일 (금) 08:37:33 박노자 / 오슬로대)
박정희, 김영삼, 김지하, 김문수, 황석영, 진중권…그들은 왜?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을 보십시오. 실제 거기에서 활약하는 활동가의 수는, 1990년대 초반에 비해서 줄었으면 줄었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덜 탄압적으로 되지만, 오히려 '골수' 체제 반대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상층 활동가들을 보면, 20년 내지 25년 전에 운동판에서 뛰었던 사람들의 상당수를 그 자리에서 더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보수정당 의원으로도 가 있고, 도지사 사무실, 청와대 등에 가 있고, 각종 대학의 교수로도 재직돼 있고 보수언론에서 문호 대접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위 '전향'을 한 것이죠. 전향이라는 정치문화적 코드를 빼고서 한국 사회를 아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향, 즉 일정한 거래를 전제로 하는 획일화된, 자발성이 강한 주류에의 '귀환'은, 극도로 보수적 사회인 한국에서는 하나의 '문화'라면 문화입니다.
조선 토착 사회 지도층의 협력 없이 효율적 통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 지배자들은, 온갖 당근들을 제시하면서 보수적인 양반귀족(민병석, 민영휘와 같은 민씨 척족 출신의 갑부들부터 시작해서)부터 신흥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자까지 열심히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비참하게도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19년의 그 유명한 '민족지도자 33인' 중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도 배신을 하지 않은 한용운만 제외하고서 다들 전향하거나 적어도 민족진영에서 이탈했습니다. 인정식, 백남운 등 엘리트 온건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전향 거부자들을 거의 모조리 죽이거나 주변화시킨 사회는, 그 다음에 전향자들을 아주 전면에 배치시켜놓았습니다. 남로당 동료들을 배신해 그 명단을 형리들에게 넘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부터 3당 합당으로 야당 정치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배신한 김영삼이나, 반노동 입법으로 노동변호사라는 자신의 경력을 배신한 노무현, 1965년 한일수교 반대 데모했다가 전향한 아키히로(明博)까지, 대부분의 남한 최고 권력자들은 전향자 출신들입니다.
황석영이나 김지하보다 강도는 훨씬 더 약하지만, 실제로 2000년대에 접어든 박노해의 변신도 일종의 '준(準)전향'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경우지만, 전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씨의 점차적 전향을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각종 사회참여적 발언들을 통해 여실히 잘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과거 '전진'그룹 등 좌파 운동가들을 맹비난하고, 귀족화된 예술인 정명훈을 옹호하는 진중권을, 그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지 않습니까? 1990년대에 이루어진 김지하의 전향과 2000년대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황석영의 전향도 그 어떤 강제도 개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주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춥고 배고픈 측면도 있지만, 일단 같은 학력자본을 소유하는 선후배들의 동정적 시선부터 참기가 힘들죠. 그런데 과거 저항이라는 경력을 성공적으로 팔아서 주류에 합류하기만 하면, 세상은 당장 바뀝니다.
그 입신출세를 위해서 딱 한 가지 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철저하게 죽여, 획일화된 대한민국의 '상식/통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주화를 자랑하는 '자유 대한'에서 절대 다수의 유명지식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 공적인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상의 수치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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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사칭 '개혁 사기꾼' 판매전략 분석 (레디앙, 2011년 12월 09일 (금) 08:14:23 박노자 / 오슬로대)
노회찬-심상정-유시민 '세트'의 의미…리버럴에 다시 속아넘어가나?
국내 정치에서는 내년과 내후년에 상당한 변화들이 예상됩니다. 2008년 이후에 권력을 다시 잡은 극우들은, 내년의 총선과 대선 이후에 그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할 가능성은 계속 얕아지고 있습니다. 즉, 극우들이 안정적인 장기집권 체계의 정립에 실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웬만한 세탁기나 텔레비전보다 국내의 극우 정객은 훨씬 더 빨리 고장나고 맙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격'만의 문제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극소수 수출 위주의 재벌들과 부동산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한국형 극우정치는 기본적으로 변신을 거부합니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의 중점적 착취와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그리고 땅 투기를 기반으로 삼는 현 (주)대한민국의 장사 방식 그 자체가 변화를 거부하듯이 말씀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만큼 민심 얻기에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현 정국 주도 구조가 단명으로 끝난다 해도 과연 (주)대한민국의 피고용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하급 노동자들까지 잘 사는 세상은 될까요? 과연 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표방하는 극소수의 진짜 진보세력들은 그 몫을 크게 확창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노력에 달려 있는 부분들은 많지만, 극우들이 패배를 향해 달려간다고 해서 민중의 대변자들이 권력을 잡을 일은 자동적으로 가능해지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한 가지 벽이 있는데, 이는 바로 '진보'를 사칭하고 있는 각종의 리버럴들입니다.
물론 이미 노무현의 시절에 비정규직을 마구 양산하고 지금 커다란 재앙으로 돌아온 한미 FTA를 선구적으로(?) 계획, 추진한 그들에 대해, 민중은 벌써 크게 분노하고 실망한 적은 있었습니다. 지금의 극우집권도 그 실망의 한 가지 결과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개혁' 사기로 정치적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비상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있지도 않은 물건, 즉 (자유주의적) '개혁'을 팔자면 정치적 상술 9단 정도 돼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 저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판매 전략(?)들을 준비한 것입니다:
1) 섞어서 "세트"로 팔기
민중을 없는 살림에 살인적 학비 등을 내야 하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냈던 노무현 정부의 장관을 이미 해본 유시민씨는, 더이상 정치적 장터에서 낱개로 판매되지 않고 노회찬, 심상정 등 친민중적 경력이 있는 우파 사민주의자들과 한 세트로 팔립니다.
낱개 판매면 이미 신선도가 별로 좋지도 않은 이 물건을 사주실 분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이번에 한진중공업 문제로 장기 단식까지 하신 두 분들과 세트가 되어서 팔린다면? 글쎄, 어쩌면 이러한 세트 판매가 성공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한 한 리버럴은, 다시 한번 "경력 세탁"되고 '참신한 친서민 정치인'으로 돌아올 셈이죠.
2) 과거의 리콜 사태에 대한 기억 지우기
실제 2006년 이후에 노무현 정권의 인기는, "놈현스럽다"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할 정도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임기 말기의 노무현과 유시민 등 그 가신들은 진보가 아닌 한미FTA식의 가장 얄팍한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나 특히 노무현의 자살 사태가 계기가 되어 그 부정적 기억들은 점차 노무현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세탁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등의 저서에서는 노무현은 거의 '이상적 인격자'로 보이고, 그 정권 시절은 '실낙원'처럼 묘사됩니다. 아키히로 정권의 '신악'의 추악함에 압도를 당한 수많은 독자들에게 노무현 당시의 '구악'에 대한 기억들을 또 지우기가 쉬우니까 이 판매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둘 위험성은 있습니다.
3) 재포장과 새로운 광고 모델
물건은 그대로겠지만, 간판은 참신한 쪽으로 바꾸고, 그 간판 위주로 포장이 다시 디자인된 셈입니다. 이러한 전략의 대표적 사례는 이번 박원순씨의 당선이죠. 포스코, 풀무원 등 사외이사 출신이며 코오롱 등 재벌의 후원을 따는 데에 수완이 비상한 "재벌가의 친구" 박원순이고, 부하들에게는 거의 '독재자'로 인식되는 스타일의 리더 박원순이지만, 대다수의 중도적 유권자들에게는 그는 '참신한 얼굴'이자 거의 '진보'로 다가왔잖아요.
이유는? 정부나 재벌, 교회, 정계 등등은 그저 '도둑'으로 통하는, 철저하게 냉소적인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시민사회'에 대한 시선은 비교적으로 덜 싸늘하기 때문이죠. 그람시의 말대로, 시민 사회의 '권위'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무형의 방어력 중의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박원순씨와 비슷한 케이스들이 꽤 있을 것 같고, '개혁' 사기꾼 진영은 그렇게 해서 재정비될 듯합니다.
사기는 영원하지 못하지만, 내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박원순 류의 "참신하고 깨끗한 리버럴"들에게 속아 넘어갈 게 뻔합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덜 속게, 진짜 진보는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이 사회의 계급적 현실에 대해 소리를 크게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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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회의한다" (레디앙, 2011년 12월 02일 (금) 01:34:00 박노자 / 오슬로대)
보통선거권, 노동자 체제편입 수단 측면도…진짜 민주주의의 의미
우리에게 흔히 한 가지 '이념적 무의식'이 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제도적 의회)민주주의 내지 (절차적)민주화를 어떤 절대선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주류'의 관점에서는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민주화'야말로 대한민국을 북조선 등과 긍정적으로 차별화시키는 어떤 절대적 '우리들의 업적'으로 평가되는데, 이와 같은 지배자들의 의견을 또 알게 모르게 수많은 피지배자들까지 수용하게 됩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영구적인 장시간 고강도 노동착취 구조에 구속 받게 하고 커다란 불안 노동자층을 만들어놓은 산업화에 대해서는 그나마 회의를 해보는 것이 적어도 진보진영에서 흔히 가능한 일이지만, 민주화만큼은 거의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지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민주주의의 그림자, 즉 복잡한 계급적인 함의에 무감각한 것입니다.
물론 권위주의보다 (절차적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좋다는 사실이야 저도 다 체감했습니다. 1991년, 서울에 처음으로 갔을 때에 거리에서 자주 맡았던 메쓱한 최루탄 냄새와 기숙사 동숙생들이 주고 받았던 잡혀간 선배들의 이야기, 프락치로 밝혀진 '가짜 학생' 이야기 등등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제는 최루탄 대용으로 얼음 물대포를 쓰고, 제가 그 때에 갔던 고려대와 같은 '명문대학'에서 잡혀갈 만한 급진운동가도 거의 남지 않아 문제지만, 좌우간 운동권의 투사가 아닌 일반인마저도 부정한 권력에 '쫄지' 않고 살 만큼 (절차적)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돼 천만다행이라는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1991년 같으면 재벌가들의 '사설 기쁨조' 이야기를 그저 입소문으로만 전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이종걸 의원처럼 <조선일보> 방모씨에 대해서 "장자연씨를 술/성접대로 결국 자살케 만든 '악마'"였다고 발언해 고소를 당해도 무죄로 풀리지 않습니까?
물론 재벌가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먹이가 돼야 할 수많은 남녀들을 자살로 몰고 있겠지만,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의 신분이 되면 이 사회에서 사람들을 생으로 잡아먹는 식인종들이 지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도 되니 정말 너무나 먼짓 세계입니다. 선진화가 다 됐나 봐요. 좌우간, 씁쓸한 이야기를 그만두고 핵심을 말하자면 분명 (절차적) 민주주의에 쓸만한 면들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측면도 보자는 말씀이죠.
국내에서는 민주화 과정은 약 50여년 걸렸지만 (소위 '건국'부터 김영삼, 김대중의 집권까지) 유럽 같으면 남녀 구분없는 보편적인 투표권 획득은 한 세기 이상 걸리는 경우들은 수두룩합니다.
영국을 한 번 보시지요. 1832년의 선거법 개혁으로 남성 중에서의 약 12%의 부유층 및 중산층만이 투표권을 얻어 전체 성인 인구 중의 투표권 보유자가 약 6%가 된 것이죠. 그게 하나의 시작이 되어 1918년과 1928년의 두 차례의 국민대표법 채택으로 드디어 재산을 기준으로 해서 투표권을 제한시키는 제도가 폐지되고 보편적 투표권이 획득됐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정도 걸린 셈이죠.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 과정에서 투표권이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획득된 측면은 큽니다. 예컨대 1830~40년대의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인 차티즘 운동은 정치적 노동자 파업과 같은 강력한 민중투쟁의 수단들을 세계사에서 거의 최초로 발견한 셈입니다.
그런데 보통선거권이 밑으로부터 쟁취된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영국에서 그때까지 없었던 징병제가 처음으로 실시되는 등 빈민까지도 총동원해야 할 강력한 '전시동원 국가'가 창출된 것이죠. 이 국가의 순량한 국민이 되어서 대륙으로 건너가 같은 노동자, 농민인 독일 병사들의 가슴에 아무 주저없이 총검을 박을 '충군애국의 평민'들을, 국가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평민들을 국가와 자산계급을 위한 살인자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겉으로라도 최소한의 참정권을 주어야 된 것이었고, 이러한 차원에서는 1918년의 '민주화'는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체제 편입'의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최소한의 '국가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볼셰비키를 벤치 마킹해서 자신들을 4년 동안 죽고 죽이게 만든, 그 흡혈귀 같은 국가를 아주 박살낼 우려도 그 때에 컸습니다. 참정권을 얻어 기존의 '온건한' 정당들의 선전의 대상이 되어 기존의 정당 질서 속에 편입된 노동자가 덜 위험할 거라는 건 그 당시 지배자들의 계산이었죠.
아마도 누군가가 저에게 "그러면 수많은 빈민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공산당 등 반체제 투쟁 단체들에게 유익하지 않았겠느냐? 그들이 왜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체제와의 싸움을 진행해 체제를 평화적으로 본격적으로 바꿀 수 없었겠느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글쎄, 제1차대전의 종료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급진화 추세를 타서, 1922년에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최초로 영국 국회의원이 되긴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민주화'된 나라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체제의 본격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국 공산당 같으면 1926년 총파업 때에 '소요선동죄'에 걸려 그 지도자 12명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신사적' 나라 영국에서 온갖 탄압들을 다 맛봤습니다. 그리고 감옥행만은 문제입니까?
"모스크바의 간첩들"이라는 모든 부르주아 신문들의 끝이 안보이는 비방전, 학교, 교회에서의 반공주의적 세뇌, 공산주의자들을 최악의 라이벌로 생각해서 그 배격에 모든 힘을 다 모으는 보수화된 노조 관료들의 악질적 방해... 형식적 민주화가 백 번 돼도, 이미 보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급진 분자'들이 아무리 '침묵하는 대다수'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표방한다 해도, 절대적으로 지배자들의 이념적 헤게모니의 철사망을 뚫어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급진 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그들 스스로가 보수화의 길을 걸어 그 바깥의 사회와 동질화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공산당을 보시지요. 1950~55년간, 즉 제6회 전국협의회까지 무장투쟁의 노선을 걸었지만, 그후에는 (절차적)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각급 의회 진출에 올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는? 1972년에 491개의 의석이 있는 국회에 38명의 의원을 보내는 등 꽤 가시적인 "유의미한 정치적 소수자"의 위치를 획득했지만, 그 대가로 포기한 게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무장투쟁 시기에 생사를 같이 했던 재일조선인 등 종족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거의 버렸다시피 하고, 노조는 관례화된 춘투 등에 안주해 보다 더 공세적인 투쟁을 포기하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매우 느슨하게 하는 등 '세계'에 대한 관심도 거의 잃은 듯했습니다.
결국 평화헌법 사수 등 '민주주의 수호'와 복지예산 증가 등의 제한적인 (현 체제 하의) 재분배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보다 본질적인 사회개혁에 대한 욕망을 접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실망으로 신좌파가 공산당을 버려 독자적 길을 걷게 됐는데, 신좌파의 경우에는 공산당 정도의 대중성마저도 잘 없었기에 결국 대중들과의 유리된 입장에서 극소수 영웅주의, 맹렬 가투주의 등으로 그 혁명적 에너지를 별 효과없이 소모시키고 말았습니다.
공산당과 신좌파의 분열은 일본 진보 운동의 일대 비극이었는데, 그 분열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현실 안주, 혁명성 상실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의 적극 참여는 이처럼 과거의 혁명가들을 순치시키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대단히 보수적이며 부족합니다. 직업 정치인들이 기업들의 막대한 정치자금을 이용해 유권자들에게 그 정치적 '상품'을 판매하고, 그 판매가 성공해 금배지만 달면 직업 관료, 기업인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존의 체제를 기득권층의 이득을 위해 그대로 운영하는 것은,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의회민주주의를 급진적인 정치적 선전, 민중의 생활개선 투쟁 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로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수준에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우선 착취자들의 선거 왜곡 (정치자금 증여 등)의 완전한 차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보다 숙련공 정도의 보수를 받고 일절 특권이 없는, 언제나 유권자에 의해서 소환이 가능한 민중의 대표자들이 매순간 유권자들의 감시와 견제, 지도를 받고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실행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 그러한 진짜 민주주의를, 꿈만 꿀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통상 민주주의라는 부르는 현 제도는 '짝퉁' 물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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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있는가?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1124 19:30)
요즘 사학계에서 한 가지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권은 역사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냉전기 선전 표어를 넣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학자는 이 반역사적 시도에 맞서고 있다. 실은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으로 봐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기초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운동권 전력 때문에 군에 끌려가서 의문사를 당할 ‘자유’(?)는 있어도 국가적 살인의 실체를 밝힐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근 몇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해서 우리에게 점차 얻어졌다. 그러나 요즘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 민주주의가 내실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에게 과연 민주주의가 있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묻기에 이르기도 한다.
세계인의 절대다수가 사는 계급사회에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기준은 피지배자 저항권의 유무다. 지배질서에 명분 있는 저항을 벌이는 피지배자를 징벌함으로써 그 활동을 폭력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사회는, 아무리 다당제 등 형식적 ‘민주주의’ 요소들은 있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심히 비민주적이다. 예컨대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는 있는 것처럼 보여도 피지배 아랍인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상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피지배자의 신체를 구속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적 장식으로 치장된 기득권층의 집단적 독재일 뿐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최근에 이 나라의 기존 질서에 가장 의미 있는 도전장을 던진 것은 ‘희망버스’였다. 비정규직과 하도급 노동자, 중소 자영업체 노동자 등 약 800만명의 불안 노동계층을 차별대우하여 초과이윤을 쥐어짬으로써 노동계급 전체를 분리통치하며 약화시키는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쳤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워도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없는 자본독재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박살”을 내자고 호소했다. 지배계급의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이윤 수취 및 노동자 통제 도구, 즉 비정규직 양산과 정리해고를 정면으로 문제화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거의 1년 가까운 장기 투쟁 끝에 희망버스의 핵심적 당면 요구인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의 복직이 쟁취되고, 그 문제의식은 전사회에 퍼져가기까지 했다. 요즘 보수언론들마저도 비정규직 양산을 우려할 만큼 이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만의 이슈가 아니라 전사회적 이슈다. 그러면 한진 자본과의 힘겨루기에서 많은 이들의 연대를 얻어 힘겹게 이기고, 비정규직 문제를 인구에 회자되도록 만든 희망버스에 대한 지배자의 대응은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자유민주주의’ 타령을 일삼는 지배자들은 그들에게 제일 쉬워 보이는 방법을 택했다. 희망버스를 승리로 이끈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을 구속한 것이다. 담론적 대결에서 희망버스 쪽을 이길 수 없고 복직투쟁에서 여지없이 패배를 당한 지배자들은, 결국 구속이라는 이름의 노골적인 폭력에 호소하고 말았다. 자진해서 경찰서에 출두한 두 사람을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잡아간 것도, 한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평화적이었던 시위를 이끈 희망버스 조직자들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도 지금 한국 지배자들의 ‘민주주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짓밟힌 자의 편에 선 일밖에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시인을 잡아간 것은, ‘민주주의적’ 한국에서 행해지는 국가폭력의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지난 8월에 그저 동아리 회원들에게 북한 서적 몇 권을 읽혔을 뿐,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자본주의연구회’ 회장에게 내린 유죄판결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가? 노동운동 차원에서든 대북문제에 있어서든 지배자들에게 ‘대드는’ 평민이 무자비한 사법 탄압을 받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억압자들에게 같이 ‘대들어’ 양심수 석방과 사법탄압 중지를 요구하지 않고서는, 이 부끄러운 현실은 과연 달라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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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or 진화 (레디앙, 2011년 11월 17일 (목) 00:50:20 박노자 / 오슬로대)
[한진중 투쟁 교훈] "도덕적 명분 선취와 폭넓은 연대 성공"
암울하기만 했던 아키히로(明博)의 치하에서 드디어 한 줌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록 '진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한 때에 학생시절에 저까지도 교재 삼아 공부했던 국가보안법 비판서를 쓰쎴던 박원순씨라는 '양식이 있는 중도보수'가 된 데에 이어, 300여일 동안의 고공농성 이후에 '김진숙'을 상징으로 삼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투쟁은 - 불완전하지만 - 일단 승리로 일단락됐습니다.
이 두 '사건'은 극우 정권의 점차적인 와해를 상징하는데, 특히 후자의 의미는 아주 깊습니다. 2003년 화물연대의 통쾌한 승리 이후로는 신자유주의 시대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노동자의 대대적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해고노동자의 숫자는 비록 많지 않더라도 이 투쟁의 전례없는 가시성도, 역시 전례없는 각계각층의 지지도, 부산권 경제에서 한진중공업이 차지하는 위상도 이 승리를 매우 특별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가장 암울한 극우정권의 시대에 가장 전근대성이 심하고 악질적인 재벌을 상대로 한 이 투쟁이 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40분 후에 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 음식과 숙제 등을 챙기느라고 더이상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것이지만, 남은 몇십 분 동안 일단 이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둡시다:
1. '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이번 투쟁의 두 명의 상징적 인물인 김진숙 선생님과 송경동 시인은 대표적인 '1980년대형' 올드 레프트, 즉 정통적 좌파적 노동운동가들입니다. 계급의 이해관계가 몸과 마음에 밴 노동자 출신의 유기적 지식인들이고, 계급의 이름으로 투쟁하시는 분들입니다.
제가 꽤 좋아하는 송경동 시인의 시만 보더라도 당장 아시겠지만, 그 미학은 전통적인 '자연의 미' 등 서정 주제를 노래하는 미학도 아니고, 원자화된 개인의 의식의 심연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고찰하는 포스트적인 미학도 아니고, 말그대로 투쟁의 아픔과 절규와 연대적 기쁨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종류의 미학입니다.
지향은 약간씩 다른 부분도 있지만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 시인의 적자, 문학적 계승자죠. 그런데 이 투쟁을 이끈 '올드 레프트'들은 훨씬 더 '소프트'화 되고 인권적 감수성이 성숙된 새 시대의 조건에 알맞게 투쟁을 디자인한 셈이죠.
쇠파이프와 화염병 대신에 그 자리에 '평화 시위'의 절대적인 강조가 들어와 오히려 경찰과 극우 알바 (어버이연합 등등)들의 폭력성을 부각시켰으며, 형식화되고 획일화된 율동과 구호 대신에 그 자리에 다양한 걸개그림, 퍼포맨스, 공연, 아동작가 등 여러 창조적인 지식인들의 참여가 들어온 것입니다.
시청각적 표현을 즐기고,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새 시대의 지향 맞게 투쟁은 재기발랄하고 절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위 시작할 때에 남녀 간 공개 키스를 하고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칠레 학생들의 시위, 즉 현재의 세계좌파 투쟁의 중심이 된 남미의 시위 문화의 예술성에 근접한 듯한 느낌입니다. '포스트'의 무의미한 늪에 빠지지 않고도 '올드 레프트'가 잘 진화돼 새 시대와 코드를 맞출 수 있다는 걸, 이번 승리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2. 도덕적 명분 선취(先取)
이 나라 대한민국의 유일한 진짜 '국시'는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 식구 정도 챙겨주고 나머지 세상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은 이 쪽에서 지독하게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죠.
그런데 또 그러한 사회인만큼, 식구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율적으로 희생을 하는 사람은 커다란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도덕이 없는 사회의 도덕적 명분을 효율적으로 차지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이유를, 오로지 민족주의로만 봐야 하는가요?
그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얼마든지 일본 유학쯤 하고 통감부, 총독부 밑에서 주사직이니 군수직이니 맡았을 수도 있었던 부유한 지주의 유식한 아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쉽게 보기 드문 일이기에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정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해서, 김진숙 선생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직접적 인연도 없는 동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농성을 하는 드라마틱한 운명의 여활동가 대 부를 세습한 악덕 재벌... 이 대립구도에서 선악이 너무나 분명해 노동운동을 싫어하는 '시민'들마저도 그 압도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폭넓은 연대
임금노동자는 이 사회의 다수(약 70%)지만 조직 노동자는 소수(약 9%)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투적인 조직노동자 활동가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립되지 않고 승리하자면 연대는 생명입니다.
이념과 이해를 약간 달리해도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 우리와 같은 진영에 서줄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그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 우리 쪽에 데려와야 합니다. 이번 운동은 머나먼 미국의 촘스키 선생이라는 전세계적 '운동권'의 거목부터 필리핀에서 한진의 착취를 당하는 이국 동료까지, 국내 야당 정치인부터 미술인, 작가까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의 월경적(越境的) 연대를 건설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박원순의 당선으로 표현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와 극우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반응, 즉 "특권층 1%"에 매우 불리한 국내외의 '분위기'도 작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한 이번 투쟁의 건설자들에게 정말로 존경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제 아이가 곧 귀가할 것 같아, 아무래도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투쟁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노동자 등 벌써 몇년 간 기록적인 (세계에서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최장기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도 사회 전반의 연대를 필요로 하고,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의 법제화, 현존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승리가 자양분이 되어서 개별적 직장의 범위를 넘는 지역적, 전국적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노동계의 총체적 공세가 시작되는 것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공세야말로 이번 승리를 최종적으로 의미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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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극우파가 극성인 이유 (레디앙, 2011년 10월 28일 (금) 17:12:02 박노자 / 오슬로대)
신자유주의 복지국가의 귀결…좌파 제대로 하면 사라져
요즘 유럽 정치 현실의 한 가지 불가사의한 화두는 그나마 공황을 비교적으로 잘 비켜가는 나라들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누리는 높은 인기다. “위기가 극우들의 극성을 부른다”는 상식(?)에 완전히 어긋나는 사실은, 국가 파산과 사상 최악의 생활 수준 저하를 맞고 있는 그리스에는 극우보다 각종의 좌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 국회에서 극우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정교회 소집'당은 전체 300의석 중의 15의석 밖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중도 우파(신민주당) 외에는 국회의 주도 세력들은 사민주의자(154의석), 공산주의자(24의석), 신좌파(9의석) 등이다.
고전을 거듭하는 그리스는 '좌경화'돼 있는 것과 정반대로는, 재정 상황은 유럽연합 안에서는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하는 핀란드는 지난 2011년 4월 총선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전형에 가까운 '진정한 핀란드인'(Perussuomalaiset) 정당이 돌연히 19%의 득표율을 보여 국회 제3당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와 같은 '포퓰리즘의 폭발'은 하필이면 왜 위기에 비교적으로 덜 노출된 유럽 나라에서 터져야 했을까?
핀란드뿐만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포퓰리즘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또 하나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는 바로 스칸디나비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7만9천 달러 정도 되는) 노르웨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대표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소위 '진보당'(Fremskrittspartiet)은 2009년 총선에서 국회의 169 의석에서 41석이나 차지했다.
지난 9월에 치러진 지방자치 단체 선거에서 득표율은 11.4%까지 급락했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진보당의 전(前) 당원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가 2011년 7월 22일에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대량 살육을 감행하여 70여 명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당연하게도 브레이비크의 범행과의 그 어떤 관계도 부인하고 그 범행을 강력 규탄했지만, 진보당 당원 사이에 만연된 반이슬람주의적, 인종주의적 분위기가 브레이비크의 광적인 민족주의적, 배외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만인이 다 인지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브레이비크의 범행이 어느 정도 과거 속에 묻혀 망각될 몇 년 후 같으면, 진보당은 얼마든지 그 2011년 초기의 지지율, 즉 25~30%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사회에서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이 정도 된다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생각하게끔 하겠지만, 그럴 만한 객관적 이유는 분명히 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사회에서 극우주의 지지자들이 이 정도로 많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 같지만, 실은 이 두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도적 역할을 해온 온건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변질의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핀란드 같은 경우에는 사민당의 바워 리뽀넨(Paavo Lipponen)은 1995~2003년간 국무총리이었는데, 바로 그 때에는 신자유주의가 핀란드 사회 속으로 깊이 삼투되기 시작했다. 자본의 초(超)국가적 운동에 일체 장벽이 거의 제거돼 핀란드의 10대 대기업들의 해외 피고용자 비율은 2002년에 거의 60% (1982년에는 불과 15%이었다)에 달했는가 하면, 비정규직 고용이 '자율화돼 특히 저임금, 여성 노동자 중심의 비정규 노동이 사회에서 보다 큰 몫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전체 근로자 중의 비정규직의 비율은 이미 21%에 달했는데, 이는 유럽연합의 평균치(14%)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었다. 70%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을 희망함에도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서 비정규직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비자율적 비정규직'으로 분류되었다. 1980년대 말 같으면 핀란드에 거의 없었던 노동파견 회사들은, 1990년대 말에는 이미 약 1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이와 같은 업체에서의 평균 고용기간은 50일 정도이었다. 한 마디로, 리뽀넨의 정부는 1990년대 초반의 불황을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강화된 착취 등을 통해서 극복해보려 했던 셈이다.
노르웨이 같은 경우에는, 비록 비정규직의 비율(9% 정도)은 유럽에서 비교적으로 낮은 편에 속하지만, 1990~1997년 온건 좌파인 노동당의 집권 시에 국유였던 대기업의 부분적 사유화를 추진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장려하는 등 공장을 저임금 국가에 이전하려는 기업들의 해고를 제대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불안 심리가 조장되는 동시에, 기업세 인하 정책 등의 효과로 거부(巨富)들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초(超)부자의 수가 두 배 늘어나 지금 180명에 달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에 가장 노출된 토건업 같은 부문에서는 오슬로 지역 같으면 약 25%의 노동자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는 국내나 외국에서 파견된 비정규직이다. 한 마디로,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는 복지국가의 골간을 유지하되, 사회의 점차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상당 부분 허용했으며, 1~2%의 최상층(부유층)과 10~15%의 빈민층, 준(準)빈민층의 극적 성장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상대적으로 불안화시킨 바 있었다.
그리스의 경우 지금 사민주의자들은 민중들에게 매우 아픈 예산 삭감 정책을 집행하는 등 다수와 점차 괴리가 벌어져가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기본적으로 민중들에게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국가자본주의적 기본틀을 간직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예산 삭감 정책에 대한 민중의 투쟁을 이끌어가는 여러 세력 중의 하나다. 즉,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이들은 그리스의 경우에는 대중적 좌파 정당이라는 배를 얼마든지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핀란드나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야말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의 전위가 된 셈이다.
노동시장 불안화, 소득 격차 급등 등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은, 노르웨이의 노동당이나 핀란드의 사민당의 문을 두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에는 노동당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회주의 좌파당(SV)이나 적색당(Roedt) 등이 있는데, 전자는 노동당의 들러리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으며, 급진적 지식인 중심의 후자는 대중성이 약해 노동계급에 잘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 좌익동맹당(Vasemmistoliitto)은 사민당보다 왼쪽에 있다고는 하지만, 1995~2003년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온 사민당의 내각에 참여하는 등 신자유주의 반대 세력으로서의 자격은 심히 모자란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래의 대한 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저임금 노동자, 영세업자 등은 과연 어떻게 투표하게 될 것인가?
특히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이민자들과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에서 이민 제한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 가버릴 확률은 꽤 높다. 물론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제시하는 배외적인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적 노동 위기의 그 어떤 진정한 해결책은 될 리는 없다. 이민자들을 배척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에서의 저임금 노동의 불안함이 개선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극우들의 정치담론은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온건좌파의 허를 찌르는 부분들은 분명 있다. '진정한 핀란드인'이 핀란드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럽연합을 강경 반대하는 것은 그 사례다. 그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민중의 생계 파괴에 앞장서는 유럽연합에 대한 원칙에 충실한 반대를, 왜 사민당과 좌파동맹당은 못하고 있는가? '온건함'이라는 이름의 그들의 변질과 무능은 결국 극우들의 발호를 가능케 했다.
좌파가 좌파답게 실천하기만 하면 극우들이 극성을 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1990년대 이래 '“주류'가 돼버린 여러 담론들을 과감히 반대하고, '주류'에서 어쩌면 비인기 집단이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 유럽연합에 대한 반대, 민영화에 대한 절대 반대와 자원과 에너지 등 핵심 부문 대기업과 은행의 국유화 지지, 그리고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우선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간다면 부유층과의 정면 충돌도 각오해야 하고, 독일 등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 지배층과의 충돌 가능성도 각오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고, 계속 우경화해온 노르웨이나 핀란드의 온건 좌파가 결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길로 가지 않는 이상 '진보당'이나 '진정한 핀란드인' 정당과 같은 부류들이 상당수 노동자의 표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좌파가 노동계급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지 않으면, 좌파를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노동계급의 정치적 정체성 자체가 점차 흔들리게 되고, 어쩌면 부분적으로 해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계급의 정치적 정체성이 위험에 처해지는 일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로 유럽 부국(富國)들의 온건 좌파가 택한 길의 가장 무서운 결과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자체가 치명적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에는, 과연 그들이 좌파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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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1027 19:27)
동구권 몰락 이후 최근 20년 동안 국내외에서는 우파와 ‘온건’ 좌파는 한 가지 재미있는 유사성을 보여왔다. 둘 다 ‘실패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온 것이다. 우파야 동구권의 몰락을 시장경제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의 원천적 불가능함의 증거로 삼아온 것이지만, 체제 속으로의 편입을 희망하는 주류 좌파로서도, 자본주의의 고칠 수 없는 결함을 강조하고 본질적 변혁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불편할 뿐이었다.
중도좌파 정당들은 복지국가 건설이나 유지 정도의 타협적인 목표를 제시해왔는가 하면, 좌파 지식인들은 계급모순보다 성차·인종·문화의 문제에 집중했으며, 상품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나 소외보다 ‘욕망생산’의 왜곡 등을 파헤치곤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근 20여년 동안의 배타적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마르크스는 정말 ‘실패한 예언자’였던가? 최근 국내외의 상황으로 봐서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메시지가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해의 중심에는 무산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 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 없이 그저 관리의 대상물로 전락한 노동자가 결국 상품이 된 그 노동과 함께 자신도 상품화되어 인격체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화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상황을 본다면 과연 이 진단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무산화된 이중적 무산계급’인 비정규직은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산의 주체인 회사에 대한 소속감마저 없다. 그 노동이 일회용품처럼 쓰였다가 버려지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인격체로서의 하등의 존엄성이 허용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그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는 인간의 신체나 감정부터 신까지 다 상품화되어 교환가치로 환원된다고 이야기했는데, 한국 사회를 한번 봐도 그게 얼마나 타당한 지적이었는지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말 그대로 상품 삼아 파는 성매매를 2004년 이후로 ‘근절’한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수법이 교묘해지고 종사자가 1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해외원정 성매매까지 번창해지는 등 ‘국제화’가 진행되는 것뿐이다. 노동 자체뿐만 아니라 미소나 ‘상냥한’ 태도까지 팔아야 하는 백화점 종업원들의 감정노동은, ‘친절’에 대한 주류사회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오히려 더 가혹해져 가고 있다. 사찰, 교회 할 것 없이 종교들이 서방정토나 낙원에의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리 최근에 사회적 비판이 거세도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것이 물화되어 거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사회의 누구나 볼 수 있는 현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질문은 “만약 계급적 모순이 일차적이라면 왜 국내 노동자들이 이 모순들을 잘 자각하지 못하고 계급투표를 거의 못하는가, 왜 계급의식의 수준이 그렇게 낮은가”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물적 토대(사회의 계급적 구조)와 상부구조(집단 의식 등) 사이의 연결은 자동적이지 않고 ‘정치’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이간질해 분리통치하고 노조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놓고 보수화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저들의 노동자 계급의식 형성 방지 정책에 여태까지 많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과연 영구적인가? 오늘날 ‘희망버스’에 대한 폭넓은 지지로 봐서는, 노동문제는 이제 사회의 중심 의제가 돼가는 것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들이 계급적 연대 없이 상품화와 착취의 지옥을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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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보이는 손'만 있다 (레디앙, 2011년 10월 21일 (금) 09:48:02 박노자 / 오슬로대)
공황과 민중의 고통…고장 수리 말고 새 체제 상상하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으로 자기 조절 능력을 완전히 갖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자본주의도, 생각해보면 10개월짜리 아이와 본질상 똑같습니다. 실제로는 기본적인 자기 보존 능력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보존, 장기 지속을 보장해주는 것은 그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정치력과 군사력, 경제 조절 능력이지, '시장'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자기 조절에 완전히 실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 이윤 추구를 통한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윤률이란 지속적일 리는 없습니다.
콘드라티에프라는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경제 학자가 묘사한 '장기 주기'(약 70~80년) 동안 이 이윤률이 점차 떨어져 나가는 것인데, 특히 콘드라티에프 주기의 후반기(현재로서는 1973~1980년 이후)에는 제조업 등의 이윤률은 매우 현저히 떨어져 제조업 주요 부문들의 위기를 촉진합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은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대응 방법들이 관찰되는데, 이 모든 방법들은 궁극적으로 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욱더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저임금 노동의 과도한 착취에 의한 초과 이윤 수취
이 방법은, 중국이나 월남 등 과거 '현실 사회주의' 나라였던 사회에 자본이 침투해 저임금 노동력을 무차별 착취하는 것과, 핵심부/준핵심부 (특히 한국이나 스페인과 같은, 노동자 보호가 잘 돼 있지 않은 사회에서)에서 상당수 노동자들을 비정규화시켜서 그 임금 착취를 강화하는 것 등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자본 증식 속도 가속화의 일시적인 효과를 낸다 해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저임금 국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탄력이 붙어 그 쪽 임금은 결국 꽤 오르기 시작하고, 핵심부/준핵심부의 비정규화된 노동자의 구매력이 떨어져 소비 시장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이윤 극대화의 효과는 있어도 결국 장기 지속이 불가능한 수법인 셈이죠.
2. 기술 혁신에 의한 신상품 개발, 새로운 상품 시장의 창출
여기에서는 컴퓨터, 인터넷, 소프트웨어, 휴대폰은 대표적 사례가 되지만, 그 신시장의 이윤이 처음에 좋았다가 결국 과잉 생산, 괴잉 경쟁에 의해서 깎아져 궁극적으로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10여년 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닷컴' 주식(인터넷 업체 주식)이 일체 떨어지는 등 인터넷 기업 버블이 터져 경제 위기가 조성됐다가 이라크 침략 등의 특수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군수 업체 주식의 리드에 따라 증시 전체가 올라간 것을 잘 기억하시고 계시지요?신상품 시장의 불가피한 버블 형성과 위기를 모면하는 값은 폭탄, 포탄, 총탄, 수류탄의 연기 속에서 비참하게 죽고 질병, 영양실조로 죽어나간 약 60~70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체제 안에서는 비서구인의 목숨은 기본적으로 '인명'으로 인정되지 않기에, 이라크 침략을 주도한 부시 등의 전범들은 지금도 이 나라 저 나라를 즐겁게 돌아다니면서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3. 산업부문에서 금융부문으로의 자본의 유출
주택담보 대출, 가계 대출의 미증유의 활성화에 따라 부동산 버블이 생겼다가 터지고, 가계빚의 피라미드 밑에서는 궁극적으로 신용 불량자들이 하늘만 아는 고통을 겪게 되고 소비시장은 결국 위축됩니다. 지금 국내 같으면 가계대출 금액은 가처분 소득의 146% 정도 되는데, 이건 이미 미국, 일본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수의 가계부채를 늘리면서 은행 자본이 짭잘한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머지 않아 파산자의 대량화에 따라 은행 자본도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가계부채의 버블은 한국형 신자유주의 위기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융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원자재와 자원, 특히 석유 등을 놓고 투기를 벌여 소득을 올리는 수법이 발전되는 것인데, 그 투기의 효과로는 지금 유가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배럴당 100불 이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위축되는 것은? 산업부문과 소비자들이죠. 결국 이윤의 최대화를 노리는 투기자본은, 경제 전체의 수익성을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도대체, 높은데에 잘못 올라갔다가 결국 거기에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를 10개월짜리 아이하고는 무엇이 다르단 말에요?
4. 비시장적 부문의 시장화
이는 무엇보다 의료와 교육의 시장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국내 같으면 예컨대 '의료 관광객'의 극심한 유치 정책 등은, 바로 잉여자본들이 의료 부문에 마구 진출하려 하는 상황과 직결돼 있습니다. 사립대학의 실질적인 영리기업화와 등록금의 살인적 급등도 이 경향의 일환입니다. 학생들을 등쳐먹고 비정규직 교원들을 등쳐먹고 청소 노동자까지 등쳐먹어야 대학 자본이 건설 자본에 발주를 해서 필요도 없는 새 건물을 짓게 하는 등 토건 자본주의 기본틀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상당수 학생들의 빈민으로의 전락인데, 이것도 - 그 비인간적인 측면들을 차치하더라도 -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소비 시장의 장기 지속에 전혀 기여하지 못합니다. 소비 시장으로서는 여유 있는 고객들이 필요하지, 등록금을 내기 위해 굶다시피 해야 하는 고학생들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이윤률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잉여자본들이 어딜 가도 결국 그 결과는 수백, 수천만, 수억 명의 죽을 고생과 폭사, 병사, 전사, 그리고 궁극적인 경제의 치명적 위기와 공황의 도래입니다. 자본의 부채를 국가가 도맡아도, 결국 국가가 파산 위기를 맞는 것이죠.
그러면, 자본주의를 살리는 궁리를 하느니, 차라리 '자본주의 그 다음' 사회를 상상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 살인적인 체제는 수정자본주가 되든 그 어떤 자본주의가 되든 어차피 결국 고통과 사회적 위기만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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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철폐 혁명에 나서자" (레디앙, 2011년 09월 30일 (금) 09:38:02 박노자 / 오슬로대)
"중고생 과도한 학습 짓눌려 투쟁 나서지 못한 것 아쉬워"
오늘 아침에 갓난 딸을 봐주어가면서 우리 적색당의 소식지를 간간히 봤습니다. 이번 호에서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기사는 소식지의 말미에 실린 적색당 청년 조직의 수장인 이베르 어스테볼 동지(Iver Aastebøl)의 "숙제 철폐론"이었습니다.
실은 숙제 철폐는 지금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당면 투쟁 과제로서, 숙제 철폐를 위한 학생들의 시위를 조직하는가 하면, 바로 지금(2011년9월26~30일간) 숙제 철폐를 위한 전국적인 학생들의 동맹 휴업, 즉 맹휴까지도 조직합니다. 맹휴 참여는 한 시간 동안의 수업 참여 거부와 숙제 철폐를 위한 서명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참가 의사를 밝힌 학생들은 700개 학교 4만 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재미있게 본 기사는 바로 이 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인 셈이었는데, 그 논리가 정연하여 국내로서 잘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부분인지라 여기에서 한 번 논해볼까 합니다.
적색당 청년 조직의 입장에서는, 학생은 기본적으로 학습노동자입니다. 학생에게 의무적인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학교"라는 기관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1) 소년, 소년, 청년들에게 권위와 권력에 습관적으로 복종하는 유순한 심신을 배양토록 유도하는 등 친체제적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을 사회화하고 2) 학습노동을 통해서 학생들을 주어진 과제를 지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 엄수 등에 익숙해진 예비노동자군으로 편성시키고 3) 성적을 매개로 해서 아동 각자의 계급적인 신분상승의 한계를 규정짓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학습 공장'의 노동자가 되는 셈인데, 노르웨이에서 노동자라면 하루의 8시간 노동을 마치고 일단 그 휴식 시간에는 직장에 대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즐길 것이나 즐기면 됩니다. 그러면 왜 예비노동자인 학생들은, 성인노동자들과 차별돼 그 자유시간까지 학습노동에 바쳐야 하는가, 라는 것은 "숙제 철폐론"의 법리적인 기반입니다.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숙제란 학습노동자의 개인 시간까지 "학교"라는 체제의 기관이 무단 침범해 식민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아동들의 개인 시간을 식민지화하는 것은 숙제뿐입니까? 체제의 논리를 가장 입체적으로 방법으로 은근히 전달하는 텔레비전부터, 유희를 통해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배우게끔 하는 컴퓨터게임이라는 소프트웨어 자본의 상품까지, 국가와 자본이 아동들의 시간을 식민지화시키고 그 심신을 체제의 규칙대로 맞추어 개조시키는 매개체들이야 무궁무진합니다.
이들 모두가 당연히 사회주의자들의 투쟁대상이 돼야 하지만, 숙제라는 이름의 아동들에 대한 폭력은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 투쟁은 보다 시급합니다. 숙제는 추가 학습노동으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무엇보다 계급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로서의 성격은 강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만 해도 저녁마다 아홉살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검토해주느라고 꼭 30~40분 정도 보냅니다.
저야 정신노동을 하니까 집에 와서 이런 추가 노동을 할 여력은 그나마 있지만, 8시간 동안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붙이고 나서 한 번 아이 숙제를 도와주어보시지요. 파김치된 상태에서 숙제를 도와주다가 그저 자버리고 말 가능성은 높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컨대 제 아내만 해도 아들의 노르웨이어 작문 및 문법, 맞춤법 숙제를 도울 능력이 거의 없고, 많은 비서구 1세 이민자 학부모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 부모의 "개인 코치"를 받아 숙제해온 아동(저희 아들의 학급에서는 약 3분의 1 정도)들과 그렇지 못한 아동, 특히는 육체노동자, 이민자 가족의 아동들 사이에 적지 않은 "학습능력 격차"가 생기고 맙니다. 그 격차는 나중에 내신 격차로 이어지고, 내신 성적대로 대입이 이루어지는 노르웨이적 상황에서 고인기 학과 진학 가능성의 차이로 또 이어집니다. 노르웨이 사회 상층부의 상당 부분은 법대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법대에 진학하자면 내신은 꽤 좋아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노르웨이지만, 저숙련 저임금 육체 노동자의 자녀로서는 법대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숙제를 철폐하면 이와 같은 상류층, 중류 상부층의 아동들만의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그나마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기회가 약간 더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한 가지 반론은 벌써 예상됩니다. 아이들의 학습량을 줄여서 모두들을 바보로 만들 생각이냐는 식의 반론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실제적 실효성이 매우 제한돼 있기에, 그 지식의 주입을 조금 덜 받았다고 해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일반 기업체 사원 같은 경우에는 영문으로 된 업무상의 편지를 읽고 간단한 영어 서신을 작성할 능력까지는 필요할 수 있지만, 외국 바이어와 구두교섭할 일이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 일반 사원이 아닌 외국어 계통으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쌓은 전문가를 보낼 것입니다.
수학의 원칙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면 나쁠 일이야 없지만, 계산을 어차피 계산기로 하는 직장에서는 과연 암산부터 고등 함수까지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는가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으면 씩 웃고 "주변부형 파시즘을 공연히 미화하는 것이군"이라고 촌평할 정도로 역사를 배운 것도 나쁠 게 없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연도, 사건" 위주의 "국민"과 "민족" 이야기의 한계도 누가 봐도 뻔한 것이죠.
사실 너무나 몸에 가까이 와닿고 재미있을 수도 있는 역사를 무미건조한 "교과서"로 만들어버리고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취미를 애당초 죽이는 것은 정말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학교 공부와 우리들의 실생활은 아주 딴판임으로, 학교 공부의 "양"을 적당히 줄인다는 것은 우민화는 절대 아닙니다.
아동들의 해방운동입니다. 아이들이 방과후 과정에 다녀도 4시반에 집에 오는, "학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노르웨이에서마저도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백베, 천배 더 그렇겠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교육대중화의 과정에서 대개 교육내용의 간소화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100년 전의 노르웨이 고등학교 졸업자는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자유자재로 했어야 했고, 성경책의 내용을 꽤나 자세히 알아야 했습니다.
고학력자나 개인 과외 선생을 붙일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 이상, 아주아주 버거운 고난도의 커리큘럼었죠.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은 다 그랬습니다. 실효성은? 1902년에 런던에 처음 온 레닌은 비록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아주 많이 배웠다 해도 영국인들이 말하는 걸 한 마디도 알아먹을 수 없었답니다. 그나마 문법 정도 다 알고 독해력은 있었으니까 그다음에 약 반년 동안 속성으로 다 다시 배운 거죠.
지금 같으면 아이들에게 고전 언어의 학습은 순전히 자율에 맡겨져 있는 문제입니다. 라틴 문학이 좋아서 학습하려는 이들은 (노르웨이 같으면 충분히 있는) 여유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고, 관심없는 다수는 라틴어 강제 주입의 악몽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것이죠.
저는 이를 일종의 해방으로 봅니다. 강제되어지는 숙제보다는,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독서에 재미를 붙이게끔 하는 자율적 독서의 지도가 필요하지요.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숙제를 하는 것보다 본인이 알아서 하는 독서에서 훨씬 더 많은 알찬 공부를 하게 됩니다.
물론 특히 교육경쟁에 미칠대로 미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숙제 철폐의 혁명"은 당장 이루어지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의 혁명은 어려워도, 진보세력들은 점차적 학습량, 학습시간의 감소 쪽으로 교육개혁의 방향을 트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이들도 조직해서 투쟁을 통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1920년대 조선 같으면 동시대의 노르웨이보다 학생들의 맹휴들은 훨씬 더 치열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과도한 학습에 억눌린 중, 고등학생들이 그러한 투쟁에 잘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주 아쉬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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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종교 제국주의? (레디앙, 2011년 09월 24일 (토) 08:23:22 박노자 / 오슬로대)
영혼 매매는 성 매매보다 치사하다…'종교 업자'의 실체
망국 직후의 혼란과 초과 인플레이션에 의한 상상 이상의 민생고,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시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낮에도 길거리 다니기가 무서워질 정도로 악화된 치안상황... 소련 체제와 함께 정의로운, 형제애에 기반하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민중들의 수백년 간의 꿈까지 일시적으로 무너져 세상만사가 그저 병리적인 이기주의와 무조건적 생존, 치부의 논리로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죽은 코끼리의 시체 앞으로 하이에나들이 운집하듯이, 죽은 소련의 시체를 밟으면서 약간의 이득을 취해보려고 온갖 부자나라 '종교단체'들이 이 죽음의 곳에서 비상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물론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장 가시적이었지만, 의외로 한국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현재 같으면 구소련에서 공식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577명이나 되지만(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천여명이 될 것입니다) 20년 전 레닌그라드만 해도 적어도 30~40명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의 언행 중에서 지금도 잘 기억되는 것은, 무엇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심이었습니다. "너네들이 70여년 동안 공산주의를 했기에 지금 이처럼 가난하게 된 것이고,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장사를 잘한 덕에 이처럼 부유하게 되고 복을 받았다"는 대조법 정도는 거의 공인된 레토릭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러시아 같으면 종교인으로서 거의 보기 드문 물질적 '시혜'에 대한 맹신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음식 등을 제공해주고 돈 벌 기회도 가끔 주고 나중에 한국 단기 유학 기회 정도 마련해주면 '성령'의 내림을 받지 않을 젊은이가 없다는 것 역시 대다수의 확신이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대한민국의 '우방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진 구(舊) 적대국에서 저들은 위풍당당한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이제 항복한 옛 적들의 과거를 심판하고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돈이라는 무적의 무기를 가진 정복군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해서 사회적 분노를 산 것인가요?
이 정복군을 대하는 데에 잇어서 무너진 나라의 '원주민'들은 크게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스리랑카의 경우처럼 민족주의적 신념이 강하거나 공산주의적 이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저항파'는 모든 유혹들을 뿌리치고 정복자들과의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접근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히 무너진 나라에서는 한국 종교 제국주의에 끝내 맞설 사람들은 너무나 드물었습니다.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의 유리 왕인 교수같이 철저한 공산주의적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스탈린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마저도 '3.1문화센터' 등 선교단체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지 못할 정도이었습니다. 단, 유리 왕인 교수의 경우에는 북-러 친선단체에서 계속 활동하고 대북교류를 계속하는 등 북조선과의 전통적 친교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역시 지조를 지키셨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는 마지막 해까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셨던 제 스승님 미하일 박교수까지 일부 선교사와의 협력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하들까지 먹여주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던 셈입니다.
보다 흔한 두번째 그룹은 저 자신처럼 '면종복배'(面從腹背)로 일관하는 '내키지 않는 협력자'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정복군 안내자 노릇을 해도 가면 갈수록 '부역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파도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 같으면 캐나다 출신의 한 한국 목사의 통역 노릇을 몇개월 동안 했는데, 낮에는 통역을 하고 저녁에도 "성금을 많이 내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같은 이야기를 통역해야 했던 제 자신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에 대한 자기혐오적 명상에 잠기곤 했던 것입니다.
정복군들에게 성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 아니면 혼(魂)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 라는 화두에 대해서 제가 그때에 꾸준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더 치사하다는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개월 혼매매 업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주로 관광가이드 등의 아르바이트로 전환했지만, 혼매매 업소에서 보낸 그 몇개월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입니다.
끝으로는, 세번째 그룹은 정복군에게 아예 항복을 하여 정복군이 강요하려 했던 영적인 '변발변복'(?髮變服), 즉 '신앙고백'하고 "열심히 하나님에게 빌어야 돈도 들어오고 복도 온다"는 정복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아무래도 협력해나가면서 호구지책을 도모하는 것은 그래도 더 쉬웠을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남는 것은 부역자로 구성된 무(無)명분의 지배층과 기형적인 대외 지향 일변도의 경제, 그리고 지식인 계층의 매판화와 그 쌍둥이로서의 병리적으로 과장된 일각의 민족주의 등등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사회는 반세기가 지나도 다 치유하지 못합니다.
한국의 2만여 명의 해외파송 선교사들이 상징하는 종교적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무엇이 남는가요? '선진문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돈 좀 주면 '원주민'의 내면의 풍경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원주민' 사회의 마음 아픈 각성과 자기 자신의 끝없는 취약함에 대한 자기혐오의 감정, 종교적 심성이 거래되는 현상에 따르는 허무감, 이 정도일 것입니다. 성매매가 몸의 병을 가져다주듯이, 혼매매는 엄청난 마음의 병을 가져다주는 겁니다.
단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종교적 정복군과의 '만남'은 소극적인 자기혐오나 반성 등으로 끝나지 않고 돈이 인간의 내면까지도 바꿀 수 있는, 영혼도 상품화되는 이 저주받을 제도, 즉 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증오와 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 피해자들이 자본가로서의 외국 '종교 업자'들의 실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저항해야 할 것인지, 나아가서 그 파송국의 피해 대중과 같이 손잡고 이 기형적인 세계적 제도에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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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87년 투쟁만큼 중요하다 (레디앙, 2011년 09월 20일 (화) 09:21:53 박노자 / 오슬로대 교원 노동자)
5차 출발을 앞두고…"재벌독재 해체돼야 민주-민생 가능"
5차 희망버스는 10월 8일에 출발한다. 토요일인 그 날에 노르웨이에서 육아노동을 하느라고 국내에 가서 같이 참가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 불가피한 불참이 그저 너무나 미안하고 아쉬울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날 '희망버스' 운동을 24년 전의 독재 타도 운동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역사적 현장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24년 전에 열사들의 자기 희생과 수많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파시스트적 군사 독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면, 오늘날 '희망버스' 운동은 어쩌면 군사독재보다 더 위험한 재벌독재를 상대로 싸운다.
이 재벌독재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도 대다수의 생계 보장도 없을 것이다. 이 재벌독재는 노골적인 파쇼성(性)을 과시한 군사독재에 비해 훨씬 더 은근하고 교묘하고, 겉으로는 매우 '선진적'으로, 깔끔하게 보인다. 그만큼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총국민생산에서 소위 '10대 기업', 즉 주요 재벌 왕국들이 보유하는 자산의 비율은 약 75%에 이른다. 그들이 한국을 소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이 나라를 소유하기에, 자유주의 정부(김대중, 노무현)가 되든 극우보수주의 정부(이명박)가 되든 그들의 몫이 계속 불어날 뿐이다.
대기업 전체로 봐서는 지난 6년 동안 평균 영업이익률이 6.7%에서 7.6%로 늘어나는 등 “장사가 짭잘해진” 셈이다. 위기다, 공황이다라고 하지만, 이는 대기업들의 세계와 무관한 이야기다. '대기업의 꽃'이라고 할 10대 재벌의 계열사들은 지난 3년 동안 영업이익은 70%나 급증했다.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재벌 이익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국내 전체 노동자의 거의 60%에 가까운 비정규직과 25%나 되는 저임금 근로자층, 국내보다 임금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의 한국 재벌과 그 하청기업들의 수백만 명의 피고용자들에 대한 착취가 그만큼 강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지속적 번영은, 다수에 대한 약탈로 뒷받침된다. 그 약탈이 가능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리 24년 전에 군사독재가 물러났다고 해도 재벌 독재자들의 '경영 행위', 즉 착취와 이윤 수취 행각에 대해서는 노동자들도 시민사회도 그 어떤 발언권도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을 줄여 대신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수법으로 노동을 불안화하고 약탈을 강화해도, 저임금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하청업체에 단가 내리기 압력을 가해 쥐꼬리만한 노동자 봉급을 더 줄게 해도, 필리핀 같이 절망에 빠진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은 곳에서 몇 년 사이에 수십 명이 사고사를 당한 '죽음의 공장'을 차려도, 그곳에다가 물량을 빼돌리고 국내 노동자들을 불법 해고한다 해도, 그 '경영상의 판단'에는 노동자와 시민사회는 물론 국회마저도 개입하지 못한다.
재벌들이 소유하는 나라의 정치구조상 국회가 그러한 개입을 효과적으로 하려는 의지마저도 물론 사실상 없다. 군사독재는 물러나도, 우리는 극소수 약탈자들의 전횡을 전혀 막을 수 없는 끔찍한 독재사회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번 '희망버스' 운동은 이 기업 독재의 횡포를 막아보려는 의거(義擧)이며, 과거 민주화 운동의 유기적 연장, 즉 기업 독재 타도 운동의 신호탄이다. 지금 이 운동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불법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복직돼야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늘어나는 만큼 국민총소득에서의 노동자 총임금의 비율(노동소득분배율)이 계속 줄어드는 이 사회의 퇴보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기업 독재를 본격적으로 타도할 수 있는 전망이 열릴 것이다.
이어서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권 확보, 비정규직의 양산을 본격적으로 막을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 관련 법률 통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요 기업의 사회화 등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한진중공업이라는 재벌독재 왕국의 불법 행각과 싸우는 지금의 이 운동은 기업 독재 타도의 중차대한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을, 아무리 물대포를 동원하고 아무리 무더기 입건, 기소 등 탄압을 자행해도, 재벌의 사병(私兵)으로 전락된 국가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수를 위한 나라, 공공성이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운동은 역사의 커다란 진보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고, 전두환의 독재가 물러났듯이 결국 이건희와 조남호의 독재도 붕괴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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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레디앙, 2011년 09월 16일 (금) 12:39:10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는 불행의 체제…극복 위한 일상의 투쟁은 필수적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주적 생명의 리듬을 느끼는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건 맞고, 단사표음 (簞食瓢飮)의 행복에 대한 조상님들의 이야기도 어찌 틀렸겠습니까? 그것까지 다 맞는데, 저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맑은 마음으로 꽃위의 이슬을 즐겨보고 아기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투쟁'이라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투쟁이란 동심(童心)을 되찾아 천지의 도(道)와 합일되는 일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일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봤을 때에는 욕망을 자제해 마음공부에 몰두하는 일(遏人欲處工夫)과 '투쟁'이라는 과정은 거의 정반대로 보이긴 합니다. 혁명적 상황에 처해지거나 폭압적 정권을 상대할 때에는 폭력을 대단히 혐오하는 투사가 불가피하게 바로 그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얼마든지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 혁명운동의 역사만 봐도 대체로 과격한 투쟁 수단에 호소하는 이들은 대개 애당초에 성품이 매우 선하고 폭력의 '폭'자도 입에 올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1878년에 한 정치범을 체벌케 한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경찰청장을 사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인민주의/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여걸 베라 자술리치(1849~1919)를 보세요.
산파라는 직업상 생명의 탄생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녀는, 돈이나 배려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주고, 천사처럼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재판정의 배심원들이 그녀를 무죄로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평소의 평판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망명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주로 대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한 혁명적인 계몽운동에 남은 인생을 바친, 즉 폭력과 별다른 개인적 인연도 없었던 그녀에게는 운명의 1878년 1월 24일에 경찰청장의 가슴에 권총을 맞추어 쏘는 것은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제정 러시아와 같은 무간지옥에서는 투쟁이란 가끔가다가 본인의 착한 마음을 극도로 억제하고 팔자에 없는 무기를 잡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지만, 노르웨이처럼 보다 개명한 사회 같으면 본인이 속해 있는 적색당(공산당)에서의 투쟁이란 꽤나 시간 소모적이고 심심한 일일 뿐입니다. 회의하고 선전물을 쓰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일간지 <계급투쟁>지를 구독하면서 가끔 거기에 글을 쓰고, 집회에 나가고... 생업, 육아에다가 그저 또 하나의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폭력적이거나 심심하고 시간 소모적이거나 하는 이 '투쟁'이라는 과정은 정말 인성 (人性)에 맞지 않은, 이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무관하고 궁극적으로 인류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필요 없는, '먼지' 같은 일일까요?
황제의 감옥에서 양심수가 채찍을 맞고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의 웃음소리만 들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야 있지만, 베라 자술리치처럼 관세음보살과 같이 착한 사람이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권총을 잡은 것은 그저 자타의 행복을 빌고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폭압 통치 하에서 아무리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아기 웃음 소리를 들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실은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노르웨이만 해도 '정상적인' 삶이란 자신을 노동시장에 내다파는 '임금노예'(wage slave)의 삶이고, 자신의 인간적 본질인 노동을 상품화해 파는 삶입니다. 노르웨이의 '임금노예' 정도면 세계적으로 꽤나 '부유한 노예' 부류에 속하겠지만, 제3세계에서 5초마다 한 아이가 굶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옆집의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를 즐겨 들을 수만 있겠습니까? 자본주의가 이 지구별을 1년에 6백만 명의 아이가 굶어죽는 커다란 고문실이자 도살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정말 개인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물론 선전물을 쓰고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직접적으로는 한 아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심심하고 무의미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반자본주의적 정당과 활동가층, 이데올로기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오더라도 자본주의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고,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 어떤 행복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레닌그라드에서 사시는 노년의 친척과 통화하고 나서 제가 결국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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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인신지배 시대에 살다" (레디앙, 2011년 09월 02일 (금) 10:28:12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 스티브 잡스, 장자연의 31명 악마들이 똑같은 이유"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보면 폭력 그 자체입니다. 대다수 피고용자들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조건 고용을 갈구하고, 해고를 두려워하고, 고용관계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한국의 경우에는 고(故) 최고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촤악의 경우에는 실직자, 해고자 등이 아사까지 당할 수 있기에 그러는 것이고, 그나마 굶어죽는 빈민이 없는 유럽 같은 경우에는 내구재 구입이나 휴가 여행 등을 할 수 없는 이등시민인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즉 체제로부터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실업자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생명 박탈이든 유럽 복지국가식의 '풍족한 삶'의 박탈이든 우리로 하여금 '임금 노예'(wage slave)으로서의 삶을 계속 하게끔 하는 것은 어떤 '박탈'에 대한 공포입니다. 공포에 의거하는 체제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 폭력의 유형에 있어서는 반(半)봉건적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준(準)파쇼 정권 하에서 준핵심부 자본주의 야수로 압축 성장한 대한민국과, 핵심부 국가들은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핵심부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 적어도 그 사회 안에서는 - 대개의 경우에는 비(非)가시화돼 있고 깊이 내면화돼 있는데다가 '합리적 절차'와 '평등한 시민' 간의 친절로 잘 포장돼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가장 터프한 사업가'로 악명이 높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를 보세요. 그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직원(임원까지 포함해서)들을 '즉석 해고'한 이야기나 자기 앞에서 감히 칠판에다가 어떤 설명의 글을 쓰려는 부하 직원에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일화 등이 유명합니다. 대체로 아집이 강하고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과시하기를 매우 좋아하는 타입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스티브 잡스가 그 회사 빌딩 앞에서 일인시위하는 해고자에게 '매값 폭행'을 감행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맞아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잡스와 최철원 사이의 차이라면, 잡스가 제도적 장치(경영자의 무조건적 해고권 등)를 이용(내지 악용)하여 폭력적인 권력 행사 정도만 할 수 있는 반면, 최철원이 그 어떤 제도적인 '매개체'도 없이 '아랫 사람'의 신체를 무조건 폭행해도 되는 것으로, 즉 자신이 적어도 한 순간 동안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즉, 잡스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제도화돼 있다면 최철원의 폭력성이 직접적이며 물리적입니다. 부하(또한 과거의 부하, 또한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의 신체를 돈주고 소유물처럼 폭력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그의 생각을, 그에게 집행유예형을 내린 법원, 즉 대한민국의 공권력까지 뒷받침해주기에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잡스의 요구사항(효율성의 최대화, 지시 숙달 등등)을 내면화하면 그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의 무기, 즉 해고를 면할 수 있겠지만, 최철원들의 무리들이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과 폭언의 무기는 아무리 몸을 낮추어 많이 굽실거려도 피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대학원이나 대기업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랫사람의 몸과 마음을 위사람이 언제나 술 동무로 이용하거나 손찌검이나 폭언으로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랫사람의 시간과 노동을 윗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국형 인신지배는 어떤 면에서는 참 역설적입니다.
일면으로는 이는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행위의 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해당 부문의 종사자가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는 것이고, 잘 안 알려져 있는 만큼 사회의 공식적인(서구적 자유주의를 표준 준거를 삼는) 윤리 규정과의 충돌을 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절대 다수의 남성들이 군대에 갔다와야 하기에 '원산폭격' 정도면 대한민국 선남선녀의 일반 상식에 속하지만, 고(故) 장자연이 죽으면서 '31명의 악마' 명단을 남기지 않았다면 연예계와 무관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연예계 입문자가 통과해야 할 '통과 의례', 즉 소속사 대표의 폭력과 이 사회 '오야붕'들에게의 술시중/성상납 등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인신지배의 실체가 갑자기 노출되더라도 이는 지배자에게 하등의 불편함도 안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뭐, 장자연을 괴롭혀 결국 간접 살해한 31명의 악마들 중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사법처리됐습니까? 이 땅을 인신지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다스리고 있기에 무엇이 어떻게 폭로돼도 그들은 무사할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저들의 인신지배 관행들은 비공식 영역에 속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이 나라의 '관습법', 즉 성문법보다 어쩌면 더 엄격하게 지켜지는 불문율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외국학생에게 지도교수가 (강)권하는 술을 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주량을 키우라는 조언은, 한국어를 배우라는 조언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어 소통은 덜 돼도 상관없지만, 위사람이 아랫사람의 위(胃)까지도 지배하는 미풍양속(?)을 어기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과거의 군주들이 '삼대(三代: 요, 순, 유임금 시대의 정치)의 치(治)'나 '백성교화'를 외쳤듯이 요즘 주상이 '선진화'를 외치면서 돌아다니지만, 저들의 그 어떤 구호와도 무관하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한국형 인신지배는 구미형 '제도화된, 비(非)노골적 폭력'으로 탈바꿈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일자리 등이 불안화될수록 피지배자들의 안정추구 심리가 강화되는 것이고, 또 지배자들이 그 심리를 이(악)용해서 인신지배 강화를 통한 사적인 및 공적인 착취 강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교에서의 정규직으로서의 취직이 아직도 흔히 가능했던, 거기에다가 운동권까지 아직도 힘이 있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대학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의 성추행부터 대필 강요까지 아주 성행했습니다.
운동권이 거의 죽고 정규직 고용도 바늘구멍처럼 된 지금 같으면? 도미유학파의 지배구조 속에서 국내 학위 그 자체는 의미를 많이 잃었지만, 고용을 갈구하는 이들의 대학실력자에게의 아부의 필요성은 훨씬 더 강화된 셈입니다.
불안화된 세계에서는 아부, 인신지배에의 복속에 의한 개인적 추종관계 형성 등은 그나마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으로 느껴집니다. 신자유주의로 망해가는 사회는 우리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공적으로 약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인신지배 관행을 퇴치시키는 방법은? 우리는 좀 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만도 아니고 민주화된, 전근대적인 찌꺼기가 없는 무상 대학 교육까지 강력하게 요구하는 학생운동부터 부활돼야 되고, 대필 요구 등을 고발할 수 있는 강력한 조교, 강사 노조가 필요합니다. 혁명적 투쟁이 아니면 '매값'과 "아나운서 되려면 다 바쳐라" 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이 유령들을, 우리가 장사지내 우리 손으로 무덤으로 보내야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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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혁명을 포섭한다 (한겨레, 박노자 글방, 2011/08/26 07:30)
국내에서 "무상급식 주민 투표"와 같은 수준의 촌극이 연출되는 현재에, 국외에서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계속 이어져 터집니다.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공황이 심화되고 미국 달러의 입장이 약화되는 가운데, 세계적인 재벌로 성장(?)하게 된 카다피가(家)는 리비아에서 권력 상실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리비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분명히 일면에서 "혁명"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진행이 어떻게 됐든간에, 리비아 사태의 뇌관은 특히 지역적, 부족 소속에 따른 차별 등의 여러 불평등이 부채질한 상당수 기층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으로 시작됐지만, 과연 이 사태가 과도국가위원회 (반군의 정부기관)의 집권과 카다피 가문의 완전한 몰락으로 일단락지어진다고 해서, 리비아 민중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겠습니까? 민중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정도 아니더라도, 과연 형식적 민주주의라도 어느 정도 모양 잡힐 것인가요? 저는 솔직히 회의적 입장입니다. 지금 리비아 상황을 보면 일종의 기시감 (旣視感)이 들 정도로, 상황의 전개가 지난 40여년 동안의 카다피 정권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재현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카다피정권은 세계 지배자들의 주구(走狗) 뿐이었습니다. 리비아 해군은 아프리카 북안을 돌면서 유럽에 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을 단속했는가 하면, 석유 판매로 벌어들이는 정권의 돈은 런던정치경제대학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아성을 지탱하는데에 마구 들어갔습니다. 단, 카다피가는 유전의 완전한 사유화와 외국자본에의 완전한 매각을 반대했으니 서방 열강들이 그러한 매각을 할 것 같기도 한 과도국가위원회 측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카다피 정권은 처음부터 그랬나요?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1969년에 집권한 카다피는 원래 자칭 "이슬람 사회주의자"이었으며 이집트의 "진보적 민족주의자" 나세르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외국 자본의 이권이 몰수되었는가 하면, 국외에서는 각종 반제 급진 단체들은 리비아로부터의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유럽의 아일랜드 공화국군부터 아시아의 필리핀 공산당의 게릴라 투쟁 부대, 태양주의 마오리족 급진운동이나 호주원주민의 운동 등 카다피 정권 수혜자의 목록은 1970-80년대 급진 투쟁단체들의 종합 리스트에 가깝습니다. 1986년에 리비아 정부 특무들의 소행으로 추측되었던 서독에서의 나이트클럽에 대한 공격 이후에는 미 제국이 리비아를 (국제법의 관점에서는 봤을 때에 불법적으로) 폭격까지 하는 등 카다피 정부는 거의 급진적 반제국주의 노선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한 때에 각급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전면폐지하고 그 대신에 러어 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까지 성립하는 등 "미제에 맞장뜨는 제3세계 지도자"의 전형에 가까웠던 카다피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돌연히 전향을 하고 맙니다. 
쏘련 망국과 동구권 붕괴 이후에 가중된 제국주의의 압력 이외에도 그 전향의 이유들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카다피를 중심으로 하는 그 족벌이 제국주의 진영과 화해하고 국내에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어느 정도 사유화시켜야 그들이 가졌던 행정력을 금전 자본으로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국제적인 "큰 손"으로 거듭나기를 원했습니다. 국제적 정의 대신에 점차 이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진 지도층의 친자본적 행각을 막을 만한 노동계급의 조직 등은 리비아에 없었기에 동구권 붕괴와 걸프 전쟁 등 미 제국주의의 새로운 세계패권 확립에 따라 카다피는 비교적으로 손쉽게 친미파로 전향하여 약 1994년부터 제국주의와의 화해 공작에 들어갑니다. 대량살상무기 제조 프로그램을 완전 공개하고 폐기한 그의 2003년 결정을, 미국 협상가들은 그 뒤에 오랫동안 북조선 상대자들에게 들이밀면서 똑같이 하라고 마구 압력을 놓을 정도로, "새로워진" 카다피는 서방 측이 좋아할 만한 "모범생"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혁명가에서 국제재벌가로의 그의 변신은 바로 그 정권의 주된 패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초호화 부동산을 사재기한 카다피가의 "큰 손" 행각은 차별 받는 리비아 동부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반(反)카다피 투쟁의 선두에 선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의 명분을 공고화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리비아의 유전들을 전부 사유화하여 해외매각하려 하지 않았던 카다피에 대해서는 구미 지배자들도 끝까지 지지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국 민중의 지지를 잃은 데도 세계 자본과의 완전한 결탁에 실패한 카다피는, 결국 그 양쪽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카다피가 패망하고 있다고 해서 리비아 민중의 열망들은 과연 다 충족될 것인가요? 글쎄, 지금 상황의 전개를 보느라면 왠지 그렇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카다피가 전향하는 데에 20여년 걸렸지만, 그 반대편에 서는 과도국가위원회는 이미 지금부터 국제자본의 주구 노릇을 자청하고, 민중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계속하려는 듯한 인상입니다. 나토의 폭격 덕분에 비교적으로 손쉽게 카다피 군대의 저항을 꺾을 수 있었던 과도국가위원회의 "지도자"라고 할 마무드 지브릴 이라고 하는 자는 미국에서 정치학 교수와 "아랍 지도자를 위한 훈련"의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카다피 정부의 각료로서 바로 신자유주의적 민유화 정책을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해서도 선출되어지지 않은 과도국가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카다피 정부 안에서 민유화 등 친서방 정책을 주도했다가 망해가는 카다피를 떠난 자 (알 이싸위 등)나 해외학계 등에서 친자본적 학술 활동을 해온 자 (워싱턴주립대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을 가르쳐온 "석유 장관" 알다르쿠니 등) 등은 당장 눈에 띕니다. 지금 이들 과거국가위원회 위원들에게 영국이나 터키측에서 카다피 정권의 경찰 조직 등을 그대로 유지시켜 이용하라고 적극 권고하고 있는데, 영국 등 나토의 주요국가에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저들이 이와 같은 방침을 채택하여 카다피 국가의 권위주의적 골간을 어느 정도 유지할 가능성은 농후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원하고 있는 작업, 즉 해외 자본의 무분별한 유치와 국가 자산의 해외 매각 등을 문제없이 잘 진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다피의 전향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그를 추방하고 있는 민중 운동을 전유하려는 반군 지도부의 요인들 같으면 굳이 전향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이미 국제자본, 서방 열강과 결탁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은, 리비아에서 노동계급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사실이죠. 숙련공이나 지식노동자, 전문가의 다수는 참정할 수 없는 외국인들이고, 정치 참여가 가능한 리비아인들은 대개 자영업이나 국가관료직, 전통 목축업 등에 종사합니다. 그들에게는 근대적인 계급의식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정부는 그 어떤 반동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도 이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저지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합니다. 석유소득 수준에 비해 상당수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지 못하다는 사실이나 차별 등에 대한 불만은 많아도 이 불만이 계급적으로 인식화되고 조직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반제국주의적 성향의 지도자가 설령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그 지도자가 꿑에 가서 그 권력을 자본화시켜 자신을 재벌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리비아 민중은 안타깝게도 막을 수 없는 것이죠.  
반제국주의 그 자체를 당연히 수긍해야 하고 적극 옹호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나 아프리카의 각종 사회주의적 경향의 신생정부들을 적극 지원한 1970-80년대의 북조선 같으면, 그러한 차원에서는 분명히 "진보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 이는 북조선의 경우에도 해당되지만 - 계급적 내용이 충분치 못한 반제국주의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제국주의를 이기자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중들까지 포함해서 제국주의의 모든 피해자들과 계급적으로 연대해야 하는데, 카다피도 북조선의 지도자들도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반제국주의는 국가 대 국가 대립의 성격을 띠게 됐는데, 그러한 대립에서는 비교적으로 약한 제3세계 국가는 이기기가 힘듭니다. 국가 대 국가 대립이 아닌, 국제적인 계급 대 계급의 대립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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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올바름과 치명적 오류" (레디앙, 2011년 08월 19일 (금) 22:54:47 박노자 / 오슬로대)
"민주주의 가치는 상대적이다…시장주의자들의 자유 제약돼야"
2011년 8월 19일은 1991년 8월 19일에 일어난 소련의 '8월 쿠데타'의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쿠데타', 즉 일부 정통 스탈린주의적 관료들의 거의 절망적인 - 그리고 매우 미숙하고 준비 안된 - 소련 붕괴 방지의 시도 이전에도 소련은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쿠데타'에서 친서방, 친시장 세력(자유민주주의자)들이 완승을 거두자 그 완전한 붕괴는 그저 시간의 문제가 됐습니다.
그 결과? 그나마 서구에 가장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까운 구소련 지역들(발틱 공화국들, 몰도바 공화국 등)은 유럽연합을 위한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지이자 서구 기업, 은행들의 '행복한 놀이터'가 되고, 어느 정도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등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제적인 자원 공급자로 전락하고, 구소련의 중앙아시아의 다수의 국가들(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은 '개발 없는 독재', 즉 민생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없는 최악의 독재 정권 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은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세 가지 커다란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비록 노동자 민주주의가 잘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관료국가는 '지배자'의 노릇을 해왔지만, 일단 개별 기업소 차원의 이윤 추구가 불가능한 전국적 계획경제라는 구조상 장기적인 고(高)기술 개발, 과학연구에 합리적인 집중투자를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지속적 과학발전과 생산력 향상이 가능했던 구조였습니다.
둘째, 노동시장이 아닌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직장 배정 시스템상으로는 완전고용과 각자 전공에 따른 취직은 가능해 행복한 직장 생활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습니다.
셋째, 비록 민주적 장치가 태부족했지만, 집권 공산당이 일단 숙련공 집단을 그 정치적 발판으로 삼았으며 민생, 복지에 대한 상당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재배치돼 있는 구소련의 후계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저 꿈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소련식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모순도 당연히 없지 않았지만(예컨대 냉전적 상황에서는 군수기업들이 지나치게 비대화된 한편, 경공업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저하되는 등 각종 불균형이 심했습니다) 가장 첨예한 모순들은 상부구조의 모순, 즉 사회적 모순이었습니다.
모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계급 형성의 문제였습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체 생산수단들을 다 소유하는 국가는 사회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사회와 유리된 지배계급의 형성은 어느 정도 차단돼 있습니다.
체제의 관리자, 즉 고위직 관료들은 그 위치를 세습시킬 수 없었으며, 지배체제의 중심축인 공산당에서 '출세'를 하자면 일단 일선 기업소에서 일선 노동자로 노동생산성이나 조직능력 등으로 인정 받아 입당하여 맨 밑으로부터 맨 위까지 천천히 '사다리'를 밟아가야 했습니다. 예컨대 그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 가운데 한 명인 고르바초프만 해도, 농업노동자로서 '모범노동자'가 돼 꽤나 일찍 (고등학교 시절에) 입당을 해 그 다음에는 지역 청년공산당(콤소몰) 위원회 하급 간부직부터 중앙공산당 총서기장까지 약 35년 동안 경력을 쌓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는, 그 위치를 예컨대 그 자녀들에게 물려줄 꿈도 꾸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무섭디 무서운 스탈린만 해도 딸(스베틀라나)은 일선 영어번역자, 편집자뿐이었고, 두 아들은 다 1941~1945년에 전쟁터에 직접 나가 몸소 참전해야 했습니다(한 명은 포로가 돼 죽었고, 전투기 조종사이었던 또 한 명은 26차례 출격의 경력을 쌓는 등 꽤 위험한 참전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지배체제는 있어도 뚜렷한 지배계급은 없었던 것은, 바로 혁명과 스탈린의 반동 이후에 성립된 체제의 주요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에서는 일선 노동자, 농민 이상의 대다수 유식자나 간부들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대자적 계급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수많은 간부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자본주의체제를 부러워했으며, 노동자층과 간부층 중간에 있었던 지식인층도 서방 재산가나 고급 지식노동자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선망하는 한편 국제적 냉전이 부과하는 수많은 버거운 제약들(자유로운 출입국의 제약, 해외 취직의 제약)을 혐오하는 나머지 미국과 서방세력에 투항하더라도 냉전을 종식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조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신흥 기업가층의 약 80%는 고등교육 수혜자들을 부모로 갖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현재 러시아 기업가층과 공산주의 시절의 간부층/지식인층의 직접적 계승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지식인층 같은 경우에는 특히 숙련공층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각종 역차별 정책을 혐오했습니다. 예컨대 고(高)인기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 있어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예비 과정'을 이수한 노동자, 농민, 전역 군인 출신들이 가산점을 받아 비교적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한편, 막 고교를 졸업한 지식인 자녀들은 서로 치열한 입학경쟁을 뚫어야 했습니다.
공산당이 그들로 하여금 대입 이전에 적어도 2년 정도 현장 노동 경험을 쌓도록 유도하려 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끼리 '고깃덩어리'라고 지칭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은 모욕이자 고역이었습니다. 바로 이들 간부층과 지식인층은 결국 소련 망국의 사회, 정치적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1985년부터 사회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의 저조라든가 각종 계층적, 민족적 모순의 첨예화에 착안하여 혁신정책을 선포한 고르바초프 신임 서기장은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맞는 노선으로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 조직의 민주화도, 몇 명의 후보가 한 선거구에서 경합을 벌이는 소비에트 조직의 민주화도, 스탈린 시절의 국가범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희생자들의 명예 복원도, 망국적인 군사비용을 줄이기 위한 미 제국과의 화해모드 조장도 다 소비에트 체제의 내재적 논리상 의미있는 정책이었으며, 이런 노선이 망국의 원인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용서할 수 없는 오류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1989년경부터 '현실사회주의' 체제 그 자체를 반대하고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 친서방적 노선을 채택한 분자들의 정치활동까지도 '자유민주주의' 미명하에 허용했는데, 이는 정말 치명적인 오류이었습니다.
결국 발틱공화국 등지에서 민족분리주의 구호하에서 뭉쳐지고, 중앙에서는 친자본, 친서방적 간부층 출신(엘친 등)과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예컨대 사학자 아파나시에브)들을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반(反)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 해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대표했던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말았습니다.
구공산당 간부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골간이 되는가 하면(일거에 대학 총장이 된 아파나시에브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지식인 계층의 상부는 새로운 체제에 매우 좋은 조건으로 기생하면서 그 이념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준지배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지배하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이미 1994년에 러시아에서 약 4백만 명의 주택 없는 하층민들이 발생됐는데, 절대 다수는 사유화의 과정에서 문 닫은 공장 출신의 직공들이었습니다. 엘친과 아파나시에브의 계급적 입장 공고화의 대가는 바로 이들의 배고픔과 병고, 그리고 때이른 죽음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지만, 탈(脫)자본주의 과정에서는 이를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밖에서는 세계 중심부로부터의 각종 파괴 공작과 공격에 노출돼 있고, 안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얼마든지 꿈꿀 수 있는 관리자층, 지식인층의 동요를 막아야 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국가에서는 통상적인 자유민주주의 룰을 적용해 반(反)사회주의적 성격의 정치활동까지 허용해주면 상황에 따라 매우 곤란할 수도 있는 것이죠.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절대 다수 빈민들의 혁명적 열정이 높은 상황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를 적용한다 해도 혁명의 진전은 가능하지만, 말기의 구소련 상황은 달랐습니다. 대중들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지식인층부터 이미 사회주의적 가치를 많이 이탈한 상황에서는, 반(反)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의 자유까지 허용해주는 것은 사실상 반공주의적 광란을 허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적어도 계획경제의 기본과 근로대중을 위한 복지 등 체제의 골간을 지키자면, 자유주의적 룰의 적용을 다소 유보해 차후 단계적으로 하든지 했어야 했고, 친자본주의적 고위층, 지식인층에 대해 훨씬 더 강경해야 했습니다.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는 자유보다는, 노숙자가 되지 않을 자유나, 노동자 출신임에도 무상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자유는 백배 더 중요합니다. 이미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적 통념에 사로잡힌 고르바초프는 -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열망했던 다수의 간부들이 바람대로 - 이를 외면해 '자유민주주의' 구호를 외치면서 다수의 민(民)이 살인적 상호 경쟁과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옥적 사회로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기억해야 하고, 다음에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지배계급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그렇게 할 '자유'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결국 다수의 진정한 자유의 유일한 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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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폭도라고? 봉기의 음악을 들어라" (레디앙, 2011년 08월 12일 (금) 08:36:29 박노자 / 오슬로대)
[영국 사태] 신빈곤층의 정당한 저항…이들 이끌 좌파 없어 아쉬워
피억압자와 억압자 사이의 중요한 투쟁 중의 하나는 바로 언어를 둘러싼 투쟁입니다. 특정 기표들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이미 연결돼 있는 특정 담론을 소환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3.1운동은 '소요'이었고, 전두환/노태우 일당에게는 5.18은 '폭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용어(기표)들을 쓰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명분없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당연하게도 제 정신 있는 사람에게는 3.1운동은 '소요'가 아니고, 5.18은 '폭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겨레>와 같은 자유주의 좌파 언론들마저도 지금 영국의 런던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민들의 반란/봉기를 고집스럽게도 계속 '폭동'이라고 부르고, '난동', '폭도'와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물론 표피적으로 본다면 정당한 명분에 나름대로 충실했던 3.1운동이나 5.18운동과 달리 지금 런던에서 가게 물건의 약탈 등 우리에게 쉽게 '반사회적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와 같은 호명법은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뉘앙스를 잘 봐야 합니다.
3.1운동이나 5.18운동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정치적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었던 반면, 지금 영국에서 일어나는 빈민들의 봉기는 '정치' 영역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불만의 누적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고, 경제적 갈등을 축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강한 운동인 이상, 중산층의 사유재산에 대한 도전(약탈)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는 있다 해도 피지배자들이 사회적 불의에 맞선다는 의미에서는 이번 영국의 빈민 반란은 아주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전설적인' 여러 민중 운동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폭동'과 같은, 적들이 쓰는 용어들을 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 도입과 유럽 사회 소외계층들의 '제3세계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빈민층의 출현입니다. 전통적 빈민층인 저임금 노동자계층과 달리, 이들 '신흥 빈민층'은 아예 공식 부문에 진입조차 못합니다. 저임금이든 최저임금이든 아예 '직장' 그 자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반란의 진원지인 토트넘 지역 같으면 어떤 직업이든간에 구인공고가 나타나기만 하면 평균 약 55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는 신자유주의가 망가뜨린 사회에서 공식 부문으로의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보다 '나은' 동네로 이사 가자면 런던 중산계층 거주지들의 살인적으로 높은 집세를 감당해야 하고, 고학력 직장을 잡자면 일단 연간 9천 파운드까지 올라갈 수 있는 대학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최고 부자들의 10%가 가장 가난한 사람 10%보다 약 273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그 불평등의 정도로는 이미 제3세계의 수도들을 다 능가한 런던이라는 도시에서는, 저학력 빈민층의 젊은 실업자에게는 정말 갈 데가 아주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그가 백인이 아니라면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일조차 어려워집니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계속 걸려 모욕적인 대접을 계속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 같으면 흑인이 백인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릴 확률은 26배나 더 높답니다.
불평등과 폭력, 미래와 희망의 절대적 부재를 늘 직면해야 하는 실업자, 공식 부문 진출을 못해 마약거래나 미등록 저임금 노동(계약 없는 아르바이트), 갱의 싸움으로 시간 보내야 하는 젊은 '유색인종'은 결국 그 누적된 분노를 참지 못해 각목을 들고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반란 가담자들이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그들이 부자들이 여태까지 약탈해온 재물을 그저 '공유'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이번 런던 등지의 빈민 봉기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그 직접적 원인으로 합니다. 극소수 부유층의 재산 증식을 최대화하도록 하는 체제는, 상당수 빈민층의 고통을 동시에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왜 빈민층이 이 구조적인 약탈을 가만히 앉아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의 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의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비조직적인 저항을 하나로 연결시켜 조직적인 혁명운동으로 이끌 만한 좌파세력이 영국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노동당 등 '혁명'을 내세우는 일부 정당들은 있긴 하지만, 주로 중산계층 출신의 그 지도자나 활동가들은 지금 반란자들을 이끌 만한 역량을 보유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조직 노동운동이 이 반란과 손을 잡아 체제 전체를 흔들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억압을 참지 못해 일어서게 된 빈민들은 잔혹할 때가 있고, 무의미하다 싶은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을 억눌러온 체제가 극도로 잔혹한 만큼, 그들의 행동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그들이 가해자로 보인다 해도 실제로는 피해자들이고, 그들의 행동은 총체적으로 볼 때에 정당할 뿐입니다.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 형태는 어떻든간에 근원적으로는 늘 정당합니다. 1918년에, 러시아 혁명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일부 친우들에게 답하면서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불르크가 "혁명의 음악을 귀 담아 들으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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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파시스트 살인마가 한국을 좋아한 까닭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804 19:13)
2011년 7월22일 노르웨이에서 미증유의 학살을 벌여 세계를 경악하게 한 파시스트 확신범 브레이비크가 한국과 일본을 ‘모범적 국가’로 치켜세운 것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옛말로는 국위선양, 요즘 말로는 ‘글로벌 코리아’를 국내인 다수가 선호하지만, 인면수심의 살인마가 친한파로 알려진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놀랄 일도 별로 없다. 브레이비크뿐만 아니고 노르웨이를 포함한 유럽 등지의 극우들의 다수는 대한민국을 대단히 흠모한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는 ‘혈통에 기반한 국가’, ‘단일 문화 국가’, ‘병영국가’, ‘경쟁력 최대화에 올인하는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브레이비크가 구체적으로 찬양한 것은 한국의 이민 정책, 즉 피난민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타민족 구성원들의 유입을 막음으로써 사실상 ‘단일민족’의 골간을 억지로 유지시키는 정책이다. 브레이비크뿐만 아니고 수많은 유럽 극우들이 이 정책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유럽도 한국도 마찬가지로 제3세계 출신의 저임금 노동이 만들어주는 초과이윤으로 자본 축적과 확대재생산의 과정을 촉진하고 있지만, 나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잡힌 유럽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도 적어도 그들에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착과 사회 편입의 기회 정도는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내용이 거의 없는 표피에 불과한 한국은 자국 자본이 부담해야 할 간접적 비용들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단기적으로 집중 착취만 하고 3~4년 후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내보내고 만다. 사회 편입의 기회는, 한국에서 혈통주의적 규칙에 따라서 주어진다. 한국인 가정의 일부분이 된 결혼이주자들이나 혈통적으로 ‘우리 민족’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해외 교민, 이북 출신들은 이 기회를 제한적으로나마 누릴 수 있지만, ‘우리’와 혈통 내지 가족관계가 닿지 않는 절대다수의 타자들은 ‘우리’에게 그저 영원한 타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유럽 파시스트치고, 이와 같은 사회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브레이비크는 이민자 이외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는 단일적인 보수적 가치들을 완벽하게 공유하며 문화·이념적 ‘이탈’을 잘 방지하는 사회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대한민국이야말로 그의 선호도 1위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연구회’와 같은 최근 공안 사건에서 보이듯이, 유럽 파시스트들의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했다가 바로 영어의 몸이 되는 게 아직도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은 마르크스주의든 수능·취직과 무관한 그 어떤 다른 앎의 영역이든,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그저 3~4살부터 살인적인 학습노동에 시달려서 탐구할 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남성들의 경우에는, 유럽인들이 가장 흔히 마르크스주의 등 ‘이단 사상’에 빠지는 청춘의 나이에 2년 동안이나 ‘불온서적’을 읽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군대에 갔다 와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시민권을 누릴 수 있다.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이론적으로 여성주의에 동감해도 외모와 상냥한 ‘여성다운’ 태도가 취업과 출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는 결국 대개는 가부장적 사회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사상’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남자도 여자도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단련시키고 자기 개인의 경쟁력과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에 올인하는 사회 - 이것이 파시스트의 꿈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지금 현재에 유럽 파시스트들의 미래 유토피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차별과 착취, 병영사회의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에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투쟁과 변혁의 길을 택할지는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자본주의, 공포, 사랑 & 오슬로 학살 (레디앙, 2011년 08월 05일 (금) 23:07:05 박노자 / 오슬로대)
'명분 없는 살인마' 한국 등장도 시간문제…자본주의, 북한보다 위험
우리는 대개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취하는 극단적 행위를 이해해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행위에 명분이라도 있으면 '역지사지'를 해서 "방법론적으로는 좋지 않았지만 이해된다."는 방식으로 판단합니다.
1990년대의 러시아에서는 임금을 악질적으로 체불하여 노동자들을 계획적으로 굶겼던 사용주나 공장 지배인들을 참지 못해 끝내 죽였던 일부 노동자들을 그 당시 사회가 어느 정도 이해했듯이 말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저렇게 억울함을 당해본 사회에서는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번의 2011년 7월 22일 오슬로 학살의 경우에는 바로 이 요소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범인 브레이비크는 외교관의 여유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여유있게 회사 직원 내지 중소기업인의 삶을 산 데다가 학교에서 한 번 따돌림을 당한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내뿜고 있지만, 사실 그가 살았던 오슬로의 부유한 서부 지역에서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자손들을 만날 가능성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온, 가시적으로는 그 어떤 억울함도 당한 것 같지 않은 복지국가의 시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증유의 살인마가 된 것이었을까요?
신념 때문이라고요? 신념이야 당연히 중요한 기폭제의 역할을 했지만, 신념만으로는 불가피한 방어가 아닌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 가장 어려운 행동, 즉 동류를 죽이는 행동을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념적 동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심성적 배경이 있어야 이와 같은 행동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가?"라는 질문을, 브레이비크에게만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약 1년 전에 아프간 침략에 참여하고 있는 노르웨이 군인의 한 무리가 "전장에서 인간을 죽이는 그 느낌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섹스보다 훨씬 더 아찔하고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응답해 노르웨이에서 상당한 충격을 일으킨 적은 있었습니다(http://www.vg.no/nyheter/innenriks/artikkel.php?artid=10036779).
그들에 의하면 방아쇠를 당기고 쓰러진 '탈레반'의 시체를 봤을 때의 느낌은 섹스하면서 느끼는 오르가슴 그 이상이었답니다. 그들의 이런 '살인적인 야담패설'이 문제가 되자 그 군인들의 우두머리, 즉 노르웨이 특무부대의 대장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못박고 자기 자신도 폭격 등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태연하게 고백(?)했습니다.
복지국가의 이 자손들은, 억울함을 당해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유쾌한'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서 '게임' 삼아,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고 도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아프간이 아닌 오슬로 시내에서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범죄인이 됐을 것이지만,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탈레반'을 죽였기에 영웅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나름대로의 재분배 메카니즘을 통해 그 나름의 사회정의까지 - 적어도 내부에서는 - 어느 정도 실현하는 사회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살인마들이 만들어집니까? 독자 여러분, 이해 안되시지요? 하기야 "섹스보다 살인은 훨씬 좋다, 아찔하다"는 류의 명언(?)을, 유교적 예의염치를 아직도 완전히 망각하지 않은 사회에서 하기는 조금 더 어려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인마들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입니다. 비록 '복지'라는 완충 장치에 의해서 완화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생산시키는 기초 심성은 바로 공포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만인은 만인의 경쟁자이기 때문이죠. 경쟁에서 지기만 하면 당장 짓밟히고 마는 것인데, 이를 잘 아는 자본주의 세계 시민들은 낙오에 대한 무서운 공포를 지니면서 삽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말입니다. 이미 초등 4학년이 된 제 맏아들이 휴대폰과 개인 컴퓨터를 사달라고 계속 조르는 이유를 따져보면, "급우들이 다 있는데 나한테만 없다.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웃음거리'가 된 것도 아니지만, 미리미리 경계심을 내는 것이죠. '모두들'에게 있는 완구를 갖지 못해 '웃음거리'가 된 아동, 즉 낙오자들을 이미 봤기 때문입니다.
청년 브레이비크도 그랬지만, 왜 돈이 있는 가정 출신의 노르웨이 고교생 다수가 돈을 내면서 운동을 하거나 헬스에 다닐까요? '몸을 만들' 여유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서, 즉 동류 사이에서 소외당할까 봐서 그렇다고도 볼 여지는 많습니다(물론 다른 동기도 있겠지만요).
왜 특히 브레이비크와 같은 자영업자들은 많은 경우에는 이민자들에 대해서 가장 배타적일까요? 저임금 노동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다 싶은 방편인 거 같아서 자영업을 택하는, 그리고 악착같이 일하고 쉬지 않는 이슬람계통의 이민자들을 '무서운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왜 브레이비크가 푸틴과 같은 파쇼적이다 싶은 리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면서도 러시아를 '적국'으로 취급했을까요? 바렌츠해 유전을 놓고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언젠가 쟁탈전을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세상에서는 '사랑'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경쟁자와 그들에 대한 공포, 낙오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과연 브레이비크의 내면만은 이 정도로 왜곡된 것인가요?
아이가 친구들한테 얻어맞아 집에 오면, "다음에 때리고 오라. 맞고 오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은 다반사인 대한민국에서는, 적대심과 공포심은 노르웨이보다 많으면 많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가족애와 같은 과거 전통사회 심성의 일부분이 잔존해 그나마 자본주의의 내재적 살인성을 약간 상쇄할 뿐입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라는 별로 좋지 않은 방법으로지만 말입니다.
가족마저도 해체되면(그 날은 곧 올 것입니다) 무엇이 남을까요? 만인에 대한 경쟁심라와 공포, 소외감을 빼면. 자본주의 심화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바로 지옥으로 행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에게도 다수의 "명분 없는 살인마"들이 나타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북한 위협'이다 '중국 위협'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야말로 우리를 제일 많이 위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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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시민-노동자 연대 되살아나" (레디앙, 2011년 07월 21일 (목) 15:11:46 박노자 / 오슬로대)
한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노동운동 발전 새로운 이정표"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부분 하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이 일이 국내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의 계기, 하나의 이정표를 이룰 것이라는 걸 지금 절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어는 '노동운동의 대중성', 그리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입니다.
1980년대 말에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최소한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점차 도입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학생 등 '중산계급 예비 구성원'들이 노동운동의 흐름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중산계급의 젊은 전위와 노동자 세력의 협공에 군사정권이 무너진 셈이죠.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오로지 중산계급의 전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부분에서 역사의 상당한 진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학연대'가 통치자들에게 위협적이었던 만큼, 그 연대를 해체시키기 위한 노력도 비상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상당수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구성된 시민사회 단체 등은 국가로부터 프로젝트를 받고 국가 자문기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상당 부분 '불순한' 반체제적 성격을 잃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 2월에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의 폭력 진압 등 노동자들에 대한 각종의 야만적인 행각을 주저없이 저질렀지만, 시민단체 활동가 다수에게 김대중은 그래도 '민주주의의 화신'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주로 수세적 싸움에 밀려 있는 노동계는 점차 고립돼 갔습니다.
공세라기보다는 수세이었던 노동법개악 반대의 1996~97년의 총파업은 그나마 시민사회 상당 부분의 지지를 얻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집권 이후에 '민주주의 화신' 김대중과 그 측근들이 열심히 유포해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시민' 계층, 즉 안정된 직장을 보유하는 대졸들이나 중소기업인 등의 사이에서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노동자의 힘든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보수 언론의 레토릭은 상당 부분 잘 먹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2002년 봄의 발전노조 파업 같으면, 노동계 안에서의 지지를 받아도 시민사회로부터 별로 연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민주주의적' 정권이 성공적으로 쌓은 셈이죠.
그때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은 사실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특히 비정규직들은 처절한 싸움들을 벌였지만 '바깥'으로부터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한 이 싸움들은 쉽게 패배하거나 매우 부분적인 승리만 거두거나 장기화되곤 했습니다.
국가와 사용자측이 소모전을 통해 분쇄한 KTX 여승무원의 파업이나 6년이나 걸린 기륭전자의 파업은, '시민'의 연대가 미약한 상황에서 불안노동의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민'들이 '노동'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연대적이지 못한 만큼, '노동'도 '시민'들의 운동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사태는 노동운동과 합쳐지지 않고 오로지 '시민'들만의 투쟁으로 남았다가 결국 국가와의 소모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1980년대 말의 '노학연대'를 해체시킨 통치자들이 거의 쾌재를 부를 만한 상황이 된 셈이죠.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말기적 위기와 세계공황의 영향까지 가세된 지금에 와서는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 듯합니다.
지난 홍대 비정규직 싸움에서도 '일반인'의 연대가 가시적이었지만, 특히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확고히 영도 노동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시민층'의 동향을 잘 반영하는 진보적 신부님들의 가두 미사 봉헌이나 <희망버스>, 그리고 수많은 선남선녀들의 영웅이 된 김진숙 선생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등은, 이제 상황이 과거와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배당금을 늘리면서 노동자들의 생계를 파괴하고 산업기반을 해쳐가는 '주주자본주의'의 약탈성에, 이제 노동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까지도 눈을 떴습니다. 정리해고, 산업 이전, 주주 배당금 우선주의, 그리고 국가와 언론에 대한 자본의 철저한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사회에 아무 미래도 없다는 걸, 이제서야 눈치 챈 것입니다. 1996~97년 이후 거의 처음으로 '노동자'와 '시민'은 손을 잡았습니다. 이 연대가 지속된다면, 우리가 이 싸움을 승리로 끝낼 수 있게 된다면, 중기, 장기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의 연대는 한국형 신자유주의와 결전을 버릴 만한 힘을 보유합니다.
이 결전에서 노동자-시민의 연대가 이기거나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자본주의 자체가 돌연히 몰락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삼성공화국이라는 이 국가의 병리적 현 형태를 해체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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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꿈 혹은 우리들의 악몽 (레디앙, 2011년 07월 15일 (금) 08:46:03 박노자 / 오슬로대)
"평양방송 듣는 줄 알아"…토건, 소매업 등 위한 특단 '부양책'
지난 2011년 7월 8일, "평창이 됐다."는 소식을 저는 택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 거의 파김치 된 몸으로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국 소식 해설자의 떨리는,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해설자의 어투로 봐서는, 피로로 거의 비몽사몽간에 있었던 저는 이게 평창 이야기가 아니고 평양방송인가 싶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최고지도자 등 신성시되는 인물이나 그들과 관련된 행사 등에 대해서 그 어떤 거역도 불허하는, 절대적이다 싶은, 감정에 충만한 어투로 보통 소식을 전합니다.
"평창이 됐다."는 이야기의 어조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반대도 원천적으로 불허했습니다. 우리들의 힘찬 도약! 일류선진국가의 꿈이 현실로! 세계 4대 스포츠 이벤트 개최국! 강해진 우리 국력! 국민의 힘으로! 이러한 구호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 국적(國籍)을 박탈당해야 할 국적(國敵), 히코쿠민(非國民) 정도 되는 듯한 분위기이었습니다.
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꼭 경찰의 진압봉과 용역깡패들의 각목, 쇠파이프만으로는 그 반대자들을 때려잡는 것만은 아닙니다. 집단 히스테리 분위기 조장의 차원에서는, 정말이지 괴벨스(1897-1945) 박사에게 몇 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한국 관변, 친자본 언론들입니다.
이 분위기가 얼마나 압도적이길래, 평소에 그나마 제 정신을 좀 보존하고 있는 <경향신문>마저도 갑자기 "평창의 꿈, 꿈의 축제"와 같은, 그 신문답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겠습니까? <경향신문>마저도 부분적으로 무너질 정도라면, 이제 전 천하가 취(醉)해 정신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옛 현자의 이야기대로는, 천하 전체가 취했다면 거기에서 취하지 않는 사람만큼 위태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평창의 꿈'을 들먹이는 이들은, 서울 88올림픽을 자주 떠올립니다. '88의 꿈'이 한국을 한 순간에서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만들었다면, 평창이 '선진화 도약'의 이정표가 되겠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글쎄, '88의 꿈'은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수만 명의 노점상들에게 악몽 중의 악몽이었지만, 무엇보다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던 철거민들에게는 말그대로 최악의 악몽이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올림픽 잔혹사'는 꼭 노점상이나 철거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창의 7조원 짜리 그 화려한 경기장 등 여러 시설들을 직접 지을 사람들은, 건설 하청 업체들이 (상당 부분은 구두 계약, 일당 등으로) 고용할 비정규직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등일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안전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사망사고를 포함한 안전사고들이 빈번합니다. 지금 현재 4대강을 죽이는 과정에서 노동자 20명도 '동반 사망'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비명횡사에 대해서 평창 유치의 꿈을 이루어냈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해당 장관은 "사고다운 사고가 몇 건 없었고, 대부분은 자기 실수로..."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평창의 꿈'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과연 몇 명의 노동자들이 "자기 실수로" 압사, 추락사, 감전사, 충돌사 등을 당하겠습니까? '평창의 꿈'을 말씀하시는 분들은, 과연 압사를 당하면서 뼈 하나 하나가 차례로 부러지는 사람이 그 죽어가는 순간에서 뭘 느끼는지 좀 짐작하십니까? 국가와 자본만큼 살인을 많이 벌이는 주체가 없는데도, 그 끄나풀들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울 88올림픽이 한국을 세계적으로 알렸다"고? 맞습니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서민들에게 한국을 '선진적인 부자 나라'로 알린 결과, 절망적 빈곤을 탈출하려는 이들의 행렬은 1989~0년부터 한국을 향하게 됐습니다. 이들을 기다린 것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빨리빨리 개새끼"와 같은 우리 아름다운 국어의 진수, 임금체불, 그리고 단속, 단속, 단속... '꿈'이 악몽이라는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가난뱅이의 악몽이란 부자들의 길몽인 법. 피해를 보는 쪽이 있다면 이득을 보는 쪽도 분명히 있는 법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같은 경우에는, 그 개최 기간에 '비싼 손님'들을 만족시켜주어야 할 성 산업이 거의 국가적 후원을 받는 결과, 성 산업 대국으로서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까운 일본뿐만 아니라 머나먼 구미에서까지도 그 명성을 떨쳐 많은 국위선양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서야 일류 선진국가답게 그 성 산업도 수만 명의 필리핀, 러시아, 중국, 북조선 출신들을 다양하게 고용해(혹은 준노예로 부려) '모범 성산업국가'인 일본을 내일이라도 압도할 듯한 기세입니다. 극일(克日)의 쾌거? '평창의 꿈'은 수많은 포주님들에게도 길몽이겠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혈세로 빼앗길 7조원을 공사비로 날리고 그 상당 부분을 폭리로 챙길 건설업자에게도 복음과 같은 소식입니다.
부동산 거품이 이제 곧 꺼질까 말까 하는 요즘 침체 상황에서는 참 대단한 소식이죠. 땅값이나 오르게 말이죠. 이외에도 공식 후원업체들도 살판이 나겠습니다. 삼성과 한진이 후원하는 올림픽 잔치에서는, 누가 백혈병으로 죽은 이들이나 영도에서 최근 비명에 돌아가신 3명의 노동 열사나, 수빅조선소에서 몇년간 사고사를 당한 30여 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을 기억하겠습니까? 올림픽의 '꿈'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맙니다. 변칙 상속부터 살인적 노동탄압까지 말입니다.
말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굳이 지금의 저처럼 말을 많이 남용하지 않아도 올림픽이라는 것이 토건업과 방송업, 소매업, 성산업 등을 위한 국가의 특단의 '부양책'이라는 점도, 동시에 우민화, 즉 민중에 대한 국가, 자본의 포섭의 기제로 활용된다는 점도 그저 자명할 뿐입니다.
저로서는 한 가지만 자명하지 않아요. 도대체 자본 독재의 포로인 우리들은, 왜 우리 혈세로 백해무익의 낭비를 벌일 지배자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투쟁도 벌이지 못하고 있는가요? 4대강 죽이기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이 있다면, 평창에서의 토건업자들의 큰 잔치를 반대할 투쟁 하나쯤 좀 조직돼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라도 국가, 자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억울합니다. 참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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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레디앙, 2011년 07월 08일 (금) 11:07:48 박노자 / 오슬로대)
권위 없는 사랑 보여줘…종교가 실천보다 고귀한 행동
이제 곧 200일을 맞을지도 모를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지켜보면서 늘 드는 생각 하나 있습니다. 생각이나 정서를 십분 공유해도 '행동'을 김진숙 선생님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 라는 부분에 대한 회의입니다.
저의 조상 대다수를 길러낸 유대교의 문화도 그렇고 한반도 문화도 그렇지만 대개 '배움'에 대해 거의 절대적이다 싶은 가치를 둡니다. 1970년대의 동일방직 여공들의 외침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이라는 전제입니다. 개인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엄격히 사회적 환경의 문제일 뿐이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애당초부터 한 수를 접고 “배운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를 대하게 돼 있습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고급 관료, 기업 소유주와 임원들의 대다수는 국내외 '명문대'의 화려한 학위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을 지성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보필해주는 전임직 교수 집단 중에서는 역시 약 40%가 화려한 '외국산 학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개화기나 박정희 시대의 구호대로 '지식은 국력'이라면, 한국은 벌써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될 만도 합니다. 식민지 모국의 '인증서'가 붙은 지식의 보유와 지배/통치 관계가 정확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이 '검증된' 지식을 확고한 지배 명분이자 매우 유용한 지배 도구로 삼지만, 백성들도 이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빚을 내서라도 아이들에게 절망적으로 '내지어'를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인 중에서는 그 당시의 내지어였던 일본어의 능통자는 약 15%이었지만, 지금 같이 직접적 식민 통치 없이, '간접 통치'의 상황에서도 거의 그 정도로 새로운 내지어인 영어의 능통자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배체제가 요구하는) 지식으로 살고 죽고 생사를 가리는 이 대한민국은 과연 덜 폭력적인 사회가 돼갑니까? 최근 경찰이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법만 봐도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성기업의 경우도 그렇고 한진중공업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본에 '감히' 행동적으로 권리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1990년대처럼 원천봉쇄, 묻지마 연행, 초강경 진압, 살인적 손배 소송, 그리고 용역의 무지막지한 폭력입니다.
1980년대와 비교해도, 고문이 없어진 것 빼고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가득 찬, 지식이 이제 거의 '잉여'가 될 정도로 지식에 의존하는 사회인데도, 그 폭력성의 수준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식 그 자체만이 사회를 개선시킬 수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의 차원도 그렇지만, 개인 차원에서도 지식 그 자체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체제에 잘 편입되기만 하면, 그 체제가 아무리 악질적이라 해도 '고급 지식'의 보유자들은 대개 군대 졸병 이상으로 잘 순치됩니다.
세계체제 주변부 파시즘의 전형에 가까운 유신 체제 하에서는 송기숙 교수 등 일부 '제도권 지식인'들은 민중의 편에 섰지만 대체로 저항을 주도한 것은 함석헌처럼 '지식' 그 자체보다 독특한 종교적 사고를 지닌, 그리고 '지식 인증서'가 없는 야생마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저항에 가담한 교수들보다 '교수평가단'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교수들은 몇 배 많았습니다.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히틀러의 치하에서는 과연 달랐을까요? 지식인의 꽃이라고 할 의료권력자, 즉 의사의 약 절반이 나치 당의 당원이었다는 곳은 파쇼 독일의 실정 이었습니다.
반전 운동을 시발점으로 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시작한 촘스키 교수는, 월남전쟁 한창이었던 1960년대 말만 해도, 미국 대학 교수의 약 7할이 전쟁을 지지했거나 무관심했다고 회고합니다. 미국 대학과 군수복합체의 밀접한 관계까지 생각한다면 결코 놀랄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식 그 자체가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뇌 속에서 축적된 지식은 그저 컴퓨터의 파일처럼 '삭제'되고 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한'한 것이죠. 사회화된 지식, 즉 책 등의 형태로 공동체 전체의 재산이 된 지식은 그것보다 오래 살아도,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오늘날 우리의 지식은 그저 역사학자들에게만 관심사가 될 뿐이죠. 지식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도 '삭제'되지 않고 수백 년, 수만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김진숙 선생님이 지금 보여주시고 계시는 '동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동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괜스레 종교적 냄새가 느껴지지만, 사실 노동운동판에서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실천은 제게 어느 종교가의 실천보다도 더 고귀하게 보입니다. 종교의 '이웃 사랑'에는 늘 권위주의적 상하 관계가 내재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동류 사랑'에는 사랑만 있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김진숙 선생님도 제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지식인'이 되고, 저도 애독하는 『소금꽃나무』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이 지식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고 '동류 사랑'의 실천 수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올바른 쓰임 방법일 것입니다. 지식이란 일종의 칼입니다. 누구의 손에 잡히는가에 따라서 해방의 도구도 학살의 도구도 다 됩니다. 그런데 칼을 절대시하는 문화는 '해방'보다 '학살'에 더 가까운 것처럼, 지식을 절대시하는 문화도 전혀 해방적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못하고 체제에 편입된 지식은 그저 악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김진숙 선생님처럼 행동하지 못하면 결국 지배자 무리에 포섭돼 이 지옥을 관리하는 악마들의 유순한 도구가 될 확률은 너무 높습니다. 저도 그렇고 저의 동료인 '직업적 체제 내 지식인'들도 그렇지만, 다 살얼음판을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인간 해방을 향한 지식 축적'은 무엇인지 매일매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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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거주자 무력감 재확인" (레디앙, 2011년 07월 01일 (금) 10:40:09 박노자 / 오슬로대)
"유죄 추정 범죄 예비군 취급…국가, 무장한 관리자들의 부대"
저는 보통 매년 7월마다 국내로 가곤 합니다. 학회와 강연 등이 보통 방학인 이 때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가 제 가족들도 저와 함께 국내로 일시 귀국하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짜리 신생아인 저희 딸 '사라'를 유모차에 실어 관할 경찰서의 외국인계에 가서 딸의 영주권을 신청했을 때에, 그 계획은 뿌리째 흔들리게 됐습니다. 저희들의 신청서는 접수 후 처리 기간이 "약 4개월 정도"라고 통보됐는데, 그 처리 기간에 해당되는 7월에 신생아인 '사라'가 외국 나들이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원칙상은 안됩니다. 원칙상 영주권 심사처리 기간에 영주권 신청인이 국내에 있어야 하며, 국외로 나갈 경우에는 체류 자격이 없음으로 재입국 보장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남한에 가겠다는 것이라고요?
글쎄, 이 경우에는 노르웨이가 가입돼 있는 유럽연합 중심의 솅겐(Schengen) 조약 자유여행권의 외부 국경을 암스테르담에서 넘게 되니 암스테르담 국제공항 여권심사대 심사관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것이죠. 원칙상 체류자격이 없는 영아를 체류자격이 있는 일가와 함께, 분명히 영주를 목적으로 하려는 상황에서 그냥 들여보낼 수는 없지만, 어쩌면 영아라고 봐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좌우간 책임 못집니다."
노르웨이의 외국인 관리 정책의 차원에서는 외국인 박사과정생이든 제 딸이든 똑같이 "무죄가 판결되기 전에 유죄로 추정되는 범죄자 예비군" 정도입니다. 하자가 없어 체류자격이 부여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는, 관리/통제 대상자뿐인 외국인은 일단 '하자 있는 인간'으로 분류돼 원칙상 입국 불허됩니다.
물론 이것은 철칙은 아닙니다. 여권 검사하지 않는 'Schengen 조약 자유여행권'(유럽연합가입국들과 노르웨이 등 유럽경제구역의 일부 국가) 안에서는 움직여도 현실적으로 큰 장애는 없고, 또 정말 저희와 같은 영아의 경우에는 어쩌면 어머니의 눈물어린 읍소 앞에서는 국경 수비대 대원은 마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안움직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일단 원칙은 하나입니다. 검증 받지 않은 외국인 거주자는 '적대적 타자'로 추정되며,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대한 제반 검증'(체류자격 심사)은 무제한적으로 긴 시간을 요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10~11개월 동안 사증 갱신을 기다렸던 외국인도 만난 적은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유럽 국경 안에서 갇힌 '관리 대상자'에게야 미치도록 불편한 일이지만, 국가 입장에서는 관리 대상자의 불편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습니다. 감시/통제의 대상물에게 그 어떤 인간적 감정들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죠.
저희 가족의 거취는 아직 미정입니다. 저야 어차피 국내행해야 하지만, '사라' 어머니는 무거운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신생 손녀를 조국에 계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이 건강에 매우 나쁠 수 있는 강제 송환의 가능성이 있는 한 그저 참고 살아야 할는지, 이민청(http://www.udi.no/) 등 우리들을 관리하는 국가 부서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문의를 한 뒤에 책임지고 결정을 해야 할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거취 등 우리의 사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한 가지 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종속이론 등 중심부와 주변부의 불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이론보다 '포스트' 담론에 도취한 학계에서 더 인기 있는 이론은 호미 파파 (http://en.wikipedia.org/wiki/Homi_K_Bhabha) 등의 '혼종성'(hybridity; 混種性, 雜種性, 交配)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식민지적/유사식민지적 상황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만남은 꼭 복종/저항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 나아가서 '혼합적 문화의 탄생' 등을 낳으며,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쪽을 긍정적으로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이론을 한국사에 적용시키자면 식민지 시기 말기의 아리랑 등 '이색적인 조선의 원한 어린 소리'가 일본 '내지'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나, 조선에서 신파극이나 엔카(演歌)와 계통적으로 유관한 듯한 '뽕짝' 리듬의 트로트가 인기를 얻었던 현상을 주목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이론을 꼭 맹목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억압적 상황이라 해도, 두 인간집단의 만남이란 어떤 생산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억압적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보편성을 내포하니까요. 또한, 억압적 상황을 타파해보려는 시도에서도 대개 어떤 '혼종성'이 포착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노르웨이를 봐도 노르웨이와 이민자들 사이의 관계에 어떤 '혼종성'이 포착되긴 합니다. 중동 음식인 케밥을 애호하는 젊은 노르웨이인들도, 노르웨이 국내 유력 논객이 된 이라크 출신의 발린 알 쿠바이시 선생(http://no.wikipedia.org/wiki/Walid_al-Kubaisi) 같은 분들의 존재도, 노르웨이 급진 정당, 사회단체에서의 이슬람권 출신의 큰 역할도 이를 증명합니다.
저희 외국인 거주자들이 노르웨이 국가의 '관리 대상자' 위치에 있어도, 우리의 존재가 어떤 혼합문화를 잉태시키는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호미 파파의 이론을 절대시하여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파기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봅니다.
'혼종성의 탄생'이라는 한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 국가는 이민자들을 관리, 통제하고, 그 노동이 자본에게 무탈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제반 조건을 조성해주는 것이고, 이 상황은 '유사 식민지적 상황'이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한 폭력성, 강제성을 띠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국가가 우리를 일종의 '유사 포로'로 삼아 관리,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중무장한 수비대가 관리하는 유럽연합의 국경을 국가의 허락없이 넘나들 수 없기 때문이죠. 관리자들이 중무장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어떤 무장도 당연히(?) 허용되지 않고, 국가와의 무장 대립을 시도해보려는 이민자는 당장에 '테러리스트'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결국 레닌의 정의대로 국가의 골간이란 '무장한 관리자들의 부대'인 셈이죠. 혼종성이라는 현상은 인정돼도, 기본적으로 이민자 등 수많은 내부 식민지들을 거느리는 자본주의 국가는 폭력에 기반을 둡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시키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하는 과정도 아마도 불가피하게 결국 폭력적 측면을 띠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자의 신성한 의무는 가능한 한 폭력을 제한시키고 인민들의 조직화의 최대화를 통해 비폭력적 혁명의 이상을 달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이상은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달성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역사적 경험은 단순한 대답을 내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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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여름, 3일 동안의 여행 (레디앙, 2011년 06월 15일 (수) 11:41:58 박노자 / 오슬로대)
진정한 사랑, 시련은 있어도 질투는 없다?…20년 만의 정리
저는 지금도 1991년 여름에 열차를 타고 흑해안 휴양지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3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게 쏘련의 마지막 여름이었다는 사실, 이 후로는 저희와 같은 일선 지식일꾼들이 흑해안 휴양지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불과 1년 후에 가스총을 휴대하지 않고 집을 떠나기가 무서운 준(準)내전적 상황들이 도래할 사실 - 이 모든 사실들을 저는 그 때에 알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여행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가스총 없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마지막 쏘련식 여행이라서는 아닙니다. 흑해 북안을 떠났을 때에 어떤 이름 모를 우크라이나의 철도역에서 우연히 신문가판대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운좋게 사서, 레닌그라드 도착까지 그 책을 열독해 거의 외울 정도가 됐습니다. 지금도 그 여행을 '프롬과의 만남'으로 기억합니다.
신문 가판대에는 황색신문과 에로잡지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늘날 러시아를 염두에 둔다면 20여년 전의 쏘련에서 신문가판대에서 사르트르나 일본 단가집, 도덕경의 러역, 아니면 프롬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데, 엄연히 사실이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인지라, 냉전기간에 외국사상에 접근 제한 당해왔던 인민들은, 그 때에 '외국 진보 사상'이나 '외국 고전'에 대한 매우 뜨거운 열기를 보였습니다. 참, 프롬의 이 책은 기쁘게도 번안 식의 국역본도 있는데 국내에서 얼마나 읽혀지는지 저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좌우간, 그 때에 불편한 열차 침대에서 그 책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그 후로 20년 동안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프롬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소유욕'의 정반대로 정의했습니다. '소유욕'이라는 것은 자아 본위적인, 자아 지향적인, 그리고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욕망입니다. 효도를 함으로써 효자/효녀 소리 듣고 싶은 욕망, 자식에의 '투자'를 함으로서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모심'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 '나의 여자/남자'가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기를 바라는 욕망 - 이는 이 사회에서 '사랑'으로 오해 받는 각종 소유욕의 종류들입니다.
그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독신(瀆神)적인 것은, 불전(佛錢) 헌납이나 교회 출석, 수천배(數千拜) 올리기 등등을 통해서 '나'나(나의 연속으로 인식되어지는) 부모/친지를 위해 천당/서방정토에서 '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욕망입니다.
정말이지, 부처님/하나님 사랑의 이름으로 신과의 '자아 본위의' 거래를 시도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살인의 악업을 지어 지옥에 갈 각오로 억압자를 상대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정의의 테러리스트가 천당/서방정토에 가는 게 더 순리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악업을 짓는다 해도, 적어도 자기자신을 위한 악업이 아니고 타자의 공통적인 업(業)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기 희생적인 악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타자에 대한 자신의 배타적인 욕망을 버리고, 타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타자의 욕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흔적이 없을수록 사랑의 순도가 높아지게 돼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바로 그럴 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나를 모시라", "나에게 예배하라"라고 욕망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남의 행복을 건설해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행복해지기를 신은 그저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만큼 '무아적'(無我的)이지 못하지만, 일단 이 방향으로 계속 시도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진짜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부양'이나 '효도'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남에게 글 등으로 도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제발 저를 황천으로 보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방법으로 자식과의 관계를 설정하자면 부자 양쪽이 내면적으로 좀 강해야 하는데, 일단 아동의 자립심을 키우는 것은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지요.
남녀 사랑 같으면, 독점욕이라는 독약이 제일 퍼지기 쉬운 영역입니다. 더군다나 이 미쳐버린 세상의 가장 악질적인 억압장치 중의 하나인 배타적인 일부일처제가 이와 같은 독점욕을 법제화까지 시키니 더더욱도 소유욕을 사랑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제게 (프롬의 정의에 맞는) 진정한 남녀 사랑의 모범은 로서아 혁명시인 마야코브스키와 문학연구자/혁명가 요십 브릭의 부인 릴랴 브릭의 사랑입니다.
1915년, 부인 릴랴가 청년 시인 마야코브스키와의 사랑에 빠졌을 때에 그 남편 요십 브릭은 그저 기뻐했을 뿐이고, 마야코브스키를 초청해 셋이서 하나의 호구를 이루어 같이 살게 됐습니다. 요십 브릭과 마야코브스키는, 질투를 느끼기는커녕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이죠.
1923년 이후에 마야코브스키와 릴랴가 더이상 육체적 관계를 거의 갖지 않았지만, 역시 아주 가까운 동무로 지냈으며, 거기에다가 릴랴가 마야코브스키와 새롭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또 다른 여러 여성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십 브릭과 릴랴 브릭, 그리고 마야코브스키 사이에 각종의 '시련'은 있어도, 한 가지 절대 없었던 것은 질투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소유'라는 게 없어지게끔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혁명가들이라서 그런 것인이었던가요?
꼭 혁명가만이 진정한 (비소유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란 사유와 이윤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과 독점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거리 두기', 상대화, 궁극적으로 소멸 작업을 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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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들의 도덕성과 국가 (레디앙, 2011년 06월 10일 (금) 09:08:35 박노자 / 오슬로대)
의회 진출 급진주의자 불가피한 관료화 보수화 어떻게 견제하나?
제 아내처럼 혁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반박은 “혁명가들이 과연 일반인들보다 특별히 착하냐?”는 류의 논거들입니다. 이 논거가 구체화될 때에 조선의 최근 역사를 놓고 '혁명가들의 치사한 말로'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사실, 한때 남로당 당원이었던 박정희부터 여운형 계통의 젊은 활동가였던 김대중까지, 남한의 대통령들만 봐도 (준)혁명가로 시작하거나 한때에 '데모꾼'이었던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급으로까지 가지 않으면 아예 한국 보수계의 절반 가까이 '전향한 혁명가/급진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을 만큼 “목숨을 내걸고 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말로는 참담합니다.
정말이지 오늘날 손학규나 이재오 등을 볼 때에 위장 취업, 수배 생활, 고문 등의 이미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도, 그들이 그 '이름 값'을 바로 '목숨을 내건 급진 활동'으로 벌었다는 것만큼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향한 혁명가'들도 수두룩하게 최근의 조선사의 페이지들을 장식하지만, '득의한 혁명가'의 모습이라고 해서 그것보다 꼭 나은 것도 아닙니다. 북조선의 말년의 김일성 주석이나 허정숙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님 등의 모습을 볼 때에도 꼭 중국에서의 목숨을 건 무장항일독립투쟁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지요. 여유만만한 귀족의 모습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혹평이 될 것인가요?
좌우간 전향을 하든 '목적 달성'을 하든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만 혁명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김남주 선생처럼 적의 포로가 되어서 고문과 고문에 준하는 옥고의 후유증으로 이 미쳐버린 세상을 일찍 떠나신 분들이 차라리 제일 행복하셨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제 아내 말대로 “혁명가라고 해서 별 수 없다, 일반인에 비해서 특별히 착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하다, 고로 그러한 인간들이 주도하는 혁명도 결국 거기부터 거기까지일 것이고 권력은 바뀌어도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못할 것이다.”는 담론이 성립된단 말인가요?
사실, 이와 같은 반박들을 접할 때에 저는 솔직히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왜인가요? 왜냐하면 '혁명가들의 도덕성'을 늘 묻는 만큼 일반인 뇌리에서 “혁명가는 원칙상 도덕적이어야 한다, 혁명가는 도덕가다.”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기 때문이죠.
혁명과 도덕이 당위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엄청 중요한 사실이죠. 우리는 혁명가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거의 지나치게 많이 요구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자본의 노조 활동 방해에 지칠 대로 지친 노조 활동가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면, 우리는 과연 이 '자본에 의한 사회적 타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노합니까?
아무리 분노를 해도, 현대자동차를 완전히 버리고 불매 운동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보적 대통령' 노무현의 치하에서 경찰의 야만적인 과잉진압으로 두 분의 농민(전용철, 홍덕표 열사)이 비명에 횡사를 하시게 됐을 때에 과연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은 많았을까요?
자본과 국가가 다소 살인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그만큼 익숙해진(?) 셈입니다. 반대로 '급진적인 반대파'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사회여론은 당장 급격하게 악화되죠. 1997년에 한총련 활동가들에 의해서 경찰 프락치로 지목된 이석씨의 상해치사 사건에 대한 사회 각계의 반응을 기억해보시지요.
사실, 한총련은 그 때에 매장을 당한 뒤로는 그 위상을 영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중 잣대'는 일면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그만큼 '진보, 급진, 혁명' 세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도덕성' 관련 기대가 크기도 한단 이야기입니다.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만 하면 급진 세력들이 상당한 사회 여론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혁명가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그 기대에 어떻게 부응하느냐, '혁명가의 도덕성'을 어떻게 지키느냐 라는 부분입니다.
제 아내의 말은 기본적으로는 맞습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신도, 태생적 영웅도, 타고난 도덕가도 전혀 아닙니다. 혁명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파악하고 피압박 계급의 편에 서서 그 모순들을 행동적으로 바로 잡아보려는 역사적 행위자일 뿐입니다. 혁명가의 자각이나 행동 능력 이상으로 그 모순이 심화되거나 그 모순을 호도하는 국가의 억압체제가 아주 고도화되면, 혁명가도 별 수 없이 활동을 포기하거나 국가에 항복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실제로는 태평양전쟁 시절에 일제의 '고등 안보 국가/총동원 국가'가 다수 민중들의 저항을 완전 봉쇄시키고 상당수 민중들을 '적극적인 침략의 공범'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던 상황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일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고 만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그 어떤 '초인적 능력'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한, 어떤 상황으로 말미암아 권력 체제 안에서 그 나름의 '한 몫'을 나누어 갖게 되는 경우에는 많은 혁명적 경력 보유자들이 거기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1930~40년대의 불굴의 혁명가이었던 미야모토 겐지(宮本?治) 선생이 1950년대 후반 이후로 일본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어서 공산당을 급진성이 결여된 의회주의 정당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례입니다.
단독으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의 보수화 가능성은 더욱더 농후합니다. '러시아 민족의 우수성' 선전과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즉, 유대인 등의 소수자 계통의 지식인) 반대 투쟁에 매몰하고 만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의 스탈린의 이념적인 모습을 보면 '혁명가'라기보다는 가장 전형적인 파렴치한 보수 쇼비니스트만이 보이는 것이죠. 정말, 성공적 권력 쟁취 내지 권력 체제 편입보다 '혁명적 도덕성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과제를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요?
공산 혁명가의 최종 목표는, 국가 권력의 탈취도 아니고, 국가 권력 구조에의 참여도 아니고, 바로 국가 그 자체의 소멸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이상, 근대 국가나 '민족', '국민'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열차부터 수력발전소까지의 대량 산업시설들을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하겠지만, 이는 국가 기관이 아닌 지역 사회가 민주적으로 조직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지구적 차원에서 나름의 계획에 입각해 해나가야 하겠지만, 이것을 지역사회들의 지구적 연합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역사회든 지구적인 지역사회의 연합이든 민초들로부터 소외된 그 어떤 폭력기구(군대, 감옥, 안보기관 등등)도 갖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정확한 정의는, '세계적 차원의 무(無)국가적인 계획적 생산, 분배의 사회'죠.
그런데 이는 우리들의 최종 목표지이지, 내일 모레 현실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거든요. 국가/자본과 국민, 민족, 군대가 아직도 이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는 오늘날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이들과의 각종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르주아 신문들과 경쟁하면서 급진진보 신문을 내는 일부터, 부르주아 정치를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일까지, 오늘날 공산주의 활동가의 일상은 자본과 국가 등과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맺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무인도나 황무지 등을 이용해서 '이상적 코뮨'을 만들려 하지 않는 이상 별 수 없단 이야기죠. 또, 부르주아 국가가 심각한 균열의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언젠가 급진활동가들이 어쩌면 국가를 운영하는 위치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볼셰비키들이 러시아라는 (후진)국가를 운영한다기보다는 세계혁명을 원했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권위주의적이며 온갖 모순에 가득 찬 나라의 '관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혁명가가 국가와 '평화공존'해야 하는 것도, 유사시에 '국가 관리자'가 되는 것도 사실 비극입니다. 국가란 최악의 독약이고,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어떤 활동을 해도 혁명가의 도덕성에 해(害)가 될 뿐이지 도움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가 갖고 있는 각종의 아비투스들(위계질서적 명령체계, 현실추인적인 인간적 태도, 현상유지 위주의 사고 등등)이 '혁명'이 요구하는 부분들(민주성, 자발성,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등등)과 정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의회 정당에 들어간 급진주의자는, 약 10여 년 동안의 의회 활동의 끝에 약간이라도 '관료적 사고'에 감염되지 않으면 기적일 것입니다. 실질적 기능이 있는 의회마저도 불가능한 후진 농업국가에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 집단 같으면, 약간이라도 과거 귀족지배자들을 닮아가지 않으면 역시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와의 '관계 맺기'가 불가피한 세계에서는 과연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바로 국가와의 의식적인 '거리 두기'와 국가와의 '거래'가 불가피한 혁명 집단 지도층에 대한 '밑'의 철저한 감시, 민주적 견제입니다.
일단 우리는 복지국가를 위해서 싸우더라도 이게 당장 불가피하게 필요한 최소강령이지 궁극적 목적지가 전혀 아님부터 잘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민중 언론이라면 무엇보다 국회 등에 진출하게 되는 민중운동의 지도부나 부르주아 언론까지 상대하게 되는 진보 '명망가'들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저처럼 온건파 자유주의자 기관지인 <한겨레>에 글을 쓰는 사람부터 잘 감시하면서 약간이라도 타협적인 냄새가 나면 무자비하게 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쟁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썩게끔 해줄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혁명가들이 어떤 국가에서 권력을 잡을 경우에는, 그 일차적 목적은 '국가 운영'보다 세계적 혁명운동의 지원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는 혁명운동 내부에서 그나마 민주성이라도 견지할 수 있지만, '혁명모드'에서 '국가운영모드'로 전환하게 되면 스탈린 대원수나 김일성 주석의 출현은 이미 역사적 필연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됩니다. 혁명의 물은, 계속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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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사람을 죽이는 사회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609 19:21)
한국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늘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다. 학생들에게 “한국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말문이 막힌다. 한국에 대한 해석을 노르웨이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어 전문성에 회의마저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심화에 따른 민중 생계의 불안화’? 꼭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부도가 난 사람들 중에서는 비관자살이 흔한 일로 알려져 있고, 가정 생계에 대한 책임을 본격적으로 지게 되는 30대 중에서는 자살이 주요 사망원인 1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양극화나 노동의 불안화 등과 자살률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다. 1995년과 1998년을 비교할 때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여파로 자살자 수가 거의 두 배로 껑충 뛴 것도 엄연히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못지않게 신자유주의가 강타한 남아공이나 에스토니아 등 여러 중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살률이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단순히 최근의 민생고만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로서의 특징’? 역시 꼭 틀린 진단은 아니다. ‘민주’(즉, 온건 자유주의) 세력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책임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 세상을 하직한 노무현 전 대통령부터, 나쁜 성적 탓에 앞으로 명문대에 들어가 효자·효녀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성적 비관 자살’의 길을 택하는 고교생들까지, 이 사회에서 자살은 흔히 ‘집단에 대한 책임의 표현’으로 통한다. 그러나 ‘책임의 윤리’와 함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스스로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유교 전통이다. 즉, 전통을 통한 설명도 그 한계를 드러낸다.
필자로서는 사회학적으로 ‘자살 공화국’으로서의 한국의 현실을 해명하기가 지극히 어렵지만, 체험적으로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경제적 요인도 사회·문화적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내면화돼 있는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타인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이 사회에서는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나 소유욕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교회나 사찰마다 하나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가 외쳐지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 보면 성금이나 불전을 주어서 죄에 대한 면죄부나 이윤추구 정글에서의 성공에 대한 주술적인 보장을 사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아이 교육에 ‘투자’해 나중에 아이가 거둘 ‘성공’을 공동 소유하려 한다. 피 말리는 학습 경쟁에 내몰려 부모의 공포와 소유욕의 대가를 대신 치러야 하는 아이는, 살인적 체제의 ‘나사’로 전락하고 만 그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쉽겠는가? 입시학원이 된 학교나, 등록금을 약탈하고 시간강사나 환경미화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악질적으로 착취하는 악덕 기업이 되고 만 대학에서 앎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인건비 절약’이 주된 모토가 된 기업체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노동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필자는 북한 사회의 세습적인 수령주의나 과도한 군사주의, 국수주의 수준의 ‘조선민족 제일주의’에 찬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 사회가 지금처럼 ‘현실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폐쇄적 형태로 왜곡되게 성장하지만 않았다면, 필자는 차라리 오늘날 한국보다 북한이라도 선택했을 것이다. 빈곤과 억압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을 상품화시켜 사랑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이 사회의 분위기를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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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중적 혁명이 가장 비폭력적이다" (레디앙, 2011년 06월 03일 (금) 01:56:44 박노자 / 오슬로대)
혁명적 폭력의 본질…"불교 들먹이는 내가 혁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우파는 필요에 따라서 독도 문제 등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또 어차피 한일의원연맹(韓日議員聯盟) 등을 통해 필요한 만큼 연대하기도 하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파 사이의 한일 연대까지 걱정할 이유는 별로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좌파'에 대한 저의 긍정 일변도의 발언에 반대하여 "좌파를 꼭 이상시할 것 없다. 1972년 산악베이스 사건이나 아사마 산장(?間山?) 사건을 생각해보라"고 제게 강력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신좌익은 대중성을 다소 결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교 운영 민주화, 등록금 인하, 지배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 '명문대' 학생들의 '착취자로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을 위해 벌여온 투쟁의 대부분은 '폭력을 위한 폭력'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공익을 위한 (일부 폭력을 포함한) 맹렬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특히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의 기억에는 그 '공익성 투쟁'보다는 왠지 말기적인 엽기적 '살인사건'들만이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좌우하는 교과서, 매체의 내용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집단 기억'은 참 선별적이지 않을 수 없네요.
저와 이야기를 나눈 지식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머리에서도 '좌파'는 꼭 '폭력'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돌을 던지는 시위자든 총을 든 적군(赤軍) 병사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좌파의 이미지는 꼭 단순히 투쟁적이라기보다는 꽤 '폭력적'입니다.
급진 좌파를 꽤 혐오하는 제 아내 같아도 저에게 가끔가다 "불교를 들먹이는 당신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급진 좌파를 지지하는 게 자가당착"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한 번 이 부분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여기에서 약간의 본격적인 고찰을 해보겠습니다.
계급사회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제도적' 폭력이 뒷받침합니다. 학교와 매체가 다수의 대중들의 뇌리에 주입시키는 법과 경찰, 군대가 없었다면 과연 삼성전자는 이씨 왕조와 여타의 대주주의 소유로 남았을까요? '법과 질서'의 강제가 아니었다면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대주주 배당금 등으로 들어갈) 이자를 꼬박꼬박 냈을까요? 이 제도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리력으로 지탱됩니다. 그리하여 이 제도를 바꾸는 것도 결국 잠재적인 물리력의 위압이든 적극적인 물리력의 이용이든 어느 정도의 '물리력'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예컨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좌파가 국가 권력을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나마) 장악한 베네수엘라의 경우에 해당되죠. 좌파의 대중성과 민주주의적 선거제 등을 이용하는 기술이 우수하니 우파는 일단 노골적 물리력 대결에서 승산이 낮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태까지 좌파의 '위압'에 눌려 대규모의 물리적 저항을 자제해온 것이죠. 그런데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다수의 혁명적 시도들은 후자의 부류에 속합니다. 역사적 경험을 분석해보면 좌파의 폭력 이용에 몇 가지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참한 폭력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극소수 위주의 '초(超)혁명적' 조직들이 벌이곤 합니다. 고립된 극소수인만큼 늘 위기감이 팽배하고 늘 '패배주의'나 '배신', '적의 스파이' 등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연합적군은 바로 이와 같은 조직의 전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러한 조직들은 - 연합적군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 또 많은 경우에는 (극소수 조직들이 자주 그렇듯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장악되고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됩니다. 이는 무분별한 폭력의 위험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죠.
반대로, 패배의 상황이라 해도 대중성이 높은 좌파투쟁은 '정당방어' 형태의 폭력을 써도 무분별한 '과잉 폭력'을 자제합니다. 예컨대 진정한 의미의 '대중에 의한 민중 정부'인 파리코뮨은 관군에 의해 패배를 당하여 관군의 학살 행위를 직면하면서도 적의 스파이와 반동 분자 63명만을 총살했습니다.
참고로, 관군에 의해서 학살 당한 코뮨의 전사와 파리 노동자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차후에 1만3천명이 또 사형과 유배형 등을 받았습니다. 파리코뮨의 경우에는 '무장방어'는 있어도 저와 대화를 나눈 국내 지식인이 그토록 반대했던 '과잉 폭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혁명가들의 대중성 여부와 함께 국제적 고립의 여부는 혁명의 폭력성에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등 남미, 중미의 좌파 정권들과 가까이 연대하는 쿠바의 경우에는 '정치범'(주로 반혁명적, 친미적 성향의 정치운동가: http://www.greenleft.org.au/node/42450)의 수는 - 다소 부풀린 보수적 매체의 보도로 봐도 - 167명에 불과합니다(http://www.bbc.co.uk/news/10517497).

이 정도면 '혁명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반대로 쿠바에 비해서 훨씬 더 보수화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거기에다가 동북아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북조선의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의 '반혁명'과 무관한 수만 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다는 보도들은, 비록 현지조사를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립된 혁명은 보수화, 민족주의화되기도 싶지만, 일단 '포위당한 요새'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적의 간첩'에 대한 피해망상증부터 태심합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대숙청으로 이어진 집단 히스테리의 피크가 소련이 상대적으로 고립돼 있었던 1937~38년이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1945~49년간의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적 정권 수립,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 1953년 조선전쟁의 종료와 남한을 기지로 하는 미 제국으로부터 소련을 방위할 북조선의 '생존에의 성공', 그리고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로는 사실상 숙청의 비극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더이상 일명의 독재자가 보안기관을 통해서 통치하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제도의 폭력성도 대단히 완화됐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시면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폭력은 소련/동유럽과의 관계 냉각 이후, 그리고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 이전에, 즉 고립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국제 고립은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의 요인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완전한 '무혈의 혁명'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단히 좋겠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봐서는 이 꿈의 현실성에는 큰 의문이 제기됩니다. 단, 혁명세력의 대중성, 민중성, 민주성 등은 혁명의 폭력성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혁명은 가장 비폭력적입니다.
그 다음에, 혁명으로서는 고립은 죽음이니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늘 무산계급 국제주의 노선을 따르는 것은 내부적인 최악의 폭력을 면하는 길입니다. 또한, 초좌파적 성향은 자주 '과잉 폭력'을 부르니 좌파의 현실적 강령은 늘 대중들의 준비 상황과 당면 욕구, 그리고 당면 상황의 현실적인 특징들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대중적, 민주적, 현실적, 국제적 성격의 혁명세력이라면 '정당방어'를 해도 적어도 '폭력을 위한 폭력'을 삼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혁명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일 것입니다. 전쟁 등으로 점철된 우리 현재의 현실로 보자면 어쩌면 이 '끝없는 끔찍함'(마르크스의 표현)에 비해서 혁명은 훨씬 덜 폭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이 '불교를 들먹이는' 사람마저도 혁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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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 “일제~박정희 미화는 지배권력 담론 만들기” (경향, 황경상 기자, 2011-05-25 21:17:42)
ㆍ최근 출범 한국현대사학회 日 ‘자학사관’ 그대로 베낀 듯
ㆍ한국사회 이슈 된 ‘복지담론’ 이해관계 얽혀 형성 힘들 것

여느 때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올해로 5·16쿠데타가 50년을 맞는 등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도 되돌아볼 만한 숙성의 시간이 흘렀다. 편향된 이념성향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명분을 내건 한국현대사학회가 출범함으로써 또다시 근현대사에 대한 논쟁이 불붙을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지난 24일 강원 영월군에서 열린 영월연세포럼에서 ‘유럽의 한국학-외부에서 보는 이점’을 주제로 발표하기 위해 입국한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38)를 만났다. 그간 한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각과 통렬한 비판을 선보였던 박 교수는 한국 역사 전공자다. ‘일종의 자기성찰’이라는 이번 발표에서 그는 유럽 등 해외에서의 한국학 연구가 “정치적인 현재성이나 요구에 따른 유행”에 덜 민감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시들해진 해방전후의 노동운동사 연구가 미국·캐나다 등 북미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되레 ‘정치적인 현재성이나 요구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한국의 역사연구 상황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출간한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통해 탈민족주의적 한국 역사를 보여준 그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사를 보겠다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출범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담론이 필요한 현재의 한국 지배계층은 반제국주의 투쟁의 입장에서 역사를 읽는 현재 사학계의 대다수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사학계가 일부 의도가 지나치고 사실적 뒷받침이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전했죠. 반면 한국현대사학회와 같은 입장은 일제강점기를 제국주의 침략이라기보다 발전의 시대로 해석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과정을 미화하면서 자본주의 발전 사관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구축하려고 하는 뻔한 의도가 보입니다.”
한국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은 일제강점기부터 총독부의 보호막 아래 세력을 형성했고, 이후에도 친자본적인 이승만·박정희 정권과 궤를 같이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본주의 흐름에 도전하거나 끔찍한 피해를 입은 이들은 폄훼·배제시키고 처음부터 끝가지 긍정적인 발전인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이런 분위기가 교과서포럼 이래 보수인사들이 비판해온 ‘자학사관’을 넘어 ‘자만사관’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이는 “잘못한 부분들을 덮고 미화한다는 점”에서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자학사관’과 용어 선택에서부터 베껴온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노르웨이에서도 보수·진보학자들이 견해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르웨이 보수들은 북부 원주민인 ‘삼’족의 강제동화 정책 등 국가가 저지른 잘못된 일들을 미화·호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차이다.
복지 선진국이라 불리는 노르웨이에 11년째 거주하고 있는 박 교수에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 담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는 우파 성향의 정당들도 현재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 노동당 못지않게 큰 역할을 했다고 자기선전한다”고 말했다. “복지를 축소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대중적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담론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지는 “자본과 노동의 임시적 타협”이기에 “그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역학관계를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이다. 한국 사회의 낮은 복지수준은 노동계급의 힘이 약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박 교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까지 복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사회 담론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복지 재원을 마련하자면 법인세, 고소득자의 소득세 등을 올려야 하지만 이 부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지배계급과 보수언론들이 여론을 이끄는 데 유보적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현재 나오는 복지 담론이 “개인의 행복보다 출산 장려를 통해 국가가 필요한 인력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에 집중돼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한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와도 관련돼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멕시코에서도 보기 어려운 노동에 대한 ‘초착취’로 이뤄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된 학습 노동에 익숙하게 만들고 경쟁을 강조해 이를 견디게 만듦으로써 초착취에 자발적으로 응하도록 ‘사육’시키는 거죠.”
결국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발전을 합리화하느냐, 이면을 들춰내서 문제를 지적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하는 박 교수는 노르웨이의 리비아 폭격 참여에 대해서도 비판적 인식을 드러냈다. 한국 사회의 갈 길도 멀다. “발전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부분이 반동적이며, 특히 대체복무제 도입 등 군대 관련 부분은 놀랍도록 보수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의경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같은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이면서 부대 내 폭력으로 자살하는 현실을 왜 정리할 수 없을까요.”
 
청년혁명을 위해서 (레디앙, 2011년 05월 26일 (목) 01:09:24 박노자 / 오슬로대)
"대한민국을 흔들 대중행동 불을 지필 세력될 가능성"
우리는 대개 북조선에서 건설부대들이 거의 무급으로 '속도전'을 해서 시설을 짓는 모습에 경악해 '부역 (賦役) 노동'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소위 자유민주주의적 남한에서도 사실상의 무급에 가까운 젊은이들의 노동 제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젠 특권이 되고 만 자기 노동의 정기적 판매 (즉, 정규직 취직)의 권리를 획득하려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어떻게든 간에, 몸을 다 부수더라도 '스펙'을 쌓으려고 다들 죽을 고생들 하시지만, 지푸라기 열 개를 붙들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노도(怒濤)를 어찌 헤쳐나가겠습니까?
지금 34만 명이나 되는 (9년전 만해도 22만이었는데, 노무현/이명박 신자유주의적 정권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이렇게 빨리 성장됐습니다) 대졸 실업자들 중에서는, 국제행사 도우미를 몇 번 해본 사람도, 전교 일등해서 '선진국'에 교환학생이라는 이름의 '순례'를 갔다온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아무리 경력은 우수해도, 이윤추구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비용절감'만을 추구해 가급적이면 새 사람을 덜 뽑고 기존 사원들을 장시간 집중 착취한다든가 인턴, 아르바이트생을 써도 정식 취직을 시켜주지 않다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피고용자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기업주들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청년실업의 공식 통계는 거의 9%이지만, 아르바이트생 등 극도로 불안한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20% 가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공식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해마다 이 숫자는 약 0.5%로 올라가는데, 이대로 갈 경우에는 대한민국 청년층의 미래는 뻔합니다.
거기에다가 빚져서 살인적 등록금을 냈다가 천만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백수 신세로 사는 수많은 이들의 형편까지 생각해주시면 지금 대한민국 젊은이의 '절망의 수위'를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젊은층 전체가 벼랑끝으로 몰려 있기에 '국제행사 도우미'라도 잠시나마 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로 보일 정도이겠습니다.
그냥 이윤도 아니고 아주 단기적인 이윤을 위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절대 다수는 '주변 분자' 이상의 그 어떤 미래도 없습니다. 이들을 그나마 부분적으로라도 살릴 수 있는 것은 기업들의 취업정책을 '이윤 위주'에서 '사회정책 위주'로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경제 요소들의 대대적인 도입일 것입니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고용 사유가 법적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고용 규모를 인위적으로 축소하거나 비정규직 고용을 일정한 수위보다 더 많이 하는 기업들이 국유화된 은행으로부터 대출도 못받게 되고 국가에 (젊은 실업자들을 위한 수당으로 쓰일) 벌금을 내야 한다면 젊은층은 그나마 숨이 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이윤으로부터의 해방, 즉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뿐이겠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요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일차적으로 이 사막에서 '일'과 '사회에의 편입'에 대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소외되는 젊은이들의 다수를 살릴 수 있는 계획경제의 요소를, 과연 사리사익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의 '오야붕'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할 것인가요? 그럴 일이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은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혁명에 준하는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말로 이 운동의 '주력부대'가 돼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의 화두는 '노동자 혁명'이었지만, 오늘날의 화두는 "노동자조차도 되기 어려운, 노동자가 돼도 하급노동자로 영원히 살아야 할 젊은이들이 선도할 혁명"입니다.
젊은이들이 일단 주도를 하면 - 러시아 혁명 그 당시에 도시 숙련공을 상당수 빈농들이 따랐듯이 - 다른 연령층들의 노동자들도 가세하겠지만, 아무래도 젊은이들이야말로 '주력부대' 노릇을 해야 할 듯합니다.
오늘날 젊은 백수들의 아버지, 어머니들 중에서는 특히 저숙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절망'보다는 '체념'의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그들과 달리 그들의 자녀들은 엄청난 돈을 어렵게 들여 고등교육을 받아도 그만한 사회적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주변부에서 소외만 당하게 되는 만큼 훨씬 더 강력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낄 만합니다.
또 윗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이 국제적 이동성까지 좋아 다른 산업국가에 비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복지나 노동정책 분야에서 후진적인지 대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한 '연락망' 구축이 쉽기에 촛불사태 때 확인된 것처럼 기동성이 강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흔들 다음의 대중 행동의 불을 지피게 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1968년 파리 젊은이들이 권위주의적 인간관계의 철폐와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폐절을 요구하고. 1987년 서울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2012년 내지 2013년 한국 젊은이들은 아마도 "직장을 달라", "배고픈 백수로 평생 보내기 싫다", "등록금을 없애라"와 같은 구호를 외칠 듯합니다.
어찌 보면 거의 저수위의 '경제적 요구'에 가까운 것이죠? 그런데 자신의 처절한 요구부터 시작돼 결국 이 운동은 민주주의 확대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철폐의 문제로 확장될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배고픈 노예로는 물론 배부른 노예로도 평생 살 수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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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위에 떡값이 있다?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5-20 오후 04:13:39)
짙디짙은 떡값 의혹은 무혐의 처리, 의혹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면 유죄
아주 편하게 ‘떡’을 먹으며 웰빙생활하는 높은 분에게 ‘명예’란

떡값검사를 “떡값검사”라고 바로 부른 그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며칠 전에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대법원으로부터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솔직히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그랬습니다. 웃을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를 몇 분간 폭소하게 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는 노회찬 전 대표의 기소 사유였습니다.
도대체 재벌의 장학생이 된 법조인에게 훼손될 명예가 있는지, 국민의 혈세를 들여 이런 일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법원이라는 곳은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주로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컷 웃고 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떡값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법관’의 명예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대한민국 ‘법의 세계’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명예’라는 단어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떡값검사’도 법의 세계에서는 ‘무혐의처리’되며 여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법적인 의미의) 명예를 보장받습니다.
무죄측정 원칙, 유죄확정판결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는다는 원칙의 취지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떡값 의혹’이 아주 짙어도 이렇게 간단하게 무혐의 처리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순히 자신의 홈페이지에 의혹 내용을 게재했다는 죄목으로 죄인이 되기도 하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유죄확정판결’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유죄확정판결’의 기준이 되는 무죄측정의 원칙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저 무의미합니다. 아무런 위험부담도 없이 마음 편하게 ‘떡’을 드시면서 웰빙하실 수 있는 높은 분들의 ‘명예’에 관해서는 말입니다.
판결문의 일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제 웃음이 아니고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예를 들어서 “(X파일상) 대화 시점은 공개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 [이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하다고 할 수 없으며, ‘공개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가 ‘통신비밀을 유지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를 초월한다고도 볼 수 없다”는 문구는 아마 저뿐만 아니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주 심하게 분노할 내용입니다. 뇌물 수수가 8년 전에 이루어졌다 해도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는 쪽은 계속 한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불법적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쪽 역시 계속 ‘법’을 집행하고 있는데, 이 상황이 ‘공익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아니라면, 대법원이 생각하는 ‘공익’이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성의 사익(社益)’과 공익을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합니다. 민중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검찰의 실체가 무엇인지 납세자들에게 알려준 것은 적어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가치’가 아닐까요?
노회찬 전 대표도 지적했듯이 이 사건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법적 정의’ 사이의 엄청난 괴리가 드러났습니다. ‘X파일’에서 ‘2년 떡값’으로 거론된 ‘5천만원’이 자신의 2년도 아닌 약 5년 소득과 비슷한 수많은 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자비한 착취로 민중으로부터 약탈한 돈을 뇌물로 펑펑 쓰는 자본도, 이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재벌의 사설 경비대’ 노릇쯤이나 하는 ‘공무원’들도 이미 ‘정의’나 ‘명예’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상식적인 정의의 개념이 법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결국 대한민국 지배체제의 안정성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 이를 권력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만 합니다.
‘5천만원’을 일회용의 ‘떡값’이 아니라 5~6년간의 밥값, 반찬값, 월세값, 학비로 쓰는 이 세상의 철수와 영희들은 아주 혹독한 계급적 지배의 세계를 몹시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상공인의 소득은 계속 줄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월 7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에 왔다갔다하면서 별로 늘지 않고 있지만, 식료품 가격부터 (특히) 교육비까지 전반적인 생활비 부담은 날로 늘어나 ‘GNP 성장률’이 4%가 되든 6%가 되든 삶살이가 딱하기만 합니다. 불경기와 물가인상에 찌든 서민들이 강남족들의 ‘웰빙’이나 ‘몰입영어 열풍’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그나마 덜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회에 계급지배와 불평등 위에 또 모종의 ‘초(超) 계급적인 통합의 틀’이 존재한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입니다. 서민으로 하여금 분노를 잊고 ‘사회 통합 메시지’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가장 강력한 틀은 내셔널리즘 (국민주의/국가주의)과 ‘초 계급적 법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전자에 대해서 나중에 별도로 쓰겠지만, 후자는 더 이상 ‘충효사상’이나 ‘우리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말로 주민들을 결합시킬 수 없는 오늘날과 같이 개방·민주화된 사회에서 중요합니다. 법의 ‘초 계급적 신비’에 대한 대중적 믿음이 없다면 이 체제가 위기국면에서 아주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권력자들도 분명히 알긴 알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의 위신’을 높여야 하겠지만, 그들은 장기적인 비전보다 단기적인 사리사욕에 얽매인 사람들이라 계속해서 그들의 ‘법’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용산참사 때 재개발업자나 경찰에 대한 사법처리가 전혀 없었던 반면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철거민만 수사, 재판의 대상이 된 것도 그렇고, ‘떡값검사’ 사건에서 검사도 삼성도 아닌 도둑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지른 기자나 노회찬 전 의원 등만 사법처리 대상이 된 것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진리’라는 사실을 다수가 깨닫게 된다면 결국 이는 체제에 대한 치명타로 이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다수의 분노가 다수의 조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시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서민이 강제철거에 쫓기고 부당해고에 생계를 잃고 비관자살로 몰릴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값’을 주고 받는 이들은 이 돈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을 만한 후각을 잃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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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사회서 물신화된 SSCI 영어논문 (레디앙, 2011년 05월 13일 (금) 08:32:19 박노자 / 오슬로대)
학술도 아니고 실용도 아니다…논문, 위신 세워주는 도구 돼
특히 고고학이나 고대사 연구에서 '위신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위신재는 통치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러나 실용성이 별로 없는 고급 물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국사 수업에서 들으셨을 것 같은 '세형동검'은 국가 형성 직전 시대의 전형적인 추장층의 위신재였습니다.
통치자의 성격이 바뀌는 데에 따라서 위신재의 모양도 당연히 바뀝니다. 계급사회가 발달될수록, 통치자에게 내재화돼 있는 문화자본의 축약적 표현물이 위신재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문민 통치자들의 한시나 사군자 그림은 그랬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치계층들이 일단 분화되고 다양해졌기에, 그들에게는 꼭 획일적인 위신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관료나 기업임원의 위신을 골프 솜씨가 잘 나타내겠지만, (드물게나마) 소위 '명문대 교수'는 골프를 안치거나 못칠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 교수, 그리고 명문대든 어디든간에 일단 '교수'가 되어서 중급 관료 내지 기업의 중급 임원에 상당되는 '대우'를 받아 '주류'(즉,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골프보다 더 중요한 위신재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위 'SSCI (이건 통상적 조선말로 옮기자면 '사회과학 인용색인' 정도 됩니다. 단, 한국 '명문대 교수'들은 이미 통상적 반도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내지화'된 것입니다) 영어 논문'입니다. 세검과 금관(金冠), 한시, 사군자 그림이나 일제시대의 웅변대회에서의 일본어 연설 등 한반도적 위신재의 전통을 이어, 이 'SSCI 영어 논문'은 인제 한반도 남반부 학자 사회의 하나의 물신(物神)이 된 셈입니다.
머슴 마당쇠의 피땀을 빨아 마당쇠로서는 도대체 읽을 수 없는 한시를 지었던 양반네들처럼, '명문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인문한국'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서민들이 낸 혈세를 받아내, 그 혈세로 정상적인 한국 민초로서 읽을 수도 없고 읽을 가치도 별로 없는 글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모든 부조리와 폐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또 새로운 정신병적인 유행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방지하고자 합니다. 인구어족의 하나의 언어인 영어로 학문적인 글을 써서 해외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외국 동료에게 읽히는 것 자체는 그 어떤 범죄행위도 아니고 학자, 즉 지식노동자의 노동행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만 해도, 영어로 논문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국내 국사학계의 논문작성 기준에 일부러 맞추는 것보다는, 저로서 그게 더 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노동행위의 일종을 물신화하느냐는 것이죠. 한시 이외에도 기(記)부터 제문(祭文)까지 수많은 장르들이 있었듯이, 지식노동자의 일에도 수많은 작업 종류들이 존재합니다. 학술 강연, 대중 강연, 일반 수업, 지도 학생 상담, 대중적인 학술적 글, 대중학술서, 일반 학술서, 고전 번역서...
남들의 혈세로 살 수밖에 없는 인문학자 같으면, 특히 강연류, 대중적 글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작업 종류들이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라면, 논문은 동료들과의 소통 방법입니다.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어려울까요? 원고 1매 당 투입되는 시간으로 봐서는 후자는 더 시간 집약적 작업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열정과 (강연의 경우) 일종의 '무대 기술', 준비된 내공과 많은 고민들이 들어 있어, 사실 난이도를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민중들과의 소통도,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더불어살이해야 하는 동료들과의 소통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으니 뚜렷한 우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화되어버린 한국의 '학자' 사회에서는 논문 이외의 그 어떤 장르도 실제로 인정을 받지 못하며, 논문 중에서도 오로지 '영어 논문'이 최고의 위치를 점합니다. 소통할 동료들의 언어권 소속 내지 언어 구사력에 따라서 덜 고귀하고 더 고귀한 분들이 있는 모양이죠.
진정한 의미의 '실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대민행정을 맡아야 할 관료들에게 한시 작성이나 맹자 해석을 요구했던 과거제처럼 아주 '비실용적인' 일입니다. (거의 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직업적 한국학 연구자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는 <황성신문>의 유교관(儒敎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영어로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가 편한 구미인이야, 그냥 본인이 편한 대로 영어로 쓰는 것은 이해가 돼도, 죽을 만큼 영어가 불편한 사람들까지 연구사업을 다 제쳐놓고 영어 학술논문 작성법을 익히느라 근무시간을 다 보내고 결국 읽기가 너무나 불편한 딱딱하고 인위적인 영어로 몇쪽을 쓰느라고 수개월을 낭비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실용'입니까?
이건 학술과도 실용과도 아무 관계없는 행위입니다. 한시 작성 능력은 조선시대 고급사회로의 '통문'이었듯이, 한국 사회귀족의 언어인 영어로 ('공돌이, 공순이'이 아닌) 동급자 내지 상급자들이 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계 '주류'에의 관문을 열어주는 '통과증'인 셈이죠. 차라리 '신분증'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태생적으로 '신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신분증'의 획득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강남족들은 아예 일찍 도미 유학 가서 내면까지 '황민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체로 한국어로 작성한 뒤에 사람이나 사서 얼마든지 '퍼펙트 영어'로 옮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출싱성분이 나쁘고 도항해서 내지에 갈 노자(路資), 학자(學資)도 없고 그렇다고 대필자 내지 대역자(代譯者)를 고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대중과의 소통도 공부도 연구도 다 깨끗이 잊은 채, 오로지 내지어의 완벽한 구사와 'SSCI 학술지' 심사자들의 기호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몰입해봐야 상당수는 계속 밀리고 밀리겠지만, 일단 다들 그렇게 하는 한 지배자들의 주된 목적은 달성됩니다. 대중들에게 이 정신병원이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벌왕국에서의 저항의 길을 가르칠 수도 있는 '지식분자'들이 일단 대중과 무관한 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목적입니다. 그래야 강남족들의 태평성세는 위협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영어논문'들을 수천개 단위로 작성해 휴대폰처럼 마구 수출해도, 점차 일본과 같은 침체의 길로 가다가 중대 위기를 맞이할 이 왕국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쓸모 없는 짓에 매달리셔야 하는 수많은 국내 동료 분들을,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저보다도 이 문제에 대한 훨씬 더 치열한 고민들을 하시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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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공격, 전쟁범죄 해당" (레디앙, 2011년 05월 06일 (금) 07:36:41 박노자 / 오슬로대)
"괴이한 미국의 축제분위기…국가 수준의 암살행위"
제국의 성립과 유지는 부단한 대량학살을 필수적 조건으로 하고 있기에, 제국의 지배자들이나 그 지배자들의 심성과 사고를 그대로 내면화한 수많은 '순량한 국민'들은 살인을 이론적으로 긍정할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즐기기까지 합니다.
미국 초기사에서 예컨대 서부에서 특별히 '유해한' (즉, 독립심과 저항성이 강한) 인디언 추장의 사살은 큰 축제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시절에 많은 미군 병사들이 '적군' 해골들을 기념품(?) 삼아 수집했으며, 애인이나 부모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빈 라덴의 사살이 촉발된 미국에서의 '축제 분위기'(이 분위기는 일각의 미국인 관찰자에게마저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를 보면 제국다운 '살인의 희열'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철저한 법치국가로 이름이 높습니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도 분명히 그런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죠. 1,143,358 명(2007년)에 달하는 미국의 변호사 총수는, 노르웨이 총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될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늘 일감이 있는 만큼, 미국은 '소송의 제국'인 셈이죠. 사유제도가 거의 신격화돼 있고, 법이 사유의 보호막으로 인식되는 자본주의 종주국인지라, 사회가 물신화돼 있는 '법'을 중심으로 해서 짜여져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범적 법치 사회인데도, 빈 라덴의 사살을 기뻐하는 오바마나 그 '순량한 백성'들은 한 번이라도 빈라덴 사살의 국제법적 검토를 해보지 않은 셈입니다. 아직도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미국이라 해도, 일단 '합법적' 살인을 하자면 확정된 사형 판결 정도 필요합니다.
빈 라덴의 경우에는 1998년 11월 4일에 뉴욕 남부 법정에서 미국시민 살인 혐의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궐석 재판이라도 받은 바 없고 더군다나 자기 변호의 기회를 한 번도 얻은 바 없었습니다. 법학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는 놀랍게도 오바마는 빈 라덴을 미국에 데리고와서 정식 재판을 벌이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특수부대에 '약간의 저항이라도 있으면 사살'할 것을 명령한 셈입니다.
사형판결이 없는 이상, 빈 라덴의 사살은 국가적으로 벌인 암살 행각에 불과한데도, 법학박사 오바마도 법으로 죽고 사는 그 '국민'들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듯합니다. 거기에다 보도들에 따르면 빈 라덴 암살의 과정에서 그 측근 중에서는 수 명의 성인 남성과 한 명의 여성, 그리고 한 명의 어린이까지 미군의 흉탄에 쓰러져 죽었는데, 이건 단순한 암살행각도 아니고 민간인 학살, 즉 전쟁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입니다(빈 라덴도 객관적으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주관적으로 자신을 '전사'로 인식한 만큼 약간의 억지를 부리면 '광의의 군인'으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파키스탄에 가서 암살 및 민간인 학살 행각을 벌인 것은, 거기에다가 외국의 영토주권 침해 행위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이미 국가적 범죄의 종합백화점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도 미국 삼부 요인들은 물론, "권력을 견제한다"고 자부하는 그 주류 언론들도 이 범죄 행각에 약간이라도 토를 단 적은 없었습니다. 빈 라덴의 주검을 집단적으로 짓밟느라고, 미국의 주류 전체가 아예 희열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비판기능이 마비된 셈입니다. 도대체 변호사들의 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이 부분은 근대적 '법' 운영의 기본 원칙과 직결돼 있기도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에서 법은 거의 신격화, 물신화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신화의 배경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의식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국체라고 할 사유제가 법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 법은 신성합니다. 그 국체가 신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체를 훼손하려는 비국민'- 그 비국민이 형식상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든 아니든 간에-은 애당초부터 법의 영역 밖으로 하위 배치됩니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나 생명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법은 보호할 일은 전무합니다. 법의 모양은 취해졌지만, 실제 데브스나 힐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법을 가장한 노골적인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전쟁을 부정하고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은 더이상 그 보호적인 효력을 상실합니다. 이와 같은 반대자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약간의 똘레랑스가 있을 수 있지만, 유사시에 그저 법과 무관하게, 또는 법을 가장해서 '처분' 되고 맙니다.
원래 CIA의 돈으로 소련과 싸웠던 빈 라덴은, 그 저항의 창끝을 미국에 돌리자 바로 이와 같은 '법외(法外)의 존재'가 됐습니다. 그의 비법적인 암살에 대해서 법학박사 오바마가 아주 무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게 아니고 미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때에만 신성합니다.
결국 미국에서 법이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절대'라는 것은, 이윤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다르다고 생각들 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더하면 더할 것이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남북한 무장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이 국내 영토에 있으면서 남한의 민중이 이북 김씨 왕조와 이남 삼성 이씨 왕조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능력이 되면 전쟁국면을 혁명국면으로 돌려 자본주의 철폐에 노력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면, 당장 감옥에 가거나 '즉석 처분'될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표현자유고 뭐고간에 말씀입니다.
체제의 존속이 문제가 되면 법은 팽개쳐지고 반대자는 그저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실정입니다. 저는 이걸 아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든간에 민중이 지배자들의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 하겠습니다. 그 말을 계속 하지 않고서는 저는 존재의 의미를 도대체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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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양심, 민중들과 만나야 빛난다" (레디앙, 2011년 04월 29일 (금) 08:19:56 박노자 / 오슬로대)
후세 다츠지 변호사의 경우…민초들의 투쟁 역사가 중요한 이유
이번에 저는 기내에서 <체벤굴> 대신에 읽은 '치료용 도서'는 3년 전에 지식여행사가 낸 <후세 다츠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라는 책이었습니다.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라는 분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양심'입니다. 돈을 잘 버는 변호사로서 출발하여 이미 1910년대 말에 동경 법조계의 거물이 된 그는, 3.1운동과 일본 국내에서의 쌀 소동, 그리고 멀리에서는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에 '자기혁명'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에서의 파업을 하다 패배 당한 동경 시영전차 노동자와 같은 약자들도 매우 성실하게 변호했지만, 특히 식민화된 조선인과 대만인들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여 그 독립운동의 주요 사건마다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는 전남 궁상면 쟁의 농민도 변호했는가 하면 아나키스트 박열이나 무정부주의 계통 의열단부터 박헌영 등 법정에 선 조선공산당 지도자들까지 다 변론해준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사민주의 계열의 일본의 합법적 좌익 정당에 속했지만, 조선에 대한 그의 의견은 차라리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의 분석에 더 가까웠습니다.
즉, 그는 조선 식민화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선 민중의 해방 문제를 세계 민중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조선 무산자와 일본 무산자의 연대가 시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쉬지 않는 무산자 변호 활동으로 그가 몇 번 체포, 구금을 당하고 결국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호사 활동의 기회를 잃어 일본의 패전까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돈 잘 버는 변호사가 자진해서 무산자들과 연대해 싸웠다가 본인도 거의 무산자가 된 것이니, 정말 진정한 의미의 양심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한 때에 지배자 대열 가까이 선 사람이, 어떻게 해서 무산자들의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을까요? 물론 어릴 때부터 유교적 보편주의를 익혀 나중에 톨스토이의 박애주의에 푹 빠진 후세 선생의 개인 특징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자진해서 무산자의 투쟁 대열에 합류해 자신의 계급적 위치까지도 거의 희생시키는 것은 유교적 교육을 받고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개명한 유명 지식인 사이에서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계급 사회의 논리로서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단순히 한 유명 지식인의 개인적 신념으로만 해명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보적 신념을 한 때에 내비쳤다가는 졸지에 <조선일보> 기고자로 전락한 교수들을, 우리가 한국에서도 최근에 수십 명 가까이 보지 못했습니까? 신념도 신념대로지만, 한 유명 유산자 지식인이 '밑의 계급'의 투쟁대열에 합류하게끔 만드는 것은 결국 어떠한 '힘'의 작용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물리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상체계와 조직체계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배자의 대열에 속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혼이 아직 살아 있는 유명 지식인은, '밑에서'는 그 영혼의 이상들을 구체적으로 실천시킬 수 있는 사상 전개의 논리가 있고, 그 이상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조직적 투쟁 대오가 있다는 것을 보면, 결국 통치자의 측을 훌륭하게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배반해서 합류할 수 있는 대오가 있다는 점을 알면 말씀입니다. 그러나 '밑에서'는 사상체계가 잘 잡히지 않고 투쟁, 조직화 움직임들이 적극적이지 못하면, 지배자 대열에 속하는 지식인으로서는 아무래도 그 양심을 사회적으로 살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후세는 러일전쟁을 반대하는 톨스토이의 글을 이미 1904년에 <평민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즉 그는 일찌감치 평민사라는 초기사회주의자들의 집단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그는 1911년에 고토쿠 슈수이(幸德秋水) 선생의 공판을 방청하는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그들에 대한 탄압의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일본에서 노조, 농조들과 긴밀히 협의했으며, 한국에서는 그의 강연회를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가 지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계급의 투쟁세력이 이미 조직돼 있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후세와 같은 명망가로서 민중의 편에 넘어가는 것은 훨씬 더 쉬웠습니다.물론 그의 양심도 한 몫을 했지만, 우리가 그를 생각할 때에 단순히 그의 양심만을 찬송할 것은 아니고 그를 매료시킨 일본, 조선 민중 투사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밑의' 노력이 없었다면 명망가의 '양심'은 그렇게 쉽게 발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보수적인 기독교 자유주의자 함석헌은 과연 씨알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역사를 보고 평가할 때에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것보다 민중의 조직과 투쟁, 민중 사상의 형성 위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명망가 '양심'만의 역사가 아니고 무수한 민초들의 싸움의 역사, 즉 진정한 의미의 역사로서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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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은 왜 자본주의를 찬양할까? (레디앙, 2011년 04월 20일 (수) 11:53:26 박노자 / 오슬로대)
푸틴은 비판해도 '성역'으로 남아…"피착취 계급의 수직 분산"
작년에 레닌그라드를 찾아갔을 때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사회의 '격차'의 폭에 계속 경악하기만 했습니다. 제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초밥집에 가서 두 사람을 위해 가장 저렴하게 초밥과 김치국만 먹어도 드는 비용은 이미 한화 약 4만원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거의 스톡홀름 수준의 물가죠. 하지만, 중심가인 네브스키 대로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서는 한 달 연금이 평균적으로 한화 25~30만원 안팎의 연금생활자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나, 한달에 한화 약 12~14만원의 월급을 받는 대학가의 비상근 교원은, 과연 어떤 눈으로 그 초밥집을 바라봐야 합니까?
초밥이야 안먹으면 그만이지만, 한국보다 평균 임금이 거의 두 배 이상 낮은 러시아에서는 무궤도전차나 버스의 승차권이 원화로 거의 1000원, 즉 거의 서울 수준이 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연급생활자들에게는 그나마 무임승차권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대학원에 다니거나 비상근 교원으로 연명하는 '학계의 무산계급' 입장에서는 과연 이런 생활은 지옥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부자들의 저택들은 거의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농장을 능가할 정도지만, 제가 며칠 다녔던 국립도서관의 아세아 및 아프리카 서적부(OLSAA: http://www.nlr.ru/fonds/vostok/ )는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보수 공사가 시급하고, 물과 전기가 자주 사고나 끊깁니다. 독자도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지옥적 사회에서 연명해야 하는 이들에게 도서관행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인 듯합니다.
흉악한 안보꾼들이 민주주의를 고사시켜 놓고 다스리고 있는, 부정부패가 사회의 모든 구석에 다 스며들고 격차는 이미 중남미 수준에 이른 곳은 오늘날 러시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 지식인들은 - 예의 중남미 지식인들의 상당부분처럼 - 과연 종속이론과 내포적 민중경제이론,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차베스와 같은 '평화적 혁명 지도자'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극소수의 좌파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제 가족이나 친척, 한국학 동료들 중에서는 급진좌파는 물론 사민주의적 온건 좌파도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경험이 아닌 통계로 보자면, 젊은이(10~20대) 중에서는 정치에 그나마 관심을 두는 이들은 약 8%에 이르지만, 그 중에서도 다수는 각종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경향에 합류하지 좌파를 거의 꺼립니다. 물론 '자주파', '민족좌파'가 있는 한국처럼 러시아에서도 일부의 민족주의자들은 적어도 반미적 지향의 차원에서는 좌파와 약간의 접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중산계층들 사이에서는 좌파는 극소수의 게토에 불과합니다.
물론 '중산계층'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정확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는데, 대체로 보면 재산 차원의 중산계층은 안정된 직장과 주택, 자동차 소유, 서방 중산층 수준에 가까운 소비 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신분(학력) 차원의 중산계층은 대도시 고학력자로서 안정된 와이트칼라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자의 정치적 입장이야 불문가지입니다. 저의 친척 대다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본인들이 무료로 양질의 교육을 받고 편안한 생활을 누려온 ) '현실사회주의'를 극구 비난, 부정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죠?
정말 수수께끼 같은 부분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가족, 친척 중의 40세 이상의 분들은, 노인의 연금이 초밥집에서 6~7차례만 간단하게 밥을 먹을 만큼 적고, 돈벌이에 지치면서 사는 대다수 서민들이 일을 마친 후에 집에 와서 수준이 있는 책을 펼쳐볼 힘도 없는, 이 지옥적인 현실을 분명히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나라를 극소수의 오만한 갑부, 관벌들과 대다수의 지치고 찌들고 밟히는 서민들이 각자 별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중적 시공간'으로 만든 자본주의를, 그들이 감히 비판하지 못합니다. 푸틴 독재야 비판할 수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신성불가침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인식과 이념 사이에 이와 같은 엄청난 괴리가 생기나요? 자본주의가 망가뜨리고 만 나라의 비참한 모습을 매일매일 보는 사람들은, 왜 '병인'(病因)에 대한 아무 생각없이 병의 증세에만 한탄하고 있는가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이론적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는 극소수의 착취자와 대다수 임금 노동자(피착취자)로 구성돼 있지만, 후자는 또 철저하게 위계서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력의 위계질서 (명문대 대 비명문대)부터 다니는 직장 사이의 위계 (대기업 대 중소기업), 직장 안에서의 위계(하급 관리자 대 단순 노동자; 정규직 대 비정규직)까지, 피착취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분산돼 있습니다.
좌파가 전통적으로 강한, 프랑스 같은 사회에서야 판사나 검사까지도 자신들을 노동자라고 규정하고 같이 파업 내지 시위할 수 있지만, '통상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피착취자라 해도 어느 수위 이상 오르기만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아인식이 소멸돼가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국내의 '명문대 출신 대기업 최하급 관리자'는 학술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노동자'로 분류되겠지만, 그가 노동자 투쟁에 합류할 가능성은 과연 어느 정도입니까? 러시아와 같이 비교적으로 가난하고 불안정된, 사회적 정의도 기초적 합리성도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피착취자 계급의 '수직적 분산'입니다. 피착취자의 상층, 중간 부분이 '작지만 큰' 특권들을 누리는 만큼 현 정권에 비판적이라 해도 자본주의에 감히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 '작지만 큰 특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학력 자본의 대물림 가능성입니다. 일단 고학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대학 교육을 받아 (남자 아이의 경우에는) 군 징집 연기하거나 (박사학위를 받을 경우에는) 면제 받을 가능성은 큽니다. 소련 시대에 태어나 이미 고령이 된 고학력자 부모 본인이야 저임금 화이트칼라직(교수, 교사, 공립병원 의사 등등)에 남아도, 아들이나 딸이 행여나 서방에 나가서 취직하거나 민영회사에서 잘 취직해 돈을 많이 벌 경우에는 온 가족이 그걸로 득을 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학력자들에게 부수입을 올릴 기회들은 열려 있습니다. 교사나 교수의 과외 등 사교육 분야부터 공립병원 의사의 개인적 진료까지요.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 노동자에 속하지만, 육체노동하는 사람과 별도의 세게에서 살고 별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분산으로 자본주의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부패한 그 지배자들은, 세계 공황의 영향부터 서방 열강들과의 모순 관리까지,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가능성은 다분히 있습니다.
1905년, 일본에 대패를 당한 러시아에서 중산계층까지 가세한 1차 혁명이 일어난 전례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은 큽니다. 단, 중산계층까지 혁명에 가세하고, 적어도 그 전위적 일부라도 공장 노동자, 청년, 이민 노동자들과 손잡기 위해서는 혁명적 전위, 즉 (몇 안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적 노력들은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이 조작한 우리 계급의 분산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분산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면, 역사의 흐름은 드디어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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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 욕만해서는 안된다 (레디앙, 2011년 04월 08일 (금) 08:08:49 박노자 / 오슬로대)
전체주의-국가자본주의 비판을 넘어…긍정적 측면 부활돼야 
이번 미국의 아세아학회에서 저로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갔던 부분은 북한초기사에 대한 발표들이었습니다. 그 발표들 중에서는 특히 미국 루트거스(Rutgers)대학의 수지 킴(Suzy Kim) 교수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유명한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제자인 그녀는, 1945~1950년의 북한에서의 대중들의 조직활동상을 분석했습니다.
주된 자료 중의 하나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돼 있는 소위 '노획문서', 즉 미군이 이북지역을 침공했을 때에 무단으로 약탈해간 북한 관공서의 문서들이었습니다. Suzy Kim교수는, 한 가지 예시로서 노획문서 중에서 그녀가 찾아낸 한 농민의 입당 신청서와 자필 이력서를 보여주면서 분석하셨습니다. 문맹자이자 소작농이었던 그 농민은, 북한 초기의 토지개혁으로 우선 소농으로 그 지위가 향상됐고, 한글을 깨치고, 또 한글을 깨친 뒤에 농민조합련맹에 가입하여 그 열성자로서 적극적인 조직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자무식의 소작농으로서 사회생활로부터 배제돼온 그는, 북한 초기의 몇 년 사이에 당당하게 공공영역에 발을 들여놓아, 작지만 큰 한 명의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농민의 운명은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나 그와 같은 무수한 식민지시대의 주변분자들에게 북한의 '현실사회주의'가 공공영역으로의 관문을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공공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공공영역은 어디까지나 당의 통제를 받는, 자율적이지 않는 공공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착취대상자에서 일명의 작은 '나라 주인'으로 일약 탈바꿈한 수많은 민초들은, 사항별로 이해충돌은 있을 수 있어도 크게 봐서 당의 통제를 반대할 일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그리고 초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의 '합의 독재'가 가능해진 상황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주체사상'의 선포와 극단적 국수주의, 개인숭배의 만연 이전의 북한은 크게 봐서 동유럽형 '현실사회주의'의 한 갈래에 해당됐습니다. 이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극우파부터 온건 사민주의자들까지 '전체주의'라고 규정하는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체성 말살, 전체성의 횡포, 국가의 견제되지 않는 폭력, 사회, 정치적 다양성의 부재'를 들어 대체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추세가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 '다함께' 등으로 대표되는 트로츠키주의자 등 급진좌파는 '스탈린주의'(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 부재나 평등성의 붕괴, 관료층의 독재, 그리고 혁명성의 쇠퇴를 들어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 왜곡"부터 아예 "국가 자본주의로의 전락"까지 이야기하여 "사회주의는 아니었다"고 잘라버리고 맙니다.
재미있게도 이 두 가지 부정적 견해는 어떤 경우에는 하나로 통합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원로 중의 한 명인 막스 샤크트만 (Max Shachtman, 1904~1972)은 소련을 "집체주의적 관료 국가"로 보는 관점부터 출발하여 머지 않아 자본주의보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운동에 더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년에 그는 우파사민주의자로 개조(?)되어 아예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반대할 정도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이론가 중에서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적 본질을 인정해주는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1923~1995)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현실사회주의의 장점보다 그 '관료적 왜곡'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모든 비판들은,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사회주의를 유토피아로 생각한다면 현실사회주의는 분명히 그런 사회주의와 사이가 멀었습니다. 일단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 트로츠키파 등 각종 급진파에 대한 관료적 보수파(스탈린파)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 현실사회주의의 질서는 분명히 경직된 관료성을 특징으로 한 것은 사실입니다.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레닌의 원래 계획대로 '밑에서부터' 자율적으로 경제기획을 짜고 코뮨형의 '국가 아닌 국가'를 민주적으로 운영했다기보다는, 위계질서적 당 중심의 질서의 하부구조로 편입되고 말았죠. 또한, 세계혁명의 좌절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와 군사대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사회주의는 국민(인민)국가 질서를 공고히 하고 상당한 수준의 군사화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비군 자체를 폐지시켜 노동자들의 자율적 민병대로 대체해야 한다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원래 이상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후퇴이었죠.
자본주의 세계에 괴멸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아주 급격히 공업화 진행해야 했던 현실사회주의는 특히 초고속 공업화 과정(소련의 1930년대 초반~1950년대 초반)에서 자원동원을 위해 상당한 국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사실, 그 누명이 높은 스탈린의 대숙청은 대체로 국가 중심의 초고속 공업화 과정의 정치적인 파생물로 봐야 할 듯합니다. 열성과 공포가 뒤섞인 분위기가 아니라면 10년간 파쇼독일과의 대전쟁에서 지지 않을 만큼 공업기반을 닦기 어려웠다는 것이죠.
급진파(트로츠키파 등)가 승리했다면 아마도 공포보다 열성의 비율은 더 높았겠지만, 우리는 유토피아 아닌 현실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극도로 보수적인 농민의 국가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를 거의 '종교화'시킨 스탈린파의 승리는 훨씬 쉽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우파가 이야기하는 현실사회주의의 '집단주의적' 측면들도, 사실 대체로 이와 같은 농민사회의 전통적 보수성에 기인하는 것이죠. 하여간, 혁명은 뜬 구름 위에서 하는 게 아니고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는 만큼 후퇴, 굴곡, 자기 배반이 없는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도 예외일 순 없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적 경험을 무조건 '전체주의' 내지 '국가자본주의', '집체주의적 관료 국가'라고 하여 배격만 해야 합니까? 역사 속의 (상당 부분 불가피했던) 왜곡들을 당연히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왜곡'으로만 보기는 힘듭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국가를 통치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들의 상대적 지위가 높아지고 고등교육부터 휴양소 등 휴양시설까지의 접근이 쉬워져 노동에 대한 소외를 훨씬 덜 느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1950~60년대를 회상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목소리 (백승욱 편,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폴레테이아, 2007)를 들어보면 그 당시에 활짝 웃으면서 밝은 표정으로 출근하고, 공장을 자기 집처럼 여기는 일은 거의 당연했습니다. '국가로부터의 노동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적어도 공장 단위의 차원에서 이윤추구, 개인 자본가의 소유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져 노동자의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는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 학교들이 권위주의나 군사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사실,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의 교사, 교장 린치 사건의 상당 부분은 교권주의적 태도에 대한 '복수'와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체벌과 같은 폐습은 일단 완전히 사라지고, 또 노골적인 성적 경쟁보다 상호협력이 우선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 못하는 노동자 출신'들이 적어도 한국과 같은 '초자본주의적' 사회에 비해 훨씬 상처를 덜 입었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필자가 다녔던 학급에서는 필자를 포함한 '모범생'들은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가서 숙제를 도아주고 보살피는 것은 관례이었습니다. 뭐, 성적에 대한 은근한 의식부터 간헐적으로 (아동 사이의) 폭력까지 있었던 것은 필자가 기억하는 소련 말기의 학교 현실이었지만, 체벌부터 수능지옥까지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는 동시대의 남한 학교와는 비교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현실사회주의란 분명히 유토피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간이 나름대로의 존엄과 긍지를 지키면서 생산적으로, 비교적으로 평등한 환경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회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북한은 '정통 현실사회주의'보다 아주 경직된, 훨씬 더 유교적이고 군사화된 사회로 나아간 반면, 쿠바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현실사회주의는 자본화를 추구하는 내부 관료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동유럽 노동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자멸을 막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장점까지 우리가 과연 망각만 해야 할까요?
어떤 왜곡들이 있어도 적어도 인간이 자기 미소까지 팔아가면서, 윗사람에게 부단히 아부하면서 생존을 도모할 필요까지 없었던 사회, 즉 개인의 소외가 오늘날 자본제에 비해 훨씬 적었던 사회를 우리가 부지런히 기억하고, 그 모습을 자꾸 복원하고 이야기해야 우리 투쟁에 힘이 보태질 것입니다.
왜곡된 면까지는 반복할 필요야 없지만, '현실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들의 부활은 앞으로는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북한초기사의 공부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의 20세기에서 가장 기억 잘 해야 할,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이 망각된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구소련-중국, 계급적 '지진' 중심 가능성 커" (레디앙, 2011년 04월 13일 (수) 08:52:42 박노자 / 오슬로대)
[현실사회주의 글 반응에 답함] "박정희 체제와 같은 거라고? 글쎄요"
'현실사회주의'의 배울 만한 장점에 대한 지난 주의 제 글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을 보면,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논리로 결국 박정희 등 개발독재까지도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기반한 것 같았습니다.
제 의도는 일당(一黨) 독재에 대한 합리화에 있었다기보다는 독재 바깥에서의 사회생활, 그리고 개인적 이윤추구를 배제한 계획경제 등 10월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불려일으켜보자는 것이었는데, '개발 독재'의 문제가 지금도 시의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제 글이 의도 무관하게 그렇게도 읽혀질 수 있었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표피적인 유사점과 본질적인 상이점들에 대한 고찰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잘못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잘못을 늦게라도 고치기 위해서는 좌파 계통의 '통제사회'인 과거 동유럽 제(諸)사회와 극우파의 '개발 독재' 체제(박정희 체제 등)를 놓고 대략적이나마 한번 비교라도 해볼까 합니다.
소련이든 박정희 시절의 남한이든, 지금 제가 그럭저럭 굴러다니면서 사는 노르웨이든 모든 근대 국민국가들은 국민국가로서의 공통적 특징들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남한처럼 '국기에 대한 맹세' 등 파쇼적 '국민의례'들이야 하지 않지만, 노르웨이에서도 학교 등 관공서는 물론 개인 단독 주택들까지도 상당수 국기 게양을 하면서 그 애국심을 만천하에 과시합니다.
세상에는 '대한민국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국민국가마다 국기, 국가(國歌) 등 '국민적 소속'의 상징들을 이용/악용하여 '국민의식'의 주입을 통해 계급의식의 전경화(前景化)를 미리 방지하는 등 체제 안정을 도모합니다.
과연 소련은 크게 달랐을까요? 글쎄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한, 소련, 노르웨이 등이 다 같은 '국민국가'의 류에 속한다고 해서는, 과연 그들을 완전히 '같은 존재'로 볼 수 있습니까? 몇 시간 전의 학부형 회의에서 "우리 학교의 핵심적인 과제는, 아이들 사이의 심리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참여와 통합 중심으로 이루어져, 특히 놀 때에 그 어떤 아이도 배제하지 않게 배려해주고 아이들이 동료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거나 동료들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미리미리 분위기 조절해주는 것"이라고 밝힌 제 아이의 담임선생의 말부터, 저는 남한의 상황에서는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선생에 대한 아이들의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마다 하루마다 아침에 꼭 악수하는 관습도 그렇고요. 반대로, '0교시, 우열반, 야자보충' 이야기를 노르웨이에서 누구에게 하면 아마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주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국민국가'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민주의 국가와 재벌 준(準)독재 국가 사이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그 다음에, 남한(그리고 대만,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 등등)과 소련(폴란드, 동독 등등)을 놓고 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배제한 총동원적 정권 하에서 초고속으로 공업화를 이루었다는 점은 분명히 - 표피적으로는 - 유사할 것입니다. 총동원의 분위기 속에서의 초고속 공업화라는 상황은, 또 그외의 여러 공통적 특징들을 파생시켰습니다. 예컨대 박정희식 저곡가 정책이든 스탈린식 저수매가, 트랙터에 대한 고임대료 정책과 식량품 징발 정책이든 도심의 공업화에 대한 부담을 대체로 농업부문이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총동원 분위기는 전사회의 군사화로도 이어져 소련에서든 남한에서든 징병제 군대에서의 복무는 다수 남성들에게 '통과의례'가 되다시피 하고, 고등학생들까지 교련수업을 받느라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저 개인 같으면 특히 그 교련수업이 아주 괴로워, 퇴직 대령급인 교련 선생님을 늘 '이상한' 질문으로 괴롭히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핵 전쟁의 경우에는 아군이 미제 측에 핵폭탄을 투하할 때에 미국 노동자 등 무산계급까지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공산주의 가르침과 합치되느냐? 적국 인민 속의 계급을 가리지 않고 타격을 주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공산주의적 군대가 이용하는 게 마땅하느냐?"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별다른 답이 없었던 그 대령님은, 제게 복수(?)하는 방법은, 자동총 분해조립을 규정대로 45초만에 하지 못했던 저를 가리켜 "너 같이 자동총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남자냐? 그런 사람에게 과연 시집올 여성이 있겠느냐? 이상한 생각 말고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나 키우라! 아가씨들에게 인기를 얻는 묘책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하셨습니다.
물론 학급의 모든 학생들은 파안대소하곤 했죠. 이렇게 해서 "인기 없는 비(非)남자"로 전락하곤 했던 저는, 만약 남한 학교에서 대령급의 교련 선생을 그렇게 대했다면 과연 무엇이 됐을까요? 바로 그 자동총으로 머리나 크게 맞아 '비(非)남자'도 아니고 아예 반주검이나 되지 않았을까요?
'현실사회주의' 학교에서 체벌부터 절대 불가능했던 점부터는 이 두 초고속 공업화 모델 사이의 엄청난 본질적인 갭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괴리의 근저에는, 양쪽 모델을 실천에 옮겼던 양쪽 정권의 정치, 사회적 발생 경로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부터 깔려 있는 겁니다.
박정희와 그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 공범(共犯) 집단은 - 비록 개인적으로 미천한 출신의 자수성가형 출세주의자들이 많이 끼어 있었지만 - 근본적으로 남한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했습니다. 재벌들의 재산을 다 몰수할까 말까 하는 초기의 생각을 그들은 꽤나 빨리 접었으며, 1964년 이후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철저하게 재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진행했습니다. 관벌과 재벌 이외에 그 '기적적' 발전으로 득을 본 사람들은 1963년부터 지금까지 약 1176배 정도(서울의 경우) 솟아오른 땅값 급등으로 고속 치부한 부동산 소유주, 즉 중산층들입니다.
셋방 살이하는 40%의 대한민국 시민들, 즉 임금노동자들의 중간층과 하층, 그리고 영세민의 경우, 그리고 약간의 부동산을 소유해도 미쳐버린 사교육 경쟁 등에 어차피 패배하게 돼 있는 상당수 중산층 하부, 중부의 경우에는? 이들은 결국 1960년대 초반의 살인적 절대빈곤을 벗어났지만, 상대적 빈곤의 늪에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위의 5~10%만이 늘 이기게 돼 있는 과두제(寡頭制)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서 지치고 병들고, 스트레스로 고생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대다수의 경우에는 외롭고 불우하게 늙어죽는 것은 그들의 비극적 운명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박정희형(型) 고속성장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반(反)민중적이었으며, 그 특징은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욱더 노골화돼 한국을 자살율만이 초고속 성장하는, 살기 무서운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박정희는 기득권층의 일부분이었다면 '현실사회주의' 사회 지도부들은 대체로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 중에서의 보수파에 속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 혁명가들을 숙청해가면서 혁명을 거친 사회를 다시 보수화시킨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일단 혁명을 거친 사회인 만큼 혁명의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예컨대 관료집단은 생산수단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해가면서 노동자의 자율적 일터 민주주의를 배제했지만, 경제적 특권이나 정치적 권력은 세습되지 못하는 등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이 요구하는 기본적 사회정의는 그래도 관철됐습니다. 공장 지배인이 그 공장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 해도 소유하거나 자손들에게 넘길 수 없었으며, 스탈린의 아들은 공군 장교가 되고, 흐루쇼프의 아들이 유명한 미사일 설계사가 되고, 브레즈네프의 딸이 외무부 고문서보관과 중간급 관료가 돼도 그들이 정치권력을 세습할 꿈도 감히 꿀 수는 없었습니다(이 측면에서는 '현실사회주의'는 오늘날 북조선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자본가가 기업을 소유하는 대신, 업적주의적 원칙에 따라 승진이 될 수 있었던 관료들이 전체 국가의 생산시설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지는 못한 채) 관리하는 과정에서는 개개인의 치부나 위치세습 등 지대추구적 행동은 나름대로 견제되고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국가운영은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남한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민중 대다수를 위한 복지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비록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혁명의 보수화 과정의 산물이었다 해도, 과거 기득권층이 전복되고 새로운 관료층이 민중들의 사회정의 욕구를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사적 이윤추구 배제, 대다수를 위한 복지 정책 추진 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혁명적 에너지'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길도 '현실사회주의'의 길도 같은 초고속 산업화의 길이었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사이에 연출된 역사적 비극의 결말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되려고 안달이었던 관료들에 의해서 '현실사회주의'가 자멸되고, 그 영토는 중심부 내지 (남한과 같은) 준중심부 산업자본을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됐습니다. 혁명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과거의 '인민'들은, 계급적 적 앞에서 너무나 약했던 죄로 새로운 과두재벌의 권리없는 머슴이 되거나, 저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부에 팔아야 하는 망국노적 신세가 된 것입니다. 계급 투쟁에서 패배한 피착취자를 기다리는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이걸 봐도 좀 아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때에 불완전하게나마 자유의 공기를 들이쉴 수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노예적 형편에 스스로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구소련이나 중국은 앞으로는 엄청난 계급적 '지진'의 중심에 넣여져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이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는, 경직된 관료들에게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개인 자본가와 개인적 이윤추구 없이 자유로이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집단기억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집단기억은, 앞으로는 새로이 화염을 번지게끔 할 수 있는 '휘발유'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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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본 (레디앙, 2011년 04월 01일 (금) 13:29:25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 이익에 봉사하는 '틈입자'들…민족주의 포기와 반북주의 광풍
저는 지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아세아학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중입니다. 방금 개회기념식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기념식에서 하와이주립대의 여러 당로자들이 축하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우리 고장 자랑" 정도였습니다. 인구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학교에서 80여개국의 학생들이 재적한다, 50여국 출신의 연구자들이 적을 둔다, 아세아에 있는 유일의 미국 주(州)다 등등,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본주(本州)가 미국에서 요즘 국시 격인 "다문화주의"의 권화라는 요지의 연설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더해, 당해 대학의 소위 공자학원이라는 기관의 기관장이란 분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바로 우리 하와이 출신, 여기에서 출생하고 학교에 다녔다"고 자랑스럽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마바의 손에 묻은 남의 피는 김정일의 손에 묻은 피보다 훨씬 짙은 것입니다. 김정일이 직접 관여했다고 믿을 수 있는 대남 공작이나, 대남 무력 충돌로 (북한의 소행인지 아닌지 극도로 불분명한 대한한국 858편 실종 사건까지 억지로 포함한다 하더라도) 희생된 사람들은 양쪽에서 수백명이 된다 해도, 오바마가 책임져야 할 아프간, 파키스탄, 리비아에서의 미국 침략, 포격, 폭격, 납치, 감금, 고문, 암살의 희생자들은 지난 3년간 분명히 수천 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무기 생산과 판매를 통한 간접 살인까지 이야기한다면, 아예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바마의 살인적 실적(?)은 좋아보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의 언급이 이렇게 환성을 자아내는 걸 보니 인간은 정말 아주 괴상한 동물입니다. "우리 정부는 살인범들의 도당"이라는 생각을 안고 살기가 그렇게까지 버겁고 어려운가요? 글쎄, 저는 지금 리비아 공습까지 참여한다는 노르웨이 정부에 대해서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내서 그렇게 해보기를 바라는 것이죠.
오바마에 대한 곡학아세 수준의 아부성은 그렇다 치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하와이 대학 당로자들의 긍정적 확신도 저로서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습니다. 물론 타자의 인종적 차이부터 언어, 종교까지 폭넓게 환영하는 것이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에서의 분위기가 타자가 틈입해서 살기에 더 좋다는 것도 수많은 한국인 이민자, 유학생들도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럽 우파식의 거의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유럽적 가치"나 동화를 방불케 하는 "통합"에의 강조보다 미국, 호주, 캐나다 식의 다문화주의가 진일보한 부분은 있다 해도, 그 저의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봐야 합니다.
북미주로 틈입하는 타자들은 대체로 육체노동 솜씨(이는 특히 중남미계 이민자들에게 해당됨)나 금전 자본 내지 학력 자본(인도,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대표적임) 등을 갖고 들어오는데, 이 모든 요소들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용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유럽과의 차이라면, 이미 동유럽을 잠식해 유럽연합에 포함시킨, 즉 폴란드 등지의 육체노동자부터 의사까지 폭넓게 이용하고, 러시아 등으로부터 도피해오는 자본을 유입시키고 있는 서유럽으로서는 유럽 바깥으로부터의 "틈입"이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유럽연합의 총인구(약 5억명)는 미국과 캐나다의 총인구(약 3억5천만 명)보다 훨씬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본은 유입 인구에 대한 착취를 지향하지 "틈입자"들에 대한 동등 대우를 전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는 아무리 국시가 돼도 프랑스나 스페인, 포르투갈과 달리 미국은 보통 소위 "불법 이민자"들을 대량으로 사면해주지 않습니다. 천만 명을 넘는 그들을 "불법"으로 계속 묶어두어야 거의 노예처럼 착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케냐와 미국 중산층 부모의 자손인 오바마에게야 다문화주의는 적용되지만, 오바마가 다녔던 고등학교 (푸나후 학교) 밑동네 근방의 식당에서 "불법"으로 일하는 중남미나 한국 등지의 출신들은 다문화주의와 무관하게 평생 단속을 겁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국계 거주자들의 비율은 유럽연합의 평균치보다 약 3배 낮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여러 측면들은 있지만, 그 중에서의 하나는 분리통치 정책으로서의 다문화주의의 한국적 역할입니다. 단기취업비자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다문화주의 정책 수혜자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돼 있는 반면 결혼 이민자들이나 고학력 이민자 등은 수혜자로 돼 있기에, 이 두 그룹 사이에 한국 권력자들이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나 인도계 기술자, 필리핀계 아주머니, 방글라데시계 노동자가 같이 손을 잡고 그들을 착취하고 사실상 계속 따돌리는 대한민국 지배자들과 연대해서 싸울 가능성을 미리미리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측면은, 다문화주의와 연계돼 있는 민족주의 이념 포기 정책이 반북주의 광풍 조장에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부분입니다.
"민족"보다 (결혼이민자들까지 하위 배치돼 편입될 수 있는) "국민" 내지 "시민"이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는 탈북하지 않는 이상 "국민화"될 수 없는 북한인들에 대한 이질감은 더욱더 강화되기가 쉽고, 반대로 "국익에 도움된다"는 이념 주입 하에서 외국자본의 유입 등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통치자들이 이북 영토에 대한 지배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그 만큼 또 이북 영토의 식민화를 합리화할 민족주의적 이념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당장에서는 그들에게 "무한경쟁" 표어 하에서 이루어지는 월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의 착취 행각이 훨씬 더 이득이 되는 것이고, 또 증시에 외국계 자금을 끌어들여 주식가격을 높여 이득을 챙기는 일도 재미가 되니 멋져보이는 "탈민족주의"를 약간 더 후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원색적인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뉘앙스가 많고 융통성이 있는 탈민족주의 내지 다문화주의는 "우리 속의 타자"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민족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단, 자본과 권력의 손에서는 민족주의든 탈민족주의든 다문화주의든 그 어떤 이념도 결국 약탈, 착취, 이용, 분리통치의 도구가 되어 악용될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죠.
우리가 풀어야 할 궁극적 모순은, 한국인과 비한국인 사이의 모순은 절대 아닙니다. 삼성 이씨 왕조와 백혈병으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이 사회, 이 세계의 기본 모순입니다. 이 모순만이 풀리면 여성문제든 종족적 타자 문제든 나머지의 이차적 모순들은 다 스스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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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역사의 답답함" (레디앙, 2011년 03월 25일 (금) 01:14:28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연구회 사건] 남북, 억압적 사회정치체제 동질화?
저는 직업상 역사쟁이입니다. 과거의 사실을 체계화, 언어화해, '집단기억'으로 만들어 유포시키는 것은 제 직업입니다. 저 같이 100년 전의 신문들을 애독하는 비정상인들이 없어져버리면 그 속의 사랑과 증오, 열정과 배신, 지배자의 이기심과 민중의 고통, 저항이 다 그저 어디론가 증발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저는 제 직업을 나름대로 애호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역사에 대해서 한 가지 아주 불편한 느낌은 늘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이라는 말은 거의 관용구처럼 돼 있지만, 사실 특히 지배자들이 이 교훈에 대한 별 관심이 없어 역사는 - 약간 바뀐 형태긴 하지만 -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반복된다'기보다도, 이미 고정돼버린 어떤 형태들, 어떤 패턴들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계속해서 무서운 '생명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진보'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우리의 기대에 비해서 너무 미미해 보이고, 그 대가는 너무 비싸고, 또 기존 패턴들의 반복성은 훨씬 더 돋보입니다. 그러기에 매천 선생의 말을 약간 바꾸어서 쓰자면 "역사를 아는 사람으로서 세상 살기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我)해동에서 일어나는 괴사(怪事)들을 예로 듭니다. 예컨대 며칠 전에 일어난 '자본주의 연구회' 사건을 한 번 보시지요. 주체사상도 아니고 이 대한민국의 국시 격인 자본주의를 연구한다는 일군의 재야 인물들과 청년들은, 졸지에 '북한을 찬양하는 이적 단체'로 둔갑되고, 바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가 국시인 나라에서 자본주의 연구를 하면 바로 이적, 즉 적을 돕는 범인이 된다 - 아, 이 정도면 우리는 벌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거의 따라잡고 능가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 덕분에 그쪽에 자유로이 갈 수조차 없는 소생(小生)은 자세히 모르지만, 듣는 바로는 그쪽에서도 주체사상연구회나 사회주의연구회를 함부로 만들어서 국시를 함부로 '잘못'(?) 해석했다가는 사회의 관리자들에게 혼날 확률이 좀 높은 편이랍니다.
참, 이번 정권은 아주 고차원적인 통일 의지가 있어서 그런지 남북한 사회정치 체제의 동질화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쪽 토건/수출제일주의자들은 저쪽 조선민족제일주의자들을 일부러 베낄 수고까지 하지 않아도 될 셈입니다.
전자는 일제라는 모태에서 미군이라는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난 것이고, 후자의 계보는 훨씬 더 복잡다단하지만 일제와 사투를 벌이면서 일제를 배운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근본적으로 1925년 5월 12일부터 일본열도와 대만, 한반도 전역에서 처음 시행돼 그때부터 실제로 한반도에서 계속해서 그 마력(魔力)을 발휘해온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의 그늘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체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조직'이라면 애당초부터 '비(非)국민', 무조건 잡아서 옥(獄)에 집어넣어도 될 사람 아닌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남한 같으면 국체의 요체는 일제시절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이기에, 치안유지법의 말대로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행위"는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됩니다.
이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굳이 '부정'하지 않고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듯한 연구'만 해도 벌써 처벌 대상입니다. 뭐, 총독부 경무국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보안기관들이 하는 일들을 저승에서 보고 있다면 아마도 박수를 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국적(國敵)을 취체(取締)하는 법"이라고 하면서요.
치안유지법과 같이 지배자들에게 긴요한 도구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싶었다가 곧바로 바람과 함께 다시 돌아옵니다. 너무나 입체적인 모습으로요. 물론 약간의 '진보'는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연구했다가 대한민국 보안기관의 현황을 현지 조사(?)하게 된 불우한 '국적'(國敵) 들은, 아마도 경무국 시절에 비해서 약간 더 나아진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적어도 고문을 당해서 미쳐버리거나 죽을 확률은 많이 낮아졌습니다. 답답해서 정신병이 발병될 확률이야 그대로 있지만요. 또한 공산주의자의 구금 소식을 전했던 1920년대의 <조선일보>보다는(못믿으시겠지만, 그 때만 해도 <조선.>은 <동아>보다 좌파적이었습니다!) 오늘날 <경향신문>은 이번 '국적 취체 사건' 을 조금 더 대담하게 다룰 자유까지 얻었습니다. 1929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사를 당한 차금봉 동지(車今奉)와 같은 불굴의 공산 투사부터 김남주 시인, 박종철 열사까지 무수한 지사들이 그 생명과 건강을 바친 대가는 바로 이것입니다. 고문은 거의 없어졌다시피하고, 그나마 얼마 안되는 신문다운 신문들이 보도다운 보도를 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치안유지법 그 자체를 역사의 쓰레기통에 완전히 버리자면 과연 역사의 잔혹한 여신에게 얼마나 많은 인신제사들을 바쳐야 할까요?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시위하고 살수차, 물대포를 맞고 곤봉 밑에서 쓰러지고 경찰 장화에 밟혀야 할까요? 참으로 답답하지 않습니까?
지배자들의 직업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망각증세입니다. 웬만하면 역사가 이미 진보됐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으려고 하고 늘 '하기 편한' 옛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미르차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려서 '영구적 귀환'으로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19세기 말 군함외교의 수준으로 다시 전락돼 리비아를 공습하는 서방 열강의 퇴보적 행태를 보셔도 무슨 뜻인지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그 시절'과의 차이라면 함포 대신 폭격기를 사용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영구적 귀환', 지속적인 옛 패턴의 반복을 막자면, 들고 일어나고 외치고 반대하고, 밟힐 때 밟히고, 그러나 그러고 나서 계속 일어나서 다시 외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주 답답하지만, 이건 역사에서 꺼낼 수 있는 제알 중요한 교훈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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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려면 모난 돌이 되자" (레디앙, 2011년 03월 11일 (금) 09:04:18 박노자 / 오슬로대)
'둥글게 둥글게'는 노예 삶…집단행동, 보통사람들의 무기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은 있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소위 '상식'이 꼭 사리에 맞지 않은 하나의 경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와 같은 류의 속담들이 나온 역사적 배경이야 십분 이해가 돼요. 한반도에서는 - 매우 아쉽게도 - 민이 관에 대해서 완승을 거둔 적은 없었어요.
왕조, 즉 '관' 조직의 교체 경험도, 외세의 영향에 기댄 급진적인 개혁의 경험(해방 직후의 이북 지역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요)도, 1987년과 같은 미완의, 아주 미완의 혁명의 경험도 있지만, '민'은 그래도 한번도 '완승'을 거두지 못하고 만 것에요.
기존의 서열들이 잘 해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범상'(犯上)을 생각하기가 두렵고, 범상할 것 같은 '모난' 성격이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거기에다 여태까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실제로 살아온 환경이란, 도시화 이전의 엄격한 장유유서 질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마을 사회나, 도시화 이후 개발독재의 문화 정책에 의해서 장유유서 식의 위계를 엄격하게 잡은 학교나 직장 등의 '조직'들입니다.
'조직형(型) 인간'의 최고의 덕목은 "둥글게 둥글게 행동하기"죠. 물론 후배나 부하에게는 꼭 둥글게 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2008년6월에 <이코노미21>에서 나온 한 직장인 여론조사의 자료에 의하면 약 60%가 '후배 군기잡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부하에게는 둥글게 하지 않아도, 이 조직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들은 상사에게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이 둥글게 대합니다. <이코노미21>의 같은 기사에 의하면 직장인 96%가 상사의 사적인 부탁까지도 들어준다고 하네요. 커피 심부름은 기본이고, 상사가 강추하는 보험에 가입하거나, '가족에 거짓말 대신해주기'까지 별 문제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상사하기 참 좋은 나라, 대한민국', 국제홍보의 좋은 거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둥글게 사는 것은 정말 심신 건강에 좋은가요? 솔직히, 제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꼭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상사에게 습관적으로 미소를 짓고 '절대적으로 비위에 거역하지 않는' 언행으로 일관하는 것은 당분간 득이 될는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심한 상처를 남겨 평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죠.
제 경우를 소개하자면, '평생'까지는 다행히 망가지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둥근 처신으로 심한 심적 외상을 입긴 했습니다. 약 13년 전에, 국내 한 사립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을 때에 그 대학의 '만능' 총장과 관계가 있다 싶은, 즉 '권세'를 부릴 만한 위치에 있었던 같은 과의 한 교수는 제게 - 본인이 총장의 요구로 번역했어야 할 - 문건의 로역(露譯)을 시켰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저는, "나중에 총장이 직접 부탁했으면 하겠다"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 때 시킨 대로 했습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겠지만, 결과는 좌우간 비참했습니다. 그 뒤로는 그 에피소드를 자꾸 떠오르게 되었고, 그 때마다 자신의 나약한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를 느끼곤 했습니다. '둥글게' 하다가는 전형적인 '심적 외상'을 입은 것이죠.
사실, 제가 본 피해(?)는, 어떻게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심부름부터 논문대필까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수많은 동료 비정규직 교수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걸레 취급'을 받아온 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을까요? "둥글게 둥글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신을 얼마나 파괴했을까요?
단재나 만해처럼 비타협적 '개인 반란'을 잃으키자면 일단 아사(餓死) 쯤을 각오해서 해야 하는데, 이는 범상한 중생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단재나 만해는 사표(師表)지 현실적 모델은 - 아쉽게도 - 되기가 힘들죠. 그런데 '개인 반란'은 어렵더라도, 착취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둥글게 둥글게" 굽실굽실했다가 나중에 화병이 쌓여서 일찌기 건강을 잃어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보다 집단 행동이라도 벌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직장단위 별로 비정규직들끼리 "충성 경쟁을 포기한다"고 서로 서약하고, 관리인들에게 공과 사의 철저한 분리, 사적인 착취의 근절을 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 교육일 걸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적당히 모난 돌이야말로 담 쌓기에도 좋고 예쁘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즉 '상황 파악/대처 능력'과 아울러 강직함, 그리고 인간적 존엄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은 좋지 않겠습니까? 궁극적 차원에서 본다면 "둥글게 둥글게 산다"는 것은 노예로 살다 죽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노예가 아니기에 이렇게 자신의 존엄성을 죽여가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불필요한 고통의 길일 뿐입니다. 인간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주로 하는 참다운 교육을 통해서 이 고통들을 방지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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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계 보스들 '행복한 놀이터'된 까닭 (레디앙, 2011년 03월 04일 (금) 07:42:37 박노자 / 오슬로대)
조용기 목사 호통의 배경…'교계 호족' 성공 비결은 낮은 행복지수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지금과 같은, 거의 '성역'에 가까운 위치에 서게 됐는가요? 어떻게 해서 한국의 일부 종교인들은 재벌과 정치인, 그리고 과거 조선 사회의 '山林', 즉 일종의 '사회 지도자'와 같은 기능들을 한 몸에 다 겸비해 기이한 '삼위일체'를 이루었는가요?
우리에게 급이 높은 종교인들이 누구에게도 호통을 칠 수 있는 풍경은 익숙해져 있지만, 이는 사실 조선 내지 동아시아 전통과 상당히 다르기도 하고, 또 세계의 많은 다른 나라들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종교인 만능' 차원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사실상 조금 독특합니다. 또 어찌 보면 종교적 파벌(종파)들의 우두머리들의 무소불위의 권위/권력은, 재벌 만능주의와 고도의 병영화/군사주의와 함께 남한 사회의 '3대 특색'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풍경은 조선 전통이나 동아시아 전통의 시각에서는 왜 이색적인가요? 정권이 늘 종교가 제공하는 정당성을 필요로 해온 동남아시아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애당초부터 국가는 이미 그 자체로서의 충분한 정당성을 보유해온 것입니다.
종교란, '王化'에 기여하는 한, 또는 기여하는 만큼 용인되고 장려까지 될 수 있었지만, '왕화', 즉 정권의 정치적/문명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입장에 전혀 서 있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정권의 요구대로 자기 고유 원칙까지 헌짝처럼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 징발이나 그 후의 의승(義僧. 국가적 신역身役을 다하는 승려)에 의한 남한산성 축성 같은 걸,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동남아에서는 승보(僧寶)에 대한 외호(外護)야말로 왕권 존재의 전제조건입니다.
한데 아조선(我朝鮮)은 정반대죠. 승려든 한양 소격서(昭格署)의 도관(道官)이든 심지어 유림이든 다들 왕조를 보필하지 않고서는 설 자리를 얻을 수 없었죠. 중국, 일본에서의 정교 관계 구조도 그 근본상 이와 상통해, 종교 지도자들이 적어도 사회를 '지도'할 수는 없는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은 바로 동아시아 전통 차원에서는 '정상'에 가깝겠습니다.
일면으로는 유럽과 비교를 해도 한국 종교는 아주 비상하게 비대화돼 있어요. 루터교를 아직도 형식상 국교로 하는 노르웨이에서만 해도, 실제 교회 출석하는 인구는 전체의 형식적 기독교인 중의 약 4%에 불과하며, 기독교적 담론은 소수의 우파 정당(기독교민중당 등) 외에서는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예컨대 오슬로 주교가 조용기 씨와 같은 류의 발언을 했다면 일차적으로는 '월권'(종교인으로서의 부당한 정치 참견) 시비는 일어났겠지만, 결국 대다수는 이를 아마도 '개그'쯤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오슬로 주교는 인기 있는 방송국 기자나 인기 작가보다 훨씬 권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지역에서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종교계 보스들의 '행복한 놀이터'가 됐을까요?
한국의 '기독교화'는 미군 점령과 이승만의 반(半)식민지적 정권 수립, 미국의 엄청난 영향으로 시작이 됐지만, 주로 1960~80년대에 이농인구의 교회 유입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최저임금제조차 없었던 '무복지 개발독재'에서는 교회란 '공동체 소속'을 잃은 수많은 이들에게 '대체/유사 공동체'가 되어준 것이었죠. 불교계는 주로 1980년대 이후, 상당 부분 기독교의 선교방법들을 그대로 채택해서 그 세를 넓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도시화 과정이 다 끝나고 적어도 기본적인 복지 서비스들이 이제 교회 밖에서도 점차 생겨나는 시대에 왜 아직까지 조용기가(家) 등 교계 호족(豪族)들의 '하나님 장사'는 이리도 잘 돼갑니까? 도대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중독'에 빠지게끔 하는 사회적 요인은 무엇인가요?
제 답은 간단합니다. 교회나 사찰이란 결국 진정한 의미의 개인적 종교의 대체물이기도 하고 (직접 신을 만나고 부처를 만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교회도 사찰도 전혀 필요없습니다), 또한 행복의 대체물이기도 합니다. 행복 지수가 한국만큼이나 낮은 사회에서는 종교 광신의 지수가 지금처럼 높은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히 연관돼 있죠. 신이나 부처님에게 성금, 불전의 형태로 (통하지도 않을) '뇌물' 이라도 주어서 풀려고 하는 문제들은, 우리가 평소에 풀 수 없는, 풀 수 없으니까 늘 괴로워하는 문제들입니다.
살인적인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암기로 끝나고 마는 '공부', 보람을 느낄 수는 없어도 불안과 공포를 늘 느끼는 직장, 상호 이용과 충성 경쟁, '하향' 멸시와 '상향' 아부로 압축되는 대인 관계, 일종의 기업체가 되고 마는 가정 등등... 이 무의미의 왕국에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는 수많은 이들은 결국 조용기들을 매개체로 해서 '최고의 상사'라고 생각되는 신이나 부처님에게 가서 자신들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최종 결재'를 받으려고 하는 셈입니다.
경쟁과 아부의 이 왕국에서 모든 문제들은 개인적으로, 상사에게 잘 접근해서 푸듯이, 행복의 문제도 개인적으로, 공인 받은 매개자를 통해 풀려 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이 매개자들이 전통상, 그리고 국제관례상 보기 드문 힘을 얻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행복을 얻으려는 이 마음이야말로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지옥에서는 개인적으로 그 지옥의 불을 도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을 타파하자면 염라대왕에게 하소연해도 소용 없고, 명부시왕에게 개인적으로 빌어도 소용없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도산(刀山)에서 몸이 살점으로 찍혀나갈 각오로 같이 몸부림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이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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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은 남한의 스승이었다? (레디앙, 2011년 02월 18일 (금) 11:18:03 박노자 / 오슬로대)
남북, 한반도적 근대성 성취와 수많은 비극 공유하고 있어
노르웨이 보수 일간지와 국내 보수 일간지를 비교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같은 보수라 해도, 노르웨이 보수는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들에 대해서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요. 그런 식으로 나오다가는 지하철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시민들'마저도 그 보수 신문을 보지 않을 게 하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가지 차원에서는 노르웨이 보수 신문들도, 국내 보수 신문들도, 그리고 세계 대다수의 '주류' 언론들도 상당한 유사함을 과시합니다. 그들 모두가 북조선을 희화화하는 것을 특기이자 주된 판매 전략 중의 하나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에 있어서는 또 상당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남한의 경우에는, 멸시와 희화화는 꼭 증오와 뒤섞여 있는 것이지만, 노르웨이 보수 신문들은 그저 "세계와 담을 쌓아 사는, 옛날 왕과 같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아시아 국가"를 이국화시키면서 "재미난 볼거리"로 삼는 것이죠.
정말이지, 배부른 자들의 오만을 목격할 때마다 차라리 극도로 호전적이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북조선식의 민족주의와 반제주의는 더 숭고하게 보이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민족주의에 문제제기할 수 있고 민족주의와 논쟁할 수 있지만, 배부른 자들의 오만을 보면 논쟁할 기분도 안나죠. 그저 역겨울 뿐입니다. 그러나 좌우간, 그 기사에서는 이국화와 오만은 느껴져도 별다른 증오심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 측면에서는 <조선일보>와 상당히 다르다고 봐야 하죠.
그런데 한국을 '최첨단 기술의 나라', '한류의 발상지' 등으로 극찬하고 (그리고 물론 삼성과 엘지의 광고도 많이 많이 받는) 이들 국내외 보수 신문들이 북조선을 증오의 대상이 아니면 그저 단순한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요?
지금이야 상상이 잘 안가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에 비해 분명히 경제력 등 종합 국력이 더 강했던 북조선은 양쪽 분단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리드하고 있었어요. 지금이야 북조선의 연간 국내총생산(약 260억 달러)은 삼성전자 연간 수익의 약 5분의 1에 해당되지만, 적어도 유신시대 말기까지 남쪽 지배자들도 지식인 사회도 은근히 - 그리고 때로는 거의 노골적으로 - 이북을 참고하고 이북을 배우고 또는 이북을 '창조적으로'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주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쪽 지배 체제의 공고화 과정이 상당 부분 병행했으며 서로 닮았다는 것이죠. 양쪽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형적으로 비슷한 궤도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분단 체제의 구조적 특징이라면 특징이죠.
본인이 볼 줄 몰랐던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쓰여진 책들을 참고문헌으로 내세운 '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님'이 된 이승만이 '총잡이' 김일성을 멸시했지만, 양쪽 체제는 많은 측면에서는 일란성 쌍둥이이었습니다.
1972년에 이남에서 유신체제가 선포되는 반면 이북에서 주체사상의 '유일화'가 이루어진 것은 과연 우연입니까? 크게 보자면 - 비록 정도의 차이 등은 있지만 - 1995~98년 이북의 대기근에 이은 부분적 시장경제 도입과 1997~1998년 환란 이후의 남한의 신자유주의화도 같은 거시적 과정(한반도에서의 개발국가식 조합주의의 위기와 시장주의로의 전환)의 일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북을 멸시한다면 결국 우리 자신들을 멸시하게 되는 꼴이죠. 더군다나 1950~60년대에 이북이 이남과의 경쟁에서 완전한 리드를 해서 이남으로서 모방의 대상이 됐던 시절까지 생각해보면 더더욱도 멸시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소련,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고, 소련과 중국의 힘을 크게 빌렸던 새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이북은,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국학 진흥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특히 주요 문헌(<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등)의 쉽고 정확한 국역과 실학 등 '근대 맹아적' 전통의 '재발견'에 주력했습니다.
뭐, 다산이나 연암에 대해 '근대 맹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근대지상주의적 견강부회의 측면이 강하지만, 좌우간 그 시의성 덕분에 <열하일기> 국역이 아주 잘 나와 지금 남쪽에서도 잘 읽혀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남쪽의 국역보다 <고려사>의 북역은 훨씬 읽을 만하고 정확하죠.
이승만 정권이 이북의 이 성과들을 보면서도 아예 별다른 대응할 능력조차 없었지만 박정희는 겨우 1965년에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문교부 산하에 두어 고전국역 사업을 좀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학 '재발견'의 중요성을 남쪽에서도 일찌감치 천관우 선생 등이 주장했지만, 특히 다산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진 것은 이북보다 훨씬 늦은 1970~80년대입니다.
1960~70년대의 이남은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면에서 이북을 '따라잡기'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박정희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들은 만주국 경험도 염두에 두었지만, 은근히 이북의 5개년계획을 능가해보자는 속셈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포항제철 건설 등 군수 공업의 기반이 될 철강 산업 진흥은 분명히 철강 생산이라는 전략적 부문에서 북한을 압도해보자는 계산 없이 그 추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는 이북이 꼭 먼저 발을 들여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이북의 핵무기가 문제된 것과 관련해서 기억해두어야 할 부분은, 김일성이 1959년에 소련과 핵연구 관련 협정을 맺은 것은 1956년 남한과 미국의 핵 협력 관련 협정에 대해 알고 남한에 의해 압도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핵과 원자력의 분야에서는 오히려 남한은 처음에 훨씬 더 많은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국학 등 연구를 국가의 직접적 지원 및 통제 밑에 두는 데에 있어서는, 1978년에 창립된 이남의 정신문화연구원은 분명히 이미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이북의 사회과학원을 은근히 벤치마킹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존심 상할 사람도 많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이남과 이북은 한반도적 근대성의 많은 성취(예컨대 문맹 퇴치 등)도, 많은 비극들(특히 전 사회의 병영화)도 같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데에 서로 지원해주는 게 정상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상적 세계에서 살지 못하는 것,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정상적 사고를 보유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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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절망, 그리고 무간지옥 (레디앙, 2011년 02월 11일 (금) 10:01:01 박노자 / 오슬로대)
최고은 작가 죽음과 대한민국…굶어죽는 거 남 일만 아니다
사실, 아사란 인류의 태생적 악몽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행위들의 바탕에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의식이 거의 언제나 깔려 있었습니다. 사실, 자연경제와 같은 상황에서는 '아이'라는 것은 가장 확실한 노후연금의 형태죠. '공동체'도, 그 핵심적 형태로서의 '가족'도 '아사로부터의 도피' 수단이라면, 인간의 윤리도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산 수단을 그나마 소유했던 농민들을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노동자로 만드는 '근대'를, 대중들이 많은 경우에는 왜 환영했습니까? 눈부시는 기술 발전이 아사라는 인류의 영원한 악몽을 퇴치시킬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그 악몽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3.1운동이 지난 뒤에 조선에 '사회', '공공성'이라는 관념이 무대 중심에 서게 되고 나서 대중매체들이 아사 방지의 노력을 사회화했습니다. 예컨대 흉년으로 인해서 1925년 이른 봄에 전남 함평군에 아사의 위험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신속히 보도하고(1925년2월10일) '사회'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회도 나서게 됐지만, 극도로 궁핍한 조선에서 아사가 그래도 비교적으로 드물고 예외적인 일일 수 있는 이유는, '가족', '마을'이라는 핵심적인 '자연적' 복지망이 그래도 여전히 강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원조와 가족이라는 보호막 덕분에, 극도로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전쟁이 황폐화한 한반도 남반부에 그나마 대량 아사 사태라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 한국에서 지난 10~20년간 사회는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어도, 자본과 국가는 제 자리에 있거나 오히려 퇴행한 것입니다. 자본도 국가도 수많은 원자화된 개체들의 질환이나 노후, 육아 등을 책임져주고 보장해줄 만한 그 어떤 복지망도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부모와의 가까운 관계는 이미 없고, 결혼을 아직 안했거나 하려 하지 않고, 가까운 친구 등이 없는 원자화된 개인은, 대한민국에서는 안심하고 살아나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240일 동안 재취직하지 못했다면? 현존하는 제도의 수준에서 이야기하자면 걸인이 되거나 굶어죽는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가족이 해체된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이죠. 물론 현실적으로는 대다수의 실업자들이 굶어죽기보다는, 다단계판매를 하든, 노점상을 하든, 공사장 노동을 하든, 몸을 팔든,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그 생존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파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최고은 작가의 뒤를 따를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만약 노동을 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무 기한없이 무상급식과 생존이 가능한 정도의 수당의 지급이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생활보호제도와, 240일이 아닌 취직 이전까지의 실업수당 지급 제도 등 제대로 된 복지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자신의 학력과 무관하게 착취적인 기업에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젊은 인재들, 가족이라는 보호막없이 해고를 당하기만 하면 아사와 같은 끔찍한 미래를 직면해야 할 것이고,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 해서 착취자들의 모든 요구를 다 충족시키느라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려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절망은 사회의 지배적인 모드가 될 것이고, 절망으로 인해서 자살, 마약, 범죄 등이 계속해서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입니다. 절망적 고국을 피하려는 젊은 고학력 인재 인파들은, 모슨 편법으로든 외국에 나가려 할 것이고, 거기에서도 각종 착취자들의 쉬운 먹이가 될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고학력, 저임금, 불안정 노동력'으로 자본은 계속 이윤을 계속 올리겠지만, 노동자에게는 대한민국은 말그대로 무간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무간지옥의 도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인 이집트의 민중으로부터 권력형 도둑들을 잡아 추방시키는 방법을 늦기 전에 배워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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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대주의자들은 근대형 지능범? (레디앙, 2011년 01월 30일 (일) 11:26:39 박노자)
사대주의의 기원과 역설…근대화보다 '백성' 노예화 우선
우리는 아주 일상적으로 '사대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사실, 그 기원은 좀 시원치 않은 말이긴 합니다. 구한말에는 일본인 관료와 언론인, 그리고 일본을 '개화 선배'로 인식한 다수의 친일적 개화주의자들은, 중국을 아직 '종주국'이자 독립운동의 잠재적 후원세력으로 봤던 유림 출신의 의병장이나 위정척사파 같은 사람들을 '사대주의자'로 몰아세우곤 했었습니다.
사대주의의 기원
일본이 사대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조선에 독립과 (일본과 합방을 하여 계속 개화의 혜택을 받을) 자유를 주었다는 기본적 전제를 깔고 사대주의라는 말을 남발했었습니다. 예컨대 독립협회의 '독립'은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지, 서재필부터 시작해서 '초고속 개화의 모범'이라고 봤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독립협회의 계승세력들은 대체로 사대주의자와 '완고파', '수구파' 같은 용어들을 혼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컨대 이광수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신식 사대주의자'라고 몰아붙이곤 했습니다. 혁명의 후원자가 따로 없는 상황에서 국가로서의 '러시아'도 아닌 세계혁명의 중심세력이라고 인식됐던 국제단체 코민테른을 추종했다고 해서 친일파인 자신보다 더 나쁜, 구식 위정척사파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아주 악질적 비방이었습니다.
유신 시절에 '한국적 민주주의' 옹호자들은 김대중과 같은 근대적 합리성을 나름대로 익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사대주의자로 비난했지요. 하여간, 근거가 취약한 비난을 위해서 많이 쓰이던 말인지라 왠지 쓰기가 꺼려지지만, 예컨대 영어 공부를 대하는 대한민국 '주류'의 태도를 보면 조선왕조 시대 양반사대부들의 한문과 중국경전에 대한 태도가 연상되긴 하죠. 단, 그 잔혹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는 보이긴 합니다.
양반 자제들은 대개 6살이나 7살 쯤부터 천자문과 소학을 천천히 익히기 시작했는가 하면, 요즘은 영어로 아이를 괴롭히는 행위는 이미 3~4살부터 시작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한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어 아이들을 경쟁의 도구로 만드는 사람들은 꽤나 빨리 야만화되는 모양입니다.
한문 숭배와 영어 공용화
그런데 이 사회의 지배자들은 정말 과거의 양반 사대부와 같은 형태에 사대주의, 즉 '상국' 문명에 대한 전반적이고 다소 몰주체적 존숭, 그리고 속도 빠른 내면화를 지향한다고 보는 것은 마땅한가요?
저는 여기에서 약간 토를 달고 싶은 부분은 있습니다. 물론 '중심의 언어'를 위신재로 삼는 행위 그자체야 양반사대부들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맞지만, 지금 국내에서의 영어에 대한 태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시절의 '내지어', 즉 일본어에 대한 상류층과 중산층의 태도를 계승, 발전한 듯합니다. 그 때의 내지어나 지금의 내지어는 전통 시대의 한문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중간계층과 피지배자들의 '구분짓기' 도구이긴 했지만, 동시에 (전통시대와 달리) 유학을 통한 학력자본 축적과 국제성을 띤 이윤추구적 행위, 그리고 관료로서의 출세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일제말기에 집의 대문에다가 '국어 (즉, 일본어) 상용의 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내지화시키겠다고 집에서도 영어를 써대는 열혈적(?) 강남족들이나, 크게 봐서는 목표는 하나죠. 현존하는 패권체제에서의 언어를 통한 치부(致富), 각종 '벼슬길'에서의 성공, 제국적 '국제화' 정도입니다.
외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전통시대의 '한문 숭배'와 통하는 듯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면 안됩니다. 한문 숭배는 '중심', 즉 중원 왕조들의 문화에 대한 아주 전반적이고 다면적인 수용, 나아가서 내면화와 동일화를 의미했지만, 식민지시대나 탈식민 과제 실패의 오늘날 지배자들의 '영어 공용화 (내지 恐龍化?)'는 극도로 선별적입니다. 즉, 저들의 위치 공고화, 특권 영구화에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이용하는 것이지 '일본' 내지 '서구'를 전체적으로 내면화하려는 것과는 사이가 멀죠.
선택적 친일, 좌파 일본 사상엔 무관심
예를 들어서 일제시대에 (사실, 이미 구한말부터) 일본 근대문학이 조선에 들어와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만엽집>(萬葉集)이나 <원씨물어>(源氏物語)와 같은 일본 고대, 중세의 걸작들에 대해서는 조선의 근대주의적 문학 애호가들은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을 지배자 반열에 올리게 하는 근대화 과제와 무관한 '과거의 유물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봐야죠. 마찬가지로 조선의 온건하고 친일적인 개화주의자들은 다소 보수적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아주 보수적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를 존숭했지, 그들의 위치를 불안하게만 만들 수 있는 바바 다츠이(馬場辰猪)나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와 같은 자유민권 운동의 좌파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단 말이죠.
후쿠자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는 최근까지도 다수의 저서는 나오지만, 후자의 두 명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국내 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연구가 비교적으로 없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해서 일본의 '모든 것들'에 대해 꼭 무조건적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불필요하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취사선택의 과감함도 십분 과시합니다.
국내 지배자들의 서구 추종주의나 친미성도 마찬가지죠. 국내 아이들을 '오렌지 발음'을 완벽하게 익힐 역사적 사명을 띠고 만들어진 학습기계로 취급하고 있지만, 도구성이 강한 언어 이외의 '서양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꽤나 엄격한 선별 기준을 적용하죠. 예를 들어 국내 학계에서는 서양사를 다소 주변적인 과목으로 인식하죠. 적어도 한국사에 비해서 말이죠. 한국사에서는 지배자들의 모든 범죄들을 다 합리화할 초역사적 '민족'도 찾을 수 있고 성웅 이순신과 '기'의 화신인 노비들이 '이'를 체현한 양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이유를 완벽하게 대준 성현 이황 등등을 다 찾을 수 있지만, 서양사는 공연히 불순하기만 하지요.
서양사가 주변적이 된 이유
특히 프랑스나 러시아 등 큰 혁명을 거친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불순하고 불온한 이야기들이 나올 게 많기에 일단 충신 김유신, 성웅 이순신, 그리고 성현 이황과 율곡을 일차시할 만한 이유들은 충분합니다. 강남족의 귀한 자제들에게 축적하기 좋은 문화자본이 되는 서양 기악이나 발레 등은 분명히 국악이나 전통무용을 압도하고 있지만, 한국 대학의 구조 안에서는 서양 철학은 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한국 철학 같으면 강화도의 양명파와 같은 비주류들이야 있지만 크게 불순한 요소들은 잘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양 철학은, 겉은 아무리 얌전하게 보여도 은근히 불순하기가 쉽습니다. 난리 칠 줄 모르는 대학교수이면서도 양보할 수 없는 내면적 양심이나 국민 국가의 부분적 해체를 통한 영구평화를 이야기한 칸트를 보세요.
칸트 연구자 김상봉 교수가 지금 그 내면적 양심의 부름대로 삼성 불매 운동을 하고 있는 게 뭐가 놀라운 일이라도 되나요? 그러니까 양심과 같은, 이 체제에서 어차피 실용성과 현실성이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 아무리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 수십 개를 받고 독일어와 영어에 대단히 능통해도 대학의 문턱 가까이도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실용적이지 못한 사대주의를 너무 하면 뒷탈이 많단 말이죠.
한 마디로 하면,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의 파땀을 쥐어짜는 패거리들은 단순히 '서구/미국'을 '숭배'만 하는 구식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근대형 지능범들입니다. 그들은 예컨대 복종하는 습관을 잘 키우게 하는 단순기계적 어학 학습을 유아들에게까지 시켜도, 공연히 지배자들에게 복종만 하는 인간의 내면적 자기 배신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나 하게 만드는 그 무슨 칸트를 한국의 피지배자들이 널리 알게 되는 걸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의 '전반적 서구화'라기보다는 유순한 노예들의 늘 숙여질 수 있는 머리들과 잘 굽혀지는 허리, 그리고 늘 일에 바쁜 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예농장이 된 이 나라에서 그 어떤 본격적 변혁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은 아주 '서구적이지 못한' 방법들까지 다 동원할 것입니다.

 

[박노자 칼럼]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1-30 오후 07:05:15)
요즘 진보언론까지 포함해서 ‘아덴만 여명’ 작전의 ‘대성공’에 들떠 있다. ‘아덴만에서의 쾌거’로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군의 위상이 강화됐다”고 기뻐하는 보수언론의 심리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진보언론들까지도 ‘해적 소탕 성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 잘 구출되고 외국 범죄자들이 응징을 잘 받았다”는 데에 대해 긍정 일변도로 반응하는 ‘민심’에 민감한 나머지 ‘주류’와 질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외국 범죄자들이 살해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국민이 구출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순박한 민족주의적 심리를 이용해 ‘아덴만에서의 승리’에 대한 다수의 한국인들의 비이성적인 기쁨을 부추기는 텔레비전과 보수신문들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다. 살해당한 이들에 대한 기본적 측은지심도 저버린 이 반인륜적인 ‘국민적 환희’는 앞으로 우리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다.
같은 국내인이 극단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인질 범죄를 범하게 된다면 우리는 통상 그 범죄에 대한 당연한 공분과 함께 빈민을 범죄자로 만든 딱한 사정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당연히 느낀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류애의 차원에서는 비록 국내인을 상대로 범죄를 벌인 외국인이라 해도 같은 시각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과 중국의 후원을 받아 ‘사회주의적 성향’을 천명한 소말리아 국가는 사실상 1991년에 동구권과 함께 붕괴, 소멸됐다. 그 후로는 전략적 요충지인 소말리아는 1993~1995년간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무장 침공부터 시작해서 계속 외세의 간섭에 시달려왔다. 최근 미국의 사주와 후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의 침략(2006~2009) 등으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재건이 계속 지지부진해 주민들의 생업은 늘 위협을 받아왔다.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해적”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붕괴된 국가가 더 이상 외국 어선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게 된 어장들을 빼앗겨 생계 곤란에 빠진 해안지구의 어민들이다. 이들의 인질 범죄를 당연히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
범죄사회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범죄 근절 전략으로서는 ‘소탕’이 아닌 생계형 범죄 예방 차원의 민생대책이야말로 최적이다.
소말리아의 경우에는, 급한 것은 인질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도박형 ‘구출작전’이 아니고 외세 간섭의 차단과 이슬람주의 세력 등 유력 반대파와의 타협, 국가재건과 어업의 부흥일 것이다. 더군다나 ‘소탕 작전’의 과정에서 해적이 살해되는 경우에는, 이는 그 작전을 벌인 국가 소속의 선원들에 대한 차후의 복수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호재’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지만, 차후에 언젠가 아덴만에서 복수를 당할지도 모를 무고한 해운업 노동자들의 생명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신경을 써주기나 하는가?
피는 피를 부를 뿐이다. 가난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 위험천만한 아덴만으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국내 선원이든, 아이를 먹여주려고 호구지책으로 해적선을 타는 소말리아 어민이든 그 생명은 똑같이 귀한 것이고, 똑같이 해치면 안 되는 것이다. 2500년 전에 성인이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살인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승리해서 돌아오는 군을 장례식을 치르듯이 맞이하라”고 했다(<도덕경>, 31장). 이 말에 비추어 볼 때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어야 할 자비심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 피부색과 무관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과연 남아 있는가?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임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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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사회 대 귀족사회 (레디앙, 2011년 02월 25일 (금) 09:17:53 박노자 / 오슬로대)
북, 스탈린 시대 넘는 권위주의…남, 미국보다 더한 기업국가
영국에서 주로 고대 중동의 역사를 연구, 교수하는 오스트리아계 라이크 교수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죽은 통치자의 묘'의 구조가 갖는 상징성이나, '죽은 통치자 영정'의 상징성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북조선 사례는 여러 모로 특수하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레닌 묘와 비교하면 물론이고, 모택동 기념당이나 손문 선생의 묘와 비교해도 금수산 기념궁전은 확실히 가장 크다는 것이죠.
소련/러시아나 중국이라는 '위압적인 우방'들과 국력을 갖고 겨룰 입장에 있지 않은 북조선은, 적어도 '선왕'에 대한 기념사업의 차원에서는 세계 최고를 기록한 셈입니다.
또 하나는 '선왕'의 표준 영정입니다. 진지한 혁명가 레닌의 그 어떤 (널리 유포된) 사진이나 초상화를 봐도 파안대소하거나 미소 짓는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혁명'이라는 코드는 무엇보다 진지함,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데, 굳이 문화적 계통으로 따져보면 이는 복음서에서 한 번도 웃었다고 기록된 적이 없는 야소 기독의 진지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대중성이 강한 농촌 출신의 모택동의 일부 사진에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표준적' 이미지들 역시 진지해 보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희생을 많이 해야 하는 혁명사업은 숭고하면 숭고하지, '우스운'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데, 김일성의 표준 이미지는 바로 활짝 웃는 이미지입니다. 바로 그 이미지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걸려 있죠. 이는 '진지한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아버지', 또는 백성을 '어루만질 줄 아는' 유교적 '성군'의 이미지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사실, 이 '유교 코드'를 빼고 북조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봐야죠.
북조선의 사회 경제적 형태는 초강력 중앙집권성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 자본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개발국가인데, 그 정치 문화적 형태는 바로 성리학적 유산을 듬뿍 담아 있는 강경 민족주의적 (주체적) 세습 통치, 즉 일종의 '왕국'입니다.
남한이 개발국가이었던 시절, 그리고 특히 1970년대 유신 시절에, 남한 통치집단도 강경 민족주의적 종신 집권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적은 있었으며, 그 때에 친일파와 친미파에 의해서 세워진, 애당초에 유교적 유산과 꽤 사이 멀었던 남한은 일종의 '2차적 유교화' 과정을 겪은 바 있었습니다.
1950년대나 1960년대초와 달리, 197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이들은 현충사를 순례하여 '성웅'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야 됐으며, 텔레비전에서는 <세종대왕>과 같은, 세종을 일종의 '전근대 개발국가 지도자'로 만드는 드라마를 봐야 됐으며, 국책 과목으로 부상되고 1972년 이후에 강화된 국사에서 '김유신 장군의 헌신적 노력에 의한 삼국 통일'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배워야 됐습니다.
장군, 성군, 성웅들의 세계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 불우하게도 - 본의아니게 보내야 했던 이들의 일부는 1986년 이후에 운동권 일각에서 유행해진 '주체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과연 우연입니까?
이북 정권의 유교적이다 싶은 외피를 은근히 벤치마킹해서 열심히 베꼈던 박정희의 퇴행적인 독재는, '인자하신 주인님'에 대한 지향성을 몸에 밴 사람들을 길러낸 것이죠. 물론 다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주의에서 김일성주의로 개종(?)하는 것이 비교적으로 쉽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뭐, 반대의 경우들도 있죠. 고 황장엽씨나 <조선일보>에서 그 필봉을 휘두르는 강철환씨를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일언이폐지하자면, 옛날에 빌헬름 라이히(1897-1957)선생이 이야기하셨던 '권위주의적 인격'이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고 봐야겠습니다. 자연의 부름대로 아이들을 15~16세부터 섹스를 하게 놓아두고 부모들의 말에 얼마든지 거역하고 얼마든지 대들 수 있게만 해주면 '새끼 박정희'와 '새끼 김일성'들이 더이상 그리 많이 안나올 터인데, 우리는 라이히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새끼 박정희'들을 계속 대량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경제력 증강 차원에서 김일성을 능가했다 해도 '강경 민족주의 종신통치 수립' 차원에서는 - 다행스럽게도 - 북조선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외향성이 지나치게 강한 경제는 1979년에 과잉,중복 투자와 외부적 쇼크로 심하게 삐딱거리자 그 정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붕괴되고 만 것이죠. 그 뒤로 무수한 굴곡을 겪은 남한은, 이제 개발국가라기보다는 (1997~1999년부터) 차라리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의 모델에 더 가깝습니다. 국가라고 하지만, 공공성은 대단히 취약하며, 실제로는 그저 재벌들의 '심부름꾼' 정도입니다.
오세철 교수 같은 분을 붙잡아 몇년 동안 재판한다면서 괴롭힌 끝에 집행유예 유죄 판결을 내릴 만큼 명시적 반대자들을 끈질기게 탄압하는 '공안형 국가'지만, 믿고 살 수 있는 국민 노후임금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는, 그런 국가입니다.
공교육 제도가 있음에도 유치원부터 40~50대의 나이까지 거의 전국 전국민이 사교육, 즉 학원가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 국가의 수준을 단적으로 말합니다. 사적 패거리, 각종 '사회 귀족' 중심의 사회다 보니까 '죽은 통치자' 숭배도 어디까지 사적 패거리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남한이 그 와중에서 전적으로 소멸돼도 어차피 자유세계의 보루인 미국이 남을 터이니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위대한 애국자', '건국 아버지' 이승만을 기리는 소집단이 있는가 하면, 유권자의 적어도 15~20%가 지금도 - 이북인들이 김일성을 마음 속에서 기리듯이 - 박정희를 기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없다면 '공주님 표'들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재벌마다 창업주 '회장님' 중심의 소규모 숭배가 있는가 하면, 또 학맥마다 모 '박사님', 모 '교수님' 등은 열렬한 숭배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북조선 왕족이 '충성'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인다면, 남한 귀족들은 '효성' 중심입니다. 자기들의 '위대한 조상님'에 대해서 말이죠.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로서는 북쪽 '왕실 조상 숭배'를 흉볼 것도 없습니다. 남쪽의 근대적 합리성의 수준은 그것과 그리 다를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 초강경 중앙집권의 북쪽과 달리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인 만큼 권력이 어느 정도 분산돼 있을 뿐이지, 그 어떤 공공성도 합리성도 찾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부하로 하여금 '회장님 어록'을 달달 외우게 하고,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리는 남한 사회귀족들은,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입니다. 그런 유형의 '호족', '권문세가'들은 사실 마땅히 역사박물관에서 박제화돼 전시돼야 합니다.
북조선의 권위주의가 스탈린 시대 소련을 능가했다면, 남한의 기업국가는 어쩌면 미국 수준 이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민중 본위의 근대가 창출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이 서로 서로 평화공존하고 대결을 접어야 양쪽 민중이 이 왜곡돼버린 근대성을 바로 잡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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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 육아론에서 배울 것들 (레디앙, 2011년 01월 21일 (금) 10:16:15 박노자 / 오슬로대)
"수호믈린스키 교육론, 경쟁교육에 대한 가장 완성도 높은 대안"
우리는 '기업인'처럼 적어도 중립적으로 들리는 듯한 어휘를 자주 쓰지만, 땅투기로 번 돈으로 자동차부품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백만원 이하의 월급을 주면서 다달이 수천만원의 이윤을 챙기는 이는 분명히 착취자일뿐이죠.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한 착취/피착취 관계로만 설명되어지지 않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심부 세력들의 침략을 받는 주변부-이라크나 아프간-의 민중들은 직접적 착취를 당한다기보다는 그 땅에 있는 지하자원을 강탈 당하거나(이라크의 경우), 그 땅의 지정학적 위치를 노리는 제국주의자들의 직간접적 지배를 강요당하는 셈입니다.
착취, 강탈, 지배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주변화죠. 예컨대 더이상 시장에 내다팔 만한 노동력을 보유하지 않는, 즉 더이상 착취할 만한 가치도 없는 노인들은 폐기물처럼 사회의 주변에 밀려, 가난(한국 노인의 약 40%는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봐도 빈민에 속합니다)과 사회적 괄시 속에서 그 인생의 쓸쓸한 내리막을 걸어야 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렇게 많은 '폐기물'들을 스스로 세상을 떠나도록 유도하여 사회의 '망국적인 복지 지출'을 이렇게도 잘 줄여줄게 하는 지배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의 괴물과 용감하게 싸우는 위대한 우리 지도자들의 기념비적 업적입니다.
착취, 강탈, 지배, 주변화 내지 폐기물화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탈인간화입니다. 이 사회의 상당 부문에서는 정상적 인간의 맨정신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기에 그 분야의 종사자들을 항시적으로 비정상적 정신상태로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탈인간화의 선구적 실험장이지만, 예컨대 스포츠계나 연예계는 이 차원에서 꼭 뒤지지도 않습니다. 구타를 당하거나 술시중, 성상납 강요를 당하는 그쪽 종사자들은, 몸을 망가뜨리더라도 경쟁자를 물리쳐 몸값을 올리는 일, 그리고 자기 섹시한 몸과 사생활까지 상품화시킴으로써 출연 드라마 시청률을 높여 협찬사들의 수익을 올리게 하는 일을 결국 당연한 '일생일'"으로 익혀야 합니다. 탈인간화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어쩌면 군대나 스포츠계, 연예계보다 더 철저하고 악질적인 탈인간화의 현장은 다름이 아닌 일반 학교입니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프로 스포츠, 연예계에 몸과 마음을 파는 이들은 적어도 10대 중반 이상이니 비인간적 세계에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고, 가장 어렵고 무서운 부분들을 적당히 피해가는 등 나름의 '생존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정신병적 '경쟁교육'에 노출돼 있는 아이들 같으면 이와 전혀 다른 입장이죠. 부모를 아직 우주 전체로 아는 10대 이전의 나이에, 그들은 바로 부모의 강요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영어로 아무 뜻도 발견할 수 없는 노래들을 이미 달달 외워야 하고, 친구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경쟁적으로 수학 문제풀이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주고 예뻐할 줄 배워야 하는 이 나이에 남자아이들은 "인생은 전장, 남자는 전사"라는 적자생존식 철학의 차원에서 벌써 '국기 태권도'를 익혀 '맞는 아이'가 아닌 '때리는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리고 싶지 않는다면? 그러면, 무수한 시체들을 밟아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나 '지지율 1위 정치인'이 되는 '최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 '진정한 사나이'로 사는 걸 포기해 낙오자, 주변분자의 삶을 감수하거나 이민 준비쯤을 착수해야 하는 셈입니다. 무간지옥은 따로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무간지옥 속에서도 아이를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 아닌 정상적인 인간으로 키우고자 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지금 하나의 희소식이 들리게 됐습니다. 수호믈린스키의 전인교육론인 『선생님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이 며칠 전에 고인돌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이야말로 경쟁교육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성도 높은 대안인 셈이죠.
반평생을 우크라이나 한 마을의 시골학교 교장으로 보낸 바실리 수호믈린스키(1918~1970, 그의 교육론에 대한 연구 등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www.sukhomlinsky.net/)는 비록 경직성이 높은 스탈린주의 관료체제 속에서 살았음에도, 그의 교육론은 공산혁명 원래의 인도주의적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교육관료들의 상당한 저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호믈린스키 교육론이 소련과 동구 등지에서 널리 알려지고 수호믈린스키가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는 등 비교적으로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교육론이 일선교사와 학부모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명저 『아이들에게 내 심장을 준다』(그 영역본은 여기)는 일찍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었죠.
지금 우리 선진적 조국에서의 처세서처럼 말이죠. 단, 그 내용은 우리가 서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세서들과 정반대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는 교육의 요체를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 지식에 대한 기쁨, 타자와 연대하는 데에 대한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남들과 나눌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인간을 키우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있고 애국조회는 있지만, 수호믈린스키 학교에서의 주된 매일 의례행사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숲의 들판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샘물 소리에서의 위대한 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양새에서 자연 속의 균형과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구름과 바람의 심포니를 배웠습니다. 이 '자연 수업'의 결과물은? 아이들은 종이에다가 자연을 접하고 나서 느낀 자기들의 소회를 그림으로 발표하고,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서로의 자연사랑을 발견하고 서로서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죠.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은, 공부를 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약간 더딘 아이들에게 개인지도하면서 그들을 돕는 연대주의 교육이었으며, 화학이나 생물학의 추상적 원리들을 자연 속에 나아가서 발견해야 하는 실사구시적 교육이었으며, 이론공부와 함께 비료나 사료를 만들고 비행기나 배 모형들을 손으로 만드는 실기교육이었으며, 철저하게 아이들의 수준과 개인특성, 연령적 특성에 맞추어진 맞춤형 교육이었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은 교과서 이외에 대중적 과학 책을 탐독하면서 물리학이나 수학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갖게 됐는가 하면, 저학년 아이들은 나무와 다람쥐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가를 상상하면서 이를 '창작 동화' 형태로 발표하여 자신의 창조력을 단련했습니다.
일선 농민들의 아이들인 수호믈린스키의 제자들은,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도 부모들에게 '재미있는 물리학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남과 나누는 일까지 배웠습니다. 그들이 자기 개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고 그 분야에서의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등 철저하게 '개인'으로 컸지만, 동시에 그 창조력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그들에게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배움이 가능해진 것은, 비록 관료화되긴 해도 어쨌든 개인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민중의 생계가 보장돼 있는 사회주의 조국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가 서거한지 이미 4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회주의 조국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밑에서는 마피아에 의해서, 위에서는 안보꾼들에 의해서 각각 관리되는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원자화돼 공포감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각자 살아남으려고 절망적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교육이론이 계속 관심을 끌고 학습되는 한,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이 야만의 시대를 뒤로 하여 보다 나은 수준에서 관료제의 폐단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다시 한 번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사회주의 없이 살 수 없는, 사회주의를 공기처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성장되면, 옛 혁명 가요의 구절대로 언젠가 "인류의 황금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걸 믿지 않고서는 이 고통의 바다에서 왜 식량을 축내면서 계속 망국 유민의 부끄러운 몸으로 살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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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성, 최첨단 상품 & 체벌 (레디앙, 2011년 01월 14일 (금) 09:52:37 박노자 / 오슬로대)
국제적 관심사 된 한국의 체벌 관행…노예 양산 위한 '육체훈육'
이번 주초에 저는 노동환경감독청(http://www.stami.no/)의 시선을 과감히(?) 피해서 약간의 직업활동을 했습니다. 동료와 함께 아시아 교육에 있어서의 국민화와 저항 등을 다루는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해서 노르웨이의 학진으로부터 연구비를 신청하려 하는데, 그 예비적 국제 워크샵에 나아가서 제 연구주제에 대한 예비발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 속에서 연구하려 하는 것은 한국 교육에 있어서의 군사문화와 체벌 등 육체훈육의 문제인데, 이번에 발표한 것은 바로 한국에서의 '체벌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발표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스마트폰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체벌을 널리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동료들의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에서 그 대강을 서술하여 강호 제현의 질정과 편달을 청하고자 합니다.
어느 계급사회든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지배자에게) 복종심 등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늘 훈육 장치들을 다양하게 설정해 이용합니다. 아주 거시적으로 본다면 미셀 푸코의 이론대로 전근대의 훈육은 대체로 육체적 통증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반면 근대적 훈육은 시장사회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개개인의 경쟁심이라도 유발시켜 스스로를 통제케 하는 '자발성 유도형'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영수는 아무리 국, 영, 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돼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아직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살아 있으니 이와 같은 '자발성 유도형 훈육'은 충분히 가능하죠. 뭐, 이 신화는 당연히 10~15년 후에 죽고 말 터인데, 지금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빈민동네들은 이미 그 때에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리오데자네이로와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자발성 유도형 훈육'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립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인접국가 - 일본, 대만, 중국 -와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영수와 영희들의 학습기계가 된 육체와 정신이 약간이라도 삐딱거리면 가차없이 그들에게 '매'라는 약을 강제 투여합니다. 약간이라도 관리자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덜 열심히 따르거나 인사라도 15도 대신에 5도로만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뇌에 새기게. 그리고 불복하면 당장 큰 통증이 온다는 등식을 아예 몸으로 기억 잘 하게.
그렇지 않아도 영수와 영희들을 '자발적인' 공포에 이렇게도 잘 빠뜨리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다소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는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가요? 한국형 훈육은 왜 전근대적인 '통증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근대적인 '경쟁심 유발'을 이렇게 조합시키게 됐는가요? 이 질문에 답하자면 대한민국의 위대한 계보부터 쭈욱 추적해봐야 합니다.
한국적 근대성의 원천이라고 할 명치시대 일본에서는, '근대'를 기치로 내걸어 체벌들을 아주 선구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금지해놓았습니다. 1879년의 교육령 46조부터 1941년 국민학교령 13, 20조까지, 명치기부터 소화 시대의 전쟁기까지, 군사주의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원칙상 체벌은 계속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번지르르한 근대적 표피뿐이었고, 실제로 일본 '황군'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일제시대 학교에서도 매를 가하려는 교실관리자를 말릴 방법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더욱더 그 체벌 관행은 심해, 법률적으로 '내지'에서의 체벌 금지는 '외지'(식민지)에서도 효력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1920~30년대에 교실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불구자가 된 조선 아이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당시 '민간지'들은 전하곤 했습니다.
일단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이나 저항하려는 용기를 꺾어서, 그 다음에 겁이 나서라도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 경쟁과 학습 성과 경쟁을 부추기려는 것은 식민지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죠. 총독부 조선인 출신의 교육관료와 함께, 이 이중적인(체벌 + 경쟁 유발)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통치권)을 이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약간의 음성적 체벌 관행은 남아도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사범학이 도입돼 체벌이 불법화됐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예 일제시대에 비해 퇴보를 하고 말았죠. 식민지 때에 말뿐이었다 해도 그나마 명시적인 체벌 금지는 있었지만,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결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 유지'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볼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돼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하는,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확언컨대 조중동은 끝내 체벌 금지를 반대할 것입니다. 군대 못지 않게 교실 체벌도 저들의 성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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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날 딸을 얻고, 기록하다" (레디앙, 2011년 01월 07일 (금) 10:47:15 박노자 / 오슬로대)
복지국가의 효능과 남한 진보 투쟁의 도움을 위해서
밑으로부터의 본질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딸 사라가 살아갈 세계는 고갈돼가는 자원을 놓고 서로 패권싸움을 벌이는 열강들의 세계, 환경 파괴의 본격화되는 세계, 자본이 국제화되는 만큼 노동이 지속적으로 불안화돼가는 세계일 것입니다.
세계가 이렇게 돼가는 데에 대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책임부터 무겁죠. 그런데, 아이 탄생은 꼭 경사만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분수령과 같은 아주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오슬로에 와서 사라를 챙겨주는 데에 도움주시는 사이에 약간의 망중한(忙中閑)을 얻은 저는, 이제 사라의 탄생을 전후로 해서 저희들이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묘사해보려고, 이 기문(記文)을 남깁니다. 제 개인의 체험과 기억을 사회화(化)하는 것은 적선(積善)의 방편인데다가, 저희들의 개인 경험을 통해 복지국가의 효능들을 엿볼 수 있기에, 이 기문이 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진보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임신이 확인되고 나서, 아내는 저희 지역의 보건소(helsestasjon)에 등록돼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초음파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물론 이는 저희 개인 비용 한푼 들지 않았던 일이었죠. 예상 출산 날짜에 앞서 3주전에 음악교사인 아내는 학교에서 유급휴가를 받아 그때부터 완전히 출산 준비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노르웨이의 법으로는 출산 관련 유급휴가란 46주 정도입니다. 만약 월급의 80%에만 만족하다 그러면, 56주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10주를 아버지가 받아야 하는데, 언제 받는가는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본인이 알아서 결정합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금년 9월부터 받을까 지금 계확합니다. 어차피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직장에서 무조건 '복지휴가'라는 이름으로 2주의 유급휴가를 추가적으로 주니까 지금의 급한 불을 충분히 다 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경우에는 출산 이전의 3주와 출산 이후의 6주는 의무적(필수적) 출산 휴가에 속하고 그걸 제때에 받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의 27주를, 본인이 알아서 기간을 정해 받는 것입니다. 제 아내 같으면 바로 봄학기에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의향에 따라 약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또 50% 시간에만 일하면서 그 휴가 기간을 두배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본인 마음만 먹으면, 출산 3주 전부터는 직장 등을 다 잊고 거의 8개월간 아이를 챙기 데에만 전념해도 되는 것이죠. 월급을 그대로 받고 원래의 직장에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알면서요. 그러니까 저희들이 아는 현지인 부부 대부분은 아이 2~3명씩이나 키우고,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인생의 최고의 낙으로 삼죠.
출산이 임박했을 때에 저와 아내는 저희들이 사는, 오슬로 근방의 위성도시격인 뱌룸(Bærum)군의 중앙 종합병원으로 향하고, 그쪽의 출산과(føden)에서 저희 방을 배정 받았습니다. 이쪽 같으면 절대 다수의 남성 배우자들이 여성의 출산과정에서 꼭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출산과에서는 남성 배우자에게까지 음식 등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도서실까지 다 구비돼 있었습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 문화생활하게요. 저희들은 담당 간호사와 담당의사도 배정 받았는데, 간호사는 의사보다 나이와 경험이 꽤 많았습니다. 독특한 것은, 명찰에 명기돼 있는 직급명이 아니었다면 제가 그 둘 중에서는 누가 의사인지 누가 간호사인지 아마도 몰랐을 것입니다. 서로 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평등했으며, 오히려 의사는 경험이 많은 간호사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면서 자기 맡은 일을 처리해갔습니다. 제 아내에게도 명령을 했다기보다는, "배에 힘을 실어주는 게 좋겠다", "제발 마지막 몇 분 참아주세요"와 같은 방식으로 제안 내지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가 드디어 나온 뒤에 아내가 휴식기에 들어가고 약 한 시간 지나서 저희 두 사람은 식사 제공받았습니다. 탁자에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던 것은 저로서는 국민주의적 의례 일종으로 꽤 흉해보였지만, 그 힘들고 힘들었던 출산 과정에서 의료진이 보인 친절에 많이 감복했습니다.
출산 과정이 끝난 뒤로는, 저희 두 사람은 같은 병원 다른 층의 산후조리과(barselavdeling)의 가족실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담당 간호사가 배정돼 언제든지 수유기술의 문제라든가 분유를 가장 효과적으로 타는 법이라든가 등등을 일대일로 상담 받을 수 있어 정말 초보 부모에게는 '생존 훈련'에 가깝습니다. 음식은 하루에 네번 나오는데, 대개 빵 등 분식 위주라 한국인의 식성에 잘 맞지 않지만, 산모에게 필요한 영량 등이 잘 조절돼 있는 것 같습니다.
배식소에 나가니 대개 부딪치는 이들은 같은 남성들이었습니다. 물어보니 산후조리과의 가족실에서 남성배우자가 산모와 끝까지 같이 있는 것은 여기에서 만인의 통상적 관습이랍니다. 산후조리과에서 만나는 산모들은 물론 대단히 피곤해 보였는데,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여유였습니다.
그들이 출산이라는 인생의 꼭대기에 올라가 그 산행을 즐기고, 사방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출산과도 산후조리과도 다 무료였다는 것이죠. 병원에 왕래하면서 쓰게 된 택시요금까지 사회복지사무실(NAV)에서 일부분 보상 받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필수적인 단서를 달겠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의 사회제도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르웨이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이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에 즐겁게 타는 자전거를 만드는 중국 노동자들에게는 노르웨이의 풍요로운 복지제도의 이야기는 그림 속의 떡일 뿐일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지만, 기업들, 부자들 세금만 제대로 내고 그 세금을 4대강 죽이기와 복한 동포를 죽일 무기의 사재기에 쓰지 말고 민중의 기초적인 복지에 쓴다면, 이렇게 고통이 많을 수밖에 없는 출산도 어느 정도까지 즐겁고 여유로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유라는 것은 계급투쟁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쟁취한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급투쟁에서 이기긴커녕 자신들과 착취자들을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착각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올 것은 영원한 불안일 뿐이죠. 복지와 여유라는 것은, 지배자들에게 '하사' 받는 게 아니고 싸워서 얻는 것이죠. 그런데 적의 괴수를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로 알면서 지내면 그런 싸움이라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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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착한 우리’에 대한 환상 깨기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1-02 오후 06:26:38)
근대 동아시아의 위대한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폭군을 폭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폭군 이외에 노예들을 노예라고 부르는 일도 심히 위험한 일이다.”
무슨 의미인가? 전통사회에서는 지식인의 가장 위험한 과제는 ‘권력자에게 진실 말하기’였다. 폭군에게 “폭군!”이라고 외쳤다가 귀양 보내져서 쓸쓸하게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 바른소리 한다는 것은 예전과 같은 의미는 없다. 일면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당국자들에게, 혹은 당국자들에 대한 바른소리를 하다가 ‘큰코다칠’ 위험성도 줄어들었고, 또 일면으로는 별다른 효과도 더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오늘의 극도로 냉소적인 지배자들은 진실을 몰라서 엉뚱한 일들을 벌이는 것도 전혀 아니다. 과연 ‘4대강 죽이기’를 밀어붙이는 이들은 이 프로젝트가 친환경적이고 차후 수익성이 높다는 걸 스스로 믿기라도 하겠는가? 알 것을 다 알면서도 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둘째, 지배자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극도로 냉소적이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다수의 유권자들은 과연 그를 ‘도덕군자’라고 믿고 뽑은 것인가? 알 것 다 알면서도 그가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한 줄의 희망 때문에 표를 던졌을 뿐이다. 권력자들도 오로지 당장의 사리사욕을 좇고, 대중들도 ‘성공’만 한다면 파렴치한 모리배를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볼 준비가 다 돼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의 직간(直諫)이나 권력자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도덕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은, 모리배들이 매체를 통해 유포하는 환상에 넘어가고 마는 대중들에게 혹은 대중들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와 달리 대중은 정치화돼 있으며 당당한 정치행위자로서 등장해 있는 상태니까 바른말의 효과는 어쩌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높다. 달콤한 거짓말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바른말이 늘 소화 못할 정도로 쓴맛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발자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방어하고 있으며 정당한 응징을 할 권리가 있다”는 권력자들의 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다른 각도에서 남북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다면 그 반발은 대단할 수도 있다.
남한 입장과 거리를 두어서 말하자면, 전 정권이 북한에 한 약속들을 무단 취소하고, 나아가서 미국과 ‘북한 붕괴’의 경우 북한 영토를 그 주민의 의사와 아랑곳없이 흡수할 일을 의논하는 당국자들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못하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야말로 넓은 의미에서 도발자다.
‘나’ 자신이 속하는 ‘우리’야말로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은 늘 마음 아프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누구에게나 소속 집단을 긍정함으로써 자기확인을 하려는 욕망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소속돼 있는 악덕업자들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이하의 박봉을 주면서 착취만 일삼았다가 결국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한 판에 ‘우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본다는 것은 단순히 어리석음만은 아니고 ‘우리’와 같은 국적을 갖고 있는 착취자들의 국제적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한다. 실제 일개 국제적 야수일 뿐인 ‘우리’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들을 피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도 자본 노예의 위치에 지속적으로 안주할 것이다.
비록 듣기 싫고 마음 아픈 이야기라 해도, 이윤만 알고 정의를 모르는 국가인 대한민국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경쟁과 착취에 길들여진 유순한 노예인 우리들의 실제적 상황에 대한 바른말이 대중화돼야 노예 상태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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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 (2010년)

 

북 못지 않게 광신과 위협 가득찬 남 (레디앙, 2010년 12월 31일 (금) 10:48:26 박노자 / 오슬로대)
반유대주의와 반북주의 닮은 꼴…이성의 마비, 뜨거운 증오
저는 소련 말기에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가다가 유대민족에 속하는 탓으로 상처를 받곤 했습니다. 물론 큰 것은 아니었으며 예컨대 재일조선인들 - 특히 조선적의 재일조선인들 - 이 겪어야 하는 구조화돼 있는 차별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재일 조선인 같으면 ('빨갱이 조선인들'을 백안시했던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일본 정부의 독단적 결정으로 국적을 박탈당해 졸지에 난민이 되고 말았고, 거기에다가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는 전후 일본에서는 비(非)가시화되고 주변화돼야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인들은 분명히 소련 공민이었으며 특히 학계나 예술계 등에서는 결코 주변적인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단, 유대인이 많았던 구(舊)볼셰비키 그룹에 대한 스탈린파 반감의 유산이 있는데다가 냉전이라는 상황 하에서 적국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갈 권리를 가지는 유대인들을 국가적으로 신뢰할 수 없어 어느 정도의 활동 제약(예컨대 군 고위직 진출 제한 등)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죠.
거기에다 유대계라면 '잠재적 이민자/배신자'로 보는 인식이 민간 사이에서까지 퍼져, 가끔가다 상처를 받을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반유대주의란 도대체 어떤 괴물인지 왜 생기는지 상당히 궁금해왔는데, 마침 저의 고교 시절에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돼 그때까지 불어 해독자만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외국서적도서관에 가서 원본으로 빌릴 수 있었던 사르트르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단상> (1946)이 드디어 러역돼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제가 그걸 보고 개안 (開眼)을 경험한 것이죠.
사르트르에 의하면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들에게 증오가 필수 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모든 문제들을 혐오집단의 책임으로 돌리면 세상이 덜 공포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컨대 근대 자본주의의 확창 혹은 근대적 대도시 문화 등을 싫어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근대의 모든 불확실성과 문제점들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순간, 이 문제들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유대인만 격리되거나 없어지면 문제도 없어지니까요.
둘째, 유대인들이 혐오집단이 되는 순간, 그들을 혐오하는 비(非)유대인, 즉 '정상인'들은 본인들의 눈에 당장 선하게 보이고, 또 서로서로 계급이나 민족을 초월해서 혐력하는 가능성들까지 생기죠.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정상적이니까요.
그리고 셋째, '혐오집단'에 대한 증오가 이성을 초월하는 만큼, 그 증오에 매몰되는 이들은 이성을 벗어나도 된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주장의 확실성을 부단히 회의하지 않아도 되고, 본인들이나 상대방의 복합성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는 착하고 저들이 나쁘다", 이는 중세 신학의 신과 악마의 이분법만큼이나 편한 논리죠. 계몽기의 사상가들이 이성을 인류의 해방 도구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 퇴락기의 상당 부분 인류는 오히려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셈이지요. 참 슬픈 아이러니네요.
저는, 반유대주의란 결국 다른 방식의 자기확립이 불가능한 이들의 타자 배척을 통한 자기확립 시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정말 해방감을 느꼈어요. 소수에 속한다고 해서 더이상 자기혐오나 자기 부정에 빠질 일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도 그 일로 사르트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정도에요.
제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그 책을 쓴 사르트르에게야 당연히 유대인의 사례는 눈에 선했지만, 사실 그가 제시한 집단 배척 메카니즘의 논리는 꼭 유대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지금 이스라엘의 주류 유대인 집단의 아랍인에 대한 타자화를 봐도 그 내재적 논리는 사르트르가 묘사한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아요. 아랍인들이 후진적이고 호전적으로 인식돼야 이스라엘의 주류 유대인 집단은 선진적이고 "평화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방어만 하는 평화세력"으로 보이는 것이고, 만악의 근원을 '아랍 테러리즘'에서만 찾으니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각종 치명적 모순들(예컨대 아랍지역 출신 유대인에 대한 유럽 출산 유대인의 극악무도한 집단 이지메라든가, 극단적 양극화 등등)도 다 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같으면,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집단혐오의 메카니즘은 요즘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대해서 적용되는 것 같아요. 제2차 대전 이전의 유럽 우파들이 유대인을 '우리/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봤듯이, 북한은 남한이나 일본에 대한 '무시무시한 위협'으로 묘사돼요.
북한의 총국내생산(미화 약 260억 불)은, 대체로 세계 11위(즉, 브라질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 패권 국가 수준)로 알려져 있는 남한 국방비 정도밖에 안되고, 거기에다 '큰형' 미국과 실질적인 동맹국인 일본의 전투력과 국방비까지 가산하면 아예 그 어떤 비교도 불가능해질 터인데, '북한 위협론'은 한-일 양국 보수주의자들의 전가의 보도처럼 계속 애용되고 있지요.
게다가 북한은 꼭 국가 단위로만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도 아니죠.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커다란 '세계에 대한 음모'의 일부분들로 인식됐듯이 남한에서는 '친북, 종북 좌파'가, 일본에서는 조선적 재일 조선인, 그 중에서는 특히 조총련 활동가들이 각각 '내부의 적'으로 지목돼 전(全)사회적 이지메 대상이 되고 있어요.
각국의 유대인들이 서로 이해관계부터 완전히 다른데다가 그 사이에서 극우부터 극좌까지 정치의 모든 색깔들이 다 섞여 있듯이, 일본의 조총련계 교포나 한국의 좌파민족주의자들은 사실 대개 북한 지배자들과 처해 있는 입장도 생각도 상당히 다른 것이죠.
그럼에도 자칭 '정상인'들에게 그들 모두 다 하나의 커다란 음모의 구성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단순히 위협으로 인식됐을 뿐만 아니고,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의 뜨거운 증오를 당해야 됐듯이, 한-일의 반북주의도 '상징적 폭력'의 극치를 달립니다.
유럽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좋은 점 하나 없는 '사회의 암적 존재', '병균'이었듯이, 북한을 광적으로 증오하는 이들에게 북한도 그저 '순수한 악'일 뿐입니다. 선임자에 의한 폭력이 거의 없는 북한 군 내부의 분위기가 남한보다 어쩌면 인격을 덜 파괴하는 점이라든가, 남한에서 지금쯤에 이루어질까 말까 하는 학교 체벌 폐지는 북한에서는 적어도 원론적 차원에서 일찌감치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그들에게 이야기해봐야 듣는 척하지도 않죠. '병균'들을 '살균'해야 할 뿐이지, 그들에게 배울 것이라고 하나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제게 "반유대주의는 모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반북주의는 - 적어도 남한에서는 - 원칙상 북한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다"라는 반론이 제기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이야기에요. 남한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념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극우주의자들도 제거 대상인 북한 지도층과 흡수통일 이후에 최하급 비정규직 노동자나 비공식 부문 종사자로 전락해 세계로 도약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저임금 노동으로 뒷받침해줄 '일반주민'들을 구분하긴 하죠.
'우리'의 노예가 될 후자에 대해서는, 대개 온정주의적, 시혜주의적 언사들이 많이 쓰이죠. '후진적'이고 '우민화'되고 '세뇌' 당한 이들은, '선진화'되는 대한민국에 의해 '해방'돼야 한다는 것이죠. 60여년 전에 우리를 해방시켜준 은인 나라는 큰 형 미국이었지만, 이제 청출어람 격으로 미국만큼 위대해진 우리는 '불쌍한 북한 동포'에 대해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야 할 셈이죠.
그런데 '불쌍한 동포'는 일단 그들이 개별적으로 '우리'의 손에 들어가 그들이 마땅히 들어가야 할 자리, 즉 최하급 도시빈민의 자리에 들어가고 나서, 혹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우리'에게 흡수되고 '착한 원주민'답게 '우리'로부터 개화의 세례를 받고 나서의 이야기죠.
그들이 그 '왕조'를 버리지 않고 남쪽으로부터의 '문명의 십자군'에 감히 저항을 계속 시도하는 한, 그저 멸시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고 적당한 '응징의 목표물'로 보일 뿐입니다. 남한이 강경 응징할 경우에는 그 선진적인 포탄을 맞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나감으로써 무적 아군의 전과가 될 북한 일선 군인들이 다 일반주민의 아들딸들인데도, 남한 보수들은 그들에 대한 하등의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죠. 그들은 인간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목표물일 뿐입니다.
'광신적이고 위협적인' 유대인을 짓밟음으로써 '문명적이고 평화로운' 집단으로서의 (허위적) 자의식을 얻으려 했던 유럽 반유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후진적 북한 광신도'들을 열정적으로 짓밟는 '선진적 우리'는 타자에 대한 배척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치명적인 문제, 갈등들을 잊으려고 할 뿐이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안수기도를 통한 치료를 포함한 온갖 기적들이 가장 정기적으로 잘 일어나는 교회, 세계에서 최장의 노동시간, 그리고 OECD 가입국 중의 가장 규모 작은 복지예산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누가 봐도 이북 못지 않게 내지 이북 이상으로 광신과 각종 위협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단, 국가적으로 누굴 위협한다기보다는, 그 관할 영토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모든 빈민, 모든 약자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지요.
반북 히스테리 속에서는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산재와 가정폭력이 제일 많은 나라의 현실은 잊혀지고 '후진적 그들'에 비해 '우리'는 아주 '선진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제 최첨단 대포, 미사일과 함께 증오와 망각의 기술로 중무장한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궁극적으로 행복해질까요? 이성이 마비될 때에 온갖 단꿈들을 다 꿀 수 있지만, 언젠가 깨어나야 할 순간은 결국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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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여, 적은 인간이 아니다” (한겨레21 2010.12.24 제841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살인을 거부하는 본성을 꺾기 위한 ‘증오 교육’…상대를 악마적 존재로 추상화해 전쟁 부추겨
전쟁을 체험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전시라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도 동류를 죽이는 데 천부적 거부감을 지녔다. 집단히스테리가 일어나 호전적인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휘어잡아도 그렇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처음엔 모든 참전국에서 교회와 정당, 언론이 부추기는 열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용감하게 돌진해서 적을 사살하는 데 열정을 보이는 모범 전사’는 전체 군인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연구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미국의 유명한 군사 연구자 새뮤얼 마셜(1900∼77)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실제로 방아쇠를 당겨 의식적으로 가시권에 있는 적군 병사를 사살하거나 사살을 시도한 미국 군인은 약 25%에 불과했다.
전쟁 프로파간다에 홀려 전쟁 자체를 긍정하는 것과, 같은 인간을 실제로 죽일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죽임에 대한 ‘수용 불가’는 꼭 전장에서의 사살 회피로 끝나지 않는다. 전투의 광란 속에서 적병을 사살해야 했던 사람 가운데 많은 경우는 죽음의 장면을 나중에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사람을 죽여봤다’는 기억을 안고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힘든 일이기에 우리 뇌는 그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격렬한 정동(情動) 상태가 아닌,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조준 사격해서 타인을 사살하게 된다면 그 희생자의 얼굴이 죽을 때까지 악몽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으로서, 타인을 죽이는 것보다는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군인을 ‘냉혈의 살인기계’로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본성을 거슬러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에는 아군이 죽여야 할 상대자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이더라도 우리를 본질적으로 위협할 수밖에 없거나, 우리보다 크게 열등하거나, 우리로서 ‘합법적으로’ 죽여도 되는 범죄적 인간임을 병사와 주민들에게 반복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는다. 이런 ‘증오 교육’ 없이는 전쟁다운 전쟁이 펼쳐지지 않는다.
단, 가상의 적과 ‘우리’의 관계 유형에 따라 증오 교육 형태는 달라진다. 예컨대 오늘과 같은 ‘선진적 통상대국 남한’과 ‘후진적 군국 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남한의 증오 교육은 ‘후진적 상대국’의 지도층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된다. 민족주의적 이념상 동족으로 인식되는 북한 일반인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후진성과 군사적 폭력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증오심 선동은 ‘도덕적 비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6·25를 일으켰다 해도, 6·25에 이르는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남한에서의 좌파 학살 등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김일성 혼자서만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공격의 피해자가 될 뻔한 전두환은, 과연 본인도 광주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끔찍한 테러를 벌인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KAL858기 폭파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의혹은 과연 완벽하게 밝혀진 것인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는,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의 현실을 무시하고 북한만을 일방적으로 문제 삼는 텍스트지만, ‘김일성 왕조 범죄’ 나열은 그 ‘왕조’를 섬기는 군인이나 민간인 역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독자가 가질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의 고전적 증오 교육이다. 물론 남한 통치자들을 향해서 내뱉는 북한 매체들의 수사(‘역적 도당’ ‘역도’ 등)도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인종과 문화, 종교가 같거나 비슷해도 ‘민족’ 내지 ‘국민’으로 엮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전쟁을 준비할 때에는 상대 집단의 민족성 내지 국민성을 공격해 악마화에 열을 올린다. 전형적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시절의 영국·미국 미디어에 의한 독일 국민의 악마화였다. 독일 프로파간다가 ‘이기적이며 타산적이며 비문화적인 영국인’ 등 상대방의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한편, 징병제 국가인 독일과 달리 1916년까지 징병제도가 없어 입대 지원자들을 계속 모아야 했던 영국으로선 증오 교육이 훨씬 더 절실했다. 그들은 독일인을 ‘무조건적 복종에 익숙한 기계적 인간’ 또는 ‘천부적 전쟁광’으로 규정했다.
1915년 5월에 나온 ‘벨기에에서의 독일군 만행 관련 보고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이용하고 적군의 만행만을 골라서 강조하여 결국 영국 정부 돈으로 30개 언어로 번역·출간돼 국제적인 심리전에까지 이용되는 중요한 무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독일 군인들과 접전했던 일선 군인들은 독일군을 ‘용감한 사내’이자 ‘우리와 같은 징집의 피해자’로 인식한 반면, 후방의 중산계급 구성원들은 ‘독일 군국주의자’를 추상적 존재로만 인식하며 증오 교육에 더 잘 넘어가곤 했다는 것이다.
영미권이나 프랑스에서의 증오 교육은 문화부터 외모까지 별반 차이가 없는 독일인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덜 성공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화·외모가 완전히 다른 상대집단에 대한 증오 유발은 대개 ‘대성공’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에게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려 했다. 전시 증오 교육이 인종주의적 편견들과 뒤섞인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있던 미군 병사 중에서 ‘독일인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이들은 25%였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인종의 멸종’을 꿈꾼 미군 병사는 42%에 달했다. 유럽 전선에 배치된 미군 병사나 미국 본토를 아직 떠나지 않았던 병사들은 일본인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인에 대해 훨씬 더 짙은 증오심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 중 60% 이상이 일본인이 멸종되기를 바랐다. 전후 연합국 쪽에서는 일본군의 ‘백인 포로 학대’를 문제 삼아 수많은 전범 재판을 진행했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군에 생포된 연합군 포로가 14만 명 이상이었던 반면, 연합군 손에 들어간 일본인 포로가 3만 명도 되지 못한 이유를 꼭 물으려 하지 않았다. 생포된 일본인 포로 수가 훨씬 적은 데에는 포로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옥쇄’(玉碎), 즉 ‘명예로운 자살’을 강요하는 일본군의 정신교육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인이 미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에게 항복하려 했을 때 ‘열등한 황인종’ 취급을 받으며 즉각 사살됐던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일본인을 원숭이처럼 생각한 미국 군인들은 사령부의 엄금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주검에서 머리를 잘라 물에 끓여 모든 살점을 떼어버린 뒤 그 해골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거나 애인이나 부모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다. 이런 만행은 일본의 반미 선전에 이용됐고, 그 선전을 접한 일본 병사들은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결을 택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곤 했다. 인종주의로 뒷받침되는 증오 교육은 전쟁의 살기를 보통 이상으로 북돋웠다.
한국 현대사 또한 인종주의적 증오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미군에게 남한은 명목상 ‘우방’이었지만, 북한 사람들을 대하는 미군의 태도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에 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은 모든 한반도 주민을- 소속 국가나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구크’(gook·‘아시아 놈’)라고 비칭했으며 ‘구크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엄연히 구분했다. 그들에게 구크는 완전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미국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모든 한반도인은 죽여도 무방한 대상물이다’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자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예컨대 독실한 가톨릭 신도인데다 일본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어떻게 말하면 ‘악질적 인종주의자’까지는 아니었던 키리스 새르노 미 해병대 6·25 참전 병사는 “전투에서 나의 사명은 가급적이면 많은 구크를 살해하는 것이었으며, 권총으로 단거리에서 그들을 사살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이런 분위기는 이북 지역에 대한 융단폭격부터 노근리 학살까지, 온갖 전쟁범죄가 쉽게 감행될 수 있게 했다. 전쟁의 정신적 ‘윤활유’로서 인종적 증오는 인간적 양심과 근대적 이성을 모조리 마비시켰던 것이다.
<조선일보>류의 극우 신문들은 북한 지도층 악마화에 대해 ‘억압적 정권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북한 정권이, <조선일보>가 유착해온 남한의 역대 독재 정권만큼이나 억압적이라는 점이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남북한이 군사적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한쪽의 주류 언론기관이 다른 쪽의 지도자를 일관되게 악마화하는 것은 증오 교육, 즉 ‘준전시 분위기 만들기’임이 틀림없다. 남한과 함께 막강한 군사 블록을 이루는 미국·일본도 이 준전시 분위기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는데, 이들의 머릿속에는 아시아인 내지 조선인에 대한 인종주의·식민주의적 편견까지 섞여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증오의 도가니는 과연 우리가 살고 싶은 동아시아인가? 
참고 문헌
1. J. Bourke, London: Granta Books, 2000, pp.103∼171, 215∼242
2. J. Dower, NY: Pantheon Books, 1986, pp.64∼66
3. S. L. A. Marshall, Washington: Infantry Journal, 1947, pp.50∼64
4. G. Messinger,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2, pp.70∼85
5. 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arno/index.html, Chris Sa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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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련 재판, 그들의 노림수 잘 봐야 (레디앙, 2010년 12월 17일 (금) 08:57:17 박노자 / 오슬로대)
공안 일꾼들의 실험?…정권안보 위한 '내부의 적' 만들기 과정 
현대차 투쟁은 그나마 노동계 안에서라도 관심사가 돼서 소극적으로라도 많은 비정규직들에게 영감을 준 바 있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오세철 교수와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맹) 재판'이라는 아주 우려스러운 희비극은 아예 진보계 안에서도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을 일으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연세대 오세철 명예교수가 이론가이자 실천적 지도자로 돼 있는 사노련은 급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며, 실제로는 다소 노동자주의적 노선을 간직해 '노동계급조직'에 주력해왔습니다. '계급조직'이라는 말은 아주 거창하게 들리지만, '계급'이라는 단어를 대체로 군에서의 계급쯤으로만 아는, 노조 간부하다가 보수정당의 국회의원 되는 일을 '전향'이나 '배신'으로 여기지도 않을 만큼 계급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사리사욕을, 체제의 범위 내에서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오세철 교수에 의해서 조직화된 노동계급은 - 제가 이해하기로는 - 대략 수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노르웨이 같으면 사노련과 노선이 엇비슷한 '적색당'(일종의 노동자공산당)은 전국적으로 약 2.5%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게 사민주의적 후진국 노르웨이 이야기죠. 위대하신 선건(先建) 지도자이신 우리 대통령 각하의 현명하신 영도 하에서 일취월장 선진화하여 그 국격이 하늘을 찌르는 대한민국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죠.
강성대국이 돼버리면 모든 국내외의 가상적들도 무조건 아주 강성하게 보이나요? 하도 얌전하게 생기셔서 급진사회주의 조직의 지도자라기보다 차라리 정치경제학을 골방에서 연구하는 '백면서생'처럼 보이시는 오세철 교수는, 약 2년 전에 현대판 특고(特高)들에게 시달리시기 시작했습니다. 혐의는 국가 변란 도모,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위협 등등입니다.
오세철 교수가 국체를 변란시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전복시키실 확률은, 아마도 스위스 학교 다녔다가 역시 폭발적 속도로 대장 칭호를 빨리 받은 김정은 '젊은 장군님'이 갑자기 대미 성전을 일으켜 뉴욕을 점령해서 '뉴평양'으로 개칭시킬 확률과 대체로 엇비슷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카프카의 <재판>은 문제없이 현실이 되는 법. 지난 12월3일에 공판이 열려 검사가 "국가 변란 음모 주범" 오세철 교수에게 7년형 등을 구형했답니다. 그의 동지들도 거의 5~7년형 정도 구형된 셈입니다. 노르웨이 같으면 7년형 정도는 정상참작이 가능한 살인범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후진적인 사민주의 국가와 질적으로 다른 강성대국 대한민국에서는 형벌들도 좀 강성해야겠지요? 역시 스케일이 크군요.
정말 법조인들에게 오세철 교수가 약간이라도 위협으로 보였다면, 이번처럼 재판을 불구속으로 진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사노련을 와해시키려는 노력들도 훨씬 더 집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국제적인 창피 등을 무릅쓰고 이 재판 코미디를 무대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진보에 대한 협박"이라고 짐작들 하실 것이고 이는 일면 맞을 것입니다. 오세철 교수가 유죄가 되든 무죄가 되든(후자의 가능성도 꽤 큽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안꾼들에게 시달리시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선진화되는 조국의 품에 안겨 있는 한 '사회주의' 같은 불온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위험하다는 교훈 정도는 이미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질식사 될까 말까 하는 정도로 조국이 강하게 포옹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를 좋아할 만한 '불령 분자'들이라면 대체로 인덕(仁德)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 조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환상이 없는 것이고, 법정에서 사상투쟁을 당할 각오는 이미 돼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류의 '재판질' 가지고서는 협박이 먹히진 않을 걸요. 자신들의 존재의 필요성을 확인해야 하는 공안꾼들의 '일건주의', 즉 한 건을 더 올리고 싶은 '순수한 열정'도 분명히 한 몫을 했겠지만, 그저 그것만 가지고 이 정도의 창피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외의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 같으면, 이 재판은 일종의 '실험'인 것 같습니다. 약 15년 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무관한 사상범에 대한 사상 재판을 다시 하기 시작한 공안 일꾼들은 일단 이 일을 실험 삼아 해보는 것이고, 사회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영향력이 큰 종교 집단들 안에서 그 진보적인 전위(카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 등)라도 반대 성명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반발을 하고, 시민사회에 힘깨나 쓰는 참여연대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세철 교수와 그 동지들을 방어해준다면 국가는 얼마든지 물러설 수도 있는 것이죠.
이제 곧 레임덕이 될 대통령은, 안그래도 관계가 아주 나쁜 시민사회로부터 추가적 미움을 받아 고학력, 중간 소득의 젊은 직장인 등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는 중간적 유권자 계층들을 또 떠돌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실험이 성공해 오세철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민사회의 별다른 반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공안꾼들이 새로운 날개를 달아 새로운 '불령 분자'들을 찾으러 끝없이 비상할 것입니다. 먼저 영세한 좌파적 단체들부터 표적에 오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회당, 민노당, 진보신당 안에서의 약간이라도 급진적 세력들이 졸지에 '국체 변란 음모자'가 될 것입니다. 밖에서 대북 대치가 첨예화되는 상황에서는, 안에서까지 '내부의 적'을 생산해낼 수 있다면 정권으로서는 이중의 효과가 발생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도 아주 큰 반발이 없을 것인지 지금 시민사회의 의향을 '떠보는' 차례인 셈입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 오세철 선생님을 방어해드릴 수 있다면 내일은 우리들의 표현 자유부터 강화될 것이고, 우리가 오늘 오세철 선생님이 마녀재판에 의해 '이지메'를 당하시는 상황을 방관한다면, 내일은 누구나 (저를 포함해서) 재판 받아야 할 '불령선인'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라고는, 연대의 힘 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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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상인'이 남기고 간 것들 (레디앙, 2010년 12월 10일 (금) 00:56:21 박노자 / 오슬로대)
[리영희 선생을 추도하며] "진실, 평화를 위한 투쟁 필요"
사실, 제가 제 자신에게 바라는 바 중의 하나는, 리영희 선생님 만큼은 입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까지도 불교적 생사관을 익혀 生에 대한 욕망도 死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궁금증도 벗어던진다는 것입니다.
좌우간, 제가 지금 슬픈 것은 또 다른 세계에서 많은 인연들과 다시 조우하시게 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건 아니죠. 우리 비정상적 세계를 밝게 비추어주셨던 몇 안되는 진정한 '정상인' 한 분이 우리를 떠나셨기에,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집단 정신병들이 더 빠른 속도로, 더 독하게 우리를 잠겨버릴지도 몰라서 슬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歷程』이라는 자서전적 에세이 모음은 사실 한반도 현대사의 진실을 알고픈 사람에게 꼭 필독서가 돼야 할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과학적 사회분석법을 휘두르신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진보적 이념'의 각도에서 이 책을 쓰신 것도 아닌데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온갖 개인적, 집단적 환상들을 버리고, '진리, 오로지 진리, 진리만'을 추구하셨던 '깨인 정신'의 소유자이신 리영희 선생님께서 그가 본 현대사의 진리를 이 책에 아낌없이 담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때로는 아주 무섭고, 때로는 우리로서 생각하고 싶지 않고 망각하고 싶은 진리죠.
예를 들어서 1941년에 일본인 학교 교장이 조선인에게 대미선전 포고의 천황 칙어를 읽어주는 장면(33면)을 한 번 더 깊이 읽어보세요. 나이 든 조선인들이야 '전쟁'이라는 단어의 섬뜩함에 억눌려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만세'를 불렀던 젊은이들, 그리고 중국 대륙을 석권해 아시아에 그 패권을 굳힐 것 같은 '무적 황군'에 대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소년들의 흠모적 환상 등을, 리영희 선생님께서 잔인하리만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제국의 전쟁을 열렬히 환영하는, 영혼을 빼앗긴 식민지인...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고 지워버리고 싶은 무서운 기억이지만, 이 기억을 반성하지 않고 지워버리면 이 역사가 또 너무나 쉽게 반복될 수 있다는 게 또 하나의 무서운 진리입니다.
지금 미제국과 반쪽짜리 준(準)제국 일본에 보조를 맞추어 반북 히스테리를 부추기는 수많은 '선량한 국민'들을 보십시오. '무적 미군'이 '이북 빨갱이 집단'을 쉽게 박멸하고 중국을 그 위엄으로 굴복시킬 것이라고 순진히 믿는 그들은, "전쟁을 불사한다"는 반북 강경 노선이 결국 동북아 전체를 다시 한 번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커다란 패권 충돌에 불을 지필 수도 있다는 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미 鬼畜 박멸을 위한 聖戰" 조칙 반포에 만세를 불렀던 얼간이들과는 도대체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대한민국의 보수계를 석권하고 있는 또 하나의 - 약간 덜 독한 - 집단정신병은 소위 '건국 열풍'입니다. 노동자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으로 우쭐해지고 자존심쯤이나 세워보겠다는 남한의 '오야붕'들은, 혁명적/반제국주의적 과거를 내세우는 이북과의 이념경쟁 차원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약간 다듬어 미화해버려는 셈이죠.
일제 때에 총독부에 붙어 조선 노동자의 고혈을 짜냈던 것도 다 '문명과 나라 발전을 위한' 것으로 둔갑되지만, 특히 "자유진영의 선두자인 미국을 위해서라면 제3세계대전을 일으켜 한국을 다 희생시켜도 된다"고 다짐하곤 했던 그 놀라운 충성심의 소유자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게 중점 중의 하나입니다. 다카키 마사오의 '촌스러운' 일어에 비해 '닥터 리'의 '액센트리스 잉글리쉬'(accentless English)는 아무래도 '어륀지' 세상에 더 맞는 부분은 있겠지요.
하여간, 본인이 제대로 읽을 줄 몰랐던 불어와 나전어 문헌들을 다 인용하면서도 조선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도 않았던 학위 논문으로 박사님이 된 '건국의 아버지', '민족의 태양', '예수와 석가보다 더 겸손하신 분'(다 실제로 그 때에 사용했던 호칭들임)께서 워싱턴에 가서 남한에서 꽃핀 '다원적인 제페르슨 식 민주주의'를 선전했을 때에 닥터가 될 만한 돈이 없는 중생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 궁금하시면 『歷程』을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초기의 대한민국을 몸으로 겪으신 리영희 선생님께서 책에서도, 구두로 그 회상들을 공유하셨을 때에도 늘 지적하셨던 것은 바로 '무한한 국가 폭력'이었습니다. 반대자를 학살해 그 가족을 연좌제로 옭매어 평생 괴롭히고, 약한 자를 군에 징집해 무의미한 동족상잔의 총알받이로 이용하고, 미제국의 원조든 국가 자금이든 다 도둑질 대상으로 만들어 지배층의 개인적 치부의 자원으로 삼게 하는 것은 폭력 정치와 '도둑 정치'(cleptocracy)의 전형인 초기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책에서 가장 아픈 대목 중의 하나라면, 1950~51년 '국민방위군' 이야기입니다. 인민군에 밀렸을 때의 '국군'은 후퇴할 때에 지나가는 지역마다 장정들을 모조리 다 징집(사실상, 국가적으로 납치)해버렸는데, 방위군으로 강제평성된 그 장정들에게 지급될 식량 등을 그 잘난 '지도층'이 다 훔쳐가는 바람에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가까운 징집 피해자들이 굶어죽고 만 것입니다. 차라리 강도를 더 방불케 하는 '국군' 장교에 건넬 몸값이라도 있는 집 장정은 살고, 없는 집은 납치형 징집을 당해 고통스럽게 아사 당하고 만 것이죠. 『歷程』에서 징집이라는 이름의 국가적 폭력이 얼마나 약자들을 골라 괴롭혔는가에 대한 자세한 진술들은 대단히 많습니다.
전선에서 군 물자를 횡령, 전용하거나 '빽'을 써서 후방으로 옮겨져 용케 잘 살아남은 장교들은 나중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지도층 또는 부유층이 되고, 국가 폭력을 회피하거나 저항을 하지 못한 그 유일한 죄(?)로 사지로 끌려간 가난뱅이들의 백골을 지금도 다 찾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리영희 선생님께서 너무나 잘 아셨던, 그리나 세상이 자꾸 망각하려 하는 우리 '건국사'의 진실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육신은 사멸됐지만, 늘 실사구시로 진실, 진리, 참된 것을 구하려는 그 '위대한 정상인'의 깨인 정신은 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 정신은 우리와 함께 있기에, 어쩌면 우리가 노력을 해서 진실, 생명을 위한 투쟁으로 리영희 선생님께서 겪으셨던 그 무서운 전쟁들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생님께서 유촉하시고 가신 가장 중요한 사항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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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조폭국가다" (레디앙, 2010년 12월 03일 (금) 10:19:13 박노자 / 오슬로대)
"현대판 봉건영주 계급 사유물…노동계급 정치화 긴요"
2년 전에 숙환으로 돌아가신 컬럼비아대학의 찰스 틸리 교수님께서 한 때에 아주 재미난 글을 쓴 바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 건설'과 조폭의 '보호세 갈취'를 비교하면서 유럽에서의 절대왕권의 기원을 설명해준 논문이었습니다.(https://netfiles.uiuc.edu/rohloff/www/war%20making%20and%20state%20making.pdf)
정확하게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도 아니고 다소 이론성이 약하지만, 중세 이후 유럽에서의 국가 기원에 대한 정치학적 설명으로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이 설명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중세 후기의 유럽은 크고 작은 봉건 영주들이 싸우고 또 싸웠던 하나의 큰 전장이었는데, 이들 영주들이 농민,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뜯어먹을 수 있었던 명분은 결국 '보호'였다는 것이죠. 한데, 화기가 고도화돼서 중세 '골목 짱'들의 요새들을 쓸어버릴 만한 대포들이 등장되니, 마르크스의 '시장 독과점화 경향' 논리대로 보호서비스 시장에서 제일 큰 보호 서비스 제공자만 살아남은 것이죠. 큰 대포들을 살 만한 '업자'들만 살아남은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불란서, 서반아, 포도국(葡萄國) 등등 절대왕권 국가들입니다.
이걸 보고 혹자가 제게 "국가와 조폭의 차이도 모르냐, 국가는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공공기관의 총체이며, 조폭은 비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익집단일 뿐이다"라고 반문하겠지만, "공공성이 있는 공권력으로서의 국가" 운운은 어디까지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나름대로의 시민권력이 확립된 근대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전의 유럽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권력'과 사실 사이가 좀 멀었어요. '공민, 공법'의 논리보다 "우리 천주교파냐, 저 개신교도파냐"의 논리가 우선이었다는 것이죠. "짐은 곧 국가"와 같은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수 있었던 절대왕권 아래에서는, 근대적 공법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작동될 수 없었지요.
그 논리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명색상의 공권력을 사실상 사적으로 이용해온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한 가지 약이 필요했던 것이죠. 단두대(斷頭臺)라는 이름의 명약 말에요. 뭐, 그 약물 투입 과정을 거친 나라라고 해도, 꼭 전근대적 권력 사유화 시대로 퇴보하지 않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반동의 시대에는 언제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번에 위키리크스에서 폭로된 미 국무성의 비밀보고서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부패한 마피아 국가"라고 - 매우 옳게 - 규정했지만, 이는 10월혁명과 그 후속 정권(스탈린주의 정권)의 역사적 패배 및 몰락에 따른 전근대적 국가구조로의 후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미 국무성 관료들의 말대로, 지금의 러시아는 푸틴 휘하의 관벌들의 사유물이고, 저들이 국가적 세금을 횡령할 뿐더러 정기화된 상납제도를 통해 '사설 세무서'들까지 운영한다는 것도 맞습니다.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단두대라는 천하명약의 맛을 제대로 모르시고 계시는 아등(我等) 동방예의지국의 대감님네나 영감님네, 그리고 그 이하의 거상(巨商) 벌족(閥族)들도 아무래도 중세후기에 사병들을 거느리고 평민들을 마음대로 칼로 치곤 했던 구라파주 후작과 남작들의 흉내를 열심히 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예컨대 SK왕국 왕자님의 거동을 한 번 보시지요. 감히 왕자님의 궁궐 앞에서 불평불만을 나타내는 등 그 무서운 불경죄를 저지른 나이 든 백성에게 손수 곤장을 친 왕자님에게는, 16세기의 불란서와 달리 호위하는 사병(私兵)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조총을 든 사병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있는 것에요. '매값'이라는 표현방식에서 보여지듯이, 그에게는 국가가 제대로 과세하지도 못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그 화력이 그 어떤 조총이나 대포보다 더 센 무기가 주어져 있는 것이죠. 대한민국에서는 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小)왕국이나 그 왕자님들은, 정말이지 못할 게 없습니다. 감히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해달라고 집단행동을 취한 '머슴'들에게는 음식물 반입을 금지해 '하찮은 상것'들을 마음대로 굶겨도 되고, 용역이라는 이름의 '사병이 아닌 사병'을 풀어서 그들의 갈비뼈를 뿌러뜨리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면, 재미삼아 말 안듣는 동업자를 포로로 잡아 물고문까지 해도 되는 것이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려는 경찰에게 중상을 입혀도 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불패의 무기만 보유하면, 양민들을 구타하든 굶기든 짓밟든 하등의 손실을 볼 일이 없단 말이죠.
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한 크고 작은 군주님들의 사유물이고, 이 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는 소위 글 배운 이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배고픈 강사생활이나 비주류 삶을 살거나 이민가고 싶지 않는 이상 이를 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조폭들이 다스리는 골목에서 건강히 잘 살자면 앞가림을 조심스럽게, 잘 해야 하는 법이죠.
여러분, 딴 건 몰라도 자기기만이라도 하지 맙시다. 우리가 상식과 공법이 통하고 시민들에게 존엄성이 허용되는 근대적 사회에서 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복잡한 경쟁/담합 관계에 있는 수많은 영주님, 짱, 보스들이 공동 관리하는 영토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논리로 운영되는 북조선과의 차이라면, 이 쪽에서는 '수령님'들이 단수가 아닌 복수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는 대리인들 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소위 '대통령'으로 만들거나 '국회'로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대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가 없다는 것, 이 정도입니다.
공정선거가 있다는 게 마침 우리와 북조선의 아주 큰 차이처럼 보는 이들이 있지만, 대학이나 교회부터 주요 신문까지 사회의 모든 기관들이 그 '영주님'들의 손에 쥐어진 상태에서는 선거, 선거직 공무원의 역할이란 영주님들 사이의 교통정리이지 그들의 난폭한 '보호세 뜯어먹기'에 대한 그 어떤 본격적인 억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주님들도 문제지만, 매값을 매겨 평민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간 '나쁜 주인'을 죽으라고 욕해도 총체로서의 '주인들'이 소위 국민경제를 잘 이끌어나가, 우리 모두를 살찌울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사는 백성들이야말로 더 큰 문제입니다.
바스티유가 국민의 요새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성곽이었듯이, 대한민국의 경제란 국민과 무관한 이씨 족벌, 정씨 족벌, 최씨 족벌 등등 '소왕국'의 사유물에 불과합니다. 남의 사유물들을 이렇게도 애지중지하고 자기 것처럼 여기는 이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은 참 착한 백성이죠?
최씨 왕자님에 대한 분노는 지금 하늘 찌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지배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현대판 '봉건 영주계급' 전체를 그 안락한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는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조직화돼 있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 계급의식으로 무장돼 있는가 입니다. 적어도 주인네들 만큼이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뚜렷하게 의식해야 주인네들과 힘겨루기라도 할 수 있단 말에요.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노동자계급은 '봉건 영주님'들에 비해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죠. 그들은 이미 대자적 계급이지만, 우리의 계급적 각성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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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투사와 착한 중산층, 누가 폭력적? (레디앙, 2010년 11월 19일 (금) 11:12:27 박노자 / 오슬로대)
공산주의, 고통스런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이성적 삶의 방식'
나이 차이나 인생경험의 차이가 대단했음에도 저와 류백사(劉白砂) 선생님으로 하여금 매일 저녁마다, 모든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 나서 같이 만나서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게끔 하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저도 류선생님도 - 사민주의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본질상 자본주의적 사회인 - 노르웨이에서는 말 그대로 '유령'이었습니다. 유령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어느 곳에서 '물리적으로' 살고 있음에도 그 곳에 속하지 않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전혀 딴 곳에 있는, 그런 존재 말이죠. 우리 둘은 그러한 유령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정 이상의 우정을 나누었다 해도 어폐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본제 사회의 근본부터 수용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인권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이야 다 좋은데, 석유를 팔아서 번 돈을 저임금 노동력을 쮜어짜는 중국대기업에 투자하면서도 '중국 인권'을 만날 들먹이고 사는 노르웨이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저나 류선생님은 역겨워했을 뿐입니다.
인권? '나'만 내지 '우리'만 누리는 인권은, '나' 내지 '우리'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는 타자가 그 어떤 인권도 향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과연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요? '나/우리'의 인권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그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 때에 그 누군가와 연대해야 하는 의무감은 중요하지 않나요?
한 개인, 내지 한 집단의 고립적 생존이라는 것이 만물이 다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 인드라망과 같은 세계에서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 몸둥이를 타고 나 또 다른 몸둥이들과 부딪치면서 사는 이상 타자에 대한 의무가 권리보다 훨씬 일차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우리가 굳게 믿었어요.
그녀가 생각하셨던 타자는, 일차적으로는 중국의 '화평적 굴기'를 위해 심신의 모든 힘을 다 바쳐 폐기처분돼야 할 선전(深玔)의 민공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고국의 무수한 생명들이 국가와 자본의 이중적 억압과 착취를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 한 그녀는 불행했습니다. 아주 불행하셨습니다.
저도 소련 초기의 혁명가요 한 곡을 듣지 않고서는 작업도 못하고 잠도 못드는 것처럼, 류선생님께서도 40~50년 전의 중국 영화들을 아주 애호하셨고, 그 시대의 노래들을 자주 들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폭력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미 시대에 맞지 않은 집단주의적 사고를 흠모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나 류선생님에게 노동계급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허름한 군복을 입고, 고장난 총을 잡고 반동 백군과의 싸움터로 나가는 붉은 군대 병사나, 일본 졸병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쳐주어서 일본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다는 각오로 항일항쟁에 나섰던 연안시절의 팔로군 영웅들이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시대적으로 불가피했던 폭력성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는 타자가 유의미하게 존재했던 것이고, 그들이 타자와 자기자신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고, 타자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서 자신이 속하는 계급의 여타 타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불가피한 폭력을 행하는 그 당시의 공산투사보다는, 비록 본인이 총을 잡을 일이 없어도 아프간에 파병되는 살인자들의 살육 행위를 가능케 만드는 세금을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내는 미국이나 노르웨이의 '선량한 중산층'은 더 악질적으로 폭력적이지 않은가요?
전자의 경우에는 폭력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도 해볼 수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제력이 저지르게 하는 폭력에 대한 관심마저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류선생님도 그러셨지만 왜 '전체주의적' 공산투사들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지를 대다수의 우리 노르웨이 제자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걸 시도할 때마다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 부딪치곤 하는 것이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여기에서 철저하게 타자, '유령'들이었습니다. 뭐, 어디를 가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과 같은, 특유의 반동성이 아주 짙은 나라로 가면 더욱더 그렇겠지요?
공산주의란 사실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사바세계에서의 이성적 삶의 방식, '고통'이라는 일차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앎에 기반되는 삶과 죽음의 태도죠. 공산주의란, 죽음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직시하고, 이해하고, 그 진리의 입장에서 세상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고 있는 중생들이 할 운동일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죽고 내가 살자는 식의 우승열패적인 자본제 사회적 삶의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요? 무명(無明)과 아집, 집착, 탐진치로 인한 집단적 정신착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특징이란, 자본제적 정신착란이 심한 사람일수록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4대강이 파괴되는 것부터 세계대전들이 벌어지는 일까지, 인류의 역사가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정신병동의 역사를 방불케 하는 부분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신병동을 다스리면서 결국 살인방화할 수밖에 없는 가장 태심한 환자를, 그나마 정신이 비교적으로 맑은 사람들이 제압하려고 시도할 때에 세상이 그걸 보고 '과격'이니 뭐니 비난하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하여간, 슬퍼하기보다는 시공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으로 돌아가신 분을 어쩌면 축하드려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픈 게 이 정신병동에서 남은 우리들의 가까운 미래입니다. 확언컨대 여기에서 권세를 부리고 있는 가장 태심한 중환자들이 이제 머지 않아 서로간의 텃싸움을 벌이면서 우리까지도 거기에 총동원시키려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때에 가서 그들을 제압하여 우리 전체에 대한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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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왜 우월한가? (레디앙, 2010년 11월 12일 (금) 16:36:34 박노자 / 오슬로대)
고등교육계 비정규직 '진보정당' 입당해 '변혁' 외쳐야
제가 '사회주의'를 여전히 유효한 - 어쩌면 지금으로서 유일하게 유효한 - 대안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반응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진보'란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 작업으로 국한됐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 제시란 거의 이단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실성이 있는 진보주의자'들이 시장의 권력을 인정하는 사민주의까지는 기꺼이 거론해도 시장 권력에 대한 본격적 도전을 이야기하는 걸 아주 아주 꺼립니다.
물론 일면으로는 이해도 할 수 있는 입장이죠. 획기적 내지 본격적 변혁이란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 별로 평화스러울 때도 없는 것이고, 늘 온갖 부작용들을 수반하니까요. 수술에 대개 전신 마취가 필수적으로 따르듯이, 본격적 변혁이란 광기 내지 폭력성을 띨 확률이 높은 밑으로부터의 총동원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또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수술은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워도, 수술을 받지 못해 일찍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보다 일단 낫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의 정도를 생각해보면 정말 아주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수술없이는 별 수 없단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시장을 '수정'한다기보다는 상당 부분 아주 배제해버려야 뭔가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적 접근이 아니면 정말 별 수 없는 하나의 좋은 사례는 고등교육계 비정규직 노동자(시강강사, '연구교수', '초빙교수', '비정규 트랙 교수' 등등 - 무늬는 아주 아주 다양하지만 궁극적 본질은 같습니다) 문제입니다. 지금 국내의 고등교육계에서는 비정규직 교원의 수(약 7만명)는 정규직 교원의 수(약 6만5천명)를 능가하고 있으며, 교양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연구논문의 주된 생산자로 기능하는 그들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그들이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는 이상 과도한 저임금 노동(낮은 수업 단가로 인한 너무나 긴 노동시간)으로 말미암아 강의노동도 즐겁게, 재미있게, 준비를 제대로 많이 해서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불확실성과 불안함 속에서 장기적 계획을 세워 연구노동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임금, 불안, 정규직 관리자들의 횡포, 그리고 대학당국의 무시와 각종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고등교육계 비정규직으로 약 4~5년 이상 있어본 사람이라면 가볍게는 고질적 스트레스부터, 무겁게는 신경질환과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것은 일반적 경험입니다.
문제는, 현존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는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시고 계시는 이 분들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개선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 즉 고교 졸업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정규직을 둘 새로운 대학의 설립도 기대할 수 없고,(오히려 지금 전남, 전북의 사립대학들부터 상당히 많이들 퇴출될 위험이 크다는 건 업계의 상식입니다) 사실상 이윤 극대화를 노리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인 오늘날 대학들이 웬만큼 정규직을 두는 걸 피해 특히 인문학 등 '이차적이고 불필요한 분야'에서 정규직 증설을 극도로 억제시키는 것도 -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 국가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고등교육계 비정규직의 비극의 씨앗은 바로 그 유명한(?) 수급 법칙입니다. 수요,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티오의 수도, 그리고 공급의 상당 부분, 즉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배출량도 똑같은 교육계 업체(소위 '대학', 그러나 실제로 '교육계 기업'으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할 듯합니다)들이 좌우한다면 과연 어떻게 됩니까?
티오의 수가 일부러 억제되고 '인건비가 저렴한' 비정규직의 티오부터 늘게 되지만, 동시에 같은 대학이 돈을 받고 팔아주는 석사, 박사학위의 소지자들의 수는 억제할 것없이 마구 늘어납니다. 또 국내 학사 내지 석사 학위 소지자들이 외국 교육계 기업의 장사를 도와주면서 해외 최종 학위까지 대량으로 따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늘 억제되는 수요와 억제될 게 없는 공급이 서로 얼마나 맞지 않을는지 자명합니다.
수급이 이렇게 맞지 않는 데에서는 그러면 누가 이득을 보는 것인가요? 맞아요, 바로 그 불균형의 원흉인 교육계 업체들입니다. 수급이 안맞아 공급초과 현상이 나타날 때에 가격이 내려가게 돼 있는데, 교육계 업체로서 이는 무엇이든 다 감수할 수 있는 '노예후보자'들의 안정된 공급이 보장돼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필하라 하면 입 다물고 대필하고, 논문 생산을 늘리라 하면 시키는 대로 초인적인 논문생산에 몰두하고, 한 학기나 일년 단위 계약으로 일하라 하면 무조건 감지덕지하는 그들이 존재하기에 교육계 업체들이 그 소기의 목표들을 달성합니다.
'인건비 저렴한 인력'을 씀으로써 학교를 등록금과 국고보조금으로만 운영해 재단 이월금을 계속 쌓아두고,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새로 지어가면서 건설사들과의 주고 받는 '파트너십'을 발전시키고 논문 생산으로 경쟁자를 눌러 그 '세계적' 랭킹을 높이고... 노예노동을 마구 이용해 (저들의 표현방식대로) '글로벌 브레인 파워'를 구축해보겠단 이야기입니다.
한국 지식시장의 상대적 고립성으로 이 커다란 '지식착취공장'을 빠져나와 도망가기도 힘들고(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보편적 해결 방식은 못됩니다), 또 철저하게 원자화돼 있어 노예주들에게 집단적으로 맞서기도 힘들어, 정말 자살이 아니고서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이라고 거의 보이지 않는 이 공장 노예들의 참담한 상황에 자본주의적 국가가 몇 차례에 걸쳐 개입을 시도했지만, 모든 경우에는 역효과뿐이었습니다.
개입 능력도 상대적으로 약하고 본래적으로 노예주 계급과 한 무리에 속하는 국가인만큼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예컨대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10년 동안의 안정된 연구여건을 보장해주겠다고 <인문한국>(HK)이라는 프로젝트를 3년 전에 시작했지만, 그게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해보겠다고 그렇게 취직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내지 그 이하의 계약으로 연명하면서 '재임용 심사'라는 노예주들의 무기 앞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교육계 업체들에게 '전임 확보율' 등을 따지는 척할 때에, 기업은 그 말을 듣는 척해 '강의전임교수', '연구전임교수' 등 무늬만 전임을 2~3년짜리로 만들었다가 바로 갈아치우곤 하는 것입니다. 교육계 비정규직 노동자를 레몬처럼 짜낼 걸 다 짜내 그저 책임없이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한국은 사회주의화됐다면 과연 이 교육계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해결됐을까요? 공급 쪽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배출을 그 '지도교수'의 허영심이나 대학 학위 장사 문제가 아닌 계획경제 운영의 문제로 삼아 전국적으로 적절히 조절했을 것입니다. 즉,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보다 까다롭게 해서 과정생 수를 줄이더라도 일단 졸업자의 취직을 보장하는 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해외 유학 출발자들도 - 귀국해서 교육계 종사할 의사가 있을 경우에는 - 어떤 국가적 심사를 받아 그 수가 조절됐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수요쪽에서는 - 차후에 어차피 공립화될 운명에 처해 있는 - 사립대학들의 재정은 학생과 교원노조, 국가 등의 합동 운영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재단 돈이 우선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 줄이기와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쓰이게 됐을 것이고, 불요불급의 공사나 '국제행사' 등등은 취소됐을 것입니다.
강사들이 당연히 교원의 위치를 얻어, 그 해고는 특별하고 불가피한 상황(해당 강좌의 폐지와 대체 강좌의 설치 불가능함 등등)이라는 사유와 국가적인 대안적 직장 알선 없이 불가능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임교수는 강의와 연구 이외에 행정업무가 있는 만큼 그 업무에 따르는 행정업무 추가사례금을 받았을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강의 및 연구 업무에 따르는 본봉은 일체 교원들에게 동등해지게 됩니다.
시간강사가 논문을 대필해주는 동안에 미국에 가서 골프나 치는 전임관리자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고, 강사는 대학의 동등한 구성원이 됩니다... 꿈 같아요? 꿈은 전혀 아닙니다. 민주적 절차 (대학의 운영을 책임지는 학생, 교직원, 국가대표자의 합동운영위원회 등등) 등을 제외하면, 이와 같은 시스템의 상당부분은 이미 동구권 계획경제 국가들에서 실현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술적 발전의 차원에서는 그 결과는 꼭 나쁘지도 않았고요. 그 경험에다가 민주적 요소만을 제대로 결합시키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을까요?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고등교육계 비정규직들이 진보신당과 같은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에 대거 입당해 거기에서 가장 왼쪽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을 외치는 것은 맞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가 아닌 이상, 그들의 위치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참,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통상적 관념은 아무래도 '종교'에 가깝지 않나 싶네요.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전혀 없어도, 그래도 그냥 자본주의를 무조건 믿는 것이죠. 이렇게 믿고 있다가 해방의 가능성들을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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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상아탑 노예들”의 해방의 길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0-11-07 오후 06:36:46)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국내 뉴스를 보다 믿을까 말까 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기사 주제는 “시간강사제도, 33년 만에 사라진다”였다. 사실, 시간강사 없는 대학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 달로 치면 제조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로 연명하면서도 전국 대학 교양강좌의 절반 이상, 전공과목의 36% 정도를 그들이 담당하고 있다.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그 많은 사립대학들의 운영이 가능해지고, 거의 구미권 수준과 비교가 가능한 전임교원의 임금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진지한 “시간강사제도 폐지”라면 고등교육의 “혁명”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물론 뉴스를 자세히 보니 이는 통과된 법이 아니고 통과 과정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개악될지 모를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사통위)의 “안”일 뿐이었다. 즉, 시간강사제도가 “사라진다”기보다는 수만명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연구를 제대로 할 기회를 빼앗아 그들을 만성적 빈곤, 불안, 우울증, 그리고 극단적 경우에는 자살로 몰아내는 이 제도를 이번 정권이 차후의 “수정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안”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진지한 의미의 “시간강사제도 수정”도 전혀 아니었다. 단, 최악의 조건에 처해진 비정규직인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아주 약간 개선시켜주는 표피적 “시혜”와 대학 내 비정규직 고용을 제도화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확대할 뜻이 보였을 뿐이다.
이 “안”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대목들은 “시간강사”라는 명칭을 폐지해 대학 비정규직 교원을 “강사”로 통칭하고 그들을 “교원”으로 인정해 그 시급을 현재의 4만여원부터 단계적으로 약 8만원으로 올리는 등 처우 개선을 단행하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교원 지위 부여”와 “시급제 보수 지급”은 서로 충돌하는 데에 있다. “진짜” 교원의 보수는 연봉으로 나오는 것이고, 비정규직 강사들에게는 계속해서 시급제를 적용하겠다는 것은 명칭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계속 차별하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시급 수준을 절대빈곤선에서 상대빈곤선으로 올려준 것은 외형적으로 “시혜”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주당 아홉 시간의 강의담당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비정규직 강사는 어차피 전임직 교원의 평균 보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돈보다 어쩌면 더 핵심적인 부분은 “지위”, 즉 신분이다. 사통위의 “안”이 비정규직 교원들에게 “교원지위 부여”를 하는 것처럼 주장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존의 학기 단위 계약 관행은 일년 단위 계약 제도로 바꾸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계약을 일년으로 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교원으로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실세” 전임 교수의 대필 요구 등을 당당히 거절할 만큼의 지위 안정성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는 아주 순진한 착각이다. 특별한 상황(불가피한 과목 폐지 등)이 발생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교원이 자동적 근무 지속을 요구할 수 있다는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전임직 관리자들의 횡포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요구한 대로 대필을 해도 정규직을 얻지 못한 강사들의 자살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상급자가 어떤 사역을 시켜도 이를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상아탑의 노예들”을, 그 상급자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가 진정하게 해방시켜줄 리는 만무하다. 노조 가입과 파업 등 연대투쟁만이 정상적인 연구자 생활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다 빼앗긴 비정규직 교원들에게 좀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비정규직 교원들이 제조업 비정규직 이상으로 분산, 원자화되어 상급자와의 개인적 예속관계에 옭매여 있는 상황에서는 연대투쟁을 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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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다문화 사회'입니까?" (레디앙, 2010년 10월 31일 (일) 10:02:49 박노자 / 오슬로대)
시대착오적 '단일민족' 주장 중단은 진일보…'통합'보다 '동화' 강요
어제 런던의 SOAS (동방 및 아프리카학 대학)에서 한국의 인종론 및 인종주의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의 주제는 주로 개화기 및 일제 초기의 조선에서의 인종론(주로 '황색인종 단합론')이었는데, 청중들과 대화를 하다가 요즘 남한에서 얘기되는 소위 '다문화 관련 정책'의 문제가 화제로 나왔습니다.
청중 중의 한 분은 그래도 단일민족론의 공식적 폐지와 다문화적 인구 구성이라는 현실의 국가적 인정 등을 일종의 진일보로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하셨는데, 저는 '단일민족'이라는 수사의 국가적 이용의 정지를 환영하면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큰 진일보인가 다소 회의론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제 회의론적 입장의 근거를 대략적으로 밝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적 수사는 어떻든간에 완벽한 '다문화 사회', 즉 여러 문화들, 또는 그 문화들을 담지하는 종족들이 완벽하게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모든 소수자들이 다 동등해진다면, 도대체 누구를 3D직종으로 보내고 누구를 착취해서 초과이윤을 짜낼 것인가요? 이윤이 경향적으로 하락해가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초과이윤을 빼낼 수 있는 다소 무권리 내지 피착별 상태에 있는 소수자들의 존재는 매우 귀중하죠. 자본가들에게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슬로에서 공사장이든 청소 용역회사든 제일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다 도맡아 하는 폴란드 이민자들을 보세요. 이민자들에 대한 착취를 감시, 적발하고, 국가적으로 처벌도 할 수 있는 사민주의 낙토(?) 노르웨이인데도, 청소 용역회사 같으면, 폴란드계 피고용자 중에서는 정규직들은 18%밖에 되지 못하고 나머지는 각종의 비정규직들입니다. 병원, 유치원, 호텔 등에서 일하는 폴란드 사람 같으면, 정규직들은 절반이 될까 말까 하고요. 그것은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이 근로인구 중에서 9% 정도만 되는 노르웨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민주의 일간지 <다그스블라데트>마저도 폴란드인들이 노르웨이에서 사실상 "B급 노동자"가 됐다고 자인하죠.
아무리 '다문화 정책'을 펴서 폴란드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민족언어 추가 학습시켜주고 소수의 폴란드계 지식인들을 일간지 고정필자로 기용해주고, 폴란드와의 문화교류를 활성화한다 해도, 결국 차별과 착취의 근본적 현실은 잘 바뀌지는 않죠. 그러나,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외국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한다 해도 적어도 '장기적인' 착취가 계획되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분을 얻어, 그 착취를 어쩌면 면할 수도 있는 '정주'의 가능성은 많이 열려 있습니다.
폴란드 등 유럽연합 가입국 출신들의 정주는 쉽게 가능하고, 이외에도 1년에 2만여 명의 '정주를 전제로 하는 이민'을 받고 있는 것이죠. 정주하고, 영주권 얻고, 7년 뒤에 노르웨이 국적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사실상 착취가 거의 정지될 가능성은 큽니다. 노르웨이어 구사능력이 좋고 일단 노르웨이에서 정주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는 폴란드계 사람이라면, 상당한 이유없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경우에는 얼마든지 고용주의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위반으로 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특히 이슬람권 출신의 경우에는 차별과 착취는 거의 '세습'될 위험성도 있지만 (이슬람적 이름을 가지고 노르웨이에서 좋은 직업 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회는 그래도 나름의 대책을 취하고 있기도 하죠. 인종차별방지법도 있고 하니까요. 즉, 소수자에 대한 착취는 여기에서 '새로운 틈입자'에게 집중돼 있고, 그러면서도 그 틈입자에게 '완전한 사회 편입'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까지 제시돼 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본래의 언어나 문화 등을 무조건 이탈하고 망각하라는 노골적 압력까지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저희 동네 공립도서관에 가도 예컨대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나 이란의 파르시어 등의 이민자 언어로 된 책자들이 아주 많아요. 이민자들의 아이를 민족문화의 자장으로 끌어들일 합밥적 방법이 다 있단 이야기죠. 물론 토박이 문화 위주로 돌아가는 노르웨이는 진지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는 아니지만, 좌우간 사민주의자들이 나름의 포괄적이고 관용적인 사회통합정책을 쓴다고는 볼 수 있죠.
대한민국은 이것마저도 없습니다. 일단 정주를 전제로 하는 노동이민부터 부재하죠.(아주 고급스러운 극소수 업종 제외하고) '고용허가제'라는 3~4년 동안 집중 고도의 착취를 받고 나가라는 식의 단기착취 위주 제도고, 하등의 장기성은 없죠.
고급 인력을 제외하고서 정주가 가능한 것은 결혼이민자들인데,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통합이 아닌 사실상의 '동화'입니다. 노르웨이처럼 '민족어, 민족문화 보존정책'은 전무하고, 일단(국가로부터의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 '한국인'으로 키우고 본인도 한국어부터 한국 '예절', 즉 윗사람 앞에서 무조건 몸을 굽히는 것까지 다 배우라는 압력일 뿐입니다.
다르게 생긴 얼굴들을 관용해주고 '단일민족'에 대한 시대착오적 이야기를 그만둔 것은 진일보라면 진일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다르게 생긴 사람'으로서의 생존권은 얻어지지만, 베트남인이나 필리핀인으로서 그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면서 한국 국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민족으로 편입돼야 된다는 것이죠. 즉, 민족과 국민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다문화주의'에요? 차별 받고 살 '다문화 가정'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다 많이 재생산시킬 교묘한 술책일뿐입니다.
그리고 약간 비관적 이야기지만, 정말 국내에서 민중적 성격의 정치세력이 집권하지 않는 한 노르웨이 정도로라도 '다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기에는, 한국 지배자들에게 장기적 사고가 너무 부족하고, 백인이 아닌 모든 타자들에 대한 멸시가 강력하게 박혀 있는 인종주의적 사고가 너무 공고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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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진보정치 부진의 이유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0-10-10 오후 08:54:53)
미국사 연구에서 한 가지 저명한 주제는 “유럽과 달리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 내지 사민주의 정당이 성공하지 못해왔는가”다.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의 개인주의와 노동운동의 상당부분을 포섭한 민주당의 역할을 칭송하면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전망 없다는 것을 자축하는가 하면, 진보주의자들은 급진좌파에 대한 국가 탄압의 역사나 인종·종족별로 쪼개진 노동계급의 분열을 한탄스럽게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진단을 내놓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친화성의 부족이 미국사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최근 십여년 동안의 경험을 회상해보면 한국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90년대 후반부터 사민주의적 지향의 진보정당이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만큼 국가 탄압은 완화됐지만, 진보정당의 역사는 주로 쓰라린 패배로 일관했다. 2000년대 초반에 일시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일으킨 바 있지만 그 후로는 진보정당들의 지지율이 침체돼 점차 소폭 내림세를 보일 뿐이다. 특히 저소득층이나 젊은층 사이에서 진보정당 지지가 미약하다는 것은 놀랍다. 성장이 둔화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부와 학력의 대물림이 일반화되는 한국에서는 진보정당의 정책비전이야말로 약자들의 이해관계에 안성맞춤이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주된 지지자들은 여전히 소수의 고학력자와 대기업 노조 조합원 등이다.
북유럽 복지국가를 선망하는 경향을 보이는 한국인들에게 토종 사민주의자들이 이렇게 호소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진보정치 부진의 사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급갈등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관념적이며 비현실적 민족주의를 내세워온 일부 정파들의 패권주의적 행위도 진보진영의 분열과 진보정치의 부진에 기여했다. 조합화되기 어려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조직성도 진보정치의 대중적 기반의 구축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이유들과 함께 사회심리적 이유도 지적돼야 한다. 사민주의는 약자들의 상호 신뢰와 연대를 기본 요소로 삼고 있지만, 한국적 풍토에서는 약자들끼리 서로 믿고 손잡아 함께 계급투쟁을 벌이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이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 이데올로기, 즉 한국인들의 “상식”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擬似)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다. 극도로 부패한 관벌·재벌의 지배하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거짓과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면서 정부나 사회 지도층도, 서로서로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타인을 일단 먼저 믿어볼 수 있다고 답하는 사람은 28%뿐이다. 그러나 늘 타인을 불신·경계해야 하는 폭력적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그 폭력에 정면으로 저항하기에는 학교나 군대에서 폭력에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저항한다기보다는, 그나마 믿어도 될 것 같은 가족·의사가족(선후배 등)과 튼튼히 뭉쳐서 폭력의 먹이사슬에서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려고 발버둥친다. 그것이 도덕적 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대다수는 이 세상에서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미 믿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냉소주의가 팽배한, 원자화된 사회에서 신뢰와 연대를 부르짖는 사민주의자들이 민심을 얻으려면, 그 연대 정신의 진지함은 약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학교 체벌 등 인권문제부터 철거민 투쟁이나 비정규직 파업까지 약자들이 싸우는 현장마다 당의 명운을 걸고 총력지원하는 것과, 약자들을 평상시 지원할 수 있는 풀뿌리조직을 확충하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저항의 현장마다 진보정당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면 결국 언젠간 한국에서도 진보정치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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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악마화'를 넘어서야 (레디앙, 2010년 10월 01일 (금) 08:28:44 박노자 / 오슬로대)
남북 지배층 본질 유사…한반도 '국제정세 영향력' 결정적
한국에서는 여승무원들이 몇년 파업을 해도 하등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노르웨이 언론들은, 이 '신기한 왕국' 북한의 소식에 대해 늘 놀라운 궁금증을 보이고 있으며 요즘 당 대표자 대회 관련으로 제게 거의 매일같이 이것 저것 묻습니다. 가끔가다가 그저 웃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며칠 전에 TV-2라는 방송국에서 김정은 차기 CEO의 스위스 학력을 들면서 "독재 국가의 권력자가 왜 하필이면 자기 자녀를 민주국가으로 유학보냈느냐"고 제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해 그 자리에서 되물었죠. "이념적 색깔은 어떻든간에 주변부의 과두권력자들 중에서 진심으로 중심부 지향적 성격을 갖지 않는 이들은 과연 많은가요? 북한은 '사회주의'를 간판으로 내걸어 일부 관찰자들을 혼란에 빠뜨리지만, 그 권력 실세들의 실질적인 의식이나 행동양태가 남한의 권력자들과 정말 그렇게까지 다르다고 보시나요?"
이렇게 해서 열변을 토했지만, 기자는 그래도 "독재 국가의 지배자가 자기 왕자를 민주국가에 유학 보내는 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고, 왕자가 민주사상을 배워오면 어떻게 될 것이냐"고 계속 우겼어요. 참, 그 '기자님'이 사우디나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북한 정도의 독재국가에서 살면서 그 권력자들의 자녀들의 유학코스를 추적하셨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오늘은 또 사민주의적 지향의 <닥스아비센>지로부터 전화가 와서 "영어와 독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3대 최고권력자가 개혁, 개방 노선으로 가지 않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식민지시대 엘리트들이 그 특권을 계속 누리는, 외세의존성이 절대적인 신생국가에서 독재를 하는 이유는 "영어를 못해 민주주의를 못배워서"가 아니고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다수 '피해대중'(조봉암의 표현)의 정권에 대한 증오심과 해방에의 의지를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극도로 착취적이고 반민주적인 한국 기업 문화도 '영어를 못해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노동생산성이 미국의 절반이나 될까 말까 하는 등의 기술적 후진성과 해외 시장을 둘러싼 날로 가열해지는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의 열세 등을 만회하기 위해, 한국기업인들이 손쉬운 '노동불안화, 임금착취'의 길을 택함으로써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다들 스위스에서 아예 눌러앉아 살아버려도 달라질 것도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북한의 귀족층이 왜 꼭 다르다고 봐야 하나요? 한국 기업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양보로 그 단기적 수익률을 위협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듯이, 북한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공장/농장의 주인님들도 개혁, 개방을 지나치게 빨리 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려 하지 않죠. 그들의 수장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능통자인데다 인터넷광이라고 해서 도대체 뭐가 달라진단 말에요?
제가 남한과 북한을 동렬에 놓고 비교하는 데에 대해서 가끔가다가 학생들은 문제제기를 하죠. 거의 모든 20대들이 매일 인터넷을 즐기는 나라와, 광명망조차도 주로 엘리트들만 이용하는 나라, 다이어트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나라와 큰 명절 아니면 고기를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비교해도 되느냐고요.
물론 지금으로서의 양쪽의 소비 수준 등은 이미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고, 이 정도의 간극을 메꾸려면 적어도 반세기 이상이 걸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북쪽의 실패를 무조건 김씨왕족의 탓으로만 돌리고, 남한의 자본주의적 번영(?)을 무조건 재벌가와 독재자들의 '선정' 덕분으로 돌려야 하나요?
사실, 남이든 북이든 한반도 역사 전체에서는 '국제적 계기'란 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해온 것을 간과하면 안되는 사실입니다. 물론 저는 일제 관학의 '타율성론' 등을 복원하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한반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그 총인구의 총체적 의지에 의해서 전개되죠.
남한의 민주화도 그랬지만, 어디까지나 대다수 인민들의 유교적 '충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북한의 기적과 같은 최근의 생존도 외인이 아닌 내인에 의거한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한 성만한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계기'들의 중요성도 무시하면 안됩니다. 적어도 역사 전개의 결정적 시기마다 말씀입니다.
남한이 1980년대 말에 준핵심부로 편입되기 전까지 그 개발의 핵심적 버팀목은 총 약 130억달러에 이른 미국의 원조(1973년까지)와 400억 달러 정도의 아시아개발은행, 일본 정부 및 시중 은행 등의 차관, 미, 일, 서구의 직접 투자와 기술 협력, 그리고 1970년대말 같으면 남한 수출의 70% 이상 사주었던 일본과 미국의 시장 흡수력이었습니다. 냉전적인 미, 일, 서독과의 (다소 종속적)'협력' 틀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라 통일'에 대한 당나라 천하 통일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그저 역사의 사실일 뿐입니다.
북한의 버팀목은 1980년대 말에 그 무역의 80% 정도를 담당했던 소련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버팀목은 좋았을 때에도 미, 일, 서독이 남한에 퍼주었던 만큼 돈과 기술, 시장 소비력을 북한에 절대 제공해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소련의 실질적 경제력은 미, 일, 서독의 총체적 경제력의 20% 정도이었어요. 좋았을 때 말이에요. 문제는 그 버팀목인 소련이 20년 전에 망했을 때에 천문학적인 군비의 무게에 허리가 휘었던 북한은 남한과 달리 아직도 '준핵심부'와 아주 사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유신 말기나 신군부 초기의 남한처럼 그저 종속적인 제3세계 국가이었을 뿐이죠('주체'에 대한 궤변은 현실과 무관한 것이고요).
거기에다 중국과 달리 규모의 경제와 같은 장점도 없고, 1980년대 등소평 식 군축 정책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은 '최전선 국가'이었던 것이고요. 결과는 1990년 이후의 처참한 반(半)몰락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는 남북한 비교를 정말 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러나 예컨대 양쪽의 버팀목들이 그나마 팽팽히 맞섰던 30년 전 같았으면 양쪽의 동등한 비교가 가능했다는 점도 기억해주어야 합니다.
국제정세에 따라 한반도 정치, 경제가 당장 춤추는 게 우리들의 비극이지, 버팀목을 잃은 한 쪽을 악마화하거나 무시할 일은 절대 아닙니다. 1990년대의 러시아처럼 미국이 국민총생산의 50% 정도 줄어버리면, 남한 경제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물론 북한의 세습 독재를 - 남한 재벌들의 세습 독재들과 마찬가지로 - 좋아할 일은 절대 없지만,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 해결의 어려움을 그들의 실정만으로 돌려 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사학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실정도 당연히 있었지만 '국제 계기'는 일차적으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 같고, 그 국제계기의 영향으로부터 남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북한의 지배 체제는 남한보다 훨씬 전근대적이고 억압적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북한의 지배자든 남한의 지배자든 똑같은 민중의 착취자일 뿐이지 북한측이 유독 악질적이고 악마적이라고 볼 수 없을 듯합니다. 마카오에서의 김정남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안보셨어요? 딱보면 외국에서 비자금 관리하면서 도박이나 일삼는 남한의 부유층과 거의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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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2010년대 새로운 화두된다" (레디앙, 2010년 09월 25일 (토) 22:45:04 박노자 / 오슬로대)
[칼럼] 반동의 시대여, 안녕…2008년 세계공황 판 바꿔
'거리'라는 게 사학자에게 아주 귀중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 이 관습을 깨고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시대, 즉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사상사적으로 사고해볼까 합니다. 그러한 시도를 또 해봐야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좌우'라는 축을 사용하자면, 지난 20년은 말그대로 하나의 '반동의 시대'였습니다. 해방 직후와 6.25 전쟁 때에 식민지 시대에 자라난 토착적 좌파가 남한에서도 (사실, 곧 북한에서도) 철저하게 학살된 이후로는 한국에서 '좌파'가 1980년대 중반쯤에 재정립될 때까지 약 30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즉, 이념계의 중심은 1953~1985년간 아주 서서히 "왼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죠.
1950년대의 화두가 주로 '민주주의' 정도였다면, 1960년대는 굴욕 외교 반대 속에서 '식민지 유산 청산' 등 '민족적' 문제들이 첨가됐으며, 1970년의 전태일 의거 이후에 '노동' 문제가 재발견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에서 다시 한번 '사회주의'가 말해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1990년대 초반의 일련의 사태들이 이념계의 중심축을 다시 한번 아주 급진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놓았습니다. 보통 형해화된 소련, 동구권, 북한의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몰락 내지 위기를 주원인으로 거론하지만, 꼭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세게체제에서의 위치가 급상승됨에 따라 남성, 고숙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현저히 상승되는 등 노동계급의 일부가 체제내화되어 노조관료의 일각이 보수화된 것도, 1987년 이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구 운동권의 지도층의 상당 부분을 변절시키면서 성공적으로 흡수, 활용한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부유해지고 복합화된 남한 사회의 포섭력, 흡수력이 강화돼 반체제적 움직임들이 탄력을 잃은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사상계의 중심축은 우향우를 거듭했습니다.
'우향우'의 구체적인 방식은, 특정 지식인 그룹의 체제 내 포섭 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졌습니다. 부르주아 정당에 흡수된 구 운동권의 주도층 다수는, 대개 1950~1970년대 식의 '민주주의' 논리를 부활시켜 거기에다 '시민' 등 유행어 몇 개를 첨가시켜 '시민민주주의' 발전을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땅 부자 1%가 전국 부동산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5대 재벌의 총매출액이 이미 1994년에 국민총생산의 약 54%를 차지하는 나라, 즉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경제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초과독점의 나라에서 과연 '민주주의' 자체가 무슨 효력이 있겠느냐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대학부터 건설사와 이동통신업체까지 모든 것을 다 하나의 세습독재형 '초과 재벌'이 소유, 지배한다면, 청와대가 아무리 시민 운동가들의 완전한 차지가 되어도 결국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사회 법칙상) 재벌의 의지가 당연히 이길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치판에 흡수된 구 운동권의 '작은 수령'은 이런 당연한 질문을 자기 자신들에게 던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천문학적 자금이 사회의 판도를 결정하는 곳에서 일개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본인들이 '벌거벗은 임금' 신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개혁' 희비극의 씨앗은, 이렇게 1990년대 초반부터 천천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지도자'급은 그 고귀한 몸둥이들을 주요 정당에 비싸게 팔았지만,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던 '이념가' 등은 대학 교직 진출에 성공하여 재벌 사회의 '지식 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두뇌의 소출을 대중 교양서 출판 시장에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장사 방식을 아주 거칠게 이분하자면 '수입상'과 '고물상'으로 나누어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구주 언어에 밝거나 약간 '개화파적' 기질의 수입상들은 주로 '포스트모던' 철학과 그 파생물들의 국내 수입 및 판매에 주력했습니다.
'근대성의 내재된 규율성의 비판' 정도면, 한 때에 1980년대의 '독점자본 반대'만큼이나 아찔하게 느껴졌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죠. '근대성의 내재된 규율성'을 비판하시는 선각자 분들은 기차를 안타나요? 원시 사회의 코끼리 집단 사냥부터 오늘날 기술사회까지 생산공정은 일정한 정도의 규율성을 늘 요구해왔습니다. 일정 수준의 규율성이 없으면 사회적 생존이 불가능하죠. 물론 한국과 같은 최악의 병영사회에서는 규율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정말 필요했습니다. 한국 지배자들이 필요불가결의 규율성을 넘어 전 사회를 맹종의 피라미드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교묘하게도 많은 경우에는 '근대 비판자'들은 한국 자본주의적 근대의 최악의 규율주의적 산물인 군대를 주 타깃으로 삼는 양심적 병영거부운동 등에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군대 같은 재벌 독재의 유지에 긴요한 기관과 맞짱뜨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거둔요.
'수입상'들이 자본도, 국가도 빠진 근대 비판에 몰두하는 사이에, '고물상'들은 국가권력의 무한한 강화를 꿈꾸었다가 실패한 정조 같은 반(半)독재자적 국왕들을 '계몽군주'로 만들거나, 외과가 거의 발전되지 않아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했던 전통 한의학을 '근대 의료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등 '전통' 장사에 열을 올렸습니다.
웃겨도 참 웃기는 일은, 지금 남한 인구 사이에 퇴계나 율곡, 다산의 가문들이 소유했던 노비들의 자손들이 그 세 명 사상가의 자손보다 더 많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퇴계, 율곡, 다산'을 이야기할 때 그 노비들의 참상이 아닌 그 세 명의 양반 노비주의 '위대한 담론'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탈계급화된 의식이, 계급적 존재를 배반하는 장인데,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개혁', '시민사회', '근대성 비판', '전통'의 판매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져 '사회주의'와 같은 거북스러운 단어들은 한 때에 거의 다수의 기억을 벗어났지만, 2008년에 시작된 세계 공황은 이 판을 이제 곧 바꿀 것입니다.
'개혁'을 백 번 외쳐도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부자들의 소득의 상당 부분을 부유세를 통해 몰수해 공공부문 일자리를 만들거나, 대기업들에게 강제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정규직 증원을 명령하지 않는 이상 계속 심해져가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대성 비판은 이론적으로 다 재미있지만, 지금대로 간다면, 남미화돼가는 남한의 인구의 상당 부분은 대형병원이나 장거리 비행기와 같은 근대 산물들을 접근하기가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근대성 운운과 무관하게 돈이 없어서요. 그리고 아무리 '진경시대'가 이태리 르네상스를 백배 초월했다고 과감하게 주장해도, 가난해지는 20~30대들이 어차피 예전만큼 교양서적을 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곧 맞이해야 할 시대는 다수의 빈곤화의 시대, 중산층이 소멸돼가는 사회에서의 극적인 갈등들의 심화의 시대, 부동산 버블의 붕괴와 성장 침체의 시대, 그리고 전세계적 자연재해와 자원전쟁, 각종 패권 갈등의 열전화 시대일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근본 문제는, '웰빙'도 '근대성 비판'도 아닌 단순한 다수의 집단 생존일 것이고, 그 생존의 방책은 사회가 전 사회의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이윤 추구가 없는 집산적 체제, 즉 사회주의일 것입니다. 물론 스탈린주의와 다른 민주적 사회주의 말씀입니다. 예상컨대, 바로 자본주의의 종언과 '자본주의 그 다음'의 문제는 2010년대의 새로운 화두로 돌아올 것입니다. 반동의 시대여, 안녕히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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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객관적 학자는 없다" (레디앙, 2010년 09월 19일 (일) 09:23:57 박노자 / 오슬로대)
러시아 학계의 대한반도 인식 변화, 원인을 따져보면
어제(17일) 거의 죽을 만큼 피곤했는데, 좀 수확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운좋게 한양대에서 개최됐던 한-러 수교 20주년 학회에서 참석하게 됐는데, 각종의 재미난 발표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제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저의 옛날 스승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상트페테르부르그대 교수 쿠르바노프의 이야기였습니다.
남북한에 대한 러시아 학계의 인식 변화 추이를 추적한 발표문이었는데, 거기에서 주목을 끌었던 부분은 1990~91년간의 소련 몰락, 북한 빈곤화의 시초, 남한과의 수교와 남한으로부터의 원고료나 강의료 등 자금 유입을 계기로 생긴 '180도 인식 변화'였습니다.
이재오 등의 사례가 증명하듯이 그들 중에서도 '대세에 따른 변신'의 천재들은 러시아 학계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연구자이었다가 1991년 이후에 한 때에 '북한몰락론'의 대표자가 된 톨로라야 박사, 북-소 무역사의 권위자로서 북한과의 '친선'을 쌓았다가 1993년에 낸 북-소 무역사 관련 연구서적에서 북한의 경제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오류'로 정의해버린 바자노바 박사 등등의 사례도 있습니다. 선배들의 '소신 변천사'를 담담하게 나열해주는 쿠르바노프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낯짝이 그냥 부끄러움으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칼 만하임의 이야기대로 우리는 대개 학자 등의 지식인들을 '자율적인'(free-wheeling) 존재로 인식하려 하고, '학자의 의견'이라면 뭔가가 중립적이고 객관성에 근접하려는 것으로 보려 하지만, 실제 예컨대 세계의 소위 '지역 연구'를 보면 연구 동향과 해당 국가의 대외 학자 지원 능력의 관계를 당장에 눈치챌 수 있습니다. 예컨대는 비록 일부의 용감한 비주류 비평가들이 그 주장을 미국에서도 하긴 하지만 (http://www.counterpunch.org/christison11082003.html), 팔레스타인인 등 비유대계들에게 이스라엘의 국토의 90% 가량 되는 국유지를 절대 팔아주지 않고 이스라엘 국가의 '유대인적 성격'(Jewish character)를 지키려는 시온주의가 사실 인종주의의 일종이라는 점을 자세히 분석하는 학자를 특히 미국의 유대학 (Jewish Studies) 학계에서는 찾아보기가 아주 힘듭니다.
이미 정년 보장을 받아 쫓겨날 위험이 없는 교수라 하더라도 연구비를 주로 시온주의에 친화적인 유대 자본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재단이나 이스라엘쪽으로부터 받는 만큼 비판을 많이들 자제하죠. '부드러운 비판' 정도는 몰라도, 시온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학자적 자세를 '스폰서'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한국학 학계는 하도 넓고 또 그 일부가 운동권 등의 경험을 한 한반도 출신들이기에 민중운동 연구나 노동계급운동사 연구, 그렇지 않으면 남한 군사주의 연구나 현재 비정규직 조합화 시도들의 연구를 하는 몇 명의 사람들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습니다. 가끔 가다 예컨대 최근 브리티쉬 컬럼비아대의 전지혜 교수님이 내신 '주변부에서의 조직화'처럼 미국과 남한의 비정규직(특히 환경 미화원)의 조합화와 상징 정치를 아주 훌륭하게 비교, 분석하는 역작들도 발견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진정으로 아픈 문제들 - 군 폭력부터 비정규직의 차별까지 - 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는 학제 소속은 '한국학'이라기보다는 사회학 등 일반 사회과학입니다. 한국으로부터의 지원금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학의 경우에는 비판하더라도 스폰서들을 지나치게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들 합니다.
그러면 외국인 '주류' 학자들의 스폰서가 될 위치에 있지 않은 북한에 대한 연구 저서의 말투는 보통 어떤가요? '어버이 같은 수령의 사랑스러운 보호하에서: 북한 일상생활'과 같은 연구서적의 주제에서 느끼시겠듯이 북한을 '비꼬는' 것은 '미덕'으로 쳐주고, 북한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일 뿐인 인종론적 요소를 마치 그 이데올로기의 전체인 것처럼 배치전환시키고 북한인들을 '인종주의자', '파시스트'로 지칭하는 유사 연구서적은 학문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비백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 모독, 구타는 외국인의 수가 매우 적은 북한보다 남한에서 백배 심한데도 (요즘의 한 사례), 남한의 태심한 인종주의를 제대로 분석하는 연구 논문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스포서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북한에 비해 남한은 많은 면에서 비교 못할 정도로 구미권 외국인에게 '접근성'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그 '성장의 기적'에 압도감을 느끼는 것도 작용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북한의 노동당이 한국국제교류재단만큼의 재원을 손쉽게 운영할 수 있었다면 과연 국제 '한국학' 학계의 사정은 약간 바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찢어지게 가난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는 동북아 최빈국한테는 기본적으로 '해외 연구자'들에게 존중을 받을 자격은 없다는 것이죠.
이 세계에서는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는' 것입니다. 북한이 악질 독재국가니 당연히 존중 받을 자격은 없다고 제게 반박하실 분이 계시리라 예상합니다. 네, 악질독재 국가는 맞습니다. 절대 다수의 국내 기업들이 '악질적 부당노동행위자'인 것처럼 그것도 사실상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형이 비슷한 중국 공산당의 독재에 대한 구미권 연구자들의 태도는 과연 어떤가요? 저도 교수할 때에 많이 이용하는 리벨탈 교수의 역작 『중국 통치하기』를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중국이 고속 성장을 성취하면서도 예측가능한 미래에 당연히 독재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등소평을 '천재'로 명명하는 리벨탈 교수는, 과연 중국 공산당에 대해 '불경한' 표현을 한 번이라도 썼나요? 답은 뻔하거든요.
악질 독재라 해도 부유해지고 강해지기만 하면 그에 대한 '민주국가' 출신 외국 학자들의 태도는 당장 확 달라집니다. 단, 북한의 '강성대국' 드라이브가 성공될 리가 만무하니 아마도 끝까지 부유한 나라들의 학자들에게 웃음거리, 욕해도 무방한 대상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율적 학자', '객관적 학자'는 신화입니다. 소수의 양심파들이야 늘 있지만, 사회, 인문과학 분야의 대다수의 학자들의 판단은 본인의 성장과정으로 인한 편견부터 연구비 지원 기관의 묵언의 요구까지 수많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절대적으로 좌우됩니다. 외형적으로 '민주화'된 나라들의 학자들이 꼭 지배계급의 '입'만은 아니지만, 지배계급의 편견이나 요구로부터는 전혀 자유롭지도 않으며, 대다수의 경우에는 자유로워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쿠르바노프 교수가 나열한 소련 한국학자들의 '변천사'는 그 극단성으로서는 다소 돋보이지만, 그 외 다수 학자들도 정도 차이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도 성직자도 절대 믿을 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세상이 다 알지만, 학자도 크게 봐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제 학회에서 얻은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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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신화다" (레디앙,  2010년 09월 12일 (일) 11:06:21 박노자 / 오슬로대)
[칼럼] 외무부의 귀족성과 특채 소동을 지켜보며
외무부의 '귀족성'이야 오늘 어제의 일도 아니니, 사실 유서가 깊고 잘 바뀌지 않는 분위기이겠지요. 지난 20년 동안은 중산층까지도 출입국이라는 권리를 누려왔지만, 1980년대 말까지는 자유로이 외국에 왕래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귀족 특권'에 가까웠습니다.
귀족이 아닌 몸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병영/군사기지를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란 공부를 아주 잘해서 관비유학생이 된 소수의 모범생,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한국 사회에서 질시, 모멸 당하는 입장이 된 극소수의 여성, 그리고 월남이나 중동 건설 현장에 집단으로 가는 노동자 정도이었습니다.건설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큰 군사기지에서 사우디 건설 현장과 같은 작은 병영으로 갔다오는 셈이었지만요.
어쨌든 이러한 병영사회에서는 늘 '휴가'를 밖으로 갔다올 수 있는 외무부의 위치는 특별했으며 거기에 운좋게 들어온 상당수 기득권자들이 당연히(?) 그 위치를 세습화하려 애쓰곤 했죠. 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통 일반의 시선이 많이 차단됐을 뿐이지 성골, 진골, 육두품들이 다시 생긴 건 꼭 오늘 어제의 일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대한민국의 체질적 특성일 뿐입니다.
그런데 외무부와 같은 '특수' 부서에 대해서는 일반의 시선이 사실상 거의 차단돼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특채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는, 외무 내지 정보 계통의 관계자들이 실제로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설정하고 관리하는 세계의 다른 정부들과의 '관계'의 상태는 실제로는 어느 정도인지 웬만하면 내부 관계자나 정부 당로자, 소수 관변 학자 아닌 이상 아무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국민'이란 외무부나 국정원을 먹여주는 '세금'을 내지만, 그 세금이 무엇으로 어떻게 쓰이고 그 효과는 어떤지는, 그 아무도 납세자들에게 보고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됩니다. 대외 관게에서 '난리'가 나거나, 미국 외교 문서가 30여년만에 비밀해제돼 일부 공개되거나 이런 경우입니다(대한민국의 외교문서는 그처럼 일정기간 지나서 자동적으로 공람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지난 번에 리비아와의 관계에서 '불'이 나 신성불가침의 한국 기업의 이해관계가 문제됐을 때에 한국 외교, 정보 관계자들이 사실상 이스라엘과 미국을 위해서 행동해왔다는 주장이 발표됐습니다.
계속 가난해지는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 백성이 내는 세금을 받아 먹는 리비아 주재 공무원들이 타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느라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험에 노출시켰다면 이는 배임행위에 가깝겠지만, 그 때는 제 기억으로는 그 누구도 납세자들에게 그 어떤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하지 않았죠. 양민들이 입역(入役)하고 세미(稅米)를 납부하면 그만이지 국정을 논할 자격은 어찌 있겠습니까? 좌우간, 그러한 난리가 나야 우리는 진실의 단편이라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아주, 아주 부분적으로요.
인터넷으로는 만가지 정보가 만인의 공유가 됐다고 하지만, 납세자와 외무의 괴리는 그렇다고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알짜의 의미 있는 정보는 인터넷에서 공개될 리는 만무하고, 인터넷에서 공개되는 정보를 다 모아봐야 대한민국 국제 관계의 실질적인 상태의 윤곽만을 아주 희미하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관변 매체 (www.vz.ruwww.expert.ru 등 류의 관계, 재계 매체라든가 극동연구소 학술지 등등)를 정독하고 외무 관련자들의 개인 블로그까지 읽어도, 이명박 정권의 장기성에 의문을 품고 근본적으로 이 정권을 불신하면서 '다음'을 기다린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지만, 역시 거기까지뿐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행여나 30~40년 후에 공개되거나, 아예 묻혀질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니까 외교란 교회나 사찰의 내부 생활만큼이나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돼 있는 것이죠. 교회나 사찰은 좋아하는 사람만 먹여살리지만, 외교 관련자들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먹여주어야 한다는 점만은 차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민주 국가'에서 산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대외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논할 것도 없고 그 정책에 대한 정보 접근권조차도 완전히 박탈 당하는 것입니다. 북한이나 중국을 '독재'라고 많이들 깔보지만, 사실 외무/외교에 대한 일반인의 정보력 내지 영향력은 대한민국이나 북, 중, 러 등 대륙 국가들이나 그다지 큰 차이는 없습니다. 미국이나 노르웨이라고 해서 실제로 또한 별로 차이 없을 것이고요. 노르웨이 외교 관련자들이 희대의 독재 국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석유 및 가스 개발 문제로 최근 접근했을 때에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여론에 관심이라도 기울였나요?
뭐, 노르웨이 외무부가 누구를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일반인들이 그리 잘 아는 것 같지도 않고 알 위치에도 있지는 않죠. 이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민주'라고 하지만, '민'이 '주인'이 된 적도 없고 될 일도 없습니다. 주인들이 실제로 뭘 어떻게 하는지도 알 자격도 없고요. 그 다음 번에 그 어떤 다음의 트로츠키가 혁명의 '외무 인민위원'이 되어서 여태까지의 모든 비밀조약들을 다 모조리 발표할 때까지요. 단, 그러한 일이 세계사에서 너무나 드물게 일어나는 것만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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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권리도 인권이다! (한겨레 훅,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0.09.12)
성장 제일주의의 유산이겠지만, 박정희에 비판적인 한국 정치인까지도 박정희만큼이나 외화로 표시되는 “우리들의 성장 통계”를 참 좋아한다. 1990년대에 “국민소득 1만달러”는 주류의 자랑거리였으며, 2000년대의 자유주의 정권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간다고 자화자찬했다. 현재 대통령이 “머지않아 3만달러, 4만달러 시대가 온다”는 것을 확약하는 걸 보니, 자유주의 온건 우파든 극우파든 외국돈으로 표시된 숫자에 대한 사랑은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 하거나 중소기업에 다니는 다수 한국인들의 주머니 사정에 그다지 큰 직접적 영향을 주지도 않는 소수 재벌들의 수출 성과에 좌우되는 외화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의 통계는 과연 한국 사회의 진일보를 제대로 반영하는가? 필자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사회 상식의 변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도 한국 사회가 지난 수십년 동안 커다란 긍정적 변화를 보였다는 것도 필자가 스스로 목도한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가 한국 사회를 최초로 체험한 19년 전에는, 절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동성애는 “변태”였으며, 군에서 살인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감옥에 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광신도”나 “또라이”에 불과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동성결혼이 가능해진 것도 아니고 무기를 들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대체 복무 제도가 신설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시민사회에서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상식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돼야 될 “의제”의 일부가 된 것이다. 즉, 국가는 구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사회의 상식이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을 성희롱하는 저질 교수들을, 그때나 지금이나 “상아탑”이어야 할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1993~1998년간 서울대 우 조교의 법정 투쟁 등 성희롱 관련 사건들을 경험한 오늘날 사회에서 성희롱이 범죄라는 상식이라도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 인권 상식이 발전돼 가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진정한 의미의 진보이자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 인권 상식은 충분한가? 전혀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인권이 부단히 유린된다는 것은 필자의 생각이다. 요즘 들어 학교 체벌과 같은 유형의 폭력은 그나마 비판적 시선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다수가 일상적으로 당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장 무서운 무형의 폭력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다. 이를 “우리 경제 사정으로서는 불가피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렇다면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폴란드나 헝가리, 멕시코에서마저도 노동자들이 연간 2316시간이나 일하는 한국 노동자보다 400~500시간이나 덜 일한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수진영에서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고 엄살을 떨지만, 국제 통계를 보면 한국 근로자의 소득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63%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이 다수를 점하는 한국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을 견디면서도 보수다운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보수진영에서 “강성 노조” 타령을 일삼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이 이렇게 당하면서 살게 된 이유는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잔업시간 단축을 요구할 만한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더 정확할 것이다. 저들이 하루마다 파김치가 되는 몸을 쉬게 할 시간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최악의 인권 침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일이다.
보수진영은 유독 북한을 공격할 때에 인권을 들먹이지만, 평일에 자녀와의 대화라도 나눌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에게는 인권이 있는가? 초(超)인간적 희생을 요구하는 장시간 노동이 바로 구타나 폭언만큼의 인권 유린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좀더 나은 사회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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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 절차 거쳐 살인하는 지옥 사회" (레디앙, 2010년 09월 04일 (토) 16:58:10 박노자 / 오슬로대)
북유럽 화제 영화 '아르마딜로'…덴마크 젊은이들의 '탈레반' 사냥
국내에서는 당연히(?) 별 관심 대상이 안되었겠지만, 여기 북구의 영화계에서 요즘 제일 화제작은 덴마크 기록영화 '아르마딜로'입니다.(http://www.armadillothemovie.com/armadillo/TRAILER.html)
평화적이다 싶은 북구 국가들이 일제히 아프간 침략의 현장에 동원돼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아프간 남부에 있는 덴마크 군대 기지의 이름을 본딴 <아르마딜로>는, 바로 이 아프간 침략을 문제화시킨 것이니까요.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해요. 그저 덴마크 침략군의 일상을 추적하는 것이죠.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고, 또 바보로 보이지 않는, 복지국가에서 좋은 걸 먹고 마시고 많이 놀고 예쁘게 큰 젊은이는, 동물 이하로 생각하는 '탈레반 놈'을 잘 사냥해서 사냥 당한 그 탈레반의 시신 옆에서 기분좋게 떠드는 것입니다. 그에게 탈레반은 인간도 동물도 아닙니다. 그저 이성적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목적에 적합한 행동, 즉 '저항세력 소탕'의 사물화된 대상물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731부대의 대원이나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보조원, 그리고 아프간에서 탈레반을 사냥하는 침략군의 일원이 되나요? 별 게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시이 시로 장군(731부대 부대장)의 부하들도, 루돌프 호스나 아르투르 리벤헨셀의 부하들도 특별히 '악마'로 큰 것이 아니었죠.
하이쿠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모차르트 음악을 즐기고, 이런 '정상적'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어느 순간 순량한 국민답게 어버이 같으신 천황님이나 히틀러 수령님의 명령을 받들고 조국과 인류의 공동선, 악에 대한 선의 승리, 그리고 본인들의 지속적 안락한 삶을 위해 본인들에게 '비인간'이라고 설명되어졌던 대상물들을 산 채로 칼로 자르거나 독가스로 질식사시키기 시작했었죠. 파리나 모기를 죽이듯이.
순량한 국민에게 "빨갱이는 파리 이하다", "유대인은 모기보다 더 해롭다"고 권위있게 설명하기만 하면, 그들이 그걸 믿고 아주 아주 이성적으로 '해충 박멸 작전'을 벌이죠. 인간이란 이성적인 동물이잖아요? 집단생활에 길들여지고, 그 집단생활 속에서 권위를 따르고 집단의 이성에 복종하는 데에 익숙해진, 그런 동물이잖아요?
아프간에 간 덴마크 군인들도 마찬가지죠. 어릴 때부터 컴퓨터게임하면서 '살인'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길들여지고, 우파 신문에서 "이슬람 광신도들이 세계 만악의 근원"이라는 걸 배우면서 '탈레반'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지고, 교수, 목사, 상사로부터 "탈레반을 살충하면 아프간이 우리 덴마크처럼 평화로운 민주사회가 될 것"이라는 권위있는 말을 들은, 그들은, 바로 '살충작전'에 나서죠.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즐기면서 사는 진정한 덴마크 식으로...
옛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잉여가치 착취의 과정'으로 설명했는데, 이 이야기는 진리의 반쪽일 뿐입니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잉여가치가 자본가에 의해서 수취되는 것도 맞지만, 컴퓨터게임부터 신문까지 사회의 이미지/정보유통 시스템에 노출돼 있는, 그리고 그 어떤 다른 사회도 상상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대개의 경우에는 자본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자본주의는 동시에 피착취자들의 순치과정이기도 하는 것이고, '정상적' 피착취자는 착취자의 세계관을 대체로 공유하고, 언제든지 착취자의 위치를 점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 출신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악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자가 되는 게 대한민국만의 사정인 줄 아세요?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고, 노동자 출신이 아니더라도 중산층 하류의 출신인 레이건 같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밀고 나가는 경우를 얼마든지 외국에서도 찾을 수 있죠. 특히 신흥자본주의 국가들의, 푸틴과 같은 보스들을 보면 하층 노동자 출신이라는 게 당장에 표시가 나죠. 쓰는 언어나 제스처 때문에.
그렇다고 그 정책은 노동계급에 유리하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본주의의 힘이라는 게 있다면, 이처럼 전 사회를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키고 각자의 마음에 그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는 게 바로 그 힘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 덴마크 젊은이가 아프간에 가서 '인간 사냥꾼'이 되는 게 '정상'일 뿐이죠.
그러면, 근대적 인간이 '정상적' 절차를 거쳐 살인을 기반으로 삼는 이 지옥적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이 되지 않는 방법이란 있나요? 진부한 답일 수는 있지만 집단적 대(對)사회적 투쟁, 즉 계급 투쟁과 관련된 경험이 아니라면 아주 어려울 수 있는 것입니다. 투쟁 과정에서는 이 사회의 실체를 확인하고, 인간적인 연대를 경험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서 개인적 희생을 감내해본, 그런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없이 국가와 자본을 위한 '사냥꾼'이 될 확률이 적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일시적 투쟁 참여도 '사냥꾼'으로서의 거듭나기(?)를 완전히 예방하지도 못해요. 1968년의 신화, 학생 혁명의 화신인 다니엘 콘벤디트가 유고 공습을 열성적으로 환영하고 아프간 침략을 주저없이 긍정하는 녹색당의 보수적 정치꾼이 된 걸 못보셨나요?(http://en.wikipedia.org/wiki/Daniel_Cohn-Bendit)
단순히 일시적 참여를 했을 뿐만 아니고, 이론적, 알음알이의 차원에서도 자본주의가 왜 아우슈비츠와 아프간 침략을 낳을 수밖에 없는지, 자본주의의 '정상적' 시민이 왜 잠재적으로 살인자일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 즉 사회과학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면 학생 시절 단지 한 때에 재미 삼아 운동해 본 사람에 비해 자본주의의 각종 유혹들을 경계할 만한 힘을 더 가질 걸요.
그리고 알음알이 차원뿐만 아니고 감성적 차원에서까지도 돈을 벌고 쓰는 영혼없는 생산/소비의 순환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시 '정상적 국민'의 원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큽니다. 투쟁 경험, 이론 습득, 감성적 반자본주의적 성향, 이 '삼위일체'라면 이 마왕의 예토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헐값에 팔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죠. 사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공상주의적 성장 소설이 구동구권에서 아주 유행했는데, 공산주의자의 인격 형성 과정, 공부 과정, 투쟁 과정을 그리는 이 소설을, 제가 최근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간으로 만든 사람들이 한 사회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지옥 탈출'이 가능할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소설의 주인공 코르차긴 정도의 집념과 오기,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諸惡莫作, 諸善奉行(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법구경 구절-편집자)의 삶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나락에서 결국 자기도 모르게 한 명의 야차나 아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원에서는, 20세기 마지막의 진정한 종교, 공산주의의 경험을 좀 긍정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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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종교성 & 최종적 낙관 (레디앙, 2010년 08월 06일 (금) 09:11:30 박노자 / 오슬로대)
[칼럼]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의 공통 소망 '목적의 왕국'
사회주의자들이 성서에서 이야기되는 '신'을 믿든 말든 일단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국가의 명령대로 사람 죽이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들처럼. 그러기에 1920년대부터 미국의 진보적 카톨릭이나 개신교도의 일부가 상당부분 사회당 운동과 겹치는 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1933년부터 Catholic Worker Movement 같은 사회주의적 색깔의 종교 운동 단체들도 생겼어요.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세계적 추세는 아주, 아주 뒤늦게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반적' 교회나 사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들을 마치 종교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있는데, 이게 아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국가가 "적군을 살해하라"하면 전장에서 그렇게 해서 나중에 훈장이나 받아 가슴에 달아야 되고,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어록 공부, 사가 제창, 집단 극기 훈련', 그리고 동료를 짓밟으면서 무한한 '충성 경쟁'하는 것을 명령해도 이것도 '사회적 도리'라며 그대로 해야 하는 것에요. 가족의 경우도 역시 남편이 부인에게 정조를 지키면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걸 바라고, 부인이 남편에게 크게 출세하여 '돈 벼락' 맞을 것을 바라는 것도 세속의 당연지사에요.
그런데 진정 하나님을 면전에서 보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국가, 사회, 회사, 가정 등등은 마몬의 미혹 내지 악마 파순(惡魔 波旬)의 시달림에 불과해요. 신을 볼 줄 알고, '나' 안에 내재돼 있는 불성을 감지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국가, 회사, 가정 따위의 사회적 창작물들은 방해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죠. 사유는 약간 다르지만, 사회주의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죠. 계급사회의 파생물로서의 국가, 기업, 가정의 생리를 체계적으로 알기에,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바칠 일은 없어요. 서로 사유는 조금 달라도 결론은 같아요.
그런데 사유는 정말 그렇게까지 다를까요? 종교인은 마몬 숭배가 만연한 '지상의 도시'가 파산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거나, 예토가 정화돼 탐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정토가 지상에서 건설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사회주의자는 물화된 노동으로서의 자본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지배와 복종, 탐욕과 타율적 규율, 경쟁과 적대심이 사라질 신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에요. 마르크스의 뛰어난 설명대로, 사람이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는, 그러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종교인도 사회주의자도 공히 염원해요.
지금 사회에서는 사람이란 도구일 뿐에요. 자본 축적의 도구, 국가적 살인의 도구, 인구 재생산의 도구 등일 뿐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에 불과하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대다수의 자칭 '신도'들이 이 지옥을 마치 '정상적 사회'로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의 수가 이 땅에서 아주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노동자들이 착취자들에 대한 충성을 거의 자발적으로 키우다시피 하고, 아이들이 서울대 가겠다고 앞을 다투어 스스로 공부의 지옥에 뛰어들어 서로 밟으려 하고, 다수의 학자들이 비판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채 순량한 '등재지 게재 논문' 생산자가 된, 대한민국이라는 이 세계의 모범적 지옥을 임하면서도 '목적의 왕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보로만 보일 걸요.
앞으로 이 사회가 수많은 치명적 위기를 통과할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오늘날 그 구조의 도착성과 부조리함이 다 노출될 것이고, 그 시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이상을 결국 대중적으로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믿어요. 다수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두들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말을, 언제 누가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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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금칙어가 되다 (레디앙, 2010년 07월 24일 (토) 11:56:22 박노자 / 오슬로대)
한국 지식인의 노예성 & 자본 '기둥서방' 된 중국공산당
이번 주 초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한 번 했습니다. 일본에서 학계의 주목을 두루 받은 학술서를 내고, 국내에서도 책 몇 권이 번역돼 나온 적이 있는, 꽤나 유명세를 타는 한 중국 인문학자 한 분을 모셔 강연을 들은 바 있었습니다.
제가 상당한 기대를 갖고 그 강연장에 갔는데, 역시 기대대로 아주 예리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중국의 학생이란 시험의 노예, 무엇에 부딪치든 정답만 찾는, 창조성이 없는 시험 기계다", "중국 학자는 기술자가 되어 논문 생산 노동에 동원돼 그 논문들의 품질이 내용도 아닌 게재지의 급으로 일률적으로 평가되는 등 대학은 영혼이 없는 논문 제조 업체로 전락된다", "중국 교수들의 관심사는 신분상승에 집중되며, 황금 만능주의가 팽배해 심지어 논문 심사 시에도 돈으로 심사자들을 매수해 게재 판정을 얻어내곤 한다".... 수많은 고발성 발언이 나오기에 제가 이와 같은 예리함에 용기를 얻어 강의가 끝난 뒤에 손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자본주의가 꼭 공간적으로만 확산되는 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삶에도 계속, 보다 깊이 파고들어 그 삶을 식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이미 관련 학계의 주지의 사실인데, 혹시 '학자의 기술자화'를 '학자의 무산계급화', 즉 비교적으로 독립적 신분의 계층이었던 학자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논리에 복속시키는 일로 봐야 하지 않는지, 그리고 대학의 '공장화'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논리에 따른 '학술 자본'의 형성 과정으로 볼 여지가 없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점에 대한 해답도 단순히 인문학적 논리에서 찾는 것보다는 반자본주의적 사회 개입의 논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시지 않으십니까?"
그 이야기가 통역되자 연사의 얼굴이 왠지 굳어져 종전의 외교적(?) 미소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자본화 과정과 상기한 학자의 창조성, 독립성 상실 과정의 연관 관계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적 전구화(세계화)가 본 강연의 취지가 아닌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자르듯이 답하시고 만 것이었습니다.
연사의 강연노트 텍스트를 나중에 쭉 읽어봤지만, 실제로 거기에서 '자본'과 '자본주의'는 언급된 바 없었습니다. 약 3시간 동안 중국 학계 자본화에 따른 각종 부작용과 그 대응 방법을 열심히 이야기하신 분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고도의 묘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1979년 이전의 중국에서는 '계급 투쟁' 등의 단어들이 아주 남용, 악용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제는 그 반대로 '자본'에 대한 비판은 그리 쉽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유일 집권당이 자본화의 주체이자 자본가들의 '기둥서방'이 된다면 정말 '자본'을 대놓고 논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중국의 문제야 남의 일이라고 치더라도 대한민국 지식인들에게도 최근에 보면 '자본/자본주의'라는 말이 요즘 점차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도저히 입에 올리기가 어려운 '금칙어'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마르크스주의자'로 찍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극소수의 '학계 공룡'들이나, 극소수 활동가들이야 <진보평론> 등에서 아직도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들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논하지만, 이 학술적 '게토' 밖으로 나오면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 문제 제기는 정말 '철의 노동자' 같은 과거의 민중 가요만큼이나 아주 드물게 들립니다.
MB 욕하거나 反한나라당 언설을 사용하면 문제도 없고 아주 흔한 일이지만 자연파괴적 '4대강 죽이기'가 건설경기 부양의 단기적 효과를 잘 내는 것임으로 단기적 이윤 제고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형적 발상이라는 말을 들어보기가 훨씬 더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은 서로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정교수 이하 교수의 경쟁적 재임용 심사를 제도화하는 등 고등교육 종사자들의 '철밥통'을 거의 없애고 'HK연구교수' 등등 여러 미명 하에서 맹목적 논문 생산에 옭매여 그 어떤 장기적, 주체적 연구나 대중화 프로젝트를 해내기가 매우 힘든 광범위한 'academic proletariat'(학계 무산계급)을 형성시켰다는 것을 "학교의 자본화와 대다수 학자의 노동자화"로 본 사람들을 제가 많이 못봤어요. 
주류 신문에 '칼럼질'하는 게 대개 아직도 귀족성이 남아 있어 '사회과학적 분석'보다 뜻이 다소 불분명한 에세이적 '아름다운 말'을 더 선호하는 정규직 교수들의 신분적 특권으로 돼 있어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인지도 모르죠. 
삼년 후에 실업자가 되지 않게 위해 '무방'하거나 위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주어진 형식의, 주어진 편 수의 논문을 생산해, 주어진 명단에 등재돼 있는 학술지에 무조건 기고해야 하는, 생산 계획 목표치에 미달하면 관리자에게 '찍혀' 고용예비군으로 밀려나는 학계 무산자에게 발언권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좀 더 험한 이야가 조금 더 많이 나올 법도 했을 터인데... 그런데 '선건(先建) 사상'의 위대한 가르침에 입각하여 선진화돼가는 세계 일류 국가인 스파클링 코리아는, 당연히 험한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시 일류의 고품격이란...
노예가 해방을 꿈이라도 꾸기 위해서 일단 먼저 자신의 노예성부터 깨닫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20년 동안 월급 전체를 저축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월급쟁이가 비정상적 부동산 가격이 단순히 '투기 세력'의 문제가 아닌, 토건 자본과 소수의 '부동산 부자', 그리고 그들의 최고 조절기관으로서의 국가의 문제라는 점부터 깨닫는다면, 적어도 다음 선거 때에 엉뚱한 데에 표를 던질 일이라도 생길 확률이 낮아지지 않습니까?
학자를 무조건적 논문 생산 기술공으로 만든 게 행정 오류도, 단순히 오도된 정책도 아니고 국가와 학교 자본의 주도면밀한, 일관성이 있는 정책이고, 앞으로는 최소한의 독립성이 보장된 인문학자 등이 이 나라에서 (자본과 국가의) 원칙상 공룡처럼 멸종돼야 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일단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곳 노예들이 대체로 자기 노예성을 부정하는 경향은 심하죠. 주인님이 마름이라도 시켜줄 것을 많이들 기대들 하시고요. 시켜주면 본인에게 축하를 드릴 일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노예 농장의 마름도 결국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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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김상봉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 (레디앙, 2010년 07월 28일 (수) 11:27:46 박노자 / 오슬로대)
금민 지원유세는 '구체적 정의'…사회주의자에게 던지는 한 표의 의미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정치 참여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인문학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철학이라는 학문은 너무나 보편화, 추상화되는 원칙들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보니 그 추상, 보편의 상공에서 특수성이라는 이름의 땅으로 뛰어내리다가는 다리 다칠 수도 있는 것이죠.
정의라는 게 무엇인가요? 여러 차원에서는 여러 가지 정의 (定義)들이 가능하지만, 사회적 정의란 결국 만인들에게 사회적 자원들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일 겝니다. 사회적 자원이란, 사회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육아, 교육, 의료, 환경, 취업기회와 같은 부문들인데, 이를 균등하게 나누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 셈이죠.
우연의 일치인 출신배경이 무엇이든간에 본인에게 필요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본인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실업자들이 없는 완전교용이 이루어지도록 국가가 적어도 노력이라도 하는, 그런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에 가깝죠. 그리고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들이 가난하거나 중상층 하부 부분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회 정의"는 결국 육아, 교육, 의료 등의 부문의 점차적 무상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죠. 그렇지 않고서는 "만인에게의 균등한 분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시대에는 "재분배적 정의"는 없었지만 ("구휼"이라는 최소한의 형태로는 있긴 있었죠), 국가는 민중의 생활에 개입하지도 않았던 것이죠. 심지어 세곡을 거둘 때도 동네에 들어가서 가가호호 거두지 않고 그냥 동네 전체의 몫을 동임을 통해 전달 받곤 했죠. 세금을 내고 부역을 다하고, 흉악범죄만 저지르지 않는 이상 다수의 백성은 대체로 국가를 그냥 몰라도 됐던 거죠.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들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서 늘 "동원"된 상태에 있습니다. 지배자들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시사적 내용을 "텔레비전 뉴스"라는 이름으로 맨날 듣고, 그리고 우리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아 팔고 이를 사줄 자본가가 없으면 결국 실의 상태에 빠지기도 하죠.
우리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서 촘촘히 조직된 사회에서 사는 것이고, 매일씩 자본가들의 잉여가치를 생산해내면서 국가의 통제를 받죠. 늘 동원되고 상품으로 거래되고 잉여수취에 이용되는 "조직 사회"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재분배적 정의라도 없다면, 이게 정상적 사회의 그림자도 안보이는 곳이죠. 이는 그냥 하나의 커다란 착취공장일 뿐이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이 지옥에다가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의 요소를 도입하는 현실적인 길이란 실제 두 가지입니다. 1987년과 같은 대투쟁이 있을 경우에는, 비록 착취자들의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 양보를 해서 일부의 복지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죠. 1988~89년에 비록 초보적 형태긴 하지만, 의료보험이 일단 전국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건 과연 우연입니까? 그런데 대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복지주의적 요소의 도입은 의회 안팎에서의 아주 오래되고 질긴 지구전의 결과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긴 싸움이 가능해지려면, 복지주의적 지향의 민중 정치인들이 일단 의회에 들어가서 복지확충의 구체적인 안이라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지주의자들의 국회 입성은 착취공장형 국가가 약간이라도 다수의 권익이 지켜지고 사회적 정의가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변모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 비록 정치 그 자체는 인문학자의 체질과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 복지주의적 진보 세력의 후보를 위해 지원유세하는 철학자는 진정한 철학자일 것입니다. "구체적 정의"라는 이름의 땅이 없다면 "보편", "추상"이라는 이름의 하늘도 결국 없기 때문이죠.
철학자가 지지한다고 해서 진보 세력의 후보가 이길 보장이 있느냐, 결국 그에게 표를 던져봐야 사표가 아닐 것이냐 물어볼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합니다. 지금의 "승리"가 문제가 아니고 복지 국가 쟁취를 위한 한 걸음으로서 사회주의자가 민초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게 미래 "승리"의 씨앗이죠.
내일이 아니고 모레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언젠가 이 착취공장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고 십장들의 폭력과 폭언을 없애고 작업의 강도를 낮추고 노동자끼리의 충성경쟁을 그만두고 자유시간에 음악이라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는 기나긴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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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의한 정치 & 망각을 위한 장치 (레디앙, 2010년 07월 17일 (토) 09:29:06 박노자)
[칼럼] "화학적 거세, 국가가 개인 신체 조절하는 전체주의"
여러 개인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자면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같이 희생시키거나(희생양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파생됩니다), 누군가를 상대로 다함께 '도덕적으로 올바른' 분노, 즉 '의분' 내지 '공분'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몇 사람끼리, 즉 '대면 공동체'(face-to-face community)라면 술이라도 같이 마셔서 한 번 같이 크게 떠들고 주정을 같이 부리면 되지만, '상상의 공동체', 즉 서로의 생물적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다수의 공동체는 어떤 매체를 매개로 하여 같이 '악한'을 상대로 해서 화를 버럭 내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집단'이 탄생되죠. 그리고 기존의 집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수준의 '의분'은 필수적입니다.
몇 가지 상징성이 강한 부문(대북 정책, 4대강 죽이기 사업 등등)을 제외하면, 과연 자유주의 정권에 비해 지금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 경찰 등 보안기관들이 아주 대담해진 부분 등은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한민국의 일상은 그냥 그대로 이어집니다. '나라를 살리는 국내의 가장 위대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백혈병으로 죽아가면서도 노조를 만들 헌법적 권리조차 행사 못하고, 산재사망률은 여전히 멕시코의 두 배, 미국의 다섯 배인 10만명 당 21명 정도고, 아버지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딸들은 여전히 몸을 사창가에 팔고...
정권이 '참여' 간판을 내걸든 '실용' 간판을 내걸든 민중들이 죽고 터지고, 팔리고 밟히는 대한민국의 일반적 일상은 그냥 계속 이어집니다. 책임을 따져본다면 이에 대해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대표해온 모든 주류 정치들은 다 책임이 있죠.
그럼에도 '노빠'나 '유빠'들은 유독 "맹박이 때문"이라는 걸 강조하는 모양을 보니 확실히 한 집단을 정서적으로 유지시키려면 공동의 적을 상대로 같이 화를 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극우주의자들의 김대중관(觀)이나 노무현관과 대동소이하니 그쪽이나 저쪽이나 크게 다를 일도 없다고 봐야죠. 니체가 다시 살아났다면 '노예 심리'라고 비웃었을 것이지만, 니체적 의미에서 '노예'가 아닌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서 그런 말을 해봐야 뭔 소용입니까?
그런데 호남 지벌과 영남 지벌, '친이, 친박, 친유' 등 세밀한 구분을 넘어서는 '공분'도 있습니다. 일본 등 적당한 외부적 대상을 상대로 하는 공분도 그 종류에 속하지만, 특히 '흉악범죄자', 예컨대 아동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든가 10대 흉악범(무서운 10대) 등을 대상으로 하는 분노는 그렇습니다. (언론들이 또 적당히 부추기는)그 분노는 하도 대단해서 아동성범죄자들을 "화학적으로 거세하겠다"는 법이 나와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잘 안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몹쓸짓을 한 어른이나, 급우를 고문해서 살해한 어린이 범죄자를, 제가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오랜 기간 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돼 교화돼야 할 사람이고, 흉악 범죄 재발 방지를 위해 사회가 조치를 취할 의무는 있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신체를 조절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게 아주 무서운, 전체주의적 세계는 아닐까요?
과거 미국이나 북구 등지에서 우생학적으로 '열등하다'고 판정된 유전병 소유자 등을 의무적으로 불임수술하고, 일제말기에 일본에서도 '단종법'을 만들어 개인 신체에 대한 과학적인 국가적 조절을 법제화해버렸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이게 '끔찍한 과거 기억'입니다.
과연 그 기억을 다시 되살려 국가가 개인의 행복추구권, 신체적 온전성 등을 모조리 빼앗아도 되는 쪽으로 나가야 하는가요? 범죄자가 아이의 인권을 짓밟았다면 사회가 그 범죄자의 인권을 짓밟아야 하나요? 그러면, 사회도 범죄자와 같은 수준이 돼야 한다는 것인가요?
성범죄 유발에 아주 복합적인 요인(유전적 요인부터 유아기 부모로부터의 학대까지)이 작용되고, '무서운 10대'들의 상당 부분은 가난하고 폭력적 가정 출신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폭력과 풋대접, 차별을 받아온 이 학력피라미드 사회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에는 사회도 일말의 책임은 있을 터인데, 이게 다 '공분' 속에서 묻혀버립니다. 그리고 '무서운 10대' 이야기 속에서 노동자들을 죽이는 작업환경을 만들어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무서운 재벌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집니다. 그게 처음부터 '공분, 의분' 정치의 목적은 아니었을까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은, 우리들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기에 우리를 지금처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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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사회주의는 어디로 갔을까? (레디앙, 2010년 07월 04일 (일) 10:58:48 박노자 / 오슬로대)
주류 지식인과 지배 헤게모니의 힘…"개조 대신 폐기된 체제"
어제 밤을, 제가 자랐던 부모님의 댁에서 보냈는데, 거기에는 지금도 페레스트로이카, 즉 1987~91년간의 잡지들이 듬뿍 쌓여 있습니다. 제가 고교에 다닐 때에 계속 애독했던 그 잡지들을 보면, 약 1990년까지는 주된 기조는 '사회주의 폐기'라기보다는 '사회주의 개조'였습니다. 필자마다 성향이 조금씩 달라 어떤 이들이 '레닌주의 원칙'을 다시 세우자 했고, 어떤 이들이 차라리 사민주의적 색깔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좋다고 하여, 일당 독재를 용인한 레닌을 힐책하고 사회주의적 다당제를 원했던 멘세비키 마르토프를 옹호했는데, 어쨌든 '사회주의'는 공통된 코드이었습니다.
잡지 필진 뿐만 아니고 제가 기억한 대로는 다수의 '일반' 노동자들은 약간의 민주성과 제한적 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을 통한 물자 부족 해소를 원했으면 원했지, 사회주의를 아주 버리자고 한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어요. 그리고 사회주의 자체를 의문시하는 사람도 병원에 갈 때에 돈내고 가는 사회를 실제로 상상조차 못했지요. 즉, '자본주의'를 이야기해도 그게 뭔지를 거의 실감 못했죠.
분수령은 1989~90년이었던 것 같아요. 동독을 위시한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 안에서의 각종 민족 독립 주장들의 고조에 힘입은 엘친 등 구 공산 관료계급의 상당 부분은, 아예 소련 해체, 사회주의 폐기, 급진적 자본화의 길을 택했어요.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이 선택은 '기정사실화' 돼버렸습니다. 놀라운 게 무엇입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대체로 - 레닌적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 '사회주의적' 사회를 지지한 듯한 다수는 새로운 주인들의 선택을 그냥 따랐습니다.
자본주의 도입의 초기 9~10년은 아예 지옥적 혼란기였고, 그 다음은 경제가 나아져도 소득 격차가 거의 남미 이상으로 벌어져 일부 계층(연금 생활자, 상당수 막노동자, 하급 공무원 노동자 등)은 고질적인 구조적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원칙적 반대'는 놀라울 만큼 약했어요.
일부 고령층 및 장년층, 특히 연금생활자와 대기업 노동자 등이 스탈린주의 시절에 대한 상당한 향수를 계속 간직해왔지만, 그게 꼭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스탈린이 달성한 '부국강병'과 그 당시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으로 나았던 처지에 대한 향수지, 혁명의 원칙이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등에 대한 향수는 절대 아닙니다. 예컨대 스탈린주의적 러시아연방 공산당의 지지자 중에서도 소련이 월남의 호지명 선생과 그의 항미독립, 통일운동에 부었던 원조에 대해 "공연한 퍼붓기"라고 욕하고 "이민족을 돕는 게 손해"라고 보는 사람들은 아두 많더라고요.
소련이 꼭 호지명이 좋아서만 지원한 것도 아니고, 북월의 승리로 얻을 수 있는 지정학적 이득을 보고 한 것임에도, 그럼에도 "이민족에의 퍼붓기"에 회의적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이죠. 그러면, 늦어도 1990년대까지 '일반인' 사이와 잡지들의 필자들에게 계속 영감이 됐던 '사회주의'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요?
마르크스가 발명한 진리들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진리 하나는, "시대마다 지배계급의 생각이 전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배계급이라고 하죠.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뒷받침하는 계층은 바로 '주류적 지식인'이라는, 저들의 지배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계층입니다. 예컨대 소련의 사례를 끝까지 보자면 소련의 몰락과 자본화가 거의 확실시되자 절대 다수의 지식인들은 갑자기 자유주의자 아니면 민족주의자, 아니면 자유주의형 민족주의자로 돌변했어요. 갑자기 텔레비전 화면부터 신문, 잡지 지면까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에 대한 예찬과 '신을 믿지 않았던 범죄적 공산주의자들이 감히 시해한 우리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천진무구한 공주님, 황자님'에 대한 장송곡으로 채워졌습니다.
지배계급은, 그들의 피해자들까지도 그들의 생각을 자발적으로 따르게끔 유도할 만한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저들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고, 저들의 헤게모니는 꼭 영원치도 않죠.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는 지배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비주류는 거의 주류만큼의 권위를 갖게 될 수 있죠. 러시아에서 변혁적 내지 혁명적 지식인들이 1917년 이전에 이미 언청난 권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초기에 성공한 (하지만 결국 보수화돼 자기부정하게 된) 혁명의 비결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지식인 계층 안에서의 혁명적 전통의 역량은, 거의 한 세기 동안 부단히 축적돼온 것이었죠. 한국의 변혁적 인텔리겐차는 이와 같은 아주 지루하고 긴 역사적 과정을 과연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요? 제정 러시아의 가시적 후진성과 대비되는 한국의 표면적 '선진성', 한국 자본의 세계적 및 지역적 위치 등을 생각하면 성공은 전혀 보장돼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어려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성공은 꼭 비판적 정신의 요람이 되기가 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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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이 세상을 사는가? (레디앙, 2010년 06월 27일 (일) 11:33:33 박노자 / 오슬로대)
고깃덩어리, 본능적 선택 '사회주의' & 비관주의자의 삶
불교를 일종의 염세적 성향으로 해석하는 건, 살려는 의욕을 잠재워야 하고 궁극적으로 인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불자의 모범'으로 보는 서양인의 편견인지 모르지만, 그 의사의 말은 자주 생각이 납니다. 사실, 저로서도 '산다'는 과정이라는 게 '낙'보다 '부담'으로 많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깃덩어리는 각종의 요구가 하도 많아서 그런 것이죠.
고깃덩이리를 먹여주기조차 어려운, 내지 그 무슨 인간 모습을 띤 나찰, 아수라들이 '나의' 고깃덩어리를 어디엔가 가두어놓고 죄를 덮어씌우는 딱한 상황이라면 '생존 투쟁'의 열기 속에서 삶이라는 업보의 괴로움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편한 상황에 놓인 고깃덩어리라면 그걸 끌고 산다는 게 그저 괴로울 뿐이죠.
이걸 뼈저리게 느낀 사르트르와 같은 다소 예민한 서방의 중생들은, 일찌감치 고깃덩어리를 끌고 산다는 걸 '선택',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질 용기'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좋은 선택 - 예컨대 파쇼들과 싸우겠다는 선택 -을 했다고 해서 "잘 했어" 하고 은총을 베풀 신도 없고, 꼭 그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불변의 도덕률도 없는데, 일단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에 일조한다는 건 공산당 지지자(동반자) 사르트르의 논리였죠.
지금 유럽에서 보이는 자본주의의 야만화 정도 - 그 좋은 실례는 영국 복지 국가의 거의 반쪽의 해체입니다 - 로 봐서는 저나 제 아이가 자연사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확신도 전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공황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야만화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돼 있는지 책에서 하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따져볼 때에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사회주의보다 야만이 선택될 확률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본과 국가가 부추기는 반이성, 비이성에 비해 개인의 이성도 아주 약하고 집단, 전체의 이성은 아예 보잘것도없습니다. 지금 4대강으로 생태가 망해가고 젊은 '백수'들이 취직자리가 전혀 안보여 절망에 빠지는 나라에서의 월드컵 열기를 한 번 보시고서, 이게 거짓이라고, 집단 이성이 정말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말씀해보시지요.
그러면, 망해가면서 언젠가 인류를 멸망시킬는지도 모를 정신병적 체제 하에서 이 고깃덩어리를 끌고 살면서 미륵보살의 하생도, 야소기독의 재림도, 후천개벽도, 심지어 무산계급 혁명의 필수적 성공도 믿지 않는 중생은, 왜 하필이면 진보정당 지지하고 정치색이 있는 글쓰고 난리칩니까?
제가 진보정당을 믿고 따르고 사회주의를 외치는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저는 낙관보다 비관에 더 기울입니다), 무산계급이 어떤 본질적 변혁을 할 수 있든 없든(지금의 체제 포섭 정도로 봐서는 매우 어려우리라 봅니다), 사회주의적 전망이 인류에 있든 없든(저는 꼭 있다고 자신과 남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냥 제 본능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인터넷에서(집에 바보상자가 없어서 세상을 접하는 루트가 인터넷뿐에요) 미제 군대가 아프간에서 또 몇 명의 마을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여 무인비행기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그냥 속이 뒤집어져요. 악마 파순(波旬)을 제 얼굴 앞에서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꼭 불교를 믿어서도 그런 게 아니고 믿지 않았다 해도 똑같았을 거에요. 저는 제국의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저 살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게 제 본능입니다. 이 폭력의 근원이 자본체제의 이윤추구라는 걸 아니까, 이 본능상으로 사회주의 할 수밖에 없어요. 고귀한 '선택'도 아니고 그저 본능대로 사는 것뿐이죠. 그래서 고깃덩어리라는 업보를 계속 지고 있는 한, 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계속 화두로 삼아 사는 겁니다.
그래도 고깃덩어리가 여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이상, 고깃덩어리에 붓고 있는 식음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라도 초보적 차원이라 해도 '치료행위'를 계속 시도하는 게 '교환논리'상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영원불변의 도덕론을 별로 믿지 않아요. '나'의 고깃덩어리로서 필요하고 또 다른 고깃덩어리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복수의 상대자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도, 배고픈 사람으로서 빵을 훔치는 것도, 아프간에서 미군 폭격으로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는 사람이 무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는 것도, 저는 꼭 '죄악'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상황적, 역사적 도덕논리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영원불변의 원칙이 있다면 그게 '호혜성'의 원칙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만큼 세상에 베풀라는 건 바로 이 원칙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옛날 스님네들이 이야기했던 '재시(法施)와 법시(財施)의 교환논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쩌면 법화경을 강독하는 것보다, 만델 선생의 <후기 자본주의> 강독은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차원에서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불교는 전쟁과 같은 현상들을 개인적 심성의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보충하여 집단의 차원에서 현대적 살육의 기원과 살육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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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대한민국, “저강도 민주주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0-06-20 오후 07:02:47)
몇년 전에 한 국내 진보 정치인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동행한 일이 있다. 노르웨이 정치인을 만난 자리에서 그가 받은 첫 질문은 “한국이 민주국가냐”였다. 국내 노조 탄압 소식이 노르웨이 좌파 정계에 잘 알려지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국내 정치인의 답은 대단히 현명했다: “한국은,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발전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왜 현명한 답이었는가? 진보 정치인이 국내외에서 합법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존재를 의미한다. 진보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긴 싸움을 한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지속적 “발전”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오늘날 한국을 명실상부한 “민주국가”라고 부르기에는, 민(民)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뚫어야 할 벽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민주의 기반은 정치참여다.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적 방법은 투표인데, 국내 투표연령은 세계 평균인 18세에 비해 한 살 높은 19세다. 오스트리아 같은 일부 선구적인 국가들은 투표연령을 아예 16세로 낮추어버렸지만, 국내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국내의 보수적 “주류”에게 10대 후반의 시민들은 아직도 훈육 대상인 “아이”지 정치의 주체는 아니다.
투표는 정치참여의 시작이지만, 본격적 정치참여는 대개 정당활동을 의미한다. 정당활동은 모든 시민들의 고유 권리이지만, 국내에서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은 이 권리를 박탈당했다.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는 변명일 뿐이다. 프랑스나 캐나다 등 정통 민주국가들도 공무원의 정치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업무수행에서는 공무원 개인의 정치적 의견 반영을 금지하지만, 공무원의 정당활동을 금지한 적은 없다. 공무원은 “공무원”이기 전에 남들과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등 “민주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일부 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공무원 정치활동 금지”를 시행하는 한국은, 공무원을 무력화시켜 기득권층의 수족으로 만들려 한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면 공무원들이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이 불허되는 진보정당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시행된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치판도 하나의 “시장”인데, 경제가 몇 개 안 되는 거대 재벌에 독점돼 있는 한국에서는 정계도 “재벌”급 강력한 극우, 온건보수 정당에 사실상 거의 독점돼 있는 상태다. 중소기업이 늘 재벌의 횡포에 노출돼 있듯이, 비정규직, 청년, 저소득층 등 소외계층들의 이해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은 언론으로부터 외면만 받고 온건 보수 정당으로부터 공직 선거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를 위해 후보사퇴 해달라”는 압력을 받곤 한다.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약자들을 위한 정당이 늘 스스로 약자로 전락하게 돼 있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과거의 망령이 산 자를 괴롭힌다고나 할까? 30년 전에 신군부가 제정하고 그동안 역대 온건 보수 정권들이 뜯어고치지 못한 공무원 정당 가입 금지 사항을, 지금 극우정권이 이용해 자신의 시민권을 살리겠다는 “죄”밖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교사·공무원들을 무더기로 파면시키는 곳은 “민주국가” 대한민국이다. 
1990년대 초반 학계에서 유행했던 말대로 이 “민주주의”는 일종의 “저(低)강도 민주주의”, 즉 실질적으로 기득권층을 위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포섭·동원시키는 외형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저강도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거듭나려면, 우선 장시간·고강도의 살인적 노동에 건강을 잃어가면서 살만한 집 한 채 얻지 못하는 소외대중의 목소리는 정계를 제대로 강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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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레디앙, 2010년 06월 12일 (토) 11:27:42 박노자 / 오슬로대)
진보 시대에 꽃피고, 신자유주의서 질식…'사회주의 정치' 필수
노르웨이 같으면 인문학의 위기란 크게 세 가지 뜻이죠. 하나는 인문학에 투자가 비교적으로 없단 이야기입니다. 노르웨이 학술진흥재단의 지원금의 3%만이 인문학에 투입되고, 저희 교내에서도 교수 증원이 이루어진다 해도 아주 어렵게 이루어지고 연구지원이 매우 취약한 편입니다.
또 하나는, 학생들의 취직은 비교적으로 잘 된다 해도 전공과 대개 무관하다는 점이죠. 전형적으로 철학 전공자이었던 학생이 노동복지공단(http://www.nav.no/English ) 사무원으로 취직하는 것인데, 결국 3년 동안(여기는 학사과정은 이제 3년으로 축소됐습니다) 칸트와 헤겔을 읽은 것은 일종의 '직장 생활 이전의 교양 쌓기' 정도 되는 것입니다. 교양으로 충전되고 그 다음에 다소 재미없는 공공부문 사무직으로 가도 나중에 틈틈이 철학이나 읽을 수 있다면 그게 인생의 낙이라는 건 이 쪽의 일종의 통념이 된 셈에요.
그리고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는 인문학 안에서는 '역학관계'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희 학교 같으면 노르웨이/스칸디나비아 역사 쪽에서 그 유명한(?) 바이킹 시대나 중세보다, 근대사도 아닌 현대사 경우 교원이 증원되고 각광을 받지만 전근대사는 '찬밥' 신세에서 벗어날 희망도 안보입니다.
대체로 '실용성'으로 이해(내지 오해)되는 ‘현재성'이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가운데에서 한 과목의 '기초'를 이루는 부분들이 뒷전으로 밀립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인문학 전체가 어려운 가운데 그 안에서는 '시의적' 내지 ‘현재적'이라는 판정을 받을 가망이 있는 일부가 자구지책으로 “고리타분한”, “실용성이 없는” 동료들을 주변화시키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을 독점하려는 겁니다. 크게 봐서는 '주류' 사회 시각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주변 분자'이지만, 그 중에서 일부는 '주변 중의 주류'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죠.
노르웨이에서 위기의 주된 특징이 '주변화'라면 보다 야만적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아예 '멸종 위기'가 다가오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국내에서 전혀 보도가 안돼 모르시는 분들이 많지만, 최근 영국 미들섹스대에서 철학과 폐과, 교수 전원 해고 계획이 문제가 돼 그 철학과를 살리자는 국제 연대 운동도 일어났습니다.(http://savemdxphil.com/ ) 그쪽 철학과는 학계에서 원래부터 하도 이름이 많이 났기에 결국 해고 당한 교수들이 런던의 킹스턴대에 옮길 수 있었지만, 학생, 동료들에게 최고 점수를 받아온 한 인문학 기관이 이렇게 쉽게 하루밤에 날라 갈 수 있다는 걸 보니 공포감을 느끼죠. 그 과는 하도 인기가 높아 통상적으로 적자가 아니었음에도 경영측이 “같은 돈으로 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과를 지원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철학을 죽여버렸대요. 즉, 존속시켜도 손해는 안보지만 없앰으로써 이득을 보자는 주의이었어요.
이게 요즘 영국에서 인문학이 당하는 '이지메'의 정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서섹스대, 켄트대, 킹스칼리즈 등에서 학생들이 용감히 막아서 철학과 등 '위험도 높은' 전공 교수들의 강제 해고들을 겨우겨우 모면할 수 있었지만, 광적인 긴축 분위기에서는 철학과, 문학과, 언어과, 문헌학 등의 교수들은 거의 그 앞날을 내다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기성 교수들 밑에서 '의자가 흔들리는' 상황이지만 신입자들의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죠. 노르웨이에서는 주변화 정도 당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무용지물' 취급 당하고, 늘 '멸절의 위기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는 정도입니다. 물론 옥스퍼드, 캠브리즈 등 '지체 높은' 학교들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씀에요.
이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결국 인문학의 사회적, 담론적 '존립 기반'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강단 인문학이란 소수 사회귀족들에게 최고급 '교양'을 공급해주고 그들의 문화자본 축적을 지원해주는 '귀족의 스승' 지위였습니다. 물론 소수의 인문학자는 급진파적 성향은 있었지만, 발터 벤야민처럼 대개 대학에서 임시직 이상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었어요. 강단 인문학의 핵심어 중 하나가 '귀족성'이었다면, 또 하나는 '민족' 내지 '국민'이었습니다. 역사, 언어, 문학 등의 '민족화' 내지 '국민화'는 별로 어렵지도 않았지만 철학처럼 보편성이 강한 학문이라 해도 대개 '본국 철학 전통 계승'식으로 해서 '민족적' 색채를 띠곤 했어요.
상황을 많이 바꾼 건 제2차대전 이후의 대학의 대대적 확장과 진보의 대세화이었습니다. 주로 중산층이나 중산층 이하 학생들의 새로운 스승들은, 마르쿠제나 알튀세 같은 진보적 인문, 사회학자이었습니다. '민족 문화'의 대의는 그대로 유효했지만, 동시에 인문학이 ‘소외를 극복하는'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작동되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 진보'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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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나만이라도 살아남자는 ‘생존’이 한국사회 키워드” (경향, 오슬로(노르웨이)|김종목 기자, 2010-05-14 23:28:45)
ㆍ노르웨이 오슬로대서 만난 ‘한국 전문가’ 박노자
-불교도 주된 관심 영역이신데요.
“개인적 목적을 불교적으로 보면, 번뇌에 덜 시달리고, 유쾌한 생활, 이타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거죠. 자본주의 사회는 불교적으로 보면 지옥입니다. 번뇌가 첨예화되고, 시달림이 악화되죠. 자기도 남도 해롭게 합니다. 불교에선 경쟁이란 있을 수 없어요. 불교는 남을 살리는 보살도가 기본이죠.”
-노르웨이에서 교수로 살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공무원 신분이어서 법적으로 위협받을 건 없어요. 연구도 자유롭고요. 학교가 간섭하지 않죠. 하지만 고립감 같은 건 느껴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에서 박사학위를 갖고 고용된 한국학 선생이 6명밖에 없어요. 현지인들은 한국학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일본학은 학생을 모집하면 150명가량 오는데, 지난번에 한국학은 2명밖에 안 왔어요.”
- 한국 지식사회와 많이 비교될 듯한데요.
“한국은 대학이 너무 기업화, 관료화된 것 같아요. 괜찮은 대학은 영어로 좋은 논문을 생산하는 기관이 된 거죠. 교수들한테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죠. 국내외 영어 잡지에 영어 논문 내랴, 연구비 따오랴, 교수는 논문 생산 노동자가 된 거죠. 자연과학이나 이공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인문학을 죽이는 방법밖에 안되어요. 학술 논문은 학자간의 소통 도구이지 대중과의 소통 도구는 아니거든요. 한국 교수들은 논문 생산 구조에 복속됐어요. 그것도 4대강 공사처럼 날림으로 써야 해요.”
- 인문학의 위기는 심화되는 듯합니다. 아울러 인문학자의 역할을 말씀해주신다면요.
“인문학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점차적 극복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이죠. 사회가 인도주의적으로 더 나은 길로 가게끔 필요한 담론을 제공하고, 부조리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사회를 치유하는 데 앞장 서는 의사들이 인문학자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화두는 기업화, 탈인간화, 인간상품화, 기계화, 인간의 원자화, 기업의 사회 지배 같은 것들인데, 인문학자 대다수는 자본주의적 맹목적 생산에서 소외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죠. 한국에서 철학이나 사회학 같은 보편적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한국을 떠나라는 권고를 하고 싶죠. 한국에도 좋은 거 있지만, 대학에 갇혀 있으면 해야 할 게 너무 많죠. 헤겔이나 칸트가 논문생산 노동자였다면 지금의 헤겔이나 칸트가 될 수 없죠. 학자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달려야지, 타인이 준 목표를 위해 달리면 안돼요.”
- 한국 대학생들은 취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학생들은 자기 상품화 압력을 받아요. 한국사회가 학생한테 요구하는 건 완벽한 상품, 명품인재가 되라는 겁니다. 모든 대학의 공개적 목표가 만능기계를 많이 만들어 높은 지위의 기업들한테 판다는 거죠. 만능기계가 되는 과정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과정입니다. 사람들한테 숨쉴 공간을 주지 않아요. 북한도 미국·중국·러시아 같은 거인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민생을 다 희생시키며 핵무기를 만드는데, 남한 자본은 미국·일본 자본을 따라잡기 위해 과도한 착취를 하면서 명품인재를 강요해요. 민족적 비극 같아요.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강대국같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다 보니 나온 비극이죠.”
- 20대의 보수화, 우편향 논쟁도 있었는데요.
“대학생 1000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니까,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유시민-박근혜-노회찬 순으로 뽑았어요. 온건보수, 극우, 진보 스펙트럼이 있는 거 같아요. 보수화됐다기보다는 명품인재 압력을 받으면서 정치를 생각하고, 정치의식을 개발할 여유가 없어졌죠. 어학연수 안 하면 인간도 아니죠.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다른 특별한 노력을 해야죠. 젊은 사람에게 여유를 안 줘요.”
- 4대강 사업은 어떻게 보십니까. 노르웨이도 비슷한 개발 이슈가 있는지요.
“최근 노르웨이 국내 문제 중 제일 큰 건 로포텐 제도의 유전 개발 문제예요. 노동당 같이 대형 노조에 기반을 둔 온건 좌파도 로포텐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죠. 보수주의자들은 찬반이 반반 정도고, 좌파와 급진파가 환경·관광자원 보전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죠. 그런데 토론·논쟁이 5~6년 되었어요. 아직도 결론 안났고요. 노동당이 집권 여당인데, 좌파(단체)를 무시하면서 개발을 밀어붙이지 못해요. 이 논쟁은 지속될 것 같아요. 유전개발이냐 환경보전과 어업 발전이냐를 두고 쉽게 판단 못해요. 그런데 한국에서 4대강 토론도 없었어요. 청계천 개발도 토론이 없었죠. 여기는 큰 공사의 토론 과정이 적어도 5~10년 걸려요. 낙동강을 왜 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일자리를 만든다고 하지만 90%가 비정규직이고, 상당수는 무리해 노동하고 안전사고도 나고 있잖아요. 4대강 사업을 안 하면 망하나요.”
-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같은 복지 이슈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 중에도 무상급식을 하겠다는 이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조금씩 진보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노후 불안을 느끼는데요. 한국인의 노후 대비는 절반 이상이 부동산이잖아요. 문제는 부동산 가격이 조금씩 내려가고, 버블을 너무 키워서 더이상 오를 거 같지도 않아요. 부동산으로는 노후 준비는 못할 거 같아요. 국민연금만 믿고 살 수도 없고요. 몇년 전 웰빙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는 돈 주고 몸에 좋은 걸 사는 소비주의적 웰빙이었는데, (지금의 복지 이슈는) 웰빙에 대한 심화 과정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 노르웨이에는 신자유주의 같은 문제는 없습니까.
“외국인 노동자가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고, 노르웨이 토박이보다 빈곤율, 실업률이 높죠. 극우정당이 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득표하려는 문제도 있고요. 하지만 신자유주의라 부를 만한 문제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복지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죠.”
- 노르웨이는 한국보다 부유한 나라고 산유국입니다. 같은 수준의 복지를 바로 하기는 힘들 듯한데요.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한국이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는 최근 경제가 망가져 가지만, 거기만 해도 원칙상 의료, 교육이 무상이에요. 포르투갈, 스페인도 그렇고요. 한국도 노르웨이 정도는 안 되어도, 이들 국가처럼 무상 의료, 무상 교육으로 점차적으로 갈 수 있어요. 문제는 예산인데, 지금 돈 펑펑 쓰는 데가 국방부예요. 한국의 무기 구입이 중국 인도 다음으로 3위예요. 미국 무기를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또 한국이예요. 무기 구입만 몇년 멈춰도 상당한 진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르웨이와 한국, 러시아를 특징하는 키워드를 꼽으신다면요.
“노르웨이의 키워드는 즐거움이에요. 나쁜 감정을 안 쌓고, 다들 즐겁게 살려고 해요. 사회 구조도 그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한국의 키워드는 하나밖에 없어요. 생존뿐예요. 나만이라도 살아남는 거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러시아도 결국 생존인 거 같아요.”
- 귀국할 계획은 없습니까.
“한국에서는 공정하게 채용하지도 않죠. 지난 3년간 제안도 없었고요. 제가 한국에서 시장적 가치가 없어요. 몇개 외국어를 하지만, 한국에서 잘 팔리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하지만 한국에서 원하는 게 삼성 휴대폰처럼 깔끔한 본토 발음이고요. 외국인 교수를 채용할 때 백인 우월주의가 심한데, 제가 수혜자가 될 마음도 없고, 그마저 미국인 우선이고요. 논문은 자율적으로는 써도 타율적으로 쓰기는 싫습니다. 지금 한국 학교 구조에서는 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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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주의자들, 유쾌한 연대 필요하다 (레디앙, 2010년 05월 02일 (일) 21:58:58 박노자 / 오슬로대)
사회주의자들이 고립되기 쉬운 이유…"이론-지도자보다 중요한 것"
영국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로 정상적인 산업이 쇠퇴하거니 국외로 이동하고 금융업이라는 기생성이 강한 부문만이 기형적으로 발전된 그 나라는 지금 세계 공황을 제일 아프게 맞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부문 총부채가 30%였는데, 계속 눈덩이처럼 늘어나 이제 60%나 된 것입니다.
예산 적자가 국가 증권(국채)의 신뢰도를 위협할 정도가 되니 세율을 높일 만한 정치력이 없는 보수당과 노동당 등 극우와 중간 우파 정당들이 다 하나같이 공공부문 지출 감소를 외치는데, 아주 최소한으로 잡아도 다음 3년간 공공부문 지출의 실제 감소의 폭은 약 11% 정도로 봐야 할 듯합니다.
내년 국가 고등교육 예산이 약 5%나 깎이니까 대학가에서 벌써 감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교수, 전임강사, 행정 직원들이 사랑하는 일터를 강제로 떠나야 할 것도 분명합니다.
초유의 자본주의 위기인데 놀라운 게 급진 좌파가 전혀 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에요. 특히 젊은이 중에서는 자본주의에 절망한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늘긴 하는데, 이 사람들은 '구좌파'라는 동네를 그렇게 잘 찾아가지 않아요. 물론 영국보다 탈산업화와 신자유주의화를 훨씬 덜한 독일에서나 프랑스에서는 급진좌파는 소폭의 세력 강화를 보이고 있는데, 역시 지금 위기의 규모에 비해서는 놀라울 만큼 느리고 소폭적인 상승세입니다.
또 그리스 같으면 요즘 '구좌파'를 중심으로 해서 거의 '혁명 준비 태세'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건 영-불-독과 확연히 다른 세상이죠. 준주변부 젊은 노동자들이 영-불-독의 젊은이에 비해서 잃을 게 없어요. 800유로 월급을 잃어봐야 뭐 아쉬울 게 있습니까? 뭐, 청년 실업률이 약 22%에서 30%까지 추산되는 그 나라에서는 800유로 짜리 일자리 얻는 것도 별따기인데 말입니다.
그러한 '절망의 땅'에서는 급진적 경향의 '구좌파'는 예상대로 잘 늘지만, 아직도 번영의 과실이 좀 남은 서구에서나, 수많은 비정규직의 희생과 대다수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 그리고 아직까지는 집값 폭락의 지연으로, 그나마 지금까지 본격적 위기를 면해온 한국에서는 급진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비교적으로 저조해요. 뭐, 한국과 같은 '초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별다른 급진성이 보이지도 않는 진보신당이나 민노당도 거의 '주류 진출'을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보수적 언론의 역할부터 소비사회의 '달콤한 족쇄'까지 온갖 사회적 원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자성, 즉 '자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의미에서는 급진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과 행동에서도 고립을 자초할 수 있는 일부의 원인들을 찾아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20세기 벽두에 형성된 활동의 형태, 방법, 표현 방식, 조직 문화를 갖고 21세기 벽두의 자본주의에 절망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좌파'의 고전적 형태들이 만들어진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유럽을 상기해보세요. 볼셰비키와 같은 전위당 하나 제대로 만들고,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다수를 잘 결합하고 세계대전과 같은 계기만 잘 타면 '제2 10월혁명'이 곧 다가올 것으로 봤어요. 그러한 풍토에서는 '당'은 모든 활동의 중심이 돼야 됐고, 당에 대한 높은 충성이 요구됨과 동시에 당에 대한 기대도 거의 절대적이었어요. '당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친구와 절연하는 것은 90년 전 급진파적 유럽인에게 거의 당연시되는 일이었죠. 그리고 전체적으로 권위주의적인 - 거기에다 전쟁 영향으로 많이 군사화된 - 그 당시 유럽 문화 풍토에서는 당에서 '지도자'(장군)와 '이론가'(참모본부)를 받드는 것도 당연시됐어요.
그런데 지금 과연 어떤 시대적 배경인가요? 서구는 물론 한국과 같은 '비교적으로 부유한 준주변부'만 해도 절대 빈곤은 50~60%에서 10~15%로 줄어들었고, 제3세계에 대한 침략들은 계속 지속돼도 주요 열강 사이의 경쟁은 아직도 열전 수준으로까지 비화되지 않고 있어요. 열전으로 가도 이스라엘-이란전과 같은 대리전으로 갈 확률이 높지 중-러와 미-일이 직접 붙을 가능성은 (최소한 아직까지) 좀 적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혁명의 본고장'에서 가장 보기 안 좋은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다 보이는 나라들이 되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수많은 새로운 '완충 장치'들을 개발해놓았어요.
이러한 세상에서는 전위당과 '무오류의 이론'을 내세우면서 천지개벽의 '그날'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유연한 '화이부동'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어요. '심판의 날'이 오든 말든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유쾌하게 뭉쳐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당'은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반자본주의적 급진 분자들이 사회 각분야에서 벌이고 있는 부문 운동들일 것입니다.
이 운동들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수유연구실'과 같은 비영리, 탈권위, 무형식 '배움터'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국방부와 같은 한국사회의 성역을 겨냥하는 운동일 수 있어요. 저도 한국에서 원고료를 받을 때에 세금을 떼이지만, 제 세금으로 그 필요성이 아주 의심될 때 많은 미국산 흉기가 무더기로 사재기 되어진다는 생각에 아주,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문제를 겨냥하는 운동이 아직까지 왜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것도 그렇고 학교와 가정 체벌 폐지 운동부터 대다수가 부당노동행위의 피해자가 되는 청년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지원 운동까지, 자본주의에 반대하려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궁극적으로 '탈자본주의'를 도모하는 그러한 운동들이 하나의 사회적 '문화'를 이루게 된다면, 한국에서도 프랑스나 독일처럼 정치적인 급진파가 어떤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없으면 그 정치에 생명이 부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섹트적 기질, '지도자' 중심주의나 '이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그날'을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만한 생기가 생기지도 않을 듯합니다. '이론'이란 결국 어떤 '위대한 지도자'의 완벽한 머리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다수의 투쟁과 그 투쟁에 대한 성찰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집단적 지혜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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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 앞의 혁명과 노동자정당 (레디앙, 2010년 04월 11일 (일) 00:59:42 박노자 / 오슬로대)
키르기스스탄 민중반란…동북아 최빈국 '북한' 주목해야
국내에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지난 주 중앙아시아에서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계속 권위화돼온 바키예브 정권이 일종의 민중반란에 의해서 유혈적으로 타도되고 사민당 등 야권 세력이 그 여세를 몰아 '과도기적 내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2005년의 또 하나의 민중 반란의 과정에서 집권한 바키예브 문중이 거의 전형적인 '도둑 정치'(cleptocracy) 모양으로, 해당 국가의 거의 모든 가용 자원들을 사유화하여 일종의 가산적인 '일가 집권하의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원 나누어먹기에 소외를 당한 북부지역의 관벌과 기업인, 유력한 범죄조직 보스 등이 야권으로 합류했으며, 야권과 바키예브 독재의 대립은 결국 민중반란을 통해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정권에 의해 사병화된 경찰들이 민중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던 관계로 사망자들이 65명에 이르렀답니다. (http://www.vz.ru/politics/2010/4/8/390961.html) 그런데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일념에 불타는 민중들이 죽을 각오로 대통령궁을 포위, 공격해 결국 값비싼 승리를 얻은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하고 차별받는 주변부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법이죠. 30년 전의 '광주'도 잘 나가는 신흥공업국 대한민국의 가장 살기 어렵고, 가장 소외를 많이 당해온 동네에서 일어났지만, 지금 유럽에서 저항의 선두를 달리는 희랍도 사실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연합의 가장 주변적 지대에 속합니다. 유럽이라고 하지만, 구매력기준(PPP)로 본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만9천 달러, 즉 정확하게 대한민국의 수준입니다. 키르기스스탄도 그렇죠. 타지키스탄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최빈국에 속하며, 1인당 국민소득은 인접국 카자흐스탄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됩니다.(구매력 기준, 액면대로라면 9배 정도 차이)
키르기스스탄의 국제적 위치를 정확하게 규정하자면 자원수출도 상품수출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주로 '사람 수출', 즉 이주 노동자 수출을 한다는 것이죠. 세계체제 안에서는 사람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주변부 국가들은 키르기스스탄 이외에도 필리핀, 몰도바 등 몇 군데 있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우에는 그 5백만 명의 총인구 중에서는 약 10% 정도는 이주노동자가 되어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에서 상상 이상의 착취를 당하는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아예 목숨을 걸고 미 제국 점령 하의 아프간에까지 가서 미 기지에서라도 일하는 지경이지요.(http://www.centrasia.ru/newsA.php?st=1199526420). 그런데 굳이 아프간까지 안 가도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자기 목숨을 버릴 확률은 높지요. 러시아에서만 해도 범죄조직들에 의해서 인신매매 대상이 돼 명실상부한 노예가 되는 키르기스스탄 출신은 1년에 약 1천 명 정도이지요. 노예로 잡히기도 하지만, 스킨헤드로부터 단순 살인부터 생화장까지 당한 사람들도 많게는 수백명이 되고요.(http://www.ferghana.ru/article.php?id=4047)
이러한 지옥을 타파하려고 민중들이 경찰의 조준사격을 무시하고 대통령궁을 향해 달려갔던 건 십분 이해되죠. 역시 혁명이란 사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절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궁지에 몰려 하는 게 혁명이죠. 사실, 이와 같은 차원에서는 우리 운동권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그래도 나름의 '중간적 착취자'가 이미 된 대한민국보다 차라리 키르기스스탄과 같은 모양으로 동북아의 최빈국이 된 북한을 주목할 필요가 좀 있어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그 쪽에서의 부정부패의 만연과 '밑으로부터의' 시장화는 언젠가 어떤 우발적인 민중 폭동을 충분히 촉발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단, 합법적 야권이 있을 수 없는 체제 특성상 이 폭동이 체제의 전면적 파멸로 이어지지 않는 한 결국 국지화돼 진압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의미있는 부분은,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수십만 명의 이산인구가 합법, 비합법적으로 보내진 북한도 이제 키르기스스탄을 닮아가면서 '사람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또 하나의 주변부 국가로서의 면모를 점차 띠는 것 같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 체제 붕괴' 등등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지만, "못살겠다"는 함성이 터져나오고 백성들이 몽둥이를 들고 죽기 살기로 권력에 덤벼드는 나라들은 대체로 오늘날의 북한과 유형적으로 흡사한 모습들이죠. 단, 북한에서는 대미, 대남 대립이 훨씬 더 강한 대민 규율화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 러시아 10월 혁명 등의 소수 예외를 제하면 - 늘 그렇듯이 조준사격을 무시하고 몸으로 때웠던 사람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죠. 지금 과도기적 내각의 수반 오툰바예바 여사 같으면 주미 대사를 역임하는 등 경력이 화려한 관벌 출신이고, 나머지 각료들도 거의 다 기득권층의 소수파 정도밖에 안돼요.
민중은 몸을 버리면서 공의와 최소한의 항산을 구하려 하지만, 권력 게임은 정당의 명망가 등이 하는 것이죠. 민중 정당이 없는 이상 그렇다는 것이죠. 물론 민중/노동자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1917년 이후의 러시아처럼 결국 독점적으로 집권하여 신흥 지배계급의 요람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근대화가 도약적으로 촉진되고 노동계급의 위치가 비교적으로 승격되는 등 긍정적 효과들도 발생되긴 하죠.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주로 건설된 당이 없다면, 내포적인 근대화라든가 노동계급의 보다 안정적 위치 획득, 복지 증강 등을 꿈꿀 것도 없어요. 결국 이 상태에서 대퉁령궁을 백번 공격하든, 수백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든, 다음날 아침부터 '사람 수출'을 위주로 하는 현실이 이어질 뿐입니다. '탈출구'는 없을 거에요.
제가 - 정치 자체를 개인적으로 꽤나 혐오하면서 - 진보신당의 당세 확장과 민노당 등 노동계급 본위의 제세력과의 전략적 연합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머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도 부동산 거품이 빠지는 등 꽤나 심각한 '동요'들이 예상되는데, 민중 정당이 이미 준비된 채 사태를 주도하지 않(못)으면 결국 영남지벌과 호남지벌 교체 이상의 효과는 없을 걸요. '쿨'하게 들리지 않는 단어지만, '노동자 정당'은 여전히 필요하단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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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유방임의 천국? (박노자 글방, 2010/03/27 04:19)
며칠전에, 러시아쪽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했다가 좀 의아하다 싶은 이야기를 본 일이 있었어요. 핀란드에 시집가서 가정을 이룬 한 러시아 여성의 아들 (7세)이 학교에서 "엄마가 나를 러시아로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친구에게 했다가 이 이야기가 아동보호기구에 알려져 아이는 강제로 가정으로부터 "분리"돼 아동보호원에 맡겨졌다는 이야기이었습니다 (http://www.mk.ru/social/article/2010/02/19/434226-rebenka-arestovali-za-frazu-o-rossii.html). 핀란드의 인권단체에서 인권침해라고 반대를 하고 법정대응을 했지만, 아동보호기관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쾌했습니다. 이 아동은 비록 이중국적자지만 지금 핀란드에서 영주중이니 보호대상이다, - 러시아와 같은 위험지역에 가게 될 경우에는 보호는 불가능하고 위험에 노출된다, - 이와 같은 모험을 계획하는 부모응 친권을 계속 향유할 근거가 없으니 이제 그들로부터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 - 이러한 논리이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상당한 "오버"라고 보여지지만, 사실 이와 같은 아동보호기구의 "적극적 개입의 자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공통점입니다. 예컨대 노르웨이에서는 비서구 계통의 이민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란, 노르웨이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약간이라도 체벌한다는 것입니다 ("토박이" 노르웨이 가정에서는 체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곧 아동보호기관에 신고가 들어가 두세번 정도 걸리면 일단 아이와 작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아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부모라기보다는 사회 전체가 진다는 관념이 아주 강하기에 이쪽 사람들 보기에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뭐, 옛 소련만 해도 부모들이 남들 앞에서 아이 학대했다가 친권 박탈 당하는 건 꽤나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저로서는 별로 새롭진 않습니다. 
아동 교육도 그렇지만, 사실 여기에서는 (사회의 대변자로서의)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일은 이외에도 한 두 가지는 아닙니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그 해결을 - 너무나 당연하게도 - 국가에 촉구하죠. 예컨대 며칠전에 몇 명의 유대계 아동에 대해서 학교에서 이슬람계 아동들이 인종적 모욕을 가하고 때리는 등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몇 번 보였다는 사실이 적발돼 아예 전국적 난리가 났습니다 (http://www.dagsavisen.no/innenriks/article476243.ece). 교육부 장관이 유대인 공동체 대변자와의 긴급 회동을 가져 그 대응책을 논하고, 홀로코스트교육 강화방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며칠간 신문에서 거의 이 일에 대한 기사들이 줄줄 나갔습니다. 교육이야 그렇다 치고, 오슬로에서 최근 몇년 간 자가용 대수가 늘어났다는 통계가 발표되자 국가의 종합적 대중교통 대책이 미흡하다고 커다란 정치적 문제로 점화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몇년 전에 이민자 계통의 가정 중에서는 약 20%의 가정에서 아동들이 상대적 가난에 시달린다 ("토박이" 노르웨이인 가정 중의 빈민은 5%도 안되는데...)는 보고서 (http://www.reddbarna.no/default.asp?V_ITEM_ID=13311)가 발표되자 역시 정치적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민자들의 빈곤율이 이리 높고 아이들까지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 결국 빈곤을 "대물림" 받을 확률이 높은데, "좌파 정부"라는 사람들이 뭘 하면서 사냐는 아우성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국가의 전반적 개입의 자세를 일부 극우들이 "formynderstat" ("훈육자로서의 국가")이라고 비웃지만, 대다수 노르웨이인들에게 "사회적 성격의 문제라면 공론화해 지자체 내지 국가의 개입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아주 작은 문제라 해도 국가는 책임져야 한다"는 건 거의 "상식"에 가깝습니다. 소련은 노르웨이보다 훨씬 덜 민주적이고 덜 부유한 사회이었지만,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살았던 것까지는 큰 차이는 없었어요. 
이렇게 여기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정말 다른 세상 같지요. 물론 "감히" 대드는 서민이나 노동자들을 때려주고 잡아주어야 할 때에는, 국가 대표자들이 무기를 들고 몇분만에 그 현장에 나타나지만, 이러한 "부자들의 해결사" 역할이나 각종 "좌파 때려잡기" (최근 명진스님의 건을 보면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외에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안보/북한과 건설경기 부양, 재벌들의 감세와 해외판촉, 그리고 국제자본과의 각종 "소통" 정도일 것입니다. 이외에는 물론 아주 기본적인 민심 수습 정도 해주지요. 뭐, 등록금 인하 요구를 죽여주기 위해 등록금 후불제를 도입해 대학기업들의 장사를 돕는 정도라든가요. 물론 최근 20년간 생활보호대상자에게의 약간의 생활보조금 지급, 아주 기초적 의료보험 등 일부 "대민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그것만 믿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는 없을 것입니다. 국가의 복지서비스만 믿게 된다면 이개 대한민국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파키스탄 이민자의 자녀가 학교에서 인종적 모욕을 당하고 맞았다고 해서 우리 교육부 장관이 대책회의를 열았다는 걸 상상해보면, 아무래도 SF 소설로만 느껴지지요. 그리고 차 대수가 늘어났다는 건, 재벌언론도 재벌 정부도 꼭 "환경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자동차의 판매 실적" 차원에서 볼 확률이 큽니다. 우리 국가란, 우리의 상전네와 그 장사를 보호해주고, 우리에게야 아주 완벽한 자유를 부여합니다. 맞고 살 자유부터 백수가 돼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남대문에 불이나 지필 자유까지입니다. 자유주의의 천국인 셈이지요? 
지금 우리 좌파, 사회주의자 앞에서는 엄청난 과제가 놓여져 있지요. 약탈자와 착취자를 보호해온 국가를 "길들여" 복지사무소 역할이나 좀 제대로 할 "인간의 얼굴을 가진 국가"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형식적 민주화보다 몇 배 어려운 과제지요. 그런데 지금의 재벌 국가가 몇년 사이에 불가피한 경제적 파국에 이르게 되면 바로 이와 같은 거시적 비전으로 좌파가 정치무대에서 일종의 "주류화"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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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석학, 고가 구매? (레디앙, 2010년 03월 08일 (월) 08:54:46 박노자 / 오슬로대)
대한민국 주요 대학 '권위 구매 프로젝트' 문제점
기내에서 "공짜"로 주는데다 제 서가 속의 원자료도 없고 시간이 좀 남기에 대개 <조선>, <중앙> 등을 정독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늘 놀라운 발견들은 잇따릅니다. 예컨대 이 번에, 약 2주전에 국내에 갔을 때에 포항공대 (요즘 이름은 포스텍인가 그렇답니다. 영어 공용화한다고 해서 이렇게 과감하게 내지어로 개명했습니다...)의 새로은 희소식을 <조선>에선가 접하게 됐습니다. 노벨상 등 주요 상들을 받은 "해외 석학" 10명을 초빙하는데 500억을 쾌척하여 유관업계에서 화제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500억이 아이들의 등록금을 더 인상시켜서 얻을 것인지 중앙정부의 또 무슨 "세계화" 프로젝트 일환으로 납세자의 주머니에 가져가 "석학" 분들께 공손히 바칠 계획인지 그 기사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뭐, 그것까지 밝혀주지 않아도 계획의 윤곽은 좀 보입니다. 500억에 사올 "석학"들의 "권위"에 힘을 얻어 "세계 50위 대학 진입"을 하는 등 대학가의 삼성이나 LG가 되어보자는 것인 셈입니다. 그 "50위 최고대학", "100위 최고 대학" 등 랭킹을 정하는 고약한 양놈들이 우리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고 있기에 일단 비싼 돈에 가장 권위 많은 그 중의 몇 마리를 사와 그 난공불락의 "세계적 권위"의 성곽을 함락시키자, 이런 계획인 셈. 참, 제강량과 원나라 태조 성길사한이 따로 없습니다.
"권위 구매" 프로젝트는, 꼭 이공계 내지 자연과학에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의 해외 한국학 지원 기관들이 "해외석학"이 (그 본래 전공이 중국학이든 일본학이든) 한국학 프로젝트를 해줄 경우에 커다란 연구비를 지급하겠다고 유혹하고 있으며, 서울대 국사, 국문/국어 계열부터 비롯하여 "외국인" (물론 이 경우에는 "외국"과 "영미권"은 동의어입니다) 교수 모시기에 역시 바쁜 것입니다. 몇 군데의 주요 대학은 인문학 분야 등까지 포함하여 본 학교의 교수와 "협력 연구"를 해줄 "해외 석학"에게 또 커다른 장려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한 마디로, 요즘에 들어 "권위"를 매개로 하는 국제거래들이 대한민국에서는 대단히 활발하게 이울어지는 셈입니다. 옛날에는 단순한 "노벨상 대망론", 또는 "노벨상 따기 ...년 계획" 정도의, 다소 단순하고 일차원적 프로젝트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돼갑니다.
사실, 우리의 신성한 권위를 저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건 꼭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이 세계는 국민 국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국민국가 내지 국민국가의 조합 (유럽 연합 등)마다 자기 나름의 독특한 권위 체계가 다 잡혀 있는 실정입니다. 패권 국가의 조합, 즉 영미권의 권위는 - 극우의 헌팅턴부터 극좌의 캘리니코스까지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 일단 나머지 국가의 교양인 사이에 적어도 "인식"돼 있지만, 나머지 국민국가 사이의 상호적 권위 체계 인식은 다소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의 권위 체제에 전통적 지적 패권의 무게가 실려 있을수록, 그리고 문제의 국가들이 서로간에 문화적으로 가까울 수록 권위 체제에 대한 이웃에서의 인식은 강할 수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일반적 경우에는 국내적 명성은 국외에서 다소의 할인을 받아 거래됩니다. 예컨대 전통적 지적 패권을 쥐고 있는 독일의 하버마스는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교양인 사이에 "역시 그 하버마스"지만, 독일에서는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과연 누구입니까? 일본에서는 (일정 수준까지 한국이나 대만에서도) "사상의 왕"인 그는, 독일에서는 "영문으로 저서 두 개를 낸" 일개 지식인으로 거래될 것이니 그 "할인"의 폭은 알 만합니다. 동아시아학이나 파시즘 연구 분야에서는 알만 한 사람들이 알겠지만, 일반 독일 교양인들이 마루야마를 알 리가 없다는 것인데, 독일 바깥에서의 하버마스의 위치와 대조됩니다. 마루야마뿐만입니까? 왕휘 선생의 경우나 백낙청 선생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분이지요. 대신에 백낙청에 대한 일본 교양인 일부의 인식, 내지 왕휘에 대한 한국 교양인 일부의 인식 등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패권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경우에는, 지식인의 명성은 대체로 이웃나라끼리 가장 잘 거래된다는 법. 지식인들이 맞딱드리는 상황들이 서로 일정수준까지 비슷하니 서로에 대한 관심이 일단 높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진화"의 과업을 이끌겠다는 우리들의 위대하신 국가적 CEO님께서 한-중-일 지식인들의 자연스러운 "서로 알기"에 전혀 만족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삼성 휴대폰들이 미국 시장까지 "막 치고 들어가는" 것처럼 한국 대학과 대학 교수의 "권위"도 이제 패권국가의 지식 시장을 쥐고 흔들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위대하신 지도자의 3년(남은 임기)지계. "빨리빨리"해야 되고 시간이 없고 돈은 (아직까지) 많으니까 일단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돈을 갖고 치고 올라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범적인 기업국가 건설을 향하여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는 "스파클링 코리아"의 국가 브랜딩 (branding)에 약간이라도 도움 줄 양놈마다 아낌없이 퍼줄 터이니 올 사람이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글쎄, 응용과학 분야의 경우에는 "파격적 투자"가 어쩌면 (제대로 관라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명의 "석학"만을 집중적으로 양성하다가는 제2, 제3의 황우석이 생길 가능성도 높지만, 비싼 설비가 필요한 이공계/응용과학에 한해서 금전적 투자의 효과는 분명하긴 합니다. 그런데 문학이나 인문학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을 경영하고 있는 건설사 출신 분들이 조금 잘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게 대체로 세 가지 정도입니다:
1) "파격적 연구비"를 보고 스파클링 코리아의 품에 안기려는 사람은 - 그가 비록 하버드에 속한다 해도 - 꼭 좋은 인문학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월러스타인들에게는 돈보다 말이 잘 통하고 같이 연구하기가 좋은 "동료"들이 더 중요한데, 영문 학술지 논문 편수로 학자의 질을 재는 국내 대학에서는 "깊은" 학자가 구조적으로 버티기가 힘듭니다.
2) 인문학이나 문학 등에서는 "빨리빨리"는 절대 통하지도 않습니다. 일본 문학의 세계화는 최초 영문 "일본 문학 통사" 출판과 함께 이미 명치 시대 말기에 시작됐기에 오늘날 (일본적 맥락을 거의 떠나버린, 후기 자본주의의 모범적 작가라고 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세계적 "권위의 사다리"에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해외 한국학의 경우에는 아직은 기초적 작업 (예컨대 제대로 된 영문 '한국근현대 문학통사')마저도 해놓지 않은 상태니까 몇년간의 "역량 축적 시기"는 어차피 필요할 것입니다.
3) 지역주의라는 것은 미국 패권이 쇠약해지는 탈냉전 시기의 특징이기도 하니 아무리 하얀 낯짝들을 사오는 데에 납세자들의 혈세를 많이 바쳐도 함석한이나 김우창을 가장 제대로 이해할 곳은 당분간 일본이나 중국일 것입니다. 그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동아시아적 지식인들의 상호 연대를 위한 기본적 조건부터 만들어주는 것은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슨 말을 해도 피와도 같은 아이들의 동록금은 아마도 계속해서 "석학 모시기"에 이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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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와 타이타닉 침몰 (레디앙, 2010년 02월 07일 (일) 10:50:52 박노자 / 오슬로대)
"한국 주류들, 국제표준 앞세워 기득권 재생산 합리화"
글로벌 스탠더드 말고는, 이 사회의 주인들이 그 기득권을 확대, 공고화, 재생산하는 과정을 더 잘 합리화할 표현도 없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엘리트들이 주어진 대외적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이름나기도 하고, 외부적 모델들을 이용하여 국내적 조건에 맞는 그 '국내판'을 만들어서 외부적 원칙과 토착적 유산이 잘 결합되는 시스템들을 만드는 걸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박정희식 개발 모델도 1950~60년대에 세계적으로 유행한 국가 주도의 개발(관치 금융,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 주도 등)과 당대 일본식 외향적인 수출 주도형 성장, 그리고 국내적 요소(일제말기식 병영국가 체제, 군벌과 재벌의 '지배 블록' 등)의 매우 재미있는 복합물이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의 국내화에 성공한 엘리트들이 꽤나 지구성이 강한 지배체제를 만드는 데에 능숙하다, 이 정도면 중립적 평가가 될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고 놀다가는 학교 종이 땡땡땡 하는 소리를 못들을 때가 있습니다. 즉, 글로벌 스탠더드 그 자체가 갑자기 낡아빠진 시대착오적 것이 돼버린다면, 거기에다 명운을 건 한반도 주인네들이 약간 불편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일제 말기 대일본제국 판도 안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인 천황폐하 만세, 황군무운장구 기원, 귀축영미 박멸, 정신 총동원 등을 갖다가 신나게 병정놀이하고 상것들을 총알받이 만들기에 정신이 다 나간 한반도의 '엘리트'들은, 과연 1945년 8월 15일에 어떤 감상을 했을까요? 공든 탑이 무너지고, 본인들이 졸지에 제일 순량한 황국신민에서 '친일파'로 전락돼 만인의 노골적 증오의 대상이 됐죠. 반대로, 도조 히데키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고하게 거부해 감옥과 벽돌공장을 오가고 있었던 박헌영이나 은둔생활과 물밑 '건국' 조직 작업을 택한 여운형 등은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지요.
지금 주인님들이 '글로벌'로 상정하는 나라들, 즉 미국과 일본이 겪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저들의 스탠더드를 계속 신주단지로 모시고 만동묘 제사 지내 듯하는 것은 1945년 5월에 녹기연맹 시국 강연을 댕기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오판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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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상식-양심 문제로 단순화해야" (레디앙, 2010년 01월 31일 (일) 23:42:46 박노자 / 오슬로대)
레닌과 카우츠키를 넘어서…'거리 정치' 통해 정치 영역 확장을
일부 카우츠키의 말이 아예 예언처럼 들려서 그런 것인가요? 예컨대 "계급독재를 빙자한 당 독재는 결국 폭력 기구들의 독재, 그리고 일인 독재로 변질되게 돼 있다"는 카우츠키의 말을 레닌이 호되게 반박했지만, 레닌의 서거 이후의 러시아의 역사를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적중했는지 알 것입니다. 폭력자 자신들을 변질시킬 폭력이라는 수단의 위험성에 대해 예고하고 있었던 카우츠키의 이야기를, 대형 폭력을 하도 많이 겪어온 20세기 후반의 소련에서는 어디까지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여간, 이 책을 읽은 뒤로는 제가 레닌보다 어쩌면 '부드러운 사회주의자' 카우츠키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됐는데, 소련이 곧 무너져 새로운 세대에게는 레닌도 카우츠키도 조롱거리이자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1990년대에는 당대의 세계적인 특징인, 우파들이 벌이는 '승리자들의 향연'과 (강온의 차이 없이)사회주의를 위시한 모든 '거대 담론'에 대한 공격이 개시됐습니다. 돈벌이와 소비의 담론을 제외하고요. 물론 벌이와 소비는 '담론'이라기보다는 이미 다수의 고질적 중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기 하는 지금 저는 과거와 달리 차라리 레닌의 입장에 더 많은 공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카우츠키의 '민주적 절차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한 변론에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결국 유산계급독재에 대한 가식이며 노동자들을 속이는 기만 전술"이라면서 '민주적' 열강들이 벌이는 식민지 반란의 유혈 진압 등을 예로 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좌파가 나름의 정치력을 가진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가식'이라기보다는 적어도 좌파적 의제 알리기의 도구이자, 좌파의 위력화, 대중화의 도구가 될 수 있긴 하지만, "민주 열강들도 식민지 노예들의 피를 그 손에 마구 묻힌다"는 레닌의 말도 어쩌면 정확한 예언이라 할 수도 있지요.
카우츠키의 정치 무대였던 '민주국' 독일이 아프간에 보낸 군대가, 또 하나의 '민주 열강'인 미국의 폭격기에 탈레반이 도취했다는 연료 적재 차량의 폭격을 주문했다가 결국 100여명의 아프간의 어린이와 여인 등 민간인들을 참살케 한 최근의 사건을 보시기를. 독일이 '민주국'이라고 해서 독일 장교가 주문한 폭탄을 맞게 된 아프간 어린이가 덜 아프게 죽게 되는 것인가요? 거기에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아프간 파병을 적극 추진한 독일의 주요 정치 세력 중의 하나는 바로 카우츠키가 몸을 담았던 사민당이라는 것입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잔혹성'을 (상당 부분 사실적 근거 있게) 비난한 이들의 후예들이 이제 아프간 아이들의 피를 손에 묻히는 걸 보니 어떤 슬픈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참, 유일하게 아프간 파병을 반대해온 좌파당은 카우츠키보다 차라리 레닌의 후예라고 봐야 할 터인데, 그것까지 생각한다면 거의 100년 전의 카우츠키와 레닌의 격한 논쟁을 단순하게 '민주주의자 카우츠키 대 독재자 레닌'이라고 처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럽 중심주의적인, 너무나 유럽 중심주의적인 '민주주의자' 카우츠키와 달리 '독재자' 레닌은 식민지 노예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점, 레닌의 혁명론이야말로 식민지 노예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강했던 점 등도 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하여간, 카우츠키와 레닌, 즉 사민주의와 혁명적 공산주의 두 원조를 생각하면, 둘 다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패배자가 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카우츠키가 그토록 좋아했던 '민주적 절차'대로 히틀러가 집권하여 카우츠키가 노년을 보냈던 오스트리아를 합병시키자 카우츠키가 거의 죽기 직전에 고통스러운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고, 레닌이 그토록 믿었던 '혁명적 전위정당'은 결국 보수적 관료단체가 돼, 끝에 가서 아예 자기 파괴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자본주의의 복귀로 진행한 것입니다.
카우츠키가 그토록 헌신했던 독일 사민당이 사실상 '수정신자유주의' 길로 가버렸으며, 소련 공산당을 계승했다는 러시아연방공산당은 스탈린주의와 종교적 민족주의의 범벅이가 돼 보기 역겨운 꼴만 계속 보여줍니다. 고전적 의미의 카우츠키 노선도 레닌의 노선도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폭풍을 견디지 못한 것인 셈이죠.
단, 레닌의 후예라고 할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그나마 신식민지 침략전쟁이나 복지국가 체제 해체에 대한 반대를 훨씬 더 강력하고 원칙주의적으로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 카우츠키의 후예들과 달리 - 권력과 관계가 멀어서 그런 부분도 있죠.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일단 집권에 성공한 이상 '혁명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인간적 윤리라도 그대로 간직하기가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 카우츠키도 레닌도 궁극적인 이상으로 공통적으로 삼았던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적 사회주의', 각자가 제 일터의 주인이 되어서 신나게,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어내면서 일할 수 있는 '즐겁고 평등한 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자면, 카우츠키나 레닌에 대한 집단적 기억들이 이제 가물가물하게 된 이 무서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여기에서 한 가지 간단하게 지적하자면 진보정당의 전통적인 '정치 투쟁'(비혁명적 상황에서는 당연히 선거 형태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정당'의 의미 자체가 점차 쇠퇴해가는 관료/자본 주도의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구체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의 '연합'들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국회에 10명의 민중 의원들을 보내든, 극적으로 30~40명을 보내는 데에 성공하든,(이거는 거의 '기적' 이야기죠) 어차피 신자유주의의 질주를 막기가 역부족일 수는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주요 병폐들을 여타의 사회세력들과 연대해서 막을 수 있다면 이건 벌써 모두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승리'일 것입니다.
문제별 연합이라면, 예를 들어서 '파병 저지를 위한 연합', '일체 체벌의 무조건적 철폐를 위한 연합', '대학 평준화를 위한 연합'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보정당이 한국 군인들이 아프간인들의 피를 손에 묻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모든 상식인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단결시켜 파병과 같은 망국적 망동을 정말 정지시킬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국치를 면하게 하는 대경사일 것입니다. '거리의 정치'를 통해 '정치'의 영역을 넓혀 일상을 정치화시키는 동시에 정치를 일상화시키는 길, 그리고 사회주의를 무엇보다 '상식과 양심의 단순한 문제'로 만드는 길은 제가 보기에는 장기적으로 카우츠키와 레닌의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을 길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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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그 반동성을 말한다 (레디앙, 2010년 01월 24일 (일) 10:50:54 박노자)
[민족주의와 상황론적 변증법] 객관적 실체 & 부정적 함의
민족주의(nationalism)란 '근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근대 세계의 주된 이데올로기죠. 근대성의 이념적 좌표에서는 '민족주의'와 거의 비중이 비슷한 개념들은 '규율'이나 '위생'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면 '규율'을 추상적으로 비판하는 건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억압성이 짙은 자본 중심의 규율주의는 비판 대상이 돼도, 우리가 아예 대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규율, 시간표라는 근대적 의미축을 비판해봐야 별로 얻어지는 바 없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유일한 이유로 김연아가 일본 계통의 경쟁자를 눌러 이겨야 한다고 응원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생산적 기능이 없는, 즉, 역기능만 발휘하는 '민족주의'의 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도대체 이 젊고 기술이 대단한 '규수'들이 서로 나라 이름을 내세워 '경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로서 이해가 안가기 때문이죠. 뭐, 그냥 본인도 즐기면서 남들을 예쁜 빙판 위의 춤으로 즐겁게 해주면 그만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식의 '민족주의'는 백해무익이라 해도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민족의 객관적 실체를 당연히 무시 못하죠.
어릴 때부터 표준화된 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근대인은 사투리들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민초 문화도 외국 문화도 어디까지 '타자'로 취급할 수 밖에 없는 한편, '우리'(국민 국가의 표준적 언어, 이념 등을 담은) 신문, 영화, 소설 등을 섭취하면서 자랍니다. 즉, (대한민국 테두리 안에서 국가화된) 민족(국민)의 일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는 무시 못할 객관적 사실이죠. 좌파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긍정시만 못합니다.
표준화된 국어부터 참 무서운 무기입니다. 그런데 일면으로는 국문학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을 한 번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뉴타운'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하면 벌써 그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대 민족/국민 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일면으로 좌파 사상의 대중적 착근의 길일 수도 있죠. 민족/국민 문화의 공간은 늘 이념적 투쟁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국민국가들의 세계에서 민족이란 비판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객관적 실체라면, '민족주의'의 정치적 함의는 국제 자본주의 체제의 당면 상황, 그 체제 속에서의 해당 국가의 위치와 역할, 그 체제 핵심부와 해당 국가의 관계 유형, 그리고 해당 국민국가의 지배형태 및 계급투쟁의 현 상황 등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즉, 민족의식/민족주의란 그 자체로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각종 국내외적 투쟁 상황에서 그 관계적(상대적) 의미를 득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변화무쌍함, 불변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다는 걸 직시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적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서 100년 전에 세계체제 핵심부의 영미의 대리자로서의 일본에 의해서 잠식되어가는 세계체제 낙오자 조선에서는 신생 민족주의는 당연히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했죠. 안중근의 머리 속에서 '황인종과 백인종의 영원한 싸움' 등등 온갖 반동적 이데올로기들의 편린들이 다 뒤섞여 있었지만 이토를 쏜 권총은 객관적으로는 이토를 열렬히 응원했던 영미권의 '주류'도 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에 대한 가해는 일본만의 가해가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가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가장 뛰어난 민족주의자들은 나중에 이동휘, 김철수, 김명식처럼 다 공산주의로 전환하죠. 공산/사회주의가 보급된 1920년대 이후의 조선 민족주의는 대체로 보수화되고, 신채호처럼 가장 격렬하고 비타협적 사람들이 아나키즘으로 전환하고, 김원봉처럼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나키스트들이 또 공산주의에 근접하지만, 그래도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구상에는 진보적 함의는 좀 남긴 하죠.
민세(안재홍)의 민족국가 구상(초계급적인 통합민족국가를 건설을 주장함-편집자) 같으면, 공산주의자들도 충분히 그 투쟁을 펼 수 있는, 그런 '새 나라'였다는 것이죠. 문제는, 민세나 만해 같은 '착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진영의 실세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 없는 시절이라 해도 구체적인 시기, 민족주의의 분파마다 그 정치적 함의는 많이 달라집니다. 대체적 추세는 민족주의의 보수화, 그리고 온건 민족세력의 친일화임에도 말씀입니다.
그러면, 지금 같으면 과연 어떨까요?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주의'란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혈통적 민족주의 - 모든 혈통적 조선인(남북한인, 각종 교포 포함)에 대한 소속/충성 의식을 가지며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 이와 같은 분들은 교포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단체에서 가끔 만나볼 수 있는데, 전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소수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묵시적 국시'상 가난한 교포(재러, 재중 교포)들은 저임금 노동력과 해당 국가로의 자본 침윤의 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부유한 교포(재미, 재일)의 '주류' 사회에의 진출과 이에 따르는 '주류화', 즉 탈민족화를 거의 비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도 소수자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의 다수가 혈통적 조선인이 아닌 오늘날 현실에서 혈통적 조선인을 특권화시키려는 이런 분들은 과연 '진보'인가요? 저는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2.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주의적' 내지 '통일지상주의적' 민족주의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사파'뿐만 아니고 '반미 자주통일'을 외치는 보다 광범위한 '좌파적 민족주의자'들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세계체제의 핵심부를 상대로 하는 이 분들의 일부 요구사항 - 미군 철수나 북한에 대한 미-일-한의 공격적 태도의 철퇴 등 - 은 객관적 의미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한다고도 볼 여지가 없지 않지만, 문제는 이 분들이 세계체제 속에서의 갈등의 축을 '계급'이 아닌 '국가/민족'으로 잡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이 분들이 북한이라는 국가에 친근한 입장에 서며, 미국/일본이라는 국가들을 반대하지만, 이 입장 속에서는 북한의 민중도 미/일의 민중도 그 어떤 독립적 변수가 안 되죠.
개별적 요구는 외형상 '진보적'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입장의 골자는 어디까지나 자국 일본을 '무산계급성의 국가'로 보고 세계적 투쟁의 축을 '일본/일본을 맹주로 하는 아시아 대 백인들의 부유한 나라'로 설정한 기타 이키(北 一輝) 류의 전전의 일본 극우파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즉, 이 그룹 자체는 '진보적'이긴커녕 어찌보면 일반적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파쇼적 성질의 사람들이라고 봐야겠습니다.
3. 남한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주의적' 민족주의. 이는 극우/보수파는 물론이고, '시민'을 내세우는 노빠류의 자유주의자나 "대한민국을 인정하자"는 국산 사민주의자들의 공동분모입니다. 물론 미국의 군사적 보호령이자 준주변부의 비교적으로 작은 국가인 대한민국이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의해 '침탈'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도 외피적 차원에서는 약간의 '진보성'을 띨 수 있긴 하죠. 예컨대 지난 번에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난리를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아랍에미레이트에 어쩌면 재앙이 될 원전이나 팔고, 인도 오리사주에서 토착민들을 추방시키는 제철소나 짓는 오늘날 대한민국은 종합적으로 봤을 때에 '피해자'라기보다는 '중간 사이즈의 가해자'에 더 가깝다는 데에 있죠.
한국 자본이 미 제국의 보호막 하에서 전세계에서 노동력 착취, 자원 갈취, 시장 침투 등을 감행하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이 형태의 민족주의는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적' 특색을 띠게 돼 있습니다. 뭐, 유시민씨와 같은 대표적인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객의 이라크 파병 관련 입장의 변천사를 고찰해보시면 대체로 뭔 말인지 아실 거에요. 아주 재미있는 연구대상입니다.
위에서 고찰한 바대로, 실체로서의 '민족'은 상당한 양가성을 지닌다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3 가지 류의 민족주의 중에서는 - 비록 특정 요구가 정당할 수도 있지만 - '진보적' 민족주의란 전무합니다. 그러니까 민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민족주의가 어떤 형태로든 노동계급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사실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민족주의의 부정적 함의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촉구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사회주의자의 임무입니다.
이는 추상적인 '민족주의 비판'과 다른 입장이고,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에서의' 민족주의의 의미를 중심에 두는 입장이죠. 민족주의는 꼭 '반역'만은 아니지만, 오늘 여기에서는 그렇게 볼 여지는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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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글

 

[야! 한국사회] 반이명박 매트릭스 (한겨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111010 19:31)
세상은 즉자적 짜증과 비아냥으로 충분히 변화시킬만큼 간단한가?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이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명박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종일 반복해서 확인하는 일’은 사회에 어떤 것일까? 적어도 운동은 아닐 것이다. 운동이란 이미 그 운동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운동의 내용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세를 넓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이명박 운동의 주요한 흐름은 그런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면모를 보인 지 오래다. 반이명박 운동은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운동에 앞장선, 그 운동으로 ‘고객’을 확보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이 되고 있다.
그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명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명박 덕을 보고 사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명박 이후 그들이 정의롭고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사람 행세하기가 얼마나 수월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 때만 해도 수구세력을 욕하는 것만으로 진보 행세를 하긴 어려웠다. 수구세력이 ‘좌빨’로 대우한 노무현 정권도 노동자 인민의 관점에서는 진보를 가장한 신자유주의 세력이라는 비판이 상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비루한 조어로 자신을 표현하곤 했는데 이젠 당당하게 ‘진보세력’이라, 자신들의 재집권을 ‘진보집권’이라 말한다. 다 ‘각하’ 덕이다.
운동의 실천은 또 얼마나 수월해졌는가. 그 운동의 이름난 논객이나 평론가들의 실천이란 이명박 패거리들이 매일같이, 아니 하루에도 수십개씩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는 소재들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것 몇개를 골라 ‘이랬다네요’ ‘기가 막히네요’ ‘○○도 아니고 씨바’ 따위 짜증과 비아냥의 코멘트를 다는 게 전부다. 코흘리개도 할 수 있는 그 즉자적 코멘트는 이명박에게 짜증이 날 대로 난 많은 시민들에게 ‘의미있는 진보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그 의미는 사회적 의미가 아니라 짜증이 날 대로 난 사람들의 심정을 잘 집어낸다는 의미겠지만.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즉자적 짜증과 비아냥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간단한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은 지배체제의 전부가 아니라 추악함이 불거진 체제의 일부임을 안다. 물론 운동이 언제나 체제의 모든 부분과 고르게 싸워야 하는 건 아니다. 불거진 일부, 더 많은 대중들이 분노하고 교감할 수 있는 일부를 간판으로 삼는 건 체제와 싸우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 반이명박 운동은 그 일부를 체제의 전부로 삼는, 그 일부만 사라지면 세상이 변화할 것처럼 과장하는, 그 일부에 체제에 대한 모든 분노와 에너지를 쏟아 넣어 소모하는 ‘반이명박 매트릭스’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쯤 되면 그 운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체제를 수호하고 세상을 수호하는 운동이라 할 만하다.
‘이명박 반대’는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일 뿐이다. 이명박 패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저급함은 두뇌와 심장이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수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인간의 기본이 진보로 승격된 사회, 짜증과 비아냥이 진보적 담론이자 실천인 사회, 체제를 꿰뚫어보는 냉철한 지성도 체제 속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사라져버린 사회는 퇴행할 수밖에 없다. 안철수 같은 ‘착한 자본가’가 사회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퇴행의 한 귀결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추락시켜 우리의 진보와 정의와 인간성의 하한선을 ‘동반하락’시키는 이명박이라는 물귀신 앞에서 냉철한 지성과 진지한 성찰을 되살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짜증과 비아냥도 풍자와 골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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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착한 소비’와 진보정치 (한겨레,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10-09-29 오후 06:49:51)
“소비를 이념으로 하는가”라는 정용진씨의 방자한 말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의 비판과 논평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울대 교수 조국씨가 <한겨레>에 쓴 ‘국가와 시민이 정용진에게 답하라’라는 글이 인상적이다. 한국의 중앙 일간지에서 ‘국가와 시민이 자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보는 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글은 정용진에 대한 ‘정서적 응징’으로 그쳐버린 느낌이다. 우선, 조국씨는 국가의 역할을 말하면서 시장 자유를 무작정 옹호하는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 그러나 지금 그 정권과 대립하는 민주당이나 참여당 역시 시장자유 옹호자들이라는 더 중요한 사실은 생략한다.
자본주의 사회엔 두 가지 자유가 있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 전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후자는 많을수록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통해 대통령을 ‘쥐’라고 골려도 잡혀죽지 않게 되었지만, 무한정한 시장의 자유를 통해 자본의 천국(속칭 ‘삼성공화국’)에서 살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무한정한 시장의 자유를 본격화하고 구조화한 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자본에 대한 국가의 견제’를 말하는 건 기만이 된다.
조국씨는 또한 시민의 역할을 말하면서 ‘가격과 편리함을 유일 잣대로 삼지 않는 착한 소비’를 촉구한다. 좋은 말이고 얼마간의 실효성도 있겠지만 먼저 세 정권 내내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사람들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야 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재난영화적 현실에서 ‘착한 소비 캠페인’은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
시민에게 촉구해야 할 것은 ‘착한 소비’가 아니라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심’이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고 이명박과 싸우듯, 나는 물론 내 아이들이 영원히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려면 민주당이나 참여당 같은 또다른 시장자유 옹호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촉구하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 삶에 눈곱만큼이라도 소용이 닿으려면 이런저런 시장자유 옹호자들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고 진보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진보정치가 세력이 미미하지 않으냐고? 그게 바로 자본의 체제가 우리를 쳇바퀴 속의 다람쥐로 만들기 위해 심어준 어리석은 생각이다. 정용진의 방자한 말에 반감을 느끼면서 눈은 여전히 유시민의 ‘노무현 정신 계승’과 문성근의 ‘국민의 명령’에 가 있게 만드는 어리석음 말이다. 진보정치가 세력이 미미해서 지지할 가치가 적은가, 마땅히 지지할 사람들부터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세력이 미미한가? 진보정치의 세력과 가치는 남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주권을 가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제아무리 시민이 각성한다 해도, 지금처럼 진보정당들이 만날 이명박 반대만 외치며 ‘이명박 프레임’ 안에서 맴돈다면 다 소용없는 일일 게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이제라도 정신줄 바짝 잡고 자신들이 민주당이나 참여당과 뭐가 다른지, 시장 자유에 맞서는 진보정치가 뭔지 시민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마트 피자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엔 프랑스처럼 대형마트는 아예 시내에 못 들어오게 하는 정치도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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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반공주의에 반대한다” (레디앙, 2010년 09월 11일 (토) 16:43:23 이재영 기획위원)
[인터뷰-김규항] “그의 주장, 해악 선 넘어서…심상정 구상 위험"
= ‘자유주의자’라는 말을 진중권씨는 모욕을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진보신당에도 자유주의 경향의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노힘’ 성향의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리고 ‘저 사람 왜 저기 있지? 민주당이나 국참당에 있으면 더 좋겠는데’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진보신당에 있을 수 있다. 그런 성향 자체가 비난거리는 아니다. 자유롭게 입당하고 탈당할 수 있으니, 그런 경향 사람들이 진보신당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재단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으로 보기 어려운 것을 진보정당에게 강요하고 부정적인 영향력이 커지면 문제로 삼아야 한다.
= 중요한 건 어느 당적인가, 남의 당과의 세력 싸움을 얼마나 격렬히 했는가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전반적 흐름으로 보면, 진중권은 점점 우경화되고 있다. 내가 그를 ‘자유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건 실은 그 스스로 자신을 매우 실천적인 차원에서 자유주의자로 규정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근래 몇 해 동안의 활동은 그 대상이 거의 전적으로 극우 세력에 한정되어 있다.
물론 한 좌파 개인이 극우세력 비판과 자유주의 비판을 적정 비율로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를 좌파라고 하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왼쪽의 좌파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식의 극단적 표현을 일관되게 해왔고, 갈수록 그것이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을 좌파로 봐야 하나?
= 진중권씨 스스로 ‘개인적으로 리버럴하다’거나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바란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자유주의적 좌파’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는 무관하게 현실에서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바라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부인한다.
맑스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맑스를 어떻게 달라진 현실에서 읽고 실천하는가를 고민해야 하고, 계급이 사라졌다고 말할 게 아니라 계급의 변화한 양상과 자본의 계급 통합 전략에 맞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사회주의 개념 자체를 부인할 게 아니라 정말 현실적이고 조화로운 사회주의 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좌파다. 사회주의를 부인하면 더 이상 좌파라고 할 이유가 없다. 자격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러려면 그냥 복지에 관심이 많은 근사한 자유주의자로 살면 된다.
= 극우가 왜 극우인가,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의견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극우 아닌가. 의견이 차이가 있어도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해야 한다.
=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넓은 의미의 좌파적 경향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더 이상 조갑제 같은 사람에 의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조갑제 씨가 말하면 젊은 사람들 다 웃는다. 오늘의 반공주의는 유시민이나 문성근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에 의해서다. 하물며 진보정당의 당적을 가진 사람이 ‘사회주의’니 ‘계급’ 같은 기본적인 모토 자체를 폐기된 것처럼 말하면 세상에 그런 효과적인 반공주의적 활동이 어디 있나. 젊은 사람들이 ‘계급’이니 ‘사회주의’에 매력 없어 하는 것은 전세계적 흐름이지만, 한국에서는 너무 족보 없이 냉소적이다.
=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자본은 아주 손쉬운 좌파 고사 전략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가치와 그 가치의 불행한 사례인 현실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런 시도 자체가 실은 어리석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만 유포하면 자본주의가 아닌 세상에 대한 상상력 자체를 차단한다. 좌파라는 사람이 그런 자본의 전략에 맞서진 못할 망정 모범을 보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는 자본이 그런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주의적 가치와 현실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의 양식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구좌파로서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라 현실과 미래를 조망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집에 찬 태도에 비판적인 것이다. 저는 노힘이나 전진의 입장에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진중권 씨 정도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까지 포함한 범좌파의 기본적 가치를 가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치를 폐기하려면 굳이 좌파일 필요가 없다. 좀 더 실현가능한 데 집중해서, 민주당이나 국참당에 가서 복지를 조금 더 늘린다거나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아닌가.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기본 지향까지 포기한다면 굳이 좌파의 일원으로 남아있는 게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진다.
- 좌파적 가치를 존중하자고 주장하는데, 진보신당 외에 좌파 블록들의 실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솔직히 말하면 좀 답답하다. 기본적인 가치 외에 대중들에게 소구하는 방식 등의 실천은 많이 낡았다는 느낌이다. 대중과 완전히 차단돼 있다. 이런 점에서는 진중권씨의 판단이나 정서와 비슷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좌파의 일원이라면 도와야 한다. 그들이 대중적이지 않다면 조금이라도 대중적 소구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낡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세련되어지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진중권 씨는 대중들을 향해 그들을 망신을 주고 조롱한다. 실제보다 더 과장해서 말이다.
그들이 비록 실천적으로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가치 지향들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들이 낡은 생각으로 지금 당장 국가사회주의를 실현할 능력이라도 있다면 그들의 폐해를 경계해야겠지만, 그들은 국가를 접수하긴커녕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가치와 지향만으로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 심상정의 구상에는 민주당 좌파까지 포함되는 거 같은데, 과거에도 통추나 재야연합 등 비슷한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결국은 자유주의 정치에 포섭되는 과정이다. 헤게모니를 가지면 좋겠지만, 힘이 모자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정체성이라도 지켜야 한다. 헤게모니는 꿈도 못 꾸고 정체성은 내주는 연합은 별 논의의 가치가 없는 거 같다. 심상정 정도 인물이라면 민주당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게 개인에게도 더 좋은 선택일 것 같다. 김세균 교수 등 진보교수연구자모임의 진보대연합 제안은 논의 가치가 충분하다. 저는 진보신당만의 강고한 정체성을 주장하거나 하지 않는다.
= 진보신당은 대중의 호의와 지지를 자신들에게 끌어오는 게 아니라 모조리 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몰아주고 있다. 당의 유력자들이 대중적 명망성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 명망성이라는 것이 ‘반이명박’ 투쟁을 통해 확립된 것이고, 자유주의 세력과 변별성을 확보하는 데는 소홀히 함으로써 결국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성과를 바치게 되고 있다.
노회찬과 심상정에 대한 대중들의 정치적 신망은 한국 정치인 중 최고인데, 그런데도 고생하고 있다. 왜 진보신당을 찍어야 하는지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선거 때 노회찬은 줄창 오세훈 욕만 하더라. 결국 한명숙을 도운 꼴만 됐다.
대중성과 대중성 강박은 다르다. 잘못된 대중성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중성은 얻었지만, 진보정당에게 유의미한 대중성은 아니다. 고생해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퍼주는 대중성일 뿐이다. 심상정이 퇴임한 노무현과 FTA를 두고 논쟁하면서 차별성이 부각됐을 때 진보신당의 지지도가 높았다고 알고 있다.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정당과 다른 이유를, 굳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

 

김규항 "진중권의 자유주의, 좌파 전체에 해악" (미디어오늘, 2010년 09월 12일 (일) 18:34:35 이정환 기자)
"진보신당 자유주의 정당으로 변질 우려… 심상정은 민주당이 어울려"
김규항 월간 '고래가그랬어' 발행인이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를 신랄하게 비판해 눈길을 끈다.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꼽히는 두 사람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을 두고 최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인 바 있다.
논쟁의 시작은 김씨가 6·2 지방선거 직후인 지난 6월 17일 한겨레 칼럼에서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경기도 지사 후보의 사퇴를 비판하면서부터다. 김씨는 "진보신당의 대중성은 진보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만 중요하다"면서 진보신당의 '대중성 강박'과 '프레임 오류'를 지적했다.
김씨는 작정이라도 한 듯 "진중권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면서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비판했다.
진씨는 다음달인 7월 9일 씨네21 칼럼에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진씨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면서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라고 지적했다.
진씨는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고 전제하고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후 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언제부터인가 진보정당과 그 언저리에도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이 출몰한다"면서 이들을 '좌파연하는 자유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내가 주목하는 건 그들의 '다름'에 대한 배타성, 자신보다 왼쪽의 사회적 상상력을 모조리 '닭짓'이라 매도하는 그들의 배타성,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라고 비판했다. 김씨는 "좌파는 물론 이명박을 반대하며 이명박과 싸우지만 그것뿐이라면 그 싸움의 성과는 모조리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고 '좌파연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는 11일 레디앙과 인터뷰에서도 "진중권은 점점 우경화하고 있다"고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김씨는 "내가 그를 굳이 자유주의자라고 한 건, 그를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유주의적 경향, 혹은 반좌파적 경향이 진보신당과 좌파 전체에 해악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치를 폐기하려면 굳이 좌파일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대중성과 대중성 강박은 다르다"면서 "잘못된 대중성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신당이 대중성은 얻었지만, 진보정당에게 유의미한 대중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씨는 "고생해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퍼주는 대중성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정당과 다른 이유를, 굳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진씨는 12일 자신의 트위터에 "변규항이라는 사람이 나보고 위험한 '반공주의자'라고... 살다 보니 별 소릴 다 듣네요. 논리가 거의 모스크바 재판 수준"이라고 짧게 남겼을 뿐 공식적인 대응은 하지 않고 있다.
김씨와 진씨가 벌이는 논쟁의 핵심은 진보신당의 '대중성 강박'에 있다. 김씨는 진씨가 좌파의 가치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닭짓'으로 조롱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고 진씨는 김씨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욕이며 폭력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김씨는 진보신당이 좀 더 명확하게 좌파의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그게 대중성을 확보하는 바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진씨가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는 진보신당에 들어오면 안 되느냐고 반박하면서 논쟁의 핀트가 약간 어긋난 느낌이다.
결국 둘의 논쟁은 진보신당의 정체성과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6·2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연대에 대한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갈등이 표출됐다고 볼 수도 있다. 김씨는 "심상정은 정도 인물이라면 민주당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게 개인에게도 더 좋은 선택일 것 같다"고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김씨는 "맑스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맑스를 어떻게 달라진 현실에서 읽고 실천하는가를 고민해야 하고, 계급이 사라졌다고 말할 게 아니라 계급의 변화한 양상과 자본의 계급 통합 전략에 맞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사회주의 개념 자체를 부인할 게 아니라 정말 현실적이고 조화로운 사회주의 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좌파"라고 규정한다.
진씨가 '전진' 등을 비현실적이라며 조롱하는 것처럼 김씨는 진보신당에 합류한 촛불세력을 평가절하한다. 김씨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좌파와 자유주의자로 구분지으면서 자유주의자를 이념적으로 치열하지 않은 현실 타협주의자 정도로 매도하고 있는데 이 지점에서 논쟁은 감정 대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진보신당이 자유주의 정당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김씨의 우려는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진보신당이 어설픈 타협으로 대중성 확보에 목을 매기보다는 먼저 정책적 선명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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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낭만의 시궁창'에 빠진 체 게바라를 구하라! (프레시안,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2012-05-11 오후 6:25:35)
[장석준의 '적록 서재'] 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헬렌 야페가 쓴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류현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은 체 게바라의 삶의 '비낭만적' 면모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켜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나는 체 게바라는 심지어 한 명의 정치경제학자이자 경제 관료다.
쿠바 혁명 성공 이후 게바라가 중앙은행장을 맡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게바라 전기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회의에서 졸고 있다가 "우리 중에 경제학자(economist) 있냐"는 피델 카스트로의 말을 "우리 중에 공산주의자(communist) 있냐"로 잘못 들어 손을 번쩍 드는 바람에 은행장을 맡게 되었다는 믿기 힘든 일화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게바라가 쿠바국립은행장과 산업부흥부 장관을 일할 무렵, 쿠바 혁명 정부 내에서는 이른바 '대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혁명적 민족주의 노선으로 출발했던 쿠바 혁명은 이 무렵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 투쟁하면서 사회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회주의를 건설할지가 문제였다.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이 파견한 경제 고문들은 자신들의 '앞선' 경험과 기술을 따라 배우라고 강권했다. 이들이 제시한 모델은 쿠바에서는 '자율금융시스템(AFS)'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탈스탈린화 이후 자유 시장의 요소를 일부 도입한 당시 소련, 동유럽의 경제 체제를 표준화한 것이었다. 소련 측 학자들은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이전의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가치 법칙(시장 교환)이 여전히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 모델을 옹호했다.
체 게바라는 감히 이 모델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것이 쿠바 혁명의 독특한 점이었다. 중국이나 유고슬라비아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련의 교리와 체제를 성서처럼 떠받들고 그대로 따라 한 데 반해 쿠바에서는 게바라와 같은 이단적 목소리가 허용되었다. 심지어는 트로츠키의 저서도 읽고 토론할 수 있었다.
게바라가 보기에 가치 법칙은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점점 더 그 작동 범위를 축소해야 할 것이지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자유 시장의 요소에 계속 의존하는 것보다는 중앙 계획을 강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게바라는 자신의 생각을 AFS에 맞서는 또 다른 모델, '예산재정시스템(BFS)'으로 정리했다. 게바라의 강조점을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가치 법칙을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고 보고 논의의 초점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모순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자유 시장의 부재에 돌리고자 한다. (…) 사회주의 이행기에 가치 법칙이 모순이라면 중앙 계획은 그것의 해결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앙 계획이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이고 그것이 정의(definition)라고 주장할 수 있다." (122쪽)
혁명 정부의 경제 부처들 사이에서 AFS 지지자들과 BFS 지지자들이 벌인 토론이 바로 '대논쟁'이다. 보통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이 정도 논쟁이 있고 나면 논쟁에서 밀린 쪽이 대거 숙청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쿠바 정부는 AFS로 작동하는 부문과 BFS로 작동하는 부문을 다 같이 운영하며 실험해 보자는 입장이었다.
사실 이 실험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쿠바는 점차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 AFS를 표준 모델로 정착시켰다. 게바라가 돌연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새로운 혁명 투쟁 현장으로 향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비록 숙청은 안 당했지만, 정부에서 밀려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한 동안은 쿠바 내에서도 게바라의 경제 사상은 별로 관심을 얻지 못했다. 쿠바 바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사정은 이 거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천박한 수준에 머물게 만들었다. 500년 제국주의의 역사가 쿠바, 더 나아가 남반구 인민에 강요하는 숙명을 뒤엎고자 했던 그의 필생의 이상과 고투는 가려진 채 낭만적 이미지만이 창궐했다.
야페의 책은 게바라의 삶과 우리의 관심 사이를 가르는 이 거대한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게 해준다. 야페는 BFS로 정식화된 게바라의 대안 경제 구상을 이론적 차원에서 소개할 뿐만 아니라 게바라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쿠바 정부에서 직접 펼쳤던 실천들을 더없이 상세히 보고한다. 마치 반세기 전으로 돌아가서 쿠바국립은행장과 마주 앉아 혁명 정부의 경제적 성과와 한계에 대해 세미나라도 벌이는 느낌이다.
게바라의 대안 경제 구상은 단지 마르크스주의 고전 독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이것은 미국 주도 독점 자본주의 혹은 법인 자본주의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야페는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에서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게바라가 보기에 소련은 러시아 혁명 당시에 세계 자본주의가 도달한 수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이 부분적으로 도입하려던 자유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과거의 자본주의에서나 중요한 요소였을 뿐이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미국 중심 자본주의에서는 이미 거대 법인 기업이 시장보다 우위에 서서 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도 이제는 현대 자본주의가 도달한 이 정도 수준에 발을 딛고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려 시도해야 한다는 게 게바라의 생각이었다. 게바라는 쿠바에서 영업하다가 철수한 미국 기업의 운영 실태를 조사하면서 이런 생각을 굳혔다. 그의 예산재정시스템(BFS) 구상은 이때 발견한 미국 법인 기업의 회계 시스템의 혁신성을 쿠바 사회 전체에 확대, 적용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국유화 조치 이후, 국유화된 미국 기업들의 회계 장부를 확인한 게바라는 이들 기업들이 자회사들에 청구서를 발행한 적도, 반대로 자회사들이 모회사들에 실제 비용을 지급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진 회계 처리, 관리, 분석 기법을 가지고 있던 미국 기업들은 화폐를 생산물의 가치를 계산하는 수단, 즉 계산 화폐로 한정했다. 게바라는 예산재정시스템에서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 (123쪽)
게바라는 쿠바에 사회주의를 '가르치려 한' 소련의 관료들보다 몇 십 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전자공학과 자동화의 중요성에 주목했고, 1960년대에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포드 자동차의 CEO 리 아이아코카의 경영 기법을 도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게바라의 대안 경제 구상은 오늘날에도 돌아볼 만한 구석들이 있다. 야페의 책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은 분명 유쾌한 독서 체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계나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산재정시스템(BFS) 구상 자체가 우리 시대에 그대로 추진되기에는 많은 근본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BFS를 주창하면서 게바라가 제시한 '중앙 계획'은 사회 전체가 마치 하나의 공장과 같아져야 한다는 시각을 깔고 있었다. 그에게 대안 사회는 공장의 확대판이었다. 현대의 대기업 내부에서 그런 것처럼, 일체의 시장 교환을 계획적 결정이나 협상 계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바라뿐만 아니라 고전 사회주의자들의 '계획 경제'론에는 항상 이러한 '사회=공장' 관념이 함께 했다.
그러나 사회는 결코 하나의 공장일 수 없다. 사회는 본래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된 생태계와 같은 것이다. 이런 역동적 생태계가 기업 조직의 내부 체계처럼 정리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 '사회=공장' 관념을 고집한다면, '사회'를 '국가'와 등치시키게 된다. 공장 체계의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가정된 국가 관료 체계에 항상 사회를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종의 국가 사회주의일 뿐이다.
이런 국가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반응 중 하나가 의식적 측면의 강조다. 시스템이 삐걱거릴수록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체 시스템의 발전을 위해 인민이 적극 참여해야 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의식이 변화해야 한다, 운운.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본질은 동원의 이데올로기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강조한 게바라의 '의식 혁명'론도 이런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게바라의 사상은 분명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지한 자기비판의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까지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논쟁'에서의 그의 기여도 국가 사회주의의 닫힌 원환을 넘어서는 지평을 열지는 못했다. 볼리비아 숲 속에서 그가 마주한 삶의 비극성은 경제 영역에서 펼친 파우스트적 시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게바라가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시킨 인간의 주체적 측면을 국가 사회주의의 동원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바라볼 여지는 없을까?
게바라의 예산재정시스템(BFS)에는 몇몇 눈에 띠는 요소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윤이 아니라 비용 절감으로 기업의 실적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반대 진영의 자율금융시스템(AFS)은 여전히 재정 수익성을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이런 차이는 각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행위 양식을 다르게 진화시킬 것이다. 게바라식 시스템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 극대화에서 다른 쪽으로 바뀌면서 기업 활동의 구성 요소들 전반이 자본주의의 통상적 기업들과는 다르게 재배열, 재구성될 것이다.
개인의 인센티브 체계도 흥미롭다. 자율금융시스템(AFS)에서는 개인의 생산 실적이나 노동 성과에 따라 상당한 보너스가 지급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노동자들 상호 간의 노력 경쟁이 중요한 경제적 행위 양식으로 정착될 것이다. 하지만 게바라가 구상한 시스템에서는 오직 교육, 훈련 정도에 따라서만 급여 수준이 차이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당장의 생산 실적은 약간의 보너스 지급으로 끝난다. 안정적으로 더 많은 급여를 받으려면 더 높은 수준의 교육, 훈련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식 및 기술 능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행위 양식을 정착시키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체 게바라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흔히 보이는 노력 동원의 측면에서만 주체적 요소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게바라는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인간 주체성에 대한 선전 문구만 늘어놓은 게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서 반드시 발전되어야 할 새로운 경제적 행위 양식이라는 차원에서 문제의식을 전개했다.
자본주의의 지배적 행위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행위 양식이 등장하지 않는 한, 지금의 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새 사회는 등장할 수 없다. 반대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제도적 틀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행위 양식들을 발전, 정착시키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게바라는 예산재정시스템(BFS)을 구상하면서 중앙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게 아니라 각 경제 주체들 사이에 새로운 행위 양식이 등장해 확산될 계기들을 마련하려 했다. 즉, 경제 관료 시절 게바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대안 사회에 필요한 경제적 행위 양식을 만들어가는 체제 이행 전략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체 게바라의 또 다른 얼굴이다. 사실 게바라의 게릴라 전략('포코'주의)이나 예산재정시스템(BFS)이나 모두 결국은 실패한 시도들이다. 그러나 대중운동과 선거를 통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붐'이 전자를 완전히 과거 역사의 한 페이지 정도로 만들어버린 반면 후자는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경제 체제 변화 과정에 대해 여전히 심오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문득 '쿠바국립은행장 겸 산업부흥부 장관' 게바라가 '게릴라 투사' 게바라보다 더 끈질기게 우리의 곁에 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할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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