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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1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다
    redbrigade
  2. 2009/06/21
    단편과 테제들(~2009/6/21)
    redbrigade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다

  • 등록일
    2009/06/21 23:18
  • 수정일
    2009/06/21 23:18

 

* 광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영화를 봤다. 옆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말 신파적으로) 내내 울었다.

 

 

[굿 바이](타키타 요지로, 2009, 일본)

[굿 바이](타키타 요지로, 2009, 일본)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었다. 물론 그 경계에는 문이 있는데, 아주 헐거운 경첩이 달려 있어서 조금만 흔들어도 빠진다. 역시 시간의 경첩은 언제나 빠질 수 있는 것이다([햄릿]). 다시 한 번 확인하자면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다. 그 단단한 미물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떠도는 조약돌, 아들에서 아들로,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 그래서 그것은 결코 우리가 잡고 있다고 해서 완전히 포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망각하고 있다고 해서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는 미카(히로스에 료코 분)에게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한 번도 의논하지 않았다. 그건 부성으로부터 배반당한 기억 때문이다. 하긴 이 방면에서 착하기만 한 미카의 모습은 페미니즘 측면에서는 영 마뜩찮다(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기에 참 다행이다. 영화를 마음의 삐걱거림 없이 볼 수 있었으니). 

 

다시 떠도는 조약돌, 모든 사람이 그 조약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피붙이 같은 존재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자주 잊어 버린다. 그래서 서로 섭섭하다. 다이고도 미카도 그렇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다. 조약돌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 어떤 것은 웃음 때문에, 고인의 얼굴 여기 저기 남긴 립스틱 자국 때문에 부풀어 있고, 어떤 것은 무서운 표정으로 으르거나, 운다. 또 어떤 것은 남자로 태어나 여자가 되기를 욕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결 같은 것은 그것들이 모두 한갖 조약돌이라는 거다. 

 

삶과 죽음, 참 일상적이다. 그 놀랄만한 집착과 그 갑작스런 패악질에 있어서 그건 너무나 평범하다. 우리는 그 평범한 진리 안에 산다. 눈물은 그런 의미다. 억울하니까. 빌어먹을 삶과 죽음 때문에 우린 이렇게 괴롭다. 조약돌 따윈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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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들(~2009/6/21)

  • 등록일
    2009/06/21 14:50
  • 수정일
    2009/06/21 14:50

*생각나는대로 수첩과 컴 메모장에 끄적였던 것들...


- 해석학의 보편성은 정치의 보편성이다. 따라서 정치의 당파성은 해석학의 당파성이다.


-부산대 신해철 특강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특강 제목은 [대학생에게 말해주고 싶은 한국의 진보]다. 이 학생들은 '진보'보다 속을 '확' 뚫어줄 신해철의 독설이 더 듣고 싶은 것이다.


- 정리하자: 노무현에 대한 '해석투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점점 더 비본래적인 부르주아 당파투쟁으로 전락하고 있다. 노동계급 제조직들은 이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에 앞서, 즉 해석에 앞서 본래적인 '진실'이 조금이라도 드러나야 한다. 검찰 수사의 전모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다. 검찰 수사를 종결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이유에 만족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수사기록을 공개하고 다시 수사하라는 것이다. 


- 조정환은 그의 책에서 촛불의 사회정치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을 나누고 그것을 시간성의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실화된 아이온으로서의 촛불과 잠재적 카이로스로서의 촛불 말이다. 내 생각에 이런 방식의 시각은 이분법이라는 경직성에 걸려 들지만 않는다면(아마 조정환 선생 자신이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이라 생각 들지만) 매우 고무적인 것이라 사려된다. 부언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이때 존재론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것 말이다. 혹은 이때 유물론은 들끓는 잠재성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지 이미 선별된(진리의 선의지에 따라) 이데아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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