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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4

  • 등록일
    2010/09/24 11:22
  • 수정일
    2010/09/24 11:22

추석 사흘 동안 바빴다. 학원 강의, 그리고 대구, 광주, 다시 학원 강의. 그녀가 대구 집에 들러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다행히 어머니는 매우 반가워하시고, 그녀를 이뻐라 하셨다. 좀 정신 없는 소리를 또 하신 것 같긴 하지만 그동안 그녀도 많이 들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집안 구석구석 낡은 가구들이며, 오래된 티비와 냉장고 때문에 좀 서글펐던 것 같다.

 

이제 다시 생활과 공부로 돌아 간다. 약간의 계획 수정. 밤마다 하던 발췌 작업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자기 전에 반드시 어느 정도 하고 자야 한다. 방송대 강의와 그녀 세미나를 도울 일도 남았다. 논문과 번역 일도 쉼 없이 진행될 것이다. 늦추기 말고, 하지만 느리게 가야 한다.

 

몇 일간의 폭우 뒤에 완연한 가을이다. 서른 아홉의 가을이 오고 있다. 삼십대의 마지막 가을인 것이다.더 나아가야 한다. 생각해야 할 것들과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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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6

  • 등록일
    2010/09/16 12:32
  • 수정일
    2010/09/16 12:32

사흘을 정신 없이 보냈다. 방송대 강의, 학원 강의, 교재 준비. 그래도 근 한 달여 만에 그녀의 책을 정리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으니 벌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기초 서적은 제일 아래 칸에, 서양 문학과 전집은 둘째 칸과 셋째 칸에, 비평서는 셋째 칸 왼쪽에, 시집은 둘째칸 왼쪽과 내 책꽂이 여기 저기에, 그리고 이론서는 제일 윗칸에.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그 책들이 우리 그간의 추억들을 빤히 비춘다. 저 책들, 그리고 함께 놓인 내 책들. 그 많은 고통과 기쁨들. 그 우여곡절 속에서도 저 책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때로는 눈물 흘리던 밤 머리맡에, 때로는 같이 걷던 종로 거리 커피숍 테이블 위에, 또 서로를 위무하던 신대방동 그 방 창가에, 서로 책 하나를 두고 토론하고 낄낄거리던 그 많은 날들의 편린 속에, 저들은 칸칸이 우리를 바라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것들. 난 그만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천방지축으로 튀어 다니던 그 시절에도 저것들은 우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저 책들이 없는 우리 삶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언제난 저들은 지척에 있었고, 우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지나치곤 했다. 하긴 앞으로도 오랫동안 책들은 우리를 그렇게 응시하며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문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일종의 반복되는 제의를 즐긴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문자들은 산 자들, 또는 한 때 빛났던 그들의 흔적들을 한 번 더 기념하는 일일테니 말이다. 조금의 경외심도 없다면 이 문자들을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지독하게 음미할 리가 만무하다. 문자를 대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대한다기 보다, 이런 저런 삶을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문자들이 내게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 삶의 칸칸이 빛을 주었듯이 말이다. 책이란, 문자란 그렇게 검은 날개의 천사처럼 언제나 우리 주위를 배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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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 등록일
    2010/09/09 17:06
  • 수정일
    2010/09/09 17:06

구름이 검게 내려 앉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구름 뭉치들이 발에 툭, 툭, 차였다. 마흔이 다 되어 가도록 길바닥에 이렇게 많은 구름들이 있는 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가 내렸는데, 이제는 길바닥으로 물이 흐른다.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저 성기들. 두둥실, 떠 올랐다가 내 면전에서 팡팡 터진다. 저렇게 죽어 가는 것들이 도처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렇게 죽어 가는 검은 구름 떼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족속이다. 나는 그 족속들 틈에서 귀도 막지 않고, 눈자위 근육을 파르르 떨면서 응시한다.  모두들 산책에 나선 것일까. 가방안에서 또 다른 구름뭉치들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그들'은 어째서 자꾸만 세계가 아닌 방향으로만 흐르고, 탈주하는 것일까.

 

깃발, 그 밑을 수평으로 놓인 노점들. 그 중 무엇이라도 쓸모 있다면 내버려 두어라.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저기 펼쳐진 구름의 잔여물들이 흔들린다. 티비 화면의 노이즈처럼, 이제 저들은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평평한 지구, 평평한 관계, 평평한 사랑, 평평한 두려움과 평평한 불안, 평평한 섹스와 교육과 학문과 시와 열정들. 너무 무거운 가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납작해 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그날까지 '그들'은 납작해지고, 또 납작해져서 거의 종잇장처럼 될 것이다. 창백하게 떨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서 말이다. 떨면서 견뎌 나가는 '그들'. 나는 납작해지지 않으려고 지금껏 살아 온 것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 보르헤스의 퓨네스처럼 너무 많은 기억을 갖고 사는 것도 멍청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것은 백치와 같다. 혹시 망각은 치유제가 아니라 서서히 미쳐가게 하는 어떤 전진성 질환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약도 소용 없는 그런 것 말이다. 때로 기억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도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미치기 전에 죽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저렇듯 노인은 전 생애의 기억을 둥근 등 안에 숨기고 걸어 가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저 여자는 더 이상 기억 하기 싫은 그 남자를 밟고 죽음을 향해 걸어 가는 것이다.

 

커피로 샤워를 한다면, 하루 종일 몸에서 나는 커피향을 맡으며 관에 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날 깨어나도 그 향기가 남아 있기를 바라며 잠옷에 붙은 솔기를 떼어 내면서 고요하게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구름들 때문에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마구 달려 오는 '그들' 때문에 세계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닌 줄로만 알았습니다. 혹시 그런가요? 이 세계는 '그들'의 것인가요? 제게 이 의심을 없애 주시고 내일은 구름들이 조금만 제 발에 채일 수 있도록 제 발을 개미 더듬이처럼 만들어 주십시오. 아니 아니 거대한 더듬이로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님, 사지와 머리는 필요 없나이다. 오로지 제 존재 전체가 하나의 더듬이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번개가 칠때마다 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더듬이의 신경들이 온전히 반응하며 찌르륵 찌륵 탱탱해 지도록. 내가 당신 안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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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 등록일
    2010/09/07 14:18
  • 수정일
    2010/09/07 14:19

오랜만에 좋은 날씨다. 장안문 근처에서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자전거를 끌며 걸어서 지동시장 근처 자전거점까지 왔다. 수원천이 옆으로 흐르고, 사람들은 어쩐지 나른해 보였다. 드문드문 나무 밑 벤취에 앉아 쉬는 사람들, 천변에 늘어선 점포들, 아직 따가운 햇살이 그 모든 생들에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걸으며 휴식을 취하는 이 오후 한 나절이 내겐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마음이 앞서곤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긴 생이 저렇듯 나른하게 졸고 있는 노인의 어깨에 햇살처럼 기대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날은 궂고 비가 오고 천둥이 칠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반복되는 휴식과 분주함을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적일 뿐,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

 

 번역물을 접는다. ... 커피숍 통유리 밖으로 또 많은 차들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나는 산책자가 되고 싶다. 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욕망을 적요한 심층에 달래고, 세상의 모든 우발성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도시를 커다란 하나의 원형감옥처럼 바라보고 싶다. 저기 감시탑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다. 실재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히려 이 원형감옥의 구조 자체. '환영의 한계', 짐 자무시는 [리미트 오브 컨트롤]을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그렇게 규정했다.  실재 자체가 영화의 환영이라면 내가 걷고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실재일 것이고, 동시에 영화며, 또 동시에 환영이다. 그러나 현실은? 난 그것을 보고 싶다.

 

영화적인 여섯번째 감각? 또는 아뢰야식? 또는 신적 직관(스피노자)? 이것들이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여전히 어떤 것도 명징하지 않다. 도대체 난 명징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오히려 난 그 '무엇'을 창조해 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현실이라니!  이 속도를 가늠하는 것은 과연 의미있는 짓일까? 나는 혹시 이 덧없는 것들 중에 가장 덧없는 어떤 것을 '현실'이라 명명하고 불가능한 탐색을 하는 것은 아닌가?

 

Sapere Aude! 하지만 아직 미명이다. 왜냐하면 아직 '덧없음'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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