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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들...

최근 한 달 동안 이런저런 영화들을 적잖이 보았더랬다.

 

기록이나 해 두자.



0.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

 

 

정이, 담이를 데리고 보았는데 초딩인 담이는 그닥 재밌어하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1, 2 편에 등장했던 신기한 동물들이나 아기자기한 마법들은 등장하지 않았고, 질풍노도기에 들어선 청소년 마법사(?)들의 갈등과 고민은 나름 심오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해리를 맡은 래드클리프의 연기력은 도대체 왜 이리 안 느는지 모르겠다. 론과 헤르미온느 역의 두 아역은 쑥쑥 성장하는 거 같은데 말이지....

이번 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장난꾸러기 위즐리 형제의 자퇴! 오, 자유로운 영혼들 ㅎㅎ

헌즈 다이어리에도 지적된 바 있지만, 마법사 세계의 모든 일들은 학사일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거 같다. 악당의 암약도, 엄청난 전투도 모두 학생들의 학기 중에만 일어난다. 월매나 좋을까?

 

0. 트랜스포머 (마이클 베이 감독) 

 

 

일곱 살 남자 아이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재밌을 영화!

듣자 하니  둘째조카 우재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완전 발광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더란다 ㅎㅎㅎ

뭐 비주얼이야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데, 8세 이상의 눈으로 본다면 상당히 거슬리는 엉성한 플롯과 대사들이 나에게 아주 큰 웃음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디셉티콘 리더가 냉동 상태에서 해동되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 '아임 메가트론'....  저거 뭐냐 싶더라니까 ㅎㅎㅎㅎㅎ

 

비주얼에 신경 쓰면 반드시 플롯은 엉성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걸까, 궁금증이 들었다.

 

 

0. 디센트 (닐 마샬 감독)

 

 

호러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유혈낭자 슬래쉬 류는 별로 안 좋아한다. (고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스크림 1,2,3편을 다 보았구나 헉.)

이 영화는, 완전 슬래쉬 무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일듯 안 보일 듯 철저한 심리호러는 아니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들여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굳이 거창하게 해석하자면 내면의 트라우마, 생존의 본능과 이기주의, 감추어진 잔혹성 등이 차례로 폭발하면서 세상에 정말 두려운 건 뭘까 생각해보는 영화???

 동굴 속에는 사람 잡아먹는 골룸들이 떼로 서식하고, 이들의 공격에 맞서 평범한 중산층 아줌마들은 에일리언 시리즈의 리플리를 능가하는 특전사요원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구와 불신, 배신감 속에서 점점 사악해진다. 나중에는 골룸 괴물보다 이 아줌마들이 더 무서워서 후덜덜.....

 

하긴, 첫 장면...

탐사하기로 한 동굴 입구만 보고도 입이 쩍 벌어졌다. ㅜ.ㅜ

 

0. 플루토에서 아침을 (닐 조던 감독)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영화를 보던 날은 오로지 좋은 감정만이 가득했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심각한 것은 딱 질색이라는 키튼의 말과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은, 싫어도 심각할 수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들의 삶에 가해지는 또다른 방식의 폭력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키튼 역을 맡은 배우는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에서 의대지망생 남동생 역을 맡았던 킬이언 머피.... 찾아보니 플루토가 오히려 먼저 찍은 작품이구나...우째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겨... 하지만, 고통받고 있는 이성애자 여성의 진정한 친구는 게이 남성 뿐이라는 설정은 나름 식상했다. 파니핑크와 오르페오 이후 이러한 관계들이 은근 영화 속에서 반복 변주되는 거 같다. 현실도 그래??? 게이 남성들은 죄다 보살이라도 된단 말이냐?

 

왜 굳이 플루토를 '명왕성'이라고 번역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니, 플루토하면 만화주인공 강아지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랬더군. 말하자면, 명왕성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끝에서 아침을...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나름 심각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에서 엉뚱하게도 히치하이커 시리즈  '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가 떠올랐음. 나 미쳤어.    

 

0. 화려한 휴가 (김지훈 감독)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관객을 보고, 혹시 영화에 감동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면 제작진들 모두 치료 받아야 함. 아니, 치료 정도가 아니라 관객들의 아픈 기억과 역사의식을 '악용'하고 '착취'했다는 점에서 징벌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내가 저따위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억울했다.  

 

영화는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의 종합선물셋트. 여기에 플롯의 엉성함까지 더해졌으니...  연기 잘하는 배우 데려다가 바보 만들고... (김상경 불쌍해!)

정말, 정말 너무들 하더라...... ㅜ.ㅜ 

 

진실이 궁금하다.

원래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역량 부족 때문에 이렇게밖에 만들 수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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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의 로망 (?)

다녀온지는 2주가 넘었건만, 이제서야 사진을 열어보았다.

 

강릉에 강의차 갈 일이 있길래 동행을 수소문한 결과, 오래전부터 7번국도 일주가 로망(?)이었다는 송 모씨가 자원하셨고 역시 나름 로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장 모씨와 바다소녀가 결합, 주말을 이용한 2박 3일 짧은 여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로망'을 가진 젊은 그들 ㅎㅎㅎ

 

대전에서 출발, 영덕의 강구항을 기점으로 하여 주구장창 해안도로를 내질렀다.

 

 

 

 



영덕 강구항에서는 꿈에 볼까 두려운 온갖 초대형 '게' 간판들에 다들 입이 쩍 벌어졌는데, 그래도 나름 영덕이니 대게를 먹어보겠다는 치기를 발휘하여 '북한산' 대게를 먹었다. 영덕산은 겨울에만 판다고 하는데(그것도 금값에), 굳이 영덕까지 와서 북한산 게를 사먹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안 들었던 건 아니지만, 속이 꽉찬 게 다리 실컷 발라먹고 나니 그런 의문쯤이야 휘리릭 ~~ 맛나더라... (물론 진도 앞바다 출신 바다소녀는 뭐 이런걸 비싼 돈주고 먹나 하는 반응 ㅎㅎㅎ)

 

식당 앞에서 한 장... 나의 먼지색 덤블비와 함께...


 

조금만 올라가면 울진, 풍력발전단지 앞 등대 전망대 모습..

이무기한테 휘감긴 제국빌딩을 연상시키는, '대게 다리' 컨셉...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아름다운 풍광에서 행여 정신이라도 놓을라치면, 저 높이 솟아오른 대게 다리가 정신을 번쩍 나게 해주는 순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더 올라가서 삼척, 구비구비 산길 돌아 동해....

정말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산들을 보았더랬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아나면 정말 바다가 불쑥불쑥 요술처럼 나타나더라...

 

실로 오랫만에 추암에 들러 요상한 관광단지가 되어버린 정경도 감상하고, 동해시내로 들어갔는데...

예전에 파견 가서 두 달 동안 산 적이 있어 친근하기는 한데, 어달리 주변이 나름 간판들을 정비해서 도대체 단골로 가던 식당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더라는.. ㅡ.ㅡ

여기서 1박 하고..

 

다음날 아침 망상 해수욕장에서 커피 한 잔...

밤에 나들이 삼아 여러 번 갔던 곳이다. 다음 주 해수욕장 개장 준비하느라 고즈넉한 가운데 열심히 모래를 다듬고 있었다. 꿈에도 잊지못한 망상철도건널목 자살(?)사건도 떠올랐다. ㅡ.ㅡ 오싹...

 

그 다음은 정동진으로...

나야 두 달 살면서 환자이송하러, 그냥 바람쐬러 여러 번 들렀던 곳이지만 (그리고 고현정 소나무며 어이없는 까페, 모텔들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송양께서 가본적이 없다 하길래 인심쓴거다.

사진은 안 찍었는데, 정동진 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을 실증하는 아주 괴이한 구조물이 존재한다. 여러 번 봐도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 ㅡ.ㅡ

 

그래도 기찻길은 여전히 정겹구나아...


 

이윽고 강릉 선교장에 들렀다.

이런 양반집 고택에 들를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내가 백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밥상 이고 빨래감 들고 종종거리며  저 문턱을 쉴새 없이 넘나들었을텐데...  하지만, 내가 이렇게 관광객이 될 수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대한 힘' 덕분이다. ㅜ.ㅜ

 

우쨌든.... 정말 살고 싶은 (머슴 말고 주인으로) 집이다.......

젠장 부러워... 이런 데 앉아서 책 읽으면 머리에 정말 쏙쏙 들어올거 같잖아...

 

 

 


 

정원의 연꽃까지....

 


점심은 초당 두부로 진짜진짜 맛나게 먹고 (막걸리까지 먹고 배터져 죽을뻔했음 ㅡ.ㅡ)

먼저 상경해야 하는 장 모씨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우리는 또 밟아서 화진포로....

 

중간에 송지호에서 한 장...

이리도 고즈넉할 데가!!!


화진포에서 (김일성별장이라고 잘못 알려져있는) 북한 휴양소와 이에 맞선(?) 이승만, 이기붕 휴양소 구경하고 주변 탐색... 이승만 기념관 짓고 있던데, 밑에 작은 전시관에 보면 이승만 이기붕이 잘못한 일은 하나도 안 써 있다. 사람들 안 보면 낙서라도 해주고 싶었다. ㅡ.ㅡ (KIN! 하고 말이다)

 

다시 달려내려오다가 양양에 들러 역시 또 엄청 맛있는 막국수 먹고,

강릉 숙소에서 푹~ 쉬고 (강의준비 점검도 하고 ㅡ.ㅡ)

담날 아침에 두 시간 강의...(학생들은 재밌었을까???)

끝나고 초청해주신 P 샘한테 감자옹심이 칼국수랑 송편 얻어먹고

재개장한 참소리 박물관 재방문. 

예전에 송정리 아파트 상가건물에 있을 때보다 시설도 엄청 좋아지고 주변 경관도 좋은데... 나름 아쉬웠던 것은.... 예전에는 관장 아자씨가 직접 소개를 해주셨는데 이번에는 도우미들이.... 

음악이라고는 잘 모르지만, 당시 침침한 음악 감상실에서 LD 로 쓰리테너 공연 실황을 들려주며 감격스러워하던 관장 아자씨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립다고나 할까? 우리를 안내한 도우미 총각은 너무 건조했다. ㅜ.ㅜ

 

우쨌든,

송은 로망을 해결한 채 서울로, 나와 바다소녀는 대전으로...

 

과연 동해안 7번 국도는

누구라도 로망을 가질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

 

친구들, 다음 로망은 또 어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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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카드

미천한 고모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바쁜 조카들께서 친히 왕림하셨다.

 

초딩 3학년은 정성껏 치장한 봉투 속에 담긴 편지를 건내주었고,

초딩 1학년은 (개구리) 배고플 때 먹으라고 잘 말린 개미 한 마리를 동봉해주었다.

 

 ㅡ.ㅡ ;;

 

 

 




아름다운 편집에 신경을 쓰느라 맞춤법이..... 생일을 출하한다니, 이거 뭐 생일 도매상도 아니고 ㅎㅎㅎ

 


 

 


 

우재의  봉투에는 '나는냐 천재 개구리'라고 써 있다.

야는 은근히 고모의 가방끈에 껌뻑 죽는다. 웃겨... ㅎㅎ

 

귀여운 올챙이들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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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의 상품화 3부

홍실이님의 [] 에 관련된 글.

자본주의 경제에서 학술 계층의 존재 조건은 과학자들의 신념과 태도를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전통의 일부로 강화시킨다. 과학자들의 신념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차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상반된 믿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하게 부르주아를 나타낼 수 있는 일관되고 암묵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포함된다. - 개인주의 : 과학에서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한 부르주아의 원자론적 관점은 소수의 개인들(여기에서는 단지 “우리”)에 의해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의도를 독립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로운 주체라고 생각한다. “천문학이 지구의 공전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지구의 정지성과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즉자적 감각에 있었던 것처럼, 역사학에서 개인이 공간과 시간의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독립성에 대한 직접적 감각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지식인들만큼 독립성에 대한 느낌이 강하고 기만 상태가 한심하게 나타나는 곳도 없다. 과학에서의 개인주의는 인구집단이나 사회의 원자(유전자)들의 속성으로부터 집단의 속성을 유추할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해왔다. 이는 또한 출세욕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변환시킴으로써 이기주의라는 진화의 법칙을 고안해냈다.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부정이다.


- 엘리트주의 : 소수 지식인 집단의 우월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종종 인류의 생존이 이들 지식인들이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을 설득하고 부추겨서 그들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게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러한 편견은 특히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다룬 공상 과학 소설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소수의 헌신적인 과학자들은 억압적인 지배자를 계략으로 물리치기 위해 공모를 벌인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反) 민주적이며 전문지식에 대한 숭배를 부추긴다. 또한 대중 조작의 미학적 포장이자 학계의 방식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기도 하며, 때로는 인종주의와 성 차별주의를 강화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의 지식을 하찮게 여긴 결과는 농업 발전에서의 재난으로 이어졌다. 엘리트주의 관점은 지적인 삶에 대한 관리적 접근을 옹호하며, 학계나 기업 엘리트의 수용적인(cooptive) 자기선택을 인간사 해결의 합리적 방법으로 여긴다. 과학 내부의 이론적 문제에서, 엘리트주의는 위계적인 조직 개념에 대한 믿음과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통제 요인을 탐색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전자, 사회, 심지어 생태계의 명령 계통 모형을 선호함으로써 각 부분들의 호혜적인 상호침투에 관한 연구들을 지연시키고 있다. 개인주의가 세상에서 부분들(이를테면, 생태계의 종들)이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라는 모형을 선호한다면, 엘리트주의 패러다임은 자율성을 가로막는 구조를 강요한다. - 실용주의 : 서구 이념에서 “실용주의적”이란 용어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는 “이념적”이라는 단어와 반대로 찬미의 뜻이 담겨 있다. 과학자들에게 실용주의란 상품화와 전문화에 의해 부과된 경계 조건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왜”라는 질문 없이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미사일 전문가에 관한 톰 레러(Tom Lehrer)의 노래 가사를 보면 그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로켓이 발사되면 그것들이 어디로 떨어질지 과연 누가 신경을 쓸까? 내 부서가 아닙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Werner von Braun)은 말했지.” 과학자들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경로는 컨설턴트로서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하는 자문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효과적이려면 신뢰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문은 수용 가능한 영역에 한정되어야 한다. 신뢰를 거두어들이는 듯한 고객의 치켜 뜬 눈썹은 과학자들이 자문 제공에 좀더 신중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결국 자문가의 지적 지평을 협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사회 체계의 불공정에 관한 뚜렷한 감정은 필연적으로 이념적이라는 혐의에 연결되며, 학문적인 냉철함에 반대되는 미성숙성을 의미한다. - 감정과 이성의 분리 : 과학자들은 한 때 세계에 관한 모든 주장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었다. 권위에의 호소도, 스스로의 소망도, 학문적 논란에서는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감정으로부터 이성의 일정한 분리는 학문의 정통성을 수립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것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감정과 이성의 분리는 자의식적인 학술 행위의 방해물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근원에 토대를 두고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거나 연구 방법을 선택하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학술 논문의 양식화된 서문을 강요한다. 과학자들을 1인칭 대명사를 제거하고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이 “수동적인 비(非)인칭”이라고 기술한 문법 형태의 채택이라는 비열한 장치를 통해 스스로 창조적인 작업 과정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질문들이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형식상 자유로워진 후, 그들이 쉽게 재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자들이 “~이다(is)”와 “~해야 한다(should)”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지 평생에 걸쳐 논쟁을 벌이는 반면, 과학자들은 “비용 효과성”, “살상 비(比)” 같은 비(非)인칭적인 어휘들의 완충 효과 덕분에 자신의 노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만들 수 있다. 이제,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결과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감정의 보호자로서 사회화가 되어온 여성들이 학문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보다 감정적”인 것이 덜 이성적인 것을 의미하기라도 하는 양 구조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것이다. - 환원주의 : 연구에서 학술 노동과 통제 기능이 분화되면서, 일반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조직화 모형이 학술 사회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관련성 있는 유사한 작업들이 학과장 하에 편재되고, 다소 차이는 있지만 관계있는 업무들이 학장 하에 조직화되고, 각기 무관한 작업들은 다른 단과대학이나 부서별로 조직화된다. 이러면서 회사나 대학의 조직도를 따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인식된다. 실천에서의 이러한 분화는 원자론적 개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과학자들의 암묵적인 철학 체계 안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환원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 과학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트러스트를 야기했던 과거의 바로 그 상황들을 재현하고자 했던 반(反) 트러스트 법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상품화,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의 전면적인 결합은 학술 활동을 위한 삶에서 지배적인 사실이며 과학자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의 힘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우리 부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과학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가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그들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일차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는 과학의 강력한 통찰력과 이에 상응하는 인류 복지의 향상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때로는 공표된 목표와 모순되는 결과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굶주림이 지속되는 것은 식량 공급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방해하는 어떤 강력한 걸림돌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농업이 이윤과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반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건의료 조직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기업이며 사람들의 건강 필요에 의해서는 단지 부차적으로만 영향을 받는다. 과학적으로 정교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성들은 지성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집요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또한 부산물로서 인간 지성을 유산시킨다. 일부 국가들이 자본주의와 갈라서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 과학의 존재 방식이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현재의 구조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 자본주의에 의해 부과된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방식을 열심히 따라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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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의 상품화 2부

홍실이님의 [] 에 관련된 글.

과학의 상품화는 특별한 변환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스러운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논의하는 것은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학 활동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낳은 결과를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상품 형태는 매우 다른 재화들 사이에서 등가(等價)를 성립시킨다. 낙타 한 마리가 담요 한 장에 상응하지는 않지만, 낙타 한 마리의 가치는 담요 몇 장의 가치와 같을 수 있다. 즉 C≠ B 이지만 V(C) = V(B) 가 될 수 있다. 질적으로 동등한 교환가치를 통해 재화들을 거래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다른 것으로의 변환이 가능해진다. 시장은 연금술사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내고 있다. 이를테면 1980년 현재, 납 5백 파운드와 금 1온스라는 교환 비를 통해 납은 금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재화들 사이에 동등성을 성립시키는 이러한 능력은 인간 노동 산물의 교환이 개별 가구 밖에서 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여기에는 물론 다른 형태의 교환, 이를테면 관례적인 선물 증정, 공유, 어려운 시기의 재분배, 의례로 자리 잡은 교환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배는 상품 관계에 의해 주도된다. 가장 좋은 음식은 돈을 벌어오는 사람한테 주어지며 여성들은 스스로의 벌이를 관리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만 한다. 상품화는 개별 재화들이 경제적으로 비슷하면서 물리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비슷함과 다름이 거래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이는 추상적 사고의 위대한 진전이라 볼 수 있다. 교환이 완벽하게 상품화되고 교환가치가 재화의 객관적이고 경제적인 속성으로 나타나려면 그 전에 수(數)의 법칙이 작동할 수 있을 만큼 빈번한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같은 재화들이 규칙적으로 사고 팔릴 때, 구매자들이 생산자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른 곳에서 똑같은 생산품을 찾을 수 있을 때, 생산자들이 다른 고객들을 기대할 수 있을 때, 개별 구매자들의 특이한 취향, 상대적인 구매력, 개인적인 절박성 등은 매끈하게 제거된다. 투자가들이 더 큰 이윤을 약속하는 기업에 자본을 쏟아 부을 때, 그리고 사람들(심지어 매우 숙련된 사람들)을 일반화된 노동력으로, 생산의 대체 가능한 비용으로 다룰 때 상품화는 더욱 심원해진다.


19세기 말까지, 과학은 화학․전기 산업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채 이르기 전, 대대적인 과학의 상품화가 진전됨으로써 과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게 되었다. - 연구는 기업의 투자 분야가 되었다. 기술 산업의 경우, 매출의 약 3~7%는 연구와 개발에 지출된다고 알려져 있다. 자본 투자의 한 가지 방식인 연구 투자는 다른 투자 방식들, 이를테면 생산 증대, 광고 증가, 변호사와 로비스트 고용, 다른 사업 분야 기업의 인수, 노조의 궤멸, 잠재적인 고객 국가들의 정책 결정자들에 대한 뇌물 살포 등과 경쟁 관계에 있다. 이 모든 가능성들은 이윤 극대화라는 단일 척도를 기준으로 우열이 가려지게 된다. 기업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연구 투자가 예산 삭감의 1순위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기술 혁신은 즉각적인 성과물을 내지 못하는 반면, 광고 증가나 노동 혹은 재료비용의 감소는 이윤에 즉각 반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의 의사 결정에 관한 연구결과들을 살펴보면, 관리자들의 전형적인 결정 지평이 대개 3~5년 정도로 나타난다. 연구에 대한 투자는 이 정도의 시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만다. 한편,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들은 개별 기업이 아닌 대학, 국립 연구소 등 공공 기관에서 수행되면서 그 비용의 사회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개별 기업들은 투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며, 전체 비용은 세금을 기반으로 사회 전체에 고루 퍼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사회화된 연구라 할지라도 시장에 내놓을만한 상품의 생산 시점에 이르면 최종 개발은 다시 민간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고 이를 통해 배타적인 소유권 행사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이는 새로운 품종 개발과 관련하여 농업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국립 연구소들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여 인증된 종자 생산자들에게 이를 배포한다. 그러면 품종은 이제 일반적인 소유권이 되어 그것들을 “세공”하고 최종 결과물을 농민들에게 판매하는 종자회사가 독점하게 된다. 연구 투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학술 컨설팅 회사라 할 수 있다. 연구 보고서는 이들의 유일한 생산품이다. (1983년 당시, 보스턴 지역에만도 1~2백 개의 기업들이 생태학적 자문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보고서의 질을 검증하는 것은 동료 심사가 아니라 고객의 만족도라는 점이다. 그 보고서가 환경 영향 평가에 관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때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의뢰한 회사가 법률을 준수하고 있으며 그 활동이 무해하고 최소 비용으로 문제를 잘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당 감독 기구에 납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컨설팅 회사와 기업 고객의 관계는 복잡하다. 컨설턴트는 당연히 소규모보다는 대규모 계약을 선호하며, 따라서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욱 완벽한 조사를 시행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다른 한편, 이 분야의 극심한 경쟁 때문에 컨설턴트들은 비용 절감의 강한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환경 지배가 득이 된다는 것을 보증하고, 발생 가능한 문제들을 나열하며, 문제가 될만한 상황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정도로 연구를 끝내는 것이다.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컨설팅 기업들에게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이들의 자본이란 대개 전산 설비와 사무용 가구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자산은 고객들의 신용이라 할 수 있다. 환경 컨설팅 업체들이 시장에서 빠르게 교체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학술 보고서가 일단 상품이 되고 나면 이 또한 기업 세계의 두 가지 다른 측면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역마차는 탈취될 수 있고, 맥주에는 물을 탈 수 있다. 즉, 이들 과학적 상품들은 도둑맞거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업적을 가로채거나, 성공담을 출판하기 위해 혹은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결과를 변조하는 행위는 점차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과학적 사기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널리 알려진 필트다운의 사례처럼)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은 명예를 두고 경쟁하는 개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과학적 사기는 이제 합리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 과학적 발견은 수량화가 가능해졌다. 기업은 신약이나 컴퓨터를 개발하는데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비용,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개발 회사나 개발 부서들은 학술 활동을 특정 문제의 해결 방식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일반화된 인간 노동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과학자들은 “학술 인력”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산 비용, 대체 가능한 존재, 관리감독의 대상이 되었다. 학문 분야에서의 노동 분업에 해당하는 전공과 서열의 창조가 점차 합리화되고 있다. 학술 활동의 창조적인 부분은 과학자들 중에서도 점점 소수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나머지는 점차 프롤레타리아화되면서 문제의 선택과 접근 방법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 매일의, 혹은 매 시간의 활동에 대한 통제권마저 상실해가고 있다. 과학적 관리는 포드(Ford) 사의 악명 높은 테일러 체계 하에서 자동차 산업을 위해 처음 개발되었으나 점차 상업, 사무직 노동, 학술 연구에까지 확장되었다. 관리적 접근은 노동력을 관리자의 목적을 위해 쓰이는 객체로 인식한다. 기술이 분절되고 그에 따라 특성화가 심화되는 현상은 해당 분야의 지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관리자의 비용 계산으로부터 비롯된다. 두 명의 일반 의료기사를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혈액검사요원과 소변검사요원을 한 명씩 훈련시키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분절화와 단순작업화는 노동력의 통제를 것을 공고하게 해 준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학술활동의 단순작업화는 더욱 큰 소외 현상을 낳는다. 생산자는 전체 생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창조적인 지적 능력을 연마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단 노동이 소외되면 과학은 더욱 강도 높은 감독을 요구하는 하나의 일자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감독의 부담은 소외를 더욱 촉진하며 부패나 무관심을 부추긴다. 이는 통제권을 과학자의 손에서 빼앗아 관리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없으며, 학술 행정 담당자들도 더 이상 그들 동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없다. 대부분의 책임은 조직 위계의 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원의 통제권자들에게 돌아간다. 이로부터 파생된 한 가지 결과는, 연구비 지원기관에 제출되는 연구계획서의 분량이 늘어나면서 좀더 상세하고 신중해졌고, 연구 의도를 정직하게 반영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결론을 합리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연구비 지원기관들은 좀더 신중한 쪽을 선택하며 이를 위해 더욱 상세한 기술을 요구한다. - 학술 노동자 그 자체가 생산되어야 한다. 대학과 전문학교의 목적은 다양한 기술 수준의 학술노동 인력을 최저 비용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또한 민간 기업의 인력 부서를 위해 교육 과정 그 자체를 외부 서비스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교육자들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학생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며,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즉, 기업주들이 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즉, 대학원 교육 기간을 단축시키고 돈이 되는 박사학위를 더욱 많이 배출해야 한다. 초등 교육에서의 이러한 압력은 “기본으로 돌아가기”를 뜻한다. 실용주의적 접근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며, 언제나 그렇게 노골적인 것만도 아니다. 교육자들은 가끔씩 사회의 지배적 경향과 충돌하며, 자신들만의 목표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창조적인 프로그램마저도 체계를 유연하게 통제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불분명한 임무를 위해 인력을 생산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상품화에 대해 대조적인 방식들로 반응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이를 애통해한다. 그들 중 다수는 중간 계급 출신으로서 거래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편으로 학문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 산물이 교환을 위해서라기보다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즉 사용가치를 갖는 일에 헌신하려고 과학자라는 진로를 선택했다. 그들은 과학이 상품화되기 이전 시대의 신화인 협동정신, 진리에 대한 숭고한 헌신이 사라졌음을 한탄한다. 그들은 학술 노동의 프롤레라티아화, 자율성의 소실을 개탄하며 관리 통제와 가치에 대한 관료적 결정에 대해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저항한다. 만일 그들이 조직을 결성한다고 해도, 이를 노동조합이라 부르기를 꺼려한다. 다른 한편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이용하는데 몰려들고 있다. 일부는 (특히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미국 번영의 짧은 시기 동안) 재정적 혹은 다른 보상을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대안들 중의 하나로 학문 분야의 직업을 선택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과학자의 약 2/3이 민간 기업에 고용되어 있으며, 이 곳에서는 이윤 추구가 솔직하게 목표로 인정된다. 전문가적 지위를 상실하고 자본주의 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어 가는 이행 상황은 직업 지식인으로서 과학자들의 이념적 위치와 사회적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 형태는 개인적 책임감과 이견(異見)을 대담하게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신중한 비판 혹은 고의적인 무관심, 그리고 비굴한 아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관료화나 프롤레타리아화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저항, 새로운 질서에 대한 현실적 혹은 열광적 참여, 또는 자본주의 반대 투쟁에서 다른 소외된 부문과의 연대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계급 분할이 과학 분야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일하는 백만여 과학자들 중 다수는 학술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며 그들의 생산품이나 자신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그 반대편에는 많아봐야 수천 명 정도가 부르주아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연구에 자본을 투자하며 연구 개발 방향의 상당 부분을 결정한다. 이 두 극단 사이에는 혼자 일하거나 대학, 혹은 연구소 등에서 소규모 집단 활동을 하는 쁘띠 부르주아 전문가 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의 동기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에 의해 유발되지만, 그들의 연구 활동은 점차로 정부 기관, 민간 기금, 혹은 기업으로부터의 연구비에 좌우되고 있다. 이제 이들에게 연구비는 필수품이다. 그리고 연구비와 연구의 관계는 점점 변해가고 있다. 원래 연구비는 연구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과학 기업주들에게는 연구가 연구비를 위한 수단이다. - 과학에 대한 자본 투자는 주요 산업이 되었다. 여기에는 화학, 기계, 문화 매체, 실험용 동물의 표준 품종, 그리고 학술 정보들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나타난 결과 중의 하나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원래 기여하고자 했던 학술 연구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나타났다. 기술은 자연 탐구에 필요한 가장 저렴하거나 최선의 방법을 찾는 쪽으로 향하기보다 특정 시장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쪽으로 몰리게 된다. 제 3세계 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세일즈 관리자들은 새로운 연구소들이 “최고의”, “최첨단의” 장비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품 보충이나 서비스 수선, 안정적인 전력의 가용성 문제 등은 확인도 하기 전에 말이다. 물론 이들 국가의 대통령은 정신과 병원에 기증된 휘황찬란한 최신식 16채널 뇌파측정기 앞에서는 포즈를 취하겠지만, 과실 파리(fruit fly) 조사에 사용되는 바나나 곤죽으로 가득 찬 양동이를 시험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기관을 새롭게 설립하는 것은 기존의 시설을 작동하도록 유지시키는 것보다 훨씬 극적 효과가 있다. 열대 지방 전역에 존재하는 사용되지 못하거나 파손, 혹은 방치된 시설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제 의미심장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현재 미국에서 과학자 한 명이 일하는데 드는 비용은 1년에 약 10만 달러 정도인데, 이는 산업 혹은 서비스 노동자 다섯 명의 급여에 해당한다. 제 3 세계 국가들의 경우, 과학자들이 받는 월급은 훨씬 적고 장비와 보급품 비용이 더욱 비싸며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한 명의 과학자를 지원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는데 50명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학술 잡지는 원래 학술 사회의 개인적인 소통 공간을 마련할 목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출판사들이 학술 서적과 학술지 발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출판사의 대표들은 과학자들에게 아첨하거나 이들을 부추겨서 또 다른 교과서를 쓰게 만든다. 이를테면 “우리 출판사는 분자 유전학과 발생 유전학에서 이미 베스트셀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을 통해 그 시리즈를 완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집단 유전학 교과서를 집필하도록 만든다. 이제 무엇이 출판되는지는 학술지를 채우려는 출판사와 편집자의 필요, 그리고 정년 심사, 새로운 일자리, 혹은 승진을 위해 시의 적절하게 게재가 이루어져야 하는 저자의 필요에 달려 있다. “이러한 학술 출판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흔히 언급되는 정보 급증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잡음의 급증이라 할 수 있다. 대학 학문의 상품화는 대학의 재정적 필요로부터 비롯되었다. 대학은 네 가지 측면에서 과학자들을 투자 대상으로 여긴다. 첫째,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얻기 위해서, 둘째, 학술 보고서로 홍보효과를 얻고 그 명성을 이용해 기부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셋째, 대학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등록금을 인상하고 학생들을 유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대학 교원에 의해 개발된 발명품의 특허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대학 내의 자원 할당은 연구자들의 명성과 다양한 사업에서의 돈벌이 능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많은 대학의 학자들이 관리자들로부터 그들의 연구를 자금이 좀더 풍족한 분야 (이를테면 유전 공학)로 전환하라는 압력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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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의 상품화 1부

하드디스크의 자료들이 '지나치게' 엉켜 있어서, 오늘 맘 먹고 몇 시간 동안 정리... 공부한답시고 이런저런 논문이랑 자료들은 정말 많이도 퍼다놨더군. (심지어 중복된 자료들도 종종 발견......ㅜ.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라는 속담을 다시 떠올렸다. 저거만 다 읽고 되새김질 했어도 말이지........... ㅡ.ㅡ 예전에 번역해둔건데, 콩 반쪽도 나눠먹는다는 심정으로 공유... 다른 몇 챕터도 시간 나면 번역하고 싶다만 과연 그 귀하다는 '시간'이 날 지는 모르겠음. ----------------------------------------------------------------- 변증법적 생물학자 The Dialectical Biologist by Richard Levins and Richard Lewontin 번역 : hongsili (2005.2) 제 8장. 과학의 상품화 근대과학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팽창, 생산의 전환, 새로운 상품의 창조, 더 많은 이윤을 낳는 생산 방식의 창출,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가려는 자본가의 필요 - 이들이 바로 근대 과학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한편 근대과학의 이념적 토대는 이러한 자본가의 필요 뿐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개인주의, 사상의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 국제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권위를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려는 성향)의 정치 철학과도 부합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과학의 참여 방식 또한 발전해왔다. 과학은 귀족(궁정악사와 광대까지 포함하여)을 위한 사치재로부터, 봉건적 신학이론에 대한 반대 투쟁의 중요한 이념적 무기이자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자원의 기능을 해왔다. 18세기 말, 산업과 농업 분야에서는 오랜 침체 끝에 발명과 창조의 뚜렷한 성장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의 경우, 1750~1780년대에 특허 등록의 숫자가 92건에서 477건으로 늘어났다. 이 즈음 농업학회가 창립되었고, 가축 교배와 관리는 발전을 거듭하여 헤레포드 (Hereford) 같은 품종을 만들어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런던에서 거래되는 소의 무게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양의 무게는 세 배 증가했다. 또한 19세기 초에는 최초의 농업 학술지가 발간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들은 과학이 가진 군사적, 상업적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다. 가장 오래된 학회들로는 1662년에 설립된 왕립학회, 1780년 뉴잉글랜드의 혁명 지도자들이 설립한 미국 학술원, 프랭클린의 미국 철학회(1768), 그리니치의 해군천문대(1675) 등이 있다. 프랑스 정부는 1795년에 에꼴 폴리테크니끄(Ecole Polytechnique)를 설립했다. 나폴레옹은 전쟁 때문에 인도로부터의 인디고 수입이 중단되자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를 대체하는 합성염료를 개발하도록 지시했으며 심지어 군수품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 국가들이 정복한 열대 지역에서는 생물학적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목록 작성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린네(Carolus Linnaeus)의 지도력 하에 계통분류 생물학의 번성을 가져왔다. 미국에서는 농업과 광업의 발전을 위해 과학적 지식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며, 1862년까지 모렐 법안(Morrell Act)을 통해 농업과 공학 기술을 위한 공유지 교부 대학 설립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첫 세기 내내, 과학은 도로나 등대 같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외부효과(externality)로서, 그리고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이를테면 파스퇴르가 당시 프랑스 와인 산업을 위협하던 파이토포라 Phytophora를 동정한 것처럼)으로서 그 역할을 넓혀왔다. 그러나 이 때까지 과학은 아직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의 응용은 불확실했으며 잠재력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그 산물은 여전히 경험적인 혁신에 대한 사후 설명으로 나타나곤 했다. 상품의 생산, 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인간 노동을 투입하는 것은 분명히 자본주의보다 앞서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 활동의 상품 형태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으로 점점 더 깊숙이 침투했다. 1607년, 세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몬 (Timon of Athens)”에서 이러한 상품화를 개탄했다. "황금? 노랗고 반짝이는 소중한 황금? ... 이것들은 이렇게 검은 것을 하얗게, 역겨운 것을 정당하게, 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평범한 것을 고귀하게, 늙은 것을 젊게, 비겁한 것을 용감하게 바꿀 것입니다. 아, 신이시여! 이것이 왜? 신이여 이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왜 이것이 당신의 사제들과 종복들을 당신 편으로부터 끌어내고, 튼튼한 남자들의 머리맡에서 베개를 빼앗아간단 말입니까 이 노란 색의 노예는 신앙을 졸라매고 부서뜨리며, 저주받은 이들을 찬양하고, 백발의 나환자들을 경배하게 만들며, 도적들에게 직함과 존경을 부여하고 그들을 인정받게 할 것입니다. 원로원들과 함께 ..." 2세기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1848)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부르주아는 그들이 지배력을 획득한 모든 곳에서 온갖 종류의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인 관계들을 끝장냈다. 그들은 사람들을 ‘타고난 상전들’에 묶어 두던 갖가지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갈가리 찢어버렸으며, 적나라한 자기이익과 냉랭한 ‘현금 지불’ 이외에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관계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 불타는 의협심, 속물적인 감상주의의 가장 경건한 황홀경마저 이해타산의 차가운 물 속에 익사시켜버렸다. 그들은 인간적인 가치를 교환가치로 변화시켰고, 헤아릴 수 없는 불가침의 공인된 자유들을 대신하여, 저 하나의, 비양심적인 자유 - 거래의 자유 -를 확립했다.... 또한 부르주아들은 지금까지 명예롭고 경외에 가득 찬 존경을 받았던 모든 직업들의 빛나는 후광을 여지없이 발가벗겨 버렸다. 이들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임금 노동자로 바꾼 것이다. " 이전에는 인간 상호작용의 직접적 결과였던 활동들, 이를테면 오락, 정서적 지지, 학습, 여가, 아이 돌보기, 심지어 혈액과 장기 공여, 혹은 자궁의 쓰임새 같은 것들마저 시장으로 들어왔으며 인간관계는 비인격적인 거래 뒤에 숨어버렸다. 인간사의 새로운 측면들이 상품화할 때마다 일부에서 저항이 표출되기도 했는데, 이는 이전 가치의 절하에 맞서는 분노의 형태로 나타났다. 시장에 반응하여 빵 값이 자유화되었을 때, 영국 노동계층에서는 빵을 얻기 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통신 수단이 상업화되고 정보 독점이 가시화되자 1980년대 유네스코의 제 3세계 대표단들이 주도하여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새로운 정보 질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보건의료의 상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보건 서비스와 건강보험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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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투자전략: 토론문

다른 자료를 찾다가, 지난 건강형평성 학회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했을 때 준비했던 원고 확인... 기록차 남겨둔다. ------------------------------------------------------------------- 토론 3: 이 글에서는 사회투자전략 중 건강투자 전략에 집중하여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건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두 번째 발표 (이원영, 건강투자전략과 국민건강)의 첫 머리에 정리되어 있듯, ‘건강’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으며 참여정부의 건강투자전략은 그 중 인적 자본, 투자재로서의 건강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효용이나 가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건강이 항상 최고, 우선순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고, 반면에 다른 차원의 안녕을 포기하고 건강을 지키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선택과는 별도로, 인권으로서 그리고 잠재력(capability)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것이 건강이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것이자 유보하거나 박탈할 수 없는 속성이다. 건강권은 세계인권선언(25조)은 물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제 12조)에 명시되어 있는 사회권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이는 경제개발의 동력, 혹은 개인의 경제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여겨질 수 없다. 물론 충분한 교육을 받고 높은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 수준에서 노동시장에서의 성취, 사회 수준에서 생산성의 증대와 경제개발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만일 높은 교육수준과 건강상태가 생산성 증대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인적자본은 회수되어야 하는가? 건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성취는 오로지 상품생산에만 존재하는가? 아마티야 센(Amartya Sen)의 지적대로, ‘인적 자본’ 개념은 우리가 “왜”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 ‘개발’을 ‘경제성장’으로만 이해하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와 가치 있는 삶을 증진시키는 ‘포괄적 사회개발’로 바라본다면,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 잠재력’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건강을 생각한다면, 참여정부의 ‘건강투자론’은 개발지상주의와 시장동원체제의 수사적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2. 건강 불평등과 사회 불평등 한편, 인적자본 개념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건강투자의 문제인식과 접근의 방식을 살펴보자. 건강은 생물학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차원적 속성으로서, ‘정상성’에 대한 생물학적 규범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생물학적/사회적 가치판단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건강상태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며, 인구집단에서 관찰되는 건강 수준의 변이도 매우 광범위하다. 우리는 다양하게 구분되는 집단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건강 수준의 모든 차이를 불공정, 혹은 불공평하다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회적․경제적․지리적으로 구분되는 인구집단들 사이에서 체계적이고 잠재적으로 개선 가능한 차이가 존재할 때, 즉 건강결과 그 자체의 분포보다는 건강 격차가 불공정한 사회질서의 결과물로 나타날 때 이를 문제라고 여긴다. 건강 형평성이 곧 사회정의의 문제라면, 결과의 평등을 넘어서 과정과 절차에서의 공정성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건강 불평등의 개선을 위해서는 격차가 발생하는 사회구조/자원의 분포 방식 자체에 대한 교정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가난하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가?’, 혹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한가?’라는 인과성 문제에서, 그동안의 역학적 연구들은 건강 선택(health selection, 건강 → 사회경제적 지위)보다는 사회적 결정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사회경제적 요인 → 건강)의 역할을 더 강조해왔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건강 불평등은 한국사회가 가진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사회적․경제적 질서의 상당한 변화 없이 소위 건강 투자 - 특히 개인의 생활습관 개선이나 보건의료서비스의 확대/적정화 -를 통해 개인들, 더구나 취약계층의 건강을 향상시키고 생산성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완수불가능한 과제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보자. 지역안전보건센터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여러 모로 영세사업장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불안정 고용을 영속화시키는 고용정책,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노동안전 법규/제도의 변화 없이, 안전보건 서비스의 추가제공만으로 과연 건강이라는 인적자본이 축적되고 이것이 추가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미 지금도 한국사회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건강 수준이 낮아서 노동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의 노동과 혹독한 노동 강도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 여성의 고등교육 수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형편없이 뒤쳐진다. 이들 생산 활동 적령기의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불충분한 인적자본 때문인가? (그림 1). 그림 1 OECD 국가들의 교육수준에 따른 30-44세 여성 취업률, 1995년 (자료원: OECD Center for Educational Research and Innovation. OECD Publication, Paris 1998) 3. 정치적 수사 혹은 진심? 두 번째 발표에서 지적했듯, 건강투자를 통한 경제개발의 논리는 어린이와 청장년 집단에서 심각한 사망과 상병 문제를 경험했던 저개발 국가들의 지원과 관련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참여정부에서 제기한 사회투자전략, 특히 건강투자전략도 정치적 우파와 개발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서의 순기능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또 다른 성장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정치적 수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차치하더라도 현재 보건복지부에서 제시한 ‘건강투자전략’의 추진과제를 통해 과연 ‘전 국민의 건강수준 향상, 소득/지역에 따른 건강격차의 해소, 적정 수준의 국민의료비 증가속도 관리’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유럽 등을 위시한 소위 선진국에서는 ‘건강투자’라는 표현을 잘 안 쓰기도 하지만, 쓰는 경우에도 ‘경제개발’을 위한 수단적 속성보다는 건강 불평등의 극복과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포괄하는 통합적 ‘사회개발’을 논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건/복지 서비스 투입을 중심으로 하는 보건(복지)부의 영역을 넘어서, 건강 결정요인들을 다루는 다양한 정부 부처 (예, 교육, 농업, 노동 등) 사이의 협업과 공조에 의해 보건목표와 건강증진 전략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복지부의 전략과 과제를 본다면 불평등을 야기하는 ‘결정요인’에 대한 고려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의료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하에 보건의료서비스의 상품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 정부는 경제개발논리에 근거한 건강투자전략에서 벗어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NAP) 권고안에 근거하여 건강권을 포함한 사회권을 보장할 수 있는 포괄적인 사회개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부처 간 협력을 통해서 ‘보건복지정책’을 넘어서는, 건강 결정요인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역군’으로서 민중들은 그동안 충분히 노력하고 시달려왔다. 생산성 운운하며 사람들을 ‘인적자본’으로 무장시켜 시장으로 내모는 것은, 최소한(!) 보건복지부가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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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끝내고 싶다.

오늘까지 원고를 마무리해야 하는게 있는데... 뇌주름이 없어지는 바람에... 진도가 진짜 안 나감... 입수한 첩보(라기보다 공저자끼리의 담합)에 의하면 Y 샘도 오늘낼 출장이라 일욜 밤까지 쓸 예정이란다. 문제는.... 월욜 아침 일찍 있는 강릉에서의 강의를 빙자하여 낼 친구들과 뜨기로 한 건데.... 노트북 들고 밤에 작업하겠다고 설쳐대면 이 인간들 백만년 전 일을 언급하며 또 나를 비난할거다. 본과 4학년 때, 주말을 맞아 정선에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이던 동아리 선배형한테 놀러가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출발하기 전 날, 즉 금요일 날... 월요일에 모의고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친구들은 다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 ㅡ.ㅡ 그 약속을 취소했다간 산채로 매장당할 것이 분명하여, 할 수 없이 2박 3일 여정에 올랐더랬다. 기차 안에서 보겠다고 나름 시험 족보랑 예상 문제집도 두어권 들고 갔는데... 시험을 앞두고도 약속을 지켜낸 신의와 희생정신에 대해 칭찬은 못해줄망정, 평소에도 안 보던 책을 여기까지 왜 들고 왔냐고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공부하는 척한다고 재수없단다. 시험날짜도 모르는 인간이 무슨 새삼 공부냐며 빈정빈정............ ㅜ.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험 문제가 너무 터무니 없어서 주말 내내 도서관에서 공부한 이들과 내 성적이 별로 차이가 없었다는 것... 고마운 무성의 교수들 ㅎㅎ) 그 이후, 이 사건을 백만번은 들먹였던 사악한 인간들.... ㅡ.ㅡ+ 학생이 공부하고, 직장인이 일하는게 무슨 죄라고 말이지... 그나저나, 이와 유사한 상황을 이번 주말에 다시 재현??? 그들의 빈정거림과 야유가 두렵구나. 진도는 진도대로 안 나갈게 뻔하고... 아, 후딱 끝내고 상큼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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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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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해역 나의 뇌가 오염될 뻔했다. 

부끄러움 없는 사회, 무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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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생일 시즌이다.

줄줄이... 어.... 많기도 하다.....

심지어 생일이 두 달도 넘게 남은 지인 J는 나에게 때이른 선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퍼즐을 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맞춰서 액자로 달라는...

나의 평소 행태를 생각한다면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겠으나,

세간의 예상과 달리 그 요청에 기꺼이 부응했다. 이는 오염된 뇌를 씻어내고자 하는 나의 수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 결과물을 받아든 J는 몹시도 좋아했다. 내가 봐도 뿌듯하긴 했다...

 

 

 


 

내 생일도 7월이다.

김씨는 내 생일 때문에 수영대회 출전을 포기했다고 투덜거렸고 (뭔 소리야?), 엄마는 1박 2일 잔치를 준비할 태세...  그나저나 가족들과 생일밥 같이 먹는게 백만년 만이니 기념할만한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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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수련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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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정책 포럼] 창립대회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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