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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문제와 개인적 문제의 경계는?

레이님의 [살아간다는 것 조차 투쟁인 세상] 에 관련된 글.



우선 가슴 아프고 슬퍼해주신데 감사합니다. 아니, 사실 이런 일에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또 다른 분노를 느끼지만, 이건 멀리서님에 대한 문제도 아니고 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이런 분노를 느끼는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렇게 따로 포스트를 달게 된 것은 멀리서님이 쓰신 어휘에 대해 제가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왜 그런 거부감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의 일방적인 생각이라거나 아니면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려는 태도라고는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멀리서님과 저, 그리고 슬픔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소통의 코드를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해 생존자'가 아닙니다. 가해자입니다. 가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방식의 결과가 생물학적 죽음을 택한 것(제가 해석한게 맞다면)이었다는 점이 저를 더욱 분노케 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피해생존자는 여전히도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한 개인에 대한 애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느낀것은 가해자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그리고 이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반성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만약 가해자의 지인이었다면, 저도 역시 슬퍼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신뢰는 개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실수가 아닌 이상 갑자기 추락하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멀리서님의 안타까움에 공감(100%는 아닐지라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가해자가 '가해 생존자'가 아닌 것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현실적 문제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해 생존자는 다릅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현실을 되돌아보고 직시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생존자'인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는 별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이건, 윤리적이건, 도덕적이건..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특히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현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나 관습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일처제가 갖는 사회적 의미나, 아이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 근친관계를 부정하는 것 등은 사실 우생학적 의미나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를 존속시키기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운동 사회 전반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이론적인 사회주의의 내용들을 생활의 과정에서 체득하고 구현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과 관념들을 그대로 둔채 이론적 부분에서만 차용하고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관념을 가진 주체들만을 조직화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제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처럼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도 정치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당사자들간의 문제로 치부되면서 정치적인 영역에서 논의되지 않아도 될 문제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를 드러냈다는 점에 대해 저는 지지하는 것입니다. 가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도덕적인 오점, 가해자 가족들이 가졌던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낙인에 대해 괴로워 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바가 아니지만, 결국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에게 던저진 윤리관념이고 도덕관념일 뿐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운동을 위해서였다면, 그런 도덕/윤리적 관념에서 벗어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되돌아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차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분노했던 지점은, 가해자를 옹호하는 방식이 상당히 '정치적 고려'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성폭력 사건 자체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폭력, 학교폭력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인정되고 있는 반면에 왜 성폭력만큼은 당사자 개인들간의 문제이거나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걸까요? 위에 나열한 폭력의 문제 역시도 개인들간에 시작된 것들이긴 마찬가지 입니다. 정치적 문제와 개인의 문제를 나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관계된 문제냐 아니냐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집을 거래하는 것도 개인간에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공적인 부분으로 취급됩니다. 제게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제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고려되는 문제입니다. 친구와 술을 마실때도 상대방의 정치적 상황들을 고려하며 말을 고르게 마련입니다. 왜 '성'적인 문제가 어떠한 정치적 조건들을 배제한 채 사적 개인들 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착각하게 되는걸까요? 그건 우리가 '자신의 소유에 대해 집착하는 이기적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르주아식의 인간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성운동에서 종종 이야기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낭만적이고 감성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개인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폭력성에서 벗어나 자치(自治)를 행할 수 있는 개인들의 정치적인 능력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조직'이나 '집단'으로서의 정치적인 영역만으로는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양식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직의 성원이자 집단에 속해있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혁명의 주체로 인식할때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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