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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9호>정몽구의 기부, 우리시대의 도덕의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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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가문의 무력진압으로 죽은 아이를 안고 권총으로 저항하는 노동자들>

 

정몽구의 기부, 우리시대의 도덕의 극단!

 

 
정몽구가 최근 사재를 털어 5000억원의 기부를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기부금이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 기회를 부여해 사회적 계층 이동에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계층 이동? 같은 공장에서 같은 차를 만들면서 같은 일을 하는 하청 노동자들에게, 정규직으로의 어떠한 ‘계층 이동’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가 바로 그였다. 불법으로 들여온 파견 노동자 8600명이 정규직으로 ‘계층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은 5000억의 반에 반도 되지 않는다!
 
정몽구의 이중성은 선배 자본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록펠러의 사설 경비대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러드로(Ludlow)공장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 5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 중엔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록펠러가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소녀를 위해 돈을 댔다.
 
이런 불가사의한 이중성은 그 추악한 면이 언론에서 편집되어 보통 감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 매수된 몇몇 지식인들은 이런 이중성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경제> 9월 6일자 사설이 그런 노력이다. 사설의 글쓴이는 적절한 답을 카네기에게서 찾았다. 카네기는 “인간의 본성이 돈을 공짜로 주면 게을러지고 타락한다는 진실을 간파했다.” “거액의 돈은 오랫동안 후손들의 손에 남아 있지 못하며 그것이 되레 독(毒)이 돼 자손들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여겨”졌기에,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
 
아주 대담한 답 아닌가?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타락에 대한 투쟁이기에, 그의 기부만큼이나 ‘도덕적’ 행위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냉혹한 자본가의 모습은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회초리를 든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다. 자본가는 자신의 미덕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미덕과 양심을 지켰다. 그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죽도록 일을 시킨 후에 돈을 주어라. 그래서 노동자들이 근면함의 미덕을 지킬 수 있게 하라. 기관총으로 50명을 때려잡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도덕성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들은 ‘근로자’여야 한다.
 
우리 시대의 이 아름답고 무자비한 도덕을 보라! 자본가의 기부가 자본가의 착취를 용서하고 있는 게 아니다. 착취가 곧 도덕에 대한 단호한 수호다. 이 도덕은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라는 대법원의 판결 위에 있고, 징계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뼈를 뭉개버리는 폭력으로 유지된다.
 
숫자만이 이 도덕의 미친 극단성을 증언한다. 내가 얼마를 기부한다면, 나는 그만큼 벌 수 있어야 한다. 정몽구는 얼마를 기부했는가? 5000억! 그의 근면함, 그의 능력은 대체 누가 평가하는가? 그는 무슨 일을 했고, 누가 그에게 그런 돈을 쥐어줬는가? 그는 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한 근면성과 능력으로 일했기에, 5000억을 기부하고도 남는 돈을 버는가?
 

줄잡아 그의 재산이 5조원을 넘는단다

그 돈은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한다

- 백무산 <자본론> 중에서

 
이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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