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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4호>교섭창구단일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악법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교섭창구단일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악법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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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을 다시 생각할 시기

 

악법에 대응한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96/97 총파업과 같이 악법을 뒤집을 전국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총파업이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총파업의 조직과 더불어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악법은 분명 민주노조운동에 독이다. 그러나 악법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노동자계급에게는 약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기존노조는 복수노조를 불편해한다. 설사 창구단일화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때문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상호불가침조약(?), 서로 성립된 곳에서는 복수노조 만들지 않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야 말로 노조의 민주성과 자주성이 무엇인지 환기해야만 한다. 만일 새로운 노조의 설립을 틀어막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당장은 어떨지 모르지만,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기존노조의 지도부는 기 성립된 노조가 민주적이며 자주적이라고 자신한다. 정말 그러한가? 그러면서도 조합원 대중을 불신한다. 기간의 노조 활동에서 조합원은 이미 ‘빠꼼이’가 되어서, 철저히 실리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조합원 대중은 구조조정 시기를 거치면서 실리성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합원 대중은 폭발적 분노와 온건한 실리지향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이것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끄는가는 노동조합에 달려있다. 이점을 간과한다면 노조운동은 대중을 대상화하고 오히려 고립된다. 조합원이 노동조합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토대로 한 투쟁을 자신의 삶의 총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면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시기에서 노조의 개량화, 조합원의 보수화는 급격해질 것이다. 자본은 타임오프제 시행 시 호언하였다. “타임오프는 조합원과 관계없는 일이니 별다른 투쟁을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현장에서 그러했다. 대부분의 현장의 간부와 활동가는 자본의 예언과 같이 조합원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지금부터라도 관성을 걷어내고, 제2의 민주노조 운동이라는 결의로 간부와 활동가는 조합원을 만나야 한다. 지켜져야 할 노조는 현재 있는 노조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다. 그래야만 교섭창구단일화 시기에 반동과 자본의 교란을 막을 수 있다.
 

우리가 아니라 자본을 교란시키자

 
우선 자본이 법을 핑계로 우기는 교섭창구단일화를 분쇄해야 한다. 현재 악법은 자본이 원한다면 노조마다의 자율교섭을 가능하게하고 있다.(자본에게 선택권을 주는 악법이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교섭과 무관한 현장투쟁은 불가피하다. 악법 하에 자율교섭이 보장되지 않음을 선언하고, 현실투쟁으로부터 자본이 자율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방법뿐이 없다. 한편 그동안 노조 설립이 제약되었던 모든 자들은 노조를 자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이다. 일관된 형태로 자본이 현장을 관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체의 역량에 달려있다. 맞다. 현실은 주체의 역량을 진전시키지 않고는 극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민주성과 자주성을 환기하자는 것이다. 지난 10년 간 노조는 합법의 틀에서 후퇴하는 운동을 하였다. 막무가내 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법 틀에서 어찌 할 수 없다면 그 틀을 깨는 투쟁을 해야 한다. 유성투쟁을 보라! 노동자에게 합법을 강요하고, 자본은 위법과 탈법을 버젓이 행사하는 것을. 이것이 자본이 바라는 바다. 자본이 우리는 교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본을 교란시키는 투쟁을 해야 한다.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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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3호>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함께 만듭시다!] 내 사랑 민주노조를 넘어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건설하자!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함께 만듭시다!]

 

내 사랑 민주노조를 넘어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건설하자!

 
민주노조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노조만 바로세우면 그래서 그 민주노조운동에 동의하는 제세력들을 모아낼 수 있다면 노동조합만으로 현실의 계급투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던 시절도 있었다. 이 생각은 옳았는가?
 
지나온 역사는 그것이 옳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의지가, 정신이 옳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이라 불리는 운동의 한계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옳지 않은 방침이었다.
 
첫 번째로 그 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것은 바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에 동의하였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였다.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조직체였고 운동이었다. 우선 그 운동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같은 몰계급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전국적인 선진노동자 결집체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하지만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운동은 노동조합을 전제로 하는 현장조직운동의 자기내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당연한 귀결로 그 운동은 스스로의 정치적 판단을 결정하여야 하는 시기마다 조직적인 분열을 거듭하였고 결국 해소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IMF와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은 그 공격의 성격이 총자본의 총노동에 대한 자본축적의 재편을 위한 공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원인에 대한 공격이 아닌 결과에 대한 방어에만 머물러 있음으로 인하여 전 계급적인 반격과 반격을 넘어서는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이후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요구하였다. 그 반성은 현재의 노동조합운동만으로는 기간의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를 지키기는커녕, 노동자 자신의 생존권마저도 지켜낼 수 없다는 뼈저린 반성 이였다. 그리고 일련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패배는 민주노조운동 진영 전반의 연쇄적인 후퇴와 양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과를 놓고 싸우는 노동조합 운동이 아니라면, 이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에 대하여 싸워야 한다면 어떤 운동이어야 하는가? 문제는 개별자본 마저도 자본주의 체제의 연관 속에서 노동에 대한 공세를 취한다는 것이며, 현재의 착취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전체 자본가 계급의 기획과 의도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저들의 공세가 이러할진대 우리의 창끝은 어디를 겨눠야 하는가? 현재의 현장통제와 조직력의 와해, 제반권리의 후퇴, 일상적인 구조조정의 진행 등은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이러한 제반의 문제를 야기하는 지금의 체제를 바꾸어내는 투쟁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투쟁은 늘 다람쥐의 쳇바퀴처럼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계급정치를 통해서만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다. 계급정치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당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 당은 어떠한 당이어야 하는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개선하면 된다고 하는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과 같은 의회주의 사민주의 정당인가? 아니다. 당은 자본주의를 근본에서부터 갈아엎는 사회주의 노동자 당이어야 한다.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란 오직 그것의 폐절과 새로운 세상의 건설외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어낼 첫 걸음,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만이 지금의 우리 노동자에게 오직 유일한 대안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노조 사수와 건설을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정당, 노동자계급의 사회를 건설하기위해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나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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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성노동자>전2권, 재능교육 비정규직투쟁에 함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