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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26
    채식요리, 같이 만들어먹어용:-D(7)
    금자
  2. 2008/05/26
    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7)
    금자
  3. 2008/05/17
    죽음의 밥상(4)
    금자
  4. 2008/05/17
    임시보호처(5)
    금자
  5. 2008/05/03
    불편한 관계, JIFF(3)
    금자

채식요리, 같이 만들어먹어용:-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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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

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 

믿을 수 없어.

시민단체들이 주 5일  문구를 채용 조건에 써 놓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라는 생각이 마구 든다.

허위, 과장 채용 광고로 노동부에 제소할까보다.

 

3월 여성의 날부터 시작하여 지구의 날, 공정무역의 날, 태안 방제활동, 대운하 반대 행사 등등

행사가 끝나고 하루 종일 서 있어서 허리가 찌르르하는 느낌을 부여잡고 집에 돌아오면

설겆이 통에는 그릇이 쌓여있고

방바닥에는 먼지가 구릅처럼 뭉쳐 떠 다니고

아침에 쓰고 던져놓은 수건이 먼지 구름들 옆에 뒹글고 있고

냉장고 안에는 며칠 동안 해 먹지 못해 시들해진 야채나 허연 곰팜이가 끼여있는 버섯.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50주의 주말을 통으로 가져다 바쳐서

대운하 폐지 선언이 으랴차차, 터져 나와도

나는 이런 냉장고를 청소하면서 음식 재료들을 싹쓸어 쓰레기통에 쳐 넣으면서

행복할 거 같지는 않다.

 

5월 24일,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행사로 서빙고 역에 아침 8시 도착했다.

토요일 아침 6시 일어나는 것이 나름 억울해

모여있는 다른 단체 활동가들에게

토, 일요일 근무를 하면 평일에 대체휴무를 쓸 수 있는냐고 물어보자

그런 건 없다는 대답과 있어도 일이 많아서 못 쓴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

도체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과 대체휴무는 영 모른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어서

같이 침 튀기고 피를 토함시롱 단체 욕을 하거나, 

것도 거시기하면 이렇게 아침부터 오두망정을 떨게 만든 이메가 욕이라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들 환경운동을 열심히 한 각고의 세월 끝에 욕망마저 사그라든 성인군자의 세계, 극락의 세계, 도의 세계에

진입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도가 통하지 않는다.

 

플랫슈즈를 흔들면서 카페에서 허섭한 책도 읽고, 음식물 쓰레기는 말린 후 잘게 썰어 텃밭거름으로 만들고,

블로그 글도 쓰고, 진보넷 집들이도 놀러가고, 비혼 축제도 느긋이 즐기고, 가만히 빈둥빈둥 나인채로 있고

나 사용기도 적어보고, 친구네 냐옹이 채식 간식도 만들어주고,

그런 것들을 하면서 주말을 보내고 싶다.

 

 평일에는 이걸 하다가 이걸하고 저걸하고 하고하고 ,이멜 보내고 이걸 하고 돈계산하고 하고하고, 마구 복잡하다가

 주말에는 다시 일하니 

 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지,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왜 하고 있는지

 그런 거를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다.

 

 단체에서 일하는 주제에 욕심도 많다라든지,

 일반 직장인들은 더 죽을둥 살둥 일한다든지

 그런 말은 위로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기쁘게 일하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고 내가 일을 어떻게 꾸리고 싶은지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느 날 일이 없는 주말 아침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있는 생활은 싫다.

 내 삶에 마구 드드드드드, 대운하가 건설되고 있는 중이다.

 플러그를 뽑고, 한 박자 천천히.

 내가 일하는 단체의 슬로건이지만, 그래서 더욱 쾌씸하다.

 천천히, 가고 싶다.

 사랑도, 관계도, 잡스러운 것도 이 세상의 모든 러블리한 것들 중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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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고대대학원 신문사에 쓴 글, 블로그에 옮기니 딱딱하네 그랴 -_->

 

『죽음의 밥상』 by 피터 싱어, 짐 메이슨

 

 

 

칠 만원짜리 서평 원고를 위해 만 오천짜리 책을 샀다.

서평이란 출판사가 뿌린 책 소개를 밑감 삼아 자기 감상을 양념 치듯 섞어 쓰라는 조언을 무시하고 화장실 변기 위에서, 달리는 지하철에서, 자다 깨서 노란색 형광펜을 그어가며 읽었다.(덕분에 원고 마감일이 지나서 이 글을 쓰는 중입니다)

진정성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을 주는 이 책, 참으로 기특하다.

허나 허구한 날 동물의 시체를 먹고 사는 인간들이 400쪽이 넘는 도덕적인 책을 읽고 개과천선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진정성의 문제는 늘 재미가 없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소고기에서(누렁아 미안, 널 고기라고 부르다니)

지구 온난화를 만드는 메탄가스의 1/3이 나오고 동물 사료를 만들기 위해 GM 곡물이 재배되어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열림우림은 잘려나가고 수질오염은 엄청나고 소고기만 적게 먹어도 전 세계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블라블라블라.

웬만한 채식 책은 다 읽어서 육식에 대해 A4 20장쯤은 참고문헌 없이 줄줄 써 내려갈 것 같은데도,

나는 7년 동안 채식을 3번쯤 뒤엎었다.

어찌된 것이 고기 냄새가 후강을 타고 내려오면 온 몸이 환장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아, 고기가 먹고 싶어.

인간의 욕망이 진정성을 이기는 순간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한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가 여전히 고기를 먹는 것도,

채식에 100% 동의하는 내가 애인과 함께 고깃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도

(된장국만 퍼 먹으면서 언젠가는, 교화시키고 말겠어!!! 부르르르르르 하고 앉아잇음) 

충분히 따뜻하고 인간적인 우리가 나치가 유태인에게 했던 것보다 더 잔악무도한 공장식 축산업에서 나온 고기를 먹는 것도 말이다.

 

올해 세계문학상 당선소설인 ‘스타일’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뚱뚱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얘기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라면 키가 작으면 하이힐을 신고,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화장을 하라는 빅토리아 베컴의 말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

 

아아, 옳으신 말씀.

 

이 글을 쓴 피터 싱어처럼 윤리학자도 아닌데 윤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밥을 먹는 것은 스스로에게 가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으면서 윤리가 무엇인지 고민씩이나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

사람에게 상처받고 ‘타인의 눈물은 물과 다름없다’는 러시아 속담을 곱씹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가슴 미어지는 쌈박한 동물.

그래서 우리는 이성과 도덕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죽음의 밥상』은 여기에 박차를 가한다.

과연 얼마나 인도적이어야 충분히 인도적인 식사를 하는 것일까.

인도적으로 키워진 동물의 살코기와 공정무역으로 재배된 농산물을 구입하는 ‘양심적 잡식주의자’와,

생선과 유제품까지도 아예 먹지 않는 100%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의 차이는?

유기농 수입 농산물과 비유기농 지역 농산물을 먹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친환경적일까?

문어나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은 고통을 얼마만큼 느낄까?

동물 세포를 실험실에서 키워 만든 배양고기(비동물성 고기)가 나온다면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어도 될까? 등등.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쏙쏙 들어오는 것은 저자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이 책상 머리에 앉아 책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즐겨먹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가족과(우리 집의 모습?),

양심적 잡식주의자의 가족과, 아이 둘을 비건으로 키우는 가족을 졸졸 따라다니며 책을 썼다.

심지어 지구에서 가장 윤리적이며 싼 식사를 하는 ‘쓰레기통 다이버’들과 쓰레기통에서 따끈하게 건져온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다.

이처럼 저자들은 세 가족의 밥상에 올라온 식품 회사들과 농장을 일일이 연결해서 방문하고 인터뷰하면서

우리가 선거일이 아니라 날마다 “마트에서 투표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국에서 풀어놓고 기른 닭의 달걀이 닭장 달걀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는 현실을 통해 더 나은 선택이 시장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 저녁, 한 끼라도 진정성이 욕망을 이기는 밥상을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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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보호처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광우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멋쟁이, 라고 봐주기는 커녕 -_-;;;

까칠하고 까탈스럽고 성격 모난 사람의 취급을 받는다.

혹은 브릿지도 바르도 흉내를 내는 동물 애호가로 생각된다.

 

나는 정확히는 채식주의자라기보다는, '고기 공장'에 반대하는 반(anti)육식자로 조개도 먹고

간혹 남들이 남긴 고기도 주워 먹는다.

 

그리고 멍멍이도, 냥이도 키우지 않는다.

간혹 섹스도 피곤해서 못 해 먹겠는, 나 하나 추스리기에도 바쁜 인간이라서 그렇고,

멍멍이나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니며 소녀적 취향을 낭만적으로 간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싫어서 그렇다.

 

그런데

요새 유기견과 유기냥이에게 관심이 간다.

유기 동물을 보살피는 것이 고양이와 테이블에서 홍차를 나눠 마시거나

멍멍이와 네일 케어를 받는 것처럼 '호사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사진의 어진이는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고, 먼 길을 돌아 주인을  찾아왔다가 다시 버림을 받았다.

다시 버릴 때는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2층 아래로 개를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진이는 구조될 당시 뒷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버티도 새끼 때 버려져 한 겨울을 혼자서 살아남은 멍멍군이라고 했다,

 

잠깐, 입양을 생각했지만 혼자 살고 바쁘고  집에 잘 붙어있지도 않고

개 사료 살 돈을 털어 신발을 기여이 사고 말 (이후 찬밥으로 개밥 만들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겠지)

나에게 그건 참 이기적인 것 같아 관뒀다.

 

멍멍이를 돌보고 계신 분께

유기견들 임시보호는 할 수 있다고 하고 마음을 접었다.

 

이제, 멍멍이들과 냥이들은 임시보호하고

그 동물들을 맡아줄 사람들에게 반육식을 권하는 활동으로 

온갖 귀여븐 동물 사진으로 불싸질러진 이내 마음을 수습해야 쓰겄어.

 

p.s

광우병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30개월 이하의 소' 같은 말 말고(병 걸리기 전에 소를 빨랑 잡으라고?)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는 피켓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어진이와 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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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관계, JIFF

난 전주영화제에 놀러나와 있다. 자랑질이다.

썬그라스를 연신 쓰고 다녀도 '간지'보다는 햇빛을 피하려는 진정성이 더 느껴질만큼 날씨도 뜨겁다. 에헤라디야~~

('간지'용이다, 실은)

금요일 휴가내고 노동절인 목요일부터 내리 놀고 있다. 에헤라디야~~자진방아를 돌려라.

느껴지는 바대로, 팔자 좋은 년이다.

특히 기혼녀들에게는 정말 팔자 좋은 년이다.

 

나와 같은 팀의 혜진은 휴가내고 전주 간다는 내 옆에서 징징대면서 말했다.

"나는 한참 농사 바쁠 때라서 시댁인 전라도 고흥까지 내려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 말을 도돌이표 했다.

뭔가 조금 억울하고, 휴일에 놀러다니는 비혼이 좀 부럽기도 하고, 고흥은 너무 멀고, 그래서 가기는 진절머리 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의 체념도 약간 섞인 그런 표정이었다.

 

이봐, 나는 게이랑 위장결혼하지 않는 한,

받지도 못할 축의금을, 그리고 피같이 애지중지한 휴일을 털어서 니들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곤한다고, 이라는 말이 느자구없이 터져나올 뻔 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낮은 출산율이라는 거국적인 문제를 가져오는 주범에

수유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서 유방암 걸릴 가능성이 더 많다는 기사에 두려워하고, 그런다고.

이렇게 국제영화제에 팔랑팔랑 놀러다니다보니 생명보험 하나 안 들었는디 말이쥐.

 

하지만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도 고흥 가기 싫은 한 기혼녀의 사정에 공감했으며

무엇보다도,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생각될만한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싶었다.

혜진은 나보다 4살 어리다. 그리고 자알 결혼했다. 남편이 아파트도 샀다. (크헉, 이게 젤 부러) 

거기다대고 비혼녀 운운하면 남들이 나를 인생의 루저, 찌찔이처럼 여길 것이고, 진짜 '노처녀'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집에 놀러와

자기 친구 중 결혼도 잘하고, 남편도 잘 만나고, 재테크도 나름 성공하고, 아이들도 예쁘게 크고 있는데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친구 이야기를 하자,

'노처녀 히스테리'를 왕빵 부렸다.

그 이야기를 한 친구가 우울증에 걸린 결혼 잘 한 여자라도 된 듯 마구 삿대질까지 해 댔다. 

오바, 했다. 열내다가 갑자가 정신을 차리고 족팔려서 뻘쭘했다.  

"넌 애인이 있어도 어째 노처녀 히스테리가 걸리냐?"라고 내 친구가 수상스레 쳐다봤다.  

"배째라, 난 '꼴통 페미'에 노처녀 왕 히스테리야" 라고 대꾸했다.

뭐 꼴리는 대로 대답했지만

나도 궁금했다.

나, 노처녀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야?

내가 왜?

아파트 때문에??

믿을 건 차곡차곡 모아둔 돈 밖에 없는 비혼여자 주제에 골드미스는 커녕 실버미스도 감지덕지한

'친환경 스댕(steinless)' 미스라서???

 

나는 마치 부르조아를 타도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투사가 된 것처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삼시롱 나름 생의 고통에 시달리고 자신의 자유가 메말라가고 있다고 비통해하는

모든 기혼녀들이 미웠다.

미워요, 미워. 것도 왕창으로다.

내가 남편이 사준 아파트와 가져다주는 월급을 포기하고  '도시 빈민'  비혼녀가 되는 삶을 선택했듯이

국제 영화제를 싸돌아다니고 인생에 대해서 심오하게 번민하는 이 거시기까지 차지하려 드는 것은,

너무 거시기했다.

하다못해 비혼인 나에게  기혼녀의 처지를 불평하는 것은 그렇다.

인생에는 싸가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억하심정까지 들었다.

요는 내가 남편이 없고 집도 없고 월급도 곱하기 1배이고 암이 걸리면 돌봐줄 인간과 돈도 없이

죽어야만 팔자라고, 불평하지 않듯이

적어도 기혼녀들은 내가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팔자 좋겠다는 눈빛을 보내서는 안되는 거다.

 

그런데 어제 여기 전주에서  '불편한 관계'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다큐먼터리처럼 아이 둘을 가진 부부의 일상을 소소하게, 일상의 속도로 그려냈다.

베티 프리단이 1963년, '여성의 신비'라는 책에서 중산층 전업주부의 삶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드러냈다면

이 영화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1980년대 헝가리 부부의 표정과 삶으로 그려냈다.

이 흑백영화 속의 삶을 보고 있자니, 고통스럽고 마음이 부딪껴서 

밖에 나가 초여름 바람에 부유하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시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알게 되었다.

미국이건, 헝가리건, 1960년대건, 1980년대건,

그리고 여기 2008년의 한국이건,

전업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결혼해 본적이 없지만 

그들의 빈 곳과 불만과 허전함도 비혼녀의 그것과 형태가 다를 뿐임을.

기혼녀를 절절이 미워하면서 여기 내려와서 처음 본 영화가 그랬다.

 

남의 고통에 몰인정해지지 않기,

내 스스로 '친환경 스댕'  미스의 삶을 살갑게 껴 안기.

그리고 기혼녀를 내 불안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기,

결국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기혼녀를 적으로 만든다.

 

나는 전주에서 철이 조금 더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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