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집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08/19 20:05
서울 황학동 부근 청계천변에 자리 잡고 서있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되고 허름한 삼일 아파트.
그곳에 '더불어 사는 집'이 있다.
 
한국 최초로 노숙자들에 의해 빈집 점거가 이뤄진 곳.
노숙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공권력도 결국엔 이들의 점거를 인정하고 삼일 아파트가 철거되는 2005년 8월말까지는 거주를 허락한 곳.
그곳에서 만난 노숙자들은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점거인 공동체를 이루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직접 찾아가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들이 많았다.
결국 나는 지난 8월 16일 용기를 냈다.
3명의 일본 친구들과 함께 삼일 아파트를 찾았다.
더불어 사는 집의 송재희 대표님을 포함해 그곳에 살고 있는 6명의 점거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삼일 아파트는 곧 무너질 것만 같았고, 밤이면 으시시해 귀신이 나올까봐 돌아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낡았지만 그곳은 분명히 더불어 사는 따스한 집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들을 안방까지 안내하고 시원한 음료수까지 대접해주면서 이들은 일본의 노숙인 정책을 질문했고,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들도 숨기지 않고 풀어놓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삼일 아파트를 점거해 살아가고 있는 이 노숙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생존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법대로 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법의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자들에게서 이런 말을 훨씬 자주 듣게 된다.
샤말 타파가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치밀한 미행작전으로 잡혀가 결국 네팔로 강제 추방되었을 때 항의 전화를 건 나에게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한 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불법체류자이고, 법대로 그를 추방시켰을 뿐이라고...
 
그런데 그 법은 누구의 법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같은 법치국가에서 법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과연 그럴까?
더불어 사는 집을 만들어 더불어 살고 있는 노숙인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형법에 의하면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는 것은 중죄이기에 엄벌로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
노숙인들은 법보다 앞서는 것이 생존권이라고 말한다.
 
"사람 살자고 법을 만든 것이지, 사람이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더불어 사는 집의 노숙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얻기 위해 법의 테두리를 넘나 들며 지난한 투쟁을 이어왔다.
공무원과 경찰과 용역깡패와 단속반원들을 피해 밤에는 낮에는 밖으로 나갔다가 밤이면 돌아와 숨어 잠을 잤다.
삼일 아파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내쫓기 위해 공권력은 일부러 화재를 내고, 유리창을 깨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치사한 방법까지도 동원했다.
그러나 가진자들의 협박과 회유와 폭력 그리고 법대로 하겠다는 으름짱도 노숙인들의 생존권을 짓밟지는 못했다.
결국 공권력은 한시적으로 이들의 빈집 점거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노숙인들은 한전에 몰려가 전기를 사용하게 해달라며 농성을 하고 시위를 벌였다.
전기도, 물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철거 예정의 아파트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전기를 달라고 하니 한전에서는 처음엔 당연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돈을 내고 전기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필수품도 돈을 내고 사야 하는 체제에서 노숙인들이 내세운 것은 생존권이었다.
 
매년 수십억원의 이익을 내는 한전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일 아파트에 무상으로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날 선풍기를 켤 수 있게 되고, 전기밥솥으로 뜨거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물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인 더불어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법을 내세운 공무원들의 권위적 태도라는 높디높은 벽을 노숙인들은 '단결투쟁'으로 극복한 것이다.
 
한국의 노숙자 정책은 이들을 군대와 같은 분위기의 수용소에 쳐넣어 사람들의 시야에서 이들을 지워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이 그런 수용소 같고 군대 같은 쉼터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런 노숙인들을 위해 더불어 사는 집 사람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얻은 성과를 나눠갖자고 말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기에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이들은 노숙자들의 재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집'과 '서로를 돕는 공동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여명의 노숙인들은 엄격하지 않은 분위기의 삼일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지내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등 자신이 얻은 것을 베풀려고 한다.
다른 노숙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슬을 맞으며 자지 말고 함께 아파트에 들어와 살자고 권하기 위해서다.
보통 노숙인들은 많이 속고 당해본 사람들이라서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더불어 사는 집 사람들은 먼저 일주일에 한번씩 무료 급식을 하면서 노숙인들과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려 하는 것이다.
빈집 점거에 성공한 노숙인들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결성하고 나아가 다른 노숙인들까지 돕는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 '더불어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몸으로 겪어본 공무원들의 권위주의에 진저리가 난 노숙인들은 적어도 직접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며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모두 모여서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결정한다고 한다.
더불어 사는 집은 형식적으로 대표, 사무국장, 사무차장 등의 위계적인 직책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인간관계까지 위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8월 말이 되면 이들은 정든 삼일 아파트를 떠나야 할까?
글쎄.
민주적 소양을 갖춘 준법시민이라면 모를까, 더불어 사는 집의 노숙인들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
준법시민이란 곧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더불어 사는 집에서 보낸 1시간 동안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법이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저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안되면 물러설 수도 있겠지.
삼일 아파트는 헐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빈집 점거 운동이, 점거 투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이들이 점거할 수 있는, 그리고 집 없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어야 하는 빈집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공무원노조의 도움으로 점거가 가능한 빈집의 정보를 얻고,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노조가 더불어 사는 집의 점거노숙인들을 돕고, 이 노숙인들은 다시 다른 곳을 점거해 공간을 마련하고 길거리 노숙인들을 도와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상호부조의 가장 좋은 예가 아닐까.
 
나도 그곳에서 이들과 더불어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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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9 20:05 2005/08/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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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비폭력직접행동 2010/12/22 17:10 DELETE

    Subject: 더불어 사는 집, 두리반

    돕님의 [더불어 사는 집] 에 관련된 글. 어제 두리반 화요 다큐상영회에서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를 보았다. 나도 2005년에 더불어 사는 집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숙인, 자립, 점거, 주거권, 농성, 철거민, 공동체 등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고, 녹색평론에 글을 쓰기도 했다. 더불어 사는 집은 전기가 끊어져 어두웠던 계단하며,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가 마치 지금의 두리반과 비슷했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유난히 따스한 온기마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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