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없애는 법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7/01/03 02:28

돕헤드님의 [감격으로 운동은 생명을 얻는다] 에 관련된 글.

 

밤늦게 책상에 앉아서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있다.

 

2006년을 시작하면서 무슨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05년에 일어났던 일들을 보면서 2006년은 분명 대추리에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리라 직감하고 있었고, 온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저항행동을 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인 2005년 12월 말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대추리에 내려가 노래를 부르면서 주말은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는 메이짱이 자던 불때는 방을 좋아했고, 메이짱이 운영하던 찻집도 좋아했었다.

대추리에 처음 들어오면 가장 먼저 가던 곳이 그 찻집이었으니까.

그 찻집에 있던 연탄난로도 좋았고, 거기서 울려 퍼지던 음악도 좋았고, 메뉴판도 맘에 들었고,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도 좋았다.

그래서 거기서 주말마다 노래도 불렀다.

 

2006년 초에 충주호에서 인권활동가 대회가 있었는데, 그거 마지막 날이 1월 14일이었고 마침 팽성 농민들이 트랙터 순례를 마치고 대추리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주민촛불행사 500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충주에서 대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었다.

오전 10시쯤 인권활동가 대회를 마치고 다른 인권활동가들은 버스를 타고 대추리로 갔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 오후 5시 무렵이 되어서 대추리에 도착했었다.

찻집에 들어선 순간 바로 그 인권활동가들이 먼저 와 있었다.

찻집 분위기는 따뜻했고, 다들 몇 시간 전에 헤어졌었지만 다시 대추리에서 만나니 참 반가웠다.

자전거로 그 긴 길을 달려온 피로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촛불행사를 시작할 무렵 내리에서부터 줄줄이 트랙터 행렬이 대추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두근거리기 시작하던 가슴은 '올해도 농사짓자'라는 구호가 불에 타오르며 어두운 대추분교 운동장을 환히 밝혀줄 때 거의 찢어질 듯 벅차올랐었다.

그렇게 1년을 시작했고, 그 뒤로 난 대추리에 살 집을 마련하고 아예 주민이 되었었지.

돌이켜보면 1년 동안 이어진 그 감동의 힘이 그렇게 컸었다.

 

1년이 흐른 지금 그 감동의 에너지는 어디론가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세계 최강 제국의 군대에 맞서, 경찰과 철조망과 법을 무기로 내세운 가진자들의 폭력에 맞서 한 움큼도 되지 않는 팽성의 풀뿌리 농민들은 참으로 질기고도 용감하게 싸웠다.

 

나르마다 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인도의 농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가슴팍에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자기 집을, 자기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버티고 서서 지키고 있었다는 아룬다티 로이가 들려준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이야기, 인도의 독립투쟁 이후 가장 괄목할 만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생생한 현실이 되어 대추리에서 바로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주저했겠는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바로 내 눈 앞에서 온갖 가식을 벗어던지고 알몸을 드러낸 국가폭력의 현장에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대추리를 국가폭력에 반대해 평화와 인권과 생명의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의 해방구로 만들고자 하는 부푼 꿈이 있었다.

대추리 꼬뮨의 꿈은 나의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나의 현실에서 국가의 실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관계에서 국가로 상징되는 관계들, 위계질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대추리 마을에서 나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를 통해 일상이 짜여지는 국가 없는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억압과 굴종의 그물을 갈갈이 찢어낸 그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민중의 연대와 협동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나는 그 새로운 그물을 보다 수평적이고,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보다 질기게 짜내고 싶었다.

이것은 나의 오래된 현실이자 오래된 꿈이며 오래된 미래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더 공상적이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더 현실적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았다.

 

혁명이란 내게 추상이 아니라 현실의 삶 그 자체였고, 국가라는 괴물은 혁명을 통해 단칼에 무를 베듯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그저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모든 것은 명료했고, 단순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란 어디 저 너머에 보일랑 말랑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대안적으로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노동자 계급을 조직해서 일거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설사 그것에 성공했다고해서 저 뿌리깊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일거에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우리들 몸에 새겨놓은 낭비적이고 소비적이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그래서 착취적일 수밖에 없는, 그렇게 인간과 자연을 착취해나가기에 도저히 지속가능하지 않은 삶의 방식은 일거에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을 살지 않으면 설령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다고 해도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멸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가 살던 대추리에서부터 비자본주의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육식을 거부하면서 채식을 하고, 자동차를 거부하며 자전거를 타고, 수세식 화장실 대신 생태화장실을 쓰면서 나는 소비를 하는 삶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는 삶의 조건들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태적 감수성, 평화적 감수성, 인권적 감수성이 길러졌고 전기와 석유가 없어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국가도 없고 자본주의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꼬뮨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국가와 사회를 심오하고도 단순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고 한다.

 

"국가는 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하나의 인간관계이자 하나의 인간 행동양식이다.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 (콜린 워드 지음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돌베개, 2004년, 35쪽에서 인용)

 

국가를 없애는 해방감, 국가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충만함을 나는 마을에서 도시로 전이시키고 싶었다.

2006년의 대부분을 대추리에서 보내면서도 그곳에서만 살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벌이는 대안운동 역시 소홀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이 흐름은 2007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는 도시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국가를 없애고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행복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여나가려고 한다. 

 

그것은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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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02:28 2007/01/03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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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kkwang 2007/01/03 12:00 Modify/Delete Reply

    2007년도도 대추리 기운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기를, :)
    글을 보고 삘 받고 갑니다.

  2. 에밀리오 2007/01/03 14:35 Modify/Delete Reply



    나는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을 살지 않으면 설령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다고 해도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멸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나는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을 살지 않으면 설령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다고 해도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멸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나는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을 살지 않으면 설령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다고 해도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멸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라는 말씀이 또 와닿았어요. 언젠가 '자본주의 세상을 때려 엎으려면 내 안에 있는 자본주의적인 생각부터 갈아 엎어야 한다' 라는 말을 듣고 공감했었는데...

    와 정말 배울게 많아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힘내시길!!!

  3. londonsmog 2007/01/08 01:34 Modify/Delete Reply

    직접행동.. 학생신분으로 부모님밑에서 사는 저로선 아직 다가가기힘든 구역처럼 느껴질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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