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24호의 기사 중에서
누구 보라고, 무엇을 위해, 왜 이런 기사들을 기획했을까
가끔 재밌는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좋은 기사는 아니었다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옷이래서 입어봤는데 몸에 맞지 않았을 때,
어깨에 패드가 너무 두껍게 들어갔거나 컬러에 풀을 너무 세게 먹인 듯한
그 제목들부터가 부담스럽고 특히 세번째 제목은 오만하다는 느낌도 든다
'386'이라는 말을 한 세대의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언급하는 것도 정보가 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말을 어떤 집단에서 가장 많이 활용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때가 묻은 표현인지도
새롭게 돌아보고 지적하고 다른 표현을 고민해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알기론, 삼팔륙 이라는 말을 가장 자주 써먹고 즐겨 유행시킨 사람들,
필요하면 한껏 치켜세웠다가 입에 쓰면 지그시 밟으면서
그 말이 내포한 80년대라는 한 시절까지도 멋대로 단정하고 유린한 세력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주류 언론과 정치계다
조선일보 제자리잡아주기 운동이 한창 뜨겁게 펼쳐지던 시기에 어떤 이들은
학생운동을 우선으로 하는, 게다가 이 사회의 학력 중심주의, 학벌주의가 그대로 투영된
삼팔륙이라는 말을 이제 제발 그만 쓰자는 이야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잠시 움찔했던 사람들까지도 이 말을 여전히 사용하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필자 중 한 사람인 오연호의 주제의식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의 글은 좋았다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 읽더라도 배울 점이 많은 글이었다
그러나 지금 '오마이뉴스'를 운영하는 오연호의 글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의 글을 그대로 수긍하기에는 그간에 벌어진 일들이,
그의 존재의의와 오마이뉴스의 가치를 회의하게 만든 사건들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FTA를 놓고 정부의 입장을 담은 광고를 실었던 일만 해도 쉽게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첫번째 기사의 앞부분에, 한 문학동아리의 한 여학생에 관한 연애담은
기사 말미에서 다시 언급하며 친절하게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주기까지 하신다
왜 그러시나
누구에 대해서는, 80년대 당시의 업적과 현재 차지한 위치에 대해서 정리해주시고
누구에 대해서는, 지극히 사적인 뒷담화를 굳이 끌어오신 거,
사람 하나 한심하게 만드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거
(이미 숱한 사람들이 사적인 자리와 공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그 주인공을 씹으셨는데)
정말 모르시나
좀 더 예민하게 읽는다면, 그거 성차별적 발상 아닌가
그 내용을 굳이 집어넣으신 의도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다
(차라리 아무 의도가 없기를 바라지만)
그 뒷담화는 기사 내용 전체에 관한 신뢰도를 떨어트리거나
이런 기사를 기획한 그 매체 자체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트릴 수 있다
그 짧은 몇 줄로 인해 나같은 독자는 시사in의 인권감수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 외 몇 가지 거슬리는 표현들
1. 낭만을 거세당한 캠퍼스에 서서히 투쟁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거세'라는 말도 유감이고, 80년대 학보사 기자로 되돌아가신 듯한 표현도 참...
낭만을 부정적으로 해석했던 분들이 많긴 했지만 거세당한 적은 없다고 본다.
문화예술 각 분야를 감상하는 것도, 창작하는 것도 오로지 맑스주의 리얼리즘
혹은 위대한 00님의 철학에 따라 움직일 것을 강요하는 분들이 당시에 많긴 했지만
복잡하고 비장한 원론을 참고하면서도 해학과 전복을 표현하는 멋진 예술작품들이
많았다. 그것은 또 다른 낭만이기도 했고, 투쟁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2. 6월 항쟁은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촉발했다.
(6월 항쟁, 물론 한국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촉발했다고 단순하게 말해도 될까
해방 이후부터 전두환정권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소박한 수준의 민주주의,
너무 기초적인 단계의 인권조차도 확보할 수 없어서 목숨을 건 사람은 많았고
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가치관을 뒤흔들었던 사건 사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지금이 '민주화'된 사회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위의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
3.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글을 써 분신 정국을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그의 글이 당시 학생운동을 질타하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상업적 언론의 의도적 왜곡과 과장된 주장이 난무했던 그 시기를
'질타의 목소리'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당시 학생들이나 민주화세력이 얻은 상처가
너무 크다.)
4. 학번으로 세대를 구분해 노동운동·농민운동 따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이 세대를 규정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그 말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구하고'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한계가 너무 크다.)
5. 김 전 대통령은 대중조직 능력 등 정치가 요구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386을
‘젊은 피 수혈’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껴안았다.
('젋은 피 수혈'이라는 말을 긍정하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재고해야 한다.)
6. 외환위기의 된서리를 맞고도 대기업을 뛰어나와 벤처기업을 창업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386 세대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성공에 대한 강한
열정과 확신은 그들을 ‘신기술의 바다’ 로 이끌었다. 벤처 거품이 걷히면서 많은
벤처기업이 신나게 터뜨렸던 샴페인 뚜껑을 다시 닫아야 하는 상황이 왔지만 이
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코스닥의 주축이 되었다.
(이 대목,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생략하고, 그래서, 코스닥의 주축이 되어서 좋은가?
IT를 중심으로 벤처의 열풍이 휘몰아칠 때, 누군가의 샴페인을 위해 야근수당도 주말도
없이 날마다 밤새며 희생당한 사람들, 그러다 회사가 넘어져서 자살해야했던 사람들
잊을 수 없다. 이 대목에 관해선 철저한 자료분석과 비판과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7. 김민석 전 의원의 행위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했던 허인회
씨(고려대 정외과 82학번)의 행위와 광주 5 18 기념식에 갔다가 단란주점에서
술자리를 가졌던 386 의원들의 행각과 더불어 386 정치인의 부도덕하고 기회주의
적인 처신의 대표 사례로 꼽혔다. 그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컸기에 이런 부적절
한 행위가 주는 타격도 컸다.
(그 민망한 술자리를 보고 와서, 고민 끝에 비판했다가 '철없는, 입 싼, 정치세력화의 걸림
돌 ' 취급을 받으며 보이지 않는 돌팔매를 지금도 맞고 있는 임00씨가 생각난다.
숱한 성폭력 사건의 결말과 너무나 닮은, '잘못한 사람'보다 '문제 제기한 사람'이
문제적 인물로 낙인찍히고 매장당했던 당시 상황, 그 요란했던 게시판들, 잊을 수 없다.
한 젊은 의원의 철새 행각보다 더 엄중하게 비판받아야할 것은 부적절한 술자리를
그런 날에도 아무 가책없이 벌일 수 있었던 당시 삼팔륙들의 인식수준이며, 동시에
그래도 그들이 희망이라고 믿고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 훌륭하셨던 동지들,
이름도 깃발도 없이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나서서 그들을 감싸안으셨던 분들의
지나친 사명감과 지나친 연대감이다.)
8. 1987년 고대 애국학생회 사건과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그는
학생운동 시절 주로 지하 서클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그가 정치의 오버그라운
드로 나올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오버 그라운드로 나올지 관심이라...무슨 락밴드라면 모르겠으나,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 좀 구리지 않습니까?)
9. 그들은 늘 ‘짱’을 원했다
(할 말이 없다...)
10. 각종 뉴라이트 단체를 조직하고 우파 이데올로그를 새로이 정립했다.
(특히 '우파 이데올로그 정립'이라는 표현, 동의 못한다. 정립하길 바란다.)
좀 더 꼼꼼하게, 다른 기사들도 포함해서 좀 더 날을 세워 짚어보고 싶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그렇게까지 애정을 쏟을 글은 아닌 듯해서 이쯤에서 마친다.
한 시대를 회고하는 일, 정리하고 추스려서 이 다음을 꿈꾸는 일, 좋다, 언제나 좋다.
그러나 회고의 주체가 누구인가, 무엇을 중심으로 정리하는가, 어떻게 평가하는 가에 따라
그 좋은 일의 결과물은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가짜 명품옷이 되기도하고
땅과 풀에 스며서 사람몸에 들어와 피와 살이 되는 거름노릇을 할 수도 있다
아직은 그 주체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핵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세력화된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가 정리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민주주의도, 성차별도, 인권도, 소박한 예의도 아직 멀기만 해서 내일도 멀다
하루 하루가 여전히 벼랑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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